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주일

 

1986. 10. 24. 새벽(금)

 

본문:히브리서 4장 1절∼13절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우리가 오늘 예배 시작 찬송을 ‘즐겁게 안식할 날’ 그 찬송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 찬송을 지으신 이도 이 안식일이 무엇을 하는 날이라 하는 것은 똑똑히 모르고 찬송 지은 것이 거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 성경에 안식일을 지키는 데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사사로운 말도 하지 말고, 자기의 재미있는 그런 오락도 취하지 말아라, 또 안식일은 일하지 안해야 된다 이렇게만 오늘까지 인식을 해 가지고 나온 것이 그만 위에 선조 때부터 이렇게, 육체의 이스라엘은 안식일 지키는 것을 이런 관습에서 지켜 나왔고 또 신약 시대에도 주일 지키는 것을 안식 지키던 그것을 표방해 가지고 지키기 때문에 육체의 이스라엘이 지키는 것처럼 그렇게 지켜서 유전적인 그런 신앙을 가졌지 여기 안식에 대해서 밝히 똑똑히 깨달은 그런 깨달음은 오늘까지 세계에 나오지를 안했습니다.

온 조직신학에도 나오지 안했고 세계에 나오지 안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벌써 근 이천 년이 돼 가기까지 모든 성경 학자들이 다 연구해도 깨닫지 못하던 그런 것을 우리가 배우는데 그렇게 쉽게 깨달아지리라고 그렇게 생각을 가지면 그거는 너무도 천부당 만부당한 생각이요 마음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서부교회 오니까 어려워서 도무지 은혜가 되지 안한다’ 그렇게 하면서 설교 말씀을 못 듣는다고 가는 사람 그런 사람을 그 구역장이 자기가 깨닫지 못하니까 바로 지도하지를 못하니, 그 사람이 가고 안 가는 그거야 제 자유지마는 거게 대해서 충분한 깨달음을 가르쳐 주지 못해서 그런 실패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어제도 내가 어떤 사람에게 물어봤습니다. 예배 참석하는 사람 가운데에 도무지 무슨 말인지 깨닫지 못해 알아듣지를 못해서 재미가 없다 그라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쉽게 가르치는 그것만 듣다가 어렵게 가르치는 것을 이제 처음으로 들으니까 모르는데 어렵게 가르치는 것을 자꾸 들으면 알게 된다’ 그렇게 말을 했다고 하는데, 그러면 여러분들 쉽게 가르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어렵게 가르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어떤 걸 기뻐하시겠습니까? 어렵게 가르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그러면 쉽게 가르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그러면 이것도 저것도 아무것도 손 못 든다 말이지. 뭐인고, 그라면? 여러분들이 이러기 때문에 암만 들어야 헛일이라.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여러분들대로 있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있기 때문에 아무 조화가 이루어지지 안해. 화합이 이루어지지 안해요. 여게 “화합지 아니함이라” “화합지 아니함이라” 화합이 안 되기 때문에 이거 낭파라 그말이오. 화합이 안 돼. 암만 가르쳐야 여러분들은 여러분들대로 따글따글하게 참 곱돌랑 냅두고 차돌랑 내비두고 쇠덩이같이 여러분들은 눅아지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대로 따글따글하게 그대로 있어. 암만 하나님 말씀 해 봤자 술술 흘러갔지 소용 없어. 그거 뭐이냐? 자기를 깨지 않기 때문에 그래, 자기를 부인치 않기 때문에.

원청 죄를 지어 놓으면 부끄러워서 어째 보면 조금 뭘 진리를 찾는 것 같고 겸손한 것 같지마는 죄짓는 그 간격이, 죄짓는 토막이 조그매만 눈이 떠서 조금 며칠만 죄짓지 안하면은 그만 교만해 가지고 안하무인으로서 그렇게 그만 돼 버리고 마니까 언제 어떻게 될란지 모르겠습니다. 이래도 속에 뭐 믿는 사람들이 있을란지 그걸 모르겠어.

믿는 이치를 할 수 있는 데까지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가르치는 그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요 믿는 이치를 그저 어렵게 가르쳐서 알지 못하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진노하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기록한 것도 어렵게 기록했다고 했습니까 쉽게 기록했다고 했습니까? 여러분들이 배울 때 어떻게 배웠습니까? 아주 서민의 말을 가지고 아주 쉽게 기록했습니다. 누구든지 보면 읽을 수 있도록 그렇게 쉽게 가르쳤습니다. 성경을 기록하기를 그래 기록했소.

이런데 이 공연히 신학자들이 성경에 기록한 그 말을 다 아는 말 같으면 그거는 재미가 없고 가치가 없기 때문에 제가 학자라는 태도를 나타내고 뭐 그렇다는 그런 가치를 나타낼라고 하기 위해서 이 성경에 기록한 말씀을 자꾸 어려운 말로 끌고 간다 말이오, 어려운 말로.

‘이 말은 불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유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철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래 가지고 아주 그들의 어려운 말을 끌고 와서 ‘그 말이다’ 이렇게 말을 해 가지고 해석을 전부 꺼꾸로 했다 말이오. ‘이 말씀은 철학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하면서 철학에서 말한 그걸 쭉 가르칩니다. 이라면 그 단어는 단어지마는 철학에서 이용한 뜻을 가르치니까 그거는 철학을 가르치는 것이지 기독교를 가르치는 거 아닙니다. 또 ‘불교에서는 이 단어를 이렇게 사용했다’ 하는 것은 그거 가르치다 보면은 결국은 불교 가르쳤지 기독교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그말이오. 이렇게 눈이 어둡고 심령이 영 어두워 가지고 있습니다. 이걸 내가 양성원에 가 가지고도 그때 말을 했었습니다.

성경은 아주 단어도 쉬운 단어, 아주 일반인, 아주 서민들이 쓰고 있는, 무식한 사람들이 쓰고 있는 그런 단어를 가지고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왜? 모든 사람이 다 보고 읽을 수 있고, 또 자기가 그 말을 다 알 수 있도록 그렇게 해 놨는데 그렇게 어짜든지 쉽게 가르칠라고 했으나 그 말의 속에 뜻, 믿는 이치, 뜻은 변동할 수 없는 하나만 되는 진리를 가르쳐야 되기 때문에 속에 있는 뜻은 그것을 변동할 수 없고 될 수 있는 대로 그 뜻을 쉽게 기록하고 쉽게 말하고 쉽게 가르쳐서 알 수 있도록 그렇게 할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에 말은, 그 단어는 모르는 말이 일반 서민이라도, 일반 무식한 사람이라도 모르는 단어가 별로이 없습니다. 별로이 없는데 이제 그 쉬운 단어를 가지고 가르친 그 속의 뜻은 그 뜻을 바로 안 사람이 오늘까지도 하나도 없습니다, 다 모두 조금씩 조금씩 지금 알아가고 있지요. 오늘도 뭐 학자들이 많고 저도 오늘 시대에 속한 사람이지마는 그저 조금씩 이래 자꾸 알아나가지 누가 다 환하게 안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러니까 쉬운 말로 가르치고 있는, 가르치고 있는 가르치는 그 뜻, 가르치는 그 이치, 가르치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치 그것을 지금 우리가 바로 깨달을라고 애를 써야 되지 그저 그 이치를 성경에 쉬운 말로 써놨는데 써놓은 그걸 가르칠라고 하니까 어짜든지 쉬운 말로 쉽게 가르칠라고 애를 써도 제가 이제까지 듣지 못한 이치요, 상관해 보지 못한 이치요, 생활하지 못한 이치기 때문에 저와 그 이치가 거리가 머니까 깨달아지지를 못한다 그말이오.

역부로 어렵게 할라 하는 게 아니라 아주 쉽게 할라고 가르치는 말도 문자를 쓰지 안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쉬운 말로 하고, 문자 쓰는 거는 그 문자 하나에 수많은 말이 들어 있으니 그것을 낱낱이 알기 쉬운 단어로 할라고 하면은 책을 한 권이나 펴놔야 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모두 다 우리가 또 배우고 쓰고 써서 ‘요거는 요런 단어라’ 요런 단어라 해서 그런 다 표준 단어로 우리가 다 모두 다 매일 쓰는 그런 것을 그 단어로 그것을 간추려서 알기 쉽도록, 또 증거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그 단어를 혹 쓰지 그렇지 않으면 그런 단어를 안 쓸라고 애를 씁니다. 그런 단어를 안 쓸라 하면은 그 한 단어에 대한 것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해도 모자랄 터이니까 부득이 그 단어를 그것을 다 모두 기억하고 있도록 해 가지고 그 단어를 한 단어로 써서 거게 대한 거는 말하고 있는 것이라 그말이오.

어짜든지 쉽게 가르쳐서 알도록 이래 할라고 애를 쓰는데 제가 거게 대해서 그 이치를 한번도 들어보지도 못하고, 행해 보지도 못하고, 이래 생각해 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처음 듣는 것이니까 알아들리지 안하니 그 사람이 어짜든지 알아듣도록 애를 써야 되지 그렇지 안하면 안 됩니다.

제가 그것을 어렵다고 해 가지고 알아듣기 쉬운 데로 가면, 어제 아침에도 말했지마는 별로이 제가 모를 것이 없는 말을 제가 듣는 데로 가면은 배움의 진도가 없습니다. 배움이 점점 배워지지를 안한다 말이오. 지식이 자라가지를 않는다 그말이오. 또 자기가 보니까 다 아는 것이지 자기가 모르는 건 하나도 없는 그런 것을 배우면은 그거는 가르침을 배우는 것이 아니고 한번 재독을 하는 것이지 자기가 지금 가르침 배우는 것은 없으니까 제일 수월하고 졸며 해도 되지마는 그것은 자기의 지식에 자라감이 없는 것이라 그래요.

어떤 사람은 자다가도 물으면 대답은 합니다. 그 사람은 이제 지식으로는 자기가 알아듣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알아듣습니다. 쉽게 알아들으나 그 사람은 알아듣는 그것으로써 자기는 만점을 삼고 알아들은 그것으로써 다라고 생각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는 평생 능력을 받지 못합니다. 능력을 받지 못하니까 그는 행하는 일을 하지를 못한다 그말이오. 그러면 행함을 못 하기 때문에 그 구원이 이루어지지 안하고 있다 그말이오.

여게서도 보면은 그런 사람들을 내가 종종 봅니다. 이러니까 제가 번연히 지금 죄를 범하고 있는데 그 죄를 이기지를 못합니다. 암만 이기라고 말해도 이기지를 못해요. 제가 또 이길 마음도 생겨지지를 안 합니다, 이길 마음도. ‘요 죄 때문에 내가 망하는 것이니까 요 죄를 내가 버려야 되겠다’ 하는 그 마음도 생겨지지 안하고 그 죄가 범죄하고 싶은 것이 벌이 꿀을 좋아하듯이 그렇게 좋아하는 데 있으니까 그것이 언제 되겠습니까? 그 사람은 그 죄는 회개를 언제 하느냐 하면은 하나님이 매를 때려서 그것으로 인해서 죽을 지경에 이르러 가지고 죽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은 그때야 후회가 될 것이고 그전에는 후회가 오지 안할 것이고, 또 그 일이 한번 지나가면 그만일 거고, 죄의 징계를 경히 여기니까. 지나가면 그만이니까 그라다가 평생 그 죄를 회개 못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몇 번 징계받고 회개하는 사람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거는 말은 그 지식적으로는 알아들으나 능력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구원의 실상이 이루어지지를 아니하고 있다 그거요.

그래서, 양성원 학생들의 요번에 공부하는 것을 자기가 성경을 읽으면서 ‘내가 잘못 안 것을 간추리라’ 고거 하나만 해도 ‘성경을 이거는 내가 잘못 알았다, 요거는 내가 잘못 알았다, 성경은 요렇게 말하는데 나는 요렇게 잘못 알았다, 성경과 같이 하지 안하고 성경과 달리, 성경과 틀린 내가 지식을 가졌다.’ 고거 하나만 간추려 해도 그것이 자기네들로서는 벅찬 공부고 또 굉장한 유익이 있는데 이걸 말하니까 ‘그거 그전에 공부한 것이라’ 해 가지고, 그전에 행함에 대해서 약간 공부하고 거게 대해서는 안 했는데 그래 그만 ‘다 같다’ 너무, 자꾸 그러니까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안하니 그 사람들도 탈이라 그말이오. 모두 껍데기요 외식이야. ‘잘못 안 것이 뭐인지 그것을 기록하라’ 또, ‘나는 이걸 이제까지 몰랐다’ 몰랐다가, `이제까지 몰랐는데 이 성경에 보니 이렇구나’ 성경에 보고 새로 알게 된 것을 기록하라.

그 두 가지를 기록하라 그말은 뭣인고 하니 그것이 결론은 뭐이 되느냐 하면은 모든 것을 성경대로 바로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둘을 하다 보면은 성경과 꼭 같은 지식을 가지고 성경이 말한 대로 그대로 아는 지식을 가지게 되니 하나님과 지식이 일치된다 그거요.

그렇게 중요한 것을 말해서 그저 그래 가지고 듣고 그래 성경 읽고 공부하도록 하는 것이지 거게서 참 말할 수 없는, 돈으로 비유하면은 억억억억만 원짜리를 거기서 일주간 동안에 만드는 사람도 있고, 거게서 아주 껍데기 단 십 원짜리도 못되는 그런 것을 만드는 사람도 있고, 성경을 같이 읽으나 그 속에 내용에 이루어지는 가치와 모든 권위는 그런 차이가 있을 것이라 그말이오. 그래 예수 믿는 것은 이렇게 차이가 많습니다.

또 하나는 잘못 행한 것을 읽어보며 기록하라. ‘내가 이거 잘못 행했다’ 잘못 행한 것을 기록을 해라.

또 하나는 ‘내가 여게 대해서 이런 행동을 하지 안했다. 이걸 해야 되는데 이 일은 내가 행하지 안했다.’ 행하지 안한 것을 기록하라.

요 네 가지를 기록하라 했는데, 기록하고 그렇게 성경을 일주간 동안에 열람하는 대로 자기가 창세기에서 뭐 한 장을 열람하든지, 꼭 그거 네 가지를 알라고 열람을 하면은 창세기 1장만 해도 좋고 2장만 해도 좋고 자꾸 그라면은 그 사람이 깊이 심각하게 깨달아서 공부를 한다고 하면은 뭐 몇 장 공부만 하면 그 나머지기 성경을 다 공부한 거와 같습니다.

그래 가지고 공부 시작한 것을 이 일주간 동안에 다 하지는 못하지마는 일주간 동안에 시작한 공부를 그것을 중단하지 말고 자꾸 계속해서 양성원을 졸업하고 난 다음에라도 ‘요렇게 그 성경 공부를 하라 했으니까 요것은 중간에 하다가 말았으니까 내가 요것을 끝을 마쳐야 되겠다’ 하고서 나가서 목사가 되고 난 다음에라도 계속해서 공부를 해서 그것을 죽기 전에 끝을 내라 그걸 말을 부탁했습니다.

그 끝을 내면 제가 목회 나가 가지고 늙지를 안할 것입니다. 늙지 안하고 처녀성이 항상 있을 것이고, 또 자라지 안하고 그 순진한 아이와 같은 아이성이 항상 있을 것입니다.

제가 어떤 사람을 만나 가지고 내가 말하기를 그 사람에게 그게 있어서 그걸 내가 아름답게 보고 하면서 말을 그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지금 순진한 아주 아이성, 소년이 아니고 아이성, 아주 열 살 이하의 아이성 그것이 자라지 말아라.

아이성 그게 큰 아이로 어른으로 자라 버리면 더러워서 못 본다. 아이성이 네가 자라지 말고 또 네 처녀성이 늙지 말아라.’ 내가 그걸 두 가지를 부탁했습니다.

‘처녀성이 늙지 말아라’ 목사도 처음에 가면은 처음에 부임할 때는 처녀성이 나 가지고 벌벌 떨며 하지마는 나중에 가서는 그만 그뭐 늙어서 환갑 진갑 지낸 것 모양으로 ‘내가 아들, 손자, 뭐 증손 다 봤으니까 나를 어떻게 하겠노?’ 하는, 마지막에 죽을 날 며칠 안 남은 할망탕구 모양으로 그만 늙어서 마구잡이 그런 인간이 되고 만다 그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요것을 연구하게 되면은 제가 평생 죽는 날까지 목회해도 할마니가 되지 안하고 항상 자기를 단속하고 단장하기를 처녀와 같이 단장할 터이니까 갈수록이 그 교회서 자꾸 환영하지 물리치지를 않을 것이라.

어제도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나 가지고 교역자를 만나서 야단쳤어. ‘나는 네게 대해서 소망을 뒀는데 네가 아주 나쁘다’ 이래 가지고 내가 심지어 ‘네 보자, 네 본토가 어데고? 네가 어데서 났노? 지방질을 타고 났는데 네가 본토가 어데고?’ 이래 물었어. 물은 것은, 네 인품을 보니까 본토의 그 지방질이 뭐 어떻기 때문에 너는 어떤 지방의 사람일 것을 내가 보고 있는데 보자, 물어 보니까 과연 그래요. 꼭 같애요.

사람이 다 지방성이 있습니다. 지방성이 있는데 섬에 난 사람은 섬 지방성이 있습니다. 섬에 난 사람은 언제든지 섬적이라서 그는 아주 그릇이 작습니다. 아주 그릇이 작고 또 자기네들만 압니다. 여기 보십시오. 제주도 사람은 아무리 백 명 갖다 놔도 제주도 사람 저거끼리만 똘똘 뭉칩니다. 남해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아주 포부가 적고 저거끼리 단합이 됩니다, 섬 사람은 그래요.

또 여기 경상도 사람은 뭐이냐 하면은 좀 뚝뚝하고 미련합니다. 미련하고, 또 전라도 사람은 예민하고, 강원도 사람은 꾸준하고, 또 평안도 사람은 성질이 급하고, 황해도 사람은 좀 원만하고, 함경도 사람은 계속성이 있고, 이러니까 고아원이나 양로원, 양로원에 가 보면은, 양로원에 가서 그 명부 조사를 해보면은 강원도 사람은 양로원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애광양로원에도 없고 신망애양로원도 없고 다른 양로원도 보면은 강원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 그 사람들은 꼭 자기의 책임과 의무성이 있어서 자기 생활 자기가 하지 남에게 누 끼쳐서 양로원 가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 그게 그만치 지방성이 다르다 그말이오.

평양 사람들을 말하기를 ‘산중출호라.’ 산에서 나오는 범이라 왈칵 하지마는 뒤가 없습니다. 이 경상도 쟁이는 이거 뭐 어떻게 뚝뚝하고 미련하고 교만한지, 이래서 경상도 사람을 가리켜서 문둥이라, 경상도 문둥이라, 보기 밉상이라 말이오.

이러니까 자기 지방질을 자꾸 알고 ‘나는 경상도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기에, 경상도 사람은 교만하고 미련하고 뚝뚝한데 그것을 알고 고칠라고 애를 써야 돼.

경상도 사람이 평안도 사람을 닮아가고, 또 전라도 사람을 닮아가고, 강원도 사람을 닮아가고, 경기도 사람을 닮아가고, 경기도 사람은 굉장히 민첩하고 사치합니다. 사치스럽습니다. 그 말하는 것 보면 아주 말뿐만 아니고 그 인품이 그래요. 이러니까 자기 지방성을 알아서 ‘나는 요 지방에서 났기 때문에 요 지방성은 표준적인 지방성이 이러니까 내가 요 지방성을 기어코라도 내가 벗어나고 대항해서 요걸 완전히 벗어야 되겠다’ 요것을 애를 쓰는 것입니다.

나는 경상도 사람이 안 될라고 애를 써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나를 보면 아마 나를 경상도 사람이라고 하지 안하고 평안도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 사람 고향이 평양인가? 말씨를 들으면?’ 말씨보다 인품의 성질을 보면 나를 평안도 사람이라. ‘그 사람은 또 강원도 사람 같은데? 그 사람은 또 전라도 사람 같은데?’ 왜? 전라도 사람같이 내가 예민하고 뭘 그렇게 할라고 애를 씁니다. ‘그 사람은 꾸준하게 뭘 간단간단한 거 같은데 똑 소 힘줄 모양으로 띵글띵글한 거 보면 그 사람이 충청도 사람이다’ 나를 이제까지 수십 년 나를 같이 있었지만 같이 있는 이 권사님들이나 모두 이 장로님들이 저를 누군지 모릅니다. 저를 누군지 몰라요. 어떤 사람인지? 요래 보면 요 사람이고 또 나중에 보면 딴 사람이고 또 저래 보면 저 사람이고, 지금 제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이렇게 같이 하는 ‘그 사람의 성질은 요렇다, 그 사람은 성질은 요렇다.’ 딱 꼬집은 자가 없습니다. 그건 줄 알고 보면 나중에 아주 정반대로 딴 사람입니다. 이래서 그런 것이 안 될라고 제가 애를 씁니다.

그러기 때문에, 뭣이든지 우리가 자꾸 노력을 해 가지고 힘을 써야 되지 힘 안 쓰면 자기는 처음에 나온 그 지방성대로, 또 지방 풍속대로, 또 그 사회대로, 그 나라의 법대로, 그 유전대로 요렇게 되기 때문에 그걸 안 할라고 애를 써야 됩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에 거석할 때에 영남회라는 회가 있었습니다, 영남회. 영남회가 있어 가지고 그 영남회에 가입하라고, 또 호남회가 있고, 이래서 제가 조부라운 일이지마는 강단에서 그 지방성으로 영남회니 호남회니 꾸민 이게 사람 죽이는 일이라고 강하게 좀 얼마 동안 외쳤는데 지금은 뭐 영남회니 또 호남회니 뭐 충청회니 하는 이런 회가 활기를 띠지 못하고, 이것이 아니라는 그걸 한 강단에서 외치면 그게 나가서 전국에 외쳐지기 때문에 그런 것이 다 지금 제재돼 가지고 그거 주장한 일 없습니다. 제가 서부교회 여기 오고 난 다음에 여기 호남회라는 그 회가 있어 가지고 상당히 내게 고통을 줬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회에 들어 가지고 잘 믿던 집사들도 다 낙심해 가지고 지금 뭐 예수 팔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저 예수회, 영감과 진리회 외의 거는 전부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주님이 요한복음 10장에 말씀하시기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절도요 강도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보다 먼저 온 사상, 또 뭐 윤리, 도덕, 또 습성, 사회성, 지방성 그런 것은 다 사람을 삼켜서 죽이는 것이라.

다 그 지방성이라면 지방으로 뭉쳐 가지고, 지방이 홀카가고, 또 습관이 홀카가고, 문중이라면 그 문중, 그 문벌이 홀카가고 다 홀카가고 나니까 남은 인간이 없어.

그거 내가 여기 우리 진영에서 ‘너희들은 혈육주의 그 문벌주의를 벗어나라’ 문벌주의를 벗어나라 혈육주의를 벗어나라 이래 가지고 삐꿔서 목사들 쳐놓고 ‘나는 정치가 이해가 안 된다’ 이래 가지고 간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있으나 가고 난 뒤에 소문 들어도 그걸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그 놀음 하니까 예수주의에 들어가기는 참 어렵습니다. 알겠습니까? 이런 걸 배우기 어렵다 말이오. 이런 거 아무 데나 배우는 거 아니라. 이런 걸 말하는 데가 별로이 많지를 못하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바로 알아야 될 터인데 오늘 아침에도 이 본 말씀에 벌써 시간은 지나갔는데 여러분들이 못 알아듣기 때문에 자꾸 알아듣도록 서론 하다가 말았습니다.

오늘 아침에 봉독한 것이 히브리서 4장 1절로부터 11절까지를 보고 그 말했는데 그후에 4장을 전장을 다 읽어 보십시오. 전장을 읽어 보면은 이런 말씀이 있어요.

13절에,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거와 같이 드러나느니라” 이제 말씀대로 됐나 안 됐나 이걸 환하게 자기 정체를 하나님께서 막 그대로 드러내도록, 드러내도록 해 버립니다. 그러면 자기가 땅위에서 세상에 산 생활이 전부, 여게 저 뭐꼬? 사람들이 배우가 자기 행동한 것이 전부 그 활동 사진에 다 나오지 않습니까? 영화 배우, 영화관에 다 그대로 나오지 안해, 뭐? 운 거, 웃은 거, 삐쭉거린 거, 삐꾼 거 뭐 싹 그대로 나오지 않습니까? 요거 모양으로 인간들이 땅위에서 생활한 그 행동이 행동록에 기록해 가지고 그 모든, 촬영해서 영화관에서 나타난 것보다도 더 환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그때는 불만과 불평을 품을 수 없어, 환하게 다 나타나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러니까 이것이 엉망진창인 사람인데 싹 뭉케 버리고 하나도 없어. 왜 그렇소? 주홍 같고 진홍같이, 행동이 주홍 같고 진홍 같은데 싹 지워버려서 하나도 나타나서 하나도 기억할 것이 없다 말이오. 어째 그렇습니까? “나로 더불어 변론하자” 나로 더불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정돈하자. 예수님의 피공로에 해결지운 사람은 그런 것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알겠습니까? 김익두 목사님이라 하는 그 목사님이 술쟁이고 개구쟁이고 사람 뚜드려 패는 불량쟁이고, 모두, 어데 있었다 하더라? 그 사람이 어데 났지? 김익두 목사님이 어디서 났지? 그 본토가 어데야? 그런데 그 장이 안 서요. 그 사람이 가면 그만 장꾼들이 전을 다 닫아버려. 왜? 그게 오면 술먹고 미친짓 하지, 또 거게서 저거 세력이 세지 이라니까 그만 그거 만나면 재수 없다고.

이런 자인데 나중에 예수 믿고 난 다음에 목사가 됐습니다. 목사가 되고 난 다음에는 어데든지 집회 가면 ‘나는 김익두입니다. 나는 과거에 이렇고 이렇게 이런 나쁜 놈입니다.’ 그말을 하는 것이 그 듣는 교인들에게 은혜가 됩니까 안 됩니까? 은혜가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지금 그 행동을 가지고 있으면 은혜가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안 되지. 그 행동을 백팔십도로 완전히 전환해서 바꿨으니까 은혜가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요.

우리가 땅위에서 어떤 죄가 있어도 그 죄를 딱 끊은 사람은, 딱 끊고 회개한 사람은 그 범죄한 그것이 하늘나라에 가 가지고도 영광이 되어지고 자랑이 되어지지마는 땅위에서 회개할 기회를 놓치고 회개하지 안하고 그대로 와 버리면 영원한 수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입고 다녀요.

하늘나라 가서 무슨 옷 입어요? ○○○씨? 하늘나라 가면 뭣 입고 다녀요? 하늘나라 가면 뭣 입고 다니지? 뭐? 행동? 졸면서도 알아들어? 소용 없어.

엊저녁에 몇시에 잤어? 오늘 아침에 좀 치료를 해야지. 몇시에 잤어? 엊저녁에 몇시에 잤어요? 어? 열시? 열시에 잤거든 인제 아홉시에 자, 그라면. 열시에 자서 예배에 졸면 아홉시에 자야 되고, 아홉시에 자서 예배 시간에 졸거들랑은 여덟시에 자야 되고, 여덟시에 자서 졸거든 일곱시에 자야 되고, ‘그라면 밥을 안 먹고?’ 밥을 못 먹어도 자야지. 예배에 잠을 안 자고 예배를 드려야지 졸면 어짤 건고? 거창서 예수 잘 믿겠다고 여기까지 와 가지고 새벽기도 나와 가지고 꾸벅꾸벅 졸면 뭣할 거라? 어제 내가 산에 가 보니까 어떤 구역 말이지 기도하러 갔는데, 내가 올라가며 봐도 천막에는 아무도 없고, 내려오며 봐도 아무도 없고, 또 올라가며 봐도 아무도 없고, 나중에 내려오며 보니까 그때 저 천막에서 뭐 합해지는가 저기 있다가 또 뽀르르 오더니만 천막에 들어가더니만 또 뭘 가지고 뽀르르 가고 하는데 뭘 하고 있는지 몰라도, 기도하러 가 가지고 저거끼리 뭉쳐 가지고 얘기나 하고 모처럼 만났으니까 재미나 누리고, 그러니까 ‘아이구, 저거는 언제 살아날란지? 죽고 또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니까 저게 언제 살아날란지 모르겠다.’ 탄식이 납디다.

요걸 오늘 읽어보십시오. 오늘 아침에 증거할라 하는 거는 그것입니다. 모두 다 지금 안식은, 지금 우리가 주일날 맞는 이 주일날은 안식일입니까 주일날입니까? 안식일과 다릅니까? 오늘은 안식일은 아닙니까? 따라합시다.다시 정한 안식일!다시 정한 안식일!다시 정한 안식일!다시 정한 안식일입니다.

여기 보십시오.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가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이러니까 어느 날 정했으면 무슨 날을 정했다 말이요? 다시 어느 날 정했으니 무슨 날 정했다 말이요? 안식일 정했다 말이요, 안식일. 다시 어느 날 정한 것은 그 사람들이 안식일에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안식일을 정해 가지고 안식에 들어가도록 했다는 말입니다.

이런데, 왜 그라면 우리를 ‘다시 정한 안식일이라’ 이래야 될 터인데 주일이라고 합니까? 그러면 다시 정한 안식일이 아니라서 주일이라고 합니까 주일이라고 하는 그 이유가 있어 주의 날이라고 합니까? 다시 정한 안식일이라고 하면은 어떤 면이 유리해요? 다시 정한 안식일이라고 하면은 어떤 면이 유리해요? 그전 안식일이 폐해졌고 새로 정한 안식일이라, 그전 안식일이 폐해졌다 하는 그면에 대해서 그 유리하게 증거가 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유리하게 강하게 증거가 돼서 거게 대해서는 확실히 알게 되지요.

그러나, 이 주일이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인해서 온,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공로, 죽으심으로써의 대속, 부활하심으로써의 대속 이 두 가지 대속을 증거하는 데는 유리하지 못하고 빈약하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그 둘 중에 어느 것이 크냐? 그전 안식일은 잘못 됐다, 그건 헛일하고 실패했다 하는 그것보다도 주님의 사활로 말미암아 된 이 사실은 그것의 뭐 억억만 배가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그 중량이 크기 때문에 이걸 주의 날이라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발표를 하신 것입니다.

이런데, 오늘 여러분들이 돌아가 가지고 4장 1절로 13절까지를 쭉 읽어 보십시오.

읽어서 볼 것 거게서 뭐, 오늘 아침에 설교한 대로도 가서 읽어봐서 깨달으면 됩니다.

그 안식이, 안식이라 말은 평안 안자 쉴 식자인데, 안식날이라 이렇게 안식날이라 정했는데 그 안식이 어데 있습니까? 그 안식을 어데서 하는 것이 그 안식입니까? 그 안식을 어데서 하는 것인지 여러분들이 가서 좀 살펴봐요.

그라면 안식을 집에서 하는 것이 안식인지, 안식날 지키는 것인지, 또 예배당에서 지키는 것이 안식날 지키는 것인지, 안식을 어데서 하는지? 안식일이라 했으니 안식을 어데서 하는지 안식하는 그 장소를 여러분들이 읽어 가지고 발견하십시오.

알겠습니까? 안식할 장소를 어데서 안식하라고 하셨는가? 이 안식일은 어데서 안식한다는 말인가? 안식을 어데서 하는가? 어데서 안식한다고, 이 안식일이라고 한 것은 어데서 안식한다는 말인가 그걸 안식하는 장소를 여러분들이 요 히브리 4장 1절로부터 13절까지를 읽어 가지고 거기서 깨달아서 확정을 지우라 그거요.

알겠습니까? 이거 뭐, 이제까지 이거 세계가 해도 아직까지 발견되지 못한 이 진리가 이거, 우리가 안식일을 잘못 지켰으니까 우리 다 헛일이라 말이오. 헛일인데 이렇게 된 일을 지금 발견하지마는 저거 들을 때에 이 세상에 도덕론 말이요, 도덕론, 똑 테레비에 나오는 것 같은 것, 이 세상에서 뭐 도덕 강의하는 것 같은 것, 무슨 철학 강의, 사회 강의 그런 걸 하면 지금 재미 있다고 귀를 쏠리고 여기 자리가 꽉 찼을 것인데 오늘 이 말씀 하니까 새벽에 안 나왔어. 새벽에 나온 사람 우리 교회 남반들로 말하면 이백 명밖에 안 돼요. 양성원 학생들이 저만치 돼요.

이러니까 얼마나 거짓부리요? 본교회 남반으로 말하면 이백 명이 덜 나왔어, 남반만 해도. 이러니까 껍데기라 말이오. 오늘은 이렇지마는 예수님 오시면 낭패입니다. 그 인간도 낭패고 나도 낭패야. 그 인간이 듣지 안해서 낭패라.

6절 하반절에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다시 다른 날을 줬다” 안식일은 이거는 뭣 하는 날이냐? 안식일은 뭣 하는 날이요? 안식은 어데서 합니까? 이 세상에 그날 일하지 말라고. 오늘까지 모두 인식이 이 안식, 이 주일날도 내나 지키는 그 법으로 하기 때문에 ‘이 주일날은 일하지 안하고 쉬는 날이라. 이 날은 쉬는 날이기 때문에 이 날은 노는 날이라.’ 이라니까 전부 직장 다니던 자들도 전부 그날은 ‘이제는 노는 날이니까 오늘은 다 인제 일 하던 일 마쳤으니까, 일을 마쳤으니까 목욕하고, 목욕하고 난 다음에 이제 오늘 저녁에는 테레비도 밤중까지 봐도 된다.’ 또 이제 밤중에도, 내일 예배보러 갈 것인데 이 남자라 하는 것이 아내를 애를 먹여 가지고, 아내라 하는 것이 남자 애먹여 가지고 이래 가지고 토요일날 밤에는 꼭 죄를 범한다 말이오.

죄를 범하는 게 뭐 동침하는 게 죄 범하는 게 아니지마는 주일을 하나님 앞에 드릴, 드리기에 벌써, 반공일이라 하는 그것도 ‘오후부터 준비를 해야 된다’ 성경에 보면 사흘 준비 했다 말이오. 성경에 십계명을 볼 때에 며칠 준비했어? 며칠 준비시켰소? 며칠 준비시켰소? 말해 봐요. 손가락으로 가리켜 봐, 며칠 준비시켰는고? 들어봐야 알지, 누가 아는가? 사흘 준비시켰어, 사흘 준비.

이랬는데, 이래 가지고 ‘자, 이제는.’ 늦게 자빠져 자고 일어나 가지고 `오늘이야 직장 가는 거 같으면 정신을 딱 차리지마는 직장 안 가는데 뭐 거기 가는 거야 놀러가는 것이지’ 주일날을 놀러가는 것, 일만 안 하면 되는 날로 노는 날로 알았기 때문에 오는 사람이 그래 가지고 늦게 일어나 가지고 ‘뭐 낯이나 씻을 게 있는가, 뭐?’ 이래 가지고 밥 떠먹고 훌떡 이래 가지고 ‘옷은 뭐할라고 넥타이 멜 거야?’ 잠옷 그대로 집구석에 입는 아무나따나 이래 가지고 그래 가지고 떡 와 가지고 이거는 아주 저거 안방에 돌아다니는 것과 같은 이리 오지 하나도 주일 온다고 가다듬어 가지고서 정신을 모두어 오는 것이 아니니까 이것 때문에 죽지 않습니까? 이 주일날을 일 안 하고 노는 날로만 알았기 때문에 주일날은 일 할 수 없는 날인 줄 알고 있어.

자, 따라합시다.안식일은!일 할 수 없는 날이다!일할 여유가 없는 날이다!주일은!일할 여유가 없는 날이다!안식 세계에!들어가는 일에!전심 전력해야 한다!안식 세계에 들어갈!들어갈 모든 요소를!다 받는 날이 주일날이다! 이라니까 바빠요 수월해요? 바빠요 수월해요? 그날은 실컷 자빠져 자고 아침에 늦게 일어나도 돼요? 열두시까지 테레비 봐도 돼요? 이 가르치기를 잘못 가르쳐 지금 이렇게 다 돼 가지고 있으니까 이게 막 마귀의 도적질하는 막 소굴이 돼 가지고 있는데 여게 대해서 가르쳐도 거게 대한 아무 생각도 없어.

요 공과를 해서 내놔야 되겠는데 요 공과를 어제도 할라 하다가 또 못 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꼬?’ 간추리다가 못 하고 말았어. 요번 주간에 할란지 안 할란지 모르겠어. 오늘도 할라고 해 볼 건데 할란지 모르겠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안 나오면 이거 못 들어. 안 나오면 못 듣고 제 마음대로, 제 생각대로, 제 주장대로, 제 뜻대로 예수 믿으니까 그거 무슨 구원이 필요가 있겠어? 소용 없어.

안 돼. 다 헛일이라. 기본구원뿐이지 건설구원은 못 이루어요.

하루 삼십 분 기도, 미래를 위해서 하는 기도 놓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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