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하는 자

 

1981. 7. 12. 주후

 

본문: 야고보서 4장 1절 - 10절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믿는 사람은 쉬지 않는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쉬지  않는 싸움을 하는 참 전투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다 군병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하고 있는 싸움은 하나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쉬지 않는 계속 전투 생활을 하는  것이 기독자이지마는 세상이 싸우고 있는 그런 싸움은 하나도 이 싸움에 섞여  있지 않는 것이 기독자들입니다.

그런데 1절로부터 2절까지의 기독자들이 서로 싸우고 다투고 시기하고 살인하고  이렇게 하는 이 싸움은 이것은 세상이 하고 있는 그 싸움입니다. 기독자가 싸울  싸움은 따로 있는데 세상들이 싸우고 있는 이 싸움을 기독자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기독자들이 이 싸움을 싸우는 이 싸움은 어디서 나왔느냐 자기 안에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 이 두 가지가 싸워가지고 성령의 소욕을 소멸하고  육체의 소욕대로 나가는 여게서부터 이런 썩은 싸움들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다 썩은 싸움들이요. 죽는 싸움들이요. 이기 봤자 사망이요. 저 봤자 사망이요.

승패간에 다 사망되는 그런 싸움인데 이 싸움은 성도의 싸움이 아니니 고  성도들이 성령의 소욕으로만 살아야 하는 것이 성도들인데 성령의 소욕으로만  살면 이런 싸움은 하나도 생기지도 안하고 이런 싸움은 하지를 아니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소욕의 싸움은 다 하나님께 대한 욕망을 천국에 대한 욕망을 하나님과  천국에 합당한 자기가 되려는 이 욕망에서만 나오는 싸움이기 때문에 이 싸움은  세상에 속한 싸움이 아니요. 악령으로 더불어 싸우는 싸움이요. 사망으로 더불어  싸우는 싸움이요. 죄로 더불어 싸우는 싸움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성도의 싸움은 싸우지를 못하고 세상이 싸우고 있는 이런  싸움들을 싸우고 있으니 이 싸움이 문제가 아니라. 이 싸움 출처가 곧 자기 속에  자기 욕심을 발생시킨 것이니 자기의 심신은 다 죽어있고 그 생애는 다 죽음의  결과를 맺게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너희들이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어라" 하는 이 종류 안에서 들어있는 것이요.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우리가 애통해야 됩니다.

이것도 애통해야 되고 참 자기를 인해서 탄식할 줄 알아야되고 자기 생애 자기가  소원하고 있는 그 소원 이것이 너무 비참하고 가련해서 참 자기와 자기 생애를  인하여 탄식을 하고 슬퍼하고 애통을 하고 이렇게 발버둥을 치는데에서 이럭  저럭 하다가 보면 다 제거될 것이 제거하고 제거되고 제거가 천국의 들어가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고 붙들수가 있는 것인데 그저 이런 싸움을 하고 살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세월아 가거라하고 밥먹어 배부르니 됐고 비 안맞고  의지간에서 잠자고 있으니 됐고 하는 이런 모든 이것도 다 우리가 애통해야 될  것들입니다.

또 애통해야 될 것은 이 싸움을 해 가지고 이것조차도 얻지를 못합니다. 서로  시기하고 살인하고 다투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꿈에라도 그저 전심 전력을 다  기울려도 이것마저도 자기의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이일에 대해서도  그저 안되니까 될날이 있겠지하고 스스로 위안제를 마시고 사람이 꼭 같으나  어데 가난하게 살사람도 있고 부하게 살사람도 있고 실패하는 사람도 있고  성공하는 사람도 있지.

이래 가지고 제가 욕심을 품는 대로 품어가지고 날뛰다가 욕심품은 그것이  달성이 안되면 여게 대해서도 참 자기의 그 허약한 것이라든지 또 자기의 그  실패한 것이라든지 여게 대해서도 사람이 뼈아피 무슨 아픔이 있어야 되겠고  울음이 있어야 되겠고 슬픔이 있어야 되겠고 통분이 있어야 될 것인데 또 이것도  없습니다.

이러니까 이거는 아무 감각없는 사람이요. 지조없는 사람이요. 목표없는  사람이요. 아무런 뼈없는 주체성없는 그런 참 죽은 송장과 같고 감각이 없는  그저 그런 무생물과 같은 이런 사람으로 살고 있는 것을 주님이 원치  아니하십니다. 이것도 울어야 될 참 마음의 가슴을 쳐야 될 것 중에 또  하나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성경에 보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에 대해서 안믿는  사람들보다 다 뛰어난다고 했습니다. 안믿는 사람들보다 지위도 높고 권세도  높고 영광도 높고 명철도 높고 모든 소유도 많고 인품도 뛰어나고 이렇게 된다고  성경에 말씀해놨는데 이것마저 안되니 이것도 울어야 될 간단한 이유입니다.

그저 안되면 안되는대로 이렇게 합리주의로 위안제만 마시고 위안제만 마시고  자기 주관대로 어찌됐든지 위로되게만 해석을 해 가지고 아무 염려 근심 걱정  없이 사는 이것도 참 탄식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이 탐하고  있는 그런 것을 탐하는 그것도 탄식이요.

또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탐하고 노력해도 이것조차도 성공하지 못하는  그것도 또 탄식입니다. 그것도 비참한 일이요. 우리 기독자들은 뼈없이 살면  안됩니다. 기독자는 절대 무저항주의자가 아닙니다. 대항을 하지 않는 주의가  아닙니다. 철두 철미한 절대적인 대항자입니다. 절대적인 투쟁자입니다. 세상이  바위 위에 얹혀도 꺾어지지 않는 것이 그것이 기독자입니다. 백번 죽는다 해도  안꺾어지는 것이 기독자입니다.

그러기에 참 기독자는 다 세상이 손들지 세상이 이기지를 못합니다. 세상이 그  앞에다 굴복을 합니다. 기독자들이 가치없는 일을 인해서 가치가 적은 일 그  가치가 잠깐 있다가 없어질 가치 적은 일 참 허무한 일 그런 것들들 욕망해서  투쟁하고 노력하는 것도 그것도 다 꿈꾸는 헛된 생활을 하는 참 탄식하고 울어야  되고 탄식을 해야 되고 울어야 되고 슬퍼야 되고 자기는 가슴을 쳐야 될 이  일입니다.

믿는 사람이 썩어질 것, 없어질 것, 영원성을 가지지 못한 것. 예수님을 알지  못했을때에 가치있게 여기고 소원했던 이것을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도 그것을  소원으로 가지고 그거 얻기 위해서 노력한다면 다 죽은 생활입니다. 그것도  탄식거리요.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위해서 노력하기를 너나 네가 꼭같이 그거  위해서 노력하는 것 같지마는 한 사람은 그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그거 그것을  욕망해 가지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그것으로 지금 자기가 그거 없으면 따지 못할기고 그거 없으면 손이 자라가지  못할 것을 그것을 만들어 가지고 자기 손처럼 자기의 기능처럼 만들어 가지고  없어지지 안 할 하늘의 것을 붙들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그것을 취하려고 하는  자도 있고 어떤 자는 그것이 제일이라고 그것만으로 만족을 하려고 취하는 자도  있기 때문에 다 같이 한 자리에서 이래 노력을 하지마는 하나는 사망에 속해서  버림을 당했고 하나는 생명에 속해서 데려감을 당했다고 그렇게 성경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쫓아나느뇨 너희 지체중에  싸우는 정욕으로 쫓아난 것이 아니냐." 이것이 하나의 탄식거리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성령의 소욕으로 성령의 소욕으로 살아도 시간이 모지래고 정력이  모지래고 그 현실이 모지래는데 이렇게 참 정금으로 비할 수 없고 한 순간의 그  현실이 우주를 두고서 가치를 그 비중할 수 있는 이런 귀한 것인데 이것을  썩어지고 없어질 이 자기의 정욕대로의 정욕의 그 욕심을 달성하기 위해서 이것  때문에 투쟁하고 이것 때문에 원수를 맺고 이것 때문에 시기하고 이것 때문에  사람을 살인을 하고 사람을 미워한다 말이오.

살인을 하고 또 살인도 실상하고 이렇게 하는 이 허무하고 비참한 허무한 이  생활 이것을 자기가 하고 있는 자기 육체의 소욕대로의 이 사는 생활 이 생활을  참 두고서 슬퍼하고 애통하고 울고 근심하고 탄식하는 이것을 우리가  가져야합니다.

이것을 가지지 못하고 육체의 소욕대로 사는 그것이 당연한 신앙자의 기독자의  생활인줄 알고 그것이 그렇게 하다가 안되면 그거 안됐다고 어둠침침한 어두운  사람이 되고 그거 하나 되면은 고만 천하에 저 이상 없는 것처럼 날개를 펴고  야단을 지기고 참 비참합니다. 참 비참합니다. 이것을 비참하고 가련한 것을  모르면 그는 그 심신의 기능은 영원한 비참을 만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성경에 보면 네가 땅에 것도 구하면 민족 위에 뛰어 나게 하겠다. 네 사회와  네 세상에서는 머리가 되고 꼬리되지 안하고 위에만 있고 아래있지 않고 남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꿀 것이 없고 너 하는 모든 일은 다 형통해서 마음에  생각보다 더 지나친 수입이 성공이 있을 것을 이렇게 성경에 말씀했는데, 이  땅에 것을 소욕하는 이것 마져도 주님 앞에서 구하고 노력을 해도 얻지 못하니.

이것도 왜?  어떻게 해서 성경에 말하기를 "구하라 주실 것이라고" 말씀했고 성경에 네가  땅에서 모든 사람 위에 머리가 되고 꼬리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 있지 않고 네  손으로 하는데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자연까지 다 협조해서 모든 것이 넘치게  곡간에 넘치게 해준다고 했는데 왜 나는 예수를 믿어도 이런 꼴을 보지  못하는가? 이것도 울어야 될터인데 이것도 또 울지 않습니다. 이것도 울지  않습니다.

공연히 위안제로 마셔가지고 자기가 무슨 큰 의인처럼 실컨 땅에 것을 욕심내는  그것이 헛 욕심을 냈다든지 자기가 욕심내는 것을 다른 사람은 다 같이 성공을  하는데 저는 성공 못하니까 다 같이 땅에 것을 욕심내서 다른 사람을 성공하는데  왜 너는 성공 못하느냐? 하나님께 버린 자식일까? 버린 자식이가 내게는  하나님이 없나. 공연히 나혼자 하나님 하나님 하고 있지 나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이냐. 이 점에 대해서도 울만한 일이요. 참 가슴을 칠만한 일이요.

이럴긴데 공연히 위안제를 마셔가지고 모든 것이 협력하여 유익이 된다. 가난한  자가 더 복이 있어. 하나님의 후사가 된다고 하지 안했느냐? 내가 세상 것을  탐했는데 안된것이 저주지 어찌 그게 하나님의 후사가 될 수 있는 가난이라고  생각하느냐? 자기가 하나님의 뜻대로 이렇게 살면서 가난이 왔으면 내가 하나님 뜻대로 살아  부요가 올때는 부요가 좋기 때문에 부요가 왔고 가난이 올 때에는 가난이 좋기  때문에 가난이 온 것이라.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 마땅하고 부요도 좋지마는  가난이 좋은 것이다.

성경에 보니까 가난이 도로 하늘나라에는 부요하다고 말씀을 했다. 내게는  부요를 주면은 그것이 시험거리가 돼 가지고 구원을 잘 이루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아시고 가난을 주신 것이니 하나님의 사랑이 변동없고 그 지능이 부족이  없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마는 자기가 땅에 것을 향하여 소망이 그뿐인데 그것  뿐인데 그것만 가지고 이렇게 욕망을 부려서 살아도 그게 안됐으면 다른 사람은  그렇게 살아서 되는데 믿는 사람이 그렇게 살아서 되는데 믿는 사람이 그렇게  살아서 생각보다 지나게 재물도 모이고 권세도 생기고 지위도 올라가고 이렇게  되는데 나는 안되니 이 무슨 이유냐?  이 이유를 찾기 위해서 울어야 되겠고 또 이 이유를 찾았으면 울어야되겠고  이유를 몰라 안 울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니까 그런가 보다 해서 안된데 대해서  자기 목적이 달성되지 안한데 대해서 울지 안하려거든 자기가 목적을 향하여  달렸던 그 모든 경영이 다 헛되다는 것 그 잘못됐다는 것 그 점에 대해서 울어야  될터인데 이것도 울지도 안하고 이것도 울지도 안하고 완전히 죽은 자입니다.

감각이 없어. 기독자는 감각없는 그런 무저항주의자가 아닙니다 아무나 따나  위안제를 마시는 그런 합리주의의 몹쓸 사람이 아닙니다. 기독자는 철두철미한  자입니다. 칼날같은게 기독자입니다. 과학이 절대적인 그 이치가 있다면  기독자의 구원은 더욱더 그것의 그것의 주격인 그런 가치의 권위의 이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구하다가 되지 않는 자는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이렇게 해도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구해도 성공이 안되는 그 이유는 너혼자  하려고 애를 썼지 하나님에게 이것을 해 달라고 네가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고  구하지 안했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을 안될 이유를 말했습니다. 믿는 사람이 뭐  내일을 내가 하지. 그렇게 하나님에게 구하는 그런 일 안하련다. 잘났다.

여러분들 속지 마십시오.

그럴때는 악령과 죄악이 주는 거 외에는 자기에게 안옵니다. 자기가 얻어도  세상과 세상 것을 얻어도 예수 안에서 얻어야 됩니다. 예수 밖에서 되는 것은  저주 뭉텅이요. 멸망 뭉텅이요. 죄뭉텅이요. 세상과 세상 것을 얻는 것도 예수  안에서 얻어야 되겠습니다.

예수 안에서 얻는 것은 그것이 뭐이냐? 주님에게 구하는 것이요. 주님에게  구하는 것은 그래도 하나님이 해주시면 되고 하나님이 안해주시면 안된다.

하나님이 해주시는 데에는 내가 세상 것을 구하는 그런 모든 방편에 있어서  하나님의 법도를 어기지 안하고 그 법도대로 내가 모든 일을 지켜해야 하나님이  이 일을 이루어 주실수가 있다.

이렇게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도록 바라면서 그 법도를 지켜 그  법도대로 행하여 이런것이 되기를 원할 때에 이것이 하나님에게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구하는 것. 하나님에게 구하면 하나님이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해주시면 되고 안해주시면  안된다.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고 하나님 해 주시도록 하려하니까 하나님 법을  어기면 하나님이 미워하실 터인데 하나님이 안주실터인데 되겠습니까? 이러니까 하나님에게 구하는 자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지 안하고 그 법대로  행하여 땅에 것을 구하는 자지요. 그것이 하나님에게 구하는 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려고 했습니다. 약속을 했습니다. 천하 모든 민족위에 뛰어난다고  했습니다.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한다고 했습니다.

기독자들은 다 체험적 길을 걸은 사람들입니다. 각각 자기대로는 다 그것이  땅에것을 구했으면 땅에 것이 되야지요. 된 사람들은 베드로가 주님 시킨대로  고기잡아보고 난 다음에는 고기를 두고서 이제는 주님 말씀대로 영원한 것을  소망하기 소득하기 위해서 그까짓거를 고기와 배를 다 집어던지 버리고 주님께  소망두고서 이제 주를 따랐던 것입니다.

이런데 다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고 주님이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요.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분에게 소망을 두고  이분이 이루어 주시면 되고 안 이루어 주시면 안돼는 줄 알고 이분이 주지 않는  마귀가 주는 것을 예수 밖에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죄뭉텅이요. 화 뭉텅이요.

저주 뭉텅이요. 멸망 뭉텅이인줄을 자기가 알기 때문에 이것은 버리고 예수  안에서 예수님이 주시는 것을 얻으려고 이렇게 생각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면서  이분에게 얻을려고 하니까 이분의 비유를 거슬려서는 안되겠다. 해서 이분의  법칙을 자기 자기에게는 이렇게 지키는데 이 일이 안되어지면 이것도 울어야 될  일입니다.

이렇게 지키서 하는데 안 됩니다. 안되면 울어야 될 일입니다. 울면 이제 안되는  그것이 되는 길이 있습니다. 그 밑에 보니 하나님에게 구하기는 구하는데 네가  내가 주면 그것을 잘못 쓸려고 네 욕심대로 쓸려고 구하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안주는게 낫지 줘 가지고 네 욕심대로 잘못써서 그것가지고 하나님 기쁘게 네  복되게 영원을 준비하게 만물과 인간에게 교제를 해서 그들이 환영하고  좋아하도록 하나님과 너에게 좋도록 너 복되게 하려고 내가 주는데 그것을  만물보다 거짓된 독사와 시랭이와 같은 네 욕심대로 그걸 써 가지고 날 근심되게  하고 모든 인류와 만물에게 저주 거리나 되어지는 그런자가 되도록 내가 줄 수가  있겠느냐? 내게 구하는데 안 될때에는 네가 정욕대로 쓸려고 잘못 구하는  것이다. 고렇게 똑똑히 볼가집어서 말씀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자기가 참 성도가 구할 것 아닌 것을 구했다는 그 탄식을 울음이  있든지 성도가 구할 것이 아닌 땅에 것을 주님에게 구했지마는 그것이 안되니  다른 사람은 되는데 안되니 안되는 그게 무엇이 틀렸는가?  그 틀린 것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 울부리고 자기를 탄식하면서  찾아야 될 이 애통이 있든지, 만일 그 원인이 정욕대로 쓸려고 잘 못구한  것이라면 '주여 내가 주 앞에 구하는 요것도 또 요걸 주시면 내 욕심대로 이것을  주님이 주신 이유있는데 이 주신 이것을 내 단독 사욕대로 요것을 사용해서 배나  저주의 자식이 되고, 범죄인이 되고, 하나님을 노엽게하는 요런 정욕으로 쓸  요런 자가 되기 때문에 주님이 주시지 않습니까' 하는걸 발견했으면  자기가 주님의 주시는 은혜를 정욕대로 잘못쓸 그런 자로 되어있는 그 자기를  두고서 탄식을 하면서 애통을 해도 해야 될 것이고 만일 자기가 주님에게 그  법도대로 구해서 주님이 풍성한 것을 주셨으면 '아 감사합니다' 하는 데에서  멈출것이 아니라. 감사는 하지마는 감사는 지내가 버리고 감사보다도 자기는  어데서 머물러 살아야 되느냐? '아 이제 내가 참 헛된 것을 구했습니다.'  이래도 주님이 이것을 나에게 주셨으니 주신 이것을 주의 뜻대로 써서 주를  기쁘시게 하고 이것을 나에게 씨로 양식으로 주셨으니 양식은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권세 있지마는 이 씨 이것은 내가 세상에서 사용할 것이 아니고 씨 이거는  심어서 썩지 아니할 걸 내가 얻고, 강한 것을 얻고, 영광스러운 것을 얻고,  신령한 것을 얻고, 영원무궁한 것을 얻는 여기에 투자해야 될터인데, 이  투자하지 못하고 투자하려 하니 인생 나오고 투자하려 하니 고만 이리저리 머뭇  거리다가 기회를 놓혀 버리고 또 이것을 가지고 이 투자하라고 하나님의 명령이  있고  이래서 이것은 내 영광과 존귀와 이웃의 영광과 존귀와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와  여게 지금 다 메여 있는데 이 모든 것을 절단낸 내가 되어 있으니 이점에 대해서  탄식을 하고 울든지 그렇지 안하면 이것을 지금 기회를 놓히지 말고 주님이  주시면 이것을 바로 사용해서 주님에게 영광이 되고 내게 대해서는 영원히  없어질 것을 마련하는 썩어질걸로 썩지 아니할 것을,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더러운 것으로 영광스러운 것을, 혈육의 것으로 신령한 것을 잠깐 보관해 있다가  뺏기고 말것을 영원히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이렇게 바꾸지 못한 과거에  대해서 탄식을 하고 지금도 바꾸지 못한 이 일에 대해서 근심 걱정으로 기회를  노리고 있으면서 '주여! 기회를 주시옵소서' 기회없이 쓰면은 다 그것을  남용하는 것이요. 다 원수에게 던지 버린 것이기 때문에 안 되겠고, 주님이  기회를 주시야 쓰지.

주님이 주시지 안하면 심을 수가 없는 것이니 심는 다는 것을 토지가 있어야  심으지 주님에게 기회를 주시야 당신이 원하시는 고 쓸수 있는 그걸 줘야 그게  내 씨를 심을 수 있는 토지가 되는 것인데, 이 기회를 달라고 하나님에게  간구하면서 과거에 기회 놓힌 것을 탄식을 하고 울면서 주여! 과거에 그와 같이  했기 때문에 앞으로 남은때는 기회를 주시지 않습니까? 심을 수 있는 주님이  소원하시는 것을 주시지 안할랍니까? 심을 수 있는 이것으로 인해서 만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모두가 기뻐할 수 있는 요렇게 쓸 수 있는 요런 밭을 주지  안하실랍니까? 기회를 주시지 안할랍니까? 여게 대해서 탄식을 하고 울어야 될터인데 이 울음을 울지 아니하면 아니하려면  자기가 이것을 가지고 이렇게 존재의 목적이 주님이 은혜 베풀어 주신 목적이  따로 있고 자기는 이것을 가지고 화도 되고 복도 되고 될 수 있는 이 귀로에  서서 있으면서 오히려 이것을 하나님이 주신것 가지고 자기것인줄 알고 자기  욕심대로 쓸 것인줄 알고 저 위해서는 아무리 써도 아깝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쓰는 거는 요만이만 써도 아깝고 쓰고 난 다음에 무슨 큰 일  한듯이 이래 되어 있으니 이걸 가지고 자기 위해서 자기 높이고 자기 위해서  하니 이것도 탄식이라는 이 탄식도 있어야 될터인데 이런 울음들이 없으니 이  탄식과 울음이 있는 이것이 십자가의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도로  죽는 것입니다.

이 애통하며 근심하며 탄식하는 이것이 있어야 이것으로서 비로소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이것으로서 주님과 연결이 되며 사망이 죽이지 못하는 영생을  가진 나, 하나님 외에는 내 위에 있는 자가 없는 나, 모든 피조물은 발 아래  밟는 나, 모든 인류는 나의 지체가 되어 있는 나 장기간의 고문과 고행의 원수의  그 최고 최종의 고문과 고행이 올때에 '주여! 감사합니다.' 내가 무엇이관데  주님과 나와의 결합되게 하시려고 이 모든 공산주의를 움직여서 만물을 움직여서  이것들을 들러리를 들러리를 세워가지고 주와 나와 결합하기에 용이하고  영광스럽게 하려고 이렇게 모든 주위 환경을 이렇게 들러리를 세워서 옹호하고  있습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세상이 세상이 해할 수 없고 사망도 고문과 고행도 악령도 어떤것이 와도 자기의  기쁨과 평강을 세상이 빼앗기지 못할 이런 기쁨과 평강을 얻게 되는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예수님께서 비유하기를 "잉태된 여인이 해산의 고통을 하나  순산을 하고 난 다음에는 그 고통이 다 물러가고 오히려 새사람이 나옴으로  기뻐한다" 하는 그런 비유로 했습니다.

이렇게 울고 불고 근심하고 탄식해야 우주와 영계의 주인공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요. 뱃속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나옵니다. 이 사욕이 다 파묻혀 있고 세욕에 파묻혀 있고 자율에 파묻혀  있고 마귀의 모든 운동과 궤휼과 참소에 간사한 유혹에 파묻혀 있던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참 자기 하나님의 아들 만물의 영장이 되는 이 자기가 나왔을  때에 나왔을 때에 세상은 협조뿐이지 해할자가 없습니다. 해할 자가 없어.

그들은 깨끈 갖다가 위해서 새사람 나온 이 사람을 해한다는 것이 그 사람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요. 해친다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신 주님하고 딱들어 붙게  만들어 줍니다. 해한다는 것이 주님에게 인정받게 사랑받게 해줍니다. 해한다는  것이 모든 피조물을 다 점령하게 모든 피조물 그의 것으로 유업으로  상속시키시는 세상에 상속주는 구속을 상속시키주는 그 역사를 하고 있는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러기에 사망도 응원 기근도 적신도 위험도 칼날도 응원 고문도 고행도 응원  모든 것이더 기쁘게 하고 더 영광스럽게 하고 더 좋게 하지 환경과 피조물들이  이렇다고 해 가지고 변동되고 시간 지나가니까 변동되고 어떤 구름 끼니까  변동되는 이 기쁨과 이런 것들을 다 너희가 이 기쁨을 근심으로 바꿔라. 이  웃음을 슬픔을 바꿔라. 너의 부요를 가난으로 바꿔라. 너의 육체의 소욕을  완전히 포기와 무로 바꿔라 성령의 소욕으로 바꾸어라 하신 것입니다.

우리 기독자의 구원 행복은 세상이 건드릴 수 없는 행복입니다. 왜?  공산주의들이 이렇게 들먹거리고 야단을 지기느냐? 참된 기독자는 더 의롭고  거룩하고 더 행복되고 가짜 기독자는 떨고 견디지 못해서 억지로라도 하나님의  원수인 하나님이 본남편이라면 간부와 같은 이 악령과 세상. 이것으로 더불어  인연이 끊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야고보서 4장 1절로 부터 10절까지의 있는 말씀을 잘 읽으면서 이기  남의 복음으로 생각지 말고 울라하면 울어야 됩니다. 웃음을 울음과 바꾸라  했으면 바꿔야 합니다. 오후에는 기독자들은 "항상 기뻐하라" 어데서든지 기뻐  즐거워하는 것이 참 기독자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오늘 오후에 시간이 지나가서 증거를 다 못하겠습니다. 먼저  울어야 됩니다. 웃음을 울고, 울고 난 다음에 얻은 웃음은 영원합니다.

"부요하나 가련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 자야" 부요 그것을 내서 일단 가난해지고  가난해진 다음에 예수로 이제 부요해져야 영원무궁한 것으로 부요해져야 그것이  참된 기독자의 부요입니다. 껍데기에서 외식 신자되지 맙시다.

이스라엘 말년에도 외식으로 망했습니다. 오늘도 외식으로 망합니다. 울음없는  기쁨가지고 공연히 위안제를 줘 가지고 기뻐간에 바람을 여가지고서 기독자를  망치는 이런 일을 말아야 합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참 자기의 가진 것 이거 주로 인하여서 살지 못하는 이점을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자는 주님에게 필요있는 것 구하기 전에 세상것은 있어야 되는줄 알고  한번도 그거 위해 구하지 않습니다. 그건 저절로 오고 가진 것 재물로 받히지  못한 이것만 탄식하고 우는 것이 저 할 일이고 이래서 근근히 이거 감당하고 나니까 또 옵니다. 오니까 또 감당해야 되겠고 이러니까 쓰기 위해서 오는 것이 기독자입니다.

  선지자선교회

몸도 그렇고 기능도 그렇고 다 그렇습니다. 물질이라는 것 제일 말단이요. 그거 초보입니다. 그것 돼야 나중에 기능과 자기 인격을 그렇게 바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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