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

 

1989. 4. 9. 주후.

 

본문: 엡 1:3-14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하신,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 복을 받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복 받는다 그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 안에서 복받는다는 말씀이요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를 벗어나서는 이 복을 보지도 못하고 또 들어도 알기도  못하는 복입니다.

 하늘에 속했다 하는, 하늘에 속했다는 이 하늘은 공간적으로 높은 것을 가리켜서  하늘이라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고 모든 가치적으로 가장 높은 것을 말해서  하늘이라, 그러면 권위적으로나 영광적으로나 모든 것이 다 존대하는 그  존대적으로나 모든 면에 있어서 지상의 것을, 지극히 높은 지상의 것을 가리켜서  하늘이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그러면 신령한 복이라는  신령이라는 말이 성경에 자주 나오는데 이 신령이라는 것은 피조물적인 요소  이것이 아닌 순전히 영원 자존하신 완전자이신 신적 요소에 속한 것들을  가리켜서 신령한 복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신령한 복이라 말은  피조물에게서 난 것도 아니고 또 피조물로 인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이거는  피조물과의 상관 없는 신령한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그것을 가리켜서 신령하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다는 것은 육신으로 말하면 아담 하와의 자녀인  영육이지마는 그 것은 피조물 요소요 그것이 이다음에 부활할 때에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은 피조물 요소가 창조주 영원 자존자 완전자의 완전  요소로, 영원 불변의 요소로 부활되는 것을 가리켜서 신령이라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가 예배할 때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 하는 신령은 순전히 신적  요소를 힘입어 가지고 신적 요소로 예배를 하는데 인적 요소의 최고 최귀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된다 하는 것으로서 인적 요소에 대해서 최고귀의  것을 표현해서 진정이라 이렇게 말씀했고 신령이라는 것은 신적 요소의 것을  가리켜서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시되 그러면 그 복을 주시는데  첫째 복이 뭐이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는 이것이 신령한  복입니다. 우리를 택한 것도 피조물로 인한 것이 아니고 전부 자존자의 그  요소로서 택함을 받았고 우리에게 대해서 이 예정하신 것도 대속하신 것도 전부  완전자의 요소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첫째  아담에게 속한 것은 이것은 피조물이요 가치 없는 것인데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생겨지는 것은 다 피조물 요소가 아니고 전부 자존자 완진자  창조수 그분의 요소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오전에 우리가 여섯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된 우리,  하나님의 아들된 우리, 또 영생을 가진 우리, 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이  부활의 신령한 몸을 가진 우리, 이래서 이 셋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또  하나는 이렇게 된 우리들이 영원한 그 직업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천직을 맡겨  주셨는데 그 직업은 어떤 것이 우리 직업인고 하니 세 가지 직책을 우리의  직업으로 맡겨 주셨습니다. 하나는 제사장, 선지, 왕직 세 가지 직책을 우리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 데 대해서 신구약 이 성경에 많이 기록해 가지고  우리에게 믿는 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모든 것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또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자녀노릇을 하느냐?  또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를 삼은 우리에게 세 가지 직책을 주셨으니까 이  직책을 감당할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그런 것을 기록해 놓은 것이  신구약 성경입니다.

 그러기에 그 모든 것이 다 간추려서 뭉쳐지면 이 여섯 가지입니다. 부활 영생을  가진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 된 우리 자신들과 또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된  우리들은 게사장직 선지직 왕직을 이것을 세상에서 감당하는 연습을 해 가지고서  이 실력이 숙달돼 가지고 무궁세계에서 이 직책을 잘 감당하도록 하는 그 연습과  연성과 연단해서 온전함을 이루는 이것이 우리가 땅위에서 공부하는 것이요 또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 구원에 데해서 우리가 실제로 우리가 가져야 합니다. 이 구원은  굉장히 큰 구원인데 이건 참 말할 수 없는 이 고귀한 구원인데 이 구원을 모두  공으로 은혜로 이렇게 받는다고 성경에 말씀해 놓으니까 은혜로 받으니까  공짜배기로 받으니 그까짓 거 가치 없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을 가지는데,  은혜로 받는 것은 우리가 그 댓가의 억억만분의 일이라도 댓가를 낼라 하면은  우리는 그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그 구원은 억억억억만 분의 일도 인간 요소  가지고는 이룰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성자라 할지라도 성자의 행위 그것은 그  성자의 행위가 우리 구원에 대해서 억만분의 일이라도 거기 들어가 있으면 우리  구원은 깨져 버리고 맙니다. 그 더러워서 그런 거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이 구원이 지극히 완전하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거게 대한 댓가도 낼  수가 없고 이 구원에 대한 조성에 조그마치라도 가담할 수가 없이서 이 구원은  순전히 은혜로 주시는 것이지 구원의 가치가 적어서 은혜로 주시는 것 아니오. 또  우리의 행함으로 하시지 않는 것은 이 구원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어서 그렇게  우리의 행함으로 하지 안하고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구원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된 이 구원이나 또 영생하는 이  생명 구원이나 또 신령한 몸으로 다시는 늙지도 쇠하지도 더러워지기도 병들지도  낡아지지도 안 하는 이런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이 신령한 몸이나 이것 다  예수님이 대신 다 해 놨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다 해 놓고 우리는 그것을 만드는  데에는 뭐 털끝만치도 우리는 손을 못 댑니다. 대 좋으면 안 됩니다. 더러워져 안  됩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요소는 하나도 없이 순전히 주님이 만드셔 가지고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또 제사장직 선지직 왕직도 이 세상에서 공부해 가지고서 무슨 취직하듯이  인간의 노력으로서 이 세 가지 직분을 받는 것 아닙니다. 이것도 순전히 예수님의  대속으로 이 직분을 만들어 가지고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기에 이것을 우리가 받아 가지고 자기 것으로 누리면 됩니다. 자기  것으로 그만 쓰면 됩니다. 자기 것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것이 돼 가지고  있는데 돼 가지고 있는 이것을 자기 것으로 쓰지 못하는 그게 하나님에게  안타깝습니다.

 그러면 이 구원을 자기 것으로 자기가 사용하는 데에는 무엇을 가지고서  사용하느냐 하면 믿음만 가지고 사용합니다. 그러기에 이 구원에는 믿음만  필요하지 믿음 외에 거는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이 구원은 믿음이면 자기 구원을  삼고 이 구원의 효력을 자기가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라는 것은 무엇을 믿음이라고 말하는고 하니 그 사실대로 알고, 아는  그것을 거짓말이 아니고 천하는 변해도 변치 않는 그 사실인 실상인 것을 자기가  인정을 하고 그 다음에는 그만 알고 인정하고 그대로 살면 됩니다. 살면 되는  것인데 이것이 아는 것이 그것이 아무리 잘 안다 할지라도 아는 것이 이 구원을  만드는 것 아닙니다. 또 인정하는 것도 이 구원을 만드는 것 아닙니다. 또  인정하고 이대로 행동하는 것도 이 구원을 만드는 건 아닙니다. 다만 알고  인정하고 행동하는 것을 합해서 믿음이라고 말하는데 이 믿음이라는 것은 이  구원을 자기 것 삼는 것이지, 은혜로 주시는 것을 받아서 자기 것, 자기 것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삼는다 말은 믿음을 가지면 자기 것이 되고 믿음을 안 가지면  자기 것이 안 되는 게 아니고 자기 것이 되어 있는데 아무도 가져갈 자 없습니다.

자기 것이 되어 있는데 믿음을 안 가지면 이 구원을 자기가 모르기 때문에  사용도 못하고 이 구원에 대한 혜택도 자기가 누리지도 못하고,  그저 비유컨대 자기가 돈을 이 지화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지화가 돈이라는  것을 이것을, 물질을 바꿀 수 있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도 안하고 그걸  가지고서 뭐 빵 하나라도 살라고 안 달라들고 사지 안 하면은 모릅니다.

 이거는 공연히 이거는 뭐 종이쪼가리라 자기는 못쓸 것이라 이래 생각하면은  아무리 몇천만 원 수표가 자기에게 있어도 그거는 빵 한 쪼가리도 못 삽니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알고 인정라고 쓰면 된다 말이오. 쓰면 되는데 우리가  그것을 가리켜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이래서 악령이 우리를 자꾸 꼬우기 때문에 이 믿음을 가지지 못하게 되는데  우리가 이 믿음을 가질라고 애를 씁니다. 이 믿음을 만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인 이 믿음을.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인 믿음을 우리가 가질라고 믿음만  가지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노릇도 할 수 있고 아들의 그 모든 영광과 존귀를  누릴 수 있는데 이 믿음이 없어 문제니까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이 믿음을  가질라고 애를 씁니다.

 그러면 믿음 만드는 법이 어떤 것이 믿음 만드는 법인고 하니 간단하게  생각해서 생각하면 됩니다. 자꾸 생각하십시오. 이래서 어데를 가든지 가면  '하나님 우리 아버지' 이래 놓고 아버지를 또 생각합니다.

 생각하면 그 사람이 성경 지식에 따라서 생각하는 범위가 많이 차이는 있지마는  이 생각이라 하는 것은 이 뚫고 들어가는, 뚫고 들어가는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꾸 생각하면 하나 생각에서 둘 생각되고 셋 생각되고 넷 생각되고, 또 거게  대해서 낍데기 생각하면 알맹이 생각하게 되고 알맹이 생각하면 그 다음에 또  알맹이 생각하게 되고, 깊이로도 자꾸 얼마든지 깊이 깊이 생각하게 되고  넓이로도 얼마든지 넓이 넓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러면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아들되었으니 '그러면 나를 아버지의  아들되게 하실 때에는 어떤 순서를 통해서 아들되게 하셨는가?' 그것도 생각하면  재미가 있어서 얼마든지 자꾸 '나를 아버지의 아들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어떤  순서를 밟았으며 또 나를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되게 하는 데에는 언제부터  시작됐는가?' 그런 것을 자꾸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뭐 세상에 좋은 것이 많이 있지마는 그런 것 생각하는 것은 다  썩을 것을 거둡니다. 썩을 것을 거두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된 것 생각하고, 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것 생각하고, 또 영생 생각하고 또 제사장직 생각하고,  선지직 생각하고, 왕직 생각하고 하는 이거는 암만 생각해야 시간도 하나도 허비  안 되고 또 정력도 허비 안 되고 그것은 털끝만치도 없어지지 안하고 전부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자꾸 이것을 우리가 생각해서, 실은 참 다른, 사람이 예수 미치괭이라고  할 만치 자기의 땅에 있는 그 정신이 완전히 없어지고 하늘에 속한 이 정신으로  완전히 바꾸어지기까지 우리가 생각하고, 그러면 이 생각 하다가 죽고 이  생각하다가 살고 이 생각에서 이제 세상을 옮겨가는 우리가 되도록 힘을 써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되면 그 담대함이 생겨집니다. 담대함이 둘이  생겨집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인 것을 자기가 믿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된 것을 알고, 아들된 것을 알고 또 인정하고 또 그대로 행동하면 그게 믿는  것인데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됨을 믿는 그 믿음이 있는 것만치 담대함이  생겨집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이런 것으로 시험하신 서런 것으로 시험해도 그 시험에  걸리지 안하는 '저 뭣 때문엔가?' 안 믿는 사람들은 미련하게도 생각하고  등신이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된 자기를 믿는 그 믿음이  있는 것만치 담대함이 생겨집니다.

 무슨 담대함이 생겨지는가? 모든 사물을 대할 때에 담대해집니다. 어떤 큰 일을  닥쳐서 '저거 저 사람 아마 기절하겠네.' 해도 그 놀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경험입니다. 뭐 '저거 저런 어려움을 닥쳤으니까 저거  아마 저 사람이 기절하겠는데' 놀라지 않습니나. 담대합니다.

 그러기에 처음에는 이 생각을 미쳐 못 했을 때 생각이 그만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인 것을 생각하는 이 생각이 없어지고 믿음이 없어지면은 뭐 공산주의  보고도 놀라고. 또 이 세상에 뭐 불 보고도 놀라고, 강도 보고도 놀라고 뭐 나라  군인들 보고도 놀라고. 그 오만 것 보고, 짐승 보고도 놀라고 놀라지마는 어떤  일을 닥쳐도 놀라지 않습니다. 이래서 말하기를 '어떤 두려운 자을 만나도 놀라지  안하면 사라의 딸이 되리라' 그렇게 말한 것은 믿음의 사람이 된다 그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신데 어떤 큰 사건을 만나도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에  문제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에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된 여게 대해서 믿음을 가진 것만치 그 사람은 담대함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것을 차차 맛을 본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 아들로 인해서 담대함을 가져본  그 사람은 온 천하에 어떤 것들이 와 가지고 나를 보호하고 협조하고 한다고  해도 그까짓 게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뭐 세계에 지금 어떤 강대국의 이  수령들이 지금 만나고 어짜고 회의하고 어짜고 해도 거게 대해서 말은 안 하고  있지마는 속으로는 웃고 있습니다. 그게 뭘 할 것입니까? 우리 아버지에게  주권되어 있는데 아버지가 뭘 하시지 아버지에게 주권되어 있는데 아버지 외에  어떤 주권자가 있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된 것을 자기가 믿을 때에 어떤  일을 당해도 놀라지 안하는 그 담대한 이 사람이 됐나 안 됐나 하는 그것으로서  자기가 아버지의 아들로 자기가 믿고 있는지 그 믿음이 말뿐인 믿음인지 아주 뭐  믿음이라 하는 것이 먼지 같은 믿음을 가졌는지 그 믿음이 어북 주먹덩이 같은  믿음을 가졌는지 반석 같은 믿음을 가졌는지 그거는 시험을 해 보면 압니다.

 어떤 걸 시험해서? 일이든지 존재든지, 일이나 존재나 어떤 존재를 대할 때에  담대한가? 어느 정도 담대한가? 만일 아버지의 크심을 믿으면 아버지보다 작은  것은 보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거게 대해서 담대합니다. 또 어떤 키 사물을  대해도 담대합니다. 뭐 또 어떻게 큰 세력을 만나도 담대합니다. 모든 피조물을  상대한 때에 담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인 것을 믿는 그 믿음의 그 실상이 이루어져 있나 없나  하는 것은 이 담대함을 사지고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큰 것을 만나도 담대하고 어떻게 많은 걸 만나도 담대하고 어떤  또 큰 사건을 만나도 담대합니다. 일이나 존재나 어떤 것을 만나도 담대함을  가지게 됩니다. 그 담대함이 없는 것은 말 예수요 말로 하나님의 자녀지 참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믿어지지 않는 증거입니다.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두 가지 두려움이 생겨집니다. 두 가지 두려움이  생겨지는 것은 '혹 하나님에게 욕을 돌릴라? 하나님을 노엽게 할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루고 하나님을 노엽게 할라? 그분에게 거리낄까?' 하는 그 두려움이 안  믿는 사람과 믿음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믿음이 생겨지면 하나님에게 대한  두러움이 생겨집니다. 모든 피조물에 대해서는 담대한데 하나님에게 대해서  두려움이 생겨 집니다. 또 하나는 모든 피조물에게 대해서 두려움이 없는 동시에  혹 그들에게 거리낄까 하는 자기가 교만해서 혹 월권해 가지고 거리끼든지  그들에게 거리낄까 하는 그 두려움이 생겨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신앙을 가진 것만치 이 사물에 대해서 담대함을  가지고, 일에 대해서 담대 존재에 대해서 담대 이 두 가지 담대함을 가지게 되고  또 두려움을 두 가지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에게 거리낄까 두렵고 자기가  교만하고 강퍅해서 이 피조물들에게 거리껴서 실수할까, 피조물들에게 해를  끼칠까 두려움이 있는 이 두 가지 두려움이 필연적으로 생겨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사도 바울이 그가 항상 두려워 떨고 하는 것은 이 피조물들에게 대해서  자기가 혹은 월권 남용하는 그 교만해서 기리낄까? 또 하나님에게 무슨 영광이나  하나님의 뜻에 가루어지는 그런 일이 있을까 이래 두려워했지,  그 두려워하기는 사도 바울 같은 그런 이는 어째 성경을 보면은 그렇게  겁쟁이가 없습니다. 어데 가도 항상 두려워했습니다. 두려워하는 그것이 이 두  가지 두려움이고 그가 뭐 이제 것이나 장래 것이나 사망이나 생명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날이나 어떤 것이라도 거게 대해서 하나도 조금도  두려워함이 없었던 것은 하나님 아버지 아들이기 때문에 그런 게 문제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내가 넉넉하여 다 할 수 있을 것을 알기 때문에 무엇이  모자라서 그런 두려움이나 그런 것 없었습니다.

 이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된 것을 믿으면 세상이 가지지 아니하는 두  가지 두려움을 가지고 세상이 가지지 않은 두 가지 담력을 가지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또 이 영생하는 영생을 자기가 가진 것을 믿는 자에게는 죽음에 대해서  두려움이 없습니다. 영생을 믿는 자는 처음에 이래 퍼뜩 생각할 때에는 혹 뭐  죽음의 문제 그 어려움이 오면 그 문제가 얼핏 생각할 때에는 그만 그거 착각을  해 가지고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그런 일이 있지마는 눈을 감든지 안 감아도  잠깐만 생각해서 자기는 영생을 가진 요것을 확실히 생각할 때는 그 다음부터는  죽음의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람은 일생 동안 죽기가 두려워서 죽음에게 종되어  죽음만 가져오면 뭐이든지 그만 굴복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생을 가진 것을  믿는 자에게는 죽음의 두려움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죽음의 두려움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영생을 가졌나 안 가졌나 하는 그것을 스스로 자기가 시험을 해서 확정을  지워야 되겠습니다. '내가 참 영생을 가졌나 안 가졌나?' 이것을 자기가 시험해  가지고서 '영생 나는 가졌다 말로 영생을 가졌지 실상은 영생을 가지지 안했다.'  자기를 시험해 가지고서 자기를 확실히 정해 버려. 확정을 해야 된다 했습니다.

 자기는 영생을 가졌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안하고 또 자기가 앞으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이 부활에 대한 것을 자꾸 자기가 생각하고 생각해서 부활을  확실히 믿는 그 믿음을 가졌을 때에 늙는 것이 탄식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늙음의 그 슬픔이라 하는 것을 굉장히 가집니다. 그래서 그  늙음에 대해서 슬퍼하고 어떻게 하면 그 늙음을 좀 면해 볼까 해서 애를 쓰고 그  참 늙음에 대한 문제를 해결짓기 못해 가지고서 늙음의 이 비판과 공포심을  가지지 안한 사람들이 세상에 없습니다. 다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 부활을 가진  자는, 부활을 가진 자는 늙는 것이나 뭐 쇠해지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그런 것을  하나도 염려하지 많고 그런 것을 완전히 발 아래 밟았습니다. 그것도 내가 이  부활을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그것을 자꾸 생각해야 됩니다.

 이 생각하는 가운데서 이 실력이 자라가고 생각하는 가운데에서 이 뿌리가 자꾸  깊이 뻗어나갑니다. 이거 뭐 비오고 바람 불고 날 따시고 하면은 조그만한 식물이  자꾸 뿌리가 뻗어서 동으로 남으로 또 깊이로 자꾸 뿌리가 깊이 뻗어들어가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생각할 때에 자꾸 뿌리가 깊이 뻗어들어가서 거게  대한 지식도 깊어지고 넓어지고 구비해지고, 거게 대해서 연단받아서 인정하는  것도 구비하고 깊어지고, 또 거게 대해서 행한 것도 요럴 때에 행해 보고 조럴  때도 행해 보고 또 행함도 점점 연단받아서 견고해지고, 자꾸 우리가 이것을  길러야 됩니다.

 그러면 영생도 길러야 되고 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이 부활도 자꾸 길러야  합니다.

 이래서 우리는 이 부활에 대해서는 늙는 거 이런데 대해서, 늙고 죽는 이런데  대해서 완전히 그는 초월했기 때문에 뭐 사람들이 늙는다니 죽는다니 하는 거  그런 것 때문에 염려하는 소리를 들으면은 그것은 똑 남의 얘기같이 들리지 우리  얘기로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 하는 그것이 '저거 내 얘기라' 자기에게 해당된 것으로서 거기 대해서  늙어진다 죽는다 이렇게 자꾸 늙어지고 쇠해진다 해서 거게 대해서 탄식하고  걱정하는 그런 소리를 들을 때에 꼭 무슨 꿈 얘기하는 것같이 들려지고 그런  것이 자기에게 실감 있게 들리지 안하는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 있습니까? 한  사람 있으면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한 사람 손 들어 봐요. 늙는다 죽는다 할 때  그런 것이 남의 얘기같이 아무 실감이 없는 것이 그게 내게는 상관없는 그런  얘기로 들리지 않습디까? 그게 그래 들려져야 됩니다. 자꾸 생각하면 들려져요.

 또 죽는다는 거 죽음이라는 그런 것도 앞에 지금 뮈 6·25같은 때도 그렇고  왜정 때도 그렇고 이제 신사참배 안 하면 죽인다. 또 그들에게 굴복하지 안하면  지금 죽인다. 이렇게 6·25 때도 할 때에 오늘밤에 끌어다 죽인다 내일 밤에  끌어다 죽인다 이렇게 할 때 그 죽음이라는 그 죽음을 이기는 방법이 뭐인가?  이기는 방법이 영생입니다.

 자꾸 영생에 대해서 생각하니까 이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일조 일석에 만든 제  아니라 엿새 동안에 우주를 창조하신 이 분이 나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는  영원 전부터 계속해 가지고 모든 예정도 내 영생 위해서. 모든 창조도 내 영생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신 것도 내 영생 위해서, 십자가의 사활의 대속을  베푼 것도 내 영생 위해서, 이 뿌럭지를 자꾸 깊이 깊이 생각하니까 그 뿌리가  어떻게 깊이 박혀 놨든지 이거는 뭐 피조물이 흔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영생인 이 영생을 가진 자기인 것을 자신을 가질 때에 아무도 죽음이,  죽일 자가 없고 죽음이라는 게 자기는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더 영생 잘하도록 하기 위해서 세상이 있지 하나도 죽일 자는  없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을 인민군이 죽였다고 죽은 줄 압니까? 그분은 죽는다는  그런 감을 절대 가지지 안했습니다. 그럴 때 그것이 이제 완전치 못한 생명을  완전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는 평안하고 즐거웠던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가 두 번 죽어야 완전 생명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 죽여야.

한 번은 죄 짓는 자가 죽고 또 의롭게 된 자가 의를 행하다가 아직까지 살아  있으면 OOO씨 어때요? 의를 가진 자가 의로 지금 열심히 의를 행하고 있으면  어찌 돼요? 완전히 살았어요 죽었어요? 왜 죽어? 아직 살아 있지 아직 죽은 건  아니지? 의를 행하고 있으니까 죽은 거는 아니지 죽을 수 있는 것이고 죽음의  침노를 항상 받고 있지. 그러나 완전히 딱 죽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는 완전히  살았습니다. 다시는 사망이 해할 수 없는 자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이것을 생각으로 자꾸 이 믿음을 견고하게 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된 것을 믿는 이 믿음이 견고해지도록 노력을 하고 또 나는  영생을 가졌기 때문에 영생 가진 것을 믿는 요 믿음이 견고해지도록 하고, 또  나는 이 고기덩어리 이거는 지금 이거 가지고는 영생 못 해. 혈과 육은 이것은  영생을 못 한다 했어요. 이러니까 이것이 신령한 몸으로 이제 부활하면은 그때는  영생해도 늙어지지도 쇠해지지도 안하는 그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이 부활을  소망하고 있는 이것을 자꾸 우리는 이 믿음을 견고케 해야 됩니다. 견고케 해서  그러면 부활의 이 소망을 견고케 하면은 견고하게 된 그 완성된 증거가  무엇입니까? 완성된 증거가 뭐이요? 늙고 쇠해지고 죽는 거게 대해시 자기는  상관없는 사람이 됩니다. 또 영생을 자기가 자꾸 생각해서 견고한 믿음을 가지 게  되면은 땅위에 있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일이 없는 이이 됩니다. 또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된 것을 자꾸 이 믿음을 견고하게 하면 사물에 대해서 담대하고. 이  피조물에게 대해서 자기가 월권 남용으로 실수할까, 교만해서 실수할까 두렵고, 또  하나님 영광을 가룰까 두렵고 하는 그 외에 딴것은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자꾸 연습을 해요. 나는 그거 잘 모르는데 언제 OOO목사님이 여기  설교할 때 내가 들으니까 겨울이 되면은 그 곰이 이제 동면을 하고, 겨울에  들어가서 누워 자는데 겨우내 누워 자다가 해동이 되면 그때 털털 털고 나오는데  겨우내 안 먹고살라 하니까 여간 좀 살이 쪄도 들어가면 그만 말라서 죽게 되기  때문에 그 꿀밤이니 따먹고 저 높은 나무에 가서 툭 떨어져 보고 떨어져서 공  모양으로 툭 튀어 올라가는 것이 아프지 안하면은 이제 됐다 하고서 굴로 기어  들어가고 아프면 또 다니면서 따먹고 이래 가지고서 살이 되게 쪄서 딩글딩글 쪄  가지고서 공 모양으로 이래 아무리 높은 데 떨어져도 하나도 아프지 안하면 이제  됐다 하고서 굴로 기어 들어간다고 하는 그 말을 하는 걸 내가 비유하는 말을  들었는데,  이와 같이 우리도 지금, 공산주의가 앞으로 될란지 모릅니다. 이거 뭐 소망이 참  없어. 뭘 봐도 소망이 없어. 언론계는 OO일보가 조금 생기가 있는 것이 보여지고  삼O 중에 그 한 O이 조금 생명이 있는 것이 보여지지 다른 데는 소망이 없어 이  뭐이 될란지 몰라요.

 뭐이 될란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곰이 그저 굴에 들어갈 때에 자기는 먹어  가지고 공같이 툭 튀어 올라오도록 되면은 되는 것처럼 우리는 모든 이 피조물과  어떤 사건을 만나도 담대할 수 있는, 이 두려움이 없는 담대할 수 있는 이 사람이  됐나 안 됐나 자꾸 이런 것 저런 것을 시험을 해 봐야 되겠습니다.

 또 해 보고 자기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룰까 두려워하는 것, 자기가 교만해  가지고서 실족할까 두려워하는 것이 두려움이 있어야 됩니다. 두 가지 두려움 두  가지 담력이 한테 합해야 이것이 온전한 하나가 되어지는 것이지 두려움만  있어도 안 되고 담대만 있어도 안 됩니다. 또 영생을 내가 가졌나 안 가졌나 이  시험은 어떤 죽음이 와도, 공산주의의 뭐 장기간의 고문과 고형, 독약 독침 감옥에  가두는 거 어데 저 무인지경에 어데 거석하는 거, 여게 무슨 병원이더라? O 무슨  병원? 아따 그 뭐이지? 여기 주기철 목사님 장사 지낸 장로 요 아래 있는데, 어?  OOO. 옳지 OOO. OOO장로님 그분이 한번 잡혀 가 가지고서 저게 인민군에  끌려가 가지고서 참 무인지경에 갔다는 그 얘기를 내 가 잠깐 좀 들었습니다. 뭐  그런 일이 있어도, 그런 일이 있어도 두렵지 안하고 또 그런 죽음을 가지고서  어떻게 협박을 하고 어떻게 한다 해도 두려움이 없고, 영생을 가진 자. 그러니까  그런 게 내게 복만 됐고 유익만 됐지 수입만 됐지 하나도 나를 해할 수 없다는  그러기 때문에 천상 천하에 모든 것이 하나도 해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해할 수 없는 평안한 세계에 사는 것이 우리들이오.

 이래서 영생을 내가 믿나 안 믿나 이것으로서 죽음을 대해서 나를 시험하고 또  이 몸뚱이가 병들고 깨지고 늙어지고 하는 여게 대해서 부활의 신령한 몸을 내가  믿나 안 믿나 대해서 그런 것에 대해서 강하고 담대하고 평안함을 가지는  것으로서 우리가 시험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고 우리가 제사장직이라 하는 것은 이 제사장직도 자꾸 생각을 해야 돼요.

생각하면 천하에 직업 쳐놓고 시기 안 하는 직업이 없습니다. 미워 안 하는  직업이 없고 대적이 없는 직업이 없어 이런데 이 제사장직은 마귀 그놈이  시기하지마는 천상천하 영월 무궁에 제사장직보 다도 더 좋은 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고 생각해요 없다고 생각해요? 천상천하에 제일 좋은 직장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한번 손 들어 봐요. 이거 뭐인지 모를 거라. 예수님이  제사장직했어요. 예수님이 제사장직 예수님이 제사장이오. 예수님 굉장한 욕심도  있는 어른이고 굉장히 지혜롭게 살았습니다. 그분 같이 지혜롭게 산 분이 없어.

그분이 제사장직을 차지했어 제사장직을 성공을 했어. 이러니까 하늘에 있는 거와  땅에 거와 땅 아래 있는 것들이 무릎을 꿇고 막 주라고 시인하고 이렇게  밤낮으로 찬양을 하지. 제사장직. 또 선지직, 이것도 뭐 여러분들이 자꾸 생각하면  알지 그것을 자꾸 말할 게 아니라. 선지직 하나님의 충만을 피조물에게 자꾸 갖다  주니까 좋아할 거 아니겠소? 하나님의 충만, 내것 가지고 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충만을 갖다 주는 거라. 그러기에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보다 복 있다'  하는 건 이게 자기에게 있는 무슨 돈을 주는 거 그런 것도 있지마는 그까짓 거야  줘 봤자 몇닢푼치 안 됩니다. 하나님의 충만을 저 갑이라는 사람에게 줄라면  어떻게 갖다 줍니까? 봉투에 싸다 줘야 돼요? 추럭에다 실어다 줘야 돼요?  하나님의 충만을. 저 누구를 하나 말해 볼꼬? 누가 아는 사람, 이름 아는 사람  없다. 이름 아는 사람 하나도 없네. 보자, 저 하나님의 충만을 요 OO교회 있던  OOO씨, OOO씨에게 갖다 줄라 하면 추럭에다 실어다 줘야 돼요? 보따리에 싸다  줘야 돼요? 어떻게 줘야 돼요? 어떻게 줘야 돼요? 하나님의 충만을 저  OOO집사님에게 갖다 줄라면 어떻게 줘야 돼요? 몰라? 어떻게 갖다 줘야 돼? 허,  이지 모두 다. 알아 봐 어떻게 갖다 주는지 몰라? 저 OOO전도사님 알아 봐.

어떻게 갖다 줘? 보따리에 싸다 줘? 선지자로 줘야 돼. 하나님의 뜻을 그에게  자꾸 전해 주면 전해 주는 그 뜻대로 하면 막 하나님의 충만이 다 가. 이러니까  선지직보다 더 좋은 직이 없어. 왕직보다 더 좋은 직이 없고.

 이러니까 양산동에 기도하러 가거들랑은 가거든 무조건 '하나님 우리 아버지'  이래 불러 놓고 또 아버지가 뭣 때문에 됐노 어떻게 뭐 어떤 원인으로 됐나,  아버지 아들이 놨으니까 권세가 얼마나 있나, 무슨 세력이 있나, 또 무슨 부자를  가졌나, 또 어떤 면에 조심을 해야 되겠나 어떻게 살아야 되겠나?  이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영생, 신령한 몸으로 부활, 요 세 가지를 놓지  안하고 굳게 잡으면 땅위의 생활이 다 평안하고 완전입니다. 아무에게도 굴할  것이 없어. 월권 남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비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 가지 직책을 자기가 가치를 알면 이 세상에서 뭐 취직할라고 날뛸 이유가  없어. 이 세 가지 직책보다도 더 좋은 직책이 없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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