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동산

 

1981. 5. 31. 주일 오후

 

본문 : 창세기 12장 15절 - 17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으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이 말씀을 벌써 계속해서 여러번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깨닫는 사람은 점점  깨달아 질 것이고 또 깨닫지 못하고 가리워지는 사람은 점 점 가리워질  것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에 세상에는 노아 때보다 죄악이 하늘까지  관영해진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좌악이 관영해지는 그것이 하나님의 예언하신 말씀대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낙망이나 한탄이나 할 이유는 없습니다. 더러운  자는 점 점 더러워지는 것이 주님이 오실 때까지의 세상이요 또 악한 자는 점 점  악해지는 것이 세상이요. 그 중에서 깨끗한 자는 점점 깨끗하고, 의로운 자는  점점 의롭고, 깨닫는 자는 점점 깨닫고,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자는 하나도  깨닫지 못한다 그렇게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에덴동산 설교를 자꾸 이래 하니까 이것이 그에게 깨달아 지지  안하는 사람은 이 본문을 읽을 때에 구역질이 날 것이요. 또 이 설교를 하면  마음에 그저 번민이 나고 설교하는 설교자의 그 입술과 소리가 미워서 정죄를  하면 싶을 것입니다. 그래도 여기에 죽고 사는 것이 있습니다.

 오전에 열왕기상 19장에 있는 말씀을 했습니다. 엘리야에게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을 그 순서로 보였고 또 우리에게 문서로 기록해 주셨는가? 그것은 그들은 그  실상을 겪은 사람이나 그들은 하나의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하나님이 주시는  데에 계시의 기관으로 사용된 계시기관 인물들입니다. 그들의 그 형상을 가지고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가르쳐 주셨고 또 그것을 문서로 해서 신약 교회  우리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벌써 이런 말 하면 여러분들에게 잠이 오는 사람은 잠이 옵니다. 마음에  동여지는 사람은 동여질 것입니다.

엘리야가 많은 활동을 했지만 그는 결국은 그 모든 일이 다 수포로 돌아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암만 거짓 선지자를 죽여도 거짓 선지자는 그 뒤에 얼마든지  왕성됐습니다. 결국은 아합과 이세벨이 하나님의 백성을 주물대로 주물렀고  우상을 끌어 드릴대로 끌어드렸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 없이 그 앞에 다 우상  앞에 경배하고 복종을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마지막에 이 바람 지진 불 순서 뒤에 세밀한 음성에서 그의  인도를 받아 행한 그 행함을 가지고 피해서 도망쳐 돌아다니던 무서운 이세벨을  죽였습니다. 아합 왕을 절단을 냈습니다. 또 그는 이방을 통치하는 통치권을  받았습니다. 타락한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통치권을 받았습니다. 진실한 하나님의  교회를 통치하는 통치를 받았습니다.

왜? 엘리야가 그가 하나님 앞에 권세받아 이방의 통치하는 왕권을 그가 자유로  부여했고 또 이스라엘의 왕권을 그가 부여했고 또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통치권을 그가 부여했습니다. 그래서 하사엘과 예후와 엘리사를 그가 기름 부어  가지고 한 것은 이방 타락한 이스라엘, 진실한 이스라엘 그 전체를 엘리야가 그  주권을 주장하시 가지고 결정지운대로 이루어나갔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그 사람은 산채로 승천했습니다. 이것은 에녹이 승천한 것이나  엘리야가 승천한 것은 별다른 뜻이 있다고 생각하면 해석이 잘못됩니다. 이것은  어떻게 하면 죽지 아니하고 영원히 사느냐 하는 것을 하나 형식 계시로 보여준  것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만이 영생한다 하는 것을 보여준 것이요.

엘리야는 많은 일 했지만 마지막에 세미한 음성을 받고 그 세미한 음성을 주시는  그를 따라서 움직이는 것게만 죽지 안하는 영생이 있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거기에서 바람이 일어나서 산을 가르고 돌을 바위를 깨뜨리고 하는 그것은  운동을 상징한 것입니다. 땅위에 참 산이라는 것은 이런 높은 것 이렇게 우뚝  솟은 것 저렇게 우뚝 솟은 것 이렇게 강한 것 그런 것들을 다 깨뜨리는 운동  세상에 어떤 큰 운동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 가지고 그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일이지마는 그것 가지고 최종의 승리는 이루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또 지진 역사가 일어난 것은 병동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을 아무리  변동시키고 변화시킨다 할지라도 그것 가지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마는 최종  승리를 성사를 이루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또 불의 역사가 일어나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하고 그들의 정신을 뜨겁게  하고 간절케 하고 아무리 한다 할지라도 그것도 하나님의 구원의 운동은  운동이지마는 그것 가지고 최종 최고의 승리를 이루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게 엘리야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하사엘을 세우면 하사엘의 칼을 면하는 자  하사엘의 칼에 죽지 아니하는 자는 예후의 칼에 죽을 것이고 예후의 칼에 죽지  아니한 자는 엘리사의 칼에 죽으리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이 정죄해서 죽이지 못하는 것 세상이 정죄하지 못하는 것 타락한 교회가  그것을 정죄할 수 있고 타락한 교회가 정죄 할 수 없는 것, 하나님의 신령한  교회가 정죄해서 멸하는 그 깨끗게 연단시키는 그것이 세미한 음성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세상이 정죄해서 이것은 고쳐야 된다 이것을 뽑아야 된다 네가 요것을  행하지 못했다. 세상에서는 그 사람에게 잘못한 것도 없고 하지 못한 것도  없다고 완전자라고 할 수 있는 그것을 타락한 교회서는 볼 때에 이것도 잘못됐다  이것도 할일 안했다. 정죄할 것이 수두룩하이 있습니다. 그것을 고쳐야 사는  것입니다.

타락한 교회가 그만하면 정죄할 것이 없고 그만하면 모지라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을 신령한 교회는 '아니라 요것도 안했으니 요걸 또 새로 해야 된다.' '요것도  잘못됐다.' 그렇게 해서 하사엘이 숙청시키지 못한 것을 예후가 숙청시켜서  깨끗하게 하고 예후가 숙청시켜서 깨끗지 못한 것을 엘리사가 숙청시켜서 깨끗게  한다.

그러면 이렇게 이방 타락한 교회 신령한 교회 이를 다스리는 그 주권적 능력 그  모든 것을 통치해서 지배할 수 있는 그런 권능은 어디서 나오느냐? 그거는  세미한 음성을 들은 거기에서 나오는 것을 가르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게 세미한 음성은 어떤 것이 세미한 음성이냐? 세미한 음성은 천하에 많은  말들이 있고 책들이 있는데 세상이 멸시를 한 신구약 성경이 세미한 음성입니다.

세상에서는 신구약 성경이 세미한 음성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읽을 뿐 아니라.

거기에 진리를 바로 깨닫는 고 진리를 깨닫는 바로 깨닫는 고것이 세미한  음성입니다.

진리를 바로 깨닫고 사는 자가 자기 현실에서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아 명중할 때에 그것이 세미한 음성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처음에  발기한 분이 되고 마지막에 이것을 최종까지 인계맡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시작은 하나님이요. 마지막에 결말 최종 책임자는 하나님이요 그 중간에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말씀은 아버지가 경영한  것을 그가 명령한 대로 주님이 행하셔서 십자가 상에 하나님 명령하신 것을 다  지켜 행하고 난 당신할 일 다 했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이  그것을 책임지고 인계해서 완료합니다. 게 지금은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이 일을  책임지고 진리가 중생시켰고 또 우리의 이 건설구원을 이루는 것도 성령과 물과  피로 보증한다 하는 그 말이 물은 진리를 말하고 피는 주님의 대속의 삼대  공로를 가르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어떤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하느냐? 제가 세상에 있는  문학을 다 통달하고 지식을 다 통달하고 과학을 다 통달하고 오만 능란한 예술을  모든 사상을 주의를 다 통달해 안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 껍데기요 소용없습니다.

그것 가지고 목회하고, 그것 가지고 인간을 구원하고, 그것 가지고 일시의  사람들의 흥분을 사람들의 인기를 사람들의 그 감정을 자기의 인기를 끈다고 해  가지고 되는 것 아닙니다.

오직 책 중에는 신구약 성경 육십육 권 뿐입니다. 말 중에는 지식 중에는 신구양  성경 육십육 권 뿐입니다. 이 말씀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고 이 말씀만이  인간을 고칠 수 있고 이 말씀만이 자기는 죽어도 말씀이 책임을 집니다.

이래서 사도행전 20장에 말씀하시기를 주가 곧 하나님의 말씀께 너를 부탁하노니  하나님이 말씀이 너를 지켜 능히 든든히 세워 거룩한 자들이 받는 업에 너도  같이 그 업을 누리게 하리라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 외에는 아무도 지킬 자가  없는 것입니다. 산을 갈라트리고 바위를 깨고 지진을 내고 불을 일으킨다  할지라도 한 세대도 갑니다. 그 사람도 갑니다.진리는 영원히 서서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아 내가 땅위에 있는 모든 지식을 다 통달했지만 이 지식 가지고는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내가 온갖 수사학을 공부해서 능란한 수사를 가지고  괭장한 웅변 연습해서 웅변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이것 가지고도  소용없습니다. 오직 신구약 성경에 기록한 이 말씀만이 구원할 수 있다.

더듬어도 이 말씀을 증거해야 되겠다. 서툴어도 이 말씀을 증거해야 되겠다.

듣는 사람이 든든지 재미없다 하든지 어떻게 하든지 이 말씀만 그들에게  증거해서 이 말씀이 너희들을 살린다 이 말씀만이 인간이 구원얻는 길입니다.

이것을 선택하는 사람이 수많은 말 가운데에 보잘것 없는 육십육 권의 이 세밀한  음성을 들은 사람입니다. 이게 믿어지는 것이요. 육십육 권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참되다 인정이 되어서 믿어지는 것,  그러기에 어떤 사람은 육십육 권에 도리에 대한 확신을 주옵소서. 밤세껏 확신을  주옵소서 확신합니다. 확신대로 더 충만케 하옵소서 확신합니다. 확신케  하옵소서 확신합니다. 이렇게 이것을 그 평상 되풀이 하는 것이 여기에 포언이  이 말씀이 모든 수많은 말 그 전부를 다 합하여 이 말씀의 한 획도 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비중이 안 됩니다.

신구약 육십육 권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영생의 말씀이요 산 말씀이요  살리는 말씀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요 말씀이 자기에게 가르치는 요  말씀의 뜻을 깨닫는 사람 요기 되야 됩니다. 깨닫는 사람 돌짝밭에 뿌린 씨,  길가에 뿌린 씨, 덤불밭에 뿌린 씨 되지 말고 요 말씀에 대한 고 진리를 깨닫는  사람 요 깨닫기를 누가 깨닫게 합니까? 성령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실 때에 불로 나타났고 혀의 갈라진 걸로 나타났습니다. 바람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성령은 움직이는 운동력이 있는 것을 가르쳐서 말씀했고 성령은 진가  좌우 생사 둘로 이렇게 구별해서 갈라트리는 것 요건 요거 조건 조렇다  갈라트리는 것, 죄만 말하고 의를 말하지 안하면 그것도 치우쳐서 다 겻길로  탈선되 가버리는 것이고 의만 말하고 죄를 말하지 안해도, 구원만 말하고 멸망을  발하지 안해도, 행복만 말하고 불행을 말하지 안해도, 순종만 말하고 거역을  말하지 안해도 다 치우쳐서 겻길로 탈선되 저 갈대로 가버리는 것입니다.

혀의 갈라진 것 이기냐 저기냐? 레위기 11장에 보면 "네가 쪽발로 걸어가는 것만  네가 취하라" 에스겔 1장에 보면 "다 송아지 발같다" 그 말은 쪽발이라 쪽발로  걸어간다 이기냐 저기냐? 둘로만 구별해 이게 신본이냐 인본이냐? 이 천국이  위주로 하는 것이냐 세상을 위주로 하는 것이냐? 이 하나님 좋게 하는 것이냐 저  좋게 하는 것이냐? 하늘에 소망이냐 땅의 소망이냐? 게 이렇게 성령이 오면  구별하는 역사를 하러 성령이 왔다 그 말이오. 구별하는 역사를 하러 성령이  왔다.

이렇게 바람이 불어서 모두를 흔드는것 마찬가지로 이렇게 모든것을 움직이는 이  운동을 생명운동을 하기 위해서 성령이 오셨다. 불로 나타난 것은 죄에 대해서  그 뜨거워지고, 의에 대해서 뜨거워지고, 자기의 잘못에 대해서 그 미움이  뜨거워지고, 옳은 것에 대한 욕망이 뜨거워지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못한데  대해서 그 마음이 뜨겁게 원통하고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는데에 뜨거워지는 것  모든 것이 뜨거워지는 것 이 역사를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요.

그때에 방언역사가 어떤 방언역사인 줄 압니까? 오순절 방언역사가 어떤  방언역사요. 오순절 방언역사는 어떤 역사냐? 그 역사는 떠드는 그런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설교하는 사람들은 다 유대인들이었는데 듣는  사람들은 설교하는 사람들은 다 유대인들이었는데 듣는 사람들은 세계 각국에서  모여왔습니다. 한나라 말로 가지고 하는데 각각 제나라의 말로 다 들려졌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는데 먼저 증거하는 자에게 유대인의 말로 하는데 헬라인이  그 말을 듣습니다. 로마인이 그말을 듣습니다. 히브리말은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모르는 사람이 히브리 말로 설교를 하는데 듣도 보도 못한 로마인이 그 설교를  듣습니다.

예루살렘 방언역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에 증거하는 그  증거가 듣는 자에게 알아 들려지게 하는 그 역사가 성령의 역사입니다. 무슨  역사가 성령의 역사입니까? 또 그들은 생전 자기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말로  하는데 자기들의 그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듣는 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데에 그 말씀을 자기들이 들어 깨닫게 됩니다.

전하는 자에게는 상대방이 들어 깨달아 바람역사, 가라진역사, 구별역사,  불역사, 이 역사가 일어나게 하고 듣는 자들은 성신의 감화를 받아 가지고 그  생전 모르는 말인데 그 방언을 자기 다 들어 자기가 자기 나라의 말로만 하는데  방언의 역사가 있어 가지고 열 나라 사람이 모였으면 자기 나라 말로 하는데 그  설교의 방언 능력이 역사해서 열 나라 사람에게 다 들려지도록 설교를 하게 된다  이거요. 또 설교를 받는 자는 자기 나라 말로는 하지 안하는데 자기가 그 나라  자기 나라 말 아닌 말로 하는 것을 자기가 들어서 깨달아질 수 있는 이런 그  방언의 역사가 있다 그게 방언의 역사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그 뒤에 방언 역사가 있는 것은 일만 마디 방언이 다섯 마디  댓마디 깨달은 것만 같지 못하다 그렇게 평가를 했습니다. 그것은 그 후에  방언이 없는 것 아닙니다. 그는 사람들이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이래  보니까 자기가 기도하는데 말을 빨리하니 입은 둔해서 따라가지 안하고 마음은  앞서가서 착착하고 이러니까 부득히 입이 둔해져서 고만 그 자기가 말한대로 다  말 못하니까 따라 못하니까 너물 너물하고 그러나 자기는 환하게 아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 자기가 알고 표현이 잘 안되는 것이지 이랬는데 자기가 방언을 하고  무슨 말했는지 모르는 그거는 잡탱이입니다. 성경에 그래놨오.

또 방언을 했으면 옆에 반드시 다른 사람이 통역할 수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방언을 하지 말라 했습니다. 그러면 듣는 사람들에게  오랑케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은 방언 역사가 어떤 역사냐? 자기가 불학 무식힌 사람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어학공부를 하게 됐습니다. 여러 나라 어학공부를 하게  됐습니다. 그러면 그 방언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것도 다 방언의 은혜요.

다 같은 설교를 하는데 꼭같은 설교를 하는데 받는 자에게 그 역사가 크고 작은  그것이 뭐이냐? 많은 것이 방언의 그 역사입니다. 다 같이 한자리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저 사람은 깨닫지 못하는데 자기에게는 깨닫게 합니다.

그것이 방언의 은혜가 자기에게 임한 것입니다.

요것을 방언의 은혜의 정의로 알고 아 나는 방언적인 은혜를 받아야 되겠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증거할 때에 다른 사람이 깨달을 수 있는 이 은혜를 방언의  은혜 다른 사람이 말할 때에 그 말을 내가 받아서 바로 깨달을 수 있는 이  방언의 은혜를 내가 받아야 되겠다. 여기다가 정의를 두고서 하면 탈선하지 안할  것이고 점점 강해질 것입니다. 이거 외에 우두두두 하는 그걸 방언의 정의로  삼으면 마지막에는 그것이 끝까지 잘나가기가 어렵고 가다가 실수하기가  싶습니다.

그런고로 또 오순절에 성령 강림이 마가에 다락방에서 열흘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는데 그때에 그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그들의 기도는 중점이 어떤  기도였느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밖혀 죽였고 거기에 대해서 서기관과 바리새  교인 또 유대인들 로마의 총독 병정 빠짐없이 전체가 다 예수님을 어울려서  죽었기 때문에 예수교가 완성되면 저희들이 죽는 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교를  절단을 내야 이 살았다 하니까 지금 가슴이 뜨거워지는 이 살아났으니까 귀신이  돌아다니며 무슨 일 할지 모르니까 어쩌든지 예수교인을 전멸을 시키야 저희들이  살판이니까 지금 일대의 생사가 지금 이 투쟁되는 때입니다.

이러니까 한 집안 식구에도 많이 있지 전체에 자기네 생명을 노리는 원수가  가득찬 그 예루살렘 속입니다. 거기에서 주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얻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겠다는 이 성령의 강림의 권능을 얻기 위해서 그들이 내놓은 것이  무엇입니까? 생명 내놨소. 생명 내놓고 생명 내놓고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또  그들이 이렇게 원수가 많지마는 하나님의 권능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안보를 입은  그 신앙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능력을 받은 그 기도의  원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떤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되느냐? 신구약 성경은 가지고  있지마는 오늘 세계에 교파라 하는 것이 몇 백 종류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  사람들 다 꼭같은 성경을 봅니다. 왜 같은 성경을 보는데, 기독교가 이렇게 그  수많은 갈레길로 이렇게 갈라져 있는가? 이유는 성경은 같은 성경이지만 성경의  깨달음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성경의 이 깨달음이 각각 다르다 말은 교리와  신조가 다르다 말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해서 로마가 한때에 전국이 그 로마에는  세계 종교라 하는 것이 다 종합되어 있는 나라인데 거기에 기독교가 흥왕되어  가지고 모든 것을 정복하고 로마의 강한 철통같은 견고한 나라가 교회에다가  법왕을 세워 가지고 법왕이 로마 나라의 그 국왕보다 세력이 훨씬 위에  있었습니다. 이러니까 기독교가 로마 나라에서 얼마나 흥왕되고 얼마나 세력을  퍼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들어서 부패해 가지고 천주교의 이 부패한 교회를  빗어내고 말았습니다.

왜? 성경 가운데에 세미한 음성을 몰랐습니다. 성경 가운데에 성령이 바로  깨닫게 해주시는 이 깨달음을 받지를 못했다 그 말이오. 우리의 죽고 살고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이 천하에 많은 지식이나 학문에 있는 것이 아니고 육십육  권 신구약 성경 도리 안에 있고 신구약 성경 도리를 아무리 잡아 잡고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한다 할지라도 이 말씀을 바로 깨닫고 잘못  깨닫는데 죽고 사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은 평생동안 '주여 성령으로 나에게 감동시켜 주셔서 육십육  권 도리를 바로 깨닫게 해주옵소서.' 이것을 평상 하루도 기도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한 번만이나 기도할 때마다 계속해서 이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그 사람들은 성경을 바로 깨닫는 이것이 천천 금은이 아니라 죽고  사는 것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이 평가했기 때문에 이렇게 바로 깨닫는 것을  귀중히 여겼습니다. 성경을 바로 깨닫고 잘못 깨닫는 데에 크게 나누면 성신의  감화로 성경을 깨닫는 길이 있고 악령의 감화로 성경을 깨닫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 예수님을 예수님이 그 마귀로 더불어 투쟁하러 갔었을 때에  그때에 마귀는 성경 깨달음이 그렇소. 성경 제가 깨달은 대로의 깨달음 가지고  예수님에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깨달음은 달라서 예수님의 성경 깨달음과 저의  성경 깨달음이 달라서 예수님이 그의 성경 깨달음을 인용치 안하고 반박하고 해  가지고 예수님의 성경 깨달음 그대로 나갔을 때에 그는 패전하고서 도망을 쳤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성경을 읽지만 악령의 감화로 내가 성경을 깨달으면 내가 죽고,  성령의 감화로 깨달으면 나와 내게 속한 사람을 살릴 수 있기 때문에 성령의  감화로 이 성경을 바로 깨닫게 해달라는 이것이 얼마나 중대한 문제인지  모릅니다.

그것이 나타나는 외부의 형편은 뭐입니까? 형편은 성경을 깨달았는데 그 성경을  그 성경을 깨달을 때에 하나님 좋게 하나님 먼저 생각하고, 성경을 깨달을 때에  어떻게 요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느냐? 요래야 하나님이 좋아하시겠느냐?  요래야 하나님의 뜻에 맞겠느냐? 요래야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겠느냐? 요래야  네게 좋겠느냐? 성경을 깨달을 때에 인간 좋은 것 하나님 좋은 것 두 길로  갈라집니다. 인간 편을 중하게 여겨서 성경을 깨닫고 하나님 편을 중하게 여겨서  성경을 깨닫는 요것이 두 갈레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는 인본주의  하나는 신본주의입니다.

게 성경을 깨달을 때에 첫째로는 자기가 죽은 것, 병든 것, 율법적으로 깨달아가  율법적으로 깨달아서 성경을 율법으로 깨달아서 이 성경에서 나에게 정죄받을  것을, 정죄 받고 내가 어떤 형을 받고 어떻게 망할 것 이렇게 율법에서 정죄를  받아 먼저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나는 성경 보면 이렇게 죽을 자로구나! 이러게  정죄받을 자로구나! 이런 죄가 있는 자로구나! 성경에 율법으로 자기가 정죄받아  자기가 일단 죽음이라는 것을 봉착해야 그 예수가 필요합니다. 이래서 예수님의  은혜로 순전히 은혜, 예수님이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고 율법을 봐도 이래봐도  주권적 은혜,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된다는 예수님의 은혜 이 복음으로 이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복음은 말하면 사람들이 다 좋아합니다. 율법의 정죄는 다  싫어합니다. 율법의 정죄를 말하면 은혜받는 자는 그만 어깨가 눌려져서 고만  얼른 예배가 마치고 그 자리 피해 도망치면 싶으고 그렇지 않은 자는 그  지질랄기 아니라 그 자기 욕할 때에 미워하는 것처럼 그 성을 율법으로  정죄하니까 전부 저 욕하는 것이고 나쁘게 하는 것 책망하는 것이고 망하는 걸  말하는 것이니까 그만 듣기 싫으니까 발악이 납니다. 이것 지나가고 난 다음에  은혜로 구원하는 이거는 얼마든지 좋은 것이니까 이것 말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합니다. 그러나 율법이 먼저요. 복음이 뒤에 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지금 들어야 할 세미한 음성은 뭐인가? 이런 바람도 지진도  불도 이걸 초월해서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됩니다. 진리를 깨달으려고 해야 돼.

우선 뭐 이렇게 저렇게 어떻게 뭐 기분 좋고 흥분 좋고 어떻게 하는 그것보다도  성경에 요 뜻이 뭐이냐? 요것을 자기가 바로 깨달으려고 해서 안되면 얼마든지  묻고 만일 목사가 잘못 가르쳤으면 얼마든지 가 가지고 그 논리해 가지고 비판해  가지고 바른 것을 찾아서 성경에 대한 바른 깨달음을 가지도록 요것을 우리가  결심하지 안하면 안됩니다.

그저 재미야 있든지 없든지 이 말씀을 바로 깨달으면 내가 정죄를 받든지 상을  받든지 어쨔든지 성경부터 바로 깨달아 놓고 나야 돼. 성경부터 바로 깨닫고  봐야 되겠다. 성경부터 먼저 바로 깨달아야 되겠다. 이 성경 깨달음에서 자기  듣기에 암만 좋아해 봤자 소용 없고, 저 사람 듣기에 아무리 좋아 말 해봐야  소용 없고, 모든 사람들 듣기 위해서 모든 사람에게 다 좋아하고서 마구 시대에  인기가 자기에게 집중되 봤자 소용이 없어. 요 성경을 바로 깨달아 하지 안하면  심판이 있다 말이요. 요걸 바로 깨닫는 요기 중요하다 말이오.

이런데 여기에 대해서 바른 진리를 말하면 고만 듣기 싫습니다. 돈벌이 말하면  눈이 바짝 뜨이요. 세상 취미 말하면 바짝 뜨입니다. 이런 낸데 성경에 있는  참된 깨달음을 가지야 되겠다고 하니까 이것이 본질과 본성도 땅에 속했지,  이제까지 습관도 땅에 속했지, 취미와 흥미도 땅에 속했지, 자기 소원도 땅에  속했지 이런 자에게 이것들을 다 죽여 변화를 시키야 되고 이것들을 다 투자해야  될 수 있는 이 하늘의 소리를 들으려 하니까 제 성질에 맞지 안하지, 비유에  맞지 안하지 자기, 경영에 맞지 안하지, 자기 소원에 맞지 안하지, 자기 취미에  맞지 안하지, 자기 현실에 맞지 안하지 이거는 전부 죽일 것 뿐이라 말이오.

보니까 전체가 죽여야 되겠고 버려야 되겠소. 고쳐야 되겠고 매잡아야 되겠고  앞으로 벌받을 것 뿐이니까 잠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와서 잠이 오느냐? 잠이 안 와서 잠이 오는 게 아니요. 여북하고 내가 어떤  유식한 박사가 여기에서는 그 모두 무식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듣고 있다 이러기  때문에 또 언제든지 장 그말 뿐이라. 이러기 때문에 내가 한 시간 반이나 한  시간이나 설교한 그 설교를 그 설교 안에서 문제를 열을 낼긴데 열을 내어도  자기는 한 답도 바로 할 수가 없다. 왜? 한 시간에 배웠는데 왜 답을 못하느냐?  그 귀가 막혀서 안들리는 것이다 안 들리는 것 말했어.

그러기에 우리는 성경에 대해서 바른 깨달음 요것이 이제 중간 껍데기 세미한  음성입니다. 요걸 성경을 바로 깨닫고 나야 그 다음에 자기 현실 생활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너는 현실에 너는 이렇게 하라 조렇게 하라 너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봐 자기가 바로 찾아서 거기에 명중해야 고게서 고기 신앙이  되어지는 것인데 성경을 바로 깨닫지 못했는데 자기 현실에 무엇을 바로  깨닫겠단 말이오. 안됩니다.

지금도 보니까 모두 눈이 간잠드리 하이 잠이 오고 똑 뜨이는 사람은 뜨이고  여기에서 춤이나 한번 추든지, 여기에서 돈벌이나 한번 말하든지, 여기에서 무슨  한번 빛장대소를 한번 할 수 있는 그런 무엇을 한번 했으면 눈이 바짝 뜨일  것입니다. 나는 그런 짓을 못하는 사람이요. 또 그 짓을 안할 사람입니다. 그  짓을 안하려고 합니다. 왜 그러면 안되기 때문에 왜 그러면 결국 이걸 깨닫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게 오늘은 시간 많이 지나갔는데 여러분들이 요 하나를 똑똑히 들으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하며 우리가 어떻게 하면 멸망을 받는가 하는 것을  가르친 그 방편을 이렇게 가르치고 저렇게 가르치고 그 방편을 가르친 것이  신구약 성경입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하며 어떻게 하면 영원히 멸망받는가 하는  것을 가르친 것이 육십육 권 성경이요.

가르친 중에도 제일 첫째로 이 방편을 가르친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 2장  15절에 에덴동산 이 형식입니다. 에덴동산 형식, 이 역사적인 사실을 우리에게  이 형식 계시를 문서 계시로 기록해 가지고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요것은  간단하고 오묘하고 내쓰기 좋아.

게 우리가 성경은 한 말로 말하면 예수님 잘 믿으라는 것이 성경이요.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말하고 말했는데 그 모든 복잡하게 해석해 놓은 방편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그 해석하는 데는 좋지만 잘못하면 많이 가지고 있으면  익숙지 못하면 '이건데 저건가?' 이 사건에는 지금 열쇠가 뭐인가? 이 성구인가  저 성구인가? 이건가 저건가? 열쇠가 여러 수천 개가 어울러 있으니까 어느 건지  몰라서 지금 더듬다가 보니까 시기 지나가버렸으면 패전해 버리고 만다 그  말이오. 그러나 열쇠가 하나만 있으면 딱 가지고 끌르면 되니까 간단 명료하기를  신구약 성경에 예수 믿는 도리 영생하고 멸하는 이치를 간단 명료하게 가르친  중에 제일 간단 명료하고 제일 요긴하게 첫째로 주신 열쇠가 에덴동산  교훈입니다.

이 에덴동산 교훈이 지금은 필요없습니까? 필요 없을 때가 없습니다. 이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일류 시조 아담은 초대 교회입니다. 상고 교회요. 제일  첫 교회가 아담 하와가 첫 교회입니다. 그 다음에 가인과 아벧은 그 다음에 제  이세의 교회입니다. 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으로 이끌면서 여기에  네가 거처하라 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하고 같이 거처하는 곳이요. 하나님과  동거 동행하는 곳이요. 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요. 거기에 떠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을 잘 만나지 못해요. 그런데 간단해.

에덴동산에 네가 여기에 머물라, 너 여서 살아라 살면서 이 동산을 다스리라,  동산을 지키라, 모든 과실은 임의로 네가 먹어라, 이 선악과 하나만 네가 먹지  말아라 이 간단해. 이것을 큰 소리로 해 가지고는 깨닫지를 못합니다. 알지를  못합니다.

에덴동산을 우리에게 거울로 주신 이 계시는 에덴동산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아담 하와가 에덴동산에서만 하나님과 밀접해 질 수 있었고 또 하나님과 아주  원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현실이라는 현실 여기에서만 하나님을  동행할 수도 있고 하나님 만날 수도 있고 사귈 수도 있고 좋은 현실이요. 동시에  이 현실에서 하나님과 원수도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것을 여러분들이 잘  아십시오.

기독교는 논리의 논리의 도입니다. 얼마든지 논리하고 논리하고 논리해서 논리가  정연하고 논리가 맞아야 됩니다. 제가 아무리 신앙에 굳게 섯다고 나는  믿사옵나이다. 나는 확신합니다. 아무리 그 싸아도 제가 믿는 지식이 제가 믿는  지식이 아직 어리다고 하면 그 지식을 가지고 믿는데 다른 사람하고 이렇고  저렇고 논리를 할 때에 논리가 있는 것이니까 이치를 따지는 것이니까 이렇게  이치를 따지는데 자기 이치 위에 자기 이치가 봐라 이게 틀리지 안했느냐 그  이치가 틀린 것을 확실히 나타내고 그 이치보다 그 위에 이치가 있으면 그 위에  이치에게는 자기는 정복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논리의 자기가 벌써 졌으면 그렇지만 나는 믿사옵나이다 해도 논리에 졌으면  벌써 자기는 점령을 당했습니다. 나중에 다급한 시기가 되어지면 그것 참 여유가  있어. 평안할 때에는 이치에 맞지 안하지만 나는 믿습니다. 이랬지만 이치에  맞지 안한 그것이 나중에 이치에 맞지 안하면 다급한 지경에 되면 그 뒤에 그  사람이 말한 이치가 맞은데 이리 가야 되는 이치가 있는데 자기는 이리 갔으니까  암만 생각해도 다급한 가운데에 마지막 최종에 가보니까 이치가 이 이치가  바르고 이 이치는 아마 틀렸는데 해도 억지로 대고 나는 이 이치로 믿는다  했지만 나중에 마지막 중량을 하나 끝으리 가보니까 이치가 이 이치가 맞는데 할  때에 그 이치로 기울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믿는 도가 그 이치가 중단되면 자기는 가다가 길이 끊긴  거와 같이 거 섰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치가 이렇고 이렇고 이렇고  이래서 자기 갈 길이 있어야 가지 이 이치가 없는데 이치가 자기가 아는 이치가  끊어졌는데 끝났는데 뭐 어떻게 간다 말이오. 이치가 끊어져 그 다음에 어떻게  가겠소 가기를  오늘 미국 교회가 이렇게 그 우주시대가 개발되고 난 다음에 미국에 믿는  청년들이 적어 아주 희귀해져 버렸어. 아주 없는 거는 아니지만 믿는 청년들이  희귀해져 버렸어. 거기에서 가르치는 것이 이렇게 우주를 관통한 이 원자 세계의  그 논리 그 이상을 기독교가 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말하기를 '야 예수 믿어  천국갈 게 아니라 우리 지금 과학으로 간다.' 이러니까 과학 이상 어디 있느냐  과학 이상 기독교의 논리가 없으면 과학에게 기독교는 밟히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소.

과학, 과학을 능가한 논리가 없으면 기독교는 밟히야 됩니다. 미국에는 과학을  능가할 그 논리가 없는 교파들은 다 주저않고 떨리고 말았다 말이오.

그러기에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에게 도달하기까지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친 것이  성경입니다. 가도 또 갈길이 남아 있고 자기가 환하게 암만 사형선고를 받은  사지에 있어도 자기 갈길이 뚜렸해. 이게 나의 갈길이다. 나는 이렇게 해야  된다. 환해야 그리 주장하고 가야 되는 것이지 그것도 모르고 야 여기에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다시 더 이상 길을 내가 배우지 안했기 때문에 그 이상  길을 모르니 여기에서는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전에는 주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는 것, 생명을 받히는 것, 죽는 것 밖에 없으니 죽어야 되느냐? 죽으면  어째야 죽어야 되며 어떻게 죽어야 되느냐? 왜 죽어야 되느냐? 네가 뭣 때문에  죽느냐? 주님 나 위해 죽었기 때문에 나는 주님을 위해 죽어야 되지. 좋기는  좋지만 그게 문신이 그 순생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조용할 때에 이 구원 얻는 도리를 깊이 길게 하나님께 까지  도달할 길을 우리가 배워야 되고 또 하나님에게 뭐 하려고 갈라 하느냐? 길을 그  도리를 배워야 되고 이치를 배워야 되고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무엇  때문에 있다 하느냐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배워야 되고 성경에 말한대로 이  성경이 가르치는 세미한 음성 성경을 읽는데에 성령님께서 바로 깨닫게 해  주시는 이 바른 깨달음 이것이 바른 교리입니다.

교리, 교리라 말은 깨달음이라 말인데 바른 교리 바른 깨달음 세계에서 지금 각  교파들이 많이 있는데도 크게 말하면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장로교인데 그  교리로서는 아직까지 장로교 교리가 제일 깊고 건전하고 논리가 정연합니다.

그러나 장로교 교리도 거기에까지만 갔지 그 다음에 갈 길이 없어.

이러니까 모든 기독자들은 우선 따라서 예수 믿으면 구원 얻으니까 예수  믿는다는 것은 좋지만 예수님에 들어서기는 들어섰지만 막상 여기에 가야 할 길,  가야 할 길을 모르니까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많은 군대들이 가가 앞에서 길이 딱  막혔으니까 마구 이래 퍼지는 것처럼 갈길 없으니 자기는 나는 이래 살아야  되겠다 이게 나 살길이다. 이래 해야 된다 이것이 살아도 또 살 길이 있고  살아도 살 게 있고, 가도 또 갈 길 있고 가도 갈길 있고 해도 또 더해야 되고  충성도 또 더 충성해야 되고 이것이 앞에 길이 었어야 될터인데 이것이 없으니까  이리 모두 퍼져서 방언이라는 데로 퍼져버리고, 지시라는 데로 퍼져버리고, 또  예언으로 퍼져버리고, 꿈으로 펴저버리고, 불로 퍼지고 퍼저 가지고  왜? 이러니 갈 길을 몰라. 갈 길만 가르쳐주니까 갈 길을 모르니까 이렇게 된다  그 말이오.

갈 길이 뭐이요? 성경에 있으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바른 깨달음을 주는 이 바른  깨달음은 하나님께 까지 도달하도록 해놓은 것이 성경인 것입니다. 게 성경에  성령이 가르쳐주시는 이것이 성경에 세미한 음성이요. 성경을 바로 깨달았지만  내 현실을 바칠 때에 내가 어떻게 되느냐 문제라 그 말이오.

그러면 자기 현실에 천인 만인이 각각 다른 현실을 가졌고 천인 만인이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 각각 다르다 그 말이오. 공통이 아니라 각각 달라. 다른데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은 뭐인가? 그것이 뭐이냐? 기름 부음이 너를 옳고 바르게  가르칠터이니까 그대로 거하라 하는 그것이 뭐이냐 하면 성신의 인도라 말이오.

성신의 감화라 말이오. 자기 현실에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달아서 그대로 하는  그것이라야 이방도, 타락한 교회도, 신령한 교회도, 하늘의 것도, 땅의 것도 다  정복하고 통치할 수 있는 승리를 가져오는 것이지 하나님 인도하는 그 뜻 외에는  아무것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요거 좀 어려운데 게 에덴동산에서 고게서 그분들은 에덴동산에 잇는 아담  하와는 죄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망이 없습니다. 그대로 영생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과 가리워지는 게 없었습니다. 밀접했어. 이랬는데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하라 하는 것을 하지 안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실패했습니다.

뭘 하지 안했습니까? 다스리는 것을 다스리지 안해서, 지키라는 것을 지키지  안했소. 먹으라는 과실만 먹어야 되겠는데 먹으라는 과실만 먹지 안했소. 먹지  말라는 과실 먹었소. 이래 가지고 에덴동산에서 죽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죽어서 죽고 난 다음에 쫓겨나 버렸소. 에덴동산에 두지 안했소. 에덴동산에서  사형을 받았고 사형을 받은 뒤에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쫓겨나서 그들은  다시 사는 길이 없습니다. 다시 에덴동산을 다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죽어서 다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 범죄했기 때문에 에덴동산에 기 들어가지  못해.

에덴동산에서 범죄하고 정죄받아 사망된 그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을 다시  복구하지 못합니다. 다시 복구하지 못합니다. 그것으로서 영원히 죽었소. 다만  그 뒤에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다시 내서 했지 그들의 죽은 것이 그대로  살아나지는 못했습니다. 대속을 해서 다른 이가 대신 죽어서 살아 났지 그  죽음은 예수님의 대신으로 죽었지 그 죽음을 안 죽을 수가 없었어. 그 죽음은  변동 못했어. 본인이 죽으면 영원히 죽을 것이기 때문에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께서 대신 죽어 살아났지 그 죽음을 면하는 길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현실이 에덴동산인데 우리 현실에서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안하면  범죄하지 안하면 사죄와 칭의와 새생명 받은 하나님과 화친에 새생명 받은  우리기 때문에 우리 현실에서 범죄하지 아니하면 범죄하지 아니한 요 시간에  범죄하지 안했습니다. 요 시간에 범죄를 안했습니다. 요 시간에 범죄를 안했으면  요 시간 범죄 아니하고 산 것 요것은 영생입니다. 요것은 영생이요. 우리 구원이  요렇게 이루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요거는 영생이요.

요 시간 요 현실에서 범죄했습니다. 범죄했으면 범죄한 것은 범죄한 것은 다시  살아날 수가 있는 줄 압니까? 아니요. 영원히 멸망이요. 이것이 둘째 사망의  해입니다. 영원히 멸망이요. 요 현실에서 살 때에 고게 쓰이진 정력, 요소,  기능, 피, 살 고거는 다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왜? 예수님의 사죄와 칭의와 새생명 받아 구속을 받은 것이지만 고것이 고  현실에서 네가 사죄받은 자로 살겠느냐? 칭의 하나님과 화친한 자로 살겠느냐?  할 때에 고 현실에 사죄받은 것을 반대하고 사죄받은 걸 버리고 죄하고 하나  되었고, 칭의 받은 걸 버리고 불의와 하나 되었고, 하나님과 화평을 버리고  하나님의 원수들과 화친했기 때문에 화친한 고것은 고대로 죽어버렸습니다. 다시  죽은 것은 이것은 다시 살리라는 길이 없습니다.

우리 현실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아 사죄 칭의 새생명 받은 이것이 이것이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그 요소로 영생화 될 수 있고 이것이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그 요소로 영생화 될 수 있고 이것이 범죄함으로 다시 살아날 수 없는  영원한 멸망화 되어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범죄했어도  그거는 살아날 수가 없는가? 안돼. 예수님이 다시 십자가에 못이 밖혀야 돼. 두  번 십자가에 못을 밖아야 되요. 예수님이 한번만 담당했지 사죄와 칭의와 새생명  받은 그것이 주님을 배반하고 범죄했을 때에는 범죄한 고 요소는 다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밖히지 안했기 때문에 한 번 박은 거 가지고는 살릴 수  없어. 영원이 어려워.

요기 여러분들에게 확실히 믿어져야 되는거라. 이런 걸 말하면 잠이 오고 듣기  싫어 아직까지 이 논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온 세계에서 분주해. 중생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해가 안되기 때문에 분주하고 그러는 사람을  정죄를 해. 중생된 영이 죄짓지 않는다는 요 교리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은  세상이 디비질 때에 디비집니다. 세상이 깨어질 때에 깨어집니다. 세상하고 함께  춤춥니다.

동방 박사가 별 따라서 예루살렘까지는 별 따라 오는 줄 알았지만 예루살렘에 탁  와서는 별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안하고 딴데로 어만 데로 가니까 이 왕자  별이 메시야가 난다 했으니까 메시야는 예루살렘에 낫을 것이다 하고 제 딴에는  메시야가 예루살렘에 낫는데 이 별이 이싸으니까 보니까 자꾸 예루살렘이 가까이  옵니다. '맞다 맞다 메시야는 지금 예루살렘에 낫을 것이다' 하고 별 따라  왔습니다. 별 따라 왔으니까 성경에는 별 따라 온 줄 알지만 반은 주관 따라  오고 반은 별 따라 왔습니다. 별하고 주관하고 나주지 안했기 때문에 따라 왔다  그 말이오.

이러다가 예루살렘에 척 와 가지고 별은 저 베들레헴 어만 데로 쑥 지나가  버리고 이러니까 그 박사가 '아 별 따라 이까지는 왔지만 별은 저리 가는데 그  왕자가 예루살렘에 낫을 터이니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야 되겠다.' 별하고  이별해서 이별해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가지고 큰 죄 저지르고 난 다음에  돌아와 가지고 별과 함께 동행했다 그 말이오.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다 자기냐 하나님이냐? 세상이냐 천국이냐? 마지막에  갈레길이 나는 마지막에 종착이 되기 전에는 다 천국 위해서 믿는 것 같고 주를  위해 믿는 것 같지만 나중에 이 갈라지는 종착점에 가면 다 하나님 버리고  제대로 가고 천국 버리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오늘까지 역사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다 시대에 넘어지고 다 한 그것이라 그 말이오. 오늘에 그것을  공부하는 것이 우리의 공부라 그 말이오. 미래를 공부하는 것이 공부하는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들은 세상에서 잘사는 공부를 하는 것이고 그 노력하는  것이 기독교 아닙니다. 기독교는, 세상 살이는 주님이 잘사는 걸 주든지, 못사는  걸 주든지, 어떤 걸 주든지 당신이 나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는 줄을 알고 뭘로  주든지 그게 좋은 줄 알고 그것을 잘 요리하도록 노력을 하고 다만 우리의  공부는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느냐? 죽음에도 진리대로 죽고, 진리를 어기는  그런 죽음을 죽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진리와 내 죽음과 함께하는 이것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공부하는 것이 오늘 기독자의 공부라 그 말이오. 이게  십자가의 공부라 그 말이오.

이런데 우리는 아담 하와와 같지를 않습니다. 우리 현실에서 내 몸둥이가 있지만  내 현실에 요 현실에 쓰여지는 정력과 진액은 따로 있습니다. 알겠습니까? 요  시간에 쓰여진 정력, 진액, 지능 고것은 고대로 갈라집니다. 고것은 그러니까 고  한 시간 살고 나면 고 만침 늙었소. 고 만침 재료가 줄어졌소. 일 년을 살고  나면 고 만침 재료가 줄어졌습니다. 줄어지는 고대로 말이요. 고 재료가 고  현실에서 사죄 받은 재료로, 칭의 받은 재료로, 하나님과 화친한 재료로 고대로  고 현실을 통과했으면 고것은 고 재료가 영생됐습니다.

그러나 고 재료가 요 현실에서 세상이 다급하게 모니까 모니까 못 견뎌서 또  세상이 너무 꾀워서 좋은 걸 말해주니까 좋은 걸 주니까 그만 고게 미혹을  받아서 요 현실에 해당된 요소가 요 재료가 요것이 사죄 칭의 화친의 새생명을  받은 것이지만 요 재료가 현실에서 사죄를 배반하여 범죄하고, 칭의를 배반하고  구비하고, 하나님과 화친을 배반하고 하나님하고 원수가 되어진 현 요 재료로써  요 현재에 해당된 요소와 재료가 요것이 하나님의 구속을 완전히 배반한 이  재료로 현실을 통과했으면 고 현실은 영원히 죽었습니다. 요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요거는 둘째 사망이요.

이러니까 어떤 사람은 머리가 백발 되기까지 살았는데 고 현실 현실에서 고  현실에 해당된 요소가 구속을 배반해 버렸고 또 고 다음 현실에서 다 밉상되는  또 배반해 버렸고 이러니까 일생 동안 살아서 마지막에 이제 운명을 하게 되는데  운명하고 부활하려고 보니까 부활 할 때에 이 세상에서 현실 현실에서 영원히  자기의 것이 자기의 수족이 되고, 자기 기능이 되고, 자기의 도구가 되고,  자기가 타고 다닐 승구가 되고 마음은 영계에서 타고 다니는 것이요.

이 고기덩어리는 물질계에서 타고 다니는 이 승구요 기구요 도구요 참 좋은  병기인데 좋은 도구인데, 이것을 현실 현실에서 현실을 예기치 못하고 마귀를  잃지 못하고 하나님보다도 절 낫게 여김으로 인해서 현실 현실에 다 죽여버렸다  말이오. 다 죽여버렸으니까 부활 할 때에 고기덩어리만 부활했지 뭐 부활의  능력이 있어야지. 아무것도 없이 어떤 사람은 일생 동안 살면서 다 같이 늙어서  쪼그라져서 없지만 그 사람은 현실 현실에 해당된 그 요소들이 그 전부 사죄와  칭의와 새생명 받은 자로서 세상에 뭐라 한다 해도 이래도 없어지고 저래도  없어지고 현실에는 없어집니다.

여러분들 요걸 잡으십시오. 현실에 해당된 요소는 죄를 지어도 그것으로써 그  다음에는 없는 것이요. 끝난 것이요. 그 현실에 대한 요소는 끝났소. 의로  행해도 끝났습니다. 이것이 이해가 됩니까?  예를 들어서 자 이 현실이라고 짭게 말하니까 여러분들이 모르는데 일 년을  살았습니다. 일 년을 지냈습니다. 일 년 지내니까 그 사람이 백분지 일이  감소됐습니다. 백분지 일이 없어져요. 백분지 일이 없어졌습니다. 그 백 년 살  사람이 일 년 살고 나니까 백분지 일이 감소됐다 말이오. 저울로 담고 가치로  보니까 백분지 일이 없어졌다 말이오.

백분지 일이 없어지는 것은 사죄와 칭의와 새생명 받아 이것으로 살아도 일 년  지내면 그거는 없어졌고 이것을 버리고 범죄해도 없어졌어. 없어지기는  없어졌습니다. 백분지 일이없어졌습니다. 그만침 줄어졌습니다. 없어졌습니다.

없어졌는데 없어진 것이 이것이 사죄와 칭의와 새생명 받은 자로 살았으면  없어졌으나 그것이 어떻게 없어졌느냐? 영생으로 옮겨졌어. 영생할 것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없어지기는 없어졌지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직까지 시험을 치를  것이라. 시험을 치려서 이거냐 저거냐 아직까지 미 합격 중에 있는 미결 중에  있는 것 중에서는 없어졌지만 하나는 합격으로 이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고  하나는 낙제로 사망으로 없어졌다 그 말이오.

다 같이 늙었지만 늙어서 쪼그라졌지만 한 사람은 영생하는 것으로 옮겨져서  그가 쪼그라졌고, 한 사람은 영원 멸망할 것으로 옮겨져서 쪼그라졌습니다. 예.

이래서 영생할 걸로 옮겨진다는 것을 가르쳐서 썩을 것으로 심고 썬지 안할  것으로, 약한 걸로 심고 강한 것으로,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혈육의 것을 심고 신령한 것으로 이렇게 살고 바꾸어 진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 요것을 요러니까 요 하나님의 도가 자 이 과학이라는 것도 조그만한 것 요거  하나 만들라 해도 고 이치가 세밀하고, 이거 뭐 원자 하는 그런 것도 이치가  세밀한데 고 하나 비우면 안 되는데 그까짓 것은 우리에게 지배받을 물질이요  우리는 하나님 아들로서 영계와 물질계 천사를 다 통치할 수 있는 이것인데  이렇게 전대 구으러 이래 있을 줄 압니까. 조그매 이치에 틀리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치에 틀리면 안되요.

이러니까 요 현실에서 내가 범죄를 했습니다. 범죄 했으면 남은 것이 다 죽었소.

현실에만 해당된 것 했습니다. 범죄 했으면 남은 것이 다 죽었소. 현실에만  해당된 것이 죽었소. 현실에만 해당된 것이 죽었습니다. 고 현실을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서 고 계명을 지켜서 현실을 통과해서 승리했습니다. 고라면 고 산  것이 전부가 다 살았소. 고 시간 해당된 것만 살았소.

자 전부가 다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현실에 해당된  고것만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틀렸어. 전부 다  살었어. 그러기 때문에 말기를 못 알아듣는 거라. 전부 다 살았소. 다 살았는데  현실에 해당된 것은 시험에 합격이 되 가지고 다시는 죽지 안할 것으로 영생으로  살았고 다른 것은 어떤 걸로 살아 있습니까? 살아 있는데 한번 시험을 쳐 가지고  시험을 이기야 이기야 영생을 하지 시험에 져버리면 다시 둘째 죽음의 해로  죽는다 그 말이오. 둘째 죽음을 죽느냐 영원히 사느냐 하는 이 무서운 과제를  미래에 남겨두고 살아 있는 자요. 현실에 해당하는 자는 영생하는 것으로 살아난  자로 여서는 끝장났습니다. 다시는 시험이 없소. 이것이 매일 매일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자 에덴동산 아담 해와는 그 현실에 그 에덴동산 한번 범죄하니까 다시  죽어버리고 그것은 다시 살지 못합니다. 못삽니다. 못삽니다. 절대 못삽니다.

영원히 죽습니다.

영원히 죽다니 어찌 우리는 살아 있는데? 우리가 살이 있는 것은 예수님이 대신  죽었기 때문에 살아 있지 예수 아니고는 우리는 못삽니다. 이런데 우리가 당한  에덴동산 현실은 봐도 그만이오. 아 내가 이 현실에 범죄해서 그것이  죽었습니다. 죽어도 죽어도 남은 것은 예수님의 사죄를 받아서 지금 죄없는 자로  되어 가지고 있고, 남은 것은 순교 받아서 의로운 자로 되어 있고, 남은 것은  하나님과 화친되어 산 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자 전 현실에 내가 범죄해서 실수했으면 이제 새로 만나는 이 현실에서는 나는  산 자로 살 수가 있소 없소? 산 자가 살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산 자로 이  현실을 맞이 할 수 있습니까? 산 자로 죽은 자로 현실을 맞이할 수 있습니까? 자  죽은 자로 현실을 맞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산  자로 현실을 맞이 할 수 있다 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산자로  현실을 맞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요렇게 아는 분들 요렇게 깨달은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와 손을 머뭇거리며 못 들어 고 현실에 해당된거는 거서 죽었지만 남은 것은  사죄와 칭의와 새생명을 그대로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내가 전 현실에서  패전해도 요 현실은 산 자로 이제 내가 전 현실에는 내 요소를 끊켰어. 팔을  끊켰고 손가락을 끊켰고 눈을 빼엇어. 거기에 있는 현실은 요소가 달라도 그때  현실은 눈도 동원됐고, 귀도 동원됐고, 입도 동원됐고, 수족도 동원됐는데  동원된 그 동원된 요소 만침은 다 끊켜서 상했어. 원통타 그 말이오.

그러니까 이제 닥친 이 현실에서는 내가 이 죽음에 닥지지 안해서 예수님의  공로로 살아난 자가 이거는 현실을 내가 과거에 내 요소를 그놈한테 줘 가지고  요소를 빼앗겼다 둘째 사망에게 뺏기고 삼켜 졌다 이제는 내가 둘째 사망에게  남은 것은 빼앗기지 않고 내가 이기겠다 하고서 그 현실을 달라드는 것이 이것이  믿는 사람입니다.

게 믿는 사람은 에덴동산이 우리의 거처인 이 현실, 이 현실에서 자기가  실수해서 현실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패전을 했으면 다시 희망이 없습니까 그  다음 다가오는 현실에는 패전자로 그 현실을 맞이할 수 있습니까? 이제 사죄와  칭의와 새생명 받아서 산자로 맞이 할 수 있습니까? 산자로 맞이할 수 있어.

○○○선생, ○○○씨 깨야 돼. ○○○씨는 보면 암만 떠들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어. 그거 소용이 없다 그 말이오. 지금 바람에 있고, 지진에 있고, 불에 암만  있어 봤자 안돼.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언제 무슨 잡탱이가 될런지 몰라. 이거  모르면 안돼. 이게 사는 것인데  게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 우리는 현실에 사죄와 칭의와 새생명 받은 내 전부가  죽고 사는 것은 아니지만 이 현실에 끝장나고 다시 맞이 못하는 그 요소와 분자  고 부분은 요 현실에서 영원히 살든지 둘째 사망의 해로 영원히 죽든지, 요  현실에서 요것이 요것이 썩을 수 있는 것이요 약한 것이요 더러운 것입니다. 이  심신은 예수님의 구속을 입어서 완전이 아닙니다. 몸은 죄로 인해서 죽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로마서 8장 9절에 보면 있습니다.

이런데 요것이 영원한 것으로 심어진 것이요. 영원한 것으로 심어졌다니 왜?  고것이 사죄와 칭의와 새생명 받은 요것으로 살려고 하니까 세상하고 이렇게  접하니까 요것이 세상은 죽였고, 세상에서 죽임을 당했고, 세상은 패를 했고,  세상에게는 해를 받았고, 세상은 저의 편이 아니라고 나를 박해를 해 배척을  했고, 나는 하나님 편으로서 고 현실에 끝장났다.

끝장난 그것이 뭐입니까? 그게 죽은 것입니까 심어진 것입니까? 죽어진 것이요  심어진 것이요? 고것이 심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은 저만  안 죽으려 하면 안 죽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데 이 도리를 모르고 이 교리를  모르고 부활이 뭐인지 영원히 죽지 안하려 하니까 이 교리가 뭐인지 이걸 모르고  벌로 덤비는 ○○○씨가 벌로 덤비어 날뛰기 때문에 똘똘 말리 들어가 버렸다 그  말이오.

이 껍데기 말만 듣고 속에 진리를 모르고 이 진리는 전체 하나인데 속에 영원히  가도 논리 해도 논리에 실수가 없고 정죄받지 안하고 옳고 옳고 발라서 하나님이  옳다 옳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요 길을 모르고 벌로 덤지기만 덤벼서 한창 그가  덤빌 때에 얼마나 많이 덤볐소. 한국에서는 제일이었습니다. 한 집회면 이 패물  금덩어리가 한 말씩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 그때 큰 부자된 것 천 년 성  아무리 그것 때문에 하지 안했소.

이러다가 요새는 이제 그 사람이 요 교리가 틀리지 안하니까 어데까지 자꾸  되느냐? 자기 한 거는 옳다고 자꾸 변동해 나가려고 하다 보니까 요새는  어데까지 나갔느냐? 성경에 기록한 의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다 죄인입니다.

예수는 죄인 중에 죄인이다 하는 것으로 정죄해 버렸소.

예 이것이 결론입니다. 바로 깨닫지 안하면 헛일이야. 인간의 열심이 몇 해  가요.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가요. 나를 하나님에게 맡기고 진리에게 맡겨 내가  하나님의 것이 되고 진리의 것이 되어서 하나님이 나를 보장하고 진리가 나를  책임져야 영생이 있지 아무도 해하지 못하지  지금으로부터 이십 여년 전 이십사오 년 전에 저 우이동에서 집회하고 오니까  한강 백사장에서 십만 명이 거 모였어. 열흘 동안 그 집회에 참석하면 성령  받으면 성경도 필요없고 아무것도 없고 성령의 권능만 받으면 모든 것 다 된다  하니까 이 허욕쟁이들이 이 도박 예수쟁이들이 허영 예수쟁이 막 그리 주 모았다  말이오. 십만 명이 모였어. 모아 가지고 막 밤낮 야단을 지겼는데  게 우리가 오면서 보고 그때에 ○○○씨 내무부 장관 ○○○씨 그 부인이 나한테  말하기를 '이렇게 모두 보십시오.' '저렇게 십만 명이라 하는 모인 수가 십만  명이라 하는데 저렇게 모두 진리를 갈급하는데 이 서울 와서 좀 외치지 안하고  와 그러십니까?' 게 어떤 사람이 말합디다. '거기에 그 사람이 참된 그 하나님의  종이 가 가지고 한 시간을 외치면 그 사람이 반은 없어질 것이고 세 시간 외치면  거의 다 없어지고 남는 거는 몇 안 남을 것이다.' '그들이 세상 욕심 가지고  땅의 욕심 가지고 자기 욕심 가지고 그 성령의 소욕으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 위해 죽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존귀케 할까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게 좋게 할까 하는 이  전부 사욕쟁이들만 주 모아 가지고 있으니 십자가의 원수인데 십자가의 도를  말해 봐라 다 흩어져 가버리고 말지 않는가.'  그랬는데 그때 십만 명은 지금 천만 명도 더 당합니다. 그때는 집회에 많이 모아  봤자 백 명, 이백 명, 천 명, 이천 명 되는 집회가 없었습니다. 제가 해방  직후에 그 환도하고 난 다음에 서울 가서 집회를 하는데 그때는 그 마이크도  없어. 스피카도 없고 바로 그때는 이랬는데 이천 명이 그때 모였는데 그 서울  생긴 이후로 모인 숫자는 제일 많다 그들이 통계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십만 명이나 모였소. 그즈음에 그만침은 아니고 그 이삼 년 후이지만  오늘의 천만 명도 더 돼요. 이랬지만 그것이 허공을 친 것입니다. 그  ○○○목사를 왜 내가 그래 평했느냐? 그래 평하는 것은 그는 원남교회를 제가  세운 교회인데 거와 집회를 하는데 십자가에 못밖힌 그것을 십자가에 못밖힌 그  도리를 그때 증거를 하는데 이거는 순전히 인본주의라 세상주의 육신주의라.

이래서 저녁 예배 마치고 난 다음에 그 제직들을 모여 놓고 '너거가 왜 이  사람을 청해 집회 하느냐?' '조심해라.' '이거 순전히 육신주의라 너거 지금  깨닫지 못하지만 요것이 십 년 아니면 이십 년이 가고나면 너희들이 알것이라.' 그 뒤에 한 이십 년 지나고 난 다음에 보수동에 집회한다 해요. 게 갔어. 어떤고  싶어서 내가 재직들 몇 분 데리고 가니까 새벽에 우리 외에 새벽기도 참석한  사람들이 두 사람 뿐이라. 다 끝장나버리고 그 많은 사람 어디로 갔는지, 지금  어데가 숨었는지 몰라요.

제가 계룡산에 하도 이종교가 많이 있다해서 한 번 가니까 거기에 새날이 있고  세일 뭐 운동이라 하고 새날 운동 새일 운동이라 하면서 예배당에 조그만한 것  지어놓고 있는데, 게 그 사람이 계룡산에 도읍한다 하니까 잡탱이로 거기에 가서  무슨 예루살렘이 가서 거기에 온다고 예수님의 재림이 거기에 온다고 그래  가지고 기다리고 앉았는데 지금은 종적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어쩌든지 모든 운동이 다 바람운동도 지진운동도 불운동도 다 좋지만  거기에서 커서 세미한 음성을 듣든데 고게 꼭 나아가야 되지 고게 안나아가면  헛일입니다. 예. 아무리 많이 보고 움직여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따져서  요러냐 조러냐 하는 하나님 말씀에 그 옳바른 깨달음의 교리 이십세기 과학  만능을 억눌을 수 있는, 공산주의의 그 세미한 주장을 다 꺾어 누를 수 있는  요런 진리를 우리가 깨달아야 하나님이 최후의 승리자의 하나님으로 동행하지.

하나님께서 불신자에게도 하나님이 동행합니다. 인본주의 신앙에도 동행하요.

세상주의 신앙에도 동행하요. 하나님의 동행은 차이가 있어. 그 사람 된대로  하나님이 동행해요. 이러니까 요것도 어려움인데 요 논리를 잘못하면 고만 끝이  노래져버려요. 아 에덴동산에 그는 죽었는데 우리는 그러면 범죄하면 다시 죽지  않는가? 고 끝날 것이요. 우리는 구속받은 사람이 요 현실을 통해서 영생이 되고  구속이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몸은 우리의 심신이라는 이 육은 영은 하나님의 양자가 됐지만  심신으로 된 육은 하나님의 양자가 아닙니다. 양자 아닙니다. 요걸 구별해야 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양자인 줄 압니까? 하나님의 아들 된 것 아니요.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아들 양자가 됐지만 우리의 심신으로 된 이 육은 하나님의 양자가  안되고 지금 양자가 되어지고 있는 중에 있는 것입니다.

요 현실을 통해서 사죄와 칭의와 새생명 받은 자로 고 현실에 해당된 요소가  요대로 현실을 통과했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요렇게 통과하지 안하고  이 구속을 배반해버리면 둘째 사망의 해를 받게 됩니다. 그러면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고 이렇게 영생을 얻으려고 하면 어째야 됩니까? "죽도록  충성하라." 언제든지 생명을 내 놓고 이 길을 가야 됩니다.

산제물로 바쳐 가지고 가야 됩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 어떻게 하면 하나님에게  드리며, 다 받히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받힐까? 이것만 연구하고  이것만 연습하고 이것만 자꾸 기도하고 이래도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에게  받혀지고 그에게 쓰여지고 그 분 때문에 없어지게 될 때에는 얼떨떨하고 아까와  하다가 그만 죽어버리고 마는 것인데,  어쩌든지 예수 밖에서 자기 욕심대로 살다가 예수 안에 와 가지고 이제는  하나님까지 이용해 가지고 자기 욕심, 소원, 달성, 성취 이게 다 소원이 뭐이냐  하면 땅의 것인데 이 소원 욕심 달성 이것만 원하는 자가 갑자기 자기에게 모든  것 다 내놔야 예수를 차지할 수 있다고 하는 단계에 들면 억장이 무너지지  이러기 때문에 선천에서 선천의 그 고을에서는 네 집밖에 그 당시 네 집외에는  다 믿기 때문에 아야 시장이나 그런 건 없어. 주일날은 그렇게 전체가 믿는  고을은 없어요. 이랬지만 외정 말년 신사참배할 때에는 신사참배 이긴 사람이  하나도 없어. 신사 참배에게 다 머리 굴하고 다 우상 섬긴 자 다 되고 말았소.

이러나 저들의 선천 고을에 있는 신자들의 신앙 생활은 전부 호박씨 까 가지고  한 입에 털어 넣듯이 한 몫 그 우상 앞에 다 받혀서 하나님 앞에 한 몫 배반해  버리고 다 사망하고 말았다 말이오. 새로 믿어야 되지 않소. 이제까지 믿은 건  다 헛일로서 종지부를 찍었는데 어쩝니까.

요것을 여러분들이 에덴동산만이 하나님이 주신 것같이 우리에게는 우리  현실만이 내가 살 곳입니다. 이 현실은 나의 영생과 영멸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곳인데 내가 범죄만 안하면 영생하는 곳입니다. 요 현실 천하에 사는 곳이  많지만 내게 대해서는 내게 준 현실 요 현실이 제일 좋은 곳이요. 요것이 제일  좋은 처소요. 이것이 좀 있으면 세계에 퍼져나가 이 현실이 우리에게는 어덴  동산이 제일 좋은 곳이라는 것이 앞으로 이제 좀 있으면 일반화가 되고 말  것이야. 때가 지나가면 다 알아요.

그런데 우리는 현실을 제가 선택해서 아무것이 현실은 좋은데 내 현실은 나쁘다.

제가 그 사람인가? 그 사람은 거기에서 이루지만 저는 제 현실에서만 성사가  결정나는 것인데 요걸 믿어야 됩니다. 요걸 확실해야 되요. 요것을 딱 잡고  기도를 많이 해야 돼. 많이 해야 어떤 현실이 와도 욥이 가족과 재산이 당장  절단난 그것도 욥에게 준 현실입니다. 우리도 그런 현실 닥칠런지 모릅니다.

어떤 현실 닥쳐도 그때에 요게 나에게는 에덴동산이라. 요게 내게서는 천하에  나로서는 제일 좋은 처소라. 이런데 여기에서 잘하면 영생하고 잘못하면 영멸이  영원히 사망한다. 내 요소가 영멸 영생하게 된다. 요것을 똑똑히 볼끈 잡고 요게  입각해 가지고 자기가 힘을 써도 될똥 말똥한데 이게 뭐인지 모르니까 생애  애착욕 그것도 생애 애착욕이나 돈 욕심이나 음욕이나 꼭같은 욕심입니다. 생애  애착욕이 들어서 욕심에게 끌리 가지고 욕심 하자는 대로 해버리는 자, 현실은  다 죽어버리지 뭐 있습니까?  이러니까 이 현실에서 할 것 간단하게 넷을 말했어. "에덴 동산을 다스리라"  다스리라 말은 그를 지배하라 그말이요. 어떻게 지배해요. 내 마음대로 아니야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내가 현실을 만났을 때에는 하나님이 나에게 영감으로  주시고 진리로 주고 나에게 이렇게 해라 당신이 하시는 그대로 현실에서 나 하면  그만이라 하면 다 됐어. 하면 그들이 나를 죽이든지 살리든지 나는 영생했어. 고  현실에 해당되는 건 영생 했습니다.

다니엘이 다리오 왕이 그렇츰 말해도 여기에서 이내 에덴동산 내 현실 내  처소에서 내가 할 일이 뭐인가? 동산을 다스리라고 하지 않했느냐? 하나님의  시키시는 대로 그들에게 행할 것이지 그게 그걸 하나님 시키시는 대로 그들에게  다스리거든 내가 하나님 시키시는 대로 하면 되는 것 그대로 해. 하나님이 뭘  시키시는데 다리오 왕이 '야 기도 한 달 동안 안하지말라' 해도 하나님이  시키시는 것 뭐인데 '나는 기도해야 됩니다.' 그것은 그만이라. 그것은 끝났어.

하거나 말거나 뭐 사정을 하거나 말거나 그 감정에 딱한 사정에 피동될 필요가  없어.

왜? 딱한 사정에 피동될 필요가 없어. 하나님에게 피동되어서 '요게서  기도해라.' '아 기도해야 된다.' '아 기도 안할 수 없이 기도해야 돼.'  고것으로서 현실을 다스렸다 그 말이오. 고기 다스리는 거라.

우리는 어떤 현실을 만나도 진리가 나에게 가르치는 그대로 나는 언행심사를  하고 성신의 감동이 나에게 감동시키는 그대로 언행심사 해, 고것만 하면 현실을  나는 다스렸지 현실에게 정복당한 사람이 아니라. 현실에게 피동 당하면  하나님께 피동으로서 현실에게 나는 그대로 했지 현실이 나에게 피동되든지  말든지 무슨 상관이 있소. 나는 그대로 했지.

"동산을 지키라." 하나님이 허락지 안한 것은 용납지 안하지, 자기 속에도  하나님이 허락지 안한 거는 어떤 언행심사의 자기에게서도 하나님이 허락지 안한  것은 나오지 못하게 딱 지켜 하나님이 허락지 안한 마음도, 욕심도, 생각도,  성질도, 뜻도 하나도 나오지 못하게 뿔근 지켜 옆에 사람이 촛분을 지워서  분하다 그 말이오. 분하면 분이 올라오면 '여 하나님이 허락지 안한 건데'  이놈이 동행을 하니까 이분을 못 들어오도록 지켜. '너는 분아 물러가 들어오지  못해.'  아무리 좋은 것이 와서 번적거리면서 '야 이거 좋다 해도 하나님께서 그런 것은  말씀을 어겨 오는 것이기 때문에 네가 그런 것을 취할 수가 없어.' 했으면 '안  돼.' '그건 용납 못해.' '내가 취하지 못해.' 이게 지키는 것이라.

다른 사람이 어떻게 나에게 억울하고 애매한 일을 섭섭한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는 제가 하는 것이고 그거는 내 현실이 되는 것이고 섭섭하이 할 때에 그때  내가 지킬 것은 뭐이냐? 섭섭함이라 할 때에 그 섭섭함에 대해서 섭섭함에  대해서 내가 분함을 용납지 안해. 복수를 용납지 안해. 섭섭하게 하는 그것도  하나님 그렇게 만들어 가지고 하는 것이니까 요서 나 할 일이 뭐인가? 다스리는  일이지, 다스릴 것 할 일이지 이런 것을 용납지 아니한 이것이 우리가 환란 때도  요걸 생각하면 요긴합니다.

예. 이 우리가 배우는 복음이 평안하고 살 때도 필요하지만 마지막 결말이  지워지는 마지막 마당에 이 말씀이 우리를 살펴야 돼. 지금은 살릴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은 복음은 평안할 때에도, 고난 때에도, 사는 때에도, 죽는 때에도,  지금도, 마지막에 최종도 이 복음이 우리를 살릴 수 있는 그 길을 우리는  마련해야 된다. 능력을 마련해야 돼.

오늘 아침에 제가 설교를 들으니까 일층에도, 지하실에도, 삼층에도, 이층에도,  뭐 사층에도 보니까 거 '기름을 사라' '기름을 사라' 우리 현실에서만 기름을 살  수 있고 하나님을 내 하나님 삼을 수 있는 것인데, 하나님과 진리의 능력을 내  것 만드는 게 기름 사는 것인데, 우리가 기름을 살라 하면 요 현실에서 하나님과  진리를 내 것 삼으려고 하면 돈이 마구 절단날 때도 있고, 명예가 절단날 때도  있고, 생명이 절단날 때도 있고, 모든 것이 다 절단나도 하나님과 진리만이  살라하는 요기 아니면 안 된다. 욕심 없으면 안 된다 하는 그것을 외쳤는데,  이것이 얼마나 큰지. 내가 다른 데 가서 그런 소리를 들었으면 그 앞에 마구  꺼꾸러져서 엎으러져서 기절할 거라 예.

여러분들 사지 안하면 안 돼요. 공연히 얼렁 덜렁 좋아하기만 해 가지고 안  됩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내가 사야지.' '진리의 권능을 내가 사야지.' 그래야  내가 이길 수 없는 때에 당신이 날 보호해 이기 주시지 이것을 사는 데에는 내가  값을 내고 사야 돼. 내가 이것을 그 희생을 해야 돼. 그러면 저절로 되는  것이니까.

하나님의 공로는 뭘 하고? 하나님의 공로가 있기 때문에 살 수가 있는 거라.

그러면 살 권리가 없어. 정죄받아 벌써 죽었어. 우리가 아담 하와가 에덴동산을  에덴동산을 다스릴 권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권세가 있소 없소? 네. 다스릴  권세가 조금 있습니까? 절대적으로 있습니까? 절대적으로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있는데 제가 안 썼지요. 우리만 쓰면 다스릴 권세가 절대적으로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다스릴 권세가 있습니다. 그래 어쨔든지 우리는 다스림으로서  끝나버렸어.

게 환란 때도 평온한 때도 요 간단명료한 이것이 내 에덴동산이지 여기에가 제일  좋다고 했지. 하 마구 칼이 삐쭉 삐쭉하고, 창날이 삐쭉 삐죽하고, 원수들이  첩첩이 와서 둘러싸고, 공산주의가 꽉 둘러싸고 있는데 뭐이 좋아. 이게 내게는  에덴동산이야. 분명히 이 현실은 사랑하는 주님이 만든 에덴동산이야. 나를  이끌어서 나로 하여금 살게한 나의 처소야. 제일 좋은 곳이야. 그러나 여기에서  영원히 살 것도 살 수도 있고, 영원히 죽을 수도 있어.

그러면 여기에서 내가 할 일은 뭐이냐? 내가 할 일은 네 가지야. 무엇이든지  첫째 다스리야 돼. 오 공산주의가 첩첩히 둘어 있어도 여기에 다스려야 돼.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시키시는 대로 그대로 이들에게  하면 돼. 이들에게 하면 돼. 내가 배운 이제 진리대로 영감대로 양심에 깨달은  이 영감대로 그대로 해버려. 그들이야 나에게 어떻게 하든지 그거는 저거  자유고, 그들이 내게 어떻게 하든지 그거는 저거 자유고 나는 그들에게 대해서  영감대로 진리대로 그들에게 해. 이게 다스리는 거라. 이걸 하라는데 힘이 없어.

왜? 왜? 이 환란이 필요 없어. 환란의 제일 요긴한 열쇠. 첫째 열쇠를 우리에게  줬는데 이러기에 모든 이단은 다 이 창세기에서 나오는데, '아 이렇게 말하면  그가 날 어떻게 더 고행할터인데' '고행하는 그거는 저거 할 일이고 나는 이  현실을 다스려야 되겠다.' '현실을 하나님의 뜻대로 내가 명하고 뜻대로 나는  행해야 돼.' 이 현실에 대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나는 하면 돼.

이게 다스리는 거라. 아 지키라고 했는데 이렇게 고문과 고행을 주니까 아 이거  얼른 피했으면 좋겠다 어쩌든지 끝났으면 좋겠다.

이거 하나님께서 용납하라 해요 안하라 하요? 예 용납하라 합니까? 용납지 말라  해? 지키라 했으니까 당신이 주관자시니 당신의 뜻대로 하실 것이요. 나는 이런  것을 용납지 안 해야지. 뭐이 고문과 고행이 끝나기를 원해. 이런 생각아  물러가라. 어떻게 하면 저들의 마음을 얻어 가지고 그들에게 잘 보여서 내가 좀  평안하게 지낼까? 하나님에게 잘 보여야 되지 저까짓 거 잘 보여야 무슨 소용  있나 이 생각아 물러가라. 사탄아 물러가라. 이게 동산을 잘 지키는 것이라.

아 이렇게 고문당하고 이렇게 하니까 차라리 고만 어떻게 그만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엘리야 모양으로 하는 것 이것도 하나님이 허락지 안해. 이 자살 행위라  물러가라. 이 고문과 고행에서 구속받아 주의 것 되어 있는 것이 법적으로 되어  있는 것이 주의 것 노릇을 하는 것이고, 이것이 주님에게 쓰여지는 것이고, 나는  주님의 모든 것을 내가 받아쓰는 것이고 이러니까 주님은 내 주님 되고, 나는  주의 것 되고, 내 모든 걸 통해서 주님의 무한하심이 나타나서 역사함이  되어지는 것이니까 나는 다 주의 것 되고, 주님은 내것 되고, 주님과 나와  밀접하게 결합되게 하는 것이니까 주님 나에게 이보다 더 좋은 중매장이가  없으니까 이 환경에 죽이니 살리니 고문하는 것이 고맙다. 내게는 고맙지만 너는  없었던 것만 못하다. 유다에게 말한 것 같이 '너에게는 불행하지만 내게는 참  좋다.' 이것이 지키는 것이라 그 말이오.

그럴 때에 주님이 기뻐하지 안하는 생각들 용납지 말 것, 주님이 원치 안하는 그  욕심을 소원을 용납지 말 것, 주님이 원치 안하는 그 언행심사를 하지 말것,  그것이 지키는 것이요. 환경에 어떤 것이 와도 내가 거기에 물들지 않는 것이  용납지 않는 것이요 거기에 피동되지 않는 것이 용납지 않는 것이라. 불의한  것을 용납지 안하는 이것이 내가 동산을 지키는 것이라.

아 이 두 가지 하고 난 다음에는 뭐 하지. 모든 과실을 먹으라고 했으니까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에 위반되지 안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 기도 좀  먹어 보자 성경 좀 먹어 보자 명상 좀 먹어 보자 또 이것도 운동 이것도 좀  이것도 좀 먹어 보자. 하나님의 뜻에 위반되지 않는 것은 거기에서 무엇이든지  하지,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고, 얼마든지 성경 볼 수 있고, 성경 외울 수 있고,  명상할 수 있고, 속으로 찬송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그거 얼마든지 하지.

거기서 '허락한 과실이라.' 감옥에 갇혀 가지고 또 그들이 밥 주면 그거는  하나님 허락하는 것이니까 또 맛있다 하고 감사하고 먹지. 하나님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갇히지 안하고 지금 이래 있으면 이 사업은 하나님 허락하느냐? 하나님이  금하지 안한 것이구나! 사업 얼마든지 하지. 정치 얼마든지 하지. 모든 것  얼마든지 하나님이 정죄하지 않는 거,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 이거 해도 된다  하는 것은 열심히 하지. 그거 먹으면 에덴동산에 먹으라는 과실 먹으면 배가  불러지고 힘도 나오고 점점 자라지.

이거 모양으로 세상에 하나님의 허락하신 그 모든 것은 내가 열심히 함으로 그게  내게 양식도 되고 힘도 되고 된다 이거요. 그렇지만 먹지 말라 하는 '선악과  이거 먹어라' '먹지 말라 먹으면 정녕 죽는다' 그거는 온 동산 안에 하나 밖에  없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금하시는 것은 극히 소수입니다. 극히 소수요. 또  고기 마귀가 와 놓으면 매력 있거든 얼마든지 좋은 것 같지만 먹으면 죽었어.

 이랬는데 왜 그런 것이 매력있게 보이느냐? 뱀을 용납했거든, 뱀을 용납했어.

처소를 현실을 불만인 자는 벌써 패전자요. 현실을 자기의 현실을 자기 처소인  줄 알고 있다 할지라도 현실을 다스리지 않했으면 벌써 패전자요. 현실을  다스려서 할 말 다하고 그들에게 대해서 하나님의 진리대로 영감대로 했다  할지라도 내 안에서든지 내 밖에서든지 용납지 안할 생각 하나만 용납해도  죽었소. 용납지 안할 소원 하나만 용납해도 죽어. 동산을 지키고 하나님이  하라는 그런 것만 하고 잘 살았소.

이렇지만 하나님이 금하는 것, 어떤 것 하나라도 먹었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다  헛일이요. 이런데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 그것을 아 자기가 하게 되는 그것은  뭐이냐? 다스리지 안하는 거기에서 고장난 것이요. 지키지 않는데서 사고 난  것입니다. 뱀을 용납했기 때문에 그래.

그러니까 하나님의 법도에 위반되는 것을 좋다고 소개하고 이래서 하라고  친척이든지, 누구든지, 위에 사람이나, 밑에 사람이나 하나님에게 위반된 그것을  나에게 가지라고 주든지 하라고 하든지 하는 고것은 가족이든지 누구든지 두  말할 것 없이 고거는 뱀인 줄 알아야 됩니다. 고 뱀이요. 고 뱀,  고 뱀이 어디에 들어왔는데? 내가 용납지 안 할 것을 하나 했기 때문에 고게서  들어 왔어. 용납지 안 할 욕심을 용납했든지, 용납지 안 할 성질을 용납했든지,  용납지 안 할 말을 한 마디 했든지, 용납지 안 할 생각을 했든지 하나의 지극히  작은 죄, 보스러기 죄 하나라도 고것을 내게 용납했기 때문에 고기 뱀이되  가지고 점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에덴동산은 간단명료해서  아주 우리의 열쇠 중에 아주 단순한 열쇠요. 어데든지 필요한 열쇠요. 다 능가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그러기에 세미한 음성, 세상에 세미한 음성은 세상을 다스렸고, 타락한 교회를  다스렸고, 신령한 교회를 다스렸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엘리야가 얻었는데, 얻었는데 이것은 어데서? 세미한 음성에서, 세미한  음성이 뭐인데? 세상에는 육십육 권이 세미한 음성이요. 육십육 권에는 바로  깨닫는 요것이 세미한 음성이요.

바로 깨달은 자가 마지막 세미한 음성은 "네 안에 기름 부음이 너에게 옳고  바르고 참되게 가르쳐 주노니 그대로 행하라" 요것이 최종 세미한 음성입니다.

요게 믿음이 되는 것이고 요게 만능이 있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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