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의 문

 

1981. 1. 25. 주일오전

 

본문:요한복음 10장 1절∼6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본문을 간단하게 해석하겠습니다.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했습니다.

여기에 우리라고 말하는 것은 인생을 구원하는 구원을 가리켜서 우리라 그렇게  비유했습니다. 인간이 다 구원을 잊어버리고 구원 밖에서 멸망을 하고 있는 것이  사람들인데 이 우리 안으로 양을 우리 안으로 인도해서 모든 해를 다 방어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는 이 구원을 베푸셨는데 이 구원을  가리켜서 우리라 비유했고,“우리에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목자요” 이 우리의  문은 예수님의 그 구원을 가리켜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구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려는 이 구원으로 들어가는 자는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목자요,

“다른 데로 넘어 이 구원에 들어오는 자는 절도요 강도라” 절도와 강도는 양을  도적하는 것이 절도요 강도입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마귀에게로 도적해 가고, 생명에서 사망으로 도적해 가고, 축복에서 저주로  도적해 가는 것을 가리켜서 도적이 도적해 간다 그렇게 비유했습니다.

그러면 도적이라고 여기에 말한 도적은 어떤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구원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구원하는 것은 다 인생을 멸망케 하는 악령의 일꾼이 되어서 사람을  생명에서 사망으로, 하나님에게서 마귀에게로, 의에서 죄로, 축복에서 저주로  이렇게 인간을 멸망으로 끌고 가는 역사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하지 아니하고 천하에 어떤 이름이든지, 무슨 종교든지,  무슨 교주든지, 어떤 교리든지 예수님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은 다 인간을 멸망시키는, 인간을 삼키는, 하나님의 적이요 인간을  도적질 해 가는 도적이요 강도라는 것입니다. 절도는 암암리에서 인간을  멸망시키는 것을 말하고 강도는 세력을 가지고서 강압적으로 인간을 멸망시키는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도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 어떤 종교에 어떤  이름, 어떤 사상 그 사상, 어떤 단체나, 어떤 주의나, 어떤 지식이나 어떤  것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인간이 구원될 수 있는데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구원하지 안하고 다른 이름을 가지고 구원하는 것은 다 절도요 강도인 것을  말합니다.

또 예수님의 이름을 구원을 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 무한한  정죄의 멸망에서 무한하신 분이 전부를 다 희생해서 구원한, 대행해서 사죄를  주셨고 칭의를 주셨고 하나님과 화친을 주셨는데 이 세 가지 대속을 가지고  인간을 구원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절도요 강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빙자하지마는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아니하고 이름만 가지고 그 다음의 인생관이나 모든 도덕관이나 정치관이나  소망관은 저거 마음대로 만든,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을 가지고 인간을 구원하지  안하는 것은 다 절도요 강도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빙자한다 할지라도 그가 영감과 진리 이 진리를 가지고  하나님이 선포해 놓으신 이 구원 도리를 가지고 인간을 구원하지 아니하는  그것도 다 실은 절도요 강도입니다. 그 운동은 사람을 멸망에 빠뜨리는 것이요  사망에 빠뜨려서 기본구원은 그가 해하지 못하지마는 건설구원은 다 멸망을  시키는 절도요 강도들인 것입니다. 영감과 진리로 한다 할지라도 그가 인간의  힘을 가지고서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의사와 방편을 가지고 하는 것은 다  도적이요 강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버린 절도요 강도인지, 예수님의 세 가지 이 구속을  버리는 절도요 강도인지, 영감 도리를 버리고 인간 생각대로, 인간 지혜대로,  인간 방편대로, 인간의 힘으로써 구원하려고 하는 이 절도요 강도인지 우리가  이것을 구별해야 되겠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자기 가정을 구원하려고 어떤 성직을 맡아서 유치반 반사, 중간반  반사, 집사, 권찰, 장로, 목사, 또 유치반 학생으로서 학생을 구원하고, 중간반  학생으로서 학생을 구원하고, 장년반으로 장년을 구원하는 이 구원을 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이름을 버리면 절도요 강도요,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을  가지고 이 대속으로 인간을 구원하지 안하면 절도요 강도요, 영감과 진리로  인간을 구원하지 안하면 절도요 강도입니다. 이것은 그 결과적으로 인간을  멸망시키지 인간에 구원은 줄 수가 없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합니다.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오는 자가 양의 목자라” 했습니다.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오는 자는 어떤 자인가? 신인양성일위이신 이 예수님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자요, 예수님의 무한하신 세 가지 사죄를 가지고 인간을 구원하고,  칭의로 구원하고, 하나님과 화친된 이 화친으로 구원해서, 사람을 사죄 받았으니  사죄를 기념하여 사죄를 놓지 아니하고, 칭의를 놓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결합을  놓지 아니하여 이 세 가지를 기념하는 이 세 가지의 대속을 받은 자로서의 이 세  가지 대속 받은 자로 이 세 가지 대속으로 살게 하는 이것이 양의 우리에 문으로  통과하는 자입니다. 또 진리와 영감으로 자기가 사는 그것이 양의 우리에 문으로  통과하는 자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예수로 살고, 세 가지 대속으로 살고, 영감과 진리로 살 때에  그것이 비로소 자기도 구원할 수 있고 다른 사람도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 구원에 목자입니다. 자기가 예수로 살지를 못하고, 이 세 가지 대속으로  살지를 못하고, 진리와 영감대로 살지 못하면 이것은 양의 우리의 문에 들어가지  못한 자입니다. 양의 우리에 문으로 통과하지를 못한 자입니다.

양의 우리에 문으로 통과는 아무나 인간 단독으로는 할 수가 없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이요 인간이신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으로 사는 것,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으로 사는 것, 진리와 영감으로 사는 것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없으나 이렇게  살려고 할 때에 문지기가 문을 열어 준다고 말씀했습니다. 문지기가 문을 열어  준다는 이 문지기는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을 가리켜서 말씀합니다.

인간이 신인양성일위로 되어 있는 우리 구주이신 예수님으로 생각하고,  예수님으로 원하고, 예수님으로 움직이고, 예수님으로 판단하고, 예수님으로  평가하고, 예수님으로 경영하고, 예수님으로 희로애락을 하는, 자기는 있으나  없는 것 같아 바울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그대로의 내 언행심사는 이루어진다는 것을 간증한 그대로  예수님으로 사는 것, 예수님의 마음으로 내 마음을, 예수님의 뜻으로 내 뜻을,  예수님의 지식으로 내 지식을, 예수님의 희로애락으로 내 희로애락을 삼아서  사는 것, 이리하여 예수님의 사죄를 기념하고 칭의를 기념하고 하나님과 화친된  이 하나님과 동거 동행하는 것을 나타내는, 성경 말씀대로 영감대로 사는 이것을  우리가 원할 때에, 이 문으로 통과하려고 원할 때에, 이 문으로 통과하려고  노력을 할 때에 문지기가 그를 위해서 문을 열어 준다 했습니다. 성령님이  이렇게 양의 우리에 문이 되는 예수님을 통과할 수 있는, 예수님을 힘입을 수  있는 이 자체가 생애가 되어지도록 성령님이 도와 주실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 다음에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자기를 통해서 구원하기로 하신 하나님의  양이며 자기에게 분담된 자기 양, 자기를 통하여서 구원하시기로 한 자기 양, 곧  주의 양이요 자기의 양입니다. 자기를 통해서 구원 얻을 그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의 인도를 받습니다.

음성을 듣는다 말은 양의 우리로 통과한 목자, 예수님으로 살고, 세 가지  대속으로 살고, 진리와 영감으로 사는 그는 목자가 됐기 때문에, 그는 인간  구원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의 인도를 자기에게 분담된 양떼가 받는다. “그의  음성을 듣는다” 인도를 받는다.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느니라” 그럴 때에 자기에게 속한  구원 받을 자들이 하나씩 둘씩 순서대로 구원을 받게 되느니라. 이 우리를 문을  통과치 아니하고 자타를 구원하려 하는 것은 움직이면 움직이는 것만치, 마치  깊은 구렁텅이에 빠진 자가 움직이면 움직이는 것만치 깊이 빠져 들어가는  것처럼 이 양의 우리의 문으로 통과치 아니한 자는 인간 구원에 노력하면 노력할  만치 자타는 멸망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말씀합니다.

4절에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자기 양을 다 불러내어 놓은  후에, 다 불러낸다 말은 자기를 통해서 구원시킬 자는 다 구원될 수 있는 기반이  닦여졌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통해서 구원할 자는 자기가 직접 자기를 통해서  구원한 자를 또 통해서 구원, 어쨌건 자기의 계열을 통해서 구원시킬 자는  하나도 구원받지 못할 자 없이 다 구출할 수 있는 모든 준비가 갖추어진다는  것입니다.

“앞서 가면” “앞서 가면” 자기만 이 양의 우리의 문으로 통과한 그 생애를  계속하면, 자기가 양의 우리의 문으로 통과한 그 생애를 계속하면, 예수로 사는  생애를 계속하고, 사죄로 사는 생애를, 칭의로 사는 생애를, 하나님과 결합된  화친으로 된 이 생애를, 진리와 영감대로 사는 이 생애를 제가 하면, 저만 그  생애를 하면, “앞서 가면” 이제는 양들에게 대해서 염려할 것 없이 저만 앞서  가면,“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오되” 자기에게 소속한 양은 그의  인도를 믿기 때문에 그의 구원을 받았어. “음성을 아는고로”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자는 자기의 계통에서 하나님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요 구원 음성을  아는고로, 새사람은 아는고로,“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양의 우리에 문으로 통과한 그자의  인도, 그자의 구원, 예수님으로 사는 자의 인도, 예수님으로 사는 자의 그 전도,  사죄와 칭의와 새생명으로 사는 자의 그 전도 설교 인도, 진리와 영감으로 사는  자의 그 인도 설교 전도 그것은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자가 인정하고 하나이기  때문에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따라오지 안하고 도리어  도망치느니라.

중생된 자는 양의 우리에 문으로 통과한 자의 인도는 받아서 구원을 얻지마는  양의 우리에 문으로 인도를 통과하지 아니한 그자의 구원은, 그자의 설교는,  그자의 전도는, 그자의 인도는 그 결과가 도리어 멀리 달아나고, 원수가 되고,  벌어지고, 아무런 마지막에는 자기를 따라오지 안하고 자기 준 구원이 구원이  되지 아니하고 그는 멀리 도망치느니라. 자기가 양을 멸망을 인도하는 인도이기  때문에 산 양들은 다 도망치느니라.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자들은 이렇게 인도할 때에 인도를 따라오고 멸망을  받을 자들은 물러가고, 통과하지 아니한 자가 인도할 때는 구원 얻을 자들은 다  도망치고 멸망받을 자들은 그리 모여서 드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는 것입니다.

6절에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알지 못하니라” 인간의 구원 문제가 양의 우리의  문인 예수님인 예수님으로 통하지 않고는 인간에게 구원이 없다는 이 말씀을  했지마는 따라다니는 자들은 알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을 제가 먼저 받아야, 예수님으로 인해서만 인간이  구원되니 예수님으로 인해서만 구원되는 이 구원을 제가 먼저 받아야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고, 이 구원을 받지 못한 자가 아무리 구원 운동을 해 봐도  구원 받을 자는 도망치고 멸망 받을 자는 자기에게 모여들고, 예수님으로 인한  이 구원을 받은 자는 자기도 구원하고 구원 받을 자는 몰려오고 구원받지 못할  멸망자는 다 물러가나니 하는 인간의 영원한 문제가 매여 있는 인간 구원의  열쇠되는 이 말씀을 했지마는 듣는 자들은 알지 못한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내가 목자인지 절도요 강도인지? 내가 어떤 절도와 강도에게  끌려서 일생 동안 예수 믿어 구원 얻는다는 것이 멸망을 마련한 내 가련한  신세가 되어 있는지? 내가 어떤 절도와 강도에게 지금 끌리고 있는지 참  목자에게 끌리고 있는지? 내가 양의 문을 통과치 아니한 내 구원을 이루지 못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는 내 구원을 이루지 못한 거짓된 절도요 강도가 왜  가지고 나만 망칠 뿐만 아니라 내게 속한 모든 자를 망치는 이 절도와 강도인지  내가 참으로 내 구원을 이룬 선한 목자가 되어 나를 통해서 구원시킬 자를  구원을 하고 있는지? 내가 목자가 되어 있는지 절도와 강도가 되어 있는지  이것을 우리가 이 시간에 구별해야 하겠습니다.

나도 이전에는 절도요 강도요 목자요 뒤섞여서 범벅타령을 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목자요! 절도요 강도가 아닙니다! 내가 알기에는 다시는 절도와 강도가  되지 않으려, 아니 하려 합니다. 되지 않게 해 주시려 합니다. 주실 줄  믿습니다.

나는 절도와 강도로서 내게 속한 양떼들을 멸망 가운데로 빠뜨리는 그런 일이  많이 섞여 있었고 양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일도 섞여 있었고 비빔밥처럼  그렇게 섞여 내가 목자노릇을 했습니다. 나에게는 인본주의가 많이 있었습니다.

자율주의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내가 지금은 발견합니다.

이제는 나를 지키시는 당신이 지키시기 때문에 나에게 인본주의가 없으련,  자율주의가 없으련, 내 사욕주의가 없으련, 왜? 내가 내 사욕을 다 버렸고  이제는 소유와 몸과 생명을 주님의 제단 위에 완전히 올려놓았습니다.

이런고로 이제 후로는 내가 이전과 같은 목회의 방편을 쓰지 않는다고  여러분들이 오해를 하고 감정 시기 질투하지 안해야 될 것입니다. 내가 이전에는  구원할 때에 개인의 살림도 살아줬고, 연탄부엌도 만들어 줬고, 집 기초도  만들고, 벽도 만들어 줬고, 문도 발라줬고, 집회 가면은 솥도 걸어줬고, 천막  자리도 닦아줬고, 오만 것 다, 밥해 먹을 나무도 대 주고 이렇게 해서 이제  하나님께서 차차 숫자를 많게 해서 숫자가 많아졌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개인 상대를 해서 내가 그렇게 하려는 그런 역량도 없고, 무리가  많기 때문에 역량이 없고, 이제는 내가 여러분들에게 목자로서 봉사할 것은  성경을 연구하는 데에, 영감으로 바로 깨달아지는 데에, 내가 주님 앞에서 나와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데에, 나를 먼저 위한다 그 말은 나로 하여금  여러분들을 위할 수 있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 위하는 것은 그 외에는 딴 게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도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여러분들에게  전달하는 것.

이 세 가지로만 내가 봉사해야 여러분들에게 봉사가 바로 되고 끝까지 미칠 수가  있지 이 외에 개적 봉사는 내가 할 수 없는, 벌써 양이 많아졌기 때문에  나로서는 이 세 가지 방편밖에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런고로 이것은 나의 간증입니다. 내가 그렇게 해 줬지마는 거기에는 내가 양의  우리의 문으로 완전히 통과를 못 했기 때문에 내가 원치 아니하는 절도와 강도가  되어 양들을 해쳤고 양들을 오히려 사탄에게로 세상에게로 도둑해다가 준 그런  결과가 맺은 일이 있는 것을 제가 잘 압니다.

이제는 양의 우리에 문으로 통과하여 선한 목자로 여생을 보내려 합니다. 이제는  예수님으로 살고, 사죄로 살고, 여러분들이 나를 볼 때에 내가 만일 범죄하거든  나에게 충고해 주십시오. 내가 사죄로 살고, 칭의로 살고, 하나님과 결합으로만  살고, 성경대로 살고, 영감대로 살고, 이리하여 이제까지 선한 목자가 되지  못하였던 것을 선한 목자의 생애로 여생을 보내려고 하나님에게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 주신 것을 내가 분명히 보았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여러분들께서도 이런 점이 있으리라 해서, 자기가 가정을  구원하려고, 자녀를 구원하려고, 자기의 믿음의 식구를 구원하려고 이렇게 애를  썼지마는 목자가 되지 못하고 절도와 강도가 되어서, 목자가 되지 못하고 절도와  강도가 되어서, 양의 우리의 문을 통과치 않은 것은 절도요 강도입니다. 예수로  살지 못한 것은 절도요 강도입니다. 나는 섞여 살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자 같기도 하고 절도 강도 같기도 하고 이렇게 참 비빔밥처럼  혼합자로 살았습니다.

이러니까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의 비밀을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절대로  양이 목자보다 앞서지 못하는 것을 성경이 여기에서 말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비빔밥 신앙생활 했으니 여러분들도 반드시 비빔밥 신앙생활 했을 것이요 그렇지  안하고 앞선 사람은 벌써 나의 목자로서 그 사람은 여기에 속해 있지를 안했을  것입니다. 이런고로 나를 보아서 여러분들을 알기 때문에 지금 이 말씀을  증거합니다.

이 시간에 나는 과연 양의 우리의 문으로 통과를 완전히 한 목자인지? 내가  가정에 목자가 되어 있는지? 내가 구역 목자가 되어 있는지? 내가 유치반이면,  중간반이면, 장년반이면 내가 맡은 자에게 참으로 목자가 되어 있는지? 그들이  나를 따르는지? 내가 주의 음성으로 그에게 들려주는지? 절도인지 강도인지  목자인지 이것을 이 시간에 우리가 구별해서 어서 바꾸어 섭시다.

내가 문으로 통과를 하고 있는지 내가 다른 데로 넘어 출입하고 있는지? 양의  우리에 문으로 통과는 인간 단독은 절대 안 됩니다.

“문지기가 저를 위하여 문을 열어 줄 것이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성령님은 예수님으로 통과하려고 할 때에, 예수님으로 살고, 사죄로  살고, 칭의로 살고, 새생명으로 살고, 진리와 영감으로 살려고 하는 자에게  성령이 도우셔서 살게 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과연 성령님이 나를 도와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이 문을 통과했는지? 나는  통과를 못하고 있는지? 다른 데로 출입하고 있는지? 예수로 살지 못하고 나로  살고, 사죄로 칭의로 새생명으로 살지 못하고 진리와 영감으로 살지 못하고  내대로 살고 있는지? 내 자율로 살고 있는지? 내 사욕을 살고 있는지? 내  주관으로 살고 있는지? 내 중심으로 살고 있는지? 우리가 이것을 이 시간에  구별해야 되겠습니다.

문으로 통과했는지 문으로 통과를 못 했는지? 문지기가 나의 노력을 보고  문지기가 안타까와 나를 도와서 이렇게 예수로 살게 해 주시는지? 이름만  예수지, 말로만 사죄와 칭의지, 읽고 기억만 영감이요 진리지 내가 그대로의  사람으로, 그대로의 생활로, 그대로의 행동으로 해지는지? 이것이 문지기의  도움을 입고 못 입는 이것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양들이 자기의 음성을 알고 따라온다고 했습니다. 과연 내 구원이 내게  속한 자의 구원이 되고 있는지? 나 혼자 구원이 된 줄로 아는데 나를 통한 구원  받을 자들이 구원 이루어 가는지 안 이루어 가는지? 자기 낯에 흉은 보지 못해도  남의 얼굴에 발린 그 흉한 것은 알 수 있는 것처럼 자기가 자기 구원을  모를지라도 자기를 따르는 자들의 구원이 과연 이루어지고 있는지? 이것을  우리가 세 가지 구별해서 이 시간에 돌이키는 복된 자리에 금년에는 입각해서  걸어가야겠습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이 무리들이 예수님의 비유를 들으나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알지 못하더라” “알지 못하더라”자기 한 사람의 양의 우리에 문으로  통과하는 여기에서 자기에게 속한 모든 자가 구원 얻고, 자기에게 속하지 안한  멸망자가 공연히 자기를 둘러싸서 그것 참 자기 양인 줄 알고 속아서 멸망받을  자들이 주 모여 가지고 자기 양인 줄 알아서 자기 양 아닌 것들이 자기에게  모여들고 있는지? 참 자기 양이 모여서 모여들어서 구원을 받는지? 자기 한  사람으로서 자기와 자기에게 속한 모든 자의 구원이 결정되고 자기 한 사람의  노력에서 문지기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안 일어나는 이것을 예수님은  말씀했으나 그 무리들은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여기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 한 사람의  멸망으로 자기에게 모든 사람의 멸망이, 멸망의 원인되는, 자기 한 사람의  구원이 바로 될 때에 모든 사람의 구원 자기에게 속한 사람의 모든 자의 구원이  낱낱이 빠짐 없이 다 된다는 것, 이 중대한 문제가 우리에게 놓여 있는데 우리는  어떤 자인지 고요히 깊이 자기를 비판합시다.

나는 분명히 섞인 걸음을 걸었습니다. 절도 강도 목자 뒤섞여서, 여기에는 내게  속한 양들도 왔을 것이고 내게 속하지 안한 마귀에게 속한 것도 왔을지  모르겠습니다. 왜? 내가 문을 완전히 통과 못 했기 때문에. 통과한 온전한  목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입술로만 양을 위해서 생명을 버리기를 원했지 버릴  수 있는 준비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모르지마는 이제는 됐습니다. 이제는 내 중심 깊은 속까지 이것이 진정 내  중심에 진정 소원이 돼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주셨으니  여러분들에게도 양의 우리의 문을 통과할 수 있는 은혜를 내게 주신 주께서  여러분들에게도 주실 것을 알고 이 말씀을 선포합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절도 강도냐 목자냐? 양의 우리에 문으로 문지기를 힘입어서 통과를 하고 있느냐  아직까지 통과를 하지 못하고 있느냐? 내게 속한 양들이 과연 따라오느냐  달아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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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3 양의 우리의 문으로 들어오는 자와/ 요한복음10장 1절-6절/ 880603 지권찰회 선지자 2015.12.06
762 양의 피난처/ 마태복음 10장 16절-17절/ 890522월새 선지자 2015.12.06
761 어떻게 살까/ 에베소서 5장 15절-17절/ 791021주전 선지자 2015.12.06
760 어떻게 살까/ 요한계시록 18장 1절-3절/ 791021주후 선지자 2015.12.06
759 어려운 시험이 올때 할 일 2가지/ 베드로전서 1장 3절-7절/ 871020화새 선지자 2015.12.06
758 어려움 당할 때/ 야고보서 1장 2절-4절/ 830831수야 선지자 2015.12.07
757 언행심사의 기능/ 갈라디아서 6장 6절-8절/ 840526토새 선지자 2015.12.07
756 에덴동산/ 창세기 2장 7절-9절/ 880808월밤집회 선지자 2015.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