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와 자체

 

1986. 11. 5. 밤(수)

 

본문:베드로전서 1장 17절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그래 앉되 이 강단이 안 보이는 데로 앉으면 자기네들이 시험에 듭니다. 강단에 안 보이는 데로 앉지 마시고 보이는 데만 앉아도 얼마든지 앉을 수 있으니까 강단이 바로 보이는 데로 앉아서 눈으로 보고 또 귀로 듣고 또 마음으로 느끼고 이래서, 첫째는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바로 알고 거기 대해서 자기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자기 깨달음이 있어야 하겠고, 그라고 난 다음에는 그대로 살아야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대로 살고 싶어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에게 구하는 일이 있어야 됩니다.

예배 볼 때에 그저 졸며 실실 듣는 그 사람은 그 예배 시간에 마귀하고 합작된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생활 할 때는 마귀 그놈이 더 달라듭니다. 예배 볼 때에 조는 것을 마귀 중에 왕마귀라 그리 말합니다, 왕마귀. 호주 마귀라 왕마귀라 그렇게 말합니다.

나그네로 있을 때라는 말씀은 우리는 이 세상살이가 우리의 거주처가 아니고, 우리가 사는 곳이 아니고 나그네가 잠깐 여관에서든지 그러면 혹은 휴게소에서든지 자기가 앞으로 갈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 그 준비를 위해서 뭐 먹는 것도, 쉬는 것도, 갖추는 것도 하는 것처럼 나그네로 있을 때라 말은, 우리는 이 세상이 우리가 살 곳이 아니고 우리가 살 곳은, 잘 준비하든지 못 준비하든지 우리는 세상을 떠날 사람입니다. 떠나서 잘 믿어도 하늘나라 못 믿어도 하늘나라입니다.

택한 자들은 지옥을 갈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다 택한 자들은 하늘나라를 가게 됩니다. 또 불택자로서는 어떠한 사람이든지 다 지옥 가도록 하나님이 정하셨고 하늘나라는 가지를 못합니다. 택한 자는 하늘나라 안 갈래도 안 갈 수 없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택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예수님 믿는 일을 하는 것은 하늘나라 가기 위해서 예수 믿는 일을 하는 것 아닙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은 ‘천국 가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다’ 이렇게들 말을 하지마는 택한 자들은 천국을 안 갈래야 안 갈 수 없고 가게 됩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 잘 믿을라고 애를 쓰고, 또 잘 믿도록 할라고 모든 신앙 선배들이 권면하고, 하나님 말씀도 권면하고 하는 것은 뭣 때문에 잘 믿도록 할라고 권면하느냐? 잘 믿는 사람은 하늘나라 가서 사는데 하늘나라에 가서 살 준비를 잘 한 사람이고, 잘못 믿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가서 살 준비를 잘못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세상살이도 어릴 때는, 청년 때를 준비하는 시기요, 청년 때는 성년이 된 그 장년되는 그때를 준비하는 시기요, 또 장년들은 늙어서를 준비하는 것이 그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면 세상에서도 현재는 미래를 준비하는 현재기 때문에 미래를 생각하고 준비를 조심있게 한 사람은 그 미래가 현재로 닥쳐올 때에 평안하고 영광이 있고, 사람들이 현재만 생각하고 현재는 미래의 원인이 되는 것을 생각지 못하고, 자기가 이렇게 하면 자기 장래가 어찌 되나 하는 그거는 생각지 안하고 현재 좋도록만 하는 그런 사람은 반드시 자기 미래라 하는 것이 현재로 닥쳐올 때에는 후회하는 그런 불행스러운 사람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살이도 범사가 준비가 있고 준비한 그대로 뒤에 받는 보응이 있고 다 그러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준비하는 것도 세상 범위 내의 준비요, 거게 대한 보응을 받는 것도 다 세상 범위 내의 보응을 받지마는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초월해서 이 세상에서 세상 준비를 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무궁세계를 준비하고 살기 때문에 세상은 세상을 위해서 준비하는 시간이 아니고 세상은 남의 집이요, 우리는 세상을 떠날 사람들이요, 세상은 잠깐 지나갈 우리들이기 때문에 나그네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 준비 거기에 기울이는 것은 그것은 곧 오늘인가 내일인가 이사 갈 사람이 이사 갈 것을 잊어버리고 이사 안 가고 살 준비만 하면은 그건 다 이사 가면 헛준비가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세상을 떠나 영원히 살 곳은 무궁세계 하늘나라, 이 영계와 물질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영원히 변함이 없는 알파와 오메가가 되는 그 나라가 우리의 나라요, 그 나라에 가서 우리가 영원히 살 것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나라에 가서 살 준비를 하지 아니하고 이 세상 언제 떠날지 모르면서 이 세상에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은 나그네인 것을 잊어버리고 이사 갈 준비를 하는 사람이 아니고, 오늘밤에 떠날지 내일 떠날지 그거는 모른다고 했는데 떠날 사람이 떠나지 아니할 것으로 알고 떠나지 안하고 살 그런 준비를 하니까 그것은 다 헛된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두려움으로 지내라”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하는 말은 나그네로 있을 때에는 자기 본토가 아니고 자기 나라가 아니니까 나그네로 있을 때에 어떤 그 불량배에게 해를 당할까 그래서 두려움으로 지내라 말 아닙니다.

속담에 그런 말 있습니다. ‘도랑만 건너도 타향이라’ `도랑만 건너도 타골이라’ 다른 고을이라 말이오. 타군이라 말입니다. 도랑만 건너도 객지요 타골이라. 그러기 때문에 거게는 아무 자기 협동한 그런 친구도 없고 자기 동료도 없으니까 외롭게 된다 그렇게 말하는데 사람들은 다 그렇게 나그네는 외롭다.

그렇기 때문에 타골장을 봐 먹을라 하면은 참 힘이 든다. 장사를 해도 자기 본토에서 하면 쉽지마는 남의 곳에 가 가지고 장사할라 하면 울이 없어서 곤란스럽다 그렇게 모두 사람들이 말하니까 여게도 “나그네로 지낼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하니까 이 세상에는 아무런 자기 동료자가 없으니까 어려우니 두려움으로 지내라 하는 그런 것으로 듣기 쉽습니다. 그런 말 아닙니다.

여게 두려움으로 지내라 말은 언제 이사를 갈란지 우리가 살 영주처는 좀전에 말한 대로 하늘과 땅의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 영원 무궁 세계, 그 세계는 변하지 않습니다. 한번 그 세계에서 천하든지 귀하든지 그 세계에서 자기가 어떻게라도 대우 받고 인정 받고 또 자기가 거게서 처소와 지위를 마련한 그대로 영영히 변동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뭐 일생 동안 팔자가 안 믿는 사람들도 세 번 돌아온다 그랍니다.

그라니까 나빴다가 좋을 수도 있고 좋았다가 나쁠 수도 있다 이라지마는 하늘나라는 한번 그 심판에서 결정지워 가지고 만나게 되면은 영원히 변동이 없습니다. 영원히 변동이 없는 나라인데 이 영원한 문제를 생각지 안하고 망령되게, “에서가 한 그릇 식물을 인해서 급하다고 장자의 명분을 팔아먹은 거와 같은 그런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히브리서에 말씀했습니다.

이와같이 이 나그네로서 언제 떠날지 모르는 우리들인데 떠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또 이 세상은 내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니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내가 가서 영원히 살 그곳에서는 한번 가서 만나는 그대로 억억만 년이고 영원히 계속되니 이 중대한 문제인데, 이 세상 것이야 좋아봤자 하루 밤과 같고 나빠봤자 하루 밤과 같으니까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마는 오는 세상은 영원한 문제기 때문에 이 문제를 중요하게 여겨서 자기는 전부 나그네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 전심 전력을 기울여 모두 다 여게다가 중점을 두고 여게다가 가치를 두고 전력을 기울여야 될 터인데 망령되게 이렇지 아니하고 떠날 이 세상에다가 자기 욕망이나 준비나 모든 갖추는 것을 갖추는 그런 망령된 자가 되지 안하도록 노력해라, 그런 망령된 자가 될까 두려워하라 그말입니다.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망령된 네가 될까 두려워하라. 또 네가 준비할 기회에 준비하지 못하고 빈손 들고 영원 무궁세계를 맞이하는 비참한 자가 되지 않도록 네가 주의해라 하는 것으로서 “나그네로 지낼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왜? 거게 말씀하시기를, 17절 초절에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고”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고” 외모로 보신다 말은 그 사람의 지위도 외모요, 권세도 외모요, 자기의 모든 재산도 외모요, 그 모든 것이 다 외모인데 하나님은 외모를 가치를 삼아 가지고 외모대로 무궁세계에 그 사람을 대우하지 않는다. 외모대로 대우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뭐 이 세상에서 어떻게 존귀하고 영광스럽고 부귀하다고 해도 그대로 대우하시지 않는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행위대로 판단하신다, 요걸 우리가 잘 알아야 됩니다.

행위대로 판단하신다. 행위대로 판단하신다.

그러면, 행위대로 판단하신다는 요 말씀을 잘못 들으면 그 사람이 행한 것을 낱낱이 다 조사해 가지고 행동한 그대로 다 판단해서 갚으신다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성경에는 보면은, 요한계시 19장 8절에는 보면은 성도들이, 성도라는 것은 뭐 잘 믿는 사람이 성도가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구별된 무리라 그말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세마포 옷을 입고 있는데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하늘나라에 가서 모두 다 옷을 입고 있는데 그 옷은 이 세상에서 행동한 그 행동의 의복이다 그말입니다. 세마포 옷을 입고 있는데 그 세마포 옷은 성도의 행위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성도의 행위라 한 말씀은 이 성도들의 세상에서 이렇게 저렇게 행동한 것은 하늘나라에 가서 옷과 같이 자기가 입고 다니게 된다.

옷과 같이 입고 다니게 된다.

그러면 자기 행동은 하늘나라에 가서 사는 데에 제일 껍데기, 옷이 껍데기 아닙니까? 옷은 껍데기 아니요? 하늘나라에 가서 사는 그 껍데기는 그 사람 행동한 대로 다 껍데기가 된다 그말입니다. 행동한 대로 껍데기가 된다 그말입니다.

또, 요한계시록 20장 12절에는 보면 하나님이 심판대를 베풀어 놓고 사람들을 모두 심판을 하는데 각 사람의 행위가 책에 기록되어 있어서 책에 기록된 그대로 낱낱이 다 심판을 받더라. 자기 행위가 책에 기록이 돼서 기록된 그대로 심판을 받더라 또 그렇게 성경에 말씀해 놨습니다.

또, 마태복음 15장 17절 이하에는 보면은 사람들이 행함에 따라서 그 속에 행한 대로 모든 악이 채인 사람도 있고 의가 채인 사람도 있다. 그러면 자기가 행동한 그게, 행동한 그것이 자기 마음 안에 다 가서 재인다. 자기 행동한 그것이 마음 안에 재인다. 그러면 마음이 행동한 대로의 마음이 된다 하는 그말입니다. 행동한 대로의 마음이 된다.

그러기에, 에베소서 4장 22절 이하에는 보면은 모든 세상 풍속을 따라서 행한 그 모든 구습을 버리라. 또 사람이 행동한 것이 자기 몸에 또 가득 배 가지고 채이게 된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여게 “외모로 보시지 아니하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신다” 그말은 행위대로, 그 사람의 의복도 행위대로 되고, 그 사람의 행동도 행위대로 되고, 이런 행동 했으면 그 사람의 행동이란 건 그 행동 되고, 또 그 사람의 몸도 행위대로 되고, 그 사람의 마음도 또 행위대로 되고, 그러면 우리의 말, 행동, 마음, 뜻, 생각, 욕심 이 모든 것이 이것이 책에도 그대로 기록되고, 또 자기 행동에도 다 기록되고, 또 자기 몸에도 그것이 다 기록되고, 자기 마음에도 기록되고, 기록된다 말은 제가 발표하기 위해서 하는 말인데 거게 박힌다 그말입니다, 박힌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행동한 그것이 자기에게 박힙니다.

그래서, 우리 행동은 행동하고 그만 그 시간 끝나 버리면 아무 없어지는 줄로 그렇게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지마는 자기 행동은 행동록에 기록된다. 인간의 말로 표시하기 위해서 행동록이라는 그 책에 기록된다 하는 그말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셨는데 현재 우리가 이 세상에 자연에 나타난 것을 보면은 우리 말한 것이 그대로 다 기록돼 있지 않습니까? 우리 말한 걸 그대로 기록할 수 있다 그거요. 녹음하면 그대로 다 녹음이 안 됩니까? 또 우리 행동한 것을 사람의 힘으로서도 이 촬영하면은 그것이 다 박혀지지 않습니까? 이것을 가리켜서 자기 행위가 기록되는 행동록에 기록된 대로 심판 받는다 그렇게 한 것입니다.

지금 이 우주라는 공간에 음파라는 것이 있어서, 이 소리, 이 소리가 있는 그걸 가리켜서 음파라 이렇게 말하는데 음파란 것이 있어서 그 사람이 몇백 년 전에, 몇백 년 전에 그 사람이 어데서 단 둘이 말하고 혼자 말하고 한 것이라도 돈만 들이고 자본만 많이 들이면 그 사람의 말한 것을 이 우주의 음파 속에서 그것을 파낼 수가 있다 하는 그것을 지금 요새 사람들의 두뇌에 과학으로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만일 어떤 정치 사상에 대해서 참 자본을 많이 들여도 그 사실을 캐내야 되겠다는 그런 가치만 있다고 하면은 사람들은 거게다가 많은 자원을 들여서 캐내면 그 사람의 말한 것이 다 녹음이 되어 있다, 음파 속에 녹음이 되어 있다 하는 그것은 일반 그 과학자들이 다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또 사람이 이렇게 무슨 행동 하든지, 자기 이 고기덩어리 행동뿐 아니라 마음과 뜻과 생각과 잠깐 지나가는 그런 것도 다 그 형태가 하나님의 이 우주 필름에 다 촬영이 되어 있다. 그것을 다 이 과학적으로 그런 것들이 다 분석할 때에 나오는 것을 지금도 자꾸 발견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내라는 이 자신은, 내라는 이 자체는 이것이 책이요, 이것이 책이요, 이것이 녹음 테이프요, 이것이 사진 박는 필름이요, 이것이 자기의 모든 전체가 다 여게 솔빡 그대로 되고 있습니다. 자기가 이 세상살이에서 뭐 십 년을 살든지 백 년을 살든지 자기 산 그것이 하나도 뽑혀 나가지 안하고 그것이 그대로 산 그대로의 그 진상이, 그 실상이 그것이 똘똘 뭉쳐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하나님께서 그걸 다 그런 걸 기록할라 하면은 천하에 두어도 둘 만한 곳이 없는 복잡하기 때문에 사람이 그 하나를 가지고 거게서 추론도 할 수 있고 추상도 할 수가 있고 추측도 할 수가 있고 하기 때문에 이제 “책들에 기록된 대로” 이 말씀을 해 놨고, 또, 하나님께서 “그 행위대로 갚는데 사람의 마음의 뜻을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그러면 뜻을 살피면 그게 남아 있어야 하나님이 그거 보고 할 것 아니겠습니까? 또 “행한 대로 갚는다” 하는 그것은 행한 대로 자기는 된다. 자기가 행한 대로 자기라는 존재 된다. 자기라는 존재가 금덩이가 되든지, 똥덩이가 되든지, 악독덩어리가 되든지, 무슨 사기 협잡덩어리가 되든지, 음란덩어리가 되든지, 사기덩어리가 되든지, 무슨 잔인덩어리 뭐이 되든지 자기의 행동한 것은 하나도 없어지지 안하고 언행심사 이 세상에서 행동한 그것이 그대로의 것이 똘똘똘 뭉쳐 가지고 이제 모든 자기라는 그 존재는 그 모든 것이 다 기록돼 가지고 자기 행동화돼서, 자기 마음도 행동화되고, 자기의 모든 이 수족도 행동화되어서 그대로 되는 것이다 그것을 말씀해서 “행한 대로 갚는다” 행동한 대로 자체가 되어졌기 때문에 자체가 되어져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평가해 주신다 하는 그말입니다.

아주 옅은 말이지마는 대단히 그것도 슬기롭게 한 말입니다. 사람이 삼 년 동안을 우는 상을 그리면은 그 사람은 자기 얼굴이 우는 상이 되고 만다. 그것을 고치는 데에는 삼 년 동안 웃는 그림을 자꾸 그리면은, 자꾸 웃으면서 그려야 자꾸 그 웃는 걸 웃어 보고 이래 그리게 되니까 웃는 그림을 그리면 그 삼 년 동안 성내거나 슬프거나 하는 그런 병든 그대로의 된 용모가 고쳐질 수 있다. 그런 것들을 사람들이 다 통계를 가지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첫째로, 내라는 사람은 요대로 있는 게 아니고 내라는 사람이 한 토막 이 나그네 생활을 이래 살든지 저래 살든지 자기의 모든 세상살이 한 그대로의 자체가 되어진다, 자체가 되어진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한번 슬쩍 지나가며 생각한 것 한 생각이라도 좋지 못한 생각 그것은 다 뒤에 보기를 싫어합니다. 자기의 좋지 못한 생각 한번 그것도 보기를 싫어하지만 한번 잠깐 생각 지나간 그것도 그대로의 자기가 돼 가지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행한 대로 갚는다 그말은 언행심사에 자기가 어떤 생활했든지 행동했든지 그대로의 사람이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 되어 있는 그대로 대우한다 하는 그말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보면 참 비판과 그 평가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평가라 말은 모든 열 가지 물건이면 열 가지 물건을 두고서 ‘요거는, 요걸 얼마짜리면 요와 같은 가치로 평가하면은 요게 얼마짜리라면 요거 얼마짜리다, 요거는 얼마짜리다, 요거 차이가 얼마 된다.’ 해 가지고, 옆에 다른 전체를 비교해 가지고 가치를 정하는 거를 가리켜서 평가라 그렇게 말합니다.

또 비판이라 말도 모든 것을 한테 놓고서 비교해 가지고 판단해서 이게 옳다 그르다, 이거는 삐뚤어지다, 이거는 적다, 크다, 이거는 가치가 이거는 참 어떤 모양이고 어떻다, 가볍다, 무겁다, 이 모든 것을 다 실상을 옆의 것과 비교해 가지고 하는 것을 비판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무슨 회사를 경영하든지 가정을 이루든지 할 때에 모든 것을 정평 정가 한다면 그 회사는 흥할 것이고 또 그 가정도 흥할 것이고 그 나라도 흥합니다.

모든 것을 그 가치를 모든 데 이거는 가치가 작은 걸 많다고 해도, 적은 가치를 많다고 해도 망하는 거, 많은 가치를 적다고 해도 망하는 거, 나라도 정평 정가에서 서는 것이고 오평 오가에서 망하는 것이고, 가정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전부 다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회사에서 이 사람은 한 달에 백만 원을 줘야 될 사람을 그 사람의 실력을 잘못 오판해 가지고 그 사람을 오십만 원을 줬습니다. 오십만 원을 주면은 덜 줬으니까 회사가 좋을 줄 알아도 회사가 망해 버립니다. 왜? 백만 원짜리를 오십만 원 주니까 백만 원짜리가 거게 붙어 있을 리가 있습니까? 안 있습니다. 백만 원짜리 실력가를 버렸습니다. 또 오십만 원짜리를 ‘이거 적게 줘서 가 버리니까 이거 좀 많이 줘야 되겠다’ 오십만 원짜리를 백만 원을 주면은 또 망합니다.

가치를 적게 치면 정당한 가치 있는 것이 거게 붙어 있지 안하고 떠나기 때문에 망합니다. 또 가치 이상을 쳐서 대우해 주면은 그 회사가 그만한 외의 가치를 지불할 수 없기 때문에 또 회사가 망하게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사람도 요 조그만한 경영에서도 모든 것이 정평 정가가 안 되면은 그 무슨 운동이라도 망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지금 서로 모두 대통령 할라고 정권 욕심만 가지는데 ○○○씨가 말하기를 ‘지금 정권을 가지고자 하는 정권 야욕을 치우고, 그걸 포기하고 어짜든지 이 나라가 민주주의 토대 위에 굳게 서도록 이것을 하면은 자연히 사람들은 인정을 해 줄 것이다. 이러기에 순전히 자기라는 사람을 완전히 희생하는 데에서만 이 민족도 잘 살 수 있고, 이 국가도 잘 살 수 있고, 자신도 얼마 안 가서 잘 살 수 있다. 자기 하나를 모든 야욕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데서 되고 자기 야욕을 이룰라고 하기 위하는 데에서 민족도 나라도 다 망하고 마지막에는 제가 망하고야 만다. 이제 지금 이 데모 하는 이런 것도 이거 암만 진압할라 해야 안 된다. 정치 야욕을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나서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으로 인해서 이 국가의 모든 이 어지러운 것은 다 진정이 될 것이다.’ 그 ○○○ 그 사람이 아주 중요한 말 했습니다. 그래 그 말 했다고 그 사람 막 논평해서 굉장했었는데 그 사람이 돌아오고 나서 그 말 몇 마디 하고 나니까 다시 그 뒤에 더 재론할 말이 없어. 옳은 말인데 누가 항거를 하겠습니까? 제가 지금으로부터 한 댓 달 전인데 어데 가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아무래도 우리 나라에서는 보기에는 뭐 사람이 없다. 그래도 ○○○ 그 사람이 좀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속에 사람이 좀 든 것 같다.’ 그렇게 평가하는 소리를 듣고서, 나는 그 사람 몰랐어요. 모르는데 ‘그 언제 접해 봤는고?’ 이랬는데 이번에 그 사람이 발언한 거 하나 보니까 이제까지 발언한 모든 사람보다는 아주 탁월하게 뛰어난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대통령 선거를 하는 그것도 그 사람을 정평 정가하지 못하면 민족과 국가는 망합니다. 그 사람이 반드시 백 점짜리를 오십 점짜리로 봐도 정권을 잡을 사람이니까 나라가 망하고, 오십 점짜리를 백 점짜리로 봐도 망합니다. 백 점짜리는 백 점짜리로, 구십 점짜리는 구십 점짜리로, 오십 점짜리는 오십 점짜리로 정가 정평을 할 수 있는 그 회사라면, 그 나라라면, 그 가정이라면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 정평 정가를 하지 안하는 데에서 다 망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없는 가운데서 우주를 지으시고 영원히 통치하시는 전지 전능의 완전자이신 하나님께서 이 성도를 무궁세계의 하나님의 후계자로 세울라고 하는데 여게 대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정확한 정평 정가가 있겠습니까? 이거 우리가 좀 생각해야 됩니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정평 정가하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우리 앞에는 절대 정확한 정평 정가의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는데 오늘인가 내일인가 우리는 그 심판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시시비비하는 거게 대해서 상대하고 거게 대해서 뭐 염려나 또 이런 저런 시비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4장에 바울은 말하기를 “모든 사람들의 그 공론 중론은 내가 매우 경한 것으로 본다” 이렇게 했어. “매우 경한 것으로 본다.

나도 내가 어떤 내인가 이것도 나도 내가 나를 믿지 못한다. 왜? 내가 모르는 게 많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그분,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그분이 심판에서 모든 것을 정평 정가해 가지고 무궁세계의 대우를 할 것이니까,” 그것이 우리 앞에 곧 있으니 오늘에 자기는 죽기까지 힘써서 정평 정가의 그 나라가 있으니까 하후하박이 없으니 자기가 할 수 있는 대로 힘써 가지고 조그만치라도 그때에 잘못됨이 나타나지 않도록 노력할 일이지, 천인 만인이 나쁘다고 해 줘도 하나님이 거게 많은 공론에 설복당할 하나님이 아니고, 또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자꾸 계속해서 호소를 한다고 해 가지고 하나님이 그 호소에 피동될 하나님이 아니시고, 모든 것을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그분 앞에 나타나서 우리가 그분의 판단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고 조심해 지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행한 대로 갚으신다 말은 우리의 행함이라 하는 것은 결단코 행함은 따로 있고 나는 따로 있지 않습니다. 제가 거짓부리로 ‘이 행하는 것은 내가 진실히 행하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행하는 게 아니고 이거 내가 거짓부리로 이제 장난삼아 행한다’ 해도 행한 그만침은 자기가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의 언행심사라는 것은 그것이 자기의 행동록, 자기의 몸, 또 자기의 마음, 자기의 그 영에게 그대로 다 촬영되고 녹음되고 자기 일생을 어째 살았든지 산 그대로의 것이 자기가 돼 가지고 있는 이것이기 때문에 “나그네로 지낼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행동이 책에 기록하고, 또 우리의 하늘나라 의복에 기록되고, 우리의 몸에 기록되고, 또 우리의 마음에 기록되고, 우리의 모든 성질에 기록돼서 그만 내라는 자체는 이 세상에서 언행심사 행동한 그대로의 조성품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알겠습니까? 그대로의 조성물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내라는 이 존재는 이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언행심사를 했든지 세밀히 털끝만한 것도 빠지지 안하고 그대로 다 자기가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의 행동은 자기를 조성하는 것이라. 조성하는 것이라.

자기라는, 말하자면 여게 어떻게 묵사지 위에다가 종이를 놓고서, 묵사지를 위에다 덮어 놓고서 주 그리면 위에 그린 데는 새카마이 잘 안 보이지마는 나중에 들어보면 뭐 삐친 것, 찌트린 것, 점 찍은 것 다 기록되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언행심사 행동은 이 세상에는 그거 보이면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도록 이래 했지마는 언행심사 그대로 이다음에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서 심판대 앞에 갈 때는 환하게 다 드러나게 됩니다. 다 드러납니다. 하나도 변하지 못합니다.

이런데 다만, 그러기에 “모든 것이 다 풀어지고 그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고 모든 것이 드리나리로다” 했습니다. “모든 것이 드러나리로다” 이라니까, 오늘의 자기가 그때 드러나서 수치스러울 것을 오늘에 이것을 고치면 자기에게어떤 사람이 그래 말했읍디다. 이 낯에 흉측한 병이 들었는데 그 병이 들어서 그게 완전히 치료가 되니까, 치료가 됐으니까 병도 그런 것도 없고 다른 사람이 전염병이 아니니까 조심도 안 하고 서로 이렇게 친근하게 지내지마는 그 흉터는 없어지지 않는다. 그 흉터는 없어지지 않는다. 세상에서 어떻게 해서 그것이 있으나 흉터는 없어지지 않는다. 자기가 그 죄를 회개했다 해도 흉터는 없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말했는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예를 들어서 김의근이라는 그 사람이 있었는데 김의근이. 옳을 의자 뿌리 근자, 김의근이라 하는 그 사람이 왜정 말년에 일본 사람 앞잡이가 돼 가지고 우리 나라 사람을 만주에서 굉장히 많이 죽였습니다.

죽인 사람인데 그 사람이 예수님 믿고 난 다음에 그 죄를 회개하고 여생에 인간 구원에 대해서 다 바쳐서 굉장히 깨끗이 살았습니다.

굉장히 깨끗이 사니까 그 사람에 대해서 누구든지 소개할 때에는 ‘이 사람이 과거에 이렇고 이렇고 이렇게 이렇게 아주 천하에 제일 못쓸 사람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런 사람 됐다’ 하니까 과거에 그 흉한 것이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지고 고친 게 영광이 되어져 가지고 흉터 있는 것이 도리어 영광될 수 있는 이것이 예수님의 대속하에서는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이라는 이 오늘에 그 모든, 드러나기는 드러나는데 드러나는 그것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회개함으로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고 자기에게도 영광이 될 수 있는 일이 될 수 있다 하는 것을 말씀을 하신 것을 봤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밤에는 우리가 내라는 이 모든 사람의 이 세상에서 어떤 언행심사 행동하든지 행동한 그거는 없어지지 않고 행동한 그것이, 언행심사의 행동한 그것이 바로 내가 된다는 거 요것을 기억합시다, 언행심사 그것이 내가 된다는 것.

내라는 것은 오십 년이니 육십 년이니 칠십 년이니 살았으면 칠십 년 산 나는, 사람들은 봐야 모르지마는 칠십 년 산 나는 내라는 이 존재가 이 세상에서 믿기 전 믿고 난 다음에 이렇게 저렇게 산, 자기의 어떤 생활 했든지 생활한 그것이 그대로 촬영되어 있는 것처럼, 녹음되어 있는 것처럼 생활한 그대로, 그대로의 자기로서 나타내고 있는 요 존재가 되어진다. 그대로의 자기로서 자기가 만들어져 가지고 있다. 만들어져 있는 그대로 하나님이 평가하시고 비판하신다. 그러기 때문에 그대로 하나님이 정확하게 정평 정가해서 갚으신다, 대우하신다. 갚으신다, 대우하신다. 그것을 여게서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하나 광고합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이 춥기 전에 구천 고개를 넘어야 될 터인데 주일학교가 팔천삼백 얼마인가 이래 되고 아직까지도 구천에 한 육백여 명인가 미달됩니다.

이런데 이 추위가 지금 닥쳐오는데 이 추위 전에 우리가 이 한계의 절정을 넘어야 되지 지금 이 추위 전에 넘지 못하면 겨울에는 헛일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지난번에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들과 의논하기를 어짜든지 요번 주일에는 잊어버린 양을 찾아서 구천 이상을 우리가 수를 넘기도록 그렇게 하겠다 그리 의논도 하고, 우리가 약속도 하고, 작정도 하고, 힘쓰겠다고 했는데 그 명심합시다.

여러분들 어짜든지 힘을 써서, 힘을 써 가지고 요번 주일에는, 우리가 이렇게 힘을 쓸라고 하는 것만치 하나님께서는 또 요번 주일을 더 춥게 해 주실란지 모릅니다.

또 요번 주일에는 지장이 더 많이 있게 하실란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전부 우로, 한서, 풍우 다 당신이 주권으로 지금도 조절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거 보지 안했습니까? 장생골 집회 할 때에 더운 것도, 추운 것도, 비오는 것도, 바람 부는 것도, 이것 뭐 전부 다 당신이 조절하고 있지 않습니까? 전부 세밀히 다 조절하고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날은 지금 구천을 넘길라 하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좀 도우셔서 좋은 일기 따뜻한 일기를 주실까 그런 생각 가지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어짜든지 우리를 연단해서 강철같이 우리를 만들어서 어떤 역경이라도 이길 수 있는 자를 만들라 하는 것이 하나님이시지 우리를 약자 만들라 하는 하나님 아닙니다.

이러기 때문에, 다음 주일에는 어떤 그 어려운 역경이 올란지 모르니까 ‘어떤 역경이 와도 나는 주님 앞에서 이제 작정한 대로 나로서는 내 반에 얼마 이상은 내가 올리겠다’ 하는 그 목표한 것을 해 놓고 기도도 많이 하고 이렇게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자,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들, 요번 주일 같이 좀 힘을 씁시다. 해서 같이 힘을 써 가지고 어짜든지 구천 이상 되도록 한번 하나님께 기도하고 이렇게 힘써서 해 볼라고 하는 이런 욕망을 가지고 같이 우리가 협력해 가지고 그렇게 구천 고개를 넘기도록 이렇게 하겠다는 요런 소원을 가지고 요렇게 서로 우리가 하기로 작정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요렇게 요 구천 고개를 넘기도록 요렇게 할 각오를 가지고 거게서 또 요렇게 넘길 수 있다 요거 성숙시킬 수 있다, 성공시킬 수 있다 하는 요런 확신의 믿음이 있는 반사들만 한번 손 한번 들어 봅시다.

여게는 반사들 없습니까? 여게는 반사들 없소? ○○○이는 반사 아니가? 이래 들어야지 요래 들으니까 내가 안 보여. 모두 안 드네. 자, 높이 들어봐요, 높이.

○○○? 할 용기 없어? 반사 아니가? 반사 아니야? 그러면 우리 한번 그래 해서, 자꾸 기도해요. 기도하고 힘써야지, 기도해야 내 속에 힘이 나옵니다. 기도해야 내 속에 힘이 나오고, 또 기도해야 하나님이 내 속에 힘을 주니까 내 속에 힘이 나온다 말이오. 기도해야 하나님의 힘을 끌어올 수가 있고 기도해야 내게 있는 이 모든 어두움이 물러가야 이제 광명의 힘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고 새벽기도 못 나와요, 모두. 새벽기도 못 나와서 참 탈이라. 저 뒤에 와 전멸이 됐습니까? 새벽기도 어짜든지 내일 새벽에 나오기로 한번 작정, 또 하고 또 실패해도 또, ‘뭐 만날 작정해도 실패인데’ 아니오. 작정하고, 작정하고 실패하는데 하루 몇 번이나 실패해도 작정하라 했습니까? 몇 번 했소? 일흔 번씩 일곱 번. 그러면 칠칠은 사십구, 사백구십 번이라. 사백구십 번 넘어져도 또, 또 작정, 또, 또,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이렇게라도 해서 자꾸 해 나가야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자, 내일 새벽에 새벽기도 이제 나오기로 작정하고 못 나오면 밥을 굶어도 굶어서, 그 사람들은 다 나와요, 보니까. 새벽기도 나오든지 밥을 굶든지 그래 가지고 그래 어떤 가정은 말 들어 보니까 새벽기도 아예 못 나오면 밥을 안 한대요, 그만. 밥을 안 하기로 해 가지고 그렇게 하는데 그 가정은 살아.

내일 새벽에 새벽기도 나오기로 작정하고 못 나오면 밥을 굶기로 그렇게 작정해서 하나님의 노를 풀고 하나님의 소원하는 그 소원을 들어 드리기로 자기가 작정하는 사람 손 한번 듭시다. 에이고, 저 ○○○집사는 보니까 작정 이래 한다. 이래 가지고 있다가 ‘작정하는 사람 손 드십시오’ 들어볼까 말까? 힘빠져, 그거 보면. 그거 보면 밉상이라 말이오.

이라면 다 요래 들고 있으면 ‘자, 그런 사람 손 듭시다.’ 막 여기 누구 가운데 이라더라, 이래. 그러면 기분이 좋다 말이오, 기분이 좋아. 우리가 어짜든지 내일 새벽에 그리 하도록 한번 해 봅시다.

그러고 여러분들 지금 우리가 한 사람이 한 사람 이상으로 전도해 나오기로 했는데 기도하고 전도하고 나오게 하는 그것이 제일 좋은 방편입니다.

○○○교회서 총동원 그 운동을 했는데 어제 거게서 주보를 가지고 왔는데 그 주보를 보니까 네 번 예배본 데에서 총합계가 이천팔백입니다. 이거 보니까 그렇게 막 총동원하는 그런 것 가지고 잘 안 된다는 거, 그거 가지고 잘 안 되고 그게 아마 좀 실패봤다 하는 것이 그거 보여집니다. 그전에 상당히 교인이 많았다 하는데 네 번 봐 가지고 이천팔백 명이니까 얼마 됩니까? 이런데, 그저 우리가 성경이 말한 대로 우리가 부지런히 기도하고 전도하고 권면하고 이래서, 기도하고 호별 방문하고 개인 전도하고 자꾸 이래 가지고 그 전도해서 복음 전해지는 것이 이것이 성경대로입니다. 이러니까 다른 이상한 방편 쓰는 사람들, 아마 좀 있으면 그거 다 헛일이라 해 가지고 그 바람이 없어질 것이오. 그거 처음에도 제가 그거 보고 좀 안됐다 이렇게 하기는 했지만 열심은 좋아했는데 그 결과가 그렇게 좋지를 못한 것같이 보여집니다.

이러니 여러분들이 우리 전도하는 거 세계의 전도의 통계가 주일학생을 통해서 전도된 것이 세계에서 제일 최고로 숫자가 많습니다. 이러니까 안 믿는 집에 가 가지고 전도하는 그것보다도 학생만 하나 나와도 ‘안녕하십니까? 집에 아이들이 나오데요.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학생 하나 나오면 그것이 끈이 됐다 말이오.

그러면 거게서 부모님들에게 그 학생에게 대해서 감동받아 학생들을 잘 가르쳐서 부모가 감동받고 자꾸 이라면은 그 학생 하나를 가지고 ‘요 학생의 부모가 감탄할 만치 요 참사람을 만들어 드려야 되겠다’ 하는 요 생각을 가지고 노력을 하면은 부모네들도 안다 말이오. 그러면 그 아이를 통해서 자꾸 전도가 돼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는 주일학교가 지금 세계에 뭐, 그거는 뭐 말로 그런지 몰라도 세계에 최대의 주일학교, 어린이 교회라고 하는데 이래 됐으니까 이 학생들을 통해서 어짜든지 부모네들이 감탄할 만치 그 학생을 사람 만드는 데 주력만 하면은 이 전도하기는 제일 밑천이 잘돼 가지고 있고 아주 자본이 튼튼히 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학생들 통해서 그 부모네들 전도하도록 우리가 힘을 쓰도록 합시다.

인제 내일 새벽에는 이만치 나와요. 내일 새벽에는 이만치 나오면은 한 이천 한 오륙백 명 될까, 이래도 삼천 명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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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71 행한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 갈라디아서 6장 6절-9절/ 1981년 3공과 선지자 2016.01.11
5370 행하면 기적과 축복/ 야고보서 2장 26절/ 1985. 10. 4. 지권찰회 선지자 2016.01.11
» 행위와 자체/ 베드로전서 1장 17절/ 1986. 11. 5. 수저녁 선지자 2016.01.11
5368 행위대로 판단/ 베드로전서 1장 17절-19절/ 1985. 3. 29. 지권찰회 선지자 2016.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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