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시 생활이 대환난 때의 생활이다

 

1984. 9. 27. 목새

 

본문: 누가복음 16장 10절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지난밤에 ○장로님이 설교를 했는데. 저와 나뉜 지가 벌써 오래 됐고 또  여기에와 연결이 그렇게 많이 있질 못했고 늘 거기서, 뭐 설교록은 지금 나왔지  그때는 나오지도 안했고 혹 여기 노트를 보내 달라고 해도 내가 한 번도 보내  주지를 못했습니다. 이래서, 여러분들이 들은 거와 약간 좀 서로 상치되는 일이  혹 있어서 이해가 혹 안 됐을 그런 것이 혹 있을는지 모르나 실은 괜찮습니다.

바로 됐는데  하나 잘못된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체가 되게 하셨다' 하는 그것은, 자체와  같은 자가 되게 하셨다 하는 그런 것을 표현이 안 돼서, 표시에 '하나님의  자체와 같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체같이는 안 되고  하나님 자체 하나님 본체와 꼭 같은 자를 하나님이 만드십니다. 그것이 표현이  잘못됐었고, 나중에는 그걸 또 바로 가르쳐서 하나님과 꼭 같은 자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기 위함이라 그렇게 나중에는 증거를 했기 때문에 모든 걸 종합하면  이해가 될 수가 있기는 있었습니다.

 또 그러고 제가 증거를 하면 보통으로 들을 건데 처음으로 증거를 하는 사람이  증거하니까 여러분들이 혹 잘못 생각했을까 해서 말합니다. 저는 말 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모든 것을 다 기울여 주셨다 투자해 주셨다  그것을 저도 말합니다. 제가 그 말을 할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부요나 영광이나 그 권세나 모든 것을 다 우리 위해서 다  기울여 희생해 주셨다 하는 그 말을 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심이  아니고 하나님 당신을 위해서 하심이라 하는 그런 말을 덧붙였었습니다. 이런데,  엊저녁에는 고 말이 빠져서 혹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에 '목사님은 우리를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를 선택했고 또 우리를 위해서 모든 십자가의 대속이나  목적을 정한 것이나 그것은 우리를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함이라고 했는데  장로님은 우리를 위함이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그것을 일방적으로 해 가지고  이해 못 할 사람이 있는가 싶어서 말합니다.

 네, 우리를 위한다는 그 말이 성경에 많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함입니다.

우리를 위함인데, 곧 하나님을 위함입니다. 그게 왜 그리 되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는데, 위해서 죽기까지 하셨는데, 그러면, 우리를  위하는데 우리를 위해서 어떤 자가 되게 하시는가?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투자하시고 희생하시고 역사하셔서 역사하시는 그 전부가 다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일인데, 그러면, 우리를 위해서 하시면 우리로 하여금 어떤 자가 되도록  하시려고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가?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것은 우리가 영원  자존하신 완전하신 그 하나님을 위하는 자가 하나님만을 위하는 자가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해서 하십니다. 그러면 그것을 단편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전적 우리를 위해서 하십니다.

 아버지는 농부라 하는 고 비유에도 농부는 포도나무를 위해서 합니다.

포도나무를 위해서 전적 포도원에서 늘 수고를 농부가 합니다. 그러면 수고를  해서 포도가 많이 열도록 잘하는 그것은 결과적으로 뭘 위함인가? 농부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포도를 위해서 종일 수고하고 일 년 내내 수고하고  해마다 포도나무를 위해서 수고하는 것은 그것은 내나 포도를 위해서 포도나무  주인 자기를 위해서 수고하는 것이 되는 거와 같은 그런 비유와 같은 비유가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완전자시요 영원불변자시요 자존자신데, 그분을 위함이 아닌,  그분을, 완전을 위함이 아닌. 참을 위함이 아닌 거룩을 위함이 아닌, 영영  불변한 것을 위함이 아닌 그 외에 딴것을 위함이라 하는 것은 그것은 다 사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당신만을  위해서, 당신만을 위하는 자가 되게 만드시는 그것, 당신만을 위하는 자가  되도록 하려고 있는 것을 다 기울였었습니다. 그러면, 당신만을 위하는 자가  되게 하려고 하나님이 모든 걸 기울여서 우리를 위해서 하셨다면 우리는 어떤  자가 되게 하려고 그렇게 우리를 위해서 하셨는가?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만들어  놨는데 만들어진 우리는 어떤 자인가?  만들어진 우리가 마귀를 위하는 자가 된다든지 또 사람 자신 자체를 위해서  위하는 것이 되어진다든지 이것으로 끝이 난다고 하면, 우리를 우리 자체를  위하면 우리 자체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피조물을 위해서 피조물이 암만 잘돼  봤자 그것이 결국은 독립하지도 못하는 것이고 자주자도 아니요 영원자도 아니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만든 그것이 어떤 자를 되게 하려고 만드셨는가? 우리는  영원 자존하신 완전하신 자를 위하는 자가. 영원히 완전자를 위하고 완전에게  복종하고 완전자에게 소속하고 완전자의 것이 되어지도록, 완전자로 인해서만  움직이고 완전자에게 피동만 돼도록 이렇게 우리를 만들어 놨으니까, 그것이  우리를 위해서 함인데, 우리를 위했는데 우리는 어떤 자가 되도록 하셨는가?  하나님만을 위하는 자로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위한다는 말이나 또 우리를 위해서라 말이나 하는  말은 결론은 다 같은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위하는 그것이 우리 개체로  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에게 필요 있는 자, 하나님에게 필요 있는 자  하나님에게 요긴한 자, 하나님을 위하는 자 되게 우리를 만드시기 위해서 우리  위해서 전부를 다 투자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함이 하나님 위함이요 하나님  위함이 우리를 위함이라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했다고, 우리를 위했다고 그 말만 자꾸 하면은  위험해집니다. 그 말만 자꾸 하면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투자하셨다 우리를 위했다 고말만 하면은 그것은 이단에 빠지기 쉽고 고거는  탈선되기 쉽습니다. 고거는 사람 중심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함이라는고 말은,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를 대속하셨다' 요래 돼지면 그것은  변동이 없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를 위함이라는고 말만 보면 여러분들이  '목사님은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를 구속했다 하더니마는 우리를 위해서 하셨다  하니 그 말이 좀 틀린다' 그렇게 들리기 쉽겠습니다. 그러면, 고 말에 우리가  전적 하나님에게 피동이 돼야 되지 하나님에게 피동이 되지 안하면 안 된다  하는. 하나님에게만 피동이 돼야 된다는고 말씀을 또 덧붙여서 했기 때문에 고  전체를 들어 보면 결국은 우리를 위함이 곧 하나님을 위할 수 있는 그런 위함이  돼서 하나님에게만 저적 피동되는 자가 되도록 요렇게 하시기 위해서 요런  우리를 만들기 위해서 있는 걸 다 투자하셨다 그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거 좀 이 해하기가 그렇겠고.

 또 지난밤에 좋은 것을 하나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여기에서 설교하는 것을  고만 입으로는 앵무새 모양으로 옮기기는 옮기지마는 속의 그 내용의 뜻은  뭐인지를 여러분들이 모르는 그런 일이 않습니다. 간추리고 간추리고 간추려서  이렇게 말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뜻을 새기는 그것은 다 잊어 버려 버리고  간추려 놓은 강령만 이렇게 지금 알게 되다 보니까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자기가  설교를 하고 말을 해도 모르는 것을 말한다. 그래 교인들에게서, 저 각처에서  우리 지교회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들으면 그 말입니다. '자기가 설교는 하기는  하는데 자기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설교를 하고 있더라' 모르는 설교 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들으면 그 설교를 내용을 아는 사람은 모르고 한다 하는 그걸 알  수가 있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그랬는데, 이제,  우리와 같이 있지를 안했기 때문에 하는 것이 간추리고 간추려서 그렇게 하지를  못해서 혹 모순될 때가 있는 것으로 그렇게 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밤에 좋은 것을 하나 말을 했어. 내가 은혜 받은 것을 간증 한다고  하면은, 지난밤에 내가 은혜 받은 것은 그것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은 자주 만나면 친해진다. 같이  있으면 친해진다. 아주 지식이 높은 대학 교수, 내외분이 다 대학 교수인데,  대학 교수 집에 가 가지고서 같이 이렇게 굴면서 한솥의 밥을 먹고 이렇게 얼마  살다 보면 고만 일자 무식군이 거기 가 있어도 구체적인 이면에 들어가면 유식  무식이 있지마는 껍데기 봐서는 유식 무식이 없습니다. 가정부로 들어가 있는 그  가정부나 대학 교수나 말하는 것보니까, 교수나 뭐이나 이거 고만 거의  어깨겨룸이 될 만치 같이 됐다 그 말이오. 어깨겨룸이 될 만치 이렇게 같이 돼  버려요. 같이 됐으나 인제 내용은 좀 아직까지 공부를 안해서 그렇지마는,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같이 되는데에는 같이 있는 것이 제일 같이 되는데에  유력하다. 그러기 때문에, 한집에 있는 사람은, 한 솥의 밥을 먹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알게 되고 또 같이 된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수종방원기요' 물은 그 그릇의 모양을 따라서 물의 모양이  된다. 그런 거 아닙니까? 그릇, 그릇에 담으면 동그란 그릇에 담으면 물이  동그래지고 네모배기 그릇에 담으면 물이 네모배기 되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와  마찬가지로 '인위선악우라' 사람이나 그런 것은 선하고 악한 그 동무에 따라서  돼진다. 선한 동무 사귀면 선한 사람 돼지고 악한 사람 동무 자꾸 사귀면 자꾸  악한 사람 되어지고, 사기꾼 사귀면 사기꾼 되어지고, 참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사람 사쒸면 충성된 사람 되어지고 이렇게 되어진다. (저 봐 ○○○ 목사님 딸  아니가? 예? 그렇제? 아이 벌써 낳아 가지고서 업고 왔네. 아이 낳은 줄도  몰랐는데. 축하 하요. 나는 아이 낳은 거 자꾸 찬성입니다. 산아제한인데 나는  다산주의자라.)  이래서, 같이 굴고 늘 같이 있어야 친하게 되고 같이 있어야 알게 되고 같이  있어야 닮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과 같이 있어야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의 음성도 들을 줄 알고 이러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서, 그  음성을 들어 그대로 행해야 되어지는 것이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마귀의 말인지 하나님의 감화인지 뭐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 사람은  행한다는 것이 잘못하면 화를 만들 수 있다. 하나님과 같이 있어야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과 친하게 되고 하나님의 그 음성도 알게 된다. 같이 있어야  알게 된다.

 그러면 같이 있는 게 뭐인가? 이 신구약 성경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께  다 피동되는 거는 아닙니다. 피동되는 거는 아니지마는 성경 말씀대로  여기에서도 자기 아는 대로는 성경 말씀을 읽고 성경 말씀을 알아서 성경  말씀대로 자꾸 행하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과 딱 동행하는 것은 못 돼도 그래도  성경 말씀대로 행하면 그 성경 말씀을 자기가 잘못 선택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같이 있는 게 된다.

 그러면, 같이 있어도 우리가 어디 있는가? 서부 교회 그 예배당 안에 같이  있었다. 예배당 안에 같이 있지마는 저기에도 있고 여기에도 있고 하면 서로  봐야 보이지도 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한 울 안에 있고 같이 직장에  있고 이러면 차차 차차 좀 멀고 가까운 것뿐이지 그래도 같이 있는 것이  되어지고 친근해지고 알게 되어진다. 같이 있어야 알게 되어 진다. 그러면, 고  말은 해석 안 했지마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면 그것이 참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선택해 가지고고 말씀대로 바로 딱 행해 버리면은 고거는 하나님과 동행이  되어지는 것이고 고거는 하나님 안에 있는 게 되고. 하나님은 자기 안에 있어서  그만 한 몸뚱이가 되는 것이 되어지지마는 그렇게 딱 들어맞지 안해도 신구약  성경 말씀대로 이렇게 행하게 되면 그 범위가 마귀하고 같이 하는 것 아니고  하나님과 같이 하는 일이 되게 되어지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과 자꾸 이렇게  말씀대로 하면은 하나님과 같이 있게 된다. 같이 있으면 하나님과 친해지고  하나님과 알게 되어진다.

 그러면, 하나님의 음성을 알 수 있다 하는 고 말에 제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 받는 것은. '아, 하나님과 계속 같이 있어야 된다.' 고거 제가 요새  설교하는 것도 그거였었습니다.

 평소에 평소에 지키는 말씀이라야, 평소에 말씀을 지켜야 극단에도 말씀을  지키고 환난 때에도 말씀을 지키지, 평소에 못 하는 일은 못 한다. 평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것이 환난 때에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하는 것이요,  평소에 하나님 말씀을 배반치 아니하는 것이 환난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치  안하는 것이요, 평소 때에 하나님을 높이고 사랑하고 그만 위하는, 그것이  대환난 때에 하나님만을 높이고 위하고 사랑하는 것이 되어진다.

 평소 생활이, 평소 생활이 비상시, 비상시, 과도기, 극단. 대환난 그때에  하나님을 섬김이 된다. 그러면, 평소 생활이 극단시의 생활이 되고 평소의 모든  행동이 과도기 비상시 그때의 생활이 되고 하나님을 위함이 된다. 그러면 평소  생활이 과도기, 역경, 환난, 비상시 내나 그때 생활된다. 그러면 그때에만  잘하려고 해서는 헛일이다. 평소에 한 고대로 그때에 하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평소에 말씀대로 사는 그것이 대 환난 때에 말씀대로 사는 것이요 평소에 하나님  배반치 안하는 그것이 대환난 때에 하나님 배반치 안하는 바로 그것이 그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평소에 자기가 하나님을 배반치 아니하는 그것이 천하 사람이 다  하나님을 배반치 안할 수 없는 그런 때에도 하나님을 배반치 아니할 수 있다.

 그래서 어제 아침에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과도기, 대환난. 아주 절정, 아주  극단의 비상시, 과도기, 아주 위험시 그런 아주 어려운 그런 때를, 절정적인  그런 어려운 때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뭣 때문에 주시느냐? 그것은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았느냐 안 살았느냐 평소의 생활을  네가 어덩게 했느냐 하는 것을 시험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평소에 생활  했으면 그때도-문제 없이 말없이 되는 것이고 평소에 하지 안했으면 안 된다.

그러기 때문에, 평소에 어찌 했느냐 하는 그것을 채점하는 것이 그것이 과도기의  역경이요 절정의 일들이다. 그러기에, 평소에는 안 해 놓고 과도기에 그때에  하려고 기도를 하고 '주여 환난 때에 어쩌든지 이기게 해 주옵소서. 어떻게 해  주옵소서' 아무리 기도를 하고 자기가 소원을 하고 결심을 하고 아무리 해도  그거 가지고는 안 된다. 평소에 자기가 신앙생활 한 그것이 대환난 때나  역경이나 절정이나 과도기나 어떤 때라도 신앙생활이 돼진다.

 그러기 때문에 대환난 때에 승리하기를 원하거든 평소에 네가 신앙생활을  계속하기를 힘써라. 평소에 계속하는 거, 네가 평소에, 오늘 이 평소, 이 평시,  평상시, 이거 또 요소란 소(素)자 말고 장소 소(所)자, 평소, 언제든지 평생  자기가 살고 있는 그 장소 거기에서 매일 매일 평일에. 평일에. 또 평상시 늘  평상의 장소, 평상의 보편의 형편 처지. 일반 생활 거기에서, 거기에서 네가  오늘 말씀대로 사는 그것이 앞으로 대환난 때에 말씀대로 사는 그거다. 그러면,  오늘에 말씀대로 사는 것이 그것이 그때 대환난 때에 말씀으로 살지, 오늘에  살지 안하고 그때에 아무리 해도 안 돼.

 오늘에 사는 그것을, 그것은 힘을 쓰면 사는 것인데 오늘에 사는 것을 대환난  때에 말씀대로 살라고, 대환난 때에 주님을 배반치 안하려고 애를 쓰는 그  애씀의 십 분지 일일랑 내두고 백분지 일만 힘을 써도 오늘에는 말씀대로 살  수가 있는데, 곧 오늘에 쉽게 말씀대로 사는 그것이 이다음에 아주 생명 다  내놔도 말씀대로 살기 어려워 생명을 내놓을라 해도 마지막에는 말씀대로 못  살고 그만 탈선되고 맙니다.

 그때 경북에 있는 서 목사님이라고 거창 와서 해방 직후에 와 가지고서 그때  집회를 했는데, 그 목사님은 어떤 목사님이냐 하면은 감옥에 가 가지고 육 년  동안 신사 참배 반대하고 갇혀 가지고 있다가 칠 년 돼 갈라고 할 때에, 육 년  마지막 될 때에 자기 부인이 와 가지고서 '이제 우리 가정은 이렇게 다 절단이  났습니다. 교인들이 우리를 멸시를 하고 이렇게 천대하고 아무 목사님 평소에  반대하던 그 사람들이 지금 승리를 해 가지고 권세를 얻어 가지고 이래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부 절단이 났습니다.' 그라니까 그 목사님이 있다가 '그래.

그거 분하다. 내가 이래 들어 있으면 가족을 돌보든지 안하고서 분하다. 그러면  내가 나가지.' 그래 가지고 나가 버렸다 말이오. 마누라의 그 충격에 충격받아  가지고서 그만 나와 버렸어. 그래 가지고 '뭐 나도 이제 신사 참배 인식이  됐습니다. 내가 신사 참 배 하겠습니다.' 하고 나와 버려. 나오고 난 다음에 오  개월인가 지나고 난 다음에 해방이 돼 버렸어. 오 개월인가 뭐 사 개월인가  지나고 난 다음에 해방이 됐어. 그러니까 주 남선 목사님이 그래도 그동안  감옥에서 있고 그랬고 나와서 부흥사를 청하려고 해 봤자 출감한 사람 외에는 별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그분을 청해 가지고서 그때 집회를 했었습니다. 집회를  했었는데, 아주 그렇게 이기다가도 그만 나중에 실패하고 나왔다 말이오.

 실패하고 나온 그것이 어떻게 되어 나왔느냐? 그 사람이 그라면 한 열  동가리라면. 십 분이라면 십 분지 구는 승리했는데 시간적으로는 십 분지 일을  승리하지 못하고 패전했다 그 말이오. 십 분지 일을 승리하지 못하고 마지막  최종까지 승리하지 못하고 패전했다 말이오. 패전했는데, 그러면 그 때에 다른  사람은 다 패전했는데 그 사람은 십 분지 구분은 승리를 하고 십 분지 일만  남았는데 고걸 승리하지 못하고 패전을 해 버렸다 말이오.

 그 패전한 그것은 왜 그러냐? 평소에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십  분지 구는 살았고 십 분지 일을 살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발표된 정확한 실력  채점 점수라. 그것이, 자기가 평소에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하나님 말씀대로 산  그것이 얼마나 살았느냐? 반 산 사람은 반 승리하고 반 패전하고, 십 분지 일 산  사람은 십 분지 일 승리하고 패전하고. 하나도 안 산 사람은 하나도 승리 못  하고, 십 분지 십을 산 사람은 십 분지 십의 승리를 했다 그거요

 그래 어제 아침에 그런 말을 했는데, 평소에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찌 했느냐  하는 그것을 간추려서 마지막에 그 실력 채점을 하는 것이 그것이 대환난이다.

그러기 때문에 평소에 신앙생활하는 그것이 대환난 때에 신앙생활하는 것이요,  평소 신앙생활에 패전한 것이 대환난 때의 신앙생활에 패전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평소에 고 신앙생활하는 그것이 오늘 이 평소에는, 평소에 신앙생활 한  그거는 자기가 이기려면 이길 수 있고 말씀대로 살려면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는 건데 고게 뭐이냐? 대환난 때에 신앙생활 하고 못 하는 고게 바로 고거라.

평소의 신앙생활 이 대환난 때의 신앙생활이요. 역경 때의 환난 생활이요 천하  사람이 다 패전하고 꺼꾸러지는 그때의 신앙생활이기 때문에, 요 평소의 생활이  고 생활이 고 생활인 줄 알고 평소에 승리하면 그때에 승리한다.

 그러기 때문에, 평소 생활은 어떤 것이 평소 생활인고 하니 지극히 작은 생활이  평소 생활이다. 또 지극히 큰 생활은 어떤 생활이냐? 대환난 때의 생활이 지극히  큰 생활이다. 그러기 때문에, 평상시 평소의 생활 하루 하루 한 시간을 살 때에  요것이 대환난 때의 생활이기 때문에 요것이 어떻게 평소에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는가, 십 분지 일을 살았는가 십 분지 오를 살았는가 십 분지 십을  살았는가 요것의 총 결산을 해 가지고 하나님께서고 결산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그것이 대환난의 환난의 시험이다 그것을 어제 아침에도 말했습니다.

 저도 어제 아침에도 말하고 '저가 나를 사랑한즉' 하는 것을 말하다가서 요렇게  사랑하되 평소에 평상시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 소용 없다 하는 그런 말  하다가 지극히 작은 데 충성하는 자는 지극히 큰 데도 충성하고 지극히 작은 데  불의한 자는 큰 데도 불의한다. 평상시 평소 평소에 말씀대로 지키지 못한  사람은 대환난 때도 말씀대로 지키지 못한다. 평소에, 평소에 작은 범죄를 한  사람은 대환난 때의 범죄 큰 범죄를 하게 된다 대패전하게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환난을 주시는 것은 와 뭣 때문에 환난을  주시느냐? 대환난을 주시는 것은 네가 평상시에 신앙생활을 어떻게 했나 하는  것을 주님은 알고 계시지마는 자기는 모르는데 자기는 지금 평상시에 신앙생활을  십 분지 일을 신앙생활 하고 십 분지 구는 어기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대환난  때는 이길 수 있으리라고 이렇게 생각하지마는 그것이 총총 모여 가지고서  나중에 고대로 답안이 나오기 때문에 안 된다. 그런고로, 자기도 모르는 무력한  자인 것을 알게 하는 것이요, 또 실력 있는 자를 모든 사람이 모르기 때문에 이  사람은 평소에 말씀대로 산 실력 있는 사람이다 하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광고를  해 주는 그것이 대환난이다.

 그러기 때문에 왜정 말년의 신사 참배는 우리나라에 선교 육십 년인가 된 육십  년인가 얼마인가 육십 몇 년인가 됐었는데, 육십 몇 년 동안 한국 교회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했노 이제 그 실상을 발표할 터이니까 그 실상의 발표를 봐라  하고서 실상의 발표가 뭐이냐? 그것이 신사 참배라는 그 문제를 내놓으니까 그저  자기 평소에 신앙생활 한 고대로의 답이 정확한 답이 나왔습니다. 하나도 평소에  신앙생활 안 한 사람은 신사 참배 때에 다 패전 했고 또 조금 한 사람은 조그매  승리했고.

 우리 교회 지금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거창읍에 ○○○장로님이라고 있고  모두 장로님이 뭐 ○○○ 장로님이라고 있고 거기 모두 장로님들이 많이  있었는데 신사 참배가 있으니까 다 신사 참배를 안 해야지. 이래 가지고  들어갔다 말이오. 들어가 가지고서 두 달 만에 자복하고 나온 사람 석 달 만에  자복하고 나온 사람. 이렇게 나왔습니다. 나중에 자복을 하고 나오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됐느냐? 내가 그때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기 때문에 내가  인사하러 갔었습니다. 인사하러 가니까 떡 뭐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나한테  말하기를, 부끄러우니까 '주 남선 목사님은 그분은 천국 못 갑니다. 천국 못  갑니다. 지옥 갑니다.' 이래. '와 그렇습니까?' 이라니까, 나보다 나이가  많았어요. 노인이고 나는 그때 젊은 청년인데. '왜 그렇습니까?' '아, 자기  구원만 잘 이루려고 가정도 다 돌보지 안하고 양떼들도 돌보지 안하고 감옥에  들어가 가지고 있으니까' 제가 범죄하고 나니까 그만 신사 참배 한 사람편이 돼  가지고 그렇게 역설을 해요. 그래 가지고 나하고 한번 다퉜어. 싸웠습니다.

'장로님, 성경을 어떻게 보고 그렇게 말하느냐? 그게 틀렸다. 주를 위함이  승리요 주를 위함이 가정을 위함이요 양떼를 위함인데, 신사 참배 하는 것은  우상 섬기는 제이계명과 일계명을 다 범하는 것인데, 그게 그라면, 그거 범하고,  그걸 범하고서 자기가 가족을 데리고 있고 자기가 양떼를 데리고 있으면 뭐 할  거냐? 어떻게 그렇게 그만 꺼꾸로의 사람이 됐느냐?' 그래 가지고, 그날  장날이라. 장날 막 대판으로 막 싸와댔습니다. 싸워대고 그라니까, 뭐 그때 신사  참배 반대하는 사람만 있으면 잡아 죽이고 그만 감옥에 가둡니다. 그렇게 나는  하고 돌아다녀도 아무도 말을 안 해. 그때 그라니까 신사 참배를 반대하고 이래  다녀도 저는 감옥에 갇히지 안했습니다. 신사 참배 때문에는 두드려 맞지도  안했고.

 그러니까 고 평소의 신앙생활 평소의 신앙생활 그것을 자기가 자기를 모르는  자기에게 자기를 알려 주고 나를 다른 사람이 허무하다는 것을 모르고 공연히  이렇게 칭찬해서 그 목사가 제일이다 뭐 뭐이다 뭐이다 하는 그것을 과도기의  대환난을 통해 가지고서 이는 가짜다 이거는 십 분지 일밖에는 신앙생활 안 한  사람이요, 이 사람은 십 분지 오 신앙생활 했으니까 봐라 이제 반은 이기고 반은  패전하고 말 것이다. 이 사람은 십 분지 구를 신앙생활 했기 때문에 십 분지  구는 이겼지마는 십 분지 일을 해서 패전할 것이다. 두 달 남구고 패전할  것이다. 석 달 남구고 패전할 것이다. 넉 달 남구고 패전할 것이다. 두 달 감옥  생활하다가 나올 것이다. 석 달 감옥 생활하고 나올 것이다. 이게 그 진상이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알지 못하는데 평소에 그 사람이 나를 주님을 말이오.

주님이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고 내 말을 배반치 아니한 그것을 내가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이런 환난 줬다.'  그러니까 주 남선 목사님 그런 사람들은 사람이 뭐 아주 겸손하지 용하지  웅변도 없지 이라니까, 그전에는 총회 하면은 그분은 총회 할 때에 말석에  말석의 말석의 하나 총회원입니다. 총회원이라. 누가 그런 사람 압니까? 돈이  없어 신학교를 구 년 만에 졸업을 했는데. 이러니까 이랬지마는 말씀을 당신을,  참 말씀대로 믿음을 지켜 살았다 말이오. 믿음을 지켜 살았으니까 하나님께서  신사 참배로 가지고 이래 떡 거석하니까 그만 신사 참배로 승리하고 나오니까  해방 후에는 마구 주 남선 목사님이, 남한에서는 주 남선 목사님 한 상동 목사님  그때 이런 분들이 제일이오. 한 상동 목사님을 첫째 꼽았고 둘째를 주 남선  목사님을 모두 다, 한상동 목사님은 또 말을 잘하고 이라니까, 이렇지마는 주  남선 목사님을 모두 뒤에는 말하기를 '주 남선 목사님이 있었으면 우리  ○○교회가 이렇게 되지를 안했을 것이다. 또 주 남선 목사님이 있으면 이런  사람들을 이렇게 끊어 버리지 안할 것이다.' 그래 가지고 모든 인재들을 저거  비위에 맞지 않다고 척척 끊어 버리고 나니까 인재들이 다 나가 버리니까 푹  무너질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이 평소의 우리의 신앙생활 여하 그것을, 하나님께서 평소에 당신을 어떻게  대우했는가 그것을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 평소 당신을  대접하고 섬기는 믿음 지킨 사람을 모든 사람에게 광고해서 알리기 위해서, 높이  등용하기 위해서 대환난을 주시는 것이고, 또 평소에 신앙생활 하지 않은 속에  텅텅 빈 깡통 같은 허무한 것이 말로 가지고서 그 사람이 제일 왕 노릇 하고  총회장 노릇도 하고 뭐 노회장 하고 이렇게 하는 그것을 쭉덩이라 하는 것으로  날려보내기 위해서 대환난을 주시는 것이라 그거요.

 그러거 때문에, 어제 아침에 제가 말하기를 대환난의 이 어려움의 때는 평소의  신앙생활을 어찌 했느냐 하는 그것의 총 결산의 답안을 나오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런 말 늘 해 나오기 때문에 저도 평소에 자꾸 이거  신앙생활을 양보치 안하고 해야 그것이 대환난 준비가 되는 것이고 되진다  이랬는데.

 엊저녁에 설교할 때에 하나님과 같이 있어야 된다. 한식구들이 자꾸 한 자리에  한 솥에서 밥을 먹고 한집에 같이 살고 이러면 서로 친하게도 되지고 또 알게도  되고 또 음성도 알게 된다. 부부간이면 자꾸 이제 같이 살았기 때문에 아내의  음성을 알 수가 있고 남편의 음성을 알 수가 있다. 그러니까 주님과 같이 살아야  주의 음성을 알 수가 있다. 주의 음성을 알아야 알아들어야 우리가 믿음을  지켜서 당신에게 피동 될 수가 있지 그렇지 않으면 피동 될 수가 없다 하는 고  점이 제가 요새 생각 하는 대로와 같아서  '아, 하나님과 나와 같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하나님과 같이 있지 안하고 이거  늘 금방 하나님하고 같이 있다가 또 하나님 또 잊어버리고 또 이래' 마치 철없는  어린 아이와 같이 금방 아버지와 가다가 그만 동무 만나니까 그만 동무하고  거석해 버리고 아버지도 모르고 그 동무가 나쁜 동무인지도 모르고 따라가기  쉽다 말이오. 그러면, 생각하다 보면 그만 일 사건 생각하다 보면 주님 잊어  버렸지, 누구 하나 만나면 그 사람하고 얘기 하다 보면 그만 주님 잊어 버렸지,  사람 만나도 주님 잊어 버렸지 일 만나도 주님 잊어 버렸지, 좋은 일 만나도  주님 잊어 버렸지 나쁜 일 만나도 주님 잊어 버렸지, 도무지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과 늘 연결하는 그 연결을 가지지 못하고  끊으니  그래서 제가 생각하면 염려가 되는 것이 앞으로 과거의 신사 참배 같은 그런  어려운 환난이 오면 뭐 아무 무서움도 없고 문제도 없이 고만 염려도 없이  생각도 없이 이렇게 통과할 수 있는 그런 앞으로 미래가 있을까 걱정이 됩니다.

그때는 기도를 많이 했고, 전적 기도할 수 있고, 그때는 제가 하나님과 동행을  많이 한 거 같애요. 이랬는데. 요새는 그만 이 나쁜 버릇이 들어서 이 사람  만나고 이야기 하다 보면 그 사람에만 막 열중해 가지고서 이렇게 저렇게 말하고  그만 그 사람하고 말을 하면서 주님하고 나하고 같이. '주님 나에게. 내 안에  계셔서 주님이 계시니 주님께서 날 주관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내가 이 사람이게  대해서 말하게 해 주옵소서' 이게 속으로는, 자꾸 한쪽으로는 시도하고  한쪽으로는 주님과 교제하면서 주님에게 들은 것을 말해야 되는데 고만 말하다  보면 그만 깜빡 잊어버리고, 그만 주님 잊어버리고 사건만, 사람만 상대하고  말하는 이런 일이 자꾸 저에게 자주 있다 그 말이오.

 이래서, '앞으로 이거 큰일이다.' 그래서 앞으로 내가 평소에 주님을  잊어버리는 시간 많았으니 대환난 때에 주님을 잊어버리고 내가 내몰라라 하고서  이렇게 부인하는 그런 인제 패전할 거 아닌가, 그리 아니면 패전을 안 하면 그때  몽둥이로 두드려 맞고 막 고문과 고형을 당해 가면서 그때 승리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고문과 고형당할 것도 없이 벌써 승리해 버리니까 마귀가 달려들지도  못하는 그런 승리가 더 좋은 승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하루 삼십 분씩 기도하는 이것이 길이 돼 가지고서 삼 십  분만 기도할 게 아니라 엊저녁의 말씀과 같이 한 솥에 밥을 먹고 밤낮 같이  누워자고, 같이 누워자고 하는 제일 가까운 사람이 부부간이요 부자간이요 모자  모녀간이고 이러니까, 제일 가까운 사람이 그 식구이니까 가까운 사람이 식구니  가까운 사람은 안면도 알게 되고 또 음성도 알게 되고 성질도 알게 되고 알게  되니까 친하게 돼진다 주님하고 같이 있어야 주님과 친하게 되고 주님도 어떤  주님인지 알게도 되고 주의 음성도 들을 수가 있다. 누가 전화하면서, 자기가 또  전화하니까, 마누라가 전화하니까 '누구십니까? 누구십니까?' 이라면 그 아내가  있다가서 여보 날 모르냐고 고함을 빽 지릅니다. 그럴 것 아니겠습니까? 함께  있었으니까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다 그 말이오. 그래 그런 말하는데 '과연 옳다.

내가 주님하고 같이 있지를 못하고 떨어질 때가 많이 있으니까 주님과  서먹서먹해지지 않겠느냐? 같이 동거 동행하는 것이 이것이 제일 중요하다  그러면, 에녹도 하나님과 동거 동행 해 가지고 됐다. 그러면 한 시간도 주님  잊어버리고 살지 안하고 주님과 동행해야 되겠다.

 주님과 동행하는 게 뭐이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꼭 영감대로 살지  안해도 말씀대로 사는 것이 주님하고 동행하는 것도 되고 주님 안에 있는 것도  있고 주님과 한 발 멀리 떠나서 멀리 한 발 떨어지게 주님과 동행하는 것도 있고  또 한 몇 미터나 십 미터나 이래 떨어져서 주님하고 같이 이와 같이 하는 것도  있고 이러니까, 말씀에 거기에서 영감에 딱 명중되면 딱 함께 들어붙어서 같이  있는 것이고. 이제 말씀에 명중하지 못해도 하나님 말씀 안에 있는,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것이 되어 진다. 그러면,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것도,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이 가까이 있는 것도 되고, 또 주님과 둘이 손을  잡고 이래 있는 것도 성경 말씀을 지키는 그것이 고게 되는 것도 있고, 또  주님은 내 안에 나는 주님 안에 있는 그것도 성경 말씀 지키는 그것이 될 수가  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과 같이 있어야 친해지고 알고 그분에게 복종할 수가 있다  하는 그 말에 대해서 어제 저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뭐 처음에 설교는 좀 여기에  설교를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두더기 설교를 하는 것 같은데 속에,  '영감은 있다.' 보니까 하나님이 붙들고 말을 해서 제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처음에는 제 말로 이래 하다가 마지막에는 성령이 붙들고 말하는 그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 되면 앞으로 목회 할 그런 희망은 있기는 있다 그렇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여러분들이 기억할 것은 평소의 그 생활, 평상시의 생활이  대환난 때의 생활이다. 평상시 말씀 지키는 것이 대환난 때에 말씀 지키는  것이다. 평상시에 주를 사랑하는 것이 대환난 때에 주를 사랑하는 것이다.

평상시에 주님을 배반치 안하는 것이 천하 사람이 다 주를 배반할 수 있는 그  대환난 역경에서도 주님을 배반하지 안할 수 있다. 그러면, 평상시 주님과  나와의 관계된 그것이 대환난 때도 고대로의 관계가 되어진다. 이것이 기름  준비다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을 하고서  어쩌든지 평소에 우리가 주님과 동행할라 하면은 주의 말씀 딱 들어맞지  안해도, 딱 들어맞지 안해도 비슷해도 된다 말이오. 주의 말씀대로지 키면은 딱  들어맞지 안해도 그래도 주님과 가까웠고, 가깝고 주님을 멀리 떠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울장 안에 있다 말이오. 성경 말씀대로 행하면 한 울타리 안에 있기는  있어요. 한 울타리 안에 있기는 있어요. 성경 말씀대로 사는데. 성경 말씀대로  살아도 주님과 좀 아주 가까운 사람 멀리 가까운 사람, 성경 말씀대로 사는데  요렇게 살아서 영감이 찬성할 수 있도록 말씀대로 산 거기에 성령의 감동이  동행하면은 주님과 딱 들어붙어 버리고 말이요. 그러니까 우리가 말씀대로 자꾸  이와 같이 살면 우리가 차차 차차 주님과 가깝기 때문에 변화가 되어져 가지고  변화가 되면 또 진리를 새로 알고 요렇게 해서 친근해진다는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네, 어쩌든지 우리가 주님과 떠나지 안한 식구가 되어지면 주님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평소에 주님을 다 잊어버리고 있다가 환난 오면 그때 가서,  암만 해 봐야 소용 없어. 기름 준비가 평소에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같이 살아서 사귀고 친하는 것입니다.

 네, 기도록에 등록된 사람은 육천 칠백 삼십 칠 명입니다. 육천 칠백 삼 십 칠  명이 등록하고 기도하는데. 어쩌든지 빠지지 말고 매일 삼십 분 기도를 요것을  앞으로 미래의 자기 가정과 자기 교회와 자기 개인의 신앙을 위해서 잊어버리지  말고 계속 꼭 기도해 가지고서 요것이 차차 차차 삼십 분 기도하는 것이 이제  나중에는 하루종일 주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지고 주님과 동거 동행하는  사람이 되어지면은 앞으로 어떤 환난이 올지라도 그거는 우리에게 영광만  되어지고 우리에게 참 승리만 되어져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신앙생활 한다는 걸  당신이 드러내 보이는 영광만 되어지지 아무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그때 신앙생활같이 지금 그렇게 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안 될 거 같애.

그래 걱정입니다. 그때는 일본 부장 앞에서. '그러면, 신사 참배 안 하면  가둔다고 하는데 신사 참배 한다는 그 천조대신을, 아마 데라스오 미까미  이가미다나에 놔 놓은 걸 날 도라. 그거는 너거가 몰라 그렇지 아무것도 아니다.

날 도라. 이러면 너희 앞에서 내가 불을 사룰께. 그러면 내가 벌받을 거  아니가?' 아, 그 아마데라스 오 미까미를 불에 태운다 했으니까 얼마나 기막힌  소리요? 또 국기에, '히노마루, 국기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나라 표징이지 아무것도 아니다. 국기 나한테 도라. 내가 너희 앞에  불사를께. 그러나 벌은 내가 받을 거 아니가?' 이런 말을 한 그것이 그게 아무  뒤에 가서 문제가 되지 안하고 그만 그대로 통과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때에는  당신만 바라보고 이라니까 여기 아해서는 불문에 붙여. 여기서 이 사람에 대해서  무슨 소리 해도 너거가 상관하지 마라' 이래 버렸기 때문에 그만 그 사람들이 뭐  꼼짝을 안 했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우리가 평소 생활이 대 환난 때의 생활이라는 거 단단히 기억  합시다. 나는 평소에 그때 모양으로 그렇지 못해. 그때는 내가 잊어버리지는  안하고 주님을 내가 사모했었는데 지금은 그만 이 분주한 게 있어. 부산 와  가지고 백 목사 영 버려 버렸어요. 자꾸 와 가지고 이 사람 만나니까, 이 사람  만나니까 또 이 말 하다 보면 잊어버리고, 저 사건과, 자꾸 이거 뭐 교회니  뭐이니, 교회는 자꾸 여러 교회 된다 하니까 이 교회 얘기하다 보니까 나중에  그것만 자꾸 머리에 있어 가지고 고통이고 주님은 잊어 버린 일이 많애.

 요새는 인제 주님 잊어버리는 일을 안 하려고, 주님 잊어버리는 일을 안 하려고  지금 애를 쓰고 있습니다. 애를 쓰고 있어서 인제 모든 것을 다, 그래서 주님  잊어버리지 안하려고 그전에 있던 옷도 다 집어던져 버리고 이제 또 인제 모두  거처하던 데 집도 획 뜯어서 없애 버리고 또 나무 있는 것도 다 캐 내버리고  이제 언제든지 청청한 것을 지금 내가, 회개하는, 죽는 나를 다시 희생시켜 주신  기념수를 지금 요새는 심으는데 어제까지 다 심었습니다. 인제 어제까지 다  심어서 그 기념수 심으는 것을 어제까지 끝을 마쳤습니다. 이래서, 그래 좀 한번  해 볼라 하는데, 이거 환난 전에 얼른 해서 또 앞으로도 대환난 와도 그저  웃으면서 지나가고 승리 할수 있어야 되는데 그렇게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든지 평소 신앙생활이 대 환난 때의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을 단단히  기억합시다.

 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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