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을 이리가운데 보낸 두려움과 기쁨

 

1980. 12. 3. 수저녁

 

본문 : 마태복음 10장 16절 - 42절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리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거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거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 말씀했습니다. 이리를 혹 동물원에 가서 봤는지  양고기를 맹수들이 다 좋아 하지만 이리라는 그 맹수가 양고기를 제일  좋아합니다. 또 양을 아주 잘 잡아서 먹습니다. 이러니까 양이 그 본능적으로  맹수 중에도 이리를 제일 두려워하는 양입니다.

이런데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주님의 구속한 이 택한 성도들을 세상에 두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가운데 두는 거와 같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양을 이리 가운데  두는 거와 같다" 그러면 이 말씀은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아 나갈 때에는 양이  이리 가운데에 있는 거와 같이 무서워서 견딜 수 없는, 그 대적이 많은 아주 참  가슴이 도근 거리고 그만 근심 걱정에 견딜 수 없을만한 그런 가운데서 살게  하셨다 그말이요.

그런고로 믿는 사람이 살아나가는 생활은 양이 이리 가운데 있는 것과 같이  그렇게 환경이 무섭고 참 자기가 자 당장이라도 절단 날 만한 그런 속에서 사는  것이 기독자의 생활이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믿는 사람으로서 아주 양이 이리 가운데에 있는 거와 같은 그런  참 마찰이 많고 무섭고 떨리는 그런 환경 속에서 사는 사람도 많이 있지만 아주  평안 무사한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자기기 무슨 고행주의 모양으로 그런 아주 고행하는 그런 것을 원해서는 안  됩니다. 어쩌든지 나도 주님을 따라가는 이 걸음에 고생을 많이 해야지 하고서  고생을 자꾸 원하는 그런 그 인생관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고생보다는 평안이  좋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그 빌릭스 각하에게 말하기를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 고난  당하는 일은 나와 같이 당하지 아니하고 이 구원에는 다 각하도 참여를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믿는 사람이 고행주의자 모양으로 고생을 제가 자꾸 만들어서 자취하는  그런 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믿는 사람이 고생을 제가 만들어서 고생하는 그런  고행주의자가 되어도 안 됩니다.

또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구속을 받은 우리들은 어떻게 살라하는 그 사는  법칙을 주셨는데 이 법칙을 져버리니까 안 믿는 사람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만  양이 양으로 있지 아니하고 양이 이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양이 이리가 되어서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과 꼭 같으니까 이것은 이리하고, 이리하고 저거  동무니까 그 이리는 이리 떼가 참 좋습니다. 이리는 이리를 서로 좋아합니다.

이리라는 그 종류는 아주 다른 종류보다도 아주 저거 동무를 좋아합니다. 양이  양을 좋아하는 것처럼 이리는 이리를 좋아합니다.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죄도 버리고, 칭의도 버리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이루는 이 화평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도 버리고, 양심도 버리고  뭐 안 믿는 사람과 꼭 같이 이렇게 사니까 주일날 온다는 그것은 일 못 하니까  조금 거리낌이 있지만 주일도 또 지킬 수 있으면 지키고 지킬 수 없으면 안  지키고 여게 가면 거게 따라 살고 저게 가면 저게 따라 살고, 형편되는 대로 따라  사는 이런 사람은 양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됐기 때문에 이리가 이리 속에  사는 데에 무슨 마찰이 있을 것이며 고통이 있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양이 이리 속에서 사는 거와  같은 그런 고통스러운 일 그런 근심되는 일 어려운 일 그런 낭파 될 일 그런  마찰이 없는 신앙 생활하는 사람도 그것은 가짜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어쩌든지 믿는 사람은 고생을 해야 된다.

이러기 때문에 나는 고생할 일만 생각해서 밥 먹을 수 있는데 밥 굶고 잘 수  있는데 자지 아니하고 공연히 자기를 자꾸 괴롭혀 가지고 이 고행주의자들은  고생을 많이 하면 구원이 되는 줄로 알아서 어떤 사람은 '이 손을 하나 들어  가지고 내가 이 손 드니까 팔이 아프지만 이 고생을 참아야 된다.' 이래 가지고  팔을 평상 이래 들고 있어서 성한 팔이 나중에 아프다 골아 가지고 바짝 말라서  고만 이 해골대가 되도록 이런 평상 요동 안하고 있는 그런 고행주의도 있고,  고생을 해야 되니까 기둥을 위에 한 개 갖 세워 놓고 고 위에 올라앉아서 곧  지금 떨어지면 깨질터이니까 도근 도근하여 고 위에 앉아 가지고 졸면 톡 널질  것이니까 졸지 아니하고 그래 가지고 그래 있는 자들, 어떤 자는 머리를 이것을  검어져 가지고 저 천장에 달아 가지고 앉으면 데이고 이래 가지고 달아 메이  가지고 그래 가지고 그 고행주의자들은 '고생을 해야 사람들은 구원 얻는다.' '그  고생을 참아야 좋은 곳 간다.' 이래 가지고 하는 그 고행주의자들 있습니다.

그 모양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공연히 당하지 아니할 고생도 그 고생을 제가  만들어 가지고 자취하는 그런 고생을 하는 그것도 예수 믿는 참된 신자가  아닙니다. 그것도 거짓뿌리 신자요. 또 예수 믿는 사람들이 고생이 없는 것도  고생과 근심 속에서 살지 안하고 고생속에서 살지 않는 것도 그것도 또 거짓뿌리  신자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기뻐하라 했는데 무슨  고생이 있으면 기쁠기 뭐 있는가? 항상 또 기뻐하라고 성경에 말씀하셔서 그렇게  가르치더니만은 오늘밤에는 또 항상 근심 걱정 고통 가운데에 있어야 된다  그렇게 말씀하니 어떨 때는 이래 말했다가 저래 말했다가 뭐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구별하지 못해서 뭐인지 모르는 얼떨떨한 그런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그 말씀도 하나님의 성경 말씀입니다.

기뻐해야 됩니다. 또 "양을 이리떼 가운데에 있는 거와 같은" 그런 양이 이리  가운데에 있으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얼마나 겁이 나겠소. 그 뭐 꼴을  먹으면 꼴이 넘어가겠습니까? 벌벌벌 떨지.

저 먼저 ○○○집사님이 개를 한 마리 보냈는데 그 개는 보니까 그저 겁이 나서  벌벌벌 떨어. 내가 속으로 양이 이리 가운데서 떠는 것처럼 네가 사람을 '너  해하지 아니할긴데 와 그래 떠노?' 그러면서 과연 내가 양이 이리 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개 모양으로 이렇게 이 떠는 일이 있나 속으로 생각해 보니까 떠는 일이  뭐 그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없고 이러니까 그것도 좀 깨닫라서 고칠 면이  있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믿는 사람은 고행주의도 안되고 또 이 고통되는 일, 번민되는 일, 근심되는 일,  두려운 일 이것이 없는 사람도 예수 믿는 사람 아니고 이 속에 살아야 되고, 아무  뭐 두려움도 없고 근심 걱정 없고 아무것도 없는 그 사람은 가짜 예수 믿어  거짓뿌리 예수 믿는 사람이라.

왜 그런 것이 없는가? 없는 이유는 자기가 하나님이 구속해 주신 죄를 안  지으려고 애를 써야 뭐 죄를 안 지으려고 해야 마찰이 있고, 의롭게 살라 해야  마찰이 있고, 하나님과 동행할라 해야 마찰이 있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  말씀대로 살라고 해야 마찰이 있지 도적 보면 같이 도적질하고, 깡패 보면 같이  깡패 노릇하고, 그만 그 환경과 주의에 따라서 그대로 행동하는데 그 마찰될 것이  뭐 있으며 어려울 것 뭐 있겠습니까?  도적질 할때 닥치면 도적질하고, 거짓말 할때 닥치면 거짓말 하고, 음행 할때  닥치면 음행하고, 미워할 일 있으면 미워하고, 이간 붙일때 있으면 이간 붙이고,  이렇게 사는 자는 양이 아니요. 양이 아니고 예수님의 구속을 받은 예수님의 양이  아니고 이것은 구속을 벗어버리고 이리와 같이 사는 자기 때문에 아무 뭐 마찰이  없어요.

제가 위천에 위천교회에 부임하니까 개평 정씨라고 하는 그 정씨가 그리 시집와  가지고 ○집사인데 그 ○집사, ○집사는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해요. 내가 황산  있는데 심방을 가니까 예수 믿으라고 전도를 하니까 뭐라고 하는게 아니라. '네  우리 개평할머니 모양으로 그렇게 예수 믿을진데 우리도 다 믿지요.' 참 그분은  참 예수를 잘믿는다고 그 내가 처음에 '개평할머니라니 누구 말입니까?' 이러니까  '아 그 (정)집사 있지 않습니까' '네 그렇습니까' 이래서 ○집사 잘 믿는 줄  알았다 말이요.

와서 요새 ○○○목사님인데 ○○○목사님 그때 집사입니다. 물었어. '○집사님 그  황산 가니까 ○집사가 예수 잘 믿는다 하는데 그분이 그렇게 잘믿소.' '그 가정이  어찌됐소.' 이러니까 '자기 혼자만 믿지 어린아이 하나 안 나옵니다.' '자기 혼자만  믿습니다.' '어린아이도 하나 안 나옵니다.' '잘 믿는데 어찌 그리되.' '그분은 뭐  제자 지내는데 가면 제사 지내고, 술 먹는데 가면 술 먹고, 세상 하는 대로 전부  다 따라하고 안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분에게는 예수님 믿어야  마찰되는 일 한 번도 못봤어.

오늘 우리가 자기가 아는대로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고, 또 자기  정도대로라도 죄를 짓지 안하려고 애를 쓰고, 의롭게 살라고 애를 쓰고, 하나님을  모시고 살라고 애를 쓰면 금방 좋던 친구가 말 한 마디에 그 사람 말 한 마디에  내가 동의를 하면 하나님께 거리끼고 그말 한 마디를 동의를 안 하면 그 사람이  의례히 동의해줄 줄 알았는데 말을 해서 '이 사람아 안그런가' 하니 '그렇지' 이  소리를 하면 당장 좋아질터인데 그 소리 하면 하나님께 거리끼니까 못하겠다  그말이요.

아 암말도 안하고 있으니까 '아 이 사람 그 안그런가' 또 말을 못하겠다. 이거야  말을 하려고 하면 이 사람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 자네 생각을 돌이키야  되겠다.' '그 틀렸다.' 이 소리를 해야 의가 되는 것인데 죄만 안 지으려고 해도  그 사람한테 동의를 안 해야 되니까 동의 하면 죄가 되니까 동의 안 하려고  암말도 안하고 있으니까 그만 그 사람이 섭섭해 가지고 '그래 이해가 안 되는가?'  '자네는 이해가 안 될걸' '안 될걸세' 이러고 그때부터 그만 그 친하던 사이가  찬물 찍어 흩음같이 이렇게 서로 벌어지게 됩니다.

거게서 의를 지키려고 하면 '야 이 사람아 내가 친하니까 자네한테 말하는데  자네는 이런 이런 자네 주관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 이 다른 사람들도 생각해  봐라 그런게 아니다.' '내게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는 좀 이렇게 이해를 해보면  어떠노.' '아 그 사람 입장을 바꿔봐라.' '그 자네가 마음을 넓게 먹고 그걸  이해를 하고 그런 모든 담을 헐고 화평을 취하게 아무리 봐도 그 자네가 그  생각이 좀 내가 보기에는 이해가 안되네.' 이래 보십시요. 당장 그 자리  싸웁납니다.

왜 양을 이리 가운데에 보낸거와 같다 말씀하셨느냐 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구속  받은 사람으로 이제 죄를 짓지 아니할 사람으로 죄라 말은 삐뚤어진 말이요.

삐뚤어진 일을 해서는 안되는 사람으로 모든 언행심사에 옳은 것을 찾아 가지고  옳은 것이면 손해가 가든지, 원수가 되든지, 뺨을 맞든지, 쫓겨 나든지 옳은 대로  해야 될 사람  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 섬기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살아야 되니까 외정  말년에도 신사참배가 나왔는데 그때 일본 사람들이 신사참배하라 하는데  목사들이 신사참배 하면 그때 양식이 귀했지만 신사참배 하면 신사참배하는  그날은 아주 데리고 가 가지고 좋은 대접도 하고 치도 태이스러 일본까지 유랍도  시켰습니다. 이렇지만 그들이 말하는 대로 신사참배하는 것은 그거는 하나님의 그  계명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안 하려고 하니까 뭐 감옥에 갖히고 매를 맞아서  그 기절도 하고 그런 어려움을 닥쳤다 그말이요.

6.25 때도 길을 가다가 인민군을 만났는데 인민군이 '아 동무' 이러면서 무슨  말을 물을 때에 말하기를 '아 수고합니다.' 그 사람들을 사람 죽이고 무슨 그  무신론이 나쁜일 하는데 뭐 그 수고한다고 칭찬할 게 뭐 있어야지. 그 말 한  마디만 하면 그만 일 없는데 그 소리를 한 마디 못하는 거라. 뻔히 할 줄 알지.

하면 그 사람이 손을 잡으면서 이러면서 '수고합니다.' 그러든지 '형제  수고합니다.' '동무 수고합니다.' 이러면 되는 것이지만 그 말을 못하고 하니까 그  사람하고 당장 거서 대립이 된다 말이요.

대결이 뜩 되어지니까 '이상하다 이러면 가슴이 도망을 치면 싶으지만 도망도  치지 못하고' 그 사람은 무장을 하고 있으니까 이래가 있는데 자 떡 묻기를  자기는 '직업이 뭐이냐?' 이러면 직업을 물을 때에 자 교역자라면 '나는 교역자,  교역자입니다.' 하면 단장 일이 난다 말이요. 또 '종교가 뭐 입니까?' 이럴 때에  대답을 하면 안해 봤자 소용 없어. 다 아니까. 그럴 때에 뭐 나는 종교가 없다  하겠소. 뭐라 하겠소? '이 나 예수 믿는 사람이요.' 마찰이라 말이요.

이러기 때문에 양이 양으로 세상에 살면 이리 가운데 사는 거와 같은 이런  마찰이 있습니다. 마찰이 있어. "항상 기뻐하라" 그말은 마찰이 있습니까? 여게  보니까 사람들이 나와 자꾸 마찰이 되어지지. 여기 17절에 말해. "사람들을  삼가라." 이 사람들에게 대해서 이런 사람은 그대로 대하고 저런 사람은 그냥  팔방미인으로서 그 사람 하자 하는대로 다 그러면 괜찮을 것인데 거게 대해서  성경에 말하기를 사람하고 접촉할 때에 네가 조심해서 구속을 벗지 않도록 해라.

이러니까 그거야 깜깜 어두운 밤에 돌아 다니면 여자가 일본 가면 임방이라는 그  여자들이 있습니다. 저 어데 어두컴컴한데 가면 그 임방이라고 여자들이 있으면서  남자들 닥치면 막 붙잡고 자꾸 끌고 가고 이럽니다. 그런 여자들이야 남자 닥치는  것이 뭐이 겁이 나겠소. 남자 오까 기다리고 있다가 지금 딱 오면 잡으려고 애를  쓰는데 두려울 게 뭐 있어야지.

이렇지만 그 정절 부인이 밤에 어두운데 이래 가다가 어떤 불량자가 나서 가지고  그 큰 변을 당하고 그렇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럴 것이니까 겁이  나니까 어두운데 안 나가고 그런데 안 간다 이거요. 그거야 왜 그런 아주 그 창기  그런 창기는 어두운데 남자가 나타나면 좋아하는데 왜 정절 부인은 정절을  지킬라 하니까 두렵다 그말이요.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살라고 할 때에 자기의  환경은 이리와 같다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아무 마찰이 없어. 아까  그 O집사 모양으로 그 사람 마찰이 아무것도 없어. 그래 놓으니까 손자 하나도  교회 안 나오요. 그래 가지고 난중에 죽을 때는 보니까 짚풀 까무러지듯이 그래  까물어졌습니다.

그래 보니까 누워 가지고 사흘 동안 말을 못해 입을 푹푹 이라고 누워서 행여나  마지막이라도 '내가 잘못 살았으니까 이 가족들에게 예수 믿어라' 유언이라도 한  마디 하고 갈란가 그걸 기다리고 있어야 암만 있어도 말 한 마디가 안 나와.

이래서 '이것은 살기도 그래 살았고 마지막도 회개 안 하니 택한 자가 아니다.'  '이러니까 나는 간다.'  나 볼일 보러 가버리고 집사들 다른 사람 기다리면 어찌할려고 난중에  마지막이라도 예수 믿어라고 자손들에게 불러 가지고 유언이라도 한 마디 하거든  나한테 기별하면 내가 와 가지고 출상 예배를 볼 것이고 그런 일 없으면 나 그  출상 예배 참석 안 하겠다. 난중에 그냥 죽어서 출상 예배는 내가 가서 참석 안  했습니다. 내가 맡아 가지고 있는 교회지만 그 출상 예배를 집사님이지만 내가 그  장례 지낼 때에 안 갔어.

믿는 사람이 이 사람과 마찰이 되지, 또 너희를 공회에 잡아다 준다 공회하고  마찰이 되지, 또 회당에서 또 채직 맞지, 또 총독 앞에 끌리 가야되지, 또  가정에서 가정에서 보니까 야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 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며 죽게 하리라" 이래 놓으니까 가족들도 막 미워서  어쩌면 저거 죽여 버릴고 이만침 된다 이거요.

남편은 저 아내 어쩌면 저거 이혼해 버리버리고 또 남편이 자면 아내가 또 어째  저거 없애 버릴고 이렇게 가정에 어려움 있지, 그 다음 보니까 동리 어려움 있지,  또 죽이려고 하는 이런 어려움이 있지, 부자간에 또 불화가 있지, 모녀간에 불화가  있지, 며느리하고 불화가 있지, 가정에 모든 사람들의 가족들이 원수같이 대립이  되어지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하면 이 세상은 악령이 주관하고 있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는 이 세상에 하나님과 화친을 해 가지고 하나님의 인도대로 가니까 온  세상 사람하고는 이렇게 마찰이 됩니다. 이게 도는 것이 정식이요 계명을 지키면  받드시 마찰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면 반드시 마찰이 됩니다. 마찰 안  되는 일이 없어. 반드시 마찰됩니다. 마찰이 되면 예수 믿는 사람은 항상 근심  걱정 고통만 하고 살것이냐? 근심 걱정 고통을 당하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는  기쁨이 옵니다.

어떤 기쁨이 오느냐? 꼭 요와 같소. 천로 역전에 보면 그 기독도가 가는데 이리  걸아가야 되는데 이 천상에서 가는 길이 이 길 한 길 뿐인데, 그리 가야 되는데  보니까 저 앞에 사자가 두 마리 그 길에 둘어 누웠어. 거 가면 당장 물리 죽을 것  아닙니까? 가기는 가야 되는데 저리 가면 사자 두 마리가 엉크리고 있으니까  가다가는 물리 죽을 것이고 못 가고 이래 멈추고 있으니까 말하기를 '내가 이러 저리 치우치지 말고, 치우치지만 말고 고 사자 뒷 다리가  묶여 가지고 있는데, 사자 뒷 다리가 묶여 가지고 있는데 그 앞 발 가지고 막  엉크리고 달라 들어도 사람 하나 빠져 나갈 만침은 그 거리가 비어 가지고 있다.

이러니까 네가 만일 치우쳐서 요러면 사자 발에 고만 붙들리 가지고 네가 삼키져  버리고 요리 해도 안 되고 이러니까 이래도 안 되고 이래도 안 되고 꼭  가운데로만 고리만 딱 가면 암만 거게 섯어도 사자 그놈들이 고함만 지르고 막  나브데기만 하지 그 발이 네 몸에 닫지 않는다. 요걸 말해줬다 말이요. 그래서 그  가면 가서 걸러 가 보니까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꼭 요와 같소.

너희들이 양을 이리 가운데에 있는 거와 같은 그런 세상살이를 살게 된다. 앞에  이 사자 두 마리가 있는 것처럼 이렇게 모든 전부 너를 삼킬라는 이런 무서운  이리의 속과 같은 이런 가운데서 네가 세상 살이를 하게 된다. 그러나 고기에  사자와 사자 오른편 왼편 이 사자 두 마리 사이에 네가 하나 안심하고 지나갈 수  있는 고런 거리가 있다. 있으니까 네가 그 사자 곁에 가서 섯더라는 데도  치우치지만 안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안하면, 신명기에도 보면 신명기  28장에 보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면 이와 같이 되리라" 했습니다.

이렇게 치우치면 가만이 섰으면 사자, 사자 그놈들만 애가 타지지 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이거요.

고것을 여게 가르쳐서 여게 말씀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어쩌란 말이요. 이리 가운데에  보냄과 같은데 그러므로있어 이리 가운데에 보내는 거와 같은데 그렇기 때문에  네가 어떻게 하라는 그게 있어요.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요게 있어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면 사자  두 마리 사이로 지내가는 거와 같이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이 같이 순결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모든 것이 형통이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뱀같이 지혜롭다 그말이 무슨 말이냐? 이제 이걸 모두다 예수님을 바로  믿지 아니하니까 어려움이 없으니까 공연히 어려움도 없는데 어려움 있다 하니까  말이 자기에게 해당되지 안한 말이라 그말이오. 어려움의 고통을 당한 사람은  알것이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 됩니다.

뱀은 마귀를 말한 것입니다. 비둘기는 성령을 가르쳐서 말씀했습니다. 뱀같이  지혜롭다 그말은 무슨 말이요? 뱀같은 지혜를 가지라 말입니까 여게 뱀같이라  그말은 같다 말은 아니라 말이요. 사람 같다 하는 그말은 사람 아니라 말입니다.

꼭 사람 아닌 것 같다 그말은 무슨 말입니까? 사람이라 말이요.

뱀 같이 지혜롭게 하라 이말은, 사탄이 어떤 것을 거론하든지 너는 그 거론을  피하지 말고 그 거론에 응하라. 예수님께서 시험하실 때에 마귀가 시험할 때에  성전 꼭대기로 갈 때에는 성전 꼭대기로 같이 갔고, 산에 올라갈 때에는 높은  산에 같이 갔어요. 광야로 갈 때에는 광야에 같이 갔습니다. 마귀가 이 세상에서  이런 일을 너의에게 당하게 하거든 네가 그 일을 네가 상대하라.

마귀가 이 세상에서 네게 대해서 너를 넘어 트리려고 너를 실패케 하려고 별별  수단 방법 모든 궤휼을 꾸밀 때에 네가 그걸 피해서도 안 된다. 그것이 없기를  원하지도 말아라. 마귀가 너희에게 어떤 그 사건 어떤 문제에 어떤 방편 그런  것을 너희에게 대해서 고걸로 너를 넘어 트리고 삼킬려고 할지라도 고것을 네가  상대하라. 상대하라. 상대하되 뱀 같이 해라. 뱀과 하나되면 안 된다. 뱀과  하나되면 안 된다. 뱀과 같이 하라. 뱀과 하나되면 안 된다. 뱀의 지혜를,  뱀과 같이 하라 그말은 그러면 뱀의 지혜를 가지라 말이요 뱀의 지혜 아닌 것을  가지라 말이요? 뭐입니까? 네 뱀의 지혜를 가지라 말이요 뱀의 지혜 아닌 것을  가지라 말이요? 뱀의 지혜를 네가 상대하되 상대하되, 상대하되 뱀의 지혜에 전부  네가 상음하되 그와 달리 해라 고말입니다. 뱀과 다른 것을 해라. 뱀의 것을 네가  가지지 말고 뱀과 하나되지 말고 뱀이 네게 방편을 백개를 네게 쓰면 그 백개  쓰는 방편을 네가 다 상대하라. 상대하되 뱀의 방편에 하나 되지 말아라. 하나  되지 말아라. 요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되지 말고 그러면 어떻게 하라 말인가?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순결이라 말은 고것을 깨끗이라는 말입니다. 깨끗이라는 말, 말을  할 때에는 그 말에 쓸말만 있고 못쓸 말이 안 끼어 있으면 말이 깨끗한 것입니다.

자 숯에는 숯덩어리에는 그 숯덩어리리에 거게 숯 아닌 딴 것이 썩여 있을  때에는 숯에 아주 울긋 불긋한 색깔 넣어서 이렇게 해 놨으면 그 숯이 깨끗한  숯입니까 숯에 다른 게 아무 것도 썩이지 아니하고 순전히 그 숯만이 있을 때에  숯을 깨긋하다 합니까? 숯을 깨끗한 게 어떤 게 깨끗한 것입니까? 순전히 숯만  됐을 때에 그 깨끗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지식에 고게 대한 지식이 어떤 물건에 대한 한 지식이 있는데  고 지식이 거게 반츰은 맞고 반쯤은 안 맞았으면 거게 대한 지식이 깨끗합니까  더럽습니까? 더렵습니까 깨끗습니까? 더럽지요. 게게 올바른 지식 고것 뿐이요.

외의 것이 없으면 고기 대한 지식이 깨끗한 지식이지요. 잡것이 없으면  깨끗하지요.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성령같이 깨끗하라.

뭘 깨끗해? 뱀이 어떤 수많은 것을 너에게 가지가서 시험을 해도 거게 상대하라.

상대하되 상대는 다하라. 뱀같이 지혜로와라. 뱀이 온갖 수단 방법을 네게 대해서  쓸때 온갖 시험을 가지고 너를 상대할 때에 그 시험을 피하지 말고 그 시험을 다  상대하라. 상대하나 뱀과 하나되지 마라.

그 어쩌라 말입니까?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거게 대해서 성령의 그 지혜가  성령의 지혜가 깨끗하게 고게 대해서 정확무오하게 정확무오하게 성신이 아심  같이 그 아심을, 그 아심을 네가 따라 해라. 그 아심을 따라해라. 네가 성령의  아심 아심이 아심같이 그렇게는 네가 완전은 아니지만 성령이 거게 대해서 그  아심같이 네가 그렇게 그를 따라서 네가 알아라 하는 그것을 가르쳐서 여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양이 이리 가운데에 있는 거와 같이 요렇게 환경이 참 심히  근심되고 걱정되고 아주 무서운 고런 것이지만 고게 이 사자 가운데로 나가는  거와 같이 하나님께서 옳고 참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 있습니다. 옳고  참되게 옳고 참되게 가르쳐 주시는 고기 있는데 고걸 발견하면 고걸 발견하면  기쁨이 됩니다. "네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온전한  기쁨으로 바꿔집니다.

왜? 고게 대해서 고것이 자기에게 참 보배로운 결과를 맺을 수 있는 고 현실인  것을 자기가 발견하고 고것 때문에 구원이 되고 고것 때문에 그 이웃의 구원이  되고 자기 구원이 되고 그것으로서 대성공을 할수 있기 때문에 발견하고 난  다음에는 기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야고보서 1장에 말씀하시기를 "네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것은 믿음의 시련이다." "네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그러면  모든 것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고라고 난다음에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에게 구하라 그리하면 반드시  주시리라." 우리가 요것도 자기가 실제로 당해서 체험하기 전에는 이 말에 대해서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모릅니다.

우리가 이리와 같은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시대에서 국가에서 모든  국제에서 자기에게 별별 그 어려움이 있는 그 어려움 속에는 자기 지혜로나  인간의 어떤 통계 어떤 그 제 삼자의 어떤 그 위로 어떤 권면 어떤 지도 어떤  것이 있다고 해도 그 두려움을 물리치지 못합니다. 그 두려움을 피하지 못합니다.

피하면 조금 후에 그보다 몇 배나 더 큰 것으로서 다시 바꾸워 오게 됩니다.

그러나 거기에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에게  구하라" 하는 요 계약대로 하나님에게 고게 대해서 분명히 피할 길이 있습니다.

감당치 못할 시험을 당치 않게 하시겠다고 약속했고, 또 감당 못할 시험을 피할  길을 내사 감당하게 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피할 길을 내사 감당하게 하신다고  요 하나님의 계약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 말씀해놨어.

이러니까 고기에 하나님이 고게 대해서 주시는 지혜 잡것이 썩이지 아니한 것,  자기 마음에도 잡것이 들어서 그러하고, 생각에도 잡것이 들어서 그러하고, 비판과  평가에도 잡것이 들어 그러하고, 소망에도 잡것이 들어 그러하고, 잡것이 들어서  이렇지만 이렇지만 사자에게 물리는 것 그렇게 모형한 것처럼 이렇게 잡것이  들어 가지고 자기에게는 큰 고통이 되는데 이 기도하는 가운데서 잡것이  제해지고 자기에게 성신이 깨끗함 같이 자기가 깨끗해지는  그러면 성령은 아니지만 비둘기 같이 순결하는 것, 비둘기는 아니요 비둘기 같이,  우리는 비둘기는 아니요 성령 되는 거는 아니요. 성령은 아니지만 성령은  아지지만 성령은 아니지만 성령의 깨닫음에는 자기 깨닫음이 같이 된다 이거요.

이리 되면 자기에게 그것이 없는 것보다 유익이 됩니다.

그래서 여게 고 다음에 말씀 하시기를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때에  무슨말 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 성령이시니라" 성령이시니라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그때에 이 모든 우리에게 어려움 닥치는 것은 요것은 왜 어려움을  닥치게 하느냐? 성령과 동감 성령과 동질 동사상 동견해 동평가 요것을 가지는  것 외에는 평안한 길이 없고, 성령과 동행할 때만 평안하도록 하나님께서 성령과  동행을 강행시키는 거라. 성령과 동행하는 이것을 어쩌든지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도록 그렇게 만드는 역사라.

이러기 때문에 그 비유에 "양을 이리 가운데에 둔 거와 같다." 그러면 이리  가운데에 양이 있으면 건너편에 목자가 서서 있는데 그 이리가 양을 둘러싸  있으니까 그 이리는 보이는 목자를 두고서 제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이래때가  막 둘러 싸오니까 이리때 둘러 싸오는 그 이리가 양으로 하여금 어디로 가게  합니까? 그 양으로 어디로 가게하는 것입니까? 어디로 가게 합니까? 딴데로  도망하게 하요. 목자에게로 가게 합니까? 뭐 목자가 있으면 그때는 물이 있어도  상관 안하고 뛸것이고, 그 덤불 있어도 상관없이 뛸 것이고, 불이 그 가운데  있어도 터럭이 타는 줄 모르고 뛰 달라들 것입니다. 고런 비유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이리 같은 어려움이 오고 있는 그것은 말씀을 지킬라고 하면  필연적으로 어려움이 오고, 이런 어려움이 있는 것은 주님과 가까와지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이 하시는 것인데, 이 어려움이 있을 때에 제가 인간 생각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사람이 물어도 소용 없습니다.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에게 구하라 주시리라"  하나님에게 여게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될 것을 하나님에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해결책을 자기에게 주실 때에는 벌써 그 해결책 얻어 놓으면  담대해요. 평안해요. '문제 없다.' '안심된다.' '이거야 문제 없다.' 평안부터  옵니다. 평안이 오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아니고서 그것이 없던  것보다 훨씬 좋게 형통해져서 좋은 결과를 맺게 됩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 사도가 빌립보에 가 가지고 복음을 전하다가 고만  귀신 들린 그 여인에게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냥 두고 지나가면 안될 것이고 할  수 없어서 여러날 동안 좀 망설이다가 '이걸 귀신을 쫓아내고 가야되지 않느냐?'  하나님의 명령이 들어 오니까 할 수 없이 쫓아 냈다 말이요. 쫓아 내고 나니까  그만 그 도시에서 그게 대선지라 하는 것인데 무리가 일어나 가지고 얼마나  두드려 맞았습니까. 두드려 맞고 책고를 해서 발로 채우고 손도 채우고 가지고  깊은 옥에 가뒀습니다.

고게 뭐이냐? 양이 이리 가운데에 있는 거라. 갖치 가지고 앉아서 하나님께  기도했어.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반드시 주시리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래 가둬  놓고 가둬 놓고 몇 시간 있었는데 가둬 놓고 몇 시간 있었소. 몇 시간 있다가  마구 전신이 터져 가지고 이래 가지고 있는데 몇 시간 지나고 난 다음에  이분들이 비둘기 같이 순결한 성령같이 고게 대한 정확한 깨닫음과 정확한  가치성을 알고 방편을 알고 또 하나님의 돕는 이 정확한 그 자기의 중보자  자기의 구주를 발견했습니다.

이러니까 밤중됐을 때에 그때가 이제 비둘기 같이 순결하게 되는 때라. 밤중될 때  뭐 그 아프고 두려웠지만 아픈 것도 간곳이 없고 두려운 것도 간곳이 없고 못  견뎌서 찬송을 했다 말이요. 어떻게 기쁜지 찬송을 해버렸어. 찬송할 그때에  찬송하는 그 찬송 소리와 동시에 지진이 나 가지고 옥문이 열리고 전부 죄수들이  다 고랑이 다 풀어져 버렸어.

이러니까 처음에 두드리 맞고 그럴 때 봐서는 옥문이 열리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아마 이때 도망 치라 하는가 보다 도망을 치지만, 이 깨닫고 나니까 어떻게  기쁘고 즐거운지 도망칠 맛이 있어야지 가만히 앉아서 죄수들이 갈라하기 때문에  '가지말라 하나님의 역사 있다.'  그래 나중에 옥사장이 옥문이 열렸지 죄수들은 다 풀렸지 그 무서운 죄수들이 다  도망 다 갔으니까 저는 사형이라 말이오. 사형 당하는 것보다 내가 자살하는 게  낫다 자살할라 하니까 바울이 보고 '아 죄수 하나도 안 갔으니까 안심하고  자살하지 말라.' 이걸 보니까 옥사장이 자 이런 권능도 기적이지 또 죄수 하나도  못 나가구로 했지 또 이런 분이 여기 있지 이러니까 어떻게 놀랐든지. 앞에 와  가지고 절을 하면서 '내가 어찌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너와 네 집이 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그날 밤에 모시고 가 가지고 예배 보고 그날  밤에 교회 섯습니다. 하루 밤에 세운 교회는 빌립보 교회입니다. 이 빌립보 교회  보면 아주 깨끗한 교회요.

이러니까 믿는 사람이 고행주의는 못씁니다. 고생을 좋은 게 아니요. 그러나 주의  말씀대로 살라고 하면 자꾸 고생이 옵니다. 고통이 옵니다. 그 고통은 하나님과  나와 가까와지기를 원하는 것이요. 네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어려움 속에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좁은 길이 있기 때문에 사자  속에 같은 좁은 게 있기 때문에 고 길을 발견만 하면 우리에게는 한없는 평강이  오고 담대함이 오고 기쁘고 어떻게 해야되는 것을 환하게 알고 하나님의 능력이  와서 역사하고 그러니까 그 어려움을 인해서 큰 승리를 이루게 되는 것이  기독교인 것입니다.

다니엘 같은 그런 사람들도 그거 다 이 비결을 알았기 때문이 이 비결을 알았기  때문에 여러번 경험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로 믿으려고 하면 어려움이  그칠세 없이 어려움이 닥치는 것이고, 닥친 그 얼려움마다 신기한 해결책이  생겨지고 그 해결책이 생겨진 후에는 그 어려움을 당하지 아니했으면 이룰수  없는 그런 일들이 이루워져 가지고 자타의 구원이 되어지는 이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서부교회에서 기도회를 시작하고 벌써 얼마나 됐는지 한 달이  됐는지 두 달이 됐는지 아마 그럴터인데 기도회 시작해 가지고 여섯 시  반으로부터 여덟 시 반까지 두 시간 사이에 기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런 어려움이 아니요. 지금은 국가적인 어려움이  있습니다.

저 광주에는 거게는 간첩들이 와 가지고 그들이 주동이 되어 가지고 그렇게 아주  반란을 일으켜서 우리 동족이 얼마나 많이 죽었습니까. 그들이 다 잡히지  아니했습니까. 잡혀 가지고 다 이북에서 월남한 그런 간첩들이라는 것이 주동된  것을 그게 나타나지 아니했습니까. 이랬는데 이 일에 대해서 일본 미국서는 이  일을 협조가 있습니다. 좌익이 한 일인데 좌익이 하는 일을 협조하고 있소. 이게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협조하고 있는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냐? 월남전에 미국이 좌익 협조해 가지고  이 미국이 자꾸 내정 간섭하고 협박을 해 싸으니까 미국이 얼떨떨 해 가지고  그들에게 간염되어 가지고 월남전에서 손을 들어서 기독자가 그시에  몰사했습니다. 이런 어려운 일이 있어. 이것이 우리 앞에 사자 두 마리가 있어.

암만 있어도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사람은 그 사이로 잘 평하게 빠져 나가서  없어서는 안될 그 어려움이요 보배로운 승리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 진액이 원수에게 멸망을 받아야  될 그 진액을 그것을 드려서 기도함으로서 그 진액 다 안드리요. 그 진액 십분지  일만 드려도 돼. 기도하면 그 모든 환란을 방지 할 수가 있고 우리 힘으로  아무래도 할 수 없는 그 일을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 가지고 내가  못할 일을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 가지고 모든 성공을 할 수 있는 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시작한 이 기도회에 무심히 생각하고 이 기도에 참여 안하는  사람은 저는 두 말할 것 없이 예수를 내줘야 됩니다. 내주면 좋은 줄 압니까.

소련에 유물주의로 혁명될 때에 예수교가 그렇게 부패했를 때에 하나님이  진노해서 유물주의로 혁명이 될 때에 예수 내놓은 사람 다 죽었소. 예수 팔고 다  죽었습니다. 기도하고 그때 승리한 사람들은 그 일이 나기전에 다 몽고로 만주로  하나님께서 피난 시켜서 다 이동시키고서 그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어쩌든지 우리가 기도로 방비해야 될 이런 큰 환란이 우리 앞에  닥쳤습니다. 기도 하면 없는 것보다 크게 영광이 되고 한없는 영광이 될 것이고  기도 안하면 우리가 패전되고 말아요.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뱀의 활동에 뱀의 지혜에 뱀의 작용이라 말이요. 뱀의 작용에 우리는 다 성공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를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상대할 때에 성령의 잡것이 없는 것  같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잡된 것이없는 깨끗한 기독자만 되면 그런 거는 다  유익이 되고 우리에게 보배로운 선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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