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도와 강도가 되지 말라

 

1981. 1. 31. 새벽 (토)

 

본문:요한복음 10장 16절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기도> 영원 자존하신 주께서 주님의 홀로의 사랑과 기쁨과 온전하신 뜻으로 정하신 이  목적을 위하여 예정하시고 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주님이 친히 사람되어  대속하사 우리의 구원의 공로를 설정하시고 진리와 성령으로 이 공로를 우리에게  효력 있게 역사하셔서 구원을 이루어 주시는 주님, 이는 모두가 다 완전자이신  무한한 자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구원이요 이루어 놓은 것들이요 또  무한한 것이오매 주님의 홀로의 능력과 은총이 아니면 이 구원은 호리도  불가능한 구원인 것을 저들이 확실히 압니다.

이 구원의 역사인 성령을 성령의 감동이 아니면 어떻게 저들이 알며 접하며, 또  무한한 진리를 이 진리에게 지음받은 저희들이 어떻게 이 진리를 스스로 알 수  있겠습니까? 이는 다 아버지의 성령님으로만 가능함을 확신합니다.

이 시간도 성령님으로 우리들을 감화 감동시켜 주사 깨달을 대로 깨닫게 하시고,  또 원할 대로 원하게 하시게 하시고, 이룰 대로 이루도록 순전히 아버지의  성령님의 은사로 역사하여 은혜로 이루어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곳마다 함께 하시고 우리의 원수인 절도와 강도를 밝히  깨닫고 이에게 동반하는 어리석음을 다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시고 대적하여  믿음으로 이길 수 있는 저희들이 되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우리에 들지 아니한 양들이 있다” 이렇게,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다. 이 양들을 다 구출해야 된다. 그런데 이 양들이 다 나와서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내게 있다 하는 이 내게라는 분은 예수님 당신을 가리켜서 내게라 이렇게  했습니다. 또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하는 이도 역사와 세계의 교회가 단일  교회로 이루어질 것을 가리켜서 말씀합니다. 한 목자에게라는 것은 한 교회, 한  교회, 단일 교회, 아담으로부터 예수님 재림 때까지의 모든 믿는 사람이 다 한  교회, 또 동시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 한 교회 될 것을 가리켜서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이렇게 말씀을 했고, 또 “우리에 들지 아니한 양들이 있다” 하는 이 말씀은 하나님 앞에 구원받기로  택한 모든 사람들을 다 가리켜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은 지금 예수 믿기 시작하는 이것이 근원이 아니고 우리의 근원은  하나님이 목적을 정하실 그때부터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의지 속에서  시발됐습니다. 그러면 이 목적은 하나님의 자존하심에서 근원이 된 구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만 이런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그 전체를 당신이 예정하셔 가지고  모든 것이 되어 있으니까 그 개체도 예정된 것은 분명합니다. 개체도 예정된  것은 분명합니다. 이러기에 우리를 통해서 구원받을 자도 벌써 예정이 되어 있고  또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누구 누구를 통해서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그것이 다  정하여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예정을 떠나서, 하나님의 목적에서부터 오는 이 구원의 근원을 떠나서  우리가 현재에 이렇게 하면 이리 되고 저렇게 하면 저리 되고 하는 그런, 이것이  시발이요 원인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이런 뿌럭지 없는 구원관을 가지기가  쉽습니다. 그것을 기억을 하고, 좀 다 어려운 말입니다.

또 3절에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문으로 들어오도록, 이 말은  ‘목자가 되도록’ 하는 말입니다, 목자가 되도록. 문지기가 문을 열어 주니까  들어올 수 있지요. 문으로 들어온 자는 목자가 되지요. 이러니까 목자가 되려고  하는 자, 문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자는 문지기의 도움으로 문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목자가 됩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예수님으로 인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려고  하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성령님과 진리가 우리의 구원에 보증자입니다.

책임을 맡았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인하여 사는 것 아닙니다. 진리로 인하여  사는 것 아닙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인하여 사는 것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성령으로 삽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진리로 삽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죄로 살고, 칭의로 살고, 새생명으로 사는 이것이  목자입니다.

본인이 이렇게 살려고 애를 쓸 때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입어서 이렇게 돼지고  이렇게 살지 아니하고 절도와 강도로 살려고 할 때에 절도와 강도가 됩니다.

절도 강도는 자기 속에 자기 아닌 옛사람 그놈이 제일 강한 절도요 강도요, 속에  들어 있는 절도요 강도요,  또 자기 밖에 “나보다 먼저 온 자는 절도요 강도라”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구속이 있기 전, 타락으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이 있기 전  세상에 있는 것이 다 절도요 강도요,  또 창세기 3장 15절에 선포한 약속이 있기 전 배암과 여인과 아담은 다 절도와  강도에게 삼켜져서 죽은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한 것은 다 절도요 강도라는 요것을  우리가, 요것이 기독교의 근원을 갈라놓는 것인데 이 근원을 혼탁해 버렸기  때문에 종교 통일이 됩니다. 이것 혼탁되면, 이것 구별하지 안하면 기독교나  불교나 문선명이나 같지 다를 게 뭐 있겠소? 사람들은 땅위에서 수가 많아지는 그것을 사람들은 크게 여기지 성경을 근거로  하지를 아니합니다. 성경을 근거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으로 근거하지 안하고  눈에 보이는 이것을 근거로 삼습니다.

이번에도 보니까 전 대통령이 이렇게 초청받아 가는 여기에는 문선명이의 역사가  큽니다. 거기 문선명이가 짜놓은 그 멤바가 많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오지 안했으면 절도요 강도입니다.

오늘의 현재에 기독교나 그나 똑 같으니까, 큰 자는 작은 자를 삼킵니다.

기독교의 근본 종자를 떠날진대는 이 기독교나 저 기독교나 공산주의나 꼭  같습니다. 기독교 유물주의, 기독교 무신론주의, 기독교 현실주의, 현재 보이는  이것만이 기독교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면 꼭 같습니다. 그러기에 요 절도요  강도요 목자라는 요것을 단단히 기억해야 됩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양은 요것은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새사람을 말합니다. 새사람. ‘양은 그의 음성을 듣는다’ 중생된 새사람은 양의  우리에 문으로 통과한 이 목자의 말을 듣지 절도요 강도의 말은 안 듣습니다.

절도와 강도의 말은 누가 듣는고 하니 절도와 강도가 듣습니다. 몸 밖에 있는  절도와 강도와 자기 몸 안에 있는 절도와 강도와 하나입니다.

이러기에 교회는 절도 강도 운동이 있고 목자와 양 운동이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천하를 휩쓰는 교회를 막 통일을 시켜도 절도 강도를 길러놨으면 절도  강도가 모였으면 이는 받을 심판만 크지 구원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옛사람을 지금 기르고 있는지 옛사람을 주 모으고 있는지? 내가 목회하는  이 목회에는 옛사람 단합이고 옛사람 운동인지 그것을 이 성경에 맞보기를  가지고서 진리의 안경을 가지고 보면 환하게 보여지는데 사람은 절도 강도의  색경을 썼기 때문에 모두가 다 그대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판을 보고 살지 심판과 무궁세계가 없이 일시만 살진대야 예수 믿을  필요가 뭐 있소? 하필 예수 믿는다는 이걸 가지고서 사기 협잡 횡령을 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받을 심판이 큰데. 택한 자는 하늘나라 가기는 가는데 받을 심판이  심히 클 것인데.

차라리 예수 안 믿는 척하고 돌아다니면 그 사람의 하는 행동으로 다른 사람이  망하지는 안하겠습니다. 절도 강도 노릇은 안 하겠어. 절도 강도는 목자의  위치를 가지면 절도 강도입니다.

목자 위치, 목자인 줄 알지만 절도요 강도라. ‘이것 목자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스승된 자는 받을 심판이 더 크다” 요렇게  말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절도 강도를 누가 단속해 주겠소? 먼저 자기가 단속해야 하나님도  단속해 주고 신앙 선배도 동지도 단속해 줄 수 있습니다. 본인이 이것을 원수로  삼지 아니하고 절도 강도가 돼 가지고 있는데 절도 강도 그것은 죽여야 되는데  절도 강도를 그것을 어떻게 그게 주체가 돼 가지고 있으면 거기에 대해서 말해  봐야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공적으로 외칠 수밖에 없지 개적으로 말해 주지를  안합니다. 개가 진주를 밟고 물러 달라드는, 도야지와 개 같기 때문에.

여기에 더 무서운 말이 있습니다.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의 이름을, “자기 양” 자기 양이라는  이 자기가  누굽니까? 예수님입니까 예수님에 속한 목자들입니까? 이 자기가 누굽니까?  자기가 누구요? 예수님으로 아는 분들 손 한번 들어봅시다. 네, 아닙니다.

예수님 아닙니다. 곧 오늘에 목자들입니다.

“자기 양” 예수님이 이 우리에 들지 안한 양이 영원 전 예정한 그 숫자가 있는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의 반렬로 구원 얻을 자가 영원 전 약속되어 가지고 예정돼  있습니다. “자기 양”“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가 목자가 돼야 자기에게 속한 양을 인도할 수가 있지 자기가 목자가 되지  안하면 자기 예배당에 온 자기 양도 자기에게 속하지 않습니다. 속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을 멸망에서 구출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에 4절에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그러면 자기 양을 다 인도하는데, 자기로 통해서 구원 얻을  자는 하나도 남김없이 다 구원할 수가 있는데 그러면 자기 양이 동시대에만  있습니까? 아니오. 자기 죽은 지 수천 년 후에도 있습니다. 자기 양은 동시대만  있는 것 아닙니다. 자기 양은 그러면 자기 있는 그 지역에만 있습니까? 아니오.

동양에 있는데 서양에도 있소.

자기로 통하여 구원 얻을 자를 그 사람이 어데 있는지도 모르고, 어느 시대에  있는지도 모르고, 자기와 평생 만나보지도 못하고, 평생 소식도 듣지 못하는데  자기에게 속한 양을 어떻게 구출하겠느냐? 제가 목자가 되면 자기에게 속한 양에  대해서 자기 할 일 다 한다 그말입니다. 자기 직분을 다 한다는 것이오.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릅니다. “자기 양의 이름을 다 불러내느니라” 그러고 “앞서 가면 따라오느니라” 저 하나만 완성시키고 나면 그 다음이  되느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보증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  아브라함은 자기 양을 다 불러냈어. 자기로서는 자기 양 구원할 직분을 다 했어.

이러기 때문에 우리보다 수천 년 전에 있는 아브라함을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증거해 줬습니다.

우리가 다 이런 원인과 관련이 있는 이 무궁세계를 향하여 가고 있는데 일시  눈가림으로써 제 마음 좋도록, 일시 무슨 돈 유익 권세 유익, 일시 자기 형편  유익하는 요런 껍데기로 발라 맞추는 이것은 벌써 원시가 없기 때문에 성령이 그  속에 없다는 증거입니다. 믿는 사람은 이걸 보고 사는 게 아닙니다. 무궁을 보고  사는 것이오. 세계가 다 합하면 뭣할 것이요? 자기 좋은 대로 자기 마음대로 한 그들의 아들들이 다 내피림됐고 용사됐고  유명한 사람들됐지마는 하나님의 심판이 올 때는 다 전멸되지 안했습니까? 전멸  속에 들어 있는 것 숫자가 많으면 뭣할 것이며 적으면 뭣할 것입니까? 적어도  노아의 그 여덟 식구 그것이 승리지.

자기 뜻대로, 자기 마음에 원하는 대로, 자기 좋아하는 대로, 자기 좋아하는  대로 하는 것이 일시에 성공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심판이 오기까지지.

하나님 심판이 올 때에 전멸 다 했고.

자기 좋은 대로 하지 안하고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  인도대로 하는 것이 일시는 아무재미 없었어. 그러나 하나님의 지시대로 받은  그게 뭐이냐? 하나님의 심판을 면케 하는 그 준비입니다. 심판을 면케 한  준비요. 하나님께서 심판하고 보응을 시킬 때에는, 암만 노아가 제가 많이  벌어봤자 우주를 다 제것 만들었겠소? 누구한테 돈 주고 샀겠소? 이 우주는 다  노아의 것으로 상속됐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보응을 바라는 것이요 우리가 자기  좋은 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에 못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워서 제 좋은 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일이 일시에 아무런 효력이나 재미가 없어도 하는 것은 뭐이냐?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다음의 보응이 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오되” “따라오되” 이러니까 아브라함의 우리가 은혜를 받고 아벨의  은혜를 우리가 받습니다.

가인을 대적합니다. 지금도 우리가 가인으로 더불어 싸우고 있습니다. 아벨을  영접합니다.

우리의 구원의 근원이 영원 전이오. 앞으로 영원 후요. 이것을 현재라는 짧은  토막에 결정을 지우는 이 현실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지금 돈을 보고 살며, 임시  대책으로 임시 변통을 보고 살며, 임시 유리한 이것을 보고 살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다 소경이요, 근시자요, 원시치 못하는 자들이오.

“다 내어놓은 후에” 이러면 자기에게 속한 양떼에게 대한 직책을 다 했다  그말입니다. 양의 목자가 되면, 자기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는 자, 예수님으로  인한 자, 자기가 예수님의 것이 된 자, 예수님으로 자기의 전부를 삼은 자  요자가 되면 자기에게 소속한 양떼는 동양에 있는데 서양에 있든지 몇 천 년  후에 있는 자이든지 그자에게 대한 목자의 직책은 다 하게 됐다 그말이오. 다  불러냈다 말은 목자의 직책을 다 했다 그말이오.

“앞서 가면” “앞서 가면” 자기만 목자의 걸음을 걸으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자기에게 소속한 양들은 자기의 음성을 아는고로, 목자의  음성을 알아. 이는 누가 일해 주요? 성령님이 이 일을 해 주십니다.

지금 보면 지내치지마는 ‘칼빈주의 칼빈주의’ 칼빈주의 해 가지고서 칼빈을  따르는 사람 많습니다. 이것도 이런 종류와 한가지입니다. 알든지 모르든지, 그  사람을 몰라도 진리와 영감 내나, 그가 진리와 영감대로 산 것, 그가 사죄로  살고 칭의로 살고 하나님의 동행으로 산 것, 그가 성령과 물과 피로 산 그것을  내나 그 다음에 자기에게 속한 자도 그대로 살아서 계대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직책을 다 하고 갈 것뿐이오. 이다음에 어찌 되느냐? 상관없어. 자기 당대만  자기만 바로 살고 가면은 그 다음에는 자기 직책은 다 했어.

단일 교회 그리스도의 몸을 만드는 일에 자기는 아무런 방해하지 안했어. 자기  직책을 다 했어. 눈이 병신이라 온 몸이 병신되게 한 것 없어. 눈은 눈 노릇 다  했고 귀는 귀노릇 다 했다 그거요.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타인은 뭣입니까? 이것 절도요 강도입니다.

절도 강도에게는 양은 안 따릅니다. 택한 자는 따르지 아니하고 중생된 자는  따르지 아니합니다. 누구만 따릅니까? 절도와 강도들만 따릅니다.

“네 친구는 저주와 음부이리라” 음부. 멸망 그것만 우르르 모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 동안 목회하고 나면은 거기에서 중생된 자는 그와 대립입니다.

 중생된 새사람은 대립됩니다. 옛사람만 뚤뚤 뭉쳐 가지고서 옛사람 뭉텅이로  모으지마는 “양은 따르지 안하고 달아나느니라” 새사람은 대립이 되고  “달아나느니라” ‘아이구, 여기 있으면 안 되겠다.’  하나님도 딴데로 보냅니다. 또 저도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이리 저리 끌어  가지고서 딴데로 갑니다.

이러니까 얼마 지나고 나니 순전히 저도 옛사람, 따르는 것도 옛사람, 새사람은  중생된 자는 새사람은 속에 처박혀 가지고서 꼼짝 못하고 있고 한숨 탄식뿐이오.

따라와도.

이러니까 영의 생활은 하나도 안 되고 육덩이 생활로 이래 가지고서 팍팍팍 하는  것이 이것이 뭐이냐? 이것이 타락한 교회요 속화된 교회입니다.

그러기에 ‘나를 좋아한다’ 나 좋아하면 좋아하는 그게 “우리 중 하나와 같이  선악을 구별한다. 선악을 구별하는 게 우리 중 하나 같다.” 하나님이 하나님  중심으로 선악을 구별하는데 인간이 제 중심으로 선악을 구별하니까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면 나를 따르는 자가?’ 여러가지를 봐서 자기가 알아야 됩니다. ‘보자,  나를 따르는 자, 나를 따르는 자 이것이 절도와 강도를 좋아하는 자냐 목자를  좋아하는 자냐? 이것 따르는 것이 정말로 양이냐 내나 새끼 절도 새끼 강도냐?’  이것 살펴보면 알지. 왜 모른다 말이요? 핑계 못 합니다. 얼마든지 알 수가  있습니다. 환하게 보여집니다.

‘나를 지금 싫어하고 대립되는 이것이 정말로 이것이 절도 강도 새끼냐 양  새끼냐? 양 새끼라서 이러냐 절도 강도 새끼라 이러냐?’ 안다 그거요.

심판이요, 바로. 그 사심판을 무시하면은 이다음에 그리스도의 심판에 가 가지고  저는 심판받아야 됩니다. 공심판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면제했지마는 그리스도  심판 앞에서는 자기의 행한 대로 다 갚음을 받습니다.

“도망하느니라 예수께서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이 다시 말해 줍니다.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는 예수님의  말씀이 ‘진실’ 말하나 안 하나 다 진실이지 진실 아니라 말이요? 이것 당신의  말씀이 진실이라고 강조하기 위해서 ‘진실로 진실로’ 말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이 복음을 듣는 우리가 거짓되기 때문에 우리의 거짓을 벗기는 역사입니다.

너희들이 이 말씀을 좀 더 진실되게 들어라 진실되게 들어라 하는 말씀이오.

당신의 말씀은 ‘진실로 진실로’ 말하는 말씀이나 이 말씀 없이 하는 말씀이나  다 진실이요 불변이요 영원이요 진리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은 우리가 이 말씀을 진실되게 듣지 못하기가 쉽고  진실되게 듣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 말씀을 붙인 것입니다.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는 양의 문이라” 구원의 문이라.

내가 구원이라. 나를 통해야 구원이 되지 나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 나를  통해야 구원이 있다.

나를 통하다니? 뭣인데? 나로 말미암은 것이 있다. 나로 말미암아 너거에게 간  것이 있다. 나로 말미암은 그게 있다. 나로 말미암은 그것이라야 산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가면 너희들에게 보혜사를  보내리니 그가 내것을 가지고 증거하리라. 그가 진리 안으로 인도하리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은 성령과 진리입니다. 성경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았소.

성경 전체가 예수님을 가르치고 있어. 성경은 예수님이 중심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중심이십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 “성령, 물, 피 이 셋이 너희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해  주나니 이 셋은 곧 하나라.” 요한일서에 말씀했습니다.

“나는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네게 선입적 관념이나  기존 지식이나 인간의 것, 개인으로 말하면 중생되기 전에 자기에게 있던 모든  인간 그거는 죽여야 될 절도 강도 그놈이 지금 호주가 되고 주장이 돼 가지고  있어.

타락한 이 세상에는 벌써 창세기 3장 15절 있기 전에 절도 강도 배암 하와  아담이 먼저 있었어. 그후에도 예수님의 복음이 나오기 전에 그것이 먼저  나왔어. 예수님의 대속보다 먼저.

“절도요 강도라” 네게 주관이 절도요, 기존 지식들이 절도요, 그러기에 이  세상에 문화를 배우고, 과학을 배우고, 예수라는 이름을 붙인 모든 참람된 모든  기독교의 지식을 배운다는 것이 그것이 뭐이냐? 절도를 영접해서 절도화되는 자  있고, 외국에 유학을 가고 신학을 감으로 절도화되는 자가 백의 구십구는  됩니다. 절도를 알려고 가는 자가 적다 말이오. 그것 가지고 인간을 구원할 줄  알고, ‘인간이 이것 이것 가지고서 하나님 대신 했구나. 나는 이것 가지고 하나님  대신하지 않겠다. 이것 가지고 인간을 구원하려고 하는구나. 나는 이것으로 나는  구원하려 하는 이것을 뽑으려고 한다.’ 오늘에 신학이라는 그것이 그것을 뽑기  위해서 인간들이 어느 구덩이에서 죽으며, 죽느냐?  이걸 내가 알아야 내가 그 구덩이에 빠져 죽지 안하지. 그 구덩이 빠지지  못하게 하지. 하는 게 아니라 그것 가지고 인간을 구원하리라고 생각하니 벌써  절도와 강도에게 삼켜져 절도와 강도의 종이 됐습니다. 새끼 절도 강도가 됐어.

우리가 눈을 떠야 합니다. 기독교는 껍데기가 아니오. 온 세상을 정죄하고  영생하는 깨끗하고 깨끗하고 온전한 것입니다.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중생된 자는 다 그들을 따르지  안했습니다. 중생된 자는, 산 영은 따르지를 안해. 그러기 때문에 기본구원만  얻은 자들이 많아. 건설구원을 이루지 못한 자들이 많이 있어.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이 외에는  구원이 없어.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나로 말미암다니? 나로 말미암은 게  뭣입니까?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은 성령과 물과 피뿐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성령 생활을 하려고, 성령 생활 하려고, 진리 생활  하려고, 사죄 생활 하려고, 의의 생활 하려고, 화친의 하나님과 부자의  하나님과의 결합의 생활 하려고 하면 구원 된다. 이 외에는 되는 길이 없어. 이  외에는 구원되는 길이 없어.

세계에 많은 무리들을 움직이면 구원이 되는 줄 압니까? 이는, 여기에 공연히  문선명이를 정죄하고 뭐 어떻게 한다 어떻게 한다 하지만 참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것입니다. 큰 도적한테는 작은 도적은 새끼 도적은  거기에 매이기 마련입니다.

그가 세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한국에 지금 총회 뭐 합동측 뭐 고신측 무슨 측  하는 그보다도 세상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범위가 훨씬 넓습니다. 훨씬 넓고 훨씬  큽니다.

자기도 모르게 벌써 매수돼 들어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도 그가 들면 안  되니까 ‘너 안 나올래?’ `아이고, 나가겠는데 좀 가만 있으이소. 차차  나가겠습니다.’ 벌써 코 꿰인 목사가 몇 천 명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의 단점이  벌써 잡혀져서 고삐가 잡혀서 꼬 꿴 목사가 몇 천 명이 되는지 모릅니다. 벌써  돈에 매수당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왜? 그거야 하나님께서 하시지.

새끼는 에미를 따르는 것이 마련이지. 큰 자는 작은 자를 삼키는 것이 마련이지.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이것 외에는  없어. 그거야 세상에 숫자보고 따라가는 사람이야 그것은 큰 숫자를 대숫자를  따라가지 뭣 때문에? 엊저녁에 내가 잠깐 테레비를 봤는데 거기에 합창대니 모두  다 환영하는 데에 거기에 다른 말은 아무도 없는데 전 대통령 말 나오고  문선명이 말은 나옵디다. 통일 교회 통일 교회 모두 지금 준비가 크다고 여기  있다고 모두 다 그러니까 통일 교회 색채라. 다 거기에서 지금 움직이고 있는  것이 그 안에 꽉 섞여 있어. 뭐인지? 세상에서 유명한 것은 하늘나라 유명하지 안해. 아브라함이 그 당시 유명하지  안했어. 노아가 유명하지 안했어. 하나님과의 결합만 가까이 됐고 하나됐지.

누가 노아를 알아줬습니까? 껍데기 그까짓 것 아무 소용없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은 성령이라. 성령님으로 살려고,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사죄 받았으니 무죄로 살려고, 칭의 받았으니 의로 살려고,  하나님과 결합됐으니 이제는 하나님 버려두지 안하고 하나님과 살려고, 이러니까 노력이 자신은 하나님의 것이 되려는 그 노력이 일생 노력이요,  하나님으로 자기의 전부를 삼으려는 것이 일생 노력이오. 자기에게 있는  무엇이든지 이것을 위해서, 또 주님이 원하시는 인간 구원을 위해서, 이렇게 할  때에 구원된다 이랬어. 이렇게 할 때에 구원된다 이랬어.

공연히 목회하면서 사람이나 끌어들여서 사람이나 인도해 가지고서 현상 유지나  해서 밥이나 먹고 지낼진대야 도적질하는 것이나 그것이나 꼭 같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두고 도적질하는 것은 받을 심판이 더 큽니다.

이러기 때문에 나면서 앉은뱅이 된 것을 메다놓고 구걸해 가지고서 앉은뱅이  팔아 가지고서 이제 구걸해 가지고 유지하는 그것이 현재 교회들을 가리켜서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앉은뱅이 팔아먹기 때문에 앉은뱅이보다 더한 자들이오.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양식을 얻으리라. 다른  데서는 양식 얻는 법이 없어. 믿는 사람이 딴데서는 힘을 얻을 데가 없어. 힘을  얻을 데가 없어. 능력을 얻을 데가 없어. 다른 데서는 자라는 요소를 얻을 데가  없어.

양식을 먹어야 힘이 나지? 양식을 먹어야 윤기가 나지? 양식을 먹어야 커지지?  그런데 양식은 어데서 나오느냐? 나로 말미암는 거기에서만 나온다. 영감대로  살려고 하는 거기에서만 나온다. 영감 받으려고 하는 데는 거기에서만 나온다.

성경대로 살려고, 성경 깨달으려고, 죄 안지으려고, 죄로 더불어 대적하려고,  의를 뺏기지 안하려고, 의를 건설하려고, 지속하려고, 하나님을 배반치  안하려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하나되려고 하는 거기에서만 양식 얻는다.

거기에서만 힘 얻는다.

이런 것 저런 것 다 보고 여기에 가서 뿌스러기 줍고 저기 가서 뿌스러기 줍고  ‘진리는 이 개교회로 나가는 데 여기에 진리가 있다. 진리는 여기 개교회서  배우고 불은 딴데 가서 불파에 가서 불을 받아야 된다. 불 받고 진리 받아야  된다.’ 진리 외에 불이 있는가? 진리와 성령은 동행인데. 그러는 사람들은 벌써  그때는 살려고 하더니마는 다 세상으로 다 가 버렸습니다. 다 가 버렸어.

명예주의, 영광주의, 지상 현실주의, 가견주의로 다 도망쳐 버리고 말았어.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뿐이요”  그것 외에는 없어.

그러기에 기독자의 구원은 순전히 하늘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요소요 종류요 힘이요. 인간들에게서 솟아온 것 없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인간에게 있는 것은 변화시킨 것뿐이오. 죽을 것이 산 것으로 살아나는 것.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케 하려는 것이라” 누가? 내가  온 것 누구? 예수님인데 목자. 목자가 온 것은. 목자는 생명을 얻고 더 충만케  한다. 예수님의 목적이 뭐입니까? 예수님의 목적은 생명을 얻고 더 충만케 한다.

생명이 뭐인데? 생명은 하나님과 결합이 생명이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뭐이냐?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하나님과 원수된 자를 하나님과 결합시키고 더  결합이 견고해지고 점점 가까워지려는 이것 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예수님이 원하시고 노력하는 것은 내가 차차 주의 것이  되는 것, 이제는 내 전신을 내가 하나도 꼼짝 못하고 주님이 당신 뜻대로 하는  당신의 지체되는 것, 내가 당신의 것이 되는 것, 내 생명이 당신의 것 되는 게  아니라 내 생명도 내라는 나, 내라는 나,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나, 영육으로  된 나, 내가 하나님의 것 되는 데에 비용으로 이용물로 쓰기 위해서 내 소유도  몸도 생명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수님을 내 전부로 삼기 위해서. 예수님이, 예수님이 내 돈도 되고,  지위도 되고, 권세도 되고, 지식도 되고, 능력도 되고, 예수님 외에는 필요가  없어. 예수님으로 내 전부를 삼는 이것 마련하기 위해서 내 소유도 몸도 시간도  생명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가 되고 나는 주의 것 되면 이제 주의 일이 내 일이라. 주의  양이 내 양이라. 그러면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려. 목숨을 위해서 그것 또 모든  소유가 쓰여져.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그러면 예수님은, 한 분을 말합니까? 예수님도  목자요. 문으로 통과한 그것도 예수 안에 있는 목자요. 이 목자 큰 목자 안에  들어 있는 목자요. 이 목자 안에 들어 있는 목자요. 선지 사도들은 목자 안에 든  목자요.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라는 목자밖에는 보이지 안해. 그 속에 있어. 내가 너희  안에 있고 너희가 네 안에 있고. 문으로 통과한 목자들은 예수 안에 있는  목자라. 예수라는 이것 목자가 생명을 얻게 하는데 문으로 통과한 그 목자들도  생명을 얻고 더 얻게 하려는 것 이것만이 목자들의 사명이라.

11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려두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이 말씀이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데 목숨은 최종을 말합니다, 최종을. 양을  위해서 자기의 소유가 양을 위해서 다 쓰여지는 것이 되고, 자기의 몸이 양을  위해 쓰여지는 것이 되고,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노는 것도 자는 것도 전체가  양을 위하는 것이 되어지고, 최종으로 목숨도 양을 위하는 것이 되어진다.

요것이 자기 성공입니다. 요게 목자의 성공이오. 하늘나라의 바라보는 것은 이것  때문에 바라보는 것이오. 이게 성공입니다.

테레비 보는 사람 다 각각 다를 것이오. 전 대통령이 이와같이 지금 미국에서  환영을 하고 이러니까, 그 사람이 여기에서 한 일이 있기 때문에 환영을 하지.

그런 데에서는 이다음에 하늘나라에 환영에 한 자연계시입니다. 하나 보여주고  있는 것이오. 그러기 때문에 동시에 뭘 보지마는 보는 각도가 다릅니다.

그럴 때에 갔는데 재미교포들이 뒤에서, 그것 다 **지도 못할 것이고. ‘저놈  죽이라. 저놈 어째라.’ 했으면 꼴 나지. 갔는데 누가 와야? 왔는지 안 왔는지  돌아봐야지? 꼴 나지. 모두 다 환영을 하고 좋아하고 이러니까 영광이지.

누가 ‘아따 참 그것 보니까 영광 대단합디다.’ 말하는데 그 사람이 그 말을  하는 것이 비웃는 말이 아니고 보고 놀라는 말인데 놀라는 말이 그것 보고  놀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들으니까 이다음에 하늘나라에서 영접하는 그 영광이  어떠할꼬 하는 것을 그 마음에 느끼고 하는 말을 나는 들었습니다. 보는 것이  각각 달라. 우리가 오늘 죽을지 끝날지 모릅니다. 그걸 바라고 삽니다. 이  세상에 무슨 바라고 사는 게 아니라. 자기 하나 바로 살면 자기 직분 다 했어.

자기에게 속한 자에게는 다 줄 것 다 줬어. 이것이 자기 하나로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이 선한 목자라 당신의 뿌스러기 하나도 남김없이  다 양들을 위해서 바쳤는데 우리도 이것을 성공을 해야 되겠는데, 남은 때라도  이것 성공해야 되겠는데, 이것 성공 안 하면 전체가 실패인데. 이 성공 못 하면  그것은 뭣이요? 하나님의 것 도적해 가지고서 저 위해 살았어. 비참하고  가련합니다.

교파를 만들면 못 할 것이요? 개혁 운동해 만들면 뭣할 것이요? 속에 알맹이가  하나님과 관계인 요 문제가 해결 안 되면 안 되는 것인데. 많은 사람이 따르면  뭐할 것입니까? 다 외식입니다.

요것을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요것은 다른 것을 다 투자했다는, 최종을  투자했으니까 다른 것은 그보다 사소한 건 다 투자했을 것 아니겠소? 제일  어려운 걸 투자한 걸 보니 쉬운 건 다 벌써 투자했다 그말이오.

어떻게 해 되느냐? 보니까 삯꾼은 안 됐어.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지 안한  자를 표시할 때 삯꾼이라 표시했어. 삯꾼은 뭣입니까? 양 보고 하는 게 아니고,  양 보고 하는 게 아니고 품 받는 자지. 쉽지 않소? 예수님의 구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택한 자 중생된 자 그자가 구원되는 이  구원을 자기 욕망으로 구원에 애착을 가지고서 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값받는 것이라 말이요, 세상에 값받는 것. 뭣 때문에 하는 것. 월급 때문에  하든지, 명예 때문에 하든지, 평안 때문에 하든지, 무슨 값을 받고 있는지? 무슨  값인지? 많은 사람들에게 ‘하, 유명하다.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 권위가 있다.’ 교파  삯을 바라고 하는지? 개혁이라는 무슨 명예 삯을 바라고 하는지? 돈 삯을  바라는지? 숫자 많은 숫자의 삯을 바라는지? 영광 삯을 바라는지? ‘세계  일주했다.’ 언제 보니까 ‘내가 이번에 세계에 지금 여섯 나라에 집회를 하고 지금 돌아오는  판입니다.’ 또 ‘내가 열세 나라를 지금 돌아다니며 부흥하고 돌아옵니다.’  좋습니다. 전파하고 좋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그분이 과연 목자로서 가서,  목자로서 가서 그들에게 꼴을 줬는지? 새끼 절도 강도를 많이 만들어 놓고  왔는지? 이것이 문제입니다.

땅끝까지 우리가 퍼져서 하지마는 ‘어데 선교 어데 선교’ 그 선교 가 가지고서  과연 선교 가서 줄 게 뭐 있는지? 뭘 주는지? 양을 도적하러 갔는지 산 자를  죽이러 갔는지? 한국에 엑스포 74, 빌리그레함 운동. 이 운동은 한국에 있는  양을 완전히 도적했습니다. 한국에 ‘살아야 되겠다. 말씀대로 살아야 되겠다.’  뻘뻘 떨며 ‘살아야 되겠다' 이래도 가책 가책 받는 것 그 설교 그 운동 보고  나니까 ‘너무 지나치게 믿었다. 우리는 너무 반사회적이다. 반현실적이다.

너무나 반국가적이다.’문선명이가 일등이지. 문선명이가 세상과 조화 붙이는  데는 일등입니다. 그는 종교 통일이오. 종교 통일보다도 이제 앞에 나선 자가  어떤 자가 있느냐? ‘종교뿐이 아니다. 종교나 무종교나 인간은 통일돼야  된다.’ 이 사람이 더 앞장 설 것이오.

문선명이는 그것은 안 하고 종교 통일을 말했는데 이제는 그 사람이 발을 디뎌  내기를 ‘종교 통일뿐 아니라 신불신자 공산주의 민주주의 할 것 없이 모든 것은  통일돼야 된다.’ 하는 그 운동으로 지금 발을 내 디디고 있습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노아 때에 유명하고 내피림이 되고 용사가 됐지마는 소용 없었어. 이것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어리석지 맙시다.

주의 날은 주의 재림은 가까왔습니다. 주님은 절대자시요 알지 못하심이 없어.

그분이 계시요. 그분이 주재자요.

그런고로 삯꾼은 얻지 못했다. 이 말씀이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라”  자기 목숨 하나라도 그 삯을 바라면, 땅에 있는 것을 바라면, 자기 목숨  하나라도 그걸 땅에서 바라면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지는 못 합니다. 이 양의  우리에 문으로 통과는 못 합니다.

그보다 더 무서운 소리가 있습니다.

14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내가 내  양을 알고 양이 나를 아는 것이” 양과 나의 관계가 말이요, 양과 나와의  관계가, 어떻다 말이냐? 관계가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으니” “같으니” 성부와 성자와 관련 같은 이 관련, 그 관련이 얼마나  여뭅니까? 얼마나 튼튼합니까? 얼마나 무궁합니까? 그 무궁한 관계 영원한 관계  완전 관계와 같이 나와 내 양과의 관계가 이렇기 때문에 내가 목숨을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에게 속한 우리와의 양, 내 위에 내 선배와, 내 밑에 내  후배와, 주님과 나와의 관계, 나를 통해 구원 얻을 그 관계 그것이 성부와  성자와 관계 같은 이 영원한 관계 무한한 관계가 있는데 이 관계를 절도와  강도가 이것을 실패케 하려고 날뛰는데 알면 이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지 안할  수가 없어. 이러기 때문에 생명을 버려.

“내가 내 양을 알고 양이 나를 아는 것이 내가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가 나를  아는 것과 같이” 안다는 말은 책임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지식적으로 아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 책임을 말하는 것이오.

너거 나라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 가지고 한국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 가지고 이  짓 했는데 이것 아느냐?’ ‘나는 그것 모릅니다.' 책임 없다 그말이오. `너거  이것 아느냐?’ ‘예, 내가 그걸 압니다.' 그말은 책임진다 말이오. 영광과  수치와 모든 것이 다 책임이라 말이오. 하나님이 나 책임지고 내가 하나님  책임졌으면 다지. 하나님이 내고 내가 하나님이지. 이렇게 큰 뜻이 있기 때문에  양을 위해서 생명을 바치고 일생을 바치는 것입니다. 공연히 바치는 것 아니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어리석게 어리석게 목회하지 맙시다. 절도 강도 노릇하지 맙시다. 자기 망하는  길이오. 왜 살라고 살라고 하는데 왜 자꾸 죽음으로 들어가, 들어가기를?  들어가면 얼마나 들어갈 건데? 하나님은 자는 자가 아니오. 하나님은 모르는  자가 아니오. 하나님은 살아 계시요.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어요. “원수를  소멸하는 불이니라“ “원수를 소멸하는 불이니라”  노아 시대에 수많은 사람을 홍수로 멸했지마는 눈도 깜짝 안 했습니다.

잔인하기도 제일이오. 사랑도 제일이오.

한 십 분 기도하고 권찰회 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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