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을 기를 때 기억할 것


선지자선교회 1988년 3월 9일 수새

 

본문:요한복음 21장 15절-22절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을 하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그들이 심히 마음이 흔들렸고 그라다가 부활하심을 만나고 난 다음에 크게  위로와 힘을 얻었고 또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자주 만나지 안하니까 또 이  마음이 흔들려졌습니다.

이래서, 예수님에게 대한 소망 가진 것이 흐려지니까 옛날 하던 이 고기잡이  하던 일에 마음이 자꾸 옮겨져 가서 지금 디베랴 바다에 가 가지고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이 찾아 오셔 가지고 생선도 구워놓고 떡도 그래 만들어 놓고  제자들을 거기에서 불러 가지고 이 음식 대접을 했습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이라니까 베드로가 거짓없이 자기 속이  그렇고 그러하기 때문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이렇게 말하고 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이렇게 예수님께서 베드로로 더불어 문답을 했습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 18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요 진실로라고  말하는 것은 어데는 뭐 진실이 아닌 게 없지마는 이것은 당신의 하시는 말씀을  더 강하게 증거하기 위해서 하는 것보다도 우리의 이 거짓된 우리들이 하나님  말씀은 획 하나도 가감도 없는 진실이지마는 너희들이 단단히 기억해야 된다는  우리의 거짓을 다져서 하나님의 말씀은 다 진실하지마는 진실한 말씀 중에  우리가 더 거기에 대해서 진실되이 우리가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을 가리켜서  그렇게 「진실로 진실로」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제 어려서는 네가 너를 단속하고 또 네가 네 주장대로 이렇게 살  수 있으나 차차 장성해서 팔을 벌리게 되면 네가 이제는 네 생각도 범위가  넓어지고 활동도 넓어지고 모든 의무와 책임도 자꾸 범위가 넓어지고 이렇게  장성해 가면, ‘남이 너를 띠 띠우고 원치 안하는 곳으로 너를 데려가리라’ 이제는 네가  장성하게 되면은 네가 네 단속을 하는 그것 가지고 되지 안하고, 네가 너만  단속하면 됐는데 이제는 네게 속한 사람들의 단속이 돼야 네 단속이 되고 네게  속한 사람들의 의가 돼야 네 의가 되고 그 사람들의 온전이 네 완전이요 그  사람들의 깨끗이 네 깨끗이요 그 사람들의 모든 불의가 다 네 불의요, 이래서, 자기 개인 자기로 살던 사람이 이제는 그 전체의 자기로, 소아로 살던  것이, 개체의 자아로 살던 사람들이 이제는 대아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점점 이제는 자기 혼자가 자기가 아니라 자기에게 속한 사람  두 사람이 자기라 차차 나중에는 열 사람이 자기라 자기 한 교회에 있는 모든  교인이 자기라.

그러면, 교인이 더러워짐이 그 더러워짐이 네 더러워짐이 되고 교인의 깨끗함이  네 깨끗함이 되는데 이제는 너만이 아니라 네 교회만이 아니라 네가 속하여 있는  그 진영 교회가 곧 네라. 그 진영 교회가 깨끗하면 네가 깨끗해지고 그게  더러우면 곧 네 더러움으로 다 네게로 돌아간다. 이제는 그뿐 아니라 세계  교회에 퍼쳐서 세계 교회가 곧 네가 된다.

이래서, 점점 장성해 가면은 개체의 개아가 대아가 되어지는, 대아가 전체아가  되어지는, 전체가 자기가 되어지는 이렇게 성장돼 나아가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19절에,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러니까, 이제 베드로가 있다가 그때 마침 요한이가 거기에 같이 참석을 했는데  베드로가 있다가 ‘그러면 여기에 같이 있는 요한이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물으니까 ‘그 사람이야 내가 올 때까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있느냐’ 그 말은 너는 지금 순교해서 이제 주님의 뜻을 이룰 것을 베드로에게는  말씀하시고 나니까 ‘이 요한이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네가 순교한다  하니까 순교할 것을 말하니까 너 죽음에 대해서’ 나는 그라면 주를 위해서  순교하는 죽음을 당하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은 내가 올 때까지 그러면 주님이 그거 모르고 말씀한 것은 아닙니다.

올 때까지라면은 벌써 근 이천 년, 예수님이 탄생 이천 년 만에 만일 오신다고  하면은 이천 년일 것이고 삼천 년 만에 오신다면 삼천 년일 것인데 이천 년  삼천 년을 죽지 안하고 그렇게 살게 한다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 있느냐? 너는  네 일만 할 일이지.’ 여기에서 베드로가 책망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다른  것은 책망을 받지 안했는데 여기에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데  대해서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도리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사람은 이렇게 예수님에게  따라서 변동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는 그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에 다 육적으로 이렇게 따랐던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니까 그 신앙이  다 무너졌습니다.

또, 부활하시니까 새로 소생됐다가, 자꾸 같이 다니면서 이런 것 저런 것  세상에서 신기한 그런 것을 보지 안하고 그저 예수님도 자주 만나지 안하고  이라니까, 그 모든 정리로 또 땅에서 이루어지는 그 모든 일들을 보고 힘을 얻었고, 땅의  모든 예수님의 하시는 그 일이 자꾸 이렇게 참 기적과 신기한 일들이 나타나니까  그것 보고서 힘을 얻었고 또 예수님께서 자주 만나가지고 자꾸 이렇게 계속  교훈하시고 이라니까 그 재미에 예수님과 가까워지고 따라다니다가 그만 그게  성글어지니까 그만 이 제자들의 신앙이 또 흔들려졌습니다. 이것이 신자라 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다 같은 신앙생활하지마는 이런 면을 보고 힘을 얻은 사람  저런 면을 보고 힘을 얻어서 신앙생활하는 그런 사람의 신앙이 종류가 많이  있는데 다 땅에서 일어나는 이 땅의 것을 보고 땅에서 무슨 소망을 가지고 땅의  것으로써 힘을 얻은 그런 것은 그것은 변해져 가고 마지막에는 없어져 가  버립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런 것을 보고 신앙생활하는 그것은 예수님이 자기에게 땅의  것으로써 역사하시는 그것을 인해서 얻은 힘은 그것이 없어지면 차차  없어집니다. 그거는 언제든지 없어지기는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저렇게 섭리하시는 것은, 이런 섭리 저런  섭리를 하시는 것은 우리가 이해 못 할 일들이 많이 있고 또 섭섭한 것도 많이  있고 마음에 실망하는 일, 근심하는 일, 낙망하는 그런 일들도 있는 그것은 뭣  때문에냐? 우리에게 있는 땅에 속한 잡철과 같은 그런 요소들을 뽑기 위해서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저런 데에서 그걸 뽑고 또 딴것으로 새것으로 또 주님의 것으로  점점 이래서 땅의 것으로 이제 얻은 힘을 땅의 것이 없어지고 하늘의 것으로  얻는 힘이 돼져야 되겠고, 또 모든 하나님의 역사로 인하여 얻은 그 힘은  없어지고 곧 주님 자체로 인하여 얻어지는 그런 힘으로 되어지는 그것이 우리  속에 참 힘이니 마치 금을 불로 연단하면 잡철은 다 타버리고 정금만 남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양떼를, 권찰직을 하든지 반사직을 하든지 할 때에  반드시 따르는 그 양은, 내가 기르고 있는 그 양은 이런 순서를 가지고 필연적인  이런 그런 변동이 있고 순서가 있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럴 때에 주님이 찾아오셔 가지고 따라다니는 제자였는데 이제는 주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따르다가 그것이 따르지 안하면 우리 마음이  흔들리기 쉽고 또 그것이 나를 찾아오다가 오지 안하면은 흔들리기 쉬우나  그것이 다 땅에 속한 것이요 그럴 때에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찾아가야  됩니다. 가서 떡을 먹였습니다. 고기를 먹이고.

이래서, 이 하늘의 것으로 바꿔 줄라고 이라다가 거기에 대한 소망이나 모든  것이 흐미해질 때에는 또 땅의 것을 줘야 됩니다. 땅의 것을 주면서 이래 가지고  땅의 것으로 소생을 시켜 가지고 그래 제자들과 주님이 땅의 것으로 이렇게 서로  접촉을 하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신령한 면으로 점점 나아가게 됐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잊어버리지 안하고 가질 것, 양을 기를 때에는 변동성이 많다. 그것은 양으로 하여금 모든 잡된 것을 뽑아  가지고서 온전케 하려는 하나님의 역사이지 그게 절대로 실패가 아니고 그것이  퇴보되거나 그것이 점점 도태되는 것이 아니고 성장되어져 가고 점점 깨끗해져  가는 것이고 온전해져 가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기를 때도 떨어졌을 때는 그런 걸로 또 접촉을 시켜 가지고서  온전한 데 나아가라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라고, 이 접하는 가운데에서 제일 주의할 것이 뭐이냐 하면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사랑하느냐' 이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인가? 마태복음 25장에도 보면 ‘네가 나에게 이렇게 어려움 당했을 때에 나를 도왔다.

너는 내가 어려움 당할 때에 나를 돕지 안했다.’ 이럴 때에 ‘언제 우리가  도왔습니까?' `지극히 나의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다’ 또 돕지 안한 자가 ‘언제 돕지 안했습니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치 안한 것이 곧 나에게 행치 아니한 것이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도  그것도 곧 우리 믿는 사람들이 자기가 은사 위치에 있어서 은혜를 베푸는 은혜  기관의 위치에 있어서 은혜를 베풀 때에 나는 어떤 김가에게 했고 이가에게 했고  또 아이에게 했고 늙은이에게 했고 이런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행한 그것이 곧  바로 주님에게 직접 대접한 것이라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 속에 뜻은 무슨 뜻인고 하니 곧 당신의 피로 구속하신 그 무리는, 그게  양인데, 그것은 바로 그것이 그에게 행한 것이 주님 당신에게 직접 행한 것으로  이렇게 주님께서 알려 주시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러니까, 그 양에게 잘한 것은 당신에게 잘한 것이요 양에게 잘못한 것은  당신에게 잘못한 것으로써 당신과 그 양의 관계가 곧 두 몸이 아니요 한 몸이요  하나라는 것입니다.

또, 여기에도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 또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도 당신과 양과의 관계는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서, 요한복음 10장에는 보면은 거기에 절도요 강도라 이리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절도라는 것도 곧 양을 기르는 이 권찰직이든지 장로 집사직이든지  목사직이든지 어쨌든지 주님의 피로 구속한 양떼를 관리하는 사람을 다 말한  것입니다.

이랬는데, 바로 그 양떼를 관리하는 것이 당신을 관리한 것이요 양떼를 대접하지  않은 것이 당신을 대접하지 않은 것이요 양떼를 대접한 것이 당신을 대접한  것인데 이렇게 해서 그 하나도 냉수 한 그릇의 수고도 빠지지 안하고 그걸 다  갚아 주시겠다고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양은 곧 당신이요  당신은 양이라.

이러기 때문에,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없어질 때에 그가 영원한 집으로  영접한다. 이렇게 주님의 피로 구속한 양떼에게 대해서 이렇게 대접한 것은 바로  나에게 대접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갚아 준다.

그 양떼에게 대접한 것은 나에게 대접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갚아 준다 그렇게  말하지를 안했습니다. 고게 보면은 곧 거기에는 양떼에게 대접한 그것이  자기에게 대접한 게 됐기 때문에 ‘그 사람이 영원한 처소로 너를 영접하리라’  바로 내다. 그 사람이 주님, 주님하고는 떨어질 수 없는 그런 하나가 된 것을  가리켜 말했습니다.

또 그 다음에 보면, 네가 남의 것을 네가 알뜰히 하지 안하고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남의 것이라는 그 남의 것은  무엇을 가리킨 건가? 남의 것은 곧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산 양떼를 관리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말했습니다.

목사에게 말합니다. ‘목사야 네가 내것에 대해서 네가 충성치 안하면 내가 네게  대해서 어떻게 잘해 줄 수가 있겠느냐? 또 네가 없어질 것 이것 가지고서,  그렇게 충성치 안하면 참된 것을, 완전한 것을, 영원한 것을 너에게 주겠느냐? 이래서, 이런 말씀 들이나 모든 성경에 보면은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산 양떼들은  다 주님과 바로 한몸이요 한덩어리요 하나요 그러기 때문에 거기에 잘한 것도  주님에게 잘한 것이 되고 못한 것도 주님에게 못한 것이 되는 것으로써 그렇게  늘 성경에 발표를 했습니다.

또, 여기에서도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이렇게 말씀했지, 양과 예수님과의 그 관계가 조그만치라도 떨어지지 안한 것을  발표를 했습니다. 곧 양이 내요 내가 양이라. 이래 하나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주님의 구속하신 양과 당신과는 하나기 때문에 거기에  떨어질 수 없고 그 사이는 아무도 벌어뜨릴 수 없고 그 사이는 뺏길 수 없기  때문에 당신이 이렇게 강하게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고, 이 목자가 선한 목자도 될 수 있고 절도요 강도도 될 수 있다, 또  삯꾼도 될 수 있다, 이리도 될 수 있다 하는 이것은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산 양은  언제든지 주님의 양이기 때문에 곧 그 양을 주님 대접하는 것으로 알고 주님과  하나인 줄 알고 이렇게 상대해서 대우할 때에 주님은 그것을 다 책임을 지시고  이 주님의 양을 제것으로 삼을라 하는 자에게는 주님께서 견디지를 못하셔서  절도요 강도라, 너는 이리라. 주님을 네 소유로, 너를 따르은 자로, 주님을 네  소유로 너를 따르은 자로 이래 만드는 거기에 대해서는 주님이 용납을 안 하고  분개하십니다.

이러기 때문에, 대개 교역자들이나 이런 은사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더러운  이익을 위해서 관리하고 자기를 위해서 관리하고 또 ‘내가 떠난 뒤에는 흉악한  이리가 와 가지고서 저를 따르게 할라고서 그들이 어그러진 말을 가지고서  너희들에게 감언이설로 말할 것이다’ 이런 모든 말씀을 보면 주님은 어떠하신  주님이시냐? 당신의 것을, 당신의 그 피로 구속한 당신의 것을 당신의 것으로 알고 이렇게  대우하는 데에는 냉수 한 그릇도 털끝만한 것도 그것은 변함없이 다 그것을  낱낱이 갚아 주시고 당신을 대접한 것으로 이렇게 알고 당신의 양떼를 자기 것을  삼는 데에는 하나님은 제일 진노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에게 대해서 대접하는 그 사람,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일을  도와서, 주님의 것을 사랑함으로, 주님의 것을 구원함으로 이렇게 하는 사람도  될 수 있고 주님의 것을 도적하는 사람도 될 수 있어 이 구속하는 이 구속  사업에서는 주님과 일대 적이 될 수 있고 일대 대우한 이 대접한 사람도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회한 지 그 결과로서 주님을 누구보다도 가장 사랑한 사람,  대우한 사람, 위한 사람에 대해서 무궁세계에서 주님에게 누구보다도 위함과  대우 이렇게 영접, 참 주님이 감사하다고 이렇게 그저 말할 수 없이 그렇게  감사하는 이런 감격에 넘치게 되는 이런 사람도 있고, 주님에게 심히 분개함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을 제일 사랑하고 대접한 사람도 있고 주님을 제일 노엽게 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을 제일 노엽게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며 주님을 제일 대우한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냐? 주님의 제일 적이 어떤 적이냐? 주님은 십자가에  대속하셨기 때문에 죄와 마귀와 사망이 적이었는데 그것은 적으로 싸워서  이기셨습니다.

이제 남은 무궁세계의 적은 어떤 것이 당신의 적이 될 것인가? 피로 구속한  양떼를 제것으로 삼은, 잡아먹은 이리와 절도 강도 이것이 제일 적이요,  삯꾼으로 한 사람은 아무런 갚아 줄 것은 없습니다. 일생 동안 자기가 어떻게  한다 할지라도 주님 앞에 갚음을 받을 것은 없습니다. 삯을 받고 했기 때문에.

삯을 받고 했기 때문에.

그런고로, 우리가 이것을 잘 구별해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주의할 것이 뭐이냐? 이렇게 사람은 흔들려진다. 흔들려지니까  그런 것을 알고 그럴 때는 네가 찾아가 가지고서 육적으로부터 시작해 가지고  그에게 다시 소생을 시켜 가지고서 점점 영적으로 성장시켜 나가도록 해라.

그러고, 네가 제일 주의할 것은 뭐이 네가 주의할 것이냐? 네가 제일 주의할  것은 내 양인데 네 양 삼지 말아라. 내 양이다. 이거는 어린 양도 내 양이요  철없이 돌아다니는 방종한 양도 내 양이요 이거는 내 양이다. 주님의 양이요 제  양이 아닙니다. 주님의 양이라는 요것을 단단히 주의해서 구별하고, 셋째로는 다른 사람이야 어쨌든지 너는 네게 대한 사명만 하지 다른 사람의 이런  환경 주위 환경과 그 사람의 형편과 사정과 네 형편과 사정을 대조하지 말고  비교하지 말아라. 너와 나와는 직접 관계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야 어떻게  됐든지 내가 어찌 하든지 너는 나를 따르라 하는 요것을 주의 줬습니다.

그러면, 시발에 대한 주의를 줬고 또 마지막에 결말을 지울 때에 주의를  줬습니다. 결말 지울 때에는 주님과 자기와의 직접 관계로서 그 관계만 자기가  생각할 일이지 다른 사람과 주님과의 관계되는 그런 것을 자기는 뭐 볼 것도  참고도 상관할 것도 없다.

너는 지금 순교하라 하는데 네가 이래 그 말하고 있으니까 너는 순교하라 하고  그 사람은 그만 육체로 죽지 아니하고 그대로 살게 한다 할지라도 네게 상관이  무엇이냐? 그러면 순교하는 거와 정반대의 요소를 말씀하시면서 너와 정반대의  무엇이 있다 할지라도, 너는 배고픈데 그는 배부르고 너는 항상 욕 얻어 먹는데 그는 칭찬받고 너는  모든 일이 형통치 안하고 모두가 다 전부 다 낭파되는 실패되는 것뿐인데 그는  모든 것이 형통해지고 너와 정반대의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너는  상관없다. 너는 그게 상관없고 너는 나를 따르라. 너는 그저 나와 너와의 관계만  가지라. 요것을 신앙의 최종에 주의할 것, 요거 주의할 것인데 베드로가 그거 좀  실수했기 때문에 그거 다시 경성했습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최종 신앙에는 요게 제일 주의할 점이지 이 점을 주의하지  못하면 안 된다. ‘저 사람도 저래 하는데 나는’ 그 사람이야 네가 그래 하든지  그 사람에게 영감이 그렇고 하나님의 뜻이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는, 너는  죽으라는데 그 사람은 살게 하라는지도 모른다. 너는 지금 뚜드려 맞으라 하는데  그 사람은 존귀함을 받도록 할는지 모른다. 그러면 어떻게 할지라도 너는  상관없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의 최종은 다른 사람을 보지 말고 주님과 너와의, 내가 너를  대속했기 때문에 대속받은 너와 나와의 관계만 생각해야 되지 다른 사람을  거기에 네가 보지 말고 나만 봐라. 그것을 가리켜서 말씀하고, 또, 구원에 시발할 때에는 그게 다 그렇게 흔들리고 변동되는 것은 주님에게  따라서 변동되나 주님이 변동됨이 아니고 주님을 따라 그 환경과 세상이  변동되니까 변동되는 것이니 그거는 땅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거는 차차차차  하나씩 도말해 가지고서 잡철을 제하고 순금만 남는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네가 이해해야 되고 그럴 때에는 육의 것, 세상 것 가지고서  거기에서 차차차차 힘을 줘 가지고 신령한 것으로 옮겨져 가야 된다.

그라고, 제일 네가 신앙에 대해서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는 이 순교인데 순교의  신앙을 어데서 기르겠느냐? 네가 순교의 신앙을 어데서 기르겠느냐? 순생의  신앙을 네가 어데서 기르겠느냐? 네가 참으로 이제는 네 자유가 없고 모든  전체의 그것이, 전체의 뜻이 네 뜻이 되고 이제 하나님의 뜻이 네 뜻이 되지 네  개체의 뜻이 네 뜻이 안 되는 거기에까지 점점 자라가는 것, 그러면, 곧 그것이 나 개인이라는 내가 들어서 차차 완성해 나아간 것은 뭐이냐?  우리가 된다. 이제 내가 우리 되는 것, 내 소아가 대아가 되는 것, 내 개아가 이  전체아가 되어지는 것, 이렇게 되어지는 이 성장이나 또 순교하는 이 성장이나 이 성장은 어데서  시발되고 어데서 성장되느냐? 시발되는 것은 내나 육의 것에서 시발돼 가지고서  성장되는 것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여기에서 모든  성장은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래서, 누가복음 16장에도 그런 뜻을 말씀했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다’ 그러면 큰 것이라 말은 내나 거기에도 지극히가  붙었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라 말은 지극히 큰 것에라 말이요,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것이라 말은 또 큰 것에도 불의하다 하는 그 큰 것은 내나 지극히  큰 것, 지극히 작은 것에서 지극히 큰 것에 성장돼 나아가는 것은 세상에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다. 다른 일로는 없다. 다만 주님의 양을 기르는 여기에서는 지극히  작은 것이 지극히 큰 것 된다. 지소한 것이 지대에까지 그거는 나아갈 수 있다  하는 이 성장성을 가리켜서 말하고 점점 능해져 가는 이것을 가리켜 말하는데, 이것은, 다만 주님의 구속의 이 역사를 협력해서 주님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이렇게 주님이 소원하신 대로 주님이 하시는 일을 도와서 주님이 소원하신 대로  주님의 하시는 그 일을 도와 가지고 하는 이것은 지극히 작은 데서 지극히 큰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 일반에서 볼 수 없는 특이성을 가리켜 말합니다.

그거는 왜 그렇겠습니까? 지극히 작은 것에서 지극히 큰 데까지 나아가는 것, 그  성장돼 나아가는 것, 그 이유는, 다른 데는 그런 일이 없어. 이 세상에서는 뭐  되기야 되지요. 그러나 지극히 큰 데는 나아가지를 못해.

그에 자기의 선천 후천의 요소가 있기 때문에 있는 사람은 선천적으로, 예를  들면은 만일 스케이트를 탄다 할지라도 선천적으로 후천적으로 그것이 아주  저능한 자로 그렇게 난 자는 아무리 연습해도 그만치 되어지지 연습이라 하는  것이 무한에 나아가지는 안한다 그 말이오. 이거 무슨 말인지? 무능에 나아가지 안하지마는 요 일에는 무능에 나아간다 그 말이오. 요 일에는  무능에 나아간다.

왜 그렇게 무능에 나아가겠습니까? ○○○목사님, 그것이 자기로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기 때문에, 그거 주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능력으로  되기 때문에 무한에 나아갑니다. 끝이 없어, 그거는.

이런데, 또 여기에서 어린 양 먹이는 거기에서 점점 자라 가지고서 나중에  자기가 소아가 대아가 되고 전체아가 되는, 그러면 말하자면 교회는 하나뿐인데  하나인 그 교회가 제 교회가 되는 그것이 모든 교회가 제것이 되어지는 이것이  곧 대아로 나아가는 것이요 전체아로 나아가는 것이요 우리가 되는 것은 그게  되는 것입니다.

이 면이 성장돼 나가는 것이나 또 자기가 벌써 순생과 순교에 나아가는 것이나  그런 것은 다 다른 방편 가지고는 안 되고 주님의 양을 주님의 양인 줄 알고,  주님의 양을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산 주님의 것인 것을 알고 주님의 양을 이렇게  가꾸고 위해서 이렇게 하는 양을 위하는 이 수고에서만 이렇게 자라갈 수 있다.

여기에서만 무한히 자라갈 수 있다.

또, 여기에서만 지극히 작은 것이 지극히 큰 데까지 자라갈 수 있다. 그것은 왜  그러냐? 그 속에 주님이 계셔 가지고서 주님이 일하시기 때문에 그렇다 하는  그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그 일을 하는 데에는 곧, 네가 하는 것이나 속에는 주님이 하시는 것,  그 일에는 주님이 자기 안에서 내주해 가지고 역사하시도록 하는 좋은 방편은 이  방편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방편에는 유한에서 시작해서 무한에까지 나아가게  된다. 또 지극히 작은 데서 지극히 큰 데까지 나가게 된다.

그런데에 주의할 것은 다른 사람이야 어쨌든지 너는 주님과의 관계 거기에만  생각해야 되지 주님과의 관계에서 다른 사람은 어찌 되느냐 그것을 보는 것이  주님한테 책망받은 것이요 시험에 든 것이라. 그거 보지 말아라.

그러고, 네가 성장되는 데에는 어데서 성장되느냐?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없어질  때에 그가 너를 영원한 처소로 영접할 것이다’ 그것이 주님과 이래 양떼와의  관계는 이렇게 밀접한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이 사이는 아무도 두지는 못합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것은 이 주님의 양떼를 주님의 것을, 이게  바로 이를 미워하는 게 주님을 미워하는 거요 이를 대접하는 게 주님을 대접하는  것이라. 그러면 주님과 이 양떼는 그만 어데까지나 하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떼를 좋아했는데 주님이 당신을 좋아했다고서 이와같이  기뻐합니다. 양떼를 멸시했는데 당신을 멸시했다고 이래 합니다. 양떼에게 뭐  대접했더니마는 하, 대접했다고 대접을 받으라 이래 합니다. 그러면 양떼와  당신이 하나라는 거 이것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이 신비한 관계, 굉장한 관계, 이런데에 또 주님이 제일 미워하시는 것은 뭐이냐? 미워하시는 것은 절도요  강도요 이리라. 절도요 강도라는 것은 양을 제 양을 만드는 것을 가리켜서  절도요 강도라는 것입니다. 양을 제 양 만드는 것.

그러기 때문에 주님은, 이것을 가리켜서 야고보서 4장에는 보면은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과 너의 벗되는 것이 마치 자기의 유일한 아내가 간부로 더불어 음행하는  그와같이 지금 분개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성령이 시기하기까지라는 말을 네가  헛된 것으로 여기느냐? 이러기 때문에, 주님의 이 양을 대우하는 것은 유일로 바로 직접 주님을  대우하는 것이 되고 주님의 그 양을 자기가 그 사이에서 뺏드는 것은 주님의  바로 유일한 아내를 제가 더불어 간음하는 것이요 그 아내를 빼앗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보다 더 큰 적으로 여기는 적이 없다는 것을 오늘 우리가 알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 총공회 산하에 있는 이 교역자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고 또 이 권찰일 보는  사람들이나 은사 위치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주님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뭐이냐?  당신의 신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일을 하는 것은 당신의 신부를 대우하는  것입니다. 위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일 주님이 섭섭하게 여기는 것은 당신의  신부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제일 분개해서, 성경에 보면은 이간죄는 거기에서 영을 죽였고 시기에는 육을  죽였습니다. 죽이는 첫째 죽음 둘째 죽음이, 둘째 죽음은 시기로 생겼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늘 보면 자꾸 거기에 대해서 많이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제일 분하게 여기는 적은 뭐인가? 분하게 여기는 적은  뭐인가? 이것은 주님의 신부를 자기 신부로 삼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인가?  주님의 양떼를 제 양떼 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절도요 강도라. 절도요  강도가 주님과 원수되는 것 아닙니까? 이런 줄을 알고 이 목회를 해야 될 터인데  이걸 깨닫지 못하고, 지금 이것을 여러분들에게 그저 조그매 움싹만, 이 딱지만 떼서 내가 늘 주면은  한 집회 거창이니 대구니 하는 집회는 아직까지는 이 총공회 산하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제가 떼는 딱지를 지금 저희들이 뗄라고는 아직까지 감감합니다.

왜? 하나님이 맡기지를 안했어.

이러기 때문에, 이 딱지 하나 떼면 그 딱지 떼면 그 딱지로서는, 비유컨대  여기에 만일 종이로 뭣을 이래 싸 놨습니다. 싸 놨으면 그 종이가 반들반들 너무  싸 놔서 그걸 뗄 수 없어도 위에 조그매만 일으켜서, 조그매만 일으켜 조금  떨어졌으면 그대로만 쭉 떼 나가면 전체가 다 벗겨져 떼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때는 여러 시간을 가지고서 이런 것 저런 것 자꾸 엮어대 가지고서  말하는 게 아니고 그때는 봉지를 떼는 것이요. 새봉지를 떼는 것 딱지를 떼는  것입니다. 이걸 깨닫고 자꾸 거기에서 그저 그 하나 딱지 떼고 하나만 받았으면  그 다음에 그와 같이는 얼마든지 쭉 연상돼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데, 교만한 자는 그거 하나 딱지 떼면 거기에서 받아 가지고 그대로 내가  연구하니까, 요 내가 딱지 뗀 거는 그분이 딱지를 떼 줘서 그 딱지 떼 가지고  이래 했다 이렇게 제가 생각하는 자는 뉘게서 배운 것, 뉘게서 배운 것은 첫째는  하나님에게 배웠는데 하나님이 누구를 통해서 배워진, 하나님이 음성으로  나타내지 안하고 하나님이 사람 통해 하는 그 계통을 알면 그것이 겸손으로서  점점 바로 돼 나가고 그것을 배은해 버리고 제가 들어서 뭐 한 것으로서 이렇게  생각을 하면은 또 안 된다 그거야. 생각하면은 그거는 실패됩니다.

` 이래서, 오늘 아침에도 이제 이 말씀을 듣고 나서 저 성경을 가 자꾸 뒤벼 봐요.

뒤벼 봐서, 주님이 사랑하는 것이 뭐인가? 주님이 제일 사랑하는 게 뭐인가?  당신의 신부를 제일 사랑합니다.

그러면, 당신을 기쁘게 할라면 뭐 어떻게 해야 기쁘게 할까? 당신의 신부를  대우하는 것입니다. 아껴 주는 것입니다. 그 신부의 위신이나 뭐이니 그런 것이  거석해질까 이렇게 아껴 주는 것, 대우하는 것, 그러나, 그라다가 신부를 탐내는, 신부를 탐내는 그런 무서운 간부의 위치에  가면은 주님이 제일 분개하십니다. 어떻게 하느냐? 시기로 분개한다 했어,  시기로. 성령이 시기하기까지라는 말씀을 네가 어떻게 지금 알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참 좋은 입장에 있으면서도 위험한 입장에 있습니다.

요셉이가 보디발 아내가 그와같이 지금 자기에게 거석했지마는 그때에 보디발  아내가, 만일 보디발이 전체를 다 맡겨 놓고 가정을 관리하게 되니까 그 보디발  아내에 대해서 얼마나 접하고 가깝고 또 그렇게 좋아하고 이렇게 했었는데 만일  그때 그 실수 했으면 요셉은 죽습니다. 요셉은 사형을 당합니다. 감옥에 가지도  안하고 죽습니다. 그게 폭로가 안 납니까? 이라면 죽어 버리고 하나님 일 제 일  다 실패했습니다.

다만 거기에서 말하기를 ‘모든 것 나에게 맡겼지마는 당신만은 나에게 맡기지  안했는데 당신은 아내이기 때문에 나에게 맡기지 안했는데 내가 어떻게 그거  이런 것을 범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거기에서 엄격하게 한 데에서 그 일이  크게 연단 받았습니다.

만일 그게 없으면 감옥에 못 들어갔고 감옥 들어가지 못했더라면 그런 장관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고 꿈꾸는 해몽을 알지 못할 것이고 그라면 바로에게 그것이  올라가지 못하는데 그것이 그 절정이라 그 말이오.

그런고로, 오늘 믿는 사람들이 자기 양떼를 만드는 거기에까지 가서 거기에서  자기 양떼를 만들지 안하고 그것이 주의 양이라는 것을 똑똑히 구별해 가지고  하는 데서 승리하지만 다 거기에서 간음해 가지고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돼  가지고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에 위대한 사람들이 없는 게 아니라 위대한 사람들이 있는 게 그게  다 자기 양 만드는 데에서 다 절단 나고 말았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오늘 아침의 말씀을 단단히 기억합시다.

양을 주님의 양으로 하는 그보다 주님 사귀는 방법이 없습니다. 주님을 밀접하게  사귀는 것, 또 자기가 대아에 나아가는 것, 또 순교할 수 있는 그 순교의 실력  이 모든 것을 기르는 데는 주님의 양떼를 기르는 거기에서만 그 힘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좋은 동시에 위험한 것은 주님의 양떼를 자기 양으로 주님의 신부를 자기  신부로 삼는 거기에 대해서는 곧 사망입니다. 사형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주 크게 변동된 것은 교역자 이동을 그것을 과거에는  임명제로 했는데 이번에는 기어코라도 해 가지고서 청빙제로 이렇게 한 것은 왜  그랬느냐? 목회자들이 전부 ‘내가 지금 나갈지 모르니까 교인들이 버티니까  되더라. 그러니까 이 교인과 총공회와 그 사이를 벌어 뜨려야 이 교인들이  나중에 공회서 어떻게 할 때도 공회 편이 되지 안하고 내 편이 돼서 이거  하겠다.’ 또, 교훈도 교훈에 대해서도 자꾸 이거, 우리에게 하나님이 특별히 주신  교훈인데. 백 목사 교훈이 아니고. 이 시대에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내가  무슨 사람이라서 이제까지에 내려온, 수천 년 동안 내려오면서 하는 그 교리와  신조에 반대되는 것도 발견을 하느냐? 내가 그런 머리가 없는 사람이오. 다  주님이 다 주셔서 한 것이지. 옳고 바르게 당신이 주셨습니다.

이랬는데, 이 교훈과 반대가 돼야 이 사람들이 나를 따라오지 안 되겠다 이래  가지고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이 시대에 주신 이 교훈과 그 양떼와 그 사이를  벌어뜨리고 양떼와 자기 독단의 교훈과 하나 되도록 하기 위해 가지고서 이  교훈을 헐고 저를 소개하는 이 일을 하고 이 공회를 헐고 저를 소개하는 걸로  해서 결국은 공회와 그 양 사이에 이간을 붙이고 행정적으로 이간을 붙이고 또  교훈적으로 이간을 붙여서 그러다 보니까 그 양떼를 제 양떼 삼는, 주님의  신부를 제 아내 삼는 이 무서운 죄를 범하는 거기에 동참하지 안할라고 제가  그것을 보고서 일찍부터 벌써, 요번에 청빙제로 그래 한 것이 아니고 청빙제로  한 것이 작년 총공회 지나고 난 다음에 작년 봄엔가 이 교역자회에서, 봄인가  여름인가 벌써 그때부터 청빙제로 해야 된다는 것을 많이 말했습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 오래 있다가서 ○○○목사 그 일이 생겼습니다.

이러니까 모든 교역자들이 어짜든지, 가 가지고서 하나님의 사람 만드는  것보다도 이 양을 나하고, 공회와 이 양들과 밀접함이 나보다 밀접할 때에는  공회하고 둘이 하나 돼 가지고 나를 밀어내면 내가 밀려 나가겠다.

그러니까, 작업은 무슨 작업해야 되느냐? 공회서 나를 어떻게 한다 할지라도 이  양들과 나와의 관계가 밀접하기 때문에 공회를 버렸으면 버렸지 나를 버릴 수  없는 이 사람을 만들어야 된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공통적으로 주신 이 교리와 신조의 은혜보다도, 그거와 이  양떼들이 은혜 받고 하나 되는 것보다도 내 교훈과 이 양떼와 하나 되는 것이 더  강해야 여기에서 요동치 안하겠다.

이래 가지고서 전부이 자기 사람 만드는 이것이 자기 신부 만드는 이 역사를  하니까 하나님이 제일 진노하시는 일이 있기 때문에 그래 제가 지난번에 서울  가서 말하기를 우리 총공회는 완전히 불로 태워버려야 된다. 완전히 없애 버려야  된다. 이라니까 어떤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공회를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실까  그거 좀 목사님이 시험에 들었는가보데’ 이렇게 저거끼리 논평을 합니다.

‘그런 말은 너무 과격한데’ 그래 내가 말했습니다. 거룩한 공회는 그 공회가 곧 하나님과 하나 돼 하나님의  몸이요 거룩한 공회가 마귀의 공회가 되면 그거는 하나님이 박멸시킨다. 우리 이  공회는 마귀 공회가 됐다.

왜 마귀 공회가 됐느냐? 이 공회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부를 잘 가꾸고 기르고  단장시켜서 이렇게 참, 아주 피투성이 이걸 건져다가서 나중에 잘 길러 가지고서  유방이 뚜렷하고 그 참 얼굴이 광채가 나고 이렇게 후궁으로 데려갈 수 있는  이런 신부를 만드는 것이 이 공회인데 이제까지 만들어 놔서 신부 만들어 놨는데  제까짓 게 그냥 돌아다니는 것, 내가 어제도 말했어. ○○○목사 여기에 구두닦이 하고 이래 돌아다니는 그게  지금 ○○○목사 그 큰 교회에 가서 부흥회를 했어. 전부 여기 교역자들은  부흥사 다 됩니다. 다 되고, 내가 엊저녁에도 말 들었는데 ○○○목사님이 뭐 ○목사인가 가서 집회할 때에  그때 교인들 앞에서 그 강사를 박살시키는 그런 일 했다는 그걸 뽑아야 됩니다.

○○○목사 그걸 뽑아야 돼요. 그거 안 뽑으면 필요 없어. 하나님께 버리면 내나  자기 그라면은 예수님의 신부를 제 아내 삼는 그짓 밖에 안 돼요, 결과가.

알겠어요? 그거 자기가 또 배우지 안한 게 없어.

그런데, 이거 모두 다 그만치 자랐어. 자라고, 그 사람들이 그렇게 큰 교회에 가  가지고서 하는 것, 지금 ○○교회에 ○○○목사가 있지마는 ○○○목사 찍해야  그때 뭐뭐 우체국에 뭐하며 한다 하는 제가 암만 거석해 봤자 뭣하겠소?  거기에서 과장이나 했거나 뭐 계장 했거나 그렇지. 우체국에 그 계장이나 과장  했을 건데 그게 어떻게 지금, 주일학교까지 말하면 몇 천 명 모이는 그 교회에  이제 목사로 돼 가지고 걸 거라? 이렇게 모두 다 저거 힘으로 난 게 아니라  말이요, 이 모두 된 게.

어떤 사람이 총공회에 목사들을 보고 다른 공회에 이 목사들 쭉 보고서 비교를  해 보니까 이거는 전부 아이들 말로 미꾸라지가 뭐 용됐다 하더니마는 이거 전부  생각지 못할 만치 성장돼서 이렇게 돼져 버렸고 그들은 저거보다 자격이  나았지마는 지금 그게 없어.

거기에서 어떤 부흥사로 모실라 하면은 부흥사가 귀해. 몇 사람 안 돼. 이거는  전부 부흥사 다 돼.

이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됐는데 이게 떡 되고 나서, 되지 못할 것이 이렇게  돼 놓으니까 너무 우쭐해 가지고서 전부 예수님에게 대한 이 원수인 간부가 되고  말았어. 간부가 되고 말았어. 여러분들이 다 간부가 되고 말았어.

예수님의 신부를 제 신부 만들라고, 주님의 양을 제 양을 만들라고, 어데 제  양인가? 내 양이라 했지 어데 주님의 양을 제 양 만들라 했어? 이런 짓 많이  해요.

○○○조사도 그거 회개해야 돼. 회개 안 하면 하나님이 막 때리고 망쳐버려.

못써. 본래부터 그런 요소가 여기에 있었는데 그 있어. 그라면 ○○○교회  죽이요.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하, 이놈 간부라. 간부라 하면 당신이 복수할라  하면 야나지게 복수를 합니다. 그래 가지고 다 은혜 있는 사람들이 절단나는 게  거기에서 절단나는 것이라.

아주 뭐 서울에 가면 다 모두 다 이 목회한다는 것이 주님의 양을 기르는 게  아니라 전부 제 양 기르고 양을 제 양 만들고 저를 땅 위에 세우기 위해서, 저를  세우기 위해서, 제가 좀 제 간판을 높이기 위해서 항상 그거라.

이번에 ○○○교회 된 저거 껍데기는 저래 됐지마는 알맹이의 동기는 어떤 내가  원인자라 하는 걸 내가 알고 있어. 모르는 게 아니라. 벌써 그거 안 것이 여러  해 전이라. 조심해야 됩니다. 알고 살아야 돼요.

주님의 양을 주님의 양으로 기르고 주님의 신부를 주님의 신부로 이렇게  대우해야 되지 그 신부를 제 신부 만들라고, 주님의 양인데 제가 왕을 만들고,  주님이 만들어 놓으니까 그저 그 용상을 제 용상을 만들어? 그 보좌를 제 보좌를  만들어? 그러기 때문에 자기를 죽이지 안한 것은 다 그것은 이리요 강도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농장에서 일을 많이 한 그 쟁기라도 그거는 주인의 식구가  아니고 아내가 아니라. 이러기 때문에 농사 다 짓고 난 뒤에 창고에다가 집어  처박아 버려요, 명년에 쓸 때까지는. 일하는 것이 자기 구원되는 것 아닙니다.

일하는 게 자기 구원되는 게 아니라.

뭐 서부교회 지금 이 교인들이 수천 명이 되고 제일 크니까 이게 백 목사 구원  아닙니다. 그건 내 백 목사 구원 아니라. 백 목사 일하는 그 일의 품삯받을 수  있는 일은 될지라도 자기 구원은 안 돼.

자기 구원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지는 그게 자기 구원이지 그거 가지고 그  모든 받은 것 가지고서 자기 높이고 이라면은 자기 구원되는 게 아니고 그것이  자기를 왕 만드는 것이라.

바울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혼자 왕이 되지 말고 우리와 함께 왕 되자’ 이  단일 왕이라. 그런고로 조심해서 시험에 들지 안하도록 그렇게 합시다.

이번에 이렇게 한 것은 이제는 이동 안 해요. 이게 이동될까 싶어서, 이동될까  싶어서 아무래도 이 교인들을 내 배경을 삼아서 이것이 나를 붙들어야 되겠다.

이래 요번에 붙드니까 붙드는 효력이 많이 났어. ○○교회도 붙드니까 그만  붙드는 효력에서 그만 공회가 뚝 떨어져 버렸지, 공회서 세워서 그거 처음에 없는 데에서 ○○○목사 보내서 월급 줘서 전세 얻는  것 줘서 이래 가지고서 칠십 명까지 그렇게 올라갔으면 그만하면 된다 그  말이오. 그만하면 그만 교회 돼요.

이런 걸 보내 가지고서 하면서 또 돈을 모두 다 옆에서 빌려서 이래 주고 또  부흥사가 가 가지고서, ○○○목사 가서 사경회 가 가지고서 그때 뭐 집도 바친  사람 있고, 딴데서. 그 교회 아닌 교인 아니오. 저 딴데 교인 주 모아 가지고  이래 바치고 이래 가지고 교회를 지어서 교회가 엔간히 예배당 지어놓고  이라니까, 무슨 작업을 하느냐? 그 교인들을 봐라’ 공회 헐어서, 공회를 헐어 가지고서  공회가 어떨 때는 공회보다 내가 너희에게 더 신임 받고 또 백 목사 교훈보다도  내 교훈이 낫다. 우리 교훈과 이간 붙이고 공회와 이간 붙이는 이 작업을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몰랐다 말이오. 왜 몰랐느냐? 그걸 알 수가 없어. 알 수가 없어.

내가 신이 아닌데 어떻게 알겠소? 거기에다 귀를 기울여야 알고 가 봐야 알지.

이래서 부리나케, 우리 총공회 산하에 있는 모든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시찰할  사람이 하나 있어야 되겠는데 누구를 낼까? 시찰할 사람을 보니까  ○○○목사님이 제일 나아. 아무도 거기에 따라갈 수 없어. 제일 나아. 이래서  이 부득이 시찰장을 하나 내 가지고 월급을 줘서, 돈 있으면 이제 차도 사  가지고서 이래 맡겨서, 그 교학실장만 아니오. 시찰장으로 그랬어.

이래 가지고 양사방 돌아다녀 보면 좀 알 터이니까 돌아다니며 좀 봐라.

이렇지만 벌써 그 작업은 늦어졌다 그거요. 이래 가지고서 이번에 무슨 일이  나니까 온 교인들이 전부 ‘우리는 총공회 반대다’ 총공회 욕을 얼마나 하고 백  목사 욕을 얼마나 하는지? 이런데 내가 저거에게 욕 얻어먹을 짓을 하지 안했어.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하지 안했어. 그저 힘껏 내가 도울라고 애를 썼지.

겨우 도와놓고 나니까 나는 예수님의 신부가 지금 단장해 간다고 주님에게  칭찬받을 줄 알고 있었는데 신부를 제 아내를 딱 만들었어. 총공회와 하나된  것보다도 저와 하나 되게 해 가지고, 그 총공회가 그라면 마귀든지 제가  마귀든지 둘 중에 마귀야. 총공회가 주님하고 하나되면 저는 주님하고 하나 안  됐을 것이고 총공회가 주님하고 원수가 되면 저는 주님하고 하나가 되는 것이  되겠지.

이래서 이번에 부리나케, 어제 여러분들 참석한 사람 봤지마는 내가 말하기를  ‘이거 긴급하다’ 임명제로 하는 것은 혼자 거의 내가 책임을 지고 하나  임명으로 ‘너는’ 안 갈라 하는 놈을 이리 가거라 저리 가거라 임명제로  이동시켜 가지고서 그 결과가 좋지 안한 게 하나도 없어. 좋지 안한 게 하나도  없어. 다 놀랠 만치 커졌지.

그렇게 하는 데에는 갖다 붙여 놓으니까 교회가 이해 못 하지 교역자가 이해 못  하지 이해 못 하는 그걸 이해를 시킬라고 내가 하는데 꼭 교역자 이동하면 내가  병이 났었어. 가만히 병난 그걸 살펴보니까 이동시킬 때마다 내가 병이 났었어.

그래서, 이 교역자는 요게는 맞지마는 저게는 안 맞아. 요게는 맞지만 저게 안  맞는 것을 요 교회도 맞을 수 있고 저 교회도 맞고 여기도 맞을 수 있도록 요게  안 맞는 걸 세워 놓고서 맞도록 할라 하니까 사람이 죽어져. 또 거기에서 맞을  만하면 또 딴데 옮겨서 저 안 맞는 데 제일 안 맞는 데 보내. 보내 가지고 또  거기에 가서 또 맞도록 만들고, 이라니까 사실은 그 진액을 기울여 가지고서  그것이 만들어졌습니다.

만들어서 이만치 만들어지고 나니까 이제는 어데로 돌아가느냐? 이거 자기를 왕  삼을라 하는 것, 교회로 자기 보좌 삼고 자기 왕 삼을라 하는 것 여기에 급급한  것이 하나 나왔고, 또 교회를 자기 것 삼을라 하는 그것이 급급한 게 나왔고, 그  방편은 무슨 방편이냐? 그 방편은 교훈을 훼방하는 것이 하나 있고 정치를  훼방하는 것이 하나 있고 그 둘로서 나눠 있다 말이오. 교훈과 정치로.

그러면 보면, 저 사람은 교훈은 자랑하나 정치를 지금 훼방한다. 정치 훼방하는  건 제가 왕될라고 하는 거라. 또 저 사람은 정치를 훼방하는 사람은 교훈  훼방해. 정치는 훼방해도 교훈 훼방 안 하는 사람 있어. 교훈 훼방 안 하는 거는  교훈은 그거 또 팔아먹어야 되기 때문에 이렇다 말이오.

이래서, 정치 훼방 교훈 훼방해 가지고서 정치와 교훈에 이간을 붙이는 이  작업은 뭐인가? 예수님의 신부를 자기 신부 만드는 이 무서운 죄를 범하고 있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그거는 전부 마귀당이라, 마귀당. 마귀 단체라, 그것이  당을 짓는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급속히, 이것을 방비해야 되겠다. 이러기 때문에 아예 이동은 그  교회 자체에서 이동이 되도록 이동을 하도록 하지 우리가 이동하지 않는다.

나중에 이동해 달라고 뭐 울고불고 하면은, 그래도 우리는 이동 안 해 주기로  했다. 이러면 네가 울고불고 하면 뭣 때문에 울고불고 하느냐? 교역자가 뭣이 안  돼서 그러냐? 뭐이 안 됐으면 너거가 너희 교회 안에서 뭐이 안 됐다 뭐이 안  됐다, 말을 해 가지고서 반수 이상이 뭐이 안 됐으니까 이거 버려야 되겠다 그리  되면은 그때 우리가 이동해라 할 수 있다. 이동해라 할 수 있다.

이동해라 하는데도 또 강제로 이동 안 시킨다. 이동해라 할 때에 ‘하라’  그라면 우리가 이동하라고 협조를 하면 그 안에서 또 만일 이동 안 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사십 명, 이동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육십 명이면은 육십 명이 좀  더 강한데 공회서 협조를 하니까 좀 더 강해지지마는 아직도 안 한다. 나중에  그래 가지고서 너거가 열심히 다 그래 말하면은 결국은 백에 백이나 백에 구십이  이동해야 된다는 게 되어지면 자연히 거기 제가 있을 수가 없고 밀려 나갈  것이라 말이오.

이래서, 이제 모든 흥망성쇠의 책임을 너희 교회들에게 맡긴다 하는 것이 요번에  청빙제로 된 것입니다.

과거 임명제로 된 것은 모든 흥망성쇠를 위에 임명하는 공회 임명하는 기관  거기에서 책임을 맡았는데 책임을 이제는 교회다가 맡겼습니다.

왜? 이제는 성장기가 됐어. 이래 맡길 수 있는 기회가 됐어. 자꾸 잘나서  뻐뜩뻐뜩 이 간부가 자꾸 생겨지니까 이거는 그대로 치료해서 해야 이게 자라  나가지 지금 앞으로 임명제 할라 하면은 안 돼요.

하나야, 하나 둘, 몇 십 교회는 되지마는 백여 교회가 됐는데 어떻게 나 혼자서  할 거라. 또 ○○○목사가 시찰장이 됐다지만 안 돼요. 다 살펴서 바로 살필  수도 없고 또 방비할 수도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임명제 또 청빙제 이래서 좀 반반이 이래 하자 하는 그런 뜻에서 말하기 때문에  그대로 둬 두고 이제 일곱 가지를 말해서 요것이 없으면은 이동을 안 한다  그렇게 어제 조문을 대략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오늘 교역자들이 남아 있는 교역자들 더러 있는데, 어짜든지 두  가지를 주의하십시오. 제가 왕될라는 것 그것 주의해야 되지 그거 되면 주님하고  대적입니다. 또 양을 제 양 만들라 하는 것은 주님의 신부를 뺏드는 것입니다.

교인을 제 사람 만드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가르치고 있소? 나면서 앉은뱅이가 자꾸 메어다가  놓고서 이와같이 구걸을 해서 둘이 갈라 먹었지마는 성전 문 안에는 못 들어가게  했어. 그러나 베드로가 그 사람들을 이겼어. 그러니까 구걸해 준 사람은 메고  돌아다녔지마는 나중에 내 몰라라 해. 그 병나은 사람이 있다가서 하, 나를  병신으로 있을 때 그때 메어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말했습니까? 그 모든  끝나버리고 말았어. 나중에 따르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사람을 낫게  해 준 사람 그 사람으로 더불어 하나되고 떨어지지 못했어. 이 성경에 환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 교역자들은 제 사람 만드는 죄를 회개를 하십시오.

또 제가 왕될라 하는 그걸 회개하십시오. 그거 아니면 죽자고 해 봐야 예수님의  원수만 됩니다, 원수만.

원수된 증거가 뭐이냐? 그걸 바로 하면 어찌 돼요? 그걸 바로 하면 어데까지  자라가요? 그걸 바로 하면 어데까지 자라간다 했어. 지극히 작은 게 지극히 큰  게 돼. 그것이 순생도 되고 그것이 대아도 돼. 그거는 다 거기에서 자라가고  있어요.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거 모든 사람들이 백 목사 저거 다 죽어가니까 곧 몇 해  안 남았다 이렇게 모두 생각을 하니까 이 마귀란 놈들이 그걸 작용을 하고 있어.

모릅니다. 여러분들 다 죽고 내가 그 뒤에 여러분들 장례를 지내고 내가 갈는지  그걸 모릅니다. 오늘 또 죽을는지도 모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런 그 마귀의 유혹에 들지 마십시오. 나는 죽어도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러니까 그런 생각 가지지 말고 마귀의 유혹받지 말고, 암만  늙어도 내가 뒤에 죽을는지 몰라요. 또 지금까지 내가 활동하고 일하는 것은  젊은 사람보다 내가 훨씬 더 많이 하고 있습니다.

‘아마 정신이 왔다 갔다 하는 모양이라’ 왔다 갔다 하지 안해. 인간이기  때문에 이래 작정해도 저래 작정해도 또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또 새로 고치요.

하루 백 번이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고치요. 우리 생각은 그러기에  불완전이고 하나님은 완전이니까 자꾸 완전을 찾아가는 거라. 눈이 있으면 좀  보면 알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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