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양식


선지자선교회 1985년 3월 21일 목새

 

본문 : 요 6:41-48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예수님께서. 41절에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사람들이  수군거렸습니다. '이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인데 어떻게 해서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느냐?' 그들은 의문이 많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하늘로서 내려왔다고  하는 이것도 그들의 생각에 전연히 이해가 되지 않는 순전히 이는 거짓말로  그렇게 밖에는 안 들려지고. 또 예수님께서 떡이라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그것도  이해가 전연히 안 됩니다. 이해가 안 되는 이것은 그들만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도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첫째 아담에게 속한 사람과 둘째 아담에게 속한 사람이 한 사람 속에  들어 있지마는서도 따로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예수님 믿는 것은 속사람이,  새사람이 믿는 것이지 옛사람은 항상 대립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서 내려오셨다는 말씀도 하나도 거짓이 없는 참 말씀입니다. 또, 예수님이  떡이시라, 양식이시라. 떡이라 양식이라 하시는 말씀도 또 거게 한 마디도  거짓말이 섞여 있지 안하고 다 참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다만  첫째 아담에게 속한 지식을 가지고 알려고 하고 또 자기네들이 모두 다 연구하고  깨닫고 이래 할라 하기 때문에 거게는 하나도 예수 믿는 이 이치나 또 작용이나  그런 것은 하나도 거게 섞여 있지 않습니다. 그건 순전히 하늘로서 내려온  구원을 또 하늘에서 내려온 성령의 역사로만 이 구원을 증거하게도 하고 또 들어  깨닫기도 하고 구원을 이루어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의문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수군 거렸다.' 그 수군거리는 거 이것은 필연한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이라는 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이라  하는 말씀이요,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이라 이 말은 하늘에서 내려온 새사람, 또  하나님의 형상대로 된 사람. 하나님의 형상대로 된 사람이 새사람이요 마귀의  형상대로 된 사람이 한사람. 옛사람, 변질된 사람. 타락한 사람이 사람인데. 이  하늘에서 내려온 새사람, 이 변질된 사람에서 새로 회복함을 받은 새사람.

하나님 형상대로의 사람. 하나님의 신성을 닮은 그 인격성의 사람 순전히  새사람의 양식을 가리켜서 말씀을 하신 것인 데 이 사람들은 새사람의 양식을  생각지 안하고 육체의 사람 이것을 포준 해 가지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이  생각하는 그 생각은 그 사색이 틀렸고 비판과 평가가 틀렸던 것입니다.

 이 떡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그 신성의 모형인, 신성 같은 인격성 참사람  새사람 이 사람의 양식인데, 이 사람은 물 먹고 사느냐 하면은 물질 먹고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과 또  하나님의 맡기신 그 일을 하나씩 둘씩 다 이루어 나가는 그것으로써 그 사람은  배부를 수도 있고 자랄 수도 있고 강건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떡을 가리켜  말했는데, 이 유대인들은 자꾸 첫째 아담의 타락 후의 변질된 사람. 그대로의  사람 가지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이 이해가 안 되고 자기들에게  수군거리지 안할 수 없는 그런 모순이 생겨졌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도를 들을 때에 하나님이 위로부터  내려오셔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하늘로부터 새로 하나님의 역사가 내려오는  그 역사를 따라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타락한 후의 사람의 가진 그  지식이나 거게서부터 움돋아 와 가지고 되는 구원이 아닌 것입니다. 요거 좀  알아 듣기가 좀 거석해도,  그러면, 이 종교와 기독교가 이것이 다릅니다. 이종교는 다 타락한 첫째  아담에게 속한 그 사람이 들을 수 있는 것이요 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요  그 사람이 그 종교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그 사람이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시 새로 창조함을 받은 새사람. 하나님의 신성. 변질되지  안한 사람, 변질된 사람이 그 변질된 데서 다시 복수돼 가지고 근본 원형대로 된  그 사람,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의 양식이요 그 사람이 들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는 위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시발된 구원이 위로부터 내려와서 사람에게  와서 역사하는 것이요, 또 이종교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니고 이미  타락되어 있는 사람 자체에게서 발동해 가지고 그것이 성장돼 나가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이미 타락돼 가지고 있는, 발동돼 있는 그것이 성장돼 나가는 것이  그것이 이종교요 또 그것이 철학이요 또 그것이 주관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된 기독교 외에 있는 모든 종교는 어떤 종교든지 그 종교는  다 철학입니다. 철학과 기독교는 정반대의 것인데 사람들은 그 근본을 생각지  아니하고 좀 은밀한 그 신비성만 가지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철학이나 기독교나  다 그것은 같은 성질의 것이요 종류의 것인데 다만 그 이름이 다르고 또 그 길이  다른 것뿐이지 그것은 다 하나라. 이러니까 시발은 다를지라도 마지막에  종착되는 그 결과는 같다' 이래 가지고서 종교 통일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OOO씨는 종교 통일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은 '불교나  뭐이나 사람들이 아직까지 무식해서 그런 소리를 하지 좀 깊이 들어가면 무슨  종교든지 마지막에 종착에는 같이 만나게 된다' 그렇게 말을 해서, 내가 언제  한번 들었는데 미국에 무슨 종교 통일을 그것을 모형해서 무슨 회관을 지어  놨는데 그 회관의 입문은, 문이 다섯이라든가 여섯이라든가 그때 한 부선  목사님이 말해서 한번 들었는데 내가, 그런데 그 하나는 기독교 입문이고 하나는  뭐 불교 입문이 고 하나는 힌두교 입문이고 뭐 하나는 유교 입문이고 이래해  가지고서 이런대, 처음에 들어가는 문은 다르지마는 마지막에 들어가면 그 안에  있는데는 다 한통살이라, 하나라. 이러니까, 그래 가지고 그 집이 미국서 건물  중에 제일 큰 집에, 순위로 제일 큰 집이라 이래 말들었는데. 혹 O 목사님 그  집이 무슨 집인지 압니까? 한 부선 목사님에게 제가 들었는데 그 집이 미국서  제일 그 집이 크다고 그렇게 말합디다. 누가 아마 어데 가서 찾아보면 뭘 알란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기에, 기독교와 이종교가 다 같은 종교라, 이름만 다르고 종류만 다르지 다  실은, 시발만 다르지 종착은 같다 그렇게 생각하는데서, '이 세상에는 뭐  여러가지 학문이 많은데 그 중에 철학이라는 학문이 있으니 그 철학은 기독교와  같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의 연구를 할라면 철학을 연구하면 내나 기독교  연구가 된다. 기독교와 철학은 사촌간이고 서로 조금 다른 것 같지마는서도  같다' 이렇게 생각을 하기 때문에 신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철학을  가르치는, 철학의 중요성을 들고 필요성을 가지는 것은 철학이나 기독교나 다  그것은 신비한. 나타나지 안한 감추어 있는 은밀한 신비한 것을 자꾸 사색해  가지고 궁구해 나가는 것인데 궁구하기를 이런 길로 궁구를 해 나가고 저런 길로  궁구해 나가지마는서도 궁구해서 깊이, 들어가면 마지막에는 다 하나라 그렇게  사람들은 생각을 가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철학은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이니 사람에게서. 땅에서 출발해  가지고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위로 올라가는 것. 그러면 올라간다 고 뭐  하나님에게까지 도달 한다는 말 아니고 올라가는데 조금씩 조금씩 조금 더 높은  차원으로 이렇게 생각해 나갑니다. 아무래도 그거는 뿌럭지가 땅에 속했고  피조물에게 속했고, 기독교는 땅에서 올라가는 게 아니고 위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위에서, 영원 자존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부터 이렇게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는 위에서 내려오고 하나는 아래에서 올라가고, 그러면 그래  만날 수가 있느냐?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공간을 두고서 올라간다 또 내려온다, 내려온 다  올라간다 이라니까 가다가 만날 수가 있으리라고 그렇게 생각하지마는 서도  이것은 땅에 속한 것이고 저거는 하늘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하늘과 땅이 다른  것이, 하늘과 땅과 다른 것이 하늘의 것이 점점 이와 같이 성장 돼 나가니까.

성장돼 나간다 그 말은 이거는 무슨 말인고 하니 하늘에 속한 것이 자꾸  하늘에서 발포돼 나간다 말이오. 발표돼 나가 하늘에서 자꾸 나와서 발표가 돼  나간다. 그러나 또 땅에 속한 그것은 그것이 또 자꾸 발표돼 나간다. 땅에 속한  것이 전부 크게 넓게 발포되고 위에 하늘에 속한 것이 넓게 발표되고 이러니까  그것이 자꾸 오래 갈수록, 오래 갈수록 그러면 하늘에서 내려온 기독교와 땅에서  나온 철학과 깊이 깊이 연구를 해서 자꾸 들어가면 그것이 가까워지겠습니까?  그것이 멀어지겠습니까? 가까워지겠습니까? 멀어지겠습니까? 어찌 되지요?  멀어져요? 예. 멀어집니다. 멀어집니다. 처음에는 조금 다르던 것이 점점 많이  달라지고 달라지고 나중에는 아주 크게 많이 달라지고 거리가 멀어지고 멀어지고  자꾸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종교와 기독교가 이렇게 다른 것인데, 이 사람들이 지금 하늘에서  내려오는 도를 땅에 있는 이것을 가지고 자꾸 듣고 이해를 할라고 하니까 이해가  안 되니까 점점 예수님의 하시는 일이 반대가 되어지고 죽일라고 하는 그런 그  정반대의 그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게 떡이라 말은 변질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복구돼 가지고서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어진,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모형이 되어진 그 사람, 참사람, 변질되지 안한  참사람. 하늘에 속한 사람. 또 참사람. 하나님의 형상의 사람 그 사람의  양식이라 그 말입니다. 떡이라 말은 그 사람의 양식이라 그 말입니다.

 그러면. 양식이라 말은. 이 고기 덩어리의 양식은 물질을 먹어야 양식이  되지마는서도 요 하나님의 형상인 신성의 모형인 이 인격성, 하나님의 신성과  같은 인격성, 그래서 베드로후서 1장에는 보면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됐다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의 신성과 같은 그 인격성이 되어진다. 인격성이  신성과 같이 되어진다. 그러면, 그 인격성은 뭘 먹고 자라는가? 하나님이 하고저  하시는 그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그것이  새사람, 하나님의 신성의 모형인 그 인격성의 양식이고, 또 하나님이 맡겨 주신  그 일을 자꾸 하나씩 둘씩 해서 이루어 나가는 것이 그것이 양식이라.

 그러면,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모형대로 지은 존재인데 피조물 물질에 속한  부분이 있고 또 하나님에게 속한 부분이 있어 하나님에게 속한 부분을 가리켜서  영이라고 말하고 물질에 속한 부분을 육이라고 이렇게 말을 하는데, 고 하늘에  속한 그 부분은 사람의 두 요소 가운데에 주격이 되어 있고 땅에 속한 부분의  요소는 피소유격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격과 소유격. 또 하나님에게 속한  부분 또 물질에 속한, 피조물에게 속한 부분 이래서, 그것을, 사람의 구성이라  하는 것은 영과 육이 두 가지 요소로 되어 있다 이래서 뭐 이분설 말하는 사람도  있고 땅에 속한 부분을 둘로 나눠 가지고서 삼분설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분설이 더 편리하다 하는 그런 점도 있고 또 이분설만 가지고는 안 되니까  삼분설이 더 편리하다고 하는 그런 부분도 있습니다. 그렇게 다 장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땅에 속한 것은 땅의 것을 먹어서 그것이 자라게 되는 것이고 또  하늘에 속한 것은 하늘의 것을 먹어야만 자라게 되는 것인데, 사람은 그 영이  주격이 되기 때문에, 마치 주인이 죽으면 집이 퇴락되는 거와 마찬가지로 영이  죽으면 땅에 속한 것이 나중에 가서 퇴락해 죽습니다. 처음에서 선악과를 먹고  난 그 정죄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속한 영이 죽었는데 그 영은 단번에  죽었고 그 영이 죽으므로 땅에 속한 이 심신의 육이 점차적으로 이렇게 죽게 된  것입니다. 마치 그 주인이 형편이 낫아지면 그 집이 형편이 낫아집니다. 주인이  형편이 낫아지면 그 집에 대해서 뭐 페인트도 칠하고 자꾸 뭐 집도 고치고, 그  집을 보면 주인의 형편이 좀 살기가 나은 가 좀 형편이 더 어려워지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은 통계하기를 주인의 형편이  부자가 되면은 그 집이 윤택하게 되다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런 데  보면서도 자꾸 이 집은 보니까 뭘 조그매씩 자꾸 고치고 또 아름답게 꾸미고  이래 쌓으면 그 주인의 형편이 낫다 그거요. 그거 모양으로 영의 형편이, 영이  강건해지면 육이 자꾸, 이 심신이 형편이 낫아지고, 영이 죽어 버리니까 이  심신의 형편이 그만 차차 차차 이래 죽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요소가 있다는 거. 그래서 육체의 욕심은 사망이요 영의 소욕은  생명과 평강이니라 하는 그 말은. 영을 말하는 것은 성령을 말한 것인데 곧  우리의 중생된 영의 소욕이 성령의 소욕이요 성령의 소욕이 곧 우리 영의  소욕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성령도 영이라고 말해 놓고 또 우리의 영도  영이라고 말해 놨기 때문에 고거 잘못하면 혼돈해 가지고서 사람의 영을  하나님의 영으로 해석하기 쉽고 하나님의 영을 사람의 영으로 해석하기 쉬운데,  그라면 그것이 정 꺼꾸로가 돼 버리고 맙니다.

 이 영과 육이 있어 가지고서 사람이 된 것인데, 사람의, 기독교의 구원은 그  영을 살려 가지고, 영을 살려 가지고서 영이 살아남으로 차차 차차 육이, 마음이  살아나고 그 다음에는 몸이 살아나고 이렇게 살아 나가도록 되는 것이 그것이  기독교요, 이 모든 이 세상의 다른 이종교라든지 철학이 라든지 그런 것은 그.

영이 죽은 영이 죽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면, 영은 죽고. 영은 죽어 있고 다만  아직까지 죽어 가고 있는 마음과 이 고기 덩어리는, 이 두 가지 합해서 육이라는  것인데, 마음과 이 고기 덩어리는 다 죽지 안하고 살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고기 덩어리와 이 마음 이 둘이 작용해 가지고, 작용해 가지고 움직이는 그것이  뭐이냐? 철학이요 그것이 다 또 과학이요 또 그것이 모든 인간의 지식이요  이종교들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근본이, 뿌럭지가 끊겨져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사는 것이 하늘에 속한 그 주격이, 하늘에 속한 주격 그 영이 살므로 이 땅에  속한 것이 그 소유가 돼 가지고 윤택해서 살아지고, 또 위의 것이  장성해짐으로서 땅에 속한 것이 권위가 점점 커져 가는 이런 작용이 안 되고, 그  주격이 죽어 있기 때문에 죽은 주격이 그것이 자꾸 그것의 작용으로 돼지니까  세월이 갈수록 차차 차차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종교나  철학이라는 그것은 세상을 마칠 때에 그때에 다 죽은 것입니다. 세상을 마칠  때에 다 죽고 그 안에는 살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종교들과 철학자들은 말하기를 '사람이 보통 사람은 죽으면 그만 그  죽는 동시에 죽어 버리지마는 좀 성현이나 유명한 사람들은 죽고 난 다음에 오래  동안 좀 산다. 그래서. 사람을 둘로 나누면 위에 상체와 하체 둘이 있는데,  상체는 이것이 죽어도 당장 죽는 게 아니고 그거는 좀 시간이 걸쳐서 죽고 난  다음에도 좀 살아 있고, 하체는 즉시 죽어서 없어진다. 그러면, 상체가 이렇게  더더 죽는 이것은 그 사람의 머리의 정신이니 생각이니 모두 다 마음의 요소를  두고서 말하는 것인데, 위대한 의인이 나 아주 대인들은. 대인은 죽은, 대인이  죽은 그 마음은, 그 정신이나 혼이나 그 대인이 죽은 것은 그것은 몇 백년도  가고 몇 천 년도 간다. 그러나 서민이 죽은 것은 즉시 죽는다'  그렇게 조작배기로 꾸며 가지고서 그렇게 말을 하나 실은 그것이 다 살아  갈수록이 자꾸 죽어 가는, 이미 죽게 되는 뿌리에 끊긴 나무와 마찬가지로 죽어  가는 그 심신이 그것들이 죽은 내음새를 자꾸 피우는 것입니다. 그래 죽은  내음새를 피운다 고 표현을, 벌써 생명이 끊어졌으면 끊어진 그것이 시간이 있어  가면 차차 차차 내음새가 나는데 그 내음새 나는 것은 썩는 내음새요 그것이  자꾸 없어지는 내음새라. 그러기 때문에, 땅 위에 있는 모든 이종교라든지  철학이라든지. 그런 것은 그것이 그와 마찬가지로 죽음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요  타락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요 점점 그 죄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 그러면, 점점  썩고 있는 내음새요 점점 나머지기가 완전히 그 심신이 죽는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땅에 있는 건 그러하고, 기독교는, 이 첫째 아담에게 속해서  죽었는데 이것이 하나님이 특별히 구원하시는 그 구원의 역사로, 구약 시대는  구원 역사의 그 완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료가 되기 때문에 그때  완료는 안 되지마는서도 하나님이 예표로 이렇게, 예약으로, 예약, 예포로  약속된 대속이 있으니 곧 짐승으로 대속을 받아 가지고서 그렇게 구원을 이루는  그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것은 아담의 아들 가인과 아벨이 거석할 때에  아벨은 이 약속에, 약속에 소속해 가지고 그는 그때부터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렸을 때에 하나님께서 받으셨고 가인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지 안했습니다. 받지 안한 것은 그에게 하나님의 그 은혜가, 특수  은혜가 그에게는 연결이 되지 안했고 아벨에게는 연결이 됐습니다. 연결이  됐으니까 아벨은 죽었지마는서도 히브리서에 보면은, 12장에 보면은 예수님의  피만은 못하지마는서도 그 피는 살아 역사하고 있다고 해서. '아벨의 피보다  낫게 역사한다' 예수님의 피를 대해서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러기에, 이렇게 하늘에 속한 이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의 양식이라는 것을  가리켜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다. 이 떡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한  떡이다. 산 떡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차차 차차 발표해 가지고서 '내 피와  살이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여기 떡이라 말은 하늘에 속한 그 하나님의 형상대로 되어 있는 신성에  속한 인격성인 이 모든 피조물 중에 제일 으뜸가는, 그러면 천군 천사보다도  위에 있고 가장 피조물 중에는 으뜸가는 이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의 주격의 양식이라, 사람의 주격인 영의 양식이라. 사람의 주격인 영의  양식인데, 영의 양식은 어떤 것이 영의 양식이냐? 영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그것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으로써 그것이 살고 자라가고. 또  하나님이 맡겨 주신 그 직책을, 하나님이 맡겨 주신 그 직분을 그걸 하나씩 둘씩  성취해 나감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성장돼 나간다 자라간다 그것을 가리켜서 여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만났을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너희 양식이 있다.' 그러면. 나의 양식은 지금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인데, 수군거리기 때문에 설명을 해 주시기를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나의 양식은 다른 것이 아니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 내 양식이요 또 나에게 맡기신 그 일을 다 성취해 나가는, 다  이루는 저이. 하나씩 둘씩 성취를, 완성을 해 나가는 그것이 나의 양식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것으로 점점 인격은 자 라갑니다. 그러기에, 요거 아주.

그런데. 이 사람들은 뭘로 가지고서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을 들었느냐? 옛사람,  땅에 속한 사람이 들었고, 땅에 속한 사람의 지능을 가지고. 그 모든 감각이나  그런 거 가지고 듣기 때문에 이는 전연히 이해가 되지를 안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은 철학과 아주 다릅니다. 철학은 인간 자기  주관이, 주관이 철학을 믿는 것입니다. 또 자기 주관이 지금 자꾸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하고 자꾸 생각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꾸 생각해 가지고 주 모은 그것을  가리켜서 이 세상의 지식이라 그렇게 말하는데, 타락한 사람이 자꾸 한 사람이  생각하니까 고만치 양이 많아지고 두 사람이 생각하니까 양이 많아지고 자꾸  사람이 생각한 사람의 숫자가 많으니까 자꾸 양이 많아집니다. 그것이 이 세상  지식의 양인 것입니다. 또 그 사람이 생각을 한 사람이 생각한 그 생각에다  거게다가 끄트머리를 달아 가지고서 또 자꾸 생각에 생각을 하니까, 마치 한  자되는, 한 자되는 막대기. 한 자 되는 막대기에다가 또 한 자되는 막대기를  이으니까 두 자는 안 되지마는 서도 한 자 가웃이나 되고 거기다가 또 막대기  하나 이으니까 또 두 자나 되고 또 네 개 이으니까 한 두 자 가옷이나 되고 자꾸  이렇게 이어 나가는 것으로 이렇게 해서 이 세상 문화라 하는 것은 건설이 된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러면, 한 사람의, 많은 사람의 지식이 모여 가지고서 옆으로,  많은 지식이 모아 가지고 횡적으로 옆으로 지식이 양이 넓어지고 많아집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이래 말하고 저 사람은 저래 말해 가지고서 세상 지식의 양이  많아지고 넓어지고 또 한 사람의 지식에다가 끝을 이어 가지고 거게다가  연구에다가 연구를 가해 가지고 자꾸 이렇게 하니까 그 지식이 자꾸 인제  높아진다 이라는데, 그게 높아지는 게 아니라 그게 자꾸 이거.

 자. 타락한 것이 자꾸. 타락한 것이 많이 발달되고 죽은 것이 많이 발달 되니까  그것이 참에게서는 멀어진다고 말했지요. 그것이 자꾸 밑으로 내려간다 그  말이오. 자꾸 타락해 갑니다. 그러면, 인간의 지식에다가 지식을 자꾸 이렇게  자꾸 계속해서 연장을 시키고 또 거게다가 자꾸 보태서 이래 더해 보태고 이래  자꾸 이래 하니까. 보태니까 그 지식의 양이 많아지고 또 연장을 시키니까 그  지식의 길이가 깁니다. 자꾸 길이가 기요. 그러면. 길이가 기니까, 하나는  하늘에서부터 내려오고, 이 구원이 내려오고 또 하나는 인간에서부터 자꾸 뻗어  나가는 것인데, 이러니까, 이것이 연구에 연구를 자꾸 가하니까 발달이 되고  성장이 되고 이렇게 진화가 되는 거 같지마는서도 실은 그것이 자꾸 근본이 죽어  있기 때문에 점점 더 죽어지는 것이요 더 타락하는 것이요 더 하나님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에 말씀하시기를 '사탄의 깊은 것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들에게 내가 뭐 딴 부담을 주지 않는다. 그것을 모르는  자들은 잘 됐다. 너희들이 지금 행하고 있는 고대로 행하라. 그러면 횐 옷 입고  나와 같이 된다.' 사탄의 깊은 것이라 하는 그것이 뭐이냐 하면 이 모든 이종교.

모든 세상 지식, 모든 철학 그런 것들을 가리켜서 사탄의 깊은 것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도가 아주 아무것도 지식이라 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말만  아는 사람, 말만 아는 사람. 말도 그게 자꾸 그 지식이 돼 놓으니까 다르기는 좀  다르지마는, 그러면, 무식한 사람이 하나님의 도를 들을 때에 깨닫기가  쉽습니까? 유식한 사람이 깨닫기가 쉽습니까? 어떻습니까? 유식한 사람이 깨닫기  쉽소 무식한 사람이 깨닫기 쉽소? 이거 이해가 안 되지마는서도 이게 사실이라  그 말이오. 유식한 사람은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무식한 사람은 깨닫기가  쉽습니다.

 왜 그러냐? 유식한 사람은 하나님과 반대되어 있는 틀린 배암의 지식에서 자꾸  깊이 들어가고 자꾸 넓게 들어가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지식과 거리가 멀다 그  말이오. 거리가 멀기 때문에 깨닫기가 점점 어려운 것입니다. 이래서, 씨뿌리는  비유에, 씨 뿌리는 비유에 길가 뿌린 씨라 하는 그 길가 뿌린 씨가 어떤 것인고  하니, 그것이 이 인간의 지식으로 점점 광장해 간 사람. 넓어지고 길어진 사람.

광장해 간 그 사람은 하나님의 도와 거리가 멀다 하는 것을 말합니다. 조금  어려운 말입니다.

 그들이 수근거린 것은 인간의 인간에게서 나온 그 지식 가지고서 그 하나님의  도를 궁구할라 하기 때문에 자꾸 의문만 나오고 의문만 나오고 의심만 나오고 안  된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 지식은 하늘에서 내려온 지식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지식을  점점 내가 받아 가지고서 그 지식으로 성장되고 그 지식으로 부강 해지는 방편은  뭐이냐? 그 방편은 뭐이겠습니까? 고 방편은, 요거 알면 좀 여러분들이 좀  뚫어질 거라 말이오. 요거 구멍을 뚫는 건데 고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주면은  받아들이는 거, 받아들이는 거, 자기가 받아들이는 거, 그저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 그러면, 받아들이는 거. 받아들이고 또 행하라 하는 대로 행하고,  받아들이고. 지식으로는 받아들이고 또 자기 움직임은 행하라 하는 대로 따라서  움직이고 그것만 가지고서 성장돼 나갈 수 있지 딴 거 가지고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지식으로는 받아들이는 거, 모르니까, 기역 하니까 기역을  받아 들여야 되지 '어찌 기역자가 됩니까?' 자꾸 이래 암만 파 가지고서도 안  된다 말이오. 모르기 때문에, 자기에게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 씩 둘씩 받아  들여서 이걸 모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행동은 거게 따라서 움직여야 되는  것인데, 그저 받아들이는 거 따라서 움직이는 거 고 둘을 합해서 무엇이라고  말하지요? 예? 고 둘 합해서 뭐라고 말합니까? 예? 믿음. 그 둘을 그걸 믿음이라  합니다. 믿음이라.

 이러기 때문에. 이 도가 너무 깊고 길고 이렇게 광대하고 이러니까 우리와  거리가 멀기 때문에 자꾸 이걸 알리기 위해서 말하는데에 시간이 많이 간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그만 어린 아이들은 돼요. 어린 아이들은 이 배암의  지식이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의 지식으로 자꾸 들어가서 그만 그대로 들어가  버리면 그대로 받아 들여요. 그대로 받아들이니까, 빈자루에다 가 자꾸 담으니까  하나씩 둘씩 들어오는 대로 자꾸 받아들이니까 자꾸 차여진다 말이오. 그러니까.

사무엘이 공부하지 않은 무식한 사람이요 또 요셉이가 무식한 사람이지마는서도  굉장히 성장됐다 그거요.

 다니엘이. 다니엘이라하는 그런 사람들이 참 십 배나 총명을 가졌지마는서도 그  사람들이 바벨론에서 가르치는 그 지식을, 바벨론 지식 가지고서 그와 같이 자꾸  십 배나 돼 갔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 온 지식,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혜 지식을 줬다 총명을 줬다 이랬습니다. 그 지식을 자꾸 이와 같이  지금 부강하게 돼지니까, 부강하게 돼지니까 땅에 있는 지식으로서는 비교가 안  되는 그런 지식이 자꾸 됐던 것입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왕이 모든 박사들 데려다 놓고 물으니까 '꿈을 말안 해  주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거 해석을 하겠습니까?' 이라니까 '꿈을 모르는, 꿈을,  내가 꾼 꿈을 모를 수 있는, 모르는 그런 지식이라면 그거는 인간을 탁월한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그거 알진대야 내가 하지 너거하테 뭐 해석 물을 게 뭐  있겠느냐? 이 꿈을 모르는 자는 조작배기로 말하는 것이지 꿈 해석할 자격이  없다' 이렇게 말해 가지고서 꿈을 모르는 자에게는 아예 꿈을 가르쳐 주지  안했습니다. 안 해 주고 꿈을 아는 자에게만 말해 줬습니다. 꿈을 아는 자에게  말해 주는 게 아니라 '네가, 그러면 내가 무슨 꿈 꿨지?' 이랄 때에, 요셉이도  말하고 또 다니엘이나 이런 사람들도 다 말하기를 '이거는 내가 아는 게 아니고,  아무도 모릅니다. 인간은 모릅니다. 인간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로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수있습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알려 주시면 내가 알아서 바로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요렇게  말했다 말이오. 그런 경험이 있거든. 자꾸 인제.

 그러니까, 그 특수 학원에서 공부를 했지마는, 특수 학원에서 공부를  했지마는서도 공부할 때에 공부하는 그것을 뭐로 삼았느냐? 공부하는 그것을  하나의 장소로 삼았다 말이오, 장소. 공부하는 그 학원을, 학원의 지식 받아  가지고서 제가 뭐 어떻게 될라 하는 그게 아니고 그 학원을 자기가 하나님의  지식을 받는 한 장소로 기회로 요렇게 삼았다 그거요. 그러니까 거기서 사람  보기에는 사람의 그거 배우는 것 같지마는서도 그때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거게  대해서 한 지식이 나오면 거게 대해서 당신이 말씀한 대로 고거 듣고, 그러면,  요 지식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지식, 그러면, 땅의 것이 무엇이든지, 물건이나,  물건은 아니지마는서도 땅에 있는 모든 사물의 지식이 되어 있는 것 아닙니까?  그 사물에 대한 것이 나요면은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거게 대해서 가르쳐 주는  그걸 자꾸 들었다 말이오. 그걸 배웠다 말이오. 그러니까, 위로부터 내려오는 그  지혜와 총명과 지식을 받았다 그거요.

 그러니까, 그 학원을 졸업했는데 사람들은 무슨 지식을 졸업했습니까? 사람들은  바벨론 지식을 졸업을 했는데, 바벨론 지식을 졸업했는데 다니엘이니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니 하는 이런 넷 청년은 바벨론 지식을 졸업 한 것이 아니라 다야  안 됐지마는서도 하나님의 지식을 지금 공부해 가지고 하나님의 지식이  통달해졌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다니엘이 느부갓네 살 왕이 꿈꾼 것을 무슨 꿈  꿨는가 안 것도 하나님에게 배운 그 지식 가지고 알았고. 또 해석하는 것도 그  지식 가지고 알았어.

 그러면, 그 지식은 한 번 지식 가졌으면 그 지식 가지고 뭘 쓰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때 그때 가르쳐 주시는 그 지식이라 말이오. 하나님이 그 때 그때  가르쳐 주시는 그 지식이니까 오늘 우리에게 와서 있는 것이 뭐이냐 하면 영감인  것입니다. 영감이. 한 번 영감 받아도 그 영감 가지고 모든 거 아는 게 아니고,  영감이. 영감이 그때 그때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그대로 감각하는 것이 그것이  영감이요 고대로 행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수군거려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이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가 우리와 같이  있는데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그러면, 그들이 지금 무슨  지식을 가지고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지금 이해할라고 하고 있었느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지식을 무슨 지식 가지고 이해할라고 했고 또  비판할라고 했더냐? 그들은 땅에 속한 지식 가지고 이해할라고 했고 비판할라고  했기 때문에, 그러면, 예수님의 하시는 그 하늘에서 내려 온 그 지식이 그들의  지식 가지고 이해할라 하고 비판할라고 했으니까 이해가 됐습니까 안 됐습니까?  그 지식이 있는 것만침 이해가 더 됩니까 덜 됩니까? 어찌 돼요? 예? 덜 되지.

덜 되지, 않소? 점점 안 된다 그 거요.

 그러니까, '어째 그러냐?' 아주 저거대로 또 말이 옳다 말이오. 저거 말로  하면은 말이 옳아요.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요셉의 아들이요 마리아의  아들이지요. 그런데 실은 하늘에서 나온 지식을 말하면 하나님의 독생자거든요.

떡을 말했는데 이건 참말로. 떡은 참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떡 이요 또 이 떡은  살찌게 하는 떡이라 말이오. 아주 살찌게 하고 참 살게 하는 떡이요 참떡이요  참양식인데 또 그들은 생각할 때에 '그게 어떻게 양식이 되느냐? 예수님의 피와  살이 얼마나 많아서 우리가 먹고 사느냐?' 항상 육덩이 위주로 육덩이 본위로서  이와 같이 하기 때문에 안 된다 그거 요. 이거 하나님의 도가 전부 다  그렇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 해야만 되어지는 것이지 자기를  부인하지 안하면 안 된다 하는 요거, 여러 분들이 이거 들으면 아마 혹 이해가  처음에는 무슨 말인고 모르기 쉬울 거라.

 4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수군거리지 말라' 그래 이해 안 된다고 자꾸 그와 같이 말하지 마라. 이해 안  된다고 말하지 말고 그저 무조건 배워라. 무조건 배우고 듣고 수락해라, 또  행동은 '이라면 어찌 됩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래 행동하면 어찌 됩니까?'  그래 물으니까 뭐라고 했습니까?  저 조는 사람들, 이 도가 속에 안 들어가. 이 도가 안 들어가면, 지금  조작배기로 인간 지혜 가지고서 예수 잘 믿습니다. 인간 지혜 가지고 예수님을  잘 믿지마는 이거는 언제든지 타락한 인간 자기 주관의 것입니다. 주관의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비유해서 집 짓는 비유에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 했어. 암만 많아 봤자, 암만 많아 봤자 그거 모래 위에 지은 집이기  때문에 인간이 능가할 수 없는 그런 일이 오면 다 삼켜지고 망하고 만다 그  말이오. 반석 위에 지은 집은 장마가 들고 바람 불 고 이래도. 그런 것을 능가할  수 있는 뿌럭지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긴다, 이거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은  이긴다 그 말입니다.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아버지께서 이끌지 안하면 아무도 올 수 없다. 아버지께서 이끌어야 올  수 있다.

 요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 믿는 것은, 예수 믿는 것은 자기 주관에서  내가 도를 듣고, 내가 도를 듣고 나니까 이제 예수 믿을 마음이 생기고, 불교  들으니 불교 믿을 마음이 생기고 유교 들으니까 유교 믿을 마음이 생기고 이렇게  생기는 것처럼 내가 전도를 들으니까 내가 믿을 마음이 생겨졌다. 생겨져  가지고서 예수를 믿는다. 또 내가, 중이 와 가지고 불교를 전하기 때문에 그  전하는 불교를 듣고서 내가 불교 믿을 마음이 생겨 가지고서 불교를 믿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말이오. 그런 것이 아니라. 요 근본을 좀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 네가 근원이 돼  가지고 -요거 잘 안 들으면 모릅니다. 요거 지금 아마 공부 안 한 사람들은 잘  들을란지 모르는데, 알고 그만 수락하면 되는데, 고대로 그만 받아 들여  가지고서, 주입식으로 할 때에 그 주입을 딱 받아들이면 되는데 이게 이런가  저런가 비판하고 논리하면은 비판하고 논리하는, 비판하고 논리하는 그 원형  지식이 무슨 지식입니까? 비판하고, '이 지식에 맞는가 안 맞는가 보자'  비판하고 논리하는 그 원형 지식이 무슨 지식이지 그? 저 OO교회 있는 저  조사님.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를 들을 때에 이게 맞나 안 맞나. 이게 이치에  맞나 안 맞나, 틀리나 바르나 이것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이리  저리 비판하고 있는데 그 비판하는, 비판하는 그 잣대 말이오. 비판하는 잣대.

비판하는 그 원형 지식, 그들이 가지는 원형 지식에 맞은가 안 맞은가 보자, 그  지식을, 하나님이 떡 무슨 지식을 말할 때에 이 지식이 맞나 안 맞나 하고서,  맞나 안 맞나 하고 그 지식을 지금 비판하는데 비판할 때에 자기들이 가진 그  원형 지식이 무슨 지식입니까? 마귀 지식. 배암의 지식. 인간 지식, 사람의 지식  이것이기 때문에 그 지식 가지고서 비판하고 하면은 그 답안이 하나님의 지식은  맞다 나오겠습니까? 틀렸다 나오겠습니까? 예? 틀렸다 나온다 말이오. 백의 백이  틀렸다 그래 나온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부인하지 안하고는 안 되다 그거요.

요거 아주 어려운 말인데.

 예수 믿는 사람은, 44절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그 말은 제가 예수 믿는 것이 예수 믿는 도를 들어 가지고  예수 믿고 싶다 할 때 그때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이끌어 가지고서,  이끌어 가지고 예수 믿구로 만드는 그 모든 이끌어 가지고서 예수 믿도록 만드는  그 작용이. 작용의 그 순서의 과정 중에 전도도 하고 말씀도 듣고 배우고 이래  되는 그것이지, 말씀 듣고 배우는 그게 시발이 아니고 벌써 아버지께서, 주님을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야 거게서부터. 이제 움직여 가지고서 시발이 된다 그  말이오.

 요것을 아는 사람은 이종교나 기독교가 같다 이 소리 안 합니다. 오늘 '이  종교와 기독교가 다른 게 뭐꼬' 하는 정의를 말하면 참 고것을 바로 아는 사람이  별로이 많지를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거 모두 다 모두 혼잡해  가지고서 타협주의로 나가는 것을 '뭐 괜찮지 않느냐?' 천주교와 개혁교와  천주교가 합동 번역 하자 하는 이거는 큰 타락입니다. 이거는 큰 타락,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인데. 이거는 뭐 천부당 만부당한 일인데 이거는 다  합당한 일이 아니냐 이렇게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렇다 그 말이오.

 '아버지께서'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이는  위로 부터 이 구원이 시작돼 왔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도 말이오, 예수 믿는  것도 벌써 그 사람이 들어서 믿는 고것이 시발점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주님을  보내신, 하늘에서 주님을 내나 보내셨고 주님 보내신 본부에서 이 사람을 예수를  구주로 믿어 가지고 구원 얻도록 이렇게 작용해 가지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서, 본부에서 움직여 가지고서 이런 건데 그게 뭐이냐 하면은. 그 구원이  무슨 구원이냐? 하나님의 목적 구원이요 예정 구원이라. 말하기를 목적 구원을  우리가 얻었다. 예정 구원 얻었다, 창조 구원을 얻었다 하는 거는 그 근본에서  더불어 말하는 것인데 그걸 모르는 사람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암만  들어야 보배로운 말이지마는 서도 이해를 못 한다 그 말이오. 그러니 좀 할라고  애를 쓰면 알 수가 있을 것인데 또 애도 안 쓰고 애 쓴다고 쓰면 내나 그 원형  지식, 배암의 원형 지식 가지고서 자꾸 잣대를 삼아 가지고 하기 때문에 점점 또  이해가 안 된다 그 말이오. 자기를 부인하고 자꾸,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 말씀  가지고 연구하고 자꾸 바로 들어갈 수가 있다 그거요.

 이러니까. 이렇게 예수 믿는 것도 아버지로 말미암아 거기서부터 움직여 나와  가지고서 그 사람을 전도를 듣게 하고 또 전도하는 사람 보내고, 그러면. 우리가  전도를 듣는 그것이. 그게 시작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나를 이끄시는 그 역사라  말이오. 이끄시는 역사에서 누구를 보내서 전도하게 되고 또 그 사람을 듣게  하고 그 장소에서 그 형편 처지에서 만나게 되고 또 장소에서 듣게 되고 요래  가지고서 그 사람이 예수 믿게 되는 것이지 예수 믿게 되는 것이 벌써 내가  전도를 받아 가지고 믿는다 하지마는서도 그 전에. 그 전에 영원 전에부터  역사해 나오고 위로부터 역사돼 나오기를 얼마나 수십 차례 역사가 나와  가지고서 그 결과적으로 된다 그거요.

 그러면, 내가 성경을 보는 것이, 여러분들 성경을 보는 것이 '내가 보고 싶으면  보고 보기 싫으면 만다.' 우리 성경 보는 것이 그것이 그 성경보기 시작되는  그시발이 내게서 시작됐습니까? 아버지에게서 시작됐습니까? 내게서 성경보는 거  내가 보고 싶다 해서 성경을 봅니다. 또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집회에 가서  듣습니다. 오다가다 집회에 가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들은 것이 내가 들은  그것이 시발입니까. 내가 성경을 보고 싶어서 보는 그게 시발입니까 그거 시발  전에 벌써 여러 순서가 벌써 영원 전부터 그 순서가 자꾸 움직여 움직여 나와  가지고서 그것이 지금 오늘 내가 아니고 성경이 보고 싶다 하는 거게 도달이 된  것입니까 그것이 시발입니까? 예? 도달이 된 것이지 그것이 시발이 아니라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영원 전에서부터 철두철미하게 이래 돼 나오는 우리의  생명의 구원이기 때문에, 예수 믿어서 그러면 이 교회 온다. 저 교회 온다 하는  것이 하나 외부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예정으로 오는 사람이 오고 가는 사람이  가기 때문에 제가 가는 사람을 애터지게 붙잡는 사람이 그 사람이 뭐이냐 하면은  하나님의 예정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그 말이오.

또. 그 사람이 와 가지고 예수 믿는 그것을 제가 외부의 껍데기만 가지고 자꾸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마는 실은 그것이 하나님의 예정에서부터 작용 된 그  작용이 지금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 그거요. 또 아버지의 역사가 나타나 가지고서  그래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전도하는 것은, 전도하는 것은 내가 전도로써 전도로써  그 사람을 예수 믿게 시작하는 시발, 시발을 시킬라고. 전도로써 시발을  시킬라고 하는 것 아니오. 시발을 시킬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역사하시는 그 역사의 한 순서로 내가 하나님에게 이용을 당해 가지고서  도를 전하게 되는 것이고, 그 도를 전함으로써 당신의 절대적인 영원한 그  계획이 하나로 이루어 나가는 것이되 나도 하나님의, 그 계획을 이루어 나가는  그이루어 나가는 성취 요소 중의 하나요 요소 중의 하나요 성취의 그 분자 중의  한 분자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도는 이런  것입니다.

 그러기에, 누가 이리 오고 가는 하는 거. 아버지가 다 함부래 작정돼 가지고  이끄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면 전도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  전도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니라 네가 전도하고 싶다고 전도하는 게 아니라 그  말이오. 전도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전도하고 싶은 것도 마음을 역사를 일으켜  가지고 그 사람이 전도하게 되고 전도하니까 또 전도가 돼지고, 또 열심히 해서  목회를 열심히 해 가지고 잘하는 거 또 이와 같이 게을하게 하는 거 이게 다 그  사람에게서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지극히 큰 데서부터 원인이 돼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잘하는 사람으로서는 교만할 자가 하나도 없고 아무리 못 하는  사람을 보고서 멸시할 자가 하나도 없다 그 말입니다. 이 요한복음은 깊습니다.

 그래. '내게로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그러면, 아버지로 말미암아 역사된 그 구원이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그 구원이  완성된다 그 말입니다. 예수님의, 예수님의 삼대 구속으로, 대속으로 인해서  구원이 완성 된다 그 말입니다.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그 말은 지금 사는 것이, 지금 이렇게 신앙생활  하는 이 신앙생활이 하나도, 지금은 신앙생활 하고 지나가 버리니까, 신앙생활  하고 지나가 버리니까 이것이 그만 끝나고 이 세상 일 모양으로 끝난 줄  알지마는서도, 불택자들은 그 세상 생활이 세상 생활 하고 나면 끝나는 줄  알지마는서도 불택자들은 그 생활 하는 것이 죽는 그 죽음이, 죽음이 자꾸 죽고  죽고 죽고 죽고 자꾸 이래 죽는데 마지막 날에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심판을  통과하면 그 죽음이 나타나 가지고 영원히 이제 죽음으로서 계속하게 된다. 또,  예수 믿는 사람은 자꾸 지금 이거 사는 그것이 살고 나서 없어지는 거  같지마는서도 없어지지 안하고 요것이 전부 살아 있어 가지고 마지막 날에는  부활할 때에 그것이 다 형체를 가지고서 나타나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그 생활은 죽지 않는 것입니다. 안 죽습니다. 영원히 안  죽습니다. 안 죽고 지금,  그런데, 안 죽는데. 사람들은 볼 수 없지마는 예수님의 재림 때는 환하게 볼 수  있게 그것이 부활합니다. 부활한다는 것은 그때 새로 죽은 게 살아난다 말이  아니고 살아 있는 것이 그때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또 모든 물질계에  활동할 수 있도록 꺼풀을 입고 나타나고, 또 영계에 활동 할 수 있도록 마음의  지체를. 도구를 입고 나서고 이래 가지고서 부활할 때에 그러니까, 이 세상에  살아나는 그것이 살아난 그대로 부활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활의 권능이라,  빌립보 3장에 바울이 말하기를 '부활의 권능에 참예를 한다.' 부활의 권능  부활의 권능 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부활의 권능을 장만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라면 권능 있는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안하지만 부활할 때는 그  권능으로써 고기 덩어리 가지고 살아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아주 실력있는  부활하고 어떤 사람은 실력 없는, 부활만 뚱뚱하게 했지 속의 실력은 하나도  없는 사람, 그런 사람, 힘이 없으면 몸이 큰 것이 그거 지체스럽지 좋을 게 뭐  있겠소?  조그만한 아이가 계단에서 나하고 같이 오는데, 보니까 조그만한 이거 뭐 고게  입학도 안 한 것 같애 안 한 것 같은데 고게 내 앞에 조그만한 게 가면서, '야  좀 같이 가자' 이라니까 '예' 이라는데, 이놈은 뭐 퍼뜩 퍼뜩 어떻게  올라가는지, 퍼뜩퍼뜩. 고게 국민학교 입학도 안 했겠어. 내가 그래 뒤에  따라가며 속으로 생각하기를 '저놈은 덩치는 작아도 힘이 있으니까 그렇다. 야,  같이 가자' 내가 이라니까 '예' 그라면서 같이 가자 하는데 퍼뜩 뛰어 올라가  버리고 그만, '야. 같이 가자' 하니까 뒤에 돌아보고 앉았고. 몽뚱이는 나는  크지만 힘이 없으니까 안 됐다 그 말이오  이다음에 부활하는데에 부활의 몸뚱이는 뚱뚱하지만 속의 기능은 그렇게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니까, 이다음에 부활했지마는서도 이 물질계에 돌아다닐 수가  없어. 물질계에 돌아다닐 수가 없는 것이 이 고기 덩어리의 육체와. 육체의 그  성화, 육체의 기능이 성화된 게 없으니까 물질계에 다니지를 못해요. 암만 다닐  자유는 있지마는서도 다닐 수가 있어야지요? 우리가, 내가 지금 이러니까  수원지도 갈 수 있고 양사방 갈 수 있지만 힘이 없으니까, 갈 권리는  있지마는서도, 권리는 있지만 힘이 없어 못 가. 그러니까 물질계에 못 와요. 또  영계도, 영계도 얼마든지 돌아다닐 수 있는데 영계 다닐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에 부활의 힘이 없기 때문에 영계를 못 다녀요.

 영계의 힘은 무슨 힘으로 가지고 갑니까? 영계는, 영계는 뭘로 가지고 다니며  물질계는 뭣 가지고 다닙니까? 우리는 그러기 때문에 피조물 가운데에 특수하게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영계는 신령한 우리 마음의 기능이 이것이 완전히 다시  죽은 것이 살아나 가지고서, 그러면. 썩을 것이 썩지 안할 것으로 살아났고 약한  것이 강한 것으로 살아났고 욕된 것이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났고 혈육의 것이  신령한 것으로 살아났다. 그러면, 마음이 살아난 마음의 기능 이거 가지고서  영계에는, 우리 영이 말이오, 영이 우리 마음을 타고 지금 돌아다니면서 이  영계에 일초 동안에, 영계는 한없이 넓지마는 영계를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우주가 얼마나 넓습니까?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 그 항성만 해도 십억만 항성인데  뭐 사십억만인가 뭐 그렇답니다. 인제 요새는 십억만이 늘어서 사십억만인가  그렇데. 태양이 항성인데 한 항성 태양계도 굉장히 넓은 것인데 이렇게 항성이  이렇게 많은 이 우주를 우리가 그때는 지금 만들어 놓은, 지금 살려 놓은 이  몸의 기능, 살려 놓은 고기 덩어리의 기능 이 기능을 타고 그때 돌아다닙니다.

돌아다니니까 돌아다니는데. 이 우주를 일 초 동안에 몇 천 바퀴라도 돌 수 있는  기능을 오늘 만든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육의 기능이, 육의 기능이 그것이 다시 살아나 가지고 살아난  걸 성화라. 또 그것이 부활이라 그렇게, 성화라, 그러면, 영이 죽은 것이 살아난  걸 가리켜서 중생이라 이렇게 말하고, 또 기능이 살아난 걸 성화라 이렇게  말하고, 고기 덩어리 형체가 살아난 걸 가리켜서 부활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부활이라는 말이나 성화라는 말이나 중생이라는 말이나 같은 말이오.

 이래 가지고서 지금 노력을 한 사람은, 친구간인데 '이 우주 한 번 돌아 가  보자.' 이라면 이 사람은 힘이 있어야지? 그라면 같이 가자고 같이 가자 하는데  이 사람은 그만 우주를 일 초 동안에 몇 천 바퀴라도 윙윙 돌아다닐 수가 있는데  이거는 힘이 없으니까 못 돌아다닌다 그 말이오. 알겠습니까? 힘이 없어 못  돌아다니니까 할 수 없어서 그만, 가고 싶기야 가고 싶고 다닐 권리도  있지마는서도 힘이 없어서 못 가. 암만 산에 이런 데도,  내가 어제 저 꽃마을에 가 가지고 그만 거기서 뭐 좀 기도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까 좀 늦었습니다. 늦어 기지고, 또 인제, 마침 그때 뭐 하나  사건이 생겨서 이랬는데, 거기서 산에 이래 쳐다만 보지 가지 못해. 어제는 내가  가보니까 조금 낫아서 '지금은 시간만 걸리면 내가 저 만당 에도 한번 올라갈  수가 있겠다.' 그 전에야 뭐 마음만 있으면 한 시간만 뭐 한 시간이 뭐이라 한  시간 안 걸려요. 한 삼십 분이면 갈 거라. 여기서 저기 수원지 꼭대기 저기  올라가는데 여기서 출발해 가지고 사십 분이면 지금 수원지 꼭대기 저 거석해  놓은 데 거기 올라갑니다. 거기 올라가 사십 분이면 올라가 기도하고 또 내려 올  때는 삼십 분이면 내려오고 이랬는데, 지금은 거기를 갈 수 있나 없나, 아마  지금은 하루 종일. 하루 종일 가면은 혹 갈는지 모르겠소.

 그거 모양으로 우리가 이렇게 마음의 기능은 영계에 타고 다니는 내 승 구요  내의의 병기요, 또 이 고기 덩어리의 기능은 물질계에 타고 다니는 이 병거요  기능이요, 이러니까, 이게 얼마나 보배지마는서도 지금 이걸 알뜰히 차각차각  하는 사람 있고, 우리는 그만 이리저리 해서 그만 그것을 마귀에게 꼬여 가지고  이 땅의 것을 인해 가지고 그것을 하지를 못. 했다 말이오. 그러니까 얼마나  이거 비참한 일인지 참 기가 찹니다. 주님이 말씀 하시기를 너희들이 하나님  말씀 한 말씀의 한 마디 순종한 것이 온 천하를 얻는 거 보다 낫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한 번 순종하는 것이 온 천하를 얻는 것보다 가치가 낫다 이렇게  주님은 평가했는데 배암의 지식 가지고 하니까 돈 천 원만도 못하다 말이오. 돈  만 원만도 못해. 조그만한 직장 그날 하루 일한 품삯만도 못해.

 이러니까. 좀 시간이 많이 갔는데. 이거 단단히 많이 좀 읽어요. 자꾸 읽어라  했지요? 요한복음 이제 공부하는 거게서부터 읽으면 그 전의 것도 가르쳐  주겠습니다. 그러면, 여기 이것을 알아서 이래 도가 넓어지고 참 모든 존재를  전체면으로 이래 알아야 되지 전체 면으로 모르면 미혹을 받아요. 이해가 안  되고. 그러니까, 요 요한복음 41절 이하를 자꾸 몇 번이고 자꾸 읽고 생각하고  하고 이러면 나중에 여기서 가르칠 때에 깨달아지니까 좀 많이 읽어봐요.

요한복음 6장 41절 이하를 아주 외우다시피 읽어요. 읽으면 그 속의 뜻을 말할  때에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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