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상대 방법

 

1983. 4. 18. 월새

 

본문 : 출34:29-31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모세가 그들을  부르니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들을 때에 그분의  외부까지가 변화됐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하시는 그 말씀을 듣는 그  말씀을 인함이 아니고 그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상대하는 거기에서  자기는 변화됐던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상대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했으면 그 모세는 변화되지 못하고 기절하게 됐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형상을 생존하신 하나님을 대면하는 그 믿음에서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소망과 위로와 평강이 오고 그는 변화함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는 말씀을 들을 때에 사십 주야를 식음을 몰랐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상대하는 데는 우리의 이성 비판으로서의 인격이 다 그분을 상대할 뿐만 아니라  본능적으로 그분을 상대하는 이 산 자의 인격 대 인격의 교제가 있는 여기에서  말씀은 하나님과 그 듣는 자의 관계에 화친을 일으키고, 또 밀접한 소망을  일으키고, 또 하나님의 안보가 자기에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밖에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두렵고 기쁘고 평안하고 만족한 소망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제일 중요한 것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데 이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인 것을 먼저 깨닫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신비한 인격 존재입니다. 다른 동물에나 곤충에나 식물에나 그런 데에  없는 천군 천사에게도 없는 신비한 인격성 곧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감각은 예민하고 활발하고 또 잘 감화되고 동화되고  변화될 수 있는 존재로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전히 변화의 완성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목적으로 그렇게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에서 물건을 대하든지, 짐승을 대하든지, 사람을 대하든지  대할 때에 우리의 몸뚱이만이 아니고 몸뚱이 안에 그 마음이 상대하고, 또  정신이 상대하고, 우리의 모든 신경들이 상대해서 우리의 속 마옴, 정신, 정성  이것이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움직일 때에 상대방과의 아무런 그  물질적 연결이 없어도 신비한 관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운 것을 만날 때에 두려움으로 우리는 온 몸에 가득 차게 되고, 또 반가운  것을 만날 때에 반가움으로 가득 차게 되고, 아주 흉한 징그러운 것을 만날 때에  징그러움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불교인들은 불상을 그것을 보면서도 그들은 주관적 변화를  받습니다. 그러나 기독자들은 아무런 그런 형상 없는 하나님을 상대하기 때문에  오히려 우상을 만들어 놓고 상대하는 것만치 우리의 마음에 속한 모든 요소의  부분들이 감각하는 그 감각이 생겨지지 않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많은 하나님의 권능을  보았지만 그들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고 난 다음에 아무리 하나님을 묵상하고  생각하려 해도 자기들이 형체가 보이지 않으니까 실감이 느껴지지 아니 하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가 실감을 가질 수 있는 무엇인가 보이는 유형의 상대를  하나 만들어 주시오' 해 가지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들이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 기독자들도 그저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하나의 서적을  읽는 것과 같이, 또 하나의 이런 그저 자기 혼자 공상을 하는 것과 같이, 또  어떤 서적 중에 하나를 보는 것과 같이 그렇게 생존하신 인격 상대를 하지  아니하고 다만 문서 그것만 귀로 접해 가지고 마음으로 끼는 그런 사람들 되기  쉽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나 그 말씀이 지식적으로 그에게 머물기 쉬우니  교만케 하고 또 율법적으로 머물기 쉬우니 정죄받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에 이 말씀하신 분을 우리가 만나기 위해서  말씀을 듣는 것이고, 또 이 말씀으로 그분을 소개받기 위해서 듣는 것이고,  그분이 무형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나타신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 말씀을 받는  이 사실을 자기가 욕망하면서 이 말씀을 살아계신 주님이 나에게 지금 말씀하고  계시니 그분을 상대하는 이 인격의 인격 대화를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다가 또 잘못하면 이스라엘이 금송아지와 같이 아무 무형의  존재를 생각하려 하니까 처음에는 연습이 안 돼서 무형의 존재를 아무리  존재한다고 생각하려 해도 무형이기 때문에 내게 인식이 안 되고 실감이  되어지지 아니하니까 이 주님을 생존하신 주님을 상대 하려고 하면서 자기는  온갖 노력을 하기 쉽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이시라, 또 나 위해서 도성인신하셔 가지고 오신  분이시라, 또 제자들에게 도복을 입고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한 분이시라.'  예수님이 육체를 가지시고 세상에 계실 때의 모든 그 형상을 자기가 추상합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은 주님을 상대한다는 것이 하나의 자기가 만들어 놓은 그  유형의 존재를 상대하기 때문에 그것이 결과는 우상 숭배로 화해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사람들이 성화라 해 가지고 예수님을 그림 그린다 하면서 예수님은  이렇게 생겼다 저렇게 생겼다, 이런 분이시다. 저런 분이시다. 해서 각각 자기  마음대로 그림을 그려 가지고 성화라고 팔고 있는 그것이 하나의 기독교를  우상화시키고 하나님을 접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을 접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악령의 그 우상 종교적인 이종교로 변질시킨다 하는 그것을 알기 때문에 성화를  용납지 아니하고 그런 것을 다 배격합니다.

 성경에 있는 인물들 가운데에 그 인물들의 초상들이 남아 있는 것도 있고 또  그때에 그 배경들이 남아 있는 것도 있는 그런 것은 얼마든지 그릴 수 있지마는  주님은 그런 것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음행한 여인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여인을 돌로 치려 할 때에 예수님께서  땅에다 글씨를 쓰심으로써 그들을 반성시키고 자각하게 하시고 그러고 난 다음에  그것을 다시 뭉캐서 없애버렸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하나의 필적도 남겨 놓은  일은 없습니다. 하나의 그뭐 사진이나 초상이나 그런 것도 남겨 놓으신 일이  없습니다.

 그것은 후세에 사람들이 타락한 사람이라 심령이 어두워 마음의 눈은 어둡고  육체로만 되어 있기 때문에 영은 죽었고 또 마음은 있으나 그 마음은 이 몸에  주권을 가지지 못하고 몸이 주권을 가지고 제일 강하고, 그 다음에는 마음이  강하고, 이래서 고기덩어리에게 마옴이 지배받고 따라오고 영은 완전히 죽어서  기능적으로 작용적으로는 없는 것과 같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고기덩어리의 눈으로 봐야 인식이 되지 그 마음의 눈으로는 볼  만한 그런 심령이 밝지를 못하기 때문에 자꾸 하나님을 주님을 생각할 때에  주님은 이 우주와 영계보다 크시고 그것들을 만드시고 또 영원히 불변하시고  완전자이시니까 그 존재가 무엇보다도 확고하고 완전하고 영원 불변하고 지극히  크신 분이시지마는 사람들은 그분에게 지음받은 어떤 존재는 인식을 하지마는  그분은 인식을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위험 방지로 주님에게 관한 것은  필적 하나도 남기지를 아니하시고 초상 하나도 남기지를 아니한 것은 주님에게  관한 어떤 그 물체나 물형이나 그것을 상대하는 우상 종교화되는 것을  방비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그것을 금하신 것입니다. 그 뒤에 신구약 성경을  영감으로 계시해서 보여 준 것뿐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저 하나의 글로, 하나의 서적으로,  하나의 책을 읽는 것으로 이렇게 성경 말씀을 상대하는 것도 그것이 다 잘못돼서  능력이 없고 자기를 도로 교만케 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고,  또 말씀하시는 이 크신 주님을 내가 상대해서 내 원형이 되어 있는, 나는  인격을 가진 자인데 인격의 원형인 그 신격을 가지신, 신격으로 생존해서 우리의  모든 지정의를 다 지으셨고, 우리에게 희로애락을 다 허락하셨고, 심지어 우리의  마음의 뜻과 생각까지 다 낱낱이 감찰해서 그것을 행위라 말씀하시고 심판하셔서  영원한 보상과 복수를 일으키시는 이 절대자이시지마는 이분을 그저 존재를  인식도 하려고 상대 하려고도 하지 아니하고 문서로만 이렇게 보고 생각하고  읽어서 자기를 교만케 하는 그런 사람도 우리가 벗어나야 되겠고,  또 이렇게 찾고 갈급하나 내 육체의 눈으로 보는 그런 유형의 어떤 존재를  만나려고 유형적인 하나님을 만나려고 이렇게 고집하고 생각 하는 이런 것도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이래서 천주교에서 그들이 미사를 한다고 하는 것이나 그들이 동상들을 많이  만들어 가지고 한 것은 그는 벌써 마귀의 종교화되어 가지고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육안으로 볼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육안으로 보는 이것을 위주로 해  가지고 사람을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끌어내 가지고 우상 종교를  만든 것이 천주교인 것입니다.

 천주교는 그는 활동이 심히 광활합니다. 그래서 온 세계를 앞으로 한 권세가  점령할 때가 있는데 그 점령하는 그 점령권이 무엇이겠느냐? 어떤 사람은  '유태인이 한번 점령할 것이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학자들은  '천주교라. 천주교가 인제 점령할 것이다.'  천주교는 지금도 그들은 정치 사상을 가지고 세계를 천주교화시켜서 통일하려는  그런 아주 강경한 그런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종교나  사상이나 그 경계가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다 용납하고 다 교제를 가져서 거게  침투해 가지고 세계를 천주교화하려는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때는, 목적은 교회를 삼키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교회를 아주  냉대하게 교회를 전멸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일 때는 전멸시키는 그 역사를  했고, 이것은 전멸시키려는 그 방법 가지고는 안 될 때에는 타협하는 그런  방편을 썼고, 또 타협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통일이 되어서 하나가 되어 가지고  그 안에 들어가서 역사하는 것이 더 천주교화 우상화 완전히 마귀화시키는 것이  유리하다 보일 때에는 그 방편을 써서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 사람의 부패한 어두운 사람에게 영보다 마음, 마음보다 고기 덩어리,  이제는 고기덩어리보다도 물질, 이래서 정 꺼꾸로 돼서 지금은 이 물질이 왕이  되어 있고, 고기 덩어리가 그 다음 되어 있고, 인간의 심령은 -심령은 양심까지  합한 것인데-심령은 맨찌끄러기로 천해져 있고, 사람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영은 활동을 못 하게 돼 가지고 있는 완전히 꺼꾸로 되어 있는 세상에,  하나님이 제일, 인간의 주격은 영, 또 인간에게 제일 중요한 기관인 요소는  마음, 그 다음에는 몸, 그 다음에 이용될 모든 소유물들이 모든 만물들이라  이렇게 하는 것이 기독교이기 때문에 기독교와 세상과는 정 반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모세가 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그 대화에서 자체가 변화된 것, 대화인 줄 알기 때문에 변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인격 상대인 주님을 생각지 않고  글로만 지식으로만 하나님 말씀을 듣게 될 때에 그 사람은 많이 돼 봐야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면 글이 가르치는 대로 서적이 가르치는 대로 서적적인 인물이  돼 버리고 맙니다. 서적적인 인물이 되면 그것으로써 족한 줄로 알지마는 그것도  역연 땅에 속한 자입니다.

 우리가 처음에는 안돼도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에서 가르친 주님, 성경에  나타나신 주님, 살아계신 주님, 이 성경에 나타나신 살아계신 이 하나님을  자기가 상대하고 있는 이 사실을 자기가 자꾸 느끼면서 '주님은 성경에 가르치신  대로 이런 주님이시라, 이렇게 사랑의 주님이시라, 긍휼의 주님이시라, 주권의  주님이시라, 또 심판의 주님이시라, 소멸하는 불의 주님이시라, 희로애락을  가지진 주님이시라.' 이렇게 성경이 말한 대로의 살아계신 주님을 상대하려는 요  마음을 가지고 성경에게 소개를 받을 때에 그 사람은 자기의 마음이 변해지고,  모든 소망이 변해지고, 의뢰하는 것이 변해지고, 또 비판과 평가가 변해지니까  자체가, 성령과 영은 하나돼 가지고 우리에게 증거하는 것인데 성령이 우리 영을  통하여서 증거할 때에 우리 마음이 먼저 변화되고, 마음이 변화된 것만치 우리의  모든 몸에 기관, 신경이나 근육이나 이런 것들이 다 변화되고, 그것이 변화됨에  따라 이 피부까지 변화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생존하신 인격자이신 하나님을 상대하는 이 상대가 없이 그저 성경을  글로만 지식으로만 이래 읽는 것은 그것은 유익이 적고 오랫 동안 그렇게 읽으면  그 사람은 하나의 이 지식으로만 가지게 되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상대할 때에 우리는 느낍니다. 내게는 없었는데 그분을  사모하고 그분을 상대하면서 그분이 나에게 말씀해 주시는 이 말씀인 것을  자기가 새삼스럽게 느끼고 깨달을 때에 내 주관 역사가 아닌, 내 주관이 아닌  객관에서 내가 생각도 못하던 역사가 있는 것을 봅니다.

 무슨 역사가 있느냐? 성경 말씀이 믿어지는 도수가 다르고, 또 성경 말씀 안에  들어 있는 구비한 내용을 깨닫는 깨달음이 달라지고, 또 자기도 모르게 소원하는  것이나 모든 가치로 평가하는 가치를 정하는 그 평가도 달라져서 자기라는  속사람이 그렇게 새사람으로 변화가 되어질 때에 모든 외부에 자기의 몸과  자기의 생활까지 변화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신구약 성경은 나를 찾고 계시고 나를 상대하고 계시는  자존하신 지극히 크신 창조주요 주재자요 주권자이신 이 지극히 크신 이분이  나에게 나를 상대하고 계시는 이분이 어떻게 상대하며 어떤 분이신가 이분을  찾기 위해서 이분을 소개받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성경이 나에게 소개하시는 소개해 주는 이 주님을 내가 소개받아 만나고 그분을  따르고,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을 의지하고, 또 성경이 나에게 그분을 어떻게  상대해야 된다. 그분은 네가 어떤 분이시니 네가 그렇게 알아서 네가 자체가  변해져야 된다.

 이렇게 우리에게 성령으로 이 성경을 통해서 알려 주실 때에 먼저 그분을 차차  알게 되고, 또 그분의 뜻을 알게 되고, 또 그분의 방편을 알게 되고, 그분이  어떻게 역사하시는 것을 알게 될 때에 나는 거기에 동화되고, 또 거기게  감화되고, 거기에 귀속하게 되어질 때에 이제 세상을 상대하는 것이 그분으로  인한 상대가 되어지기 때문에 세상관이 아주 달라지고 만물관이 차차  달라집니다. 가치관이 아주 달라집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요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가 닮아서 입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 예수님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우리를 부르신 것은 예수님의 형상을 입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다 말씀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생존하신 주님을 상대함으로 우리가 과거에 두렵던 것을  상대할 때에 그 두려움보다 주님이 더 두렵고, 또 과거에 내가 모든 사은했던 그  모든 사은의 대상을 대할 때에 그 사은의 대 상보다 주님의 사은이 더 크고,  어떤 세력 있는 그 세력을 상대할 때에 그 세력보다 주님의 세력이 더 큰 것이  자기에게 믿어지고, 나를 어떻게 위협하는, 나를 해하려는, 그 나를 죽이려고  하는 그런 세력이 나를 상대할 때에 그 세력보다 더 크신 전능하신 주, 모든  활동에 주권을 가지신 주, 또 나를 사랑하셔서 심지어 머리털 한 낱 같은 그런  것도 다 주권하시고 개별적으로 섭리하고 계시는 주,  이 주님이 처음에는 자기에게 믿어지지 않으나 평소에 이 주님을 많이 상대해서  교제함을 인해서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먹만한 세력도 당할 때에 그  세력이 하나님보다 크게 보이는데 마지막에는 어떤 사람은 온 존재의 그  전세력을 다 합해도 주님의 그 세력과 능력보다 작게 보여지기 때문에 주님에게  귀속되고 주님을 향하는 것이 요동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 둘 연성시켜서, 주님 외에 아무도 없고, 주님 외에 사모할 이가  없고, 주님 외에 두려워 할 이도 없고, 주님 외에 바라볼 이도 없고, 주님 외에  맡길 이도 없고, 의지할 이도 없고, 우리에게는 주님 외에 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어. 주님만 있으면 그분이 나에게 필요한 것은 다 조절해 가지고 많을 때는  많게, 적을 때는 적게, 없어야 될 때는 없게, 그러나 주님이 떠나면 우리는 이리  저리 치우쳐 가지고 필요한 돈을 인해서 제가 죽고, 필요한 권세를 인해서 제가  죽고, 필요한 지식을 인애서 저를 망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생존하신, 우리의 인간의 천태만상의 인간의 마음의 구조 사람의  마음은 굉장하게 오묘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마음만 해도 그 속은 해부하면  굉장한 것이오.

 사람들이 의학적으로 뭐 육체를 연구해 가지고 '사람들의 세포까지도 그 사람의  한 인격체와 같은 그런 요소로 개 인격체를 가지고 있다,' 이 머리에는 컴퓨터나  뭐 십억이 들었다든가 뭐 들었다든가 말하는 오늘 과학들이 그렇게 봤는지  않는지 하나의 추론인지 모르지마는 그렇게 말하거든 하물며 이 고기덩어리가  아닌 사람의 심령이겠습니까? 사람의 마음의 구조는 굉장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마음에 수많은 구조를 만드시고 이것을 운영하시면서 이 모든 활동과 작용과  모순과 마찰 이 속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우리에게 조성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분을 상대하기 위해서 성경에게 소개를 받고 인도를 받는  성경 위치를 바로 깨닫고, 우리가 우리의 구주로 상대하는 그분은 서적 중 한  인물이, 한 상상적 한 인물이, 불교와 같이 추상적인 한 인물 그런 것이 아니고  자존하셔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운영하시고 보존하시고 살아계셔서 실질적으로  역사하시는 그분이신 것을 깨닫고 그분을 상대하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분을 잊어버리는 것이 그것이 성경에 음녀같이 주를 떠나는  것이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또 우리는 이상한 존재입니다. 이상한 존재라. 우리 위에는 두 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악령이 있습니다. 악령은 하나님이 지으신 천군 천사 위에  머리되었던 루스벨 천사라고 아주 권위 많이 있었던 것인데 이 천사가 악의를  가져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고 제가 하나님 되려고 하다가 쫓겨나 타락한 것이  악령입니다.

 악령이 제 버릇 그대로 에덴동산에 들어와 가지고 하와에게 '네가 하나님 돼라'  하는 것으로써 인간이 타락해서 멸망받은 것입니다.

 이 두 영이 우리보다 권위 있게, 지금은 우리보다 권위가 있습니다. 왜?  예수님의 대속으로 악령에게서 우리는 해방시켜서 악령이 우리에게 왕노릇은 못  하지마는 그의 실력이 우리보다 낫기 때문에 우리에게 온갖 유혹할 때 우리는  그에게 유혹을 받습니다.

 왕노릇은 못 한다는 것은 최종적인 절대적인 권리는 없습니다. 우리가 악령을  지금이라도 물리치면 나갑니다. 그러나 구속을 받지 못한 자는 왕권을 가지고  있고 있기 때문에 물리칠 권리 없어. 물리치면 대번 사형을 시켜 버립니다. 안  됩니다. 우리는 물리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우리의 심신은 다 구속을 받지 못하고 죄 아래 있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은 그 악령이 점령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도 세상에  계실 때에 그가 침노를 하고 그가 이렇게 제 마음대로 예수님을 침노하고  마음대로 형벌하고 마음대로 주장해도 예수님이 그에게 굴하지 않고 하나님과  연결된 것을 놓지 않았음을 인해서 그가 제 자유로 흔들고 마음대로 때리고  찌르고 이렇게 하다가서 예수님의 그 모든 존재가 하나님에게 연결된 소속한  화친한 그것을 털끝만치도 양보하지 않고 그대로 끝을 마치는 데에서 악령은  대패전으로서 이제 당하고 주님은 승리를 하신 것입니다.

 이 두 영이 우리 위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 생각 안 하면 마귀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을 사모 안 하면 두말 할 것 없이 마귀 사모하게 됩니다. 주님과  나와의 연결의 작용이 우리 심신에 없으면 영은 이미 연결돼 있지마는 심신에  없으면 악령에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아무리 분주 복잡한  때라도 분주 복잡한 분주 복잡을 만날수록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함께 그 분주 복잡을 상대하고, 분주 복잡을 분석하고, 분주 복잡을  처리해야 됩니다.

 또 의외에 만난 사람, 반가운 사람, 또 두려운 사람, 원수, 먼 사람 사람을  만나든지 물건을 만나든지 무엇을 만날지라도 우리는 잘못하면 그것 만날 때에  주님은 잊어버리고 그것하고 나하고 둘이 상대해 가지고 갑론을박 하다가서  마치는 이것이 이제 주를 떠난 음녀같이 떠난 것이요 이것이 곧 신령적으로는  우상을 자기가 영접한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일이 처음에는 안 돼도 자꾸 연습하고 연습해서 우리에게 "네가  성신의 감화를 소멸치 말아라" 하는 건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올 때는 감화로 옵니다. 깨닫게 하는 것으로 읍니다. 믿음으로 우리에게 옵니다.

 이러기에 우리에게 오시는 이 영감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셔서 하나님이 그  영감이라는 빛으로 우리에게 비추어 준 것을 깨달아 그 영감을 향하여 하나님을  상대하는 이 일을 우리가 자꾸 연습하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래서, 이럴 때에 과거에는 죽음이 내 앞에 오면 죽음이 없을 때에는 죽음보다  하나님이 두렵고 죽음을 하나님이 주권하고 계신다고 말을 천번 만번 말을  했지마는 이 연습이 안 되면 죽음이 오면 그때에 아무리 '주님이 주권하시는데  무슨 염려냐? 주님이 주권하시는데 무슨 염려? 주님이 주권 무슨 염려냐?  안심이라.' 아무리 입으로는 놀려도 그 속에 마음과 신경과 온 몸은 다 두려움  앞에 떨리기 때문에 상은 새파랗게 질려서 송장빛같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생존하신 주님을 상대하는 이 일을 자꾸 연 습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잘못하면 주님하고 이렇게 동행하다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이 그것이 동행인데 주님과 이렇게 동행하다가 사람 만나서 그만 주님 버리기  쉽고, 물건 만나서 주님 버리기 쉽고, 사건 만나서 주님 버리기 쉽고, 내 욕심에  맞은 것 만나서 주님 버리기 쉽고, 내 성질에 거리끼는 것, 내 성질에 거리끼는  것 만나서 주님 버리기 쉬우니, 주님이 이런 것을 자주자주 계속해서  교체시킵니다. 계속 해 이것 줬다가 저것 줬다가 자꾸 이렇게 우리 현실을  교체시키는 것은 세상에 아무런 무엇이 어떻게 와도 주님과 나 사이를 끊지  못하고 주님과 하나되어 살게 하는 이 일을 달성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환난이냐 곤고냐 기근이냐 적신이냐 위험이냐 칼날이랴? 그 무엇이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끊겠느냐?" 아무 그런 것이 와도  주님과의 동행하는 연결은 놓지 않고 언제든지 주님과 동행해서 같이 그것을  상대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핑계할 수 없는 것은 환합니다. 현저히 내가 주님을 배반하고  있느냐 또 주님을 영접하고 있느냐? 이 시간 이것 때문에 주님을 배척해  버리느냐 내가 이게 암만 있어도 배척하지 않고 지금 모시느냐? 환하게 압니다.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시요, 전능자시요, 주권자시요,  대주재십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그러고 광고합니다.

 대구집회는 오월 이일부터 육일까지 계속됩니다. 거게 대해서 경비는 차비가  삼천오백 또 식대가 사천오백 합해서, 오일 사박인지 그런데 팔천 원  경비입니다. 이것 뭐 요새는 이렇게 싼 돈이 없습니다.

 그러고 그전에는 집회에 대해서 기도를 많이 준비했었는데 올해는 갑자기  서둘러졌고, 또 제가 병이 나서 오랫 동안 있었고, 또 건축도 있고 이래서 그저  집회가 있을까 말까 이렇게 해 가지고 기도도 못 했습니다. 지금이나마 바짝  서둘러서 하나님이 그 집회에 함께 하셔서 은혜를 주시도록.

 저는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사람들의 오는 사람들의 마음의 그  모든 더러운 욕심, 쓴 뿌리, 죄악 그런 것을 다 집회에 오기 전에 다 뽑고  옥토같은 마음을 가져 하나님의 그 생명과 신령에 속한 것이 하나 하나 내릴  때에 다 받아서 옥토에 심은 씨와 같이 결실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가  맺어지는 이런, 우리의 믿음의 병, 인격의 병, 생활 병, 모든 행동의 병, 우리의  속성의 병 이런 것도 고치고, 이것을 한 말로 말해서 신령한 병을 고치고 육체의  병까지도 다 고쳐서 그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은 영과 육이 다 아울러 고침을  받는 금번 기회가 되도록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기도로 준비합시다.

 그러고 십 분 기도 후에 권찰회 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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