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기쁘시게 함

 

1987. 1. 28. 밤 (수)

 

본문:히브리서 11장 6절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금년 당해서는 첫 공과입니다.

본문은, 히브리 11장 6절.

제목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 요절은,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서론,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써야 한다.

기쁘시게 한 것은 다 영생이요 노엽게 한 것은 다 사망이다. 우리는 밤이나 낮이나, 바쁘든지 한가하든지, 괴롭든지 즐겁든지, 건강하든지 병들든지, 어떤 환난 고문 고형에서라도 변함없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내가 되기만 힘써야 한다.’ ‘금생과 내세 영과 육의 자타 전부를 말할 수 없는 쾌락과 부강으로 들어가는 생명길이다. 이탈하면 괴로운 사망이다. 무변 대해와 캄캄한 밀림 속에 빠진 학생이 집을 찾아가고 싶으나 바른 길을 찾지 못해 죽는 것처럼 주님을 기쁘시게 하여야 될 줄 알면서도 마귀가 혼미하게 하여 인생은 방황하다가 영원을 망치고 만다.’ 본론.

‘기쁘시게 하는 유일한 길은,’ 첫째, ‘하나님께서 신인 계약으로-신은 하나님이요 인은 사람입니다-신인 계약으로 선포하신 성경 신구약 두 계약의 내용을 정확하게 세밀히 아는 것이 첫째 기쁘시게 하는 것이요, 한 획이 천지보다 권위가 큰 정확무오한 계약 성경은 신구약 원본 성경이다. 요사이는 악마가 사본과 번역에서 잘못된 것을 혼합 혼돈시킨 것이 많다. 그런고로 성경은 잘 택해야 한다.’ 둘째, ‘계약의 내용을 정확히 아는 것은 잊어버리지 말고, 없는 것은 되찾고, 모르는 부분은 알도록 노력하고, 본인이 이미 안 것은 하나도 의심 말고 확신하는 것이 둘째로 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옳다 참되다 믿을 때에 우리 자체와 또 관련된 만물에게는 큰 능력의 역사가 따른다.’ 셋째, ‘이 계약의 내용을 알고 믿고 그대로 행할 때에 하나님은 그 사람의 믿음을 통하여 천상 천하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전개되는 전 순서를 움직여 그 사람과 동거 동행하여 자타가 하나님의 지극히 큰 영광을 보고 누리게 된다.’ 문답.

일, ‘우리 중생된 하나님의 사람된 우리는 금생과 내세에 제일 할 일이 무엇이뇨?’ 답에, ‘언제나 어디서나 무엇에서나 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유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이뇨?’ 답에, `믿는 것입니다.' 셋째, ‘믿는 것이 무엇이뇨?’ 답에, `신구약으로 되어 있는 하나님과 택자 사이에 되어 있는 두 계약을 바로 아는 것과, 아는 대로 믿는 것과, 믿는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요것이 이번에 공과 될 것입니다.

요절에 대한 해석을 간단하게 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8절에 보면 “우리가 담대하여” ‘우리가 담대하여’ 하는 이 담대라 말은 예수님의 이 도리를 우리들이 들어서 알고 깨달아 믿기 전에는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담대함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왜? 잘못하면 세상에서 쫓겨날까, 또 세상에서 망할까 실패할까, 이 세상뿐인 줄로만 알았기 때문에 그때는 세상이 우리에게 어떤 것으로 위협하든지 그 위협을 다 우리는 받았고, 또 어떤 것으로 꾀우든지 우리는 그 꾀움에 빠졌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알고 보니까 세상은 하룻밤과 같은 짧은 기간이요 영원한 세계는 죽었다가 부활하고 난 다음에 있는 것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위협을 받지 안합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우리가 과거에는 세상뿐인 줄 알았지마는 세상에는 준비하기 때문에 세상이 필요하지 아무리 예수를 잘 못 믿는 사람이라도 하늘나라는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을 누리는 사람보다는 낫습니다. 하늘나라에 제일 천한 구원 낮은 구원도 이 세상에 신불신자로서 제일 행복을 누리는 그 사람보다는 나은 것입니다.

잘 믿는 사람의 하늘나라의 그 영광은 족히 비교할 수가 없는 그 지극히 큰 영광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영광이 없으니 그 영광 있는 사람에게 비해서 마음에 수치스럽고 원통스러운 것을 말하는 것이지 택한 자가 하늘나라에 가서 머무는 것은 아무리 제일 끝이 되는 믿음에 제일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도 이 세상 제일 존귀한 자리에 있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또 안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어떤 그 불행스러운 참 비참하고 가련하다고 하는 그런 어떤 그 비참 속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도 지옥의 제일 존귀한 자리보다는 낫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안 믿는 사람은 아무리 세상에서 비참하다고 해도 지옥보다는 세상이 낫습니다.

택한 자들은 천국이 아무리 그에게는 원통하고 영광이 없다 할지라도 세상에 제일 영광스러운 그 사람보다는 낫습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영광의 그 구원이 어떠한 것은 말을 해도 모르고 성경을 읽는 가운데서 자신이 변화되면 변화된 것만치 알고 영감을 받으면 영감 받은 것만치 하늘나라가 영광스러움을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그 나라의 영광스러움을 아는 사람은 땅위에 있는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아무리 못해도 세상에 있는 것보다는, 세상에 영광스러운 것보다는 주님 계시는 곳에 가서 사는 것이 낫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아무리 세상에 고통스러운 사람이라도 지옥의 제일 좋은 자리보다는 낫고, 또 하늘나라의 제일 낮은 구원을 받은 자라도 세상에 제일 존귀한 자리보다는 낫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가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세상에 살든지 떠나든지” 하는 것은 영원한 하늘나라에 가서든지 항상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만 힘씁니다.

왜? 10절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그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우해 줍니다. 그러면 세상에든지 하늘나라서든지 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이것만을 성도들이 힘쓰게 되는가? 그 힘쓰게 되는 이유는 주님을 기쁘시게 한 그대로 또 하나님이 우리를 대우해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기쁘시게 하는 것이 없으면 대우가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적으면 대우가 적고, 기쁘시게 하는 일이 충만하면 하나님이 우리 대우하는 것이 충만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할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요 제일 요긴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뭣 때문에 그러한가?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다 설 터인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서 서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그대로 하늘나라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대해서 대우해 주십니다.

또 하늘나라에 가서도 또 그 나라에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만치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대우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지극히 큰 대주재이신 하나님에게 대우 받는 그것을 우리가 마련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만치 하나님은 나를 기쁘게 하시고 내가 하나님 기쁘시게 한 것만치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로 하여금 기쁜 행복을 누리도록 해 주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이것이 우리의 할 일 중에 제일 큰 일인 것입니다. 이래서, 요리 문답에 제 일문답에 해 놓기를 ‘택한 자들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냐?’ 우리들의 제일된 목적이 무엇이냐?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영원히 그를 즐겁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거는 신구약 성경에서 빼 가지고 ‘사람이 무슨 목적으로 사느냐? 사람은 여러가지 목적이 있지마는 목적 중에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이냐?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즐겁게 하는 것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세계에 흩어져 있는 장로교 교인들로서는 다 이 교리를 요대로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그 감리교나 이런 교에서는 참고만 하지마는 우리 장로교가 제일 교리와 신조가 정확하고 바른 신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교파서 다 장로교 신조를 자기네들이 따라오고 자기네들 교리와 신조를 버리고 장로교 신조를 점점 따라서 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장로교 신조와 교리 중에 제일 첫째가 뭐이냐?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이뇨?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히 즐겁게 하는 것이니라.’고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왜?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영화롭게 하는 이것이 곧 하나님을 대우하는 것이요 또 대우한 그대로 하나님이 그 사람을 대우해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과 같이 살 때에 하나님이 내게 대해서 어떻게 대우하느냐 하는 그것은 내가 오늘 하나님을 어떻게 대우하느냐 하는 그대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핑계할 수 없고 다, 여기 말씀하시기를 9절에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시게 했나 노엽게 했나, 기쁘시게 하는 일은 뜨문뜨문하고 노엽게 한 일만 많이 했느냐, 기쁘시게 한 일이 아주 희귀하냐 하는 이대로 하나님이 심판해서 영원한 갚아 주심을 받기 때문에 이 일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여게도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이랬습니다. 그러면 성경 말씀에 세상은 하룻밤 나그네와 같고 부활 후 맞이하고 사는 그 세계는 영원히 우리가 살 세계인데 그 세계는 아무리 그 세계가 제일 그 세계의 하등 구원을 얻었다 할지라도 이 세상 신불신자간에 제일 상상 그 영광을 누리고 사는 것보다 낫습니다. 또 그 지옥에 아무리 제일 높은, 지옥 중에는 제일 나은 곳이라 할지라도 세상에 제일 천한 곳보다 더 험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부끄러운 구원 얻는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열심히 오늘에 힘을 다해서 준비해야 된다 하는 것은 하늘나라 가면은 그 수치스러운 구원이라 이렇게 말하니까 이 세상보다 수치스러운 줄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고 그 나라에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영광이 나타나고 또 믿는 사람들의 그 영광이 무한히 나타나기 때문에 그때에 그 무한한 영광을 누리지 못하고 자기는 이 세상에서 세상만을 소망하고 살았기 때문에 그 나라의 그 영광이 그 큰 영광을 다 뺏기고 영광 없는 구원을 얻는 그것을 가리켜서 불쌍하다고 말하는 것이지 하늘나라가 이 세상만 못하고 그래 그런 것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나라에는 얻은 사람들은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소유로, 자기의 기업으로, 자기를 바라는 것으로, 그렇게 자기 것을 다 삼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모두 그 강대국에 그 나라에 뭐 일본에 있는 수상이 어떻고, 또 소련에 있는 그 머리가 어떻고, 미국에 있는 또 머리되는 사람이 어떻고 그런 사람들 영광되다고 이렇게 하지마는 그런 나라의 정권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 백성들이 다 좋아하느냐 하면은 좋아하는 사람 몇 사람 없습니다.

또 그 권세를 가졌으니까 큰 거 같지마는, 소련 같은 나라가 제일 크다고 말하지마는 그런 나라도 이 지구에 비해서 아주 극히 작은 것입니다. 작은 것이요, 이 지구 땅덩이라 하는 이것도 이 우주에 모든 존재에 비해서는 이거 뭐 먼지 같은 존재입니다. 이 지구 땅덩어리보다 몇천 배 큰 것도 몇만 배 큰 것도 꽉 찼는 이 우주입니다.

이런데, 그러면 “하늘의 것” 하늘에는 더합니다.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다 우리의 기업이 되고 우리를 바라고 살고 우리에게 영광을 돌리고 우리는 그들을 봉사해서 그들이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는 이 뭐 영광스러운 그 영광이 한이 없습니다.

이러니까 그런 영광을 얻지 못하니까 그런 영광에 비해서 불쌍하다, 가련하다, 부끄럽다, 수치스럽다 하지 하늘나라의 제일 하등 자리라도 이 세상에 최고의 영광의 자리보다는 비교 못 할 만치 존귀한 것입니다. 그 나라가 너무 크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지.

그런고로 우리는 이 세상과 하늘나라가 비교해서 세상과 하늘나라가 비교할 수 없는 이것을 성경에 말해 놨는데 이것을 믿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자기에게 유익 없는 일 합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이것이 한국 땅덩어리를 차지하는 것보다 낫고, 세계를 차지하는 것보다 낫고, 이거 지구 땅덩어리 같은 거 몇백 개 몇천 개를 차지하는 것보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더 유익되다는 이 사실을 성경이 말해 놨는데 이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주님을 기쁘시게 못 합니다. 이걸 믿는 사람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이래서, 우리가 담대하다 그말은 이 세상에 매여 살았는데 알고 보니까 이 세상은 암만 좋아도 천국 제일 낮은 자리만도 못하고 하니까 이 세상에서 뭣이 떠날까, 이 세상에서 손해갈까, 이 세상에서 뭐 죽을까, 절단날까, 천해질까, 고생할까 이런 것이 문제되지 않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가 담대하여” 말합니다. 깨달은 사람은 담대함을 가지고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이 담대함을 가지지 못합니다.

뭐 세상이야 어찌됐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이것이 이 세상 그런 것을 뭐 얼마를 차지하고 몇 개 몇천 개를 차지한다 해도 그런 거와 비교할 수 없는 이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일이 쉽지 안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낱낱이 보면은 이 세상을 버려야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그래 안 하면 기쁘시게 못 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느냐 이 세상을 차지하느냐 둘이 쌍방으로 같이 비중되기 때문에 세상보다 하늘나라를 귀중히 여기는 사람은 괴로워도 기쁘시게 하는 그 일을 택하고 하늘나라나 이 세상이나 비등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이런 십자가의 길을 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이것이 뭣 때문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이렇게 사람들이 모두 거하든지 떠나든지, 세상에 있든지 영원한 나라를 가든지,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 하노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주를 존귀케 하려 하노라 이렇게 말하는가? 하는 것은 그것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그대로 무궁세계에서 또 하나님이 우리를 기쁘게 복되게 대우해 줍니다. 그러면 내가 지금 세상에서 주님을 대우하는 이 대우 그대로 하나님께서 영원 무궁세계에서 우리를 대우해 줍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이 세상에서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으면 하나님도 마음 다해서 나를 기쁘게 해 주십니다. 그러면 나도 내 전부를 다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고 하나님도 하나님의 전부를 다해서 나를 기쁘시게 하고, 그러면 어찌 됩니까? 하나님이 나를 기쁘시게 하는 것과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그 양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어떻습니까? 양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꼭 같습니까 다릅니까? 어떻습니까? 차이가 있습니까? 얼마나 차이가 있습니까? 저○선생?○장로 아들 ○선생? 이것도 우리가 자꾸 입술로만 이럴 게 아니라 자꾸 생각해야 됩니다. 자꾸 생각을 해서 내라는 사람이 변화가 돼야 됩니다.

자, 여게서 이 세상에서도 아주 가난한 서민 하나가 자기 있는 그 힘을 다 들여서 어떤 대왕을 섬겼는데 대왕이 있는 힘을 다해서 그 사람을 섬긴다면 다 같이 섬기기는 섬겨서 품앗이 했지마는 대왕이 그 사람을 섬기는 거와 그 사람이 대왕을 섬긴 거와 섬긴 그 양을 비하면은 비교하면은 그것도 왕이 그 사람 섬긴 것은 그 사람의 섬긴 섬김의 여러 억만 배도 더 될 겁니다. 사람도 안 그렇습니까? 억만 배도 더 됩니다.

그런 일이 있다고 하면은 그 어찌 되겠습니까? 그런 일이 있다고 하면은 자기가 그 왕을 있는 것 다해서 섬기지 안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그 대왕과 나와의 서로 기쁘게 하는, 서로 대우하는 이 품앗이와 양이 같을란지 다를란지? 이런 것은 자꾸 우리가 명상하는 것입니다. 명상하는 가운데서 내 사람이 변화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내 있는 것 다해서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이 당신 있는 것 다해서 나를 기쁘게 한다는 이거는 뭐 측량 못 할 것이요, 이거는 비교 못 할 것이기 때문에 이걸 자꾸, 성경이 그래 놨기 때문에.

보십시요, 성경이 그래 놓지 안했습니까?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9절에 “그런즉 우리가 거하든지” 세상에 있든지 말이요, “떠나든지” 세상을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10절에, “이는” 왜 힘쓰느냐? “이는”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그리스도의 심판대라 말은 믿는 사람들만 심판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심판대입니다. 신불신자를 심판하는 것은 백보좌 심판이요 여게는 그리스도의 심판입니다. 공심판이 아니고 그리스도인들만, 그리스도의 이 대속의 공로를 입혀 줬는데 이 대속의 공로를 어떻게 믿으며 이 대속의 공로를 받았으니 대속의 공로를 베풀어 주신 주님을 어떻게 대우하느냐 하는 거게 따라서 다 보응하시고 대우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선이라 하는 건 하나님 중심, 하나님 중심은 하나님 기쁘시게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는지-악은 자기 중심입니다.-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는지 자기를 기쁘게 했는지 “선악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든지 자기를 기쁘게 했든지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자기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했는지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그대로 받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고 할라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원한다” 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대우하는 그것이 막바로 하나님이 무궁세계에서 나를 대우하게 하는 그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여게 다 기울여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어짜든지 죽어도 세상에 살고 싶고 고생해도 세상에 살고 싶고 이랬는데 이 도리를 깨닫고 성경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보다 하늘나라가 좋고, 여기 있는 것보다 주님과 만나는 게 좋고, 거기 사는 것이 아무리 이 세상에 어떻게 존귀한 것보다도 그 나라에 제일 천한 자리도 그게 나으니까 가고 싶지 있기를 싫다 그말이오. 요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야 됩니다.

이북에서 요번에 망명한 그 열한 사람들이 그뭐 죽을 각오를 하고 나섰는데, 죽을 각오를 하고 나섰는데, 가다가 죽었으면 죽었지 거기서는 살 수 없어서 망명한 것이라 그말이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만일 ‘너 이놈, 그라면 이남으로 쫓아보내 버린다.’ 하면은, 이남으로 쫓아보내 버린다 하면는 이남을 아는 사람은 좋아하겠습니까 벌벌 떨겠습니까? 좋아한다 그말이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들을 세상이 뭐 이렇게 저렇게 ‘너 굶겨 죽인다, 너 사업을 없애 죽인다, 너 고문과 고형해 죽인다.’ 무슨 소리 한다 해도 이제 떠나면 더 좋기 때문에, 이런 사람이라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지 그렇지 안한 사람은 못 합니다.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니라 그런즉 우리들이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왜 힘쓰느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이 무슨 말이요? “선악간에” 선은 하나님 중심이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말이요 악은 자기 중심이니까 자기를 기쁘게 한다 말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든지 자기를 기쁘게 했든지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그대로 하나님이 대우해 주십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주님에게 어떻게 한 그대로 주님이 무궁세계에서 나를 그와 같이 대우해 주십니다.

우리는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섭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은 우리는 지옥 가는 공심판은 받지 안하지마는 주님의 대속의 이 사랑의 은혜를 입은 우리들인데 우리들이 다 같은 대속의 은혜를 입기는 입었지마는 대속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주님을 어떻게 대우하며 어떻게 사랑하는가? 이제 그대로 하늘나라에 대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는 누구든지 꼭 같은 그리스도의 이 대우가 있었습니다.

대속의 대우가 있었는데 이 대우를 받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느냐? 산 그대로, 그리스도의 심판은 대속 받은 자들이 대속 받은 자로서 대속하신 주님을 어떻게 대우했는지 그것을 심사해 가지고 그대로 정확하게 갚아 주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주 미약한, 말하자면 뭐 비교가 안 되지마는 우리는 구더기와 같은 내 전심 전력 기울이면-비교는 안 됩니다.-전심 전력 기울이면 이 세계에 제일 영광스러운 대왕이 전심 전력을 나 위해서 기울이는 것보다 비교 못 할 만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티끌 같은 이것이 이제 주를 섬기는 것은 지극히 크신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있는 거 다 기울여서 나를 섬기게 하는 이 계약을 맺어 놓은 것이 하나님의 계약이라 그말이오. 이것이 계약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공과에 “믿음이 없이는 주를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주를 기쁘시게 하는 유일한 방편은 믿음이다.” 말했습니다. 믿음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을 입은 우리들이 대속의 공로를 입혀 주신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하는 그대로, 내 있는 걸 다 해서 주님을 사랑했든지 만분의 일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했든지, 만분의 일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했으면 주님도 만분의 일 가지고 나를 사랑할 것이고, 내가 다해 가지고 주님을 사랑했으면 주님도 다해 가지고 사랑하는 요것을 요 계약에 해 놨기 때문에 요 계약을 믿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믿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대우하는 것이요, 요 계약을 믿는 것이.

그러면, 내가 만분의 일 가지고 주님을 기쁘시게 영화롭게 했을 때에 주님이 만분의 일 가지고 나를 기쁘게 영화롭게 해 주신다고 하면은 어찌 됩니까? 그것은 내가 손해갔습니까 유익봤습니까? 유익봤지요.

그러면 내가 만분의 일로 대우하니까 주님도 만분의 일 가지고 나를 대우했으면은 내 대우에 주님이 만분의 일 가지고 나를 대우했으니까 대우한 것이 그것이 내가 대우한 것과 양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저○선생 옆에? 양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얼마나? 조금 다릅니까? 무한히 다릅니다. 무한히 다르요.

이 사실을 성경에 기록해 놔으니까 보십시오.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10절에 “이는” 뭣 때문에 힘쓰느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이 선악이라 하는 것을 세상 사람이 말하는 선이라 악이라 그래 해석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선악을 배운 걸 따로 배웠다 말이오. 선은 하나님 중심이 선이요 하나님 위주가 선이요 악은 자기 중심 자기 위주가 악이라는 것을 벌써 배워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다른 데서 이래 배우는 데가 적어요. 선이라면 세상에 말하는 선, 악이라면 세상에서 말하는 악이라고 말하지 성경을 보고 배우지 안했기 때문에.

성경에 있는 단어는 성경에서 그 단어를 뭐라고 사용했느냐 이걸 보고 해야 되지 국어사전 봐 가지고 그 단어의 뜻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 틀려.

“선악간에” 자기 중심으로 살았는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는지, 이것이 뭐이냐?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는지 자기를 기쁘게 했는지 그말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할라 하면 자기 기쁘게 하는 것을 버려야 되고 자기 기쁘게 할라면 하나님 기쁘시게 하는 것을 버려야 됩니다.

이래 “선악간에” 네가 누구를 기쁘게 했는가? “그대로” 몸에 행한 그대로 “다 갚음을 받기 때문에 그러하다” 말했습니다. 요 사실을 믿는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이렇게 이 신구약 이 성경은, 다른 말로 말하면 신구약 성경이라 말은 다른 말로 말하면 무슨 말입니까? 신구약이란 무슨 말이요? 신구약이라 말이 무슨 말입니까? 계약서라 말입니다, 계약서. 구약은 처음에 계약한 것이고 또 신약은 그 다음에 신약 시대에 계약을 해서 구약에 계약한 것을 신약에 더 확고하게 나타낸 것이 신약 계약입니다.

이 두 계약서에 기록되어 있는 계약, 이 계약은 하나님과 택한 자와 계약한 계약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나와 내게 대한 계약입니다. 요 계약은 확실히 알고, 요 계약을 확실히 알고, 금생과 내세의 영원 문제가 여기 달렸는데, 여기 달렸는데 이거 모르는 사람은 덩더꿍이오. 제가 천하의 학식을 다 가져도 하나님과 인간과의 그 사이가 이 계약을 모르는 사람은 그 사람은 등신이요, 소경이요, 지식으로 말하면 완전 무식이요 전공인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자기와의 사이에 선포해 놓은 요 계약 요 계약의 계약 조문을 낱낱이 알고 조금 알았으면 그 사람은 요게 대해서 조금밖에 못 믿기 때문에 그 사람은 구원이 적을 것이고, 조금 아는 사람 많이 아는 사람 다 아는 사람. 또 알기만 알고 믿지 못하는 사람, 다 믿는 사람. 알고 믿고 그 다음에 행하지 못하는 사람, 알고 믿고 행하는 사람, 요 아는 것과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이-믿는다 말은 인정한다 말입니다.-아는 것과 믿는 거, 아는 것과 인정하는 그 행하는 요 세 가지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딴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나님이 뭐, 이 사람들은 선물을 갖다 주고 예물을 갖다 주고 이라면 기뻐할 줄 알지마는, 사람이야 그렇지요, 하나님은 그렇지 안해요.

하나님은 엿새 동안에 우주의 모든 걸 만들었는데 뭐 있소? 사과가 필요 있겠소, 배가 필요 있겠소, 소고기가 필요 있겠소, 뭐이 필요가 있겠소? 엿새 동안에 만들었는데. 다 필요 없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뭐이냐? 당신을 믿어 달라는 것이오.

당신과 우리와의 계약이라 하는 것은 그 계약은 당신 좋게 한 계약입니까 우리 좋게 한 계약입니까? 우리 좋게 한 계약이라 말이오.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대우해 주시되 그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되지 안 받으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와 계약은 당신이 무조건으로 은혜로 우리에게 마구 주시는 이 은혜로 주시는 모든 은혜를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되는 계약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당신이 공짜배기로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당신이오. 당신의 무한하신 것을 주실 때 그 주시는 것을 받기를 원하고 받을 수 있는 사람 되는 것을 제일 원해요.

그러기 때문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 기쁘시게 못 하나니” 하는 그말은,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 기쁘시게 못 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게 뭐인가? 하나님 기쁘시게 하는 것은 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기쁘시게 하는 것은 그게 뭐이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우리를 행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부모도,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 기쁜 것은 자식이 무슨 물질을 가져오고 뭐 대우하는 것보다도 부모가 제일 기뻐하는 것은 그 자식이 행복되는 것을 제일 기뻐합니다. 그 자식이 행복됐다, 또 그 자식이 다른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 자식이 영광스러워졌다, 자식이 성공을 했다, 그 자식의 모든 것이 형통해졌다 하면 그 부모는 기뻐합니다.

우리가 박할지라도 부모로서 그 자식이 뭐 주는 것보다도, 부모는 먹을 게 없으면 갖다 주는 거 좋아하지요. 그렇지마는 그냥 지내는 부모는 자식이 부모에게 갖다 주는 것보다도 그 자식 자체가 행복된 것을 부모가 제일 기뻐하는 것이오. 제일 근심하는 것은 자식 그 자체가 불행스러워지는 것을 근심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주님을 우리가 기쁘시게 하는 것은 뭐인가? 믿음이라. 믿음은 뭐인가? 하나님의 계약한 대로 이대로 준행하는 그것이 우리 행복되는 거라. 우리 행복되는 걸 기뻐한다 말이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 사랑을 가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 계약을 지키지 아니함은 우리를 자체를 행복되게 할 수 없다. 우리 자체를 행복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이 계약 지키는 것은 우리 자체를 행복되게 하기 때문에 이거는 주님을 유일로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된다 하는 그것을 가르쳐서 말씀한 것입니다.

해석은 별로 안 했는데 선생님들은 이 공과를 가지고 자꾸 읽어보면 이제 될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모두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그 나라도, 우리 교회서는 “그 나라에도 불 가운데 구원 얻는 거와 같다” 불 가운데에 구원 얻는다는 것은 주님의 대속의 이 사랑을 베풀어 주셨는데 내가 그 대속의 사랑에 대해서 너무 내가 무시하고 너무 등한히 하고 이랬기 때문에 인제 부끄럽지요. 부끄럽다고 해도 그 나라에는 이 세상에 제일 영광스러운 존귀보다는 낫습니다.

이 하늘나라는 왜 좋은가? 오늘 저녁에 독창 하나 있을 것입니다. 독창 하나, 이 독창 말이요, 이 좋은 찬송인데 그만 이 요새 신식 사람들이 다 뽑아버렸어요.

이래서 좋은 찬송은 다 뽑고 아주 속화된 그런 찬송만 많이 하고 참 좋은 찬송?, 자, 나와서 한번 찬송을, 우리 저○○○목사님, 다른 사람은 그 찬송 몰라요. 내가 그 찬송가를 찾으니 찬송가에 없어. ‘왜 이게 없습니까?’ 다 빼 버렸어. 다 빼 버렸는데 아주 옛날 찬송에 있어요. 하늘나라에 찬송, 하늘나라가 이렇기 때문에 좋습니다.

한번 찬송을 한번 뜻을 알고 들어야 되기 때문에 읽어 보겠습니다. 그 합동 가지신 분은 493장입니다. 합동에 있지마는 새찬송 통일은 없습니다.

‘하늘엔 곤찮고 장생불로 몸 신령하여져 장생불로 괴롭고 무겁게 세상 사람 짐졌네 하늘엔 즐거워 장생불로’ ‘하늘엔 울잖고 장생불로 날마다 복받아 장생불로 이 세상 죄 많아 슬픈 눈물 흘리나 하늘엔 복 많아 장생불로’ ‘하늘엔 병 없어 장생불로 영원히 쾌하여 장생불로 세상 일 괴로워 맘이 항상 곤하나 하늘엔 편하여 장생불로’ ‘하늘엔 죽잖고 장생불로 생명이 한없어 장생불로 사람의 사후길 노소없이 뫼로 가 하늘엔 무한년 장생불로’ 그만해도 이 세상보다 안 좋습니까? 세상에 어데 그런 좋은 게 어데 있습니까? 암만 천국 가면 제일 하뿌리라도 그건 다 가지고 있습니다.

하늘은 아무리 하등이라도 세상 최고보다 낫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늘나라의 그 영광은 어떤 영광이냐? 내가 세상에서 내 만분지 일 주님을 위했으면 하나님의 만분지 일 나 위하고, 내 전부 다 위했으면 하나님 전부 나를 다 위합니다. 하나님 무한하신 하나님 아닙니까? 이렇게 큰 중대한 문제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인해서 우리와의 연결이 지금 되어서 영원을 마련할 수 있는 이 좋은 기회인 것인데 이거 우리가 모르고 지금 벌로 날뜁니다.

광고합니다.

내일은 구정입니다. 내일 양산동에 산기도 가실 선생님들은 아침 여덟시 삼십분까지 교회로 모이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구정되면 야단이고 설 새러 간다고 야단인데 이제 산으로 가니까 주님 만나러 간다 말이요, 바쁘니까.

또 기도 제목에 대해서. 기도 제목은 자기가 다 가 가지고 어짜든지 반사라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반사 직책 하니까 이 반사직 잘 할 수 있는 그게 기도 제목 돼야 되겠고, 또 그라는데 내가 죄짓지 안하고 학생들에게 좋은 본이 돼야 되겠으니까 본되기 위해서 기도해야 되겠고, 그라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표적과 기적이 내게 따라야 되지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이 따라야 학생들이 보고 ‘아이고, 저 참 믿는 게 저렇다.’ 이래 돼야 될 터인데 이 세 가지만 해도 기도 제목 되겠습니다.

이라는 데에는 자기 주일학교 반사 일을 잘 감당해서 주님이 기쁘시게 하는 고거 하나 기도해야 되겠고, 또 자기가 학생들에게 본이 되도록 이렇게 잘 믿는 빛의 생활 해야 되겠고 요것도 하나 제목 돼야 되겠고, 하나는 이렇게 살면 반드시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이 따르니까, 기적과 축복이 따라야지 말만 해야 소용 있습니까? 기적과 축복이 따라야 되지. 따르도록 우리가 해야 되겠다 말이오.

고거 기도 제목 되겠습니다.

그리고 산에 올라가서는 두 사람 쌍 지워서 다니지 말고 잡담하지 말 것. 또 산을 훼손하지 말고 휴지나 쓰레기를 버리지 말 것.? 또, 내일 그 주일학생들 주일학교 반사들 네시, 오후 네시 전에는 일체 산에서 내려오지 말 것. 집에 돌아오는 시간은 네시 삼십분에 출발합니다. 철야하실 분은 다음날 새벽 세시에 출발합니다. 그러면 거기 가 가지고 산에서 철야할 사람은 철야하고 또 내일 돌아올 사람은 돌아오고 어짜든지 많이 가서, 오늘 가서 저쪽에 기도할 장소를 봤습니다.

갔다 온 사람들이 모두 좋아서 침이 마르게 말해요. 양쪽에 계곡도 있고 물도 좋고 뭐 여러 수백 명이 앉아서 같이 이렇게 재독도 들을 수가 있고 같이 할 수도 있고 또 암만 해도 그 동네 사람들에게 들리지도 안하고 그런 자리를 또 봐 놨습니다.

이러니까, 내일 가실 분들은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들은 뭐 한 오륙백 명 다 가도 됩니다. 오륙백 명 다 가요. 여기 있어봤자 손해지 수 없어. 거기 가서 어짜든지 주님 기쁘시게 하는 일 찾고, 또 모두 학생들에게 본될 것 찾고, 또 하나님의 축복과 기적이 자기에게 오도록 또 찾아서 고치고 이보다 더 좋은 게 어데 있습니까? 광고는 이상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할 수 있는 대로는 그만 집에서 이래 안 되면 빵이라도 한 쪼가리 사 가지고 가면 되니까 어짜든지 그만 산으로 가면 성공입니다. 산으로 가면 성공이고 여기서 있으며 뭐 집 의지 하면 하루 그만 그라다 보면 하루 시간 다 가 버리고 아무 할 일도 하지도 못하고 손해니까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들은 뭐 될 수 있는 대로 빠지지 말고 전부 다 가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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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4 하나님만 위하여/ 유다서 1장 14절-15절/ 1983. 9. 7. 수새벽 선지자 2016.01.02
493 하나님에 대한 이름들의 차이점/ 빌립보서 3장 4절-11절/ 1980. 3. 27. 목새벽 선지자 2016.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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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1 하나님에게 쓰임 받자/ 학개 1장 8절-9절/ 1989. 7. 28. 금새벽 선지자 2016.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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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9 하나님으로 전부를 삼으라/ 베드로후서 3장 11절-13절/ 1989. 7. 20. 목새벽 선지자 2016.01.02
488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베드로 전서 1장 20절-25절/ 1979. 7. 8. 주일오전 선지자 2016.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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