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림, 재림

 

1988. 12. 25. 주일새벽

 

본문: 이사야 1장 18절∼20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예수님이 처음에 땅에 오신 것을 가리켜서 초림이라 그렇게 말하고 또 두번째  오시는 것을 재림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지금은 온 세계가 예수님이 초림하신 이 초림에 대해서 감사하는 기념 축하를  다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성탄 축하라 그렇게 말합니다. 성탄 축하라 말은  주님이 거룩하신 주님이 거룩하신 주님이 탄생하신 그 날을 기념하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그 경축을 드리는 것을 가리켜서 성탄 축하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땅위에 뚜렷이 오시는 것은 두 번입니다. 초림이 있고 재림이  있고, 초림과 재림이 아주 현저히 다른 것은 초림은 한없는 사랑과 용서와 긍휼로  오셨습니다. 당신이 참 우리가 측량 못 할 큰 사랑의 희생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는 아흔아홉 의인보다 한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고 또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불러서 구원하러 오셨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의원은 성한 자에게는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필요 있는 것같이 나는 죄인을  불러서 치료해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음행하다가 당장에서 잡힌 그 여인을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 앞에 끌고 와  가지고 예수님이 돌로 쳐서 죽이라고 모세의 법대로 그렇게 말을 하리라 생각을  하고 끌고 왔는데 예수님께서는 음행한 여인의 편이 돼 가지고 여인을 위해서  변호하고 당신이 처음으로 하시는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쓰셔서 자기만 알 수  있는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셔서 사람들이 다 스스로 다 물러가 버리고 그  여인을 돌로 쳐서 죽이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주님이 여인에게 말하기를 '너를 벌하려는 사람들이 있느냐?' '다 가고 없습니다.'  '나도 너를 불쌍히 여겨서 형벌하지 아니하고 너를 불쌍히 여기니 네가 이제 가서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말고 네가 깨끗하게 여생에 구원을 이루라.' 그렇게  권고하셨습니다.

 이렇게 처음에 오신 주님은 이렇게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용서와 이해와 당신이  희생해서 구원하시려는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주님을  사랑의 주님으로, 또 용서의 주님으로, 죄인의 친구가 되신 주님으로 이렇게  우리는 보고 만만히 주님 앞에 상대하고 가까이 하고 주님도 그것을 원하셔서  어쨌든지 우리가 범죄할 때마다 우리를 벌하신다는 것보다도 용서하시고 이해를  시켜서 우리를 돌이키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우리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저는  하나님께서 당장에 징계를 하시고 벌을 내리셔야 되겠다 하는 그런 아주 급박한  그런 잘못에라도 주님의 뜻은 또 용서하시고 타이르시고 여러모로써 알도록  깨닫게 하시는 그런 역사를 하셨습니다.

 이렇게 너무 하시니까 사람들은 그만 주님은 사랑의 주님이시라, 얼마든지 그저  잘못된 것을 용서하시고 위로하시고 붙들어 주시는 이런 하나님으로만 이렇게  알고 믿기 쉽습니다. 그러나 차차 차차 신앙이 조금씩 자라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이 외모 속에 무서운 그 두려움이 속에 계시는 것을 차차  발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까다로운 사람보다 주님이 더 까다롭고,  아무리 각 박하고 잔인한 사람보다 주님이 더 잔인하고, 하나도 용서 없는 정확  하고 아주 딱딱하고 냉정한 어떤 사람보다 주님은 더욱 그러한 것을 점점 깨닫게  돼서 사람들의 행위가 차차 차차 사랑의 부드러운 주님을 맞이해 가지고  마지막에는 두려우신 주님으로 그 앞에 참 기절하는 거와 같이 이렇게 되어지는  것이 그것이 모두 성도들이 차차 눈이 열려서 주님을 보게 되는 그 결과입니다.

 이래서 사도 요한이도 그는 주님의 사랑을 믿었기 때문에 가장 가 깝게 접했고  성경에 주님의 그 품에 안기고 기대 누웠던 제자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 1장에는 보면 주님을 다시 그 눈이 열려서 보고 난 다음에 그 앞에  그만 두려워서, 부끄럽고 두렵고 죄송해서 죽은 자와 같이 됐었습니다.

 그때에 주님이 위로하시면서 '네가 이제 나를 보고 이떻게 두려워 하나 네가 내  품에 의지해서 기대고 안고 눕고 할 그때에 내나 내가 지금 네가 보는 바니 네가  두려워하지 말고 이제 내가 모든 사망과 용서로서 사망을 이겼고 마귀를  이겼으니 네가 이제는 담대히 이 복음을 전하는 데에 바치라' 하는 그런 부탁을  하시고 위로하셔서 기도해 주시므로 사도 요한이가 밧모섬에서 주님의 안수를  받기 이전과 이후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서 '내가 떠나기 전에 영광과 권세로  임하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으리라' 하는 말씀대로 주님의 재림하실 이것을 거의  실물같이 요한계시록에서 계시한 것을, 본 성도들도 남아 있습니다. 우리들이 다  그 계시를 보고 있습니다.

 이래서 처음에 오신 주님은 사랑의 주님이시지마는 두번째 오시는 주님은  용서가 없는 주님이십니다. 거게는 이해가 없으신 주님이십니다. 꼭 말씀하신  요대로 딱딱 호리도 틀림이 없이 정확하게 나타나시는 심판의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가 성탄 기념일을 맞이해서 해마다 늘 그때는 복음 전하는  언제든지 전하지마는 전하는 그것으로써 기념하는 그런 행사를 했었는데  이번에는 특별히 주님께서 저에게 나타나셔서 제가 견디지 못해서 그날 새벽에  나와 가지고 말을 하고, 전도지를 박아 가지고 우리가 평년보다 더 많은 전도지를  지금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제일 많이 전한 것은 그때에 백만 장이가? 백만  장이지? 제일 처음에 많이 전할 때가 백만 장 아니가? 백만 장을 박아 가지고  우리가 전한 일이 한번 있었는데 그때 제일 많이 전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삼백칠십만 장을 우리가, 거의 사 배나 될 만치 우리가 박아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이 주님의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깨닫고 전하고  있습니다.

 아마 전하는 사람들로서는 각각 주님을 만난 그런 경험과 체험이 있을 것입니다.

알뜰히 성의 있게 전한 사람에게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도 또 자기에게 기쁨도  자기가 모든 시간을 다 거게서, 딴데서 제하고 특별히 시간을 내서 전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보충해 주시는 것도 잘 체험했을 것입니다.

 이래서 아무래도 언제인지 모르게 이 두려우신 주님, 심판의 주님, 우리 행한  것에 대해서 사정이 없이 정확 무오하게 심판주로 냉정스럽게 엄격하게 공평된  그 상벌의 심판의 보응을 가지고 주님이 나타 나실 것이 언제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아무래도 좀 시급하게 되어 있다 하는 것을 짐작으로만 하지 그 날과 그 시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날을 아무리 자기가 다 속으로는  언제쯤이라 하는 것이 짐작이 돼져도 그런 말을 담대히 할 사람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징조를 봐서 '주의 재림이 급박하다' 하는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는 따름입니다.

 이래서 이번에도, 요새는 지금 온 세계가 평화 위주의 세계입니다. 이런데 이것이  또 무엇으로 둔갑을 하련지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은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화를 부르짖고 다 이렇게 물결이 쏟아지듯이 평화의 물결로  이렇게 쏟아지지마는 이것이 언제 둔갑해서 잔인한 그런 전쟁으로 화해지련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은 그저 우리가 좋아도 믿을 수 없고 나빠도 믿을 수 없고  나빠도 그것이 나쁘다고 인정할 수 없는 것은 언제 좋아지련지 좋아도  나빠지련지 주권은 당신이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당신의 뜻대로 되는 것이지  땅위에 이런 순서를 보니까 형편 보고 처지 보고 모든 분위기와 모든 그  공기들을 보니까 이렇겠다 저렇겠다 우리는 그렇게 짐작 못 합니다. 왜 그것이  하나도 정함이 없습니다.

 이래서 그렇게 하던 미군도 차차 차차 철수해서 그들이 활동하고 있던 그  범위를 조금씩 조금씩 자꾸 좁혀 들어가는 이런 역사를 하고 있고 뭐 소련하고  중공하고도 아주 그렇게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다시 점점 친화돼지고 또 이북과  이남도 그렇게 화친이 돼져서 이북에 연탄은 곧 남한에 직송해서 우리가 수입해  가지고 사용하도록 그렇게 된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기에 참 이 정치 쳐놓고는 그래도 제일 믿을 만한 정치는 미국 정치입니다.

그 나라는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거게 입각해서 하니까 좀  그렇지 딴것은 뭐 조석으로 변하는 게 아니라 아예 뭐 아침에 변해 버려. 하루  아침에 다 변해 버려. 아침에서 저녁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이런데 이렇게 모두가 다 평화를 원하고 있는데 누가 말하기를 '이 급한  소식이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 시대에 맞지 않고 이 현실에 맞지 않기  때문에 요새 사람들의 심리라는 것은 어쩌든지 풀어 놔서 이렇게 평화를 말해야  좋아하지 이 급하다 하면 벌써 각박한 것이 되어지고 또 딱딱한 것이 되어지기  때문에 지금은 딱딱한 것을 싫어 하는 시대입니다. 이렇게 마음대로 지금  풀어놔서 풀리고 이렇게 헐어 놓은 융화를 좋아하는 이런 시대가 돼 가지고  있는데 이 급한 소식이라고 이러는 것은 이거 이름이 좀 잘못됐습니다.' 기쁜  소식이라는 것은 벌써 서부교회서 말했지마는 온 전국에 전도지라 하는 제목은  기쁜 소식이라고 거의 전도지는 다 기쁜 소식이라고 이래 많이 이름을 썼는데  '그런 좋은 이름을 쓰지 않고 이렇게 급한 소식이라고 또 이렇게 했습니까?'  그랬는데 반은 급한 소식으로 했고 반은 급한 소식 속에는 피난 준비라는 것이  그 속에 제목이 되어 있습니다. 급한 소식이라는 그 표명을 열고 그 표제를 열고  안에 들여다 보면 피난 준비라 그렇게 돼 가지고 있습니다.

 이래서 지금은 참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인자의 이 성탄을 축하하는 이  절기인데 이래서 세상도 마음을 풀어 놓지 또 교회들도 성탄이라 해 마음을 풀어  놓지 이래서 아마 금년 성탄절에는 이 사람의 행사들의 외모에 무슨 그 형식이나  치장이나 단장이나 이런 것은 별로이 변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마음은 가속도로  이렇게 다 나사 풀리듯이 다 풀어져 가지고 이렇게 화해라는 이런 인화주의로  아주 뜨겁게 역사할 것입니다. 이런데 실은 많이 급박합니다.

 이러니까, 그래서 오늘 제가 새벽에 네시 돼서 O총무에게 전화를 해 가지고  '오늘은 그러면 분반 공부가 없이 통반 공부로서 내가 그 설교를 하게 되느냐?'  그렇다고. '그러면 시간은 얼마나 되느냐?' '시간은 그저 뭐 요량해서 시간은 한  그러면 십 분이나 그 정도지 무슨 행사 하려 하면 시간이 있겠느냐?' '그러면 오늘  증거할 증거는 무엇을 증거해야 되겠느냐?' 이러니까'그것은 목사님이 요량해  하시이소. 뭐 공과를 해도 괜찮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지금 오늘은 당일을 뭐 축하한다고 모두 이렇게 아이들에게는 마음이  이렇게 많이 부풀어져 있고 기뻐하고 있는데 오늘 설교를 무슨 설교 해야 되느냐  하는 거게 대해서 생각을 일찍부터 좀 해 나왔는데 그래서 오늘은 무슨 설교를  해야 주님이 주시는 말씀이 되고 또 모든 성도들에게 마땅히 전해야 할 말씀  들어야 할 말씀이 되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래서 오늘 새벽이나마 이사야 1장 18절을 읽고 이것이 우리에게는 그저  요한복음 3장 16절에 이 복음은 우리가 다 듣고 믿고 있는데 지금 이 단계에  와서는 이사야 1장 18절 이 말씀이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말씀으로 그렇게  생각이 돼 집니다.

 한없는 사랑과 자비가 한없는 두려움과 냉정과 공의와 정의의 공의 공평 공평  공평의 이 참 무섭고 떨리는 이 공평의심판의 보옹이 갑자기 우리에게 닥칠  터이니까 지금 대단히 어려운 시기입니다. 그저 초림의 주님만 이렇게 믿고  생각하고 있다가 재림의 주님을 생각지 못하고 큰 낭파당하는 참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뭐 갑자기 안다고 어떻게 하느냐? 녜, 우리는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형 대행 대화친의 대속의 공로를 베풀어 놨기 때문에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시는 재림의 주님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재림의 주님이 나타나시기  전까지는 우리는 초림의 주님에게 관련해서 얼마든지 우리는 사죄함을 받을 수  있고 칭의함을 받을 수 있고 주님의 대속을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은 누구나 흠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바울같이 그 깨끗한 그런 성자가  차차 나이가 많아갈 때에 그분은 아마 성화돼서 털끝만한 죄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분이 말하기를 '나는 죄인 중에 괴수 죄인이라' 그렇게 마지막에  고백을 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처음 믿을 때보다 차차 차차 죄를 더 범란하게 지어 그런 것이  아니고 분명히 그분의 심령의 눈이 밝아지고 주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자꾸  깨달아지니까 다른 사람은 죄라고 여기지 못하는 그 속에도 수많은 죄가 들어  있는 것을 깨닸았기 때문에 그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도 우리는 이런 급박한 위기를 당해 가지고 있으니까 어쩌든지,  우리가 뭐 잘해 놓은, 자기의 좀 잘해 놓은 것은 얼마든지 다 보상이 있을  터이니까 그 것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된 것에는 대해서 조사할 것도  없고 누가 뭐 알아 주니 못 알아 주니 그런 것을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게 교만한 생각입니다. 너무 정확해서 기찹니다. 또 철이 없어서 어쩌든지  자기를 이모 저모로 어떻게 하든지 좀 들어내고 나타내 볼까 하는 그런 것도,  내가 엊저녁에도 오층에서 여기 사층에 중간반 학생들의 그 성탄 축하 하는 것을  거게서 듣고 있었습니다. 다, 성의 있게 하기는 하지마는 자기를 잊어버리고,  자기를 잊어버리고 이거 외모에서만 나타나고 있고 속에 사랑의 주님으로만  맞이하고 있지 두려우신 주님을 느끼지도 못하는 그런 점이 너무 좀 유치하고 좀  안타깝게 돼 있다 하는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이러니까 이때는 우리들이 자기의 잘못을 어쩌든지 여게 전심 전력을 기울여서  우리가 찾아야 되겠습니다. 공평된 하나님을 대해서, 또 우리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에게 대해서, 사람에게. 대한 중에는 모든 사람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대해서, 모든 사람과 물질과 나와의 관계되는 것들이 모두  사건들입니다.

 그러면 사건들에 대해서, 사람에게 대한 사건, 물질에 대한 사건, 혼자의 사건,  모든 마음으로 일어난 것, 생각으로 일어난 것, 감정으로 일어난 것, 그 무슨  물질로 인해서 일어난 것, 우리가 뭐 오만 것이 얼마나 지저분하게 추접한  우리들입니다.

 이러니까 이런 것을 어떤 것이라도 개의치 말고 있는 것을 낱낱이 주님 앞에  고해서 사함을 받는 것이 우리가 슬기로운 일이요 주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심판의 주님으로 오실 때에 그때 주님은 사랑의 주님이 공의로 가지고  심판을 가지고 오시기 때문에 당신의 그 심정을 가리켜서 주께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고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아무 상이 없을지라도 급속히 당신의 대속의 효력을 입어서  하나님의 공평된 심판에 깅리는 이 진노의 원인이 하나도 없도록 청산하는 것을  당신이 기뻐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죄악 이라도 주님 앞에 고해서 깨끗하게 사함을 받읍시다.

뭐 만일 전 시간까지 어떤 죄악이 있다 할지라도 이 시간에 그 죄를 그 마음에  아피 회개를 하고 뭐, 회개하는 자 그렇게 마음 아프다고 뭐 거게 대해서 뭐 마음  아피 뜨겁게 뭐 어쩌고 하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럴 시간이 없고 그럴  정력이 없습니다. 그저 잘못된, 것은 잘못된 줄 알고 주님 앞에 고해서 사함받고,  사함받고, 이제 어디다가 전력을 기울이느냐? 다시 그 죄로 더불어 싸워서 어떤  경우가 있을지라도 다시 그 죄에게 내가 종이 되지 않도록, 지금 주 앞에 고하면  벌써 자유를 얻었습니다. 자유 얻은 이것을 다시 죄악에 종이 되지 않도록 여게는  우리 심신을 다 정력을 기울일 수도 있고 전력을 기울일 수도 있고 또 자기의 뭐  소유나 몸이나 쌍명을 다 기울여서 싸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크고 작은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해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주홍같고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과 같이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나로 더불어 변론하자  주님이 우리의 변호사라 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변호하는 중보자가 있으니 곧  주님은 우리의 변호자라 이랬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변호하시기 때문에 주님에게 이 변호에 의탁하면 당신이  이것을 맡아 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저 우리는 오늘 낮에 만나련지 밤에 만나련지  며칠 후에 만나련지 몇십 년 후에 만나련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늦출 것이 아니고 오늘 이 시간에 주님이 오실지라도 나에게  거리낌이 없도록 이렇게 준비하는 것이 슬기로운 일입니다.

 이래서 지체하지 말고, 우리는 뭐 다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이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잘못이 무엇인지 하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자기대로는 다 알 수가  있습니다. 마음에 양심을 쓰고 자기 생각을 기울이면 알 수 있습니다. 자기로서  잘못된 것도 알 수가 있고 어떤 잘못이라도 주님의 사죄에 고하면 다 없어질 수  있고 주님의 칭의에 고하면 우리는 의로운 자로 담대히 하나님의 심판 앞에  담대히 설 수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중보자요 예수님을  가리켜서 예복이라 이랬어. 주님은 우리의 모든 걸 가루십니다.

 이런고로 어쩌든지, 이 시간이면 이 시간, 자기는 어떻든지 자기의 잘못을  깨달아서 주님 앞에 고해서 사함받는 이 시간이 계속되어서 이제 찾고 그런 것이  없으면 있도록 찾아보고 어찌 됐든간에 찾아서, 찾고 없고, 찾아 가지고 고해서  사함받고 해결짓고, 찾아도 없고 찾는 중에 있고 여게서 주님 만나는 것이 우리의  지혜로운 일이요 슬기로운 일입니다.

 우리가 뭐, 하도 급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른 것은 말고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했어. 이런 것들은 뭐 의식주를 염려하지 말고 이것을 해라. 그러면  당신이 그것은 다 해 줄 것이기 때문에 급박한 걸 가리켜서 모든 성경이  말하지만 우리는 자꾸 누그럽게 이렇게 그 강퍅해 가지고 하나님의 이 계약의  심판을 어누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여게 대해 생각하고, 학생들에게는 이제 언제 한 주일을  더 뭐 보련지 안 보련지 그것도 모릅니다. 이러니까 반사 선생님들은 있는 힘을  다 기울여서, 뭐 일곱시 반인가 되면 무슨 테레비 본다 하는데 혼을 내십시오!  혼을 내! 지금 불이 떨어져서 곧 네가 불에 탈 터인데 이걸 모르고 네가 지금  하고 있느냐고서 흔을 내요! 여러분들이 속에 느껴진 것만치 그들에게 갈 때는  반드시 양쪽에 날선 성신의 검으로 갑니다. 찌르면 그 옛사람 그놈 그 테레비  보게 하는 그놈이 죽어 버렵니다. 뻐드러집니다. 뻐드러지고 새사람이 생기를  얻어 가지고 일어나게 됩니다.

 이래서 오늘이 마지막이련지도 모르는데 그 아이들에게, 그래도 제 속으로는  오늘은 성탄 축하의 이것은 뭐 언제든지 많이 인식을 시켜서 알고, 그러면 사랑의  주님보다도 두려우신 주님을 전하고 두려우신 주님이 아직까지 오기 전에는  사랑의 주님이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 우리가 어서 정리하고 용서할 것을  용서받고 해결짓자 하는 이것을 학생들에게 전해야 되겠다 하는 것을 저 혼자  짐작이 돼서, 너무 오늘 성탄 축하에 기념 주일날 이 설교하는 것이 너무 좀  거리가 멀어서 그래서 오늘 O총무에게 내가 그것을 새벽 네시에 물었던  것입니다.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자기가 맡은 학생들 어쩌든지 오늘에 다 참석을 시켜서 두려우신 주님을 깨닫고  이 두려우신 주님으로 오시기 전 사랑의 주님 앞에서 해결을 다 짓고 자기  마음에 자책할 것이 하나도 없도록 해결을 짓고 두려우신 주님을 영접하도록  그렇게 오늘이라는 이 주일을 헛되이 넘기지 말고, 뒤에 또 그런 날이 있으련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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