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망과 징계


선지자선교회 1983년 9월 10일 토새

 

본문 : 히12:5-13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여게 19절에 '무릇 하는 말,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무릇 하는  말은 '몇이든지' 하는 그런 뜻입니다. 무릇 범(凡)자, 사랑하는 자는 누구든지  다 책망과 징계가 있다 하는 말씀입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몇  사람이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주님이 사랑하는 자는 다 책망하고 징계한다.

잘못이 있을 때는 책망하고 징계한다 하는 말씀입니다.

 지난밤 설교에 잘 했는데 그 지키라고 하는 것은 동산을 지키고 아담 하와  자기들을 지키라 말은 아닙니다. 자기네들은 다 깨끗하고 흠이 없이 되어 있는바  동산을 지키라고, 동산의 외적을 방어하라, 방어하라, 안보하라, 그렇게 말씀한  건데 안에도 지키고 밖에도 지키고 그 양면으로 지키는 그런, 힘을 양쪽으로  갈라서 '쓰는, 쓰게 하는 그런 것은 혼잡을 일으키는 것이라 좀, 제가  가르치기는 그렇게 가르치지를 안 했습니다. 그것을 잘 구별해서 그렇지 않도록  하는 게 좋습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몇이든지 내가 사랑하는 자를,  누구든지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는 빠짐없이 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책망한다는 것은 자기의 잘못을 자기의 삐뚤어짐을 자기가  주님이 하라고 하신 일을 안 하는 것도 잘못이요 또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런데 잘못을 본인이 깨달을 수 있도록 사람을 통해서  사건을 통해서 모든 이 세상에 있는 어떤 모든 것들 그런 것을 통해서 자기가  '이는 나의 잘못을 주님이 책망 하시는 것이로구나' 하는 그것을 자기가  깨달으면 깨달을 수 있는 작고 적은 꾸지람을 가리켜서 책망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자기의 잘못을 깨닫게 하되 부드럽게, 그때에 고치면 별 희생되는 것이 없이  고쳐질 수 있는 그런 방된으로 자기를 고치도록 하나님께서 이렇게 깨닫게 해  주시는 그런 자기 모든 요소가 손해보지 않고 깨달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하는 그  정도의 것을 가리켜서 책망한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고,  또 징계를 받는다 하는 것은 자기의 잘못을 깨닫게 해도 고치지 안하니까 그  다음에는 채찍으로 때린다 하는 뜻입니다. 채찍으로 때린다 그말은 자기에게  그만치 희생이 되는 댓가를 내게 되는, 자기의 구원 이룰 모든 요소를 잘못을  인해서 소비되고 허비되는 하나의 벌과 꼭 같은, 벌을 받는 것과 같은 벌과 꼭  같은 것이지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희망을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절망인  심판인 벌은 아니지마는 그만치 자기가 손해가 간다.

 그래서 '주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주님이 징계하시는 그 징계를  업신여기고 사소한 일로 그렇게 예사로 여기면 징계받고 징계받고 하면 받을  때마다 자기의 구원 요소가 다 없어지는 것이니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 자기 주관으로 하나님을 대항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는  즉시 싹 돌아서서 이제는 자기를 부인하고 '당신이면 됩니다. 나를 축복해  주읍소서.' 그러나 그 징계를 받기 전에는 '안 됩니다. 내가 보기에 그 모든  것이 해결되고 난 다음이라야 내가 갈 수 있지 해결되기 전에 에서를 쫓아서  딴데로 보내든지 그리 안 하면 에서를 죽여버리든지 어찌 해야 되지 그대로  두고는 나는 못 갑니다.'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고 자기의 주관을 세우다가 징계받고 난 다음에는  이제는 그저 '당신이 말씀하시면 됩니다. 당신이 말씀하시면 되니까 나를 내가  처음에 가라 하던 그 말씀 믿고 내가 얍복강을 건너서 에서에게로 갑니다. 가는  것은 내가 두려워하지 안하고 주님의 말씀을 믿고 갑니다. 그 징계를 받기  전까지는 못 갑니다. 가면 안 됩니다. 가라 신강하던 그것은 내가 이제 환도뼈  맞고 난 다음에는 내가 잘못인 줄 알아서 이제는 믿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가기는 가지마는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신 축복을 해 주옵소서. 이제까지  축복 안 한 축복을 해 주옵소서.' 하면서 새 축복을 바란 것이 그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바로 그 정의를 알아야 하는데 이스라엘이라는  그 이름의 정의, 이스라엘은 큰 이름인데 그 정의를 아는 것이 모두 다 삐뚤어져  있습니다. 알기가 어렵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힘을 겨루어  이겼음이라' 했으니까 껍데기로 알고 하나님을 이기는 그 이김으로써  이스라엘이라는 그런 영광의 이름을 준 것으로 그렇게 생각을 가지는데  정반대입니다. 그게 아닙니다.

 믿지 않는 그 죄를 회개하고, 징계받고 회개하고 이제는 믿고, 또 믿기 위해서  '말씀으로 축복해 주옵소서' 하는 그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자기 주관을 가지고  살던 자가 징계받고 자기 주관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또 그분의  그 축복을 바라는, 축복은 미래에 있는 것이지 현재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완전히 믿음으로 또 그 축복을 바라는 이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이 징계는 하나님께서 잘못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처음에는 책망을 해서  그만 그때에 고치면 아무런 희생되는 것도 없고 손해보는 것도 없는데 그때에  고치지 아니하니까 하나님께서 부득이 매를 때려야 하니까 매를 때리니 자기가  자기에게 상함이 있습니다. 그만치 자기의 요소가 손해가 갑니다. 그만치 무슨  물질 손해가 가든지, 자기 무슨 지위나 권위 손해가 가든지, 건강 손해가  가든지, 무슨 손해가 가든지 손해간 그것은 복구할 수 없는 그 손해가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한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 넘의 책망이 없으면 좋은 줄로 여기지 말고 하나님께서 버려둔 자요 또  그렇지 안하면 택함을 받지 안한 불택자요, 불택자가 아니면 하나 님께서 버려둔  자라,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보내실 때에 '내가 사자를, 내 사 자를 너희와  같이 올려보낼 터이니까 사자들이 너희를 도울 터이니까 올라가라. 그러나 나는  너희들과 같이 가지 않겠다. 왜? 돕는 일은 사자들이 가나 내가 가나 같은  도움을 주지마는 내가 가면 너희들은 강퍅하고 완패하고 교만한 사람이라 나하고  동행할 때에 강퍅과 완패와 교만을 행하면 나는 그것을 묵인할 수는 없고 내가  너희에게 책망하고 징계하고 이렇게 해야 되니 그렇게 하면 중간에서 너희들이  내 징계로 인해서 멸망을 받을까 두렵기 때문에 내가 같이 가지 않겠다. 내가  책망하고 징계할 때에 네가 회개를 할 것 갈으면 내가 책망하고 또 안 들으면  징계하고 이러지마는 네가 강퍅하고 완패하고 네가 무서운 죄악에 붙들려 있기  때문에 내가 책망해야 꿈쩍도 안 할 것이고 그러면 책망 뒤에는 징계가 갈  것이요 징계받아도 꿈쩍도 안 하면 그 다음은 멸망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갈이 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에 하나님이 그 말씀하시고 그 뒤에는  내가 너희들과 같이 간다' 말씀만 있고 같이 가지 않는다는 그 말씀은 없지마는  이스라엘의 행위는 하나님이 같이 갈 수 없는 그런 행위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가J안에 가서 있을 때에 하나님이 사자들과만 동행했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안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하나님이 돕는 은혜는 있었지마는  하나님께서 책망하고 징계하는 그 은혜는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점점  새로와지고 깨 끗해지고 하는 그것은 없었다 그거요. 그러니까 점점  더러워졌으면 더러워졌지 새로와지고 점점 새로와지고' 점점 더 깨끗해지는 그런  역사는 그들에게 없었다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인데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들도  거룩할지어다 성전을 더럽히는 자는 하나님이 멸하시느니라'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된 것은 우리의 영이 성전되고 또 우리의 이 육이 성전되어  있는 것인데 영은 성전되어 있지마는 육은 성전되지 않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중생된 사람이지마는 육이 성전되지 않고 믿는 사람들 많습니다.

 그것은 왜? 성전을 더럽히는 자는 하나님이 멸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들어가시면 성전을 더럽힌 그대로라도 유지가 되지마는 하나님이 들어가시면  더러운 성전은 멸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중생된 자라도 하나님께서 그 심신으로 된 육에게, 마음과 그  몸에 하나님이 들어가시려면 할 일은 없고 가면 토벌밖에는 할 일이 없으니까 가  가지고 그 사람을 멸해야 되고, 멸해야 되니까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들어가실  수가 없고 하나님의 사자들만 들 어가는 그런 일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들어가시면 점점 새로워지는 역사가 있고 점점 깨끗해지는  역사가 있고 하나님이 그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간섭하시는, 성전 밭마당이  아니고 성전과 제단과 경배하는, 하나님의 간섭을 받는, 하나님이 점점  새로와지고 깨끗해지게 하시는 이 은혜를 받는 그 은혜가 뭣이냐? 그것이  책망하고 징계하는 것입니다.

 책망이 없고 징계가 없으면 그것은 사사로운 아들이든지 그렇지 안하면  하나님의 택한 자면 그에게 아예 상속이나 유업을 주려고 하지 아니하시고  버려둔 자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전 밭마당인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가 없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은 아들이지마는 하나님의 유업을 받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없는 것입니다. 요걸 잘 들어야 되지 아무렇게나 하는 말을 자꾸 이래 주  대 놓으면 하나님 말씀을 그것이 더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벌이 있습니다. 안  됩니다.

 요걸 잘 들어서 '어,아'를 구별해 가지고 잘해야 되지 아무나따나 이러니까 주  붙여서 말만 하면 되는 줄 알아도 그걸 좀 세밀히 들어가 보면 잘못 붙이면 큰일  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자기에게, 사람이라는 것이 책망받을 만한 그런  일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책망받을 만한 그건 일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책망을 받을 때에 즉시 회개하는 사람 있고, 또 그럴 때는  회개를 안 해도 징계를 받을 때에 회개하는 사랄 있고,  책망을 받지 않는 그것은 책망하지 않는다면 책망하지 않기 전에 벌써  하나님께서 그에게 책망도 했고 또 징계도 했고 이렇게 새로와지는 역사를  하나님이 하셨지마는 그가 강퍅하고 완패해서 부인하고 나가니까 그 다음에는  멸하는 역사밖에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일을 그만 중단해서  '측량하지 말아라 하는 측량함을 받지 못하는 그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게서 깨달을 것이 뭣인고 하니 자기에게 책망과 징계가 없으면 그는  하나님께서 버려둔 자이기 때문에 거게서 점점 새로와지고 깨끗해지고  온전해지고 하는 그 성화구원은 없습니다. 또 자기에게 하늘나라의 무엇을 얻는  그 역사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셔서 역사하시는 그  사랑의 역사가 없는 사람이라 그렇게 우리가 판정을 가져야 됩니다.

 히브리서 12장에는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또 하나님이 상속시켜 주는 그 유업을 받을 만한 그런,  하나님이 소망을 가지시고 그에게 무엇을 상속시켜 주고 유업을 시키려고 하는  그런 일이 아예 중단돼 버려서 뭐 그는 이러든지 저러든지 그만 방임해 버려둬라  하는 그 사람이 아니라면 책망과 징계는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책망과 징계가 자기에게 없으면 그는 발써 택함을 받지 아니한  사람이든지 불택자가 목사 노릇도 할 수가 있고, 장로 노릇도 할 수가 있고,  전도사 노릇도 할 수가 있고 뭐 성직자 노릇을 얼마든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택자든지 불택자가 아니면 하나님이 책망한 것을 무시하고 또 그러니까  하나님의 징계가 왔고, 징계가 와도 무시하고, 그러니까. 그 다음은 하나님이  멸하시는 것밖에 없으니까 이를 멸해버리느냐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느냐 둘 중에  하나입니다.

 멸하면 끝장나 버리고 하나님이 떠나시면 제가 단계적으로 멸망하는 현실  현실에서 멸망해서 그 사람의 구원의 십분지 구가 다 멸망받고 십분지 일이  남았을 때에 비로소 제가 그때에 하나님의 책망 옛날 잭망받은 것을 자기가  깨달아서 그 책망을 달게 받고 그때 징계받은 것을 그것을 깨달아서 돌이켜  회개를 해도 아직까지 십분지 일이 남았기 때문에 십분지 일이라도 구원이  되어지지마는 만일 멸해버리는 날이면 십분지 일 그것도 살릴 수가 없고 전멸이  되어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떠날 수밖에 없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가 없으면 그에게는 택한 자가 아니던지  택한 자라면 하나님께서 떠나시고, 같이 하다가는 큰 변이 날 터이니까 하나님이  떠나시고 간섭하지 아니하시고 방임해 버려둔 자이든지 둘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에게 잘못을 사람을 통해서 책망하는 일도 있고 또 자기의  양심에게 책망을 받는 일도 있고, 또 모든 이 사건과 사물을 통해서, 일과  물질을 통해서, 사물을 통해서 자기가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책망하고 계신다  이렇게 보여지는 그런 것도 있는 그것이 책망입니다. 그러기에 책망이 없으면  좋은 게 아니고 자기에게 '아!' 사람을 통해서 책망을 해 주시든지, 또 어떤  사물을 통해서 자기를 책망을 해  주시든지, 자기의 양심을 통해서 책망을 해 주시든지 책망이 없으면 좋은 것이  아니라 책망이 없으면 성전 밭마당으로 하나님께서 버려 두시고 하나님이  떠나셨어.

 왜! 그를 고치는 역사를 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떠나셔서 그에게는 다시  개조와 개신, 새로와지고 성화되어지는 그것이 없는, 그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떠나신 것이니 떠나시는 것은 있으면 멸할 것이기 때 문에, 있으면 그 다음에는  징계해도 안 되니까 멸할 것밖에는 없기 때 문에 떠난 것이라,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자기에게 책망 없는 사람은 자기가 이 말씀을 듣고 가만히  살펴보면 자기가 하나님에게 징계를 받은 일이 있고 책망받은 일이 있는데 그럴  때에 돌이켜 고쳐서 회개하지를 아니하고 자기가 그때에 강퍅을 부리고 어떤  죄악이든지 그 죄악의 세력이 강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징계와 하나님의 책망이  툭 튀어서 튀어나가 버리고 거게서 효력을 내지 못한 그런 강퍅하고 완패한 일을  한 적이 있는 것을 자기가 깨달아 가지고 돌이키는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들어오실 수가 있고 그렇지 안하면 하나님께서 버려둡니다. 버려두지  안하면 멸해버립니다.

 만일 그 사람이 죽을 때가 가까왔으면 하나님이 멸하시는 일을 합니다. 죽을  때가 가까왔으면 그 사람을 멸하시는 일을 해서 장기간 병으로나 이래 가지고서  고통을 받아 가지고 그때는 다시 그 마지막 멸하시는 징계는 자기가 그것을 참  회개나 하지 회개해 가지고 무슨 값있는 의로운 일을 할 수는 없고 그저 용서나  받고 사함이나 받지 거게서 개가 돼 가지고 무슨 건설하는 그런 일을 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강퍅한 사람은 마지막에 죽음이 될 때 그때는 그저  잘못된 것을 후회만 하고서 주님 앞에 고해서 사함이나 받지 앞으로 무슨 건설할  요소는 없다 그거요. 만일 '조그매라도 일찍 와서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해  주셨으면 내가 그때에 뭘 할 터인데 지금부터 한 달이라도 살려주시면 한 달  동안에 내가 무엇을 건설하 겠는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나를 사일, 삼 일만  살려 주셔서 삼 일 동안만 내가 좀 활동할 수 있으면 삼 일 동안에 내가 하지  못한 것을 그래도 다문 얼마라도 내가 좀 하겠다고 삼 일을 말미를 달라 해도  하나님은 그 말미가 없습니다. 없어서 그사람은 그저 다시 건설할 힘 하나도  없는 그때에 멸하는 그것으로서 마지막에 후회해서 고하여서 사함받는 사유함을  받는 그 역사만 있지 개는 할 수가 없는 그런 형편에 되는 것이 하나님이 그  사람은 일찍 징계하셔도 안 듣고 이러니까 버려두시고 하나님이 나가 계시다가,  나가 계시다가 아무래도 당신의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들어와 계시기는 계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영 안에도 와서 계셔야 되고 우리 심신의 육 안에도 계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은 영만이 성전이 아니고 영육이 다 성전입니다.

영 안에는 성전이 됐지마는 육 안에는 성전 되지 못하고 하나님이 들어오시지  못했는데 차마 차마 다문 십분지 일이라도 남았을 때에 그 사람이 징계로 회개를  하면 하나님께서 이제는 들어오셔서 자꾸 자꾸 그것을 고쳐서 나갈 수 있는 데에  그 사람이 회개를 안 하니까 할 수 없어 마지막에는 이제는 뭐 다 멸해진  것이니까 이제는 마지막 구속으로 후회라도 해서 주님 앞에 고해서 사함이라도  받아야 되겠다 해 가지고 마지막으로 주님이 들어오시는 것이고 주님이 나가서  피해 가지고 계시는 것은 다문 얼마라도 살려서 회개를 일으키기 위해서 피해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다 책망과  징계가 있습니다. 책망과 징계를 해도 그가 돌이키지 안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다음은 멸할 수밖에 없어. 멸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야곱이 만일 얍복강가에서  환도뼈가 뿔라져도 그가 회개치 아니했으면 하나님이 피하셨든지 그렇지 많으면  그를 멸했든지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환도뼈를 맞고 난 다음에  즉시 회개를 했습니다. 징계를 받고 난 다음에 징계의 댓가로 불신을 완전히  회개 했습니다.

 불신을 회개하고 '이제는 내가 얍복강가를 가겠습니다. 건너가겠습니다.

에서에게로 갑니다. 밧단 아람에서 가라고 말씀하신 그 말씀을 거역했지만  이제는 믿고 가겠습니다. 또 중간에 올 때에 천군을 보이면서 천군이 너와 함께  하니까 안심하고 가라는 그 말씀을 내가 의지하고 내가 가겠습니다. 가는 데는  나에게 앞으로를 축복해 주읍소서. 내가 이건 죄를 지었으니까 앞으로를 축복해  주옵소서.' 축복해 달라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축복을 하셨습니다. 만일  그렇지 안했으면 하나님께서 그를 멸했을 터인데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믿는 사람에게, 아직까지 죽기 전에는 바울 같은 사람도  하나님 앞에 책망받을 일이 있고 징계받을 일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없는  사람 없고 없는 사람에게는 완성자인데 땅위에 둘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땅위에 회개해서 고치기 위해서 두는 것이지 완성자를 땅위에 두지는 않습니다.

 그러기에 젊은 사람으로서 일찍 떠나는 사람 가운데에는, 물론 수명이 정한  것도 있지마는 그 사람은 다 구원을 완성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간다 이런 면도  또 있습니다. 이런 면으로도 생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책망이 없으면, 제일 복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복있는 사람인고 하니 중생된  자로서는 책망받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시편 73편에 '아침마다 징책을  받는다자기가 양심에 책망을 받든지, 양심에 책망받아 자기의 신앙 선배를  통해서 책망을 받든지, 또 다른 사물을 통해서 책망을 받든지 그 책망받는 것이  그 사람이 제일 복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지금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책망에서 머물지 아니하고 책망에서 자기가 강퍅을 부려서 책망에서  하나님이 안 되니까 징계의 단계로 옮겨서 갔을 때에 그 징계를 받는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간섭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책망하시고 그 다음에는 징계하시고 이제는 징계가 없어졌습니다.

징계가 없어졌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그것만 못해도 노여워하실 수 있고  그것만 못해도 하나님이 징계하실 수 있는데 분명히 잘못이 있기는 있는데,  분명히 잘못이 있기는 있는데 아무런 하나님의 책망도 없고, 그만 양심의 가책도  없고, 사람을 통해 오는 책망도 없고,   내가 어떤 사람을 며칠 전에 만났는데 그 사람을 그전 같으면 내가 책망을 할  사람인데 책망을 하지를 안했습니다. 책망을 하지 안하고, 하나님께 붙여 둬야지  내가 책망하면 도로 개와 도야지에게 진주를 던지면 그것을 밟고 도로 와서 물  터이니까 책망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도 지금 둬 두셨기 때문에 그대로 둬 둬야  된다 해서, 그전 같으면 내가 책망할 터인데 책망을 하지를 안했습니다.

 하나님은 더욱 재빠릅니다. 날랩니다. 사람도 그렇게 깨달아지는데 하나님은 더  빠르게 아시고 번개같이 역사하시지마는 책망하다가 안 들으면 징계하고  징계해도 안 들으면 그 다음부터는 할 순서가 뭣입니까?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떠나지 안하시고 버리지 아니하시면 그 다음에 할 순서는 뭣입니까?  그 다음에 할 순서는 뭣이지요? 멸하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 할 순서는 멸하시는  것이요, 멸시는 것. 멸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멸하는 것보다는 그대로 둬 두는 게  낫다 그말이오.

 왜? 그대로 둬 두면 제가 목사 노릇도 하고, 장로 노릇도 하고, 전도사 노릇도  하고, 권찰 노릇도 하고, 아주 신앙 생활을 사람 보기에는 칭찬받는 신앙 생활을  할지라도 그에게 구원은 없습니다.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집을 짓지, 반석 위에  집을 짓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그 일은 건설은 안  됩니다.

 안 돼도 하나님이 그를 멸하시는 것보다는 그대로 둬 두는 게 낫는 것이 그러면  많은 세월이 지나가는 가운데에 혹 제가 '내게는 하나님의 책망이 없다. 이제는  양심에 가책이 없다. 양심이 나를 책망하지 않는다.' 양심을 책망하는 건 양심  속에서 영감이 양심을 일으켜 가지고 책망하게 하는데 '양심에 책망이 없다.

마음에 가책이 없다. 어떤 사람도 나를 책망해 주지 않는다. 또 무슨 책망받을  만한 그런 사물의 책망도 없다. 일이 그 일이 이리 되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책망하시는 것이로구나. 내가 뭣뭣 잘못으로 말미암아 이런 사건이  일어나는 것 이로구나, 이런 물건이 일어나는 것이로구나 이런 책망도 없다.

분명히 책망을 받고도 남음이 있는데 책망이 없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그때사 가로늦게 책망받은 것을 추억하면서 회개를 하고  징계받은 것을 추억해서 회개를 하면 하나님이 그때부터라도 착수해 가지고서  자기가 하나님이 기업을 받는 그 기업받는 역사를 일으켜서 다문 일 년이고 반  년이고 십 년이고 이렇게 할 수가 있지마는 그것이 없을 때는 그것이  중단됩니다. 이러니까 멸망시키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떠나시는 게 낫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책망받고 징계받을 때에 거게서 회개치 아니하면  하나님은 떠나십니다. 떠날 수밖에 없어. 떠나시는 것밖에는 그이에게 좋은  방편이 없습니다. 행여냐 다문 몇 달이라도, 몇 해라도 남궈 두고서 그가 그  징계를 느껴서 회개하면 될 수 있지마는 회개 안 하면 할 수 없지마는 그래도 그  회개할 그런 여유가 있을까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시다가 만일에 그가 끝까지  회개를 안 하면 하나님이 재차로 들어오시는 때는 어느 때냐 하면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날 그 임박할 때입니다. 임박할 때에 하나님이 들어오십니다.

 요것을 가리켜서 어리석은 부자가 '이제는 내가 이렇게 다 많은 걸  준비했으니'까 이제는 됐다' 이제는 잘 먹고 예수 잘 믿자 했는데 그날 밤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때사 반성하고 돌이켜 회개하는데 뭐 회개할라  하지마는 그때에 고칠 시간 없었어. 그만 잘못된 것 후회하고 사함받았지 고칠  시간은 없었다 하는 그 여유, 고칠 여유의 시간이 기회가 없었다는 것을  가리켜서 어리석은 부자의 그 회개로 표시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제일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냐? 두려워할 것은 하나님의  책망 없는 것, 징계 없는 것, 제일 두려워할 것이오. 책망 없고 징계 없는 것을,  자기 양심에 화인을 맞으면, 양심에 화인 맞았다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어떤 한  죄악에 대해서 처음에는 그것이 떨리기도 하고 잘못을 느꼈지마는 차차 차차  그것이 그면을 깨닫게 하시고 그면을 충격 주는 그것이 마비가 돼 가지고서,  다른 면은 있지만 그 면에 대해서는 아무 감각이 없이 그면에 대해서는 아무  가책이나 감각이 없는 그것이 양심에 화인맞은 것입니다.

 화인이 어느 면이라도 맞았으면 다른 면도, 기독자의 구원은 동글 동글하게  이렇게 이루어지지 삐쭉삐쭉하게 이렇게 모나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동글동글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한쪽에는,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의 구원은 깊은 데를 따라가고 있습니까 높은 데를  따라가고 있습니까? 어떤 데를 따라가고 있소? 높은 데를 따라가면 그게  채워져야 되는데 높은 데를 따라가지 안하고 깊은 데를 따라 구원은 깊은 데를  따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겉어머리 다른 데는 이렇게 한아름되게 커도 한쪽이 구멍이 떡  뚫혀 가지고 그 구멍대로 삐져 깎으려고 하면 요만밖에는 안되면 그 사람은  구원은 요만치만 돼 가지고 있지 이만치 돼 가지고 있는 데에 채워지지가 않는다  그말이오. 기독자의 구원은 원만하게-이루어지지 기독자의 구원이 기형적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기 때문에 사람 보기에는 큰 점을 보고 구원이 크게 이룬 줄  알지마는 나중에 흠없이 삣고 삣고, 하나님의 심판은 삣는 것인데 삣고 갈고  삣고 갈고 하니까 마지막에 그 구멍 뚤힌 것이 그것이 다 없어져 깎여 나가야  그게 되기 때문에 그 구멍 뚫힌 그 깊이를 그걸 준해 가지고. 모든 걸 깎아서  내뜨리기 때문에 그것이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집으로 다 불타버리는 것이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의 구원은 진실한 사람이 되지 강퍅하려면 얼마든지  강퍅할 수 있습니다. 강퍅해지는 건 하나님께서 그뭐 강퍅 해지는데 하나님이  떠나지 아니하시고 거기 있으려고 하면 그 사람을 멸해야 되기 때문에 그대로 둬  둡니다. 그러면 그대로 둬 둬서 그 사람이 하나님에게 이렇게 저렇게 쓰여질  수도 있습니다. 쓰여지지마는 그것은 마치 말하면 거짓 선지자 노릇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제삼자에게는 그것이 구원이 됩니다. 주의 이름으로 능한 일도  했지 귀신도 쫓아냈지 또 선지자노릇 했지 이랬 으니까 그 사람을 통해서 다른  사람은 구원을 이루었지마는 자기 구원은 절대 없습니다. 자기 구원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집에 도구로 연장으로는 쓰지마는 그 사람이  자기 구원은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기는 전하 지마는 그 사람이 자기  복음은 하나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자기 복음은 책망을 하실 때에 책망을 달게  받아 회개하고 또 징계를 받을 때에 달세 받아 회개하지 안하면 하나님께서는  떠나시게 되는 것입니다. 떠나시면 자기는 무슨 활동을 한다 해도, 하나님이  농구를 가지고 농사 지을 때는 일을 하지마는 그 농구가 식구는 아닙니다.

농구가 밥 먹는 것은 아니고 방안에서 식구와 같이 침상에 누워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 없는 농구요. 생명 없는 농구처럼 하나님의 교회에 능한  일을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연결 없이 하나님이 이용만 하지 자기에게는  하나님과 연결된 역사는 없다 그거요.

 그러면 제삼자의 구원은 이루니까 제삼자에게 복음을 주지 남의 복음을 가지고  남에게 복음을 주지 제가 제 복음으로는 가지지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무릇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고 징계하노니" 그러면 자기에게 책망과 징계가  없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떠났다 하는 것을 그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떠나기는 왜  떠났을까? 그것이 택한 자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그를 이용물로 쓰기 위해서  도구로 쓰기 위해서 부른 불택자, 일 많이 하고 난 다음에 죽을 때에 예수  배반하고 죽습니다. 유명한 부홍사로서 주의 일을 하고 마지막 세상 떠날 때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떠난다 말이오.

 그것은 도구로 이용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택함을 받지 않는 자도 하나님께서  이용하시기를 당나귀가 중생된 자는 아니지마는 하나님께서 발람 선지에게  대해서 당나귀를 이용하셨습니다. 이용하셔서 하나님의 선지에게 교훈할 만한,  선지에게 교훈할 만한, 평신도가 아니고 선지에게 교훈할 만한 그런 일을  했지마는 그 당나귀가 하나님의 백성은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는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제일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 제일 두려워할 것이냐 하면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가 없는 것이 제일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가  없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그 사랑을 중단했다 그거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가 중단되고 성전 밭마당으로 버려둔 자라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죄인으로서 회개하는 이 기간을 가진 것이 세상입니다.

우리가 완전자로서 완전자의 노릇을 하는 것이 하는 기간이 세상이 아니고  죄인으로서 회개할 기간으로 받아 가지고 있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에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이냐? 오늘에 하나님의 사랑은  위로의 사랑, 무슨 또 하나님의 칭찬의 사랑, 하나님이 완전자기 때문에  완전자를 쓰시는 사랑 그런 사랑이 아니고 우리를 고치시는 사랑입니다.

고치시는 사랑. 모든 일을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고쳐 가지고, 그 사람  본인은, 바울이 일한 것도 그 일한 것이 바울 자신에게는 고치는 것이요 제  삼자에게는 복음을 전해서 구원을 주는 것이라. 자기 복음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도 죽는 그 시간까지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가 있었기 때문에  '죄인 중에 괴수라 점점 노령이 돼 갈 때마다 더했습니다.

 이러니까 책망과 징계가 없으면 하나님께서 버려둔 자요. 하나님이 피한  것입니다. 버려둔 자요,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가 있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같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제일 좋은 위치가 어떤 위치냐?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있는 위치가 제일 좋은 위치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위치요, 하나님의 간섭을 받고 있는 위치요, 하나님이 우리를 성화시키는  그 역사를 받고 있는 위치인데 그 책망받는 위치에서 그 책망을 달게 받아  회개하면 그 책망에 대해서 어떻게 하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느냐 하면 이  책망하는 것은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는 그것이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이라. 책망이 있는 데에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이라.

 그러면 네가 할 일은 뭣이냐? 이미 하던 일은 열심을 더 낼 것, 네가 일을  하기는 하지마는 미직지근하게 하니까 하나님이 책망하는 것이니 미직지근하다고  책망하시는 일은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이고 잘못됐다고 책망하시는 것은 고치면  되고, 그러기 때문에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그것이 뭣이냐? 그것이 곧 네 안에  들어가려고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책망이 우리 안에 주님이  들어오시려고 문을 두드리는 것이요 징계가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려고  문을 두드리는 것이니 책망을 해도 징계를 해도 그가 영접지 아니하면,  영접하는 것은 어떤 것이 영접하는 것이냐? 문을 열어 줘서 영접하는 것은 어떤  것이 영접하는 것이냐? 책망받은 것을 그것을 돌이키고 회개하고 징계받는 것을  돌이키고 회개하는 것이니까 그 책망이 네가 열심을 내야 되는데 네가 열심이  모자라니까 하니? 열심을 더 내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열심을 더 내는  것이 영접하는 것이요 문을 열어 주는 것이요 또 잘못된 젓온 고치는 것이 문을  열어 주는 것이라.

 그 말의 각도를 알아라. 말의 모때기를 알아라. 각도를 알아서 그걸 잘못  잡으면 그만 측량이 헛일이라 그말이오. 지난밤에 ○조사님이 설교하는 데에  '지키라'하는 거게 대해서 혼돈을 일으켰다 그거요. 가서 자세히 좀 생각하면,  모르는 사람은 그것 몰라. 그러면 한 군데로 집중해야 될 것을 이리 돼 버리면  일이 안 돼. 그 에덴동산 안에는 아무런 나쁜 것이 없습니다. 외적만 안  들어오면 돼. 외적이 안 들어오면 되는데 외적을 막아야 되지 그 안에 있는  무엇을 파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말이오 혼돈을 시켰다 그거요. 아무나따나  붙이면 되는 게 아니라. 요것도 똑똑히 알아야 돼요.

 문을 두드리는 것은 어떤 것이 문을 두드리는 것이냐? 하나님이 책망하는 것이  문을 두드리는 것이요 징계하는 것이 문을 두드리는 것이니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 그럴 때에, 그러면 문을 두드릴 때에 문을 열어주면서 주님을  들어오라고 영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조사님? ○조사님? 문을 열어주는 것은  뭣이지요? 문을 열어 주는 것은 책망받는 것? 문을, 또 엉뚱이같이, 책망받는  것은 문을 두드리는 것이 책망받는 게 문을 두드리는 거라. '어,아'를 똑똑히  알아야 돼. 각도를 모르면 헛일이라. 자꾸 이래 혼돈을 하기 때문에 자꾸 만들어  놔 부수고 만들어 놔 부수고 자꾸 안 된다 그말이오.

 문을 두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책망하는 것이요 징계하는 것이 문을 두드리는  것이라. 열여 주는 것은 뭣이 열여 주는 것이요? 자, 대답허 봐요. 열심내는 것.

 제가 일은 하기는 하지마는 홍떵흥떵하고 열심을 요만치 내야 될 열심을 요만치  내고 있으면 그걸 하나님이 책망하시든지 징계하시든지 하는 것이라.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신 대로 그 열심 원하시는 거기에 도달되도록 열심내는 것이 그거  문 열여 주는 것이라. 열심 내지 안 한다고 열심에 대해서 책망하고 징계하는  것은 열심을 내는 것이 문을 열어주는 것이라.

 그 다음에 또 문 열어 주는 것 하나는 뭣입니까? 회개하는 것 회개하는 그것이  문을 열어 주는 것이라. 그것이 주님을 들어오게 하시는 것이라. 자기가  회개하지 안하는데 주님이 들어오시면 어찌 됩니까? 멸하실 수밖에 없다 그거요.

멸하실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요걸 요래도 저래도 되는 게, 아니라. 요리 되면  탈 되고 조리 되면 탈 됩니다. 그것 잘못하면 이래 할 때에 문 두드리는 것을  그것을 하나님이 책망하시는 것이지 문 두드리는 그것이, 책망을 받는 것이  그것이 문을 열어 주는 것은 아니라 그말이오. 책망을 받는 게 아니라 책망받을  때에 그 책망받은 것 고쳐야 그 문 열어 주는 것이지 책망을 받고 있는 건 문  열어 주는 게 아니라 그거요. 그 구별을 해야 돼요.

 그러면 그렇게 문을 열어 줘저 주님이 들어오십시다. 이제는 열심에 대한  책망이든지 또 잘못된 데 대해 책망이든지, 잘못된 데 책망은 회개해야 될  것이고 열심에 대한 책망은 열심을 더 내야 될 것이고 이렇게 그걸 두 가지를  하면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십니다. 영접해 들이는 것이오. 영접해 들어오시면  무슨 좋은 결과가 있는고 하니 주님이 승리하시고 아버지의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자기도 승리하고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앉는다 그거요. 그런 성공을  합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성공을 하는가? 나는 너로 더불어 행하고 너는 나로 더불어  행한다' '나는 너로 더불어 먹고 너는 나로 더불어 먹는다' 나는 너로 더불어  행한다. 먹는다 말은 행한다 말이오. 나는 너로 더불어 행하고 너는 나로 더불어  행한다. 그러니까 주님이 승리하시고 아버지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너희도  승리하고 내 보좌에 함께 앉는 이런 영광스러운 일이 된다. 그런고로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벌써 내가 지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나 없나 그것은 내게 책망과  징계가 있나 없나 그것이오. 책망과 징계가 없으면 두 가지입니다. 책망과  징계가 없으면 '징계 없으니까 하나님이 좋으시 는갑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은  용납하시는갑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은 상관이 없는갑다. 번연히 제가 남에게  있으면 그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고 제가 아니라고 증거를 하는데 '네가  아니라고 증거를 하고 네가 그와같이 하는 것은 네 말이 너를 정죄했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알 수 있는데 아무런 책망과 징계가 없으면 그것은 무슨  증거입니까? 자기에게 책망과 징계가 없을 때는 몇 가지로 우리가 봐야 됩니까?  하나는? 불택자. 하나는 불택자. 하나는 불택자. 불택자가 목사. 노릇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불택자. 히브리서 6장에도 보면 증거했습니다. 또 하나는?  불택자가 아니라면? 하나님이 떠나신 자, 하나님이 떠나신 자.

 왜? 성전을 더럽히고 자꾸, 성전을 고쳐야 들어가지, 자기 아버지가 법관으로  있는데 그 아들이 법에 걸려서 감옥에 묶여갈 수 있는 그 일을 하니까 아버지가  거기 들어가는 날이면 묶어가야 될 터이니까 부득이 자꾸 밖에서 지금 이것 문을  두드리는 이것은 그걸 돌이켜서 가 봐야 저거 아버지 눈에 법관 눈에 걸리는  것이 없어야 그대로 친근히 만나고 오지 걸리는 게 있으면 당장에 딱 묶어  가지고 가야 되니까 못 들어간다 그말이오. 피할 수밖에 없어. 들어가면 자식을  묶어 가지고 가야 될 터이니까 부득이 피할 수밖에 없다 그말이오. 책망과  징계가 없으면 그것은 내가 불택자든지 불택자가 아니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고  방임해 두시고 '그는 그저 방임해 둬라. 제가 언제든지 돌이켜서 이 책망과  징계의 효력이 있어서 열심을 내고 회개를 해야 내가 그때부터 들어가서  역사하지 그전에는 들어가면'멸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랑하심으로 하나님이  떠나셨다 그거요. 그러니까 구원이 헛일이라! 왜 하나님이 아시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대해서는 그런 얼마든지 그런 죄악을 용납하고 계시는 줄 압니까? 그런  게을을 용납하고 계시는 줄 압니까? 아니야! 하나님이 떠났어!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이 없고 그렇게 게을을 부리게 됩니까?  그렇지 않소. 예수 믿는 신앙은 늙지 않습니다. 바울이 모형하기를 거게 대해서  묘사하기를 무거운 짐진 것과 같다 했어. 무거운 짐은 갈수록은 무겁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라. 갈수록 무거워지지. 이러니까 늙어갈수록 자기에게  대한 책임감이나 부담감이나 하늘 나라에 소망에 대한 충격은 점점 더 심해지고  커지지 그것이 식어지는 게 아니라 그말이오.

 어떤 자가 말하기를 '우리도 젊을 때 믿을 때는 저렇게 불덩이같이 저랬지마는  저거 장개비 물이다. 암만 저래 쌓아도 저거는 나중에 식어진다. 우리도  그전에는 그랬는데 이제 노숙했다.' 제가 노숙한 게 아니고 늙었다. 신앙이  어데, 늙느냐? 신앙은 늙지 않는다. 신앙은 죽지 않는다. 바울은 말하기를  무거운 짐진 것과 같다 했는데 제딴에는 '노숙해서 내가 이렇게 느릿느릿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자는 망령을 부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떠난 증거요. 택한  자면 떠난 증거요 그리 안 하면 불택자라 그거요.

 그런고로 우리가 깹시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어지럽게 혼돈케 하면 안  됩니다. 아무나따나 이러나 저러나 해 가지고는 안 됩니다. 꼭 정확해야 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내가 나중에 만날지 안 만날지 모르겠는데, 하나 들으면 여럿이 다 들으니까  그것을 개인으로서 무슨 공격으로 생각지 말라 그거요. 달게 받아요. 저  ○○목사님이 지금 ○○교회에 시무하고 계시는데 ○○ 교회 교인들이 좀  흩어지는 사람이 있고 또 교세가 조금 약해진다 하는 그런 말을 내가 들었는데  들을 때에 내가 그렇게 말을, 나는 내 판단으로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  목사님이 이제는 진리에 입각했습니다. 진리에 입각했어. 이제는 진리를 잡았어.

 이러기 때문에 그저 다른 교인이야 어떻게 하든지 이 진리 말씀이라야 사람을  구원하지 다른 것 가지고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요 진리의 말씀을 또  증거하고 증거하고 요걸 꼭 알려야 되지 요 진리 말씀을 아는 데서 구원이  이루어지지 다른 데서는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람에게 인기 설교를  하지 아니하고 사람에게 간판 설교를 하지 아니하고 꼭 요 진리를 알려야 된다  하는 거게 입각해 가지고 가르치면 교인들이 듣기 싫어합니다. 듣기를 싫어하고  스르르 무너지지마는 무너지는 걸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 가도 좋습니다.

하나님이 그걸 원하시기 때문에 그대로만 하면 언젠간가 그 교회가 참된 교회로  반드시 부흥을 일으키고야 맙니다.

 설교를 들으면 '저게 풍자적인 설교다. 저게 인기 설교다. 저게 간판 설교다.

저게 외식 설교다. 저거는 하나님 말씀을 구경시키는 설교다 저거는 참 살리는  것이다. 치료하는 설교다. 저거는 사람을 일으켜서 양식을 먹이는 설교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거요. 아무나따나 말만 자꾸 하면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렇지마는 속에 진리에 딱 들어 맞아야 되지 안 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운 하나님이 아니오 그건고로 여러분들이 그 진리대로 가르치려고 해 보면  한 설교를 또 하게 되고 또 해야 되겠고 또 해야 되겠고 자꾸 해야 되고, 또  해야 되고 또 해야 되고, 또 하되 설교하는 사람이 새로와진 것은 벌써 거게  새로운 영감이 더 가해지는 것입니다. 자꾸 이러니까, 껍데기로 듣는 자들은 '또  한 설교 또 한다.' 여기 서부교회도 설교하면 벌써 그 성경 읽으면 '이건 내가  다 아는 것' 하고서 그만 그때부터 그만 좁니다. 그자는 하나님 떠난 자라.

책망과 징계가 간섭이 없는 자라. 벌써 그 신앙 생활은 죽고 있다 그말이오.

환하게 죽고 있어.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목사에게 큰 고통 두통거리라 근심거리라 항상 그걸  위해서 기도해야 되고 근심 걱정거리라, 또 권찰에게 근심 걱정거리라  고통거리라 일거리라. 그래 돼 가지고 있는데 저는 제대로 '나는 모든 것이  부요하고 구비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야 네 가난한  것과 가련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한다. 그런 것 가지고는  다 소용 없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횐옷은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네가 완전히 입으라 네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라. 그리스도의 대속의 것이 돼라. '주여, 나는  주의 것입니다.' 주의 것일 때에는 횐옷을 입었고 주의 것이 아닐 때는 횐옷을  벗었어.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 성경 말씀대로 모든 것을 견해하는 그 사람이  되어져라. 그것이 안약 사 바르는 것이라. 그래야 눈 뜨이지. 이래 가지고 썩은  자는 썩은 자의 운동하고 있습니다. 그걸 알아요 어떤 지역에서는 썩은 운동하고  망하는 운동하고 저거끼리 이래 하고 있는 걸 안다 그거요! 하나님이 버렸어!  하나님의 사랑이 간섭지 안해 책망과 징계가 없어!  그러면 뭐 딴것 될 것 뭐 있는가? 자기 구원 안 되는 것이고, 남의 구원은  그대로 됩니다. 자기 구원이 안 돼. 그래 마지막에 죽을 때에 죽을 때 그때 급한  꼴 보지마는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고로 처음에 긴 말씀을 가지고 한 그 말씀을 기억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떠난 것이 무엇이다. 또 자기에게 무엇  없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떠난 것이다. 하나님이 왜 떠나시느냐? 떠나시는 이유.

 녹음기 놓고 녹음기에게 마음은 다 가서 '이게 언제 이것 끝이 날란가?' 그  녹음기, 마음은 녹음기에 가 있고 '테이프를 바꿔야 될 건데' 녹음기에 가 있고,  또 '내가 여간 잘 못 들어도 녹음기가 나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하니까  녹음기가 요래 우상되고 저래 우상되고, 또 '설교록이 올 터이니까 또 요래  가르칠 것이다 저래 가르칠 것이다.' 설교록이 그것이 우상되고 이래 가지고,  '스스로 삼가 우상을 멀리 하라' 우상 멀리 하라 말은 마지막으로 요한일서 5장  끝절에 말한 것은 그것은 뭘 말하는 것이냐 하면 자기 우상이오. 옛사람 그놈을  죽이라 그말입니다. 그걸 죽이지 안하면 헛일이라. 그래 가지고 녹음기 있는  사람들은 다 졸고 있어. 그저 진리입니다. 누가 말해도 진리요.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내가 스스로 안 것 아니라. 나는 신학교 가 가지고 우리 신학교 다닐  때는 가 배운다는 것이 선내끼 찌꺼기 거뜩거뜩 말하고 별로 배우지 못했어요.

또 교리서 그런 것도 나는 별로 보지를 목했어요. 뭐 박형룡 박사 교리 이래  뻐뜩뻐뜩 이래 좀 이래 봐서 그렇다는 것만 봤지 그 안에 내부적으로 구체적인  그런 것을 나는 공부하지를 안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깨닫게 해 주신 것이 옳은 그 모든 교리와는 맞소. 맞는 그게  나 혼자 깨달은 것이 모든 그 옳은 교리와는 맞고 옳은 신조와는 맏고, 또 서로  삐뚤어진 때에는, 나도 삐뚤어진 걸 볼 때에는 그래도 삐뚤어진 것이 다른  이에게 있는 게 많지 내게 있는 것이 많지를 안했어, 하나님이 나는 가르쳐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줄로 압니다.

 그런고로 그렇게 아무나 따나 말하면 된다는 그런 걸 생각 가지지 말고 꼭,  내가 말로는 표시해도 내 속에 원대로 말하는 것 다 못 합니다. 내 소원은  그에게 녹음기를 통해서는 가지 못할 것이요, 말씀으로 들을 때에는 내 소원이  그의 소원이 될 것이요. 내가 안타까와 하는 것이 그에게 안타까와 할 것이요,  나를 영감시킨 그 영감이 그에게 건너갈 것이요. 영감은 사람을 통해서만 갔지  영감이 직접간 일 없습니다. 성경을 살펴보십시오. 그러기 때문에 선지 사도를  통해서 갔지 선지 사도 없이 따로 떨어져 가지고서 성경만 가지고 된데가 없다  그거요. 사람을 통해서 중생이 됩니다.

 십 분 기도하고 난 다음에 권찰회 모입니다.

 요새 우리 교회도 보면 여기 장로들은 새벽기도 안 나와. '내가' 양심에 화인이  맞았어. 양심에 화인이 맞았어. 양심에 화인이 맞았어. 자기 새벽기도 나오지  않는 것은, 장로가 돼 가지고 새벽기도 안 나오는 것은 가책이 없기 때문에 그  놈의 양심이 족었다 그 말이오. 화인을 맞으면 그 주인의 도장을 찍어 놓은  거라. 화인 맞았다 그말은 그것 새벽기도 안 나와도 양심에 가책 없는 '새벽기도  안 나와도 괜찮다' 하는 그 죄악의 것이 됐다 그말이오. 그 죄악의 사람이 됐다  말이오. 죄악의 장로가 됐다 그말이오. 막바로 그것이. 어리석지를  말아야합니다.

 말씀을 안 듣고 제가 신앙 생활 할 장사는 없습니다. 말씀을 듣는 데서 제가  고쳐지고 능력이 오지, 말씀 듣지 안하고 천하 꺼부지기를 다 꺼머다가 제것을  만들어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영감과 진리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좀 실질적으로 목회하는 목회자들이 좀 됩시다. 그냥 말씀이나  팔아먹고 껍데기 해서 농구 모양으로 이용당하고 난 다음에 마지막에는 창고에다  집어던짐을 받는 그런 자가 되지 말고, 책망과 징계가 없으면 두려워 떨어야  됩니다. 책망과 징계를 받지 안하고 그 대로 지나가면 나중에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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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107 참사랑/ 고린도전서 13장 1절-8절/ 1985. 9. 4. 수새벽 선지자 2015.12.28
106 참사랑/ 고린도전서 13장 1절-13절/ 1985. 9. 3. 화새벽 선지자 2015.12.28
105 참사랑/ 사도행전 20장 29절-32절/ 1985. 8. 10. 토새벽 선지자 2015.12.28
104 참사랑과 그 역사/ 요한일서 4장 7절-21절/ 1982. 4. 16. 금저녁 선지자 2015.12.28
103 참사랑으로 피차 뜨겁게 사랑하라/ 베드로전서 1장 3절-25절/ 1985. 11. 24 주일오전 선지자 2015.12.28
102 참사랑의 의의/ 마태복음 25장 31절-46절/ 1982. 3. 19. 금저녁 선지자 2015.12.28
101 참선 중의 회개/ 에베소서 1장 5절-14절/ 1985. 7. 16. 화새벽 선지자 2015.12.28
100 참소하는 혀/ 로마서 10장 13절-15절/ 1986. 7. 14. 월새벽 선지자 2015.12.28
99 참자랑과 어리석은 자랑/ 고린도후서 12장 5절/ 1981. 12. 13. 주일오후 선지자 2015.12.29
98 참제사-믿음이 더해지는 방편/ 고린도전서 4장 2절/ 1981. 7. 22. 수새벽 선지자 2015.12.29
97 창기 신앙/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1988. 10. 28. 금새벽 선지자 2015.12.29
» 책망과 징계/ 히브리서 12장 5절-13절/ 1983. 9. 10. 토새벽 선지자 2015.12.29
95 책망과 징계/ 요한계시록 3장 19절-22절/ 1983. 9. 8. 목새벽 선지자 2015.12.29
94 처음 사랑/ 요한계시록 2장 1절-7절/ 1988. 4. 9. 토새벽 선지자 2015.12.29
93 처음 행위를 가지라/ 요한계시록 2장 1절-7절/ 1988. 4. 6. 수새벽 선지자 2015.12.29
92 처음 행위와 그 효력/ 요한계시록 2장 1절-7절/ 1988. 5. 30. 월새벽 선지자 2015.12.29
91 처음 행위와 순서/ 요한계시록 2장 1절-7절/ 1988. 5. 29. 주일오전 선지자 2015.12.29
90 처음사랑을 7가지에서 찾으라/ 요한계시록 2장 1절-7절/ 1987. 9. 28. 월새벽 선지자 2015.12.29
89 처음사랑-처음행위/ 요한계시록 2장 2절-5절/ 1987. 10. 5. 월새벽 선지자 2015.12.29
88 처음사랑-처음행위/ 선지자 2015.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