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1986. 3. 9. 주일오후

 

본문:고린도후서 5장 9절∼10절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선지자선교회 오전에 여게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거 쉽게 그렇게 해 가지고 알기는 어렵고 한 번 또 오후에 잠깐 간단하게 거게서 좀 설명을 하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있는 것이나 무궁세계에 가서 살 때에나 우리 할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적을 정하시고 당신의 형상대로 그렇게 지으시기로 하신 그 목적 자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목적을 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우리의 택하고 부르심은 아버지 하나님을 위해서 택하고 불렀다 그렇게 성경에 말씀을 했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지키심을 받은 자들이라 또 그렇게도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이 목적 정하시고 택했구먼.’ 녜, 그렇습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이기주의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완전자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택하신 것은 곧 완전을 위하는, 완전을 위하는 자들이 되는, 완전한 자체와 완전한 행위와 완전한 모든 건설들을 하기 위해서 우리를 택하시고 또 창조하시고 구속하셔서 오늘까지 기르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선악간이란 말은 선은 하나님을 중심해서 하나님의 법도대로 사는 것이 선이요 하나님 외에 어떤 피조물이든지 피조물을 중심해서 피조물의 의사대로 사는 것이 그것이 악입니다. 그래서 선과 악으로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오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있어서 네 가지로 말했는데 첫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주님과 주님의 그 뜻을 바로 아는, 앎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아는 그 앎이라는 바로 아는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바로 안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바로 안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기에 바로 앎이 기쁘시게 했다 그 말은 앎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게 아니고 바로 아는 그 자체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또, 둘째로는 주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을 믿는, 믿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또, 셋째로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보니 내 모든 소망이 다 거기에 있고 내 모든 문제 해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분과 의논하지 안 할 수가 없고 그분에게 기도하지 안 할 수가 없어 필연적인 기도하게 되는 고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합니다.

네째로는, 이렇게 되므로 필연적으로 그분의 법도에 순종하고 또 그분에게 순종하고, 그분에게 순종한다는 말은 그분을 따라서, 그분을 자꾸 따라서, 그라니까 그분은 원형이라면 우리는 그분과 꼭 같은 모형적인 그 인격과 행위를 가지게 되는 이것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든 원인이 다 하나님이시요 또 그분이 계획한 그런 일이 있으니 그분이 제일 크시고 그분이 모든 것의 원인이고 모든 것의 또 전부고 이러니까 우리는 알아야 될 것이 많이 있고 그런 것이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이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해서 가지신 그 뜻을 아는 것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도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알도록 우리가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다 강제가 아니고 또 무슨 모험성을 가지고서 하는 것도 아니고 기독교는 전부 다 필연성의 것이요 필연성의 행동입니다.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는, 필연적으로 해야 되는 그것이 기독자의 생활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들은 그래도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출세를 하고 뭐 다른 사람 앞에 뒤떨어지지 않게 산다든지 또 무슨 온갖 면으로 성공을 한다든지 이렇게 하는 데에는 아무래도 거게 대한 과학을 배워야 되겠고, 또 사람들이 어떻게 지금 모두 꾸며 가지고 서로 사회성을 가지고 조화성을 가지고 사는가? 인인 관계에 조화성을 배워야 되겠고, 또 물물 조화성을 배워야 하겠고, 또 자기가 어떻게 모든 존재들을 상대하여야 하느냐 그런 것을 알아야 자기가 천해지지 안하고 자기가 다소라도 좀 실력 있고 존귀하게 된다 이래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 뭐 아주 형편이 없어도 학교에 입학을 시켜 가지고 어짜든지 공부를 해야 된다 하는 그것은 자기네들은 알아야만 살고 알아야만 성공을 하고 알아야만 자기네들에게 오는 모든 해독을 다 방어할 수가 있기 때문에 모두 다 필연적으로 아무래도 이것 좀 배워야 되겠다 해 가지고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아니까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우리의 전부가 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다 매였습니다. 딴데 매인 게 아니고 전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매였기 때문에 그분을 바로 알아야 그분을 바로 상대하겠고 또 그분의 법도를 바로 알아야 그분의 법도에 맞추어서 살아야 되지 잘못 살면 심판으로 멸망이요 바로 살면 축복이니까 얼마나 참 위태 위태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법을 알아야 되겠고, 또 하나님 그분이 뭐 한 이등이나 삼등이나 십등이나 가는 것 같으면 하지마는서도 그분이 홀로 주권자입니다. 땅 위에 우주에도 큰 위력을 가진 존재들이 많지마는서도 다 그분이 지었고 그분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그분이 제일 크니까, 부득이 우리가 그분을 잘 알아 가지고 비위를 맞춰야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사대주의, 큰 것을 섬기는 것을 다 조롱하고 있지만서도 사대주의가 아닌 것은 꺾어지고 망하고 맙니다. 우리는 그런 데 속한 게 아니고 하나님에게 속했지마는서도 이 세상에서는, 그러기 때문에 야당의 자손들이 잘 안 됩니다.

야당의 자손들이 보면 과거에 왜정 말년 때도 그 애국자로서 그때 그 정권에게 반대한 그 야당으로 독립 운동하는 사람 애국자 한 그 사람들이 다 자손은 다 비참하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좋은 일이고, 할 일은 할 일이지마는서도 그 위에 또 뜻이 있어.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저 민족에게 붙였다가 또 이리 붙였다가 자꾸 이래 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그저 우리는 따라서 하나님이 정확 무오한 법칙을 주었기 때문에 그 법칙대로 뭐, 우리는 공산주의가 되면 공산주의 밑에서 그 법칙대로 삽니다. 법칙대로 살면서 그 법칙에 거슬리면 우리가 대립이 될 것이고 그 법칙에 맞으면 또 그대로 살 것이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에, 쪼부랍게 어떤 편벽되게 어떤 존재에게 붙을 것이 아니고 제일 거게 큰 세력에게 붙는 것이 생리의 본능이요 또 사람들의 그 이성 비판의 본능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제일 크시니까 우리는 그분에게 붙어야 되겠고, 또 그분에게 속해야 되겠고, 또 그분의 비위를 맞춰야 되겠고, 그분을 따라서 살아야 되지 그분이 제일 크신 분이라 없는 가운데서 다 만들어 놨지 지금도 만들어 놓으신 걸 보존도 그분이 보존하시지 없앨라 하면 일시에 우주가 다 가루가 될 수도 있고 없앨 수 있고 이렇지 또 그분이 먹이고 입히고 기르고, 그라는데 그분이 앞으로 큰 심판을 두고서 ‘나그네 세상에서, 이 세상에서 한 토막 어떻게 사나 보자. 잠깐 지나가는 육칠십 년 칠팔십 년 그저 백 년 이쪽 저쪽이라는 짧은 세월을 네가 살면서 어떻게 사나 보자.’ 없는 가운데 내신 제일 크신, 지극히 크신, 지존하신, 지대하신 이 하나님을 상대하고 그분에게 따라서 그분을 위해서 그분의 법칙에 맞춰서 사나, 그것은 버리고 네가 왕이 되어 가지고 네 중심 네 위주로 사나 그것을 지금 이 한 토막 세상에서 사는 그것을 가지고서 영원 무궁을 다 보응시킵니다.

이래서, 성경에 몇 군데 말씀하시기를, 네가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큰 것을 맡기겠다 이랬습니다. 작은 것에 충성했으니 큰 것을 맡기겠다 그 말은 작은 것은 이 세상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데 잠깐 지내는 이 세상을 네가 하나님의 법도를 지켜 살았고 대주재이신 하나님을 위주로 해서 중심으로 해서그분을 모시고 살았으니까 네가 간단한 시간에 하나님 중심 위주로 그 법도를 지켜서 살았으니 영원 무궁세계에 너를 세워 가지고서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로 그 법도를 따라서 살도록 하겠다, 네가 작은 일에, 하룻밤 나그네와 같은 이 짤막한 세상도 네가, 창조주요 조물주요 모든 보존자요 전부를 네게 먹이고 입히는 그분을 네가 무시하고서 그분의 법칙을 무시하고 네 맘대로 사는 그 자를 무궁세계에 또 좋은 걸 주면 안 될 터이니까 너는 유황불 구렁텅이에 집어 넣어서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영원히 있게 하리라 그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사대주의하는 게 죄가 아니고 그게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요런 것은 그저 확고한 지식으로 가져야 됩니다. 어떻게? ‘사람이 삶의 목적이 뭐냐, 사람된 목적이 뭐이냐, 내가 땅 위에 난 목적이 뭐냐, 그러면 내가 여기 이렇게 하루 이틀 살아가고 있는 이 목적이 뭐냐?’ 전목적이 조물주 그분을 경외하고 또 그분이 우리에 주신 그 법칙대로 살고 이렇게 하므로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거 이것이 우리의 사람된 목적이요 또 우리의 소망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한계시 18장은 이 세상을 불로 다 태워서 없어질 그 심판을 말씀했었는데 거기에 말씀하시기를 무슨 죄로 사람들을 불을 태워서, 우주를 전부 불로 태워 가지고서 다 원소로 만들어 버리고 다 사람을 바짝 태워서 다 죽여 버리고, 또 사람들의 모든 은밀한 행동을 다 환하게 드러내 가지고 모두 다 알도록 그렇게 할 것인가? 무슨 죄를 짓기 때문에 그런가? 거게 대해서 성경이 말씀해 놨습니다.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대로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주라’ 이랬어. 그 죄는 단지 그겁니다. 하나님 기쁘시게 하지 안하고 저나 어떤 인간이나 그런 거 기쁘게 하고 하나님 법칙 따르지 안하고 어떤 인간, 잘난 인간이든지 저든지 그 법칙 따르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불심판으로 다 멸망시킨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과거에 한번 크게 심판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는 물로 심판했습니다. 물로 심판할 때는 그라면 어떤 심판 했던가? 창세기 6장에 보면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보고 제가 좋아하는 대로 취하여 아내 삼았기 때문에 멸망했다’ 요렇게 딱 고 멸망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면 거게 하나 생각할 것은, 여자는 하나님의 뜻은 생각지 안하고 저 좋은 대로의 남자 택해 가지고서 살았기 때문에 멸망한다, 또 남자는 저 좋아하는 대로 여자 택해 가지고서 살았기 때문에 멸망했다 고것을 표시한 건데 고 표시가 무슨 표시냐 하면은 남자고 여자고 저 좋도록 저 위해서 한 고것 때문에 홍수로 다 멸망시켰습니다. 노아는 자기 좋도록 하지 안하고 하나님 좋도록 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았기 때문에 그는 온 천하를 물로 멸망시키는 가운데서라도 고 여덟 사람만 구원을 시키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에 온 천하가 물심판으로 멸망받은 것도 하나님 기쁘시게 하지 안하고 저 기쁘게 하다가 멸망을 받았다, 또 앞으로 남은 이 우주도 멸망받는 것은 하나님 기쁘시게 하지 안하고 자기 기쁘게 하다가 멸망을 받는다 고걸 기억하고, 그러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는데 새 하늘과 새 땅은 누구 줄라고 있는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법도대로 산 그 사람을 주기 위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다 예비해 놓고 있다. 이것은 온 성경에 간단하게 말하면 이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런 것을 확고한 지식으로 가지고 매사에 크고 작은 일을 닥칠 때에, 보자 이것은 하나님 기쁘시게 하는 일이냐 나 기쁘게 하는 일이냐, 또 이것은 하나님의 법도 지키는 것이냐 내 생각대로 하는 것이냐 고만 고것만 비판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우리는 망하고 그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영생이요 평강입니다. 영생이요 평강이오. 하나님의 법도대로 사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법도대로 사는 것도 전부 영생이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당신이 완전이기 때문에 당신 좋게 하라 그말은 완전을 좋게 해라 그말이니까 완전을 좋게 하면 우리는 행복된 사람이 될 게 아닙니까? 완전을 좋게 하면 우리는 완전자가 될 것 아닙니까? 그런고로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서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우리의 생활의 잣대를 삼아야 할 것입니다.

조그마한 가정이라는 그런 나라에도, 가정이라는 조그마한 세계, 고 세계에도, 고 세계가 유지할라면은 자기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면은 고 가정이 돼지고 온 가족을 다 희생시켜서 저만 기쁘게 할라 하면 그 가정 망하는 것입니다. 사회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고 회사도 그렇고, 안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안 그런 게 하나도 없습니다. 뭐 작은 단체나 큰 단체나, 둘만 있어도 둘이 있으면서, 갑하고 을하고 둘 있는데, 갑은 항상 을 좋도록 할라 하고 을은 갑 좋도록 하고 그러면 그거야 자꾸 부흥이 되지마는서도 갑은 을을 어짜든지 옹쳐대서 저 좋도록 하고 을은 갑을 어짜든지 옹쳐대서 저 좋도록 하고 이라면 멸망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다 그렇다 말이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놨고 그게 참이라, 그게 바른 법칙이요 이치라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사람은 조물주이신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은 우리 기쁘게 하고 이라면, 하나님은 우리 위하고 우리는 하나님 섬기고 이라면 그 영생이 되고 모든 것이 잘될 수밖에 없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저 좋게 할라 하는 고것은 전부 자멸 행위라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저 좋게 안 하면 다른 사람을 좋게 할까? 다른 사람을 좋게 하는 그것이 좋지마는서도 그것이 자존자 조물주에게 거슬릴란지 몰라.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단순합니다.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면은 그것이 원수도 기쁘게 한 것도 됐고 사랑하는 자도 기쁘게 한 것 됐고 하나님만 기쁘시게 했으면 그것이 전 인류를 기쁘게 했고 행복되게 한 것이 되어지고 만물에게도 다 행복되게 한 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우리가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는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요 일을 잘해서 성공해야 되겠는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요 일을 잘해서 성공하면 인간 성공을 하고 가는 것입니다. 또 세상에서 성공하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무궁세계에서 성공자로, 무궁세계에서도 하나님은 그 사람만 씁니다. 그 사람이 주먹덩이만침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으면 주먹덩이만한 일을 하늘에서 맡깁니다. 그 사람이 세상에서 이 집채 무더기만침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으면은 하늘나라에서 집채 무더기만한 그 일을 맡깁니다. 그 이상은 맡기면 제가 감당 못 할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세상에 왔다 간 사람 중에 제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으면 그 사람은 무궁세계에 제일 큰 것과 제일 중한 중직을 맡기게 됩니다. 제일 큰 중직을 맡기게 돼요.

또, 그 사람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 하나도 없으면 하늘나라에서 할 일이 하나도 없어. 그 사람은 한번도 세상에서 해 보지 안했기 때문에 거게 대해서 무식꾼이라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하늘나라에서 할 일 없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할 일 없는 사람, 천한 사람, 무능한 사람, 쓸모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 기쁘시게 한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그것만이 무궁세계 가치요 실력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에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할 것인가? 오전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을 몇 가지를 말했습니까? 네 가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네 가지라 말했습니다. 요 가운데 다 들었어.

첫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ㅡ하나님이 주님이요 주님이 하나님입니다.ㅡ그러면 ‘하나님’ 해도 되고 `주님' 해도 돼요. 주님 해도 되고 하나님 해도 내나 같은 말이라. 주님이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이 주님이십니다ㅡ이러기에, 첫째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그 뜻을 내가 바로 아는 것입니다. 바로 아는 그것이 제일 기쁘시게 하는 것이오. 첫째 일호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그 뜻을 내가 바로 아는 거, 그러면 하나님만 알면 그만 그 뜻도 알고 다 됩니다, 그만. 하나님을 바로 아는 그것이 하나님을 제일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 아는 것이, 기쁘시게 하는 것 중에도 제일 기쁘시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아는 것이 제일 기쁘시게 하는 것이오. 그러기 때문에 ‘저가 나를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이랬어. 하나님만 알면 자꾸 하나님이 높여,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또, 둘째로는 아는 이 하나님을 내가 믿어 드리는 것이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믿어 드리는 거, 믿는 거. 하나님이 제일 섭섭하게 생각하는 것은 뭘 섭섭하게 생각하고 하니 하나님에게 대해서 무식한 것을 제일 섭섭하게 생각합니다. 무식한 거.

우리도 자식을 키우는데 자식이 내나 밥 먹이고 옷 입히고 학교 공부시키고 떡 이라니까, 이래 가지고 떡 가서 ‘내가 누구지?’ `몰라요.' `내가 누군지 몰라?’ ‘내가 알 턱이 뭐입니까?' 이래 보이소. 그래 놨으면 참 아무 아버지라도 좋다 할 아버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 하나님을 아는 걸 제일 기뻐하시고 그 다음에는 아는 하나님을 내가 믿는 것을 기뻐하시고, 아버지가 뭐 이렇게 이렇게 이래라 이라니까 안 해. ‘왜 안 하노?’ ‘그렇게 하면 될란지 안 될란지 아는가요?' 아버지의 말을 안 믿는다 그말이오.

아버지가 ‘야, 내가 지금 이렇게 이렇게 너에게 해 주겠다.’ 도무지 반응이 없습니다. ‘왜 내가 하는 말 네가 안 듣노?’ `해 줄란지 안 해 줄란지 누가 아는 가요, 어데? 내가 어떻게 믿을 거라, 아버지를 어떻게 믿을 거라, 아버지 말을 어떻게 믿을 거라.’ 그래 놨으면 부모 마음이 좋겠소 섭섭하겠소? 꼭 그와 같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아무리 좋은 지도를 해 줄라고, 좋은 것을 유업으로 넘겨 줄라고 해도 아버지의 교훈을 믿지 안하고 아버지를 믿지 안하고, 이러니까 그 사람에게 주면 뭣 되겠습니까? 주면 죄나 짓지 딴거 뭐 있겠소? 이러니까, 첫째는 아는 것을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고, 둘째로는 믿는 것을 제일 기뻐하시고, 셋째로는 기뻐하는 것이 알고 믿기 때문에 막 그분에게 매달리요.

그분에게. 모든 것도 또 그분에게, 아이 귀찮다 해도 그분에게 가서 의논하고 그분에게 간구하고 그분에게 뭐, 잘못한 것도 그분에게, 잘한 것도 그분에게, 어려운 문제도 그분에게, 필요 있는 것도 그분에게, 두려운 것도 그분에게 막 전부를 다 그분에게 들이밀어 가지고 그분에게 ‘이거 이거 이거 해 줘야 됩니다, 이렇습니다.’ 그분으로 더불어 관계를 맺고 의논하는 그게 기도입니다. 그것이 셋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네째로 기쁘시게 하는 것은 이렇게 알고 믿고 그분에게 기도하고 이랬기 때문에 이제는 그분이 시키시는 대로 하면 돼. 순종하는 거.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면 이 네 가지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요 이것만 하면 영원 세상에도 성공이고 금생에도 성공입니다.

요걸 여러분들이 자꾸 알고 알고 느껴서, ‘그러면 하나님 알고 하나님 믿고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그러면 그게 교회에서나 필요하지 우리 상점에서도 필요해요, 그게 예수 믿는 데서나 필요하지 내가 세상에서 장사하는 데도 그게 필요해요, 내가 정치하는 데도 필요해요, 공부하는 데에도 필요해요, 내가 전쟁 가 가지고 지금 탄환 속에 지금 파묻혀 있는데 곧 탄환 맞아 죽을 지경인데 여게도 필요해요?’ 어데도 필요하다. 어데라도 필요하다. 제일 필요하다. 이것이면 안 될 것 없어. 전쟁에도 필요하고 장사에도 필요하고 공부하는 데도 필요하고 정치하는 데도 필요하고 출세에도 필요하고 모든 행정에도 필요하고 뭐 돈벌이하는 데도 필요하고 몸을 건강케 하는 데도 필요하고 필요한데, 전부 이것만하면 다 돼. 이거 제일이라. 이것만하면 다 돼요.

이러니까, 요 네 가지를 우리가 제목적으로 단단히 외웁시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 하나님 의심 없이 믿는 것,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과만 더불어 상대하는 것, 이랬기 때문에 그분을 따라서 ‘예 예’로 복종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요.

하나님이 땅 위에 참으로 좋은 것은 이 네 가지 한 사람에게 조금 했으면 조금 주고 많이 했으면 많이 주고 또 무궁세계도 좋고 행복스런 것은 이런 사람들에게 줍니다. 땅 위에 좋은 것이라니? ‘기도 하나도 안 하고 하나님 안 믿고 하나님 모르고, 그 사람도 부자가 되데,’ 어리석은 자야 그 부자가 정말로 저에게 좋으냐, 하나님 모르고 하나님 안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안 하고 하나님께 복종하지 안하는 자가 가지고 있는 그 돈이 정말 저에게 행복되나? 그것이 저를 태워서 멸망시킬 폭탄입니다. 좋은 게 아니라, 유익 된 것이 없어. 권세도 그렇게 지식도 그렇게 명예도 그렇고 다 그래요.

좋은 것은, 다 네 가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을 좋은 거 주십니다.

금생에도 좋은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에게 다 주고, 그거 주기 위해서 만들어 놓았고 무궁세계에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에게 주기 위해서 좋은 것을 다 갖춰 놓고 있습니다.

그러면, 앎에 대해서 지금 제가 또박또박 읽습니다. 왜? 그 해석을 하면 복잡할 것이기 때문에, 혹 여러분들이 들을 때에 이거는 문법상 이거 어법상 틀렸다.

여게는 무슨 자를 하나 넣어야 되겠고 무슨 자 하나 빼야 되겠고, 그렇게 생각되는 거 있을지라도 그렇게 하지말고, 그거 다 이유가 있으니까 똑 그대로, 기록 할라면 기록하십시오.

일, 하나님을 앎이 기쁘시게 함. 하나님을 앎이 기쁘시게 함. 하나님을 앎으로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아는 그 자체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 말입니다. 고게 일에, 고게 일, 하나님 앎이 기쁘시게 하는 고 앎이 기쁘시게 한다는 거게 대해서 첫째가, 성경을 읽어 앎이 기쁘시게 함. 성경을 읽어 앎이 기쁘시게 함. 성경을 자꾸 읽어 내가, 성경을 읽으니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라 하나님의 뜻은 뭐이라 그런 거 하나씩 둘씩 안다 말이오. 내가 하나 알았으면 그만침 그것으로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둘 알았으면 또 하나님 기뻐하시고 열 알았으면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그 앎이라는 앎 그 자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생활하는 데는 제일 일호가 성경을 알기 위해서 성경 읽는 것이 제일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하러 가도 시간 없으면 고만 기도만 하기 쉬운데, 성경을 꼭 먼저 읽고 그라고 난 다음에 기도하는 것이 좋고, 성경을 읽을 시간이 없으면 이제 자기가 성경에 대한 말씀을 외웁니다. 외우면서, 외운 가운데 기도가 나옵니다. 외우는 가운데 기도 나오고 성경 읽는 가운데서 기도가 나오고, 이렇게 성경 말씀을 읽는 거게서 시작해야 되지 다른 데서 시작하면은 안 됩니다.

소지 이호입니다. 성경 말씀을 들어 앎이 기쁘시게 함. 성경 말씀을 들어 아는 거, 들어 안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들어 아는 것은 자꾸 이 얘기하면 이 사람이 이런 말 하고 저 사람 저런 말 하는 가운데 들어서 안다 그말이오.

들어서.

나는 들어서 안 것 하나 잊어 버리지 안하고 있어요. 내가 해방 직후에, 거창읍에 한 상동 목사님이 와 가지고서 사경회를 하는데 나는 그때 가지를 못했습니다.

가족들을 다 보내느라고 보내고, 나는 들판 가운데 집이 있어서 다 보내고 난 다음에는 집을 비워 둘 수도 없고 이래서 나는 집을 보고 다른 가족들은 다 사경회 보냈습니다. 보내고 난 다음에 나중에 마치는 날, 월요일 아침에 그때는 마쳤는데, 월요일 새벽에 내가 내려갔습니다. 사람들 그전에 올라 올 터이니 가족 올라오면 그동안에는 비워도 안 되겠나! 싶어서 내려갔는데, 내려가니까 사경회 마치고 모두 다 앉아서 숙떡거립디다. 숙떡거리는데 ‘그래 모두 무슨 은혜 받았느냐?’ 이래 물으니까 ??? 저거 아버지가 있다 말하기를 ‘한 상동 목사님이 옥중에서 옥살이 할 때에 그때에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마지막 절에 ‘세상 끝날까지 나는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는 요 성구를 말씀하시면서 항상 요 성구를 외우고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신다 하는 요것을 생각한 여게서 승리했다고서 고 말 한다고. 그래 내가 들으니까 그 사경회 참석 안 했는데 진수는 내가 먹었어, 진수는 그만 하면 됐어. ‘됐다 그라면 요거 요거지.’ 고것이면 됐다 말이오. 그런 것은 뭐냐 하면은 들음으로 아는 거라.

들음으로 아는 것. 성경 말씀을 들음으로 앎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

또, 셋째로는 성경 말씀을 배워 앎이 기쁘시게 함. 성경 말씀을 배워서. 설교를 하니까, 설교에는 배우는 거 아닙니까? 성경을 주해해서 가르치는 거, 배워 가지고 앎이 기쁘시게 합니다. 안 고게 앎으로 내가 기쁜 행동 한다는 말 아니오. 안 고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그말이오. 아는 그걸 하나님이 기뻐하시요, 아는 것.

네째로, 성경 말씀을 외워 앎이 기쁘시게 함. 자꾸 외우면 알게 돼요, 자꾸 외워 가지고서 자꾸 외우면은 알게 되요, 이래서 외워 앎이 기쁘시게 함.

또 다섯째로는, 성경 말씀을 생각하여 앎이 기쁘시게 함. 생각을 자꾸 생각하고 자꾸 생각하니까 알게 된다 말이오. 그거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여섯째로는 성경을 깨달아 앎이 기쁘시게 함. 그러기에 성경을 자기가 자꾸 그라니까 조금씩 깨닫고 또 거기서 진리를 깨닫고 깨닫고 자꾸 이치를 더 깨닫고 깨닫고 깨닫는 고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요.

일곱째로는 하나님 말씀을 영감으로 앎이 기쁘시게 함. 하나님 말씀을 영감으로 앎이. 내가 과거에는 내 지성이 알았고 이성이 알았고 내 주관이 알았지마는 내 주관이 알아도 주관이 아는 것은 정도가 있지 그 이상은 몰라요. 깨달아도 그 이상은 깨닫지 못해요. 믿어도 그 이상은 믿지 못해요. 이런데 자꾸 그라다 보니까 성신의 감화가 와 가지고서 내게 내 주관이라는 것을 초월해서, 내 주관은 그런 거 할 수 없는데 내 주관을 초월한 앎을 나에게 주고 깨달음을 나에게 주고 믿음을 나에게 주더라 말이오. 분명히 성령이 와 가지고 내게 역사해 가지고서 나는 키가 열 자밖에 안 된다 하면은 열 자밖에 안 되는데 열 자 이상 것을 당신이 알려 주시니까 그게 뭐이냐 하면은 성신의 감화라 그말이오.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앎이 기쁘시게 한다 하면 어떤 건가? 요 일곱 가지를 말했는데. 고것을 집에 가서 잘 자꾸 생각해서 고대로 하면은 당장 여러분들이 변화를 받고 자꾸 유익 보는 것으로 환하게 알 것입니다.

큰 둘째로, 큰 둘째로는 주님을 믿어 기쁘시게 함. 주님을 믿어 기쁘시게 함.

주님을 믿는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요. 주님을 믿으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셔.

그러면 주님을 믿는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게.

믿으므로 좋은 행동을 해서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그 자체가 기쁘게 하는 거라, 믿는 그 자체가. 주님을 믿어 기쁘시게 함.

거게 일 소지로, 양심이 믿어 기쁘시게 함. 요런 것도 좀 알기 어려운데, 양심이 믿어 기쁘시게 함. 양심이 믿어 기쁘시게 한 사람은, 양심이 믿어 기쁘시게 한 사람은 세상에 이런 거 저런 거 좋은 것을 암만 말해도 이게 옳다 저게 옳다, 사상이나 주의나, 사상이나 주의나 도덕이나 어떤 것 좋은 것을 말해도 내 양심으로서 하나님의 도를 믿어서 기쁘시게 함. 양심이 믿는 사람은, 예수 믿는 도에 무슨 사상이 온다, 철학이 온다, 주의가 온다, 아무리 좋은 게 와도 변동하지 않습니다. 양심이 이게 참 되다 옳다, 양심이 딱 믿었기 때문에, 양심이 믿었으니까 그 사람은 다른 어떤 좋다는 것에 대해서 유혹을 받지 않습니다.

이 양심이 믿지 안한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이 철통같이 믿고 열심히 믿다가도 고만 무슨 시대가 변해 가지고서 어떤 것 오면은 고만 거기 쭉 따라가 버립니다.

그리 따라가. 그게 좋다고, 시대를 따라서 시대에 좋다, 바르다, 곧다, 이것이 참 의롭다. 한말로 말하면 시대가 변하면 이거 좋다, 모든 사람이 이거 좋다 옳다 이랄 때에 좋다는 것과 도덕적으로 좋다 하는 거나 사상적으로 좋다 하는 거나 좋다 하는 데에 쭉 따라가는 것은 아직까지 그 사람이 양심이 신앙 생활을 시작하지 안해 그런 것입니다. 양심이 믿지 안해서. 요 양심 믿는 요런 것은 가서 여러분들이 자꾸 많이 연구를 하면은 알게 될 것입니다.

양심이 믿어 기쁘시게 함 요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래 놓으면 세상에 이종교나 뭐 그런 데에 유혹받지 않습니다. 믿는다 하는 사람이 무슨 다른 이종교에서 어떤 묘한 말이 오면은 그런가 해서 그만 휘떡거리고 흔들리는 것은 아직까지 양심이 믿는 믿음을 가지지 안했기 때문에 그래. 양심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게 옳다 옳다 평가적으로 비판적으로 양심이 판단해 가지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도를 믿어 놨으니까 그 외에 하나님과 하나님 법도 외의 것은 믿지를 않습니다.

양심이 믿었기 때문에.

둘째는, 지성과 이성이 믿어 기쁘시게 함. 지성이라 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는 지식성, 아는 그 지식을 간수하고 뭘 알고 또 이렇게 하는, 아는 지성이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성. 듣든지 보든지 해 가지고 공부해 가지고 알라 하는 요 지성이라 하는 게 있어 가지고 공부를 하는 건데, 고 지성이 믿으면, 지성이 믿으면은 다른 지식에게 이제 미혹을 받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지성이 있다가, 지식이 뭐 세상에 지식이 천도 만도 있지마는서도 요 지성이란 지성이 벌써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만을 딱 믿어 버리고 나니까 다른 무슨 그런 지식이 암만 왔다 해도 그것이 들어 가지를 않는다 말이요. 들어가지를 안해.

또, 지성과 이성이 믿어 기쁘시게 함, 이성이란 말은 이치 이자, 성품 성자인데 이성이라 하는 건 이런 거 저런 거 따져서 옳고 그른 것을 비판하는 그것이 이성인데, 이치로 가지고 따지는 것이 이성인데, 고 이성이 믿어, 이성이 하나님과 그 말씀만이 참되다 이랬기 때문에 그 이성은 다른 뭣이 지식이 와 가지고 아무리 어떻다 미혹을 해도 그 이성이 미혹을 받지 안해요. 그 이성이 따라가지를 안 해요. 이성이 믿는 믿음이 안 되면은 시대를 따라서 그 사람은 변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 신경 근육 피부가 믿어 기쁘시게 함. 그 사람의 신경이 믿기 때문에, 신경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그 법도를 믿기 때문에, 신경이 믿으니까, 신경이 믿으니까 그 사람에게는 무슨 놀래는 일이나 불쾌한 일이나 뭐 그렇다고 얼떨떨하는 일이나 그런 일이 없습니다. 이 몸에 신경 말이요, 이거 뭐 어데든지 꼭 찌르면 아픈 그런 거 신경 아닙니까? 신경이 벌써 하나님과 하나님의 도를 믿었기 때문에 그 사람은 하나님의 법도대로 행하는 데 따라서 주저하는 것이나 무슨 변동되는 것이나 뭐 그런 놀래는 것이나 그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신경이 믿고 또 근육이 믿어야 돼. 우리 근육이 믿어야 돼. 근육이 믿어야 되는 거.

‘그거 말로 그렇지 무슨 말인지 내가 모르겠다.’ 근육이 믿는 요런 것도 자꾸 연습함으로 믿어져요.

어떤 사람이 지금, 예를 들어서 만일 스케이트를 탄다 합시다. 스케이트를 타는데, 그 사람이 스케이트를 탈라면 요리 넘어갈 때는 요리 재껴야 되고 조리 넘어갈 때는 요리 재껴야 되고 또 어떻게 해야 된다 하는 이치를 말하는 것은 이성이 들어서 스케이트를 탈라면 요리 조리 해야 한다 그 논리를 해 가지고서 그걸 아는 것이 이성입니다. 제가 이성으로서, 이성으로서 스케이트를 어떻게 타야 되지, 스케이트를 타면 나설 때는 요래야 되고 고럴 때는 요리 재껴야 되고 고럴 때는 저래 재껴야 되고 뭐 오만 것 강의를 잘 해도 스케이트 타면 못 타요. 타라 하면 그만 툭 자빠지고 탈 줄을 몰라요. 이성으로서는 잘 말하는데 신경이 모른다 말이요, 신경이.

신경이 모르는데 이 사람은 어릴 때부터 스케이트를 타 놓으니까 이것은 ‘야, 스케이트를 탈라면 보자. 요리 넘어갈 때는 어떻게 하노?’ 이라니까 ‘몰라요’ ‘요리 넘어가면 어째야 되노? 몰라?' `모릅니다.' `그러면 해 봐라'이리 넘어가는데 어느 틈에 그만 휘떡해서 이리 돌아가 버리기는 돌아갔는데 ‘그러면 요리 넘어갈 때 어쨌지?’ ‘모르는데요' 그거는 뭐냐 하면 신경이 알았다 말이오. 신경이 연습을 해 가지고 신경은 알고 있지만서도 논리 그 이성 지성이라 하는 것은 모르기 때문에 지성과 이성은 그것을 말하지 못해도 신경은 알고 척척 돌아간다 그거요. 그라면 알겠습니까? 신경이 믿는 거.

믿고, 근육이 믿고, 근육은 힘줄 모든 고기덩어리 이것이 믿어야 돼. 이것은 연습 아니고는 안 됩니다, 연습. 뭣이든지 그 사람이 글씨를 쓰는데, 글씨를 쓰는데 이렇게 자꾸 쓰든지 또 기름 장사가 기름을 부을 때에, 기름 장사가 말은 이층에서 밑에 병 하나 놓고서 이층에서 기름을 부어도 한 방울도 딴데 떨어지지 안하고 조르르 고게 부어야 기름 장사라. 그 기름 장사는, 요새 기름 장사는 그렇지만 옛날 기름 장사는 그렇게 정확하게 부울 줄 압니다. 그러면 그거는 그거는 무슨 논리 가지고 되는 게 아니라 그 근육 가지고 돼, 근육 가지고.

근육으로 요렇게 딱 들면 요래 가지고 밑에 부으면 요라면은 ‘요라면 된다.’ 그거는 연습을 많이 해서 이 근육이 숙달이 된 것이지 근육이 알게 된 것이지 안 게 아니라 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 생활은 자꾸 이래서 내 근육에 꽉 배어야 돼요.

내 근육에 꽉 배어야 되고 내 신경에 꽉 배어야 되고, 신경에 믿음이 꽉 배어야 되고 근육에 믿음이 꽉 배어야 되지, 자기가 아무리 뭐 논리적으로는 많이 믿었다 할지라도 신경이 믿지 안해. 이랬는데 믿는 생활, 그러면 공산주의자가, ‘네가 날 반대하면 우리 공산주의 반대하면 너는 죽인다’ 이라니까, 공산주의 반대하면 죽인다 하는데 논리는 있다가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에게 매였지 생명은 하나님이 주권하고 가졌지’ 자꾸 이란다 말이오. 그 뭣이 그랍니까? 고 이성이 그말해, 자꾸 이성이 그렇다고 이렇게 말해. 이라는데, 자꾸 그래 말 하는데 신경은, 이 신경은 떨려서 못 견디는 거라. 신경은, 믿으면 문제 없지마는 그걸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면 좋지만 신경은 그거는 하나도 믿지 안하거든. 이러니까 신경은 지금 죽겠다고 지금 떤다 말이오. ‘왜 이 손이 왜 떨리노? 손이 떨리니까 안 떨리구로 할라 이래 쌓아도 뭐 떨려 못 견디고 고만 정갱이가 툭툭 부딪치고 안 된다 그말이오.

그래서, 우리가 그거는 연습으로 됩니다, 연습으로. 요걸 자꾸 또 믿는 행위를 하고 하고 하면 요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의 신경에 딱 배요. 그러면 신경이 믿는 신경이 돼요. 또 믿는 근육이 돼 버리요. 또 믿는 피부가 돼 버리요. 믿는 피부가 돼. 이러니까 저 사람이 믿나 안 믿나 보니까, 뭐 막 장담을 합니다. 장담을 해도 보니까 피부가 안 믿습니다. 피부가 안 믿어. 피부가 안 믿어서 장담을 해도 저거는 껍데기 장담이지 속은 하나도 믿지 않는다 피부가 증거를 하고 있다 말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예수님은 그 세포, 세포 하나도 반대 안 했습니다. 세포 하나도 반대 안 하고 순종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세포 하나가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싫은데’ 그 세포 하나가 반대를 했으면 하나님의 지공법에서는 네게 속한 세포 하나가 반대했기 때문에 세포 하나에 대해서는 네가 강제한 것 아니냐, 자원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이래서 하나님의 공심판에 이거는 자원한 것이 아니다 하면은 대속할 수가 없어. 헛일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것 때문에 십자가상에서 그 대속할 것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두려워 떨면서 죽기까지 고민했습니다. 뭐 죽기를 두려워한 게 아니라.

순종하지마는 세포 하나도 원하고 원해야지 세포 하나라도 반대하면 안 되기 때문에 그것을 평소에 자꾸 연습을 시켜 가지고서 이제 신경 근육, 세포 하나까지도 다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그걸 연습해서 복종뿐이리 말이오.

복종뿐이라. 그냥, 목숨만 복종하고 그 세포는 다른 근육은 다 반대하는데도 그래도 뭐 주최측이 그러니까 따라가지마는서도 불공평이라 말이오. 그러면 하나님의 지공법에서 대속이 안 됩니다. 요거 이해가 됩니까? 요거 논리가 되요? 논리가 맞습니까? 신경, 근육, 피부가 믿어 기쁘시게 하고, 네째로는 이성과 비판과 평가가 기쁘시게 함. 이성이라면 이성에서 비판과 평가가 나오는데 이성으로 내가 이치를 따져 가지고 의심 없이 믿는다. 이성이 믿는데, 이성이 믿는데 비판이 안 믿을 수 있습니다. 이성이 믿는데 평가가 안 믿는 수 있습니다. 그거는 평소에 그런 일을 안 했기 때문에 이성으로서는 그렇지마는 실지로 딱 비판할 일을 딱 닥치고 나니까 적이 많다 말이오. 욕심이 들어서 방해를 하지, 또 모든 정실이 들어서 방해를 하지 하니까 ‘이거는 꼭 이래야 되는데’ 이치로는 ‘이래야 되는데' 하는데 옆에 대적들이 많으니까 비판을 바로 못 하겠다 말이오. 평가를 바로 못 하겠다 말이요. 옆에 주위에서 방해를 많이 하니까.

요거 이성과 비판과 평가가 믿어 기쁘시게 한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성이 내나 비판하고 평가하는 것인데 이성이 믿으면 비평과 평가는 믿지 딴게 뭐 있는가? 곶감 접말 해 놨다.’ 사람들은 그렇게 경솔히 말하기 쉬울 거라 말이오. 이성이 믿어도 비판이 안 믿습니다. 평가가 안 믿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어떤 사실이 있는데 이성은 ‘이렇게 해야 된다.’ 이렇게 주장을 하는데 막상 실상에 달라들어 가지고서 ‘요렇게 비판해야 된다’ 이렇게 비판할라 하니까 ‘그라면 우리 죽습니다.’ 하고서 이제 많은 것이 떠들러 자꾸 이라니까 그 옳은 비판을 내리지 못 하겠더라 말이오. 옳은 평가를 내리지 못하겠더라 말이오.

이러니까 이성은 믿었지마는 비판과 평가가 안 믿어 가지고서 실패하는 그런 일들이 많다 그거요.

우리 ○장로님이 여게서 있다가서 저 ○○로 전근이 됐습니다. 전근이 돼서 ○○도에 그 ○○실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러니까 아마 위에서 신임을 하는 모양이야. 그거 대단히 돈이 지걱지걱한 자리고 매수당하기 쉽고 아주 어려운 거 그런 게 많은 자리입니다. 또 딱한 사정 많은 자리고 뭐 조금만 눈 지근 감으면 막 뭉떵뭉떵하이 막 꺼머들일 수가 있는 그 자리요. 그러니까 가장 위에서 신임하는 사람을 그런 자리 앉히는데, 신임하기는 하는 모양이야, 하는 모양인데, 오늘 설교가 잘 됐습니다 잘 됐어. 이성은 이래야 된다 단정을 내려놨는데 나중에 실지로 비판을 딱 당하니까, 옆에서 방해물들이 많으니까, ‘이 비판하면 우리 죽습니다. 한 번만 봐 주십시오’ 자꾸 이러니까 그 비판이 믿음을 가지지 못한다 말이요. 비판이 믿음을 가지지 못해 삐뚤어진 비판을 하고 삐뚤어진 평가를 해 가지고서 절단난다 그거요.

그래서, 나는 우리 ○장로님에게 그렇게 말해요. 내가 양사방 다닐 때도 갈 때마다 말하기를 ‘어짜든지 자기 선 자리가 심히 어려운 자리고 힘드는 자리고 이라니까 거기에서 옳고 바르게 해 가지고 복음을 가루지 말고 복음을 영광스럽게 하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면 됐지 교회 촉탁을 받지 마십시요’ 이걸 단단히 부탁했다 말이오.

이랬는데, ○○가 가지고서는 ○○목사님이 떡 그래 가지고서 전화 한 달 냈어.

그래 내가 야단을 좀 쳤어요. 이제 대구는 가면 전부 믿는 세계요. 대구는 믿는 사람들이 전부, 관리들 공무원들 다 보면은 전부 믿는 사람들이라. 거기는 일찍부터 복음이 들어와 가지고서 한국 예루살렘이라 하는 곳이 대구입니다. 믿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이제 와 놨으면 ‘됐다’ 하고서 막 그 다음부터는 자꾸 지금 이래 쑤셔 댈 모양이니까 이제 이성은 믿지마는서도 비판이 못 믿을 때 많고 평가가 못 믿을 때 많고 또 움직이는 행동이 못 믿을 때 많기 때문에 고럴 때 못 믿으면 죽는다 말이오. 그럴 때 딱딱 믿으면 이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모든 걸 책임지셔. 다니엘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다니엘은 행정적으로는, 행동적으로는, 처사적으로는 그 사람에게 흠 잡을 것이 없다 하는, 안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지 안했습니까? 그래요. 이성이 믿고 비판이 믿고 평가가 믿음으로 기쁘시게 한다.

또, 욕심이 믿음으로 기쁘시게 한다. 욕심이 믿으면 이게 돈 욕심도 내고 무슨 욕심도 내고, 욕심이라 하는 것은 돈 있으면 돈 욕심내고 명예 욕심, 권세 욕심, 이거 욕심이라 하는 것이 돈 욕심도 욕심 그놈이 가지고 있고 명예 욕심도 욕심 그놈이 가지고 있는데 욕심 이놈이 믿어야 돼. 욕심 이놈이 이제, 과거에는 돈 욕심도 가지고 권세 지위 욕심도 다 가졌었는데 이제는 이놈이 믿어 가지고 하나님 욕심과 하나님의 뜻 욕심 외에는 안 가져요, 욕심 이놈이. 그라면 그 욕심이 변화가 됐는데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만 욕심내지 돈도 욕심 안 내고 사는 것도 욕심 안 내고 전부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만 욕심 내니까 그 욕심 이름이 바꿔졌소 안 바꿔졌소? 그 욕심 이름이 뭐입니까? 성령의 소욕으로 바꿔졌다 말이오. 성령의 소욕으로, 그 욕심이 이제 성령의 소욕으로 바꿔졌어. 그것이, 그렇게 하면 기뻐해요.

‘내가 꼭 요게서 이 한 마디만 이거 떡 눈 지끔 감으면 이제 돈이 몇억 나온다.

이거 내가 하나 먹고 그만 떨어질까? 몇억이 나온다.’ 요럴 때에 ‘아니다.’ 요 욕심이 돈을 믿고 돈에게 이용당해서 돈 욕심이 되는데 그때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나는 믿는다.’ 요 욕심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믿어.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믿으니까 아무리 와도 꼼짝을 안 하거든. 꼼짝 안 하니까 하나님이 뒤에 찾아올 거라. 찾아와서 ‘얘 너 지금 요번에 그라면 몇억이 지금 주머니에 들어가는데 네가 왜, 그말 슬그머니 하나, 도장 하나 꾹 찍어 버리면 될 것인데 왜 네가 안 했느냐?’ 이럴 때에 ‘당신보다 큰게 어데 있으며 당신의 법도보다 더 보배로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러니까 나는 당신과 당신의 법도가 내게 보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라면 아브라함에게와 같이 ‘그래, 네가 나만 보고 좋아하고 나로 전부 삼으니까 내가 네 방패와 네 손 방패와 네 지극히 큰 상급이 되겠다. 네가 모든 것 다 싫다 하고 나만 좋아하니까 내가 네 하나님이 돼야지.’ 이게 신자의 승리라. 이렇게만 나가면 잠깐 올라가 버려.

여섯째로, 믿은 시청 언행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그 시청, 이 눈도 하나님에게 복종함으로 하나님이 보라 하는 것은 보고 보지 마라 하는 것은 안 보고 하나님이 보고 나쁘다 하는 것은 나쁘다 하고 좋다 하는 건 좋다 하고, 이 눈이 하나님에게 복종으로 본다 그말이오. 알겠소? 마귀란 놈이 ‘야, 이게 좋다.’ 좋게 안 보는 거라. 눈으로 딱 보고는 하나님이 좋다 하는 것은 좋다 하고 나쁘다 하는 것은 나쁘다 하고 그거는 악하다 하면 악하다 하고 그거는 깨끗하다 하면 깨끗하다 하고, 하나님이 보신 거와 꼭 같이 하나님을 따라서 보는 것이 그것이 이제 믿음의 눈이라 그말이오. 하나님을 따라서.

하나님이 요렇게 보면 나도 요렇게 보고 하나님이 조리 보면 조리 보고. 또 하나님이 요렇게 들으면 나도 요렇게 듣고 하나님이 조리 들으면 조리 듣고 하나님을 듣는 걸 따라서 듣는 그게 믿음으로 듣는 거라.

언행 심사, 그러면 하나님을 따라서 말하는 것이 믿음의 말이요, 또 하나님을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믿음의 행동이라.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오.

예수 믿는 게 이게 복잡합니다. 복잡해요. 이러나 알고 보면 하나라. 아무나따나, 믿는다는 것이 보면 그거 뭐 엉뚱하게 해 가지고서 속으로는 흉측한 걸 가지고 있으면서 믿는 척 하고 이래 있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그거 들어 줄 수가 있습니까? 또 일곱째는, 믿은 결과가 기쁘시게 한다. 믿은 결과가. 그 믿음으로 결과가 나와야 돼, 결과는 믿은 결과 나오는 거 아닙니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믿음의 결과가 언제 나왔습니까? 결과 나온 거는 불에 들어갔는데 불에 타지 안하니까 그 결과가 조끄매 나오기 시작했지, 느브갓네살 왕이 보고 ‘아이 저거 세 사람 집어 넣었는데 네 사람이 됐는데 그는 인자 같다. 야 그거 이상하다. 안 타 죽고 돌아다닌다.’ 겁이 나 가지고 ‘가서 불러 내라' 결과가 나왔지.

불러내고 난 다음에는 또 인제, 모든 대적들은 거석하고 ‘누구든지 이들을 방해하고 이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방해하면은 그건 다 죽인다.’ 이라니까 결과가 콱 터져 나왔다 말이오. 다이나마이트가 터졌어.

또 셋째로, 주님께 기도하여 기쁘시게 함. 기도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

기도함으로. 주님을 똑똑히 알고 주님의 뜻을 똑똑히 아니까 내 소원 성취와 모든 문제가 그분에게 달렸으니까 그분하고 의논할 수밖에 더 있겠어요, 그렇지 안해요? 어떤 사람이 지금 회사를 경영할라 하는데 그 회사가 되고 안 되고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아무것이에게 달렸다 하면 그 사람 찾아가겠소 안 찾아가겠소? 그 사람 찾아가겠소? 저○선생, 찾아가지 뭐 찾아가지 말라 해도 그만, 형사들이 지킨다면 찾아가지 말라 하면 밤으로 잘 때에도 숨어서라도 갈 거야. 안 그렇겠소? 자기의 성공과 실패, 또 승리와 패전 이 모든 것이 그분에게 말이오.

그분 한 분에게 달렸다, 그분 한 분에게 매였다 하면은 그분 찾아가겠소 안 찾아가겠소? 그분 한 분에게 뭐 전부 생사 화복이 다 달렸다고 하는데 안 찾아갈 사람 있겠소? 이 세상에서도, 그 사람 지금 사업을 하는데 그 사람 사업이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이 아무것이에게 달렸다 하면 안 찾아가겠소? 그 사람이 지금 병이 들었는데 그 병은 아무것이에게 가야 살리든지 죽이든지 그분에게 가야 살지 딴데 가면 안 산다 그러면 안 찾아가겠습니까? 찾아가지요.

이러니까,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법칙을 믿고 보니 주님에게 기도 안 할 수 없는 거라. 기도 안 하는 사람은 그분을 안 믿는 증거요, 그분의 법칙을 안 믿는 증거요, 믿으면 기도 안 할 수가 없어. 이게 다 필연적인 기도라 말이오.

기도함으로 그를 기쁘시게 하는데.

기도하는 데 대해서 첫째로, 말로 기도해야 돼요. 오전에 해석을 많이 했는데, 말로 기도하는 거, 말로 기도하는 거 필요합니다. 말로 기도하면은 이 껍데기에서 배 들어가요, 배 들어가요, 자꾸. 말로 기도하면은 자꾸 배 들어가요. ‘하나님은 전능을 믿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전능을 믿게 해 주시옵소서.’ 이라다가 또 한참 하고는 ‘하나님의 전능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을 믿습니다.’ 혼자 음음 이래 가지고 있는 그것보다도 고만 처음에는 안 되면 저 예배당 구석에 가든지 그리 안 하면 산만당에 가든지 ‘주님의 전능을 믿습니다. 주님의 전능을 믿습니다. 주님의 전능을 믿습니다.’ 자꾸 천 번이고 몇백 번이고 하고 나면은 주님의 전능을 믿는 믿음이 쑥 배 들어온다 말이오. 이게 배 들어와요. 말하면 배 들어와요. 그라기 때문에 기도는 말로 기도하는 그것이 초보의 기도이지마는서도 중요합니다. 말로 기도하고, 그 다음에는 마음으로 기도해. 말로는 기도하면서 마음 없이 기도하고 있거든.

그라면 안 돼요. 말로 기도하면서 차차차 마음을 수립을 해요. 말로 기도하면서 마음은 딴데 가 있을 수 있어. 말로는 중얼중얼 하면서 마음은 지금 저 딴데 돌아다닙니다. 저 지금 돌아다니며 말만 기도하는 그거 다 소용없어. 그러니까 말로 기도하기가 제일 쉬워. 말로 기도하고 난 다음에는 마음을 주 모아 들여요.

자꾸, 내가 말로 기도했으면 마음도 같이 기도하도록 그렇게 마음을 모아 들여서 마음으로 기도하고, 또, 내가 행동으로 기도해. 행동으로 기도하는 것은, 기도는 하나님하고 의논하는 거 아닙니까? 하나님하고 의논하는 것인데 의논하기를 말과 마음으로만 의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행동도 ‘하나님에게 내가 또 이런 것을 의논해야 되겠는데 이런 걸 물으러 가야 되겠는데, 이런 것 달라 해야 되겠는데, 이런 걸 용서해 달라 해야 되겠는데.’ 그분에게 이렇게 기도하다 보니까 이 행동을, 그분을 보니까, 그분을 보니 조심 있게 해야 되지 안하면 안 되겠다 그말이오.

이 세상도 안 그렇습니까? ‘나 취직을 좀 시켜 주십시오’ 취직을 자꾸 시켜 주십시요 이라는데 취직을 시켜 달라 해 놓고서 취직을 시켜 달라 하는데 이게 술주정뱅이라. 술주정뱅인데 취직을 시켜 달라 하면서 술을 먹고 이라다가 ‘야, 너 아무것이한테 취직 부탁했지?’ `그래.' `그분 지금 퇴근 시간이다. 어데 가다 네가 만나면 어쩔거고?’ ‘아이고' 막 도망을 쳐 숨을 거라 말이오. 안 그렇겠소? 고만 숨을 거라. ‘아이고 그분에게’ 이래 가지고서 만일 술이 취해 가지고 응응 이래 쌓다가서 ‘야, 아무것이 온다’ 아무것이 온다 하면 ‘응? 오나? 어디로 숨으꼬, 어디로 숨으꼬?’ 그래 숨을 수가 없으면 아주 시침 뚝 떼고 오면 술 안 먹은 체 하고서 이래 가지고서 떡 이래 가지고 정중하게 이래 가지고서, 오면 ‘안녕하십니까?’ 인사할 거라 말이오. 이게 곧 사람이라.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우리가 기도하는 사람은 그 행동이 거게 따라서 같이 움직이지 안하면은 실상이 아니라 그말이오. 행동으로 기도하고, 또, 자체로 기도해, 자기 자체로서. 사람에게도 그렇지요. 그러면, 고만 그래 가 가지고 털털하게 해 가지고서 얄궂게 옷도 그래 입고 뭐 이래 가지고서 털털하게 이래 가지고서 고만 이래 가지고 모두 뭐 흙을 묻혀 가지고 이래 가지고 머리도 뭐 시커멓게 이래 가지고 머리도 터벅하게 이래 가지고서 더풀더풀 이래 있습니다. ‘야, 너를 지금, 네가 취직 부탁한 그분이 있는데 그분이 너 보면 미치괭이라고 하겠다.’ 안 그렇겠어요? 이러니까 ‘그분에게 내가 갈 터인데 오라 하는데 어째 갈꼬? 너무 빤들빤들하게 해 가지고 가면 이놈 사치꾼이라 해서 안 될 거고 또 너무 너절해 가지고 가면 이거 또 등신이라고 안 될 것이고 이거 참, 요래 가야 그분의 비위에 맞출까 조래 가야 그분의 비위에 맞출까?’ 이거 자연히 조심이 될 것 아닙니까? 조심이 돼서 ‘그분은 점잖은 어른이기 때문에 내가 수수하게 옷도 입고 진실되게 해 가지고서 정중하게 가서 대해야 되겠다. 이 태도가 그분에게 합격이 되도록 해야 되겠다.’ 그럴 것 아니겠어? 우리 하나님께도 꼭 그와 같습니다. 그래야 돼요, 우리 자체가 기도에 합당한 자체가 되도록 그렇게 필연적으로 조심하게 돼요. 주님을 안다면 말이지요.

그렇지 안해요? 내가 주님에게 그랬는데 오늘 또 삼십 분 기도 안 하면 이거 거석하겠지, 오늘은 뭐 해야 될 터인데 이거 안 하면 주님이 또 거석하겠지, 심방 안 가면 거석하겠지, 반사들도 그럴 거라. ‘내가 이거 오늘 아침에 심방 안 가면 주님이 섭섭해 하시지, 또 노여워하시지.’ 이러니까 주님 때문에 심방 가고 주님 때문에 말하고 주님 때문에 참고 주님 때문에 뭐 하는 일이 많다 그거요. 그래서 자체가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둘째로는 감사 기도가 기쁘시게 함. 감사 기도란 말은, 이제까지 당신에게 내가 은혜 받은 것을 낱낱이 간추려서 그걸 잊어 버리지 안하고, 이미 내가 받은 은혜를 챙기는 것이 감사입니다. 받은 은혜를 챙겨 가지고서 그 은혜의 가치를 알고 그 은혜를 내게 주시는 데는 어떻게 주셨는가 그것을 공적을 알아 가지고 그 은혜에 대해서 정확한 그 가치를 알고, 정확한 그 은혜에 대해서 자기가 보존하고 귀중히 취급하는 거기에서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 감사는 그런 것이니까 이 감사하는 그것이 우리에게 주실 하나님에게 대해서는 얼마나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 줄 마음을 생기게 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이래 감사 기도, 또 그러다 보니까 잘못된 거 있으면 회개하는 기도, 또 무슨 이런 저런 것을 의논하는 기도, 그 의논하는 기도도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십니다.

우리 작년이 아니고 재작년에, 저 재작년에 거창서 기도원에서 뭣을 했는데 그만 여기 목사님들이 ○○○목사님, ○○○목사님 그때 모두 한창내기들이 거기 있으니까 하면서 전부 이거 모두 자기가 잘한 거라. 자기가 전부 잘한다고 자기네들이 다 잘한다 이래 가지고서 ‘나는 이런 동서가 있습니다.’ ‘나는 사법고시 합격을 했습니다' 이래 쌓으면서 이래 하니까 그 사람들도 ‘잘난 사람들이다’ 이라면서 그 사람들은 목사가 들어오는데 간판에다가 눈 목(目)자 죽을 사(死)자 커다랗게 써 놓고, 목사가 군수 만나러 온다 했는데 눈 목(目)자 죽을 사(死)자 커다랗게 칠판에 써 놨더래요. 얼마나 그만 잘난 체 했든지. 조롱을 해놨든지 이래 놨는데 뭐 잘나기는 뭐 잘나? 뜻밖에 이래 가지고서 그만 목사를 구속 영장이 내려서 그만, 구속 영장이 내려 놓으니까 대구로 피해갔다가 대구로 잡으러 올지 모르니까 또 부산 서부교회로 피해 왔어.

피해 왔었었는데, 이렇게 있었는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날 저녁에 모았습니다.

그날 저녁에 전부 모아 가지고 ‘이러니까 이거 문제다. 이거 어째야 되느냐? 이게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우리가 잘난 체 하고’ 전부 제가 다 잘했지 하나님은 뭐 할 일이나 있나, 저거가 다 잘한다 하니까 잘하구로 냅두지 뭐, 하나님 할 일이 있어야, 하나님 믿지도 안하고 전부 저거가 잘했다 합니다. 나는 이렇게 잘났고, 나는 사촌이 뭐 어데 경찰 어떻게 된다 하고, 전부 저거가 했지 하나님이 한 게 하나도 없어. 잘났어. ‘이래서 하나님이 노여워하신 것이다. 이러니까 우리가 회개하자.’ 그날 밤에 모여 가지고서 목사님들하고 대구의 장로님하고 모여 가지고서 이 사 층에서 회개를 진뜩했습니다. ‘어짜든지 용서해 주옵소서.

우리가 그러니까, 이제 당신만 믿고 당신에게 의논하지 우리가 잘난 척 하지 안 하겠습니다.’ 기도를 하고, 기도를 하니까 마음에 믿음이 들어와요.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다’ 산림을 훼손했다고 구속 영장이 내렸는데 그거는 판사가 만일 기각을 하면 판사가 모가지가 달아나는 것인데 그거 되겠습니까, 그거? 그것도 못 하지, 농사짓는다고 벼를 심어서 벼가 시커머이 땅내를 맡아 있는데 불도자가 저 안에 들어 있는데 그거 할라 하면 들을 막 헤쳐 나와야 하는데 그거 만일 ○대통령한테 고발만 들어가는 날이면 당장 기도원 철폐 될 거라 말이오. 이런 어려운 일이라. 거기 냅두고 일 년 내 세금 줄라 하면 기도원 거 다 팔아도 모자라겠고 이랬는데 그래 떡, 우리가 회개를 하고, ‘가 봐라. 가 보는데’ 부탁하기를 ‘네가 너거 뭐 동생이 뭐 그 경찰에 높은 자리 앉았다고 하는데 그 사람 내 세우지 마라. 하나님 또 노여워하신다. 그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이 해 달라 하고 가거라.’ 이랬더니만, 여게서 가니까 그날 벌써 가기 전에 구속 영장은 다 기각이 돼 버리고 또 논 임자한테 갈라 하니까 논 임자가 와 가지고서 ‘자네들 이거 불도저를 이래 냅두면 안 될터이니까 이거 안 낼 건가?’ ‘내야지요.' `그거 내 가야지.' 자기네들 손으로 모 다 뽑아 가지고서 내 가라 해서 내 왔어.

그분하고 의논하면 모든 게 되는데 그분을 뒷방 영감으로 집어 던지고 그분과는 의논 안 하고 저기끼리 의논하고, 갈라 먹고 주님이 노여워하신다 그말이오. 그런 것을 우리가 자꾸 체험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의논하는 기도, 그분에게 의논하는 기도, 우리가 이거 의논하는 것을 도고의 기도라 하는데 범사를 주님하고 의논하는 그런 기도하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뭐 어떨 때, ‘이거는 주님이면 한다.’ 그렇지 안해요? 우리 남편들도 말이요, 사람 남편도 그렇지 안해요? 그 남편이 암만 못나도 ‘여보 이거는 당신이 해야 되지 당신이 안 하면 안 됩니다. 당신이 할 수 있고 당신이면 이거 능히 할 수 있습니다.’ 남편을 믿으면서 남편이 이걸 할 수 있다고 하면은 그 남편 속으로, 할 힘이 없으면 남의 집에 가 가지고 뭐 종질을 하든지 뭘 하든지 해 냅니다.

아내 모르게 다 해 내요. 다 해 놓고, 암말도 안 하고 ‘그거 뭐 내가 하면 되지’ 떡 이래 놓고는 자기가 하지 못하니까 막 오면 저자세 오만 욕을 다 보고도 떡 해 놓고 난 다음에는 ‘여보 어찌 됐지요?’ `됐지 뭐, 어째. 그게 됐지 뭐.’ 떡 그거 ‘됐지 뭐, 안 될 거 뭐 있는가?' `우리 남편이 제일이야’ 이렇게 보여지기를 원하는 게 인간성입니다.

하나님도 이렇습니다. 당신이 이런 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신에게 뭐 이라면 당신 아니면 안 된다. 이랄 때에 좋아서 ‘그거 내가 안 하면, 내가 뭣해? 너거가 이리저리 해 보지’ ‘안 됩니다. 안 됩니다. 해야 됩니다.' 당신만 전적으로 믿고 의지할 때는 당신이 ‘그래. 나 아니면 할 수 없나?’ 하나님 안 해 주고 가만히 냅둬 보니까 하나님이 안 해 주면 할 수 없다고 딴데 하지도 안해. 죽어도 하지도 안해요. 냅둬 버립니다. 냅둬 버리니까 이거는 할 수 없다 말이오.‘왜 내비두노?’ `당신이 이외에 아무도 할 이가 없는데 당신이 해 줘야 되지 뭐 누가 해 주겠습니까?’ 좋아하신다 말이오. 하나님을 우리가 달랠 줄도 알아야 되고 하나님을 사귈 줄도 알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줄도 알아야 돼요.

하나님도 사람과 꼭 같습니다. 하나님도 사람하고 꼭 같아요.

다른 사람이 예수님 믿는다고 욕을 자꾸 하면 망한다고 하면은 속으로 좋아서 ‘자꾸 욕해라, 자꾸 욕 해라.’ 왜? 욕하면 우리 주님이 듣거든. `예수 믿으면 망한다. 예수 믿으면 망한다. 예수 믿으면 망한다.’ 그라니까 속으로는, 말은 안 해도 ‘주님이 귀가 있으면 듣겠지, 듣겠지.’ 하나님 약을 채워라. 주님 자꾸 약을 채워라. 예수 믿으면 망한다고 자꾸 너거가 자꾸 그렇게 해라. 그러면 하나님이 ‘망해? 보자.’ 퍼뜩 들어 올리시거든. 우리 하나님이 우리와 꼭 같은 분인데 죄가 없고 우리보다 무한히 탁월하신 분이지 그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라 말이오. 이러므로 이래 알아서 하나님을 우리가 사귀고 섬겨야 됩니다. 하나님에게 간구하는 것.

여섯째로는, 기도 안에 있는 믿음이 기쁘시게 한다. 기도 안에 있는 믿음이 기쁘시게 해. 기도를 암만 하지만 속에 믿음이 없으면 고만 헛일이라. 기도는 자꾸 이래 하면서 믿지는 안 해요. 그거는 소용없어. 그 기도하는데 고 속에 믿음이 들어 있다 말이오. 그러면, 고만 폭발이 돼요. 기도 안에 있는 고 믿음이 기쁘시게 한다. 이러니까 기도하는데 기도 안에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에게 근심거리고 고통이지 기뻐하지를 안해요.

일곱째로, 바라는 계속 기도가 기쁘시게 한다. 그 어떤 지경에 있어도 소망하는 것을 요동치 안하고, 소망하는 것을 요동치 안하고 계속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누가복음 18장에 말씀을 해 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왜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들어 주지 않아? 들어 주지 안한 그 이유가 몇 가지 있어. 첫째는 들어 주님을 받아서 감당할 만한 우리 자격이 모자라기 때문에 우리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그래 하는 일 있고, 또 제일 좋은 시기를 맞출라고 기다리고 있는 일 있고, 또 제일 좋은 장소를 맞출라고 기다리는 일 있지 그분이 안 들어 그런 것도 아니고 할 수 없어 그런 것도 아니라 그말이오. 그러니까 우리는 바라면서 계속 기도하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네째로는, 순종 행위가 기쁘시게 한다. 순종 행위가 기쁘시게 한다. 그러면 순종 행위가 기쁘시게 하는데 그 첫째가 양심 순종이 기쁘시게 합니다. 우리 양심이 순종을 해야 돼, 양심이. 양심 순종한다는 말은 자기가 생각하고 생각하고 깨닫고 깨닫고 아무리 이렇게 비판하고 비판하고 자꾸 이렇게 해도 ‘그래 이게 옳다’ 양심이라 하는 것은 자기에게는 최고의 빛인데, 최고의 빛인데, 최고로 비판하고 평가해 가지고서 옳다 인정하는 것인데, 그 최고 절정의 옳다는 그 양심이 순종해야 되지 그 양심은 근방에 가지도 안하고 뭐 고기덩어리 욕심이나 또 뭐 헛된 욕심 허영을 가지고서, 어떤 사람은 예수 믿어도 뭐 장가 예수 믿는 사람, 또 집사될려고 집사 예수 믿는 것, 시집 갈 예수 믿는 사람 뭐 자본 얻을라고 자본 예수 믿는 사람, 또 물건 잘 팔려고 예수 믿는 사람 그거다 잡탱이라.

양심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요거라야 됩니다. 다른 것 암만, 마음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는데 여러 가지 요소가 다 순종한다 할지라도 양심이 순종 안 하면 그거는 언제든지 변동이 되고 병이 되고 맙니다. 그거는 세상에 좋은 게 오면 이리 유혹되고 저리 유혹되고 양심을 점령 못 했기 때문에 불교가 오면 불교에 유혹되고 신신학이 오면 신신학에 유혹되고 이런 모든 과학 오면 과학에 유혹되고, 이런 거 저런 거 좋은 거 오면은 뭐 도덕이나 사상이나 뭐이든지 좋은 지식이나 오면은 그만 유혹받습니다. 양심이 딱 믿었으면 그 다음에, 좋다 하는 거 가지고는 미혹이 없어요. 변동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지성이 순종해야 되고. 우리에게 지성이, 지식을 가지는 그 지성인데, 지성적 순종이어야 돼, 지성이 순종해야 돼요. 지성이 순종하면 지식에는 다시 유혹이 없습니다. 지성이 순종해 놓으면 지식이라 하는 거는 우리 지성을 통해서 오는데 지성이 딱 순종해 놓으니까 다른 지식이 와 봤자 뭐 소용이 없어. 댈 수가 없어. 지성이라는 지성이 믿고 난 다음엔 지식에게 미혹받지 않습니다. 지성이 순종 안 하는 사람은 그보다 높은 지식 오면 또 그만 미혹되고, 또 높은 지식 오면 미혹되고 그렇습니다. 요런 거 다 어려운 말이오.

또, 이성이 순종하면 이치를 아는 그 이성이 순종하면 다른 데에, 이런 비판이나 평가나 유혹을 받지 않습니다. 이성 순종이 되면 유혹을 받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네째로는 욕심 순종, 욕심이 순종해 놓으면 다른 미혹의 욕심이 오지를 못해. 그 욕심이 다 주님께 다 순종하는 욕심이 딱 돼 놨으니까 이런 미혹 저런 미혹, 미혹의 욕심은 그만 다 죽어 버렸어. 와야 소용이 없어.

여섯째로는 직업이 순종, 직업이 순종하는 그 사람은, 가 보니까, 그 사람 공장도 순종하는 공장. 가 보니까, 공장에 보니까, 목장에도 가 보니 전부 그 목장에 다 순종입니다. 인부들도 순종, 해 놓은 것도 순종, 지키는 것도 순종, 그 목장 전체가 다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목장이라. 하나도 하나님이나 하나님 법도에 거슬리는 게 없어, 하나님 법도, 하나님에게 딱 들어맞게 그렇게 순종해. 그 사무실에 떡 가보니까 그 사무실에는 사무실이 순종해. 사무실이 순종해. 가니까 사무실에는 전부 분위기라든지 주장이라든지 뭐 신망이라든지 그 모두 다 신앙으로 돼 가지고 있어.

그러니까, 그거는 어렵지마는서도 자기 개인 단독이라도 ‘저 사람은 뭐, 저 사람은 와 가지고서 사무 봐도 꼭 자기는 무슨 직업을 가지고, 직장에 있지만 자기 저런 직분을 가지고 있지만 그 직분 전체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거라.

하나님에게 순종되는 것이면 죽자 살자 하고 하나님에게 거슬리는 것이면 안 해.

하나님 법도에 거슬리는 것이면 안 하고 하나님 법도에 되는 것이면 하고, 하나님이 좋아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하고 하나님이 노여워하는 것은 안 해. ‘그 사람에게 돈을 억만금을 줘 봐라 하는가? 안 한다.’ 하나님께 욕되는 것은 당장 지금 ‘네가 모가지가 달아난다’ 해도 다니엘처럼 꼼짝도 안 합니다.

다니엘은 그 직업에서 하나님께 순종했어요. 요게 순종입니다. 직업 순종.

그 다음에는 자기의 의식주가 다 순종으로 되고. 요렇게 하면, 요걸 그렇게 쉬운 게 아니고 자꾸 보고 읽고 외우고 기억하고 하나씩 둘씩 요래서 공부를 하고 연습을 하고 또 연습하고 여러 수십 번 수백 번 연습하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눈감고 기도로써, 기도로써 수백 번 수십 번 합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도편수가 집을 하나 지을라 하면서 말하기를 하룻밤에 집을 열 두 번 지었다가 열 두 번 부순다고서, 다른 사람은 다 자는 것 같지마는 자기는 누워자도 이래 배 위에다가 집을 지어 가지고 요래 지으면 이렇고 조래 지으면 저렇고 자꾸 열 두 번이나 그 많은 집을 지었다가 부쉈다가 자꾸 그라는 가운데 지어 보니까 또 요게 또 안 됐다. 또 새로 고치고 또 조래 고치고 이래 가지고라야 그 사람 한 일이 뒤에 결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이 일을 자꾸 만들고 연습하고 연구하고 연습하고 또 이래 자꾸 해서 숙달하고 이렇게 돼지지,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 위에 뒤서 이거 저거 모든 만물을 주시고 이런 저런 환경을 주시는 거 뭐 때문에 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공부하라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연습하라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숙달하라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좋다 좋다. 이 경험하고 체험하라고. 네가 고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하지마는서도 거짓말쟁이다. 고것은 기쁘시게 한 것이 아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진가를 알라고, 연습을 하라고, 숙달하라고 하는 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고대로만 살면 모든 것이 형통이요 모든 것이 자유요 평탄인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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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6 하나님께 피동/ 마가복음 11장 20절-25절/ 1985년 9월 6일. 금저녁 선지자 2016.01.02
495 하나님께 피동된 기도/ 마가복음 11장 20절∼25절/ 1985. 9. 6. 금새벽 선지자 2016.01.02
494 하나님만 위하여/ 유다서 1장 14절-15절/ 1983. 9. 7. 수새벽 선지자 2016.01.02
493 하나님에 대한 이름들의 차이점/ 빌립보서 3장 4절-11절/ 1980. 3. 27. 목새벽 선지자 2016.01.02
492 하나님에 대한 지식/ 시편 91장 14절/ 1980. 12. 23. 화새벽 선지자 2016.01.02
491 하나님에게 쓰임 받자/ 학개 1장 8절-9절/ 1989. 7. 28. 금새벽 선지자 2016.01.02
490 하나님으로 더불어 의논/ 이사야 1장 18절-20절/ 1985. 11. 8. 지권찰회 선지자 2016.01.02
489 하나님으로 전부를 삼으라/ 베드로후서 3장 11절-13절/ 1989. 7. 20. 목새벽 선지자 2016.01.02
488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베드로 전서 1장 20절-25절/ 1979. 7. 8. 주일오전 선지자 2016.01.02
487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언행심사/ 마태복음 5장 14절-16절/ 1985. 10. 20. 주일새벽 선지자 2016.01.02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고린도후서 5장 9절-10절/ 1986. 3. 9. 주일오후 선지자 2016.01.02
485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히브리서 11장 6절/ 1981. 1. 4. 주일오후 선지자 2016.01.02
484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 히브리서 11장 6절/ 1981. 1. 4. 주일오전 선지자 2016.01.02
48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것 두가지,믿음/ 히브리서 11장 6절/ 1983. 4. 29. 금저녁 선지자 2016.01.02
48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 히브리서 11장 6절/ 1987. 1. 28. 수저녁 선지자 2016.01.02
48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 히브리서 11장 6절/ 1987. 2. 1. 주일새벽 선지자 2016.01.02
480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 히브리서 11장 6절/ 1987. 2. 8. 주일새벽 선지자 2016.01.02
479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 히브리서 11장 6절/ 1987. 2. 15. 주일새벽 선지자 2016.01.02
478 하나님을 떠나지 말라/ 출애굽기 12장 14절/ 1979. 11. 20. 화새벽 선지자 2016.01.02
477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말라/ 갈라디아서 6장 1절-10절/ 1984년 5월 12일 토새벽 선지자 2016.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