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원인을 찾자

 

1987. 5. 8. 밤 (금)

 

본문:누가복음 10장 25절∼28절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성구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다 잘 알고 있는 성구이면서 이 성구를 자기 복음으로 삼기에는 너무도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다 안다고 할 수 있고 외우기도 하지마는 실은 이 성구는 자기 복음을 삼지 못한 사람 되기가 매우 쉽습니다.

여게 영생한다 하는 말씀은 우리가 죽은 자가 살아난다 하는 그 말은 아닙니다.

죽은 자가 생명을 얻어 가지고 살아난다 하는 그런 말씀은 아니고 산 자가 멸망할 생활 하지 안하고 영생하는 생활한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영생은 생명을 가진 자가 잘 하면 영생이 되는 것이지 생명을 가지지 못한 자는 영생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어서 우리들의 영은 죽어 있었는데 예수님의 피공로와 성령님의 감화 감동과 또 진리의 힘으로 우리 죽은 영이 다 살아났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 육은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나지를 못하고 있지마는 우리의 영은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났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중생이라 그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중생된 것은 영이고 육은 아니라 그렇게 요한복음 3장에 말씀했습니다.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 성령으로 거듭난 것, 진리로 거듭난 것, 또 예수님의 공로로 거듭난 것 이것은 우리의 영만 살아났습니다. 육은 아직까지 살아나지를 못했습니다.

영 살아난 이 영은 영생하는 생명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이 영은 다시 죽는 일은 없습니다. 이 영은 영생하고 죽는 일은 없는데 이 영이 주격이 돼 가지고 우리가 현실 현실마다 우리의 심신이 행동을 합니다. 심신이 행동을 할 때에 중생된 영에게 인도를 받아서 중생된 영을 따라서 살면 그때에 산 심신의 기능은 영생을 합니다.

그러나 그때에 중생된 영을 따라서 살지 아니하고 악령 악성 악습을 따라서 악령 악성 악습이라 말은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의 악령의 감화받아 가지고 자기도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사는 그 행동은 다 영원히 멸망을 받습니다.

오늘 편지 보니까 어떤 사람이 둘째 사망이라는 사망에 대해서 편지를 써서 넣었는데 자기 이름은 쓰지 안하고 자기가 말하기를 ‘내가 이름 쓰면 도로 덕되지 안하고 분위기 좋지 안할까 해서 안 씁니다. 또 이것이 혹 덕이 안 될까 해서 조심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내게 지금 주신 사명이라 하면은 내가 얼마든지 이 일을 추궁해서 잘 밝힐 것입니다.’ 그렇게 써서 놨읍디다.

녜, 그렇게 뭘 좀 알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고맙습니다. 그런데 자기 이름을 기록하지 안하는 그것이 좋지 못합니다. 자기 이름을 기록해도 아무도 누가 나쁘다 소리 할 사람 없습니다. 자기가 모르면 묻는 것이 또 당연하고 또 목사도 인간이기 때문에 틀릴 수 있으니까 틀린 거 있으면은 말을 해서 고치면 목사님의 선생님이 될 터이니까 목사 위에 있는 사람 되는 것이고 이렇지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안하는 그것은 좀 엉큼한 그 어두운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이 가운데 누가 있는 사람인지 모르지마는 자기 이름은 써놓고 경남 부산이라 한 것은 그것도 또 주소를 엉뚱한 데를 써서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 가지고 엉뚱하게 있는 사람같이 그렇게 둔갑을 한 그런 것 그것도 그러면 못씁니다.

또 그 사람이 거기 있는지는 모르지마는 포항제철 공장에, 제철 공업소에 그 용지를 가지고서 써서 냈으니까 그 사람은 그 제철 공업소에 다니지는 안하는데 그런 종이를 구해 가지고 그렇게 해서 자기를 숨길라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 되는데 그런 버릇 하지 말고 자기 이름을 쓰고 또 전화가 있으면 전화번호를 써서 그렇게 물으면 제가 아는 게 있으면 가르쳐 줄 것이고 또 알아도 가르쳐서는 안 되겠다 싶으면 가르쳐 주지 안할 것이고 내가 내 자량대로 할 터이니까 누구든지 그럴 때는 이름을 써서 내는 것이 좋습니다.

그 사람은 둘째 사망에 대해서 성구를 많이 대서 그렇게 해 놨는데 나도 그 성구 다 아는 성구입니다. 아주 조금 묻는 것이 실은 제가 몰랐는데 아직까지 거게 대해서 알 만한 그런 지금 사람이 못 됐는데 아주 그 틀린 것을 무슨 정죄하는 것처럼 위협도 하고 협박도 놓고 그래 가지고 그런 못된 버르징이의 질문을 했습니다. 만일 우리 진영의 교인이 그런 사람 있으면 회개해야 됩니다. 목사가 돼도 그런 사람은 평생 가야 그런 길만 걸어 가지고서 불쌍하게 됩니다.

우리 진영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목사들이 있어 가지고 그 교회가 절대 부흥 안 됩니다. 어느 정도만 되지 그 다음에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들을 때에 잘 들어야 합니다.

또 잘 듣고 들을 때에 자기가 바로 배워 가지고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들어야 되지 ‘보자, 뭣인가 티를 뜯을 것이 없나? 뭐 정죄할 게 없나?’ 요런 생각 가지고 하면 그 마음이 양심이 아니기 때문에 생명의 도에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암만 제가 몇십 년 배워도 저에게 생명은 들어가지 않습니다.

여게 영생이라는 것은 중생된 사람들에게 한해서 영생이 있는 것이지 중생하지 아니한 사람들에게는 영생이 없습니다. 중생된 그것은 생명이고 중생된 사람이 멸망하지 않을 그 생애를 한 것을 가리켜서 영생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영은 영생했습니다. 그러면 영생은 뭐이 영생인가? 영생은 심신의 기능 영생을 가리켜서 여기 영생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심신의 기능 구원을 얻으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것을 여게 말해 놨습니다.

심신의 기능 구원을 얻으려면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행동이라야 심신의 기능이 구원 얻지 그 외에 거는 구원 얻을 수 없다 하는 것을 여게 못박아 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사랑하는 행동과 사람 사랑하는 행동을 한 그것이라야 그 기능이 영생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면 어떻게 사랑하면 사랑한 그 기능은 영생이 되는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한 것이라야 영생이 된다고 여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오늘 밤에는, 그러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한다 하는 그 다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며 다하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이 다하는 것인가 하는 그것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래서 다한다는 것을 간단하게 지금 증거하겠습니다.

다한다는 것은 다른 데 쓰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외용하지 않는 것, 하나님 사랑하고 사람 사랑하는 거기에 마음도 목숨도 힘도 뜻도 거게 써야 되지 딴데 쓰면 안 된다 하는 그것을 여게서 가리켜서 말씀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 네 가지를 아무데도 쓰지 안하고 가만히 보관해 두는 것도 안 된다 하는 말입니다. 딴데 써도 안 되고, 딴데 써도 안 되고 또 안 쓰고 가만히 그저 묵혀둬도 안 되고 또 한목 몽땅 다 써 버려도 안 되고, 다하라 이 말씀은 주님이 자기에게 조금 써라, 조금 써라 하면은 조금 쓰고 또 조금 많이 쓰라면 많이 쓰고 또 보관해 두라면 보관해 두고 한목 몽땅 다 쓰라면 다 쓰고 이 네 가지에 대한 전권을 주님에게 맡기는 그것을 가리켜서 여게 말씀한 것입니다.

주님에게 전권을 맡겼으니까 주님이 다 쓰라 하면 다 쓸 것이고 보관해 있으라면 보관해 있을 것이고 조금씩 흘려서 그렇게 쓰라면 그래 쓸 것이고 이제 마음 목숨 힘 뜻 이 모든 것을 완전히 주님을 사랑하는 데에 다 바쳐 놓고 이웃 사랑하는 데에 다 바쳐 놓고 주님의 명령 따라서 다하라 하는 것이니까 주님의 명령 따라서 이 네 가지를 다른 데도 쓰지 말고, 묵혀두지도 말고, 한목 다 쓰지도 말고, 이 사용하는 데에 제 생각 제 주장 제 뜻대로 제 욕심대로 원하는 대로 해서는 안 되고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써서 남김없이 다 바쳐 써야 되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하라는 것은 이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함으로 이 네 가지를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사용을 해야 되는데 주님을 사랑함으로 해야 되고 또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렇게 해야 되는데, 그러면 다해서 사랑하라 또 이와같이 이웃도 네가 너를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 해도 하나님 사랑 다음에는 너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니까 너와 같이 사랑해라 이랬으니까 이제 사랑하는 방법은 외용도 말고, 달리 쓰지도 말고, 그대로 묵혀두지도 말고, 제 마음대로 많이 쓰고 적게 쓰고 그렇게도 하지말고 다 바쳐 놓고 주님이 쓰라고 지도하는 대로 명령하는 대로 순종해서 그대로 다 써야 된다.

딴데는 쓰면 안 된다. 안 쓰고 가만히 묵혀둬도 안 된다. 제 생각대로 왈칵왈칵 ‘이거 다 쓰라 했으니까 뭐 질질 쓰나 한목 쓰나 뭐 다만 하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하고서 이렇게 하기 쉬우니까 너무 천천히 써도 안 되고, 급속히 써도 안 되고, 여러차례 써도 안 되고, 단번 써도 안 되고, 딴데 써도 안 되고, 이 네 가지는 순전히 주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 데에 다 쓰기로 바쳐 놔야 되는 것을 첫째 말합니다. 다 쓰구로 바쳐 놓은 것 이게 첫째입니다. 다 쓰도록 바쳐 놓은 것.

그 다음에는 바쳐 놓고 쓰는 데는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지도하시는 대로 그대로 써야 되지 ‘주님을 위해 쓰면 뭐 쓰기만 하면 아무나따나 써도 되지 않는가?’ 이래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쓰되 주님이 쓰는 것도 지도하시는 대로 당신의 뜻대로 써야 되지 제 생각대로 써서는 안 되는 것을 여게 말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 이 사랑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싶고, 주님을 사랑하고 싶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뜨거워져서 마음 다하고, 목숨 다하고, 힘 다하고, 뜻 다해서 주님을 사랑할 수 있다면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해서 사랑할 만치 된다면 뭐 다하지 말라 해도 다할 것입니다.

그러고 이 세상에서 이 하나님의 사랑은 아니지마는 배암의 사랑이고 다 인간 사랑 그것이지마는 그것도 다 바칠 수 있을 만치 사랑하면 안 바칠래야 안 바칠 수 없고 안 바치는 것보다 바치는 것이 더 기쁘고 좋습니다. 심지어 돈을 사랑하는 사람도 돈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해 바치는 것을 아까와하지 않습니다.

죽을 줄도 모르고 바칩니다. 사랑만 하면은 바친다는 건 또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거 바치는 것이 어렵기도 하지마는 바치는 것은 어렵지 않고 저절로 바쳐집니다. 자기가 자녀를 사랑한다면은 자녀 사랑하는 것이 자기 목숨을 바칠 만치 사랑하게 되면은 안 바칠래야 안 바칠 수 없고 바치는 게 좋고 바치는 것이 본능적이지 바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심지어 이 애정이라도 정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애정이라도 자기가 재물과 힘과 시간과 몸과 정성을 바칠 만치 사랑하게 되면은 안 바칠 수가 없고 안 바치고는 못 견디고 바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성구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서 내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 바쳐서 사랑하는 다 바쳐 사는 것 이것도 어렵지마는 다 바쳐 산다는 이 다 바친다는 것은 이것은 필연적이라고 그렇게 저는 해석이 됩니다. 안 바칠래야 안 바칠 수 없고 이것을 다 바칠 수 있을 만치 주님을 사랑하게 된다면은 안 바칠라 해도 어느 틈으로도 안 바치고는 못 견딜 겁니다.

이러니까 사람들이 세상에 이런 것 저런 것 사랑함으로 다 바치고 사는데 사람들이 하루 생활이라도 제가 좋아하는 것 제게 필요한 것 제게 유익한 것 제 하고 싶은 것 거게 바쳐서 사는 것은 이것은 뭐 전 인간 생활에 필연성입니다.

이런데 다른 데다가 바치지 안하고 전부 이 네 가지면 우리의 것 다인데 이 네 가지를 주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바쳐 살아라 이렇게 그래야 영생이 된다고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우리는 어데다가 역점을 둘 건가? 그러면 다해서 주님을 사랑할려고 하는 여게다가 역점을 둬야 될 건가? 다 바쳐서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주님을 사랑하는, 이 주님을 사랑하고 싶고 주님을 사랑하는 이것을 만드는 데다가 역점을 둬야 될 터인가 이 네 가지를 바쳐서 사랑하는 데다 역점을 둬야 될 터인가, 어데다가 역점을 둬야 될 건가? 어데다가 힘을 써야 되겠습니까? 어데다가 힘을 써야 되겠소? 모든 걸 다 바쳐서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주님을 사랑함이 내게 생겨지는 이것이 어렵습니다. 이것만 생기면 생겨진 것만치는 내게 있는 것을 바치지 안할 수 없는 것은 그거 다 필연적인 행동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라고 하는 데에는 우리가 세상에 이 자연계시에서 보면 사랑할 수 있는 그 원인이 있을 때에는 사랑치 안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할라고 해도 사랑할 만한 그 원인이 없으면 사랑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결혼하는 데도, 결혼한 부부라도 제가 사랑할 만한 뭣이 원인이 있어야 사랑하지 사랑할 마음이 없는데 ‘내가 아무래도 이래서는 안 되지 내가 사랑해야 되지.

사랑해야 되지.’ 해도 얼굴을 좋아하는 사람은 얼굴이 박색이 돼 가지고 있으면 ‘그거 내가 사랑해야 되지 사랑해야 되지’ 한다고 해서 사랑이 가지지 않습니다.

또 ‘내가 뭐 얼굴 보고 사나?’ 이래도 내가 상대방이, 아내가 얼굴이 아름다와서, 그 얼굴 아름다운 것이 내 사랑이 갈 수 있도록 그렇게 원인이 돼 가지고 있다면은 안 사랑할라고 ‘헤, 나는 아내 안 사랑할란다. 아내 사랑하는 애처가 안 될란다.’ 암만 그래 쌓아도 사랑 안 하고 못 견딥니다. 이러니까 사랑할 수 있는 근거가 있어야 되지 사랑할 수 있는 근거가 없으면 안 됩니다.

서로 원수입니다. 아주 그 사람을 원수로 알았는데, 원수로 알아서 ‘저 원수를 어떻게 할꼬?’ 이렇게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사람이 그런 게 아니라 참 자기가 잊을 수 없는 자기에게 공로가 있는 사람, 은밀히 자기에게 무엇을 한 사람, 그 사람이 자기에게 행한 것, 자기와 관련된 것, 또 모든 것들에게 행한 모든 행동 이런 걸 하나 둘 알고 보니까 그만 그 사람이 원수로 여겼는데 원수로 여긴 사람이 차차 차차 변해집니다.

변해져서 나중에는 그 사람을 잊을 수가 없고, 자꾸 존경가는 것도 원인이 있으면 존경가게 되고, 또 사랑할 만한 원인이 있으면 사랑이 가게 되고, 그에게 대해서 그 은혜에 대해서 감사해서 견디지 못하는 사은을 해야 될 원인이 있으면 사은하게 되겠고, 뭣이든지 그 감사라든지 사랑이라든지 미움이라든지 그런 모든 것은 그게 다 거게서 피동적으로 되어지는 것인데 원인이 있으면 원인을 따라서 피동적으로 되어지는 것인데, 미워할 수 있는 그런 원인이 있으면은 저는 아주 친하고 좋고 서로 입에 밥을 내먹을 만치 이만치 서로 사랑하고 좋았는데 알고 보니까 그 사람이 자기에게 원수 중에 원수인 그런 원인이 있습니다. ‘아이쿠, 내가 이놈한테 속았구나.’ 그걸 알고 난 다음부터 당장에 뭐 마음도 달라질 것이고 얼굴빛도 달라질 것이고 모든 행동도 달라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것이나 미워하는 것이나 또 내가 원수로 삼는 것이나 내가 그를 참 내 몸같이 여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나 이런 것은 다 원인 없이 안 되는 걸 압니다.

우리가 무슨 속아서, 누가 말한다고 이래 속아서 또 뭐 길들여 가지고 되는 것도 있습니다. 자꾸 길을 들여도 돼요. 길들여 되는 것도 있지마는 길을 들여서 사랑하지 안한 것을 자꾸 사랑할 만치 길을 들이고 또 사랑하고 사랑하고 자꾸 이라면은 나중에 그게 사랑이 되는 수가 있습니다. 길들여 가지고서 사랑이 되는 것도 있지마는 그것은 야만적 사랑이요 그것은 언젠간가 때가 되면은 그것은 흐미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할 수 있는 그 원인이 있어 가지고 사랑하는 것은 그 원인이 깨지기 전에는 사랑이 변동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아무래도 영생은 하기는 해야 되겠는데, 우리가 영생한다 하는 이것을 영생은 중생된 사람들에게만 영생이 있지 중생되지 안한 사람에게는 영원한 사망이나 이루지 영생이라 하는 것은 없다. 중생된 사람에게만 영생이 있다. 요것만 똑똑히 들어도 오늘 나한테 편지에 보낸 사람이 여기 있으면은 그 사람에게 영감이 가면 정신을 차려서 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 배워서 알려고는 하지 안하고 알지도 못하며 자꾸 정죄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서 자기 망하는 그런 일을 하지 마십시오. 그걸 뽑아버려야지 그거 뽑아버리지 안하면 불쌍한 사람입니다. 가련해져. 누가 자기를 망치겠습니까? 자기가 자기를 망치지. 누가 자기를 구원하겠습니까? 자기가 자기를 구원해야 됩니다.

자기가 자기를 망치기도 하고 자기를 존귀케 하기도 하고 자기가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암만 나를 망칠라 해 봤자 그 망침이 내게 오지를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암만 복되게 이래 북돋아 줄라고 해도 북돋아 주는 그것이 바람에 날아가듯이 날아가 버리지 그것이 내게 북돋아지지를 안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영생은 중생된 우리들이, 영은 중생했고 영생하는 생명으로 중생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은 영생이 없습니다. 그 생애가 전부 영생이오. 영생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영은 변동 없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영생할 수도 있고 영생 못 할 수도 있는 것은 영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심신의 기능이 영생할 수도 있고 영생 못 할 수도 있는 것은 그 심신의 구원입니다, 심신의 구원.

이런데 우리 심신의 구원이라는 이 구원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 사랑하기를 그와같이 사랑해야 된다고 했는데, 제 몸같이 사랑하라 말은 제 몸은 뭐 다 있는 것 다 들여서 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은 제 몸같이 하라 말은 내나 다해서 하나님 사랑하는 것처럼 다해서 이웃 사랑하라 그 말입니다. 자기에게 있는 거 자기 사랑함으로 다 기울이지 달리 합니까, 어데?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 데에 이 네 가지를 다 바쳐야만 영생이 되는데 이 네 가지를 바친다는 것은 이것은 바칠 수 없는 데에 바쳐지지를 안한다 그거요. 바쳐지지 안해.

바칠 수 없는데 바쳐지는 것은 혹 바칠 수 있습니다. 강제적으로 바칠 수 있습니다. 강제적으로 바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껍데기 바치는 게 아니고 속에 마음으로 바쳐야 되기 때문에 강제로 바치는 데는 껍데기는 바치지마는 바칠수록이 그 속에는 바치기 싫은 것은 더 강해집니다. 이 외식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러니까 아무래도 이 네 가지를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만 하겠는데 이 사랑할 수 있는 원인을 만드는 게 문제입니다. 원인 만드는 것이.

이러기 때문에 영생을 이루는 데에는 내 전부를 다해서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이 원인을 만들어야 되겠고 또 그 다음에는 내 전부를 다해서 이웃을 사랑해야 될 원인을 만들어서 원인만 만들어 놓으면 사랑하지 말라 해도 사랑할 것이고 사랑 안 할라 해야 안 할 수 없이 필연적으로 사랑이 되어지는 것이다 그거요.

그러면 그 원인은, 원인은 주님을 이 네 가지를 다해서 사랑하고 그 다음에는 이웃을 이 네 가지를 다해서 사랑할 수 있는 그 원인이, 그 원인이 되어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아직까지 원인을 찾지 못해 그런지 그 원인이 없으니까 그 원인을 만들어서 우리가 조성을 해야 될 것인지? 그 원인을 만들어야 될 것인지 그 원인이 만들어져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지금 눈이 어두워서 보지를 못해서 그런지? 보지 못해 그러면 자꾸 찾아서 보도록 해야 될 것이고 없으면 만들어야 되겠는데, 없으면 만들어야 되겠는데 이것은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도 보는 형제도 사랑하기 어려운데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이거 사랑할라고 사랑할 수 있는 원인을 인간이 암만 만들라 해도 못 만듭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이 원인은 자기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만 아니라 있으면 얼마든지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고 싶고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할 만한 그 원인이 무한히 있습니다. 그 원인이 무한히 있습니다. 무한히 있으니까 우리가 몰라서 이것을 바쳐 주를 사랑하지 못하고, 몰라서 이것을 바쳐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지 사랑할 만한 원인이 없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원인을 찾아야 되지 원인을 조성할 필요는 없고 우리가 몰라 그러니까 이 원인을 찾아야 됩니다. 찾으면 얼마나 찾는가? 주님을 내가 사랑해야 될, 주님을 내가 사랑해야 될 그 원인을 찾으면 어느 정도 찾아야 될까? 내 소유와 몸과 생명, 내 마음 목숨 힘 뜻 다해서 사랑할 수 있는 그 원인을 우리가 찾아야 되겠고 원인을 잡아야 되겠고, 어떤 사람은 그 원인을 찾아서 자기 있는 그걸 다하고도 마음에 모자라서 무익한 종이라고 결론을 지우고 목숨 바칠 때도 ‘나는 이래 바칠 수가 없습니다. 나는 꺼꾸로 못을 박아서 보통 못박혀 죽는 것보다도 사형보다도 더 혹독한 사형을 받아 주를 사랑하고 바쳐야 되겠습니다.’ 하는 그것도 그분들은 뭐 별사람이 아니라 주님에게 대해서 그와같이 자기는 전부를 다 기울여 바쳐서 살지 안하면 견딜 수 없겠고 다 바쳐 살아도 마음에 유위부족 부족 부족함을 느낄 만치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발견의 그 뭉텅이가 커지니까 자기에게 있는 거는 적어지고 다 바치고도 부족하다 되어지는 것이고, 주님의 사랑할 만한 그 원인이 아주 빈약한 사람은 주님을 사랑함으로 돈 한푼 희생하는 것도, 욕 한번 얻어먹고 참는 것도, 뺨 한번 맞고 참는 것도 주를 사랑함으로써의 이루는 그 역사는 지극히 적은 것 하나도 되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오늘밤에는 요것만 여러분들이 깨닫고, 영생은 영이 영생하는 게 아니라 영은 영생을 가지고 있고 우리가 하루 살면 하루 사는 데에는 그만치 우리의 마음의 기능과 몸의 기능이 살았습니다. 하루 활동했습니다. 하루 산 활동한 그 마음의 기능와 몸의 기능이 영원히 죽느냐 그것이 영생을 얻느냐? 이것은 새로 얻는 것입니다. 얻으면 있고 못 얻으면 그만 제게는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의 심신의 기능은 이 시간에 산 기능이 영생도 될 수 있고 영멸도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사망이라는 것은, 둘째 사망이라는 것은 그것은 믿는 자에게도 둘째 사망이 있고 안 믿는 자에게도 둘째 사망이 있습니다.

안 믿는 자는 둘째 사망이 뭐이 둘째 사망이냐 하면은 지금 이 세상에서 죽은 그것이 첫째 사망이오. 이 세상에서 죽는 그것이 지금 사망이라. 그거 처음 아담 하와로 말미암아 죽은 그 죽음으로 인해서 지금 죽는 이것이 첫째 사망이라, 첫째 사망.

아담 하와의 그 원죄와 본죄로 말미암아 지금 이 몸뚱이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 사망이고 이다음에 하나님의 공심판 받아 가지고 부활해 가지고 공심판 받아서 다시 또 사망합니다. 이러니까 안 믿는 사람들은 정죄받아 가지고서 사형받아 가지고 지금 죽는 것이 첫째 죽음이고 부활해 가지고 심판받아 가지고서 영원히 죽는 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택한 자들은, 중생된 자들은 예수님이 대형하셨기 때문에 사망에서 벗어났습니다.

영은 완전히 벗어났고 우리 육도 법적으로는 사망에서 벗어났습니다.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살아난 자입니다. 처음에 죽었던 것을 예수님이 살려냈습니다. 살려낸 것이 다시 하나님의 공심판 받아 가지고 죽는 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이러기에 우리가 영생할라고 하면 이 네 가지를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영생이 되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마음의 기능이라야, 그 몸의 기능이라야, 그 본질이라야, 그 본성이라야, 그 종자라야, 그런 요소라야 그것이 영생하지 그거 아니면 영생할 수 없습니다. 그거 영생하면 뭐하구로요? 이해가 됩니까? 요렇게 깨끗한 거,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고, 자기 있는 걸 다해서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할 수 있는 그 심신의 기능 그것이 영생해야 되지 그게 아닌 것이 영생해 놓으면은 그 해독을 얼마나 지울라고? 그거 냅둬 되겠습니까? 만물 재판에서 저거 죽여버리라 할 건데, 죽여버려라.

이것은 뭐 별스럽게 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기를 자기의 있는 것 다해서 사랑할 수 있는 그 심신의 기능이 돼야, 그 심신의 본질과 본성이 돼야, 그 심신의 요소가 돼야 그게 영생할 수 있지 그것 되지 않으면 영생 못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봐요. 그거 아닌 것을 영생시켜 놓으면 그거 어찌 되겠습니까? 이해가 됩니까? 알고 지내가야 돼.

이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이거 다해서 사랑해야 되겠는데 이 사랑하는데는 사랑할 만한 이유는 없는데 억지로 사랑합니다. 영생 얻기 위해서 억지로 사랑합니다. 영생 얻기 위해서 억지로 사랑할라고 암만해도 사랑이 가야지? 안 가.

타이르면서 ‘이렇고 이렇고’ 아무리 타일러도 안 가. 타이르는데 그 사람이 타이르는 사람의 말을 듣고, ‘암만 너거 마누라가 지금 쪼글쪼글하다고 해도, 아주 쪼그라지고 얼굴 못났어도, 지금 다리가 병신이 됐었어도 너거 부모 봉양하느라고 어떤 봉양한 줄 아느냐? 이렇게 이렇고 이런 봉양하느라고 그 꽃같은 너거 마누라가 늙은 거 모르나? 또 네가 다 팽개쳐 버렸는데 네 몸에서 난 자식 그거 기르고 이렇게 하느라고서 그래 가지고 고생한 걸 모르나?’ 고생한 걸 전기를 쭉 다 말해 줍니다. ‘그것 다 하고 벌어다 먹인다고 이래 하고 돌아다니다가서 차에 치여 가지고 다리가 뿔라져서 병원에 몇 달 있다 나온 줄 모르나? 이놈아 몰라?’ 가만히 들어보니까 이거 참 감사하고 감탄이 되고 ‘내가 참 그분은 내게 대해서는 금쪽 같은 분이로구나.’ 자꾸 그 사실을 얘기하니까 차차 차차 알아듣고 그 사실을 들어서 ‘이 아내는 내가 사랑할 게 아니라 내 상전같이 모셔야 되겠고, 내 머리같이 모셔야 되겠고, 내가 평생 업고 다녀야 되고, 모시고 다녀야 될 분이로구나.’ 이 자꾸 이해를 시키고 납득을 시키고 이라니까 그거 사실, 거짓말 하는 거는 아니고 참말로 자꾸 이해를 시키고 납득을 시키니까 나중에 그게 몰랐다가 알고 난 다음에는 변해져 버려. ‘여보’ 하면서 이렇게 존대하니까 배척당하던 이 아내가 이 어짠 일인고 싶어서 공연히 놀려 주는가 싶어서 주저주저해도 진정 그렇게 자꾸 이래 존대해 가지고서 평생 보배로 이렇게 존대할 것입니다. 그거 뭐이냐? 원인이 있는 걸 알았다 그 말이요, 원인이 있는 것. 사랑할 수 있는 원인이 있는 걸 제가 알고 나니까 달라져 버려. 사랑할 수 있는 원인이 생겨지니까.

이러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자기의 전부 여생을 다 기울일 수 있는 그것이 그 심신의 요소로 변화된 거, 지금 이 심신의 이 본질 본성이 완전히 변화되는 이 본질 본성이 돼야만 영생하겠는데 이 본질 본성이 변화되구로 하는 데는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할 만한, 내가 다 바쳐서 사랑할 만한 원인만 있고 사랑만 돼지면 뭐 바치는 거야 문제가 없어. 바치는 건 저절로 바쳐져.

이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없는 걸 만드는 게 아니고 사랑하고도 무한히 남을 만한 사랑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자꾸 연구해 가지고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 이유가 뭐꼬? 생명 바쳐 사랑할 이유가 뭐꼬? 이웃을 내가 사랑할 이유가 뭐꼬?’ 하는 이것을 자꾸 생각하고 생각해서 연구해서 자기의 전부를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이것이 필연적으로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랑할 수밖에 없고 사랑하지 안하고는 견딜 수 없는 이 원인을 우리가 찾아야 되기 때문에 이 원인을 찾도록 노력합시다. 오늘 저녁에 증거하는 거는 그것입니다. 원인이 있고도 남습니다.

그 찾는 방법은 그러합니다. 찾는 방법은 그러하요. 주님이 내게 대해서 어떻게 행하신 이 열한 가지의 구속을 자꾸 생각합니다. 자꾸 성경을 가지고 ‘성경에 보자, 주님이 나에게 열한 가지 구속 어떻게 했느냐?’ 자꾸 읽고 생각하고 읽고 생각하고 읽고 생각하니까 차차 차차 주님을 사랑해야 될 그 원인이 생겨집니다.

이러니까 사랑치 못한 것이 눈물이 쭐쭐 나오고, 사랑하고 싶고, 있는 전부를 다 기울여 사랑하고도 마음에 부족하고 자꾸 주님을 사랑해야 될 그 원인이 발견이 됩니다.

또 자꾸 이와 같이 지금 하나님의 그 심령, 생명까지 바쳐서 이 인간을 사랑했는데 주님의 그 심장을 생각하니까 주님을 사랑하니 주님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차차 차차 이웃 사랑하는 그것도 안 사랑할래야 안 사랑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평생 못 봤지마는 자기 아들이 어떤 얄궂은 동무 하나 데리고 왔는데 저거 아들이 그 동무를 제 몸같이 사랑하고 제 몸보다 더 사랑하고 이라면은 그 부모는 그것을 때리지도 못하고 미워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자식이 사랑하면은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사랑하면 사랑하게 돼요.

사랑하는 남편이 사랑하면은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웃 사랑하기를 있는 것 다해서 제 몸같이 사랑할 수 있는 이것도 찾으면 원인이 넉넉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랑할 그 사랑이 넉넉하고 또 사랑해야 하는 그 인질을, 사랑해야 하는 그 인질을 제가 고쳐서 그 인질이 돼야 되지 사랑하지 안하는 그 인질은 제가 생각해도 불에 태워버리면 싶으고 그러한 인질이 가치, 그 인질에 가치를 둘 때에 그 인질이 되고 싶어서 소원하게 되어지고, 또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큰 소망이 있으니까 그 소망으로 인해서 또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이 그 집에 가 보니까, 그 집에 가 보니까 송아지가 한 마리 얄궂은 거 한 마리 끌어다 놓고 온 식구들이 막 거기다가 뭐 오만 정성을 다 들이고 똥을 누니까 똥을 빨아먹을 만치 막 이렇게 애끼고 온 정성을 다 들이고 이래 가지고서 뭐 밤잠 안 자고 자꾸 이래 간호를 하고 막 이래 쌓습니다.

왜 그라는고 가만히 보니까 가난한 사람이 어데 송아지 한 마리를 젖송아지를 하나 누가 선물 줘서 얻어왔는데 이제 그거 하나 키워 가지고서 앞으로 한 마리가 두 마리 되고, 두 마리가 세 마리 되고, 네 마리 되고 이라면 자기 가정에 지금 앞으로 전소망과 희망이라 하는 것이 그 송아지 한 마리에 지금 전소망이 기울어져 가지고 있으니까 안 사랑할 수가 없고 안 아낄 수가 습니다. 자꾸 애껴지고 자꾸 사랑해집니다.

이러기에 주님에게 대해서는 소망보다도 그분은 나에게 내가 사랑하고 모두 다 바쳐서 사랑할 만한 그 원인이 있기 때문에 원인을 자꾸 성경 보고 찾으면 됩니다. 자꾸 찾으면, 자꾸 찾으면 자기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바치고도 마음에 부족해서 내가 어떻게 주를 사랑할꼬 하는 그만한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원하고 원해서 바쳐 사랑할 수 있는 그 원인이 있고, 또 사람도, 그 사람도 자기가 자기의 그 인간의 인질성, 인간성, 인질성 이것을 자꾸 성경을 보고 비판하고 보니까 저는 독사요 시랑이 같아서 ‘내 성질은, 내 성질은 이놈을 어짤고? 내 성질 요거는 불에 바짝 태워야 되겠다.’ 다 자기가 성경 보고 이라다가서 정당한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그런 인간성, 인간질, 인간질 그것은 제가 봐도 ‘요건 불에 태워버려야 되겠다. 요건 어디다가 소산수에다가 녹아버릴까?’ 이래서 이렇게 인간의 정상적인 인질을 발견하고 난 다음에 자기의 인간성 인질을 발견하고 나서는 자기 밉지 안한 사람이 없습니다. 밉지 안한 사람이 없었고 ‘이것은 참말로 어데다가 어떻게 혹독하게 모질밧게 태워서 없애야 될까?’ 하는 그렇게 미운 인성이라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된 인간의 인간성을 발견하고 보면은 자기에게는 다 미워서 처분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러니까 이것을 자꾸 발견하니 인간을, 저를 위해서 인간을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지 안할 수 없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이 아까 송아지 사랑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제 앞으로 말할 수 없는 호호양양의 무궁세계는 그런 그 인질밖에는 가서 살지 못하기 때문에 그 나라에 가서 살 그 소망을 생각할 때에 자기가 그런 인질로 성화돼야 되겠고 또 그렇게 하는 그것이 자기에게 어떠한 영원이 그로 인해서 자기에게 부과되고 자기에게 누리게 되는, 누리게 되는 그 소망을 생각할 때에 또 자기는 자기를 다 바쳐서 사랑하지 안할 수 없는 이런 것이 돼집니다.

이러니까 성경에서 어짜든지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 이것이,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 것이 자기의 있는 것을 다 기울여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지고 또 자기의 전부를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위해서 바치는 요것이 가치 있는 것이고, 개운한 것이고, 좋은 것이고, 이것이 기쁘기도 한없이 기쁘고, 수입도 한없이 수입이 되고, 평강도 한없이 된다는 요것을 깨닫는 요 깨달음에서 이 원인을 마련하겠습니다.

오늘밤에 결론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서 내 전부를 다 바쳐서 살 수 있는 이 사실은 확고하게 얼마든지 되어 있는데 이것을 우리가 보지 못해서 이런 것이니까, 알지 못해 이런 것이니까 여게 대해서 자꾸 알라고 연구해서 성경으로 연구하고 기도로 연구하고, 자꾸 우리가 찾지 못해 그런 거니까 “찾아라 만날 것이라” “찾아라 만날 것이라” 이랬으니까 자꾸 찾아들어가고 찾아들어가고 찾아들어가면 내 전부는 주님과 이웃을 위해서 이 전부를 쓰고 살고 그를 위해서 사는 것보다도 더 가치 있는 일이 없고 그것이 참 정상의 사람이요 자기의 유일한 그 행복의 길이라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수가 있기 때문에 이 깨닫는 이 노력을 우리가 자꾸 연구해 가지고서, 껍데기만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주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 자기 소유와 자기 마음과 생명과 힘과 뜻을 다 바쳐서 사랑할 수 있는 이런 사람이 어쨌든지 돼야 됩니다. 어쨌든지 이런 사람이 돼야 됩니다. 이제 그 모든 원인에 세밀한 해석 안 했지마는 어쨌든지 이런 사람이 돼야 됩니다. 이 사람이 안 되면 영생 못 합니다.

이런 사람이 돼야 되는데 이런 사람이 되어지는 데는 그 해석을 지금 말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지는 데는 원인을 찾아야 되는데 원인은 있고도 남는다.

얼마든지 충만하다. 이러기 때문에 그 원인을 찾도록 연구하고 노력해라.

연구하고 노력해서 나는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내 전부를 바쳐 사는 것이 원하고 원하고 이것이 제일 가치 있고 제일 보배롭고 참된 것이라 하는 것을 이것을 자기가 알고 그러한 사람이 되어지는 그것이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요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광고 하나 합니다.

구역장님들은 보고서 안 내도 됩니다. 또 구역장님들께서는 이번 집회에 참석한 인원을 장년반 중간반 유치반으로 구별해서 다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 병나은 사람들도 다 보고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대구에서 제가 올 때까지에 보고 받은 것 한 사백 됩니다. 삼백오십 얼마 됐었는데 그후에 몇십이 들어왔습니다. 이러니까 한 사백 안 됐는가 싶습니다.

아마 사백 더 될 것입니다. 이러니까 그런 사람은 빼지 말고 자기가 크든지 작든지 ‘이거는 주님의 은혜로 내 병이 나았다.’ 그것을 나은 사람은 빼지 말고 그것을 기록하십시오. 주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기쁨을 돌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자기에게 ‘만유의 대주재이신 하나님이 내게 당신이 친히 와서 손대 가지고서 나를 치료해 주셨다.’ 큰 치료나 적은 치료나 그분이 내게 오신 것이 문제입니다. 내게 왔으니까 주님이 나를 버리지 안하시고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주님이 나를 간섭하시고 나는 주님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을 스스로 표적으로 보여 준 것이기 때문에 그걸 꼭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이거 하나님이 다, 사람들이 마비가 돼 그렇지 이 한 집회에 오백 명이고 육백 명이고 이거 뭐 크나 작으나 하나님이 와서 병낫운 이런 일이 역사에 없습니다.

사도 시대도 없소.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금 큰 은혜를 주시고 있는데 이걸 모른다 그 말이오. 암만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그 사람들이 알았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큰 역사하지마는 이거 봐야 몰라. 소경들이라 몰라.

또 그라고 아직 찾아가지 안한 짐이나 구역 짐이나 이런 것은 내일까지 다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여게 모레 주일날 지장없이 볼 수 있으니까 다 그 짐을 찾아가기 바랍니다.

또 천막이나 비니루 그런 것을 예배당에서 저 물에서 씻기는 하지마는 이 의자에게다 걸쳐 가지고 말리는 그런 짓 하지 마십시오. 그라면 그 의자가 견딥니까? 이 의자에 걸쳐서 말리지 못합니다. 저 밖에서 예배당 밖에서는 혹 씻는 게 있다 할지라도 어떤 사람은 이 안에다 걸쳐서 말리는데 그거 안 됩니다.

그래 하지 마십시오.

이거는 내가 말하지 안한 건데 아마 다른 사람도 생각이 이렇기 때문에 여기 광고를 써냈습니다. ‘그리고 천막이나 비니루를 예배당 안에서 말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의자가 상하고 더러워져서 주일 예배 볼 때에 지장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욕이 됩니다. 나는 몰랐는데 이런 일 더러 하는 모양이지. 내가 봤으면, 내가 봤으면 비니루고 천막이고 휘 뭉쳐서 다 끌어다가 저 불에서 태워버리든지 저 끌어다 내버렸을 거라. 왜 사람들이 그렇게 의의 분이 없는고 몰라. 내 눈으로 봤으면 안 냅두요, 그까짓 거. 집어뜯어버리든지 저 불에 태워버리든지 찢든지 하지. 어데 하나님의 성전에다 그런 걸 갖다 널도록 하고 있어? 그런 것 보고도 너는 사람도 그렇지만 보고 있는 사람도 다 같은 종자라. 회개해야 돼요. 뭐 그런 일 하고 있어, 있기를? 또, 이거는 내일 감전동 분교, 분교 뭐 시공 예배, 공사 시작한다는 예배인데 그거 그리 큰 예배가 아니오. 큰 예배 아니니까 거게 갈 필요 없어. 거기 뭐 어데, 여기 말하기를 ‘내일 감전동 분교 신축 예배에 참석할 분은 아홉시까지 교회로 오시면 같이 가실 수 있습니다.’ 떡도 해 놓고 뭐 했다 하는데, 떡 먹으러 가지 말아요. 뭐하러 가요, 가기를? 어데 거기 갈 여가 어데 있어? 또 떡 하지 말아요.

○○○집사님, 떡 같은 거 많이 하지 말아요. 그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면 되는 것이지. 그래 놓으면 안 돼. 아마 떡 엔간히 많이 할 모양이지. 지금 또 오라고 청해 쌓아니까. 이런 광고는 안 하는 거라. 이 광고를 써냈는데 안 하고 내일 가지 말라 하는 이게 백 목사 권위라. 알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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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하나님과 사람 사랑-계명지킴/ 요한일서 5장 2절-3절/ 1983. 9. 23. 지권찰회 선지자 2016.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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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원인을 찾자/ 누가복음 10장 25절-28절/ 1987. 5. 8. 금저녁 선지자 2016.01.02
510 하나님과 이질적인 요소를 버리라/ 히브리서 11장 6절/ 1981. 1. 6. 화새벽 선지자 2016.01.02
509 하나님과 자기와 믿음 생각 할 것/ 요한계시록 3장 18절 상반절/ 1987. 10. 29. 목새벽 선지자 2016.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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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 출애굽기 12장 13절-14절/ 1979. 11. 23. 금저녁 선지자 2016.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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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2 하나님께 감동 주는 사람/ 히브리서 11장 1절-3절/ 1985. 9. 15. 주일새벽 선지자 2016.01.02
501 하나님께 구하라/ 야고보서 4장 1절-3절/ 1984. 5. 21. 월새벽 선지자 2016.01.02
500 하나님께 대해서 노력할 것/ 로마서 6장 23절/ 1985. 11. 8. 금새벽 선지자 2016.01.02
499 하나님께 받는 방편/ 요한계시록 3장 8절∼12절 상반절/ 1987. 4. 16. 목새벽 선지자 2016.01.02
498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마태복음 13장 3절-9절/ 1984. 4. 1. 주일오후 선지자 2016.01.02
497 하나님께 주권이 있음을 믿고 계명생활/ 다니엘 6장 1절∼27절/ 1987. 3. 15. 주일오후 선지자 2016.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