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이 절개

 

1987. 7. 21. 새벽 (화)

 

본문:베드로후서 3장 10절∼14절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우리가 이번 주간은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준비하는 주간으로 그렇게 정하고 우리 각자들이 다 힘쓰고 있습니다. 그래도 새벽기도 나오는 사람은 계속 경고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것이고 그만 새벽기도 못 나오는 그런 사람들은 다는 아니지마는 세상에 빠져 가지고서 정신없이 지내면 앞으로 큰 낭파를 당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은 결혼한 사람과 독신으로 있는 사람이 다른 것은 결혼한 사람은 아무래도 마음이 나누어지게 되고, 나누어지기 쉽고, 뭐 결혼한 사람이라고 다 나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제일 원만하고 온전한 그 신앙 행위는 결혼 생활에서 됩니다. 그래서 에녹은 삼백 년 동안 자녀를 낳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했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그는 결혼 생활 해도 마음을 나누지 안하고 다 하나님에게 기울였지마는 일반 사람들은 나뉘기가 쉽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여러가지 환경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 환경을 다스리고 지켜야 되는데 그게 에덴동산인데, 환경이 우리 에덴동산인데, 다스리고 지켜야 되는데 환경을 다스리지 못하고 환경에게 다스림을 받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무슨 사건 만나면, 물론 그 사건이야 하나님의 뜻대로 대개는 처리하겠지요. 또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으로 더불어 대화하는 것이나 상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대로 서로 대화하고 또 모든 것을 경영하고 처결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 일을 그래 한다 할지라도 에녹같이 하나님과 동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동행은 어떤 게 동행인고 하니 우리가 귀로 접하는 것이나, 눈으로 접하는 것이나, 또 입으로 접하는 것이나, 모든 수족으로 피부로 모든 것을 접할 때에 주님과 함께 접해서 주님 잊어버리지 안하고 주님과 함께 접하는 그것이 동행이요, 또 주님으로 인하여 사는 것은 그런 것들로 인해서 내가 언행심사가 시발하지 안하고 움직이지 안하고 주님으로 인하여서 움직여지는 것이 그것이 주님으로 인하여 사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 생활이 얼마나 이게 어려운지 모릅니다.

하다 보면 그만 사람하고 둘이 얘기하고, 사건 보고 사건에 관해서 생각하고, 사건 생각하는 것보다 사람 접하는 것보다 주님과 나와의 하나돼서 동행하고 주님에게 접하는 그것이 먼저 돼야 될 터인데 우리는 대개는 먼저 되기가 어렵고 그만 먼저 되지 못하고 자기가 먼저 사람을 접하든지 사물을 접하든지 자기 현실 접하고 난 다음에 주님을 불러댑니다.

접하고 나서 주님 앞에 ‘이것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이렇게 묻기 때문에 제가 앞서 저질러는 놓고 그라고 난 다음에 주님에게 이제 묻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을 그저 하나의 방청으로 세우고 하나의 고문으로 세울지라도 주관은 전부 제가 주관된 생활입니다. 이래서, 에녹은 하나님과 삼백 년 동안 자녀를 낳으면서 그렇게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꾸 마음을 이걸 연습해서 내 마음을 내가 자유하는 이 사람이 되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이래서 안 믿는 사람들이 조심한다 그말은 마음을 볼끈 붙들고 살라 그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피와 살을 먹는 자는 나로 인하여 살리라” 하는 이 말씀은 전부가 주님으로 시발되는 걸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많은 연습 가운데에 되는데 연습 중에도 어려서 모태로부터 신앙 생활하고 또 어려서 주일학교 다니면서 이래 신앙 생활한 그 사람들은 좋은 점은 어떤 점이 좋은 점이냐 하면 이 악성의 그 생활을 많이 하지 안했습니다. 자기 중심의 생활이 많기는 많지마는 그래도 나이가 많아 장성해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에 비하면 악성의 그 모든 성장이, 악성의 성장이 어립니다, 거게 늘 방해를 받기 때문에. 또 악습의 성장이 어립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은 악성의 성장과 악습의 성장이 어떻게 장성해 놨는지? 이래서 마음에 자기가 주님과 동행하고 또 주님으로 인해서 사는 이 생활을 할라고 결심해도 자기도 모르게 그만 삐뚤어져 가지고서 악성 악습의 생활로서 악령 소속이 되고 마는 것을 얼마든지 봅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모태로부터 믿든지 그리 안 하면 주일학교 때부터 믿든지 그런 사람은 그런 그 악성 악습의 그 성장이 기회가 없기 때문에 어립니다.

어리고 약하기 때문에 이기기도 쉽고 그 정복하고 변화시키기가 아주 쉽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메어 교수는 저를 만나 가지고서 묻기를 ‘여기 서부교회는 이 모든 많은 학생들이 있는데 이 학생들의 일반 사회 교육을 어떻게 시키느냐? 교육 시설이 따로 되어 있느냐? 그러면 일반 불신자들이 시설해 놓은 학교에다 보내 가지고서 공부를 시키느냐?’ 하는 그것을 묻습디다. 그래 뭐 우리 나라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고 또 약간 그런 거 있기는 있는데 아직까지는 그것이 별 효력을 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어릴 때부터 이 세상하고 투쟁 생활 하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전투 생활이다. 악령 악성 악습으로 더불어 싸우는 옛사람으로 더불어 싸우는 그런 생활을 벌써 어릴 때부터 싸우지 안하고는 안 될 그런 환경 속에서 연단받기 때문에 그면에는 아주 오히려 강한 그런 점이 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만일 6 5와 같은 그런 어떤 일, 월남이나 캄보디아나 그런 데와 같이 그런 비참한 공산화되면 아마 순교할 숫자는 우리 주일학교에 제일 숫자가 많으리라 그렇게 제가 본다고, 제가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뭐 그 아이들은 두말 할 것 없이 그라면 순교하고, 그 어리니까 장기간은 모르지마는 현재로서는 다 순교한다면 뭐 순교에 나설 그런 아이들이 장년반보다 많고 제일 노인들이 적을 것이고 그렇게 차차 차차 그렇게 되지 않느냐 그런 것을 말을 했습니다.

했는데, 그분이 말하는 것은 그 말은 똑똑히 서로 그렇게 통하지 안했지마는 어릴 때부터 신앙 행위를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인화, 다시 말하면 피와 성령과 진리로, 그분은 말은 그래 안 하지마는 중생된 새사람으로 성장되는 것이 거게서는 아주 성장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래서 아무래도 교육 시설을 따로 믿는 사람들만 해 놓고서 한다고.

그뭐 국민학교는 다, 우리로 말하면 국민학교는 다 그래 하고 중학교도 다 그래 하고 고등학교까지 된 데도 있고 그거는 또 자본이 모자라 못 한 데도 있고 어떤 데는 대학 시설까지 믿는 사람들은 따로 학교를 세워 놓고서 그렇게 교육하는 그것이 그 아이들을 참 예수 믿는 사람 만드는 데에 어떻게 일반하고 하니까 어렵고 이래서 따로 구별해 가지고서 양육한다 하는 그런 말 합디다.

그런 말 하는데 그 말을 제가 들을 때에 참 과연 그러하다. 이 전투력은 강해서 하지마는 그 시간이 자꾸 옛사람으로 접하고 살고 생각하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자꾸 옛사람으로 자라지 이 새사람으로 자란 그런 기회가 적기 때문에 새사람화되는 그 양이 적다 하는 그것을 저도 느끼고 과연 그 나라가 종교 선진국이요 참 오랫 동안 통계에서 아무래도 그게 낫기 때문에 그래 한다는 그것을 제가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마음과 몸인데, 우리 영은 말할 것 없고. 우리가 마음으로나 몸으로나 신앙에 관한 일을 할 때에는, 대구에서 뭐라고 배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도리를 이렇게 깨달아서 읽는 것, 새로 깨닫는 건 놀랄 만치 새로 깨닫는 것, 새로 깨닫는 것은 몇 가지가 합해 가지고 우리에게 깨닫도록 해 준다고 했습니까? 예, 일곱 가지가 합해 가지고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뭐 우리 이 마음이 성경을 읽고 싶어서 읽고 또 신앙 생활을 시작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고 벌써 우리 마음에까지 오는 데에는 많은 순서를 거쳐 가지고서 오게 됩니다.

그러면 제일 첫 순서가 뭐라 했습니까? 성부, 성자, 성령, 또? 중생된 영, 또? 틀렸지? 자, 새로 셉시다. 또? 처음에는? 성부, 또? 성자, 또? 성령, 또? 거기가 틀린 것 같은데. 진리, 또? 중생된 영, 또? 선지 사도 모든 성도들의 그 협력, 또? 만물의 그 협력. 그라면 몇 가지입니까? 녜, 요 일곱 가지가 합해 가지고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도를 알리고 또 사모하게 만들고 그렇게 가지도록 그렇게 합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 종교와는 아주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순서로 나타나는 그 순서의 예정을 우리 구속 위해서 하셨고 또 창조도 우리 구속 위해서 하셔서 이 모든 순서나 이 모든 존재들이 우리 예수 믿어 구원 얻는 일을 위해서 그들이 다 이용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고 다 역사하셔 가지고서 결과적으로 이용이 되도록 그렇게 협조해 가지고서 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는 건데 중요한 것이 뭐이냐? 우리 주관에서는 영은 아예 성령으로 더불어 하나가 돼 가지고 있고 이제 우리 구원은 이 마음과 몸의 구원, 마음과 몸의 구원이요 또 그다음에는 이 모든 사물 구원입니다. “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그렇게 말했고 “너희의 냉수 한 그릇의 수고도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는 그런 것은 다 행위를 말한 것입니다. 행위의 구원과 모든 물질의 구원 그보다도 앞서 있는 것은 우리 몸의 구원 우리 마음의 구원, 이러기 때문에 우리 마음과 우리 몸을 그저 이 주님의 구속에다가 자꾸 기울여서 그리 붙여 두는 게 좋습니다. 자꾸 우리의 구원을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래서 “네가 만일 그리스도로 더불어 다시 살리움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우편에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랬습니다.

우리 마음을 자꾸만 거게다 기울여서 이래 하는 것이 우리가 성화되는 데에 이 악령 악성으로 자라는 그것이 자라지 못하고 잡초 같은 그것이 자라지 못하고 이제 곡식과 같은 피와 성령과 진리로 된 새사람으로 자라가는 그것이 자꾸 자라가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대로 우리 마음을 나누지 말고 그리 외쪽으로 그리만 마구 기울이는 것이 그것이 좋습니다.

혹 마귀란 놈이 자꾸 유혹 주는 것은 ‘그렇게 그저 주님과 주님이 주신 우리의 구원 이것만 생각해서 주님에게만 피동이 된다면은 우리 일은 어떻게 하고? 우리 모든 당면된 우리 책임과 의무와 자기의 직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고?’ 이렇게 마귀란 놈이 유혹을 줍니다. 그러나 그런 염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분에게 피동되면은 뭐입니까? 그분에게 피동되면 전지에 피동이요 전능에 피동이요 주권자에게 피동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그의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그 사람의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마음을 어짜든지 “위엣 것을 생각하라” 네 마음을 다해서 그것 생각해라. 목숨 다해서 생각해라. 힘 다해서 생각해라. 뜻을 다하라 말은 모든 계획이나 모든 경영을 다 거게다가 기울이라 그말이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 살이는 어떻게 하고?’ 마귀란 놈이 자꾸 요렇게 유혹을 하지마는 우리가 신앙 경험으로, 성경도 그렇게 말해 놨고 또 우리가 신앙 경험으로 이렇게 보면 믿음이 좀 나을 때에는 한 시간 일하는 것이 믿음 없을 때에 뭐 일 년 일하는 것보다 더 합니다. 왜? 그 요령을 알아서 필요 있는 일을 하고 필요 없는 일을 안 하기 때문에 재를 저지르지 안하니까.

사람이 못사는 것은 일을 안 해서 못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부지런히 해야 돼, 근검이 필요하다, 근검이 필요하다는 것은 어느 범위 내에서 어느 면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 사람이 망하는 것은 다 근검 때문에 망합니다. 부지런해서 망합니다. 게을해 망하는 게 아니라 부지런해서 망하요. 안 할 일을 해서 다 망하는 것이지 할 일만 하면 뭐, 할 일만 하면 할 일이 없어. 얼마든지 성경 보고 기도하고 하나님 섬기고 얼마든지 할 수 있어. 그러면 하나님이 복 주심으로서 해결할라면 되지마는 자기의 노력으로 할라 하면 죽자껏 해 봤자 안 돼.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면 된다는 요것을 자꾸 듣고 읽고 해서 믿어서 그 사람이 벌써 자기의 마음과 몸을 주님에게 아낌 없이 다 기울이는 게 성공이다, 어짜든지 거게다가 기울여서 주님에게만 다 바쳐서 이렇게 사는 것이 성공이다 하는 요것을 확실한 지식으로 가진 사람은 참 복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못 해도 밤이나 낮이나 자기 마음이나 생각이나 모든 것을 주님에게 기울이라고 애를 쓰고 또 거게 기울여 가지고서 자기가 신앙 경험과 체험에서 딴데 기울이는 것보다 거게 기울이는 것이 모든 세상일도 잘되고 모든 다른 사람에게 대한 일이나 자기 대한 일이나 그 일이 잘된다는 것을 확실히 경험하고 체험한 사람이라야 그 일을 안심하고 담대히 나아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은 하나님의 이 객관 지식, 하나님의 지식을 자기가 가지는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자기에게 증거해 주는 그런 지식도 자기에게 필요합니다.

그러나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영감의 지식이 제일 중요하고 그다음에는 무슨 지식이 있나? 자기의 경험의 지식 체험의 지식이 둘째로 중요하고 그다음에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 통계의 지식이 자기에게 필요하나 그것은 참고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경험의 체험의 지식은 자기에 자기 지식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 지식 다음으로 자기를 주도하는 힘이 강합니다.

그래서 요번 주간은 어짜든지 예수님의 재림 준비에 자꾸 마음을 기울입시다.

예수님의 재림 준비, 신구약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을 총괄한다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이 교훈이 십분의 칠은 됩니다. 전부 예수님 재림 맞이할 준비입니다, 재림에 대한 준비.

이러기 때문에 요번 주간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우리가 전심 전력을 기울여야 하겠는데 기울이는지 안 기울이는지 하는 그것은 자꾸 열매를 보아서, “나무를 모르거든 열매를 보아서 알라” 그 결과를 보아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재림을 확실히 믿는다고 하면은 필연적으로 그 사람의 생활에는 무슨 열매가 맺겠습니까? 거룩한 행실과 경건에 주력하게 됩니다. 왜? 불심판 가지고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그 준비는 주님이 정해 놓기를 노아 때는 방주 만드는 것으로써 심판을 이기는 유일한 준비로 정했지마는 지금은 거룩과 경건으로서 이 불심판 통과하는 유일한 법칙으로 우리에게 정해 주셨다 말이오.

유일한 법칙으로 방식으로 정해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을 확실히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은 자기는 믿는 줄로 알고 속기 쉽다 말이오. 믿느냐 안 믿느냐? 믿으면 필연적의 결과가 있으니 뭐이냐? 거룩과 경건에 주력하게 된다.

그러면 거룩과 경건을 내가 어느 정도 마련해 가지고 있느냐? 그것의 표시는, 표시판. 그 결과는 뭐입니까? 거룩과 경건을 내가 어느 정도 준비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그것은 필연적으로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까? 녜,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 되어집니다, 필연적으로.

그러면 그렇게 참으로 내 마음이나 소망이나 모든 것이 거게 기울어져 가지고서 거게다가 힘을 쓰는 사람이 되어 있나 안 있나 그 결과는 무엇을 보아서 아느냐? 무엇을 보아서 압니까? 녜, 모든 기뻐하고 근심하는 것이 거게 있습니다 기뻐하고 근심하는 것이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자기 기쁨도 거게 있고 또 걱정도 거게 있습니다.

다른 것이 뭐, 지금 어떤 학교에 입학할라 하는 그 학생이 근심과 기쁨은 어데 있습니까? 자기는 그 준비하는, 준비해서 그 입학하는 데 거게 지금 낙제되면 어짤까 근심은 거게 있을 것이고, 또 자기의 주력은 낙제 안 하도록 익힌 것도 또 익혀보고 또 익혀보고 자꾸 거듭거듭 익혀서 모든 것이 원만하게 준비가 되도록 그렇게 노력을 할 것입니다.

이러니까 거룩과 경건이 바로 됐나 안 됐나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자꾸 사모되고 바라보게 됩니다, 필연적으로. 이것도 말로 해 가지고는 몰라요.

그 비유를 했지요. 자기 남편을 지금 기다리고 있는데 그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 그 아내에게 자기의 정조를 뺏들라고서 환경에서 이래 가지고서 고문과 고형을 당하면서도 그 정조를 안 뺏기고 있는 그 사람이 고문과 고형을 당할수록이 그 마음은 어데 가 있겠습니까? 자꾸 자기 남편 오기를 고대하고 그저 꿈에도 낮에도 어서 남편 오기를 고대하고 전소망과 간절이 거게 있는 거 필연적이라. 이 거룩과 경건을 준비할라 하면은 꼭 정조와 같애. 거룩과 경건을 준비할라 하면은 이 세상은 거룩을 싫어해요. 주님 맞이하는 데에 흠없는 생활, 흠없는 생활 그걸 준비할라 하면은 이 세상은 예수님 맞이하는 데에, 예수님 맞이하는 데 방해되고 못쓸 것 그것을 세상이 다 주장하고 좋아하고 있다 말이오. 좋아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아니면 저거가 뺏겨. 그래서 요한복음 15장에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세상에 속했으면 세상이 저희 것이라고 알아서 너희를 친절히 하고 사랑하지마는 너거를 내가 세상에서 불러내서 세상에서 나왔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들을 미워한다. 너희들을 미워하는 것은 너희들보다 나를 먼저 미워함이요 나를 미워하는 것은 나보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를 미워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된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거룩 준비하는 것은 세상하고 나하고 떨어지는 것이요 또 경건을 준비하는 것은 세상 저 좋도록 하는 것이 주님 좋도록 하는 이걸로 전부 주력하니까 그들과 떨어질 수밖에 없어. 떨어지니까 그들에게는 욕 얻어먹고 박해당하고 매 맞고 여러가지 곤욕을 당한다 말이오.

그렇지 않습니까? 춘향전에 보면은 원이 춘향이를 욕심을 내 가지고서 달래다가 꾀우다가 해도 그 정조를 양보하지 안하니까 오만 고통을 뭐 시킨다 말이오. 오만 고통을 시킬수록이 자꾸 자기 남편 이도령이 더 사모돼지고 또 기달펴지고 전부가 그만 죽고 살고 거게 마음이 다 기울여졌을 거라. 그게 필연적이라 말이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거룩과 경건을 마련하게 되면은 자연히 세상이 멀어지고 자기 마음은 주님의 재림과 또 주님이 모든 것을 심판하실 그 불심판 거기에 전부가 기울어져 있습니다. 소망도 거게 있고, 사모도 거게 있고, 기쁨도 거게 있고, 자기의 모든 노력도 거게 있고, 자기의 행복도 거기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해지는 이게 된다 말이오. 이러니까 그게 되나 안 되나 우리가 경험해 봐요.

어제 장례한 그 아이는 내가 잠깐 가 보니까 그 마음이 전부 하늘에 있어. 하늘에 있기 때문에 땅에 있는 것은 하나도 생각지 않고 하늘에 있는 것, 또 하늘에 있는 것들만 좋아해요. 사람도 그 사람이 와서 하늘에 있는 요소가 조금 있으면 조금 좋아하고 하늘에 있는 요소가 하나도 없으면 필요가 없다는 거라. 또 하늘에 있는 것만 많이 있는 사람은 또 좋아하고.

그라다가 갔는데 뭐 찬송을 평소에 잘 부른다고서 하는데 그 찬송을 누가 듣고 와서 어제 나한테 한번 보여줍디다. 보여 주는데 그게 하늘의 소망 찬송이라.

하늘에 어서 가고 싶다는 거 그 소망 찬송이라.

이거 모양으로 우리가 예수님이 구름타고 불심판 가지고 오시는 이 일에 대해서 거룩과 경건을 준비하는 묘하게 하나님이 그 방편을 정했습니다. 거룩과 경건을 준비하게 되면은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고 간절히 사모하게 됩니다. 필연적으로 그렇게 돼 버려. 필연적으로 그렇게 돼요, 그만.

그러니까 그 사람이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 그게 진짜냐 가짜냐 하는 그것은 또 뭘 보아 아느냐? 그 필연적인 결과를 보고 알아.

필연적인 결과가 뭐이냐 하면은 자기의 기쁨도 있고 근심도 거게 있고, 기쁨도 거기 있고. 거기 것이 뭐이 됐으면 기쁘고, 거기 것이 뭐 잘못됐을까 싶어서 걱정도 거게 있고, 근심과 기쁨이 거게 있고 또 자기가 ‘해 보자’ 하는, `해 보자' 하는 그 열심의 노력도 거게 있고 ‘이게 틀렸다. 어서 고쳐야 되겠다.’ 고칠 것도 거게 있고, 고치는 노력이나 이제 다시 조성하는 노력이 다 거게 있고, 근심도 거게 있고, 기쁨도 거게 있어.

근심도 거게 있고 기쁨도 거게 있는 그것이 참 진짜냐 가짜냐? 그것은 뭐이냐? 자기의 전부 위엣 것을 찾는다고 그 소망이 하늘나라 소망, 하늘나라 소망,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그것이 진짜로 돼 가지고 있으면은 그 사람은 전부 땅에 사나 하늘에 살아. 소망이 하늘나라 것뿐이고 땅의 것은 아무 소망이 없어.

땅에는 소망이 하나도 없고 하늘에 소망만 자꾸 가지게 돼요.

내가 언제 우리 ○장로님이 자기 부인하고 둘이 말하며 자기 부인이 뭐 위로해 준다고 가서 ‘우리는 뭐 하늘에 소망 가지고 땅의 것은 다 없어지고 지나갈 것들이기 때문에 고생해 봤자 수치가 돼 봤자 실패돼 봤자 잠깐이 아닙니까? 하늘이 영원한 것 아닙니까?’ 이 위로해 준다고 그라니까 이 ○장로님이 듣다가 좋아서 ‘여보 당신이 어떻게 하늘의 소망을 가지요?’ 기뻐 아주 즐거워하더라고.

하늘에 소망을 가지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즐거웠는데 벌써 옥에서 나와 가지고 속화가 돼서 아마 하늘에 소망 가진 것이 흐려지지 않느냐, 많이 흐려졌소? 안 흐려졌어? 흐려졌어? 죽어도 흐리지 안해야 돼. 그게 제일이라. 죽어도 흐리지 안해야 돼.

이래서 보면, 그만 그 사람은 땅에 있으나 항상 소망은 하늘에 있고 그 사람 생활도 하늘에 생활이고 그만 그 사람의 모든 생활이나 전체가 사람들이 이해 못 하는 생활이라. 세상이 이해 못 하는 생활.

‘저 사람 왜 저렇게 천치같이 하는가?’ 왜? 그 사람이 귀하게 보는 것을 세상이 천하게 보는 것이지, 그 사람이 걱정하는 것 세상은 아무 그까짓 거 무슨 일 있느냐 그렇지, 그 사람이 두려워하는 거는 세상이 두려워하지 안하는 것이지, 세상과 정반대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말이오. 세상은 마귀에게 속하고 그는 하나님께 속하고, 세상은 사망이고 그는 영생하는 생명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어.

이래서 요것을 자꾸 “열매를 보아서 나무를 안다” 열매를 보아서 나무를 안다, 그 결과를 보아서 그 원인을 알 수 있다 하는 요 말씀대로 어짜든지 내가 예수님의 재림을 참 믿느냐? 예수님의 재림이 있다 없다, 믿느냐 안 믿느냐? 믿으면 필연적으로 그 유일한 준비의 법칙대로 준비가 됩니다.

준비가 되면 이 준비는 이상해요. 이 준비는 준비 하면은 그만 그 마음과 생각과 뜻이 전부 예수님의 재림에 막 기울어지게 된다 말이오. 준비는 땅에서 하는데 준비하면 자꾸 자기의 사모도 간절도 고대도 전부 주님의 재림으로 막 기울어지게 돼 버려. 이상하게 주님이 그렇게 만들어 놨어. 거룩과 경건을 할라 하면 그만 그렇게 돼져.

왜? 세상이 거룩과 경건에 정반대거든. 이러니까 거룩과 경건을 준비하고 보니까 세상과는 정이 떠지고 세상에는 배척을 당하니까 세상은 쓸쓸한 빈들판이라.

그러니까 참 자꾸 눈물이 나와. 눈물이 나오는 것은 세상에서 서러우니까 눈물이 나오고 주님 사모하니까 서러우니까 사모돼서 눈물 나오고 자꾸 이리 돼져.

그래서 어짜든지 요번 주간에는 예수님의 재림 준비에 대해서 충분한 준비를 합시다. 그뭐 우리가 그냥 그것만 가지고 구원에 대해서 하는 것 아니니까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이 준비하고 또 공부하면서도 이 준비하고, 그게 진짜 영생하는 생명입니다. 영생하는 생활이요, 영생하는 생활.

세상에 모든 일을 이 구원 준비 위해서 이 구원 준비를 거게서 하면서 하면은 구원 준비는 알맹이요 구원 준비한 자기 공부한 학교서 공부하는, 또 사업 하는 거 그거는 뭐라고 했습니까? 그거는 뭐요? 뭐? 껍데기? 어, 배설물. 그거는 배설물이야, 배설물. 배설물은 음식에 대한 배설물은 대소변이 배설물입니다.

이렇게, 그게 참 재미 있는 것이라. 그러면 자기 생활이 종일 그러니까 하루 종일 일하는데 ‘나는 이 일이 팔십프로가 됐다 백프로가 됐다’ 그 기쁨이 아니라.

성도의 기쁨은 그 기쁨이 아니라. ‘오늘 이 일 하는 데에서 내가 어떠냐? 이 일이 낭파가 돼도 그 준비 했다. 또 이 일을 성공하면서 준비 했다.’ 어짜든지 자기의 성패는 뭐이냐 하면 땅에 있는 것이 자기의 성패가 아니고 이제 주님으로 말미암은 소망, 열한 가지 이 구속을 입고 산 것, 이 구속으로 산 것, 구속 생활 한 것.

구속 생활을 어데 했는가? 직장에서 구속 생활 했고, 감옥에서 구속 생활 했고, 욕 얻어먹으면서 구속 생활 했고, 칭찬받으며 구속 생활 했고, 이 모든 그 껍데기 속에서 알맹이 구속 생활이 되지 안했으면 그것 다 헛일입니다. 그러니까 한 자리에서 둘이 있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해. 하나는 구속 생활 했고 하나는 껍데기 생활 했어.

그런데 그런 말이 있어요. 내가 오늘 아침 내려오니까 그말이 문뜩 생각해져.

시골에서는 게을부리는 사람에게 ‘야 사람들아, 하루 벌어 가지고서 겨울에 열흘 먹는다.’ 하루 벌어 가지고 겨울에 열흘 먹는다. 하루 벌어 가지고서 겨울에 열흘 먹고 산다. 지금은 뭐 겨울에도 하지마는 그때는 겨울에 일을 못 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어요.

이랬는데 우리는 이 재세간에 한 시간 벌어 가지고 한 시간 신앙 생활 해 가지고서 얼마나 삽니까? 영원히 삽니다. 이거는 뭐 얼마나 이 세상이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묘한 세상 주시고 아름다운 세상 주셨다’고서 말씀했는데 이 세상 생활, 박윤선 목사님이 ‘지극히 작은 의 하나가 영원 무궁한 세계에 얼마나 큰 양을 차지하는지 우리는 계산 못한다’ 하는 그런 뜻으로 말한다는 말을 내가 직접은 못 들었는데 간접으로 내가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 세상살이 하루라 하는 것은 참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하루 생활 그것이 영원 무궁에 뭐 억억만 년이 아니라 얼마나 큰 걸 한지 모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루 생활 살고서 시간표를 정해 놓고서 ‘오늘 이거는 공이다.

오늘 요면은 공이다. 요번은 성공이다.’ 이래 가지고서 시간표를 정해 가지고서 ‘요면은 오늘 공쳤다. 요면은 성공했다. 요면은 오십프로 됐다. 요면은 팔십프로 됐다. 요면은 찍해야 한 일프로밖에 못 했다.’ 요렇게 시간표를 정해 가지고서 그렇게 생활을 합니다.

제가 여기 처음에 와서는 그걸 가지고서 여러 사람들에게 많이 좀 연습을 시키다가 이제는 이거 하지 말고 이거는 인제 없애고 자기 머리 속에 넣어놓고 하루 생활 하는 가운데에, 그만 주님으로 인하여 살지 않은 거는 다 죽은 것입니다.

이제는 이제 모든 것이 다 그래도 조금씩 성장됐으니까 ‘내가 오늘 주님으로 인해 살았나?’ 말 하나도 `주님으로 인해 말하나?’ 내가 설교하면서도 ‘주님으로 인해서 설교하나? 주님과 동행해서 설교하나?’ 주님과 동행, 그러기 때문에 에녹은 하나님으로 더불어 동행했어. 하나님으로 동행했습니다. 또 엘리야는 전생활 보면은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하라 하니 나는 이렇게 하는데 너는 여게 있거라.’ 그 엘리야 전생활은 하나님에게 순종 생활이라. 하나님이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했어. 에녹은 동행 생활이요 엘리야는 순종 생활이라.

동행 생활과 순종 생활은 다 영생이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하루 삼십 분 기도하는 것 이거 잊어버리지 말고 꼭 계속해야 됩니다. 앞으로 큰일 납니다.

또 지하철 공사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그 만일 툭 금이나 나가버리는 날이면 불안하고 우리 이거 예수님 재림도 가까왔는데 이거 지을라 하면 또 힘들어요, 뭐.

다른 사람은 예배당 잘 짓지마는 잘 짓거나 못 짓거나 예배 볼 장소만 있으면 돼.

그뭐 잘 지을 여가가 없어, 돈도 없을 뿐 아니라.

그라고 주일학교 공과는 이번에는 ‘회개 20가지’를 하겠습니다. ‘회개 20가지’ 하겠으니까 베껴 가지고서 자꾸 또 외워요. 인제 우리는 이거 뭐 아는 것이 필요 없고 암만 알아봤자 ‘예수님의 재림이 있다’ 그거 알아야 소용 없어.

내가 준비가 돼야 돼요. 실지로 준비가 돼야 되지 아는 게 아무 소용 없어.

그러니까 ‘회개 20가지’ 그것을 또 요번에 거석하면서 반사 선생님들이 꼭 그래서 20가지를 자기가 완전히 갖추어서 준비를 한 사람이 되도록 이렇게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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