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동산

 

1988. 8. 8. 월밤집회

.

본문: 창세기 2장 7절∼9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우리는 늘 복잡하고 분주해서 참 정신을 못 차릴 만치 그렇게 분망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살고 난 뒤에 뒤를 돌아보고 생각하면 안 해서는 안 될 그런 일을  한 것은 별로이 없습니다. 또 할 만한 그런 일을 한 것도 별로이 없습니다. 모두  보면 잘못한 그런 일들이 가득히 차 있습니다.

 사람의 모든 불행을 사람들은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킵니다. 그러나  양심적으로 따져보면 모든 실패는 책임의 원인이 자기 본인입니다. 이렇게 바로  찾으면 희망이 있고 그저 그것조차도 자기 중심으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면 그에게는 빛은 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 분망한 것이 뭣 때문엔가? 하나님은 우리를 간편하게 염려없이 살게  할려고 하시는데 악령이 들어서 우리를 분망하게 만듭니다.

 금번에도 모두 바빠서 이 자리에 참석 못 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 줄 압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는 이 바쁜 일은 집회 참석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마땅히  자기의 할 일이라고 생각들 하겠지마는 오랜 후에 뒤로 돌아보면 그것은 다  자기를 속이고 낭패된 것뿐이지 참으로 할 만한 일을 한 그런 것은 별로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이 말씀을 한 말씀 한  말씀 듣고 읽고 배우면서 확정을 지워야 할 것입니다. 하나하나 확정을 지워서  이것은 할 일이다 안 할 일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렇게 확정을 지우면  우리 인간 살이는 심히 한가한 것입니다.

 타락하기 전 에덴 동산에서는 아주 한가했습니다. 마귀의 유혹을 받은 후로부터  심히 분망했던 것입니다.

 금번에는 한 말씀 한 말씀을 들을 때에 깨닫고 작정을 합시다. 다시 두 번  되풀이하지 말고 이것은 이러하다 저것은 저러하다 하는 것을 확정을 지워  놓으면 우리 할 일은 별로이 없습니다. 별로이 없는 그 한가한 것은 자타를  멸망케 하는 그 일을 안 하니까 한가합니다. 자타를 멸망케 하는 그 일을 하지  안하니까 한가합니다. 분망한 것은 자타를 멸망케 하는 그 일 때문에 분망합니다.

자기에게 유익되고 남에게 유익되고 필요한 그런 일은 그렇게 많지를 않습니다.

아주 극소수입니다.

 그러고 또 성경은 우리들에게 염려없고 평안한 생활을 하도록 그렇게 하나님은  하신다고 늘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개인 개인마다 경험한 그 모든 경험을  따져보면 성공된 것은 어떻게 해서 성공이 됐는지 모릅니다. 성공은 어떻게 해서  성공이 됐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다 양심을 쓰지 안하고 참람해서 내가 이렇게  이렇게 계획해 가지고서 성공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다 거짓말쟁이오. 어떻게  돼서 성공이 됐는지 모릅니다. 그저 골탕을 쥐먹는 것은 안 된 일로 골탕  쥐먹었고 제가 들어서 다 고통했지, 보는 눈이 짧고 좁기 때문에 성공이다  성공이다 이렇게 하지마는 조금 넓혀 보면 그저 분망하게 날띈 일의 그 결과는  전부 패망뿐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한 사십이나 오십 되고 난 다음에도 나의 전생의 분망한 것은  전부 나를 망친 것뿐이다, 나는 헛일한 것뿐이다 하는 그것을 사오십 세가 될  때까지도 깨닫지 못한다면은 거석한 사람은 참 멸망할 그 짐승 같은 사람입니다.

냉정스럽게 양심적으로 따져보면 압니다.

 그래서, 금번에는 하나썩 확정을 지우고 다시 그것을 또 되풀이 하고 또 그것을  의문을 가지고 연구하고 하는 그런 일을 하지 말고 하나 하나씩을 확정을 짓고  그렇게 나가도록 합시다.

 이래서, 과거에는 우리가 벌써 오랫 동안을 이런 집회를 가졌는데 하나님의  도리를 깨닫게 할라고, 알게 할라고, 귀 문을 열어서 듣게 할라고 참 시간도 많이  들었고 또 말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이에는 거의 다 진리는 알게 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하나씩 확정을 지우고 다시 그것을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백 번이고  되풀이하는 그런 일을 안 하면 우리 일은 아주 간편해집니다.

 그저 한번 생각한 그대로를 여러 번 중복으로 자꾸 그렇게 또 생각하고 또 속고  또 속고 자꾸 속아서 그러니까 분주한 것이니 확정을 짓고 간편하게 살고 그저  성경 얼마든지 보고 기도 얼마든지 하고 잘먹고 잘입고 잘살고 평안하고 이렇게  살 수 있는 이 길이 있는데 이 길을 우리들이 좀 가지고 살아야겠습니다.

 공연히 분주해서 참 눈코를 못 뜰만치 이렇게 분주하나 그것이 전부 다  자멸하는 마귀의 유혹으로써 헛일된 것뿐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해치는 자인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러면 마귀가 시키는 일, 마귀에게 속한 일, 마귀가 기뻐하는 일 하나님이  근심하는 일이라면, 마귀가 기뻐하고 마귀가 시키고 하나님이 근심하고 마귀의  인도 따라 하는 그 일이라고 하면은 그 일 천 가지 중에 우리에게 유익된 일이  혹 몇 개나 섞였으리라 생각이 됩니까? 분명히 마귀가 시키는 일, 또 마귀가  기뻐하는 일, 또 마귀와 동행하는 일 이 일을 천 가지를 했다 합시다. 천 가지. 백  가지가 아니라 천 가지를 했다 합시다. 천 가지를 했으면 이 천 가지 한 그 일에  우리에게 유익이 될 일은 몇이나 섞여 있으리라 생각이 됩니까? 몇이나 섞여  있겠습니까, 거게는? OOO목사님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 그 대답이 맞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없는데 우리가 일한 것 중에  이거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느냐 마귀가 기뻐하겠느냐? 이 거는 마귀의 인도냐  하나님의 인도냐? 이거는 마귀와 동행하는 일이냐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이냐?  따져서 자기가 하나 하나 그렇게 고요히 앉아서 따져서 자기 행동을 조사한다면  그 행동이 아마 십분지 일이 될 게 아니라 백분지 구십구나 될 것입니다. 백분지  구십구나 됩니다.

백분지 구십구가 되고, 또 어떤 사람은 보면 백에 백이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일,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 그 일은 백에 하나도 섞여 있지  안할 수 있는 것이 우리 기독자의 생활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이제 우리가 말한 대로 거게는 자기에게 유익된 일이 하나도  없다고 우리가 공통으로 다 대답을 했습니다. 그 대답이 맞습니다. 이러나, 우리는  이것을 따질라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내가 오늘 종일 한 일 가운데에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한번 또 가려 간추려  놓고 마귀가 기뻐하는 일 간추려 놓고, 의가 되는 일 간추려 놓고 죄가 되는 일  간추려 놓고 이런게 하나씩 또박또박 따져서 계수를 한다고 하면 하루 종일  계수하는 가운데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일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한 건도 없습니다. 한 건도 없소, 뭐. 몇 건이 있는 게 아니라 한 건도  없어. 전부는 마귀가 원하고 마귀가 좋아하고 하나님이 근심하고 노여워하는 그  일뿐입니다. 그것 때문에 백 가지 중에도 유익된 것은 하나도 없는 그 일  하느라고 우리가 분망합니다.

 그러면 이 문제가, 자, 이 문제가 큰 문제입니까 작은 문제입니까? 이 문제가 큰  문제입니까 작은 문제입니까? 자,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네, 이거 큰 문제입니다. 참. 이거 참 큰 문제입니다.

 이러니까, 하루 열 가지 하는 가운데에 전부 자기 망할 일만 했는데 그 열  가지가 없어지면 그날은 뭐해야 되겠습니까? 그날은 뭐, 그날은 그것만 없었다,  그것만 안 했다고 하면 그날은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있었을 것 아닙니까?  이렇게 우리 기독자들은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것인데 공연히 들어서 이렇게  고통하고 분주하고 뭐 바쁘고 제딴에는 큰 일 하는 체 하지 마는 하나님이  보시고 비웃습니다.

 그 철이 없어서. 모든 군왕들이 하는 일이 이렇거든 하물며 일반인들 하는 것이  어떤 일이겠습니까? 모든 군왕들이 하나님의 결박을 벗어날라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물샐틈 없이 딱 진리로 결박을 해 놨는데 이 결박에서 제가 벗어나니까  벗어나는 것은 다 자멸되는 것뿐이지 구원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부터는  작정을 한번 해 봅시다.

여게, 아담을 지으시고 하나님께서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그 원시에 관한 일입니다.

이번에는 내가, OO목사가 왔기 때문에 잠깐 말했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  몰라도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뭐 증거할라고 한 말씀도 내가 정해 가지고 왔거나  뭐 오지 안했어. 그동안에 혹 설교한 말씀 가운이 뭘 증거할란가 해서 그래  가지고서 그동안에 설교한 그 성구를 좀 빼 달라 해서 성구는 모두 써 가지고  왔지마는 내가 이 말씀을 증거해야겠다는 그런 것은 하나도 없었어. 또 그 성구  내가 그전에도 봐야, 빼 가지고 와야 그 성구 가지고 설교한 적이 없습니다. 별로.

 하나님이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저에게 주시리라 그렇게만 믿고 왔는데  제게 일찍부터 이 거창집회에 대해서 내게 그 감동이 오기를 이번에는 아무래도  사람병을 고치고 고기덩어리병 고치고 이 두 가지 병을 고쳐야 된다 하는 거게  대해서 강하게 필요성을 느껴지는 것은 내게 강하게 감동이 됐었습니다.

 그래서, OO목사더러 '이번에 무슨 설교를 할란지 모르기는 모르지마는 내게 그런  영감이 왔었다. 그런데 혹 그럴런지 모르니까 사회하는 일도 그렇게 짐작하고  그런 뜻으로 한번 기도하고 그렇게 사회를 하도록 하라' 그렇게 제가 좀 한 서너  시간 전에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씀도 제가 오후 점심 먹고 또 밤에 잠을 안 자서 한숨 잤습니다. 한숨 자고  그래 나서 이 말씀이 생각이 났었습니다.

 여게 아담에게 하나님이 하신 것은 아담은 전 인류의 시조입니다. 그래서 이  아담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일은 전 인류의 근본이 되는 대표자요 대리자가  되는 이 아담에게 하신 일이기 때문에 전 인류에게 하신 일이라 그렇게 우리가  보는 것이 바릅니다.

 그러면, 전 인류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아담을 지으시고 동방의 에덴이라는  처소를 창설하시고 아담을 거게 두었다 이랬어. '아담을 거기에 두시고'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류 대표에게 대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없는 가운데서 인류 시조를 있게 창조하신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아담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전 인류는 하나님이 다 창조하셨습니다.

이래서 아담을 창조하신 것은 우리 전 인류를 창조하신 것이 그 안에 다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래서 우리가 보통 생육법으로 나는 사람은 아담의 허리에 있었다 그렇게  성경에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래서, 하나님이 없는 가운데에 수많은 사람들을  창조하시고, 창조하시고 난 다음에는 그저 집어 던져 버리는 것이 아니고  창조하시고 난 다음에는 창조한 그 모든 사람들을 둘 곳, 모든 사람들이 거처할  수 있는 거처하는 곳을 하나님이 마련하신다 하는 것을 여게서 우리가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류 시조를 창조하시고 인류 시조 아담 둘 곳을 하나님이 다시  창설했다 이랬습니다. 이미 이 땅을 만드시고 거게 동방에 에덴이라는 곳에 이  아담을 둘 곳을 창설하시고 거게 두었다 이랬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인류에게, 곧 나에게 하신 것이기 때문에 여게  대한 뜻을 깨닫고 확정을 지워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신자만이 아니고 신불신자  전부에게 대해서 망라해서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게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은 수가 않든지 적든지 뭐 잘났든지  못났든지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은 그 사람 둘 곳을 하나님이 마련하신다 하는  것을 여게서 선포해 놨습니다. 그러면 둘 곳을 마련이니까 우리가 살 곳을  마련하신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지음을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나는 나 살 곳이 있다 하는  것을 확정지워야 되겠습니다. '나는 나 살 곳이 없다. 어데가 살아야 되겠느냐?'  나를 지으신 이가 내자 살 곳을 벌써 창설했다 이랬어. 아담을 지으시고 아담의  있을 곳을 하나님이 창설하셨습니다. 에덴에 아담이 있을 곳을 창설했다 그말은  창조한 것이 아니고 창조 후에 창조하신 것을 이용해 가지고서 아담이 살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든 것을 가리켜서 창설이라 말합니다.

 창설이라는 말은 제조란 말과는 다릅니다. 창조는 없는 가운데서 만든 것이  창조요 창설은 만들어 놓은 그것을 재료로 삼아 가지교서 있을 곳을 마련한 것을  가리켜서 창설이라 그렇게 우리가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래서 첫째로,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은 택자나 불택자나, 신자나 불신자나  그이의 처소를 하나님이 다 마련하셨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마다 자기가 있을  곳이 벌써 마련돼 있다 하는 요것을 우리가 확신을 합시다.

 또 둘째로는, 아담이 거처할 곳을 마련하신 다음에는 아담을 끌어다가 거게  뒀습니다. '아담을 거기에 두시고' 했습니다.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이랬어. 그러면 두시는 것은 제가 돌아다니며 찾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들어  가지고 가게 뒀습니다.

 이래서 이제 두 가지가 여게서 확정을 우리가 지워야 되겠습니다. 나의 살 곳은  하나님이 그때그때 벌써 내가 뭐 찾고 내가 염려하고 내가 구하고 만들라고  날뛰는 그런 일을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들에게 다 있을 곳을  창설하셨다 하는 요것을 우리가 확실히 단 정지워야 합니다. 내가 마련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가 살 곳을 당신이 마련하셨습니다. 살 곳을 우리가  마련한다 하는 그것이 인본이요 그것이 하나님을 무시하고서 인본으로 동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게서 우리가 미국 가 살아야 되겠나, 동양에서 살아야 되겠나,  거창서 살아야 되겠느냐 어데서 살아야 되겠느냐 하는 그것은 우리가 생각할 일  아니고 우리가 염려할 일 아니고 우리가 노력할 일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것은  당신 할 일이기 때문에 당신이 있을 곳을 창설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그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창설하신다는 이것을 냉정스럽게  확정을 지워야 됩니다. 나는 어데가 살까? 나 살 곳은 하나님이 벌써 마련해  두셨다. 나 살 곳은 있다. 사람으로 났으면 벌써 그 사람은 오늘 있을 곳, 내일  있을 곳 모레 있을 곳, 있을 곳이 다 당신이 우리보다 먼저, 나를 만드신 당신이  내가 있을 곳을 당신이 창설하신다는 요 사실을 확신하고 자기 있을 처소에  대해서는 자기가 머리를 쓰거나 날뛰거나 그렇게 하지 안하고 당신이 창설하신다  하는 요것을 확실히 믿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는,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찾아다니지 안하고 '여게 더 있을까  덜 있을까?'자기의 있는 데 대해서는 하나님이 두시는 대로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두시는 대로 있으면 돼. 하나님이 두시는 대로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두시는 대로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자기가 찾아  돌아다니지 말고, 자기가 찾아다니지 말고 그저 하나님이 섭리하심에 따라서, 나는  단지 주의할 것은 뭐 주의하느냐? 하나님이 가지 말라는 자리만 안 가면 됩니다.

알겠습니까? 하나님이 가지 말라는 공만 안 가고 가지 말라는 데만 가지 말고  하나님이 인도하는 대로 합니다. 여게 있으라 하면 여게 두면 여게 있고 저게  두면 저게 있고, 실은 인생들이 공연히 제 마음으로 조급해서 날뛰기만 날뛰지  하나님이 두시는 대로 다 그대로 있지 제가 뭐 이렇게 저렇게 뭘 찾아  돌아다녀서 뭘 구한다는 그것은 제 주관으로 공연히 그 참람된 말이지 안 됩니다.

 이러니까, 믿음을 가지고 하는 사람은 평안하고 즐겁고 믿음 없는 사람은 죽자껏  골탕은 쥐먹지마는 골탕 쥐먹는 대로 한다고 해서 저 가고 싶은 데 가고 제 있고  싶은 자리 있는 것 아닙니다. 요것을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아담을 거게 두시고  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의 있을 처소는 나를 만드신 그분이 만든 나를 둘 데도 없이  아무나 따나 주 차여 돌아다니구로 이라구로 하지 안하고 만드신 그분이 나를 둘  곳을 만들었습니다. 둘 곳을 마련했다 했습니다. 둘 곳을 마련했어. 둘 곳을  마련하고 난 다음에는 그 다음에 아담을 거게 뒀어 거게 뒀어.

그러면, 당신이 두게 하는 대로 거게 있으면 돼. 그러면 당신이 이 섭리하시는  데에 내가 당신이 여게 있으라 하면 여게 있고 하면 되는데 거게 있지 안하고서  제 마음대로 찾아 돌아다니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제 마음대로 찾아  돌아다니는 것입니까?  내가 여게 있을까 저게 있을까 어데 있어야 좋을까? 자기가 어데 좋을까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찾아 돌아다니는 것이며 하나님이  둥시는 대로 거게 주저앉아 있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제가 어데 있을까  있을 곳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두는 대로 거게  죽박지르고 앉았는 거는 어떻게 하는 것이 거게 앉아 있는 것인가? 하나님이  있게 하시는 대로 거게 있고, 여게 있으라 하면 여게 두면 여게 있고 저게 두면  저게 있고 거게 두면 거게 있고 하나님 두시는 대로 내가 거게 있는 거 그거는  어떻게 하는 것이 그렇게 하는 것이며, 또 내가 지금 '여게 있어야 되겠나 저게  있어야 되겠나 어데 있어야 되겠느냐, 어데 가 있어야 지금 내가 나 있을 곳이  어데 있겠느냐? 또 어데 가 있어야 내가 좋게 있겠느냐?' 그 자기 있을 좋은 곳을  찾아다니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찾아다니는 것일까? 자, 어떻게 하는 것이  찾아다니는 것이며 또 하나님이 두시는 대로 거기에 있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게  있는 것인가 요런 것을 확실히 깨닫고 확정을 지워야 됩니다. 요거 확정을 지워야  돼요. 이것 때문에 뭐 평생 분망한데 이제 딱딱,  이거 보십시오. 자, 있는 처소를 제가 마련할라고 애를 쓰는데 이것만 해도 있는  처소, 내가 살 곳, 내 처소, 내 처소를 내가 마련하는 것, 처소 마련할라 하는 것이  아마 그것이 사람들에게는 자기의 노력의 몇분지 일은 차지할 것입니다. 몇분지  일이나 차지할 것이요? 자기 있을 곳 마련하는 것이 한 삼분지 일이나 될까  십분지 일이나 될까? 자기 있을 곳 차지할라고 자기 있을 곳 마련하는데 지금  그거 하는 데에 시간 걸리고 거게 마음들이고 시간 걸리고 하는 것이 그거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루 종일 생활하는 가운데에 얼마나 될꼬? 자기 일생 동안 생활하는 가운데에  십분지 일 될까 백분지 일 될까 천분지 일 될까? 저 O장로 뭐 좀 지혜가 있어 잘  알지. 한번 해 봐. 그 있는 처소 마련하는 데에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리고 수고가  얼마나 걸리요? 전부 다 걸려? 전부 다 걸려? 전부 다 걸려? 전부 다 걸린다  말이 맞소. 전부 다 걸린다는 말이 맞아. 그런데, 그거는 하나도 하지 말라 하는데.

이라면 우리는 볼고 살지 안해요? 우리는 놀고 살 것 아니겠소? 아무 일 없소.

얼마나 편하겠소? 이것이 당신을 믿는 것입니다. 똑똑히 요거 확정을 지워요.

 그러면, 인간을 만들어 놓으시고 하나님께서 그 아담 있을 곳을, 만들어만 내던져  놓고 아담이 여게 있을까 저게 있을까 어데로 갈꼬 뭐 동주서분하면서 이래  돌아다니면서 있을 곳을 몰라서 지금 호독거려 찾아다니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했습니까 아예 아담은 모르지마는 있을 곳을 딱 마련해 놓고 거게다가  두셨습니까? 마련해 놓고 두셨습니다.

 사람들이 견해가 좁아 그렇지 떠들기는 떠들어도 천국은 하나님이 있게 하는  거게 있지 제가 있게 하는 그 자리를 떠나서 딴데 못 갑니다. 공연히 저만 애터져  날뛰고 있고 죄만 짓고 하나님 앞에 망령만 부리고 패역만 부리지 하나도 제  생각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조금 깊이 넓게 생각한 사람은 '너 왜 여기 와 있노?' 제가  이렇게 저렇게 좋은 자리 같으면 내가 이렇게 저렇게 노력을 해 가지고서 이랬다'  하지마는 정신을 조금 차리면 '내가 여게 있게 된 것은 내가 여게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여게 있게 하셔서 내가 꼼짝 못 하고 여게 있다' 이렇게 답을  하는 것이 그것이 깨달은 자의 답입니다. 그게 정확한 답이오. 바른 답이오.

 자기가 찾아다닐 게 아니라 하나님이 있게 하는 데에 있는 것 자기가  찾아다니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있으라 하는 데 있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찾아 돌아다니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게 찾아 돌아다니는 것이지? 자,  그거 한번 대답해 봐요. 어떻게 하는 게 찾아 돌아다니는 거고 하나님이 있게  하는 대로 있게 하는데 거게 주저앉아 있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있게 하는 대로 거게 있는 건가? 거게 하나님이 두시는 대로 거게 있는 건가?  하나님이 두시는 대로 거게 있는 거는 어떻게 하는 것이며 찾아서 제가  돌아다니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찾아 돌아다니는 것인가 그거 한번 좀 말해  봐요. 자, 이 O목사님. 잘 알아듣지, 말귀는. 한번 대답해 봐요. 그거 비슷하기는  비슷한 말인데 그거 해석이 길고 복잡하다.

 제가 찾아 돌아다니는 것은 하나님이 가라 소리 안 하는데 하나님 말씀을  어겨서 돌아다니는 거는 전부 제가 찾아 돌아다니는 거라. 이 답이 맞아요 안  맞아요? 하나님이 이래라 시키는 대로 하지 안하고 제 뜻대로 해서 제 처소  마련할라고 돌아다니는 거는 전부 제가 마 련할라고 찾아 돌아다니는 것  아닙니까? 그게 맞아요 틀려요? 확실히 맞아요?  확실이 맞으면, 우리가 자기 있을 곳을 여게가 좋으나 저게가 좋으나 어데로  이사갈꼬 이래 가지고서, 이사가는 사람 중에 인본주의도 있고 신본주의도 있어.

 그러면 하나님이 있게 하는 데에 거게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나님이 가라고  하기 전에는, 가라고 하기 전에는, 옮기라 하기 전에는 그 자리 있는 사람이  하나님이 있게 하는 대로 그 자리 있는 사람입니다. 그거 맞아요? 자기가 닥친  현실, 닥친 그 현실은 하나님이 만들어서 어짜든지 있게 했는데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지 안하고 하나님 명령 따라서만, 하나님 명령이 없을  때에는 명령이 있을 때까지 자기 처소를 떠나지 안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이  있게 하는 대로 있는 사람입니다. 맞아요? 요거 맞아요? 이게 해석 틀리면 해  봐야 헛일이라. 그거 맞습니까?  또, 하나님의 뜻을 어겨서 자기 생각대로 인간 생각대로 이곳 저곳이 어데가  좋은가 하고서 찾아다녀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이 아니고 인간 뜻대로 생각대로  해서 자기 처소를 마련할라고 다니는 그것은 하나님이 있게 하시는 데 있지  안하고 제가 제 처소를 마련할라고 돌아다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요것도 틀림없어요? 틀림없어요. 틀림없어요.

 이러니까, 요래서 요거 둘을 확정 지웁시다. 이게 신앙입니다. 이게 신앙이오  아브라함은 그렇게 살았어요. 아브라함이 벧엘에 갔다가 하나님은 벧엘을 제  처소로 헛는데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흉년이 들어 가지고 배고프니까 애굽으로  실실 기어 내려간 것은 아브라함이 자기 처소를 자기가 마련할라고 돌아다니요  하나님이 마련해 주는 데에 있어요? 제가 마련할라고 돌아다니다. 가 혼났어요.

우리 믿음의 조상이 참 제가 제 처소 찾아 돌아다니다. 가서 혼났어. 마누라도  뺐길 뻔 허고 또 마누라만 뺐깁니까? 나중에는 죽여 버리요. 안 죽이겠습니까?  마누라도 뺐겼지 이거 보니까 자꾸 보니 아브라함하고 사라하고 서로 남매간이라  하더니마는 속으로 정을 두고 지내는 것 한번 봤으면, 시기 마귀라 하는 그거  무섭습니다. 당장 죽여 버렸을 것입니다. 이런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처소에 있지  안하고 제 생각대로 저 있을 처소를 찾아 돌아다니는 것은 자살 행위요 마누라  뺐길 행위요 가정 파괴될 행위요 전멸될 일 하는 행위라.

 자, 이것도 뭐 변동할 수 있어요, 이거? 어떻게 조그매라도 너무 과하게 말합니까  꼭 그대로 정확하게 말했습니까 너무 지나치게 과도히 말하는 겁니까? 좀  과장했소? 과장 하나도 없어. 꼭 그대로라 이러니까, 이제, 내가 있고 싶어 있는  것 아니오.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기 때문에 내가 있습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내가 생각하기 전에 나 있을 곳을 당신이 다 마련해 두셨다 하는  요것을, 날마다 마련하고 달마다 마련해서 언제든지 나 있을 곳은 나보다 당신이  먼저 아시고 나 있을 처소를 당신이 마련하고 계신다, 마련해 두고 계신다 하는  요거 생각하고,  마련해 두니 나는 어째야 되느냐? 당신이 있으라 하는 데에 있고, 있으라 하는  데에 있고 내가 찾아 돌아다니는 일 하지 안 해야 된다 하는 요거 확정 지워요.

이거 진리라요 진리 아니요? 진리입니까t 이제 이 분주한 일 좀 간추리자고요.

분주한 일을 간추리요. 요 두 가지.

 또 그 다음에 보니까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이래 놓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거기에 보기  아름답고, 보기가 아름답고 먹기 좋은 나무를 나게 하셨다 그말은 그때는 이  실과를 먹고 사는 그때입니다. 실과를 먹고 사는 그때라.

 이러니까, 하나님께서 아주 보기도 좋고 아름답고 먹기도 좋은 그런 나무를 많이  나게 해 가지고서 뭐 거게 가득 찼습니다. 암만 먹어도 모자라지 안해요. 자 에덴  동산에 하나님께서 보기 아름답고 먹기 좋은 과실을 만들어 놨는데 거게 자꾸  배가 불러도 자꾸 먹고 설사하고 먹고 설사하고 막. 이래서 자꾸 따먹으면  모자라겠소 안 모자라겠소? 안 모자라. 안 모자라. 하나님 말씀이 거짓말입니까  정확무오한 말씀입니까?,

우리의 처소를 당신이 마련하시고 당신이 있게 하는 그 자리, 있게 하는 그  자리는 어떤 자리냐? 그 자리는 보기 좋고 먹기 좋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 좋은  그 나무를 많이 나게 한 곳입니다. 요렇게 살면, 오늘로 말하면 보기 좋은 게 뭐  있겠소? 막 서로 시비를 해서 아이구 야 아무것이 그 사람 돈은 모았지마는  독하다 흉측하다 누구하고 원수가지고 시비를 하고 만날 이렇게 재판하고 이렇지  안하고 보기 좋으면 뭐 다른 사람이 볼 때에 보기 좋으면 덕 있는 것이겠지. 덕  있는 것이겠지. 아름다우면 다른 사람에게 칭찬받는 영광있는 것이겠지. 먹기  좋으면 취하기 쉽지. 먹기 좋으면 그걸 취하기 쉽고 사용하기 쉽고 전부 형통이요,  형통. 요것이 실상 기독자의 걸음입니다. 요것이 기독자의 걸음.

 요 신앙 생활을 바로 해서 요렇게 하는 사람들은 염려하지 안해요. 그렇게 딱  맞추지를 못해도 그래도 모두 하나님이 마련한 처소, 제가 마련할라고 하지  안하고 하나님이 있으라 하는 데에 거게 있을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벧엘에 가 가지고서 너거가 여기 머물러라 이라며 하나님이  있으라고 하지 안했소? 이랬는데 거게서 애굽으로 가 가지고 그 낭파당한 그것을  아마 기독자는 다 보고 동감으로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게 하는 데 있지  안하고서 제 좀 어렵다고서 제 생각대로 나갔다가서 참 크게 망할 뻔 했다 하는  그거 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이 내가 알기 전에 걱정하기 전에 나를 만드신 그분이 당신이  만들어 놓은 것 그거 둘 곳을 당신이 만드시고 둘 곳을 만드는데 그 둘 곳은  어떤 곳이냐? 보기 아름답고, 또? 먹기 좋은 나무를 막 많이 나게 합니다. 자꾸  막 여게도 저게도 나서 그만 무성하게 자꾸 땀이 만들어 놔. 이것이 우리의 살  곳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살 곳.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사랑해. 요거 배암  요놈이 들어서 자꾸 자 있을 곳을 제가 마련할라고서 뭐 어데로 이사 가고 뭐  부산으로 가고 서울로 가고 어데로 가고 자꾸 이사 가지, 미국으로 가지. 아래서  하나님이 보내서 가는지 제가 저 있는 처소를 마련할라고 기어 돌아다니는지! 자,  하나님이 옮기지 안하는데 하나님이 마련한 처소 거기에는, 하나님이 마련해  주시는 처소 거기에는 보기 좋고 아름답고 먹기 좋은 나무가 가득 찼는데 또  하나님이 마련치 안한 제가 마련할라고 돌아다니는, 모든 사람들 뭐 전부 다인데  그만 우리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보면은 제가 저 좋은 곳 마련할라고  돌아다니다 가서 그 결과적으로 뭣 당했습니까? 낭파 안 당했소? 이게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이라 말은 이리나 저리나 꼭 같이 끊길 거는  끊기고 상할 거는 상합니다. 맞기도 이 사람에게도 맞고 저 사람에게도 맞고 다  맞소. 이 말씀을 어기면 어긴 값을 다 받고 이 말씀을 지키면 지킨 값을 다  받습니다. 누구는 뭐 어겨도 안 받고 누구는 지켜도 안 받는 게 아니라.

 이러기 때문에, 좌우에 이한 날선 검이라 말은, 이 양날 가진 칼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여게나 저게나 다 그대로 단행된다, 달성된다 그말이오.

 요 세 가지. 우리가 평안하게 살 곳은 어데 있소? 일호 믿고, 이호 믿고, 할 일은  일할 게 아니라 가만히 있으면 돼. 일호도 제가 할라고 날뛰니까 분주하지 이호도  제가 할라고 날뛰니까 분주하지 삼호도 재가 만들라 하니 분주하지, 일호 이호  삼호는 거기 있으라 하는 대로 가만히 거게 있으니까 먹을 과실나무가 자꾸 와서  열어재낍니다.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 좋은 과실, 이것이 아이들 꾀우는 소리요  하나님이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는 말씀입니까? 변하지 않소.

 자기는 어데로 갈지 모르나 하나님이 자기의 처소를 마련하는 이 사실을 믿고  하나님 마련해 주는 그 자리 있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안 할라고 하고 지키는  사람이면 벌써 그만하면 막 복이 내리 퍼붓소. 이래 놓으니까 아브라함이, 롯은  어째 됐소? 롯은 자기 행복스러운 곳을 제가 만들라고 찾아다녔소 하나님이 주는  대로 했소? 자기가 만들고 찾아다녔어. 찾아다니다. 가서 마누라는 소금 기둥이  됐지, 또 종업자들은 다 도망 다 가 버렸지, 짐승 한 마리도 없지, 집도 없지,  산골짝에 가 가지고서 추접한 일해 수치스러운 조상이 돼 버렸지 얼마나 망했소?  이것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 아닙니까?  아브라함은 한번 데였기 때문에 다시는 그짓 안 해. 하나님이 옮기라 하기  전에는 옮기지 안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곳에 있지 제가 좋은 곳 찾을라고 쓰지  안하고 그라니까 발간 자산이라, 발간 자산밖에는, 하나님은 발간 자산에 거게  있으라 했거든. 발간 자산에 거게 있었는데 뭐이 어찌 됐어요? 붉은 자산에 푸른,  초장이 있었어, 푸른 초장. 이게 오늘도 그때입니다. 꼭 같습니다. 하나님은 변치  안해요. 하나님의 계약도 변치 안해요.

 이런데, 그 다음에 2장 16절에 보니까 '모든 과실은 네 임의로 먹되' 했습니다. 네  임의로 먹되 선악과는 먹지 말아라 이랬어. 임의로 먹는 것, 임의로. 제 마음대로  먹는 과실, 제 마음대로 먹는 과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처하도록 만들어  준 처소에는 보기 아름답고 먹기 좋은 과실이 얼마든지 있는데 그 과실이 거게  세 종류 있었습니다. 세 종류 있어. 하나는 임의로 먹는, 임의로 얼마든지 먹는  과실이 있어. 임의로 얼마든지 먹는 과실.

 임의로 얼마든지 먹는 과실은 하나님이 죄되지 않고 금하지 아니하고 얼마든지,  임의로는 자유 아니요? 자유로 얼마든지 죄되지 않는 한 자유로 얼마든지 제  마음대로 욕심대로 이와같이 취해서 사는 그 길 하나 있습니다. 이 물질계, 뭐  여기 막 과일이 주렁주렁하지 안해요? 이런데, 자기 임의로, 임의로 먹을 과실이  있어. 임의로 먹는 과실. 먹지 말라는 과실 있고. 하나는 생명과실이 있어.

 임의로 먹는 과실은 어떤 게 임의로 먹는 과실인가? 하나님이 금하지 아니한  하나님의 허용, 하나님이 허용한 허락한 범위 내에 얼마든지 자기가 춰할 수 있는  것이 가득히 있습니다. 우리 현실에는.

 그런데 거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이 말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그러면 생명나무는 뭐일까?  생명나무는 거게 보기 아름답고 먹기 좋은 많은 나무들이 나온 그것은 아니고  중앙에 보니까 생명나무 있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있다 그랬습니다. 그러면,  생명나무는 뭐이 생명나무인가? 생명나무는, 생명은 하나님과 친밀히 하나님과  연결이 되는 하나님과 이렇게 사귐이 되고 하나님과 관계가 맺어지는 데  하나님과 친교가 맺어지는 데 거게만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과 친교  맺어지는 것이 생명입니다.

 또, 선악을 알게 하는 것은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먹고 난 다음에는 그들은  선악을 알게 됐습니다. 선악을 아는 눈이 떠졌습니다. 선악 안다 말은 그것은  자기 중심이 아닌 자기에게 배격되면, 자기와 배치되면 다 그렇게 악으로 하고  자기와 화합이 되면은 선으로 삼는, 다시 말하면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의 눈을  뜨게 된다. 자기 위주 자기 중심의 사람이 되어져 가는 일이 거게 있다. 또  하나님과 친근해지는 그 사람이 되어져 가는 것이 거게 있다. 어데 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그 처소에 있습니다. 처소에. 거게는 생명나무도 있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처소를 마련해 주시는데 자기가 어데 있든지 거게 있게  됐으면 하나님은 그 자리를 나를 만들어 준 처소인 줄 알고 그 자리에서  나쁘든지 좋든지 그 자리부터 이제 정착을 할 것입니다. 그 자리서부터.

어데서든지 그 자리 자기 있는 그 자리를, 그 자리에다 정착을 하고 이제  거게서부터, 내가 어찌 왔든지 이 현실에 지금 이 현실 이 자리에 내가 머물게  되고 이 처지에 살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여게 있게 했으니 이것이 내  처지다. 죄를 지어 왔든지 어째 왔든지 자기 처지인 줄 알고 거게서부터,  거게서부터, 이제는 내가 내 장소를 마련할라고 내가 서둘러서 날떡는 그런 일 안  하고 하나님이 있게 하시는 곳에 내가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것이 뭐이냐  하면 그 자리서 지금 괴로와도 즐거워도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괴로와도 즐거워도.

 그런고로, 모든 사람이 자기의 당한 현실 뭐, 비참한 현실이나 비극의 현실이나  어떤 현실이라도 그 이미 있는 현실을 자기가 바꿀라고 하지 마십시오. 요 말씀이  요것이 너무 교인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해서 여게 대한 큰 손해를 많이 보고  있습니다. 자기 현실은 죄를 지어서 왔든지 인본주의로 제가 왔든지 하나님을  거스려 왔든지 어쨌든지 와 가지고 있는 그 현실은 하나님이 거게 있게 하셔서  제가 있는 것이지 달리 있는 것 아닙니다.

 제가 만든 것같이 이래 알지마는 하나님이 거게 있게 하셔서 제가 했지  하나님의 주권에서 그가 변동 못 합니다. 암만 죄를 지어서 죄지은 그 죄를  지음으로 그 현실을 당했다 할지라도 당한 현실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거게 있게  한 현실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요것도 믿어야 돼요, 또. 요거 이해가 안  되면 안 돼요. 자기가 어떻게 샜든지 자기의 현재에 머물고 있는 처지가 비참한  처지든지 행복된 처지든지 자기가 죄를 지어서 역부러 만든 처지든지 어쩌든지  자기 현재의 살고 있는 자기 처지는 주님이 그렇게 거기 있도록 만들어 놨다는  요것을 믿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자기 생각에는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해 가지고서 내가 그리 갈 건데 내가 이리  와 이리 왔지' 그렇게 제가 만들어 가지고 자기 현실을 만든 것같이 생각하지마는  만들어 현재 있는 그 처지는 어떻게 왔든지 그 자리는 하나님께서 거게 있게  하셔서 온 게 그만 틀림없습니다.

 그 계산은 맞는데 그 계산을 설명할라 하면 많아, 그만. 거게 어쨌든지, 암만  제가 오고 싶어도 거게 오지 못해요, 그만. 오고 싶어 왔든지 어째 왔든지 그  현재의 처지는 그 처지는 주님이 그 자리에 있게 하셔서 있게 됐다 하는 요것을  믿어야 돼요. 요걸 믿어야 돼요. 믿습니까! (아멘!) 요걸 믿어야 돼요!  자기가 죄를 지어서, 죄를 지어서 돈 탐해 가지고서 그만 창기로 팔려가 가지고  지금 창기가 돼 가지고 있습니다. 창기가 됐으면 '내야 돈에 팔려서 창기가 됐기  때문에 내가 이런 신세를 망쳤다. 내가 이런 자리에 왔다.' 그러면 그 자리에  창기에 팔려 가지고 창기가 돼 가지고 있으면 자기가 있는 그 자리는 하나님이  거게 있게 해서 있게 됐습니까? 제가 제 능력으로 찾아 와 가지고 거게 있게  됐습니까? 요거 믿기가 어려워.

 하나님이 어쨌든지, 제가 와 가지고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이 거게 있게 해서  있게 됐습니다. 요걸 알아요. 제가 암만 죄를 지어서 있다 해도 하나님이 있게  하신 요걸 믿지를 못해 고거 믿지 못하는 건 아직까지 믿음이 어려서 믿지  못해요. 하나님이 있게 해서 그렇습니다. 자기가 그리 오고 싶어서 이래도 이리  오고 이리이리 생각을 가지고 이리이리 하도록 해 가지고 거기 있게 됐든지  어짜든지 그 자리 와서 있도록 만들어 놓은 이는 하나님이시지 인간이 만든 건  아닙니다. 알겠습니까?  인간이 터럭 하나도 제가 흔들 수가 없습니다. 꼭 하나님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당신의 뜻 외에는 이루어지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라면, 그 처지에  있으면 그 처지에서는 어째야 됩니까? 그 처지를 제가 옮겨야 됩니까? 그 자리에  있어야 됩니까? 그 자리에 있고 옮기지 안해야 됩니다. 그 자리에 있어야 됩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옮기라고 하기 전에는 안 옮겨야 됩니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있으면 그 자리는 어떤 자리가 되느냐? 그 자리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거게서 보기 좋고 먹기 좋은 과실을 있게 합니다. 그 자리에 있게  되면 보기 좋고 아름다운 과실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다 따먹어 버리고 저  따먹을 게 없으면 어짭니까? 하나님이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 좋은 과실나무가  나게 했다 하는, 그러면 오늘 우리로 말하면 그런 모든 행복된 행복이 이루어져  닥치도록 했다 하니까 저절로 됩니까 하나님이 섭리를 해서 됩니까? 하나님이  섭리를 해서 됩니다.

 그 자리에서 그러면 그 창기가 할 일은 뭐입니까? 창기가 할 일은 그 자리서  뭐입니까! 창기의 자리를 떠나도 안 되고 그 자리서 할 일은 뭐입니까? 할 일은  뭐이지요? 그 자리에서 말씀대로, 해야 됩니다. 그 자리에서는 이제 가라 하면  가고 있으라 하면 있고 거게서 그 자리에서 말씀 떠나지 안하고 말씀대로 그  자리서 행합니다. 말씀대로 행하게 되면 혹 몽둥이가 올란지도 모르지요.

말씀대로 행하면 꺼꾸로 달란지도 모르지요. 어짜든지 말씀대로 행하면 그 자리에  보기 좋고 아름답고 먹기 좋은 나무가 나게 됩니다. 요게 신앙이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이래 하신다 하면은 그만 대번에 그와같이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그걸 섭리하셔 가지고서 하기 때문에 당신이 엿새 동안에  우주를 만들었으니까 그분이 있게 하는 데 있으면은 그분이 그까짓 거야 뭐 당장  변화도 얼마든지 변동시킬 수가 있지 변동 못 시키시겠습니까?  그 자리에, '주님이여, 나는 여게서 내가 지금 요거는 내 처지니까 내가 요게서는  내가 하나님 있게 하는 대로 요게 있겠습니다.' 딴 데로 옮기지 안하고. 있게 하는  대로 있으면 하나님이 있게 하는 대로 있으니까 그 자리서 어떻게 해? 그 자리서  인제 믿음 지켜야지. 그 자리서 믿음 지켜야지. 그 자리서 신앙 지켜야지. 그  자리서 신앙 양심 지켜야지. 그 자리에서 주일 지켜야지. 그 자리에서 성결  지켜야지, 그러면, 거기서 하나님은 그 사람이 믿음을 지키는 그 믿음을 통해  가지고서 하나님은 이 아름다운 과실나무가 거게서 나 가지고서 열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섭리해 만듭니다. 그거 만들 수 있겠소 없겠소? 몽둥이 뚜드려 맞을  건데? 당신은 능치 못하심이었어. 그분을 믿어야 돼요. 거게서 그 자리에서 계명  지켜.

 그 자리에서 계명 지키니까 이제부터는 창기노릇을 안 해야지 뭐. 할 수가  있겠소? 그 자리에서 안 해야 돼. 그 자리에서 안하고 계명대로 지켜. 계명대로  지키면, 계명대로 지키면 몽둥이 왔던 것이 상급이 되고 욕했던 것이 나중에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하고 되고 발의 티끌을 핥게 되고 하나님의 이 기이한  조화가 있어 하나님 시키시는 대로 하면 시키시는 대로 하는 그것이 없는  가운데서 있게도 하고 있는 걸 없애기도 하고, 하나님 시키시는 대로 하면은 그만  사창굴 그만 그 뭐꼬? 뭐라 하노? 주인이라 하나, 오야지라 하나? 사창굴 뭐라  해? 포주? 시키는 대로만 하면 사창굴 포주를 예수 믿는 사람도 만들 수 있고  사창굴 포주를 당장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시키는 대로하는 그 순종을  통해서 그 사람을 변화되게도 만들 수도 있고 그 사람을 병신도 만들 수도 있고  그 사람을 그만 혼이 나서 도망을 치도록 만들 수도 있고 얼마든지 할 수가 있어,  하나님 시키시는 대로 하면. 얼마든지 할 수가 있어.

 이러니까, 우리 이 현실은 참 좋은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 현실에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 좋은 이 나무가 있고, 또 하나는 뭐 있습니까? 생명나무 있고, 또  하나는? 선악을 아는 나무. 세 가지 있어.

 세 가지 있는데 거게서 제일 실패는 뭣이 제일 실패입니까? 선악과 먹는 게  제일 실패입니다. 우리 그 현실에서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거 하는 거 하는 것이  그것이 제일 실패입니다. 그게 선악과라. 먹지 말라는 게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이라. 취하지 말라는 거 하지 말라는 거, 하나님이 하지 말라 하는 그것이  선악과 먹는 거 제일 실패고,  또 그 다음에는 임의로 얼마든지 먹는 거 먹어, 임의로. 임의로 얼마든지.

하나님이 정죄하지 안하고, 죄는 되지 안하고 자기가 얼마든지 취할 수 있는  복덩이가 거게 있어. 그것이 제일 나쁜 거 다음에는 좋은 겁니다.

 그라면 그 생명나무 있는 거는 뭐입니까? 거기에 하나님과 연결되는 그 결과를  맺게 하는 그게 있다. 생명나무가 거게 있다.' 생명나무의 과실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그러니까 이걸 쫓아내자.' '생명나무 과실을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그러면 그 현실에서 생명나무가 있다. 하나님과 가까와지고 하나님과 사귀어지고  하나님과 연결되는 그 연결이 또 거게 있다. 거게 있다.

 그러니까, 그 현실에서 임의로 먹는 과실로 배가 부르고 아주 잘먹고 잘입고,  사장도 되고 정치가도 되고 또 뭐 부자도 되고 모든 행락도 되고 오만 거 세상  부귀영화 뭐 존귀 전부 다도 돼요. 그 임의로, 그런 거 하는 게 죄 아닙니다.

임의로. 그거 죄 아니라요. 얼마든지 먹을 수 있어.

 먹어서 많이 배는 부르고 많이 먹기는 먹었는데 생명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생명과실을 먹어야 영생하는 건데, 여게 보니까 '과실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이래서 에덴동산에서 쫓아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자 오늘 다섯 가지 배웠는데. 제일 처음에, 우리의 처소는 하나님이 벌써  마련해 놓고 있다. 염려하지 마라. 우리 할 일 아니다. 또 거게서 좋은 처소를  찾아다닐라고 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있게 하는 대로 있어라. 있게 하는 그 자리  있거라. 그러면 셋째로 그 자리는 어떠한 자리냐? 보기 아름다운,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 좋은 과실이 얼마든지 있는데 그 과실은 얼마든지 임의로 먹을 수  있는 게 있다. 이래 임의로 먹을 수 있다.

 이러니까, 이거 임의로 먹어도 죄 아닙니다. 죄 아니고 임의로 먹을 수 있으니까  막 이거 자꾸 뭐이 박사도 거머먹고 사장도 거머먹고 뭐 권세도 거머먹고 오만  거 다 막 거머먹어. 그거 임의로 먹으라 했기 때문에 죄 안 돼 임의로 먹는 사람  있고,  거기에서 또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 먹지 말라는 선악과만 먹고서  멸망받는 그자도 있고, 거게서 제일 복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생명나무 과실,  거게서 자기의 그 자리의 사회에서 한 건으로 하나님과 가까와지고 또 한 건으로  하나님과 가까와지고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생명나무' 하나님과 가까와지는,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하나님과 친밀해지고 가까와지는 그것을 제 수입으로 알고  그거 하는 사람 있다. 이해가 됩니까?  오늘밤에 몇 가지 배웠어요? 다섯 가지 배웠습니다. 다섯 가지 배웠는데 거게  제일 나쁜 것이 몇 가지 있습니까? 제일 나쁜 것 한 가지. 제일 일등으로 좋은  것은 몇 가지입니까? 일등으로 좋은 거는 몇 가지요? 한 가지. 또 이등으로 좋은  거는 몇 가지입니까? 한 가지.

 자, 이등 좋은 것을 원하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봅시다. 뭐 안 들기는 안 들어,  전부 원하기는 그거 원하면서. 일등으로 좋은 걸 원하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봅시다. 야, 할렐루야! 뭐 이것만 되면 다 돼, 왜 염려해요,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열왕은 네 양부가 되고 왕비는 네 유모가 되고 또 네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절하고 또 어깨에 메고 발의 티끌을 핥을 것이라. 그제야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순종하면 요와같이 되면 나중에 '참 여호와라!' 이래 알지 지금은 모두  순종도 뭐 십분지 일밖에 안 하니까 하 과연 과연 이래 쌓아도 참으로 여호와가  여호와인 줄 모릅니다. 우리가! 끝까지 순종해 보면 알아요. 요렇게까지 결과를  맺도록 하나님이 하십니다. 녜, 오늘밤에는 다섯.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이제 작정을 해요, 이제는. 이제는 내 처소를 내가 마련할라 하는 망령 부리지  않겠다. 좋은 처소 찾아다니는 그런 일 내가 하지 않겠다. 하나님 금하는 선악과  내가 먹지 않겠다. 얼마든지 임의로 먹을 수 있는 것 많이 있지마는 그것이  내것이 아니고 생명나무 이것이 나 할 일이다. 그 가운데 춰할 것.

 


선지자선교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775 양심을 써야 하나님을 찾아 갈수 있다/ 베드로후서 3장 8절-13절/ 881030주후 선지자 2015.12.06
774 양심의 인도에서 영감의 인도로/ 베드로전서 3장 21절-22절/ 850607금새 선지자 2015.12.06
773 양심의 화인/ 딤모데전서 4장 1절-5절/ 830829월새 선지자 2015.12.06
772 양심의 화인을 맞지 아니하려면/ 디모데전서 4장 1절-5절/ 860321금야 선지자 2015.12.06
771 양심의 힘/ 창세기 4장 1절-7절/ 820104월새 선지자 2015.12.06
770 양심자유-진리자유-영감자유/ 갈라디아서 5장 1절-6절/ 881022토새 선지자 2015.12.06
769 양을 기를 때 기억할 것/ 요한복음 21장 15절-22절/ 880309수새 선지자 2015.12.06
768 양을 위하여/ 요한복음 10장 11절-15절/ 810126월새 선지자 2015.12.06
767 양을 이리가운데 보내심/ 마태복음 10장 16절 / 880221주후 선지자 2015.12.06
766 양을 이리가운데 보낸 두려움과 기쁨/ 마태복음 10장 16절-42절/ 801203수야 선지자 2015.12.06
765 양을 이리가운데 보낸 두려움과 기쁨/ 마태복음 10장 16절/ 801204목새 선지자 2015.12.06
764 양의 문/ 요한복음 10장 1절-6절/ 810125주전 선지자 2015.12.06
763 양의 우리의 문으로 들어오는 자와/ 요한복음10장 1절-6절/ 880603 지권찰회 선지자 2015.12.06
762 양의 피난처/ 마태복음 10장 16절-17절/ 890522월새 선지자 2015.12.06
761 어떻게 살까/ 에베소서 5장 15절-17절/ 791021주전 선지자 2015.12.06
760 어떻게 살까/ 요한계시록 18장 1절-3절/ 791021주후 선지자 2015.12.06
759 어려운 시험이 올때 할 일 2가지/ 베드로전서 1장 3절-7절/ 871020화새 선지자 2015.12.06
758 어려움 당할 때/ 야고보서 1장 2절-4절/ 830831수야 선지자 2015.12.07
757 언행심사의 기능/ 갈라디아서 6장 6절-8절/ 840526토새 선지자 2015.12.07
» 에덴동산/ 창세기 2장 7절-9절/ 880808월밤집회 선지자 2015.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