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이 없고 충성이 없다

 

1986. 1. 11. 토새벽

 

본문:누가복음 11장 5절∼13절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지마는 덩이를 내게 빌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든지 듣든지 할 때에 그대로 실행을 해서 구원의 실상을 이루고자 하는 그것이 속에 없으면 헛일입니다. 그것이 있는 자와 없는 자는 정반대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이 없이 말만으로 족하게 여기는 자는 언제나 말만의 말을 좋아하지 구원의 실상을 이루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항상 새 말을 듣고 싶어하고, 또 암만 제가 들어도 말 속의 깊은 복음은 듣지를 못하고, 또 그게 없으면 영감도 받지 못하고 권능도 얻지 못합니다. 이 말씀을 어느 말씀이든지 이 말씀대로 내가 요대로 실행해서 내 구원의 실상을 이루겠다 하는 그것이 우리의 준비 중에는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지난 밤에 겨자씨 믿음을 말씀했는데, 이제까지 말해도 겨자시 믿음에 대해서 듣고 깨닫는 사람도 있겠지마는 너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겨자씨 믿음은 우리의 신앙 생활의 전부를 가리켜서 말씀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겨자씨 믿음만 있으면 고만 다 됩니다. 겨자씨 믿음만 있으면 만물이 다 그 앞에 복종을 하고, 만물을 명령할 수 있고, 만물은 복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만물을 명령할 수 있고 만물을 복종할 수 있으니 그 명령하고 복종한 그 결과는 뭐 이루는가? 그것은 뽑는 역사와 옮기는 역사와 심어지는, 심기는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러면 그 겨자씨 믿음은 인간이 만드는 것인가? 인간이 만드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겨자씨 믿음을 만들어 가지고 주시는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하는 그 믿음은 자기가 만들어 가지고 가지는 것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지고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물로 주시는 그 겨자씨 믿음만 받아서 가졌다고 하면 그것이면 전부입니다. 다 됩니다. 능치 못할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겨자씨 믿음을 하나님이 만들어 가지고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면 은혜로 주시는 그것을 받기를 어떻게 받느냐? 주시는데 누구든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받으면 어떻게 받느냐? 겨자씨 믿음을 하나님이 만들어 가지고 주실라고 애를 쓰는데, 주실라고 애를 쓰는데, 안 주실라고 해서 우리가 찾아다니기 힘드는 게 아니고 주실라고 애를 쓰시는데 우리만 그 겨자씨 믿음을 그만 힘 들일 거 없이 받으면 됩니다. 받으면 되는데 받는 것이 어떻게 하면 받는 것인지 하는 그것을 여러분들이 들었으면, 요거는 내가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어제, 지난밤에 다 많이 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받을 수 있는가 받는 고것은 집에 가 가지고서 연구해서 받아 보십시오. 받아 보시면 됩니다. 왜? 마음을 쓰지 안하고, 마음이 따라오지 안하고 껍떼기만 가지고 그저 말만 듣고 하는 그런 것을 좋아하고 그게 신앙 생활인 줄 알기 때문에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봉독한 말씀 가운데에, 벗이 와서 벗에게 대접할 떡이지마는 덩이를 빌리려고 이래 하니까, 밤중에 자는데 와서 그라기 때문에 그 친구가 ‘내가 이렇게 침소에 누웠고 아이들도 다 이렇게 돼 가지고 있으니까 나를 괴롭게 하지 말아라’ 빌려 주지 못하겠다.' 그거는 무슨 말이냐? 그것은 고다음에 보면 벗됨을 인해서는 그렇게 말하고 줄 수 없다 그말입니다. 벗됨을 인해서. 벗됨을 인해서는 줄 수 없다.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서 줬다. 그러면 벗됨을 인해서 주지 않는다 이랬습니다. 그러나 강청함을 인해서 준다. 그러면, 벗됨 그것보다 강청이 신앙의 실효에 더 크다 그것을 여게 구별해서 말합니다.

그러면, 벗됨을 뭐이 벗됨인가? 벗이라는 것은, 벗됨을 인해서 안 준다고 하는 거 보면은 그저 서로 알고, 자주 만나고 알고 그렇게 벗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 벗이 자기의 괴로움을 무릅쓰고 그 요구대로 줄 수 있는 그런 무슨 속에 강한 인연은 없습니다. 강한 인연은 없고 그저 알고 친하고, 알고 지내고 친하고 지내고 서로 이래 자주 만나고 하는 그런 정도입니다. 그 정도이지 밤중에 와 가지고서 떡 달라 할 때에 줄 만한 그런 강한 인연을 가진 그런 벗은 아니라 그말입니다.

이것은 비유인데, 우리 믿는 사람들이 그저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알고 믿고, 또 이 신앙 행위에 의식을 갖춰 의식으로 믿어서 학습이나 받고, 세례나 받고 또 주일 지킨다고 그저 주일날 왔다 갔다 주일이나 지키고, 지킬 수 있는 형편이면 주일 지키고, 지킬 수 없는 형편이면 주일 못 지키고 그저 형편되는 대로 주위 환경에 따라서 그렇게 예수 믿는 그런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속에 뼈가 없는 그런 신앙을 가진 그런 신자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신자는 자기에게 그 어려움이나 무슨필요한 것이 있을 때에 주님에게 구한다고 해도 주님이 주시지 않는다, 고만 간단하게 그말입니다. 그런 신앙 가지고는 주님에게 얻지 못한다 그말입니다.

말로나 입으로나 예수 믿고, 도 그저 교회의 그 신앙 의식인 학습이나 받고 세례나 받고, 형편되는 대로 주일이나 그저 가끔 가다 왔다 갔다 이렇게 하고, 또 주일도 지키면은 고것이 지킬 수 없는 어려운 역경이 있는 고때에 지키는 고것이 주일을 지키는 것인데, 평소에 자기 모든 행사 다 하고 남은 찌끄러기 가지고서 그저 예수 믿는 그 행세를 항상, 머리 떼서 바치라 했는데 하지 안하고 그렇게 믿는 신앙 생활은 아무 효력이 없는 것을 여게 단정해서 말했습니다. 벗됨을 인해서는 안 준다 이랬습니다. 벗됨을 인해서는 안 준다. 그러나 강청으로 인해서 줬다 이랬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저 아무런 자기의 마음이 기울여지지 안하고, 자기의 정성이 기울여지지 안하고, 자기의 힘이 기울여지지 안하고, 자기의 뜻이 기울여지지 안하고, 그저 자기 목숨이 기울여지지 안하면 그것도, 목숨이 기울여져야만 참으로 신앙 생활인데, 그게 안 기울여질지라도 자기 마음이 기울여지고 뜻이 기울여지고 또 자기 힘이 기울여지고, 이래야 비로소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는 자기가 접할 수 있는 것이고, 생명을 기울이면 뭣이든지 다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그 소용대로 주리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 믿되, 이 강청은, 요것도 잘 구별하지 못하고 깨달으면 헛일입니다. 강청이라 하는, 강할 강자 청할 청자인데, 강청이니까, 강청은 양면이 있습니다. 자기가 강하게 청하는 거 있고 또, 강하게 청하여야 할 그 원인이 있고 둘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은 보면은 아주 자기가 참 말할 수 없는 간절한 그 마음으로 이게 안 되면 안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그런 중요한 일이 있어도 와 가지고 말할 때는 말을 차마 못 하고 그저 자기가 얼마 동안 벼르고 벼르고 하면서 이거는 꼭 이게 내게 없으면 안 되겠는데, 이거는 이이 밖에는 해 줄 이가 없는데, 이이에게 이걸 받아야 되겠는데, 이래도 가서 말을 못해 찍해야 가 가지고서 ‘아 그거 좀 필요한데 좀 해 주시이소’ 이라니까 암말도 안 하고 있으니까 ‘좀 해 주실 수 없습니까?’ 암말도 안 하니까 그만 희미하게 그만 가 버립니다. 자기 속으로는 그렇게 마음에 강하지마는 말을 그렇게 못 하는 인간이 있고, 또 어떤 인간은 보면 자기 속에는 그게 아무 필요도 없는 것이지마는 필요 없는 것도 말을 하면은 막 입으로 가지고 강하게 이렇게 ‘이거 안 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입으로 억세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 있습니다.

그거 모양으로 주님에게 대해서도 자기의 그 강청하는 그 주관의 방편은 강하게 하지마는 자기가 참 얻어 가져야 되겠다는 그 필요성이나 중요성이나 자기가 구하는 그 자체에 대해서 자기가 필요성이나 중요성이나 그 갈급성이나 그것은 가지지 안하고 그저 말로만 그렇게 하는 그런 게 있다 말이오. 그런 것은, 사람은 그걸 모릅니다. 자꾸 그걸 말 많이 하면은, 인간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듣는 줄 알고, 또 말을 많이 하면은 말에 다 넘어갑니다. 말에 안 넘어가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말에 넘어가지 안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위인입니다. 신앙 생활은 참으로 말에 넘어가지 않는 그 사람이라야 되지 말에 넘어가는 사람은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악령의 궤휼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라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에게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은 내가 구하는 태도와 그 방편 그것보다도, 그것보다도 내가 구하는 그 은혜 그 자체, 내가 구하는 것, 그거 구하는 그 자체 그것이 내게 필요성의 강도가 더 중요하고 그것이 이분이 아니면 나에게 줄 수 없는데 이거는 내가 꼭 얻어 받아 가져야 되겠는데 하는 자기에 필요성 중요성, 또 그분밖에는 줄 수 없다는 상대방의 실력성, 유효성, 그것을 자기가 가지는 그 강도가 강해야 되지 그 강도는 없고 구하는 그런 방편만 가지고 날뛰는 그런 자를 가리켜서 외식하는 자라 그렇게 말씀하시고, 그런 자에게 대해서 하나님은 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속에 내용이 강하고 방편은 그 사람의 성격에 따라서 그렇게 뭣이 간절치 안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다 들으시고 그렇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신앙 생활은 이 일반적인 보편적이 그런 그저 하나의 속에 뼈 없는, 속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라는 요것이 알맹이 뼈다구인데, 신앙의 뼈다귀, 뼈인데, 요것 없이 껍데기로 훌훌하는 그런 신앙 생활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면 그 알맹이 있는 신앙 생활을 하되 신앙 생활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은 나에게 주시고 나는 받고, 나는 달라 하고 하나님은 주시고 그저 상호 관계는, 내가 하나님께 달라는 것, 또 하나님은 내게 주시는 것, 나는 받는 것 이것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되는 이 관계입니다. 이 관계에 대해서 하나님께 구하는 그 자체 그것이 강해야 되지 그것은 없이 그저 입술로만 가지고 날뛰고 있는 그런 거는 아무 필요가 없다 그말이오. 요것도 신앙 생활에 그것은 제가 몇십 년 하고 죽는 날까지 해도 그거 모르고 사는 사람은 모르고 삽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산 기도를 간다, 무슨 금식 기도한다. 금식 기도를 해도, 그러면 금식 기도하는데 금식 기도하는 그 형식이나 그런 시일이나 가는 그런 것만 갖추지 자기 속에 이거는 주님에게 꼭 얻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는 그것의 자기에게 필요성, 그것의 가치성, 그것의 중요성, 그분밖에는 줄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없이 기도를 얼마 동안 해도, 만일 하나님이 보실 때 그 분석을 해 보면 그 속에 뭣을 달라고 하는 아무 목적이 없고 거기 대해서 참 자기에게 필요성이나 중요성을 느끼지 안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제가 단식 기도해도 안 주고, 아무리 금식 기도 사십 일을 해도 안 주십니다. 왜? 하나님께 구하는 그 은혜의 그 자체가 자기에게 중요성이 있는 것만치 그것을 주면 그 사람이 중요하게 쓸 것이고, 필요성이 있는 것만치 필요 있게 쓸 것이고, 중요성과 필요성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만치 그 은혜를 주실 때에 소중히 여기고 감당하지 그것이 없는 자가 공연히 입버릇을 가지고서 뭐 사십 일을 조르고 뭐 자꾸 달라고 이리 쌓아도 아무 거기 대해서 필요성 중요성을 느끼지 안하는 자는 그 은혜 주면은 저버려 버리고 맙니다. 그것 또 쓰지도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 말씀이 알기 좀 어려운 말인데, 자기가 하나님에게 강청하는 데에는 강청하는 그 주관 태도 그것보다도 강청하는 그 자체, 하나님에게 뭘 강청하든지, 자기가 믿음을 강청하든지 자기가 그렇지 않으면 무슨 회개를 강청하든지 자기에게 무슨 어려운 난제가 있는데 그 무슨 난제를 강청하든지 뭘 강청하든지 강청하는 그 제목, 기도의 제목, 기도의 그 자체, 뭐라고 표시를 못 해서 그렇다 말이오. 제목, 자체 그것에 대해서 네가 어느 정도 네가 느끼고 필요성을 가지고 중요성을 가지고 그것이 참 중요하다, 그것은 주님 외에는 줄 이가 없다 거게 대해서 네가 어느 정도 네가 그 중량을 가지고 있느냐, 고것이 강청하는 그 태도보다, 그 방편보다 그것이 더 중요하다 그말입니다. 알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데는 기도의 태도나 방편이나 그것보다도 내가 기도하는 기도의 목적인 얻어야 되겠다는 그 자체 거게 대해서 내가 어느 정도 중요성을 가지고 있으며 어느 정도 지금 중량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고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빈약하기 때문에, 어린 아기들도 보면 그걸 뭘 달라고 하는데 이놈이 고집이 있고 트집이 있고 억센 놈이 돼 놓으니까 막 달라고 억지를 내고 이렇게 막 달라고 야단을 지기고 이랍니다. 지기고 야단이나. 그게 참으로 원하는 줄 알아도 조금 딴거 있으면 그거 다 잊어버리고 딴거 거석합니다. 또 뭐이든지 그놈은 달라고 하는 데만 억세지 그놈이 자기가 받아야 된다는 거기 대해서 중요성이나 필요성을 가지지 못하는 그런 놈이라 말이오. 그놈은 그저 달라고 하는데 뭣 필요 없는 것도 달라 하면 막 억세게 달라고 하고 이거는 달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강하게 하지를 못하고 물렁하게 그렇게 해도 그걸 안 주면 병이 날 만치 그렇게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의 성격도 있다 그거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내가 지금 뭘 말할라고 하는데 그 말할라고 해야 그것이 내 말에 언변도 없지, 또 발표력이 모자라서, 이러니까 뭐라고 내가 발표를 잘 못 하겠으나 이렇게 자꾸 말해 쌓는 데에서 아마 저 목사님이 뭣을 지금 발표할라고 하는가 보다 하는 그것을 자기네들이 깨달아서 그것을 잡으면 된다 그거요.

그것을 잡도록 하기 위해 가지고서 그저 이렇게 저렇게 자꾸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말을 많이 할라고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저렇게 발표를 거석하니까 이라면 혹 알아 듣고 깨닫고 잡을 수가 있을까 해서 하는 것입니다.

막 늑장을 하고 억지를 내고 뻐득거리고 막 아이가 죽을 것같이 이래 쌓아서 이놈이 본래 이렇게 달라고 억지를 대고 고집통이 센 놈이라 이놈이 이렇지 실상 이거 필요도 없다 왜? 줘 봤거든. 과거에 줘 보니까 금방 주니까 휘떡 집어던져 버리고, 주면 고만 필요성이 없으니까 주면 휘떡 집어던져 버리고, 또 뭐이든지 달라 하면 그렇다 말이오. 그러니까 이놈 버르지기가 돼서 이렇지 간청하는 것이 제게 필요 있어서 간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부모가 알 때는 그놈 간청하는 그까짓 거야 구불거나 말거나 목이 쉬어서 자빠지거나 말거나 버르지기 요걸 고쳐야 되겠다 이렇지 줘야 되겠다는 그것이 안 되고 맙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런 사람되기 쉽다 그거요.

「소용대로 주리라」 또 9절에 말씀하시기를 또 딴 말 합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요거 ‘마다’라 하는 말은 한 번만 썼는데 요게는 문장적으로나 또 문법적으로나 고 시적으로나 보면은 마다라는 것은 한 번만 썼지마는 요 마다라는 것은 말마다 마다를 다 말한 것입니다.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이마다 다 열릴 것이니라고 마다가 다 세 군데 다 붙어서 있도록 고렇게 문장이 뜻이 돼 가지고 있고, 또 시적인 그런 방편에서 다 그렇게 세 군데 다 붙도록 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이제는 네가 흐리멍텅하게 십 년 예수 믿어도 예수 믿어 효력을 한 번도 얻지 못하는 그런 자 있다. 그것은 강청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 또 강청이 있었는데 안 되는 것은 네가 거기 대해서 주님밖에는 그거 주실 이가 없고 그것이 네가 어느 정도 필요하며 중요한가 그것도 생각지 안하고 네 버르지기가 돼서 겉의 것만 하나님의 눈을 뭐 졸라대고 기도하고 하는 그것은 마치 아이, 못된 고집쟁이 억센 아이 그거 버르지기 모양으로 그런 것이지, 그놈은 암만 해 봤자 저놈은 필요있어 하는 게 아니라 말이오. 주면 휘떡 집어 던지고, 또 금방 그거 하다가 또 인제 그거 하다가서 안 주면 그다음에 다 잊어 버렸어. 고만 잊어 버려 버리고, 거게 대해서 이것이 필요하다, 이것을 내가 가지지 않으면 안 되겠다, 받지 않으면 안 되겠다, 거게 대한 필요성이나 중요성이 그 속에 마음이 어느 정도 그 중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어느 정도 간곡히 그 속에 박혀 가지고서 있어서 하는 것이냐 하는 그것이 없이 구하기만 입으로만 자꾸 떠드는 그런 인간이 있고, 또 구하기는 그걸 차마 못 해도 속에 간곡한 거 있고. 간곡한 그것이 구하는 방편 그거, 그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하는 것을 우리가 느껴야 됩니다.

그런 강청 그것보다도 뭐이 중요하냐? 주님에게 우리가 얻어야 될 것 많고, 우리가 또 찾아봐야 할 것 많고, 또 우리가 자꾸 한 걸음씩 이제 한 문씩 열고 들어가야 될 그런 세계가 많이 있는데 그런 것에 대해서 꾸준한 노력이 더 중요하다 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하라. 구하는 것도, 구하라 그러면 얻는다. 찾으라 그러면 찾아진다.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려진다 하는 이것은 꾸준한 노력을 가리켜 말합니다. 자기가 일시적으로 마음에 뭐 단식 기도해서 죽기를 결심하고서 이거 내가 안 되면 안 되겠다고서 그렇게 필요해서 강청을 하는 그런 강청, 일시적으로 강청하는 그거 가지고 신앙 생활이 되는 거 아니고, 강청하는 그것보다도 꾸준히 계속적인 이 노력이 더 중요하다 하는 것을 여게 가리켜서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할 것은 무엇을 구할 것인가? 구할 것은 이거 주님에게 다 구할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은, 내가 무엇이든지 떡을 구한 것도 그러하고 여게 뭣을 구하든지 구하는 것은 어떤 것을 네가 구하는 것인가? 구하는 것은 다 예수님이 이미 내게 주실라고 만들어 가지고 있는 그것을 우리가 구하는 것입니다. 다른 데 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내게 주실려고 만들어 가지고, 주실라고 손에 들고 있는 것을 우리가 기다리는 것입니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을 우리가 기다리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달라하면 하나님이 다 주십니다. 또 찾는 것도 뭐 찾느냐 하면은 예수님에게 있는 것을 우리가 찾는 것입니다. 또 문을 두드리고 열고 들어갈라 하는 것도 어데 가는 것이냐? 예수님에게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할 것을 뭣 어떤 것을 내가 구해야 될란지 구할 것을 모르면 구하지 못합니다. 모르면 구하지 못하는데, 신구약 성경은 어떤 것인고 하니 신구약 성경은 내게 주실려고 주님이 다 만들어 가지고 손에 들고 있는 게 뭐인가? 내가 무엇을 구해야 될 건가? 구할 것은 신구약 성경을 읽고 듣고 하면은 거게 내가 구할 것들이 다 거게 있습니다. 구할 것을 알아야 내가 구하지요? 또 네가 찾아서 만나야 될 것 만나야 될 것. 무슨 성령의 권능이라든지 진리의 깨달음이라든지 또 내가 무슨 진실이라든지 거룩이라든지 의라든지, 얻어 가지고서 가져야할 것, 그런 것이 다 주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이 가지신, 주님이 만들어 가지고 내게 주실라고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내가 만나야 되겠는데, 그거 만나야 되겠는데 가지고 계시는 것을 내가 만나야 되겠는데 그것도 성경에서 찾아야, 성경에서 찾아 가지고서 실상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찾는 것도 성경에서 찾아 가지고 그것을 실상으로 만들어 내가 가지는 것이라 말이오. 성경에 찾은 것은 주님이 그저 주시요. 은혜로 주시는데, 은혜로 주시는 것을 내가 받기만 하면 되는데 받는 그것은 뭐이냐 하면 하나님이 거게 대한 말씀을 주실 때에 고 말씀을 내가 들어 가지고 고대로 실행하면 고것이 뭐이냐 하면은 믿음인데 실상이 된다 이랬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된다 했어.

그러면, 주님이 내게 주실라고 만들어 가지고 있는 그것도, 그것도 내가 성경에서 찾으면, 그거 찾을 종류를 알고 거게서 찾았는데 내가 찾은 모든 것을 실상으로 만드는 데에는 뭣이면 실상이 됩니까? 내가 성경에서 내게 주실라고 만들어 가지고 있는 주님이 가지고 계시는 것, 만들어 가지고 계시는 것, 또 주님 자체의 것, 만들어 가지고 계시는 것 주님 자체의 것 또 주님이 쓰시는 그 모든 방편 이런 것을 다 우리가 찾아서 만나야 되겠는데 그런 것도 다 주님이 만들어 가지고 내게 주실라고 가지고 있는 건데 그것을 성경에서 우리가 찾아야 됩니다.

성경에서 찾았으면 찾았을 때에 성경에 이렇다, 이런 것을 네가 찾아 가지라, 이런 것을 네가 찾아 가지라 했는데 찾아 가지라 하는 고 말씀을 우리가 깨닫고, 찾아 가지라는 고 말씀을 깨닫고 찾아 가지라 하는 고대로 하면 고만 실상 돼 버립니다. 이거 완전히 공짜배기 중에도 공짜배기 이렇츰 공짜배기가 없습니다.

그러면, 찾는 데에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크게 강령적으로 말하면 사죄에 속한 것이고, 칭의에 속한 것이고, 화친에 속한 것 여게 대한 것을 우리가 만들어 가지고 있습니다. 만들어 가지고 있으니까 그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찾고, 또 우리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는 것도, 그러면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는 데에는 어떤 세계로 들어가는가? 그것도 그 세계를 찾는 데에는 신구약 성경 말씀에서 그 세계를 찾습니다. 신구약 성경 말씀에 보니까 아, 이 세계가 있고 저 세계가 있고 자꾸 이 세계가 있으니까 그 세계를 거게서 찾아 가지고 요 세계에 내가 들어가야 되겠다. 믿음의 세계에 들어가야 되겠다, 진실의 세계에 들어가야 되겠다, 거룩의 세계에 들어가야 되겠다, 확신의 세계에 들어가갸 되겠다, 권능의 세계에 들어가야 되겠다, 모든 것을 내가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세계에 들어가야 되겠다. 모두 다 거게서, 뭐 그거 내나 한가지입니다.

구하는 것이나 찾는 것이나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는 것이나 이 셋이 하나인데, 이 셋이 하나인데 그것의 말하는 각도가 다르다 그말이오. 각도가 달라. 구한 것도 들어가 보면 내나 찾는 그거고 내가 문 두드리고 들어간 그거고 그거라 말이오.

그러면, 그것을 한 말로 말하면 예수님이 가지고 계시는 것 또 예수님의 자체, 예수님의 가지고 계시는 것 예수님의 자체 또 예수님이 이렇게 지금 역사하시는 그 역사 그것이 우리가 다 구하는 것이요, 찾는 것이요,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가야 되는 그런 것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간청도 좋지마는 간청보다도 자기가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이 꾸준한 노력이 더 중요하다, 노력이 중요하다 하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노력이 중요하다 하는 요것도 아까 그 간청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내가 주님에게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데에 우리가 그 꾸준한 노력을 해 가지고 얻게 되는데, 꾸준한 노력을 하는 거, 이 노력을 하는 데에 노력을, 내가 구하고 이렇게 뭐 힘을 쓰는데 뭘로 구하느냐? 우리가 입으로 구할 수 있고, 또 마음으로 구할 수 있고, 자기 행동으로 구할 수 있고, 또 자기의 자체로 구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입으로 구해도 마음 없으면 주님은 마음을 아시기 때문에 입으로 아무리 구해도 그 마음에 없는 걸 구하면은 그거 소용이 없다 말이오. 마음으로 구함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 또 그 사람이 마음으로는 구합니다. 마음으로는 구해도 또 뭘로 구함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까? 예? 녜. 인제 말했지요, 내가. 행동으로 구하지 아니하면 소용이 없어. 그러면, 몇 가지로 구합니까?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소. 몇 가지로 구했소? 저 뒤에 손가락으로 한번 가리켜 봐요. 추워도 손가락 한번 내서 들어 봐요. 녜, 세 가지로 구했지요.

세 가지로 구하는 그것도 좋지마는 하나 또 더 구해야 됩니다. 구하는 건 뭐이냐? 내가 그것을 구하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구하는 사람이 되면은 그것이 제일 힘있습니다. 아, 이분은 내 말만 들을 줄 아시는 분이 아니고, 내 마음만 볼 줄 아시는 분이 아니고, 내 행동만 볼 줄 아시는 분이 아니고 그걸 얻기 위해서 내가 이런 사람되면 밉상스럽게 보여서 안 줄 것이다 내가 이런 사람 돼야 주실 것이다. 내가 구해서 주님이 나에게 주실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그것이 마지막으로, 구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구하는데 그렇게, 말로 구하고 마음으로 구하고 행동으로 구하고 자기 자체로 구하고 이렇게 구하는데, 구하는 데에 내가 그렇게 구하는 방편 구하는 태도, 구하는 방편 구하는 태도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뭐입니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뭐입니까? 진실성? 저 ○○교회 ○조사님. 내가 막 입으로 간청합니다. 주여, 주여 하며 계속 어찌든가 합니다. 또 마음으로 간절히 지금 구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또 자기가 행동적으로도 구하고 있습니다. 또 자기가 자체적으로 구하고 있습니다. 구하는 데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뭐입니까? ○○○목사님, 내나 처음에 말하지 안했어? 그거라. 그게 더 중요해.

내가 아무리 말로 마음으로 행동으로 몸으로 아무리 그래도 내가 구하는 그 자체가, 자체의 그것이 내게 얼마나 필요하며 얼마 중요하며, 거게 대해서 네가 얼마나 그 필요성 중요성을 가지고 그걸 주면은 네가 어떻게 그 보배롭게 여겨서 그것을 저버리지 안하고 중요하게 여겨서 그것을 사용하겠느냐 하는 고게 대해서 가치성, 중요성, 필요성을 가지고 있는 그게 더 중요하다 그말이오.

그것을 강청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안했습니까? 그거 없는 모두 기도를 하기 때문에 소용이 없어. 아까 똑 고집 부리고 트집부리는 그 아이라고 그렇게 비유를 많이 하지 안했어요? 이 아이는 버르지기가 그래. 뭐이든지 아무 소용도 없으면서 이거 뭐 있으면 그거 달라 해 가지고 고만 안 주면 늑장을 칩니다. 늑장을 치요.

그러나 그놈이 그거 달라 하지만 거게 대해서 필요성이나 중요성이나 간절성이나 가치성이나 거게 대해서는 아무것도 없는 놈이 버르지기가 되어 그래. 그러면 어찌 해요? 그건 매를 때려야 될 거라 말이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다가 매 맞는 사람 많습니다.

기도하는데, 이 구하는 데나 강청하는 데는 강청하는 그 제목인 그 자체인 거게 대해서 그 가치성과 필요성과 중요성, 그러니까 자기가 뒤에 가서 그걸 주면은 어떻게 잘 효력 있게 이용을 하겠느냐, 그걸 어떻게 잘 간수하고 그것을 강직하겠느냐 하는 그런 것이 다 그게 가치성이기 때문에 그게 더 중요하다 그말이오. 그래서 꾸준한 노력이 더 중요한 것을 가리켜서 여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그다음에 말씀하시기를 11절에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은 알 대신에 전갈을 줄 자가 있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겠느냐’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자기의 이 일반적인, 흐리멍텅하게 일반적으로 아무 뼈 없는 그 신앙 그까짓 신앙 암만 하는 것보다 강청이 더 낫다 강청이 더 힘있는 그 실상을 이루는 신앙 생활이다.

강청보다도 네가 목표를 두고서 꾸준히 노력을 하는 그것이,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꾸준한 노력이 더 강하다. 일시적으로 막 단식 기도를 한다 무슨 금식 기도를 한다 산기도를 한다 떠들러대는 그것보다도 꾸준히 그 목표를 두고서 구하는 그 꾸준한 노력이 더 효력 있다. 그러면 꾸준한 노력이나 강청이나 그런 거 다 안팎이, 알맹이 있고 껍데기 있다는 고것을 여러분들이 기억을 하십시오.

그러면, 꾸준한 노력보다도 뭐이 효력 있느냐? 네가 하나님과 너와의 관계가, 인연이 맺어져 가지고 있는 인연 그것이 더 크다 그것을 말합니다. ‘아비된 자가 있으면’ 하는 그 말은 이제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 되었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 되었고, 주님은 내 머리 되었고 나는 주님의 몸 되었고 주님의 지체된 이 관계가 다 크다.

그러면 그 관계가 더 큰데 그 관계를 우리가 오늘 아침에 생각할라 했는데 그 관계가 큰 것을 우리가 자꾸 생각해야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피와 살을 먹는 자는 다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린다, 내 피와 살은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라.’ 그 말은 영양이 많고 참 먹어야 될 양식이라 그말이오.

그것은 양식은 무슨 양식이냐? 우리의 신앙 인격의 양식이요, 인격의 양식이요, 의의 양식이요, 사랑의 양식이요, 진실의 양식이요, 환난 때에 그 환난을 참는 참음의 양식이요, 계속의 양식이요, 세상을 이기는 양식이요, 양식인데 그것은 예수님이 대속하신 그 대속을 자꾸 새기고 새기고 자꾸 새기니까 우리 속에 인제 그 힘이 나온다 말이오.

대속을 자꾸 자꾸 새기고 보니까 이렇게 세상이 나한테 와 가지고 달라드니까, 일본 나라가 달라들고 공산주의가 달라드니까 이 세력이 강한데,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으니까 하나님이 나 위해서 사람되셨고, 하나님이 날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부요를 내어 놓으셨고,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지극히 존귀한 영광과 권세를 다 내어 놓으시고 심지어 죽기까지 하셨고, 또 영원히 피조물을 입기까지 하신 이것을, 이거를 자꾸 생각하고 보니까 하나님은 전부, 나를 위해서 예정했고 나를 위해서 창조했고 나를 위해서 섭리했고 이렇게 하나님이 나에게 벌써 들인 것이 많다 말이오. 이래 한 것이 많은데 이제, 내가 나갈 때에 공산주의가 네가 주님의 뜻대로 따라서 믿음 지켜서 나갈라고 하는데 그걸 막는 것이 공산주의가 막는 것이 공산주의의 억억억억만 배도 더 큰 세력이 나와 함께 있는데 그게 문제가 뭐이냐? 이걸 깨닫고 보니까 나중에 호령을 쳤다 말이오. ‘뽕나무야 뽑혀 바다에 심기워라’ 명령하니까 그들이 다 순종한 그말이오. 이것이 신앙의 비밀입니다. 믿는대로 되리라.

물 위로 어데 걸어간 사람이 역사에 있습니까? 역사에 없는데 예수님만 물 위로 걸어왔고 베드로가 물 위로 잠깐 걸어봤습니다. 이렇지마는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라. 이런데 그 명령에 복종해 가지고 걸어가니까 떠뻑떠뻑 걸어갔다 말이오. 걸어가다가 왜 빠졌습니까? 베드로가 발자국 떼 놓는 게 달랐습니까 태도가 달랐습니까? 베드로가 아닙니까? 무슨 배가 없어졌습니까? 아니라 그거요.

믿고 안 믿은 것뿐이라 그말이오. 믿고 안 믿은 거. 믿으니까 됐는데 안 믿으니까 빠졌다 그말이오. 이래서 이번 공과에 믿음이 끊어지면, 연결이 끊어지면 물에 빠진다 하는 그것을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그 베드로를 인용해서 말해 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이 인연을 자꾸 생각하는 그것이 더 중요하다. 네가 무슨 꾸준한 노력보다도, 강청보다도 뭣보다도 네 인간의 노력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과 너와의 그 관계점, 그 관계점을 네가 생각하라. 그 관계점을 생각하는 그것이 더 힘이 있다. 살을 먹으라 하고 피를 먹으라 하는 것은 주님이, 이 피라는 것은 마지막에, 도성 인신하신 것과 마지막에 십자가의 대속의 절정을 가리켜, 끝을, 맨 마지막을 결말을 말하는 것이니까, 결론을 말한 것이니까 그 결론을 자꾸 생각하면은 거게서 또 부활을 이래 생각하고 이래 가지고 하는 그것이 제일 신앙에는 힘이 있다. 그 순교할 수 있는 순교의 능력이, 순교의 실력이 어데서 생겼느냐? 피와 살을 먹는 데서 생겨졌다. 모든 절제가, 죄악을 이기는 것도 의를 행하는 것도 거게서 생겨졌다. 그것은 피와 살은 육신의 양식이 아니고 그것은 우리의 신앙의 인격의, 신앙의 인격의 양식이요 믿음의 양식이요 의의 양식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양식을 먹으라 이랬는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참으로 그 피를 우리가 먹어야 된다고 이래 성찬식 할 때에 그 포도주와 떡이 예수님의 참 피와 살이 됐다고 그렇게 화육설을 말하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우리 진영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말이오.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 게 뭐인지도 모르고 이라니까, 피와 살을 먹으라 하니까 피와 살을 먹는 데 대해서 여게 대해서 그걸 깨닫지 못하고 내가 성만찬에 참여를 해 봤는데 참여해 보니까 피와 살을 먹는 데는 전부 육신의 양식적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 믿음의 양식이라 하는 것은 그것은 발견을 못 하고 말을 못 하더라 그말이오. 암만 들어야 여러분들이 가치와 보배를 모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자라지 않는다 그말이오.

이렇게 인연을 생각하는 것이 더 크다. 그래 내가 인연이라고 말하는 말은 세상이 쓰는 그 인연을 말한 것 아닙니다. 에수님이 나에게 어떻게, 어떻게 하는 그 원인을 가지고 하나님과 나와의 연결된 그말을 쓰기 때문에 나만 독특히 쓰는 그 인연이지 세상이 쓰는 그 인연이라는 그런 말이 아니라 그거요. 이게 제일 중요하다

그런데, 너희들이 하나님에게 향하여 하는 것은, 만일 하나님 아버지에게, 이런 인연을 가졌기 때문에 이 인연을 가지면서 무엇을 구할 때에 그저 너희들이 ‘아, 함부로 하나님께서 입을 열지 말라고 했으니까 구할 때 벌로 구하면 안 되겠다.’ 벌로 구하는 그런 것 걱정하지 말아라. ‘생선을 달라 하면 배암을 주겠느냐’ 그 말은 구할 때에 나쁜 거 주지 않는다는 그것을 판정했습니다. 나쁜 거 주지 않는다 그말이오. 나쁜 거 주지 않는다. 구할 때에 나쁜 거 주지 않는다. 그러면 그다음에 생선 달라 할 때에 생선 줬느냐? 생선 주지 안했습니다. ‘좋은 것을 주지 않겠느냐’ 이랬어.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잘못 기도했다 해서 우리가 화가 될 그런 것을 잘못 기도해도 그 잘못 기도한 것 주지 않습니다.

또 내가 기도하는 반대로 내게 해로울 거 주지 안해. ‘우리 기도에는 하나님이 해로울 것 주시지 않는다’ 고것을 우리가 하나 기억해야 되겠고, 또 ‘내가 어리석어서 잘못 구해도 구한 대로 주시지 않는다’ 고것도 기억해야 되고, ‘그러면 내게 필요하고 좋은 것을 당신이 주신다. 좋은 것으로 주신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구할 때는 그렇다는 것을 그것을 기억을 해야 되고, 또 우리는 모든 것보다 주님과 나와의 인연된 그 인연을 자꾸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 오늘 아침에 증거할라고 하는 게 요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보배가 어데 있느냐? 아까 말하기를 우리의 모든 보배가 다 주님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구할 것 다 주님에게 있고, 우리가 찾을 것 다 주님에게 있고, 우리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갈 것도 다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가 다 하나라. 이런데, 이렇게 하는 것이 이것이 중요한데, 그 모든 것보다도 주님과 나와의 관계가 어찌 되는가 그거 생각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오늘 아침에 증거할라고 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그것을 자꾸 생각해요. 주님은 전능자시다. 나의 주님은 전능자시다. 전능하신 아버지다. 전지하신 아버지다. 영존하신 아버지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이시다.

주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내 모든 것을 책임진 그것을 발표할 때에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하나님이라고 그저 부르는 것은 삼위 일체의 하나님,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삼위 일체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요것이 묘한데 요게 지금 묘해도 요걸 너무 신학자들이 이리이리 멍얼멍얼 하기 때문에 이거 잘못하며 정죄한다고 이래 하기 때문에 이걸 말을 못 해 그렇지 하나님은 한 분뿐이십니다. 하나님은 한 분뿐이라는 걸 기억하십시오. 한 분뿐이시오. 한 분뿐이신데 그분은 본체가 하나뿐입니다.

하나뿐인데 삼위입니다.

그러면 한 분뿐인 그에게 위가 셋인데, 위가 셋인데 위 서이가 다 본체가 다 있습니다. 본체 다 있으나 성부의 본체가 내나 한 분의 본체요 성자의 본체요 성령의 본체요 한 본체요, 한 분뿐이시고 본체는 하나인데 본체 하나 그 속에는 성부 성자 성령의 본체가 다 들어 있습니다. 또 성부의 본체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본체가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다 들어 있을 수 있느냐? 이 세상에 그릇은 큰 그릇은 밖에 있고 작은 그릇은 속에 있는데 작은 그릇 속에 큰 그릇이 어찌 들어갈 수가 있겠느냐, 이렇게 사람들이 생각하는 요것이 요 짤막한 요거 이 현상 세계에 요것을 보고서 알기 때문에 요것 가지고서 이 물질계 이것을 초월한 그 사실을 이 제한된 이거 가지고서 이거와 같으냐 저거와 같으냐 하니까 맞지 않는다는 것이지 하나님은 한 분뿐입니다. 두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오.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오. 본체도 하나입니다. 요것이 지금 아직까지 통과가 못 돼 가지고 있는 이 세대입니다.

그러기에 삼위라, 위라 하는 것은 그 격위를 말하는 건데 위에는 반드시 지위가 따른 것이고 위에 대해서는 책임과 의무와 사무가 따라 있는 것을 가리켜서 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여게서, 하나님이라는 말이나 주님이라는 말이나 주님 해도 삼위가 다 들었고, 성령님 해도 성령님 속에 성부 성자가 다 들었고, 이제 성자님 해도 성자 속에 성부 성령이 다 들었습니다. 삼위 일체의 위는 서이인데 일체, 본체는 하나라 그것을 우리가 알면 되는데 지금 이것이 세계에 논란입니다. 위가 셋인데 본체도 셋이라. 본체가 셋인데 본체가 하나라 말입니다. 그걸 몰라. 본체가 셋인데, 본체는 하나라는 걸 그걸 모르고 있어. 이래 가지고 어떤 신학교에서는 본체가 하나라. 본체 셋이 한 본체 속에 들었다 이라고, 본체 셋은 따로 있다. 이 따로 있으면 결국 하나님이 셋이라는 그래 하나님으로 결론이 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논리로 나가다가 끝까지 나가지를 못하고 중간에 끊어졌기 때문에 이 혼돈돼 가지고 있다 그말이오.

그런고로, 우리는 신앙 생활에 제일 중요한 것이 주님과 나와의 이 대속의 역사 이 사실을 생각하는 것이 제일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님 공부를 자꾸해요. 내 아버지는 전능하신 아버지, 전지하신 아버지, 자꾸 이래 가지고 우리 신경에도 배고 정신에도 배고 관념에도 배고 이성에도 배고 지식에도 배고 가뜩이 배서 이제 나의 아버지는 전능하신 아버지라. 내가 전능하신 아버지의 보호, 아버지의 품 안에 있다. 주님 안에 있다. 우리가 주 안에 있지 않습니까? 주 안에 있는데, 주 안에 있는데 그러면 어떤 분 안에 있느냐? 요걸 좀 기억하라 말이오. 어떤 분 안에 있느냐? 이러면 자꾸 그래 가지고 해서 이게 꽉 배었니까, 그러면 확실히 닥쳐도 그까짓 게 문제가 없다 말이오.

이러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아들된 것이 제일 중요하다. 그런데 그분에게 모든 것을 구할 때에 네가 염려하지 말아라. 잘못 구해도 잘못 구한 것은 다 하나님께서 삭제하시고 잘못 구한 것을 좋은 것으로 주신다. 또 네 구한 대로 주지도 않는다. 또 나쁜 거 주지도 않는다. 좋은 것을 너에게주신다.

그러니까, 우리의 기도는 어떤 기도든지 자꾸 기도만 하면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 하는 걸 깨닫고 자꾸 기도만 하면은 점점 효력이 나게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데, 구하는 자에게는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면 좋은 게 뭐인가? 좋은 것은 성령입니다. 성령님만 오시면 우리에게 다 돼. 성령님이 오시면 무한하신, 이 부요하신 하나님의 모든 것이 내것이라는 것을 성령님이 오시면 알고, 그러면 알 뿐 아니라 그 무한한 것을 내것을 만들도록 다 성령이 해 주시니까 성령 외에 구할 것이 뭐이 있습니까? 성령님 외에 구할 것이 없다 그거요.

깨닫고, 진실한 신앙이라야 되지 요거 실천에 옮기지 안하는 그런 껍데기 신앙이기 때문에 우리 진영의 교회가 부흥이 안 돼. 우리 진영 지금 교역자들이 다 게을러 빠졌습니다. 진리를 몰라. 이거는 입술로만 들어서 앵무새 모양으로 이래 녹음기지 그게 목사인가? 목사 아니야! 녹음기지! 목사 아니라! 녹음기라! 권능이 없어! 역사가 없어! 녹음기 테이프라, 녹음기. 이게 뭐이냐? 진실이 없기 때문에 그래. 듣는 자가 복이 있고 읽는 자가 복이 있고 지켜 행하는 자가 복이 있는데, 행할라고 하지 않기 때문에 진리를 깨닫지를 못해. 행할라고 안 하는 자가 암만 행하는 방법을 말해 봐야 그 방법은 듣기 싫고 도무지 들리지를 않는다 말이오. 이래 가지고는 헛일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하나라도 행하십시오. 저는 요번에 집회 가는 사람들한테 와서 물으면 내가 말하는 말이 그말이오. 네가 말 구경시키지 말고 한 마디라도 전해 가지고 실행을 시켜 놓고 오너라. 그 외에 딴거 없어. 이러니까 그 마음을 가지고 가 가지고 갔다 왔는데 보니까 전부 대부흥사라. 대부흥사인데 다른 사람에게는 전했지마는 제가 가지지는 못해 게을러. 내가 볼 때 이 교회가 부흥되느냐? 부흥되는 거, 우리 교회는, 우리 진영에는 진리가 없어 부흥 못 하지 않습니다. 설교 못 해 부흥하지 못하는 거 아니라 열심이 없고 충성이 없어서 부흥 안 돼요. 그것만 있으면 다 부흥 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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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0 열매를 맺을 때/ 요한복음 15장 1절-8절/ 890624토새 선지자 2015.12.07
679 열매를 맺을 때/ 요한복음 15장 5절/ 890708토새 선지자 2015.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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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7 열여섯 가지 구속에 대해서 깨달을 것/ 베드로후서 1장 4절/ 871025주새 선지자 2015.12.07
676 열여섯 가지 구원에서 나온 기쁨/ 빌립보서 4장 4절-7절/ 871216수새 선지자 2015.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