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에 거리낌 없기를 힘쓰노라

 

1987. 4. 22. 밤(수)

 

본문:사도행전 24장 15절∼16절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오늘 예배는 다음 주일 주일학교 공과입니다. 오늘 저녁에 이 공과를 그만 두 번 또박또박 읽고 예배는 끝나겠으니까 그리 아시고, 공과 다 받았지요? 받았으면 공과를 내 가지고 보도록 합시다.

본문, 사도행전 24장 15절로 16절.

제목은 ‘양심에 거리낌 없기를 힘쓰노라’ 양심에 거리낌 없기를 힘쓰노라.

요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8절.

이, 서론.

‘마태 6장 23절에 양심은 마음의 빛이다. 양심을 버리는 자는 그 모든 생활이 다 근시적이요’ 근시적이라 말은 멀리는 생각지 못하고 그저 가깝게 그때만 생각하는 걸 말합니다. ‘근시적이요 모든 삐뚤어진 유혹에 빠져 모든 처사를 소경같이 행하기 때문에 일시 성공 같은 것도 실패요 모두가 자멸 자살 활동만 하게 된다. 사람마다 행복과 성공이 길지 못하고 속히 망하는 것은 전면과 길게를 보지 못하는 연고이다. 양심을 꺾고 죽이고 양심 아닌 마음으로 생활하였기 때문이다.’ 본론.

일, ‘양심의 종류는 심히 많다. 종교 주의 사상마다 양심은 다르다. 이유는 지식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양심은 지식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지식의 종류가 많으니까 양심의 종류도 많은 것입니다.

‘지식에는 잘못된 지식이 많고 바른 지식은 하나뿐이니 하나님의 지식 신구약 성경이다. 사람들이 양심 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양심 자체가 삐뚤어졌으니 결국 생활도 삐뚤어져 멸망을 받게 된다.’ 세상 양심대로 다 산다고 하지마는 세상 양심대로 다 살았다 할지라도 양심을 지배하고 있는 그 지식이 온전한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영원한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자는 바른 지식은 가졌으나’ 하나님의 지식을 가졌으나 ‘양심 생활을 아니함으로 실패 천대 고생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둘째로, ‘기독자는 양심 생활 안 하면 믿는 것은 다 허사이다.’ ‘양심으로 섬겨야 하나님은 받으시고’ 그 밑에 보면 절수입니다. `받으시고' ‘양심 생활 하여야 비방과 욕을 벗을 수 있고’ 다 이거 성경 말씀입니다.

‘양심 생활로 하나님 찾아가는 것이다.’ ‘양심 생활 하여야 하나님을 만나 볼 수 있다.’ ‘양심 안 쓰는 믿음은 파선한 배와 같다.’ ‘양심을 써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거리낌이 없기를 힘써야 한다.’ ‘양심은 죽은 행실을 깨끗게 함을 받게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깨끗게 해 주셔야 되지 그리 안 하면 안 되는데 양심 쓰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이 깨끗게 해 주시지 양심 안 쓰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깨끗게 해 주시지를 않습니다.

셋째, ‘신앙 양심은’ 신앙 양심이라는 것은 `자기가 인정하고 확신하는 성경 말씀대로 옳게 바르게 하려는 마음이다.’ 이것이 신앙 양심입니다.

‘양심은 자기에게도 어떤 피조물에게도 속하지 않고 오직 진리와 하나님에게만 속하여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할려고만 하는 마음이 양심이요 하나님과 진리 외에 무엇에게나 속하여 그것 편이 되어’ 그것 편이 되어, ‘비판 결정하는 것은 화인맞은 양심이다. 양심을 가꾸고 길러야 한다. 예수님의 대속을 입게 하는 것은 양심이다.’ 양심이 예수님의 대속을 우리에게 입게 하십니다.

문답, ‘양심의 종류가 어떠하뇨?’ `심히 많습니다.' 답에 `심히 많습니다.' 둘째, ‘신자의 양심은 어떤 것이뇨?’ 답에, `성경을 바로 깨닫고 그대로 실행시키는 것입니다.’ 양심이 우리 마음과 몸을 지배해 가지고 실행을 시키는 것이 양심입니다. 양심을 꺾어버리면 우리 마음과 몸을 바로 생활해 가게 인도할 자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성령도 양심을 통해서 인도하기 때문에 양심을 버린 자는 하나님과도 상관이 없이 끊어져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화인맞은 양심은 무엇이뇨?’ `피조물에게 매여 자유하지 못하는 양심이다.’ 사람에게나 돈에게나 권세에게나 거게 매여 가지고 공평을 이루지 못하고 그것에게 붙들려서 거게 종이 돼 가지고 모든 비판하고 평가하고 결정하는 것이 붙들린 그것의 중심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그런 양심은 다 화인맞은 양심입니다.

넷째, ‘양심 생활 안 하면 행위구원은 어떠하뇨?’ `양심 생활 안 하면 행위구원은 어떠하뇨?’ ‘회개할 때까지는 전부 허사에 머물고 있다.' 그러면 양심 생활 안 하면 아무리 의로운 생활이 많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 미완성에 돼 있기 때문에 양심을 쓸 때에 그것이 다 살아나고 쓰지 안하면은 준비해 놓은 것이 다 허사입니다. 그만 그래 있다가 숨 딸칵 가 버리면 행위구원은 하나도 없습니다.

한번 더 읽으면서 간단하게 해석하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23절에’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냐” 사람의 빛, 사람의 빛은 양심입니다. 사람의 빛은 양심입니다.

서론에 ‘양심은 마음의 빛이다. 양심을 버린 자는 그 모든 생활이 다 근시적이요’ 가깝게만 보지 멀리 넓게 보지 못합니다. 넓게 보지 못하고, 넓게 보지 못해. 사람의 양심은 범위를 넓게 봅니다. 보는 그 면이 넓습니다. 시야가 넓습니다. 그러나 전체는 못 봅니다.

성령은 전체를 보고 계획하고 인도하는 것이 성령입니다. 영원 후까지, 영계까지, 피조물로부터 창조주까지 전부를, 존재 전부를 보고 우리를 거게 맞도록 인도하시는 것이 성령이요 양심은 인간이 자기 지식의 범위 내에서는 그 전부를 다 보고서 인도하는 것이 양심이요, 욕심이라 하는 마음은 물욕 그것만 보고 물질면만 보고 인도하는 것이 물욕이요, 물욕심. 또 생애 애착욕은 안 죽고 살라고만 하는 그 욕심에 그것만 보고 하기 때문에 그런 건 다 일방적이요 양심에다 비해서 아주 근시적이요 다 소경적입니다.

‘모든 삐뚤어진 유혹에 빠져’ 양심을 안 쓰면 마귀란 놈이 우리를 삐뚤어진 것을 자꾸 이게 좋다 하고 가르칠 때에 그 유혹에 빠집니다. 양심 안 쓰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고 양심 쓰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처사를  소경같이 행하기 때문에 일시 성공 같은 것도’ 잠깐 성공같이 보이지마는 그것조차도 완전히 멸망입니다. 눈이 어둡기 때문에 은행에 가서 돈을 그만 훔쳐 가지고 품안에 넣고 도망쳐도 그 은행 문을 나가기 전에 붙들려 가지고 감옥에 갑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들이 성공이라는 그 성공이 그 성공으로 인해서 자기 당대는 좋아도 자손은 그 화가 돼 가지고 망합니다. 그러나 자손대까지를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도 하나님의 심판도 모르기 때문에 그걸 성공인 줄 알고 모두 날뛰고 있는 것입니다.

‘실패요 모두가 자멸 자살 활동만 하게 된다. 사람마다 행복과 성공이 길지 못하고 속히 망하는 것은’ 금방 성공했다가 금방 망하고, 금방 평안했다가 금방 고통되고 자꾸 이렇게 속성 속망하는 것은 ‘모든 것에 전면을’ 그 전체의 면을 보지 안하고 일방만 보고 하기 때문에 쉽습니다.

일면만 보고 하면은 그게 쉬워요. 열 가지를 해야 될 터인데 한 가지만 하면 한 가지 그거야 십분지 일이니까 빨리 될 것 아닙니까? 그렇지마는 나머지기 구가 있어야 될 터이니까 구비할 것이 아홉이 모자랐으니까 그거는 망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전면과 길게를 보지 못해. 기다란히 길게, ‘이라면 자손대는 어찌 되겠느냐? 자손대는 어찌 되겠느냐? 이라면 내가 늙어서는 어찌 되겠느냐?’ 아이들도 늙어서를 생각하는 학생은 아이 때 젊을 때 공부를 열심히 하고 뭐 장성이 돼 가지고 어떻느니 그거 생각 안 하는 아이들은 우선 좋도록만 하지.

또 사람이 자기 당대만 생각할 게 아니라 ‘내 자손도 있을 터이니까 내 자손 대대에 어찌 되어 있느냐?’ 이걸 생각하는 사람은 또 좀 행동이 달라집니다.

‘길게 보지 못하는 연고이다. 양심을 꺾고 죽이고 양심 아닌 마음으로 생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양심을 꺾으면 양심 아닌 그놈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양심 아닌 물욕심이 지배하든지, 명예 욕심이 지배하든지, 감정 마음이 지배하든지, 복수성의 마음이 지배하든지, 허영이나 허욕의 마음이 지배하든지, 양심이 지배하지 안하는 그 사람의 행위는 전부가 다 자멸 행위입니다.

본론에, 이거 좀 어렵습니다, 이거 뭐 쉬운 게 아니고. 이 간단한 것이지마는 세계에 이 양심관이 통일이 안 돼 가지고 있습니다. 양심관이 통일이 되어 있지 않소. 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양심관은 우리와는 아주 다릅니다. 그거는 완전히 틀렸습니다. 그러니까 이거 예사로 보면 안 돼요. 설교를 안 하고 자꾸 이걸 좀 읽고 집에 가 많이 읽으라 말입니다.

‘양심의 종류는 심히 많다.’ 왜? 종교가 수많은 종교가 있고 주의가 수많은 주의가 있어. 이런 주의 저런 주의 이런 사상 저런 사상, 그런 것이 다 양심을 각각 다른 양심 저거 양심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거는, 그런 것이 다 지식을 각각 다른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 지식이 따로 있고, 민주주의 지식이 따로 있고, 불교 지식이 따로 있고, 유교 지식이 따로 있고, 미신 지식이 따로 있고, 어떤 사상자의 지식이 따로 있고, 어떤 철학자의 지식이 따로 있고 이렇게 지식이 따로 있기 때문에 지식 자기가 가진 그대로의 양심이 되기 때문에, 양심은 지식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 지식 가진 대로 그 사람의 양심은 그 지식대로의 양심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의 종류는 심히 많다. 종교 주의 사상마다 양심은 다르다.

이유는 지식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양심이라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옳다 인정하는 그 지식 그대로 하는 것이 양심입니다. 그러면 불교인의 양심은 불경에서 ‘요렇게 하는 게 옳다’ 그렇게 불경을 보고, 불경을 보고 ‘제일 요렇게 하는 것이 옳게 바르게 사는 것이다’ 그렇게 불경을 보고 알고 인정하는 사람은 인정하는 그대로 하는 그것이 불교인들의 양심입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이 불경을 보고 ‘요렇게 하는 것이 불경에서는 옳다고 말했다.’ 그걸 알고도 그대로 살지 안하는 그 사람은 불교인의 양심을 속이는 사람이요 죽인 사람입니다.

‘지식에는 잘못된 지식이 많고’ 지식에는 삐뚤어진 지식이 많습니다. 요것도 아주 어려운 말입니다. ‘잘못된 지식이 많고 바른 지식은 하나뿐이니’ 이것도 세상이 욕하고 조롱합니다. ‘바른 지식은 하나뿐이니 하나님의 지식 신구약 성경이다.’ 이러니까 창조주요, 주재자요, 모든 주권자시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신데 이분의 지식을 선포해 놨고 그 지식대로 이분이 모든 것을 심판해서 처리할 터인데 사람들은 이분도 모르고 이분의 지식도 부인하고 이분의 모든 심판도 주권도 부인합니다. 부인하고 자기네들 생각하는 대로의 지식을 가지고 다 주장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양심도 자기네들 생각대로 양심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는 상관 없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 없어. 이런데 하나님이 심판해 가지고 모든 것을 결론을 짓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 않는 그런 지식은 하나도 용납할 수 없고 다 불살라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구름타고 지금이라도 오시면 모든 하나님의 지식 외에 삐뚤어진 천만 가지의 지식이 있으나 그대로 하는 지식은 주권자 창조주가 당신의 지식대로 딱 이행을 해 버리니까 그 지식에 이탈된 것은 다 멸망되고야 만다 그말이오. 이거 얼마나 큰 말인지 모릅니다.

지금 여게서 이래 배우지 좀 있어서 때가 가까우면 이런 소리를 못 하게 하고, 그래 설교록을 사 두라 하는 겁니다. 나중에 설교록을 잡아 태울 겁니다, 집집마다 다니면서. 왜? 지금은 이런 걸 설교하지만 좀 있으면 설교를 못 해요. 여러분들이 암만 듣고 싶어도 알고 싶어도 몰라. 알 수 있소? 세계에 있는 모든 이방 학자들이 암만 알아도 기독교의 진리를 모릅니다. 그렇게 알기 쉬운 줄 아요? ‘사람들이 양심 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그러면 각 이종교, 제 종교마다 제 종교대로의 양심 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양심 자체가 삐뚤어졌으니’ 양심 자체가 삐뚤어졌어. 양심 자체가 왜 삐뚤어져? 양심을 지배하는 지식이 삐뚤어져 가지고 있거든. 지식이 삐뚤어져 있으니까 양심이 삐뚤어질 수밖에 없지요.

‘양심이 삐뚤어졌으니까 결국은 생활도 삐뚤어져 멸망을 받게 됩니다.’ 이방은 안 믿지마는 하나님이 신구약 성경 말씀하신 요 성경 말씀 가지고 심판을 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구속을 받지 않는 사람은 다 멸망이지마는 안 믿는 사람은 거부합니다. 부인합니다. 부인하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면 하나님을 능가해서 못 하구로 하나님을 능가할 힘이 있으면 하지만 하면 당한다 그말이오. 노아 홍수 때도 하나님이 일백이십 년으로 정하고 홍수 멸망을 시키니까 모든 사람이 거부했지마는 홍수로 멸망하니까 그 속에 빠져 가지고 멸망했다 그거요.

인간들이 하나님이 선악과 먹으면 죽는다 할 때에 안 죽을라고 애를 썼지마는 오늘까지 사망을 이긴 과학이 없고, 사망을 이긴 지식이 없고, 사망을 이긴 주의가 없습니다.

‘멸망받게 된다. 기독자는 바른 지식은 가졌으나’ 바른 지식을 가졌으니까, 바른 지식을 가졌으니까 바른 양심을 가졌습니다. 바른 지식을 가졌으니까 바른 양심을 가졌습니다. ‘가졌으나 양심을 생활을 아니함으로 실패 천대 고생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양심 생활 안 하니까, 성경 보고 요게 옳다 요렇게 보고 알고도 옳다 하는 그대로 제가 하지 안하니까 멸망받는다 말이오.

세상은 옳은 지식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옳은 양심을 자기가 가질 수가 없고 옳은 양심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옳은 생활 할 수가 없고, 이러니까 양심 생활 해도 소용 없습니다.

둘째로 ‘기독자는 양심 생활 안 하면 믿는 것은 다 허사이다.’ 기독자가 양심 생활 안 하면 믿는 것은 다 허사이다 이 무슨 말입니까? 기독자가 자기가 성경 보고 깨달아서 ‘요게 옳다’ 요게 옳다 싶은 거, 옳다고 생각되는 그대로 안 하는 것은 다 헛일입니다. 알겠습니까? 기독자가 성경 보고 요게 옳다, 요렇게 깨달아 안 자가 그대로 안 하면 헛일이라.

기독자는 자기 속에 양심, 양심이 뭐인데? 성경 말씀 보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대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대로는 요렇게 하는 게 옳다, 자기 지식이 옳다고 인정하는 그대로 하는 것이 양심입니다. 그러면 옳다고 하는 그 지식대로 하는 게 양심이요 그 지식이 참 옳게, 옳은 것을 옳다고 했으면은 그 양심은 산 양심이요 산 생활 됩니다. 자기로서는 그 지식에 대해 ‘요렇게 하는 게 옳다’ 요렇게 인정한 대로 하면 양심은 양심이지마는 옳다 인정한 그것이 잘못 알아서 삐뚤어진 것을 옳다 인정했으면은 그거 죽은 양심이기 때문에 그 양심대로 해도 멸망이라 그말이오. 요거 알아듣겠습니까? 예를 들면은 ‘양심으로 섬겨야 하나님은 받으십니다.’ 디모데후서 1장 3절에 기록돼 있습니다.

또 ‘양심 생활 하여야 비방과 욕을 벗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6절에 있습니다.

또 ‘양심 생활로 하나님 찾아가는 것입니다.’ 양심 생활이 아니면 하나님을 찾지 못합니다. 요것도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 있습니다.

‘양심 생활 하여야 하나님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양심 생활 해야 하나님 만나볼 수 있지 양심 생활 안 하는 사람은 일생 동안 예수 믿어도 하나님 만나보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5장 8절에 있습니다.

‘양심 안 쓰는 믿음은 파선한 배와 같다.’ 디모데전서 1장 19절에 있습니다.

양심을 안 쓰는 사람의 믿음은 파선한 배와 같애. 배가 파선되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다 손해만 가지. 아무 소용 없어. 파선된 배가 뭐 물건을 싣고 가겠으며 사람을 태워 가지고 가겠소? 이러니까 양심을 쓰지 안한 믿음은 다 헛일입니다.

‘양심을 써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거리낌이 없기를 우리는 힘써야 합니다.’ 사도행전 24장 16절에 말씀했습니다.

‘양심은 죽은 행실을 깨끗하게 함을 받게 합니다.’ 양심을 쓰면 우리 죽은 행실을 양심 쓰는 자에게 성신이 오셔 가지고 죽은 행실을 깨끗게 해 주십니다.

양심 쓰지 안하는 자에게는 성령이 오실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손잡을 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손잡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양심입니다. 양심을 안 쓰고 있는 자에게는 성령이 와서 손을 잡을 수가 없어. 이러기 때문에 거게는 마귀하고 한덩어리기 때문에 하나님은 접선을 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셋째로, 신앙 양심은 어떤 게 신앙 양심이냐? ‘신앙 양심은 자기가 인정하고 확신하는 성경 말씀대로’ 요게 옳다. 요렇게 하는 것이 옳다, 성경 말씀대로 자기가 깨달은 그대로 ‘옳게 바르게 할려는 마음이다.’ 어짜든지 성경 말씀을 깨닫고 그대로 할라고 애를 쓰는 그게 양심입니다. 그 애쓰는 게 없으면 안 된다 그말이오.

‘성경 말씀대로 요대로 살란다.’ 요대로 살라고 또 하다 안 되면 또 넘어지면 또 쓰고 또 쓰고, 성경 말씀대로 살라고 애쓰고 힘쓰는 그게 없는 사람은 양심 생활 안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예수님과는 상관 없습니다. 구원에는 상관도 없고 축복도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순 강도같은 흉측한 욕심이 들어서 하나님의 축복받을라고 뭐 산에 가 암만 기도해도 소용 없어. 양심 안 쓰는 자의 기도는 하나님이 듣지 안하십니다.

그러기에 “네 양심에 가책될 것이 없어야” 네 양심이 ‘이거 틀렸다.’ 양심에게 꾸지람받을 것이, 양심에게 책망받을 것이 없어야 “하나님 앞에 담대하고 네가 기도하는 것을 다 하나님에게 받을 수 있다” 이랬습니다.

‘양심은 자기에게도’ 양심이라 하는 것은 자유 있는 게 양심입니다. `양심은 자기에게도’ 자기에게도 매이면 안 됩니다. 양심이 자기 위주로 자기 편이 돼 가지고 자기 좋도록 판단하면 그 양심은 자기라는 화인을 맞았기 때문에 자기의 종이 됐지 그 양심이 자유하지 못하는 양심입니다. 양심은 어데든지 매이면 안 됩니다.

양심은 자타가 없어. 자기나 남이나, 그저 말씀대로 바로 할라 하는 그게 양심인데 양심이 벌써 자기에게 사정 두고 자기 유리하도록, 자기 편이 되어 날뛰면 그 양심은 자기라는 화인을 맞아서 양심의 주인이 자기가 됐습니다. 양심의 주인이 자기가 되면 안 됩니다.

‘어떤 피조물에게라도’ 그러면 왕이든지, 뭐 이거 무슨 자연이든지, 이 모든 세계의 큰 징조의 환난이든지 그런 게 온다고 해 가지고 거게 속해서 그대로에 판단하면 양심이 아니라 말이오. ‘죽든지 살든지 꼭 하나님과 진리대로만 판단해 가지고 하는 것이 그게 양심입니다.’ 그게 신자 양심이오.

‘속하지 않고 오직 진리와 하나님에게만 속하여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하려고만 하는 마음이 양심이요’ 그게 양심입니다. ‘양심이요 하나님과 진리 외에 무엇에게나 속하여 그것 편이 되어’ 그것 편이 되어 ‘비판 결정하는 것은 화인맞은 양심이다.' 화인맞은 양심이다. 양심은 사가 없는 양심입니다.

‘양심이다.’ ‘양심을 가꾸고 길러야 한다’ 양심을 가꾼다 말은, 양심을 가꾼다 말은 매사에 양심대로 할라고, 양심이 뭐? 매사에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옳고 바른 그대로 할라고 자꾸 해서 하고 ‘옳고 바르게 할라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옳게 바르게 할라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옳고 바르게 하는 것을 찾는 사람은 양심을 찾는 사람입니다. 그 양심을 대우하는 사람이오.

양심을 기르는 건 어떤 게 기르는 것이냐? 양심을 기르는 것은, 양심을 찾는 것은 옳고 바르게 할라고 애를 쓰는 그 사람은 양심을 찾는 사람이고 양심을 기르는 사람은 옳다 바르다 생각되면 자기에게 어떤 큰 불행이 닥쳐도 꼭 옳다 바르다 하면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한번 실행하면 그만치 양심이 자랐습니다. 두 번 실행하면 그만치 자랐습니다. 이러면 양심이 점점 권세가 있어서 마지막에는 그 사람이 양심에 가책되는 일은 죽었으면 죽었지 못 합니다.

기독자들이, 왜? 누구든지 다 살고 싶고 환난에 누가 겁 안 낼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러나, 자기 양심에 이게 옳다고 생각할 때는 죽음을 뿍뿍 찾아가고 죽어도 그 자리를 피할 수가 없어, 양심에.

이러기 때문에 6  5 환난 같은 때 인민군들이 그래도 그만 그 강단 냅두고 다 도망 다 가 버렸는데 그 강단에서 양떼를 두고, 성경에 “이리가 오는 것 보고 양을 두고 달아나는 것은 삯꾼이요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렸다” 했기 때문에 교인과  같이 죽으면 같이 죽고 같이 살면 살지 교인들 냅두고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갈 수가 없다 말이요, 성경에 그래 깨달았으니까.

깨달았으니 그대로 하면은 양심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때 그런 줄 알기는 알지마는 죽음이 두렵고 죽기가 두렵고 생명이 아까와서 만일 그대로 행하지 못하면 그 양심이 무슨 양심입니까? 무슨 양심이요? 무슨 화인 맞았습니까? 생명의 애착욕, 생명 욕심에 화인맞아서 제 양심은 벌써 생명의 양심이 됐다 말이오. 생명의 양심이 됐기 때문에 그 양심은 죽은 양심입니다.

‘뜻대로 바로 할려고만 하는 마음이 양심이요 하나님과 진리 외에 무엇에게나 속하여 그것의 편이 되어’ 그것의 편이 되어, 그 편이 되어, 그것의 것이 되어 ‘비판하고 결정하는 것은 화인맞은 양심이다.’ ‘화인맞은 양심이다.' ‘양심을 가꾸고’ 양심을 가꾸는 것은 자꾸 양심을 등용한다 말이요, 양심을 가꾼다 말은 양심을 자꾸 등용해. ‘양심으로 한번 생각해 보자. 이 양심을 생각해 보자. 양심 이 어떻게 하면 되느냐?’ 자꾸 양심이 세월이 납니다. 뭐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양심을 자꾸 찾아 가지고 ‘양심 양심, 양심 네가 좀 판단해 주십시오.’ 양심을 자꾸 찾고 이라면은 그게 양심을 가꾸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심이 말하면, 옆에 사람이 있다가 ‘야, 그거 양심에 거리끼지 않느냐?’ ‘에이, 양심이고 뭐이고.' 이렇게 하는 자는 양심을 짓밟아 처넣는 거라 말이오.

‘양심을 가꾸고 양심을 기르는 것’ 기르는 것은 양심대로 하면 자랍니다.

가꾸는 것은 양심을 찾아서 양심에게 묻고 양심을 앞에 선봉장으로 내세워 가지고 양심에게 모든 일을 주권을 맡기는 것이 양심을 가꾸는 것이고 기르는 것은 양심대로 행하면 한층 그 양심이 커졌습니다.

‘길러야 한다. 예수님의 대속을 입게 하는 것은 양심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이 있지마는 기본으로서 영은 우리가 입어 가지고 있지마는, 영은 입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늘나라 가지마는 이 심신은 예수님의 대속을 입고 살아야 이 대속이 자기 것이 되는 것인데 양심을 안 쓰는 사람은 이 대속을 못 입습니다.

대속 입을라면 감감합니다. 대속 입지 안하고, 양심 안 쓰는 사람은 마귀를 입고 사는데, 마귀 입고 사는데 마귀 입고 사는 줄도 모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양심을 가꾸지 안한 사람은, 양심을 기르지 안한 사람은 예수님의 대속을 입을 수가 없습니다. 양심 이것이 들어서 예수님의 대속을 우리에게 입혀 주고 합니다.

이 사람을 가리켜서 “두루마기를 빠는 자가 복이 있도다” 두루마기를 빠는 자가 복이 있도다 그말이 뭐이냐? 예수님의 대속을 입었는데 더럽혔다 말이오.

더럽혔으면 예수님의 대속을 깨끗하게 대속을 틀림없이 확실히 확고히 입는 그것이 두루마기 빠는 것입니다.

이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말씀하시기를 “네가 스스로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 하나 네 가난한 것과 가련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하는도다. 네가 내게서 연단한 금을 사 가지고 부요하게 하고 또 안약 발라서 눈을 밝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흰옷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그러면 흰옷을 사서 입히기를 누가 사서 입힙니까? 흰옷을 누가 사서 입힙니까? 흰옷을 누가 사서 입힙니까? 신앙 양심이 사서 입힙니다. 알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마지막에 ‘양심을 가꾸고 길러야 한다. 예수님의 대속을 입게 하는 것은 양심이다.’ 양심이 입혀 줍니다. 양심 버린 자는 예수님의 대속을 보지도 못하고, 말만 하지 보지도 못합니다. 가까이 가지도 못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양심을 길러야 예수님의 대속을 입고 벗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 있을 때에 모든 교인들이 울면서 예루살렘에 가면 죽을 터이니까 지금 가지 말라고 이라니까 바울이 대답하기를, 사도행전 20장에. “내가 마음에 볼끈 매여 가지고 꼼짝 못한다. 내가 마음에 매인바 되어 예루살렘을 안 가고는 못 견디겠다.” 바울의 양심을 말한 겁니다. 양심에 뽈끈 매여 죽을 지경이라도 양심이 가야 된다 하니까 가야 된다 그말이오.

이렇게 양심을 평소에 장성하게 길러 놔야 되는 것이지, 그러기 때문에 다 왜정 말년에나 6  5 때나 지금도 그 양심을 길러 놓은 사람은 자기가 손해갈까 어짤까가 아니라 양심에 가책돼 못하는 것이지 인간이 두려워 못하는 게 아니고 양심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양심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양심을 기르지 안 하는 자는 자기 구원은 다 허사입니다.

이래서 문답에 ‘양심의 종류가 어떠하뇨?’ `심히 많습니다.’ 그말은 무슨 말이요? 양심의 종류가 많다는 걸, 종류가 많다는 걸, 이거 큰 말입니다. 양심의 종류가 많다. 종류가 많다, 수없이 종류가 많다. 이것도 이게 세상에 없는 말이오.

‘많다’ 그러면 ‘신자의 양심은 어떤 것이뇨?’ 신자의 양심은 ‘성경 보고 깨달아서 그대로 할라고 하는 그것이 양심이요’ 할라고 하는 그걸 죽이면 양심을 죽인 것이요, 할라고 해 가지고 했으면 양심을 길러서 양심이 그만치 커졌습니다.

또 ‘화인맞은 양심은 무엇이뇨?’ 화인맞은 양심은 벌써 양심이 자유하지 못하고, 자기가 죽어도 옳은 건 옳다 아닌 건 아니라 이라면 그 사람 양심이 살았는데 양심이 자기에게 매였든지, 죽기 싫어서 생명의 애착욕에 매였든지, 권세에 매였든지, 사람에게 매였든지, 어데 매였든지 하면 그 양심은 화인맞았기 때문에 양심은 자유하는 양심이 아니고 산 양심이 아니고 어떤 것에 소유가 되어 가지고 있는 양심이기 때문에 아무짝도 못쓰는 양심이라 그말이오. 화인맞은 양심이라는 것을 이것을 단단히 기억해야 됩니다.

그러면 6  5 때 같은 때도 자기가 번연히 그 양떼들하고 같이 생명을 같이 하고 그래도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 섬기는 게 옳지마는 원청 그 사람들이 거석해서 잡아 죽일라 하니까 생명이 아까와서 양심을 버리고 가책을 받으면서도 도망쳤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 양심이 죽었다 말이오. 화인을 맞아버렸어. 그러면 그때 그걸 지키면 양심이 자라요.

‘화인맞은 양심이 무엇이뇨?’ `피조물에게 매여' `피조물에게 매여’ 사람이나 물질이나 뭐 자연이나 모든 것에 매여, 만일 뭐 뇌성벽력이 난다든지 또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셔서 모든 게 불탄다든지 할 그때에 타기 때문에 자기 양심에 옳은 것을 이게 그만 급해 놓으니까 할 수 없다 하면은 예수님의 재림에 화인을 맞아버렸어. 재림에도 화인맞으면 안 돼. 어데서든지 자유해야 됩니다. ‘매여 자유하지 못하는 양심이 화인맞은 양심입니다.’ 넷째로, ‘양심 생활 안 하면 행위구원은 어떠하뇨?’ ‘회개할 때까지 전부 허사에 머물고 있습니다.’ 요거 잘 아십시오.

온 전체가 하나님의 뜻대로 의를 행했습니다. 온 전체가 의를 행해서 전체가 다 천국 가고 지옥 가지 안하고 천국 다 갈 수 있도록 온 전체가 다 그렇게 의를 행해 놨는데 손가락 요거 하나가 죄를 지었어. 손가락 요게 하나 죄를 지었어.

그러면 손가락 요거 하나 죄지은 걸 요걸 회개하면 되는데 회개 안 하면은, 회개 안 하면은 손가락 요게 하나 장 죄를 짓고 하는 그것 때문에 아무리 다른 거 온전한 게 돼도 요게 미결입니다. 다 미결로 돼 가지고 있어, 요거 때문에. 손가락 요거 때문에 미결돼 가지고 있어.

이럴 때는 네가 손가락을 가지고 회개하지 못하거든 손가락 끊어버려라. 끊고, 끊어버리면 요놈이 죄지은 거 요거 끊어버리니까 죄 안 지으니까 인제 다른 것도 깨끗해 가지고 간다.

그러나 손가락을 끊기 전까지는 네가 아무리 의를 많이 했어도 요거는 그때까지 미결로 지금 모두가 다 허사에 붙들려 매여 가지고 있다. 매여 가지고 미결로 지금 매여 있다. 매여 가지고 있다가 요걸 끊지 안하고 그대로 그만 세상 떠버렸으면 그만 다 지옥 갔어. 행위구원은 다 지옥 가 버립니다.

그러면 나중에 요걸 죽기 전에 회개를 하면은 그때사 나머지기가 그게 등용이 돼지지마는 사람이 회개 뭐 ‘죽을 때 하면 되지’ 그게 회개를 제게 권리 있다고 생각하면 그게 참람입니다. 회개는 꼭 하나님이 시켜 줘야 되지 시켜 주지 안하면 안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오늘은 회개 안 하고 그때 급할 때 그때 회개해도 안 되겠느냐?’ 그자는 벌써 회개가 제게 매였다 하기 때문에 참람된 자요 가증된 자요 그게 벌써 하나님이 저주했기 때문에 제가 그런 망령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 마지막에 죽을 때 회개 못 하고 죽는다 그말이오. 그라면 기본구원은 얻어서 영은 하늘나라 가고 이 마음과 몸의 형체는 가지마는 속에 기능은 못 가. 기능은 다.

여러분들 기능이라 하는 거 다 알지요? 다 같은 눈이지마는 눈의 기능이 각각 달라. 눈의 기능이 달라서 나는 영어 보는 기능은 없어요. 이래 놓으니까 영어를 뭐 죽인다 해도 그거 봐야 아무것도 몰라요. 하나도 몰라요. 기능이 없어. 다 같은 눈인데 영어 아는 기능은 그거 보면 다 알거든. 그게 기능이라 말이오.

또 다른 사람은 이 성경 암만 봐야 모르는데 나는 또 성경 보면 알거든. 그건 성경 보는 또 기능은 있는데 다른 사람은 성경 보는 또 기능은 없다 그말이오.

그게 기능이오.

이제 사람의 가치는, 사람의 가치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의 가치는 기능 가치입니다. 알겠습니까? 다 같은 사람인데 기능도 하나 없으면은 그건 짐승만도 못해. 기능 없는 그 사람, 기능이 아무것도 없으면 그 사람을 누가 가치로 봅니까? 동정해서 구제한다 하지마는 그것도 소용 없는 것이고.

다 같은 사람인데, 일행 있는데 기능을 따라서 그 사람을 천층 만층 구만층이라고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기능 평가라 그말이오. 그러면 이다음에 하늘나라 가기는 가 있지마는 기능을 가져가고 못 가져가고 기능의 차이가 그것이 하늘나라의 영광의 차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을 안 쓰는 사람은 모든 이루어 놓은 구원이 다 미결입니다.

여게 천막에 대한 이거 전부 구역장들 다 받았습니까? 구역장 쳐놓고 안 받은 분 이거, 천막에 대한 규정입니다. 우리가 천막에 대한 이 규정을 말해 놨는데 천막에 대한 규정 이거 규정서를 안 받은 구역장 한번 손 들어 보십시오. 안 받은 구역장, 이거 안 받은 구역장. 안 받은 구역장은 나갈 때 이거 받아 가지고 가십시오.

읽어보고 함부래 미리부터 범죄함이 있거들랑은 회개를 하십시오. 나중에 이제 조사를 할 겁니다. 조사해 가지고 그때 걸리면 집회 가운데서 치리할 겁니다.

치리해. ‘이 사람은 거짓말 하고 이렇게 했다.’ 그래 치리해서 요번에 꼭 고쳐 요번에 꼭 뿌리를 꼭 뽑을 겁니다.

오늘도 뭐 대구에서 전화가 많이 왔습니다. 와 가지고 천막 때문에 이렇고 저렇고 하는데 이제 모두 다 하나씩 둘씩 모두 게워 내놓는, 게워도 내놓고 모두 다 이렇게 해서 지금 어서 다 고쳐버리면 일 없어. 고치면 일 없고 안 고치면 그때 가서 큰 우사당하지 말고.

오늘도 전화가 왔어요. ‘지금 이 천막 이거 자리가 남의 천막을 지금 점령했는데 이 지금 뜯으면 그 밑에 지금 본 대지가 그게 석축해 놓은 게 나오는데 이걸 지금 뜯으랍니까 어짜랍니까?’ 나한테 물어. 우리 서부교인이라.

‘뜯으랍니까 어짜랍니까?’ 그래 내가 있다가 ‘뜯지 마라’ 하지 안하고 ‘그러면 뜯어 가지고 똑똑히 거석해서 틀렸거들랑 코가 납작하도록 못을 쳐 가지고,못을 때려 쳐 가지고 못 대가리를 말이요, 꺼꾸로 굽혀 가지고 꺼꾸로 콱 뚜드려 박으면 못 대가리가 폭 들어갑니다.요렇게 탁 꺾어서 그렇게 하도록 하라. 어짜든지 뭐 우리 교인이고 뭐 내라도 잘못했으면 그렇게 해라. 요번에는 그 잘못된 모두 거짓말 하는 것을 다 뿌리를 뽑자.’ 내가 그리 대답했어.

함부래 미리 알아서, 미리 알고 그 일 닥치기 전에 얼른 가서 그만 그라기 전에 가서 고칠 거 고치고 다 내놓을 거 내놓고, , 터가 모자라면 주최측에 ‘나는 지금 새로 터를 신기를 몇 개 해야 되겠는데 그 어데다 하면 좋겠습니까?’ 그래 가지고 가까운 데 ‘여게 누가 합니까?' 아무도 안 하고 빈터 있으면 ‘여기 빈터니까 내가 할 수 있습니까?’ 하라 하면 돼.

그래 가지고 하고 요번에 꼭 걸려 가지고 이제 백 목사 낯 뜨거운 꼴 보이지 말고 백 목사 그 사람들한테 비쭉거리는 꼴 보이지 말고, 벌써 내가 총을 많이 맞았어. ‘서부교회 교인들이 서부교회 교인들이’ 서부교회 교인이 그래 가지고 내가 지금 욕을 많이 얻어먹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아예 가만히 생각해서 내가 안 친 거는, 또 한 평짜리 있으면 한 평짜리 해야 되고, 큰 거는 안 되니까. 그만했으면 그 옆에 사람한테 양보 얻어 가지고 그래 하고 아예 억설은 지금 그 뿌리를 뽑아야 돼요. 억지 그거 냅두면 안 돼요.

그러니까 함부래 미리 다 고쳐서 가면 말썽 없이 그래 하도록 합시다.

이 마귀란 놈이 엔간히 수입 봐. 집회 가면은 천막 터 가지고, 뭐 그때는 이성을 잃으니까. 싫컷 싸우고 이래 가지고 다 속에 마귀가 가뜩 차 가지고 서로 ‘저 누구 누구’ 서로 미워하면 살인하는 자니까 그 속에 영생이 없다 했는데 이런 시비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 앉았기만 앉았지 그 은혜는 하나도 못 받습니다.

마귀 이놈이 요 수입을 봤기 때문에 집회 때마다 천막 장소 가지고 우리 구원을 다 깨뜨려. 이러니까 올해는 꼭 뿌리를 뽑아야 되겠어요. 어짜든지 깨끗이 해서 그런 게 걸리지 않도록 합시다.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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