아브라함의 신앙


선지자선교회 1984년 5월 25일 금저녁

 

본문 : 창 13:14-18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 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아브라함은 주님이 가르치시기를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라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 혈육적 자손보다도 믿음으로 된 자손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그렇게  밝혔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믿음의 조상이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다 표준 신앙으로 삼아서 아브라함 같은 그런 신앙을 가져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인데 다른 선지자들과 다른 점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자기 구주라고 고대하고 있는 사림들이 많았으나 막상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심히 많아졌습니다. 그때도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는 믿는 사람들이 유대인뿐 아니고 이방인으로서도 더러 있고 많았었습니다.

그런데, 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고대하고, 메시아가 오면 자기들을 구원할  것이라고 메시아 오기를 고대했지만 예수님이 오시니까 그들이 다 배척해  버렸습니다. 또 예수님을 사탄이라고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 예수님을 아주  그렇게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도 선지자로도 보지 안하고 아주 자기네들과  대립이 되는 이단자로 그렇게 보고 십자가에 못박아 사형을 시키라고 말할 때에  그들이 주저 없이 말했습니다. 뭐 나중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난 뒤에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짐작을 했고 부활했을 때는 더 똑똑히 짐작을 했고  이랬지만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는 예수님을 저희들의 구주로 인정하고 믿는  사람들이 심히 적었습니다.

 왜 그렇게 됐는고 하니 자기네들이 이 하나님의 도를 믿는 것과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도라면 그들이 다 환영했을 터인데 자기 들은  서기관, 제사장, 바리새 교인 그들에게 배워서 그들이 가르친 대로 다 배워  가지고 종교 의식이나 구원 도리나 진리나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가르치시는 것을 보니까 아주 자기네들이 배워서 알고 믿는 그 도리와  아주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와서 전하는 이 도를 이단이라고 하고  마귀의 도라 이렇게 그들이 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들이 고대하는 메시아를 이렇게 적대시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는가?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나타내신 말씀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들이 장로의 유전을 가지고 도를 삼아서 헛되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들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자기들보다 앞서 예수님 믿는 모든 사람들을 보고 '저렇게 믿으면  되겠다.' 해 가지고 믿어서 차차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서 부모의 신앙이어서  아들이 믿고, 아들의 신앙 이어서 손자가 믿고 이래서, 그 믿음들이 다  유전적이며 또 계통적으로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틀리면 그  다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틀리게 됩니다. 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사람의 말로 도를 삼아서 하나님의 도는 저 버렸다. 부모에게 드려서 유익할  것을 하나님께 드려서 고르반 됐다고 하니 너희들이 제오계명을 범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거기서 우리에게 한 가지 교훈을 주시는 것은, 예수님이 길로 지나가실 때에  수천 명이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뭐 지금과 같이 이렇게 모두 다 도로들이  수축돼 있지 안할 때이니까 모두 손(孫)길로 이렇게 따라서 수 천 명이 가니까  참 사람 뒤에 사람 서고 사람 뒤에 사람 서고 이렇게 서서 가는데, 그러니까,  앞에 사람도 가운데 예수님이 있으니까 예수님을 보기 가 어렵고 또 뒤에 사람은  예수님을 보기가 어려워서 전부 사람들은 본 다는 것이 사람들의 뒷꼭지보고  사람들의 옆 보고 또 뒤를 돌아 서 서 사람들의 안면 보고 이것만 보지, 그저  예수님을 땀기는 따랐지만 예수님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때에 삭개오라는  사람은 '아무리 이렇게 따라다녀 봤자 결국은 사람의 뒷꼭지나 보고, 앞서 가는  사람 뒤나 보고 따라다니지 예수님은 보지 못하겠다. 예수님을 안 만나 가지고는  구원이 무슨 이루어지겠느냐?' 이렇게 생각을 하고 그만 저리 둘러서 앞서 가  가지고, 예수님이 오시는 그 길에 앞서 가서 뽕나무에 올라가 가지고 가만히  내려다 보고 있으니까. 예수님이 그리 지나가실 것이라 하고 내려다보고  앉았었습니다. 이러니까, 예수님께서 '삭개오야 내려오라. 내가 오늘 밤에  너희들 집에 가서 유숙해야 되겠고 또 너거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누가복음 19장에 기록해 가지고 우리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초림하실 때에 이스라엘 종교  말년의 모든 이스라엘들의 신앙이 어떠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서 신령한  이스라엘도 예수님의 재림 때가 되면 이와 같은 다 교회가 될 것이라 하는 것을  보여도 주셨고 말씀도 했습니다.

 그러면, 그때 그 사람들이 사람 따라다니면서 사람보고 예수님을 믿고,  메시아를 믿고 메시아에게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모두 그 선조들의 신앙의  유전을 따라서, 그저 선조들이 어떻게 믿었는가에 따라서 자기네들도 그와 같이  믿는 그것이 한 해 두 해 십 년 이십 년 이렇게 흐르고 흐르고 하니까 하나님의  성경 말씀과는 멀고 다만 먼저 믿는 그 사람들을 보고 그 사람들같이 믿으면  되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하나님이 뚜렷이 율법 책을 주셨으니까 이 법칙대로  믿어야 된다는 그런 것은 대단히 멀었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우리는 성경을 보고 이렇게 성경대로 믿을라고 애를  쓴다는 것보다도 먼저 믿는 그 사람들의 모든 신앙 행위나 의식이나 언행심사나  그런 것을 따라서 그대로 하면 신앙생활이 되는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기독교는 보면 성경대로 믿는다는 것보다도 신앙의  선배들 따라서 믿는 신앙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사람의 말을 도를  삼아서 나를 공경하기 때문에 다 헛되이 공경한다.' 그렇게 말씀을 하신 거와  같이 오늘도 우리는 사람 보고 예수님 믿어서 '모든 저 교파서 이렇게 하니까  우리 교파도 그렇게 하자. 또 저 교회들이 그렇게 하니까 우리들도 그렇게  하자.' 이래서, 사람 따라서 믿는 사람들이 되기 쉽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대로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 되기가 심히 어려운 때인 줄 압니다.

 요새는 그만 그것이 자꾸 기형적으로, 기형적으로 자라고 자라고 자라서 이  진영 교회와 저 진영 교회는 아주 딴 도와같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딴 도와같이  돼 가지고 있고, 또 이 사람이 가르치는 구원 도리와 저 사람 이 '가르치는 구원  도리는 아주 딴 도리로 이래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 같고 조금씩만 틀렸으면  틀린 걸 말하지만 뭐 근본적으로 모두 이 진영과 저 진영 이 교파와 저 교파, 이  교회와 저 교회 신앙들이 아주 차이 있게 다르게 되어 있기 때문에 다  자기네들의 교파만 옳다고 말하고 다른 진영의 교파들은 틀렸다 그렇게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아침에도 이 말씀을 했는데,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을  가리켜서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신앙의  체계를 따라서 아브라함의 신앙과 같은 그렇게 신앙을 가져야 올바른 신앙이라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교훈입니다. 지금 이 교파 저 교파에서  신앙생활 하는 교리라든지 신조라든지 이런 것을 살펴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또 사도들 그들이 그때에 신앙생활 하는 것과 요사이 이 한국 교회나 세계  교회의 신앙생활 하는 것은 아주 참 판이하게 다르다고 할 만침 그렇게 달라져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이나 그들의 신앙과 오늘의 신앙이  다른 것을 말하면서 '그럴 때는 모두 다 미개한 때요 요새는 대단히 문명한  때라.'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오히려 그때의 신앙을 멸시하는 그런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지자적인 신앙을 채받아야 되겠고 사도들의 신앙을 채받아서  믿어야 되지 오늘 현대의 이 내려오는 유전이나 모든 교계 의 인물들의 신앙  사상을 보고 믿었다가는 참 낭파가 될 만침 너무 하나님의 도와는 거리 멀게 돼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살펴보면서 아브라함의 그 신앙 걸음을 걸을라고,  아브라함의 신앙을 신앙의 표본으로 삼아 가지고 아브라함과 같이 그렇게 그런  신조와 교리를 가지고 예수님을 믿을라고 하는 그런 사람들은 너무도 희귀하게  됐습니다. 그저 성경은 가지고 가르치기는 가르치고 교리와 신조를 말하기는  말하지만 교리와 신조도 다 각각 자기대로 뻐드러져 나가서 그 교리와 신조를 다  제작한 사람들을 보면 전부 자기 표준해서 자기 드러내는 하나의 출세하는 그런  방편에 지나지 못하게 되는 그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경에 초대 교회의 그 신앙가들, 또 청교도들의 그들의  신앙들 선지들 신앙들, 사도들 신앙, 또 믿음의 표본인 아브라함이라든지 이런  분들의 신앙 그런 신앙을 우리는 연구해서 그런 신앙을 본받아서 이렇게 나가야  되지, 그저 유전으로 이렇게 내려와서, 사람이, 한 시대가 지나가면 아주 그  시대에 적합하게 그 시대에 적합한 도가 만들어졌고 또 그 다음 시대가 들어오면  그 다음 시대에 합당한 도가 만들어져서, 모든 사람들이 이 예수교도  근대화되어야 되고 또 예수교도 다 이 개명한 시대화되어져야 한다고 이렇게들  다 생각을 가지고 있고, 초대 교회의 그 신앙을 연구해 볼라고 그런 생각을  가지지를 안하고 그런 신앙과 대조해 볼라고 하지를 아니합니다.

 요사이 이 교파 저 교파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을 하나 믿음의 표본인  아브라함을, 아브라함의 신앙을 가지고 '저 사람의 신앙과 아브라함의 신앙이  어떤 고 보자 비교 학번 해 보자.' 비교해 보면 안 맞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과  비교해 보면 맞지 안하고, 또 그 외에도 여러 선지, 선지자들의 신앙과도 비교해  보면 맞지 안하고 사도들의 신앙과도 비교해 보면 맞지 안하고 이거는 순전히  어디서 나왔는고 하면 아버지의 신앙을 아들이 본받았고 아들의 신앙을 또  손자가 본받았고 이렇게 해서 자꾸 그 신앙의 선배들이 자기네들의 형편을  따라서, 자기네들의 주견대로, 자기네들의 의견대로. 자기네들 좋게 그렇게  자기네들에게 합당하도록, 자기들에게 알맞는 그런 도를 만들어 가지고 믿는 그  도를 따라서 살기 때문에 자꾸 기독교는 인간화돼 버리고 말고 그만 세상화돼  버리고, 참된, 이 속화되지 안한 옛날 교회는 찾아보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보면서도 지금 시대와 그때 시대와 맞지 안하니까. 그때 시대의  성경에 기록한 성경 역사의 신앙가들은 생각하기를 이거는 참 하나의 골동품을  구경하는 것처럼, 아주 옛날 신화를 구경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지, 이 성경에 있는 역사를 이와같이 믿어야 된다. 이와 같이 믿어야 믿는  믿음이다. 이대로 믿어야 되지 그때의 신앙과 지금의 신앙은 너무도 동떨어지고  아주 다른 도가 되어 가지고 있다 하는 요 면을 생각해 가지고 옛날 선지  사도들의 신앙을 연구하면서 그때의 신앙을 가져보자 하는 여기에 대해서 눈을  뜨는, 착안하는 사람들이 심히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미국에 있으면서 '청교도들의 그 신앙에 대해서 좀 저서  되어 있는 그런 책들이 있는데 어떻게 하렵니까?' 이렇게 해서 요새, 이 요새  신식 시대에서 신식으로 난 모든 서적들, 요새 근대화 돼 가지고 있는 이 신앙  서적들, 모두 진보. 진화돼 가지고 아주 현대화 되어 있는 그런 서적은 필요가  없고, 그저 켸궤묵은 옛날 신앙, 옛날 초대 신앙 그 신앙이 성경대로 바로 됐기  때문에 그 신앙들에 대한 그 서적을 좀 사 가지고 오라 이래서 거기 있으면서  사는 대로 구해서 부쳐서 청교도들에 대한 서적은 거의 와서 있습니다. 거기에  있으면서 부쳐 보내라고 해서 부쳐서 왔었습니다.

 그러면, 그때의 신앙과 지금 신앙과는 아주 판이합니다. 그러면, 이 기독교도  다른 종교와 같이 진화가 돼서 요새 이 시대에 맞는 도는 진화돼서 개량된  도이고 아주 개량이 돼서 잘된 도이고. 옛날 도는 야만 도가 돼가지고 그것은 다  미개한 도인가 이렇게들 사람들이 벌써 생각을 가지기까지 됐습니다. 기독교는  진화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진화가 없고 기독교는 개량 이 없습니다. 언제나  온전하고 참되고 바른 도인데 사람들이 어두워지면 깨달음이 좀 둔하고 성글고.

사람들이 밝아지면 깨달음이 밝아지고. 그 사람이 장성하면 장성함에 따라서,  신앙 장성에 따라서 하나님의 도라든지 하나님의 그 권위성 이라든지 모든 것이  인정이 되어지고, 그 사람이 타락하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도의 이 진리에 대해서  가치성이나 권위성은 인정되지 않는 것이지 사람이 미개하고 또 광명해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지 하나님의 도가 우리에게 그렇게 진화적으로 진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왜 이런 말을 자꾸 하는고 하니 우리는 '성경대로 예수를 믿는다.' 이렇게 말을  하지만 성경은 신구약 한 권뿐인데 이 성경에 대해서 해석 하는 것은 얼마나 뭐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교리나 신조라고 이렇게 해서 그 문서를 보고  성경을 연구하는 거기에만 힘쓰고 성경에 있는 초대 인물들의 그 신앙생활을  연구해 가지고 자기의 구원도리에 참고를 삼을라고 하는 그런 사람들은 많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너무도 가속도로 이렇게 속화돼 나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속화된 여기에서 물들지 아니하고 속화되지 않는 초대 교회, 상고 시대의 그  하나님의 도를 우리가 찾아 가지고 볼라고 하면 우리는 옛날 성경에 기록돼 있는  역사적 그런 인물들의 신앙 초대의 신앙. 옛날 신앙, 우리 한국 교회도 말하면  처음에, 기독교 선교 백 주년이라고 올해는 뭐 백 주년이라는 그 말을 많이 써  먹는데, 백 주년인데 백 주년 전에, 한 지금 칠팔십 년 전에 조선 교회가 어떻게  믿었던가? 칠팔십 년 이전의 그 신앙들을 연구하는 것이 지혜 있는 사람이요 또  성경 주석을, 주석에서 주석을 주석에서 주석을 자꾸 달아 가지고 이래 나가기  때문에 그 주석은 어디까지 출어서 어디로 뭐 엉뚱하게 어디까지 도망을 쳤는지  모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초대에 하나님께서 신앙의 표본이라고  우리에게 알려 주신 이런 신앙 인물들의 그 신앙들을 우리가 열람하고 연구하는  것이 대단히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이라든지, 요셉이라면 요셉이는 어떤 신앙을 가지고 살았으며 그는  무슨 힘으로 가지고 그렇게 살았더냐? 또 요셉이는 어떻게 인내했으며 그들은  어떤 욕망으로 살았던가 하는 것을 우리가 살펴보면 요새 이 현대 교회는 아주  발달이 돼서, 20세기의 문화가 발달돼서 문화 발달에 따라서 기독교도 발달됐다  이라지만 요새 교회는 옛날 교회의 그런 신앙들을 도무지 찾아보지 못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칠팔십 년 전, 칠 팔십 년 전 신앙생활 한 사람들의 성경 해석  이라든지 또 신앙생활 한 것이라든지 그런 것을 우리가 책자에서도 보고 이래  들어 보면 그렇게 믿는 그런 미개한 사람이 요새 없습니다. 그렇게 믿는 미개  신앙, 그렇게 믿는 미개 신앙, 아주 야만 신앙, 아주 무지의 신앙 그런 신앙은  없다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고 그때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 권위가 있었고 하나님을 다 만났던  것입니다.

 이래서 이 아브라함에게 대해서 좀 우리가 연구를 해서, 아브라함을 신앙의  표본 인물이라고 이랬기 때문에 우리도 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좀 배우고  간직하고 그대로 따라 나가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브라함과 롯과 그 두 사람은 대조적인 인물인데, 롯은 아주 처음에는 대단히  행복스러웠지만 그 결말은 참혹하게 망했습니다. 또 아브라함은 처음에는  비참했지만 그 마지막의 결말은 아주 행복스러웠습니다. 이런 것도 우리는 좀  미개하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이 신앙 걸음을 걸으면서 처음에 처음에  좋으면 처음에 좋으면 뒤에는 나쁘고 처음에 나쁘면 뒤에는 좋다. 주님을  따라가는 걸음은 처음에는 다 나쁘지만 결과적으로는 다 좋았다. 주님을  배반하는 그 걸음은 처음에는 좋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다 나빴다. 이런 것은 뭐  아주 미개한 소리지, 그렇게 문체 없는 말이지만, 뚝뚝한 말이지만 이런 이  사실을 굳게 잡고 가는 것이 우리에게 대단히 슬기 있는 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제가 어떤 사람이 글을, 써 놓은 글을 봤는데, 그 신앙에 대해서 기록했는데  신앙의 골자는, 신앙의 뼉따구는 하나도 없습니다. 신앙의 뼉따구는 하나도  없고, 어떻게 예수를 믿어야 된다는 그 뼉다구는 하나도 없고 전부 이 말 저 말  아주 그 아름다운 문장들을 쓰고, 아름다운 단어들을 쓰고, 아름다운 그 모든  정서들을 써 가지고 이래 놓으니까 읽어 보면 어째 보면 뭐이 참 맛이 있고  재미있는 것 같고 잘된 것 같은데 뭐이 있는 가 암만 읽어 봐야 못 잡겠어. 또  읽어 보고 또 읽어 보고, 하도 그래서 '이거 뭐인고 한번 읽어 보자.' 몇 번  읽어 보니까 속에 알맹이는 하나도 없는 전부 이거 말만 요런 고운 말 조런 좋은  말 요런 재미 있는 말 요런 것만 끌어다 붙여서 전부 종합해 놨지 그 속에 도라  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 그 책이 있는 걸 봤습니다. 그 책을 부애가 나서  거머쥐고 때려서 당장 불에 다 사뤄 버리면 싶어서 확 집어 내던지고 말아  버렸어.

 우리는 이 하나님의 도를 받을 때 우리가 능란한 그 수사학이나 또 무슨  정서학이나 그런 박식인 그런 것을 우리가 탐하면 안 됩니다. 그저 우리는 예수  믿는 이치가 어떠냐? 예수 믿는 이치가 어떠냐? 예수 믿는 이치를 말하는 데도  좀 고등 술어를 써 가지고 하는 것보다도 좀 미개한 야만의 말을 써서 누구든지  다 들을 수 있고 들으면 다 깨닫고 들으면 기억하고 할 수 있는 그런 쉬운 말로  해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는 도를 배울라고 하는 우리가 돼야 되지 도를 배우는  것인지 분장을 배우는 것인지 문체를 배우는 것인지 무슨 문법을 배우는 것인지  이거 도무지 짐작을 하지 못할 만침 혼탁해 가지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래서,  성경은 보면 우리 믿는 신앙생활을 아주 간단하게 말했습니다. 간단하게 말해  놨는데 우리가 거기에서 공연히 주를 달고 복잡하게 해 가지고 예수 믿는 이  곧은 길을 찾지 못하고 더듬게 만듭니다.

 이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출발해 가지고 얼마 동안 걸었고,  걷다가 또 롯하고 둘이 갈렸고, 또 그 다음에는 소돔 고모라 성이 불타고 난  다음에 또 소돔 왕으로 더불어 말하다가 갈렸고, 또 그 다음에 굵닥 굵닥하게  말하면 이삭의 문제로 번제로 드리는 그런 일이 있었고 이렇게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산 생활을 굵닥굵닥하게 하면 몇 자지 안 되는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어떻게 믿었던가? 그저 한 말로 말하면 아주 간단합니다. 뭐 시비를 한  일도 있었고, 우물 때문에 시비한 일도 있었고. 토지 때문에 시비한 일도 있었고  또 숙질간에 시비한 일도 있었고, 또 물질 때문에 서로, 힐난한 일도 있었고  이렇게 이런 생활 저런 생활 여러 가지 생활을 했는데, 그 생활한 결말을 보면,  그 아브라함이 말한 것이라든지 행동 한 것이라든지 취한 것이라든지 그런 것을  보면 우리가 왜 아브라함은 이렇게 했는고 그걸 잘 판명하지 못할 만치 그렇게  좀 어리석고 또 좀 약한 것 같고 그렇게 보여 졌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반드시 무슨 사건이 있은 이후에는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와서 위로해 주시는 것이 그것이 특성입니다. 다른 선지자들에게서 보기  드문 그런 일들이 아브라함의 생활에서는 늘 계속되고 있습니다. 조카하고  그렇게 시비할 때도 나중에 시비가 끝나고 나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왔습니다. 찾아왔고, 또 소돔 고모라 성의 그 전쟁 문제가  끝나고 난 다음에 물질로 인하여 시비가 있은 지 후에도 또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왔습니다. 이래서, 무슨 사건이 있은 지 후에는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온 것을 우리가 찾아 볼 수 있고, 그것이 아브라함의  신앙생활의 특징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그 모든 관계된 것을 보면 아브라함은  사람으로 더불어 어떤 교제를 가지든지 무슨 행사를 하든지 그의 행사에는 한  가지뿐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디서든지 하나님만을 자기 하나님을 삼으려는 요것  하나가 아브라함의 그의 전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뭐 참 물질면이나 자존심.

명예심, 무슨 문제가 많이 있었지만 아브라함은 신앙생활 할 때에 하나님 한  분만을 자기는 자기 하나님으로 삼으려는 그것이 그이의 생애의 전부였고 그  외에 딴 것은 자기의 생활의 목적으로 삼지 안했다 하는 것을 우리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 생활이 결과적으로 그렇게 행복이 됐던 것입니다.

 롯으로 더불어 시비할 때도 아브라함은 롯과 정반대 길을 걸었는데, 아브라함은  자기 좋게 하면 하나님이 섭섭하고 하나님 좋게 하려면 자기가 안 됐겠고 이럴  때에 자기냐 하나님이냐 그 둘을 놓고 언제나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자기가  영접했습니다. 또 가족들의 그 모든 여론이 많이 불의가 일어났을 때에도. 모든  사람들의 그 의사와 하나님의 뜻이 이렇게 서로 대조될 때에 사람들의 의사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사를 따랐고, 롯은 하나님의 의사를 버리고 사람의 의사를  따랐던 것이 그것이 롯의 걸음입니다. 또 롯은 눈에 보이는, 아주 눈에 보이는  모든 좋은 형편, 물질이나 형편이나 사정이나 그런 것 그것을 보고 그것을  위주로 했고. 아브라함은 그것보다도 하나님이 자기에게 축복하시는 그 축복을  위주로 해서 걸은 것이 아브라함의 걸음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 현실에서, 현실에서 언제든지 자기냐 하나님이냐 할  때에 먼저 하나님 섬기고 난 다음에 자기 하면 했지 하나님 좋아 하시는 것  버리고 자기 좋은 일을 택한 일이 없었고. 하나님 좋아하시는 일 먼저 택했고,  자기야 어쨌든지 하나님 좋아하시는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하나님을  위하는 일. 하나님을 생각하는 일을 앞서 했고, 또 모든 여론들이 있는 그 모든  데 대해서는, 사람들의 그 여론이냐 하나님의 뜻이냐, 인간의 의사냐 하나님의  의사냐 이렇게 대조될 때에는 인간 의사를 버리고 하나님의사를 취해서  따랐습니다. 모든 보이는 가견적인 형통이나 성공이나 축복보다도 하나님의  축복을 아브라함은 위주로 해서 따랐고 롯은 정반대의 걸음을 걸었습니다.

이러니까 아브라함은 간단하게 자기 현실에서는 하나님,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축복 이것을 택한 것이 아브라함의 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복종하는 길입니다.

 이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뭘 했는고 하니 롯이 떠나고 난 다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와 가지고 말하시기를 '네 자손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땅의 티끌과 같이 많게 되리라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으면 네  자손을 셀 수 있으리라.' 말하는 그 축복을 주셨고, 또 '이 네가 보는 이 가나안  땅을 줘 가지고 영원토록 누리게 하겠다.' 소유를 아브라함에게 줬습니다.

그러면 자손을 많이 줬고 소유를 또 많이 줬습니다. 소유를 줬는데. 그 소유는  가나안 땅이라고 말했지만 아브라함이 히브리서 11장에 떠날 때 보면  '하나님께서 이 가나안을 주시지 안하는 것은 터 있는 곳을 주시기 위해서  하심이라.' 하고 떠났는데.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가나안은 육체의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복지라고 말했고 가나안 복지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가나안은 무궁한 하늘나라라고 다 이렇게 벌써 일반인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자기보다 하나님을 높여서 하나님 때문에 자기를  부인한 아브라함에게는 아브라함과 같은 자손을 그렇게 많이 줬습니다. 줘서  티끌보다, 티끌같이 된다고 하는 그 자손은 다 신앙의 자손들인데. 홍포 입은  부자와 시비한 그 나사로를 보면 나사로가 어디 가 있는 고 하니 아브라함 품에  가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늘나라 가면 다 아브라함에게 속해 가지고  아브라함의 그 슬하에. 아브라함의 그 슬하에. 아브라함의, 그 품안에서  우리들이 다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야브라함이 그 현실 현실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을 취한 그에게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나와 내 도를 위해서 버린 자는 여러 배 백 배 준다.' 하는 말씀  그보다도 주님을 위해서 자기를 버린 그 아브라함에게 뭐 여러 천 배 만 배가  아니라 셀 수 없을 만침 그렇게 아브라함을, 아브라함이 자기를 부인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같은 자손을 그렇게 많이 주었습니다.

 또 보이는 소돔 들 아름다운 그것을, 그것 취할라 하면 하나님 축복 못 받을  것이고 하나님 축복받으려면 그것을 양보해야 될 때에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고  그것 양보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그 가나안을 줘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될 때에 그 무궁한 것을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다 차지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축복을 하셨습니다.

 또 모든 사람들의 의사보다 하나님의 의사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이렇게 간  그에게. 자타의 인간 의사를 다 버리고 하나님의 의사를 따라서 간 아브라함에게  그 다음에 끝 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제단을 쌓고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는, 제단을 쌓고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는 제사장 직책을 아브라함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다 선지자라. 아브라함은 선지자요 아브라함은  제사장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제사장이요 아브라함은 선지자라. 이  제사장은 어떤 게 제사장인고 하니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치하는 것이  제사장입니다. 사사 시대에 보면 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부 재판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재판한 이가 제사장이요. 또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든 행사에  대해서 검사하는 이가 다 제사장이요, 또 병에 대해서 건강 진단 그런 질병이나  이렇게 이스라엘의 병에 대해서 진단하는 이가 제사장이요. 모든 사건에 대해서  판단한 이가 제사장이요, 또 통솔하는 이가 다 제사장이었습니다.

 이래서, 아브라함은 인간 의사를 버리고 하나님 의사를 취하는 그것으로  인하여서 그는 영원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인간을 통치하는 최고의 통치  최고의 치리자, 최고 통치 치리자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고, 그 가  보이는 소유를 주를 위해서 버렸을 때에 가나안을 그와 그 자손들에게 주었고,  주님을 높이고 자기를 부인한 그 아브라함에게 그 아브라함과 같은 그 많은  수많은 믿음의 자손들을 준 것을 우리가 여기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뒤에 소돔  성과도 시비할 때도 가고 난 다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아브라함아,  이제는 네가 염려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고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축복하셨습니다.

 이래서, 오늘 밤에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주님이냐 자기냐, 또 주의 뜻이냐  자타의 인간의 뜻이냐, 주님의 축복이냐 눈에 보이는 이 현실들이냐 이것이  언제든지 대조되고 비중이 되는데, 이럴 때에 아브라함처럼 이 세 가지를 버리고  아브라함이 택한 세 가지 길을 택한 이것은 참 승리한 것은 얼마나 큰 승리라고  말할 수 없을 만치 큰 승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개인 시비든지 대중 시비든지, 무슨 사업이든지, 또  개인 생활이든지 대중생활이든지 공동생활이든지 무슨 일이든지 우리는 우리가  생활하는 이 언행심사의 모든 생활, 우리의 언행심사의 모든 생활에서 우리는 그  생활에 잘못하면 그 생활에서 어떨 때는 돈을 목적하기도 쉽고. 지위를  목적하기도 쉽고. 인정을 목적하기도 쉽고, 또 권세를 목적하기도 쉽고 뭐  악령이 우리 마음을 흔들어서 현실 현실마다 우리의 소망과 목적을 변개시킬라고  이렇게 유혹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참 그 유혹 받기가 대단히 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듣는 일이든지, 우리 귀로 듣는 일이든지 우리 눈으로  보는 일이든지, 또 우리 손으로 움직이는 일이든지, 우리 입으로 말하는  일이든지, 우리가 생각하는 일이든지, 우리가 계획하는 것이든지 무엇이든지  우리는 요 아브라함을 따라서, 무엇을 하든지 거기서 우리의 욕망은  하나뿐이어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욕망은 어디서든지 여기서 내가 하나님을.

내가 이로 인해서 하나님이 더 내 하나님이 되느냐, 요 생각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더 내 하나님이 되느냐, 요 말로 인해서 하나님이 더 내 하나님이  되느냐? 내가 요 말을 들을 때에 요리 들으면 내가 하나님을 손해 보고 이전보다  내가 하나님으로 가난해지느냐, 요 말을 요래 들으면 하나님으로 부요해지느냐?  우리는 우리의 전 생활을, 듣는 것이나 보는 것이나 접하는 것이나 내 마음에서  생겨 나오는 것이나 또 어떤 그 움직이든지 그 전부에서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만을 자기 하나님으로 모시려는 요 욕심 하나, 요 욕망, 요 성령의 소욕  요 하나에서 아브라함은 살았습니다.

 이러니까, 아브라함의 그 생애를 연구해 보면 그 아브라함이 왜 그렇게 했는가  하는 것을 대번에 그 성경을 보고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않지만 그 전체를 봐서  보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서 이런 생활을 했을까? 이런 말을 했을까? 이런  행동을 했을까? 그는 하나님 한 분에게만 욕심을 두고 어짜든지 하나님  차지하려고, 하나님 차지하려는 요 한 가지 욕심만을 가졌기 때문에 이런 말도  저런 말도 나왔는데. 그런 말을 종합해서 다 이와 같이 살펴서 결론을 지워 보면  하나님 한 분만을 욕심했기 때문에 그 말이 나왔고, 하나님 한 분만을 욕심했기  때문에 그 행동이 나왔고 그 생각이 나왔고, 그 대화가 나왔고, 그 양보가  나왔고. 그렇게 모욕을 당했고, 그런 참고 견디는 것이 나왔고, 그 아브라함의  전 신앙생활은 하나님 한 분을 자기가 모셔서 차지하고 하나님 손해 안 보기  위해서 그 비유의 말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이만큼 차지해 가지고 있다가  하나님 손해 보면 요만침 적게 차지해. 하나님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  당신이 손해 보는 게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많이 가지고 하나님으로  부요해지고, 하나님으로 손해 봐서 하나님으로 가난해질까? 하나님 가난될까?  하나님 부요하기 위해서 하는 요걸 목적하니까 그 하는 일이 뭐 참 뚱딴지 같은  일입니다. 그 어리석은 일 아닙니까? 현재에 목축하는 그 낙농하는 것은 초장이  제일 중요하고 거기에는 또 물이 중요합니다. 짐승은 물 안 먹으면 죽지  않습니까? 풀 안 먹으면 죽는 건데 그 자산에, 발간 산을 취해서 간 것 보면  어리석기가 짝이 없고 롯은 참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이랬는데. 아브라함은 왜  그 자산을 취했느냐? 왜 그 자산을 취하고,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다.' 그렇게 했느냐? 한 것은 아브라함의 속에는 어쨌든지  하나님 한 분 놓지 안하고 하나님으로 부해지기를, 하나님 차지하기를 원하는 요  목적에서 했습니다. 이러니까, 이사야 49장에 보면 아브라함을 두고 말하기를  '자산에도 푸른 초장이 있었다. 사람 보기에는 발간 산인데, 눈에 보이는 발간  산인데 인간이 모르는 그 푸른 초장이 있었다. 나중에 낙농이 되는 것 보니까,  짐승들이 살찌고 모두 윤택해지는 것 보니까 인간 눈으로 볼 수 없는 초장이  거기 있었다 그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의 성공은 어디 있느냐? 자기가 듣는 데에서도 만일 자기가  들어서, 그 말을 들어서 천하 지식을 다 차지했다 할지라도 하나님 잊어  버렸으면 자기는 망했습니다. 또 자기가, 자기한테 와 가지고 감언이설로 천하  사람이 다 자기편이 돼 가지고 자기를 옹호하고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높이고  이렇게 자기 귀에 달콤한 어떤 소리를 했다 할지라도 고 말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손해 봤으면 자기는 망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을 들을 때에,  이 말을 들을 때에 여기서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을 빼앗기지 않겠느냐?  하나님을 이전보다 손해 보지 안하고 하나님으로 부해지겠느냐? 다른 사람하고  언거언래를 할 때에 도 여기서 잘못하면 언거언래 할 때에 내가 이기느냐 네가  어기느냐? 저 사람이 저래 말하니까 어떻게 내가 말을 답변을 하고 어떻게 내가  말을 해야 내가 이제 이길 수가 있겠느냐? 내가 물질에 유익이 되느냐 하는  그런데다가 욕망을 두지 안하고, 아브라함은 말을 해서, 다퉈서 졌든지 이겼든지  어쨌든지 요 서로 언거언래를 하는 이 말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내가 차지할  수 있느냐? 하나님을 위할 수 있느냐? 요 한 가지에만 아브라함은 집중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안했고, 이래 가지고 하나님 차지하니까 자산에도 푸른 초장이 있었습니다. 또  다 없었지만 길에서 먹을 것이 나 왔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고로, 지금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남북에 대해서 뭐 이렇게 말하는 것,  이런 것도 이것도 다 깊이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어서 하나님으로 부요해져라.

네가 돈도 권세도 나라도 강대국도 지위도 권세도 아무것도 네게 정말 필요가  없다. 정함이 없는 그런 것들에게 소망을 두지 말고 모든 것을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라.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고 하나님으로 좀  부요해지라고 이렇게 지금 애를 쓰시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고, 마지막 앞으로  나올 환난은 어떤 환난이냐? 환난은 하나님 차지한 고것만 가지고 피난도 하고  모든 안보도 되어지지 차지한 하나님 외에는 안보될 게 하나도 없습니다. 뭐  비행기 아무리 많이 준비해 놔 도 아무 소용없고 아무리 강대국과 연맹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요것을 요 각도로 요 면에 우리가 눈을 뜨고, 요  면으로 눈을 뜨고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의 모든 성경 역사는 보면, 성경에  기록돼 있는 역사는 하나님 차지 덜 하면, 하나님 차지가 적으면 그 나라가  빈약해졌고 하나님 잊어버리면 그 나라 잊어 버렸고 하나님 차지가 부강해졌으면  그 나라가 부강해졌고 하나님 차지하면 모든 전부를 다 차지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따라서 우리가 언행심사에 아무리  재미있는 일이 있어도, 아무리 귀에 속속거리면 재미있고, 남을 헐고 간교하게  거짓말로 이렇게 이간 붙이고 이래 하면 아주 뭐 얼마나 귀에 달콤하지만 우리는  그럴 때에 '이 말을 비판해 듣나 안 듣나?' 그라면 우리는 벌써 실패자입니다.

아무것으로서도 그때 진찰을 바로 해 가지고 바른 치료를 할 수가 없습니다.

거기서 그저 '자. 이 말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 하나님을 내가 차지할라면, 이 말  하는 데서 하나님으로 더불어 부요하면, 이 말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하나님으로 더 부요해지고, 이 말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나와 멀어져  하나님 손해 보고 이렇게 하나님 손해 보고 하나님으로 부요해질라고 하면  어떻게 하나?' 요것만 가지면 판단이 정확히 나오고 당장 승리가 나올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지름길을 잡았습니다. 아주 첩경을 잡아 가지고  요렇게 신앙생활 했습니다.

 그랬는데, 요새는 자꾸 속화되어서, 속화돼서 떠내려가고, 흐르고 흐르고 자꾸  이렇게 물 흘러가듯이 흘러 내려가기 때문에 지금은 옛날 초대의 교회와 상고  시대의 교회, 선지 사도들의 교회, 또 아브라함 그런 분들의 신앙 이걸 찾아 볼  수가 없어요. 그 신앙과 지금 신앙과는 너무 이질적이요, 너무 이질적이기  때문에 도무지 찾아 볼 수가 없어. 지금 교리와 신조는 다 문체적이요, 번쩍  번쩍하는 문체적이요 옛날 그 교리와 신조는 참 미개 야만의, 아주 질적으로  이렇게 볼 수 있는데 그것이 참된 생명의 도입니다.

 그런고로, 오늘 밤에 우리는 단정하고 아브라함의 자손된 우리들은 어 데서든지  하나님 차지하기를 힘씁시다. 하나님 차지해야 되겠다. 내가 이 말 하면 이 말  하면 내가 하나님으로 가난해진다. 이 말 하면 하나님을 내가 잊어버린다. 이 말  하면 하나님 잊어버린다. 이 소리 들으면 하나님 잊어버린다. 이럴 때 성 내면  하나님 잊어버린다. 이럴 때 웃으면 하나님 잊어버린다. 이럴 때는 성을 내야  하나님을 차지한다. 어쨌든지 하나님 한 분만을 차지하기 위해서, 더 부요하기  위해서, 하나님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 내가 하나님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언행심사를 해서 하나님 한 분이 내 하나님이 된다면, 그분이 없는  가운데서 창조하신 분이오, 모든 것의 주재시요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그분 한  분이면 우리에게는 족합니다. 모든 면이 족합니다. 쾌락도 족하고, 모든 취미도  족하고, 평강도 족하고, 재미도 족합니다. 그분 한 분이면 족하지 그분 한 분  만나 가지고 모자란다 하는 사람 없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이 사람을 가까이 하니까 하나님이 가고 없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아 그  텔레비전  그거 이상하다. 텔레비전 보고 나니까 다른 거는 모르겠는데 그만  하나님이 어디 갔는지 하나님 잊어 버렸다. 텔레비전  보고 나니까 하나님을  잊어 버렸다. 하나님이 어디로 갔는지 없다. 하나님을 찾으려 하니 안 되고  텔레비전  보고 기도할라 하니까 도무지 기도가 막히고 정신이 띵한 것이 정신의  정기를 잊어버린 것 같다.' 그게 세상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 밤에 우리는 하나님 손해 볼 일 하지 맙시다. 어디서든지 하나님으로  수입되고 하나님으로 부강해지는 고 길만을 우리가 택해서 걸어갑시다.

하나님으로만 부강하면 다른 것 다 거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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