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보행

 

1985. 1. 27.주일오후

 

본문 : 마태복음 14장22절-33절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 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 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오전에 신명기 28장 1절 이하의 말씀을 봉독하고 거게 대한 도리를 우리가  생각 했습니다. 오후에도 그와 같은 신앙면의 가르치심을 기록해 주신  말씀입니다.

 이 제자들은 해변에서 자랐고 또 일찍부터 어부에 숙달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라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그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적으로 그들을 먹이신 후에 제자들을 재촉해서 앞서 바다 건너편으로 가라  하시고 예수님은 그 무리들을 보내고 산으로 따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배를 타고 바다 건너로 가라 하시는 그 주님의 명령을 듣고  즉시 출발해서 배를 타고 바다 건너로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얼마쯤 바다  가운데로 항해해 가다가 의외에 바람이 일어서 배가 가지를 못하고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위로 걸어서 찾아가셨습니다. 그들이 풍랑을  만나서 심히 놀라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가시니까 제자들이 그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유령이라 유령이라 말은 물귀신이라 말입니다. 아 이 물귀신이 저게 온다.'  자기들도 본능적으로 고함을 지르면서 심히 다급해 했습니다. 그때에 주님이  '내로라 두려워 하지 말라' 하는 그 주님의 음성이 그들에게 들려졌습니다.

그럴 때에 제자들도 다소 마음에 좀 두려움이 가라앉고 그 아주 민첩하고 날쌘  그 베드로는 그 말씀을 듣고 즉시 주를 향하여 보았습니다. 보니까 물위로  걸어오시는 분이 내로라고 하는 그 음성을 듣고 베드로가 말하기를 '만일  주님이사거든 나를 물 위로 걸어서 주님에게로 오라고 명령해 주십시오' 주님이  '오라' 명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그 명령이 떨어지자 즉시 배에서 물에 내려서서  예수님에게로 걸어가고 있읍니킥. 걸어가다가 바람이 심히 이니까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에 빠져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는 다시 주님을  불렀습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면서 부르짖을 때에 주님이 오셔서  손을, 내밀어 잡아 올리시면서 하는 말씀이 '적 게 믿는. 자여 왜의  심하였느냐? 그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이라시면서 들어올려  가지고 함께 배 있는 대로 향하여 배에 올랐습니다. 배에 오르시니 '그만  바람이 잔잔해지고 배는 순조롭게 주님이 명하시던 그 목적에 가게 됐습니다.

그것을 본 제자들이 '참으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로소이다 하는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이것이 본문에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성경에는 사실을 빠짐없이 다 구비하게 기록한 것이 아니고 참 다 기록 할라고  하면 세상에 두어도 둘 곳이 없을 만침 그렇게 복잡한 것을 신구약 66권에  간추려서 우리 구원 도리를 기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성경 안에는  성령님의 내재적 감화 역사가 있어서 요만큼만 기록해도 그 안에 있는 세밀한  것은 성신의 감동으로 알게 해서 우리 구원을 잘 이루어가도록 그렇게  하십니다. 여게서 우리가 배울 구원의 도리가 여러 각도로 심히 많습니다.

그러나 그중에 오전에 우리가 들은 말씀과 같은 그런 각도의 말씀을 여게서  생각해 볼려고 합니다.

 제자들이 처음에 출발할 때에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바다 건너로 앞서 가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그때에 배를 타는 어부들이기  때문에 배를 타고 건너갔습니다. 배가 없는 이스라엘은 홍해에서 바다 건너로  가라 하실 때에는 배도 아무것도 없는데 제사장들이 앞서 물 위로 들어섰을  때에 홍해 바다는 갈라져 가지고 육지같이 건너가게 됐습니다. 우리가 조브랍게  생각하면 '아무래도 주님이 바다 건너로 가라고 하시는 그 명령에는 배가  없었으면 주님의 명령은 거절당하고 말았지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고, 그때에 배가 없으면 그들이 주님의 명령이 바다  건너로 건너 자라고 했으니 물 위로 걸어서 가게 되든지 날아가게 되든지  그러면 그 갈릴리 바다가 갈라져 가지고 육지로 건너가게 되든지 주님이 가라  하셨으면 가게 되는 것이 그것이 성경입니다.

 없는 가운데에 우주의 수많은 것을 만드신 그 창조를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없는 것이 다 생겨졌습니다. 그러면 없는 것이 생겨지기도  했는데 만들어 놓은 그것이 이렇게 저렇게 요동되는 그런 일은 주의 말씀에 안  될 리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배가 이미 있었고, 또 그들은  어부들이기 때문에 배를 타고 가야 될 줄 알고 배를 타고 나섰습니다. 배를  타고 나섰는데, 그 배가 수리를 갔다 이랬습니다. 우리 나라 이수(理數)로  말하면 수십 리를 말합니다. 수십 리 바다 가운데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차차 차차 풍랑이 일어 가지고 그들은 조금도 전진하지 못하고  풍랑으로 인해서 심히 두려워 놀래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찾아오셔서  무서워 말라 하는 그 말씀을 하시고 찾아오신 것을 보아 그들이 만일 주님이  오시지 안하고 그대로 뒀으면 그 풍랑속에 어떻게 큰 곤욕을 당할 만한 그런  어려움이 아니었겠나 하는 그런 생각을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여게서 그 제자들이 배타고 가는데 처음에는 잘 갔었는데 어떻게 해서 뜻밖에  풍랑이 일고 배가 조금도 전진하지 못하고 곤욕만 당했을까 하는 그것을 우리가  여게서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 성경 연구요 그것을 발표하는 것이 성경  해석입니다.

 성경 해석은 각자들이 자기가 깨달은 대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해석 한  것이 잘못됐을 때에는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스승된 사람은 받을 심판이  크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보면 예수님이 배 위에 올랐을 때에 뭐 예수님이 풍랑에 대해서  아무런 호령친 일이 없었습니다. 배에 올라서니까 제자들에게 들어와서 배에  같이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이 있으니까 고만 풍랑은 잔잔했습니다. 다른 데는  보면 예수님께서 풍랑에게 잔잔하라고 그렇게 명할때에 바다 물은 순종으로  잔잔해진 일이 있습니다마는 여게서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없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하니 풍랑이 잔잔해졌었습니다.

 요런 게 앞뒤를 요렇게 해서 이루어진 것은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영원전부터 예정적으로 요렇게 모든 것을 조직하고 예정대로 그대로  모든 것이 성취되어지는 그것이 하나님의 예정이요 창조인 것입니다. 우연히  바람이 이르렀다, 바람이 잔잔했다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모든 성경이  가르치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봐서 제자들이 처음에 나설 때에는  주님이 바다 건너로 건너가라 하셨다. 그러면 오병 이어로 그들이 평생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 제자들의 마음에는 예수님 한 분으로  마음에 흐뭇했고 가득 찼고 예수님 한 분이면 뭐 다 됐다. 모지랄 것 없다.

그들은 그 마음에 예수님 한 분으로 가득 차서 있었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바다 건너로 건너가라 하신 그 말씀 이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지상 명령이겠고  또 그 명령은 절대 권위 있는 명령인 것을 그들이 인식했었을 것입니다.

 이랬는데, 그때는 나설 때에 배가 순순히 잘 가다가 차차 차차 바람이 더  심해지고 배는 안 가지니 우연히 바람이 불었다고 그렇게는 우리가 볼 수 없고  바람 부는 것도 영원전 주님이 예정하신 그대로 바람이 불었으니 전지자가 이  일을 설계하실 때에 계획하셨을 때에 무엇 때문에 바람이 서서히 일어났고  그들은 가지 못했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알기 쉬운 그 깨달음을 가질 만한 그  내증이 있습니다. 그 자체에서 증거해 주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 제자들이 처음에 갔을 때에는 그저 예수님은 따로 산에 기도하러  가셨지마는서도 예수님이 저희들과 함께 계신다는 예수님의 이 은혜속에  예수님의 품속에 예수님의 통솔 속에 예수님의 이 슬하에 예수님을 모시고  저들이 있다는 그 확신이 그들에게 가득 찼었을 것입니다. 또, 주의 말씀은  그들에게 확고하게 아무것도 들리지 안하고 주님의 명령이 '건너가라' 요  명령에만 그 귀들과 그 정신은 기울어져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모든 성경을 연결시켜서 볼 때에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셨고  주님의 명령 하신 명령을 그들이 듣고 간직하고 있고 주님이 명령 하신  명령데로 할라고 했으니 그 일은 형통하다, 거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다 하는  것이 다른 모든 성경에 증거이니 그들이 주님이 같이 계시는 것과 또 주님의  말씀과 이 둘을 생각하고 믿고 한 그 믿음과 생각과 순종 이것으로 인해서 배가  수리나 순조롭게 갔었는데, 그러면 갔으면 가지 왜 가다가 그렇게 이외에  풍랑이 일고 그런 방해물이 있고 중단이 되었을까? 그러면 그들이 나중에 그  결과를 보아서 주님이 물 위로 걸어오시니까 주님은 허퍼서도 생각하지 안하고  '물귀신 온다' 하면서 고함지르는 걸 봐서 주님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그들은  그저 노를 저어서 바람을 피해서 어떻게 갈려는 그것만 생각했지 주님은 그들이  차차 차차 배타고 가는 가운데에서 노젖고 저거끼리 이야기하고 이라다 보니까  생각도 딴 데로 기울어졌고 또 주의 명령도 차차 흐미해졌고 또 자기들이  배젓는 거기에만 열중되었고, 이라다 보니까 주님과 주님의 명렁을 다  잊어버리자 풍랑으로 배는 조금도 전진하지 못한 게 아닌가? 또 주님과 명령이  흐려지고 흐미해질 때에 그 풍랑과 모든 거슬림은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요 본문 고 안에서 확고히 우리는 의심 없는 그 분해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여게서 이 사실을 믿읍시다. 주님이 이렇게 갈릴리 바다로  우리 도리를 가르치신 것은 갈릴리 바다는 이 세상을 하나의 모형 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바다와 같은 이 세상을 거쳐서 주님의 나라에  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 주님의 재림을 영접하는 그  자리로 가라고 하시는 그 구원을 향하여 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는 '불이 섞인 유리 바다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또  '불이 섞인 유리 바다라' 그것도 세상을 말하는데 세상은 바다이면서 불이다.

네가 한 시간 한 시간 걸어가는 데에 빠지면 탄다. 여게는 빠지면 죽는다.

세상에 빠지면 죽는다. 세상에 빠지면 불에 타서 죽는다. 다만 기독자가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주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는 것과 또 주님이 명령하시는 그  명령 고대로 행하는 것과 요 둘로만 불이 섞인 유리 바다도 무사히 건너갈 수가  있고, 이 갈릴리 바다와 같은 풍랑심한 이 잔인하고 거짓으로 흉용한 이 세상도  무난히 거쳐서 우리의 구원의 목적에 도달할 수가 있지 그 외에 다른 걸로서는  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 계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세상을 건너 구원의 언덕에 완성해서 서는, 그 승리하고  서는 이 걸음은 주님이 내 현실에는 언제나 풍랑 속에도 나와 같이 계시고  수많은 원수들이 포위한 그 포위당한 내게도 주님은 이 시간 에는 나와 같이  계시고 내가 어떤 잘못된 재를 저질러서 수많은 헤어날 수 없는 큰 재를 일으킨  그 재난을 당한 내게도 주님은 이 시간에 나와 같이 계시고 또 어떤 그 다급한  맹수 같은 혹독한 불같은 그런 현실을 만났을 때라도 주님은 이 현재에 나와  같이 계시는 이 사실을 믿고, 고게서 이 시간에 주님이 내게 명령하시는 것이  뭐이냐? 나는 살라고 헤어날라고 해결할라고만 하는 그런 것 다 치워 버리고  주님이 내게 명령하신 명령이 무엇이냐? 요 명령 찾아 행할 때에 그 모든 것은  당신의 지극히 큰 능력이 와서 책임지시고 모든 것을 다 해결지워서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시겠다고 그 결말을 말씀을 하신 그것을 얻어지는 것이  오늘입니다.

 오늘도 신앙의 사람들은 다 이적으로 삽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저렇게 많은 여론들의 입이 있고 많은 사람들의 눈아 있고 많은 사람들의 귀가  있고 하나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주님 한 분 그분에게  그분의 귀로 들을 때에 그분이 보실 때에 그분의 입에서 어떻게 하는 그분 한  분과만 해결을 지워서 거리낌이 없이 할려고 하는 요거 하나로만 전 방편을  삼고 있는 것이 기독자요, 이렇게 걸어가는 자 수많은 함정 속에 빠져서 그는  헤어날 수 없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가 높이 들려지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증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이 그렇게 그만 노젓고 옛날 주님 만나기 전에 어부 노릇할  때에 옛날 그 연습, 옛날 기술, 예수님 만나지 안했을 때에 불신자로 중생하지  안했을 때에 사는 그 기술 방편이 그만 나와 가지고 그 아주 젓는 사람은 제가  젓으니까 내가 이 모든 군중 속에 내가 노를 저으니까 멋있게 한번 젓겠다 해  가지고서 그 젓는 바람에 그 사람은 주님 잊어 버렸지 또 옆에 앉은 사람들  젓는 것 보고서 '야. 제법 잘 젓는다' 보다가 잊어 버렸지, 또 그라다가 안  되니까 '야, 내놔라. 내 한번 젓어볼 게.' 이라다가 저라다가 하다 보니까 인간  놀음만 해 버렸고 같이 계시는 주님은 완전히 잊어 버렸고 또 주님의 명령은  완전히 잊어 버리고 이럼을 인해서 풍랑이 일었던 것입니다. 요 믿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 요 형식 계시를 우리에게 이루어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들은 항해하지 못하고 놀래 있는데 주님이 물위로 걸어서  오셨습니다. 여게 밤중에 그들이 다급해 하시는 것을 아시고 찾아오셨습니다.

여게서는 하나 덧붙여서 언제든지 우리가 놀래기 전에 당신이 먼저 아시고  우리가 급하기 전에 당신이 먼저 아시고 우리가 낭파당하시기 전에 당신이 먼저  아시고 우리가 환난 만나기 전에 원수를 만나기 전에 당신이 먼저 아시고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와도 찾아 오실 때에 제자들이 볼 수 있는 방편으로 배를 타고 절렁절렁 젓고  오면은 '아, 저 배가. 인제 우리 구원하십시오.' 했지마는서도 주님은 물 위로  걸어왔기 때문에 평상 이 제자들이 느끼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방편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이러니까 그들의 주관 이치에 그들의 소견과 이치와 선입적  관념과 기존 지식에 맞지 않는 방편을 가지고 오시니까 그 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오늘도 언제든지 우리 중생된 자의 모든 형편을 살피고 계셔서  공간으로는 산에 계시고 바다에 계시니까 공간은 떨어져 있지마는 당신은  전지자시요 전능자시요 하기 때문에 공간은 떨어져 있으나 우리가 한자리  앉아서 여게 한 뼘 떨어져 있는 것이나 당신이 수억만 리 떨어져 있는 것이나  내나 그분은 공간이 없기 때문에 공간에 초월했기 때문에 거게 제재를 받지  안하고 당신은 또 능치 못하심이 없기 때문에 억만 리가 떨어져 있어도 당신은  일 초에도 올 수 있는 그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은 멀리  있으나 가까이 있으나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구원하러 오셨는데, 오셔 가지고서 오니까 아, 유령이라 놀랬습니다. 놀랬으나  실상 알고 보니까 자기들을 구원하신 구주였습니다. 이러기에 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주님은 나와 함께 계시고 그때에 주님이 내게 명령하시는  명령은 꼭 그 명령은 내게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방편으로 명령하지  아니하십니다. 또 내 주관 이치에 맞는 방편으로 그렇게 당신이 구원 방편을  쓰지 않습니다. 이 세상 것은 다 사망의 법이요 당신은 생명의 법이기 때문에  벌써 주님 잊어버렸으니까 그때는 이 사망이 세상 법만 가지고 있는 세상  지식으로 모든 것을 비판하고 평가하는 이 사람이 됐는데 옛사람이 돼 버리고  말았는데 예수님이 이 생명의 법을 가져 오니까 맞을 리가 없습니다. 정 반대로  왔기 때문에 살리려 오시는데 죽이려 오는 물귀신 같이 보여졌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오시는 주님은 우리 주관 이  옛사람의 법칙, 세상 법칙에 맞지 않는 비합리적으로 비과학적으로 인간들이  역대에 비통계적으로 다만 당신의 성경 말씀에 맞도록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옛사람이 된 인간 지식대로의 나간 여게는 완전히 반대가  됩니다. 그러나 그때 맞이하고 보니까 맞이하고 보니까 풍랑도 다 잔잔했고  해결 다 되지 아니했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환난의 때든지 그때에 하나님의 종들이 와서  권면하는 것, '네가 이라면 안 된다. 이래라.' 권면, 권면하면은 안 듣습니다.

'예 그 말로는 쉽지마는 그게 됩니까, 어데? 그래 가지고 됩니까?' 또 교만한  것은 말하면 '아무것도 무식한 뭐 무식한 목사가 이렇게 이 세상에 이런 걸로  뭐 뚜렷한 이런 어려운 일은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벌로 말한다.' 또 무식한  권찰이나 이런 집사나 장로들이 가서 말하면 뭐 안다고 그런 소리 하느냐고서  물에 넣어도 붓도 안한 그런 소리 한다고서 비꼬우고 업신여깁니다. 왜? 제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에, 그래도 '요래라'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지도할  때에는 무책임하게 그래 지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고 난 다음에 안 되면 그걸  책임을 집니다. 그래도 인간이 질. 수 있는 데까지는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요래라 하는 대로 해 가지고서 안 된 자가 없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꼭 요래 할라 할 때에 빡빡 우겨서 요래 하는 자가 망했지 그리 안  하고 시키는 대로 해 가지고는 망하는 자가 없습니다. 또 사람보다도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더욱 절대 그것은 실패가 없는 것입니다. 절대를 붙일 만침  정확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축복은 인간의 자율과 주관과 인간들의  지식, 통계에 맞지 일는 비합리적이요 비세상적이요 비인지적이요 비과학적으로  오는 이 모든 것들을 초월하신 지극히 크신 이런 것들을 초월하신 창조주적인  그분의 능력의 지도이기 때문에 맞지 안하나 순종할라고 하면 세상에 속한  옛사람 다 부인해야 순종하고, 또 순종할라고 하면 옛사람 이놈은 박살이 되고  옛사람이 박살되고 자기 주관이 박살되고 고런 지도를 합니다. 그래 지도를 할  때에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고 순종하니까 주님의 주신 것은 옛사람을  죽여서 없애서 박멸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박멸하라는 명령이니까  박멸하라는 명령이니까 자기를 부인해 자기를 박멸하고 십자가를 져서 자기의  모든 육체의 그 소욕을 다 저 버리고 안일주의를 버리고 이렇게 복종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와 가지고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게서 이 물귀신이라. 왜 이런 순서를 뭐할라고 하나님이 예정하셔 가지고서  이렇게 일으켰는가? 아,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 갈릴리 바다와 같은 세상을  건너가다가 경제적 어려움이든지 정치적 어려움이든지 사업적 어려움이든지 또  연애적 어려움이든지 사회적 어려움이든지 사고적 어려움이든지 가정적  어려움이든지 어떤 그 어려움이든지 어려움을 만났을 때에 주님이 구원하시는  이 성경대로의 구원의 길은 이것은 비세상적이요 비인지적이요 비인간의  합리적이요 비사학적이요 비통계적인 하나님의 법으로 온다. 하나님의 법은.

인간의 법은 다 사망의 법이기 때문에 사망의 법과 반대되는 하나님의 법으로  온다. 그럴 때에 인간의 법을 죽을 요랑하고 물리치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만  하면 된다 하는 것을 요게서 가르치기 위해서 요 한 순서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내로라 두려워하지 말라' 이라니까 그들은  주님은 유령으로만 봤지마는서도 주님이 내로라 하는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그들이 다 같이 오래 동안 지냈기 때문에 음성을 다 알고 있으니  주님이 내로라 이렇게 말씀한 그 음성을 들으니 벌써 그때에 그 놀래던  제자들에게는 속에 후련한 평안의 안심의 훈기가 돌아옵니다. 훈기가 돌아와서  은연중 평안한 훈기가 돌아왔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무조건 성경 들고 앉아 가지고 성경을 자꾸 읽으면 자기가 주님을  발견하고 대면하지 못했을지라도 성경을 읽으면 성경 말씀은 내 주관적 평안을  줍니다. 내 주관을 평안하게 합니다. 평 안하게 합니다.

 이래서, 어떤 사람이 어려움 당할 때에 '너는 네가 기도원에 가 가지고서  신구약 성경을 열 번만 읽고 나오너라. 열 번만 읽으면 다 해결 된다. 읽으고  나오너라.' 이러니까 다섯 번 읽으니까 이제 됐다. 뭐 다섯 번 읽으니까 아무  문제없어. 다섯 번 읽으니까 그만 평안뿐이고 문제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나왔다가 병아리가 부화가, 다 되기 전에 알 밖에 나오면 죽는 것입니다. 열  번만 읽었으면 될 것인데 다섯 번 읽고 나왔으니까 급속히 나왔으니 거게  준비가 될 대로 준비가 안 됐습니다. '네가. 너는' 내가 어떤 분에게  말했습니다. '이해해 주는 말 하지 안하고 요 기회가 지나가기 전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의 성경 지식도 가지고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도 가지라 그게  지금 되는 것이 시급하고 급속하지 나오는 것이 시급하지, 않다. 그 준비가 안  됐으면 억지로라도 앉아 가지고서 꾸물 대 가지고서 거게서 안되면 그냥 무슨  조그만한 그 조그만한 허물이라도 하나 옆에 사람이라도 공연히 찝어 비트려  가지고라도 이놈 내보내면 안 되겠다. 해 가지고라도 역부러라도 거게 주저  앉아 가지고서 네가 주님과의 관계에 말씀의 그 해결과 주님이 요구하시는  고것을 완전히 해결 짓고 난 다음에 나오라. 나올라고 할 바에야 그것부터  급속히 해라.' 내가 그렇게 말은 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어떠한 어려움을 당하든지 그만 그 어려움을 보면 이  제자들이 풍랑을 보니까 아이구 바람이요 바람이 저렇게 큰 바람이 온다,  이렇게 세게 인다. 물결이 흉융하다. 여게가 어디고? 여게 물 가운데 한 가운데  들어왔다.' 제가 그 어려움 당했을 때에 환경을 보고 세상을 보고 사건을 보고  거게 관련된 사람들을 보고 암만 제가 해결 지울라고 무슨 백방 노력해봤자  저는 더 두렵고 어렵고 간담 녹아지고 일은 점점 악화 돼 나가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왜? 믿기 전 사람들은 버렸기 때문에 저거끼리 살지마는서도  믿는 사람은 네가 순종 안 하면 내가 저주를 한다고 전능의 능력으로 대항한다  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 그만 다 덮어 놓고 '이제는 안 됐다. 기도원으로 가자. 안  됐다.' 그라면 저게 어데 모르는 데 아무도 모르는 데 객지로 그만 도망을 쳐  가지고서 방을 하나 얻어 가지고서 이제 성경을 보자. 자꾸 성경 봅니다.

그것이 주님이 내로라 하니까 그렇게 두렵던게 다 두려움이 없어져 버리고 그만  평안해졌습니다. 평안해졌어. 속이 후련했어. 이제 그 바람은 그때 일었오.

바람 그대로 일고 있지마는서도 자기 안에 주관적 펑안은 왔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은 밖에서 저질러 놓은 그 일은 이 놈이 어디갔노? 찾고 수사하고 야단을  법석을 지기도 성경 읽으면 자기의 주관적 평안은 옵니다. 마음아 든든하고  평안합니다.

 자꾸 성경만 읽으면 평안하고. 성경을 읽다가 주님만 발견했으면은 문제  없습니다. 주님만 발견하면. 성경으로 주의 음성 듣고, 다른 사람들은 주의  음성 들으니까 마음이 흐못하게 그렇게 놀래 죽을 지경이던 것이 '아주님의  음성이 들린다' 이렇게 그분들이 좀 기분이 좀 활기가 생겨겼습니다.

 생겨겼고 거게서 재빠른 슬기 있는 베드로는 퍼뜩 '아, 주님이로구나' 주님을  발견해서 '주님이로구나. 주여 주시어든 나를 명하여 바다 위로 걸어오라  하십시오.' 이거 뭐 바다 때문에 죽겠다고 하는 그 인간이 주님 발견하고  나니까 주님 발견하고 나니 주님을 만나고 보니 바다는 육지와 같습니다.

바다에 빠지면 죽는다는 것 다 잊어 버렸고 주님만 보고 주의 음성듣고 주의  음성을 인해서 주님만 척 발견하고 보니까 이제 바다는 빠진다 물결이 있다,  여게 빠지면 죽는다, 어떻다 다 잊어 버렸오. 자기 그 신경과 정신과 지식과  마음이라 하는 것은 솔박 주님에게 다 기울어져서 주님에게만 주시했습니다.

요렇게 될 때에 바다가 보이지 안해.

 이러니까 '주님이 오시는 대로 나에게 명하시옵소서 그러면 내가 주님에게  가겠습니다.' '오라' 내려서 떠뻑떠뻑 걸어 갔습니다. 그것이 실험해 보지 안한  사람은 모르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성령이 오시면 우리 마음이 평안하고 소망 없는 게 없습니다.

미운 게 없습니다. 그놈 죽여야 되겠네 해도 성령 오시면 '야, 죽일 게 뭐  있나? 불쌍하다.' 그놈은 희망 없는 놈인데 성령 오시면 '아니라. 그것도  된다.' 성령이 오셔 가지고서 희망 없게 보이는 사람 나는 한번도 못 봤습니다.

성령이 와 가지고서 이거는 참 불만이고 이 원수다 하는 그런 장벽이 막히는  사람 하나도 못 봤습니다. 성령이 왔다가 떠나면 나는 내대 로의 옛사람으로 다  돌아가고 보니까 모두가 다 아사리 밭이라. 한 사람도 믿을 사람 없고 상대할  사람 없고 접할 사람 없고 인정할 사람 없고 사귈 사람 하나도 없고 희망 있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이거는 희망 있겠나? 성령 떠나고 나면 이제 죽 봅니다.

목사를 봅니다. 목사, 아이구 그것도 희망 없다. 장로 아이 그것도 희망 없다.

다 그렇다. 다 멸망이지 뭐 아무 희망이 없다. 전체가 멸망이요 전부가  암흑이요 전체가 절망이지 희망이 하나도 없어. 그 사람은 잘 믿는데 잘 믿는데  보니까 잘 믿기는 뭐 잘 믿어 이렇고 이렇고 저렇고 희망 없다. 하나도 희망이  없어.

 성령이 오시면 성령이 오고 난 다음에는 아무것이 그놈은 희망 없는 놈 인데  그 놈은 죽여야 될 놈인데 그도 살아야 되겠고 그도 살려야 되겠고 그도 좋은  점이 있고 그도 힉망 점이 있고 얼마든지 얼마든지 될 수 있는. 이러니까  성령이 오시면 모든 그 환경과 주위와 세상이 다 변해집니다. 산천 초목이 다  변해집니다. 수많은 그 인간의 그 수많은 심리들 그 수많은 심리들이 다  평안해서 이 베드로가 바다가 육지처럼 두렵지 안하고 날 오라 하십시오. 오라  하니까 저벅저벅 걸어서 가는 거와같이 이렇게 되어지는 것이 이것이 기독교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가 어떤 어려움에서라도 주님의 음성 외에는 해결 되는  길이 없습니다. 자기가 어떤 어려움을 당해서도 어려움 당했거든 그저 성경  펴십시오. 어려움 당했거든 성경 펴십시오. 어려움 당했거든 저 집회하는데  사경회 하는데 가십시오. 사경회는 못 가겠거든 성경 펴고 읽으십시오. 읽으면  그 안에 성령이 내재해 계시기 때문에 됩니다. 자꾸 읽으면 읽는 가운데에 차차  차차 눈에 보이던 세상은 멀어지고 흉측한 악령과 악성과 악습으로 된 무서운  아주 못 쓸 놈 잡아 죽여야 될 놈 옛 사람 고놈은 미워지고 고놈은 미워지고  고놈을 닥치면 잡아 죽이면 싶으고 이놈은 고놈은 내가 죽인다. 이가 갈아  붙여질 때 고놈은 어디로 간곳없이 사르르 빠져버리고 빠져버리고 이제 차차차  성경 읽는 가운데에서 주님이 나타납니다. '아 이런 주님이로구나. 저런  주님이로구나.' 이라다 보니까 가깝게 '아, 주님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믿습니다. 내가 믿습니다. 주님이 날 이렇게 사랑하는 줄 나는 몰랐습니다.'  이래서 주님 앞에 감사도 나오고 자복도 나오고 이거는 또 어째야 되는 겁니까?  의논도 나오고 또 간구도 나오고 이렇게 하다 보면 주님 만납니다.

 주님을 만났을 때에는 벌써 베드로가 나를 바다 위로 걸어오라 하십시오  명령하십시오,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제 주님을 만나면 그 사람은 땅위에  주의 명령 '순종 못할 게 뭐 있겠노? 내가 요번 순종은 죽어야 된다. 주를  위해서 죽는 것, 주의 명령 순종으로 죽는 거야 얼마나 영광인가? 죽음이  가로막힙니까. 네가 이렇게 순종하면은 가정이고 가산이고 다 낭파되는데  낭파되면 가산이 낭파되면 가정이 낭파되면 그거다 주께 있는데 문제가 뭐  있겠느냐? 아무것도 어려운 문제가 없어서 어디든지 걸어가지 못할 것 없고  어떤 명령이든지 주의 명령에게 순종 못 할 명령 없고 '주여 뭐이든지  명하십시오. 내가 능히 복종할 수 있습니다.' 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지는 것을  여게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때에 베드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안하고 주님만 보였습니다. 그때 '주여 만일  주시어든 만일 주시어든'하는 그 말은 자기가 아직까지 접촉하지 안했기 때문에  주님에게 좀 흐려져 가져 있고, 또 주님이 물 위로 걸어오시니까 자기가 그  명령을 하실런가 안 하실런가 해서 만일 물위로 걸어오시는 것이 주님이시라면  주님이시 라면 나도 물위로 걸어가게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요 따지는 그  속에서 이상 야릇하는 따지는 말이요 고리를 딱 걸어 가지고 하는 말입니다.

'만일 주시어든' 물위로 주님이 걸어오는 게 주님이시 거든 나도 걸어오라  하십시오. 요렇게 딱 꼬갱이를 걸어 가지고 딱 그래 말할 때에 그러면 오라  명했습니다.

 그럴 때에 베드로는 '나를 오라 하십시오. 명하면 내가 걸어가겠나이다. 할  때는 그 베드로 그 사람이 어째 그렇게 좀 전에는 놀래 죽겠다 하는 사람이  그렇게 됐을까? 그거는 주의 음성을 듣고 주의 말씀을 듣고, 그라고 난 다음에  주의 말씀을 통해 가지고서 주님을 발견하고, 말씀 듣고 주님 발견하여 주님이  자기와 같이 계시는 그 주님 발견하고 말씀을 들어서 주님 발견하고 보니까 그  베드로는 그때에 주님에게 하필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하십시오 이렇게 말했을  때에 베드로는 어떤 심정이 있었을까. 베드로의 그 생각이 얼마나 복잡했을까,  무엇을 생각했을까, 과학을 생각했을까, 무슨 윤리를 사회를 무슨 출세를  생각했을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베드로 생각에는 주님 한 분뿐입니다. 또  베드로 눈에도 주님 한 분뿐입니다. 또 베드로 소원은 뭐입니까? 명령  순종하고저, 어떤 명령이든지 어떤 명령이든지 명령하면 내가 순종해  보겠습니다. 주님이 날 공중으로 날라 하십시요 이랬으면 그분이 주님이 날라  했으면 날 것입니다.

 이런데, 그때 베드로에게는 주님만 보고 주님의 말씀만 기억나고 생각나고  그의 보는 것과 생각과 마음, 소망, 소원이 아무데도 없고 주님 한 분에게  전부이 집중됐습니다. 집중된 것 요것을 여러분들이 가 가지고 자꾸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 한 분에게만 집중되지 딴 데 아무데도 없이 주님 한 분에게,  마음도 주님에게, 생각도 주님에게, 소원도 주님에게, 보는 것도 주님. 귀도  주님의 음성 듣는 것 기울이는 것 그뿐입니다.

 요렇게 베드로가 주님과 죽의 음성 요 둘에만 전부가 기울어졌을 때에 그  베드로는 어떤 사람이 됐던가? 그는 물위로 걸어오라 할 때에 물위로  걸어갔습니다. 물위로 걸어갔었습니다.

 걸어가다가 물에 빠진 일을 와 또 요렇게 했겠습니까? 요거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요 계시를 주신 것이라 그 말이오. 물위로 걸어갔는데 주님만 보고  주님이 오라 했으니까 주님이 오라고 명령하셨으니까 없는 가운데 천지가 되라  하니까 천지가 됐는데 아, 만들어 놓은 것 가운데 바닷물 그까짓 거야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그게 뭐이 거슬리겠습니까? 이랬는데 주님만 보고 주님의 명령만  듣고 자기 할 일은 이제 주님만 바라보면서 순종하는 고것만 자기 할 일이라  요렇게 구별해서 딱 단정짓고 떠벅떠벅 걸어가다가 걸어가다가 눈이  바꿔졌습니다. 주님만 보던 눈이 바람 봤습니다. 물결 봤습니다. 주님의 명령만  생각하던 것이 이 모든, 아마 그 때 순간이라도 찰라라도 순간이라도 별별  생각이 자기 심리 속에는 연상 됐을 것입니다. 왜? 어부니까 연상될 것이오.

'햐, 물결 되게 흉융하다. 이런 물결은 무슨 물결인데 이거는 뭐 뭐 여게 말려  들어가면 꼼작 못하는데, 여게 물길이 얼마인데 수심이 얼마나 되는데.' 별별  그 순간 동안에 우리 마음이 수백 그 밖으로 연상되는 것 우리가 잘 체험하고  있습니다. 금방 우리 생각에 잠시 생각에 요리 요리 요게서 조르르 요게서  조르르 자꾸 연상해서 주르르하이 여태 생각하는 그 연상이 아마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 베드로는 물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과 우리 몸은 마음은 주님만 사모하고 주님만 생각하고  주님만 사모하고 주님만 생각하고 주님에게만 모든 것 다 소망두고 맡기고 주님  한 분에게 주님 한 분만 생각으로 주님만 소망하고 사모로 주님만 소망하고  주님에게 내 소망이 있기 때문에 사모하고 생각하지요.

 그러면 다 복잡한 그걸 본인들이 가서 하면은 다 나오나 여게서 간추려서  말하면 생각과 사모 요것을 주님에게만 기울이십시오 생각을 주님과 사모를  주님에게만 기울이고 내 눈은 눈을 감고 보든지 눈을 뜨고 보든지 주님만  봅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 눈을 감고 보면은 더 잘 보이고, 또 눈을  뜨고 보면은 이제 좀 자라면 눈을 뜨고 보면 더 잘 보입니다. 눈을 감고  명상하고 보면 잘 보이고, 지식으로 지식의 눈으로 보면 잘보이고 지식의'  눈으로 주님이 여게 계신다는 성경에 여게도 저게도 말씀했기 때문에 여게  계신다. 지식으로 보면 더 확고하게 보여지고 자기 육안으로 아무 때 주님이  이렇게 이렇게 한 것 보시면 그때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시는 게 아니냐? 그  주님이 같이 계시는 게 아니냐? 신앙 경험과 체험이 있으니까 눈도, 육안도  마음의 눈도 주님만 보고 우리 육의 귀나 그 마음의 귀나 주님의 음성만  기다리고, 이래서 요래 있다가 오전에도 말했지마는서도 이래 있다가 우리  생각이 옮겨집니다. 생각이 마귀라는 놈은 요 일을 하기 위해서 있습니다.

마귀를 하나님이 내놨습니다. 왜? 고렇게 해도 그 유혹을 안 받아야 그 실력  있는 것이지.

 이러기 때문에 주님만 생각하는데 주님 생각한다고서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 그저 주님을 잊어버리지 안하고 '주님은 나와 함께 계신다. 나를  구속하셔서 이렇게 큰 구속을 큰 힘 들여 하신 사랑의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 이러니까 눈물이 나오고 감사의 눈물이 나오고 못 견딜 만침 이런  주님인데, 갑자기 누가 와 가지고 문에 와서 땅땅 두드립니다. 땅땅 두드리면  이거 어리석어 땅땅 두드리면 어느 결에 버떡 '누구십니까?' 누구십니까 하고  보니까 벌써 주님 생각하는 것 다 옮겨서 그리 가버렸어오. 거게 가 가지고서  한 시간이고 반시간이고서 그거 하고서 이야기하고 뭐 이리저리 하다 보니까  나중에 주님 잊어 버렸어.

 그때 돌아와 가지고는, 우리가 생각이 주님에게서 옮겨지는 것 사모가  주님에게서 옮겨지는 것, 소망이 주님에게서 옮겨지는 것, 우리가 주님을 보는  그 눈이 옮겨지는 것, 주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옮겨지는 것 이렇게 주님 두고  무엇으로 인해서 생각이 내가 주님 두고 내 생각이 그리 가든지 주님 두고 내  귀가 그리 기울여졌든지 주님 두고 내 눈이 그리 기울여졌든지 주님 두고 그리  사모가 옮겨졌든지 이라는 것은 막바로 주님을 배반하는 것이요 이것이 지극히  큰 능력으로 나를 보호해서 함정에 빠지지 아니하도록, 내게 필요한 것은  하나도 놓치지 안하고 낱낱이 다 받아 챙기도록, 이분 이분보다 더 좋은 분이  없는데 이분을 빼앗기는 것이요 잊어버리는 것이요 이라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책상 위에 써 놓은 것 보니까 그렇습디다. 주님을 생각하는 생각을 옮기는  그것이 악령이요 그것이 원수다, 주님 사모하는 사모를 옮기는 그것이 배암이요  원수다 이렇게 그 책상 위에 써 놓은 것을 제가 봤습니다.

 여게서 우리가 주님만 생각하고 주님만 사모하고 또 그라다가 사믓 주님만  사모할라 하니까 너무 단순한 것 같으니까 주님이 내게 어떻게 하신 분이시며  무엇을 요구하시는 분이시며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 이래서 뭐 생각할라면은  그거는 시간이 모자랍니다. 아무라도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하면 밥 먹을  시간도 잊어 버리고 고만 뭐 시간이 잘 때라도 꼭 이거 일찍 자야 되겠는데  하다보면 열 두 시 한 시 그만 가 버리고 맙니다.

 이래서. 이 베드로가 주님만 보는, 주님이 지금 자기 오라 했으니까 주님을  바라보는 주님 보는, 그 눈이 딴 데로 옮겨졌을 때에 주님의 명령 순종으로  주님이 명했으니 주님 명령 지금 명령대로 지금 걸어가고 있다는 주님 명령  순종이라는 요것을 잊어 버렸을 때에 주님과 주님의 명령을 잊어 버렸을 때에  물 위로 걸어가던 자가 물 속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이것을 여게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나갈 때에 주님을 생각하는 이 생각을  옮기지 맙시다. 주님을 사모하는 이 사모를 옮기지 맙시다. 주님을 보는 같이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이 눈을 옮기지 맙시다. 주의 음성을 듣는 이 귀를  옮기지 말고 그저 이 모든 것이 한 말로 통털어 말하면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걸 믿는 거라. 요 믿는 거 한 마디인데 이 자꾸 알도록 하기 위해 이래  말한 거라.

 주님이 이 시간 나와 함께 계신다. 이분이 어떤 분인데? 이분이 어떤 분인데?  이분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분이 얼마나 크신 분이시며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며 나를 하나님께서 온전한 자로 만드실라고 책임지고  죽기까지 투자하신 분이 그분 아니십니까? 이 분이 나와 함께 계시는 이것을  내가 확실히 믿는 것과 그의 명령 내가 찾아서 순종하는 것 요 두 가지에  우리는 기울여질 때에 그 지극히 큰 능력이 와 가지고 내 지혜가 되어서 내  지혜가 되어서 새게 필요한 일 털끝만한 것도 빠지지 안하고 총총 다 합니다  내게는 그분의 전지의 지혜가 내게 오니까 내가 할 일은 털끝만한 것도 빠지지  안해. 주님만 사모하다가 밥 못 먹고 어짤꼬? 주님만 사모하다가 사장 노릇 못  하고 어짤꼬? 주님만 사모하다가 이 경리 노릇 못 하고 어짤꼬? 주심만  사모하다가 이 장관 노릇 못하면 어짤꼬? 주님만 사모하면 지극히 큰 능력 그  분이 내 안에 오셔 가지고서 전지자가 왔으니까 아무리 땅위에 있는 일등  대통령이고 정치가라 할지라도 주님 만침 지혜가 있겠습니까? 주님이 내게  왔으니까 생각할 것 하나도 빠짐없이 다 생각하지 말할 것 하나도 빠짐없이 다  말 하겠지 처리 할 것 하나도 빠지지 안하고 다 처리하지 계획할 것 하나도  없이 다 계획하지 정리할 것 하나도 없이 정리하지 치울 것 하나도 없이 내가  치우지 닦을 것 하나도 없이 닦지 깰것 하나도 없이 깨지 건설할 것 하나도  없이 건성하지 이러니까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라다가 그 엉뚱이같이 빠져들어가니까 그때사 '주여 나를 도우시옵소서'  주님 찾았어. 주님 찾으니까 주님 안 찾았으면 베드로 저는 물속에 빠져  죽습니다. 별수 없이 죽어. 주님 찾으니까 당장 구출해서 물 위에 건져내지  안했습니까? 그라고 난 다음에 같이 가니까 아무 일 없어. 주님 하고 같이  가니까 물 위에 걸어가지 배타고 가지 안했어. 주님이 아듬고 가지 안했오,  보듬고 가지 안했오? 주님과 같이 가니까 물위에 평평히 잘 걸어갔어. 물위에  걸어서 갔어. 걸어서 배 위에 올라서니까 풍랑 잔잔하고 목적지에 갔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것이 우리의 구원 도리를 가르친 것이니까 금년에는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이 사실을 우리가 언제든지 잊어버리지 말고 확신을 가집시다.

학신을 가지고 그 다음에 우리 할 일은 뭐인가? 주님이 고게서 하라는 고것만  하면 돼 주님이 하라는 것만 하면 돼.

 하라는 것은 뭐이냐? 기본 명령 그거는 어떻게 하고, 기본 명령을 지키는 것은  기본 구원을 입고 있고 기본 구원을 입은 자로 기본 구원을 받아 가진 자로  사는 것이 고것이 기본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고것이 다른 말로 말하면  새사람으로 살아라는 말이오.

 요거 하고, 그라고 난 다음에는 당신의 명령이 뭐인고? 오늘 출근하라 하나 안  하라 하나? 다 그것도 명령하십니다. 출근하라 하면 하고 하지 말라 하면  안하고 누웠으라면 눕고 자라면 자고 죽어도 그 말하다가는 죽을라고요?  말하라면 죽어도 하고 내가 분해서 온 전신이 덜덜덜덜덜 떨려도 떨려도 가만히  참으라 하면 참고 이래서 고 현실에서 당신이 내게 요것은 네가 해라. 하다가  죽을라고? 그래도 해라. 당신의 명령을 할 때에 요거는 네가 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라도 하지 말아라. 안할 때에 그때에 지극히 큰 능력은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마귀가 가득찼지 대적이 가득찼지 마귀는 수많은 사상, 종교이  모든 운동들 다 해 가지고서 온 천하가 똘똘 뭉쳐 가지고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는데 전체는 다 어린 양의 대적편인데 이 원수 속에 사는 우리들이 지극히  크신 그분의 도우심이 아니고 어떻게 우리가 이 길을 걸어가겠습니까?  이 아주 참 산죽 밭같고 마치 못으로 만들어 놓은 이 방석 같은 이런 이 못  위와 같은 이 세상을 걸어가게 만드는 이런 세상으로 만든 이가 누굽니까?  주님이십니다. 왜? 이 길을 주님의 지극히 큰 능력과 함께 하는 자는 주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는 것을 확실히 믿고 주님이 그때 그때 명령하는 고 명령대로  순종하는 요 자만이 평안이 걸어가고 세상을 이기고 죄악을 이기고 모든 승리를  하고 요게 없는 자는 어떤 세상 방편 가지고 해도 저는 안팎의 고민이요  껍데기는 평안해도 속에는 고민이요 절대 평안이나 담대는 없도록 고렇게  하나님이 조절하시는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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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73 행함 있는 믿음/ 야고보서 2장 26절/ 1987. 3. 13. 지권찰회 선지자 2016.01.11
5372 행함/ 야고보서 2장 14절-26절/ 1978년 3공과 선지자 2016.01.11
5371 행한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 갈라디아서 6장 6절-9절/ 1981년 3공과 선지자 2016.01.11
5370 행하면 기적과 축복/ 야고보서 2장 26절/ 1985. 10. 4. 지권찰회 선지자 2016.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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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6 행위대로 갚으시는 하나님/ 요한계시록 2장 23절/ 1989. 1. 11. 주일학교 공과 선지자 2016.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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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상보행/ 마태복음 14장22절-33절/ 1985. 1. 27. 주일오후 선지자 2016.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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