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의 영감

 

 1980. 10. 7. 화새

 

본문 : 열왕기하 2장 9절∼10절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가로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고.


선지자선교회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구한 영감은 신약 교회 하나님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예수님의 영감을 구하는 모형으로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이는 다 신약에 있는  성도들로 이를 거울 삼아 가지고 이를 보아 자기를 알게도 하고 또 깨닫게도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엘리사가 엘리야의 영감을 구한 이것으로 우리에게 거울로, 모형으로  계시해 주셨는데, 주님의 영감을 우리가 구하는 것이 이 계시의 목적을 가지는  자인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영감을, 우리에게는 주님은 어떻게 하고  계시는가? 에베소서에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베푸신  지극히 큰 능력인데 이 능력은 곧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대속을 완성케 한  능력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이 능력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이 능력을  보내셔서 이 능력으로 죽은 영이 살아났고 또 이 능력으로 계속 산 생활을 하게  하시려고 원하고 계십니다. 이러니까 하나님 편에서는 주님의 영감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고 원하고 있으니까 우리만 영감을 원하고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영감은 어떤 영감이며 또 영감이란 무엇인가? 영감은 자기 주관  감정에 정대립 자입니다. 또 성령의 소욕은 자기 사욕의 정대립 자입니다.

그러기에 사욕을 가지고는 주님의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자기 주관 감정을  가지고는 주님의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일꾼이 없어서 일꾼으로 뽑아서면 된 줄로 알지만 그러다가 행여나 될까 해서  사람이 없으니까, 뽑아서 일하는 가운데서 교회를 몇이나 희생시키고, 일하는  가운데서 되어질까 해서 뽑아 쓰는 것이지 됐다고 봐서 등용하는 것 아닌 줄  알아야 합니다. 왜? 분명히 주관의 사욕의 주장되어 있는, 언행심사가 사욕에서  나오고 언행심사가 주관 감정에서 나오는, 하나님 위주 중심 말은 하지만 자기  중심, 위주, 자존해서 살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혹, 복음에 수종드는  가운데에서 되어질까 해서 그런 소망 중에 하는 것인데 돼도 못하고 된 줄로  알고 너무 넘어가서 익지도 안하고 썩어 버리는 그런 일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증거는 저는 잘났는데 교인들은, 양떼들은 싫어합니다. 양떼 얼마가 구원에  좀 손해 가고 희생을 해도 하나님 일꾼 하나 바로 된다면 그는 그보다도 몇 배  일 할 수 있고 복음에 이바지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득이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도 그런 말을 제가 들었습니다. 한 사람 교역자의 의식주를  위해서 양떼들이 그렇게 양식되지 않아서 갈급하고 호소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는  것을 하나님이 쓰시겠느냐? 하는 항의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부터 한  33년 전에, 제가 비로소 교역자로 나섰든지 집사로서 있으면서 교회를 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거창 지방에 그런 교역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그렇게 호소하는 것을 주남선 목사님도 그래도 그 교인들에게  좀 참으라고 하고 둬둬서 그렇게 해 나갔는데 그런 가운데 귀한 일꾼이 된  사람도 있고 끝끝내 그러다가 망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망한 사람들은 다  지성인, 지식인,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다 망해 버렸습니다. 목회가  절단 났고 자손들은 비참하게 되어 버렸고 그때 못난 사람들은 떨면서 그래도  회개하고 교회에 죽었으면 죽었지 배척 당하지 안하려고 목회자로 나간 자가  교회가 점점 쇠약해 가고 교인들이 은혜가 안된다고 호소하고,  그러면 거기서 힘을 쓰다가 죽어 버리든지 죽든지 그 일이 면해지든지  죽음보다도 그것이 더 기가 막혀서 죽어도 그 일을 없앨라고 그렇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다 성공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이합니다. 인간이 약할 때  강해진다는 비밀을 능한 사도 바울이 알았기 때문에 바울이 일 잘했지 인간이  어떤 능한, 하나님 앞에 나타나서 나는 이것 있으니까 된다 하는 사람 쳐 놓고  하나님 앞에 하나도 망하지 안하는 사람 없습니다. 어제 내가 양성원 개교  인도를 했는데 거기서 설교하면서도, 여러분 가운데 교만 가득 찼습니다.

설교하는 소리를 여러분들은 지금 넘어가서 못 알아듣습니다. 그래 되면 목회를  하므로 비참해집니다.

 영감은 자기 주관 감정에 정반대가 영감입니다. 성령이 원하시는 소원은 자기  소원에 정반대인 것입니다. 오시면 먼저 자기 소원 죽이는 것부터 먼저하고 그  다음에 일반 다른 사람들의 소원을 죽이기 시작합니다. 성령의 소원이 오는 것은  인간 소원 죽여 하나님의 소원을 건설하는 역사입니다. 인간의 주관 감정을 죽여  하나님의 감정을 건설하는 그것이 역사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영감을 우리가 원하는 것이 갑절이나 주님을 붙들고 성령이  일하시는 그 정도 가지고는 자기는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고 반대하는 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전체가 반대하는 뭉텅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만큼 힘써 가지고는  자기로서는 안될 것이기 때문에 그 갑절이나, 배나 자기를 붙들고 강하게 역사  하셔야 자기의 강퍅으로 하나님의 일을 막고 방해하는 이것을 꺾고 이룰 수가  있다는 자기를 아는 말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주님의 영감을 원하는데서 주님의 영감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우리 사랑하는 사랑의 영감입니다. 사랑은 죄를 멸하는 것이 사랑이요 의를  건설하는 것이 사랑이요 하나님 중심자로 변화시키는 것이 사랑입니다. 제가  몸을 주고 생명을, 재산을, 동정을 주고 그것이 간교입니다. 그것이 하와 속에  들어서 아담을 죽인 간교입니다.

 이래서 오늘도 교인이나 개교회나 교회가 망하는 것은 간교 때문에 망합니다.

마귀의 궤휼과 간사한 유혹, 죄를 멸하는 역사가 없는 것은 다 간교입니다. 죄를  멸하는 역사가 아닌 의를 건설하는 역사가 아닌 하나님 중심을 건설하는 역사가  아닌 것으로서 인간을 살리고 인간을 좋게 하고 친근히 하는 것은 다  사탄입니다. 어떤 자는 자기의 명예를 위해서 자기를 알아주고 자기를 위하도록,  자기를 높이도록, '아, 그 사람 좋고, 그 사람 괜찮다' 자기 위해서, 정을  위해서 지방정실, 혈육정실, 동류정실, 계급정실, 그 정실 위해서 장사, 물질,  재미 위해서 사랑하는 척하고 봉사하고 희생하는 그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이 간교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으니 곧 그가" 우리의 사죄, 칭의, 새생명, 하나님의  원수 된 이것 위해서 당신이 목숨 바쳐 죽은 것이 사랑입니다. 주님의 영감은  그것입니다. 자기가 목회에 나섰으면 교인들의 죄가 미워서 그 죄를 말하니까  미움 당하고 별별 조롱을 당하고 죄에 빠진 그것을 어떤 매장을 당해도 그  죄에서 구출해 보려고 희생하고 매장 당해도 기어코 라도 죄에서 구출할,  하나님만 상대해서 이렇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하나님 중심 생명에 대하여,  이것이 사랑인데 사랑을 위하여 다시 말하면 사죄 칭의 새생명을 위하여 자기의  높고 부요하고 뭐, 입는 것 모든 것 다 생명까지 희생해서 이것을 죄에서  구출하고 의의 사람으로 옮기고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의 전부를 원하고 원하는 마음으로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이것이 영감을 원하는 것입니다.

 안 되어 있기 때문에 안 되어 있는데 다른 사람과 같이 그래 준다 해도 그것  가지고 안될 자기에게는 더 하나님을 방해하는 강퍅과 악독과 거짓된 자존심  자기 높이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이런 사랑의 사람이, 아버지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생명에 대한  이것을 소원하는 아버지의 소원에 따라가는 것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달리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당신에게 드릴 게 없어.

당신은 완전자야.

 그러므로 "수양의 기름보다 말씀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했습니다. 그것은  당신 뜻을 따르는 것, 당신이 소원하신 소원을 내 소원으로 삼는 것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아버지를 사랑했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므로  또 그 사랑을 따라서 이웃을 사랑하므로 십자가 상에서 제물이 되셨고 제물 되신  그것으로 끝내지 못하고 제물 되어 속량했지만 그 다음 영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영원까지 책임지기 위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릴 수 있는 능력 있는  자에게 제물 될 뿐만 아니라 영원히 제물 되기를 심한 통곡으로 간구했기 때문에  죽으시는 일과 부활하시는 일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없어 양떼의 죄에 대해서 그들이 하나님 뜻대로 사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온갖 것을 참으며 온갖 것을 견디며 이모저모  등신 되고 창자 없는 자 되고 오기 없는 자 되고 뼈 없는 자 되고 간 없는 자  되고 인격 없는 자 되고 온갖 것 다 매장되고 희생되면서 그를 사랑하려고  이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심정인데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예수의  마음인데" 이것이 자기 안에 없는 것을 인하여 예수님의 영감이 자기에게 있기를  원하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최고의 소원을 최고의 포부를 최고의 욕망을 최고의  것을 구하는 자다. 네가 큰 것을 구했다, 어려운 것을 구했다. 참 중요한 것을  구했다. 이 소원이 기독자에게는 은사 위치에 있는 자뿐 아니라 기본 위치에  있는 평신도들도 제 가정에 있는 조그만 가정을 책임 맡든지 단 몇 사람을  책임진 반사의 위치에 있든지 어디 있든지 이것이 저의 소원이 된 자라야 하나님  앞에는 필요 있습니다. 이 소원이 아닌 다른 소원, '내가 1등 혁명가, 개혁가가  되겠다, 무슨 부흥사가 되겠다.' 다 허영이요 허욕이요 다 어리석은 것입니다.

못난 것을 구했소.

 주님의 영감을 자기가 평생 소원되어, 바울이 "내가 모든 사람 앞에 빚진 자라"  무슨 빚? 돈 빚졌소? 그는 일생 동안 일해 가지고 남을 구제했소 빚지지 안했소.

이 빚입니다. 주님의 영감으로 해야 될 터인데 하지 못한 것이 빚이라, 주님  앞에 빚이요. 주님이 전달하라 했는데 전달하지 못한 것이 빚이라.

 이 소원이 있어야 되고 행동은, 나를 올리어 감을 네가 봐야 되지 보지 않으면  이루지 못한다. 소원은 이 소원이 되어야 되고 행동은 자기 마지막으로 다  바치는 것입니다. 올리어 가는 것이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자기가 제물  되어지는 자기가 녹아지는 그 현실에서 달게 녹아져야지 이런 행동과 이 소원  없으면 하나님의 사람으로는 참 천한 자요 무가치한 자요 허무한 자요 가장 가치  없는 것을 원한 자입니다. 왕 노릇하면 뭐해요 눈에 보이는 것들은 다  껍데기입니다. 알맹이는 주님과 자기와의 관련, 모든 인생과 관련, 인생의  구원과 자기와의 관련입니다. 그것만이 관련이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딴 파 차려서 왕 노릇해서 뭐할라고. 나 고신에서 딴 파 차릴라고 나온  사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담대히 말합니다. 내가 딴 파를 차리려 했으면  고신은 없어졌습니다. 내가 그때 왕됐소. 고신에 수뇌 목사 그분들이 다 목사고  나는 조사지만 그때 내게 '개혁 깃발 들어라, 개혁 깃발 들어야 된다.' 그렇게  하면서 따라다니면서 OOO목사 그분도 구호는 하나입니다. '조사님만 개혁 깃발  들면 됩니다. 우리가 딿겠습니다.'  거기에 가까이 따르는 그 사람들 지금도 목회 크게 못합니다. 그런 몇몇 사람만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 부르짖었습니다. 왕 노릇하려면 그때 개혁기를  들었으면 석원태 목사와 OOO 목사도 다 들었습니다. 쏠빡 다 들었습니다. 몇만  빼고 다 들었습니다.

 한 몇 교회 남고 남은 교회는 다 돌아와 그때, 그렇게 분명했습니다. 이러고 난  다음에 그때 나를 정죄해 가지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도 여기서  누구든지 들어 올 수 있게 했으면 지금도 교회가 고신 보다 많지 적지 않습니다.

서울에서 75명 목사가 단합하여 내게 세 번이나 교섭하려 왔습니다. 이름만 가져  주면 우리가 목사님 따라 하나 되겠습니다.

 OOO, OOO 목사 그런 분들이 내가 안 나타나니 그분들이 각각 신학교를  차렸습니다. 서울에 한번만 와 달라 해. 왕 노릇했으면 개교회로 나가는 것은 다  떨어졌을 건데 하나님 앞에 심판의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 짓을 못했습니다. 왕  노릇 뭐할라고 어리석으면 안됩니다. 이 소원이 자기 평생 소원이 되어야 할  것이고 자기가 걷는 걸음은 올리어 가심을 네가 보면 이루어지고 거기에  참관하면 이루어지고 참관 안하면 안된다. 주님이 제물 되신 그 제물이 날마다  자기의 걸어가는 걸음이 아니면 헛일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진실해야 돼요. 진실한 자들이 이기리로다. 진실은 거짓이 아니라 하나뿐이요  진실해야 돼요. 거짓부리 성경 백독 천독 읽는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이게  되기 위해서 성경 읽고 이것 되기 위해서 성경 배우고 이 노릇을, 이걸 원해서  이게 된 것만치 이 노릇하기 위해서, 이 노릇이 목회하고 이 노릇이 사람  구원하지 이 2가지 이 소원하는 것 가지고는 소원으로 이 2가지가 된 그것이  사람을 구원합니다. 그것이 자타를 구원합니다. 그것이 아니면 구원하지  못합니다. 다 외식을 버려야 합니다. 외식 신자는 참 신자를 죽입니다.

{ 설교 시간을 알 수 없는 말씀입니다 }  그러면 다른 사람이 조롱할수록 더 조롱 받습니다. 멸시 천대할수록 더 멸시  천대받습니다. 억울함을 당할수록 억울함을 당하는 것 같이 합니다. 왜? 속에  배짱이 있다 말이오. 왜 그것이 남이 모르는 저만 아는 그런 세력이 배경이 됐기  때문에 평강을 누리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가르쳐서 주관적 행복이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주관적인 그런 담력이 있고 평강이 있고 온유가 있고  유유해. 천지가 움직인다 해도 눈도 꿈쩍 거리지 안해. 유유해.

 왜?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절대자이신 주재자가 나를 돕고 나 하는 것이 그분  시키는 대로 그분과 합작되어 가지고 하는데 그분과 하나 되어 가지고 하는데  단합이 아니라 그분과 하나로 움직이는데 이것을 믿을 때에 주관적인 용감도  평강도 담력도 만족도 주관적인 유유도 나오는 것이요 이것뿐이라면 술 취한  사람이요 속은 사람이지. 이렇게 믿는 그 증표가 무엇인가? 주관적인 행복이요  주관적이 행복의 증표가 뭐이냐 사실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것이요. 모세가 애굽에서 가나안을 가는 때에 앞에는 홍해 바다가  놓여 있지 뒤에는 강한 군병들이 추격하고 있지 그 가운데 쌓여 있으면서 모든  사람들은 죽겠다고 사경인데 모세와 여호수아와 갈렙은 기뻐 못 견디면서 '야,  놀래지 마라 우리 하나님의 솜씨 또 한번 보자.' 기뻐 즐거워 기다립니다.

그것이 주관적 행복이요 믿기 때문에 주관적 행복이 닥쳤습니다. 아무리  그랬어도 그들이 그 자리에서 몰사했으면 무슨 가치 있습니까?  이렇게 믿기 때문에 주관적이 평강과 만족과 행복이 왔는데 그대로 하나님이  시행하시니까 홍해 바다가 갈라졌지 애굽 병정들은 그 홍해 속에 다 매몰되어  버렸지 그들은 승리의 개가 부르고 그 어려움을 통해서 원수는 다 끝나 버렸고  한번 더 하나님과 결합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더 알게 되었고 꼭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대로 되리라" 성경에 이와 같이 말씀했는데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는 영감대로 자기가 살 때 하나님이 도우시는 이 사실을 믿느냐 안  믿느냐 그 표는 주관적인 행복이 이루어지는 것이 믿고 안 믿는 표요 주관적인  행복 이것이 진짜냐 가짜냐 하는 표는 그 결과적으로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와 가지고 역사 하시는 그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손이 짧아서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 것 아닙니다. 또 귀가 어두워서  우리의 소원을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손에는 피가 돋쳤다  했습니다. 이것은 자타의 자살 행위만 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그의 자살 행위  하는 그 일을 자꾸 더하라고 하나님이 어떻게 들어서 그의 원하는 대로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영감대로 사는 것만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실 수 있고  우리는 그의 도움을 입을 수가 있는 것이지 영감을 완전히 벗어났을 때는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실 수 없어서 피하십니다.

 왜? 하나님이 가깝게 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완전히 배반하는 것  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오시면 우리를 멸할 것밖에 없지 딴것 없습니다. 그  아버지가 수사관, 형사라면 죄인을 체포하는 것이 자기 직책인데 아들이 죄를  지었으니 가면 잡아야 될 것이니 어쩌겠소? 잡으려 하면 부자간에 못할 일이고  안 잡으면 국범이 되겠고 잡으려 하니 윤리의 인정상 거리끼고 이러니까  아버지가 할 수 없어 피할 수밖에 없어. 피하고 다른 형사를 보내든지 피할  수밖에 없다 말이요.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감대로 살지 않을 때는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하시면 멸하실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를 피하신다 했습니다.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나는 너희들과 같이 올라가지 않겠다. 너희들이 목이  곧고 자꾸 나에게 거슬러지니 내가 같이 가면 너희들이 내 정의와 공의에서  진멸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나는 같이 가지 못하겠고 사자들만 보낼 터이니까  가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영감대로 살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위하십니다. 이  영감대로의 가는 걸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 걸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돕는 걸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해하지  아니하고 돕고 우리에게 이용만 되어지지 해하는 것이 없고 일시적으로  외부적으로 이 일이 이루어져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는 일시 보면 영감대로 사는  것을 해하는 것같이 보여지는 일도 있습니다.

 해하는 것같이 보여지는 일도 있지만 그것이, 그 사람이 죽을 때가 됐으면 죽는  것이고 그것이 유익 되면 그러하지만 해하는 것 같이 보여지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오는 것이, 그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다니엘이 죽음을 통하지  않았으면 절단 났을 것 아닙니까? 그 죽음을 통해서 살리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과 진리 때문에 내가 손해보는 그 손해를 통해서 유익을  보는 유익의 새벽이 있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나님과  진리를 떠남으로 피조물은 사망하는 것인데 하나님과 진리에 속하기 위해서  피조물의 박해를 받아도 하나님과 진리와 결합됐으니까 하나님과 진리에 연결이  되고 소속이 되었으니까 소속이 되었으면 죽는 거 살리는 것도 문제가 없고 약한  것 강하게 하는 것도 문제가 없고 마른 걸 살찌우는 것도 문제가 없다 그  말이요. 그것이 구원 얻는 십자가의 도의 방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감 도리대로 살 때에 여러 가지 마찰이 있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고 도우시니 아무 피조물도 해할 수가 없다 하는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을 믿되 어떻게 믿을란가 자기 주관적 평강과 담대와 온유와 이  능력이 나오도록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6.25때도 이렇게 하나님이 위하시고 돕는 이 사실을 믿으므로 주관적  평안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다른 데는 제가 모르는데 거창은  많았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해도 오히려 그 사람들이 불쌍스러워 민망스러워  답답해했지 거기 대해서 아무런 두려움이나 총부리를 들이대고 가자 해도 기쁘고  즐겁고, 가면 구덩이에 묻으려고 하는 것은 두렵지만 "하나님은 나를 돕는  자시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왜정 말년에도 하나님이 도우시는 이 사실을 믿어 주관적 평강이 그 속에  머물어 있을 때는 어떤 피조물도 그를 해하지 못했습니다. 해하는 것같이  날뛰지만 해하는 것이 들어오지 못하고 만일 그가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으면  떠나는 것이고 해하는 것같이 보여서 다니엘을 사자 굴에 집어넣었으니 해한 것  같았지만 해한 게 아니라 그로서 다니엘의 원수를 전멸했고 그로 말미암아  일국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해졌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해졌어.

 이러기에 왜정 말년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도 판사  앞에서 '네가 예수 안 믿으면 다 지옥 간다 했는데 우리 천황 폐하도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가느냐?' '아, 가고 말고요 천황 폐하도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가지요. 이러니까 내가 믿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전도를 하고 싶은데 안 믿으면  지옥 가지요.' 주관적 평강과 담력이 있기 때문에 그런 말한 것입니다.

 '야, 네가 예수를 믿으려면 일본법에 맞는 일본적 기독교를 믿어라.' 손양원  목사님이 판사에게, '내가 물을 테니 대답해 보시오.' '물어 봐라.' '여기  사접시가 있는데 사접시에다가 큰 산더미 같은 바윗덩어리를 넣으면 접시 속에  들어갑니까 접시가 바짝 깨어집니까?' '접시가 깨어지지.' '일본 속에 기독교를  넣으려 하면 그 접시처럼 바싹 깨어집니다.' 어떻게 그 말했겠어?  하나님이 돕기 때문에 영감 양보하지 안하고 영감 그대로 말했습니다. 다  신앙의 사람들은 이렇기 때문에 신앙의 사람들의 기도 한마디에 말 한마디에  세상은 진노도 되고 하나님의 긍휼도 되고 파괴도 되고 건설도 되고 심기도 하고  뽑히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피공로로 인해서 우리가 이 사실을 다 믿을 수  있는 입장을 가졌고 소속을 가졌고 벌써 주님이 밑천을 다 들여서 기반을 다  닦아 놓은 것입니다.

 영도 벌써 믿고 있습니다. 우리 영도 믿고 있는데 다만 악령 악성 악습 나 아닌  나, 나를 죽인 나, 거짓된 나, 나를 죽인 원수가 나 인체 가장해서 나 아닌  이것이 내 마음을 꼬아서 우리 마음이 거기 꼬여 가지고 겁 안낼 것은 겁내고  겁낼 것은 겁 안내고 욕심부릴 것은 욕심 안 부리고 막 집어던져야 될 것은 욕심  부리고 이것에게 속아 이렇지 우리는 이런 권세를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위하심을 우리와 약속하고, 하고 있는데 우리가 영감 생활이 안되니  하나님이 우리를 돕는 것으로 우리를 멸하실 수밖에 없다 말이요 우리가 옳아야  하나님의 도우심을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우리가 삐뚤어져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도움을 삐뚤어진 것을 멸하는 것이 돕는 것이라 말이요. 우리가  절단날 거라 말이요.

 이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고 도우시는 이 사실을 어디서든지 믿어야  됩니다. 무엇을 닥쳤든지 이 사실을 믿어서 주관적 평강이, 내게 마찰되는 그  어떤 것이라도 그걸 능가할 수 있는 평강이 있을 때 이 믿음으로서 하나님은  비로소 일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다 하지만 어떤 마찰이 오면 그  마찰에 대해서 벌써 하나님의 도우심을 다 부인해서 압도되어 가지고 내가 믿는  하나님은 조그매 보이고 무능해 보이고 하나님이 나 돕는 것이 의심나고 그  세력은 직접적으로 강하게 나에게 타도하니까 '나는 저것에 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하니 벌써 믿음은 없어졌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역사 할 수 있습니까?  그 모든 것을 당할 때 '하나님은 나를 위하시니 아무도 나를 대적할 자 없고  해할 자 없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자시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주관적  평강이 있는 그것이 하나님이 도우심을 믿는다는 증표요 그리하여 마찰되는  상대방을 능가하여 상대방으로 인하여서 하나님이 자기와 같이해서 좋은 구원이  이루어질 것을 인해서 칼을 들고 오는데 소망을 가지고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이 신앙이 있을 때 하나님은 능력으로 우리에게 역사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 옥중에 유혈이 낭자해 가지고 들어 가지고 앉아 있는 사도 바울이  아프니까 기도하는 가운데에 하나님이 자기를 돕는 것, 주를 위해서 복음 위해서  맞은 것, 이제 받은 고난과 장차 받을 영광을 비교하면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거. 이렇게 죄악이 마찰되어 있는 자기니 이만큼 하늘에 속한 것이 죄악에게  속하는 것과 마찰될 수 있는 이 자신, 그 모든 것을 생각할 때 바울이 기뻐 못  견뎌서 찬송이 터져 나왔어. 찬송이 터져 나온 그것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약속하신 데에 대해서 확신을 하니까 아픈 것도 간 곳 없고 기쁘고 즐겁고 못  견뎌서 노래가 터져 나오니까 그 믿음에 하나님이 역사 해서 옥터와 그 주변을  진동시켜서 죄수들은 다 풀려 버렸고 옥문은 다 열려 버렸고 그 날밤 하룻밤에  빌립보 교회가 세웠는데 그 교회는 깨끗한 교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것이 주관적 행동이기 때문에 믿음의 여하의 증표는 주관의  평강이니 주관의 평강이 있을 때 믿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주관적 평강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저거 마취해서 최면술에 걸려서 공연히 위안제를 마시고 있네'  위안제인지 위안제가 아닌지 사자 굴에서 살아나는 것 보면 알지 위안제인지  위안제가 아닌지 불에서 나오는 걸 보면 알지. 세상을 이겨서 세상은 깨어졌고  그는 승리해서 나온 것을 보아 알지 우리가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서  제물로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뇨?" 독생자도 우리 구속을 위해서 대속 제물로 주신 하나님이,  이분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신인양성일위이신 참 사람인데 우리의 대속물로  주셨는데, 하나님 당신이 친히 우리 위해서 우리의 벌을 위하시고 우리 행할  것을 위하시고 하나님과 화목을 위하고 이 셋 때문에 죽었습니다.

 '죽일 터이니까 하나님을 배반하라' '죽어도 하나님과 불목 안하겠다 죽어도  하나님 거역 안하겠다 대신 죽어도 모든 택자의 잘못을 대형 하겠다' 이것으로  죽기까지 하신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지은 모든 것인데 이 모든 것을 은혜로  공짜로 너희들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너희들은 하나님이 목적하시고  소원하시는 영감의 사람으로 진리의 법칙대로 이대로 사는데 만 전심전력  기울여라 어느 분야에 있든지 어느 직장에 있든지 층층시하에 있든지 감옥에  있든지 질병 중에 있든지 어디 있든지 너희 할 일은 영감대로 사는 참사람으로  사는 이 일을 숙달시키고 연습시키고 이 일이 실력 있어서 영감대로 사는 것을  어떤 것이 방해해도 방해받지 안하고 암만 어려워도 바위라도 뚫고 나오고  이대로 살다가 죽는 이대로 살다가 끝마치는 이런 사람이 되도록 여기에  주력해라.

 그럴 때에 내가 세상에 머무는 동안에 네게 필요한 것은 내가 무엇이 필요한  것인 줄 다 알고 많아야 될 것도 알고 적어야 될 것도 알고 없어야 될 것도 알고  있어야 될 것도 알고 너희는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모르지만 나는 너희  택자들에게 자연 은총이란 이것들이 어떻게 있어야 된다는 그것을 적합하고  적당한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이것을 담당한다. "그러므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 모든 것을 더 하시리라,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  이것 깨닫기, 믿기 어렵습니다. 은사로 공짜로 주시지 않겠느냐? '내가 일해  가지고 대가를 받았는데' 그것이 인본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주는 사람은 일했다고 주든지 말든지 하나님은 그것들을 통해서  나에게 적당하게 주시는 것이고 나는 할 일이 있어. 나는 그것 위해서 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영감대로 사는 그 생활을 연습했소 그것만이 내 전문, 전공이라  그것만 했소 나는 그것 했는데 그거 하니까 돈을 주니까 돈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나는 그것만 전공했소 자기 양심이 알고 자기가 알고 자기 전신 전체가  그것만 전공했소.

 내가 돈보고 일한 것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영감 시켜 주는 이대로  하나님이 주신 이 법칙 이대로 사는 생활을 나는 여기서 연습할란다 오늘도  지금도 실습하게 됐다 실습하면서 실패했으면 다시 시작하고, 하니까 조금 애로  있어도 극복했고 또 애로 있으니까 극복하지 못하고 넘어졌으면 또 다시  시작하고 이제 저는 하루종일 그 연습입니다. 그 실습입니다. 돈 생각하고 하지  안했소 이게 예수 믿는 사람이라.

 이러니까 자기는 그것 했는데 그 사람들은 보기에 그것 한 줄 모르고 그  사람들은 돈보고 한 줄 알고 돈을 주지요. 돈주면 하나님이 돈주게 했기 때문에  돈을 주지요 그러니까 많이 주든지 적게 주든지 주님이 주는 것인 줄 알고 아무  인간대 불평이 없어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그대로 쓰고 자기는 자기 일 이대로  하고, 이래서 자기가 세상에서 애써 어떤 대가가 와도 자연 은총의 대가는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것인 이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이고 하나님이 주셨는데  이것은 내가 노력한 노력의 대가가 아니고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이 공짜로  은혜로 주셨고 나 할 일은 따로 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신행입니다. 이게  어려워요. 이게 신행입니다.

 그 다음에 33절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우리가 이렇게 영감대로 하나님 법칙대로  살아 나가면 어떤 때는 친구가 틀렸다고 정죄를 하고 어떤 때는 사회가 어떤  때는 가족이 어떤 때는 국가가 어떤 때는 세계가 어떤 때는 전 시대가 전 교계가  틀렸다고 하지만 영감대로 안된 그게 문제지 영감대로 생활하는 것은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고 판정하고 됐다 바르다 하는데 누가 송사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천하가 정죄 하면 어쩔 것입니까?  옳은 것을 자기는 잡았고 그대로 말하고 그대로 생각하고 그대로 행하는데 온  세계가 정죄 하면 온 교계가 정죄 하면 무궁세계 가 가지고는 정죄한 것은 다 그  앞에 머리를 숙여야지 정죄한 반대로 찬양을 해야지 영감대로 가는 걸음에 정죄  하거든 그는 머리를 영원히 의롭다고 칭송할 존재들이요 너를 훼방했으면 너를  찬양할 것들이라 성도가 영감대로 땅 위에 사는 생활을 대적하면 대적하는  그것이 무궁세계의 찬양대라. 무궁세계에 자기를 찬양할 찬양대라, 왜 자기를  찬양해? 자기가 하나님에게 속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주관적 기쁨을 누립니다.

 다른 사람이 욕을 하고 조롱하고 훼방하고 정죄하고 대적할 때에 영감대로 사는  이것은 하나님이 옳다고 하시고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는 이것이 자기가 확실히  믿어지면 주관의 평강이 올 때 그분들이 틀렸다고 하는 것이 나중에 가서  자기에게 찬송을 올릴 사람들이요 무릎을 꿇을 사람들이요. 거기서 의롭다고  칭송할 사람들이라. 이러기 때문에 남이 모르는 기쁨을 남이 모르는 담력을,  평강을, 잘못하면 교만하기 쉽고 거기서 '주여, 우매 무지한 자인데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 기억하십니까?'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영감대로 살아 나가는 것을 세상이 이렇게 저렇게 말한다고  거기 대해서 인간들의 입이 많이 말한다고 인간들의 눈이 어떻게 말한다고  인간들의 귀가 무섭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그럴 때에 다시  재고할 것은 내가 영감대로의 것이냐 영감대로의 것이 아니냐 나타난 문서  계시를 가지고 문서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 열람하고 상고해서 성경에 옳다  인정을 하고 영감이 있을 때는 평강하고 담대하여 "사랑하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언제든지 평안해.

 그러므로 우리가 영감대로의 옳은 사람으로 옳은 길을 걸어갈 때는 어떤 것이  어떻게 송사하고 정죄 할지라도 하나님이 의롭다 옳다 인정하시니 하나님이  인정하시면 됐지 모든 것을 지저거리 쌓아도 그것은 끝을 맺지 못할 것이고  마지막에는 종결은 하나님 앞에 가서 재판 받아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니까 머리를 숙여야 되지.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서 시작을 했든지 위로 하나님께 까지 도달해야 안심이  되고 옆으로 아래로 모든 존재 말단까지 도달해서 거기에 다 해결이 지어졌어야  우리는 해결이지 거기 가지 안하고 몇 사람들이 제 편 되어서 찬성 찬성한다고  어느 지역에는 어느 시대가 문화가 아이고, 좁아, 좁아! 20세기 문화가 인정하는  것이 얼마 안돼. 눈이 넓은 사람들은 몇닢푼치 안되는 줄 알아. 그것은 다  지나가는 것인데 하나님이 옳다 해야 되지 천하 인간이 다 옳다 해도 하나님이  옳다 하는지 안하는지 그것이 문제라.

 하나님만 옳다 하면 천하가 다 반대해도 문제없어 더 좋지. 영광이 집중되지.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정이 아니면 안심이 안되는고로 모든 읽을 책도 많고  볼 것도 많고 들을 것도 많지만 급박하게 급선무적으로 긴급하게 우리에게  당면된 일(여기까지 녹음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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