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선교회 거룩한 행실-예수님의 피 속으로


1983년 6월 13일 월새

 

본문 : 벧후3:11-14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세상 지식에 대해서 증거하던 것은 다음으로 하고 어제 증거하던 것을 좀  덧붙여 증거해야 될 줄 알고 오늘 아침에 이 말씀을 봉독합니다.

 거룩한 행실, 거룩한 행실은 어떤 것이 거룩한 행실인가? 거룩한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거룩한 깨달음을 가져 그 깨달음대로 행동하는 것이 거룩한 행실입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세상에서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성인이라  성현이라 하는 말은 거룩하고 어진 사람들이라 그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거룩이라 말을 이종교에도 종교마다 다 쓰고 또 도덕 마다 다 쓰고 사상들마다  다 쓰고 있습니다. 어떤 주의든지 단체든지 크고 작든지간에 다 이 거룩이란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 상식적으로 거룩이라 하면 뭐 선한 것 좋은 것 깨끗한 것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라 그렇게 다 상식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거룩한 행실이라고 하면 너무 세상에 널리 쓰여지는 말이 돼 있고  또 너무 범위 넓게 다 이 거룩이라는 것은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이 거룩이  뭐인가? 이 거룩의 정의에 대해서 알기가 어렵습니다. 이 거룩을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종교가, 수많은 도 덕이 수많은 사상들이 다 말하고 있으니  어느 거룩을 표준으로 해서 그것을 따를까 하는 것이 문제됩니다.

 그래서 기독자들도 대개는 거룩이라 하면 깨끗하고 착하고 그저 의로운 것이라  그렇게 보고, 또 좀더 깨닫는 사람들은 '거룩이라는 것은 다 구별해 가지고서  참에 옳은 것에 도달한 그 깨달음과 행위가 거 룩이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라, 계시록 4장에 "거룩 거룩" 이 거룩한 하나님은  하나님이 영원 자존할 때는 거룩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비로소 예정하시고  창조하시고, 목적을 정하시고 그리고 난 다음에 이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모든 존재가 있은 지 후 이 존재와 구별돼 있다 이 존재와 구별돼서 이  존재보다 크다, 더 권위 있다, 더 참되다, 더 완전하다, 비교할 그 대상들이  있은 지 후에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 후에 창조된 피조물로 인해서 그분이 깨 끗해지거나  온전해지거나 더 좋아지거나 그렇다 말이 아니고 그게 있기 전에는 영원  자존자였는데 이제 창조함을 받은 모든 피조물과 이래 존재가 같이 있을 때에 이  존재와 이 존재는 구별돼 있다, 이는 이와 같은 것이 아니다 하는 거게서부터  거룩이라는 것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거룩은 자존하신 하나님으로 인하여서 정해진 이 거룩인데 하나님 자체에  대한 거룩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정해 주신 거룩입니다. 자존하신  하나님이 인간 수준에서 '너거 인간들로 말하면 이렇게 이렇게 구별해라.

구별해서 여기에 도달이 되면 너희들은 거룩이 된다.' 이래서, 하나님이 정해  주신 거룩이요, 또 하나님 당신이 거룩 하다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모든  피조물과 다른 영원 자존하신 절 대자 창조주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이렇게 구별된 것을 말하고, 우리에게 "거룩한 행실을  가지라" 그말은 땅위에는 수많은 사상, 주의, 지식, 행동, 모든 지식관이 있는데  세상에 모든 것이 이거는 이렇다 저렇다 만물관이 있는데, 만물은 이렇다 저렇다  이렇게 모두 사람들이 그 관점이 각각 다른데 "너희들은 내가 너희들에게 선포해  준 이대로 구별해서 이대로 온전에 도달하라 그것을 말씀하신 거룩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거룩은 우리가 구속함을 받기 이전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대로 그대로 우리가지식하는 것이 거룩입니다. 우리가 구속함을  받기 전, 구속함은 우리가 존재하기 전 예수님의 십 자가의 대속이 있고 또 그  얼마 후에 우리가 존재하고 예수님의 대속을 입었지마는 우리가 생기기 전 영원  자존하신 거게서부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식하라 하는 그대로 '하나님은  자존하시다. 하나님께서 목적을 정하셨다. 하나님이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예 정하시고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섭리하시고 도성인신 하셔 가지고  이렇게 타락에서 구속을 하셨다.' 이 구속하기 전까지의 모든 과정을 하나님께서  성경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그대로 아는 것이, 지식 하는 것이 그것이  거룩입니다.

 또 그리고 난 다음에는 '이렇던 것을 주님이 도성인신하셔 가지고 십자가의  이런 공로의 과정을 통과해서 사죄와 칭의와 화친의 이 생명을 얻게 됐다'  요것이 또 거룩입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의 대속을 입은 이후 영원의 미래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그대로 지식하는 것이 그것이 거룩입니다.

 그러기에 거룩은 간단하게 말해서 예수님의 피를 찾는 것이 거룩 이요,  예수님의 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거룩이요, 예수님의 피의 공로의 이 은총을  입어 사는 것이 거룩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내 피와 살은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라 내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에 다시 살아난다"  또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라" "너희들이 그리스도로 다시 살리움을  받았으면 이제는 소망을 완전히 바꾸어라" 과거에 그리스도의 구속을 알지  못하고 입기 전에 살던 그 사람은 하나의 육체인데 그것을 완전히 죽여버리라,  그래 가지고 새로 살아나라, 그렇게 말씀하신 말 씀들이 다 이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지식이요, 또 거룩한 깨달음이요, 또 이래 사는 것이 거룩한  행위입니다.

 그러기에 공부를 하든지, 어떤 업을 자기가 하든지, 어떤 처지를 만나든지 뭐  어떻게 어렵고 급한 처지를 만날지라도 거룩한 행실을 너는 가져라. 거룩한  지식을 가지고, 거룩한 깨달음을 가지고, 거룩한 행위를 가져라 하는 것은  어데서든지 네가 구속받기 전 자존하신 그 자존하신 분으로 말미암아 네가  존재하고 타락하고 이렇게 비참하게 된 무엇으로 말미암아 지음받은 것이 어떻게  해 가지고서 타락해서 어떤 비참을 가진 그 과정을 네가 어데서든지 알고 그대로  깨닫고 그런 자인 줄 알고 네가 행동해라.

 거게서 예수님의 대속을 네가 입어 대속 입은 전에는 어떤 자였는데 대속 입은  후로서는 어떤 자 됐다. 그것을 네가 바로 알고 깨닫고 그대로 네가 그자로  행동해라.

 또 예수님의 대속을 입은 이후 네 소망이 무엇이냐, 이로 인해서 지극히 큰  소망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이런 지극히 큰 소망을 가진 자니  네가지극히 큰 소망을 가진 자로 살아라, 행동해라, 이것을 가리켜 거룩한  행동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거룩한 행실은 경건을 이룹니다. 경건이 조성됩니다. 경건이 조성되는  것은 한 분만 되신, 한 분이신, 영원 자존자이신, 절대 자이신 완전자이신,  그분으로 말미암아 모든 생겨진 것들이 생겨진 이것을 망각하고 이 거짓말 하는  원수에게 꾀여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겨진 것이 그분을 버리고 다른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겨졌다는 인식을 가지고 주인을 바꿔서 멸망받게 되는 그 주인은  사탄인데, 그것이 죽 이고 제가 왕노릇으로서 했는데 거게서 예수님이  대속하셨기 때문에 거게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그것에게 매이게 되고 그것의 권세 아래 눌리게 됐으니 그것이 권 세가 있는 게  아니라 그놈이 하나님의 지공하신 절대적인 이 법을 등을 대 가지고서?  '법적으로 이렇게 된 자들 아닙니까? 이러기 때문에 이 것은 내게 속했고 이것은  내것이 아닙니까?' 그 법을 의지해 가지고 죽이고 살리고 하는 그런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하나님의 권능을  '하나님이 이렇게 말하지 안했습니까? 이렇게 법을 정하지 안했습니까?' 그 법을  등을 대 가지고서 법을 어긴 자들에게 대해서 권세를 부리고 이렇게 하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 법이 정죄한 것을 다 형을 받고 또 그 법이 요구하는 요구에  만족을 다 이루어 버 렸습니다.

 그러니까 이 법을 어긴 댓가를 내서 해결을 지욋고 이 법이 요구하는 것을 다  완전히 이루어서 해결을 지웠기 때문에 로마인서 8장 l절 이하에 보면 "사람은  육체가 달렸기 때문에 이루지 못하는 그 율법의 요구를 예수님이 율법의 요구에  만족을 이루었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래 가지고 다시 자존자 조물주 모든 것의 원인되신 그분에게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그분에게로 돌아가서, 옛날 조물주와 자기와의 관계 있던 그 자리가  본지위인데 본지위에서 선악과 먹음으로 말미암아 본지위에서 타락했습니다.

본지위를 뻣기고 본지위에서 쫓겨나고 본 지위에서 타락된 이것을 다시 본지위로  쉽격시켜서 본지위에 올려 앉혀 놓았는데 이것은 두 가지니,  하나는 이 지위가 영원히 고정된 지위가 되어 있는 이것을 가리켜서 영생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영생하는 생명으로 우리를 중생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영  이요, 진리와 성령으로 영원 불변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난 것은 영이요 "물과  성령으로 다시 살아났으니 영으로 난 자는 영이요 육은 아직까지 죄 아래 있다"  로마인서 8장에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주격인 영은 이 지위를 완전히 회복받아 불변적으로 받았고 심신으로 된  이 육은 아직까지 예수님의 이 대속을 입지 못하고 입을 수 있는 자 되어 있는데  입지 못하고 법적으로만 입고 있습니다. 있 으니까 아직까지 "죄 아래 있다"  이래. 법적으로는 입었지마는 실질 적으로는 죄 아래 있습니다.

 있는데 죄 아래 있는 이것이 현실 현실을 만날 때에 법적으로 입고 있는 이  대속을 그 현실에서 벗지 안하면, 벗지 안하면 이 대속은 자기가 완전히 입은 자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법적으로 입혀 놓은 이 대속을 실상적으로 우리에게  입혀서 이 심신이 대속을 입도록 하는 것입니다.

 대속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가려졌고, 또 가려진 그것을 틔었고, 피조물이  피조물 제 자존자처럼 제가 능동적으로, 언제든지 피조물은 그분에게 피동되는  것으로 살아야 될 터인데 피조물 이것이 제가 능동적으로 행동했던 그게  불의인데 능동적으로 행동했던 이것을 예수님이 다 댓가를 받으시고 이제는  절대자에게 피동되는 자로 재 연결을 시켜 놓은 그것이 칭의입니다. 이것을 영은  입었지마는 심신으로 된 이 육은 벋적으로만 입었는데 이 법적으로 입은 것이  언제 이것이 완전히 입는 게 되느냐 하면 현실을 만났을 때에 법적으로 입은  것을 벗지 안하면 이제 실상으로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법적으로 이루어 놓은 구원을 실상으로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현실을 주시고, 이 일에 우리로서는 감당 못 하기 때문에 성령과 진리와  언제든지 피 이 셋은 하나가 돼 가지고서 우리를 이 대속의 공로를 입히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을 깨닫고 대속하신 대속을 받은 이전 상고, 영원 전 상고,  자존하신 분으로부터 지음받은 그 과정을 깨닫고 타락 과정까지 다 자기가  깨닫고 어떤 멸망 가운데 들어 있는 자기가 예수님의 대 속으로 인해서 구속함을  받아 본지위가 다시 회복됐는데 이 회복은 처음 아담의 지위와 다른 것은 아담의  지위는 그 지위가 변동될 수 있는 지위지마는 변동될 수 없는 지위로 구속한  것이 이것이 예수님의 구속인데 이 일이 영에게는 됐지마는 육에게는 현실  현실을 닥쳐 가지고서 그것이 되어집니다.

 그러기에 이것을 깨닫고 대속받은 자로 자기가 살고 벗지 안하고 대속을 입고,  대속 받은 자가, 대속 입은 자가 어떤 지극히 큰 소망을 우리에게 주어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했다" 하나님의 신성과 꼭 같은 그런 자로서 살아 만물을  유업으로 받고 만물을 발 아래 밟고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은 발등상이니라'  하는 것은 교회 밑에 있는 위치를 가리켜서 말합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 교회가 있다. 만물 안에 교회가 있다  말은 이 물질적으로 밖에 것은 크고 안에 것은 작지 않습니까, 작은 그릇 속에  큰 그릇이 못 들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그게 아니고 만물 안에  있다 그말은 만물보다 존귀한 자리에 있다 그말입니다.

 만물 안에 교회가 있고 교회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진리가 있고 하는  그와 같은 그런 성격의 것으로서 만물 안에 있으면서 만 물에게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케 하는 것이 교회다 그말입니다. 그러기에 거룩한 행실을 네가  가지고 경건에 도달하도록 해라. 이 절대자에게 귀속되도록 해라. 거게서 나온  것이, 거게서 나왔다 말은 거게서 유출됐다 말이 아닙니다. 요것 또 인제  잘못하면 이단으로 빠지기 쉽습니다.

 그에게서 나왔다 말은 그분이 지어서 그분의 능력의 역사로 우리가 생겨졌다는  말이요 그분의 쪼갱이가 갈라져 가지고 그분의 분자가 우리가 돼 가지고 있다는  것 아닙니다. 신학중에는 '그분의 분자가 우리다, 그분의 뽀스라기가 내려와  가지고 우리가 됐다.' 이렇게 하는 설들이 있는데 그거는 성경적이 아닙니다.

그분의 창조로 말마암아 우리가 생겨졌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의 원인이요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겨졌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겨진 이것이 그분을 버리고 엉뚱한 곳에 가 가자고서  영원한 사망하게 된 것을 다시 이것을 복귀시켜서 그분에게 소속을 다시  재소속을 시켜서 연결시킨 이것이 예수님의 대속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대속은 입었고 지금 입고 있다. 기본적으로 입은 것은 꼭  같지마는 자기가 건설적으로 자기 인적 요소를 가해 가지고 입는 이것이  건설구원인데 집짓는 걸로도 비유하고 여러가지로 비유 했는데 이게  건설구원인데 이 건설구원은 자기의 노력과 하나님의 역사와 이 둘이 합해  가지고 이루는 것인데 이거는 천층 만층이다. 사람들은 차이가 많이 있다. 많이  있는데 하늘나라에 간 기본구원은 꼭 같지마는 구원과 구원의 차이가 있는 그  영광의 차이는 순전히 그 행함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인간이 건설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점에 대해서 루터파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에게 구원을  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거부 안 하면 된다.' 이것이 루터파가 말한  교리입니다.

 그 다음에 요한 웨슬레가, 요한 웨슬레는 감리교 머리인데 요한 웨슬레는  깨닫기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본구원 주시고 이 건설구원 주시는 건설구원은  하나님하고 사람하고 둘이 힘을 합해 가지고 이룬다.' 그러기에 이거  합동설입니다. 합동해 가지고 이루어진다 이랬는데,  칼빈은 '이는 전적 은혜라' 이래서 이게 좀 다릅니다. 전적 은혜는 그거는  껍데기로 보면 사람하고 하나님하고 같이 어울러 가지고 한다, 사람이 거짓말 안  하면 된다 이렇게 보여지나 실은 사람이 거부하는 것도 하나님이 거부하게  하시기 때문에 거부한다. 또 둘이 합작하는 것도 하나님이 합작을 하되 이  사람에게는 이만치 합작, 다른 사람에게는 요만치 합작, 합작에 차이 있는 것도  순전히 그것이 하나님 한 분의 주권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다 결정되고 조정된다.

 이러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한 분의 은혜다. 그러기 때문에 궁극적  은혜라 전적 은혜라 이것을 주장한 것은 칼빈 주장이 장로교 교리인데 이것이  바로 된 것입니다.

 그 칼빈이 위대한 것은 어떤 점이 위대하냐? 칼빈이 위대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칼빈은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발견해서 '하나님의 주권으로써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 이 주권 발견했기 때문에 그 교리에 루터파 교리,  요한 웨슬레의 교리 이 교리들과 다릅니다. 루터파가 있고, 한국에는 별로  없지마는. 또 요한 웨슬레파는 여기 감리교는 요한 웨슬레파입니다. 이 교리가  좀 다릅니다. 그런데 칼빈이 정확한 교리를 말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발견한  그것을 뿌럭지가 돼 가지고서 그와 같이 했습니다.

 그러나 칼빈이 인론에 대해 가지고는, 아레도 어떤 사람이 하나 썼는데. 칼빈은  보면 사람의 영을 그는 똑똑히 발견을 못 했습니다. 그 영은 그저 이성과 같은  이성적 영이라, 영이라는 것은 성경에 영이라고 해 놨기 때문에. 영은 어떤  것이냐? 영은 이성적 영이라. 인간의 그 이성과 같은 것이 영인데 영이 이성이요  이성이 영이다. 또 그 영은 도덕적 영이다 이렇게 말을 해 놨고.

 도덕이나 이성이라 하는 것은 벌써 나와서 인간의 마음 부분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육에게 속한 것인데, 육에 속한 것인데 영은 인간의 심신도 아닌  존재라. 그러기에 타락 후에는 순전히 육으로만 산다. '사람이 육체가 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이 영원히 거게 같이 있을 수 없게 됐다' 하는 그것은  사람이 범죄함으로써 심신의 사람이 됐고 영은 완전히 하나님과 끊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영 안에 계시는 게 하나님이신데 영이 죽었기 때문에 그들 안에  있을 수가 없다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생각은 성령을 거스리고' 하는 육체의 생각이라면 육체의  생각은 어떤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냐? 이 고기덩어리를 가리켰다 이렇게  말하는데 고기덩어리는 생각이 없습니다. 생각이라는 것은 벌써 마음까지 다  포함된 그것을 가리켜서 육체라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언제 여게 O목사라고 여게 다니는 O목사 그분 이름이 뭐이지? O 뭐?  O목사님이 와서 말하는데 고신에서 교수들이 말하기를'인간을 삼분설로 하지  말고 이분설로만 하면 된다.' '이분설로 하면 성경에 영과 혼과 골수라고  말했는데 혼은 어디로 붙습니까?' '어쩠든지 그만 영 육 둘뿐이다. 영 육  둘뿐이다. 그런데 육은 고기덩어리요 고기덩어리 아닌 것은 영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마음을 영에다 갖다 붙입니다. 마음을 영에다 갖다  붙여서 이분설로만 그만 말해야 된다, 삼분설로 말하지 말고. 성경에 삼분을  말해서 '사람의 혼은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내려간다 짐승도 혼이 있는 것을  말을 했습니다. 또 사람은 영, 혼, 이 모든 고기덩어리 이렇게 돼 가지고 있다"  성경에 또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이분설로만 주장하는 사람들은 고기덩어리 또 영혼 이 둘이기  때문에-'그러면 이 고기덩어리는, 마음이라는 이 모든 생각 이라는 이성이라는  것 비판이라는 그런 것이 고기덩어리에는 있나 없나? 고기덩어리에는 없다.

그러면 성경에 '육체의 생각은 성령을 거스리고' '육체의 소욕이라' 육체에 거게  마음 없으면 무슨 욕심이 있으며 뭐 마음이 없으면 어떻게 성령을 거스릴 것이  있으며 그렇겠느냐? 이러기 때문에 이 육체에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안했느냐? 이러니까 이 마음이 육에 속한다.이분설로 하려면 영은 영이고 육은  마음과 고기덩어리 둘이 합해 가지고서 육이다.' 이래 가지고 이제 그 가운데  마음을 이리 붙이고 이리 붙이는 데에서 달라집니다.

 그러기에 이 고기덩어리로 안 붙이고 영으로 붙여서 영이 마음이요 마음이  영이라, 양심이 영이요 영이 양심이라 이러니까 암만 중생됐 지마는 중생되고 난  다음에 마음은 하루 열 번 백 번도 죄를 범하기 때문에 '이거는 중생된 영이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 설이다.' 그렇게 말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차차 차차 하나님이 역사하셔서'중생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 하는  그것이 지금은 인제 숫자가 많아져갑니다. 지금은 숫자가 대단히 많습니다.

많아서, 지금은 가만히 두니까 하나님께서 성신으로 감동시켜 깨닫게 해 주셔서  '중생된 영은 범죄 않는다.'? 중생된 영이라 영은, 영만 중생됐다. 육은  중생되지 안했다.', 요렇게 갈라진 사람들은 그만'중생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  담대히 말하는데 마음을 거기다가 붙여 놓은 사람은 '실질적으로 죄를 짓는데  어떻게 중생된 영이 죄 안 짓는다 하겠느냐? 내가 중생됐지만 내 마음으로 하루  열 번도 죄를 더 짓는데' 이러기 때문에 그 용기를 못 얻습니다 요게 갈라지기를  잘못 갈라 가지고서 혼합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영과 육이 예수님의 구속을 입은 것이 영은 단번에 또 이 육은  증복적입니다. 이 육은 종합체이기 때문에 중복이 돼야 됩니다. 우리 마음은  마음에 그 세포가 천도 만도 억억만도 넘습니다. 또 이 고기덩어리의 이 세포도  억억만도 넘습니다.

 그러면 그게 전체가 종합해 가지고 한덩어리가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게  서로 의논이 맞을 때는 힘이 있고 의논이 안 맞아서 이 둘이 서로 삼 갈래 사  갈래 뭐 십 갈래 백 갈래로 이래 대립되는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이 구속을  입는 데는 그때 그때 그 하나 하나가 그 현실에서 구속을 입어서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또 죽은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있는 모든 지식은 다 그 지식은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탄을 통해서 다 궁극적으로는 작 용했지마는 끊어져 있기  때문에 이거 세상 지식은 어떤 거냐? 생명이 없는 죽은 것이요 다, 죽은 것이요  다 썩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지식은 세월이 자나가면 지나갈수록 다 자꾸 썩고 썩고  썩어서 예수님이 재림할 때에는 이 지식이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까 하나도  없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이 지식이 다 멸해진다는 것은 그때는 지식의  기능이 작용이 하나도 없이 완전히 다 그것은 유황불 구렁텅이로 다 몰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썩은 데에 생명을 심으면, 이 옥토에 심은 것과 박토에 심은 것과  다른 것처럼 이 세상 지식을 많이 가진 데에 생명이 심겨진 것과 세상 지식이  아주 박토같이 조그매 있는데 심어진 것과 성장률이 다릅니다.

 생명이 심어진다 말은 하나님과 연결이 된 그 지식이 그 속에 심어져서  하나님과 연결된 그것이 세상 지식을 빨아먹기만 빨아먹으면 굉장히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지 말라는 위험하다 하는 그말은, 조심하라 그말은 이제 이  생명을 가지고 이 지식 속에 심어야 지식이 이용이 되어지고 좋은 거름이 되어서  성 장되는데 이 망령되게 산 지식 하나님과 연결된 연결은 버려버리고,  그만 그것을 보니까 크고 너르고 이러니까 이 생명을 버리고 거기 가 가지고서  그것으로만 되어지기 때문에, 중생된 생명은 영은 버리지 안하지마는, 심신  이것이 하나님과 연결을 가지고 거기 심어져야 그걸 막 이용해서 먹고 자라는데  연결된 심신이 연결 버려버리고 가니까 지식에게 삼키워져서 이것은 점점 음행의  포도주가 돼 가지고 하나님과 자기와의 갈라지고 그것과 한덩어리 돼지니,  생명 없는 씨는 들어가면 땅속에 들어가면 썩습니다. 생명이 있으면 겨자씨는  작은 것이지마는 아무리 큰 땅 속에 들어가도 그 땅을 삼키고 이용해서 자라지  거게 삼켜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말하는 것 인데.

 이제 우리는 거룩한 행실, 자기가 공부하면서도 '내가 이 시간 거룩을 잊어  버릴라?' 거룩을 생각하는 것은 '나는 근본 어떤 존재다. 어떤 존재가 어떻게  타락해서 어떻게 비참한 존재였었다.' 이것을 생각하고, 그랬는데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다시 본지위를 회복했다.' 이 러니까 이 본지위를 다시  뻣기지 안해야, 어떤 현실에서라도 뺏기지 안해야 이 회복이 자기 것이 된다.

 이 자리에서도 공부하면서'내가 이 지위를 뺏기면 안 된다." 이 지위, 회복된  이 지위를 뼛기지 않는 것은 사죄 받은 자로 사죄를 지금법 적으로 받았으니까  사죄, 법적으로 받은 이 사죄를 입고 칭의를 입고 화친을 입고 이것을 벗어 주지  안하면 됩니다. 이것을 벗어 주지 안하면 그 사람의 공부하는 것은 어짜든지  공부를 할수록 그것은 더 커지고, 더 옥토가 되어지고, 더 땅이 넓기 때문에 더  많이 무성하게 자랍니다.

 그러나 이것을 버리게 하는 것을 가리켜서 음행의 포도주라, 이것을 버리게  하는 것은 본남편과 같은 하나님을 버리고 간부와 같은 세상과 짝이 되어서  하나님을 버리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음행의 포'도주라 그렇게 세상 지식을  요한계시록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거룩한 행실이 어떤 것이라 하는 그 정의를 똑똑히 잡고, 잘못하면 이  정의를 불교에서 말한 것 모든 것 말하는 '거룩한 행실이 어떻게 하는 게 거룩한  행실인가? 내가 착하게 하는 것이, 마음 깨 끗하게 먹는 것이, 옳게 하는 것이'  이러면 천하에 가득한 거룩한 행 실이지마는 그건 다 죽은 것이요 썩은 것이요  소용이 없습니다.

 거룩한 행실의 정의 바른 것은 예수님의 피공로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의 피공로를 베풀게 됐느냐? 이 예수님의 피공로 입기 전은 내가 어쨌으며  예수님의 피공로를 입힐 때에 어떻게 해서 입혔느냐? 그러면 이 피공로를  입었으니 내 희망이 뭐 이냐? 내 희망이 이러하다. 그러면 예수님의 피공로를  내가 얼마나 힘들여 보존 하겠느냐?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버려도 이 피공로는  버려서는 안 된다.' 하는 이 깨달음을 가지고 공부를 하면 공부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 그말이오. 사업을 하면 사업하는 것이 나쁘지 많다 그말이오. 그러나  이것을 잊어버리면 죽고 썩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십 분 기도 후에 권찰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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