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 덕

 

1986. 3. 13. 목새벽

 

본문:베드로후서 1장 3절∼11절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기한 능력으로」 신기한 능력이라 말은 우리들이 지식할 수 없는, 우리 지식을 초월한, 우리가 생각해도 이런 능력이 아닌가 아무리 그 능력을 우리가 크게 생각해도 그 능력의 실상의 큰 데에 가까이도 가지 못하는 인간 지식을 초월한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이라. 그러면, 여기 생명이라 말은 힘이라는 뜻을 가졌는데 이 생명은 무슨 힘인가! 하나님과 연결이 됨으로 하나님의 모든 능력이 믿는 자의 것이 되도록 그와 연결되어 그 무한한 능력이 자기의 것이 되게 되는 그 역사를 가리켜서 생명이라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경건에 속한 모든 것」 경건에 속한 것이라 말은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인데 하나님의 뜻인 그 법칙대로,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로 살되 하나님의 뜻인 그 진리의 법칙에 딱 들어맞게 하는 그것이 경건인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과 경건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자기가 은혜로 받아 가지고 자기 것으로 행동할 수 있고 살 수 있는 지극히 큰 은혜요 능력을 말합니다.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서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영광과 덕으로 불렀다’ 영광과 덕으로 불렀다 그말은 심히 온화한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마치 아직까지 해동이 안 됐는데 온상을 해 놓으면 그 온상 안은 은은하게, 밖은 차지마는서도 안에는 따셔서 식물들이 자라는 것처럼, 또 계란이나 이런 알들을 부화장에다 갖다가 놓으면 그 부화장에서 은은하게 따셔서 그것이 한 이십여 일 지나면은 그것이 차차차차 병아리가 돼 가지고 부활를 합니다. 그러나 온도라는 것이 차차 따셔져서 그 안에 있는 흰자와 노른자가 그것이 변화되어서 병아리로 부화돼 가지고 나올 수 있도록 그렇게 뜨뜻하게 온도로 부화되게 하는 그와 비슷한 그런 것을 가리켜서 ‘영광과 덕으로’ 그렇게 말합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하시는 그 일이 배어 나와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로 자기가 유익을 많이 본 사람들은 그분에게 대해서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영광으로 우리 구원을 주시는 것은 더 범위 넓게 마치 하나님께서, 아주 쌀쌀한 엄동 설한이 물러가고 따뜻한 봄이 오되 그 봄이 만일 속도가 조금 빠르게 되면은 그 모든 식물들과 모든 것은 다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봄이 오는 줄 모르게 은은하게 그렇게 날이 차차 따셔지므로 모든 식물들이 하나도 장애 없고 모든 곤충들이 하나도 병하지 안하고 다 생기를 얻고 성장하게 되는 그런 것을 영광이라, 영광이라 덕이라 말한 것입니다.

덕이라는 것은 마치 그릇에다가, 도가지에다가 물을 부을 때에 도가지에다가 물을 한 박지기 두 박지기 퍼다가 부어 가지고 도가지를 채우는 그게 아니고 그 독을 큰 못에나 바다에다가 담구니까 그 물이 흐뭇하이 들어와서 그 도가지에 하나 차는 거와같은 그런 것을 가려켜서 말합니다.

주위 환경에, 자체가 인식도 못 하는 그런 정도로 아주 그 은밀히 은은하게 해 가지고서그 은택이 상대방에게 가서 충만해지도록 하는 그런, 상대방을 아끼고 조금도 상하지 안하도록 그런 면으로 해서 은혜 베푸시는 그걸 가리켜서 영광과 덕으로 우리를 불렀다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 베푸시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촉감적으로 무슨 나타나게 이렇게 어떻게 되면은 우리가 많이 상할 터인데 상하지 안하도록 그렇게 하는 것을 가리켜서 영광과 덕으로 불렀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덕으로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그분을 차차 알도록 해 가지고서 우리 구원이 이루어지게 합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이라 하는 것은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약속인데 그 신구약 성경에는 어떤 약속이 나타나 있는가? 거게는 약속이 나타나기를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깨끗하심과 하나님의 그 전지 전능과 하나님이 우주와 영계를 다 통치하고 모든 것에 은혜를 베푸는 거와 같은 그런, 하나님과 꼭 같은 그런 실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대리할 수 있는 거게까지에 계약을 우리에게 맺어 주셨습니다.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정욕이라 하는 것은 자기 욕심입니다. 정욕이라 하는 것은 어떤 게 정욕인고 하니 자기 욕심이 정욕입니다. 자기 욕심. 자기 단독 욕심이 정욕이오. 그러면, 자기 욕심에는 다른 사람의 욕심도 되어지고 다른 사람의 유익도 되어지고 또 만물의 유익도 되어지고 피조물들의 유익만 될 게 아니라 창조주까지 좋아할 수 있는 그런 것이 돼야 되는데 이 정욕이라 하는 것은 그저 저만 좋고 또 그게 정욕이요, 또 일시만 좋고 영원이 좋지 않은 그런 것도 정욕이요, 또 크게 말하면 피조물들만 좋고 창조주는 좋지 않은 그게 다 정욕입니다. 창조주가 있기 때문에 피조물 저거들만 좋은 그런 욕심은 다 하나님이 완전히 멸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나라를 건설한 것은 첫째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좋아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는 그것이 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사람이 기뻐하고 좋아하고 또 사람이 기뻐하고 좋아할 뿐 아니라 하늘에 있는 모든 영물들이 기뻐하고 좋아하고 또 땅위에 있는 모든 만물들이 다 기뻐하고 좋아하는 이것이 뭐이냐 하면 이것이 성령의 소욕입니다. 이 정욕이라 하는 것은 성령의 소욕의 반대입니다.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욕심 삼아서 이 세상에 있는 것에는 유익된데 하늘나라에 손해가면은 그것은 다 정욕 행위입니다.

저는 좋지마는 다른 사람에게 손해가면 그것이 다 정욕 행위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소욕 행위는 창조주도 좋고 피조물도 좋고, 또 나도 좋고 다른 사람도 좋고, 지금도 좋고 장래도 좋고, 또 눈으로 보는 사람도 좋고 귀로 듣는 사람도 좋고, 또 여러 수천 년 후에 글자로 쓰여 있는 것을 보는 사람도 좋고 그것이 성령의 소욕입니다.

네가 근시자라 눈이 어두워서 멀게 길게 넓게 보지 못하고 네 시야가 좁아서 ‘요라면 좋겠다’ 해서 저만 알고 저만 좋은 거 고것이 제일 악입니다. 고것이 유황불 구렁텅이에 타되 제일 뜨거운 데 가서 탈 것입니다.

「정욕을 인하여」 네가 지금 욕심내고 있는 그것이 현재에 네게는 그것을 내가 좋은 줄 알지마는서도 다른 사람은 들으면 다 욕하고 조롱하고 좋아하지 않는다.

다 싫어하고 대적할 것이다. 또 네가 이 눈이 어두워서 지금은 좋지마는서도 네 장래는 생각하면 기가 막힐 것이다. 네가 살았을 때는 좋지마는서도 죽을 때는 생각하면 기가 막힐 것이다. 그런 것이 다 정욕의 행동인 것입니다.

성신의 소욕의 그것의 정반대로, 지금 좋은 거보다 또 하루가 더 지나가니까 더 좋고, 젊을 때 좋은 거보다 늙을 때는 더 좋고 또 살았을 때 좋은 거보다도 죽을 때는 더 좋고, 또 저만 좋은 게 아니라 저보다도 다른 사람은 더 좋고, 모든 것이 더 좋아하고, 더 유익이 되고, 또 피조물만 좋은 게 아니라 창조주는 더 좋아하시고 이렇게 되어지는 이것이 성령의 소욕입니다. 이 법이 있는데, 저만 아는 정욕의 육체의 소욕의 법이 그것이 설 것입니까? 그것이 유지가 되겠습니까? 이것은 모두 보는 면이 좁기 때문에 다 그런 것이라 그말이오.

양성원에 모두 공부를 하고 있는데 시야가 좁으면 안 돼. 언제든지 일방적으로 되면 안 돼. 전체를 봐야 돼. 이 세상에는 제일 큰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대국적이어야 돼. 무엇이든지 대국적이어야 된다 이래. 대국적이어야 된다. 큰 대(大)자 그 모든 대국적이어야 된다. 기독교는 그게 아니라. 대국적이 아니다.

전체적이어야 된다. 창조주와 피조물 전체적이어야 된다 하는 그것이 기독교라 말이오.

그래서, 과학이라 하는 것은 다 땅에 속한 것들인데 그런 것을 공부하면서, 과학을 공부하면서 이 창조주와 하늘에 속한 것 영원한 것을 한테 연관시켜 가지고서 ‘이거는 가치가 하루밖에 못 견디는데 이거는 영원히 견딘다. 이거는 국부적으로만 유익이 되지마는서도 이거는 전체적 유익이 된다’ 그런 것을 비교를 해 줘야 사람이 자라게 된다 그거요.

이 모두 긴장 완화라 긴장 완화라 요새는 그 말이 많이 있습니다. 긴장 완화가 되면 좋다 어쨌든지 긴장 완화만 위주합니다. 긴장이라 하는 그 긴장은 그라면 긴장은 나쁘다. 긴장만 없으면 된다. 긴장이 없어지면 다 행복이 되어진다. 긴장이 있어야 될 긴장도 있고 없어야 될 긴장도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긴장은 있어야 됩니다. 땅에 속한 긴장은 없어야 됩니다.

사람은 근심 없이 살아야 된다. 근심 없이 살아야 된다. 어떻게 근심 없이 살고 싶느냐? 근심 있게 살아야 된다. 근심 없게 살아야 된다. 무슨 말이냐, 그게? 하늘에 속한 근심은 있어야 되고 땅에 속한 근심은 없어야 된다. 하늘에 속한 근심을 가져 땅에 속한 근심이 없어지기까지 되어져야 된다 그거라 그말이오.

어제는 법을 공부하는데, 제가, 사학과를 가라, 공부를 하거들랑은 모든 과학에 속한, 자연에 속한 것들을 공부하는 거보다도 사학과를 가라, 또 법과를 가라 하는 그 말은 법과 가면 그거 가지고 돈벌이 하라 그말 아니오. 사학과에 가라 말은 인생을 제가 너무 인생의 범위를 좁혀 가지고서, 젊은 자는 젊음만 보고 또 늙은 자는 늙음만 보고 또 사람들이 자기만 보고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제 그 역사라 하는 것은 여러 수백 명이 지나간 그걸 수천 년 동안에 된 그걸 한 페이지에 기록해 가지고 우리에게 보여 준다 말이오.

이러니까, 시간적으로 이 공간적으로 모든 움직이는 활동적으로 너무 고거 범위를 좁게 보기 때문에 넓히 해서 수천 년 동안의 그 범위를 보면은 우는 자가 울지 않을 것이고 좋다고 교만해서 뒤로 우쭐하는 자가 우쭐하지 않을 것이요 또 슬퍼하는 자가 슬퍼하지 안할 것이라 그말이오. 그 전체를 보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인간 만사가 북마 옹이라 북쪽에 말 첨지와 같다. 그거 뭐 시간 없어 못 하는데 말을 잃어 버리느냐? 잃어 버리니까 와 가지고 모두 위로하면서 ‘이거 말을 잃어 버리다니 이거 참 이거 큰 손해 갔습니다. 이런 일이 어데 있겠습니까?’ 그라니까 그 주인은 하나도 슬퍼하지 안하고 웃고 있습니다. 또 그 순서 와 가지고서 ‘그 말이 한 마리가 나가 가지고서 여러 수십 마리를 데리고 들어왔으니까 참 큰 유익이 됐다’ 이라니까, ‘어떻게 많은 말이 왔다고 유익이라고 보느냐? 어떻게 말 한 마리가 없어졌다고 손해로 보느냐? 네 시야가 좁아서 그렇다.’ 나중에 좀 있으니까 그 말을 타고 아들이 돌아다니다가 그만 다리가 부러졌다 말이오. ‘아이고, 참, 그때 영감님이 한 마리가 말 여러 마리를 데리고 왔다고서 아주 복 있다 하니까 어찌 그걸 복이라고 생각하느냐 이라더니마는서도 그 말 타고 다니다가 아드님 다리가 부러지고 보니까 참 복이 없습니다.’ 이래 놨다 말이오. ‘어떻게 아들 다리 부러진 걸 화라고 생각하느냐?’ 이 영감 참 이상한 영감이로구나. 나중에 보니 전쟁이 일어났는데 전부 건강한 사람들은 다 데려다가 전쟁에 다 전사를 다 시켰는데 그 아들은 안 갔다 그말이오. ‘아이고 참 그때 그라더니마는서도 아들이 안 갔으니까 그게 참 복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시야가 좁다 그말이오.

좁은 사람이 저밖에 모르는 사람이 그 사람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 벌써 이야기하다가 저밖에 모르는 사람이면 불쌍한 사람으로 봐야 됩니다. 저밖에 모르고 일시밖에 몰라서, 그러기에, 권력을 탐하는 사람들이 대개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왜? 권불 십년이라. 권세는 십 년을 가지 안해. 권세를 가지다 보면은 월권하고 남용하기 쉽다 그거야. 사람은 좀 넒게 봐야 되는데 신구약 성경 말씀은 우리를 한없이 넓게 만든 것입니다. 넓게 만든 것이라. 고것이 얼굴이 뺀들하이 앵두색 모양으로 뺀들하이 예쁠 때만 봤지 고것이 좀 있으면 쭈굴쭈굴한 거는 보지를 못했다 그말이오. 그거까지 연관 시켜서 봐야 돼.

그러기에, 철학자들은 말하기를 갓난 아이의 울음 소리와 그 아기가 자라 가지고 늙어 죽어서 조문군이 와 가지고서, 문상하러 와 가지고 어이어이 우는 소리와 같이 동시에 본다 그말이오. 그게 철학자라. 그것은 세상에서도 고만치 좀 넓게 보는 거 기독자는 그거 가지고 안 돼. 기독자는 창조주로 하나님한테 영원까지를 봐야 돼. 시간으로 말하면 영원, 존재로 말하면 모든 존재, 이래야 우리의 모든 계획이나 모든 생활하는 움직임이 실패가 없지 어떤 구석에 끼여 있으면, 치우쳐 있으면 그는 망할 수밖에 없다 그거요.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거 뭐 하나님의 성품이라. 신의 성품이라 하니까, 신의 성품이라 요거 요래 놨는데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요거. 하나님의 성품. 신의 성품이라 말은 하나님의 성품. 이 신자는 하나님 신(神)자를 이래 해 놨다 그거요.

그러면 하나님같이 우리가 되는 거라. 하나님의 속성같이 우리 속성이 돼서 하나님같이 되는 거라. 「하였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우리가 힘써야 돼요.

어제 법을 공부하는데 내가 또 들으니까, 법에 대해서 뭐 법이 이렇다 까짓 거 뭐 육법 전서를 다 말한다고 해도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알기 때문에, 법은 그 생명이 어데 있느냐 하면은 생명이 권력에 있습니다. 생명이 권세에 있어. 아무리 좋은 법이라도 그만 그 법에, 뒤에 권세라는 실력이 따르지 않으면, 힘이 따르지 안하면, 법에 힘이 따르지 않으면 그만 그 법은 죽은 법이라. 좋으면 무슨 소용 있소? 힘이 없으면 악법이라도 그 악법이 아무리 선량한 법이라도 다 까뭉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데, 세상법은 그 배경인 힘이 극히 제한돼 있어. 그러기 때문에 그 힘은 끊어질 때가 있다 그말이오. 그런고로, 힘이라는 것이 다 죽은 힘이기 때문에 세상법은 다 죽은 법이라 하는 고것을 가르쳐 줘야 돼. 세상법은 다 죽은 법이라.

그러면 하나님의 법은 이거, 그거는 알파와 오메가라, 그 나라는 알파와 오메가라, 영영하다 그말이오. 그 힘이 영영하기 때문에 그 법은 산 법이라. 그러면, 세상법은 죽은 법이라고 이제 죽은 법으로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하나님 법은 산 법이라 말이오. 요게 중요하다 그말이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믿음에 덕을」 이 믿음이라는 말은 하나님에게 대한 것을 가리켜서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대한 것. 덕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에게 대한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에게 대해서 아무리 그 사람이 열심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람에게, 하나님이 해동을 시켜면 해동하는 온기가 저 구석에 있는 모든 얼음을 녹히고 저 구석 속 물 속에 있는 그런 것도 새움을 틔워 가지고 나게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향한 것이 사람에게 그렇게 배어 들어가도록 덕이 되어서, 덕이 되어서, 그들에게 직접적이 아니고 마찰되지 안하고 온화하게 이렇게, 봄 바람이 불어와 가지고서 이제 그 얼음 속에 있는 것을 갑자기 그만한 온도를 해 버리면 그만 다 죽어 버린다 말이오. 서서히 이거 상하지 안하도록 이렇게 배어 들어가도록 해 가지고서 봄이 와서 모든 식물들에게 새움을 트게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향한 내 열심이 그 모든 사람들에게 은은하게 이렇게, 마찰되지 안하고 배어 들어가 가지고 그들에게 구원이 되도록 하는 그것이 덕이라 그말이오.

이랬는데 어제 내가 들으니까, 양성원 학생들 산기도 가라고 했더니마는서도 그래 여기 한번 처음에 이제 시작하니까 수원지 대신 공원으로 산기도를 간다던가 뭐 꽃마을로 간다던가 간다 해. 그거 좋다고 이랬다 말이오. 이랬는데 말 들으니까 여게서 나설 때부터 마구 뭐 고함을 지르기 때문에 뭐 무슨 난리났나 굿왔나 싶어서 모두 우 모아드니까 거기 가는 사람들이 막 여게서 노래를 불러. 그거는 찬송이 아니라 노래야. 노래를 불러. 자기 흥분에 겨워서 재미로 흥으로 하는 그거는 노래지 찬송이 아니라. 찬송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그렇게 찬양합니까? 스룹바벨 성전을 지을 때에 그때 기초 닦으며 노래 부른 것은 그것은 모든 잔인으로 이와같이 지금 학대해 가지고 학정에 있다가 해방을 당했으니까 그때 노래 불렀는데 노래만 불렀으면 그 노래가 저주받습니다. 울음소리와 노래 소리가 막 섞였기 때문에 뭐인지 모른다 그말이오. 그거는 진정 자기 인격에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서 감격하는 거라.

이런데 뭐 노래를 그렇게 불러서 모든 사람이 대단히 놀랬을 거라, 놀래서 아마 저 집에서는 그럴 거라. 저 미친놈들 저놈들 예수 믿는 놈들 저놈을 밉상스럽워서 이 집을 팔고 가면 싶으다고서 그래 가지고 여기 귀퉁이 하나는 팔고 갔어요.

팔고 갔는데 그거 예수 믿는 사람이 사 가지고 왔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 얼마나 욕을 했다고서. 아이고, 여기 나 이 집 판다고. 왜 팔라 하느냐? 아이구 예수 믿는 놈들 밉상스러워서. 미친놈들. 이 미쳤다 소리를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그거야. 그것을 좀 절제해서 그들에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르다. 사람들은 저래야 되겠다. 암만해도 사람은 저 사람이 참 사람이라. 저런 사람들 따라가야 되겠어.’ 이렇게 은은하게 그들에게 덕을 끼쳐야 될 거라 그거야.

또 이제 말 들으니까, 내가 그런 거 같아서. 왜? 또 저 산에서 내려오면서 꽃마을에 내려오면서 또 거게서 고함을 지르면서 또 찬송했다 뭐 그 사람들 놀랬을 거라. 저 사람들 저 어떤 사람이 저 뭐 난리 났나 저 뭐이 왔노 어데 술주정뱅이들이 아마 와 가지고서 하는가 뭐 하나 그런데 술주정뱅이가 와도 낮에 그렇지 벌써 아홉시가 지나갔는데 안면 방해도 모르고 저놈들 미친놈들이다 끌어내려라 이랬을 거라 그말이오. 청년들 같으면 가서 그랬을 거라. 이 어떤 미친놈들이 다른 사람들 누워 자는데 잠도 못 자구로 아홉시가 지나갔는데 막 고함들 지르고 떠들고 이라느냐고 이랬을 거라 말이오.

이랬는데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아니다. 그 사람들 예수 믿는 사람들이다.’ 이랬으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다' 이랬으면 `그렇지 않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제까지 오랫동안 여기 다녔지마는서도 그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 어데 그래? 예수 믿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아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공연히 애매한 소리하지 마라. 그 사람들은 아주 덕이 있는 사람들이고 아주 그 사람들은 좋은 모본을 끼치는 사람들이지 그런 사람들 아니다. 이럴 거라. 옆에 와서 보니까 그 무엇인가 노래 부르는데 하나님 뭐 어짜고 하면 ‘그거 예수 믿는 것들이라. 예수 믿는 것들도 미치는가배.’ 이랄 거라 그말이오. 정신을 차려야 돼.

믿음. 하나님을 향하는 거 고거 다음에는 사람을 향하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어제 내가 교학실장 좀 야단을 쳤어. ‘교학실장 ○ 목사님은 그 인솔해 가지고서 산기도 갈 자격이 없습니다.’ 말했어. 거게 지금 입산 금지를 합니다. 요새는 입산 금지합니다. 여기 대신 공원에도 그 시간 제한해 가지고서 입산 금지가 있습니다.

금지가 있는데, 이 서부교회 교인들은 지금 암만 가도 입산 금지를 안 해. 내가 말 들으니까 아래 정복을 입고 인제 산림 감시원 정복은 똑 경관 정복같이 그렇습니다. 경관 정복을 입고서 찾아 왔더래요. 와 가지고서, 찾아 올라고 인사하러 왔습니다. 소문을 들었습니다. 여게 모두 기도하러 많이 오신다고 이라기 때문에 소문을 듣고 인사하러 왔습니다. 그라면서, 그 사람들은 뭣 때문이냐 하면은, 다른 사람들이 동네 사람들도 다 옹호하고 다 옹호하고 찬성해.

다 좋아해. 왜? 그 사람들만 가면 불은 안 난다. 그 사람들 가는 데는, 뭐 그 사람들 있는 동안에는 불나면 불 끄지 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은 불낼 염려는 하나도 없다.

요게 인정을 받는다 그말이오.

또 하나는 그 사람들은 뭐 자연에 대해서는 참 자연 보호는 아주 잘한다. 자연 보호를 잘한다. 뭐 설인가 지나고 나니까, 설 지나고 나니까 뭐 성묘하러 간다고 어짜고 와 가지고서 전부 산에 우저리하이 해 놨는데, 기도하러 간 사람들이 비니루 봉지 하나씩 가져가 가지고서 그거 다 주워 와. 뿔룩뿔룩하이 다 하나씩 다 넣어 가지고 온다 말이오. 오니까, ‘햐, 이렇게 산이 깨끗하다. 그거 다 어쨌노?’ ‘내나 예수 믿는 그 사람들이 다 와 가지고 이거 전부 이랬다.’ ‘자연 보호는 뭐 사람들만 가면 자연 보호는 돼. 산화 방지는 그 사람들만 가면 돼’ 이게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그 덕을 보고서 찾아와 가지고 인사하러 왔어. 여기 뭐한다고 산에 올라가느냐고서 야단치러, 산에 못 올라가구로 입산 금지하러 온 사람들이 와서 인사해. 그 인사 한다 소리를 많이 들었어.

또 와 가지고 ‘요번에 나는 갈아왔는데 내가 삼월달까지는 내가 여게 담임으로 오게 됐습니다. 그래 내가 말을 들었습니다. 이거 모두 참 깨끗이 하고 이 자연 보호나 또 이거 불이나 여게 대해서 많이 힘을 써 주시는데 대해서 감사합니다’ 이라면서 가면, 기도하러 가면 그란대요. 거게는 지금 아무 데가 지금 따시니까 그리 기도하러 가라 한대요. 그리 기도하러 가시이소. 기도 많이 하시이소. 이라고 또 오면 ‘이거 좀 안 됐지마는 우리 식사 좀 하고 가십시오’ 이래도 말한대요.

그런데, 또 거게서 또 욕하는 사람 있어. 저거는 어느 교회서 왔는지 저것들은 와 가지고서 그 길가에서 막 떠들고 지금 가고 난 다음에 보면은 지저분하이 이렇게 뭐 주 흐트려서 더럽혀 놓고 이래 놓고 이러니까 저 뭐 어데서 온 건고 뭐 저런 것도 다, 저것도 예수 믿는 갑다고서. 그거 내나 한 교회서 갔다 그말이오. 왜 그렇게 욕을 얻어 먹이게 하는가? 그게 덕이라 말이오. 어데든지.

지금 우리 여기 중간반 반사에 우리 여기 ○○○ 선생. 열심으로 말하면 이 교회에 제일이오. 그런데 반사를 내가 안 시켜. 왜? 덕이 대해서 주의를 안 한다 말이오, 덕에 대해서. 덕에 대해서 주의를 안 해.

내가 이거 남의 일 맡아 놓고 이렇게 그만 말면은 ‘아이고, 서부교회 교인 그거 쓰지 말아라, 서부교회 교인 쓰면 이런 낭파당한다’ 이런 소리 들을 터이니까 내가 꼭 옮기고 싶어도, 나가고 싶어도 나가지 못하고 이걸 그 사람들에게 손해 안 가도록 모든 것을 넉넉하게 상대방에게 피해가 되지 안하도록 이래 해 주고 나가야 되겠다. 또 내가 지금 이 견디기가 좀 어렵다고 해 가지고서 이미 시작한 일을 견디기가 어렵다 해 가지고 내가 막살하고 그만 가 버리는 날이면 아, 서부교회 교인은 자기 좋으면 하고 자기 싫으면 안 하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인내성이 없어서 그 사람들 써 가지고서, 일을 하면은 될 때도 있고 수월할 때도 있고 또 어려운 일도 있고 쉬운 일도 있는데 어려울 때 안 하면 그 사람 그런 사람 데리면 큰일난다. 서부교회 교인들은 꼭 어려울 때는 안 하더라.’ 이게 돼 놓으면 어찌 됩니까? 그 사람들은 만일 시작만 해 놓으면은 어려워도 되도 괴로워도 복잡해도 상관이 없다. 그 사람들은 어짜든지 자기가 할 때까지는 해서 그것을 거석해 놓고 남의 일 낭파지우지 안하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그만 남의 일 낭파지우지 안한다.’ ‘식모를 데릴려면 서부교회 식모를 데리십시오.' 또 `장가를 갈라거든 서부교회 처녀에게 장가를 가십시오’ ‘두말 할 것 없이 시집 갈라거든 서부교회 다니는 총각한테로 가십시오.’ ‘야, 취직을 할라면 서부교회 교인 직장에 그런 회사에 취직을 해라.’ 이래 돼야 이게 덕일 거라 그말이오.

그런고로, 「힘써 너희 믿음에」 「믿음에 덕」 하나님에게 대해서, 믿음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인정하고 또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겨놓고 순종하고 참고 견뎌 나가는 이것이 믿음 아닙니까? 믿음 행위하는 이것이 제삼자에게 감화 감동이 돼서 그들에게 이제 유익을 끼쳐 드려야 된다 그말이오.

저것들은 말로 하면 오만 것 다 되는 줄 알고 또 말뿐이지 뭐 행동이 뭐 있느냐 하면은 그 덕이 안 된다 그말이오. 하나님께 대한, 내가 하나님께 대한 그 열심이나 모든 그 덕이 안 된다 그말이오. 하나님께 대한, 내가 하나님께 대한 그 열심이나 모든 진실이 사람들에게 그 혜택이 배어 들어가야 되지 배어 들어가지 안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배어 들어가야 됩니다. 그러니까 믿음 다음에 덕을 말했다 말이오. 덕을 말했어.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한다 말은 아무리 그와같이 하지마는서도 이미 지식이 있어. 사람들이 다 이 세상 지식도 있고 하나님의 지식도 있기 때문에 세상 지식에도 걸리지 안해야 되지 하나님의 지식에도 걸리지 안해요 된다 말이오.

‘너희가 지혜는 배암같이 하고’ 하는 그말은 배암 지식은 이 세상 지식인데 이 세상 지식을 다 그것을 아는 대로 알아야 됩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다 알아야 됩니다. 알아서 그 지식에 걸리지 안하도록 그 지식이 이용이 되도록. 비둘기같이 순전하라 그말은 영감을 가리켜 말한 거니까 영감의 지식에도 맞아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성원에서 과학 공부도 하고 뭐 어학 공부도 하고 또 이 모든 조직 신학이나 성경 신학이나 그런 공부도 하고 또 성경 공부도 해. 성경 공부는 여러분들이 배울라고 해도 여기 새벽에 배워. 새벽에 배워야 되지 성경 공부는 배나 시간을 잡았지마는서도 제가 언제 하나 데리고 앉아서 이거 저거 가르쳐 봤자 또 되지도 안하고 이 새벽으로 배우면 돼.

‘영광과 덕으로 우리를 불렀다’ 하는 고것만 알아도 여러분들에게 큰 유익이 될 거라 말이오. 영광과 덕으로 부른 게 뭐인지를 알면 다행이야. 가르치는 사람이, 영광과 덕으로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지를 못하기 때문에 요행히 잘 걸리면 영광과 덕이라 하는 것을 바로 배워서 예수 믿는 사람이 바로 되지마는서도 그렇지 않으면 바로 안 된다 말이오.

이 덕을, 영광과 덕으로, 예수교라 하는 것은 영광과 덕으로 시작했고 이것으로 끝을 맺는 것이 기독교인데 왜 기독교가 이와같이 지금 마찰이 많고 이렇게 있느냐? 마찰 많고 있는 것은, 그거 또 마찰 많은 그것은 어두움과 빛이 상대되니까 마찰 있는 것도 있지마는서도 대개는 그게 아니라 그말이오.

이래 가지고서 떡 가정에서 불화를 일어 가지고서 쫓겨나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이라면 ‘예수 믿는다고 안 합니까?' 전부 예수 믿는 데다 똘똘 걸머지우지마는서도 나는 그런 소리를 듣지 안해. 예수 믿는다고 그럴 리가 없다.

예수 믿으면 그 남편이 어떤 강퍅한 남편이라도 이 시대에 감화를 받아서 이제 ‘나도 가 봐야 되겠다’ 이렇게 하지 예수 믿는 사람을 그렇게 여길 리는 없다 이렇게 말했다 말이오. 사람들이 그걸 누가 그런 소리를 곧이 듣습니까? 여기 봐. 「아내된 자들아 이와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남편에게 순종하라 했는데, 순종하는데 또 하나님 좋아하거든. 순종하는데. 순종하는데, 남편에게 순종 안 해도 그 남편이 감동을 받아야 된다 말이오. ‘저거는 참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그거는 하는데 이거는 안 한다’ 보니까 ‘죄되는 거는 안 하고 죄 안 되는 거는 그거는 한다’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말을 해 가지고서 그 남편을 전도하는 게 아니고, 말하는 그까짓 소리 안 들어. 말을 뉘가 듣습니까, 말을? 이 거짓말만 꽉찼는 놈의 세상에.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를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두려워하며’ 뭐, 남편에게 절절절절 매니까 그 두려움 말입니까? 그 두려움은 뭐이요? 보니까, 그 사람 뭐 죄 될까 싶어서 겁이 나. 죄 될까 싶어서 겁이 나 가지고 뻘뻘 떨지. 또 뭐 부정이 있을까 싶어서 벌벌 떨지. 또 하나님의 심판에 가 가지고 ‘그 사람 보니까 아마 심판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라.’ 저거는 죄라 하는 것은 죽자고 들어 깨. 여기 그 사람 여기 앉았어. 그 남편하고 나하고 지금 시장에 어째 같이 만났어. 만났는데, 내가 전도를 하니까 핍박을 하면서 ‘그래 가지고 어찌 삽니까?’ `뭐입니까?' 공상 타작을, 공상을 들여다가 타작을 했는데 다, 한 다섯 섬이고 여섯 섬이고 뚜드리고 나면 뒤에 한 반 섬이나 그리 안 하면 반 섬 못 되게 남는 그런 거는 의례히 그거는 삯을 안 떼는 건데 기어코 그걸 떼자 한다고서. 그거 한 가마니에 뭐 한 되씩인가 한 섬에 한 되씩인가 되니까 다섯 가마니 뚜드렸으면 다섯 되를 봐야 되는 건데 고 조금 남은 거 반 가마니도 안 되는 그걸 꼭 반 되를 떼 넣기 때문에 그거 안 된다고 그래 가지고 싸워 가지고서 기어코 내가 못 떼구로 해 가지고 내가 야단을 쳐 못 뗐지마는 나중에 그만 살며시 나 모르게 나 자고 난 뒤에 살며시 그걸 떼 넣어 놨더라고서. 그 이야기를 해. 그래도 더 줘도 말이오. 더 줘도 감동은 받았다 말이오. ‘그러면 그게 나쁩니까?’ `정직하기는 정직해요.' 그런 것이 자꾸 쌓여지면 남편이 회개한다 그거야.

여기 있어 지금. 그 본인은 모를 거야. 내가 ○○○씨 남편하고 내가 시장 가다가 내가 그 소리 들었어. 그래 그래도, 믿는데 그 자손들이 그 본을 떠서 좀 정직하게 이랬으면 했으면 되는데 그 본 잘 안뜨는 거 같애.

이제 시간 다 지나갔는데, 믿음에 덕, 덕에 지식을, 암만 믿어도 이 지식적이라야 돼. 지성적이라 돼. 성경 지식에 맞아야 돼. 또 세상 지식 틀린 것은 틀린 대로 가도 옳은 것은 옳은 대로 맞아야 돼. 다시 말하면 세상 지식 쳐 놓고 옳은 것은 물리는 옳습니다. 성경적이요 과학적이야 된다 말이오. 성경적이요 과학적이라.

인간의 지식은 다 안 맞아. 세상 지식은 다. 인간 지식은 안 맞지마는서도 물리 지식은 맞아. 그러면, 성경적이요 과학적으로 이렇게 살면 아무 걸림이 없다 그거야.

믿음의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뭐입니까 지식에 뭐이요? 절제. 절제라 하는 것은 조절이라 그말이오. 속에야 찬송이 나오기야 나오지만, 나오지마는 빌립보 옥중에서야 찬송했지, 뚜드려 맞고 지금 옥에 갇혀 가지고 있으니까 거게서는 막 찬송을 터지게 한번 할 수가 있다 그말이오.

그러나, 여기 이런 평소에서는 다, 찬송할 수 있는 데에서는 그렇지만 찬송 못 할 수 있을 때는 하는 거 좋지마는서도 이런 데서는 다른 사람들이 벌써 이래 거석하고 있으니까 욕을 하나 어짜노 저 사람들은 사람의 모본을 보이기 때문에 그때 암만 좋아서 춤을 추고 싶지마는서도 그 춤을 추면 다른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 미쳤다 할 거 아니오. 또 찬송을 해도 고함을 지르면 그렇다고 할 거 아니라? 덕을 생각해야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덕이 되나 안 되나, 이러면 다른 사람에게 감화를 주나 안 주나, 유익을 주나 안 주나? 믿음의 덕, 덕에 지식, 지식에 절제 있어야 돼. 암만 하고 싶어도 안 해야 될 때가 있다 그말이오. 또 암만 하기 싫어도 또 해야 될 때가 있어.

‘절제에 인내를’ 암만 그래 잘한다 할지라도 계속 없으면 소용없어. 우리 ○○○ 선생은 이 인내가 없어.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좋은 일이라도 뻐뜩 좋고 그 다음에 그만 안 해 버려.

그러기 때문에, 양을 맡기지 못하는 것은 양을 지금 맡겨 놓으면 아마 천 마리도 먹일 거라. 천 마리도 먹이지마는, 천 마리 먹이지마는서도 한 대엿새 먹이고 난 다음에는 이제 딱 굶겨 둘 터이니까 천 마리가 다 죽을 거라 그말이오. 인내가 없는 사람에게는 양 한 마리도 못 맡깁니다. 이거는 무능해서 양을 한 마리밖에는 못 먹이지마는 이 한 마리 맡겨 놓으면 이 양은 아주 뭐 계속해서, 비가 오든지 눈이 오든지 춥든지 이 한 마리만큼은 잘 먹여내서, 앙도 한 마리 젖 많이 나오면 너 되 나옵니다. 너 되, 한 마리가 너 되 나와요. 너 되 너 되 반 나와요. 내가 실제로 짜봤어.

이런데, 그 한 마리도 이거 잘 먹이면 이거는 한 마리라도 먹이도록 목부로 들여서, 하루 너 되만 나오면 그 품 주고도 뭐이 남는다 그말이오. 하지마는서도 이거는 양을 백 마리 맡겨도 잘 먹여. 잘 먹이지마는서도 열흘 만이든지 한 달 만이든지 하루 쏙 잡아 뺄 때는 그때 아무것도 안 줘 가지고 그만 양 죽여 버린다. 그러면 그 사람 양 맡길 수 있소 없소? 예? 양성원 학생들. 맡길 수 있소 없소? 없어.

이러기에 목사도 석 달 목사 있어. 석 달 목사. 삼 년 목사. 삼 년까지는 은혜 끼치지마는 삼 년 지나고 난 다음에는 그래 그만 헛일이라.

저 ○ 조사님도 보니까 뭐 펄펄펄 뛰는 것 같지마는서도 요새는 딱 가라 앉았는가 아무 소식이 없어, 보니까. 계속이 있어야 돼 계속.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산기도 가는데 여러분들이 고만 그것만 생각해. 저 양산동에도 그렇습니다.

양산동에도, 그 동리에 사람들은 벙어리인 줄 알았어. 벙어리인 줄 알았어.

아이들도 말이 없어요. 놀아도 조금 조금 요래 말하더니마는서도 요새는 막 떠들어. 요새는 그 앞에 와서 떠들어.

떠드는데, 떠드는 거 이걸 속으로 내가 생각하기를 떠드는 것은 일방적은 좋다, 일변으로는 좋다. 일면으로는 기가 찬다. 말이오. 왜? 내가 그 동리는 말 없는 동리라고 소리 없는 동리라고 말을 냈고 참 양반으로 이래 알았는데, 아이들도 그래요. 이랬었는데 요새는 막 떠들어. 왜? 우리 기도하러 간 사람들이 막 떠들어 재끼고 이라니까 그 본을 떠서 이래 그만 떠드는 게 좋은 건 줄 알고 막 이래 떠들어 재껴 지금. 떠들어 대. 그 동리를 버려 놨어. 그 동리 밖에는 그런데 이 안에는 그 동리는 도무지 말 없는 동리라. 암만 가 봤자. 거기 있는 사람들 말 못 들었어. 아이들 놀아도 소리가 없어. 이랬는데 요새는 이 아이들이 마구 떠들어.

우리 기도하러 간 사람들이 그만 떠들어서 해 놔서.

어제도, 어떤 동리 노인을 보고서 ‘아이구, 이거 너무 많이 와서 이거 떠들고 이래 가지고 피해를 많이 끼쳐서 미안합니다.’ 이라니까 ‘뭐 아무 피해 끼치지 안하고 부덕스런 일 없는데 뭐 그런 소리를 합니까?’ 이래도 속으로 알 거라 말이오. 내가 언제 말 들으니까 이층에 있는 사람들이 그 밑에 집을 떡 내려다 보고, 남의 집에 들여다 볼 게 뭐이라? 이래 보고 있기 때문에 이래 말하는 소리를 듣고서 내가 보니까 나서서 이래 떡 이래 가지고서 떡 뭐 뭐 호주머니인가 이래 떡 손 넣고 이래 가지고 떡 내려다 보고, 왕인가.

그래서 그 글을 쓰기를 이웃집을 내려다 보지 말아라. 넘어다 보지 말아라. 또 소리를 크게 내서 말하지 말아라. 또 모든 오물 그런 거는 반드시 쓰레기 통에 청소해서 깨끗하게 해라. 이랬는데 안 그런 구역 있어. 어떤 구역은 지나가고 나니까 더러워 못 봐. 어떤 구역은 보면은 그 구역이 지나가고 나면은 깨끗해. 뭐 길가에 있는 전부 청소 다 했지, 동네 사람 보면, 그렇게 청소했지 아무 말 없이, 사람들이 수십 명이 왔다 하지마는 왔는지 갔는지 모르지.

또 어제 보니까 밥해 먹는다고서 이제 뭐 곤로는 둘뿐인데 사람들이 여러 구역에서, 이런 큰 곤로지마는서도 두 구역이 한테 합하지는 못하고 이러니까 이제 밥해 먹는다고서 그 옆에 부엌을 만들어 놨는데 거기다 대고서 막 불을 때고 있다 말이오. 고게 고 옆의 집에 문으로 들어간다 말이오. 연기가 문으로 들어가. 문으로 들어가는데 거게는 불을 때 이제까지 사용했습니다. 사용한 것은 그전에 있던 안 노인이 있는데 그 노인은 좀 억세서 다른 사람하고 막 싸워서 일대 일로 하니까 그 사람들이 참아서 그거 다투지 말고 냅둬라. 이래서 속으로는 욕을 했다 말이오. 속으로 내가 한번 들었어. 들으니까 좋아하지를 안해요. 그 다른이를 욕을 해요. 이래서 우리는 그걸 불을 안 땔라고 딱 거석하고 불 안 땠는데 어제 가 불을 때. 그래 내가 있다가서 아, 이거 불 때면 안 됩니다. 그래 이제 이쪽에 우리 집 안에다 솥을 걸어 놓고서 불을 때고 거기 못 때구로 했다 말이오.

못 때구로 했는데, 그걸 만일 그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을 그 사람들이 내용을 안다고 하면은 ‘아이구, 그 사람 두려운 사람이다, 그 사람들은 남에게 털끝마치도 피해를 끼치지 안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참 두려워해야 된다. 두려운 사람이다. 아주 우리가 본 받을 좋은 사람들이다’ 이렇게 볼 거 아니야. 불을, 연기를 풍풍 내놓으면 속으로는, 말은 안 해도 ‘이것들 저거는 우리 코구멍은 코구멍 아니가? 어데 남의 코구멍에다가 불을 때서 연기를 이래 나구로 하나?’ 그럴 거라 그말이오. 그래서, 그걸 오늘은 가서 뜯어 버릴 겁니다.

뜯고 인제 그래서 이제 할 수 없어 곤로를 또 새걸 두 개를 이런 걸 더 사 가지고 갔습니다. 기름 가지고 가고. 이래 곤로가 너이면 뭐 네 구역이 한목 가도 할 수 있을 것이라.

어짜든지 우리는 믿음에 덕, 믿음은 하나님이 기뻐하실수 있도록 하나님에게 대해서 흠점이 없도록 이렇게 해야 되고 사람에게 대해서 흠점이 없도록 덕을 세우도록, 흠점이 없는 거는, 요 덕이라 하는 것은 참, 봄이, 봄날이, 해동해서 봄날이 돌아오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은은하게 이렇게 무슨 충돌 충격이 없이 상대방에게 유익을 끼쳐 줄 수 있는 이런 것이 덕이라 그말이오.

하나님도 우리를 부를 때 영광과 덕으로 불렀다 하지 않습니까? 우리 기독교는 그것이 기독교인 것입니다. 뭐 어떤 사람은 자꾸 뭐, 기독교는 십자가의 도라고 죽이고 살리고 이래 마찰되는 게 기독교인 줄 아는데 그게 아니고 이와같이 덕으로 하다 하다가서 우리는 덕으로 하는데 상대방이 해 가지고서 마찰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고 암만 봐도 백의 백이 저는 옳고 백의 백이 봐도 너는 틀렸다 이렇게 정죄가 될 때에 그걸 치시든지 그걸 정죄하시지 둘이 똑 같이, 믿는 사람이나 꼭 같은데 누구를 친다 말이요? 믿는 사람과 불신자와 둘이 꼭 같이, 행위가 꼭 같았는데 하나님께서 누구를 치겠소? 한번 말해 봐요. 누구를 치겠어?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과 둘이 꼭 같은데 누구를 치겠소? 저게 ○○교회 있는. 왜 믿는 사람 쳐? 믿는 사람 편을 드는데 믿는 사람을 쳐? 왜 쳐? 왜 쳐? 그걸 말해 봐. 뭣 때문에 쳐? 또 고 뒤에.

고 뒤에 사람? 고 뒤에 몰라, ○○○? 또 몰라. 고 뒤에? 왜 믿는 사람을 쳐? 뭐라 하노? 녜. 고다음에는? 뭐라 하노? 법을 배우기 때문에? 그거 아니야. 내 새끼기 때문에 그래 알겠어? 내것이기 때문에 내것이기 때문에 내것부터 고쳐 놓고 다른 사람을 고치려 들 거 아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이기 때문에 꼭 같을 때는 당신의 백성을 쳐.

또 둘이 이래 꼭 같이 악을 행하면 믿는 사람 치고 또 안 믿는 사람은 둘쯤 나쁘게 해도 안 치고 셋이 나빠야 치고, 셋이 나빠야 치고 또 믿는 사람도 하나 나쁠 때 치는 사람 둘 나쁠 때 치는 사람 셋이 나빠야 치는 사람 넷이 나빠야 치는 사람, 그러면 다섯이 나빠야 치지 너이까지 나쁠 때는 치지 안하는 사람,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섯이 나쁠 때에 치는 사람과 하나 나쁠 때에 치는 사람과 하나님과 그 사람과의 관계가 어때요? 누가 더 친해요? 다섯 나쁠 때 치는 사람이 더 가깝지 안해, 친하지 안한가? 어때요? 그래. 하나 나쁠 때에 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이 더 친한 사람이라.

가정에서도 아들하고 마누라하고 둘이 싸운다 말이오. 둘이 싸우면, 그 남편이 아내 편을 들어야 되겠소 아들 편을 들어야 되겠소? 어때? 전연히 몰라. 아내 편을 들어야 돼? 아들편을 들어야 돼? 여게는? 아들 편을 들어야 돼. 아들 편을.

왜? 아내 편을 안 들고 왜 아들 편을 들어? 저 뒤에 안경 쓴 저분. 아들하고 어머니하고 둘이 꼭 같이 지금 싸우는데 꼭 같은 싸움이, 같은 싸움이라 말입니다.

둘이 다 잘못하고 둘이 다 꼭 같애. 꼭 같을 때에는 그 아버지가 아들을 나무래야 될까 엄마를 나무래야 될까? 이것도 몰라. 아들 나무래야 돼? 아들 나무래야 돼? 아들이기 때문에 이제 자식이니까 밑에 수하이기 때문에 나무래야 된다 말이지? 그러면, 둘이 잘못하면 아비 잘못한 거 자식 잘못한 거 둘이 꼭 갈이 잘못했으면 누가 더 많이 잘못했다고서 먼저 무엇부터 벌을 해야 되겠어, 그 할아버지가? 원근이 있고 지위가 있기 때문에.

에미와 자식과 둘이 같이, 자식은 새끼니까 아직까지 모르는 것이고 에미는 많이 알 것이고 에미가 더 선생님 아니오. 선생님이기 때문에 선생부터 먼저 내무래야 돼. ‘네가 선생이 돼 가지고 뭐이야?’ 예를 들면은 또 자기와 가깝기가 아들보다 아내가 더 가까와. 가까운 것을 나무랠 수밖에 없어. 가까운 걸 나무래야 거기서 고장이 안 생기고 반동이 안 나. 아내부터 나무래 놓고 그라고 난 다음에, 아내부터 나무래 놓고 그 다음에 이제 아들에게는 ‘야, 그렇지마는 네가 그래 가지고 되나?’ 이거 뒤에 교훈해야 될 텐데, 아내를 나무랠 때 아내가 그걸 듣고 참고 있어야 뭐 일이 되겠는데 이게 그만 떡 들고 나서 가지고 야단지기니까 집구석은 다 헛일되고 만다 그말이오.

그런 놈의 집구석은 뭐이냐 하면은 아들하고 그 아내하고 둘이 이래 싸우면 아내 편을 들어서 아들을 야단을 친다 말이오. 아들을 야단을 치니까 아들 이놈이 뭐 경제권도 거기 있지 밥도 얻어 먹어야 되지 하니까 그래 그 아들자식이 아따 저거 편이라고 세력 있다 한다 그말이오. 그라고 나면 그 다음에 그 아들이 힘이 세고 난 다음에 ‘지금은 안 된다. 그때는 내가 그렇게 내가 억울한 꼴을 봤지마는 지금은 안 된다. 주먹 가지고 달라들면 나이가 많으면 꼼짝 없이 이제 애비도 지고 에미도 또 져야 될 거라 말이오. 그거는 뭐이냐 하면 힘으로 하는 것이고 경제권으로 하는 것이지 이거 도덕이나 예의나 사랑이나 그런 거 가지고 하는 것이, 윤리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그거요. 이거 알아야 돼요.

아내를 나무래니까 아내가 ‘예, 잘못했습니다.’ 이라니까 아들은 말 안 해도 돼 버렸어. ‘나무랠 일 안 했는데 왜 어머니를 나무래나 어머니 나 때문에 꾸중 들었다’ 말 안 해도 그놈이 알아챈다 말이오. 알아채고 나중에 조용할 때 그 이야기 하면은 ‘예 제가 꾸지람 들을 건데 그렇습니다’ 그라기 전에,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꾸지람 들어야 될 건데 그랬습니다.’ 이렇게도 돼질 거라 말이오. 이거 뭐이든지 바로 알아야 돼요.

그러기 때문에, 자기에게 가까운 자를 더 단속합니다. 자기에게 가까운 자를.

가까운 자의 흠을 더 흠을 잡는 것입니다. 그걸 먼저 벌하고 책하는 것입니다. 또 위에 권세자와 밑에 약한 자가 있으면은 그 둘이 꼭 같이 잘못했으면 권세자를 책하고 밑에 약자를 그 다음으로 하는 그게 순서라 말이오. 이 세상이 다 뭐이냐 하면 꺼꾸로 돼 가지고 있어, 전부.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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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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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 덕/ 베드로후서 1장 3절-11절/ 1986. 3. 13. 목새벽 선지자 2015.12.30
60 팔 덕과 유익 세 가지/ 베드로후서 1장 5절-11절/ 1984. 9. 7. 금저녁 선지자 2015.12.30
59 팔복/ 마태복음 5장 1절-12절/ 1985. 9. 2. 월새벽 선지자 2015.12.30
58 팔복/ 마태복음 5장 1절-12절/ 1986. 10. 31. 금새벽 선지자 2015.12.30
57 팔복-심령가난/ 마태복음 5장 1절-3절/ 1986. 10. 31. 금저녁 선지자 2015.12.30
56 패괴 된 세대/ 창세기 6장 5절-12절/ 1988. 5. 11. 수저녁 선지자 2015.12.30
55 펠라기우스주의펠라기우스주의/ 창세기 6장 1절-12절/ 1988. 10. 21. 금새벽 선지자 2015.12.30
54 평상시 생활이 대환난 때의 생활이다/ 누가복음 16장 10절/ 1984. 9. 27. 목새벽 선지자 2015.12.30
53 평소에 기름 준비하는 법-자기부인/ 마태복음 25장 1절-13절/ 1983. 11. 4. 금새벽 선지자 2015.12.30
52 평소에 전력하여 말씀을/ 마태복음 14장 22절-23절 / 1984. 8. 3. 금새벽 선지자 2015.12.30
51 평안은 죄의 온상-아합/ 디모데후서 4장 1절-4절/ 1979. 12. 14. 지권찰회 선지자 2015.12.30
50 포도나무 가지의 제일 성공하는 방편/요한복음 15장 1절-11절 /1988. 1. 6. 수새벽 선지자 2015.12.30
49 포도나무 비유/ 요한복음 15장 9절-15절/ 1981. 12. 12. 토새벽 선지자 2015.12.30
48 포도나무 비유/ 요한복음 15장 1절-8절/ 1984. 4. 6. 금새벽 선지자 2015.12.30
47 포도나무 비유/ 요한복음15장 1절-14절/ 1983. 5. 15.주일오전 선지자 2015.12.30
46 포도나무 비유/ 요한복음 15장 1절-14절/ 1983. 5. 15. 주일오후 선지자 2015.12.30
45 포도나무 비유/ 요한복음 15장 5절/ 1979. 7. 18. 수새벽 선지자 2015.12.30
44 포도나무 비유/ 요한복음 15장 1절-12절/ 1988. 1. 5. 화새벽 선지자 2015.12.30
43 포도나무 비유/ 요한복음 15장 1절-15절/ 1988. 9. 11. 주일오전 선지자 2015.12.30
42 포도나무 비유/ 요한복음 15장 1절-7절/ 1988. 09. 12. 월새벽 선지자 2015.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