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법

 

1987. 7. 4. 새벽 <토>

 

본문:요한일서 4장 8절∼11절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였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을 자기의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해서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하는 것이 최고의 법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두 가지를 행하는 자는 최고의 법을 지킨 자라 말씀했습니다. 모든 법을 지킨 것보다도 최고의 법을 지킨 것이라.

고린도전서 13장에는 보면은 “우리가 지식이 누구보다 뛰어나고, 또 믿음이 뛰어나고, 또 자기가 이웃을 위해서 어떠한 희생을 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 이랬습니다. 심지어 “자기를 주어서, 자기 몸을 주어서 불살라서 형제를 위해서 불사른 이런 희생을 한다 할지라도 사랑 없으면 아무 소용 없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나 사람을 위하는 일에 있어서 자기의 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한다 할지라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 할지라도 또 실효 없는 헛된 일이 되기 쉽습니다. 그것은 뭐이냐? 두 가지 해결을 해 주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멸망에서 해방시키는 일과, 또 영원한 생명과 평강을 이루어 주는 일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 우리가 아무리 형제를 위해서 무슨 일을 희생을 하고 또 죄에서 해방시키는 일과 또 하나님과 연결시켜서 생명과 평강을 주는 일을 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사랑함으로 하지 안하면 또 소용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함으로 해야 되겠고 하나님과 형제를 대해서 사랑함으로 하는 이 사랑이 있어야 되겠고, 사랑함으로 해야 되겠고, 사랑함으로 그러면 어떤 일을 해야 되느냐? 사랑함으로 형제를 멸망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또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하지 안하면 안 되겠고 또 이것을 한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있는 것을 그 일을 위해서는 희생하지 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사랑과 또, 사랑은 그 동기가 되겠고, 사랑은 동기가 되겠고, 그 목적과 결과는 형제를 멸망하는 그 죄에서 구출하는 결과가 맺어져야 되겠고, 그 목적으로 해야 되겠고, 또 생명과 평강이 되는 대주재자이신 하나님과 화친을 일으키는 그 결과를 맺지 안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는 데에는 우리에게 있는 것을 희생하지 안하면 안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이것이 최고의 법을 이행한 자입니다. 그런데 “최고의 법을 이행하는 자니” 이 말은 최고의 법을 이행한다 말은 모든 법은 이 법을 위해서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법을 지키는 자는 모든 법을 다 지킨 사람이라. 최고의 법을 지켰기 때문에 그 이하 법은 다 지킨 것이라.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도리를 받았는데, 이 법은 우리의 생애 법칙이요 영원히 지켜야 될 우리의 법칙인데, 신구약 성경 법칙은 이 법칙을 지킴으로 우리가 의롭게 된다고 구원이 된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율법에 속한 사람이 되어서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고 해치는 일이 되겠고, 또 이미 예수님께서 이 모든 하나님의 입법하신 이 입법을 대신 지켜 주셨기 때문에 나는 지키지 안했으나, 주님이 내 대신 지켜 주셨기 때문에 주님이 지키신 그 지키심은 나를 위해 지키심이기 때문에 내가 지킨 것이라. 내가 지킨 것이니 나는 모든 율법을 다 행하고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의롭다 인정함을 받은 내라.

그러면 인정함을 받은 내니 이제 내가, 인정함을 받은 내가 사는 생애 법칙은 내가 사는 생애 법칙은 곧 하나님께서 신구약 성경에 나타내 주신 이 법칙이 우리의 사는 법칙이라.

그러면 이 법칙 가지고 자기가 구원을 이룰라고 하면은 율법 아래에 속해서 그 사람은 멸망을 자취하는 일이 되겠고, 또 이제 예수님의 대속으로서 우리는 구원 얻은 자이기 때문에 법이 필요 없다 하고서 법을 지키지 안하는 사람은 자기의 건설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되겠고, 예수님의 대속의 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법을 지킴으로서 완전타 함을 얻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내 대신 모든 것을 대속하셨기 때문에 완전함을 받았으니 완전함을 받은 나는 이제 신구약에 나타낸 하나님의 법칙은 완전자가 사는 법칙이라.

그러면, 우리가 처음에는 이 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다 법을 지켜야 되는데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정죄함을 받아서 멸망을 했어. 이 법이 들어서 우리를 멸망시킨 법이오. 이 법이 들어서 우리를 멸망시킨 법이오. 예수님의 대속을 입고 난 다음에는 이 법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법입니다.

요것을 생각하고, 이 법 중에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자기의 있는 것을 다 들이는 그것은 모든 법을 다 지킨 사람이라. 최고의 법을 지킨 사람이기 때문에 최고의 이 건설구원을 이룬 사람이라.

그러면 최고의 건설구원을 이루는 사람은 자기가 이 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최고의 구원을 이룬 것은 이 법을 지킴으로 자기가 모든 법에 완전히 지킨 자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대속하심으로써 자기를 이 정죄의 율법에서 완전히 구원해 가지고 대속의 구원을 주셔서 대속의 구원을 받았으니 대속의 구원을 받은 자의 이 생명법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제 대속을 받았으니 대속받은 자기의 사는 생애 법칙인 것을 깨닫고 이 법칙으로 살면 산 것만치 자기의 구원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법칙으로 살므로 자기 근본 구원이 기본구원이 된다고 생각하면은 그 사람은 예수님의 대속을 벗기 때문에 벗으면 그 사람은 율법 아래 있어서 이 법으로 자기를 정죄만 받지 구원은 못 합니다. 또 구원을 대속의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는 법이 필요 없다 하는 사람은 건설구원을 이루지 못합니다. 또 이 법을 지킴으로써 자기의 기본구원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율법 아래에 속해서 자꾸 정죄만 되어지지 구원은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을 우리가 어떻게 관계를 가지겠느냐? 내가 율법을 아무리 지켜 행할라 해도 행하지 못했는데,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이 율법을 다,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행해서 율법을 완전히 이행한 사람이 됐습니다. 예수님이 대신해서 당신이 죽기까지 이행해 주심으로서 나는 완전히 율법을 이행한 사람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믿음으로 자기는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완전타 인정받아서 죄와 사망과 마귀에게서 완전히 해방받고 하나님과 완전한 화친을 이룬 이룸을 받은 자기라.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하신 이 대속의 공로는 자기 것이 됐고, 자기의 살아 있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값주고 산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것 됐고, 나는 주님의 것 됐고 주님의 대속은 내것 됐고, 이래서 주님의 대속을 내것을 삼으니 나는 주님의 것된 요것이 “사라”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사라는 것입니다.

“값이 없어도 사라” 그러면 사는 것은 값이 되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완전히 주님의 것이, 대속으로 값주고 샀기 때문에 자기는 완전히 주님의 것인 것을 인정하는 것이 이것이 댓가를 내는 것이요, 왜 자기가 그러면 주님의 것이 됐느냐? 주님의 대속이 내것 됐기 때문에 나는 주님의 것 된 요것을 똑똑히 요 알아서 믿으면, 믿으면 예수님의 대속이 자기 것 됩니다.

그러면 이 대속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대속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대속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다시는 죄를 범할 수 없고, 또 불의를 행할 수 없고, 하나님과 불목할 수가 없고, 마귀에게 다시는 종될 수가 없고, 사망에게 종될 수가 없는 요 사실을 믿는 믿음 토대 위에서, 믿음으로, 믿기 때문에 믿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법칙을 지키는 것은 자기에게 다 건설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본구원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대속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받은 자기는 하나님 법칙을 받은 자의 이 영생하는 법칙인 것을 깨닫고 이 법칙을 지키면 지킨 것만치 자기에게는 영생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법이 한없이 많은데, 그 법 중에 제일 강령되는 제일 으뜸되는 법이 뭐이냐? “최고의 법이라” 야고보서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희생해 바치는 것은 이것은 최고의 법을 지킨 사람이라 그말은, 최고의 법이라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의 법이 한없이 많지마는 그 법에 강령, 벼릿줄. 벼릿줄을 지킨 사람이라.

그러면 그물이, 그물에는 벼릿줄이 있는데 벼릿줄만 뻐뜩 들면은 그물이 뭐 천고고 만고라도 그것만 들면 다 들려올라옵니다. 이것 모양으로 이제 이 한 최고의 법을 지키면은 나머지기 밑에 있는 법은 다 지킨 사람이 된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다 지킨 사람이 되는데 이 지키는 데는 두 가지 믿음이 있습니다. 이 지키는 데에는 ‘내가 이와같이 지킴으로 내가 의로워진다. 또 내가 모든 죄와 사망을 벗게 된다.’ 이렇게 자기가 이 법을 지키는 데도 두 가지로 지킬 수 있으니, 이 법을 지키는 것을, 지키는 것을 기본구원을 이루는 것으로 이 법을 지키는 자는 다 헛일이고, 다 멸망이고, 정죄함만 받지 자기 기본구원 건설구원이 다 헛일이고, 헛일이라 말은 자기 주관적으로 헛일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이 기본구원의 효력을 보지 못한다 그말입니다. 효력을 보지 못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효력을 보지 못합니다.

세상을 떠나면 하나님의 기본구원을 입힌 그 택한 자는 지옥을 못 갑니다. 아무리 갈라 해도 지옥을 못 가는 것입니다. 또 택함을 입지 안한 자는 아무리 천국을 갈라 해도 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거는 벌써 과거사로서 절대 불변적으로 다 완전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이 법칙을 자기가 예수님의 대속을 받은 것은 이 법칙을 예수님이 대신해서 완전히 지키셨기 때문에 이 법칙을 완전히 자기는 지킨 자라.

이러기 때문에 완전히 지킨 그것을 자기가 인정을 하고 믿고, 자기는 율법을 완전히 이행한 자라, 예수님이 대신 했기 때문에 완전히 이행한 자라, 자기는 완전히 구원 얻은 자라, 구원 얻은 자이기 때문에 나는 이것이 내 구원 얻은 자의 영생법인 것을 깨닫고 요 법대로 지키는 자가 있고, 법을 지키되 이것으로써 기본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서 지키는 자가 있고, 그러면 처음에 말한 것은 영생이 되고 두번째 말하는 것은 영원한 멸망이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지 못하고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 하는 그말은 내나 요것을 들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이 법칙을 자기가 지키되 기본구원을 이 법 지킴으로 이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헛일, 또 예수님의 대속으로 구원을 얻었으니까 하나님 법칙은 내게는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헛일, 그러면 예수님의 대속으로 나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대속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 법칙이 우리에게는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뭣이 실패가 됩니까? 뭣이 실패됩니까? 건설구원이 실패됩니다. 건설구원이 실패되고, 또 예수님의 대속을, 자기가 대속을 믿음으로서 대속으로 자기가 기본구원 얻는 것인 것을 믿지 안하고 자기가 이 율법을 행함으로 자기는 기본구원을 얻는 것으로 이렇게 알고 이 하나님 법을 자기가 지켜서 이행하는 사람에게는 또 무슨 손해가 있습니까? 무슨 손해 있습니까? 손해가 무슨 손해 있소? 녜, 그 손해는 자기가 예수님이 대속하신 것을 믿지 안하고 자기가 이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서 자기의 의가 이루어진다고 이렇게 생각하고 열심히 지켜서 행하는 사람에게는 무슨 손해가 있는고 하니, 무슨 손해가 있는고 하니 기본구원을 자기가 이제 벗어서 기본구원이 없는 사람이 되는지? 기본구원이, 기본구원은 없앨 수 없으니까 기본구원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마는 세상에 있는 동안에 이 기본구원을 자기가 믿음으로 이 기본구원의 혜택을, 기본구원의 능력을, 이 기본구원의 효력을 한없이 입을 수 있는 것인데 예수님의 대속을 믿지 아니함으로 기본구원을 자기가 입어서 믿을 때에 이 기본구원의 효력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율법을 다 이행할 수 있는 이런 효력의 능력을 자기가 가지게 되고 효력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건설구원의 이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이 기본구원의 효력을 입어서 성화구원을 이룰 수 있는 이런 효력을 보지 못합니다, 효력을 보지 못해.

효력을 보지 못하고, 그라면 이 기본구원의 효력이 예수님의 대속을 믿지 안하면은 이 기본구원이 없어집니까 없어지지는 안하고 있기는 있는데 세상에 있는 동안에 기본구원의 효력을 입지 못합니까? 효력을 입지 못하는지 기본구원이 없어지는 것인이 어느 것인지? 손해는 손해인데 기본구원이 없어지는 손해를 보는지 이 기본구원의 효력을 자기가 이용하지 못하는, 효력을 자기가 사용하지 못하는 손해를 보는지, 자, 그러면 한번 손을 들어서 표시해 봅시다. 그러면 기본구원을 자기가 얻지 못하는 그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녜, 맞았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믿지 않는 것은 기본구원의 효력을 이 세상에서 보면 이 효력 가지고 우리가 성화구원을 다 이루는 것인데, 이 효력 가지고서 하나님의 법칙을 다 이행할 수 있는 이런 효력이 있는데 자기가 예수님의 대속을 믿지 아니함으로써 건설구원을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충만한 모든 능력을 자기 것을 삼아서 자기가 이용할 수 있는데 이용하지 못해서 예수님의 대속의 효력을 세상에서 건설구원 이루는 데에 이 효력을 쓰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고 요 손해가 간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요거 똑똑히 구별해. 요겁니다.

요걸 똑똑히 구별해서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율법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사람은 이 사람의 최고의 법을 지킨 사람이다” 이러기 때문에 다른 것을 안 지켜도 이것 지키면 그거는 저절로 다 지킨 것이 되어지고 또 지켜진 것이 됩니다. 실상으로 지킨 것이 되어집니다.

그런데,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가? 성경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라” 이렇게 말씀했어.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라” 또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지음받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라” 그렇게 또 요한일서 5장에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이 사랑하는 것은 어떤 것이 사랑하는 것이냐?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은 입으로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소용 없고 실지로 사랑하는 것은 사랑함으로써, 사랑함으로 상대방을 구원 되도록, 상대방을 유익되게 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사랑함으로 자기의 것을 희생하는 그게 있어야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자기의 것을 희생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되고, 또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사랑함으로 자기 것을 희생하는 것이 있어야 사랑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는 자기 희생할 게 뭐 있는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사랑하는 건 그 계명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계명 지키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지 안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또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 것을 자기를 희생해야 그것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희생하는 데는 어떻게 희생하느냐? 그러면 희생만 하면 되느냐? 자기 몸을 주어서 불사를지라도 희생 가지고는 안 된다. 그러면 희생 가지고 안 된다.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또 자기가 마음으로서 자기 말로만 사랑하고 자기가 희생하지 안하면 안 된다. 사랑한다 해도 희생하지 안하면 안 된다. 아무리 희생해도 사랑이 없이 희생하면 아무 소용 없다.

그러면 사랑함으로 희생한다. 사랑함으로 희생한다 할찌라도 두 가지 목적과 결과가 맺어져야 되지 그게 안 맺어지면 안 된다. 그게 목적이 없으면 안 된다.

그 목적이 뭐인데? 죄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멸망에서 구출하는 것이니 멸망에서 구출하는 것과 또 하나님과 화친을 만드는 것은 다 생명과 평강을 얻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목적으로 하지 안하면 안 된다. 또 이 목적으로 하되 그 결과가 맺어진 것만치 효력이 있는 것이다 하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난밤에 말씀한 것같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자기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자기 소유와 몸과 생명, 자기 마음, 목숨, 힘, 뜻 이것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 다해서 사랑하는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바치는 것인데, 그러면 몸을 어디다가 바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바치는 것인가? 하나님의 계명 지키기 위해서 몸 바치는 것이, 또 자기의 목숨 바치는 것이, 힘 바치는 것이, 자기의 마음 바치는 것이, 자기의 뜻 바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어떻게 그걸 어디다 바칠 건가? 계명 지키는 데에 바치는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바치는 것이라.

계명은 뭐인데? 계명은 뭐인가? 그 계명은 전부 예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대속하셨기 때문에 이 대속을 자기가 믿음으로써 대속을 입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 지키는 것이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이 대속을 벗지 않고 입고 살기 위해서 자기 생명 바친 것은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생명 바친 것이라.

또 이렇게 자기가 이 대속을 얻고 또 그라면 대속 얻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면은 어떻게 하는 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가? 이 대속을 형제에게 전달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이 대속을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해 바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바치는 것이라.

그러면 형제에게 대속을 위해서 자기가 희생하는 것은 형제를 사랑함으로 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는 것이 되지마는 아무리 희생한다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헛일이다. 또 사랑하고 희생한다 할찌라도, 사랑하고 희생한다 할찌라도 잡탱이 사랑이 많기 때문에 사랑하고 희생한다 할지라도 영원한 멸망에서 구출하는 이 속죄와 또 하나님과 연결돼서 화친으로 영생 얻는, 속죄하고 구원하는 이 두 가지의 목적과 결과가 맺어지지 안하면 또 소용 없다.

그러면 사랑 없어도, 사랑 없이 희생해도 소용 없고 또 희생 없이 사랑한다 해도 그것도 소용 없고, 그러면 사랑과 희생 이 두 가지는 꼭 있어야 되겠는데 또 그라면 그거 가지고서 한다 할지라도 셋째로 한 가지가 더 있어야 되는데 한 가지 더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 가지 더 있는 건 뭐이지? 요 학생들 말해 봐.

한 가지 더 있는 것은 뭐이지? 한 가지 더 있는 것은 사죄 칭의 화친입니다, 사죄 칭의 화친.

그러니까 사죄라는 것은 멸망에서 구출하는 것이요, 칭의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것이요, 또 화친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라. 그러면 이거 없어도 안 돼.

그러면 세 가지. 사랑 없어도 안 되는 것, 또 희생 없어도 안 되는 것, 그 목적과 결과로서 구속이 없어도 안 되는 것. 이러면 이 세 가지 삼각인데 세 가지가 다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기가 희생만 하고, 희생만 하고 구속을 합니다. 희생만 하고 구속을 전합니다. 구속을 전해서 사죄와 칭의 화친의 구속을 전하기 위해서 자기가 희생을 다합니다. 희생을 다합니다. 그러면 자기가 형제를 구원하는 구속을 전하기 위해서 자기의 있는 것을 희생을 다합니다. 그러면 몇 가지입니까? 구속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을 다한다 그라면 몇 가지 했습니까, 손가락으로? 몇 가지 했어, 저 ○선생? 왜 손가락 안 들어? 두 가지. 두 가지 했지. 뭐이 하나 없어요? 사랑 하나 없어. 이라면 안 돼. 이 세 가지 있어야 돼.

또, 자기는 사랑은 없이 희생하고 구속하기 위해서 구속을 전하기 위해서 자기의 소유와 몸과 다 버렸습니다. 다 버리고 구원을 하기 위해서 희생도 하고 구원도 했어. 희생과 구원 했습니다. 그러면 이것만 하면 다 됩니까? 안 돼. 사랑함으로 하지 안하면 안 돼. 사랑이 없어도 안 돼.

또 자기는 사랑합니다. 아주 사랑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을 다 합니다.

사랑함으로 모든 걸 희생을 다 합니다. 사랑함으로 희생을 다 했는데 그것은 이제 성공이요 실패요? 실패라. 왜 실패? 목적과 결과가 없기 때문에 실패라 그말이오.

이러니까 사랑이 있어야 되겠고, 또 목적과 결과가 있어야 되겠고, 그렇게 하는 데는 자기가 또 희생이 있어야 된다. 요 세 가지가 있어야 되는 요것이 최고의 법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면은 그러면 그 하는 자기에게는 뭐이 되느냐? 그렇게 할라 하면 자본이 있느냐? 천 대까지 복 준다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본을 얼마든지 주시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 것, 또 자신에게는 뭐이 됩니까? 자신에게는 영생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 것, 또 그라고 난 다음에 하나되는 건 뭐이 된다 했습니까? 예? 하나되는 건 뭐이 된다 했지요, 저 뒤에? 하나되는 건 뭐이 된다 했어? 예수님의 기쁨! 이만하면 되지 딴거 뭐 필요 있는 게 뭐 있어요? 그거 세 가지 있으면 다 되는데.

그렇지 안해요? 자본 얼마든지 주님이 주시지, 자본을 얼마든지 주님이 주시지, 또 이 자본 주셔 가지고 하는 일이 괴롭게 억지로 하면 하지만 그 하는 데에는 한없는 기쁨이 충만하다 했지, 또 암만 기쁨이 충만해도 또 영생 없으면 소용 없는데 그 자체가 또 영생하는 그 자체 실력 본질 본성 바로 그 자체 그것이라 그말이오, 주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 것이.

그러니까 우리는 염려없이 이 생활을 한번 해 봅시다. 이래서 이 세 가지를 다 한 사람들이 다 승리했습니다. 다 이 세 가지를 거의 다 믿는 사람들은, 잘 믿는 사람들은 다 이 세 가지를 하고 있어요.

자기 일생 동안에 모든 영광과 존귀 부귀가 뭐 자기대로는 가다가서 못 받을지라도 자기에게 호호양양한 성공과 영광과 존귀가 있지만 그것 다 버리고, 버리고, 주님을 사랑함으로 형제를 사랑함으로 다 버렸어. 희생을 했어.

이거 또 하고서 형제에게 사죄해서 해방받고, 모든 멸망에서 해방받고 하나님을 더불어 딱 화친을 만들어 가지고 영생하도록 이 일을 위해서 다 희생했고 이 일 했어. 여게 양성원 학생들도 모두 다 희생하고 나선 사람들이라.

여기 또 중간반 반사들도 모두 사장들이오. 사장들인데 그때 돈으로 한 달에 뭐 오십만 원 사십만 원 수입은 다 됐는데 여게 와 가지고서 오만 원 받았습니다.

사십만 원 오십만 원 자유 생활 다 하면서 수입하는 거 버리고 여게서 초급이 오만 원이라. 오만 원 받고 하는 그것이 뭐이냐 하면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므로 하나님을 위해서 이웃을, 이 구속 도리를 위해서, 구속 도리를 위해서 다 자기 것을 희생한 사람이라 말이오.

이 희생이 차차차 뭐 권찰들도 주일학교 반사들도 다 희생해요. 희생하는데 뭐 할라고 그 희생합니까? 토요일날 주일 아침 뭐 주일날 밥도 먹지도 못하고 뛰어 돌아다니고 다 모두 다 자기대로는 세상에 뭐 갈 그 넓은 호호양양한 영광스러운 길이 있지마는 그 길 안 가고 예수님에게 몸을 바쳐서 시간을 바쳐서 이래 사는 것은 이제 희생하는 것이라. 뭐 할라고 그러느냐 말이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목적과 결과는 좋다 말이오.

그래 가지고서 구원해서 지금 주일학생이 뭐 구천이니 얼마니, 그런 줄은 모르지만 어쨌든지 세계에서 최대의 어린이 교회라 하는 그런 말은 벌써 그 신문 잡지에 많이 났다 말이오.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그와 같이 말하는 거라.

이러니까 이제 해방시키는 것과 구원하는 것, 멸망에서 해방시키는 것, 모든 멸망에서 해방시키고 모든 생명과 평강의 구원을 주는 이 일은 결과를 맺어놨다 말이오. 결과를 맺는다 말이오. 그라고 또 희생도 한다 말이오.

그런데 염려되는 것이 뭐입니까? 뭐이 또 염려가 돼? 뭐이 하나 염려돼? 두 가지는 있는데 뭐이 하나 염려돼? 사랑이 없기 쉽다 말이오. 사랑함으로 해야 되는데, 이미 사랑함으로 하면 되는데 사랑함으로 하지 안하고 사랑 없이 하기 때문에 그 두 가지만 있으면 안 돼.

우리 서부교회에 모든 성도들은 이렇게 희생도 뭐 합니다. 희생도 해요. 아직까지 때가 돼서 다 하지는 안 하고 생명까지 다 바치지는 안했지마는 그래도 있는 힘대로는 다 희생을 한다 말이오.

희생도 하고 또 사죄 칭의 화친의 이 예수님의 구속도 입힐라고 애를 써서 많든지 적든지 다 입혀놨고 이런데 사랑함으로 요라면 요것만 있으면 되겠는데 사랑함으로 하는 요것 없이 요 두 가지만 하기 쉽다 그말이오. 두 가지도 실패.

아무리 사랑하면서, 사랑하면서 희생을 한다 하니까 두 가지가 있어도 실지로 이 구속이 없으면 실패, 또 희생과 구속이 있어도 사랑 없으면 실패, 또 사랑과 구속을 한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뭐 없으면 실패라요, 저 ○권사님? 뭐라 하노? 큰 소리 해 봐. 거기 사람이 큰 소리로 전달해 봐. 희생. 녜, 희생 없으면 실패야.

이러니까 잘못하면 이 세 가지 가운데 말이요 사랑, 희생, 구속 요 세 가지 어떤 사람은 요것만 열심히 할라고 애를 씁니다. 요것만 암만 열심히 할라 해도 희생 안 하니까 이 일이 안 돼. 뭐 암만 그래 쌓아도 안 돼.

가만히 보면은 자기 가정이든지 자기 구역 식구든지 이거 열심히 예수 안 믿는다고 막 예수를 믿으라고 아무리 이래 강조해도 그 사람은 보면은 요 희생이 없어 가지고서 안 되는 사람 있다 그거요.

또 희생도 이 구속도 이 두 가지를 뭐 죽자껏 희생을 하는데 사랑함으로 하지 안하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어, 사랑함으로 하지 안하기 때문에. 사랑이 없어 안 되는 것.

그래 요 세 가지가 다 겸해서 있어야 되는데 요 세 가지 겸한 생활 우리가 엊저녁에 하자고 그렇게 또 작정을 안 했습니까? 작정을 했는데, 그 하는 일이 우리에게는 세 가지 보증이 있기 때문에 염려가 없어. 여러 배 줄라 했거든.

아무리 희생하면은 희생할수록이 여러 배 백 배 줄라 했어. 또 하나님이 천 대까지 축복해 줄라 했기 때문에 그게 하나님이 자본주가 ‘내 자본은 문제하지 마라. 자본은 염려하지 마라. 자본은 내가 대 주마.’ 하는 그말이오.

“천 대까지 복 받는다” “하나님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복 준다” 하지 안했습니까? 그 계명을 지킨다는 그 계명 지키는 건 뭐이 그 계명 지키는 것이지요? 그 계명 지키는 것은 뭐 어떻게 하는 것이라요? 요한복음 15장 12절에 그 계명은 주님이, “계명을 지켜서 내 사랑 안에 거하라 내 계명은” 뭐라 했습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그것이 계명이라” 이랬어.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계명 지키는 것이오. 또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은 뭐이냐 하면은 그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형제 사랑하는 것이라 그말이오. 알겠습니까? 그라면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그 계명을 지켜야 됩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됩니까? 뭐입니까? 뭐이 먼저 돼야 돼요? 형제를 사랑함으로 계명을 지켜야 돼요 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돼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순서가 바로 됐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요. 녜, 이게 바로 됐어요, 이게 바로 돼. 잘못 하면 형제를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그 일 하기 쉽거든. 그라면 안 돼요. 꺼꾸로 되면 안 됩니다. 순서가 바로 돼야 되지.

그래 가지고 우리가, 뭐 자본 얼마든지 주십니다. 그러니까 자본 문제 하지 말고, 그라면 그렇게 하면 이 세상에는 자꾸 다른 사람의 것을 착취를 하고 다른 사람을 이용해 먹고ㅡ저 열심쟁이 또 조네. 그 이상해. 예배 때는 왜 졸아? 그래 요 세 가지가 다 겸해서 돼야 되겠는데 이렇게 할라 하면은 사람이 남의 것을 뺏들어야 좋고 다른 사람을 찌르니까 좋고, 지금 우리 나라에서는 뭐 대통령 될라고 하는데 지금 서로 뭐 웃고 이래 쌓지마는 속에는 ‘저게 어떻게 됐으면’ 하는 그런 일도 하기 쉽다 말이오. ‘저게 어떻게 없어졌으면 좋겠다.' 이럴 수도 있다 말이오.

모두 다 자기 욕심이 이루어져서 자기가 떡 당선이 되면 기쁘고 즐겁지마는 자기가 뚝 떨어지면은 모두 다 기쁘고 즐겁지 안할 거라 그말이오. 사람들은 자기가 희생되면 다, 자기가 희생되면은 슬프지 않소? 자기가 희생되면은 자, 자기가 희생되는데 좋아하는 사람 누가 있어요? 안 좋아해요. 이런데, 세상에서는 자기 희생되면 좋아 안 해요. 무슨 일로 희생해? 자꾸 주 모아야 되지.

이런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이 구속을 주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것은 기쁨이 충만해.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그 말씀을 똑 해 놨어. “내 계명을 지켜 내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너희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충만케 하려 함이라”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 희생하는 것이 슬플 것이고, 고통일 것이고, 이거 가난이 될 것이고 문제 크다.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못 한다 말이오. 믿음이 없어 못 해. 이라면 하나님이 주신다는 걸 믿으면 하는데 그분이 신실하신 하나님이시지마는 믿지 않기 때문에 못 한다 그말이오.

그런데, 그러면 하나님이 자본 준다 하자. 자본은 준다 하지마는 자꾸 뭣을 얻어야 세상에서 기쁨이 즐거움이 오는 것인데 희생하면 기쁘고 즐거울 수가 없지 않겠느냐? 그랬기 때문에 주님이 말씀했어.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세상에 썩어질 것 뭐, 돈 얻어 기쁘다, 뭐 시집가며 기쁘다, 장가가서 기쁘다, 아들 낳아 기쁘다, 딸 낳아 기쁘다, 뭐 취직해 기쁘다, 뭐 당선돼서 기쁘다 그런 기쁨은 다 땅에 속한 기쁨인데, 그 기쁨이 아니고 영생하는 기쁨이요 그 기쁨은 기뻐할수록이 만물들이 보고 ‘햐, 참 저분은 저런 걸 기뻐했구나.’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것도 모든 만물들이 보고서 ‘저분은 저런 기쁨을 가졌구나.’ 그 기쁨 가진 것이 어떻게 이래 존경하고 숭배해야 되는 그 기쁨이 있어. 그 기쁨이 충만케 하는 것. 이러니까 문제 없지 안해요? 그렇다고 해서 자기에게는 만일 자기 자체가 어찌 되느냐? 자체는 또 영생이라.

그런고로 이 계명을 지킴으로써 모든 것이 이 부요해지고, 또 자기 자체는 영생하는 실력가가 되어지고, 또 한없는 기쁨이 되어지고, 자, 뭐 모자라는 것 있어요? 언덕을 떠나서 한번 해 보자 그말이오. 그런데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못 해요.

거게서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집사로 있을 때에 그 동리에서 어떤 사람이 논 닷 마지기인데 닷 마지기 그 논이 참 좋은 논이오. 그 사람이 공연히 그 사람이 내가 저한테 줘 제 논이라고 달라들어. 다른 사람 온 동네 사람들이 막 모여 가지고서 ‘그놈 환장한 놈 그런 놈이 어데 있나? 제가 뭐 돈이 어데 있어 그럴까보냐?’ 이라는데, 자꾸 시비를 해요. 내가 그 사람한테 심부름을 시켰더니마는 그 제것이라고 그만 그래 딱 아주 이래서, 그 동리 사람들이 나를 청해. 말 한 마디만 떨어지면 저놈 당장 이 동리에서 모둠벌을 주겠고 지금 이라겠다고 그런 어데 그 날도둑놈이 어데 있느냐고 하는 걸 그래 내가 가 가지고서 ‘그런 게 아니고 그 사람이 나한테 말을 할 만해서 하는 것이니까 좀 그만 참으시소.’ 그래 가지고 닷 마지기 싹 다 줘 버렸어.

그 주고 난 다음에 내 속에는 한없는 기쁨이 있었어. 왜? 그런 걸로 한번 체험해.

그렇게 해야 될 그럴 때 여러분들이 애낌 없이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와 같이 할 때에는 큰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또 손해가 없어요. 손해 없어.

그래 내 예수 믿으러 나오며 처음에 믿을 때에는 배고팠고, 또 목회 유급의 교역자로 나설 때에, 나설 때에 그러니까 넉 달인가 배고팠어. 넉 달? 석 달. 석 달 배 곯았어. 석 달 배 곯았는데 그때는 호박만 삶아먹고 그래 아이들 학교 가고 이랬어요. 이랬는데 나중에 석 달 지내고 나니까 맥추감사절이라. 맥추감사절인데, 모든 집사들이 있다가서, 그 집사가 모두 가짜 집사라. 전부 주남선 목사님에게 ‘이 집사 다 이거 다 떼 버리이소.’ 이라니까, 이 집사 떼면 교회 안 되는데 이거 어짤라고 하느냐고. ‘아이구 내가 그거 집사 그래도 안 떼면 나는 여기 목회 안 할랍니다.’ 할 수 없어 집사를 다 떼버렸어.

집사 떼니까 그 부자들이 ‘저게 와 가지고 지금 저 뭐 소문에 부자 조사라 하더니마는 이제 제까짓 게 그냥 견디는가 보자.’ 그전에 조사는 어떻게 괴롭혀 놨는지 조사 부인은 항상 바느질 품들고 또 양식 꾸러 돌아다니고 그래 살았어, 요것들이 돈 가지고 쫄랑쫄랑 근근히 연명만 하구로 요래 내 주고 돈 안 내고 이라기 때문에. 그랬는데 네가 그만 그래 집사를 떼놓으니까 ‘보자, 제까짓 게 인제 굶으면 뒤에 항복 안 하는가 보자.’ 이랬다 말이오.

이랬는데, 그래 다 떼고 뭐 ‘너거 연보하기 싫거든 마라. 너거 복받기 위해 연보하는 것이지 뭐 조사 위해서 연보하지 마라.’ 이래 놨는데, 추수감사절 지켰더니마는 그전에는 보리가 몇 가마니밖에는 안 됐는데 자꾸 보리가 들어오는데 들어오는데 창고에 차고 창고 밖에 예배당에 몇 가마니 재 버렸어. 그 창고가 그뭐 그리 크지는 안하지마는 그래도 창고에 보리가 꽉 한 창고 재고 난 다음에 그랬어. 그 교회 생긴 이후로 그렇게 맥추감사 연보가 나온 일 없어. 이래 놓으니까 그만 그 맥추감사 보리 내 가지고 또 터도 더 샀지 또 그거 가지고서 뭐 암만 먹어도 남아요. 그래 가지고서 배부르게 먹었어.

주를 위해서 물질을 바친 자는 물질에 곤고 안 하고, 생명 바친 자는 생명이 튼튼하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주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 자는 산다” 이랬어.

이거 주를 위해서 바친 거는 자꾸 여러 배 백 배로 온다는 이것을 믿으면 되는데 안 믿기 때문에 일이 안 되는 거라.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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