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받는 방편

 

1987. 4. 16. 새벽 <목>

 

본문:요한계시록 3장 8절∼12절 상반절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우상에 대해서 요새 많이 강조했습니다. 우리 마음이나 몸에 우리 자체에서 하급 우상, 중급 우상, 상급 우상 셋으로 나눠서 알기 쉽게 말했는데 이 우상을 뽑지 안하면 항상 저는 우상 섬기는 행위를 하면서 신앙 행위라 그렇게 하기 쉽습니다.

이런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또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다섯 가지를 요사이 늘 말했습니다. 그도 계속해야 됩니다. 계속해야 신앙이 되지 계속 안 하면은 우리에게는 회개의 능력도 안 오고 또 소망의 능력도 안 오고 실행의 능력도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난밤에는 양심에 대해서 말을 증거했습니다. 양심으로 안 하면 소용 없다. 양심은 우리의 마음의 제일 수지되는 제일 머리가 되는 것이 양심입니다.

마음에는 양심 빼놓으면 그 마음은 다 생명 없는 시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도 또 하나님과 이렇게 결합을 가지고자 하는 데에도 양심을 빼놓으면 절대 안 됩니다.

그걸 빼놓고 되는 줄 알지마는 그것을 가리켜서 다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집을 지었다, 불탈 걸로 집을 지었다, 모래 위에 집을 지었다 하는 것이요 마음을 제일 먼저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그다음에 목숨을 다하라 그말은, 마음 다하라 말은 곧 양심으로 하라는 그말이요 목숨 다하라 말은 자기 몸에 있는 것 다 들이라 그말입니다. 목숨이 최종 아닙니까? 그러기에 양심으로 하라 이라니까 기도할 때도 양심으로 해야 되고, 또 연보할 때도 양심으로 해야 되고, 모든 범사에 양심으로 하지 안하면 하나님과는 상관 없다 말씀을 하는 것인데 양심으로 하는 게 뭐이냐? 양심으로 하는 것은 자기가 인정하는 지식, 자기가 인정하는 지식, 그러면 불교를 믿는 사람은 불교의 지식을 인정할 것이고, 또 공산주의는 공산주의의 그 사상 지식을 인정할 것이고, 이런 유교는, 유교 하는 사람들은 유교의 그 사상을 인정할 것이고, 기독자는 기독교의 지식인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을 인정하는 사람이 기독자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이 지식은 옳다, 이 지식은 바르다, 이 지식이 옳다. 인정하는 지식이 성경 지식을 인정하면 기독 신자고, 또 그 사람이 불교 지식을 인정하면 불교 신자고, 예배당에 다니기는 다니지마는 성경 가운데에 몇몇 지식은 내가 인정할 수 있지만 나머지기는 인정하지 못한다 그라면은 그 사람은 온전한 기독자는 아닙니다.

또 그 사람이 그러면 인정하기를 기독교의 지식 가운데에 백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만 인정한다면 그 사람은 부분적 신앙이요 그는 이리 저리 치우쳐서 일방적 신앙이지 온전한 신앙은 아닙니다.

그러면 자기가 한 가지만 인정하는데 한 가지만 인정하는 그대로 행하면, 한 가지만 인정하는 그 인정하는 그 지식의 지배를 받으면, 한 가지 인정하는 그 지식의 지배를 받으면 그 사람은 부분적인 신앙 양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또 자기가 인정을 만일 백 조문 중에 열 조문을 인정한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어떤 신앙이냐? 그 사람도 부분적 신앙이라고 볼 수가 있고 아주 어린 신앙이라 볼 수 있고 좁은 신앙이라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구비하지 못하는 불구비한 미구비의 신앙이라 그렇게 할 수 있고, 그 사람의 양심은 어떤 양심이냐? 자기가 인정하는 것만치는 그 지식에 지배를 받는 마음이 양심입니다. 그러면 열 가지, 백 가지 중에 열 가지는  인정하는, ‘요것은 옳다’ 옳다 인정하는 그 지식을 자기 행동에는 버리지는 안하고 옳다 인정하는 그 지식대로만 자기가 마음이나 몸이나 그 움직여서 행동할 때에 그 사람은 양심을 쓰는 사람입니다.

양심을 쓰는 사람이나 그 사람이 백분지 열을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양심은 어린 양심이라 그렇게 할 수가 있고, 또 그 사람은 일방적 양심이라, 또 불구비한 그런 양심이라, 기형적 양심이라 그렇게 할 수도 있고, 또 그것은 양심의 씨종자는 있다, 양심의 씨는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양심의 씨는 있다 하면은 그 사람이 자기가 신구약 성경 지식을 인정하는, 인정이 안 돼서 지금 그대로 행하지 안하지 인정이 되는 것은 그대로 변동 없이 행한다면 그 사람은 양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백의 열이니까 십분지 일 아닙니까? 십분지 일만 하기 때문에 온전한 양심은 되지 못하고 십분지 일이니까 어리다 그말이오.

어린데, 그러면 어리면 십분지 일을 행하는데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의 신앙이 치우쳤다, 십분지 일을 하는데 왜 어떤 사람에게 대해서는 그 양심이 일방적인 양심이다, 치우친 양심이다, 기형적 양심이다, 양심의 종자는 있다, 종자적 양심이다. 그 내나 같이 백의 열을 행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구별하겠습니까? 치우친 양심이라 그말은 다른 건 다 무시하고 요것만 인정하기 때문에 요것만 하면 된다, 요것만 하면 된다 하는 그것이 일방적 양심이요, 치우친 양심이요, 기형적 양심이요, 또 그것이 불구비한 양심이라 할 수 있는데, 어린 양심이라 하는 것은 무엇을 어린 양심이라 하느냐? 자기가 아직까지 신구약 성경 지식에 대해서 인정을 지금 다 못 하고 백의 열만 인정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자꾸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 둘 인정을 해 나갈라고, 인정을 더 길러 갈라고, 인정을 더 길러 갈라고 애를 쓰는 그 사람은 또 인정이 자라가니까 열 가지 인정했다가 열한 가지 인정합니다. 그러면 자꾸 인정을, 알라고 애를 쓰고 인정할라고 애를 쓰고 인정이 자꾸 하나 더 자라가니까 그대로 하나 행하는 것도 하나 더 범위 넓게 구비하게 행합니다. 그러면 그런 것은 양심이 어린 양심이나마 그 양심이 지금 살아 있다, 자라가고 있다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자라가고 있다.

‘그 양심이 기형적이다’ 기형적이라 말하는 것은 그것으로써 고정되고 그것으로써 족하다, 이제 그 이상 더 알아갈라고 인정해 갈라고 애를 쓰지 않는 그 사람의 신앙도 양심도 그것은 다 기형적이요 또 일방적이요 불구비적입니다.

그런데 어린 양심이라 하는 것은 뭐이냐? 어린 신앙은 뭐이냐? 어린 신앙이라는 건 자꾸 자라가는 그 성장성, 자라가는 성품이 있을 때에 그것을 어리다, 신앙도 어리다, 또 양심도 어리다,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에게 간단하게 말하면 좋을 건데 왜 그렇게 여러가지로 말하느냐? 여러가지로 말하지 안하면 들을 사람은 들어야 되는데 고거 일방적으로 말해 놓으면 뒤에 거게 대해서 다른 사람이 오면 완전히 까뭉케 버려서 바짝 뭉캐져 죽어버립니다. 이러기 때문에 거게 대한 구비한 것을 증거하고 가르쳐야 그면을 다 알면 다른 것들에게 침노를 받지를 않는 것입니다.

만가지가 다 그렇습니다.

이런 곤충들도 그놈이 생겨나올 때에는 하나님이 짓기를 그것이 살면은 앞으로 방해할 것들이 많습니다. 그 방해할 그런 것이, 또 그거는 그대로 또 삽니다.

그러면 이 생존과 저 생명과 이 존재와 저 존재가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서로 충돌이 돼서 어느 곤충이라도 그 곤충으로서의 사는 것이 먹을 것 있는 데 가 살아야 되겠고 자기 적성에 맞은 데 가서 놀아야 되겠고 또 활동해야 되겠고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데, 이것이 자기가 활동할 수 있는 그 모든 범위 내에서는 어떤 것이든지 그것을 다 면역성이 있고 방어성이 있어서 그런 걸 다 방어하고라야 살지 방어하지 안하면 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데 구비한 것을 하나님이 주신다 그말이오.

오리 새끼는 그놈은 물에 가 살기 때문에 아예 물에 뜰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자꾸 구비하고 기르고 또 이 새는 기어 돌아다니지 안하고 날아다니기 때문에 자꾸 나는 연습을 시켜 가지고 어데서든지 날 수 있는, 날 수 있는 이런 새도 여러 종류로서 그저 높은 데 날지 안하고 요 나무에서 저 나무로 호뜩호뜩 자잔하게 그래 다닐 것은 그걸 배우지 독수리처럼 공중에 나는 그런 것을 배우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서 살 수 있는 환경 그 주위와의 조화가 맞을 수 있고 그런 데에서 피해를 받지 안하고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종류마다 각각 그 모든 기능을 달리 그렇게 하나님이 기르신다 그말이오.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여게서 이래 있다가 이 사회에 나가면은 별별 뭐 이단도 만나고 신신학도 만나고 별별 것 만날 것이기 때문에 그런 걸 만날 때에도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 범위 넓게 자꾸 이렇게 그저 될 수 있는 대로는 필요 없는 범위는 하나도 말하지 안하고 필요 있는 범위 중에서도 그저 감당할 수 있는 그런 범위에서 가르칠라고 자꾸 이렇게 범위를 넓히 놓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양심에 대해서도 양심이 어떤 게 양심이냐? 양심은 한 말로 말하면 자기가 인정하는 지식, 자기가 인정하는 지식, 요거는 옳다 인정하는 그 지식에 지배를 받는 그것이 양심입니다. 알겠습니까? 요거 무슨 말인지 깨달아져요? 자기가 인정하는 지식에 지배를 받는 것이 양심입니다. 자기가 인정을 하는데 그 지식에게 지배를 받지 안하고 그 지식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안하면은 그것은 양심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구약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이라고 신학교수도 하고 이렇게 하지마는 그 사람이 요 지식을 ‘요거는 참되다. 요거는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는다.’ 그 지식으로 인정하는 것이 하나도 없으면 그 사람은 기독자가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신앙이라 말은 하나님의 이 선포해 놓으신 이 하나님의 지식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반쪼가리요 또 인정하는 대로 행하는 것이 그것이 반쪼가리어서 믿음이 되는 건데 그러면 인정하는 것을 자기가 인정하는 지식대로 행할 때에 행하게 하는, 행하게 하는 과정이 어떻게 되느냐? 행하게 하는 것은 그 마음이 강조해 가지고 그 몸이 마음의 지배를 받아 가지고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서 움직여서 몸이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때 역사하는 것이 양심인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그 양심이 뭐라는 것 알 수가 있어요? 이거 못 알아들으면 안 돼.

그러기 때문에 양심은 그 사람이 인정하는 지식에 지배를 받아 가지고 인정하는 지식대로 움직이는 것이 양심입니다. 그러면 불교자의 양심은, 불교인의 양심은 불교를 불경을 그 사람이 인정하는 그대로 행하는 것이 그것이, 행할라고 역사하는 것이 불교인의 양심이요, 기독자는 신앙 양심이라는 것은 뭐인고 하니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지식을 인정하고 인정한 그대로 지배를 받는 마음, 하나님의 지식을 인정하고 인정, 자기가 인정하는 그 지식의 지도를 받는 것이 그것이 양심이라 그말이오.

그러기에 자기가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인정을 해도 그 마음은 그 인정하는 지식의 지배를 안 받으면 그 사람은 양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양심이 없는 사람으로 그저 지식으로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양심이 비로소, 자기가 인정하는 것은, 인정하는 것은 양심 없이도 인정할 수가 있고 이성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성도 인정할 수 있으나 이성이 인정하는 그거는 인정을 하지마는 자기가 이거는 이게 옳다 이래 인정하고 또 저거는 저게 옳다 이렇게 인정을 하지마는 그 사람은 양심은 없는 사람입니다.

양심 있는 사람은 인정하는 그대로 ‘요대로 해야 된다’ 하는 요 마음 있는 사람이 양심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인정을 해도, 인정을 해도 자기와는 상관 없이 ‘참되다. 옳다. 이거는 맞다.’ 이렇게 인정하지마는 자기와는 상관 없는 그것이 이성으로 인정하는 것이요 양심은 없는 사람이라.

양심은 자기와, 자기가 알고 있는 인정하는 지식과 자기와 관련을 가지는, 관계 가지는, 연결 가지는, 관계 가지는 그게 양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은 마음의 제일 수지요 마음의 제일 진수라.

그러기에 다시 말하면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다 인정한다 보고,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몰라 그렇지 하나님의 말씀은 참되다 인정한다고 보고, 그러면 인정하는 사람은 자기가 요 말씀대로 하려고 하는 그 마음, 요 말씀대로 하려고 하는 마음, 그 마음이 그것이 양심입니다. 요 말씀을 아는 대로는 요 말씀대로 행할라고 하는 것.

그러면 연보하는 데도 양심으로 하지 안하면 소용 없다 하는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성경 지식을 아는 대로, ‘요라면 요 연보하는 것이 요것이 옳게 연보하는 것이냐? 바르게 연보하는 것이냐? 이 참된 연보가 되느냐? 하나님이 요 연보를 받으시겠느냐?’ 그 연보하는 데 대해서 자기 마음을 써 가지고 자기대로 아는 대로는, 아는 대로는 모든 지식을 다 활용해 가지고 모든 지식에 맞춰서 요대로 하면은 ‘내가 성경을 알고 깨달은 대로는 요 연보하는 것이 요것이 바로 됐다.’ 그러기에 자기 마음으로서 옳게 바르게 자기가 알고 있는 그 성경 지식대로는 옳게 바르게 하려고 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 거게 맞도록 해야 그거 하나님이 받으시지 그거 아니면 안 받으신다 그말이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일생 동안 신앙 생활해도 양심을 쓰지 않는 사람 있습니다. 또 자기가 무슨 행동을 해도 그 행동할 때에 ‘요 행동이 요것이 바르냐 틀렸나?’ 그러면 ‘바르나 틀렸나?' 바르냐 요게 틀렸느냐 그것을 살필 때에는 바르냐 틀리냐 하는 것은 뭣을 잣대로 삼아 가지고 요거 바르냐 삐뚤어졌느냐 합니까? 신구약 성경 말씀을 잣대를 삼아 가지고 바르냐 삐뚤어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서 ‘요라면 바로 되느냐? 요라면 말씀대로 바로 되느냐? 바로 됐느냐 요거 틀렸느냐?’ 요것을 살펴서 자기가 아는 성경 말씀대로 요대로 바로 하려고 하는 요 마음 그게 양심입니다. 요거 없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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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하나님과 사람 사랑-계명지킴/ 요한일서 5장 2절-3절/ 1983. 9. 23. 지권찰회 선지자 2016.01.02
515 하나님과 사람 위하는 방편/ 마태복음 5장 7절/ 1988. 9. 16. 지권찰회 선지자 2016.01.02
514 하나님과 성도와 관계성/ 호세아 2장 4절-23절/ 1984. 8. 26. 주일오전 선지자 2016.01.02
513 하나님과 연결-말씀 묵상으로/ 골로새서 3장 2절-4절/ 1983. 9. 20. 화새벽 선지자 2016.01.02
512 하나님과 연결이 생명/ 베드로전서 1장 24절-25절/ 1986. 5. 2. 지권찰회 선지자 2016.01.02
511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원인을 찾자/ 누가복음 10장 25절-28절/ 1987. 5. 8. 금저녁 선지자 2016.01.02
510 하나님과 이질적인 요소를 버리라/ 히브리서 11장 6절/ 1981. 1. 6. 화새벽 선지자 2016.01.02
509 하나님과 자기와 믿음 생각 할 것/ 요한계시록 3장 18절 상반절/ 1987. 10. 29. 목새벽 선지자 2016.01.02
508 하나님과 재물/ 마태복음 6장 24절-34절/ 1989. 6. 16. 금저녁 선지자 2016.01.02
507 하나님과 재물/ 마태복음 6장 19절-34절/ 1989. 6. 17. 토새벽 선지자 2016.01.02
506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 출애굽기 12장 13절-14절/ 1979. 11. 23. 금저녁 선지자 2016.01.02
505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라/ 창세기 6장 1절∼14절/ 1981. 1. 28. 수저녁 선지자 2016.01.02
504 하나님께 가까울 수록 거룩하라/ 민수기 20장 2절-13절/ 1983. 6. 25. 토새벽 선지자 2016.01.02
503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면/ 요한복음 14장 1절-3절/ 1981. 3. 27 금새벽 선지자 2016.01.02
502 하나님께 감동 주는 사람/ 히브리서 11장 1절-3절/ 1985. 9. 15. 주일새벽 선지자 2016.01.02
501 하나님께 구하라/ 야고보서 4장 1절-3절/ 1984. 5. 21. 월새벽 선지자 2016.01.02
500 하나님께 대해서 노력할 것/ 로마서 6장 23절/ 1985. 11. 8. 금새벽 선지자 2016.01.02
» 하나님께 받는 방편/ 요한계시록 3장 8절∼12절 상반절/ 1987. 4. 16. 목새벽 선지자 2016.01.02
498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마태복음 13장 3절-9절/ 1984. 4. 1. 주일오후 선지자 2016.01.02
497 하나님께 주권이 있음을 믿고 계명생활/ 다니엘 6장 1절∼27절/ 1987. 3. 15. 주일오후 선지자 2016.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