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선교회 참 자기와 원수 자기

 

1987. 1. 16. 밤 (금)

 

본문:로마서 8장 18절∼23절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사망과 사망 역사만 가득찬 세상에 생명과 생명 생활을 할려고 하면 세상과 필연적으로 대립되고 마찰이 있습니다. 생명화된 것만치 마찰이 있습니다.

이 사망 세상에 자신이 생명으로 인하여 사망과 마찰된 그 고난과 영원한 나라에 생명이 사는, 지금은 사망에게 마찰 당하는 생명이나 이 생명이 무궁세계에서 생명을 누리고 살 그때의 영광은 지금 세상에서 생명 생활 함으로 마찰의 고난과 비교하면 비교할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온갖 창조물이 사람들에게 이용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용 당하는 것은 저희들의 자유로 이용 당하는 게 아니고, 저들이 약하고 못나 이용 당하는 거 아니고 이용을 당하도록 하시는 이로 인해서 할 수 없이 이 허무한 것들에게 이용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피조물은 속으로 탄식하면서 고대하고 소원하는 것은 이 모든 허무한 것들에게서 해방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 생활 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광의 자유 생활을 할 때에 동참하고 이용된 모든 만물들은 영생으로 새롭게 되는 그들의 구원이 있기 때문에 고대하는 것입니다.

23절에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우리” 이 “우리” 하는 것은 중생된 영의 단체를 가리켜서 “우리” 말합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성령의 역사의 결실이 된, 성령의 목적의 결실된, 영들은 중생됐기 때문에 중생된 영들까지도 “우리까지도” 영들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이 중생된 영들이 탄식하여, 그러면 중생된 영들은 내라는 것이 없고 우리라는 복수를 썼습니다. 중생된 영은 그 수가 뭐 몇 억억억억이든지 그것은 한 덩어리로 돼 가지고 역사합니다. 개체가 없는 게 아니고 개체가 다 뚜렷이 있지마는 그 모든 힘과 사상과 지식과 소원과 모든 소망과 희로애락이 하나이기 때문에 한 덩어리입니다. 영은 한 덩어리가 됐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구원 얻지 못한 이 심신으로 되어 있는 육은 천 명이면 천 명이 천 개로 각각 나뉘었고 만 명이면 만 명이 개별 개별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다 사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망 법 아래 있는 연고인 것입니다.

주기도문에는 “우리 아버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전부 우리로 말했습니다. 실은 우리가 되지 안할 때에는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삼은 모든 단일체 예수님의 그 몸이 되어 있는 이 우리가 되어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개별 개체로 나가면 하나님과는 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양자 될 것이니까 아직 양자가 안 됐습니다. 영은, 15절에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우리 영은 벌써 양자의 영을 받아서 양자가 됐습니다. 우리 영은 양자가 됐으나 우리 몸은 아직까지 양자가 안 됐습니다. 그래서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그러면 지금 우리가 힘쓰고 있는 것은 이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니 몸의 구속은 곧 이 심신의 기능이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것입니다.

양자는 그 요소는 신적 요소가 아니고 피조물의 요소이나 신적 요소로 된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이 받는 그 모든 하나님의 유업 기업은 같이 받는 권세를 가지기 때문에 적자는 아니고 양자라 이렇게 표현된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구원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자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자기를 바로 알지 못하는 데에서 모든 실패와 손해를 받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도 쌍방이 서로 대화하는 것인데 하나님을 바로 찾고 자기를 바로 찾았을 때에 기도가 되지 이걸 바로 찾지 못하고 기도하는 기도는 그것은 다 구원의 운동은 될지라도 구원은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 하는 그 말씀이 있고 또 “옛사람을 벗어버리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어라.” 또 “육체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라”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다투어서 우리의 소원인 구원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 “육신은 성령을 거스려 싸운다” 이렇게 말씀한 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육신이라는 것은 어떤 존재인가? 세상에는 이 깨달음이 공통되어 있지를 아니합니다. 육은 이 고기덩어리가 육이고 마음은 영이라 이렇게 깨달은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기에 “육체의 생각이라” 하니까 이것을 가리켜서 고기덩어리를 육체라고 봤으니까 육체의 생각이라고 하니 그 고기덩어리가 무슨 생각이 있을 수가 있나? 마음은 영이고. 이러니까 이것은 육체라고 말한 것은 원어로 싹스인데 이거는 부패성이라는 말이다 이렇게까지 번역을 하도록, 해석을 하도록 이렇게까지 됐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영이 있고 혼이 있고 몸이 있고 이 세 가지라고 삼분설을 말하고 어떤 사람은 영과 육 둘이라 해 가지고 이분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분설 말하는 사람들은 곧 마음이 영이요 영이 마음이라, 이성이 영이라, 영은 이성이라 그렇게 다 보고 있는 것이 정통 학자들 가운데에 많이 있습니다. 칼빈도 ‘영은 이성적 존재라’ 그렇게만 말하고 달리를 말하지 안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똑똑히 밝혀서 우리가 알지 못하면 안 됩니다.

이 육이, 육체의 생각이라 육체의 욕심이라 하는 이 육체라는 존재가 몇 종류가 있다고 배웠습니까, 손가락으로? 저 뒤에도? 녜, 두 종류가 있다고 배웠습니다.

하나는 죽은 영과 이 심신으로 된 육과 둘이 합해 가지고 행동할 때에 그것을 가리켜서 육체의 생각이라, 육체의 소욕이라, 육체의 행위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사람의 심신은 능동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심신입니다. 사람의 심신은 독단으로 능동하지 못하도록 지음받아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람의 심신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죽은 영은 기능적으로는 송장이기 때문에 작용을 못 하고 심신은 단독 능동 행위를 하지 못하니 그러면 그 어떻게 육체가 생각도 하고, 소욕도 하고, 서로 시기도 하고, 훼방도 하고, 당도 짓고 이렇게 하는가?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하고서 육체의 하는 일들을 많이 나타내서 말해 놨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그러면 그때에 이 심신을 움직이는 것이 뭐인가? 그 움직이는 것이 곧 악령과 악성과 악습 이 셋이 그 마음을 붙들고 움직입니다. 악령은 하늘나라에서 하나님 중심 위주로 사는 데에서 배신하고 제 중심 제 위주로 살다가 쫓겨난 것이 악령입니다.

악령이 에덴동산에 들어가 가지고 하와와 아담을 꾀워서 그들이 처음에는 하나님 중심 위주로 하나님에게 소망 두고 복종 생활을 하다가 배암의 유혹을 받아 가지고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의 행동을 했습니다.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의 그 사상이 들어오고 난 다음에 선악과를 볼 때에 선악과는 가장 가치 있고 저에게 보배로운 것으로 보여졌습니다. 이래서 선악과 먹고 난 다음에 사망하게 된 것입니다.

이래서, 악령이라는 것은 하늘에서 쫓겨 내려온 자기 중심 위주의 영을 가리켜서 악령이라고 말하고, 악령의 유혹을 받아 가지고 사람이 범죄한 원죄가 있습니다, 원죄. 죄는 원죄와 본죄 둘이 있는데 원죄를 가리켜서 악성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타락해 가지고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의 그 인간성 된 그것이 원죄입니다.

또 악습이라는 것은 악령과 악성으로 인해서 하나 둘, 악령적이요 악성적인 이 행위를 하나 둘 해서 모은 것을 가리켜서 본죄라고 하고 악습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이래서, 불택자는 죽은 영과 또 그 심신으로 된 육과, 죽은 영과 육과 둘이 한 뭉텅이입니다. 그러나 그 영은 완전히 기능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그 육에 대해서 아무런 작용이 전혀 없습니다. 있으나 없는 거와 꼭 같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는, 죽은 영과 육이 하나되어 있는 거기에 이 육은 능동으로 움직일 그 기능은 하나님이 짓지 안했기 때문에 없습니다.

악령이 와 가지고 이 심신을 충동시켜 가지고 이 심신이 악령의 충동을 받아 가지고 움직이는 그것이 곧 육체의 생활이요 육체의 생각이요 육체의 욕심인 것입니다.

창세기 6장에 “사람이 육체가 되었으니” 하는 것은 벌써 사람이 하나님의 영, 자기 주격의 영을 배반하고 악령의 미혹을 받아 가지고 악령으로 인하여 동하고 정하게 된 그것을 가리켜서 사람이 변질되어 ‘육체가 되었다’ 그렇게 말씀을 한 것입니다.

이래서 불택자는 죽은 영과 움직이고 있는 이 육과 이 악령 악성 악습은 이 셋은 하나입니다. 악령으로 인해서 이 육이 움직입니다. 그러면 움직이는 그것이 움직일 때에 벌써 사람의 육은 악성이 됐습니다. 행동을 할 때에 벌써 악습이 됐습니다.

이래서 불택자는 죽은 영과 이 움직일 수 있는 기능을 가진 이 육과 악령과 이 셋이 합해 가지고 움직이는 것을 가리켜서 육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육체의 생각, 육체의 욕심이라, 이 육체라 말했습니다.

이렇게 육체가 돼 가지고 사는, 육체가 돼 가지고 있는 그 사상을 가리켜서 악성이라, 행동한 것을 가리켜서 악습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불택자는 죽은 영과 악령과 이 육과 셋이 합해 가지고 움직이는 걸 가리켜서 육체라, 육체의 욕심, 육체의 생각이라, 그것이 욕심하는 것을 육체의 욕심이라, 그것이 생각하는 것을 육체의 생각이라, 그것의 소원을 육체의 소원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하는 것은 그 육체입니다.

“사람이 육체가 되었으니” 하는 것도 내나 그 육체입니다. “육체는 성령을 거스려 싸운다” 하는 것도 다 그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또, 중생된 사람이 육체 생활 할 때 있습니다. 중생된 사람은 육체 생활할 때에 어떻게 하고 있는가? 중생된 영과 이 육체와 악령과 이 셋이 한테 뭉쳐 가지고 행동하는 것을 가리켜서 육체의 행동이라, 소원을 육체의 소원이라, 욕심을 가리켜서 육체의 욕심이라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불택자도 몇 개가 합해 가지고 육체의 행동하고 있습니까?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소. 세 가지. 녜, 세 가지. 또 중생된 자의 육체 생활, 육체 소원, 육체 욕심은 몇이 합해 가지고 하고 있습니까, 손가락으로? 몇이 뭉쳐 가지고 하고 있습니까? 손가락으로? 녜, 셋입니다.

그러면 이것과 저것과의 다른 것, 다른 걸 여러분들이 기억하십시오. 이것과 저것과 다른 것. 셋은, 셋의 수는 꼭 같습니다. 셋의 수는 꼭 같습니다. 다른 것이 있는 것은 하나는 죽은 영과 뭉쳐 있고 하나는 중생된 산 영과 뭉쳐 있습니다.

이제 배운 대로 이해가 됩니까? 이해가 됩니까? 이러니까 불택자의 육체 생활은, 불택자의 육체 생활은 시비가 없습니다. 불택자의 육체 생활은 시비가 없고 일사천리로 단합돼 가지고 역사합니다. 그러나 중생된 자의 육의 생활은, 육체의 생활은 시비가 있습니다. 육체의 생활은 시비가 있습니다.

로마서 7장 15절에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니”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니” 이 내가 누군지를 알아야 됩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니” 요 내가 중생된 참사람 자기입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치 아니하고” 원하는 것은 행해지지 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그러면 원하는 것은 하지 안하고 미워하는 그것을 하니까 이 미워하는, “원하는 것은 하지 안하고 미워하는 그게 된다” 하면서 이 탄식하는 자는 누굽니까?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니” 하는 그 주인입니다. 자기입니다.

알겠어요? 16절에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이러니까 할라 하고 안 하고, 육체의 생활을 한 단합돼 하지 안하고 중생된 자 육체의 생활에는 그 속에서 시비가 있습니다.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육체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안한 줄을 아나니” 이 육체 속에는 뭐입니까? 이 육체 속에는, 이 육체 속이라는 이 육체는 몇 가지입니까, 손가락으로? 세 가지. 육체 속에는 악령과 육과 시비하고 고통당하고 있는 산 영과 이게 합해 가지고 지금 하고 있습니다. 알겠습니까? “내 속 곧 내 육체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그건 속에 영은 원하고는 있지마는 이 마음하고 고기덩어리 이놈들이 역사하니까 그 영은 그것을 억제할 수가 없습니다.

영은 이 물체는 없습니다. 영은 물체 물형은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영이라는 것은 물질 행동은 하지 못합니다. 심신은 물질입니다. 영이 이 물질을 잘 도구같이 이용해 가지고 물질계에 활동하는 것인데 물질로 된 심신 이놈이 영을 배반하고 행동하니까 영은 할 도리가 없는 거라. 마음으로 원하기만 하지 선을 행할 능력은 내게 없도다.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절에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이만하면 알겠습니다.

이래서, 중생된 자의 육의 생활과 불택자의 육의 생활에 그 요소가 불택자의 육의 생활 할 때에는 그 요소가 몇 가지입니까, 손가락으로? 뻐뜩뻐뜩 빨리빨리 손가락 들어 봐요. 이 같이 배워요, 모두. 예. 셋. 또 중생된 자의 육의 생활에는 그 요소가 몇 개입니까, 손가락으로? 다 같이 세 개입니다, 다 같이 세 개.

세 개인데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것은 불택자의 셋은 죽은 영과 악령과 육과 셋이 뭉친 것이고 중생된 육의 생활에는 중생된 영과 악령과 육과 셋이 뭉친 생활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이해가 돼요? 그러니까 불택자의 육의 생활은 단합이 돼서 아무 분쟁 없이 육의 생활이 모든 일에 힘있게 역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중생된 자의 육의 생활은 끌려가면서도 원치 아니하는 일이 되니까 속에서 깽깽거리면서 싫다고 하면서 고통을 느끼고 시비를 하고 있는 존재가 속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중생된 자의 육체 생활은 일사천리로 나가지 못합니다. 가다가는 고장 생기고 가다가는 고장 생기고 자꾸 시비와 이의가 자꾸 생겨집니다. 그 이유는 왜 그렇습니까? 누가 들어서 그래 자꾸 분쟁을 일으킵니까? 중생된 영이 분쟁을 일으킵니다.

이래서, 이 중생된 사람이 육의 생활을 할 때에는 중생된 영을 배반하고, 중생된 영을 배반하고 심신 이놈이 착각을 일으켜서, 영이 주인이요 이 심신은 주인에 속한 그 피소유격인데, 이 영이 주인이고 심신은 영에게 속해 가지고 영이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하면 이게 다 영생이 되어지는데, 옆에 와 가지고 악령 이놈이 꼬웁니다. 꼬와 가지고 이 육체에게, 육체에 와 가지고 제가 주인인 척하고 나섭니다. 제가 주인인 척하고 나서 가지고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하지. 내 몸을 내 몸대로 하지. 내 소원대로 하지. 내 생각대로 하지.’ 이라니까 그만 이 심신이 거게 꼬임받아 가지고 ‘그렇지.

마음은 내 마음이지. 몸도 내 몸이지. 내 소원대로 내게 유익하도록 해야지.’ 이렇게 자꾸 유혹할 때에 성도들은 착각을 합니다.

그러면 거게서 중생된 영은 배반하고 그만 이 심신이 이제는 악령하고 합작이 됩니다. 악령하고 합작이 됩니다. 악령하고 이 육하고 합작이 됩니다. 합작이 되면은 중생된 영은 떼 버렸습니까 함께 중생된 영은 끌려다닙니까? 끌려다니는 것을 로마서 7장에 여러분들이 자세히 읽어보면 압니다.

이 로마서 7장이 아주 난해로서 난해절로 이래 가지고 시비가 분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7장 해석을 바로 못 하면, 바로 깨닫지 못하면 그 교리와 신조는 궁극적으로는 다 삐뚤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여게서 심신이 중생된 영이 어데까지나 제 주인인데 중생된 영을 버리고, 악령이 와서 꼬우니까, 악령이 와서 꼬우기를 뭐라고 꼬우느냐? 악령이 와서 꼬우는 것은 마음 좋도록 꼬우고 고기덩어리 좋도록 ‘마음 네 마음대로, 고기덩어리 네 마음대로, 네 소원대로 네 욕심대로 하라.’ 이라니까 어리석은 놈이 꼬여 가지고 중생된 영을 버리고 악령에게 꼬임받아 가지고 움직이는 육체 생활합니다.

육체 생활을 일 년 하든지 십 년 하든지 뭐 몇십 년 하든지 육체 생활하는 그때의 육체의 기능은 완전히 유황불 구렁텅이에 다 둘째 죽음으로 다 죽어버리고 사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중생된 나, 중생은 진리로 중생됐고 성령으로 중생됐고 예수님의 일곱 가지 사활의 대속으로 중생됐기 때문에 이 중생된 힘은 중생된 생명은 완전하고 영원합니다. 완전하고 영원합니다. 중생된 자기가 있고, 중생된 영 자기가 있고, 언제든지 영은 주격이요 이 심신으로 된 육은 소유격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내라는 나, 내라는 나를 바로 구별해야 됩니다. 영 나, 영 나, 영 나. 내 마음, 내 몸 이것은 ‘내 마음이라 내 몸이라 내 육이라’ 하는 나는 이거는 주격이요 마음은 피소유격이요 몸도 피소유격이요 ‘내 돈’ 하면 돈도 피소유격이요 나는 주격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나는 주인이요 ‘내 마음, 내 몸, 내 소원, 내 기쁨, 내 즐거움, 내 돈, 내 집, 내 가족, 내 지위, 내 권세.’ 나는 주인입니다. 나는 주인이고 그런 모든 것들은 다 소유물입니다. 소유의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격과 피소유격을 우리가 잘 구별해야 됩니다.

이런데, 요 나를 구별하지 못하는 데에서 실패를 합니다. 요거 잘 안 들으면 몰라요. 중생된 나는, 중생된 나는, 새사람 나, 중생된 나, 예수 믿는 나, 하나님의 자녀된 나, 영생하는 나, 이 나는 뭣을 가리켜서 나라고 합니까? 뭣을 가리켜서 나라고 합니까? 나는 뭣입니까? ○○○조사님? 중생된 영. 중생된 영이 내입니다.

요거 단단히 기억하십시오. 중생된 영이 나입니다.

아무리 악령이 와 가지고 제가 내라고 해도 그것은 악령이 와 가지고 미혹할 때 이 마음과 고기덩어리는 그 미혹을 받아 가지고 그걸 제인 줄 압니다. 악령을 제인 줄 압니다. 악령을 자기인 줄 압니다. 중생된 영만이 자기의 주인입니다, 자기요. 악령은 자기도 아니고 자기를 죽인 원수, 자기 아닌 자기, 거짓된 자기 그놈이 가장해 가지고 오기 때문에 나와 나를 구별하지 못하는 데에서 모든 사람이 실패합니다. 나와 나를 구별하지 못하는 데에서.

그러면 나와 나를 어데서 구별할 건가? 이 악령 내가, 악령으로 된 나 그놈이 오만 것을 꼬울 때에 소유를 가지고 꼬웁니다, 소유. 소유를 가지고 꼬웁니다.

‘이거는 네것이다, 이것은 네것이다, 이것은 네것이다. 마음은 이게 네 마음이다.

이 몸은 네 몸뚱이다. 이 소유는 네 소유다.’ 자꾸 이라니까 고기덩어리 이놈이 참 그거 내라는 그것이 자기 주인인 줄로 이렇게 알고 미혹을 받습니다.

요거 좀 어려운 말인데, 이것이 아직까지 뚜렷한 그런 교리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많은 미혹들이 있습니다. 중생된 영이 우리 심신의 주격입니다.

그러면 중생된 영은 뭣을 가지고 있느냐? 중생된 영의 것은 뭐이냐? 중생된 영은 뭣을 가지고 있느냐? 중생된 영은 마음과 몸을 제 마음 제 몸으로 가지고 있습니까 없습니까? 중생된 영이 이 마음과 몸을 제 마음 제 몸으로 가지고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요걸 잘 알아야 됩니다.

중생된 영의 소유는, 중생된 영의 소유는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일곱 가지 요것만 중생된 영의 것입니다. 중생된 영의 것은 요 일곱 가지만 중생된 영의 것입니다.

마음은 중생된 영의 것이 아니요 요거는 요 일곱 가지의, 일곱 가지를 받고 일곱 가지를 가지고 샀고 일곱 가지에 팔린 육입니다. 일곱 가지에 팔린 육이요 일곱 가지에 팔린 영입니다.

요 영육은 요 일곱 가지에 팔렸기 때문에 요 중생된 영은 예수님의 사활의 일곱 가지 대속만 제것이지 자기의 영육은 다 주님이 값으로 산 주님의 것이 됐습니다.

그만 기억만 하십시오. 주님의 것이 됐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입은 우리 영육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입은 내라는 사람은 가진 것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일곱 가지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외에 딴것은 가지지 못합니다. 그것을 가지면 이 일곱 가지를 도로 내놔야 됩니다.

그러기에 이 사활의 대속을 자기 것으로 삼은 사람은 이 영육은 주님의 것 됐습니다. 영육은 주님의 것 됐어. 이 사활의 일곱 가지 대속을 자기 것 삼은 사람은 사활의 대속만 제것이지 이 외의 것은 전부 주님의 것입니다. 영도 주님의 것이요, 마음도 주님의 것이요, 몸도 주님의 것이요, 그의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도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참 나와 가장하고 온 거짓된 나 그놈을 나인 줄 알면 전부 몽땅 속아버리고 마는데 참 나와 거짓된 나를 어데서 구별할 것인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그것만을 내것으로 생각하는 그 내가 참 내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향하여 진리로 영생하는 그 영생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진리로 영생 그것만이 나, 내것. 영감으로 영생하는 그것만이 내것. 죄에 대해서 해방 받아 자유하는 그 자유만이 내것. 또 사망에서 해방받아 사망에게 자유하는 그것만이 내것. 악령에게서 자유하는 그것만이 내것. 하나님의 공심판에 그 심판을 이긴 나, 그 심판에 완전으로 통과한 그 완전 통과의 의만이 내것. 하나님과 화친된 그 화친만이 내것. 이 일곱 가지만 자기 것으로 삼은 것이 새사람 자기입니다. 요거 아주 어려운 말이오. 새사람 자기입니다. 일곱 가지만이 자기 것으로 삼아 가지고 있고 일곱 가지로만 살고 있는 것이 참 자기입니다.

이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만일 ‘이 마음은 내 마음이라’ 마음을 내 마음이라 할 때에 그 나는 뭐입니까? 그 나는 중생된 자기입니까 자기 아닌 악령입니까? 중생된 영이 그랍니까 악령이 그랍니까? 악령입니다. 요게서 구별해야 됩니다.

‘내 몸’ 하면은 그것은 악령이 유혹시켜서 말하는 것이지 제 몸이 없습니다.

실은 제 몸이 없고 제 마음이 없고 제 영이 없습니다. 다 예수님의 일곱 가지 사활의 대속으로 값주고 샀기 때문에 주님의 것입니다. 제것은 없습니다.

이런데 영육간에, 어떤 그 모든 관계돼 있는 어떤 사물간에 벌써 ‘이것은 내것이라’ 하는 자기가 나올 때에는 그때는 틀림없는 고거는 악령으로 된 옛사람입니다. 악령으로 된 옛사람. 요거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 심령이 어두우면 못 깨달아져요.

‘아, 이거는 내 돈이다. 이거는 내 가정이다. 이거는 내 몸뚱이다. 이거는 내 재산이다. 나는 내다.’ 하면 벌써 예수님의 대속을 벗고 옛사람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악령이 주인공입니다. 새사람은 아닙니다.

마귀가 이 심신을 꼬와 가지고 심신이 그런 줄 알 때에는 실상은 심신은 이 주님의 것이요 영육이 다 주님의 것인데 영은 그렇게 꼬임받지 안하지마는 이 육은 이 주님의 것이요 제것은 없고 저는 자유하지 못하고 주님의 것인데 이 심신이 제 심신이라고 할 때에 ‘이거는 내 마음이다. 내 몸뚱이다. 내 소유다.

이거는 내다.’ 예수님의 것 외에 자기라는 거와 자기의 것이 있는 것은 언제든지 그것은 마귀요,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마귀요 옛사람이요 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대속을 하실 때에 그것은 법적으로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인데 악령이 다시 산 척해 가지고 와 가지고 유혹을 줍니다.

그러기 때문에 중생된 나는 예수님의 사활로 내게 주신 이 일곱 가지만 내것이요 영도 육도 다 주님의 것 됐습니다. 그러면 사활의 대속을 내가 은혜로 받아 가지고 내것 삼은, 사활의 대속을 내것으로 삼아 있는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사활의 대속을 내것으로 삼아 있는 내 영도 주님의 것이요, 내 마음도 주님의 것이요, 내 몸도 주님의 것이요, 내 소유도 주님의 것이요, 사활의 대속만 내것입니다.

그러기에 사활의 일곱 가지 대속만 내가 관계할 수도 있고, 살 수도 있고, 쓸 수도 있고, 행동할 수도 있지 내 영과 마음과 몸 모든 소유는 주님만이 자유하지 나는 그 자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내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자유하지 못합니다.

자유하면 법을 범했습니다.

자유하지 못하는 것인데 악령이 와 가지고 자유할 수 있다고 해 가지고 자유할 때에 예수님의 대속이 끊어집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옷입듯이 입었다가 예수님의 대속을 벗어버렸습니다. 벗었기 때문에 그것은 다시 대속 없는 자기가 되어서 내나 악령 악성이 주인이 돼 가지고 살던 옛사람 그 사람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요 나를 구별할 때에 요것을 단단히 기억하십시오. 내라는 것이 움직일 때에 요 내가 참 내인지 거짓된 내인지 뭘로 구별할랍니까? 내가 움직일 때에 참 내인지 거짓된 내인지 요것을 구별하는 데에는 다른 데서는 구별하지 못합니다. 다만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일곱 가지 요것을 제것으로 삼아 요것으로 움직일 때에 참 자기입니다. 요것의 이해를 따질 때에 그것이 참 자기입니다.

요것을 위해서 움직일 때에 참 자기입니다.

사람이 돈의 이해, ‘이 돈이 손해가 가나 유익이 되나? 이 돈이 손해 가나 유익 되나?’ 서로 말할 때에 ‘이라면 이 돈이 내게 손해가나 유익이 되나? 이라면 내게 이 돈이 내게 손해가고 이라면 유익되고.’ 돈에 대해서 이해를 따질 때에 그 자기가 누구입니까? 그 자기가 누구입니까? 육체입니까 중생된 영입니까? 육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뭐 이거 알고 하는지 모르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돈의 이해를 따지면서 ‘이라면 돈을, 이 물질을 요렇게 하면 내 영생에 유익이 되나 손해가 되나? 이라면 영생이 되나 영생을 버리는 것이 되나? 요라면 진리 영생이 되나, 요라면 영감 영생이 되나? 요렇게 하면 죄에 대한 자유 생활이 되나? 사망에 대해서 자유 생활이 되나? 마귀에 대해서 자유 생활이 되나? 하나님의 공심판에 자유가 되나? 하나님과 친밀한 결합이 된 이 결합에 손상이 없나? 이 돈을 어떻게 하면 어떻게 되느냐?’ 이 돈으로 일곱 가지 사활의 대속을 자기 것인 것을 깨닫고 ‘사활의 대속에 이 돈이 어찌 되느냐? 이 지위가 어찌 되느냐? 이 권세가 어찌 되느냐? 이 행동이 어찌 되느냐?’ 행동을 논하나 사활의 대속 이것이 자기의 것이요 이것으로 자기는 살기 때문에 ‘내가 나로 사는 것이 되느냐? 이 일곱 가지만이 내것이기 때문에 일곱 가지 내것에 대해서 손해가 되느냐 유익이 되느냐?’ 이라면서 돈 문제를 그렇게 다룹니다. 사건 문제를 그렇게 다룹니다. 또 권세 문제를 그렇게 다룹니다.

그렇게 다룰 때에는 그 사람이 돈이든지 모든 세상 현실의 어떤 생활이든지 자기 것은 일곱 가지요 자기 생활은 일곱 가지로 사는 것이 자기 생활이기 때문에 일곱 가지로 사는 생활 일곱 가지에 해가 되지 안한 그 이해를 따져 가지고 요렇게 하는 그 자기, 물질에 대해서도 말하고 권세에 대해서도 말하고 모든 것에 대해 말하는데 이렇게 일곱 가지를 자기 것으로 근거해 가지고 모든 다 말하는 그것은 참 자기입니까 거짓된 자기입니까? 참 자기입니다.

이것을 버리고, 이것을 잊어버리고 물질만, 권세만, 자기 몸뚱이만, 자기의 심령에 마음의 평안하고 즐거운 것만, 일곱 가지를 벗고 자기 뭐 심신이든지 모든 사물, 일이든지 물건이든지 그것만 가지고 이해를 따지고 ‘이것은 네것이라’ 이제 그것만 상대해 가지고 이해를 따지든지 비판을 따지든지 뭐 진가를 따지든지 그것만 가지고 따지는 그것은 그것이 중생된 자의 자기 생활입니까 자기 생활이 아닙니까? 그 따지는 그자는 자기입니까 원수인 자기 아닌 자기입니까? 자기 아닌 자기입니다.

요게서, 그러기에 세밀히 참 자기와 자기 아닌 자기를 요것을 구별해 가지고 분별해 따진다는 거는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요게서 영생과 사망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둔하게 뭐 이렇게 전자 계산이니 그까짓 그런 기계 가지고 계산 댈 그런 정도의 것은 아닙니다. 이거는 참으로 하나님의 성령이 와서 구별해 줘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저녁에는 이만치 하고 여러분들이 요것만 기억하십시오. 육체 둘 있는 것을 말했습니다. 또 내가 둘인 것을 말했습니다. 내가 둘인 거. 참 내가 있고 나를 죽인 내 원수 그놈이 내라고 가장을 해 가지고 어떻게 기묘하게 와서 달라붙는지, 우리 마음이란 이거는 둔하게 돼 가지고 있는 것이오. 마음은 둔하요. 마음은 절대 능동력이 없습니다. 마음은 능동력이 없도록 지음받은 것이 마음입니다.

이것도 지금 나가면 이 교계에서 뭐 교리사에 굉장히 시비가 날 것입니다. 암만 시비해 봤자 요거는 승리합니다. 승리합니다.

마음은 자기 영에게 피동되든지, 영에게 피동되도록만 만들어 놓은 건데 요게 악령에게 피동된 것이 에덴동산에서부터 시발됐습니다. 이런데, 마음은 어데든지 피동되도록 하나님이 지어 놓은 것인데 이것이 중생된 영에게 피동이 되면 영생이고 중생된 영 외에 딴데 피동되면 멸망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말하기를, 16절에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그러기 때문에 성령은 우리에게 직접 역사하지를 안하시고 꼭 중생시키고 난 다음에는 영을 통해서 역사하지 월권적으로 그렇게 하지를 아니합니다.

이래서, 우리 심신은 능동할 수 없는 존재다. 중생된 영에게 지배받는 것은 곧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이와같이 역사하기 때문에 중생된 영에게 지배받는 것이 성령에게 지배받는 것이요 성령에게 지배받는 것이 중생된 영에게 지배받는 것이요 중생된 영과 성령은 하나되어서 움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다시 사망이 없는 영생입니다.

그렇게 지배를 받든지 그렇지 안하면 악령에게 이 심신이 지배를 받든지 둘 중에 하나인데 악령에게 지배받으면 사망이요 중생된 영에게 지배받으면 영생입니다.

악령도 나로 나타나고 중생된 영도 나로 나타납니다. 자기로, 나로 나타납니다.

‘내라’ 나로 나타납니다.

이 내가 참 내인지 저 내가 참 내인지, 원수 그놈을 내인 줄 알고 거기다 모든 거 다 마음이나 몸이나 막 다 바쳐 놓으면은 그놈이 뭐 어떻게라도 잡아먹을라고 하기 때문에 나 아닌 원수 그놈을 내인 줄 알아 놓으면 이거는 참 자기 집에 원수를 잡아 놓은 거 한가지라. 자기 가족들에게 잡아먹는 사자를 잡아놓은 거 한가지라. 다 잡아먹어 버리고 나중에 없어 버려.

그러기에 자기를 구별하지 못하면 구원은 헛일입니다. 참 자기인지 원수 자기인지, 생각이 난다고 ‘아,’ 생각 난다고 하는 사람 어리석은 사람이오. 생각이 나면 참 자기의 생각인지 원수의 생각인지 뭘로 압니까? 참 자기의 생각인지 원수의 생각인지 뭘로 압니까? 참 자기는 몇 가지로만 언행심사에 움직이도록 돼 가지고 있습니까? 일곱 가지로만 언행심사로 움직이게 돼 가지고 있습니다. 요거 믿기가 참 어렵습니다. 요거 심령이 밝아져야 되지 뭐 말로 천번 만번 듣는다고 되는 것 아니오.

중생된 나는, 중생된 나는 예수님의 사활의 공로가 없으면 중생 못 합니다.

그러기에 사활의 공로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된 영입니다. 중생된 영인데 이 영 이것이 내입니다. 참 나. 중생된 영이 참 내입니다.

따라합시다.중생된 영은!참 내다!참 나는!중생된 영이다!심신의 주인은!중생된 영이다!악령 악성 악습이!내인 척 가장하고!심신을 꼬운다!심신은 참 주인된 내인지!원수 가장한 거짓된 내인지!요것을 바로 구별해야 한다! 바로 구별하는 것은 어데서 구별하느냐? 중생된 영은 가지기도 일곱 가지 외에는 가진 게 없습니다. 알겠습니까? 중생된 영은 가지기도 일곱 가지만 가졌지 그외에는 가진 게 없습니다. 중생된 영은 행동도 일곱 가지로만 행동하지 딴 행동은 없습니다. 못 합니다. 딴 행동은 없습니다. 중생된 영의 소원도 욕심도 일곱 가지 소원 일곱 가지 욕심 외에는 없습니다. 알겠습니까? 이러니까, 나는 나를 구별을 못 합니다. 나는 나를 구별 못 하는데, 내 마음이 썩 나왔습니다. 내 마음이 썩 나왔을 때에 예수님의 사활의 일곱 가지 그것을 말하고 그것을 생각하는 그 마음은 중생된 영 나의 마음입니다. 알겠습니까? 중생된 영 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활 대속 외에 대속과 상관없는 것을 생각할 때에는 그것은 중생된 내가 아니고 원수 가장된 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행동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만일 ‘내 마음이 이렇다. 내 마음이 좋다 나쁘다. 내 마음이 기쁘다. 내 마음이 슬프다.’ 하면 그 나는 누굽니까? 그 나는 누굽니까, ○○○조사님? ‘내 마음이 기쁘다. 내 마음이 슬프다.’ 하면 벌써 악령의 것입니다. 요거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모릅니다.

왜? 나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예수님의 것이 됐습니다. 내 마음에 대해서는 내가 주권할 권리가 없습니다. 알겠습니까? 내 마음은 내가 주권할 권리가 없어. 내 마음이야 살든지 죽든지 당신의 것 됐어. 당신의 일곱 가지 대속만 내것 됐어.

그러면 나는 예수님의 일곱 가지 대속만 생각하고, 대속으로만 살고, 대속의 이해만 따지고, 대속으로만 주장하고, 대속을 위해서 움직이고 하는 이것이 새사람이요 대속을 버리고 자기 것을 자기로 도로 찾았으면 예수님의 대속을 내놓은 계산이 돼 버립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것은 벌써 악령과 옛사람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중생된 사람은 마음의 움직임이나 몸의 움직임이나 이거 전부 다 대속만, 일곱 가지 대속에 관한 것만 관계하지 딴걸 관계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이 일곱 가지 대속을 관계하면 이 마음은 누구 마음입니까? 이 마음은 주님의 것 된 마음인데, 주님의 것 된 마음인데 대속을 이렇게 생각하고 대속에 관해서 활동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주님이 계셔서 주님이 역사하셔서 내 마음과 몸이 그분의 지체와 그분의 것이 돼 가지고 이용되고 활동하고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이 있습니다. 이 마음은 내 마음입니까 주님의 것 된 주님의 마음입니까? 주님의 것 된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이 마음은 내가 주관할 수가 있습니까 주님만이 주관할 수가 있습니까? 내 마음을 내가 주관하면은 월권입니까 정상입니까? 월권입니다. 내가 내 마음을 주관할 때에는 주관하는 그자가 누구입니까? 악령입니다.

요것을 똑똑히 구별해서, 시간 많이 갔는데 이제 여러분들이 이제는 육체를 구별했습니다. 육체의 생각이란 육체는 두 종류 있다. 이 육체도 셋 저 육체도 셋이다. 왼쪽에 있는 이 셋의 육체는 시비 없이 한 덩어리 돼 가지고 잘 움직여 가고 있다. 영은 죽었기 때문에 유야무야라. 있어도 없는 것 한가지라.

오른편에 있는 이 셋은 이 셋이 육체로 살 때에는 시비가 있다. 영으로 살 때에는 한 덩어리가 된다. 영으로 살 때에는 악령의 미혹이 항상 계속 따르고 있다.

영으로 살 때에는 한 덩어리가 돼 가지고 일사천리로 잘 산다. 육으로 살 때에는 반드시 그 속에는 우는 자가 있다. 원치 안하는 자가 있고 탄식하는 자가 있고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안하고 원치 안하는 것만 행해진다. 내게 원은 있지마는 내 지체 속에 의를 선을 행할 자는 하나도 없다.” 육체가 이 악령하고 합작이 됐기 때문에 중생된 영만 고독해 가지고, 이 심신은 전부 악령하고 한 덩어리 돼 가지고 있을 그때의 광경을 중생된 영이 고독한 그 고립성을 가지고 지금 그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요것을 많이 기도하고 많이 궁구하십시오. 요것을 해결지워야 유혹이 빠집니다.

이러기에, 나와 나를 구별할 때는 뭘로 구별하는가? 나와 나를 구별할 때에는 그 행동으로 구별하는데 행동으로 어떻게 구별하는가? 참 나는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요것만을 제 행동으로 삼고, 여게 관해서만 연구하고, 여게 관해서만 생각하고, 여게 관해서만 이해를 따지고, 여게 관해서만 소욕을 가지고, 여게 관해서만 노력하고, 여게 관해서만 경영을 하고, 요것만이 제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고거 아닌 땅위에 어떤 중요한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내인 줄 알면 벌써 원수 내 그놈에게 삼켰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모두 다 사망만 이루어진다.

요거 좀 어려운 말인데 여러분들이 아직까지 그래 생활에 이해가 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요것을 기억하고 잘 가지고 있으면은 알 수가 있습니다.

여게서 고장이 나 가지고 뛰하이, 언제는 성령으로 시작해 가지고 딱딱 하던 것이 뛰할 때는 나와 나 그놈을 구별해서, 뛰한 그놈이 저인 줄 알지마는 아니오.

그것은 사활의 일곱 가지 대속과는 원수입니다. 알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나와 나를 구별할 때에는 사활의 대속만 제것으로 삼고 있는 그 내가 내입니다. 알겠습니까? 사활의 대속에 관해서만 연구하고, 그것만 욕심품고, 그걸로만 살고, 거게 대해서만 이해를 따지지 사활의 대속 그 외의 딴것은 천하가 다 뺏긴다 해도 상관이 없어. 그거는 이해로 따지지 안해.

이러기 때문에, 물질 모든 그런 것도 ‘요라면 내가 영생의 자유성에 손해가 가나, 영감 자유성에 손해가 가나, 요 죄에 자유 또 마귀에 자유 사망에 자유 그 자유, 공심판에 자유, 하나님과 화친에 자유 여게 거리끼나?’ 그것 때문에, 물질에서 거리끼는 것도 있고 사건에도 거리끼는 것도 있고 인인관계에서 거리끼는 것도 있고 하기 때문에 그 따지는 거는 이 일곱 가지 대속을 근거해서 요것 때문에 따지는 것이지 껍데기는 돈 가지고 얘기하는 것 같지마는 속에는 이 일곱 가지 대속을 가지고 따지는 것이지 대속에 관련 없는 것이라면 온 천하가 다 불타든지 말든지 상관없는 이것이 중생된 자기라.

그 중생된 자기 참 자기를 똑똑히 구별해서 자기는 이거는 우주를 상속할 자입니다. 이것은 우주보다 귀한 자입니다.

이런고로 요것만 알고, 자, 새벽으로 ‘오늘 곤하다. 내가 지난밤에 늦게 잤는데 곤하다.’ 또 ‘오늘은 지금 내가 복잡한 사무를 보게 될 터이니까 내가 좀 더 자야 되지 새벽기도 가면 안 되겠다.’ 또 ‘암만 그걸 사무를 못 봐도 내가 새벽기도 빠지지 안해야 되겠다.’ 이 둘이 있는데 어느 놈이 자기고 어느 놈이 원수입니까? 어느 놈이 원수요? 만판 나를 죽이는 원수 그놈하고 지금 합작돼 가지고 날뛰고 있는 것이 인생들입니다.

내일 이제, 거짓말쟁이가 돼놔서 새벽기도 나오자 하면 손 드시오 손을 뻑뻑 드는데 새벽에는 나오지 안해. 안 나와요. 모두 거짓말쟁이가 됐어, 인제.

거짓말쟁이.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하늘나라 들어가지 못한다” 했는데. 그 말씀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없어요? 어데 있지? 요한계시 21장. 거기 있어요.

자, 나와서 배워야 돼지. 이 지금 그냥, 뭐인지 지금 여러분들 번민만 있을 거라, 뭐인지. 꽉 잡아야 ‘아멘’ 힘이 나올 터인데 이거 잡지 못하기 때문에 번민과 뭐 벙벙하고 어짜고 힘도 없고 지금 그럴 거라 말이오. 나와서 알아들어야지.

자, 육체로 사는 사람, 육체라니? 육체가 몇 종류 있습니까, 손가락으로? 두 종류.

맞았어. 왼편 육체는 요소가 몇 가지입니까? 오른편의 육체는 요소가 몇 가지입니까? 꼭 같네요, 그라면.

왼쪽에 있는 육체는 영이 어떤 영입니까? 죽은 영. 오른편에 있는 육체는 그 영이 어떤 영입니까? 산 영. 그러면 육체 생활하는데 중생된 자의 육체 생활에 분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봐요. 왼쪽에 있는 육체 생활할 때에 분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요.

왼쪽에는 분쟁이 없고 오른쪽에는 분쟁이 있습니다.

분쟁 있는 이유가 왜 그렇습니까? 전부, 왼쪽 거는 전부 죽은 생활이기 때문에 죽은 것들만 모아 가지고, 마귀도 그놈 죽은 놈, 다 정죄받아 사형받아 있는 놈, 이 심신도 전부 다 사형받아 가지고 있는 놈, 영도 죽은 것, 다 사형받아 가지고 있소. 우리의 육체는 사형받아 가지고 있어요. 사형받아 가지고 있어요. 또 영도 사형받아 가지고 있어요. 영은 죽었어요. 이러니까 악령도 사형받았지, 우리 심신도 사형받았지, 영은 죽었지. 죽은 것들만 모이니까 죽은 생활하니까 시비가 없어.

이런데 오른편에 이 육의 생활하는 데에는 자, 영은 사형받았고, 악령은 사형받았다 말이오. 악령은 사형받아 그놈은 죽을 자라. 죽는 노릇만 하고 있는 자라. 악령은 사형받은 자, 또 이 심신도 사형받은 자, 중생된 영도 사형받은 자, 맞습니까? 중생된 영도 사형받은 자, 맞습니까? 안 맞아.

그러면 중생된 자가 육의 생활할 때에는, 육체 생활할 때에는, 육체의 생각하고, 육체의 욕심하고, 육체의 뜻하고, 육체의 소원하고 이럴 때에는 거게는 요소가 몇 가지입니까, 손가락으로? 요소가 몇 가지요? 손가락 들어 봐요, 모두. 저 목사들 들어봐요, 목사들 들어 봐. ○○○조사 들어 봐, 손가락 들어 봐.

셋인데 그라면 왼쪽에 육체 생활에는 죽은 것이 몇이며 산 것이 몇이요? 죽은 것이 몇입니까, 왼쪽에는? 손가락을 전부 들어 봐. 왼쪽에는 죽은 것이 몇이요? 셋. 오른쪽에는 죽은 것이 몇입니까? 둘. 산 거는 몇입니까? 하나. 이만해도 많이 알았어.

배우고, 이제 자꾸 나와요. 이제 이 배워서 알면, 이 알면 믿게 되고 믿으면 하나님의 전능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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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참된 양식-목회자의 할 일/ 요한복음 6장 45절-51절/ 1985. 3. 20. 수새벽 선지자 2015.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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