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마음과 온전한 마음으로 주를 믿자

 

1987. 5. 6. 새벽집회 <수>

 

본문:히브리서 10장 19절∼39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란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우리가 전 시간에 공부하는 중에 “적은 누룩이 얼마나 많은 가루를 다 부풀어 썩게 한다” 하는 그 비유를 배웠습니다. “천국은” 했기 때문에 이 누룩을 좋은 것으로 해석하는 그런 사람들도 있고 또 이 누룩을 못쓸 것으로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여게서 가르치기를 이 누룩을 좋은 것으로 해석을 했습니까 못쓸 악한 것으로 해석을 했습니까? 좋은 것으로 해석을 해서 배운 사람들 손 들어 봅시다. 녜, 한 사람도 없습니다. 녜, 저는 이 악한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것이 아닌 이 마귀의 것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우리 신앙 생활에 마귀의 것, 잘못된 하나의 교리와 신조, 성경을 잘못 깨달은 그 하나의 잘못 깨달음 그거 하나로 말미암아 전체가 다 썩는다.

어제 어떤 사람이 와서 ‘서 말이라 했으니까 그 서 말이 뭐인지 뜻이 있을 거 같은데’ 그렇게 말했습니다. 녜, 서이라는 그 숫자는 얼마든지 이렇게 저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을 이분설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또 삼분설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분설은 영과 육으로 그렇게 둘로 나누고 삼분설은 영 혼 몸 이렇게 셋으로 나누는 사람도 있습니다.

셋으로 나누든지 둘로 나누든지 그것은 오늘까지는 다 정통으로 인정을 하고 나옵니다. 영육 둘로 나눠서 이분설로 말하는 것이 유리한 점도 있고, 유리하다 말은 우리 구원 이루는 데에 좀 유익이 있다 말이오. 유리한 점도 있고 또 삼분설로 하는 것이 유리한 점도 있습니다.

왜? ‘육’ 하면 그만 고기덩어리, ‘영’ 하면 마음까지 다 합해서 영, 이렇게 영육을 잘 경계를 분별하지 못하는 그런 면에 있어서는 삼분설이 유익합니다.

“영과 혼과 이 관절 골수 이 몸” 말하는 그것이 유익하고, 또 육을, 심신은 다 물질이요 우리에게 영의 요소가 있는 것은 영이니 영의 요소와 물질의 요소를 분별하는 데에는 이분설이 유리합니다. 이해됩니까? 육은 물질에 속했고 영은 영물이라 영에 속했고, 이렇게 물질과 영을 구별하는 데에는 이분설이 유리하나 또 이분설이 불리하고 분명치 못한 것은 ‘영’ `우리 마음' `우리 몸' 이렇게 셋이 그 모든 작용도 각자 할 수도 있고 또 각각 존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이걸 이분설 하는 사람들은 분별을 못 하기 때문에 “영과 혼과” 말하는 것은 이것은 부인해 버립니다. 부인해 버리고 이분설로 말합니다. 마음과 몸을 둘로 구별해서 분별하는 데에는 삼분설이 유리합니다.

이러니까, 그 어떤 이의 해석하는 사람들은 가루 서 말은 영 마음 몸이라 그렇게 해석을 가질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해석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거게 대해서는 가르친 것이 무슨 뜻으로 서 말을 말했는지, 혹 영이라고 말하면 영은 중생된 영은 깨끗한 영이요 완전한 영인데 그 영이 그 부풀어질 수가 있겠느냐? 영이 가루어지고 파묻혀지기는 합니다. 중생된 영이 가루어져서 파묻혀서 영이 영 구실을 하지 못하는 그런 일도 있기는 있습니다마는 그것을, 부풀었다면 썩는 것인데 그렇게는 보지를 않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비유한 것은 가루 서 말 아니라 석 섬을 말해도 될 것이고 두 말을 말해도 될 것이고 거게는 그 비유에는 다만 적은 누룩이 많은 가루를 부풀게 해서 썩힌다. 적은 누룩이 많은 가루를 다 변질시킨다 그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서 말이나 두 말이나 거게 대해서는 나타내는 그 중요한 뜻이 없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다만 그 누룩은 교훈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이요 곧 교훈은 행위를 가리킵니다.

행위와 교훈은 하나입니다. 자기의 지식과 행위는 하나입니다. 행위는 지식에서 나오고 또 지식은 행위에서 나와서 서로 관련성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지식만으로 행위와 상관없는 지식이라면 그 지식은 행위에는 이해를 주지 못하는 그 지식이나 지식은 반드시 그 행위의 좌우를 주관하고 있는 것인 것을 우리는 다 공통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제도 많이 말했지마는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이 신구약 성경에 모르는 것은 많이 있습니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제쳐 두고 그것은 죽는 날까지 바로 알기를 힘쓰는 일을 계속하고 또 자기가 바로 안 것은 행하다가 하루 일흔 번씩 일곱 번 실패를 할지라도 다시 일어나서 행하여 아는 대로 다 실행을 할려고 애를 쓰는 이 두 가지 노력은 죽는 날까지 우리가 계속 하여야 할 노력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모르는 것은 상관없다고 제거해 버려서는 안 됩니다. 또 우리가 행하지 못하는 것은 행할 수 없으니 상관없이 버리면 안 됩니다. 모르는 것은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만나질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어 주시리라” 하는 그 방편은 우리의 전신앙 생활 각 부분과 종류에 다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모르면 구하여야 하겠고, 주님에게 구해야 되겠고, 또 잊어버렸으면 찾을라고 애를 써야 되겠고, 또 자기가 아직까지 들어가 보지 못하고 밟지 못한 그런 세계는 들어갈려고 자꾸 문을 두드리며 애를 쓰면 들어가지고, 내게 필요한 것이 모자라는 것은 다 충족시켜 주시고, 내가 필요한 것을 가졌다가 잊어버렸든지 아직 필요한 것을 내가 잡지를 못했을 때에는 찾으면 다 찾는 자마다 잡는다 이랬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도리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해 주시마고 약속하셨는데 제가 그 모든 것을 제해 버리는 자는 또 하나님의 말씀이 정죄합니다. “버리고 행치 않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다 지키고 행하는 자라야 크다” 또 “하나를 제해 버리면은 이 구원에서 제해 버린다 더하면 여게 기록한 형으로써 더 가하게 한다” 이 하나님의 성구가 있기 때문에 이 성구에서도 심판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공심판과 사심판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에는 보면은 “인간이 행위로써는 의를 얻을 자 하나도 없다” 하는 것을 갈라디아서 전체에다가 다 기록해 놨습니다. 이래서 갈라디아서는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 정금같은 율법이라 그렇게 모두 다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거게 중심이 뭐인고 하니 의는 인간이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을 수 없다. 율법을 다 행해야 의가 되는데 율법을 다 행할 자는 하나도 없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율법은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율법이 다인가? 그거 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지의 지혜로 입법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 범위는 심히 넓고 또 높이와 길이와 깊이는 심히 무한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누가 그것을 다 행할 자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대속하신 것은 이것을 위해서 대속했기 때문에 자기를 위하여 대속해 주신 것을 믿는 믿음으로써 사람이 의를 얻는다. 행함 가지고 의를 얻을라고 하는 자는 예수님의 피와 상관이 없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갈라디아서에 이렇게 믿음으로 의를 얻지 행함으로 의를 얻지 못한다 이 말씀한 것은 행위구원에 대해서 말씀한 것이 아니고 기본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신 그 의입니다.

사람들이 여게서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그 의가 행위구원과 기본구원에 대한 그 의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래서 기본구원과 행위구원, 기본구원은 사람들은 하나도 힘쓰지 안하고 본인이 알기도 전에, 알기도 전에 다 이루어져 있는 그 구원 그것이 기본구원인데, 기본구원은 순전히 예수님의 대속을 우리가 다 알지 못하나 그분이 전지의 지혜로 입법해 놓은 하나님의 공심판을 주장하고 있는 모든 완전 그 율법, 온전한 그 율법, 이 완전 율법 하나님의 공심판 이 법을 예수님이 대행하셔서 통과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본구원에 대한 것입니다.

이래서 이 구원에 대해서는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구원이라.” 또 에베소서에는 거저 주신 구원이라 이랬습니다. 순전히 은혜로 주신 구원이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런데 구원을 하나로 보니까, 구원을 하나로 보니 예수님의 이 대속하신 의는 그 구원을 위해서 대속하셨기 때문에 구원을 하나로 보니 ‘예수님의 대속의 의면 다 되지 인간이 행할 필요가 뭐 있나? 행함이 그의 구원에 대해서 관련이 있겠나?’ 이렇게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러면 “행한 대로 갚는다” 하신 그런 말씀은 무슨 말씀이냐? 그것은 그저 교훈적으로, ‘행해야 되지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그런 것을 하나 협박적으로 위협적으로 이렇게 의를 권면하는 말로 한 것이지 그것이 심판의 정죄까지 따라가서 관련된 것은 아니라 이렇게 해석을 하는 것이 그것이 일반인들입니다.

이것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구원에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을 둘로 나누지 안한 사람은 대속의 이 의를 믿음으로 의를 얻는 그 의는 구원에 대한 의이기 때문에 그 의는 건설과 기본과 다 그 구원에게 다 해당되기 때문에 행할 필요는 하나도 없습니다. 혹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접으로 행한다 할지라도 안 행해 봤자 그거 가지고 조그마치라도 안 행했다 하는 그런 부담으로나 책임으로나 거게 대한 보응은 하나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을 혼합시켜 가지고 둘로 나누지 안한 이것은 우리 기독자의 구원에 대해서 제일 큰 누룩덩어리입니다. 제일 큰 누룩덩어리입니다. 이것으로써 구원을 얼마나 박멸하고 마귀의 수입을 얼마나 주는지 모릅니다.

또 중생된 영은 죄를 짓는다 안 짓는다 하는 것은, 중생된 영이 죄 짓는다 하는 것은 중생된 영이 뭐이냐? 영이 뭐이냐? 영관이 곧 마음이 영이요 영이 마음이요 이렇게 보는 것이요, 중생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 하는 그말은 몸과 마음은 육에 속한 것이요 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모형으로 지은 신령한 것이다.

이러기 때문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것은 육이 아니고, 영으로 거듭난 것은 영이라 똑똑히 밝혔습니다.

그러면 마음과 몸을 육으로 보느냐  마음은 영이요 곧 영이라고도 하고 마음이라고도 하니 마음이 영이요 영이 마음이라, 마음 이꼴(equal) 영, 영 이꼴 마음, 이성 이꼴 영, 영 이꼴 이성, 이렇게 영과 마음을 하나로 이렇게 보는 것과 영은 영으로서 영물이요 마음은 곧 육체의 신비한 것으로 물질에 속한 것이라.

영은 영의 것이요 마음과 몸은 물질의 것이라 이렇게 분류하는 것은 기독교에 다 강령들입니다. 중요한 강령들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영관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 하는 이것은 잘못되면 그 사람의 구원을 막 썩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또 구원을 하나로 봐 가지고, 기본구원에 대한 근거가 되는 예수님의 의를 건설 행위구원까지를 다 망라해서 하면은 그 사람의 구원을 완전히 삼켜버리는 전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건 중대한 문제입니다.

세계 신학자들이 중대한 문제인데 이걸 바로 구별해서 백 목사를 정죄를 해 버리든지 죽여버리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옳다고 하든지 여게 대해서 어쨌든지 머리를 써서 이 문제가 기독교 박멸이냐 기독교 성공이냐 하는 것의 분기점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이 중요성인 줄 알고 착념해서 연구해야 될 터인데 교리와 신조도 사욕이 있습니다. 악이 있습니다. 악의 교리와 신조. 자기 중심의 교리와 신조는 악입니다.

이는 교리와 신조는 진리이기 때문에 인간 수평선 이상에 무한한 이상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 수평선 이상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어데까지든지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그 지식 가지고 분석하고 연구하고 해석하고 자기의 주관을 거게서 가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이 진리 가지고 연구해서 이 중대한 문제가 기독교를 마구 통으로 삼키고 전멸을 시킬 수 있는 이런 교리 신조 이것은 신학자들의 책임일 것입니다.

만일 이것을 잘못해 가지고 구원에 손해갔다면 그 형벌은 전부 신학자가 다 받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하는 말이 틀립니까? 만일 교리와 신조를 바로 가르치지 안해서 교인의 구원이 잘못됐으면 그 심판은 그 교회 교역자 교훈 책임자가 그 형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스승된 자는 받을 심판이 크니라” 그러기 때문에 많이 스승되고자 하지 말고, “네가 옳고 바른 참된 것은 열방과 나라와 전부를 파괴시키고 파멸시키고 건설하고 뽑고 심는 이런 권위가 있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글거려서 대적하는 그것을 그 찔레와 가시같은 자들이라도 네가 상관하지 말아라. 듣든지 말든지 너는 옳은 것은 주장해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어제도 잠깐 말했지마는, 한 교리 신조가 잘못되면 그대로 믿는 자의 구원이 다 잘못 됩니다. 바로 가르쳤으면 제가 지키지 안해서 구원이 잘못된 것은 파수꾼에 상관이 없습니다. 바로 가르쳐서 지켰으면 그것은 제가 노력해 지켰기 때문에 자기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교인들의 구원 잘잘못은 제 행위에 속했으면 제가 책임지지마는 교훈에 근거된 것이라면은 그 교훈을 가르친 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모든 교역자들은 다 신학자들이 가르쳐 냈으니까 신학자들에게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자들이 틀리게 가르쳤다고 해서 신학자들은 틀리게 가르친 데 대해서 역력히 세밀히 절대성의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내 구원에 잘못된 것은 교역자 신학자가 잘못 가르치는 데에 원인된 것이기 때문에 내게는 상관이 없다 이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잘못 배워서 알아서 구원을 잘못 이룬 것은 잘못 가르친 자에게 책임이 있고 내가 잘못 배워서 구원 잘못 이룬 그것이 너는 잘못 배워서 구원 잘못 이뤘기 때문에 네 책임이 없으니 너는 좋은 구원 받으라 그래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래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역자가 잘못 가르쳐도 자기에게 성경이 있는데 성경에는 특별히 명백성이 있습니다. 성경만 보고 행하고 보고 행하면은 완전히 바로 깨달을 수 있는 그 능력이 안에 들어 있습니다. 또 성경에는 성신의 감화의 영감성이 내재해 가지고 있습니다. 또 이 말씀을 참되다 지켜 행하는 자에게는 그 행함을 통해서 그 사람을 성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이 말씀에 있습니다.

이 말씀은 독자적 권위성을 가졌습니다. 이 진리는 사람과 같은 수준이 아니고 이 진리와 성령과 성자와 성부는 하나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은 진리시라 말했습니다.

진리는 하나님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독자적 권위성을 가졌으나 진리는 하나의 이치요 인격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진리는 하나님이라 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은 진리라 이렇게는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의 뜻이나 그 진리는 하나님과 하나입니다.

이질적의 것이 아니고 동질 동성이요 또 동거 동행합니다. 사람과 하나님과의 차이가 있느냐? 진리와 사람과의 차이가 있는 거와 같습니다. 진리와 사람과의 차이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차이와 같은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데 하나님의 진리를 그것을 인간이 말한 것으로 알고 천주교에서는 교황 교리 무오를 말합니다. 교황이 깨달은 깨달음은 그는 성경과 같다 해서 그를 이 성경 진리 하나님의 뜻인 동등으로 완전 무결로 인정하는 거기에서 천주교는 부패하게 나왔습니다.

성경만을 믿지 안하고 교황의 그 주장과 깨달음을 믿었기 때문에 성경은 차차 차차 도태당해서 성경은 일반인들에게 보지 못하게 금했습니다. 금한 것을 역사가 다 알고 있고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됐기 때문에 천주교에서 지금은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개방을 시켰습니다.

그러면 성경을 전연히 보지 못하게 하고 교황이 깨달은 그 경문만 몇 가지를 가지고 말하고 교황이 인정하는 그 성구만 성경에 붉은 줄 쳐 놓고 붉은 글로 박아놓고 그리만 보게 한 그것이 어제 아레입니다. 인간은 망각성에서 망합니다.

일찍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긴 역사 로마 교회서부터 천주교가 나올 때까지 어떻게 나왔으며 중간에 어떻게 변질돼 행동했으며 오늘에는 어떻게 둔갑했는가? 그때에 역사한 영은 무슨 영이며 오늘에 역사한 영은 무슨 영인가? 눈이 길게 멀어서 원시하는 자, 전체를 보는 자 이자가 아니면 소경입니다.

이래서, 아무리 신학자가 잘못 가르쳤더라도 자기의 영원한 멸망과 구원을 그 일개 신학자에게 책임지울 수 없습니다. 신학자보다는 자기가 자기에게 더 책임이 있습니다. 전세계 신학자가 콩을 팥이라 해도 ‘많은 신학자가 말했기 때문에 따라갔습니다’ 하는 그것 가지고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는 못 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나 혼자라도 해서, 틀렸으면 틀렸다고 정죄하고 나가는 것이 진실한 자입니다.

또 교역자가 아무리 잘못 가르쳐도 교역자는 교역자대로 파수꾼의 책임을 지지마는 교인은 제 구원은 교역자가 돕는 일은 하지마는 자기를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잘못 가르친 것으로써 자기에게 구원에 손해는 보이지마는 잘못 가르쳐서 구원 손해본 그것을 복구시켜 줄 권리는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교역자가 아무리 가르친다 할지라도 자기는 정확무오한 성경이 있으니까 성경 보고 깨달으면 또 바로 깨달을 수 있다 했으니까 이 방법을 자기는 항상 가져야 되겠고, 또 깨달은 대로 실행하면은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 알지니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얼마든지 진리로 살 수 있는 이런 권위 있는 자도 되게 하신다고 성경 자체가 나하고 단둘이 붙어 가지고 된다고 했으니까 이 방편이 완전한 방편이요 든든한 방편이 아니겠습니까? 이런고로 우리는 자기가 성경을 가지고 증거받아서 이 도리는 옳다 바르다 하는 것이 인정이 되기 전에는 미결로 두고 여기에 전심 전력 기울여야 됩니다. 우리가 구원 이루기 위해서는 마음 목숨 힘 뜻 다해야 된다고 했는데 마음 다하고 목숨 다하고 힘 다하고 뜻 다하면 뭐 이룬다 했습니까? 뭣을 이룬다 했습니까? 영생 이룬다 했습니다.

영생은 생명이 아닙니다. 요것도 구별해야 됩니다. 영생은 생명이 산 생활을 영생이라 합니다. 생명이 없는 자는 영생하지 못합니다. 생명 가진 자라도 잘못 행동하면 영생은 안 됩니다.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없는 줄을 너희들이 알지 못하느뇨” 아무리 중생된 자라도 그에게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영생은 안 된다 이랬으니까 그러면 영생 안 된다는 그 영생은 무슨 구원입니까? 기본구원입니까 행위구원입니까? 이렇게 똑똑하고 분명한데 어짤라고 억설로 끌고 가는지.

시편 기자들이 “나는 완전하다. 나는 흠이 없다. 하나님이여, 나를 보십시오. 내게 흠이 있습니까? 네게 잘못됨이 있습니까? 내 부족함이 있습니까?” 이렇게 말한 시편 성구 해석을 어떻게 할 건가? 이것을 해석해 놓은 모든 신학자들의 그 주석가들이 ‘이는 과거에는 본능적으로 범죄했지마는 지금은 본능적으로 범죄하지 안하고 이는 원치 안하는 범죄가 됐기 때문에 자기 본질 본성은 그런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을 표시한 것이라’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어떻게 성경에 그렇게 어누리를 해서 성경을 기록했을까? 그러면 기자가 마귀지.

그것은 예수님의 대속을 입은 중생된 영을 말하고 영과 육이 일치될 때가 있습니다. 이래서, 하나님의 아들 됐다가 마귀 자식 됐다가 하나님 아들 됐다가 마귀 자식 됐다가 이리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로마서 8장에는 보면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탄식하며 고대하는 것은 양자될 것” 그러면 양자 안 됐다 말 아닙니까? “양자될 것 곧 그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육의 구원을 기다리느니라 말씀했습니다. 바로 그 위에 “영은 아버지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아바 아버지라 부른다” 그 위에 성구에 말해 놨습니다. 이 성구를 어떻게 할 겁니까? 옛날 예수님 당시에 성경을 아는 서기관들이 복된 사람이요 제사장들이 복된 사람인데 그 사람들이 복된 사람이 되지 못하고 복을 다 까불러 버리고 화를 가진 이유가 뭐입니까? 저희들이 깨달아 가진 교리와 신조, 저희들이 오늘까지에 행해 놓은 그 행위 그것을 절대성으로 보고 거게 맞으면 다 의고 거게 틀리면 다 죄로 요렇게 정죄한 그것 때문에 그 교리와 신조 모든 행사들이 자기 중심 자기 위주 자기 본위로 했기 때문에 우리 해석으로 말하면 그게 악이 됐습니다.

이랬는데, 예수님이 오셔 가지고 교훈하시고 행위하시니 예수님의 교리와 신조는 그들에게 다 적이 됐습니다. 대립이 됐습니다. 대립이 됐으면 내것이라는 것을 고집하지 말고 옳은 것을 찾아갈라고 했더라면 예수님의 교훈에서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데. 깜짝 놀랄 만치 이 지혜와 능력이 어데서 왔느냐고 깨닫고 난 다음에도 자기 주관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들이 망한 것입니다.

이래서 예수님을 부정하고 자기네들의 현존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현존 무대를 보존하기 위해서, 저희들의 명예와 지위와 권위와 그 모든 인기를 진리보다 크게 여겨서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서 했는데 예수님의 하시는 일이 자꾸 이적과 초인간의 능력이 나타나니까 방어하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이라다가 그들이 예수님이 죽기 전에 삼 일 만에 부활하시겠다고 했는데 과연 병정들을 첩첩이 지켜 놨는데 삼 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병정들이 기절해서 와 가지고 ‘부활하셨다’ 그만하면 그들이 다 잘못된 거 확실히 깨달을 수 있지 않습니까? 이래도, 그때는 교리 신조 지위 권세 명예 자기 활무대 그것만 희생될 것이 아니라 자기네들의 생명이 돌에 맞아 죽을 것이기 때문에 아까운 것이 더 하나 생겼습니다. 이래서 돈을 주면서 ‘너희들이 그런 말 하지 말아라.’ 돈을 주어서 군인들을 매수해서 ‘너희들이 자는 가운데 그 제자들이 도둑해 갔다 그렇게 말해라.’ 이래 가지고 돈 주고 매수당한 것이 지금까지 유대인 가운데에 얼마든지 꽉 퍼져 있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것을 전해서 퍼져 있고 안 믿는 자들은 그들의 편이기 때문에 가루고 이라니까 알쏭달쏭해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서 볼 때에는 이미 죽음은 죽어버렸고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서 섰으니까 그럴 때는 뭐이 후회될까요? ‘이미 죽는 목숨 죽어도 그때에 메시야를 옳게 증거하고 올 걸’ 하지 안했을까요? 예수님이 기적이 나타나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 먹인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습니까? 썩어 내음새 나는 사람을 살려내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습니까? 얼마든지 남고 남은 그 기적의 증거가 있지마는 그들은 뭣이 아까와 그리 했던가? 그들의 가진 것을 아까와서 내놓지 못해서 마귀 자식들이 됐습니다. 다 버려야 내 제자가 될 터인데 버리지 안했기 때문에 제자가 못 됐습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분들은 마귀 지식이 돼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분들은 다 지옥 가야 됩니까 천국 가야 됩니까? 지옥 가야 됩니까 천국 가야 됩니까? ‘그들은 다 지옥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은 너무 담대한 소리입니다.

우리는 그런 소리 못 합니다. ‘그들의 행위는 그러니까 행위구원은 헛일이지마는 택했으면 천국은 간다’ 요렇게 판정하는 것이 든든할 것이요 완벽할 것입니다.

이렇게 교리 신조에도 사욕이 있어서 악이 있어,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의 교리와 신조가 있어 그 해독이 신약 교회에도 휩쓸어서 신약 교회 전부가 다 천주 교회가 됐던 것입니다. 천주 교회는 과거 불의한 교권이 예수님 당시에 그렇게 악행한 거와 꼭 같은 성질의 것입니다. 다릅니까? 그랬는데 여게서 개혁하기 위해서 천주교에 쏠려가지 안하고 진리를 바로 깨닫고 증거하기 위해서 죽은 사람들이 수십만입니다. 수십만 명이 죽어서 이 개혁을, 타락하고 완전히 부패해진 천주교에서 개혁해 가지고 이 참된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이런 모든 개혁 교회들이 생겨졌습니다.

이런데 오늘 또, 신앙의 근거는 성경인데 신앙의 전 근거가 되는 신구약 성경 이 번역을 천주교와 합동 번역했으니 그 영은 누군지? 그 주장하는 영은 누구인지? 눈을 떠서 보라! 소경들아! 눈을 떠라! 너희들이 아무리 주장해도 하나님보다 크지는 못할지니라.

아무리 깨달아도 ‘다수가 있으니 다수를 대적하다가는 내가 몰려서 감옥 가겠다.

내 무대가 좁아지겠다. 사람들에게 인정이 점점 협소해지고 축소되겠다.’ 이 인본주의자야. 이 악한 자야. 그게 주님 중심이가 네 중심이가?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보느냐 인간의 입술들과 인간의 눈들을 보느냐? 눈 보고 사느냐 입 보고 사느냐, 하나님 보고 사느냐 하나님 심판 보고 사느냐? 여러분들 우리는 지극히 크신 하나님 보고 살아야 되고, 그다음에 볼 것이 있다면은 하나님의 심판 보고 살아야 되고, 그다음에 볼 것이 있다면은 부활 영원 무궁세계가 있는 것을 보고 살아야 됩니다. 이는 앞으로 등장될 것들입니다. 이는 앞으로 영계와 물질계의 것이 통일될 때에 그때에 왕노릇할 것들입니다.

“이런고로 네가 그리스도로 다시 살리움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게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느니라. 그분 발자취를 따라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너희의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옛사람은 죽었다.” 그놈이 들어서, 너 아닌 그놈이 들어서 너인 척해 가지고 네 심신을 다 꼬와서 전 멸망만 걷게 하던 그놈을 예수님이 다 대신 죽였다. 너는 죽일라고만 하면 된다. “너는 죽었다”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그놈은 죽었다. “너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났다” 성령과 진리와 영감으로 영 네 영은 살아났다.

너에게 주격은 살아났으니 이 주격에게 심신은 따라 순응하라. 그러면 네가 잘 되리라.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우리도 함께 칭찬과 영광 가운데 나타날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다. 성령은 우리 생명이다. 진리는 우리 생명이다. 우리 생명은 피와 성령과 진리, 예수님의 공로와 성령과 진리가 우리의 생명이 됐다. 그 힘으로 우리가 살아났다. 우리 힘은 그 힘이다. 우리 힘은 진리가 우리 힘이요, 영감이 우리 힘이요, 예수님의 대속이 우리 힘이다.

이러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있으면 점점 더러운 것은 소생돼서 치료되고 성장되고 네 마음에 그리스도를 잊어버렸을 때에는 썩는 것뿐이다. 죽는 것뿐이다. “너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에 그 영광 중에 같이 나타날 것이다. 너는 죽었다. 그러기 때문에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고 위엣 것을 찾으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래서, 구약 시대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다 그것은 실패된 자들은 다 지옥을 갔다고 봐야 될란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인도하셔 가지고 광야로 왔는데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믿지 아니하므로 다 광야에서 멸망받은 그들은 다 지옥 간 자로 봐야 될란지? 그들이 택함 받았으면 행위는 멸망받았지마는 영은 구원 얻어서 하늘나라에 갔을 것이다. 택했으면 갔고 택하지 안했으면 멸망받는다. 요렇게 보는 것이 옳을란지 그들은 행위 없으니까 다 멸망받았다 그렇게 보는 것이 옳을란지? 가라지는 남을 넘어지게 하고, 또 하나는 뭐라 했습니까? 불법을 행하는 자라 했으니까 요 불법 행하는 자는 다 지옥 가야지. 가라지가 지옥 가면은 다 불법하면 지옥 가야지. 내게 불법이 있으면 가야지. 큰 불법은 불법이고 작은 불법은 불법 아닌가? 하나님의 심판은 큰 불법은 불법이고 작은 불법은 불법 아닙니까? “모든 율법을 다 행했을지라도 한 법을 범하면” 뭐라 했습니까? 성경에 뭐라 했습니까? 이 성경을 모르니 탈이야? “모든 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말씀하지 안했습니까? 어떻게 할랍니까? 불법을 한 자, 남을 넘어지게 한 자, 넘어지게 한 일이 없습니까?  고린도전서 6장에 말씀하시기를 “우리도 다 그전에는 오만 죄 범죄해서 남을 범죄케 하던 자들인데 이제 우리가 이와같이 되지 안했느냐? 그들도 죄 가운데 있지마는 앞으로 희망이 있다. 계속해서 그들을 구속할라고 노력해라. 끝까지 견뎌라.” “말세가 되면 다 이렇게 강퍅한 자들이 되어서 자기를 사랑하고 진리를 거스리는 말을 듣기를 좋아하는 그런 때가 온다. 많은 사람들이 다 이렇게 다 돌아갈 것이다.” 그들이 멸망받을 사람이라면 너는 입 닫고 있지 뭐 때문에 멸망받을 사람을 자꾸 죄를 더 지으라고 자꾸 충격을 해 가지고 ‘해라’ `안 할란다' 죄를 더 많게 하는 자이냐? 그들은 어떻게 할 것이냐? 이대로 하면 너는 어떻게 되며 어떻게 될 것이냐? 기름 준비 못 해서 밤중에 불이 꺼져서 빛을 들지 못했으니 왜정 말년 그 밤중 신사참배 때에 예수 믿는 사람은 우상 숭배 안 해야 되는데 우상 숭배 안 하면 생명 떨어지니까 못 견뎌서 빛을 들지 못하고 다 빛이 없이 안 믿는 사람과 꼭 같이 우상 숭배 했으니 조선 교회에 우상 숭배한 모든 사람들은 어데로 보낼 건지? 어데로 보낼 건지! 어데로 보낼 것입니까? 슬기 없는 다섯 처녀가 다 지옥 가니까 너는 어데 갈 것이냐? 신사참배 한 너는 어데로 갈 것이냐? 공연히 깊이 생각지 안하고 양심 쓰지 안하고 진실을 가지지 안하기 때문에 참람되게, 남의 말은 식은 죽먹듯이 한다고 저는 택했으니까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니 문제 없다. 기름 준비가 무슨 상관이 있어? 보니까 슬기 있는 다섯 처녀는 다 기름 준비 다 됐는데. 나는 다 돼 있는데.’ 다 돼 있으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그것은 빛을 드는 것이라. 밤중에 빛을 드는 것이라. 밤중에 빛을 드는 건 뭐입니까?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말씀을 했습니다.

제 마음대로 해석합니다. 제 유익된 대로 해석합니다. 제게 좋도록만 해석합니다.

가라지 비유는 어떻게 할 건지, 열 처녀 비유는 어떻게 할 건지? 그물 비유에서 나쁜 것은 다 내버리고, 심판 때까지 같이 웅얼웅얼, 같이 찬송하고, 같이 기도하고, 같이 설교하고, 같이 예배드리고, 같이 복음 운동하고 이라다가 마지막 추수 때에 와 가지고 천사들이 다 구별했는데 그러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같이 예배보지마는 여게서 얼마나 유황불 구렁텅이에 던짐을 받을 자가 얼마나 많은지? 가라지가 얼마나 많은지? 같이 예배보고 같이 구원 운동하다가 마지막에 천사들이 와 가지고 가려서 다 거게서 유황불 구렁텅이에 던지지 안했습니까? 또 그물로 후어들여서 바다에서 그물로 훌쿼 들였으니까 바다는 이 세상인데 세상에서 다 예수 믿는 자로 구별해 가지고 십 년, 오십 년, 육십 년, 칠십 년 예수 믿었는데 마지막에 천사가 와 가지고 가려서 자기 중심자, 자기 중심자, 악한 자, 자기 중심자 그자는 다 유황불 구렁텅이에 던지지 안했습니까? 이것을 영육의 멸망으로 봐야 될란지 건설구원의 멸망으로 봐야 될란지? “그 행위가 남아 있으면 상을 받고 그 공력이 다 불타면 해를 보리니 저는 구원을 얻으나” 공력 다 불타고 구원 얻습니다. 공력 다 불탄 자로서 구원 얻는데 “저는 구원 얻으나 불가운데 구원 얻은 거와 같다” 하는 이거는 성구는 어짤랍니까? 성경에 있는 성구는 여러 번 말한다고 권위 있고 한 번 말한다고 권위 없는 것 아닙니다. 천 번 말한 것이나 한 번 말한 것이나 권위가 꼭 같습니다.

인정됩니까? 또 이렇게 예수님의 교훈 듣고 “이 지혜와 능력이 어데서 왔느뇨” 놀란 사람 그거 뭐인가? 그거 뭘로 봅니까? 악령의 감화로 봅니까 성령의 감화로 봅니까? 뭘로 봐야 됩니까? 악령의 감화로는 못 볼 것입니다. 성령의 감화로 봐야 될 것입니다. 그랬는데 자기 주관으로 돌아가서 부인하고 만 그것이 우리의 전생활 아닙니까? 우리 신앙 생활에서 우리가 얼마든지 체험하고 경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그때에 예수님 배척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으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은 다 그것을 지옥으로 보내야 될 건가 천국으로 보내야 될 건가? 보내기야 하나님이 보내지마는 우리는 어떻다고 판정을 해야 될 건가? 제가 판정했으면 판정한 대로는 책임을 가져야지.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경솔히 보지 맙시다. 그저 경솔히 해치워 버리지 말고 그렇게 단정지워 치워버리지 말고, 자기의 영원한 생사 화복이 거게 매였고 전인류의 영원한 생사 화복이 거게 매였기 때문에 이 일은 뭐 이 세계에 강대국이 망하고 흥하는 그까짓 거 몇억억만 배보다도 더 큰 문제입니다. 이 큰 문제를 어떻게 그렇게 경솔히 그렇게 바로 정죄해서 규정지워 치워버리고 맙니까? 이거는 너무도 담대한 일이요, 너무도 어리석은 일이요, 너무도 냉정한 일이요, 너무도 무자비한 일이요, 너무도 무책임한 일이요, 자기를 따지지 못한 자의 이 소행입니다.

거게 보면 멸망받는다 하는 그 멸망받는 사람들의 그 멸망에 자기의 행위가 가입 안 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자기는 어짤 겁니까? 이러니까 예수님의 대속을 어제 어떤 사람이 말하듯이 예수님의 대속을 끌어붙일 수밖에 없지. ‘예수님의 대속이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은 예수님의 대속 없습니까? 우리도 같은 죄 짓고 예수님의 대속 있다면 그 사람들은 또 같은 죄 지었는데 예수님의 대속 없습니까? 어떻게 예수님의 대속은 나하고 그 사람하고 생활은 꼭 같이 행동하고 더럽게 했는데 내게는 대속이 효력이 있고 그 사람들에게는 대속이 효력이 없습니까? 어떻게 미련한 다섯 처녀를, 이렇게 예수님을 배척해 버린 자들을, 예수님을 부인해서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을 다 지옥에 간 자라 불택자라 그렇게 단정지워서 담대히 말합니까! 모든 신학자들이여! 조금 자중하고 조금 자기를 생각하고 냉정스러운 양심으로, 양심은 자기편 된 것은 양심이 아니라, 양심이 썩었어. 자타에게 끌리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진리에만 소속해 가지고 피조물에게 대해서는 독립성을 가진 것이 인간의 양심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이러기 때문에 네가 양심을 써서 좀 생각해 봐라. 그러면은 이 문제가 해결이 될 것입니다.

이런 성구가 한 군데 두 군데가 아니라 많이 있습니다. 이러니까 가서 잘 생각해서 어느 걸 주장하든지 주장을 하십시오. 내가 주장했으면 그대로 심판을 받아야지.

히브리서 10장 19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성경 내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예수의 대속의 피를 힘입어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예수님이 대형했기 때문에 죄에 거리낌 없고 대행했기 때문에 의에 거리낌 없습니다. 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 말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들어갈 수 있다 말입니다. 하나님의 공심판 통과로 담대히 들어갈 수 있다 그말입니다.

하나님의 공심판은 휘장입니다. 휘장 너머 있는 지성소는 심판 너머 있는 영원 무궁세계입니다. 휘장 밖에 있는 성소는 오늘에 교회입니다. 성전 밖마당, 성소 밖에 있는 성전 밖마당은 속화된 교회들입니다. 왜? “성전과 제단과 경배하는 자들만 측량하고 나머지기는 측량하지 말고 마흔두 달 동안 이방에게 짓밟히게 하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버렸기 때문에 세상에게 짓밟혀서 세상에 이용물이 되고 놀음거리 됩니다.

그들을 멸망으로 볼 게 아니라 나도 그와같이 하나님이 버리면 그와같이 될 것이기 때문에 소망 가지고 우리는 죽는 날까지 그들을 구원할라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당연한 일입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 길이요 산 길이요” 새 길이요 산 길이라, 이거는 영생길이요 새 길이요 산 길이라, “휘장의 곧 저의 육체니라” “휘장은 저의 육체니라” “휘장은 저의 육체니라” 예수님의 육체로 이 휘장이 찢어지고 열려졌습니다. 예수님의 육체로 우리의 공심판은 갈라졌습니다. 알겠습니까? 예수님의 대형 대행으로 하나님의 공심판은 우리에게는 쫙 갈라져서 우리는 공심판에 아무도 우리를 공심판에 우리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왜? 죄 없는 완전한 의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의 육체는 휘장이요 곧 하나님의 공심판입니다. 알겠습니까?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이 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말씀합니다. 구약 교회 제사장은 다 신약에 나타나신 이 제사장의 예약적 제사장이요 모형적 제사장입니다. 이라다가 예수님이 제사장이 나타나서 제사를 완전히 완성했을 때에 구약 제사장의 제사는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휘장이 찢어졌고, 또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에 무덤이 열렸고,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오셨을 때에 자던 성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에 바위가 갈라졌습니다. 모든 죄악의 세력은 깨졌습니다.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믿음으로 뿌림을 받아” “믿음으로 뿌림을 받아” 나는 그렇게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완전한 행위 한 것이 없지마는 예수님이 내 대신 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내 대신 형벌 받았기 때문에 나는 형벌 안 받았지마는 죄의 형벌 다 받았으니까 남아 있는 이것은, 형벌은 받고 남아 있는 이것은 예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대신 모든 의를 다 행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이행했기 때문에 나는 하나도 행하지 안했지마는 나는 행한 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믿음으로 나는 주님의 것 됐습니다.

아직까지도 자기가 자기 것으로 아는 사람은 주님의 대속과는 건설구원에는 상관이 없습니다. 알겠습니까? 건설구원에는 상관이 없어. 기본구원에는 “우리 행위대로 된 것이 아니고 영원한 때 전부터 하나님이 은혜로 이렇게 하시기로 작정해서 거저 주신 은혜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구원은 믿음으로 되는 것 아니오. 그러기 때문에 기본구원 영 구원은 영원한 때부터 우리는 죄 정함을 받지 않기로 작정돼 있고 예수님이 오셔서 대속하셨기 때문에 그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기본구원은 된 것입니다.

우리의 기본구원 영 구원 얻는 것이 영이 만들어지고 난 다음입니까 그전에 이 구원이 됐는데 구원된 것으로 만들어졌습니까? 영이 만들어진 것이 뒤입니까 구원된 것이 뒤입니까? 뭐이 뒤요? 우리 만들어진 게 뒤요. 그전에 이 구원이 설정돼 있었습니다, 설정돼.

“마음에 뿌림을 받아” 인제 나옵니다. “양심의 악을 깨닫고” “양심의 악을 깨닫고” 위에 “하나님 앞에 담대히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은 길로 지성소에 담대히 들어간다” “새 길을 걸어간다” “이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된 걸음이라” 요게서 우리가 이미 얻어 놓은 구원을 말합니다.

구원을 우리가 얻어 놨습니다. 이 구원은 아무도 뺏들지 못합니다. 우리가 평생 죄를 지어도 이 구원은 죄로 인해서 죄 때문에 이 구원이 없어지지를 못합니다.

이렇게 완전한 구원을 이미 우리가 받고 있습니다. 이 구원이 우리 영 구원입니다.

기본구원,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된 것도 기본구원이요 우리 행위로 된 것 아니오.

천국 가는 것도 기본구원이요 예수님의 공로로 된 것이오. 공심판 통과도 이것이오. 중생된 것도 이것이오. 영생 얻은 것도 이것이오.

이런데 아직까지 구원을 받지 못하고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한다는 것, “힘써 구원을 이루어 가라” “더욱 힘써 구원을 이루어 가라” 아직까지 미결된 구원이 있습니다. 영은 양자됐기 때문에 “아바 아버지라” 양자의 영을 받아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나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가 된 우리들까지도” 우리들이니까 단수는 아니고 복수입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우리들” 성령의 처음 익었다 말은 성령의 첫 결과라 말입니다. 성령의 첫 결과가 뭐입니까? 택한 자들의 영을 중생시킨 것이 성령의 첫 결과입니다.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억해입니까 순조로운 해석입니까? “우리들까지도” 중생된 영 단체가 말합니다. “우리들까지도 탄식해서 고대하는 것” 뭐? “곧 양자될 것” 영은 양자가 됐는데 양자가 아직까지 안 되고 미결된 거는 뭐입니까? 우리의 심신의 기능입니다. “양자될 것 곧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그러기에 우리가 부활하는 것은 기본구원입니까 건설구원입니까? 기본구원이요.

부활하는 것은 기본구원이요, 기본구원. 이거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다 부활받아요.

그러나 우리 기능이, 부활은 같이 받았는데, 부활은 같이 받았는데 어떤 자는 그 심신의 기능이 충만하고 어떤 자는 심신의 기능이 하나도 없어. 이러니까 하늘나라에 쓸모가 없어. 하늘나라에 활동력이 없어. 하늘나라에 가 가지고 봉사할 힘이 없어.

이것은 세상에서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봉사한 자라야 하고 세상에서 봉사에 능숙한 자라야 해. 이것을 연습하고 연단받고 연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를 입었나니 너희들이 이런 저런 여러가지의 시험을 당할 때에 잠시 근심하게 되지 안할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의 믿음이 금을 연단하는 것보다도 더 보배로워” 더 깨끗하다 그말이오.

연단하고 연단해서 이런 환난 저런 환난에서도 요동치 않는 그 믿음, 요동치 않는 그 심신의 기능, 이것을 칭찬과 영광과 존귀로 관씌운다고 말했습니다.

오만 죄 다 지은 그자와 생명 바쳐서 주님의 대속의 공로를 보수한 자와 같은 대우되는 것이 그것이 공평입니까?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 우리가 각각 드러나” 뭐라 했습니까? 선악간에 행한 대로 갚음을 받는다고 하지 안했습니까? 이 성구는 어떻게 하고 예수님의 대속이면 다라고 이렇게 범벅타령 마구잡이로 도매금 많은 이 마귀 말을 하고 있습니까! 이거 우리가 참 얼마나 기막힌지 생명을 바쳐서 외쳐야 될 때입니다. 외쳐야 합니다. 생명 바쳐 외쳐야 해! 잘못된 신학자는 바짝 콩가루같이 빠사지고, 잘못된 교리와 신조는 빠사지고 올바른 교리와 신조가 살아나서 모든 사람들을 살려야 할 때입니다.

뭐 어데를 가요, 뭐? 미국을 가요 일본을 가요? 여게 죽은 자가 제일 많아.

거게는 가서 사람 만날라 하면 만나기 힘든대요. 여게는 사람이 바글바글해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어.

어떤 사람이 미국서 복음 전하러 한국 와 가지고 ‘아이구’ 여게 가 봐도 아이들이 바글바글, `아이구 이걸 어짤꼬?' 저게 가 봐도 아이들이 바글바글 ‘아이구 이거 어짤꼬?’ 미국은 아이 하나 만날라 하면은 하루 종일 애써야 하나 만날까 말까 하는 그 나라에 있다가 여기 보니까 막 보배가 바글바글해.

우주보다 큰 생명이 바글바글해. 그 마음이 놀래지만 안하고, 버리지 안하고 그대로 계속하면 하나님은 그자의 하나님으로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양심에 뿌림받다니? 예수님이 내가 잘못된 행위를 그저 없앤 게 아니고 그 형벌을 낱낱이 받아서 우주적인 고난을 받았습니다. 내 범죄한 그 형벌을 다 받아 가지고 그 죄가 사죄된 것입니다. 그냥 말로 된 것 아니오.

예수님이 내 죄의 형벌을 어떻게 받았는가? 제가 죄의 형벌은 안 받지마는 죄지은 것으로 형벌과 비슷한 징계를 받는 데 봅니다. 네가 징계를 받느냐? 네 죄값으로 징계 받느냐? 그거는 형은 아니다. 그와 비슷한 종류인데 징계받을 때에 ‘하, 이렇게 이 죄의 징계가 이렇게 크거든 멸망으로 형을 받은 냉정스러운 형을 받는 데는 어떨까?’ 징계는 사랑의 아버지 어머니가 희망을 가지고 사랑으로 그에게 매를 침과 같은 징계고 형은 원수가 냉정스럽게 ‘요놈 꼬시다’ 하고서 냉정스럽게 형을 주는 형이요 예수님은 냉정스러운 형을 받았소. 우리에게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 징계하는 것은 자비의 사랑으로써 매가 마음대로 오지 못하고 오다가가는 그쳐지고 당신 종아리부터 먼저 치고 우리 종아리 칠 수 있는 이런 형입니다.

알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우리 양심이 살아난다 말입니다. 양심의 악을 깨닫는다 말은 양심이 살아난다 말이오. 양심도 악해져 버렸어. 양심도 자기 중심의 양심이 됐는데 양심이 예수님의 피뿌림을 받아 가지고 이제는 악을 깨닫게 됐어.

예수님이 형받아 죽은 것은 무슨 형이지? 악으로 행한 것을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행동한 그것을 예수님이 형벌 대신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내가 행하지 못한 그 모든 것을 예수님이 대신 하나님의 전지의 입법을 대신 행하느라고 죽기까지 하셔서 행했습니다. 죽기까지 해서 행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법을 지킬라 해서 어려울 때마다 주님은 그 억억만 배도 더 되는 것을 다 대신 지켜 행하시느라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예수님의 죽으심은 한 죽음이지마는 그 속에 분류하면은 세 가지 죽음을 했습니다. 우리 형을 대신해서 죽으셨고, 우리 형 때문에 죽으셨고, 우리가 행할 것을 대신 하나님의 입법을 완수하기 위해서 죽으셨고, 행하다가 죽었으니까, 행하다가 죽으셨으니까 살아 있으면 남은 것 행할 터인데 행하는데 죽였으니까 행하지 못하구로 중단해 죽였으니까 죽인 자가 책임 있지. 이러니까 마귀는 실패하고 패전하고 주님은 이기셨어! 하나는 하나님 아버지와 화친하기 위해서 화목의 제물로 죽으셨어.

이렇게 주님이 대형 대행 대화친의 이 죽으신, 피를 본다 말은 죽으심을, 피흘려서 죽지 안했습니까? 이 피를 말한 건 죽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대형 대행 대화친의 죽으심을 깨닫고 보니 양심이 살아납니다. 양심이 살아나.

과거에는 양심도 마귀에게 삼키워져서 악의 양심 원죄의 양심이 됐었는데 이제 보니까 예수님이 이 대속하신 그 피공로를 인해서 “양심의 악을 깨닫고” 이제 양심이 살아납니다. 양심이 살아나. 양심이 살아나고 난 다음에는 산 양심을 따라서 복종만 하면 됩니다.

산 양심 따라 복종하면은 산 양심은 어디로 인도합니까? 산 양심은 어디로 인도하는 인도자입니까? 내 모든 마음을 통솔해 가지고 진리로 인도합니다.

성령으로 인도합니다. 어데 갈라고? 어데 갈라고? 예수님의 열한 가지 구속, 일곱 가지 대속과, 여덟 가지 대속과, 열한 가지 구속 그것 찾아 갈라고, 그것으로 살라고.

택한 자로 살라고, 아버지 아들로 살라고, 공심판 통과한 의로운 자로 살라고, 죄에대해서 사망에 대해서 마귀에 대해서 자유자로 자유 생활 할라고, 하나님을 향하여 진리 영생할라고, 영감 영생 할라고, 만물의 중보인 제사장 생활 할라고, 선지 생활 할라고, 선지 생활이 복의 기관이라. 우리가 말하는 데에 그대로 그 복이 다 돼요.

여게서 지금 말씀한 이 말씀이 전부 뭐이 됩니까? “주인이 그 곳간에서 새 것과 옛 것을 내오는 것이라” 새 생명에 속한 것과 멸망한 거, 옛사람과 새사람, 멸망할 것과 영생하는 새 것을 그대로 내오는 실상이다. 실물이다. 실물이다, 실상이다, 실물이다. 실물을 받아라! 새 것을 받든지 옛 것을 받든지 자유로 선택하라! 바로 이것이 실상이다. 논리만 아니다. 말뿐만 아니다. 바로 이게 실상이다. 바로 이것이 심판이다. 바로 여게서 결정된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제자가 누군데? 천국 배워서 천국같이 된 것이 제자지. 천국이 뭐인데? 주님 모신 곳이 천국이지. 성전이면 천국이지. 성전이면 천국 중에 천국이오. 알겠습니까? 자기 속에 주님 모셨으면 자기는 천국이오.

성전돼도 천국이오. 천국보다 더 좋은 성전이오.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몸을 맑은 물로 씻었다 말은 이 몸은 우리의 육체를 가리켜 말합니다. “맑은 물로 씻었으니” 하나님께서 선포해 놓으신 이 약속을 인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사죄 칭의 화친 받았으니 “맑은 물로 씻었으니” 더럽히면 안 돼.

조그매라도 더럽혔으면 즉시 이 두루막을 빨아야 돼.

“씻었으니” 씻었으면 어짜라 말이요? “참 마음과” “참 마음과” “참 마음과” 예수를 아무나따나 예수님의 대속이 있으니까 아무나따나 죄 지을 대로 짓고 마음대로 짓고 수지는 제가 다 먹어버리고, 제 마음의 수지 몸의 수지 이놈은 전부 다 돈에게 다 주고, 인간에게 주고, 제 욕심 또 제 차지하고 다 갈라먹고 찌끄러기 못쓸 거 이것 가지고 하나님 섬기는 거 하나님이 분해서, 30절에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그의 백성이라면 누구라요? 택자요 불택자요? 택자라고 봐야 될 것이라.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하나님의 손을 제가 요리 조리 숨어 빠져서 천국 갈 수 있어? 안 돼. 안 돼요.

그리스도의 심판을 제가 빠져 달아나지 못해. 하나님의 이 약속 법이 있는데 이걸 어겨서 제맘대로 빠져 들어갈 줄 알아? 가라지야 곡식아 같이 너울거려 놀지마는 마지막에 판단이 있다. 한 그물 속에서 같이 놀지마는 마지막에 가려서 하나는 멸망시키고 하나는 구원시킨다. 멸망을 어디다 시키느냐? 유황불 구렁텅이에 시킨다. 슬피 울며 이를 갈며 있다. 네 심신의 기능이 거게 가 가지고 슬피 울면서 이를 갈며 있다.

영이 안 가는데 어떻게 희로애락을 알고 지정의를 알아? 영이 죽어서 없는 아무것도 없는 거와 같은 그럴 때도 우리는 희로애락 지정의를 다 알았다. 아픈 것도 알았고, 평안한 것도 알고, 좋은 것도 알았다.

영은 빠져 하늘나라 가 버렸고 그 형체는 다 부활해 갔지마는 속에 희로애락을 다 아는, 기능이 알지 껍데기가 압니까? 껍데기가 아는 것 아니야. 형체가 아는 것 아니라. 속에 기능이 알지. 이러기 때문에 아픔을 느껴도 기능 차이에 따라서 아픔을 느끼는 것이 다릅니다.

이 기능은 지옥에 가 가지고 고통을 당하는데 ‘이거는 천부당 만부당한 설이라!’ 요 주장의 설이 나쁘면 내가 심판받을 것이고 요 주장이 옳으면 하나님은 내 하나님 돼서 증거할 것입니다! 여러분들.

과거에 여게서 집회 올라올 때 내가 말하기를 “주님이여, 인간들이 다 시시비비를 말하는데 뉘 말이 옳은지 압니까? 주님이 말씀한 것보다도 더 능하게 말씀할 자가 누가 있습니까? 아무리 주님의 말씀을 대변하지마는 주님이 직접하신 것보다 인간들이 주의 말씀을 대변하는 것이 그보다 더 능하게 하겠습니까? 주님이 하셔도 ‘우리가 믿을 만한 표적 내놔라’ 풍랑을 잔잔케 할 때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때에, 죽은 나사로가 살아날 때에,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이 살아날 때에 모든 사람이 보고 ‘이 어짠 일이냐? 이는 참으로 하늘로서 온 선지자라.’ 당신도 인간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표적이 있을 때에 그들이 인정하지 안했습니까? 우리를 대변시켜 놓고 아무리 주의 말씀을 대변한다 할지라도 주님이 ‘이는 내 대변이다. 내가 말했다.’ 하는 것을 인정시키는 표적을 주시지 안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거게 뭐 표적 행해서 누구 명예받고 권세받고 영광받을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다 진리를 알기 때문에 주님이 하지 안한 것 없고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아는데 백 목사 우쭐해서 올라가지 안할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보십시오. 나는 그것으로써 내가 올라갈 그런 지식을 가지지 안했습니다. 올라가는 것이 화인 줄 아는데 화를 자취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당신이 당신을 증거하십시오.” 내가 그것 말하고 그것 기도하고 그번에 왔었습니다.

이번에는 그 기도를 내가 하지를 안했습니다. 그저 낫아 달라고만 했습니다.

그때는 그것을 기도하고 왔습니다. 그때에 육백여 건이 기적이 나타났고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병이 자기,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제 눈으로 봐. 그것이 백삼십오 종이 나타났어.

자기가 내치 해도 안 되던 무좀병, 발사이에 무좀병 나은 그거는 그 기적은 기적 아닙니까“ 죽은 자 살아는 기적과 그 기적과 다릅니까 같습니까? 같습니까 다릅니까? 전능자가 했기 때문에 같애. 그분에게는 같애. 받는 자에게 따라서 그걸 많이 주면 도로 그것 가지고 죄지을 것이기 때문에 적당하게 다 당신의 전지한 사랑이 선택해서 결정지운 것이지 그 능력은 같애. 나를 치료한 능력은 같애.

“마음에 뿌림을 받아” 이것이 우리의 행위구원입니다. 행위구원을 이루는 데는 “마음에 뿌림을 받아” 예수님이 뭣 때문에 죽으셨느냐? 그분이 죄 때문에 죽으셨고, 순종 의 때문에 죽으셨고, 하나님 배반치 안하고 하나님과 화친 때문에 죽으셨으니 내가 죽어도 이제는 죄짓지 안해야지. 죽어도 의는 놓지 안해야지.

죽어도 하나님 배반하고 우상 섬기지 안해야지. 천조대신 섬기지 안해야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이것이 내 중심이로구나. 이것이 내 중심 이것도 내 중심, 내 중심, 내 중심인 나 그놈은 어떤 놈입니까? 내 중심인, 내 중심으로 살았다 ‘나’ 하는 그놈은 어떤 놈입니까? 그게 자기 아니라. 요걸 똑똑히 알아요.

“악을 깨닫고” ‘나 나 한 이놈이 이거 순전히 악이로구나. 이거 내가 아니로구나. 나를 죽인 그놈이로구나. 원수인 그놈이로구나.’ 나는 어떤 나입니까? 예수님의 대속을 받은 내가 내입니다. 틀립니까? 예수님의 이 예정부터 예택서부터 예수님의 열한 가지 구속을 받은 내가 내입니다. 내가 내입니다. 주님의 피에 팔린 내가 내입니다. 참 내입니다.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해서 사는 내가 내입니다. 완전히 주님의 것이 된 내가 내입니다.

주님의 종이 된 내가 내입니다. 주님의 성전된 내가 내입니다. 참 내입니다.

주님의 지체가 된 내가 내입니다. 주님의 몸이 된 내가 내입니다. 주님의 신부가 된 내가 내입니다.

신부가 뭐이야? 신부라 하면 남녀 성교하는 것만 생각해. 아니야. 신부라 하는 것은 짝을 배우자를 말하는 거라, 배우자. 나의 배우자는 주님뿐이라! 내가 상대하는 자는 주님뿐이라! 아무도 없어! 주님만이 나와 상대라. 이 내가 내라. 이 내가 참 자기라.

주님의 제사장된 내가 내라. 피조물과 하나님과 그 사이에 중보 책임을 맡은 내가 내라. 피조물이 모르는 하나님의 그 뜻, 모든 생명과 축복이 되는 그 뜻을 피조물들에게 전달해서 전달된 그대로 행하니까 생명도 되고 평강도 되고 영광도 되고 승리도 되고 치료도 됩니다. 요 영광스러운 선지자가 내라. 왕이 내라.

이 내지, ‘이 돈은 내 돈이다.’ 그 나는 누구라요? `이 지위는 내 지위다.

이것은 내것이다. 이 지식은 내것이다.’ 그 나는 누구지요? 나는 누구지요? 그 나는 누구요? 그 나는 누구요? 참 자기요? 참 내입니까? 이 열한 가지 외에, 주님의 것된 거 외에, 주의 종된 거 외에, 주의 성전된 것 외에, 주의 지체 몸된 것 외에,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해서 사는 것 외에, 제사장 선지 왕노릇 하는 이 외에 그 외에 돈을 위해서 살고 지식을 위해서 살고 세상 부귀 영광을 위해서 살고 어쨌든지 예수님에게 속한 것 이것, 주의 것으로 예수님에게 속한 것이 이것으로 살지 안하고 그외에 딴것으로 사는 자기, 그게 자기인가? 참자기인가? 예? 뭐이라요? 왜 대답 안 해? 참 자기입니까? 참 자기입니까? 내 가정 위해 사는 것 참 자기입니까? 아니오. 공부 위해서 사는 것 참 자기인가요? 자기 몸뚱이 자기 생명 위해서 사는 것 참 자기인가요? 아니오! 요거 똑똑히 알아요. 아니오. 그러면 먹어도 주를 위해서, 마셔도 주를 위해서, 살기도 이것 저것을 하는 것도 주를 위해서 하는 내가 참 내입니다. 요거 구별해야 돼요.

틀려요? 틀려요? 요거는 어떤 신학자라도 틀렸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라면 그것으로 더불어서 다 연상해서 그대로 분석해 나가면 확실한 정답이 나올 것입니다. 왜 썩을 것은 대가리 댕기고 궁구하고 왜 참된 것은 궁구하지 않는가? 궁구하는 그 자체조차도 너 아닌 악 그놈이 너를 거머쥐고 이용하는 줄 알아라! 네가 원수에게 붙들린 것을 알아라. 어리석지 맙시다.

“몸을 맑을 물로 씻었으니” 예수님의 대속을 입었어. 이제 흰옷을 사서 입었어.

입었기 때문에 이 옷만, 예수님의 대속을 입었으니 이 대속을 예수님의 대속을 벗지만 안하면 깨끗합니다. 예수님의 대속으로 씻었기 때문에 다시 더럽히지만 안하면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길 때에 베드로가 반대할 때에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지 안하면 나와 상관이 없다’ 하는 말에 깜짝 놀라서 ‘온 몸도 다 씻어 주십시오’ 하니까 ‘이미 목욕을 해서 전신을 씻었으니 발만 씻으면 된다'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완전히 구속함을 받은 자는 날마다 걸어가면서 행위에 나쁜 거 있으면 즉시 즉시 예수님에게 고해서 씻음받아야 됩니다. 대속받았으니 마음대로 죄지어도 된다는 것 아닙니다.

“참 마음과” 참 마음 가지고 주를 믿어야 됩니다.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참 마음, 참 마음, 참 마음은 무슨 마음이요? 참 마음은 양심이 인정하는 마음이 참 마음입니다. 양심에 자책할 것이 없이 주를 믿어야 합니다! 내가 양심에 자책할 것을 찾지 못하나 눈이 어두워 찾지 못하기 때문에 이로써 내가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 알지 못함이 없으신 그분이 심판 세워놓고 나를 심판할 터이니까 그때 가서 어찌 되나 해서 내가 옳다 한 것도 다시 더듬어 보고 옳다 하는 것도 다시 더듬어 보고 씻어서 깨끗해진 것도 다시 씻어보고 씻어보고 그날까지는 발발 떨면서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 서는 것이 우리들의 정상적인 자세인데, ‘예수님의 피 있으니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 슬기 없는 다섯 처녀는 멸망하기로 작정된 자에게는 우리에게는 상관이 없다. 가라지는 우리는 아니다. 그물에서 건져서 내버린 것은 그것은 불에 넣어서 사르는 것은 우리는 아니다.’ 네가 어찌 그리 잘났느냐? 너는 행위는 멸망할 자의 행위와 꼭 같은 행위했는데 어떻게 해서 너는 거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느냐? 좌우에 날선 검이다. 이 사람에게도 그 정죄 저 사람에게도 그 정죄지 네라고 다르지 않는다. 거게 다 꼭 같이 예수 믿었다. 세상 끝날까지 예수 믿었다. 한 그물 속에서 다 놀고 놀았다. 다 같이 등 들고 신랑 오기를 밤이   도록 졸음을 졸아 가면서 기다렸고, 온다고 소식 오니까 얼른 일어나서 맞이할라고 나갔고, 신랑 기다린 처녀고, 다 같애. 기름 준비 안 한 그것만 달라, 다 같고. 이래서 쫓겨났는데 너는 어떠냐? 어떻게 자기 욕심대로 사욕대로 제게 유익하도록 악으로 해석을 합니까? 그는 스스로 속는 일입니다.

“참 마음과” “참 마음과” 참 마음, 참 마음, 참 마음이라 말은 뭐이요? 양심이 인정하는 마음인데 무슨 마음이요? 참 마음. 양심으로 말이요, 참 마음, 거짓 마음이 아니고. 진짜 마음, 수지 마음, “참 마음” 수지 마음.

마음의 수지가 뭐입니까? 마음의 수지가 뭐이요? 양심이요, 양심. 참 마음이라 말은 양심으로, 거짓부리 없이, 껍데기로 하지 말고 양심에 가책 없는 양심이 인정하는 마음,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온전한 믿음은 야고보서에 뭐라고 말했지요? 온전한 믿음은 몇 가지가 합해서 온전한 믿음 됐습니까? 두 가지 합했어. 두 가지 합했어. 알고 인정하고 그대로 행하는 것. 그게 온전한 믿음 아닙니까?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되지, 지금 시간 많이 지나갔으니까 그까지만 하고 그다음에 계속하겠습니다.

이러니까 우리 믿는 게 뭐인 줄 알고 여게서, 지금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일들이 많은데, 교단등록 안 했다고 이단이라 하는데 그거 아닙니다. 교단등록 안 해도 정통일 수 있습니다. 교단등록 그것이  이단과 정통을 규정짓는 것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또 그 지방에 교역자회에 입회를 가입을 하고 안 하는 그것으로서 정통과 이단을 규정짓는 근거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알겠습니까? 속지 마십시오.

우리의 법전은 신구약 성경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은 성신의 감동을 받아야 됩니다. 그는 양심이 아니면 찾아가서 만나지를 못합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합시다.

이제 제일 조심한 것, 깜짝 놀라면서 깨달은 거 받은 능력 버리면 안 됩니다.

뺏기면 안 됩니다. 요것을 첫시간부터 뺏기지 안하면 여게서 큰 능력 받을 것이고 어떤 병이라도 다 낫습니다. 뭐 문둥병도 낫고 암병도 낫고 다 낫습니다. 내과 병도 낫고 외과 병도 다 낫습니다. 깨달아서 바로 믿을라고 하는 데에 주께서 낫아 주시지 돈받고 기도하는 데에 그 기도한다고 낫아 주실 하나님은 이용당하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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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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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147 착하고 충성된 종/ 마태복음 25장 22절-29절/ 1987. 11. 13. 지권찰회 선지자 2015.12.28
146 착하고 충성된 종/ 마태복음 25장 14절-30절/ 1987. 7. 19. 주일새벽 선지자 2015.12.28
145 착한 행실이 빛이다/ 마태복음 5장 13절-16절/ 1987. 9. 17. 목새벽 선지자 2015.12.28
144 착한 양심/ 베드로전서 3장 21절-22절 / 1987. 6. 30. 화새벽 선지자 2015.12.28
143 착한 양심/ 베드로전서 3장 18절-22절/ 1987. 7. 1. 수새벽 선지자 2015.12.28
142 찬송가 201곡/ 베드로전서 1장 3절/ 1989. 2. 7. 오전 교역자회 선지자 2015.12.28
141 찬송가내력 -하나님의 인도와 순종/ 창세기 12장 1절-10절/ 1988. 5. 4. 오전집회 선지자 2015.12.28
140 찬송가내력-하나님의 인도와 순종/ 창세기 12장 1절-10절/ 1988. 5. 4. 수전집회 선지자 2015.12.28
139 찬송가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14장 9절-12절/ 1987. 4. 7. 화새벽 선지자 2015.12.28
138 찬송가에 대해서/ 야고보서 1장 15절-18절/ 1987. 12. 29. 화새벽 선지자 2015.12.28
137 찬송론/ 요한계시를 2장 23절/ 1889. 2. 5. 주일새벽 선지자 2015.12.28
136 찬송하리로다/ 에베소서 1장 3절-14절/ 1987. 9. 11. 금새벽 선지자 2015.12.28
135 찬양 예배/ 에베소서 5장 15절-21절/ 1984. 2. 15. 수저녁 선지자 2015.12.28
134 참 기쁨 얻는 구원/ 빌립보서 4장 4절-7절/ 1983. 3. 27. 주일오전 선지자 2015.12.28
133 참 나와 나 아닌 나 원수인 나/ 로마서 8장 23절/ 1987. 1. 16. 금새벽 선지자 2015.12.28
132 참 된 생애/ 전도서 1장 1절-4절/ 1979. 12. 20. 목새벽 선지자 2015.12.28
» 참 마음과 온전한 마음으로 주를 믿자/ 히브리서 10장 19절-39절/ 1987. 5. 6. 수새집회 선지자 2015.12.28
130 참 목자/ 요한복음 10장 1절-3절/ 1984. 1. 3. 밤 교역자회 선지자 2015.12.28
129 참 사랑/ 요한일서 3장 1절-3절/ 1980. 3. 9. 주일오후 선지자 2015.12.28
128 참 연보와 그 결과/ 고린도후서 8장 11절-14/ 1982. 5. 24. 월새벽 선지자 2015.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