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사활의 대속과 서로 바꾸는 것

 

1986. 12. 10. 새벽 (수)

 

본문:갈라디아서 2장 16절∼21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여기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이라는 말과 은혜라는 말이 많이 기록됐습니다. 율법의 행위라 하는 것은 겉만 보면 육체의 이스라엘들이 예수님의 대속을 믿지 아니하고 과거 예수님의 그 대속을 예약하고 예표한 구약의 모든 속죄 구원의 그 제도와 그 의식을 행하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으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은 자가 아무도 없고 다만 거게서도 예약된 예수님의 대속을 바라봄으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 용납함을 받는, 의로 인정함을 받는 것이고 율법을 가지고서 저희들이 의롭게 될라고 하는 그런 모든 것은 다 헛되다 하는 것을 많이 말해도 그들은, 지금도 그 유대인 가운데서는 고집하고, 구약 의식과 제도 그 모든 것은 다 예수님을 소망하는 하나의 예약 예표의 그림자와 같고 예수님의 대속은 실상인 것인데 늘 그 어두움을 벗지 못하고 구약 의식 제도에 매여 가지고서 예수님의 대속을 부인하고 있는 그것을 가리켜서 말한 것으로 그렇게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할례를 받고, 절기를 지키고, 이런 짐승의 피를 가지고 이래야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예수님의 대속을 믿지 않는 그 행위를 사도 바울이 이것을 회개시킬라고 많이 애를 쓰고 그거 때문에 박해를 당했었습니다.

이래서, 만일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헛되다. 또 너희들이 구약의 의식 제도, 또 예약 제도, 그 예표 제도, 하나의 모형적이요 실상을 소망하는 그림자와 같은 그것을 버리고 실상을 믿지 안하면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 돼 버린다 이렇게도 믿는 사람들에게는 또 말을 했습니다.

이래서, 잘못하면 구약 유대교를 믿는 그런 사람들에게 관해서만 율법 아래 있다고 이렇게 말한 것으로 이렇게 알고 오늘 신약 교회에 성도들이 율법 아래 있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게 되면은 우리에게는 다 무익함이 되고 맙니다.

신약 교회도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인가?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첫째 아담에게 속한 그대로에 있는 사람이 율법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또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대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기는 비유컨대 새로 지음을 받은, 새 창조함을 받은 자요 그거는 완전히 첫째 아담에게 속한 사람은 완전히 죽어 버렸고, 완전히 죽었고, 죽어서 장사지낸 것같이 완전히 죽었고 이제 살아 남아 있는 이것은 예수님의 것이 살아 남아 있는, 예수님의 것이 살아 남아 있기 때문에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나의 이 지체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됐고, 나의 몸은 그리스도의 몸이 됐고, 또 내 정과 욕과 육체 그런 것은 예수님이 그 십자가에 내 대신 죽으신 거기에 나는 죽은 셈이 되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써 이루신 대속은 내것 됐고 나는 주님의 것이 돼서, 과거에는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내가 나를 주장해서 내 주장도 있었고, 감정도 있었고, 사상도 있었고, 또 소욕도 있었고, 무슨 취미 그 마음의 작용 또 몸의 작용 그런 것이 첫째 아담에게 속해서 곧 내것이 있었다, 내 마음이요 내 몸으로 이렇게 작용하고 활동했지마는 이제는 이것은 예수님의 대속을 내것 삼았기 때문에 나는 완전히 예수님의 것이 돼서 내가 사는 데에는 내 마음의 움직임이나 내 몸의 움직임의 그 움직임은 순전히 주님이 내 마음을 주권하고 당신의 수족으로 이래 쓰시는 것이지 내 주장이나 내 뭐 주관이나 그런 것으로서의 움직이는 거는 하나도 없고 그거는 십자가 못박아 죽여 버렸다 그렇게 그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갈라디아서를 읽어 보면 ‘은혜 아래 있다, 율법 아래 있다.’ 하는 그것을 많이 말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것은 첫째 아담에게 속한 사람, 제가 저대로 사는 것을 가리켜서 율법 아래 있다 했고, 제가 제대로 사는 사람은 제가 다시 말하면 제가 죄의 문제를 해결할려고 하고, 제가 또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려고 하고, 또 제가 마귀의 문제를 해결할려고 하고, 또 제가 하나님의 그 무한한 율법을 해결할려고 하고, 또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해결할려고 하는 사람이요, 또 그 사람은 자기가 지금 하나님을 향하여 영감과 진리대로 살려고 하는 그런 사람이니 자기를 자기가 담당하고 책임지고 살라는 사람이 그 사람이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니 그 사람은 의롭다 함을 받을 자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심신이 약하므로 하나님의 법을 이루지 못하는 그것을 이제 신인양성일위이신, 하나님이요 사람이신 예수님이 그 일을 내 대신 다 이루셨다. 내 대신 다 이루셨는데 그 이루신 것은 인성뿐이라면 그 인성이 나 하나밖에는 담당 못 하지마는 무한하신 신성이 일위가 됐기 때문에 그는 유한한 인간 숫자를 다 담당하고도 무한히 남음이 있다.

이래서 예수님의 대속을 믿는 사람은 이 일곱 가지에 대해서 내가 행하는 게 아니고 일곱 가지에 대해서 예수님이 내 대신 행하신 그것을 내것 만듦으로써 나는 이 일곱 가지 죄에 대해서, 마귀에 대해서, 사망에 대해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하나님과 이 원수됨에 대해서, 또 하나님을 향하여 영감과 진리대로의 영원히 사는 이 일에 대해서 자기가 행할라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평생 계속해서 행해야 되고, 행하는데 율법 하나라도 범하면 죽고 온 율법을 하나도 범하지 안하고 계속 행하면 그 행하는 것과 앞으로 행하는 것과 또 과거에 법을 다 자기가 완전히 행한 사람이라야 되어지는데 이미 범죄한 것을 인해서도 안 되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할 자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 말하기를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율법을 온전히 행함으로 산다 하기 때문에 이것은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율법이 사람에게 나타난 것은 사람을 하나님의 율법 속에 가둬서 아무도 이 율법을 이긴 자가 없고 이 율법에게 정죄를 받아서 이 율법 정죄를 받지 않는 사람이 없는 이 정죄에 가둔 일만 했지 그 율법은 사람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왜 그러냐? 율법은 무한한 율법인데 이 사람의 이 심신을 가진 것은영은 말하지 안합니다. 영은 지금 구속 받았기 때문에.심신을 가진 것은 그것은 아무도 하나님의 율법을 다 이행할 자가 하나도 없다.

그러기 때문에,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이 일곱 가지 사활의 대속을 내것 삼은, 공짜배기로 내것 삼는 요것을, 자기 것 삼은 것을, 자기 것이 되어 있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의가 되고 자기는 예수님의 대속을 나 대신 대행, 대화친, 또 대형, 형을 대신 받고 이래서 대신 했기 때문에 나만 이것만 예수님에게 드려 버리고 예수님의 그 대속을 내것 삼으면 이거는 의가 된다.

그러면 내것은 이것만 믿어서 내것 삼고 예수님의 대속을 내것 삼았기 때문에 나는 이거 예수님의 것을 드려서 예수님의 것 됐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걸 가지고서 이래 살든지 저래 살든지 뭐 당신이 어짜든지 이렇게 해서, 이게 만일 예수님에게 드려 가지고서 주의 것으로 사는데 이게 살다가 만일 죄를 범하면 예수님의 것에 맡겼기 때문에 예수님이 죄를 짓게 한 것이냐? 예수님이 죄를 짓게 한 것은 아니고 내가 그때 그것을 다시 내것으로 도로 찾은 그것이니까 그걸 다시 예수님에게 드려서 드리면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행하셨기 때문에, 그걸 나를 줘서 나도 가지고 있고 예수님도 행하셨기 때문에, 행하셨으니 마치 비유컨대 옥이 진흙에 들어가면 진흙이 묻었지마는 옥이 진흙 속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거 묻었으면 그만 그거 썩 닦아버리면 깨끗해진다.

이와같이 예수님의 대속을 내것으로 내가 믿고 내 남은 모든 것은 산 제사로 드려서 예수님의 지체요 예수님의 몸으로 내가 드렸을 때에 이것은 나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깨끗해졌고 그것은 예수님의 대속을 입은 내가 주님에게 드려 주님의 것 됐기 때문에 이것도 깨끗하다.

나도 깨끗하고 이것도 깨끗하고 깨끗했는데 이것이 악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가다가 죄를 범하는 더러운 일이 있다. 그것은 더러운 이 죄를 범했으나, 죄를 범했으나 그 죄가 나도 더럽히지 못한다. 왜? 예수님의 대속이 내것 됐기 때문에 나를 더럽히지 못한다. 또 이것은 깨끗하신 온전한 행위를 이루신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또 이것도 더럽히지 못한다. 요거 잘 알아야 됩니다. 나도 더럽히지 못하고 주님도 더럽히지 못한다.

그러면 더럽히지 못하는데 죄 지은 것은 뭐이냐, 그거는? 그것은 내가 지은 죄가 아니고 주님이 지은 죄도 아니고 내 속에 죄 그놈이 들어서 그와 같이 행동한 것이지 죄 그놈이 그랬기 때문에 죄 그놈에게 책임 있지 믿는 자에게는 자신에게도 그런 것이 가까이 오지 못하고 또 주님의 것이 됐으면 주님의 것된 거는 가까이 오지 못하는데 그것은 순전히 죄 그놈의 작용이라. 그러기 때문에 “내가 원치 아니하는 것을 한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죄가 행한 것이라” 하는 것을 로마서 7장에 말씀하신 그 진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성경을 읽을 때에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의 대속을 벗어버리고 제가 하나님의 뜻대로 깨끗이 옳게 살아 가지고서 구원을 이루어 갈라 하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고, 율법 아래 있다 말은 예수님의 대속을 벗고 제가 하나님을 향하여서 의롭게 깨끗하게 살라고 하는, 제가 하나님 앞에서 의를 이루고 구원을 이루고 자기 행함을 가지고 무엇을 할라 하는, 자기가 이 모든 원죄 본죄의 과거가 있고 또 현재와 미래가 있는데 여게 대한 하나님의 그 모든 무한한 법이 다 입법되어 가지고 있는데 이 입법을 과거에 자기의 그 모든 잘못되어 있는 것이나 또 그 현재에 자기가 모든 당해 가지고서 할 일이나 앞으로 할 일 그 일을 자기가 담당할라고 하는 그것이 율법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걸 우리가 잘 구별해 가지고서, 율법 아래 있으면은 그 사람이 아주 천하에 제일 의인으로 잘 살았다 할지라도 나중에 가서 보면은 그는 완전히 용납할 수 없는, 건설구원기본구원은 영은 순전히 객관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중생을 시켰기 때문에 이거는 하나님의 주권 능력으로 중생을 시켜서 사람의 요소는 하나도 관계하지 안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영 중생 이거는 완전히 됐지마는 지금 심신의 구원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성경에는 심신의 이 성화구원 건설구원에 관한 말씀이 많이 있고, 대부분이 그 말씀이고 근본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은혜로 중생돼서 구원 얻는다 하는 그 말씀 기록한 그 성구는 몇 성구 안 됩니다.

이런데,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이것은 제가 담당한다는 것이니 유대인들이 다 그와같이 돼 가지고 있고, 그와같이 하고 있고 오늘도 예수 믿는 사람이 다 그와같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유대인들에게 대해서, 대개 학자들이 말하기를 ‘유대인들에게 대해 했기 때문에 이거는 유대인들에 대해서 하는 말이지 이거는 신약에는 상관없는 거라’ 이렇게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학자들이 그런 이들이 많소. 왜? 번연히 성경에 유대인들을 두고 자꾸 말했거든. 유대인들이 율법 아래 있는 것이나 오늘 신약 교회에 있는 사람이 예수님의 대속을 벗고 구원을 바라보는 사람은 전부 율법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고,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자기로서는 아예 이거 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하신 이 사활의 대속하신 것을 내것 삼고, 내것 삼고 나는 주님의 것 삼았고 주님의 것 됐고, 내것 삼았고 주님의 것 됐고, 이제 그라면 남은 행위는 어쩌느냐? 남은 행위는 이것은 예수님의 대속을 내것 된 거는 변동 없고 내것을 주님에게 드려 주님이 내 안에서 나를 붙들고 살아야 되는데 망령되게 살지 안하고 혹 주님의 것을 제것으로 도로 찾는 일이 있다.

도로 찾는 그것은 나는 찾기 싫기 때문에 나는 찾지 안할라 해서 나는 찾지 않는데 찾은 그런 결과 내는 것은 내가 한 게 아니다. 그것은 내 속에 있는 죄 그놈들이 한 것이다. 그래서, 거게서 잘 구별을 가지고 많이 논란을 했습니다.

로마서 7장 20절에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그거 하면” 이것이 나는 주님의 것 된 나를 말합니다. “하면”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이를 행하는 자가 아니요, 이거, 이거는 주님의 대속을 내것 삼았기 때문에 주님의 것 되어 있는 나를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것 되어 있는 나를. 이렇기 때문에 여기 내라는 말을 이걸 잘 구별하지 못하면 아주 그만 혼돈돼 버리고 맙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거는 주님의 것 된 나를 말합니다.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주님의 것 되어 있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라는 속에, 내라는 전체 속에 아직도 악령과 죄 그놈이 지금 남아 있는데 나와 적이 돼 가지고 있고 나와는 상관없는 그놈이 내 속에 이 패잔병이 있어 가지고 나를 자꾸 괴롭히고 있다. “죄니라” 21절에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하나님 중심 하나님의, 주님의 것이 됐으니 주님의 것이 사는, 주님의 것으로 사는 게 아니라 주님의 것이 사는 요것이 내 생활이기 때문에 주님의 것이 사는 요 일을 할라고 하는 나에게,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주님의 것이 되었으니 주님의 것이 주님으로 살라고 이렇게 이것을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이거는 나와 아주 원수인, 내가 아닌 딴것이 있다.

이래서, 모두 다 악이나 죄나 마귀나 예수님의 대속이나 또 예수님의 것이나 이 전체가 자기라는 뭉텅이, 자기라는 뭉텅이 속에 들어 있다. 자기라는 뭉텅이 속에 들어 있으나 그 뭉텅이 속에서 이렇게 구별을 해 가지고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구별을 해 가지고서.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그것도 자기 안에 있는 내나 “내 속 사람으로는” 그거는 뭐냐 하면은 주의 것 되고 주님의 것은 내것 되고 나는 주님의 것으로서 이제 새로 지음받은 이 새것 된 사람은 말입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지체 속에서” 이거는 아직까지 습성이, 악습이 싹 빠져 나가지 안했고 악습 이놈이 아직까지 남아 있고 악습이 남아 있으니까 남아 있는 것만치 마귀는 제것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 악습 속에서 이놈이 작용을 하고 자꾸 이렇게 하고 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그러면 “마음의 법과 싸워” 나와 싸워 그말이오. 내 마음과 싸워, 나와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나는 그걸 원치 안하는데 내 속에 있는 습성 그놈이 들어서 퍼뜩퍼뜩 자꾸 이래 가지고서 실수하게 돼, 습관 말이요, 버르징이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 죄를 이기는 데에는 제일 악령, 악성, 악습 이 세 가지가 옛사람인데 그 중에 우리에게 제일 덤벼드는 것은 악습입니다. 악습 이놈이 제일 쉬지 않고 노력하고 악습에게 유혹받는 일이 제일 많고 이것이 우리를 많이 넘어뜨립니다.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속에 있으니까 이제 뭐이냐? 예수님의 대속은 내것 됐고 또 나는 예수님의 것 됐고 이제 사는 것은 예수님이 살아야 되는데 예수님이, 예수님의 지체로 이 지체는 당신이 써야 되고 마음도 몸도 당신이 써야 되는데, 당신이 써야 되는데 당신이 쓰게 하지 안하고서 도로 제가 도로 찾습니다. 도로 자꾸 찾지 안할라 하는데 찾아졌다, 도로 내가 주장하지 안할라 했는데 내가 주장하게 됐다. 주장하게 된 것은 이것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내 속에 죄가 그래 했다.

곤고한 거는 왜 곤고하냐? 이것을 내가 입었고 벗었고, 예수님의 대속은 내가 입었고, 또 모든 악령 악성 악습의 것 옛사람은 벗었고 주님의 것은 됐고 하는 이것이 고정이 돼야 될 터인데 이것이 자꾸 이래 고정되지 안하고 자꾸 흔들리기 때문에 곤고하다 하는 걸 말해.

곤고하나마 “그것은 내가 원치 안하는 것을 한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죄가 행했다” 이래서 그 속을 구별해 가지고서 이렇게 믿음으로 하는 것은 자기가 속에서 자원하는 고의적인, 자기가 고의적인 것이 아니고 자기가 원치 안하는데 그런 일들이 되어진 그것을 가지고 말합니다.

이러니까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입은 것도 변동을 안 시키고, 변동 안 시킬라고 애를 쓰고, 그 변동 안 시키는 것이 이것이 자기 그 마음으로 변동 안 시키는 것입니까 이런 무슨 고정체, 무슨 고체 모양으로 그렇게 그런 것으로써 변동하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것입니까? 자기 마음으로 고정을 시키는 것입니까 무슨 형체로 물체로 고정시키는 것입니까, 뭘로 고정시키는 것입니까? 뭘로 고정을 시키지요? 마음으로 고정시키기 때문에 고정시킨 것이나 안 한 것이나, 시켜도 금방 보기에 또 이래 돼 버리고 자꾸 변동이 잘 된다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정을 시켰는데, 고정을 시켰는데 이 고정시킨 것이 변동이 없어야 될 터인데 고정시켜 놓은 것을 무엇이 퍼뜩 와 가지고서 이것을 다시 제것으로 이용을 해 버렸으니까 그걸 말하기를 “나는 속속들이 내가 그걸 원치도 안했고 또 나는 하기를 싫어했고 했는데 그것이 악습 속에 들어 있는 게 들어 가지고서 그놈이 그렇게 했다. 그래서 내 지체 속에 내가 그 버르징이 들어 있는 것을 봤다. 그러면 그놈이 했지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이래서, 요 로마서 7장에 바울이 말하는 것은 자기 속에 예수님의 대속을 입어 예수님의 대속은 자기 것 됐고 대속을 입었기 때문에 자기의 남은 그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이 내 대신 행했기 때문에 이거는 내 대신 행한 그건 내것 만들었으니까 내 남은 것은 당신의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당신의 것이 된 것, 이러니까 나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죄, 사망, 마귀, 하나님과 불목,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 이거는 완전히 벗어버렸다 말이오.

이거는 입었고 벗었고, 내것 됐고 주님의 것 됐고, 이러나 이것이 뭘로 되는 것이냐? 이거 무슨 못을 박아 되는 것같이 뭐 나무로 각목으로 탕탕 짜서 뚜드려 박은 것같이 이게 아니고 말이지, 이거 믿음으로 되는 거라. 믿음으로 되니까 믿으면 돼 버렸고 또 이 의심해 버리면 그만 확 깨져서 아무것도 없고, 믿으면 됐는데 믿으면 된 그것도 잡을라 해야 잡을 것도 없고 형체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이거는 참 무형의 존재인데, 무형의 존재요 또 믿음을 헐어서 부숴버린 것도 또 그거 무형의 존재라 말이오. 이러나 믿으면 전지 전능의, 그 피조물이 하나님 되는 것이고, 말하자면. 피조물이 하나님이 아닌데 피조물이면서 피조물이 하나님 되는 것이고, 믿을 때에 하나님 되고 믿음을 버릴 때에 이는 완전히 지옥물이 되어진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속하신 하나님의 공법에서는 다 돼 가지고 있지마는 실제로 우리가 행동해서 예수님의 것이 살아야 되겠고 또 나는 이걸 벗지 안해야 되겠고 나는 어데서든지 일곱 면으로 완전자가 돼 가지고서 하나님에게도 대해야 되겠고, 만물에게도 대해야 되겠고, 마귀와 죄에도 대해야 되겠고 이라면 자유하는 자가 되어지는 것인데, 이게 마음의 작용에, 마음의 운동에 믿음으로 되기 때문에 이걸 이게 믿음으로 마음의 작용에 믿음으로 되는 거기 때문에 이 무슨 고체인 물질로 되는 것보다 더 여물게 견고한 것이지마는 이게 또 무를라 하면 한정 없이 무르고 여물라면은 한정 없이 여물고 이것이 강할라면 한정 없이 강철보다도 강하고 이거 또 흐려서 무를라면 이거는 물보다도 더 무르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요동치 안할라고 지금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지랴” “이 사망의 몸에서” 이러니까 이 지체 속에 있다는 말과 사망의 몸이라 하는 이 몸과 꼭 같은 것입니다. 몸에는 이거 우리에게 습성이 다 꽉 들어 있는데 습성 이놈이 지금 그라지 이 자기 중심으로서는 이거 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을 벗기를 싫어하고 이런데 이 지체 속에 있는 거 이 몸 속에 있는 거 이 습성 이놈이 들어 가지고 자꾸 그렇게 하는 것인데, 우리가 이것을 자꾸 말로 자꾸 하고 마음으로 자꾸 하고, 마음으로 예수님의 그 일곱 가지 대속을 자꾸 내가 말을 하고 또 생각을 하고 내가 또 인정을 하고 또 믿고 또 자기가 그 행동으로서도 자꾸, 예수님의 이 대속은 내것, 나는 주님의 것, 이제 그 모든 옛사람 첫째 아담의 것은 완전히 벗어버린 거, 또 주님의 것이 되었으니 주님의 것이 사는 거 이것이 아주 허무한 거 같습니다. 이 말뿐이니까 허무한 거 안 같습니까? 말뿐이니까 허무한 것 같으나 이것이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요,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보이지 안하기 때문에 그까짓 거 허무한 것 같고 사람이 이렇게 뭐 행동해 놓은 것은 뚝 나타났기 때문에 행동한 건 여문 거 같고 큰 거 같고 강한 거 같고 그러나 마음으로 한 것은 그것은 약한 거 같고 허무한 거 같지마는 실은 그 육체로 하는 것보다 마음으로 하는 게 더 강하다.

또 마음으로 행한 그거보다도 영으로 행한 것은 더 뭐 흐미해서 그거는 있다 해도 그거 거짓말같이 아무 보이지 안하지마는 영으로 행한 것이 더 강하다.

또 영으로 행한 것보다도 하나님으로 행한 것은 그뭐 누가 다 부인할 수도 있고 아무것도 없는 거 같지마는 그게 더 강해서 모든 존재는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아 나왔다.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서 있다.

이 사람들이 심령이 어둡기 때문에 이 신령한 것의 실력과 오묘의 이치를 모르니까 이래서 할 수 없어서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강하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아 나왔고 보이는 것은 차차 없어질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 자꾸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자꾸 이 구원 이룰라 하면 육체로 돌아갑니다. 자꾸 안으로 기어 들어가지 안하고 자꾸 밖으로 나가요. 이렇게 성령으로 거석한 것을 자기 마음으로 나가 버리고, 자기 마음이 육덩이로 나가 버리고, 육덩이로 나간 것이 끄트머리 무슨 이 사물과 접촉을 해 가지고 사물로 되어진 그거라야 견고한 줄 알고 그게,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과학을 위주하는 것은 그거는 이 껍데기로 나가 가지고 하기 때문에 그거 비참하고 불쌍한 사람이고 그거는 심령이 어두워서 그런 사람이다.

그러기 때문에 과학자가 절대자이신 이 자존자, 보이지 않는 그분을 알고 그분의 소행으로 이 모든 과학의 오묘가 나왔다 하는 것을 발견해서 이 보이는 것을 넘어 자존자를 발견한 그 과학자는 누구보다도 예수를 잘 믿습니다.

왜 잘 믿느냐? 그거는 이 모든 보이지 않는 자로 말미암아 보이는 것들이 나타난 그 오묘의 그 범위가 굉장한데 그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나타났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그분을 이 나타난 이걸 가지고서 좀 더 세밀히 알 수 있지마는 과학을 모르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그분의 작용이 보이는 것으로 나타난 그것을 많이 모르기 때문에 주님을 많이 모른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은 외나 과학을 알수록 예수님을 참 잘 믿는 사람이 되어지고 보이는 이것을 중하게 여기다 보면은 보이지 않는 그분으로 말미암았는데 그분은 무시하고 자꾸 보이는 걸 위주한다 말이오.

그거, 미국에서 있는 모든 과학 노벨상 받은 그 모든 사람들이 이 천지 창조를 부인하는, 성경 창조를 부인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은 그것은 기독교들이, 예수 교인들 그 모든 하나님 믿는 유대교나 그런 사람들이 종교적 그 교리에 불과치 못하지 그걸 그 실상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과학자 저거는 보여야 되니까. 뭐뭐 몇억억만 배의 돋보기라도 봐야 되지 보이지 않는 건 다 부인하다 보니까 그 사람들은 참 불쌍한 사람이 된다 말이오.

그거는 하나님 보이지 않는 분으로 말미암아 보이는 것이 나왔다는 그 과학자는 그 과학자가 돼 갈수록 하나님의 오묘의 하나님의 그 무한 능하심을 자기가 알 수있지마는 그분을 부인한 과학자들은 그거는 다 사망자들입니다. 사망자들이요 그거 보면 불쌍하고 가련하기가 짝이 없습니다.

이래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우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하는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주 예수라고 예수를 먼저 말했습니다, 여게는.

그리스도를 먼저 말한 데도 있고 예수를 먼저 말한 데도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했는데 여게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를 먼저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지금 제사장, 선지자, 왕을 이게 영원한 우리 천직인데, 영원직인데,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가진 자가 이제는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 사이에 중보자가 되는 이 제사장, 또 하나님의 모든 것으로 피조물을 충만케 하는 복을 주는 이 선지자, 또 모든 것을 하나님 한 분의 단일 통치로 이 모든 것을 통일 통치, 단일 통치라 말한 것은 한 분의 통치라 말이요 통일 통치라 말은 모든 존재들이 다 그 단일 통치에 복종된 통치를 가리켜서 통일 통치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하나님께 감사한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써 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해결된다. 이래서, 예수로 말미암아 이겼다, 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겼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 사활의 대속을 자본을 삼아 가지고서 이 자본을 자기 것 삼은 요 자는 자체가 완전자 될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 천상 천하 영계와 물질계에 모든 피조물과 하나님과 그 사이에 중보자가 돼 가지고서 영원히 역사한다.

중보자라 하는 것은 그것은 한 편만을 위하는 것이○○○! 못 알아들어? 졸아? 이거 못 들으면 헛일이다. 이거 못 들으면 예수 헛 믿는다고. 이게 지금, 내가 보니까 처음부터 이거 잘 못 알아듣는데 이거 못 들으면 예수 암만 믿어도 헛일입니다. 생명 내도 아무 헛일입니다. 여러분들, 그거 알아야 돼요.

그뭐 자기가 어떤 지식을 통달하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고 또 자기 몸을 불사르고 어떻게 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그거 무슨 말입니까? 그러면 위해서 순교하는데, 교회를 위해서 순교를 하는데 또 그 뭣을 이방에서 하는 거 그거 냅두고, 이제 그거는 예수 믿는 사람 말해 놨소. 자기 몸을 주어서 불사르는 거 그거 순교 아닙니까? 그보다 더 순교자가 어데 있소? 순교해도 소용 없다 그거 무슨 말이오? 그게 뭐이냐 하면 예수님의 대속, 자기가 바꿔지지 안했으면 아무 소용 없다, 건설구원은 하나도 없다 하는 그말입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요.

이러기 때문에 제가 여기 첫시간에도 고린도전서 2장 1절에서 말하기를 자기가 전하는 것은 말에나 지혜로움에 있지 안하고서 그 믿음이 성령과 하나님의 권능에 있기를 원해서 전한다 하는 것은 그거는 자기가 전하는 게 아니요. 완전히 바꾸어져 가지고서, 바꾸어져 가지고서 주님이 그와같이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완전치 못한 자가 완전한 도를 뭘 전합니까? 이러기 때문에 지금은 예수님의 대속을 입어서 요 일곱 가지 사활의 대속을 완전히 바꾸어서 가진 요것이 아니되고서 얼마든지 성자 노릇 하고 성녀 노릇 할 수 있고 얼마든지 봉사할 수 있고 얼마든지 순교할 수 있지마는 나중에 가 보면은 그것은 다 멸망이라. 그것이 뭐이냐 하면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요 은혜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 아래 있지 않으면은 생명이라 하는 건 털끝만치도 없습니다.

요거 모르면 안 돼요. 이걸 모르기 때문에 지금 옛사람이 들어서 막 강단을 뚜드리고 야단을 지기고 지금, ‘너 망하는 짓 말 잘한다. 네 자살하는 행위 많이 잘하고 다른 사람 죽이는 살인 행위, 자살 행위와 살인 행위 많이 하고 있다.’ 그거 가 들어 보면은 자살 행위와 살인 행위를 알 수가 있다 말이오. 생명이 없는 그 역사를 하고 있는 거, 고린도전서 13장에 말하지 안했습니까? 고린도전서 13장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괭과리라” 생명 없다 그말이요, 여게는. 생명이 없다 말입니다. 생명은 고기덩어리 생명 이거는 생명이 아닙니다. 죽음입니다. 여기 생명이라 하는 것은 영원히 어떤 존재에게도 멸해지지 않는 실력을 가리켜서 여기 생명이라 말합니다. 어떤 존재에게도 멸해지지 않는 실력, 이거 능력을 가리켜서 생명이라 말하는 건데,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괭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이것도, 이거 가지고 자랑하는데 이것도 아무 소용 없다 말이오. 천하에 대신학자, 천하에 제일 대신학자, 또 천하에 그 신학으로서 제일 일등이고 지식으로 일등이고, 뭐 아무리 일등해 봤자 천사만 하겠습니까? “예언하는 능이 있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고” 하나님의 뜻을, 예언하는 능이 있다 말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아 가지고 사람들에게 전한다 그말이오.

예언하는 능이라 말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아 가지고서 전한다 그말이오.

“예언하는 능이 있고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이게 이거 뭐 굉장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 그러면 믿는 지식 안 믿는 지식, 신구약 성경 다 외우고 뭐 대주석가 대신학자, 대주석가 대신학자 대예언가 뭐 또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서 미래사도 모든 거 다 바로 말하고 이거 뭐 여게 하나도 빠진 게 없습니다.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그러면 이 믿음 하나님을 인정하고 알고 뜻을 생각하고 또 하나님에게 복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존재도 인정하고 모든 거 다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생활 하고, 이 말을 가리켜서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의 최고입니다. 믿음의 최고가 있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여기 또 사랑을 말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이 사랑이 뭐입니까? 요거 모르면 헛일이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이 사랑을 이라니까 이 사람들이 껍데기로 얼마나 그거 껍데기 말합니까? 이래 가지고 정욕 사랑, 동류 사랑, 또 혈통 사랑 저거 친구끼리 ‘오차 한잔 먹으시오. 오늘 주일이지마는 모처럼 왔는데 이라십시오.’ 자꾸 이래 뭐 친절하게 하고 손잡고 떨고 사랑하고 뭐 이렇게 화목하고 부드럽게 관용하게 유하게 관대하게 뭐 이렇게 하는 거 그게 다 사랑인 줄 아는데 그게 전부 죽이는 사랑이라 말이오. 요 사랑과 사랑을 구별한다는 이 말을 예사로 압니다. 사랑이 들어서 지금 교회를 다 죽이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봐라, 사랑이 제일이라 안 했나?’ 이 사랑을 바꿔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지 안하고 인간 사랑을 말하다 보니까 이거는 사람을 왕창 죽여 버리는 일이 되고 만다 그말이오. 요걸 구별하지 못하면 헛일이오.

왜 강단에 지금 하나님의 성령이, 자기가 완전히 주님의 것이 되고 주님의 대속은 자기 것 된 이걸 지금 그 바꿔서 이게 바꿔 돼 가지고 할라고서 바울은 죽자껏 애를 썼는데 이거 없이 뭐 어떤 죄를 짓고라도 이렇게 뭐뭐 그 말씀만 증거하면 되고 그 시간에 사람들만 설복을 시키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거는 참 얼마나 하룻강아지 범을 모르고 말하는 것보다 더합니다, 이거는.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것보다 더한 거라, 이거는. 화약을 지고 불로 들어가는 일이라. 이제 가 보면, 하늘나라 가면 별별 일이 많이 있을 거라. 이래 가지고 하다가 나중에 멸망되는 거, 멸망받을 게 얼마나 많아요.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이거 얼마나 잘 믿는 사람이요?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러면 이 사랑은 무슨 사랑이겠습니까? 이렇게 이 모든 것보다 나은 사랑이 뭐이겠습니까? 나은 사랑이 인간들이 동류 사랑, 정욕 사랑, 혈육 사랑 이런 것이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그말이오.

그게 아니고 이것은 “사랑은 여게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독생자를 보내 가지고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화목 제물이 됐다” 하는 그건 예수님의 대속의 한 토막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으로, 사활의 대속으로 완전히 이 일곱 가지 난제를 해결지워서 예수님의 대속을 받고 대속을 받은 나는 주님의 것 되고 주님이 영원히 내 대신 영생하는 그 영생은 내것 됐고 나는 주님의 것 돼 가지고 하는 대로 하고 하는 이것이 없으면 아무 소용 없다 하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 벌써 시간 많이 갔기 때문에 그런데 지금 제가 말하는 것은 뭐이냐? 완전히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이 내것 되고 대속을 받은 나는 주님의 것 되고 이제 주님은 사활의 대속을 가지고 내게 장가왔고 나는 이 사활로 대속한 그것이, 이 더러운 그것이 주님에게 시집갔고 주님과 나와 둘이 합해 가지고서 이제 예수의 것으로 사는, 예수님의 것으로 사는 이제 주님의 것이 되어서 나는 껍데기고 주님은 알맹이로서 주님은 내 안에서 역사하시고 나는 그 성전이 됐고 그 지체가 돼 가지고 사는 이것이 믿음으로, 이거 무슨 뭐 그 어떤 이런 공작으로 되는 게 아니라. 이거는 믿음으로 되는 거라. 요 사실을 믿으면 돼요. 믿으면 되는데 요 믿음이 없으면은 아무것도 아니라. 그러기 때문에 믿음은 능치 못할 것이 없다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거 그런데, 사활의 믿음을 믿어야 되는데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은 이거 마귀 믿음을 말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향하여 믿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이렇게 하나님을 믿어서, 믿으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하지마는 아무리 나타나고 이란다 할지라도 자기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과 이 서로 바꾸는 거, 교환하는 거 요게 안 되면 그거는 사망뿐이지 생명의 역사는 없다 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목회하는 것도 꼭 요 사활의 대속이 내것 되고 나는 주님의 것이 돼 가지고 주님의 그 지체가 역사하는 거게서 생명 역사가 일어나지 그리 안 하면 생명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선교사 한부선 목사님이 그 어른이 참 믿음이 좋은 어른입니다.

일본에 하천풍언씨가 그때 세계 성자라고 유명했고 아주 뭐 굉장했었습니다. 그 사람의 내가 저서를 얼마를 내가 좀 읽어 봤는데 세계에서 성자라고 말하는데 그 사람 보고 보니까 항상 그 저서 가운데에 예수님의 이 대속이 기록이 안 돼 있어요. 예수님의 대속에 대해서 고조하지 안하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러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는 생명이 없다 이래 나는 의문을 쥐었어.

그 사람의 뭐 ‘사선을 넘어서’라든지 `태양을 쏜다'든지 하는 그런 뭐 책은 그 아주 좋은 책인데도, 그 사람 책은 참 읽기 시작하면 그만 잠이 안 와요. 언제든지 읽기 시작하면 그만 그 책이 끝 나 버립니다. 뭐 자꾸 연속해 어떻게 연속미가 있는지 읽기 시작하면 그만 재미가 붙어서 끝을 봐야 말지 끝을 보기 전에는 안 놓는다 말이오. 이렇게 했지마는 어짠지 거기 예수님의 대속이 없어요. 대속을 이래,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성자로.

대속이 없는데, 그래 그 의문을 가졌는데 그 의문을 가져서 언제 내가 한부선 목사님에게 ‘하천풍언씨를 압니까?’ 이라니까 녜 안다고 이래서 `하천풍언씨가 저서한 걸 이래 봤는데 그분이 어떤 분입니까?’ 이라니까 ‘그분은 그 모두 다 성자라고 이라는데 그분은 기독교 사회주의자요 정치주의자지 그 사람은 신자는 아닙니다’ ‘뭘 보고 신자 아니라 합니까? 그 사람 성자고 예수 잘 믿는다 하는데.’ 만주 가서 설교할 때에 보니까 ‘예수님의 피는 지금 살아 있다. 예수님의 피는 살아 있는데 이 살아 있는 예수의 피가 우리 속에 들어와 가지고서 역사한다.’ 예수님의 피는 죽어서 우리를 대속했는데 예수님의 피의 대속에 대해서 확실히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예수님의 대속을 바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신자가 아닙니다.’ 그때 그말 하고 나서 나도 해결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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