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내주고 주님 차지할 것

 

1989. 7. 4. 교역자회.

 

본문: 사도행전 3장 4절∼15절.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죽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구약 교회는 핍박과 오해와 반대라 이단이라 하는 그 속에서 새 싹이 자라가고  있었습니다. 구약 교회 속에 생명의 산 움싹이 자라갈 때에 그 생명의 옳은 움싹  같은 그 참구원은 구약 교회에서 핍박을 받고 오해를 받고 반대를 받고  이단이라고 하는 그런 꺼풀 속에서 십자가로 완전히 탈피해 가지고 부활한  도입니다.

 우리가 기독교를 이 구약 교회로 말하면 얼마 동안 구약 교회가 이래 자라  나오면서 참교회는 잡초 속에 든 곡식과 같이 그렇게 아주 미약해 가지고서  이렇게 나오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이단이라 또 잘못이라 이래 가지고서  반대하는 그런 꺼풀 속에 하나님의 교회가 자라 나왔습니다.

 그때에 뭐 구약 교회들의 신앙에 외부에 번들번들한 그 제사장 서기관 또 열심  있는 유명한 바리새교인들 그런 데에는 생명 역사가 없었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에 참 생명이 된 그런 역사들은 그들에게 다 부정을 당하고  다 오해를 받고 이단이라는 그런 평을 받는 그런 존재로서 자라나오다가  마지막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비로소 새 움싹이 역항해서 아주 승리로  그렇게 나타났었습니다.

 우리는 구약 교회의 말기를 우리가 잘 상고해서 신약 교회의 말기와 같은, 거의  같은 것을 우리가 거기서 찾아볼 수가 있고 또 그렇게 찾아볼 수 있는 그것은  예수님께서 아주 초대 아주 상고 시대의 교회, 상고 시대의 교회의 말년 홍수 전  말년 그때의 교회를 신약 교회의 말기와 같다 그렇게 주님께서 또 증거해 주신  것을 우리가 읽습니다.

 이래서 어데서나 보면 시작이나 중간이나 끝이 거의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는 신약 교회의 종말을 맞이하고 있는 우리들인데 우리에게 참고될 것이  뭐인가?  그러면 상고 시대의 교회 창세기 6장에부터 있는 노아 홍수 시기의 그 종말  교회 그 교회를 우리가 살펴보면서 우리는 거게서 우리 스스로를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가 거울로 삼아야 하겠고 또 그후 구약 육체의 이스라엘인 유대교,  유대교의 그 종말을 우리가 또 살펴보고 우리 신약 교회의 종말과 비슷한 그런  참 거울이라고 할 수 있을 만치 그렇게 아주 같은 점이 많은 그런 것을 우리가  거기서 살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상고 교회의 종말도 그 생명의 역사들은 다 모두 고독해졌고 또 그젖게  세상적 세력이 강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때 모두 유명한 용사니 네피림이니 뭐  굉장한 사람들이 그때나 지금이나 꼭 같은데 거기에 인간의 영원을 해결겠는  구원이 없었고 오히려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멸시받고 있는 고독한 그 노아에게  그 구원이 맡겨져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살펴보면 우리에게는 많은 참고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그라고 또 구약 그 종교 말년에 그때도 뭐 제사장도 있고 서기관도 있고 바리새  교인들도 있었고 굉장한 조직과 제도와 또 거게 성직을 맡은 그런 유력한  인물들이 많이 있었는데 예수님을 그들이 메시야로 소망하고 있었지만 정작  메시야가 오니까 메시야와 그들이 어떻게 됐던가 하는 그런 것을 우리가 거울을  삼아서,  우리가 모두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고 이래 있지마는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면  그분과, 그분과 우리와는 어떠한 관계를 가질 것인가? 지금 현재 우리가 우리가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그런 것을. 우리가 뭐 살펴본다면 아주 뭐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정확한 답안이 나옵니다. 뭐 서슴을 것도 없고, 우리가 항상  강퍅해서 어누리하는 데에서 '그렇지마는,' 그렇지마는 어떻다고 하는 것이지  정확한 것을 모를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고 또 제자들은, 예수님 따라다니던 제자들은 참 그때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난 다음에 얼마 동안이라는 그 기간은 외적으로는 굉장한 그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외적으로는 굉장한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으나  내적으로 그들에게 영생하는 새생명을 그들이 가졌기 때문에 참 울고 웃고 하는  그런 생애를 가졌습니다.

 외부적으로는 그때 그뭐 말할 수 없는 그런 핍박이 있어서 그 속에 영생하는  새생명의 이 도리를 깨닫지 못하면 제자들이 걷고 있는 걸음은 다 미친  걸음이라고 다 욕하지 누가 한 사람도 그거 찬성할 만한 사람은 없는 그런  껍데기를 가진 그것이 신약 교회의 그 성장 과정입니다.

 신약 교회의 둥치는 구약 교회가 신약 교회의 둥치인데 거기서 또 그 속 움이  난 그 속 움은 곧 예수 그리스도가 도성인신 하셔 가지고서 그렇게 대속의  역사를 일으키는 그것은 구약 교회에 잉태해 있던 그 생명이 신약 교회에  나타나서 성장할라고 할 때에 그 과정은 예수님 당시도 그러했고 또 바로 그  사도들 때도 그러했고 뭐 속사도 교회때는, 속사도 시대는 조금 덜했지마는 그런  모든 외적으로 참 이 세상적으로 볼 때는 아무 취할 만한 가치가 없었고 또  부러울 만한 것이 없었고 또 인정받는 것들이 없었고 동정하는 것들이  없었습니다.

 어쨌든지 그 꺼풀은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것을 보면은 천인이면 천인 만인이면  만인 다 배반하고 던져 버릴 수 있는 그런 외모를 주셨습니다. 그 외모를 주시나  그들이 어떻게 그런 어려움을 자꾸 견뎌 나오게 됐던가 하는 것은 그 속에  '영생하는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한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그들이 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 말씀하신  대로 성령을 그들이 받아서 성령의 영감으로만 그때에 위로를 받고 유지를 했고  견뎠지 딴 힘으로는 견딘 게 하나도 없습니다.

 딴 힘은 뭐 그거는 전체가 다 견딜 수 없는 꺼풀 참 아주 박해스러운 멸시와  천대를 받을 수 있는 그 속에서 오는 '이는 네 육체가 너를 알게 한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너에게 알게 하셨다' 한 말씀대로 곧 영감으로만  그들이 견뎌냈지 외적으로는 견딜 만한 그런 아무 재료나 아무 뭐 힘이나 그런  가치가 하나도 없었다 하는 요것을 우리들이 또 단단히 기억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구약 속에서 자라나온 그 생명의 도도 그래서 껍데기는 너무 많고 속에  알맹이는 적었고 그 생명의 도가 신약 교회로 나타나는 새 움싹으로, 움이 나오는  것처럼 말아해 가지고서 움이 나와 가지고 나오는 과정이나 또 나와 가지고 얼마  동안 자라는 과정이나, 주님이 삼십삼 년 사 개월 동안 그렇게 사생활과 공생활  하는 것은 그 생명의 도가 자란 건이요 생명의 도가 다시 말하면 우리  사람들에게 점점 비추어서 발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도 역연 어떤 환경 속에서 자랐으며 어떤 그 방편과 순서를 따라서  자랐던가? 그런데 그들이 그 도가 예수님 자체도 그렇고 제자들도 그렇고, 그럴  때에 무슨 외래적인, 외래적인 그런 가치나 도움의 힘이나 그런 것은 하나도  없었고 전부 그것은 다 박멸해질 수밖에 없고 다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그런 아주  모양 없는 그런 참, 보배가 질그릇에 담겼다고 말씀하신 대로 그때는 뭐 질그릇이  아니라 참 흉악한 말할 수 없는 흉악한 껍데기 속에 들어서 나왔기 때문에  그들은 외래적인, 외부적인 외래적인 무엇에 털끝만치도 도움이나 뭐 위로나 받을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전부 그 속에 내적 영감 역사로 말미암아서만 그래  된 것이지 딴 걸로는 되지 안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러했고 또 예수님의 도가 이제 제자들을 통해 가지고서,  사도를 통해 가지고 이렇게 나타나는 성장 과정이나 아주 발전 과정, 그거 이렇게  자꾸 선전해 가지고 자꾸 이렇게 해서 퍼져 나가는 그런 과정이나 그런 과정은  꼭 보면은 순전히 안에서 나오는 그 힘으로만 됐지 외래적인 힘이라 하는 건  하나도 없었다 하는 이것을 우리가 깊이 좀 보고서 깨달아서 확신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참 제자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하는 그런 형편, 그때는 요새는 뭐 아무리 핍박이 있다  하더란대도 그래도 자기와 신앙 동지의 사람이 다문 몇 사람이라도 있을 수 있고  이래 끼어 있을 수 있지마는 그때는 이 제자들뿐이지 다른 사람들은 전부 적이  다 돼 가지고 있었던 그런 꺼풀 속에서 이 도는 자라나갔습니다.

 그라다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마지막 승천하실라고 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당부하시기를 '너희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허락하심을 기다리라.

그러면은 몇 날이 못 되어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권능 얻고 권능을 얻으면  너희들이 참으로 땅끝까지 이르러서 나를 세상에다가 전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구주로 전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도 왜 그때 그러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했던가?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 못박아 멸하고 난 다음이고 지금 부활 했다 안 했다  그때까지 모든 정권들과 또 바리새교 뭐 그 서기관 제사장 그런 사람들은 하나로  똘똘 뭉쳐 하나됐습니다.

 똘똘 뭉쳐서 하나되고 바로 예수님께 직속되어 있는 사도들과 문도들 그  사람들만 그렇지 밖에서는 전부 해치는 박해뿐이지 하나도 의지하거나 도움이  되거나 뭐 할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는 그말은 예루살렘에  있기가 견디기가 어렵기 때문에 떠나지 말라는 그런 부탁을 했는데 그래 그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을 붙잡고 예수님이 그와 같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안하면 몇 날 못 돼서 성신의 은혜를 네가 받아 가지고서 권능을 얻으면,  성신의 권능을 얻으면 땅끝까지 이르러서 내 증인이 될 수 있으리라.' 하는 요  약속을 해 주신 그 약속을 붙잡고 그들이 참고 견뎠습니다.

 견딜 때에 그 성경에 보면은 한 일백 한 이십 명쯤 됐다고 이랬는데 승천  직후에 그 말씀을 붙잡고 그들이 성신의 권능 얻기 위해서 참고 견디던 그  환경은 어떤 환경이냐? 다 죽음 속입니다. 하나도 의지할 게 없고 전부  자기네들을 죽일라고 하는 그것뿐이지 도움되는 거 그런 거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뭐 소유도 몸도 생명도 다 그것을 가치로 삼아서 거게 소망  두지 안하고 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아버지의 허락하신 그 성령의 권능을 얻는  데에 그 전부를 다 들여서 그 전부로, 성신의 권능 얻을라고 하는 그 사람들이  됐기 때문에 거기서 견뎠지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 자리서 튀어나갔지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것이 바로 신약 교회의 움싹이 요것이 제일 첫 잎사귀로 자라가는 때요 제일  일 순위로서 이 도가 전파돼 나가는 제일 첫 자욱이라.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 제일 첫. 자욱도 요 자욱이 땅위에는 의지할 것이 하나도 없고 순전히  그들은 주님이 말씀하신, 약속하신 그 약속 하나만, 주님을 든든히 믿고 확실히  믿기 때문에 주님과 주님이 약속해 주신 약속 그 두 가지만 붙들었지 다른 것은  그들을 해치는 것뿐이지 돕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신약 교회의 성장  초기라 성장 일호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신약 교회의 생명이요 종자요 그 생명이요 종자인 그 구원이  성장돼 나가는 과정 또 성장이라면 또 거기 대해서 잘못하면 오해하기 쉬운데  이제 발전돼 나가는 과정, 전파돼 나가는 과정, 그 과정에 일호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허락하심을 기다 리라. 그라면 성령이 오시면 너희들이  권능을 얻어 가지고서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서 내  증인이 될 수 있다.' 증인 될 수 있는 거,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 전해 줄 수 있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전해 줄 수 있는 그 권능을 얻기 위해서 그들은 그  예루살렘에, 말할 수 없는 큰 박해 중에서 있었습니다.

 그때는 뭐 군인들도 한 덩어리요 또 유대교인들도 다 한 덩어리요 또 그 모든  정치들도 다 한 덩어리요 뭐 그 외에 사람이 몇 사람 없으니까. 그 전부 다  단합해 가지고서 '예수 믿는 사람들 이거 예수 믿는 도를 완전히 박멸해야 되지  이걸 냅두면 안 된다' 하는 그런 아주 무섭고 혹독하고 세밀하고 잔인한 그런  어려움 속인데 그들은 승리를 했습니다.

 어려움 속에 무엇을 붙들고 그들이 거게서 참고 견뎠던가? 견딘 것은 두 가지를  믿고 의지했습니다. 주님의, 신실하신 주님을 믿는 것과 주님이 말씀하신 그 약속,  주님과 약속 그 둘을 붙들고,  그러면 그들은 둘을 붙들고 했는데 둘을 붙들고 할 때에 뭣을 지금 소망하고  그랬던가? 그들은 아무것도 소망하지 안했고 다만 소망하는 것은  하나뿐이었습니다. 뭐인가? 성령의 권능 얻어서 예수님을 증거 하려는,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성령의 권능 얻는 그것이 그들의 소망이지 딴 소망은 없었습니다.

 그들이 하늘나라에 소망하는 그런 것도 그저 예수님 믿고 예수님의 약속을 잡고  그 둘을 힘으로 삼고, 그 둘을 힘으로 삼고 성령의 권능을 받으면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다 하는 거 그 세 가지를 가지고 그들은 그 예루살렘의  어려움에서 피해서 도망치지 안하고 능히 거게서 참고 견뎌서 성신의 권능을  받기까지 됐건 것입니다. 그것이 신약 교회가 성장돼 나오는 형태요 또 그것이  바로 초보입니다. 바로 일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해 나오는 그 기간이 한 열흘 됐는데 열흘 되니까  오순절이 닥쳐서 오순절에 성령 강림이 있어 가지고 그래 성령의 권능을 받아  가지고 신약 교회가 자꾸 이렇게 퍼져 나가게 돼서 신약 교회가 건설해  나갔습니다. 전파돼 나갔습니다.

 이것이 신약 교회가 첫 움싹과 같은 아추 최초가 뭘로 됐느냐? 최초가 환경과  배경은 아무것도 무의 무탁할 수 있는 그런 환경과 배경이 됐다 그런 속에서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오늘 복음 운동이나 신앙 생활 할라고 할 때에 뭐 어떤 어려운  그런 환경이 됐다, 공산주의 그런 치하니까 어렵다. 공산주의 치하라도 거게도  오히려 신앙을 동정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끼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그때와 같이 그렇게 전적으로 박해로 아주 관영해 있는 그전 거와 같은  그런 배경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배경 속에서 신약 교회가  처음에 새 움이 나와서 자랐다.

 그러면 그 자랄 때에 어떻게 자랐느냐? 다만 주님을 믿는 것과 주의 약속해  주신 그 약속을 믿는 것 이 두 가지 믿는 것, 주님과 주님의 약속을 믿는 것과  그들이 소망하는 건 무엇이냐? 성신의 권능 얻어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요 하나  소망, 이러면 두 가지 믿고 하나 소망 가지는 것 요 세 가지로 가지고 신약  교회는 새 움이 터서 잘 자랐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가지고  그때에 하루에 삼천 명이 다 회개하는 그런 아주 무성하게 자라는 그런 자람을  봤습니다.

 우리가 여게서 오늘도 교회나 자기 개인 구원이나 자기가 목회를 하면 그  목회의 교회가 성장되는 것이나 이런 것은 요 형태를 떠나지 못합니다. 그때  형태와 지금 형태와 꼭 같습니다.

 그래서 혹 우리가 뭐 무슨 피조물로 어떤 것으로서 배경을 삼을라고 그런  배경이 혹 있을까, 그런 무슨 다소라도 그래도 내게 좀 도움이 될 수 있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그런 것을 우리가 생각을 가지는데 이 기독교라 하는 것은 처음부터  종자 때부터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는 환경의 종자도 이러하고 또 힘이 되는 그 믿는 것도  종자가 이 둘뿐이오. 종자 둘뿐이고 또 소망하는 것도 이 종자 이거 둘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예수님과 같이 되는 그 외에는 다른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로만 나간다는 요것을 우리가 단단히 기억을  해야겠습니다.

 그라다가 오순절에 성령 강림을 하셔 가지고서 거게서부터 하루 삼천 명씩  이렇게 신약 교회가 자꾸 건설되고 이렇게 전파해 나가서 신약 교회가 점점  가속도로 이렇게 성장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3장 1절 이하에 이제 본 나면서 앉은뱅이 요 형편도 요것도 이  신약 교회의 일면의 그 형태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  교회는 대체로 어떻게 생긴 교회인가? 그 외형은 신약 교회의 외형은 어떤  껍데기 모양을 가졌었는가?  그것을 우리에게, 환자가 있었는데 그래 그만 그런 일이 있었다, 역사적으로 그런  사람이 있었다 그렇게 알면은 아무 그뭐 우리에게는 복음이 되지 않습니다. 이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예정하셔 가지고서 그런 일을 했기 때문에 오다 가다가  그런 역사에 그런 사실이 있어서 그렇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영원 전 계획적으로 그런 순서를 해 가지고서 나면서 앉은뱅이를 나게 하셨고  있게 하셨고 그때 만나게 하셔 가지고서 이런 관계 한 것은 그것은 다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가르쳐 주시는 계시 기관이라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두 다  잠이 꽉 들었는데 그래 좀 어짜든지 들어 두십시오. 들어 두면, 들어 두면 나중에  가서 여러분들이 오랫 동안 힘을 쓰면 깨달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랬는데 그 외모는 처음에 보니까 첫째로는 나면서 앉은뱅이 일이 있었습니다.

나면서 앉은뱅이. 이것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입니다.

그뭐 도무지 무엇이든지 인생 걸음은 걸을 수 없는 완전한 병신입니다. 인생  걸음은 걸을 수 없는 완전한 병신 이런 병신인데 메어다가 놓을 때는 구걸하면은  같이 갈라 먹기 위해서 메어다가 놓은 그것이 이 신약 교회의 외형입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그런 것을 뭐 이렇게 아주 못쓸 것으로 볼 게 아니라 이게  지금 신약 교회가 자라가는 이 과정에 있어서 외형은 다 이러하다. 그러면 전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것을 메어다 놓는 것이 이거 교회들이다. 그래  교역자들이 자꾸 이래 사람을 주 모아 놓는 것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들을  메어다 놓는 그것이 교회의 외형이다.

 그랬는데 거게 많은 사람들은 지나가면서 그들이 말하면 뭐 물질이나 이래 주고  지나갔지 앉은뱅이 된 그자의 인생 문제를 영원한 문제를 해결해 주는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저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볼 때 성전 안에 있다고  말하지마는 성전 안에는 출입은 못 합니다. 그는 그 안에 들어가서 보면 아주  하나님 앞에 저주받아 가지고 성전에는 출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요 외부에서 볼  때는 성전 안에 있는 사람들로 그렇게 인정돼 있지마는 속에 들어가 보면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신약 교회 외형이니까 오늘 우리가 목회하면서도 그저 참 구걸하는 그런  것을 갈라먹기 위해서,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으로 성전 안에 있다고 하지만 병신  많고 그래 가지고 믿는 사람이 이래 구걸하는 행위, 다시 말하면 사람에게 무슨  덕을 볼라 하는 그것은 전부 다 구걸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다 성전 안에 못  들어가 구걸하는 사람들은 성전 안에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그거는 다 병신이기  때문에 구걸하고 병신은 성전 안에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 교회의 외형이기 때문에 오늘 사람이 인생 걸음은 하나도 걸어가지  못하고 항상 남에게 짐이 되고 인간으로 말미암아 얻기 위해서, 인간에게, 무엇을  얻어 볼라고 하는, 외나 교회에 알맹이 교회는 그런 게 아닌데. 알맹이 교회는  외부에서는 죽일라고만 달라들어서 전부 박해뿐이고 속에는 하나님께 얻는 것 그  하나뿐이지 그거 없는데 이제 이 신약 교회도 껍데기는 전부 암만 애쓰는 사람도,  메어다 놓는 사람도 인간의 덕볼라 하는 것 또 환자도 그런 것 그런 껍데기를  가지고 있는 그것으로서 그저 그게 교회 생활인 줄 알고 그렇게 살고 있다 하는  그런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 겁니다.

 이래서 자기가 아무리 목회를 해서 교인들을 이렇게 불군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나 안 만나나, 하나님의 성전 생활을,  성전과 제단과 경배하는 자는 측량하고 나머지기 성전 밖마당은 다 마흔 두  달이라 하면 신약 시대의 전체를 가리켜서 마흔 두 달인데 신약 시대의 전체의  사람에게 밟혀서 세상에게 종질을 하고 멸시받는 것이지 세상을 이기는 그런  자는 하나도 없다 하는 것을 말씀하신 말씀인데,  이래 이래 가지고 아무리 교회에서 전도해 가지고 교인을 만들어 가지고서 교회  나왔다 할지라도 항상 이 사람에게 소망을 가지고서 뭘 볼라 하는 이 구걸 생활  이것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구걸하는 사람들은 병신이요 병신은 하나님의 성전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니 인생이, 예수교는 정반대인데. 사람에게 덕보는 게 아니라 사람에게  덕을 보여 주지 사람에게 덕보는 거는 기독교가 아닌데 사람으로 인해 무슨 덕을  볼라 하는 그것은 벌써 인간병이 들어 가지고서 그런 것이니까,  인간병이 들어서 그것은 피와 성령과 진리와 하나님께 대한 소망으로 거듭난 그  새사람은 대주재인 그분과, 포도나무 뿌리 같은 그분과 연결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분에게 얻고 얻고 얼마든지 충만히 얼마든지 얻고 모든 피조물에게 줄  수 있는 것인데 지금 피조물들에게 뭘 얻어 볼라 하는 그것은, 그거는 완전히  땅에 속한 자요 병든 자이기 때문에 구원이 없다 하는 걸 여기서 우리가 한번  확정을 지울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예수 믿는 사람이 피조물로 뭣을, 피조물로 뭐 덕을 볼라고,  피조물로. 우리를 대속하신 주님 그분으로서만 뭐인가 자기에게 유익된 거 있지  그분 외에 딴것으로 뭐 얻어 볼라고 하는 그것이 내나 구걸 생활이요 성전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인데 이런 생활만 하고 있는 것이 신약 교회의 외부의  형태인데,  거기에, 베드로와 요한이가 거게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서 말하기를 '우리를  바라보라' 이라니까 그가 뭐 얻을까 싶어서 이렇게 주목해서 보는 것을 보고서  사도들이 말하기를 '내게는 네가 바라고 있는 그런 은 금은 없다. 다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내게 있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는  그것을 할 때에 매여 와서 이제까지 거기서 구걸하던 그 병신이 병이 나아  가지고 일어서서 걷게 됐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많은 신약 교회들 가운데에 어떤 사람이 있느냐? 구걸해  가지고서 구걸하는 것을 자꾸 가르쳐서 구걸해 가지고서 구걸하는 것을 같이  이렇게 나눠 먹기를 계획하는 그런 교회도 있고 또 거게서 사도들과 같이 '나는  은과 금은 내게 없다. 없다. 다만 내게 있는 걸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역사, 이름은 그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역사라 할 수 있으니까 예수님의 공로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과 금이라 하는 것은 이 피조물, 이 피조물 그런 것으로 소유 삼아  가지고 있지 아니하고 그런 소유는 다 자기는 자기 소유로 생각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주시면 보관해 가지고서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지 그거 암만 가지고  있어도 거게 소망 가지지는 안하는 거,  왜? 그게 암만 많아도, 많아도 그게 쓸모 없을 수도 있고 아무리 없어도  부족함이 없을 수 있기 때문에 필요 있는 쓸모 있는 거는 주님이요 또 주님이  없으면 다 그거는 아무리 많아도 쓸모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은과 금은 내가  가지고 있지 안하지마는 내게 있는 것으로 너에게 주겠다' 하고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서 그에게 준 것, 이것이 과연 신약 교회의 외형입니다.

 오늘도 교회 가운데 저런 교회도 있고 이런 교회도 있고 항상 업어다가 놓고 뭐  구걸이나 할라 하는 거 있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가진 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근본 문재를 해결지워서 완전히 병을 낫게 해 주는 그런 교회도  있고 이거는 다 외형적 교회인데 이거는 필연적으로 됩니다. 필연적으로  앉은뱅이를 낫게 한 거와 마찬가지로 이제 교회 들어오면 사람이 차차 차차 병이  나아서 중생도 되고 또 중생된 것이 성화도 되고 하는 이런 것은 다 교회의  외형이라 저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또 거게 셋째로는 사람을 구해 가지고서 구원해서 아주 기이한 그 성화를  일으켰습니다. 일으키니까, 일어나서, 그탄 그 병신이 일어났으니까 뭐 구걸할  리도 없는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놀라고 기이하게 보고 또 이제 비로소 베드로  이 사람들로 말미암아 성전 출입하는 그 일을 처음으로 했습니다.

 이래서 오늘도 교회가 이 세 가지 그 외형을 가지고 있다, 메어다 놔서 구걸하는  그런 외형, 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을 치료해 주는 그런 외형, 이라니까  모든 사람들이 기이히 여기고 놀라고 그 사람 병이 나아 가지고서 성전으로  출입하는 이런 것도 다 이것은 교회 외형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됩니다. 이거는  필연적으로 됩니다.

 뭐 이거는 교회라면 그 사람이 인간병이 낫기 마련이고 또 낫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은혜로 말미암아 낫고 또 교회라면 그 교인들이 그뭐 생활이  으례히 그 성결하나 그 부정하나 그런 거 상관 없이 어짜든지 수입 오면은 수입  들어오면 교회 유지하고 이렇게 할라 하는 그런 것은 다 필연적으로 된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이 교회는 필연적으로 이거는 다 된다. 이것이 교회 외형인데,  그러면 교회의 이면에 내부는 어찌 되느냐? 그 속에 뭐이 그러면 중요한 게  들었느냐? 이거는 다 교회가 다 됩니다. 이 처음에 앉은뱅이 메어다 놓고  구걸하는 것 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게 한 것 또 그 사람들이 이 베드로  이 사람들을 보고서 따르고 뭐 뛰고 굴리고 성전에 출입하고 이라니까 모든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는 것 이거는 교회마다 안 되는 교회가 없습니다. 옳은  교회라면 다 이거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면 다 이거는 다 됩니다. 다  되는데 그 다음에 어려운 거 있습니다.

 인제 그 다음에 이면에는 뭐이냐? 첫째가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불잡고  따랐습니다. 요것이 신약 교회의 이면입니다. 속에 이면. 나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고 따랐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놀라고 모든 백성이 다 쭉  모아 들었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교파든지 어떤 교회든지 요 표면, 신약 교회의 그 외면 표면  요거는 안 되는 교회가 없습니다. 요거 다 됩니다. 요거 다 되고 교파도 다  됩니다. 어떤 교파든지 시작할 때마다 요거는 다 됩니다. 요거는 다 되는데 그  다음에 알맹이가 잘못돼 가지고서 다 그만 성공을 하지 못하고 실패합니다.

 그 속에 알맹이는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고 따르는 걸 보고서 모든  백성들이 놀라서 주 모아 들었다' 이랬습니다. 요것을 제가 오래 전부터  말했는데도, 우리 총공회도 그렇습니다. 총공회서 지금 속은 다 돼, 속을 그뭐,  첫째 외면은 다 됐습니다. 뭐 사람병도 고쳐졌고, 하나님의 기적도 나타났고, 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가 모든 거 해결 지우려 하는 그런 것도 다  되어지고, 다른 사람이 놀라기도 하고 다 그거는 됐습니다.

 우리 총공회도 모두 '총공회가 제일이다. 총공회 이거 뭐 기도실 지어 놓고  이라니까 우리도 그를 따라가야 뇌겠다.' 하는 그런 건 다 됐는데 이제 문제가  뭐이냐 하면은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사람들이 기이해하고  놀랬는데 요게 지금 문제입니다.

 나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지 아니하고 그만 나았으니까 은혜 그런  거는 다 잊어버려 버리고 제가 스스로 나은 것같이 배은 하고서 왕될라 하는  그런 일들이 많습니다.

 우리 진영에서도 그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얼마든지 전파하고 좋지마는  자기가 낫게 된, 낫게 된 신앙의 선배 또 은사의 기관 그것을 잊어버리면 볼일 다  봤습니다. 그러면 그만, 그게 연결 줄기인데 아무리 호박 넝쿨이 크게 무성해도  외나 뿌럭지 그 줄기에 불어야 되지 그 줄기가 끊어져 버리면 별수 없이 말라  버리고 마는 거와 같습니다. 그것을 아마 깊이 느끼는 게 좋을 것입니다.

 거게 둘째로는 모든 사람들이 모여 가지고서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고 이라는 거  보고 뭐 놀라면서 아주 뭐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할 만치 그때에 베드로와  요한이가 모든 사람 그 안전에 아주 인기가 굉장히 높았습니다. 높고 모두 다  주목하고 아주 이리 됐는데,  그래 됐을 때에 백성들 앞에서 '왜 너희들이 나를 주목하느냐?' 하면서 요한과  베드로에게 영광 돌리는 그 영광을 베드로와 요한이 자기네들이 받지 안하고 그  영광을 똑똑히 구별해 가지고서 '이는 우리들이 한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을 똑똑히  구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 취할라고 하지를 안했습니다.

 하나님 영광을 가로취하지 아니하고, 거게 있는 모든 집합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 취하도록 하는 것이 환경의 사람들입니다. 환경의, 가로  취하도록 하는 것이 환경의 사람들인데 그 영광을 가로취하지 안하는 것이  교회의 이거 이면입니다.

 이 교회 속에 이것이 없으면 뭐 껍데기로 앉은뱅이가 낫고 또 뛰어 돌아다니고  하는 것은 교회마다 다 됩니다. 안 되는 게 아니고. 이거는 다 되는데 인제  그보다 높은 차원에 올라가 가지고서, 뭐이 되느냐?  그럴 때에 어려운 것이 나은 자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고 따르는데 붙잡지  안하고 낫고 나니까 그뭐 상관 없이 제가 스스로 나은 것처럼 날뛰는 거 붙잡고  따르지 안한 그것이 지금 망하는 것이고 붙잡고 따르는 그게 이제 속에 알맹이  귀중한 것이고,  붙잡고 따르면서 영광을 저희들에게 돌리니까 그 영광을 하나님이 보실 때에 그  영광을 제가 가로취하지 안하고 그 영광을 완전히 하나님께 돌리고 그 영광을  저희들이 하나도 받지 안했습니다. 요것이 교회의 또 속에 알맹이입니다.

 알맹이고 그라면 신약 교회의 근거는 뭐인가? 그러면 신약 교회의 뿌럭지, 신약  교회의 근거는 뭐인가? 신약 교회의 외면을 말했고 이면을 말했고 근거를  말했습니다. 근거인데 근거 중에 하나는 뭐이 하나인가?  '왜 그렇게 여기느냐?' 여게 말하기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들이, 신앙에 그들의 근본의 조상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요 또 이삭이 믿음의 조상을 계대한 계대 조상이요 또 야곱이 계대  조상인데 이들도 그 계대 조상을 잊어버리지 안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조상 우리들의 하나님이라' 이래서 신앙의 그 계보를  무시하지 안하고 꼭 계보를 지켜서 계보에게 속했습니다. 그라면서, 그것이 인제  교회의 뿌럭지입니다.

 신앙은 계통이라, 신앙은 반드시 인간을 통해서 있지 혼자 이래 자립이나 독렵이  없고 꼭 전도를 통해서 연결로 되어지는 것이지 독립으로 되어진 거 아닌 것이라.

 둘째로는 뭐이냐? '그 종 예수를' 말했어, 그 종 예수를. 그러면 기독교의 근거는  뭐이 근거냐? 기독교의 근거는 자기 위에게 순종하는 그것이 기독교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재자들이 만일 예수님께 순종하지 안하면 안 되고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순종하지 안하면 안 되는데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그러면 셋째 근거는 뭐이냐 하면 그 자체가 영광스러운 모든 일이나 무엇이나  성공 기독교의 성공이나 승리나 기독교에게 좋은 것은 다 종 노릇함으로서만  된다. 순종으로만 되지 딴걸로는 되지 않는다 하는 요것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우리 조상의 하나님' 하는 그것이  인간으로서 요거 올바른 근거가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였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등이시요 또  본체시지마는 종이라는 그 방편을 통해 가지고만 그 모든 영광된 성과는  이루어진 그것을 우리는 교회의 근거로 삼아야 되겠습니다.

 또 그러면 신약 교회가 타락한 것은 뭘로 타락을 했느냐? 신약 교회의 타락은  뭘로 타락했느냐? 신약 교회의 타락은, 신약 교회의 타락이 그것이 구약  교회에서부터 시작돼 가지고서 타락이 돼서 나왔는데 교회의 타락은 어떻게 돼  가지고 교회의 타락이 되는가?  되는 것은, 우리의 현실에서는 반드시 교리와 신조와 행정, 교리 신조 행정 이 세  가지가 그 현실마다 놓여 있는 것인데 그 현실에서 교리 신조 행정 요것을 바로  취하지 못하고 잘못해 가지고서 요게서 잘못해 가지고서 타락했습니다. 그러면  타락은 교리 신조 행정 여게 있어서 타락된다.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해서 타락이 됐는가? 현실에서 자기를 세우고, 자기를  세우든지 주님을 세우든지, 자기를 세울라 하면은 주님을 벼려야 되고 주님을  자기에게서 세울라 하면 자기를 버려야 되는데 우리의 그 현실은, 우리의 현실은  전부가 우리에게 현실마다 교리 신조 행정이 없는 때가 없습니다.

 우리 현실에는 교리 신조 행정이 없는 때가 없는데 그것은 다 뭐 하는 것이냐?  그것은 자기하고 주님하고 바꾸는 것이요 또 세상하고 하늘나라 하고 바꾸는  것이라. 그러니까 자기를 취할라 하면은 주님을 내 줘야 되고 또 주님을 자기가  잡을라 하면은 자기를 내놔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 현실은 전부가 바꾸는  시간이오. 그러니까 자기와 땅의 것은 '내가 단연코 말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는 그말은 날마다 바꾼다 하는 그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현실에는 반드시 교리 신조 행정이 있는데, 교리 선조 행정이라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명령하시고 교훈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그말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그게 있는데 이것은 다 뭐하는 것인가? 이거 뭐입니까? 우리 현실에 하나님께서  현실마다 교리 신조 행정 없는 것이 없는데 그거 다 하나님의 우리에게 주시는  교리요 신조요 행정인데 그것은 다 뭣하는 것인가? 그것은 전부 자기 내놓는  것이요 자기 죽이는 것이요 그것으로서 주님과 바꾸는 것입니다.

 자기와 주님을 바꾸는 것이요 또 자기의 이 땅에 있는 소유와 하늘의 소유를  바꾸는 것이요 전부는 다 이미 예수 밖에 내가 가지고 있던 그 모든 것을 예수  안에 있는 것으로 바꾸게 하는 그런 기회입니다.

 그게 아닌 것 하나도 없는데 바꾸게 하는 그 기회인데 어떤 사람은 그 현실에서  자꾸 자기에게 있는 것을 내주고 주님을 차지하고 하니까 자꾸 바꿔집니다.

바꿔지면은 자꾸, 자꾸 바꿔지면 무슨 봉우리가 커집니까? 그렇게 자기 내주고  주님 바꾸는 사람은 뭣은 줄어지고 뭣은 커집니까? 예? 자기는 줄어지고 주님은  커집니다.

 또 현실마다 그때에 이제 하나님의 말씀과 교리 신조 행정은 전부 나 내놓고  하나님과 바꾸라고 하는 것인데 바꾸지 안하고 지금 자꾸 그거 그 말씀을 어기는  것은 바꾸기가 싫으니까 어겨서 자기를 보존하고 자기를 수입하고 키우고  하나님을 내줍니다. 내주니까 차차차 그라면은 나중에 하나님은 작아지고 주님은  작아지고 자기는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단연코 말하노니 날마다 나는 죽는다' 그말은 바꾼다 그말입니다.

바꾼다 그 말이오. 이거 내놓고 저거 바꾸는 것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바꾸지  안하고 자꾸 그러니까,  그래 나중에 여기 보니까 15절에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메시야를, 임마누엘과 메시야를 대대로 소망하고 뭐 일생  동안 소망하면서 소망하는 선전을 했고 소망하는 또 생활을 했고, 소망하라고  선전도 했고 팔기도 하고 이렇게 밤낮으로 말하는 것이 메시야 영접하고 세상 것  내놓으라 하는 이런 말을 한 것이 그들의 전생활입니다. 서기관들의 생활이요  제사장들의 생활입니다.

 이 생활인데 어떻게 이렇게 메시야 영접하고 메시야 모시고 하는 게 저거들의  생활이었는데 어떻게 해서 이 살인 강도와 나중에 한 덩어리가 됐을까? 살인  강도와 한편이 되고 메시야를 죽이는 데 그렇게 나아갔던가? 이것이 신약 교회의  마지막에 결말의 형태입니다.

 이래서 '생명의 주를 너희들이 죽였도다 이러니까, 어떻게 살인 강도의 편이 돼  가지고서 생명의 주를 죽이기까지 그렇게, 근방에도 가지 안하고 천리 만리  거리가 멀은데 어떻게 그 살인 강도와 그렇게 한 덩어리가 되고 주님을 죽이는  그렇게 주님과 대립이 되는 그 일이 됐던가?  그것은, 그것이 날마다 자기 현실이라는 현실에서 자꾸 주님은 팔고, 주님은 팔고  자기는 세웠고 주님은 팔아서 돈은 모았고 주님 팔아서 지위는 모았고 권세는  모았고 이라니까 주님과 교리와 신조를, 신조대로 하면은 자기는 죽고 주님은  살고 이제자기는 팔아 가지고 썩을 것을, 저 파는 것인데.

 주님의 교리와 신조는 썩을 것을 파는 것이고 썩지 않은 걸 사는 것이고 약한  것을 파는 것이고 또 강한 것을 사는 것이고 혈육의 것을 파는 것이고 신령한 걸  사는 것이고 자꾸 이것인데,  이러니까 이것을 팔기 싫으니까 부득이 그 교리의 반대하는 것을 하다 보니까  주님 팔고 이렇게 자꾸 해서 일생 동안 모아 놓은 게 돈 모아 놨고 지위 모아  놨고 명예 모아 놨고 또 권세 모아 놨고 다른 사람들이 저거를 환영하는 환영  모아 놨고 이것만 일생 동안 모아 놨으니까 이거만 태산 무더기 모양으로 강하고,  이거는 강해 이거는 그렇게 보배로 여겨서 모아 놓은 이거는 태산 무더기같이  크고 이제 주님은 자기가 뭐 번번히 배반했기 때문에 자기에게 그렇게 귀중하게  여겨지지를 아니하는 그런 이제 형편에 도달을 했는데 자기의,  이제는 예수님의 교리와 신조가 행정이 맞은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교회와  신조와 행정이 맞은 것을 알고 옳다는 것을 긍정을 했습니다. 긍정을 했지마는  그들이 자기가 이제까지 모아 놓은 것 그것을 내주기 싫으니까, 그것을 내주기  싫으니까 부득이 예수님을 내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내주면 그냥 내주지 어떻게 예수님을 내주면 예수님을 그만 안 믿으면  안 믿고 말면 말지 그 살인 강도하고 그렇게 한 덩어리가 됐던가? 그 어찌 그래  됐습니까? 어찌 살인 강도하고 한 덩어리가 됐을까요? 그냥 안 믿으면 안 믿고  말면 말지 어떻게 살인 강도하고 한 덩어리되고서 예수님을 죽이는 데  이르겠습니까? 그거는 마지막에 요거는 요런 데에 요런 절전에 도달하는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그때에 자, 살인강도 이름이 뭐입니까? 바라바? 바라바인데, 하나씩을 내주는  그런 형편이니까 '예수님을 그러면 너거 규정대로 해 가지고서 지금 예수라 하는  분을 내줄까?' 예수를 내주면, 예수를 내주면 저거들의 계획이 헛일이기 때문에  바라바를 내줘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되기 때문에 바라바를 내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이제까지 일생 동안 모아 놓은 것, 일생 동안 저축하고 일생  동안 모아 놓은 것 그것이 그 가치로 여기고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것을 안  내줄라면, 안 내줄라면 예수님을 죽여야 되는데 예수님을 죽일라면은 바라바를  구출해야 예수님이 죽지 바라바를 구출 하지 안하면 예수님은 죽일 수 없어.

 하나씩 살리기로 했기 때문에 빌라도가 절기에는 한 사람 살리니까 '예수를 살려  줄까?' 이랬으니 예수를 살려 주느냐 바라바를 살려 주느냐 둘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바라바를 살려 달라 해야 예수님을 죽이라는 것이 되기, 때문에 바라바를  살려 주고 예수님을 죽여 달라'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일시에 된 게 아니라 일생 동안 그 현실 현실에서 자기는 그 귀한  것을 그걸 가치로 삼아서 모았기 때문에 마지막에 주님을 팔게 되는 그런 것이  되어졌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도 오늘 교리와 신조와 행정이 옳은 줄 알면서, 옳은 줄  알면서 어떨 때는 돈 때문에, 옳은 줄 알면서 어떨 때는 사람 때문에, 옳은 줄  알면서 어떨 때는 가족 때문에, 옳은 줄 알면서 어떨 때는 자기의 지위나 권세나  명예 때문에, 어떨 때는 옳은 줄 알면서 자기 생명 때문에 이렇게 자꾸 팔아서,  예수는 자꾸 팔아서, 한번에 파는 게 아니라 예수는 자꾸 파니까 이제, 파니까  자꾸 나중에는 큰 예수가 참 조그만한 뿌스러기같이 남아 있고 자기가 그래  귀중히 여겨서 자꾸 이거 취해 놓은 것은 그거 그렇게 크게 되다 보니까 그런  생활을 해서 모은 사람이 마지막에 자기의 소유나 몸이나 생명을 내주고  예수님을 주로 영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이렇게 모시는 것도 건설구원에 있어서  단번에 되는 것이 아니고 일생 동안 노력해서 어느 것을 하느냐? 어느 걸  취하느냐 하는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신약 교회 마지막에  위험성이 이것이라, 일반적으로는 이 결론이 다 이런 결론을 짓고 마는 것인 것을  우리가 좀 알아서,

 그래 저는 그렇게 생각해 봤습니다. 신약 교회의 외면은 그 나면서 앉은뱅이, 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가진 사람이 이 살릴 수 있다는 거, 뭐 둘은  가지지를 못해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란다고, 이래 가진 사람이 가졌지 은도 금도 뭐 세상에 뭣도 가지고  이래 또 둘은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잘 경험합니다.

 이거 둘은 못 가져. 이거 가질라면 가지고 저거 가질라면 가지고, 그만 요거  가질라면 조거 내놔야 되고 조거 가질라면 요거 내주고 이라기 때문에 이 신약  교회에서 자기가 옳게 목회를 하고 신약 교회의 신앙 구원을 이룰라고 하면,  자타의 구원을 이룰라고 하면은 내게는 가진 것이 은이나 금이나 세상 물질  그거든지 예수든지,  물질이든지 예수든지 둘 중에 하나니까 예수 가지든지 물질 가지든지, 둘 가질  수는 없으니까 이제 그것을 안 가지고 예수님을 가진 사람이라야 자타를 구원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자타를 구원할 수는 없다 하는 것을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되겠고,  이러기에 이것은 필연적으로 교회들이 다 되는데, 이거는 뭐 교회들이 다 지켜  나오기가 쉬운데 그 어려운 거, 어려운 그것이 뭐이냐 하면은 교회의 이면인데,  속에 내부가 어찌 되느냐 하는 그것인데 신앙의 위치를 계대를 잊어버리지 말 것,  그 계대가 중요한데.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라' 하는 그 말씀은 네가 배운 것이 곧 사람에게 배운  것인데 하나님에게 배운 것이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서 너에게 가르쳤기  때문에 네가 하나님에게 배웠다는 것을 아느냐? 네가 또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사람에게 배웠다는 것을 알라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뉘게 배웠다는 것을 네가  아나니 하는 것은 하나님과 은사 기관인 사람을 합해 가지고서 가리킨 대로  그렇게 말씀을 한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요거 집에 가서 여러분들이 자꾸 생각해 봐서 베드로와 요한을  그 나은 사람이 붙잡은 이게 큰, 이게 중요했습니다. 붙잡으니까 사람들이  모여들었지 뭐 그때 그라고 난 다음에 낫고 나서 그 나면서 앉은뱅이가 제가  나은 척 하고 거기서 뭐 뛰고 좋기나 하고 그라면 하나 구경만 하고 이래 말지  그게 무슨 운동이 되거나 단체가 되거나 그럴 리는 없는 것입니다.

 또 그라고 나서 거기서 베드로와 요한이 있다가서 '이거는 내가 이렇게 했는데  또 네가 이렇게 했다.' 해 가지고 서로 거기서 무슨 만일 영광 싸움을 했으면은  그것도 그 뭐이 되겠습니까? 안 될 것입니다. 또 그러니까 요것을, 요한이는 여기  나서지 안해. 요한이는 베드로가 주체로 나와 가지고 이래 했기 때문에 요한이는  거기 나서서 말 한 마디도 한 일이 없어. 베드로 하는 대로 옆에서 협조만 하고  기도나 하고 이래 있었지 거게서 서로 할라 하는 그런 추태를 보이지 아니  했습니다.

 그러고 또, 따르니까, 우 따르는 그것이 이상했고 또 그 다음에는 그들이, 그리  아니면, 뭐 이렇게 참 능한 일을 하셨다고 이렇게 존대하면 떡 그 영광을 자기가  슬그머니 가로받을 게 있는데 그것을 엄격하게 따져서 '왜 너희들이 나를 이렇게  주목하느냐? 우리 개인의 무엇으로 된 줄 아느냐?' 요렇게 딱 영광을 똑똑히  구별해 가지고 하나님께 돌리고 그라고 난 다음에는 신앙 계대를 똑똑히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하나님의 종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였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였다.' 요렇게 어떻게, 이라기 때문에 그  교회가 바로 요거 돼 가지고서 올바른 교회가 성장됐습니다.

 이래서. 그랬는데 그 다음에 마지막에 보니까 너희들이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암만 그들이 생명의 주를 죽인 것도 참 그거는 이해 못 할  상상 못 할 일이고 또 살인 강도하고 어떻게, 생명의 주는 반대하고 살인  강도하고 하나가 됐겠습니까? 그들이 살인 강도하고 하나될 마음은 없는데 그  나중에 가서는 어짤 수 없이 살인 강도하고 하나되게 되는 그것도 필연성이요  생명의 주를 죽이는 것도 필연성의 일이라.

 이것은 매일 매일의 그 교리 신조 행정을 파는 데에서, 그것을 팔아서 자기를  샀고 그것을 팔아서 자기 지위나 권세나 소유나 명예나 영광이나 이런 걸 샀고,  그런데 이 기독자는 자기를, 자기와 모든 소유와 그런 생명을 교리 신조를 따라서  팔아 가지고서 이제 주님을 사는 거,  그러면 주님을 자기가 뒤에 가서 주님의 가치가 자기 소유보다 크다 자기  몸보다 생명보다 크다 하는 것은 자꾸 주님을 모아 놓으니까, 이거 암만  금싸라기도, 나 그전에 거창서 그랄 때에 금굴을 팔라 할 때 내가 봤는데 이 금이  많이 나나 안 나나 이래 갈아 보면은 그 얍작하게 그거 갈면 금이 나와요, 이래.

나는데 그까짓 거 금은 금이지마는 무슨 가치 있습니까?  금도 그것도 인제 주먹덩이만하면 가치가 있고 또 커단하게 크면 자꾸 많으면  가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이 나에게 가치 있게, 내 생명보다 뭐 귀하게 보이는  것은 이 조그만한 보스새기로, 보스래기에서 '나보다 주님이 크다' 소유보다  주님을, 돈보다 주님을, 지위보다 주님을, 자기보다 주님을, 자기 목숨보다 주님을,  이제 평소에 자꾸 이제 그것을 많게 크게 요렇게 모으고 모으고 이래 놓으니  나중에 커다라이 이만치 모여지니까! 그라니까 이제 크게 보이니까 팔기가 싫지.

그렇지 않해?  암만 금덩이가 좋지마는 그까짓 거 뭐 눈꼽재기만치 있으면 무슨 가치가 있어?  다른 거 더 가치가 있지. 이러니까 평소에 네가 자꾸 이렇게 주 모으면 커지고  그러면 가치가 커져지고 헐어서 없애면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요거 자꾸 가서  생각하고 생각해서 그렇게 우리가 신약 교회에 그런 강령되는 몇 가지를 생각해  가지고서 그렇게 구원이 되도록 합시다.

 다 같이 통성으로 한번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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