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를 맺을 때

 

1989. 7. 8. 토새벽

 

본문: 요한복음 15장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며칠 동안 계속해서 양성원 학생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현재의  목사님들보다는 위에 상급 학생들이 낫고, 또 사학년보다는 삼학년. 이 낫고, 인제  이학년은 아직 안 시켜 봤는데 삼학년보다 이학년이 낫지 않느냐? 그보다도 지금  양성원에 입학을 하지 안한 그런 사람들 중에 더 진리를 굳게 잡고 굳게 서 있는  사람이 있지 않느냐?  그래서 자꾸 신앙 연조가 뭐 모든 자기의 그리스도 안에서 있는 사람이 알 수  있는 그 지위로서. 낮은 사람이 위에 사람보다 훨씬 실력 있지 않느냐? 이걸 볼  때에 일면은 걱정이 되고 일면은 또 기쁩니다. 걱정되는 이유는 이 사람들도 다  처음에는 이렇게 팔팔 살아 있던 게 그 성직을 가질수록 자라가지 안하고 점점  그만 늙어 쇠퇴해서 그 노쇠에 빠진 게 아닌가?  하늘나라는 노쇠하지 않습니다. 신앙이라 하는 것은 겉사람은 자꾸 노쇠해도  속사람은 노쇠하지 않고 날로 새로와지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사람은 우리의  구원은 세상 떠날 그때가 그 사람으로서는 최고로 강하고 윤기 있고 또 열심  있고 간절한 때입니다. 육신이 따라가지 안해서 그렇지 이런 건데 '이 늙어져서  그런 게 아닌가?' 그걸 생각하면 이게 혹 가짜가 아니냐?  하나님의 일을 육체로 하는 사람은 육체가 자꾸 노쇠해갈수록이 그는 노쇠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대개는 보면 목회하던 사람들이 차차 차차 그만  이 세상 사람들과 같은 그런 혈육의 힘이 노약해지면은 그만 신령한 것도  노약해져서 나중에는 목회를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노약해지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새로와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최종에  제일 능력 있는 설교를 합니다.

 홍순철 목사님도 세상을 떠날 때의 그 설교한 것이 녹음돼 있는데 그 설교는 참  말할 수 없는 그 생명이 담긴 그런 설교였습니다.

 사도 요한도 마지막에는 육체가 약하니까 걸어오지를 못해서 메어 다가 강단에  놓는데 메어다가 강단에 놓으면 다른 말은 다 하지 못하고 '서로 사랑하라' 하는  그 한 마디 말씀에 온 교인들은 다 은혜를 받고 회개의 눈물을 흘린다는 그런  전설이 있습니다.

 이래서 차차 위에 이 목회를 맡아 가지고 지금 목회를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나이 많은 목회자들은 보면 이거 뭐 설교를 들어 보든지 뭐 모든 면을 보든지 좀  형편이 없이 이래 돼졌는데 이게 노쇠해서 그런 것 아니냐 그 면을 생각하면  마음에 그만 참 근심이 되고 절망과 낙망이 될라 합니다.

 그러나 또 일면으로는 그런 것이 아니고 그때보다 사람이 차차 차차 이 교훈  안에 오랫 동안 있어서 자라가니까 새로와졌으니까 그렇지 않느냐 또 그런 면을  생각해 보면은,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제일 소망이 있고, 앞으로 그러면 학생들과  자꾸 이와같이 지금 팔수록 더 그리스 도화된 사람들이 많지 않겠느냐, 일군이  많지 않겠느냐 이 소망에서는 기쁩니다.

 지금 시간 없으니 나중에 요다음, 다음 주간은 내가 가르치는 시간 아닌데 그때  혹 가 가지고 모든 그 평을 하겠습니다. 그라고 다 시험지를 다 내고 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요한복음 15장 5절을 봉독한 것은 여게 과실을 맺으면 아버지도 영광을  받으시고 또 아버지가 전적 이 과실 맺는 자를 위해서 역사하실 것을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믿는 사람들은 포도나무 과실 맺는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목적입니다. 또 우리의 가치는 이 포도 나무 과실 맺는 것이  우리의 가치지 그 외에 거는 가치가 아닙니다.

 뭐 세상에 어떤 문화에 어떤 그 주인공이 됐다 할지라도, 과학의 무슨 주인공이  됐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가치는 아닙니다. 또 재벌이나 무슨 권세나 명예나  또 세상적인 그런 무슨 공로나 이런 것이 있고 회회교 그 교주와 같이 많은  사람을 점령해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까짓 것도 가치는 아닙니다.

 우리 기독자의 가치는 다만 이 포도나무 열매 맺는 것인데 이 비유인데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니 포도나무 열매 맺는 것은 예수의 열매입니다.

 예수의 열매라 말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네 가지 구원을 주셨고 네 가지로  중생됐는데, 사죄의 열매를 말하고, 칭의의 열매를 말하고, 화친의 열매를 말하고,  하나님을 향한 소망의 열매를 말하는 것이니까 이 네 가지 열매를 맺는 것이  우리들의 목적이요 우리들의 가치요 우리들의 실력입니다.

 그러면 네 가지 열매는 신구약 성경 말씀에다가 다 이렇게 속에다가 내포시켜  놨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 말씀대로 이대로 결실하는 이것은 곧  포도나무 열매입니다.

 그래 내가 오늘 아침에 말하기를 '그 과실 맺는 가지는 과실을 뭐라고 말했느냐?'  이래 물으니까 '뭐 과실에 대해서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말해. 과실은  사죄 열매, 사죄, 예수님의 사죄 칭의 화친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 네 가지를, 네  가지로 우리가 중생됐는데 네 가지 이 대속,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벗지 안하고  입고 사는 그것이 우리의 과실이요, 이것이 우리의 가치요, 우리의 능력이요,  우리의 또 영광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그랬는데 여게 보니까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주님과 끊어지면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주님과 끊어지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데 우리가 끊어지는 이 문제와 다시  재연결되는 문제 이 두 가지 문제가 있는데 어데다가 더 힘을 써야 되겠느냐?  끊겨진 데서 다시 잇겨지는 그런 데에 힘을 더 써야 되겠느냐 끊겨지지 않는 데  힘을 더 써야 되겠느냐? 우리가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냐, 어느 걸 더 힘써야  되느냐? 힘쓰는 것은 끊겨지지 않는 데 힘쓰는 것이 첫째로 힘써야 됩니다.

 왜? 그거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기도 전에 벌써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써  영육을 다 연결시켜 놨습니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우리가 중생될 때에는  벌써 영육을 다 연결시켜서 온전함을 이루어 놨는데 영은 다시 변동이 없지마는  우리 심신으로서는 예수님의 대속을 입었다가 벗었다가 이렇게 실패되는 일을  하기 때문에 대속을 벗지 않는 것이 이것이, 끊겨지지 않는 것이 우리가 제일  주력할 일이오.

 끊겨지지 않는 데에 우리는 주력을 해서 항상 사죄 칭의 화친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입고, 이 사람이 우리니까. 우리는 주님의 것된 것이 내요 또 주님의 종된  게 내요, 주님의 성전된 게 내요, 주님의 지체된 게 내요, 주님의 몸된 것이 내요,  주의 나라와 제사장과. 주님의 제사장된 것이 내요, 선지자 된 게 내요, 주님의  대리 왕된 것이 내요, 영광의 찬미된 게 내요, 주님의 그 형상된 것이 내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사람이 살고 이 사람을 벗어 버리고 엉뚱한 사람이 살지 말고  이 사람이 사는 것이 그것이 열매 맺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사는 것이 열매 맺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의 목적이요, 우리의 성공이요, 우리의 가치요, 우리의 영원한  영광이요, 대우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거 외에는 우리가 탐할 것이 없고 가치 있는 게 하나도 없는데  이 가치 있는 이것을 우리가 성취하는 데에는 포도나무하고 붙어 있어야 된다.

떨어지면 안 된다. 요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오늘 아침에 이 말씀을 봉독했습니다.

 떨어지면 안 된다. 주님과 나와의 떨어지면 안 된다. 그러면 그만 아무것도 맺을  수 없어.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말은 무슨 말씀인고 하니 생명과 평강에 속한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뭣만 하느냐? 썩는 것 죽는 것 그외에 딴거는 없습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썩는  것과 죽는 것 그 두 가치 외에는 아무것도 되는 게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나와 끊어져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 라 뭐 죄  못 짓는다 말이 아니고 우리에게 생명에 속한 거, 평강에 속한 거 영광에 속한 거.

다시 말하면 열매, 사죄 칭의 화친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 열매, 이 좋은 우리가  소망하고 있는 이 결실은 하나도 할 수 없다. 주님 떠나서는 하나도 할 수 없다.

 하나도 할 수 없는데 주님과 우리와의 그 사이가 끊겨지는 그 이유는 뭐인가?  주님과 우리와의 끊겨지는 이유는 죄입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주님과 나와의  끊겨지는 것은, 죄라 말은 주님과 나와의 관계가 삐뚤어진 거 있다 말이오.

삐뚤어진 것 있어. 삐뚤어진 거 있으면 그만 주님과 나와에는 끊어집니다.

 이래서 아가서에 보면은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 사슴과 같다' 이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 사슴과 같다' 이랬는데 노루와 사슴은 다른 짐승과  다릅니다. 여우 저런 거는 뭣을 보면은 자기가 모르는 거 뭐 이상한 게 보여도  능글능글하면서 가다가도 뒤 돌아보고 이라지마는 사슴하고 노루하고는 자기가  모르던 것이 뭐이 하나 보이면 깜짝 놀퀘 가지고 얼마나 달리는지?  뭐 얼마나 달리는지 그만 산 그 산만당까지 가야 서지 중간에 쉬지 안해요.

아무리 높은 만당이라도 산만당까지 치켜 올라가 가지고 그 너머를 봐야 거기서  중지를 하고 서지 그리 안 하면 중지하지 안해요, 그만. 그렇게 놀라면 멀리  달아나는 것을 가리켜서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 사슴과 같다' 이랬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뜻에 맞지 않는 것, 당신에게 다른 그런 것을 하나 딱 보면은  그만 달아나시기를 노루와 사슴같이 그렇게 멀리 달아납니다. 그러기에 그전에  이용도 목사님 그 책을 내가 보니까 주님의 뜻에 좀 틀린 것 뭣이 죄 말이지요.

그런 게 하나 있으면 주님은 어떻게 달아나는지, 잠깐 실수로서 주님과 자기와 그  사이가 얼마나 멀어졌든지 그 뒤를 다시 찾아 가지고 주님을 만날라고 하면은  어떻게 힘이 드는지? 그것을 표현해서 말해 놓은 걸 봤습니다.

 이래서 주님과 나와의 떨어지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데 주님과 나와의 사이가  떨어지게 하는 것은 뭣인가 삐뚤어지게 한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능력도  성공도 어데 있는가? 능력도 성공도 주님과 나와의 뭐 결합만 돼 가지고  있으면은 자연히 성공이요 자연히 능력이요 자연히 지혜요.

 이래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지혜요, 능력이요, 우리의 생명이시요, 우리의  부요입니다. 우리 영광이십니다. 이래 주님하고만 연결만 되면 필연적으로 이  과실을 많이 맺는데 주님과 끊겨져 있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자기에게 필요하고  유익한 것은 하지 못합니다.

 이라니까 우리가 제일 힘쓸 것은 첫째 힘쓸 것은 뭐입니까? 첫째 힘쓸 것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벗지 않는 그 일에 제일 힘쓸 것이고 또 두번째 힘쓸  것은 예수님과 나와의 떨어졌느냐? 이러면 어서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입는  그것이 뭐이냐? 다시 연결되는 것이고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잊어버리면 그만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이래서 안 끊어지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에는 끊겨진 데를 찾아 가지고  빨리 연결하는 것이 둘째로 중요합니다. 안 끊기도록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다시 연결되는 것.

 이래서, 우리가 지금 있겨 가지고 있으면 그거는 문제가 없는데 대개 보면은  끊겨져 가지고 있다 그거요. 열이면 열이 모두 끊겨져 가지고 있는 것이 그것이  사고지 뭐 입고 있는 그 사람은 으례히 입고 있으니까 열매 맺을 것이고,  우리가 그러니까 안 끊겨지도록 하는 그걸 제일 주력해야 되겠는데 실은  뭐이냐? 끊겨진 그것을 찾아 가지고 '뭣 때문에 끊겨졌느냐?' 자꾸 끊겨져 있는  걸 찾아 가지고 다시 연결되는 거기다가 우리가 힘을 쓰는 것은 항상 제일 써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나 사이가 연결돼 있으면은 이는 모든 세상이 끊을래야 끊을 수  없고 없앨래야 없앨 수 없는 항상 있는 영원한 것을 우리가 가지는데 기쁨도  평강도 능력도 또 존귀도 온갖 실력도 부요도 이 감사도 뭐 끝없는 이것을  우리가 가지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우리들인데 주님과 끊어져 놓으면 전부  절단입니다.

 슬퍼하는 것도 끊겨진 사고요, 근심하는 것도 끊겨진 사고요, 교만한 것도 끊겨진  사고요, 게을한 것도 끊겨진 사고요, 뭐 자기 옛사람의 자기 사욕이 나온 것도  끊겨진 사고요, 모든 세상에 대해서 갈급한 것도 끊겨진 사고요, 주님에게 대해서  등한히 하고 주님 외에 딴거 찾을 게 아무것도 없는데 주님 외에 딴것 찾아  날뛰는 것은 끊겨진 사고라 그 말이오.

 지난밤에 귀신 설교 했는데 잘 했습니다. 귀신이 들어온 그 원인입니다. 그  결과로 그런 것이니까 어짜든지 '뭣이 주님과 나와의 사이를 끊고 있는가?' 요걸  찾아 가지고, 딱 끊고 있는 거 찾아서 주님하고 나하고, 그걸 찾아 가지고  주님하고 딱 나와 만나서 주님하고 나하고 만나는 게 제일입니다. 주님하고  나하고 만나서 대면해서 주님과 나와 그 사이가 있겨지면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다 산 자의 생활이 나오게 됩니다.

 이러니까 설교 준비를 하는 것 보면은 저것은 주님과 자기와의 끊겨진 것을  연결할라고 지금 애를 써서 연결한 그 발표를 하고 있다. 연결된 그것을 발표하고  있다 하는 것도 있고, 주님과 자기와의 끊겨진 걸 연결해 가지고 연결을 힘써  가지고 연결된 발표도 있고, 어떤 사람은 주님은 상관 없고 이 성경 말씀과  연결된 사람, 또 설교록과 연결된 사람. 또 그것보다도 이 세상 지식하고 연결된  사람, 세상 이 모든 마귀 지식하고 연결되고 이 세상 것 이런 것 저런 것 보배로  여기는 그런 것하고 연결된 사람 그것을 우리가 구별할 수가 있습니다.

 뭐 말이야 잘하고 못하고 해도 연결이 됐느냐 안 됐느냐 하는 그것이 문제지  연결만 됐으면 더듬고 말 못해도 상관 없소. 그 사람이 그 생활 하면 자꾸 있어  갈수록이 목회가 되고 성공이 되고 자꾸 좋은 결과가 맺어집니다. 그러나 자기가  주님과 연결되는 이 면을 주로 힘쓰지 안 하고 어만 것하고 연결된 그 사람은  아무리 미꿈해도 마지막은 죽고 맙니다. 목회나 그런 게 아무 결실이 없습니다.

 또, 요새 모두 은퇴라 하는 거, 은퇴가 얼마? 칠십이 은퇴라 하던가? 칠십이  은퇴입니까? 저 OOO장로님? 칠십이라든가? 녜, 칠십까지는 그만 은퇴가  됩니다. 은퇴가 되는데 주님하고 대면 안 하고 살던 사람은 뭐 칠십까지가 못  견뎌요. 칠십까지가 못 견뎌서 이리 쫓겨다니고 저리 쫓겨다니다가 그만 칠십이  되면 은퇴되면 '됐다' 하고서 그만 그 다음부터는 이제자기는 은퇴해 가지고  있으면서 '아이고 인제 참 평안하다' 이래 됩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연결되는 그것으로 가지고 늘 사는 사람은 은퇴하면 그 교회서  사면을 했으니까 자기는 다시 가 가지고 개척 교회로 나가 가지고 또 일을 안  하고는 못 견딥니다. 이래서 나중에 가서 나이가 많으면 필요 없는 산 송장이 돼  가지고 나가지마는 주님하고 연결된 그 면을 힘쓰는 사람은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에 제일 실력 있는 그런 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이 말씀 봉독한 것은 주님과 우리 사이가 끊겨지면 그만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살아봤자 살면 재나 저질러서 자꾸 죽고 썩는 것  망하는 것만 하기 때문에 죽는 게 낫지 살아 있어 봤자 그거는 백해 무익입니다.

해뿐이지 유익이 하나도 없어.

 이러니까 주님과 연결이 끊어져 있으면 헛일입니다. 뭐 끊어져 가지고 주님과  연결이 끊어져 가지고도 부흥사도 돌아다닐 수 있고, 목사 노릇도 할 수가 있고,  세상에 오만 것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소용없는 것이기 때문에  '나를 떠나서는 너희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뭐 정치 운동해도 소용 쉽고, 유명한 목회해도 소용없고, 유명한 개혁한다 해도  그게 뭐 마귀 노릇이고 다 자타를 망치는 것이지 생명의 역사는 안 된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주님과 나와 연결 끊어지면 절단입니다.

 연결되는 거 끊어지는 거 이걸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주님과 나와에는 끊겨지는  것은 삐뚤어지는 게 끊겨지는 것인데 그러면 그걸 다 성경을 볼라 하면 한이  없기 때문에 간추려서 사죄에 삐뚤어진 거 사죄는 죄 없는 것인데 죄가 있으면  안 되는 것이고, 또 하나님의 뜻대로 의가 없으면 안 되고, 하나님하고 동행이  아니면, 딱 들어붙지 안하면 안 돼. 하나님과 들어붙어야 돼요. 그러고 하나님을  향한 소망에 이 붙어 가지고 있어야 돼요.

 이러니까 뭐인가 끊겨졌으면 절단나니까 끊겨진 게 뭐이냐? 그 끊겨진 것  주님과 자기와의 이렇게 결합되지 안하고 끊겨져 있는 요 면이 문제이기 때문에  요 끊겨져 있는 요 면을 찾아 가지고서 회개하면 돼요.

 '하루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깨닫고 그걸 고치거든 다 용서해 줘라' 하는 것이  주님의 주장이기 때문에 그 우리는 주님의 대속의 이 공로가 있기 때문에 끊겨진  것을 알면 그 끊겨진 것을 '이제 내가 요거 회개합니다. 요거 요 끊겨진 거 내가  고칩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고 주님에게 믿으면 딱 결합이 돼 버려.

그라면 하루 일혼 번씩 일곱 번도 끊어질 수 있고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오묘입니다.

 이래서 끊겨진 것을 다 모두 재연결해 가지고 순전히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에,  이 네 가지가 우리 뭐입니까? 우리가 뭘로 중생됐습니까? 이 네 가지의 능력으로  우리가 중생됐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연결된 거는 네 가지 능력에 연결되는  것이요 그 열매는 네 가지 능력의 결실을 맺는 그 실상을 이루는 것이 그것이  과실입니다.

 이래서, 기도하러 가도 그렇고 뭣도 그렇고 우리는 무슨 이 사물에 대해서 그  일을 어떻게 할라고 애를 쓰지 말고 그것보다도 주님과 나와의 연결되는 그 면에  전력을 기울여야 됩니다. 연결만 되면은 그 다음에 옳은 일이 돼져요. 연결 안  되면 다 망하는 것밖에 안 돼요.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과 연결할라 하는 그 면을 애쓰지 안하고 뭐 공자와  연결할라고, 석가모니와 연결할라고 불경, 이 세상에 또 과학 이 세상 이십세기의  문화, 뭐 땅위에 있는 무슨 어떤 권세 이런 모든 피조물과 연결할라 해 가지고는  안 됩니다.

 우리의 생명은 네 가지는 이거 피조물이 아니고,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은 이거는  창조주의 알맹이에 피조물의 이거 연결성을 가지고 있는 표리를 가진 것이  우리의 사활의 대속입니다.

 그런고로 재연결하는 이 면에 우리가 전력을 기울여서 어짜든지 끊기지 안하고  주님과 연결되면은 우리는 아무리 근심 걱정이 끼여 가지고 있어도 연결되면은  근심 걱정이 싹 없어져 버리고, 강하고 담대하고, 평강이 생겨지고, 염려도  없어지고, 교만도 없어지고, 시기도 없어지고, 미움도 없어지고, 나쁜 욕심도  없어지고, 모든 불안도 없어지고, 항상 감사와 기쁨만 충만할 수 있는 이 연결!  뭐이 연결 끊겨진 걸 이걸 우리가 찾아야 돼요.

 모두 끊겨진 그 결과는 싫어서 야단을 지기면서 끊겨진 거는 찾지 안해. 그러면  그 자리서 있다가 암만 끊겨진 것은 염려를 해도 가룟 유다가 후회를 암만  했지마는 배가 터져 가지고 죽기까지 후회해도 멸망하고 말았지 살지는 못했어.

연결이 돼야 돼요.

 예,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가서 얼른 가서 주일학생 중간반 학생들을 다 깨워 가지고, 그 곤하게 자는 거  애처롭게 생각지 말고 깨워 가지고서 주님과 연결이 끊어지면 큰일 나니까  재연결되도록 그래 해요. 그라면 지혜 총명이 있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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