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을 써 자기 진리를 찾아라

 

1988. 4. 1. 금새벽

 

본문 : 사도행전 12장 1절-10절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애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 나와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여기 본문에는 유대인들이라 했는데 이 유대인들이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유대교는 어떤 게 유대교인고 하니 구약 시대의 모든 교인들이 다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말로 말하면 육체와  이스라엘들입니다.

 또, 그다음에 보면 “손을 들어 교회 중” 하는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하는 교회 중 몇 사람이라는 이  교회는 신약 교회 곧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교회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구약 교회와 신약 교회는, 구약 교회를 육체의 이스라엘이라  하고 신약 교회를 신령한 이스라엘이라 이렇게 구별하는데 그러면 육체의  이스라엘과 신령한 이스라엘이 근본이 다른가? 근본은 같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이 대속을 미래에 두고 대속을 하나님이 하나의 예표로  약속하셔서 우리에게 대속을 입도록 한 것은 짐승을 제물로 삼아 가지고 대속을  받도륵 그렇게 하셨고 또 신령한 이스라엘은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의 대속을  완성하신 그 과거의 예수님의 대속을 믿고 나가는 것이 그것이 신약 교회라고 할  수 있고 신령한 이스라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신령한 이스라엘이나 육체의 이스라엘이나 다 예수님의 대형, 대행,  대화친의 이 대속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 것은 꼭 같습니다. 그런데  구약은 아직까지 예수님이 이렇게 실상의 대속을 베푸시기 전인데 하나님께서  짐승을 예수님의 이 대형으로 하나 예표의 약속으로 이렇게 선포하시고 짐승을  잡아서 죄를 대형 대속하도록 그렇게 하나의 예표로 미리 표로 가지고서 이렇게  하나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짐승의 피로 가지고서 죄사함 받는 이  속죄제. 속죄제는 죄 속함을 받는 것을 속죄제라고 말하고, 속건제라는 것은 죄  증에도 허물이라고 할 수 있는 작은 죄 그런 죄를 사함받는 것을 속건제라고  하고, 또 서로 화목하도록 하기 위해서 불목한 것을 사함받는 것을 가리켜서  화목제라고 하고, 또 자기는 이제는 온전히 주님에게 바쳐 사는 것을 표시해서  번제로 이렇게 드려서 했습니다.

 그랬으나 그들이 아직도 죄 사함받는 것이 완성을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예약을  지키기 때문에 소망 중에 있었습니다. 있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 그때에 휘장이 열렸습니다. 휘장이 열린 것은 이제까지는 하나님께서  성소라 지성소라 이 성전을 만들어 놓고 지성소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성소에는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그 밖에서 하나님으로 더불어 이렇게 교제하고  제사하는 그런 형식을 가졌는데 그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짐승의 피를  가지고 라야 들어가지 들어가지 못했었습니다.

 이랬는데, 지성소에 하나님이 계시고 또 그 밑에는 모세의 율법이 거기에  있었고 아론의 지팡이도 있고 이랬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그때에 그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갈라졌습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는 이  휘장이 다시 쳐지지를 안했고 외식하는 사람들이 그 뒤에 쳤을지라도 하나님과  그 사이에 휘장은 갈라졌습니다. 이래서 성경 히브리서에 보면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은 이 생명길이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러다가, 하나님과 그 죄인 사이가 가로막힌 죄의 담이 절단 난 그것을  표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 못 박히실 때에 사람이 손대지 않고 휘장이  갈라졌습니다.

 또,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에 무덤이 열리고 자던 성인들이 많이 무덤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이것으로서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모든 우리 인간의 죽을 것을  대표해서 대신해서 죽으셨고, 그 죽음을 이기시고 삼 일 만에 부활하실 때에  그때에 구약 성도들이, 범죄자가 죗값으로 죽고 또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죄  사함을 받고 다시 중생하는, 영생하는 그 생명을 받는 이 구원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에 무덤이 열리고 자던 성인들이 다 일어나는  것으로서 이제 인생에게 영생하는 새생명으로 중생하는 은해가 완성됐다 하는  표시로서 오래 전에 죽은 그 성인들이 무덤 속에서 나왔습니다. 나와 가지고서  예수님이 부활하셔 가지고선 무덤에서 나오셨을 때에 일어난 성인들도 다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나와 가지고서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으로써 예수님의  부활로 그들의 소망하는 부활이 완성됐고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와서  행보하심으로 그들은 완전히 사망에서 부활해 가지고서 이제는 행동할 수 있는  것이 시발된 것을 표시했습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 그 성인들은 다시 무덤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다 완전한 부활의 중생의 생명은 얻었고 활동하는 벌써 그 시기는  지나갔기 때문에 무덤으로 다시 들어가서 있으나 육체는 들어가서 있지마는 그  영과 또 그 마음은 다 낙원으로 그 시로 즉시 옮겨갔습니다.

 이래서 구약 시대에 있는 성도들이 그 낙원으로 가 가지고 이제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됐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시면 그다음에 육체의 부활 받아 가지고 영원토록 영육이 영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유대인들은 구약 교회를 말하고 교회는 신약 교회를 가리켜서  말하는데 여기에 기록한 유대인들은 이 유대인들이 타락을 해서 이렇게 변질이  됐습니다. 변질이 됐으나 다 변질된 것은 아니고 변질되지 안한 사람들도 있고  변질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변질 안 된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셨을 때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다 영접했고 만나면 다 알았습니다.

 이래서 목자들도 구약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지마는 타락하지 안하고 변질되지  안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모셨습니다. 또 동방박사들도 예수님을  자기의 구주로 오셨습니다. 또 평신도들도 그 시므온이나 안나나 또  나다나엘이나 그런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모시게 됐습니다.

 외식 신자들은 예수님을 껍데기로는 바란다고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지켰지마는 그들은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전에 예수님을 만나지를  못했습니다. 탄생하시기 전에 예수님을 만나지를 못했습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예수님께서 참 이는 이스라엘이라 했습니다.

간사함이 없다 해서 이스라엘이라고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이  ‘나를 언제 보셨기 때문에 그렇게 나를 그렇게 아십니까?’ 이라니까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밑에서 보았다’ 그는 무화과나무 밑은 자기 기도 장소로 정해  놓고 항상 거기에서 기도했을 때에 자기가 진심으로 양심을 가지고서 영감을  만나서 기도했습니다.

 영감 만나서 기도했는데 그때에 그는 자기 양심 속에 성령이 계셔서 이  성령으로 더불어 교제가 되는 그런 산 기도를 했었는데 그렇게만 하나님이 계신  즐 알았지 그 하나님께서 사람되어 가지고서 오셔서 나타날 줄은 몰랐습니다.

 몰랐으나 예수님은, 내가 너를 그때에 무화과나무 밑에서 봤다 하는 것은  예수님이 사람되어 오시기 전일 수도 있고 나다나엘이 만일 예수님보다 나이가  많다고 하면 전일 것이고 또 그 후일 수도 있으나 예수님이 육체를 가지고서  지금 공생활을 할라고 복음 사역에 나타나시기 전에는 하나의 목수의 아들로서  나사렛에서 거기에서 그저 야고보의 맏형으로서 다 마리아의 아들이요 아버지는  목수로만 알고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해서 나신 것은 사람들이  모릅니다.

 모르나, 나다나엘이 그렇게 하나님께 대해서 기도할 때에 나다나엘이 만나던 그  영감, 만나던 그 성령은 곧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때 봤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기도 가운데에 영감으로 메시야를 접하는 그 메시야가  이제는 형체를 가지고 나라나셨으니까 나다나엘은 모르지마는 주님은 아셔서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밑에서 보았다’ 이겼을 때에 그때에 나다나엘이 그  말을 듣고 보니까 무화과나무 밑에서 자기가 기도할 때에 교제하고 있던 섬기던  내나 그 주님인 것을 자기가 깨달았습니다. 깨닫고 그때부터 즉시 믿는 사람이  됐습니다.

 또, 시므온이니 안나니 하는 그런 사람들은 아주 나이가 많은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은 성전에서 그저 늘 기도만 하고 있었습니다. 메시야를 바라보고  기도하고 이렇게 있으면서 그 구원을 소망하고 기도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을 낳아  가지고 강보에 싸 가지고, 결례의 날이 차서 하나님의 법도대로 결례를 행하려고  이제 예수님을 데리고 성전에 갔습니다. 성전에 갔을 때에 그때에 그 시므온이  예수님을 데리고 오는 것을 보고 아듬고 자기의 메시야요 구주라는 것을 찬양  하면서 그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분이 ‘내가 메시야를 만나기 전에는  죽지 않겠다’ 그렇게 선포들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알게 그렇게 선포하고,  또, 안나라 하는 사람은 내치 항상 성전에서 밤낮 기도했습니다. 돌아가지도  안하고 성전에서 밤낮 기도했었는데 결례의 날이 차서 예수님이 오시니까  메시야임을 자기가 깨닫고 찬양을 하면서 이제는 내가 세상을 떠나도 내 소원은  다 이루어졌다 그렇게 하면서 그들은 떠났습니다.

 또, 마리아같은 사람은 예수님이 잉태하기도 전에 벌써, 메시야로만 소망하고  메시야가 언젠가 오시면 우리를 구원하신다, 우리의 구주는 구세주 메시야가  오실 것이다 이렇게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아는 예수님이  도성인신해서 오시기 전에 알았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네가 지금 아들을 낳을 것이라 이라니까 마리아가  놀라면서 그때에 유대 나라에 그 종교법에는 처녀가 아이를 낳으면 사형을  시키되 그저 시키지 안하고 먼 데 들판 가운데에 세워 놓고 돌을 던져서 투석  매장을 시켜 가지고서 사형을 시키면 돌무더기가 커다랗게 됩니다.

 그 돌무더기가 되면 그 돌무더기는 사람들이 손 안 댑니다. 더럽다고 손을 대지  않습니다. 이래서 칼로 죽이면 가까이 묻기 때문에 먼 데서 들을 던져서 죽이는  그런 아주 참 모욕스러운 그런 사형이었습니다.

 이랬는데 그라고 나면은 거기다 이름을 붙여서 ‘이것은 어느 족속 누구의 아들  누구의 딸이 이렇게 무슨 죄로 이렇게 됐다’ 하는 것을 거기다가 써서 붙이기  때문에 그것이 유대인으로서는 환하게 다 압니다. 이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지나가면 거기 가서 돌을 한 개씩 던지고 침을 뱉고 그래 지나갑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일이 있습니다. 서낭이라고 서낭에 갈 때에는 돌무더기가  있는데 그 돌무더기는 가면서 다 침을 세 번씩 뱉고 또 돌을 한 개씩 던지고  그래 가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서낭에 돌 던져본 사람 있어요? 손들어 봐.

서낭에 돌 던져본 사람, 아이고, 더러 있네. 내는 아주 모르는 거 아니로구먼.

그런 사형이기 때문에 마리아가 이런 인사가 어데 있느냐 고서 그렇게 천사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나는 지금 남편이 없는 처녀인데 이런 일이 어데 있겠느냐 고서 항의했을 때에  그 천사가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하나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제일이지 네가  죽고 사는 게 문제가 뭐이냐? ’ 하는 것을 천사가 말할 때에 그때에 또  말하기를 ‘네가 알다시피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은 수태를 해 보지도 못한 그  여인이 벌써 노인이 됐는데 아이가 배어 가지고서 지금 육 개월이 됐다. 이게  증거다. 가 봐라.’ 그래 그때 가서 마리아가 그 소리를 듣고서 말하기를 ‘주의  계집종이오니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라고 그때 순종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도성인신 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난 자가 누군고 하니 마리아가  제일 먼저 만났고 또 두 번째로 만난 사람은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이 두  번째로 만났습니다.

 이래서, 마리아가 자기가 그 허락을 하고서 ‘지극히 크신 하나님이 너를  덮으시리니 네가 낳은 것이 사람이 아니고 성령으로 잉태해서 하나님으로  잉태한,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를 낳을 것이라.’ 이 계시를 듣고서  그가 이제 엘리사벳 집에 갔습니다. 갔는데, 그때 엘리사벳 집에 가니까  엘리사벳이 찬양을 하고 성령에 충만해 가지고서 예언을 하면서 이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고 모든 피조물을 구원할 이 구세주가 오셨으니 곧 우리의  메시야가 오셨다 이라면서 말하기를 내 속에 있는 육 개월 된 - 세례요한인데 -  육 개월 되는 그 뱃속에 있는 세례요한이가 뱃속에서 기뻐 뛰노는 것을 내가  보고 있다.

 육 개월이면 아이가 많이 뛰어놉니까? 움직입니까? 쪼매 움직여 요? 네. 그런데  ‘내 속에서 지금 이 메시야가 옴을 인해 가지고서 기뻐 뛰놀고 있다’ 이래서  여섯 달 만에 메시야를 영접했습니다. 그러면 둘째로 엘리사벳이 영접했고  셋째로는 세례요한이가 영접했습니다. 이래서, 이것을 근거해 가지고서  유아세례를 주는데 유아세례 주는 그것은 성경에 유아세례 주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것도 인본주의자들이 조작배기로 그 사람을 붙들기 위한 전도의  방편으로 썼지 그거 성경적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집회할 때에 어린 아이들도 데리고 오라 하는 그 말은 왜 하느냐  하면은 아이들은 못 오게 하지 안하고 우리 서부교회는 어린 아이들도 어짜든지  될 수 있는 대로, 주일학교 다니는 거는 주일학교 다니고 그렇지 않은 것은  데리고 오라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것도 오면 성령을 받을 수가 있고 진리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제가 그런 것을 많이 봤습니다. 젖 먹는 아이인데 한두 살 서너 살 먹는  아이인데 그 아이가 집회에 와 가지고는 그 아프던 아이가 아프지도 안하고 울던  아이가 울지도 안하고 조용하고 그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예배를 드리면  즐거워하기를 어른들보다 즐거워하는 그런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  아이에게 분명히 성령이 충만히 와 가 지고서 그 생명의 도를 듣고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도 데리고 오면, 어린 아이 그게 뭐인가 어린 아이 그게 뭐  알아들을 것인가 하지마는 말을 못 알아듣고 해도 성령의 감화는 받습니다. 또  뱃속에 있어도 주님이 오셨을 때에 영감으로 그가 층만해서 뱃속에서 뛰노는  일을 했습니다.

 이래서, 셋째로는 세례요한이가 만났고 그다음에는 사가랴가 만났고 요셉이는  언제 메시야로 영접했는가 하는 것은 자세히는 없지마는 마리아에게 배가  불룩하게 나왔으니까, 배가 불룩하게 나오면 그 숨 갈라고 해도 숨기지 못할  만치 배가 부른 것은 몇 달 되면 그렇습니까? 육 개월? 육 개월째 되면 그래요?  그렇습니까? 육 개월쯤 되면 표가 나요?  그러니까, 표가 나기 전에는 요셉이는 맞이하지를 못했습니다. 표가 나고 난  다음에는 자기는, 이거 내가 약혼한 이 아내가 지금 이렇게 임신이 됐으니 아마  이거 부정한 임신이니까 내가 그거 임신했다고 내가 사랑하는 약혼자가 나와는  관계를 하지 안했는데 잉태됐으니 이것을 발표하면 돌쪼산으로 투석 사형을 시킬  것이고 하니까 그는 의로운 사람이라 가만히 끊고자 했다 이랬습니다.

 가만히 ‘그걸 소문 내지 안하고 그저 서로 그만 어릴 때 그만 이혼만 해  버리면 되지 않는가’ 하고서 가만히 끊고자 했을 때에 그때에 가브리엘 천사가  와 가지고서 ‘마리아 데려오기를 네가 그 무서워하거나 싫어하거나 그렇게 하지  말아라. 그에게 잉태된 것은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너희들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다.’ 이렇게 소식을 전할 때에 그때에 요셉이가 깨닫고 마리아를  모셔다가 마리아 속에 자기 메시야가 계시는 것을 알고 그는 있는 힘을 다  기울여서 봉양을 했습니다. 봉양하고.

탄생하고 난 다음에도 애굽으로 또 피난할 때에 요셉이는 그 마리아에게 대해서  그 메시야의 어머니인 줄 알고 그렇게 충성되게 성의 있게 봉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또 법도가 약혼했기 때문에 그는 부부 생활을 해야 되는  고로 예수님 탄생한 후에 요셉이는 마리아로 더불어 결혼을 하고서 다시 자녀를  낳았습니다.

 이래서, 그때도 구약 종교 말년인 이스라엘 종교 말년에 사람들은 점점  외식화되어서 아주 예수님이 주일날 병신을 고친다고 해서 적이 됐습니다.

이렇게 어찌 됐든간에 이렇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터인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아니하고 이렇게 병 고치는 이런 일을 하니까 이는 하늘에서 온 메시야가  아니다 이는 선지자도 아니다 선지자 같으면 안식일을 잘 지키지 이럴 리가 없다  하고서 그래 가지고서 예수님을 미워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모르고 그 메시야인 줄을 모르고 그랬습니다. 메시야인 줄  모르고 그렇게 했는데 왜 몰랐느냐? 다른 사람은 아는데 왜 몰랐느냐? 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을 껍데기 그 의식과 제도로만 섬기고 하나님의 법도를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얼마나 엄격하게 지켰느냐 하면은 주일날은 닭을 모이를 주지 안 했습니다. 왜  모이 안 줬느냐? 모이를 주면은 모이 주는 것이 혹 튕겨 가 가지고서 한  알이라도 그것이 움이 나면은 종자를 심은 일이 된다 해 가지고서 주지를  안했습니다. 그렇게 아주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엄격하게 지켰지마는 껍데기  의식으로 그렇게 문자적으로만 지켰지 주님을 만나지를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을 만나지를 못했습니다. 영감을 만나지를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감을 만나지를 못해. 영감이 내나, 영감이 성령 감화인데 성령이  누굽니까? 성령이 누구의 영입니까? 그리스도의 영이라. 내나 예수님의  영입니다.

 이래서, 지금 삼위일체론도 이것도 지금 너무 사람들에게 확고하게 이렇게 다  인식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것을 똑 바른 말을 지금 해 주지를  못합니다. 해 주면 그거는 해결하기 어려운 이단이 되기 때문에, 어려운  이단으로 정죄받기 때문에 그거 내비 두지마는 내나 한 하나님이시오. 그런고로,  성령의 본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성령의 본체도 있습니다. 성자의 본체도  있습니다. 성부의 본체도 있습니다. 그러면 본체가 몇입니까? 서이 있는데? 네,  하나입니다. 본체는 성부 본체 성자 본체 성령 본체니까 서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각각 본체를 가졌는데 본체는 하나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거기에서 찾으면 또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래서, 그들은 왜 그 문서를 그렇게 엄격하게 지켰지마는 성령의 찬성을 받지  못했느냐? 우리가 성경 진리를 오늘도 지키고, 지키면 다 되는 게 아니라. 성경  진리만 지키면 그것은 다 믿음이 되는 줄 알아도 믿음이 되지 않습니다. 성경  진리만 지키는 그것이 외식도 될 수 있습니다. 성경 진리를 지키는 데에  외식자가 거기에서부터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지키는 데에 외식은 뭐이 외식이며 진실한 자는 어떤 게 진실한  자냐? 둘이 성경 말씀대로 꼭 같이 지키는데 하나는 진실한 신자가 되고 하나는  외식 신자가 되는 것은 뭘로 구별되느냐? 성경 진리대로 지키는데 한 사람이  지키는 데에는 성령님이 찬성을 합니다. 성령님이 동행을 합니다. ‘네가 진리를  지키는 것은 바로 지킨다’ 동의를 합니다. 동의 동행한다 말이오. 동행합니다.

 동행하는 이것을 가리켜서 요한계시록에는 이마에 인을 친다 이래. 이마에 인을  친다. 성령의, 하나님의 인을 받은 자들은 다 요한계시 9장에 조 7장에도  말하기를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은 사람들은 이 황충이 해를 받지 안하고 인  맞지 안한 사람들만 다 상하라. 푸른 채소나 그런 거는 상우지 말고 인 맞지  않은 사람들을 상우라 요랬으니까 황충이는 푸른 채소 먹고 사는 것인데 푸른  채소는 상하지 말고 하나님의 인 맞지 않는 자를 상우라 했기 때문에 요거는 이  황충이가 아니고 그것은 곧 인간 욕심에서 나오는 옛사람 그놈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라 하는 것을 계시록에서 발견하고서 모두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그들이 왜 하나님의 법도를 그렇게 엄격하게 지켰는데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느냐? 고 이유가 뭐이냐? 그  이유가 뭐인지? 보자, 양성원 학생, 저 어데서 온 학생이지? OO교회서 온  학생인가? OO교회서? 언제 나하고 만 났지?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성경 말씀을  마구 모이 하나라도 떨어지면 거석할까 싶어서 모든 나물 채소 이런 것까지  십일조를 다 드렸습니다. 다 드려서 그렇게 지켰는데 왜 메시야를 메시야로  모르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을까? 왜 그랬을까?  물론 성령의 인정을 못 받아 그렇지요. 네, 맞습니다. 성령의 인정을 못 받아  그렇지요. 성령의 인정을 받지 못해서 그런데 성령의 인정을 왜 받지  못했을까요,저게 OOO교회 조사님? 자기를 부인하지 않기 때문에. OOO 조사님?  하나님 중심으로 하지 안했기 때문에. 또 양성원 학생들 대답해 봐.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렇게 엄격하게 성경 말씀대로 철두철미하게 지켰는데  메시야는 십자가 못 박아 죽이고 그들이 건설구원을 받지 못했는가? 메시야  죽였으니까 건설구원 없어요. 성화구원은 없어요. 왜 그리 없었는가? 왜  그렇지요? 대답해 봐요, 거룩한 행실과 진실이 없었기 때문에? 그거 다  외식이야. 안 돼.

 고다음에. 고 뒤에? 자기 위하는 것으로. 전부 조작배기라, 조작배기. 암만  갖다 들이대도. 고 뒤에? 주님을 잊어버리고 했기 때문에. 저 인제 사 학년이가?  0O0 전도사님? 자기중심으로 했었기 때문에. 참 어렵다. 이거 시험 봐놨으면 다  떨어진다. OOO 조사님? 몰라 이거 참, 여기에? 여기에는? 여반들은. 또?  외식은 외식인데 외식이 뭐인고? 어제 아침에 많이 배웠는데. 왜 그렇지?  영감은, 그렇게, 영감이 없어 그렇지, 뭐. 영감이 없어 그렇지. 영감이 왜  없었느냐 그 말이요? 영감이 없어 그런데 영감이 왜 없었느냐 그거요? 영감이 왜  없었어?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못 만나 그래요. 하나님을 못 만나 그래요.

하나님을 왜 못 만났어요? 하나님을 뭐로 가지고 만난다 했어요? 착한 양심은  하나님을 만납니다. 마음이 정결한 자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외식이라, 외식.

껍데기 의식만 지켰지 자기 착한 양심을 가지고 지키지 안했어. 안팎이 달라.

 양심 없이 자기 속에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지켜 살까’ 하는 자기 속에  가책 없이 하나님 말씀대로 진실되게 지키지 안하고 속에 마음은 얼마든지  하면서 껍데기 의식은 지킬 수 있습니다. 속에 사람을 미워하는 미움은 누구든지  미워하는 사람 한 사람 두 사람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든지 설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 양심에 나는 지금 누구를 사랑치 못하고 미워하고 있으면서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은 내가  사랑을 가지지 못하고 미움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랑을 말하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 말씀을 거짓부리로 증거하기 때문에 이거는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운  것이요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요 무시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귀머거리로 알고  하나님을 소경으로 아는 것이다 해서 자기가 그거 가지면 그 사랑을 말할 수가  없는 거라. 양심에 가책되는 것을 말할 수가 없는 거라.

 양심과 동행하는 사람이 그다음에는 성령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이래서  가르치기를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하나님을 향해서  찾아가는 것은 착한 양심이 찾아가지 양심을 내비 두고는 성경 말씀 암만  지켜봤자 그것은 가리켜서 양심 없이 성경 말씀 지키는 자를 가리켜서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라 이랬어. 율법 아래 있는 사람.

양심대로 지키는 사람이 그 사람이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은 누군데? 거기에 하나님은 누군데? 성령을 가리켜 말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요. 하나님 만나 가지고서 이제 지킬 때에 그것이 믿음이 되는 것 입니다.

그것이 믿음이 되는 것이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그것이 이제 예수님의  대속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모든 지식이 다 많은데 모든 지식을 다 이렇게 헤치고,  ‘좁은 문이라’ 좁은 문이라는 것은 모든 지식을 헤치고, 오든 지식을 다  헤치면 그 속에 뭐 남았어요? 하나님의 지식이 남았어요.

 그러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지식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지식만을 잡은 사람이  지식적으로 좁은 문을 잡은 사람입니다. 또, 그거는 좁은 문이면 인제 다냐?  그것도 넓어서 못 들어가요. 이런데 하나님의 지식 속에서 무엇을 무슨 진리를  찾아야 됩니까? 저 O 선생. 몰라? 이거 다 가르쳐야 장 못 알아들으니까 뭐 하는  건지?  하나님의 지식을 이렇게 자기가 이제 넓은 지식 속에서 하나님의 지식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진리입니다. 진리에서 이제 또 좁은 걸 찾아야 돼.

진리 속에 알맹이가 있기 때문에 진리 속에 알맹이를 또 찾아야 됩니다. 진리  속에 알맹이를 찾아야 되는데 그 알맹이 찾는 기능은 뭐 입니까? 알맹이를 찾는  기능은 뭐이요? 양심이오. 알맹이를 찾는 기능은 양심이라.

 양심을 쓰지 안하는 인간은, 양심을 쓰지 안하고 양심은 양심대로 내비 두고  이렇게 지식만 가지는 그자는 교만한 것만 가졌기 때문에 그 사람은 점점  교만해져서 나쁜 자 되지 안 되는 것입니다. 꼭 양심 안 쓰면 헛일이오. 양심 안  쓰면 성령은 근방에 가지도 못합니다.

 이래 가지고서 양심을 쓰면, 양심을 쓰면 무엇을 찾습니까? 양심을 쓰면 뭘  찾습니까? 예? 자꾸 그리 뛰어 건너가지 말고. 양심을 쓰면 많은 성경 가운데에  내가 지킬 내 진리가 있습니다. 요 시간에는 내가 어떻게 해야 된다는 자기가  지킬 자기 지식을 고걸, 자기 진리, 고게 자기 진리요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요 고대로 행하는 걸 가리켜서 겨자씨 믿음이라 했습니다.

 고대로 순종하는 걸 가리켜서 겨자씨 믿음이라 이래. 겨자씨 믿음은 만능이라.

하나님이 자기에 대한 뜻을 딱 바로 가르쳤을 때에 고 뜻대로 하는 것이야  하나님과 동행인데 무엇이 방해하겠소?  그래 가지고서 자기 진리를 찾았을 때에 하나님께서 찬성을 해서 동행을  합니다. 동행합니다. 고래야 고게 믿음이 되는 것이오.

 그런데, 또 믿음도 껍데기 믿음에서 차차 차차 거기에서 껍데기를 자꾸  추려냅니다. 껍데기를 자꾸 추려내고 제일 알맹이 진짜 믿음이 될 때에는  하나님과 자기와 동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자기 뜻으로 삼는 그것이 비로소  그것이 자기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누가 그래 말하더라? ‘목사님의 표어인 요한복음 l5장 7절 네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네 안에 있으면 원하는 대로 구하라 다 이루리라 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자기 뜻이 일치되는 것을 가리켜서 말한다.’하는 것을 그것을  OOO 목사님이 말했나요? 그 사람은 뭘 좀 깨닫고 그러니까 인제 이 깨닫는 바로  깨닫는 거는 좋은데 그 사람에게 단점을 늘 내가 말하기를 바로 깨달은 건  좋은데 종적으로만 이래 올라가고 횡을 몰라. 옆에 이 사회성이 모자라요.

사회성이 모자라. 이래 놓으니까 어데 가든지 목회하러 가면 꼭 제가 좋아하는  사람 몇 사람뿐이지 전체는 안 돼.

 이래 놓으니까, 그 사람이 제일 잘 믿는다고 하는데 잘 믿는 사람 그 사람이  일을 내 OOO교회 가서 그 사람이 제일 잘 믿는다고 그 사람은 집사 내놓고  회계집사 내놓고 뭐 이래 놨는데 그 집사, 성이 뭐이지? O 집사라, O 집사. 내가  기억할 건 잘 기억하고 있어요. 나는 늙어도 그렇게 건망증이니 그런 거 없어  아직까지 하나님이 안 주시요. 이런데, 오늘 이랬다가, 오늘 이랬다가 또 좀  기도해 생각해 보니까 ‘아니다’ 또 고칩니다. ‘이러니까 자꾸 이랬다, 저랬다  한다.’ 고치는데 먼저보다 더 좋아지게 고치면 그것이 회개요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거라.

 ‘아, 고거보다 조거.’만일 나쁘게 고치면 그게 변질되는 거라. 더 좋게 자꾸  고쳐지는 것은 개량이라. 얼마든지 우리는 주님 앞에 이를 때 까지는 항상  ‘이게 잘못됐나 고쳐야 되겠나 잘못됐나? ‘이래 가지고서 현재로서 그게  지나가기 전까지는 항상 그 마음에 조마조마하면서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그분  앞에 갈 일인데 이게 잘못되면 어짜노? ’ 이러니까 항상 마음에 미완성이라.

 미완성이라서 그저 마음에 조마조마 이러다가 들리면 ‘아’ 고치고 고치고  고치고 이런 건데 이 고치는 이걸 보고서 ‘목사님이 요새는 나이가 연세가 많아  놓으니까 이랬다가 저랬다가 거석하고’ 이랬다가 저랬다가 해도 저거는, 저거는  뭐 앞으로는 되지마는 현재로는 죽었다 살아나도 못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아 가지고 고대로 명중해서 하니까 그게 권능이오. 그게 성경대로  되는 거라   이래서, 양심을 쓰지 안하면 헛일입니다. 양심을 쓰면 자기 진리를 찾습니다.

신구약 성경은 다 진리이지마는 그 진리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는,  신구약 성 경이니까 다 성경대로 하면 됩니까? 아니오. 자기 현실에서 자기가  지켜야 될 고 자기가 지켜야 될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 고것이 자기가  걸어갈 자기 진리요. 그게 좁은 길이라. 그 길을 찾는 데에는 양심을 쓰지  안하면 헛일입니다. 양심 쓰지 안하면 헛일이오.

 양심 쓰는 것은 자기가 다른 죄를 죄로 알고 있는데 그 죄에 대해서 매력을  가집니다. 죄를 죄로 아는데 그 죄악에 대해서 매력을 가집니다. 죄에 대해서  매력을 가져서 죄인 줄 알지마는 그 죄를 부인치 못하고,  회개를 해도 또 하나님은‘아, 이거는 내가 죄인 줄 압니다. 이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해도 네 깊은 속에서는 지금 애착과 미련을 가지고 있다 ‘이제는  내가 물질 따라가지 않겠습니다.’하지마는 하나님은 외식이 아니기 때문에 ‘네  속에 그걸 지금 너는 물질하지마는’ ‘내가 이래도 어쩔 수 없다’ 또 범하고  사함받고 범하고 사함받고, 그러면 그 죄는 사함이 됩니까? 안 됩니까? 어째요?  됩니까? 안 됩니까? 이거 아닌 줄 알고 또 범했기 때문에 용서받고 또 범하고  용서받고 하는 그라면 그 죄는 짐짓 짓는 죄가 됩니까? 그라면 무지 무능해서  짓는 죄가 됩니까? 알고 짓는 죄가 돼요 모르고 짓는 죄가 돼요?  알고 짓는 죄라 알고 짓는 죄는 사함은 못 받아요. 안 됩니다 알고 짓는 죄는  고쳐야 그 죄가 해결되지 고치기 전에는 뭐 눈물 흘리면서 암만 가슴 찢고 옷  찢고 암만 해야 소용없어요.

 이러니까 그것이 뭐이냐? 양심을 쓰지 않은 것이라 말이오. 그것을 자기가  요렇게 했어도 과거 것을 완전히 회개해서, 인간이 모르기 때문에 미래에 어떻게  실수가 있을지라도 현 재로서는 자기에게는 완 전이 됐다는 그로 더불어  하나님이 보실 때에 ‘너는 참으로 이제는 완전히 그걸 싫어하고 완전히  배반했구나’ 하는 것을 인정할 때에 도장을 찍어 줘. ‘인정했다’  이래도 사람이 또 연약해서 범죄 할 수 있어.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현재로서는 완전히 끊고 거기 대해서는 완전히 애착이나 거기 미련이나 완전히  끊고 돌아선 고것이 뭐이냐 하면은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닳는 사람이라  말이오. 그거 아니면 양심으로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라.

 이러니까, 언제든지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명증하나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 자기로서는 한 세 가지나 되는데, 세 가지나 되는데 실은 두  가지는 떼내 버릴 넓은 문이고 고 속에 한 가지가 좁은 문인데 하나인 고것을  명중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유일로 띠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능이 비슷한 게 나오지 하나님의 큰 권능이 나오지 안하고 깨닫는 것도  비슷하게 깨달아지지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는 것이 나오지를 못한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을 쓰지 않는 데에서는 거기에서는 하나님이 동행해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동행이 안 됩니다. 안 되고 양신을 쓸 때에 비로소 자기  진리를 찾습니다. 자기 진리를 거기, 눈이 어두우면 못 찾아요. 양심을 쓸 때에  자기 진리를 찾습니다.

 제가 어떤 환상을 봤는데 왜정 말년 때인데 왜정 말년 때에 제가 기도하는  가운데에 ‘앞으로 팔 월 달에 해방이 된다. 해방이 되는데 이 북과 이남이  살라진다. 미국에서 와가지고서 한국을 도우나 한국에 배암을 길러 가지고서  배암의 알을 먹을라고서 그와같이 하고 있다.’ 인본주의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어떠하냐 그 내용은 새소식이라 하고서 기록해 놨는데 그  대문자를 큰 글자만 보니까 그런 것만 봤지 자잔한 글자가 있는데 그거는 암만  볼라 해도 안 보여. 눈이 어두워 안 보여. 암만 볼라 해야 안 보여. 그때는 내가  나이가 뭐 한 서른 몇 살 먹을 때니까 내 눈이 밝을 때인데 암만 볼라 해야 안  보이요. 그거는 뭐이냐 하면 내게 대한 좁은 길을 내가 하나님께서 보여 주지  않는 것이라. 그 양심을 많이 쓰지 못하니까. 거기까지는 봤지마는 그 더 양심을  써서 더 밝으면 고걸 봤을 건데 세 줄을 보지 못해.

 그래서, 지금 이북과 이남이 갈라질 줄 알고 고것을 넉 달 전에 봤는데 넉 달  전에 제가 발표를 했어요. 팔월달이면 해방된다. 그것을 제 밑에 있는  교인들에게 돌아다니며 집회할 때마다 그 말을 했어요.

 했는데 그라면서, 갈라진다. 이 미국이 와 가지고서 이와같이 하는 것은 이것은  배암을 기르는 것은 배암의 알 먹기 위해서 기르는 것이지 그것이 우리에게는  좋지는 못하다 하는 그것을 봤지마는 거기에 대한 세밀한 해석을 내가 봤어야 될  터인데 내 마음의 눈이 심령의 눈이 어두워서 그것을 보여 주지 안하니까 보지를  못했다 그거요.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좁은 문이라는 거는 자꾸, 예를 들어서 만일 이리 가는  동으로 간다 하면 동으로 가면 여기에도 동 저리도 동 다 동인데 동이 넓으니까  그 동이 넓은데 동으로 간다고 자기가 갈 길을 ‘그 길이 어디로 갑니까?’  ‘서울을 갑니다.’ ‘서울을 가려면 북쪽으로 가야 된다’ 북쪽 간다고서 되는  게 아니라.

 북쪽 가는 데서 다 떼내고 떼내고 떼내고 북쪽 가는 고 길을 찾는 고것이 좁은  길인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향하여 가는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것은 생활해 가는 것 아닙니까? 생활해 가는 건 하나님의 뜻을  하나씩 둘씩 밟아서 지금 이루어 나가는 것 아닙니까?  이루어 나가는 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껍데기 외식을 자꾸 이뤄  나가는데 거기서 자꾸 갈라내고 갈라내고 갈라내 가지고서 비로소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명중해서 나아가는 고럴 때에 성령이 동행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이 성령과 동행하는 명증하는 그 양심을 쓰지 안해서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메시야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오늘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그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을 죽이는, 그러면 다 참된 신자들은  외식 신자들에게 다 죽임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내가 주의를 말할라고 했는데 시간이 다 됐습니다. 또 고건 다음  시간 또 계속할 것이오. 주의.

 이래서, 이 학생들에게 언제 시험을 칠 것이오. 기독교 가운데에 꿔 인본주의니  또 유물주의니 정치주의니 도덕주의니 모든 감정주의니 지방정실주의니  혈육주의니 뭐 이런 게 꽉 찼는데 그런 걸 있는 대로 한번 네가 한번 써봐라,  종류가 있는 대로 한번 써봐라 해서 많이 쓴 사람 그 사람은 제일 낫고 못 쓰는  사람은,  지금 그걸 몰라요. 그걸 지금 말하지 안해요. 강단에서 그걸 말하지 안해요.

강단에서 말하면 그거 죽여. 말하면 마귀 이놈이 막 달라들어 가지고 이라기  때문에 그걸 말하면 교인이 달아나요. 알겠습니까? 그걸 만하면 교인이  달아나요. 그걸 말하면 교인이 들어와요. 인제 교회가 들인데 그걸 말하니까  ‘에, 은혜 없다.’ 도망쳐요. 기독교는 신앙주의요. 신앙주의요 하나님주의  인데, 하나님주의니까 신앙주의라. 독재주의라. 다수가결이 무슨 주의요,  다수가결은? 다수가결은 민주주의라. 민주주의는 누구 주의지? 인본주의라.

그래. 우리 총공회는 다수주의가 아니다. 종다수주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진리주의다. 진리라야 결정하지 진리 아니면 그거는 숫자가 많다고  따라가지 않는다 이랬는데 그것도 모든 사람이 조롱해요.

 나간 사람들이 다 ‘헤, 참.’ 이거 이런 소리를 하니까 기독교는 민주주의라고  뻔뻔하게 내놓습니다. 민주주의는 종다수주의요. 그거는 인본주의요.

신앙주의는, 신앙주의라, 신앙주의라는 말은 무슨 말이요? 순종주의라  순종주의라 말은 무슨 주의라 말이요? 독재주의라 독재주의. 하나님 그분 한  분에게 독재를 당하는 것이 기독교라. 정신 차려서 믿어야 되지, 그저.

 이러니까, 서부교회 교인들은 이 뭐 설교하면, 설교하면 이 무슨 이 세상에서  다른 주의, 다른 주의를 설교하면은 ‘그거 좀 다르더라’ 안 듣는다 그말이오.

잘 안 들어. 또 신앙주의 하나님 한 분 주의로 유일하신 하나님 주의를 하면은  귀에 쏙쏙 들어온다고 좋아서 한다 말이오.

 이 서부교회는 이제 이 신본주의, 신본주의를 말하면 좋아서 들어오고 안  나갑니다. 백 목사가 만일 신본주의가 좀 약해지면 그 안에 이 은혜 없다 하고  잘 안 나오요. 다른 데에는 신본주의를 말하면 그만 다 도망칩니다. 신본주의를  말하면 도망쳐.

 여기에 있는 부자들 장로들 없는데 그거 다 신본주의 말하니까 저 인본주의를  말해야 좋아할 터인데 인간 안 알아주지 하나님 알아주니까 재미없다 해  가지고서 안 나와요. 여기 장로들 잘 안 나와요. 장로들 잘 안 나오는 거  인본주의 안 해 주니까 잘 안 나와.

 인본주의로 해 가지고 여기 장로들 앞에 떡 여기 의자 떡 갖다 놓고 여기는  장로석이라 해놓고 오면은 떡 저 가서 장로들이 떡 이래 앉았고 그라면 거기  앉았는 그게 영광이라 인제 그러면 다 나을 거라. 아마 새벽으로도 여기  장로석을 딱 만들어 놓고 장로님들은 여기 와 앉아야 됩니다. 이라면 다 나을  거라. 그 인본주의를 안 쓰니까 안 나와. 인본주의를 써도 나오는 장로 그  장로는 진짜 장로야.

 장로는 뭐 진짜 장로는, 백 목사가 때릴 때는 손으로 안 때려요. 하나님 말씀  가지고 때리기 때문에 무슨 어떻게 때려도 예예 복종하고 하지마는 인본주의  장로는 때려주지도 안 해. 때려주지 안 해 때려 주면 삐꿔서 도망칠 터이니까  그대로 내비 두고서 이제 설설 좀 돼 나가야 되지 그리 안하면 안 될 터이니까,  그래.

 이러니까, 성경 말씀을 알아야 돼. 그러면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안약이 뭐이 안약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나님 말씀. 이게 진리라 진리로 가지고서, 진리로 가지고 자기 심령을 밝게  하라 말이오. 진리를 가지고서 자기 심령을 밝게 하면 이 진리 가지고 보면 다른  걸 다 볼 수 있다 그거요. 그러니까 이 진리는 맞보기 안경이라 이렇게 박인순  선생님이 ‘진리는 맞보기 안경이라’ 그분이 그렇게 그런 말을 썼어요. 아주  깨달은 사람의 말입니다.

 잘 믿어야 돼. 그냥 열심만 내, 열심 그까짓 거는 아무것도 아니라 열심이  하나님의 진리를 바로 찾아 가지고 자기 진리 찾기를 열심을 내고 자기 진리  찾고 난 다음에는 행하기를 열심을 내야 되지 자기 진리도 찾지 안하고 엉뚱한  열심하는 그거는 자꾸 외식자이기 때문에 바로 믿는 사람들의 적만 되고 말지  아무 소용이 없어. 열심이 무슨 소용 있어? 순교가 무슨 소용 있어? 죽어도  소용없어. 자기 진리를 찾아 가지고서 순교해야 되지. 그러기에 순교자는 살았을  때 순생한 자가 순교하지 순생 안 한 자는 순교 못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O 권사님이 우리 한국에 순교자 유가족을 돌아보는  책임자로 있다가 여기 와 있습니다. 그때 순교자가 몇 없어. 가짜 순교자들이 꽉  찼어. 죽으면 되는 줄 안다고? 죄짓다 죽는 것도 있는데. 정치 운동 하다가도  죽은 것도 있는데.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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