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과 부활

 

1988. 6. 18. 토새.

 

본문: 고전 15:42-49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우리의 부활에 대해서 첫째로 알아야 될 중요한 것 제일 중요한 것은 죽어야  부활하는 이것을 우리가 확신하고 굳게 잡아야 됩니다. 이래서, 그 부활을 좋은  부활을 원하는 자마다 죽기를 원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죽기를  싫어하는 자는 좋은 부활을 싫어하는 자입니다.

 죽음은 두 번 죽음이 있는 것을 말했습니다. 우리 현실에서 처음에는 옛사람이  죽어야 새사람으로 살지 옛사람 죽지 않고는 새사람으로 살지를 못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기 전에는 예수님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땅의 소욕과 소망을 가진  자로 사는 자가 죽기 전에는 하늘의 소망과 소욕으로 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의 육체 소욕 자기 욕심의 사람이 죽어져야 성령의 욕심의  사람으로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행동과 부활의 영광은 나눌 수 없는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행동을 할  때의 행동할 때의 세상 평가와 부활할 때의 그 평가는 아주 다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행동할 때 그때의 세상적 평가만 자기가 보고 그  행동에 부활은 어떤 부활이 연결돼 있다 하는 것을 생각지 못하기 때문에 다  행동면으로 치우쳐서 행동 좋은 것만 취하기 때문에 로마서 8장 18절에 ‘이제  받는 고난과 장차 받을 영광은 족히 비교 할 수가 없다’ 그랬습니다. 지금  행동에서 고난 그것이 장차에는 영광의 부활이 되는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활은, 그 행동할 때와 행동에 따른 그 부활은 형체가 달라. 모든  평가나, 모든 사람들이 다 이렇게 좋아하는 것이 다르지마는 그 행동에 대한  부활의 영광은 그것은 둘이 아니고 하나다.

 하나라서 행동에 따른 그 부활의 영광은 마치 종자마다 벌써 형체가 결정돼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종자마다 뒤에 다시 났을 때, 살아서 그게 나서 자랄 때의  형체가 그거는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이 정해 놓은 그 변할 수 없는 절대성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들이 세상에서 행동하는 그 행동과 장차 부활하는 그  영광은 그것은 요동할 수가 없어요.

 언제든지 그 행동에는 그 부활 이것은 절대성으로 변할 수 없는 하나로 연결돼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행동과 부활을 연결시켜서 하나로 이렇게 보지를 못하기  때문에 다 행동 위주로 살고 있다.

 다만 이것은 세상에는 이 부활이라 하는 지식이 어느 종교에도 없는데 그  종교들이 지금은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도둑질했다가서 그저 따라서  저거도 부활이 있는 양으로 이렇게 말하고 영생이 있는 거로 말하지 영생을 아는  그 종교는 하나도 없습니다.

 불교에서 극락 하는 그런 것도 추측으로 추론으로 추상으로 이렇게 하나 가정한  것이 차차 차차 이거 실지로 있다고 그렇게 뭐 아주 견고하게 점점 실상화  정확화 이래 만들어 가지고서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은 거짓말이 더  능해서 강해진 것뿐이지 실은 그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부활이나 영생이나 그런 것이 없는데 지금은 뭐 사이비한 종교 어떤 종교 유사  단체마다 이런 게 다 있습니다. 그거는 다 거짓말로 한 것이고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이 종자, 심는 종자와 장차 나는 그 형체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한 분밖에 없는데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주신 이 계시 지식에서 알려  줬기 때문에 이 개시 지식을 자꾸 열심히 상고하는 사람은 행동과 그 행동에  따른 부활의 영광은 끊을 수 없이 둘이 하나이다 하는 것을 자기가 알게 되고 더  확고하게 알게 되고,  아는 것 만치 그는 그 행동에다가 가치를 두되 현재 행동이 현재 형체 현재  형편에 가치 두는 가치보다도 그 행동에 따른 부활이 어떤 부활이냐 해서 부활에  가치를 두기 때문에 한 행동 한 행동하는 것이 부활을 표준으로 위주로 중심으로  해서 부활을 위해서 행동하지 행동을 위해서 행동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기  때문에 영원한 그 부활의 영광은 행동에서 결정된다.

 그러기 때문에, 부활에 좋고 나쁜 그 수치스럽고 영광스러운 것은, 오늘 행동  선택에서 결정되는 요것을 기독자들만이 하나님의 계시한 지식에서 알 수가  있는데 이 지식을 다 등한히 여기고 만홀히 여기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께서 온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인류가 전연히 모르는 이 지식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지마는 이 지식을 사람들이 그렇게 크게 여기지를 안하고 인간들의 머리에서  나온 그 지식만 크게 여겨 가지고서 야단을 지긴다.

 그것도 뭐이냐 하면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그 지식만 크게 여긴다는 그것도  세상 위주로 사는 사람이지 영원무궁세계를 위주로 살지 않기 때문에 그 지식을  위주로 하는 것이지 세상 머리에서 나온, 사람들 머리에서 나온 그 지식은 다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시면 아무것도 없이, 다 없어진다고 말했다. 모든 지식은  폐해진다고서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은 말씀을 해  놨습니다.

 이렇게, 행동과 부활은 나눌 수 없는 하나이다. 그러기에 행동 선택은 바로  부활 영광 선택이 된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행동할 때에 현재만 보고 행동하지  안하고 부활을 보고서 행동한다. 부활을 소망하고 행동한다.

 그것을 가리켜서 자기에게 있는 것을 땅에다가 심어서, 주먹에 쥐고 있던 것을  놔서 땅에 심는 거와 마찬가지로 세상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기의 가지고 있는  것을 그것을 부활을 위해서 부활을 소망하고 부활을 가치로 삼아서 좋은 부활을  얻기 위해서 가지고서 땅 위에서 모든 것을 희생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걸  가리켜서 심는다고 말했다.

 자기 가지고 있는 것을 먹어 없애는 것도 있고 내 버리는 것도 있겠고 그것을  더 큰 수입을 위해서 소망을 위해서 투자하는 것을 가리켜서 심는다고 말했다.

 이렇기 때문에,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고 또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고  혈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 이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 심는 것은 더 큰 추수의 소망을 가지고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내놓는  것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가진 것을 현재에 자기가  당장 이용하지 안하고서 장래를 위해서 현재 것을 투자해서 좀 더 좋은 미래를  얻을라고 하는 그것이 다 심는 행위다.

 그러기 때문에, 심는 행위는 둘이 있고 또 자기 가진 그것을 처리하는 것은 세  가지가 있다. 처리하는 거 세 가지가 있는 것은 가지고 있는 것을 자기가 당장  먹어서 없애는 거,  자기 그라면 인간의 가진 것은 전부 이 네 가지뿐인데 썩을 거, 또 욕된 거,  약한 거, 육의 몸 이거 네 가지밖에 없고 네 가지 외에 딴 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네 가지뿐입니다.

 이 네 가지뿐인데 이 네 가지에 대해서 어떻게 처리하느냐? 이 네 가지를 현재  좋기 위해서 처리한다. 현재 좋기 위해 쓰는 사람 있다. 현재 재미있기 위해서  현재 기쁘기 위해서 현재 수월하기 위해서 현재 다른 사람들에게 존대 받기  위해서 현재 좋기 위해서 현재를 위해서 자기 가진 것을 쓰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말하자면 종자를 볶아 먹는 거와 삶아먹는 거와 같다.

 현재 가지고 있는 이 네 가지를 현재를 위해서 쓰지 안하고 장래를 위해서 쓰는  자는 다 심는 자다.

 그런데 심는 자 중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이 세상 추수를 위해 심는 자를  가리켜서 육체를 위해서 심는다고 말했고 또 죽은 후 영원 부활을 위해서 자기  가진 것을 투자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성령으로 심는 자라 이렇게 말씀을 한  것입니다.

 이러니까, 우리 가진 것이 너이라는 거 이거 기억해야 되겠고, 또 그 다음에는  심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또 심지 안하고, 심지 안하고 막바로 그것을 현재에  좋기 위해서, 예를 들면은 곡식 종자가 한 말이 있는데 그거 난리가, 그 말  있어요. 지금 난리는 좀 다르지만 그때 난리는 뭐 성질은 같지마는 좀 다른데  ‘난리가 나도’ 종자 오쟁이라 했어. 그전에는 그릇이 없기 때문에 짚으로  만들어 가지고 짚으로 만든 그릇이 오쟁이라요. 그걸 무슨 종자라 했어? 씨래기  오쟁이인가 씨랭이, 오쟁이.

 난리가 나도 씨랭이 오쟁이를 땅에다 흩고 간 사람들은 뒤에. 다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에 저절로 나서 자라도 자라 가지고서 추수해서 먹고 살게 되고 인제 뭐  전쟁 났으니까 뭐 언제 농사짓겠냐 하고서 그걸 삶아먹고 간 자는 다 굶어  죽는다 그말 있어.

 내가 오래 안 써놔서, 시골 가면 그 말 있어요. 씨랭이 오쟁이, 씨가 씨종자  있는 그것을 난리 나서 피난 가면서라도 뿌리고 간 사람들은 뒤에 와서 먹고  살게 되고 그만 인제 뭐 전쟁 났으니까 이까짓 뭐 심어봤자 소용 있나 하고서  마구 삶아먹은 사람들은 다 와서 굶어 죽었어. 전쟁이 끝났는데 먹을 게  있어야지 뭐? 굶어 죽었다 그거요,  이와 마찬가지로 그러면 인생은 가진 것은 다 차이가 있느냐? 차이가 없어요.

다 네 가지 다 가졌어. 네 가지가 좀 많고 작은 것은 좀 차이가 있지마는 다  동등입니다.

 그 차이는 얼마나 있느냐? 좁쌀내끼 큰 거 작은 거 있는데 좁살내끼 큰  좀쌀내끼와 작은 서숙내끼와 그 크기 차이 있는 거와 그 이상 더 차이 없어.

인간과 인간 차이가 별로이 없다는 것입니다. 별로 없습니다. 없는데, 다 자본을  별로이 차이가 없는 자본을 꼭 같이 가지고 있는데, 그거 조금 차이가 있지 다  가지고 있어. 가지고 있는데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가지고 있기는 네  가지 가지고 있습니다. 네 가지만 가지고 있어. 네 가지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네 가지만 가졌어.

 지식을 가지고 있는 그것도 썩을 거, 그것도 다 나중에 보면 더러운 거 욕된  거, 왜? ‘세상에서 제일 높은 지식을 가졌다’ 나중에 가 보니까 전부이 속이는  지식 속는 지식 죽이는 지식 이것만 죽은 지식만 가졌기 때문에 지식 많이 가진  사람들이 많이 속였고 많이 죽였고 또 자기도 많이 죽었고 강하게 여물게 죽었다  말이오.

 이러니까, 전부 지난밤에도 말했지마는 땅위에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들은  나 썩을 것 아닌 것 하나도 없고 더럽지 않은 것 하나도 없고 약하지 않은 것  하나도 없고 또 혈육의 몸 그 외에 다른 것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를 가졌는데 이 네 가지 가지고 어떻게 사느냐? 사느냐 하는  것은 세 가지 종류로 삽니다. 하나는 뭐입니까? 막 씨를 볶아 먹는 거. 삶아먹는  거. 씨를 삶아먹는 거는 뭐를 하는 건데요? 자기의 가진 그것을 그 시간 현재에  그 시간 좋기 위해서 사는 것, 예를 들면 오늘 ‘이거 오늘 내가 그만 놀고  싶지마는 놀면 이제 내일 생활이 곤란하다’ 이래 가지고서 내일 살기 위해서  오늘 품드는 사람은 그 사람은 심는 사람이오.

 내일이야 어찌 됐든지 오늘 우선 좋도록 하자 하고서 오늘 놀고 평안하게 사는  그 사람은 막살이 하는 마구잡이로 사는 사람, 막살이 하는 사람, 장래를  소망해서 사는 사람 아니고 희망살이 안 하고 막살이 하는 사람이야. 그 사람이  제일 불쌍한 사람이라.

 그러면, 우리는 항상 이걸 지식을 가지고서 다 볼 때에 저 사람은 막살이 하는  사람이냐 저 사람은 지금 썩어질 추수를 위해서 썩어질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이냐 영원한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이냐 그것을 이렇게 찾아봐야 된다  말이오. 썩을 농사짓고 있느냐 영원한 농사짓고 있느냐?  그거 아주 서울대학에 들었습니다. 여기서 지금 이래 가지고서 서울대학에  들었지 또 그만 나중에 자꾸 올라가 가지고 장관이 됐지 지금 대통령 후보로  자기가 자꾸 출마를 하지 자꾸 이래 올라갑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그거 볼 때에 ‘저 사람은 썩을 농사를 짓는데, 썩을 농사를  짓는데,’ 그러면 그 사람은 썩을 농사만 짓습니까? ‘썩을 농사를 짓는데 저  사람이 썩을 농사 속에 진짜 영원한 농사를 짓고 있는지 썩을 농사만 짓고  있는지 모르겠다. 썩을 농사만 짓고 있는지 영원한 농사를 짓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면 영원한 농사, 그러면 영원한 농사를 짓는 사람은 눈에 보입니까? 안  보이는 것도 있습니까? 안 보이는 것도 있어. 두 사람이 밖에서 일하면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했다. 두 사람이 한 자리 누워 자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했다. 그러면, 똑 같은, 외모는 꼭  같은데, 껍데기 모양은 꼭 같은데 왜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했습니까? 데려감을 당한 사람은 어떻게 살았기 때문에 데려감을 당했습니까?  무슨 농사 치은 사람이요? 보이는 농사뿐 아니라 영원한 농사를 지었어.

 그러니까, 껍데기 다 보이는 농사는 꼭 같이 짓는 것 같은데 그 사람은 보이는  농사짓지 안했고 속으로는 영원한 농사를 지었다 그거요. 부활을 위해서 그  사람은 모든 것 다 투자했지 세상에서 육의 수입만 보고서 투자한 사람이  아니라.

 이러니까, 다 같이 공부를 해도 장사를 해도 영원한 부활을 위해서 투자하는  사람 있고 현재에 세상 것만 바라고 투자하는 사람 있으니까 그거는 썩을 추수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오. 알아듣겠어요.

 이러니까, 고 세 가지로 평가를 해야 돼. 모든 사람이 있다가 저 사람은 말 한  마디 하는 거 볼 때도 저거 또 무슨 말하고 있나, 어떤 사상이가 어떤 주의고,  뭣을 표준해서 살고 있나?  그 사람은 꼭 같이 썩을 것을 위해 사는 것 같지마는 한 사람들 속에 영원히  썩지 안할 것을 위해서 투자하고 있고 그 농사를 짓고 있고 하나는 지금 예수  믿는다 하지만 그 사람은 영원한 것을 생각지 안하고 썩을 것만 가지고서  투자하고 살고 있다. 그걸 볼 수가 있다 그말이오.

 저 사람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성내고, 희로애락 즐거워하고 기분이 좋고  슬프다 성공이다 하는 그 모든 것이 영원한 추수를 보고서 지금 그라고 있느냐  현재 추수를 보고 그라고 있느냐? 그러면 희로애락도 각각 다르다 말이지.

 그러면, 썩을 희로애락을 가진 사람 있고 영원한 희로애락을 가진 사람이 있어.

 이러니까, 자기도 자기를 평가해야 되겠고 다른 사람도 평가해야 되겠고 자꾸  이렇게 평가해서 우리는 이미 썩을 거 더러운 거 욕된 거, 더러운 거 약한 거  혈육의 몸 이거 가지고 있는데 이걸 가지고서 지금 영원한 농사를 짓도록 영원을  위해서 투자하는 현 행동이 되어지도록 생활이 되어지도록 이렇게 할라고 애를  쓰는 사람이 돼야 된다 그거요.

 요셉이는 온갖 비참한 생활을 했는데, 비참한 생활했는데 요셉이 비참한  생활은, 그 생활한 그거는 애굽 나라의 총리대신이 됐습니다. 총리대신이 됐는데  그것은 썩을 추수입니까? 영원한 추수입니까? 무슨 추수요? 썩을 추수야, 썩을  추수, 총리대신이 된 것도 썩을 추수라.

 그런데, 썩을 추수뿐인지 썩을 추수 속에 영원한 추수가 있는지 없는지 그거는  그 사람이 행동한 데 따라서 하나님만 아신다 그말이오. 겉어머리 그 사람이  애굽 나라 총리대신 됐다, 뭐 다윗이 왕이 됐다하는 그것은 그 껍데기 그것만은  썩을 추수라. 세상에서 있다가 없어질 그런 것을 가리켜서 전부 외식이라 그렇게  말했어. 외식이라,  그것을 가리켜서 외식이라 말했고 또 그것을 외식이라 말했고 또 다른 말로  무슨 말로 했습니까? OOO조사님. 외식이라 말 말고 다른 말로 뭐라고  표현했던고?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신다.

 외모가 뭐이냐 하면은 세상에 있다가 떠날 때 가져가지 못할 거 없어질 거 그런  것을 가리켜서 다 외모라 말이오.

 그러면, 총리대신하는 그런 거는 다 외모고 그 외모 속에 영원한 것은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 사람이 행동할 때에 하나님이 보시고 그것을 다 그대로 보응시켜  주십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생활할 때에 이것을 항상 세 가지를 생각하고  행동할 때는 해야 되겠고, 행동할 때는 이 세 가지를 생각하면서 행동해야  되겠고 땅 위에 이것 저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나 또 자본을 마련하는게 있다  말이오. 자본을 마련하는 거.

 자본 마련하는 거는 뭐이 자본 마련하는 것인가? 썩을 거 또 욕된 거 약한 거  혈육의 몸, 혈육의 몸이 병 안 들라고 위생 주의를 잘하고 또 이렇게 애쓰고  하는 그거 다 모두 혈육의 몸을 준비하는 것이라 말이오. 그 준비하는 것인데  그거 준비하는 그걸 할 때에 항상 그걸 기억하고 준비해야 돼요.

 이 준비할 때에 이거는 준비해 봤자 썩을 것, 또 성공해 봤자 욕 얻어먹을 것,  또 성공 해봤자 약한 거, 또 성공해 봤자 혈육의 것 그런데 이러니까 그  준비하면서도 그런 줄 알고 준비해야 되지 그렇지 않는 줄 알고 말이지 그게  약하지 안하고 그게 그것만 있으면 다 될 줄로 알고 이렇게 약하다 욕되다 또  썩을 것이다 혈육의 것이다 이것을 구별하지 안하고 가치를 바로 정평정가하지  안하고 요 고런 것들이다 하는 걸 가치를 평가하지 안하고 산 사람들이 노아  시대에 노아 여덟식구 외에 모든 세상으로 부강한 사람들이요 네피림이라. 다  유명한 사람들이라. 다 용사들이라. 그 사람들은 그걸 이 상식을 못 가졌거든.

암만 이래 봤자 이거 영광도 천하 영광 다 가져도 썩을 거, 그거 뒤에는 퇴박이  할 거, 이건 약한 것, 이건 혈육의 것이기 때문에 다 늙어지고 죽어지고 없어질  것 이것을 모르고 그것만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헛일됐다 그거요.

 오늘 우리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막 이 네 가지를 인해서 뭐  사생결단입니다. 이 네 가지를 인해서.

 요새 이거 내가 엊저녁에 들었는데 학생이 여학생이 둘이 그만 중학생인가 뭐  그런데 공부하다 공부를 못해서 그만 둘이 그만 약속하고 삼층에서 떨어져서  자살해버렸어. 자살했어.

 그거 만, 공부해서 세상에서 제일 일등 성공한 놈이나 성공한 년이나 그거나 고  같은 미친 짓인데 차라리 그게 일찍 수고 고생 안 하고, 막 좋은 줄 알고 잠도  못 자고 안 먹고 뭐 그렇게 안 하고 자살한 그게 낫습니다. 차라리 그게 나아.

해 봤자 내나 그게 그거라. 조금만 시간만 몇 시간만 더 지내면 내나 그게  그거고 다 한가지라,  원치 안하고, 원치 안하는 죽음을 죽어서 고생할 건데 그것들은 차라리 원해  죽었으니 용사라.

 그렇게 다 썩어질 것 대해서 가치로 삼고 아무래도 예수는 못 믿어도 그거는  가져야 된다, 새벽 기도는 못 나와도 그거는 가져야 된다, 주일은 못 지켜도  그거는 가져야 된다, 또 아무리 그래도 예수는 못 믿어도 내가 돈벌어 가지고  자식들 공부는 시켜야 하는 그것이 다 뭐이냐 하면은 이 네 가지에 대해서  정평정가를 못 해 그래요. 알겠습니까? 인간들이 이 네 가지를 성경이 말한 대로  정평 정가를 못 해 그래. 이 네 가지가 다 썩어질 것들이요 다 욕 퇴박이라. 욕  퇴박이.

 자, 그 사람이 아주 종교 중에서 제일 일등 종교 제일 큰 종교 창설자입니다.

그 사람이 욕되다니? 세상에서 석가모니로 말하면 굉장히 이렇게 높으겠는데 왜  욕돼? 석가모니 욕을 누가 해요? 욕을 누가 해요? OOO조사. 자기 뭐? 석가모니  교인들? 그러면 불교인들이 말하지. 그래.

불교인들이 지금은 막 이라고 야단을 지기는데 나중에 가서는 다 욕을 합니다.

저놈의 새끼 때문에 나는 전부 이 헛일하고 왔다, 전부 우리 죽인 것과 우리  유황불에 온 건 저놈이다 이렇게 하며 다 욕을 할거라 말이오. 알아듣겠어요?  나중에 그렇지, 뭐. 나중에 가보니까 뭐 그것 외세 뭐 어데 있어? 다 심판  밖에는 없는데.

 이러니까 전부 다 욕된 거 혈육의 젓, 썩을 것, 또 욕된 거, 약한 것, 이것을  언제든지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이런 것들이다 하는  것을 딱 결정 지운 사람은 가치를 거게 두지 안해.

 이거 가치는 얼마나 있느냐? 이거 가치가 제일이다 그렇게 날뛰지 안해. 그거  가치 있다고 뭐 아이구 이거야 뭐 썩을 거, 이거는 욕된 거, 이거는 약한 거,  이거는 혈육의 것,  ‘그러면 그거 내버려 버리지’ 아니다. 이걸 가지고서 썩을 걸 가지고서 썩지  안 할 것으로 바꿀 수 있고 이 욕된 걸 가지고서 영광스러운 것을 바꿀 수 있고  약한 걸 가지고 강한 걸 바꿀 수 있고 혈육의 몸을 가지고 신령한 몸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이게 없으면 안 된다. 이거 바꾸기만 잘하면 참 된다.

 바꾸는 거 어째 바꿔? 이거는 심어야 된다. 장래를 위해서 투자해야 된다,  심어야 된다. 이러니까 이것을 우리가 땅위에 가지는 모든 것을 가질 때에 그  평가를 바로 정가해야 돼. 바로 공평되게 옳게 정가를 해야 돼.

 이거는 얼마 가치가 있다. 그 가치는 다 썩을 것인데 썩지 아니할 것으로서  바꿀 수가 있다. 욕된 것인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바꿀 수 있다. 약한 것인데  강한 것으로 바꿀 수 있다. 혈육의 몸인데 신령한 시공을 초월해서 영원히  늙지도 않고 쇠해지지도 않는 시공을 초월한 몸으로 바꿀 수 있다. 바꿀 수  있다. 이것의 가치는 바꿀 수 있기 때문에. 그러면, 바꾸지 않으면? 바꾸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그러면, 이거 가지고 있는데 이거 가지고 있는 데에  사람들이 살기를 몇 가지 종류로 이것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이 가지고 있는 이  자본 네 가지를 몇 가지 종류로 사용하고 있습니까?, 손가락으로? 한번 뻐뜩  들어 봐요. 둘로? 둘 든. 사람 많다. 둘 든 사람 많은데 이 세 가지로 들어야  돼. 오늘 아침에 하나 더 말했지. 세 가지로.

 하나는 영원한 거 위해서 현재 걸 사용하는 사람 있고, 하나는 이 세상에서  추수해서 좋기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 있고, 그것도 저것도 희망을 위해서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투자하지 안하고 현재 것 좋기 위해서 사는 사람은 막살이  사람이라.

 자, 현재만 좋기 위해서 사는 사람을 가리켜서 뭐라 합니까? 막살이.

따라합시다. 막살이! 막살이! 막살이 소년! 막살이 청년! 막살이 노인! 막살이  젊은 사람! 이것을 구별하지 안하고 막살이라.

 이제 자기의 언행심사의 행동과 부활은 나뉘지 못합니다. 자기 언행심사 행동에  고게 연결 딱 되어 있는 영원한 부활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현재  말하는 그것은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고 그것이 영원한 것을 결정 지운다는 것을  알아야 돼.

 그러기 때문에, 제가 말하기를 현재를 뭐라 했소? 현재를 뭐이라 했습니까?  현재는 뭐라고 말했소? OOO권사님. 현재를 뭐이라고요? 현재는 뭐이라고?  OOO권찰님. 현재는 뭐이라고? 현재는 영원이라. 현재는 영원이라 말을 여러 천  번도 더 했을 것인데. 현재는 영원이라. 현재는 영원이라. 현재 이게 영원을  결정해. 현재는 영원이라 말을 얼마든지 했는데 암만 들어야 모르고 그만  귀넘어듣는 거라. 이러니까, 똑똑히 말했습니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49절에. 처음에  첫 아담 해와의 그 형체와 꼭 같은 형체를 우리가 입고 있어. 조금도 뭐 다름이  없어. 꼭 같은 형체 입었어요. 아담 해와의 눈이 둘이니까 우리도 눈 둘, 입이  하나니까 우리도 입 하나, 콧구멍 둘이니까 둘, 수족도 같고 꼭 같은 형체를  입었어.

 꼭 같은 영육의 형체를 입고 꼭 같은 형체를 입었는데 하늘에 속 한자의 형체도  땅에 속한 자의 형체를 우리가 땅에 속했기 때문에 땅에 속한 자의 형체를 입은  거와 같이 하늘에 속한 자의 형체도 틀림없이 요와 같이 입는다.

 하늘에 속한 자는 누군데? 누군데? 하늘에 속한 자가 누굽니까? 누구요? 땅에  속한 자는 아담 해와 말한 것 아니요? 하늘에 속 한자는 둘째 아담이라고 그  밑에 말해 놓지 안했어요?  그러면, 첫째 아담의 형체를 입은 것같이 우리는 또 두 번째 둘째 아담의  형체를 우리가 입는다 그 말이오. 아담의 형체를 입어. 아담의 형체는 아담은  누군데? 예수 그리스도시라.

 예수 그리스도와 꼭 같이 우리가 돼요. 그는 원형이라면 우리는 모형이라.

그거는 근본이면 우리는 거게 속한 것이라. 그가 첫 열매라면 우리는 그 다음  열매라. 그로 말미암은 열매.

 그분은 신인 양성 일위의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도 신인 양성이 있어. 신인 양성  일위는 안 되고 일행은 돼, 일행. 신인 양성 일행. 동거 동행. 신인 양성 일행.

신성과 인성이 둘이 합해 가지고서 움직임을 한 움직임을 가지고 있어.

 생각도 한 생각하고, 뜻도 한 뜻, 소원도 한 소원, 계획도 한 계획, 기쁨도 한  기쁨, 그분 기뻐할 때 나도 기뻐하고 그분과 나와 한 기쁨을 가지고 한 행동을  하고 한 계획을 가진다 그 말이오. 일행.

 또, 그분이 하나님과 연결이 돼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인성이 하나님과  연결되기를 일위 연결됐어, 일위로. 한 격위로 연결이 됐어.

 연결이 됐는데 그분은 한쪽은 하나님이요 한 쪽은 사람인데 이제 우리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연결될 때에 그분은 그분의 신성이 하나님과 하나이기 때문에  돼 가지고 있고 인성은 우리 사람과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돼 가지고서 신인 양성  일위가 하나님과 우리와의 연결된 그 연결의 결합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  결합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신인 양성을 가졌고 그분은 일위인데, 일위의 중보로,  일위의 이 증보, 둘이 신성과 인성이 둘이 붙었는데 둘이 붙였는데 아주 목수가  나무하고 나무하고 잘 다듬어 가지고 딱 들여 붙이니까 아주 틈도 없이 딱  들어붙었습니다. 딱 들어붙은 것 같이 요렇게 붙었습니까?, 사람이 구별 못 할  만치 아주 딱 들어붙었습니까? 딱들어 붙어서 한 격위를 이루었어.

 여게 대해서 격위를 이루었는데 격위를 이룬데 따라서 이러니까 하나님하고  사람하고 그만 둘이 한테 막 주 타 가지고서 이래서 그만 그 혼합이 됐다 해서  혼합설 그것도 이단이라.

 또, 하나님과 신성과 인성이 둘이 언제든지 그 붙어 있으나 이거 그 사이에  금이 있고 따로 되어 있다. 신성은 신성으로 인성은 인성으로 그래 따로 있고  한테 밀접한 관계로 따로 있다. 고것도 헛일.

 그러니까 그것도 저것도 아닌 신인 양성 한 격위를 이룬 한 격위를 한 인격을  격위를 이룬 이 결합이다 하는 것이 그것이 기독교의 바른 교리요 신조인  것입니다.

 이래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체를 우리가 입는다 하는 요것을 자기가 자꾸 또  연구를 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됩니다. 예수님 같애. 예수님은 다만 원형이요  우리는 거게 따른 모형이라. 예수님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그 인성이 신성과  하나된 그거는 한일위로 하나됐는데 그로 인해서 우리도 하나님과 우리와의  하나되기를 얼마나 하나되느냐? 동거 동행이라. 있기도 꼭 같이 있고 영원히  같이 살고 또 움직이기도 같이 움직여. 이것이 하늘에 속한 자라. 그 영광도 또  능력도 권위도 꼭 같애. 예수님의 그 인성이 전능같이 우리도 전능이라.

예수님의 인성이 전지같이 우리도 전지라. 왜?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하나님과 결합이 돼서 전지가 됐어.

 ‘그의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그의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그의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진다. 그의 힘은 누구 힘인데? 하나님의 힘이라.

‘하나님의 힘의 능력으로 우리가 강건하여지고’ 우리가 강건해져. 하나님의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져.

 이것을 보자. 우리 칼빈 선생이 어떻게 해석을 해 놨는고 요렇게 보니까 내가  그 보니까, 칼빈 주석을 있어 고걸 내가 봤어. 다른 걸 잘 안 보는데 요거는  ‘요거야 해석이 요렇게 조렇게 되겠는데 요거 어떻게 했는고 보자 이라니까  어짜든지 사람이 하나님이 은혜 주시고 그분이 능력을 주셔야 되지 능력을  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고 해석을 고대로는 바로 해 놨는데 하나님과 나와의  믿음으로 결합됨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게 아니고 그 분의 능력을 줘 그런 게  아니라 그분과 결합이 되니까 그분의 능력이 내게 와 가지고서 역사를 해서 그런  것인데 끊어지면 그만이다. 그분과 연결되니까 그분의 능력이 내가 연결이  되니까 그분의 능력이 내게 와 가지고 역사된다. 연결로 말미암아 되어진다.

 연결을 어찌 하느냐? 현실에서, 현실에서 그분의 진리와 내 진리가 하나되고  그분과 나와 진리로 하나되고 영감으로 하나되고 예수님의 대속으로 하나되고  현실에서 부인치 안하고 고대로 인정하는데 인정하고 실행하면 결합된다.

결합되면은 그분의 완전자에 결합이 되니까나는 완전자이다. 완전이나 내게  내것은 하나도 없고 그분과 결합되니까 그분이 내게 와 가지고 역사한다.

 그러면, 내가 지금 오늘 아침에 설교를 하는데 설교하는 것은 내가 받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이 아니고 그분과 나와의 연결됐기 때문에 그분이 나를 통해서 내게  오셔 가지고서 주인이 되고 나는 그분이 손을 움직이는 것도 그분의 힘으로  움직이고 입술도 그분의 힘으로 움직이고 그분이 나를 붙들고 쓰셔서 나는  당신의 지체요 당신이 써 가지고서 역사하는 것이니까 당신 떠나 버리면  아무것도 없다.

 당신과 연결된 이 믿음으로 연결돼서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그 중보자로  연결되는데 연결되면 이런 능력 얻는다. 요렇게 확고하게 깨닫는 요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감사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오늘 아침에는 이제 오늘 아침에 있다 또 가 버리면 못 들을 사람들  많은데, 우리가 자본은, 자본이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영원과 장래를 지금  행복을 만들 수 있는 자본은 차이가 있습니까? 같습니까? 자본은 같애. 선천  후천이 같애. 별 차이 없어요. 사람 보기에 차이가 많은 것 같지마는.

 다 그러면, 몇 가지 가졌습니까? 자본? 손가락으로. 네 가지 가졌어. 네 가지  가졌어. 그런데 이놈을 가지고서 장사를 하고 농사를 짓는데 이거 가지고서 지금  생활하기는 이거 가지고 사용은 이거 가지고 사용하는 그 사용 방법은 몇  가지입니까?, 손가락으로? 저 뭐꼬 OOO목사님은 처음에 둘 들다가 이제 셋 쓴다.

서이 이래 들어야 돼. 잘못하면 엊저녁에 가르친 대로 둘만 들기 쉬워. 그러니  서이 들었는데 마지막에는 서이 들었어, 보니까. 둘 들다가 퍼뜩 서이 드는구만.

그래 셋이라.

 셋인데 자, 이것도 한번 말해. 그래야 익혀져요. 제일 나쁜 것은 뭐입니까?  어째 사는 것입니까? 제일 나쁜 게 뭐입니까? 막살이 막살이, 자꾸. 막살이  막살이 막살이 막살이. 저건 마구잡이 사는 거라. 뒤도 보지도 안하고 막살이.

막살이 막살이.

 또, 하나는? 썩어질 것을 소망해서 썩어질 추수하기 위해서 썩어질 추수.

갈라디아 6장 7절 이하에 있지 안해요? 썩어질 추수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 있고  영생을 추수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 있어. 한번 읽어볼까? 7절에, ‘스스로 속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이러니까, 지금 농사짓는 사람은 세 가지라. 막살이로 먹고 사는 거 막살이  있고, 또 썩어질 추수 썩어진 거 추수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 있고, 영생  추수하기 위해 사는 사람 있고 그런데 제일 나쁜 것이 막살이라. 제일 나쁜 거  막살이. 이등은 썩어진 거 추수하는데 암만 추수해봤자 썩어진 것이라.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들은 공과를 외우고 꼭 실천해요. 공과 외우고 요대로  살아봐요. 요대로 살면 자기에게 깨달음이 있어 생활 깨달음으로서 경험 깨달음  체험 깨달음 그게 있어. 모든 사건에서 깨닫고 자기 자체에서 깨닫는 게 있어.

그래 가지고 그 학생들을 가르쳐요. 그때 외우도록 하고,  또 하루 삼십 분 기도 이거 잃으면 큰일납니다. 앞으로 환난은 삼십분 기도 그  한 사골이라야 승리하지 그 기도 안 한 사람은 승리 못합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해 놨어. 예수님 이 마지막에 세상을 떠날 십자가 못박히실 때도  너희들이 시험에 들지 않고 깨어서 기도하라 이랬어. 기도 안 하면 시험에 다  들거든. 이러니까 우리가 그것을 생각하고 어짜든지 기도해야 돼.

 삼십 분 기도를 일지 말아야 되고 또 부장 선생님들은 꾸준히, 부장 선생님들이  쉬지 않고 자꾸 그라면 밑에 그 반사들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반사들이 학생을  어짜든지, 반사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어데다 대고 길러요? 어데다 길러요? 저  OOO이. 마음 속에 품어 가지고 길러. 마음 속에 배어 가지고 길러. 마음 속에  배어 가지고 길러야 돼요. 학생이 그 마음에 떠나 버리면 학생 죽어 버려.

낙태돼요. 이제 부장 선생님도 자기 맡은 그 반사 선생님들이 자기 마음에 항상  들어 있을 때에는 반드시 부흥이 뒵니다. 잊어버렸을 때는 그만 헛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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