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부족한 것이 흠


선지자선교회 1984년 5월 9일 수후집회 

 

본문 : 마가복음 10장 21절∼31절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라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계속 이 본문을 읽고 말씀을 증거하려고 하니까 아마 여러분들 가운데에 혹 이  본문을 또 읽을라고 시작할 때에 무슨 다른 본문을 읽고 가르쳐 주실란가 이렇게  생각했다가 또 이 본문을 읽고 하니까 마음에 고만 권태가 나고 시험에 들어서  처음부터 여기에 대한 욕망을 가지지 아니하고 졸음에 사로잡히는 사람이 있을까  좀 염려가 됩니다.

 양을 안 먹여 봤지만 양이나 염소나 그 종류가 비슷한데 염소를 먹여 보면  그것이 한 가지 풀을 많이 오래 먹지 안하고 요것 조금 저것 조금 이렇게 자꾸  번갈아 그렇게 먹는데, 이거 교인들도 이것도 가르치고 저것도 가르쳐서 이 진리  저 진리 이렇게 바꾸어 섞어서 먹여야 잘 자라지 않나 그런 생각도 제가  가집니다.

 그러나 제가 자꾸 이 본문을 읽고 자꾸 시작하는 것은 제가 증거할 대로 증거를  충분히 하지 못했다 하는 그게 있기 때문에 내가 공연히 한 성구도 바로  증거하지 못하고 자꾸 성구만 바꾸어서 이렇게 하면 마치 음식을 할 때에 설어서  재료만 버리지 쓰지 못하는 것처럼 이렇게 모두 다 가르침에 이번 집회가  선집회가 되지 않나 그래서 또 시작하고 또 시작하고 합니다. 한 말씀이라도  바로 가르쳐서 또 이 말씀이 듣는 자들에게 참 복음이 되어야 할 터이니까  복음이 되도록 가르칠려고 하는 그것을 목적을 삼고서 그렇게 가르칠라고 하니까  가르치는 사람도 충분히 가르치질 못한 것이 마음에 유감스럽고, 또 듣는  사람들도 충분히 들어서 깨닫고 자기 복음으로 삼지 못하니 유감스러워서 또  다시 시작하고 시작하고 그렇게 시작을 합니다.

 그런데, 듣는 여러분들이 내 마음과 같은 그런 마음이 돼 줬으면 좋겠습니다.

배웠으나, 배웠으나 아직까지도 확신이 없고, 배웠으나 아직까지 똑똑히 모르고  이 말씀으로 확정을 지어서 이제는 서슴지 않고 더듬지 안하고 바로 이 말씀대로  달려갈 수 있는 내가 되지 못했으니 마음에 안타깝고 걱정스럽다. 이러니까 이번  시간에는 내가 이 말씀을 참 내게 영생으로 역사하고 지능으로 역사를 해서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도록 내가 먼저 확신을 가지는 이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하는  이런 마음을 가지고 또 새로 시작합시다.

 무엇을 했다가 안 되면 낙망하고 만 사람은 성공을 못 하지만 자기가 해 가지고  안돼서 실패할 때에 다시 실패를 원통히 여기고 또 새로 욕망을 가지고 또  시작하고 시작하고 하면, 그래도 그 욕망을 가지고 또 실패한 그 점을 자기가  가지고 새로 새로 시작하면 한번 시작할 때에 다만 얼마씩이라도 좀 나아지고  나아져서 결국 그 사람이 그것을 후퇴하지 안하고 계속 한다고 하면 성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심정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도를 듣는 사람들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저 구경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가 실지로 실행을 해서  구원을 이룰라고 하는 것보다도 다만 지식으로만 그저 가질라고 하는 그런  정도의 사람이 되면 이 말씀은 아는 지식이니까 사람은 자꾸 욕망이 있어서 아는  지식은 그만 두고, 아는 지식은 아니까 모르는 지식을 또 새로 배워서 채워야  되겠다 하는 그런 다 지식의 그 욕심이 그렇게 있는 것인데 한 번 들어서 안  것은 두 번째는 자기의 기대한 데는 전혀 공과 같이 아무것도 없는 헛탕이 되기  때문에 잠도 오고 마음도 풀어지고 그렇게 재미도 없게 되는 것으로 그렇게  압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똑똑히 알아서,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말씀입니다. 어떤 말씀이든지 어느 절수이든지 그 말씀은 이렇다  했으면 내가 그대로 믿고 행할 때에는 거기에는 뭐 대적이나 마찰이나 방해되는  것이 크고 작은 것이 상관이 없습니다. 그대로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있는, 능력 있는 말씀인데, 그게 이루어져 가는데는, 그 말씀대로 내가 실행해서  그 말씀대로 성공이 되어져 가는 그 경로에는 제일 어려운 것이 뭐이냐 하면, 그  말씀대로 해서 성공이 이루어져 가는 데에 제일 어려운 고비가 있습니다. 제일  어려운 고비가 있소.

 제일 어려운 고비가 있는데 그 고비가 뭐인고 하니 그 말씀대로 나는 성취를  시킬라고 이렇게 해 나가는데, 우리가 보기에 '도저히 이거는 헛일이다.

헛탕했다. 이 말씀대로 내가 이제까지 해 볼라고, 이대로 성취가 되도록 하려고  애를 썼지만 이제는 전후좌우 모든 것을 봐도 이는 실패다. 절대 불가능하게 안  된다. 또 이제까지의 통계를 봐도 이 말씀대로 행하려고 하는 데에 벌써  배경들이 다 이렇게 돼 가지고 있으니 이런 환경이 되어 있는 데에 이 말씀대로  내가 할라 하는 이대로에 성사되는 일은 없다.' 이래 가지고서 자기가 처음에는  소망을 가지고 시작을 했지만 가다가 낙망하지 안 할 수 없고 다 포기하지 안할  수 없는 그런 고비가 옵니다. 그것이 제일 어려운 고비인데, 그것이  기독교에서는 성공의 앞잡이입니다. 성공의 앞잡이. 그것이 오고 난 다음에  성공이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밤중이라 그렇게 비유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취시키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  나갈 때에 그 말씀대로 행하려는 그 욕망이 달성되지 못하게 하는 모든 조건들이  아무리 일어나도, 아무리 일어나도, 피조물들이 들어서 그렇게 방해를 하는  것인데, 그 조건들이, 방해하는 조건들이 많이 일어나니 나로서는 도저히 안  된다. 그러나. 방해하는 조건들도 강하기는 강하고 위대하기는 위대하지만  방해하는 조건보다 내가 복종하는 이번 이 일에 대해서 복종한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신데 이 말씀은 그것들보다 더 크고 강하다.

 또 이 말씀을 나에게 선택해서 이대로 하라 하신, 내 안에서 영감이 알려 준 그  영감은 또 이 진리보다 더 크시다. 진리는 엿새 동안에 모든 것을 창조한 그  시공한 능력이요, 또 이 시공할 수 있는 능력을 호령하고 명령하신 분이 곧 내  안에 계시는 영감이요, 영감이 하나님이시니까 아무리 그래 봤자 문제가 없다,  해서 자기 믿음으로 그런 걸 능가할 수 있는 그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뭐냐? 그것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는 것이요, 진리를 진리로 대접하는  것이니 그것이 '저가 나를 안즉' 하는 것입니다. '저가 나를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하신 그 약속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을 때에 내가 이 말씀대로 앞으로 실행해  나갈라고 하면 어떠한 그런 마찰이 있을 것이며, 또 대적하는 세력들이 있을  것인가? 그 세력들을 우리가 예비, 미리 미래의 것을 예비하는 예비 영감을  받으면 거기에 대한 것을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정확히 알 수 있는데, 예비  영감을 받은 사람들은 미래에 내가 이와 같이 하려고 하면 마찰이나 대적들이  있겠는데 거기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더 넘어가서, 넘어가서  과대하게, 과대하게 알게 됩니다. 귀대하게 알게 돼요. 꼭 정확하게 그 실상  만침 알기는 어렵지만 미래적 예비적 영감을 가지는 사람들은 고 미래에 대해서  좀 지나치게 더 크고 많게 그렇게 자기가 알고 예비를 하기 때문에, 그 예비는  사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그 예비를 지나치게 투자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손해  가는 것이 아니고 사람 만드는 일인 것이기 때문에 하나도 허비는 안 됩니다.

낭비는 안 됩니다.

 그래서 현실을 닥쳐 보면 오히려 예비한 태에는 한 열 개나 있어야 되리라  생각하고 열을 예비했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까 다섯 개도 안 되니까 그까짓 거야  누워서 가도 갑니다. 누워서 가도 가요. 그것이 예비 영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지나간 신사 참배 때도 저 평양에 있는 오 장로님이라고 오 형선  장로님의 백씨 되는 장로님인데, 그 장로님은 예비적 영감으로 얼마나  준비했든지 그때에 그들이 다른 사람들은 감옥에 가뒀지만 그분은 가장 신사  참배를 반대하는 일을 많이 주재하는 장로님인데 그 장로님은 가두지를  못했습니다. 가두지 안했습니다.

 가뒀다가 내놨어. 내놔서, 내놓으면 또 거리에 다니면서 신사 참배 반대하는 그  전도를 자꾸 하고 다닙니다. 그래도 그분이 갇히지를 안하고, 끝까지 갇히지  안하고 그라고 있다가서 일본 나라가 손을 들고 끝을 마쳤습니다.

 이러니까 다니엘 같은 사람도 자기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나 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그런 일에 대해서는 앞으로 어떠한 마찰이 있을 것이라  하는 것을 예비적 영감을 받아 가지고 준비를 했었는데, 준비를 했었는데 준비한  그대로 하나님에게 한 달 동안은 기도하지 말아라 하는 그 어려움이 와서 사자  구덩이에 이제. 다른 뭣에게 기도하고 그 왕을 향하지 안하는 자는 다 사자  구덩이에 넣어서 사형을 시키겠다 하는 그 조서가 자기에게 왔고 또 그 조서가  온 전 국민이 다 받아 가지고서 알고 있는 그 소식을 듣고 다니엘은 심히 떨며  근심하지 아니하고, 아주 기다리고 기다렸던 그 반가운 분이, 반가운 분이 오는  것으로. 또 이 반갑고 참 사랑하는 분에게 아주 대접할 수 있는 좋은 선물이,  좋은 식물이 자기에게 소식 들려오는 것과 같은 그런 기쁨을 가졌습니다. 가져  가지고 감사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분이 뭐 상을 찡그리거나 염려하지를 안하고 감사하면서 기도를 하고, 또  그렇게 다리오 왕과 자기와의 관계가 그 전에도 말했지만 참 어려운 입장입니다.

그분이 뭐 강제 아니고 하루 종일 왕이 신하에게 사정을 했으니까 그 사정하는  사정에 거절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래도 보면 다니엘은, 우리  생각에는 참 어려운 일이지만 뭐 다니엘은 어렵게도 생각지도 안하고 그저 뭐  보통 일로서 '아, 안 됩니다.' 또, 말하면 '아, 안 됩니다.' '아, 이번만 그리  해라.' '안 됩니다.' '속으로  기도하든지 말든지 겉으로나 기도하는 모양이나  나타내지 마라.' '안 됩니다.' 그렇게 아주 쉽고 수월하게 됐고, 묶어 가지고  사자 구덩이 넣었을 때에. 그 때 사진기가 있었으면 좀 지금 같으면 박아  봤으면, 아마 다니엘의 얼굴에 기쁨의 희색이 만만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이 다 어디서 생겨졌는가? 하나님에게 간구해서 어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지 아니하려는 그 간절한 마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이고 또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을 간절히 바라서 벌써 그 해결을 지운  것이고, 또 하나님께 영광 돌릴 만한 자신만만한 그런 벌써 대비가 단단히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자꾸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마가복음 10장에 있는 이  말씀을 자꾸 읽습니다. 자꾸 읽고, 그저 이 시간에도 이 말씀 저 시간에도 저  말씀 자꾸 그래 증거하는데, 제가 보기에 내가 증거가 미진하다는 것은 증거를  하면 증거하는 사람들이 이 말씀에 대해서 예비적인 영감을 받아 가지고 이  말씀대로 앞으로 실행을 해야 구원이 되어지는 것이지 실행하지 안하면,  실행하지 안하면 구원이 안 되는 것인데,  그 실행을 하려고 하면 앞에는 태산 같은 그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을 나는 똑똑히는 모르기는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그래도  얼굴에 나타난다 그거요. 얼굴에 나타나는데 그 얼굴에 보면 얼마나 근심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지금 걱정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지금 마음에 난제라고 그에게  감동이 되어 있는지 하는 것을 보면 대략 알 수가 있는데, 여러분들의 피부를  보든지, 눈을 보든지, 뭐 얼굴의 용모를 보든지 태도를 보든지 하나도 거기  대해서 두려움의 마음이나 염려하는 것이나, 어려움이 앞에 있다. 이 말씀대로  실행하면 어려움이 있다 하는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느끼는 것이 피부를 볼 때에  하나도 안 보여집니다. 교만이 그대로 있소. 여러분들의 안면에 교만이 그대로  있습니다. 배짱이 그대로 있소, 뭐 애비에 대해서 염려하는 안색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니까, 이거 내가 증거를 잘못했으니 또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심하고 담대히 유유하는 사람들인데 보면 이 문제가 큰 문제는 닥치지  안하고 사소한 일, 사소한 일을 닥쳐도 턱턱 쓰러지고 꼼짝을 못 하는 것을 자꾸  보는데, 실은 이 말씀대로 나갈려고 하면. 한 절정의 잿만당을 넘어갈라 하면  아직까지 감감한 조그만한 평지보다 조금 도도록한 고런 조금 언덕만 돼도 다  꺼꾸러지고 그 언덕을 채 올라가지 못하고, 찰싹거리는 얕은 물에서도 놀래고  지금 다 뒤비지는데 이 말씀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여러분들의 패전이 내 패전이요 내 패전이 여러분들의 패전인데,  앞으로 이 말씀을 주시는 것은 이 말씀이 반드시 경고의 말씀이요 우리에게  예비시키는 말씀인데, 이 말씀에 대해서 아무런 예비에 대한 관심도 가지지  아니하고 그저 이렇다는 것을 지식으로 대략만 듣고서 마니까 정죄 밖에는 받을  것이 없으니 내가 몇 시간 증거해 봤자 여러분들 정죄 받구로 한다면 그거는  증거 안 하는게 낫지, 증거한 결과가 정죄만 받고 구원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그 무슨 효력이 있습니까?

 이번에 중요한 말씀들을 주셨는데, 우리가 만나는 그 현실은 필요하고 요긴한  현실이라는 그 현실에 대해서도 우리가 똑똑히 배웠고, 또 이 현실은 무엇을  하는 것인가도 똑똑히 배웠고. 그러면, 이 현실에서 어떻게 하면 제일 좋은  보배로운 5가지 구원을 이룰 수가 있는가 하는 것도 똑똑히 배웠고, 이제까지  모두 다 사람들은 땅에 붙어서 세상에 속해서 살았는데, 그 세상에 붙어 속해  살던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만 소망하고 모든 걸 세상에 소망을 둡니다.

무엇이든지 세상이 해 줘야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있는 그 기도실 옆에 바로 고 앞이 부산 의과 대학, 부산의대 병원인데,  그 병원에 보면 그 많은 집이 칸칸이 불이 꺼져 있는 방이 없습니다. 전부 불이  다 켜 있소. 나는 가보지 안했지만 칸칸이 환자들이 다 들어박혔구나.' 하는  것을 짐작을 합니다. 그래 또 모자라서 오데 보니까 큰 집이 지금 하나  지어지는데 '저거 무슨 집이 갑자기 저래 지어지노?, '아, 그거 병원 아닙니까?  병원 아닙니까?' 그래 말해요.

 이렇게 세상에, 땅에 속한 사람들은 의례히 땅의 것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해결하리라고, 전부는 땅의 것으로 해결하리라고 해서 땅에다가 소망을 두지만  이렇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땅에, 세상에, 피조물에게 소망을 두고 의지하고  그것이 시키는 대로 따라 복종하는 이 말세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뭐인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모든 사람이 땅의 것을 의지하고 바라보는데  너희들은, 없는 가운데 모든 걸 지은 받는, 지음을 받은 그 모든 것보다 내가  크니까 그것 바라보지 말고 나를 바라봐라. 그것을 의지하지 말고 나를  의지해라. 그것에게 피동되지 말고 나에게 피동되라. 하나님이 그것을 의지하고  바라보라고 명령하신 것을 바라보고 의지하지 않으면 죄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연을 우리에게 주셔 가지고서 자연을 사 용케  하기는 했지만 하나님이 자연을 사용케 하신 그것은 사용하는 것이 의요, 사용치  말라고 하는 것은 사용치 안하는 것이 의요, 그것들을 바라보고 의지하지 말라는  것은 의지하고 바라보지 않는 것이 의요, 바라보고 의지하라고 할 때는 그것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이 그것이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간단하게 세 가지를 말했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좀  살펴 가지고, 새겨 가지고서, 새김질해서, 너무 제목을 많이 내놓으면 안 되니까  하나를 가지고 자꾸 생각하고 생각하면 거기에서 나온다 그거요. 생각하면 자꾸  나와요. 그것만 생각하면 거기에 조건 여건들이 다 나오고 그와 관련된 모든  수많은 배경들이 다 나와요.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대책을 세워야  되겠다. 어떻게 대비해야 되겠다, 하는 것도 다 나와요. 이러니까, 그것이 다  복잡해서, 그 일이 우리 할일입니다. 그래 가지고 이기면 다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들을 때는 작정을 하든지 안 하든지 하나님  편에서는 판정이 난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은  말씀이 있지만 여러분들이 생각해 보면 알 것입니다. 그 말씀을 읽어가는  가운데에 그 말씀이 나에게 딱 알려지고 깨달아졌습니다. 깨달아겼으면  이제까지도 나에게 명령하시고 요구하신 것이지만, 알고, 딱 그 말씀이 딱  깨달아지고 생각이 나졌을 때에는 고때에 그 말씀은 나에게 명령이 떨어진  것입니다. 명령이 떨어진 것이오.

 또 자기에게 사람이 들려 주든지 어떻게 들려 주든지, 강단에서 그 말씀을  들려서 평소에는 거기 대해서 관심을 안 가졌는데, 강단에서. 이렇게 하라  그렇게 강단에서 설교가 떨어졌으면 저는 책임을 지든지 안 지든지 자기에게는  벌써 그 말씀은 명령적으로 떨어졌습니다. 명령적이오. 이행 안하면 벌이옵니다.

 이러니까, 이번 집회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이 말씀도 우리에게는 벌써  이것이 명령으로 받았어. 그러면, 명령으로 받아서 '아이구, 집회 참예해서 자꾸  명령만 받아 가지고 책임만 짊어지니까 문제네. 그 명령을 받아 가지고서 책임을  짊어져서 잘하면 구원이 될 것이고, 잘 안 하면 벌이 될 터인데.' 명령을 받고  안 행해도 벌. 명령을 받으라 하니까 받지 안하고 그대로 다 반대해서 받지  안해도 벌, 알고 안 행하는 사람은, 알고 안 행하는 사람은 알게 하나님께서  징벌하시고, 모르고 안 행하는 사람은 알릴 필요도 없이 징벌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그 청년이 와서 말하는 소리를 듣고 주님이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물론 주님이 사람을 다 사랑하셨지만 '여기 사랑하여 가라사대 ' 하는 이 사랑은  그 청년이 하는 그 보고를 듣고 이제까지 그 청년이 애쓰는 그 모든 행위를 보고  주님이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를 사랑하셨지만 사랑하셨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 정도 정도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는  사랑하시는데, 사랑하신 그 다음에 주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를 치료해  줄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모든 건 잘 준비했다. 그러나 오히려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하는 이 한 가지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를 말씀하신 것인지, 모르기는  모르지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하는 이 말씀에는 주님이 여러가지 있는데  한 가지 부족한 것을 말해 준다는 그 말씀인지, 다른 것은 다 됐는데 한 가지  부족한 것 있으니까 그것을 고치라 한 말씀인지 그것은 똑똑히 판명을 못  하겠습니다. 못 하겠으나, 주님이 그 청년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해서  부족한 것이 있어도 주님이 사랑했습니다.

 사랑했지만 그 사람이 영생을 이룰라고 그렇게 마음을 소원을 가지고 주님에게  나타나니까 주님이 영생을 이루는 그 길을 열어서 영생을 이루도록 하시기  위해서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그렇게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구하라 주실 것이요.' '구하라 주실 것이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의 구원 이루는 그 일이 소원되는 그 소원이 그것이 성경에 보면  그 소원, 옳은 것 소원하는 그 소원은 내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소원을  넣어 줬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의 그 소원을  우리 마음 안에 넣어 주시고 그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옳은 것이 자기에게 소원되어질 때에는 그 소원이 자기 스스로의  마음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옳은 것이 소원되어질 때에는 그 소원은  하나님이 성신의 감동으로 우리에게 그 소원을 가지게 하셨기 때문에 그 소원을  가지지 안한 사람보다 소원을 가지게 된 사람은 벌써 하나님이 그 구원을  자기에게 주실라고 역사하시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소원은  주님이 나에게 일으키신 소원이요, 내가 그 소원대로 포기하지 안하고 그 소원을  이룰라고 애를 쓰면 하나님께서, 그 소원을 내게 주신 그분이 나만 애를 쓰면 그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이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구원은 전부, 힘쓰는 자는 얻고 힘쓰지 않는 자는  얻지 못합니다. 힘쓰지 않는 자는 얻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옳은  것을 소원하는 그 소원이 듣는 데에서 생기고 성경을 읽는 데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루 종일 듣는 것을 우리의 구원에 관한 것을 듣지  안하고 어마는 것을 듣고 어마는 것을 접하고 이러니까 그 소원이 우리에게  생겨질 수가 없는 것은 성신의 감화가 우리에게 올래야 올 수가 없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혜 있는 사람들은 고만 그것을 초월해서 성경 말씀을 듣든지  읽든지 할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접촉되는 사람이든지 물건이든지. 보이는  것이나 듣는 것이나 그 전부가 나에게 구원을 재촉하고 계시는 주의 계시라  이렇게, 통 털어서 이렇게 해 놓고서, 보여도 이것이 무엇을 나에게 경고하고  무엇을 나에게 부탁하고 있는가 무엇을 나에게 지금 지도하고 있는가 그렇게  해서, 신구약 성경에 가르쳐 주신 이 특별 계시만이 아니고, 이 모든 하나님의  창조, 모든 하나님의 섭리, 이 모든 인간들의 그 변화되어지는 인간들의 마음의  구조 이런 것들을 다 합해서 이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알려 주시는 계시라 이렇게  보고서, 특별 계시 자연 계시로 이렇게 해서, 모든 보여지는 것 들려지는 것  접촉되는 것을 하나도 허투루 지내보내지 아니하고, 그것이 전부 주님이 나에게  경고시키시고 알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이라, 주님이 열어 보여 주시는 것이라,  그렇게들 생각하고 구원을 이룰려고 애를 쓰는데, 그것 전부 다 하나도 그거는  그것대로 다 보고 듣고 저버려 버리지 성경말씀 보고 저버리고 듣고 저버려  버리지, 이러니까 구원이 언제 이루어지겠습니까?

 '하나 오히려 부족한 것이 있다.' 이러니까 그만 그 청년이. 주님을 찾아온  청년인데 주님 앞에 영생을 지금 구하려고 찾아 왔는데, 또 이렇게 영생을  위해서 주님 앞에 칭찬을 받을 만치 애를 써 나오던 청년인데, 자기가 애써  나오는 구원을 이룰라고. 애를 써서 나오는 그 구원을, 애를 써 나오는 그  구원을 한 입에, 한 입에 홀딱 둘러마시는 그 원수가 자기에게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한 입에 홀딱 둘러마시는 원수가 자기에게 있는 것을 이 청년은  모르고 지금 뭐 계명지키느라고 힘쓰고 성경 읽느니라고 힘쓰고 또 힘을 쓰다  좋은 선생님이 오셨다고 하니까 주님 앞에 찾아와 가지고서 이에게 물으면서  힘을 싶고 이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힘을 쓰고 애를 썼지만 자기가 이제까지 애쓰고 힘쓰고, 참 영생이라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이런데. 이렇게 보배로 여기고 소원하고 애썼던 것을  한 입에 홀딱 둘러마실 원수가 자기에게 있는데 그 걸 몰랐다 그거요. 그걸  몰랐어. 그 원수가 뭡니까? 그 원수가, 주님이 '너희의 지금 이 영생의 구원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그것이 하나 들어 있으니까 그것을 네가 어서 처리해라.'  그것을 처리하는 방편을 가르치면서 '있는 것을 다 헐어 가난한 자에게 주어라.'  그렇게 말씀하니까 고만 그 청년이 근심을 하고 주님과 영생도 다 버려 버리고  다 돌아가 버렸습니다. 달아나 버렸습니다.

 우리는 이와같이 우리의 이 건설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데에 내가 모르는 내가  모르는, 그 무서운 원수가 자기에게 있는 것을 그 청년은 이제까지 몰랐습니다.

주님이 말씀하니까 알았지 몰랐는데, 그것은 자기가 사랑하기를 주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의지하고 더 바라보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렇지만 그게 원수인 줄을  몰랐습니다.

 주님께서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해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은 영생을 삼키는 원수가 네게 있고. 나를 바라 볼라할 때에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원수가 네게 있고, 나를 의지할라 할 때에 의지하지 못하게 하는 원수가  네게 있고, 내기에 순종하려고 할 때에 순종하지 못 하게 하는 원수가 네 속에  있다. 그놈을 처단해라, 이렇게 처단하는 방편을 주는데, 과연 그 말씀이  떨어지자 그 사람은 이제 그 재물 그놈이 있다 가서 '가자 가자 가자. 어라  가자. 여기 뭐 들을게 뭐 있노? 가자.' 그놈 이 가자 하니까 두 말 할 것 없이  가 버렸습니다. 예수고 뭐 영생이고 집어던져 버리고 가자 하니까 따라갔습니다.

그 큰 원수가 자기 속에 있는 것을 그 청년이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이렇게 했으니까 믿는  사람이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줘야 됩니까? 아니오. 주면 안  됩니다. 제 경험으로서는 제가 얼마 되지 안하지만 있는 것을 팔아 가지고서  그것을 '어떤 자에게 줄까? 가난한 자에게 주는게 좋다.' 싶어서 가난한 자에게  줄라고서 이렇게 하면서 그걸 줄라고 찾아가 가지고 하나씩 따져서 보니까 그것  주면 그 사람이 화가 돼 가지고서 망할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죄만  짓고 그것으로 망하지 도움이 하나도 되지 못하기 때문에 참으로 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줘서  그에게 유익이 되겠다 싶은 그렇게 보여지는 것이 없어. 이 사람에게 이것 주면  안되겠다 싶은 것뿐이지. 이러기에, 이 준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 아니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확정을 짓고 갈 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 한 자에게 줘야 구원 된다 하는 이 성경 해석은 아주 저버려야  됩니다. 아주 그거는 다 마귀 말이오. 주님이 여기에 하신 말씀은 그 말씀이  아니라 그 말이오.

 고다음에 해석한 것을 보면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우냐? 약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 하는 그것은 그것을 의지하고 거기에  소망하고. 그것이 끄는 대로 복종해 가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것이지.

하나님께서 앞으로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주실  터인데 그보다 더 큰 부자가 어디 있겠소? 당신이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맡기는데. 우리에게 맡길 때에 그것을 거기 소망 하나도 두지 안 하고, 의지하지  안하고, 거기에 피동되지 안하고 하나님에게 소망두고 의지하고. 거기에  복종하는 것으로 그 모든 것을 통치할 때에는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다 주마  했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아예 꺼꾸로 해석을 해 가지고서 '그런 성구는 우리는 지킬 수 없지  않느냐? 보라 성경에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했으니까  그것부터 지켜야 될 것이 아니냐?' 요렇게 마귀란 놈들이 우리를 속입니다.

 청지기 비유에 보면 자기의 소유는 하나도 없는 것이 기독자입니다. 자기  소유는 억만금을 가지고 있어도 자기의 소유는 하나도 없는 자가 기독자요.

주님이 피로 날 샀으니까, 날 샀고, 내게 있는 모든 것도 당신이 대속하셨기  때문에 창조적으로도 당신의 것이오. 내가 만들어 놓은 것. 나를 당신이  샀으니까 내가 만든 '것도 다 당신의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속적으로도 당신의  것입니다. 그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오. 그 사람은 아무것도 없고  예수님만 자기의 예수님이 돼 가지고 있고, 예수님의 공로 만 자기 것이 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다른 것은 하나도 없어. 청지기 모양으로 보관하고  있는 것이지. 주의 것을 보관하고 있는 것이지.

 그러기에 우리에게 있는 어떤 것이든지 내가 그것을 의지하지 안하고. 바라보지  안하고, 그것에게 피동되지 아니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 만 소망하고,  내 소망은 전부 하나님이라. 무엇이든지, 뭐 신체 건강이나 병낫는 것이나  부자되는 것이나 출세하는 것이나 입신양명 되는 것이나 성공하는 것이나 모든  것은 당신이 해 줘야 된다 하는 것을, 그것이 주님 만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만 소망두고 하나님 의지하고, '하나님이 나를 보호해야 되지.' 안보는  하나님의 안보만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안보만. 그라고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으로써 하나님께 그 모든 것을 자기에게는 억만금이 있어 도 하나님이  버리라면 버리고 두라면 두고, 또 그것을 이래 쓰라면 이래 쓰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대로 그대로 주고 받고 하는 일을 하고,  자기는 하나님이 자기 모가치로, 자기 양식으로 줘서 자기 쓰라고 하는 것만 그  양만 쓰지 하나님이 명령하지 안한 것을 자기 마음대로 자기에게 쓰지 않는 것이  그게 믿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자기에게 있는 조그만 돈이라 해도 기도해  가지고, 제 맘대로 쓰지 않습니다.

 이런데 주님이 그라면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러면 준  그것은 하늘에 보화가 쌓인다.' 네, 우리가 연보는 연보요, 연보는 연보요. 또  우리가 봉사는 봉사요. 희생은 희생이오. 그것은 그것대로 하나님께서 댓가를 다  치러 주십니다. 썩을 것을 썩지 안 할 것으로 댓가를 치러 주십니다. 그러나  그거와 또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를 위해서 한 거와  다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데에는 물론 소유 가지고도 그래 하지만 자기가 어떤  그 물질이나 자기에 있는 그 모든 기능을 가지고서 주의 일을 할 때에 상급  바라고 일하는 사람도 있고, 그것에 또 뒤에 영원한 것으로 갚아 줌을 바라서  일하는 사람도 있고,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님을 대접함으로 하는 사람도 있고  이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에서는 그것이 세밀히 분석돼 가지고서 그대로 다  보응을 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그 사람이 물질로, 자기의 기능으로 하나님의 복음 사업에  일은 많이 했다 할지라도 경건은 하나도 없는 사람 있습니다.' 경건이라 하는  젓은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는 것이, 지키는 것만이가 경건이 아니고 주를  위해서, 주 때문에, 주를 사랑함으로, 주 때문에, 주를 위해서 하나님의 법도를  지킨 그것을 가리켜서 경건이라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있는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하는 그것은 재물을 없애는  것 그 사람의 재물을 없애는 것이 당신의 목적이 아니라. 재물을 없애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재물을 두고는, 그 재물을 소망했던 것, 바라봤던 것 의지했던  것. 재물에게 피동됐던 것 그것을 도무지 두고 그것을 고치기는 어렵기 때문에,  그것을 없애는 것이 제일 고치기 쉽기 때문에 없애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때에 '핍박을 겸하여 주시리라 하는 그  핍박이 무슨 고난인가? 무슨 박해인가? 그 박해, '세상에서 여러 배 백 배를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으리라.' 하는 그 말씀을 여러 번 해석을 했습니다.

그것은 무슨 핍박이냐? 그 핍박은 자기가, 무슨 문제를 해결해 주시든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시든지 이렇게 주실 때에는. 그 사람이 이제 까지  피조물이나 세상에 있는 것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복종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주실 때에는 뭘 주실 때에 반드시 그것을 소망하지 안해야 주고  의지하지 안해야 주고, 그것을, 그것에게 복종하지 안해야 줄 수 있기 때문에,  와 가지고 그게 올 때에는 꼭 그렇소. 고게 내 앞에 와서 있을 때에는 그것을  소망하고 고것 의지하고 고것 바라보고 고렇게 고걸 해야, 그것을 그렇게  잊지하고 바라보고 소망을 해야, 고래야 고것을 자기가 차지 할 수가 있고, 또  자기가 유지할 수가 있고, 또 그것이 새로 얻을 수가 있고, 꼭 요런 환경을  하나님이 꼭 만드십니다. 요런 환경을 꼭 만드셔 가지고서. 그러면, 그 사람이  그럴 때에 그 앞에 있는 그것을 그것을 바라보지 안하면, 그걸 소망하지 안하면,  그까짓 이리 되든지 저리 되든지 하면 절단 나 버린다 말이오.

 자기 직장이든지, 자기 사업이든지, 성공이든지. 공부든지 무엇이든지 그것을  하나님이 주실 때에 고것을 자기가 참 안 바라볼래야 안 바라볼 수 가 없고, 안  의지할래야 안 의지할 수가 없고, 고것을 위해서 자가가 움직이지 안할 수 없는  고렇게 딱 되는 그런 환경을 딱 만들어 가지고서 주님이, 당신이 주실 때에 고럴  때에 고것을 바꿔서, 고 바라보던 것을 그것을 하나님 바라보고, 둘 다 바라볼  수는 없게 될 때에 '어라. 이거 포기해라.' 포기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포기하고 하나님 의지하고, 포기하고 하나님에게 복종하고, 이것이 바꾸어서  하나님으로 옮겨졌을 때에 그것이 견고히 자기의 것이 된다 그겁니다. 그것이  견고히 자기 것이 된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백 배나 줄 수 있는 그 역사가 꼭  이것을 전제로 두고, 전제로 두고서, 이렇게 바꾸는 어려움을 전제로 두고서,  바꾸는 어려움이 그 앞에 놓여 있을 때에, 바꾸는 어려움을 바꿀라고 하면 그  모든 것을 다 집어 던져 버리고 다 포기해야 된다 말이오. 다 포기해야 되지  포기 안 하고는 바꾸지를 못해. 포기 안하고 바꿀 때에는 바꾸는 것 같았지만  속에는 그게 미련이 있어 가지고서 실은 그 속에 그놈이 붙들리고 있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버리는 것이라. 포기하는 것이라. 그래 포기를 통해서 얻는 다 그  말입니다. 버림을 통해서 얻는다. 파괴를 통해서 건설이 된다. 실패를 통해서  성공이 된다, 요것을 오후에 아무래도 좀 똑똑히 가져야 되겠다, 사람이 요것만  가지면 우리 기독자들이 더듬을 것이 없이 대개는 고만 확신을 가지고  용감스럽게 마귀의 미혹 받지 아니하고 나가겠는데. 요기에 대해서 확정을 짓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5절. 이런 절수를 확정을 지어야 됩니다. 이렇게 이래도 해석할  수 있고 저래도 해석할 수 있다 하는 그것은 우리에게 구원되지 못하고 미혹만  됩니다. 그 성경 진리는 이래도 해석하고 저래도 해석되는 것 아닙니다. 물론  해석해서 표현하는 방편은 이런 것들 예를 들 수 있고 저런 것들 예를 들 수  있지만 그 진리는 이 진리 됐다가 저 진리 됐다가 되는 길은 없습니다. 절대  없습니다.

 25절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저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이 목숨이  최고의, 육체적으로는 목숨이 최고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최고의 것이라는  말인데 여기 '목숨을 구원코저 하면 잃고 또 목숨을 잃으면 또 찾으리라.'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이랬으니까 이 목숨이 무슨 목숨인지, 육체의 목숨을  잃으면 신령한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의 신령한 생명을 그것을 찾는다는 것인지,  육신의, 육체의 목숨만을 말하는 것인지 요 것이 무엇인가 확정을 짓고 단정을  지어야 되겠는데. 여기 대해서 다 어떻게들 생각합니까? 여기 목숨이라 말은  생명인데, 이 목숨이 육체의 생명인지 우리 신령한 생명인지 무슨 생명을 여기  가르친 것인지 두 생명을 가르친 것인지 어떤 것인지 우리가 확정을 짓고  갑시다.

 그전에 저도 거기 대해서 확정을 짓지를 못해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짜다라  생각해 봤었는데 지금은 학정을 짓고 있습니다. 그 생명은. 무슨 생명이? ○○○  목사님, 확정 지어 봤습니까? 목숨에 대해서. 이 목숨 문제가 제일 큰 문제인데,  이거 실패하면 전부 다 실패인데, 뭐 이 목숨 문제 이것 실패하면 다  실패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학정 확신이 없으면, 확정, 확실히 정한 확정이  없으면 모든 것이 그 밑의 것은 확정이 없는 것이오. 확정이 있다고 할찌라도  올라오고 올라오고 하면 마지막에 여기에 도달하는 것이 절정이기 때문에 이  도달해서 절정에 와 가지고서 전부 혼합 혼돈 돼 버리면 다 헛일이라 그거요.

이러니까, 이 성구에 대해서 어떻게 확정을 짓습니까? ○○ 목사님 뭐 확정 지어  봤습니까? 아직까지 생각 못해 봤습니까? 네?  25절은 육신의 생명이고.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요 목숨은 신령한  목숨이라 말이지요? 신령한 생명. 25절은 육체의 생명. 저도 처음에 그전에  그렇게들 생각했었습니다. 아마 제게 배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까? 제게  배웠어? 예? 나도 그전에 그렇게 생각했어. 생각했는데, 이제 내가 그것 잘못  가르쳤어요. 지금 이제 고쳤읍니다. 물론 다른 데 그런 것이 많이 있어요. 다른  데 육체의 생명도, 육체의 생명도 온 천하보다는 귀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육체의 생명 끊어지면 온 천하제 것 다 돼 봤자 무슨 소용 있습니까?  한 사람의 생명이 우주보다 귀하다는 그 말씀은 고 신령한 생명을 말씀하신  것이지만 이것은, 하나는. 25절은 육체의 생명이요, 26절은 신령한 생명이라  이랬는데, 우리 ○ 목사님, ○○○ 목사님, 여기 대해서 어떻게 학자들이 해석을  합니까? 예? ○○○ 목사님. 어떻게들 해석합니까?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주 요것 참 확정 짓는 것이 대단히 필요한 것으로 압니다. 아주 필요합니다.

요것 이치나 다른 이치나 이치는 꼭 같습니다. 버린 자는 세상에서 여러 배 백  배를 얻는다. 얻되 핍박을 겸하여 얻는다 하는. 요 성구나 꼭 같은 동일한  진리입니다.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25절 생명과 26절 생명이, 다  육체의 생명을 가르침이라 그렇게 확정을 지었습니다.

 25절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것이요' '잃을것이요' 잃는다  말은 목숨을 빼앗긴다 발이지요. 또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목숨을 잃으면 찾는다 말이지요. 목숨을 버리면 찾는다 말이지요.

목숨을 버리면 찾는다. 목숨을 구원하기 위해서 목숨을 구원하려고 하면 뺏기게  되고, 목숨을 주를 위하여 버리면 이제 찾게 된다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자꾸 이래 말하니까 속에 무엇이 깨달아지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의  생명을 이 생명은 이 세상에 있어서는 육체적으로는 이것이 제일 최귀의  것입니다. 최귀의 것인데, 이 생명을 구원코저 하는, 다 생명을 구원코저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다음에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이랬으니까, 이 목숨을 자기가 구원하고자 하는, 자기 목숨을 자기가  구원해서 자기 목숨을 자기가 잘 보존을 하고 자기가 그렇게 지킬려고 하는  그것은 성경이 허락한 것입니까 성경이 허락을 안 한 것입니까? 성경이 허락 한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자기가 잘 지켜서 보존을 해야 됩니다.

 그러나 어떨 때에 가 가지고 자기 목숨을 내놓아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목숨을 자기가 잘 보존하라고 하신 것, 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요  하나님의 뜻이지만 자기 목숨과 주님과 둘을 두고서 목숨을 구원할라 하면  주님을 내놔야 되고 주님을 자기가 내놓지 안하려면 목숨을 버려야 되고 하는  그것. 다니엘이 그렇게 되지 아니했습니까? 그럴 때에 주님을 위해서, '나를  위하여' 주님 때문에 진리 때문에 자기 목숨을 내놓는 그것을 여기서 말하는  것이지. 아무나 따나 자기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이렇게 아주 헌 신짝 버리듯이  버려서 목숨 그까짓 것을 아무것도 아닌 걸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주 못 쓸  사람입니다. 안 믿는 사람보다도 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이 복음을 잘못 듣고 그만 이것은 무엇을 하면서  뭐 죽는 것을 겁을 냅니까 사는 것을 겁을 냅니까? 망하는 것을 겁을 냅니까  흥하는 걸 겁을 냅니까? 부자를 탐합니까 가난한 것을 두려워합니까? 아무것도  없어. 그 사람이 말단의 악인입니다. 말단의 악인. 그 사람은 무얼로 제재할 수  없어. 뭘로 길들일 수 없고 뭘로 조절할 수 없고 붙들 수가 없어. 가장  악인이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 다. 예수 믿는 사람, 잘못 믿어 가지고  늙은 사람. 예수 잘못. 믿어 가지고 늙은 사람은 이것 뭐 죽인다 해도 겁을 내요  뭐 알리는 것을 아요 뭐 부자 되고 가난한 것도 겁을 내요 굶긴다는 것을 겁을  내요? 이거는 뭐 막판이라.

 믿는 사람은 아주 자기를 보호하고 아끼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보호하고  아끼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자기 명예를 자기가 아끼고, 자기 위신을  자기가 아끼고, 자기 신분을 자기가 아끼고, 또 자기 지위를 자기가 아끼고,  자기 소유를 자기가 아끼고, 또 자기 목숨을 자기가 아끼고, 왜? 그것은 주님이  자기에게 분담시켜 놓은 일이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먼저 자기에게 맡겨서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잘 관리하고 보관을 잘 하고 그 다음에 그걸 가지고서  타를 위해서 사용하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이 자기에게 대해서 아무나따나 마구잡이로 하는 그런 사람은  방탕이요, 방종이요, 아주 그것은 타락이요, 탈선입니다. 믿는 사람이 수치를  수치로 여기지 안하면 아무짝에도 못 쓰는 사람이오. 자기의 몸에 이런데 뭐  까시가 찔리든지 뭐 이든지 할 때에 그 아픈 감각의 신경이. 마비돼서 아픈 것을  모르면 반드시 좀 있으면 썩고 고장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인격에,  자기의 무슨 수치나 이런 것을 아무 무감각 해 한다면 인격적인 그 신경성이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은 결국은 다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서 '목숨을 구원코저 하는 사람은' 하는 것은 고다음 말씀이 해석을 하기  때문에, 목숨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을 버리는 사람, 주님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사람, 고 둘을 가리켜서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목숨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을 버리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그러면, 고런  현실을 닥쳤을 때에 그때에 목숨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을 버린 사람은 그  목숨은 제가 구원하는 그 외에는 이상 힘이 없습니다. 제가 자기 목숨을  책임지는 것이지 그 외에 자기 이상의 능력을 가진 자가 책임 질 자가 없기  때문에, 그 자기 목숨을, 그것을 다른 것이 빼앗을라고 할 때에 자기 이상의 그  권위자가 그것을 책임지고 보호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보다 힘이 약한  자면 자기에게 지니까 자기 목숨을 빼앗지 못 하지만 자기보다 강하면 자기  목숨을 그 강한 자가 빼앗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써 자기 목숨을 보호할 수 있는 그런 단계에서는  자기 목숨을 자기가 보호하나 누가 보호하나 상관이 없지만 자기 목숨을 자기  힘으로 보호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단계에 가서 있어서는 자기 목숨을 주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주를 위해서 버렸기 때문에 그 목숨을 주를  위해서 버린 것은 그 목숨을 주를 위해서 버렸기 때문에 주를 위해 버린 그  목숨은 주님에게 바친 것이 됩니다. 주를 위해서 그 목숨을 버린 것은 그 목숨을  주님에게 바친 것이 됩니다. 그렇지 않소? 틀립니까? 그것은 주님에게 그 목숨을  맡긴 것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목숨은 하나님이 예정의 떠날 시간이 되기  이전에는 아무도 침노를 못합니다.

 그러기에.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저 하면 잃을 것이요'  하는 그 말은, 자기 힘으로써 할 수 없는 그 일에는 이상 힘이 없기 때문에 제가  목숨을 책임지고 구원하면 제 힘이 닿지 안하는 데에는 다 그 목숨이 다  끊어지게 된다. 빼앗겨지게 된다.

 그러나 그 목숨을 나를 위하여,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버리면'  '잃으면 찾으리라' 그 말은, 자기 목숨을 그것을 자기가 책임지지 안하고  주님에게 맡기면. 맡기면,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 주님을 붙들고  취하고 목숨을 내놓는 것은 그 목숨을 주님에게 바친 것이 되고 주님 위해  내놨기 때문에 주님이 그 목숨을 책임지시고 구원하시기 때문에 생명이 끝나는  고 예정 시간 전에는 그 생명을 아무도 침노할 수가, 없지만 세상에 우리의  생명을 취하려고 하는 자들이 많이 있는데 그 생명을 자기가 거머쥐고 날뛰는  자람은 결국은 자기가 기한 전에도 뺏길 수가 있다 하는 그말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육신의  목숨도 자기 죽어 버리면 천하 다 얻어 봤자 무슨 소용 있습니까? 또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온 천하다 해도 제 목숨 하나 회복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래서, 나는 이 성구를 이제 육신의 생명만을 가르친 것이라 그렇게  단정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를 위해서 버리는 것. 또 주님에게  소망하기 위해서 딴것에게 소망했던 그것을 버리고 주님에게 내가 소망을 옮겨  바꾼 것 또 내가 의지하던 것을 다 그것을 버리고 주님을 의지하는 것으로 바꾼  것. 그것에게 피동되던 것을 버리고 주님에게 피동된 것으로 이렇게 바꾼 것,  바꾼 것은 그 소망했던 그것을 내놓은 그것 다 주님에게 맡긴 것이 되고, 또  의지했던 것을 다 내놓는 것이 주님에게 맡긴 것이 되고, 자기가 그것에게  피동됐던 것 내놓은 것이 다 주님에게 말긴 것이 회기 때문에 그 바랐던 것  의지했던 것 피동됐던 것 그것을 다 내놓은 것이 주님에게 보관시킨 것이  되어지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것을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책임을 지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주를 위해서 당한 것은 주님이 다  책임지십니다. 주님을 버릴 때에 우리는 그것을 내가 책임지고 세상이 책임져야  되지, 그러니까, 우리가 이 소망하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바라보고 의지하고  복종하는 이것을 다른 것에게 두는 것은 다른 것이 책임을 질 것이고 주님에게  두는 것은 그것을 주님이 책임지고 그것을 맡아서 하십니다.

 다니엘이 자기의 목숨을 주를 위해서 버리고 주님의 계명을 지켰으니까 그  목숨은 주님이 책임졌습니다. 또 자기의 모든 지위나 권세를 주님이냐 그것이냐  저것이냐 할 때에 그것을 주를 위해서 버리고 주를 영접한 것은 그것을 주님에게  맡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에게 맡긴 것입니다. 모든 염려를, 모든  문제를 다 내게 맡기라 하는 그 맡긴 것이 됩니다. 그 맡긴 후에는 당신이  책임을 집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요게서, 무엇이든지 그것을 자기가 책임지는 길이 하나 있고,  자기와 피조물이 그것을 책임지는 길이 있고, 또 창조주 주님이 책임지는 길이  하나 있고, 있으니, 주님에게 맡기면 주님이 책임지시고 또 다른 것이 다른 데  맡기면 다른 것이 잘 지든지 못 지든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인데, 주님께 맡긴  것은 어떤 것이 주님에게 맡기는 것이냐 하면 주님과 주의 계명, 계명이라면 곧  주님이요 주님이라면 그 계명과 하나인데, 우리가 주를 위해서, 주를 위해서  그것을 버린 것은, 주를 위해서 버린 것은 그것을 주님에게 바친 것이 됩니다.

 주를 위해서 버린 것은 그것은 주님을 내가 영접을 하는 동시에 내가 그것을  맡긴다고 주님에게 맡기지 안해도 주를 영접하기 위해서 그것을 버린 것은  주님이 그것을 맡아 가지고서 처리를 해 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 자는 제가 뭐, 목숨을 얻기 위해서 버린 것이 아니지만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 자는 내가 다시 찾아 주겠다 하는 그 약속이오. 요것에 대해서  확정을 우리가 좀 가져야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 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러니까, '모든 걸 버리고  주를 좋았다.' 이랬으니까. 주를 위해서 버린 것 아닙니까? 이러니 그 밑에  해석하기를 '나와 내 복음을 위해서 버린 자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이오. '버린  자는' 이랬으니까 그 위에 베드로와 그 모든 제자들이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좋았나이다' 하는 그 버린 것은 주를 위하여 버렸다는 그말입니다. 주를  위해서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말 아닙니까? 그냥 귀찮아서 버린게 아니라 주를  위해서 보배로운 것을 버렸습니다. 보배로운 것을 버렸으니까.

 그다음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를 위해서 버린 자는' 이것이나 저것이나  어떤 것을 버렸든지 '버린 자는' 했으니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하는 그 버린 것은 주를 위해서 버렸다는 말입니다. 버렸는데, 버린 것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는다.' 그라면 이제 버렸으니까  그것은 없어지고 새것을 줍니까? 버렸으니까 없어지고 새것을 줍니까 그것을 잘  보존해 주신다는 말입니까? 그것을 판정지워야 될 것입니다.

 '부모나 형제나 자매나 처자나 이것 버린 것은 금생에서 여러 배를 받는다.'  이러니까 '여러 배를 받는다.' 누가 주는 사람이 있어야 받지요? 그러면 받는다  그 말은 주님이 여러 배를 준다 그 말이오. 여러 배를 주님이 준다는 말  아닙니까? 주면 어떻습니까? 새것을 줍니까 그것을 주십니까? 예? 그것 줍니까  새것 줍니까? 자 새것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손들어 봅시다. 또 그것을 준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네, 그것을 줍니다. 그것을 줘요. 그것을  줘요 내나 그것을 줍니다.

 어디 그라면 부모도 딴 부모 주고 마누라도 딴것 주고 처자도 딴것 주고 그래  줍니까? 그것 준다 말이오. 그젓 준다는 것. 그게 뭐이냐? 이제 버린 자는 위에  '목숨을 버린 자는 찾는다.' 그 말씀과 꼭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요것을  학신을 가지고 있어야 돼요. 확신을, 버리는 것은 주님에게 맡기는 것이니  주님을 위하여 그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되나 안 되나 버리는 것은 못 쓰지만  주님에게 맡기면 모든 것이 주님의 뜻대로 하실 것이라. 그것을 벌써 그런게  오기 전에 주님에게 맡겨 놓고 주님이 거기에 대해서 관리하라 하는 대로 하는  것은 주님에게 벌써 맡긴 사람이라 그 말이오.

 그럴 때, 주님이냐 그거냐 할 때는 말단이오. 극단에 이르렀다 말이오.

극단에서 그거를 주님에게 맡길래 네가 책임질래 하는 극단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때 안 맡기면 볼일 다 봐. 그 전에 벌써 다 맡겨요. 그 전에 다 맡겨서 '주여,  내 죽고 사는 것 당신에게 다 맡깁니다. 목숨에 대해서 당신의 인도대로 나는  딿겠습니다. 내 모든 소유나 사업이나 그런 것도 당신 인도대로 나는 딿습니다.'  그렇게 확정을 지어 놓고 성도들이 살기 때문에, 단순하고 쉽고 조용하고  안정된다 이거요.

 '나와 및 내 복음을 위하여' 복음을 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하는  것이고, 하나님 말씀을 말씀하는 것이고, 또 나는 주님을 버려야 되는 때도 있다  그 말이오. 주님을 버려야 하는 때도, 고 말씀이 연결되고 둘이 하나 될 때도  있지만 주님을 자기가 이제 배반, '너 예수 안 믿는다 해라. 안 믿는다 해라.'  하는 그것은 말씀은 아니고 주님에게 직접 직결이 되는 일들이라 그 말이오.

'네가 다시 예수 안 믿겠다고 해라.' 하는 그것은 주님에게 직접 관련된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주님에게 직접 관련된 것. 과거에 왜정 말년에 저 고제면에서  교회가 ○○교회. ○○교회, ○○교회, ○○교회. 그 면내에 교회가 네 교회가  있었습니다. 네 교회가 있었는데. 그 면 아주 신사 참배 때문에 딴 면보다 좀  혹독했습니다. 혹독을 해서 그 세, 교회는 교인을 전부 명부를 가지고서, 교인  명단을 가지고 전부, 그때 주재소입니까? 오래 돼서, 그때 이름이 주재소요? 예?  주재소입니까? 네 주재소 재소로 전부, 일본 사람들, 지금은 문화가 돼서 일본  사람들 겁 아 내고 총도 겁 안 내지만 그때는 우리가 미개한 때라. 다모두 보조  군인이라고 순사들은 기다란 칼을, 이만한 칼을 여기 옆구리 떡 차고 철커덕  철커덕 그라면서 그래 다녔습니다.

 그랬는데. 한 사람 한 사람 다 불러다 놓고서 말하기를 그저 그래 말해. '너  예수 안 믿겠다 하라.' 그때 그래 말해. 신사 참배 그것은 다 냅두고 '예수 안  믿겠다 하라.' 그러면 예수 안 믿겠다고 전부 다 도장 다 찍고 이름 다 적고 다  해 버렸어. 그것이 주를 버리는 것이오.

 그럴 때 '너 그라면 직장을 뗀다. 너 무슨 장사하는 면허장을 뗀다. 무엇을  어짠다.' 이렇게 하는 그런 것이 다 주님이냐 그거냐 둘이 저울질 될 때인데,  저울질 될 때인데, 그럴 때에 이제 '내가 면허장을 뺏겨도, 내 직장에서 면직을  당해도, 아주 돈이 쏟아져 나오는 그런 좋은 기업을 내가 뺏겨도 나는 주님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 하는 것 있을 수 있고, 또 '네가 이제 업을 하되 주일을  범해서 하라. 또 성경에 위반되는 것 요것을 하나 하면서 하라.' 하니까, 고거  하면서 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이 되어지니까 그럴 때에 '못  했으면 못했지 하나님의 말씀에 어겨지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해 가지고서  하는 것은 그것이 주와 주의 복음을 위해서 버리는 것이라 그 말이오.

 뭐 지금이라도 모두 기업체 허가를 내 가지고 있는데 그 허가에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 딱 걸어 놓고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저촉되는 요것을 하지 안하면  그 면허장 취소된다. 그 직장 면직 당한다 어짠다 그렇게 말하면 그 걸 내놨지  주님과 주의 복음은, 복음은 이 진리를 말하는, 계약서를 말하는 것인데, 이  복음은 내놓을 수가 없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많지를 못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이 되어집니다. 왜? 지금 보니까 이 말씀을 시시하게 듣고서 여기 대해서  아무런 감각이 없는 것 보니까 필연 실패할 자라 그말입니다. 이러니까, 하나님  말씀, 계명 어기는 것이 예사입니다.

 그런데, 그럴 때에 주님이냐, 주님이냐 하나님의 말씀이냐? 또 이 세상에 있는  무엇이든지 세상에 있는 것 다. 세상에 있는 가정이냐, 자기 명예냐, 사업이냐,  돈이냐, 자기의 무슨 무대냐, 직장이냐? 자기의 몸이 자유하지 못해. '그러면  감옥에 가둔다.' 자기 몸이냐 자기의 목숨이냐 이렇게 되어 질 때에 그때가 지금  뭐이냐 하면 우리가 어려울 때라 말이오. 그때가 어려 울 때라.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나가는 것 만치 그만침 어려워요. 그 어렵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그 시험을 이기지 못한다 그말입니다. 기도하지 않은 사람은 이기지 못해요.

그럴 때에, 그럴 때에 주님과 주님의 전해주신 이 진리를 위해서 그것을  내어놓으면 어찌 됩니까? 그것을 붙들기 위해서 주님과 진리를 내놓으면 어떻게  되며, 주님과 진리 때문에 그것을 내 놓고 주님과 진리를 붙들면 어떻게 되는가?  여기에 대해서 확정을 짓자 그 말이오. 확정을 지어 서슴지 말고 학정을 지어  학정을 지어.

 마태복음 16장에 있는 말씀은 그럴 때에, 그럴 때에 그걸 구원하기 위해  가지고, 목숨이니까 목숨 밑의 것은 다 따랐다 그 말이오. 그것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것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것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과 도를 버린  자는, 뭐라고 했습니까? '잃고' 했다 그 말이오. '잃고.' 육신의 생명을 잃어  버리요. 모든것 잃어버리요. 그걸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과 도를 버리는 그것은  반드시 조만간에 다 없어지고 다 빼앗겨진다고 확정을 지워요.

 다 빼앗겨요. 확정을 지워요. 그것은 전능자가 책임지지 안하고 이 세상이  책임지고 있는데. 세상이 벌써 티를 잡을려고 그와 같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 주님의 절대의 권능자가 지금 책임지는 그게 두려워서 뻘뻘 떨고 있는데  어짜든지 그래 가지고서 '그만 주님 배반하고 우리가 잘해 줄 터이니까, 우리가  잘해 줄 터이니까, 주님 배반하고 이라면 우리가 잘해 주겠다.' 잘해 주겠다 할  때 그렇게 꼬우는 것이 주님만이 손 떼도록 주님을 배반하게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배반만 딱 하면 그다음에는 거머쥐고, '이놈아, 네가 네 마음대로 해.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마음대로 잡아 부립니다.' 이러니까 그다음에는 제가  반드시 세상에게 패전하고 삼켜 지고 마는 것입니다. 마는 것이오.

 그럴 때에 주님과 주님의 이 진리를 위해서 그런 것을 내놓고 '이것을 내놔도  나는 주님과 진리는 내어놓을 수 없다.' 하고서 내어놓을 때에 그 내놓는 것이  그것이 다 없애 버리는 것입니까 그것이 주님에게 맡겨지는 것입니까? 내가  주님에게 맡길려고 하는 것 아닙니다. 맡길려고 하지 안 하지만 당신 때문에  손해 보면 당신이 책임을 진다 그 말이오.

 우리 사람도 말이요, 인격이 있는 사람들은 저 때문에 손해 간 것은 기어코라도  뭅니다. 기어코라도 물어. 기어코라도 그것은 배상을 해서 제가 다시 심판에 안  걸리도록 하려고 애를 쓴다 말이오. 저 때문에 손해 간 것은 기어코라도 그것을  회복을 하고야 말지,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있으면 주지 만 좋은게 아니면  그거라도 회복을 하지 무책임한 그런 일은 사람도 안합니다. 저 때문에 손해 본  것을 제가 그냥 내몰라라 하고. 놔두는 그런. 어디 몰상식하고 그렇게  무책임하는 그렇게 짐승같은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은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럴 수가 없다 그 말이오. 우리 하나님을 믿어야 돼요.

 이러기 때문에, 주님과 주님의 도를 위해서. 그 둘이 어느 것이냐 이렇게  견제할 때에 그때에 내가 그것을 주와 주의 복음을 위해서 버릴 때에는 '내가  이거 버리면 주님이 책임져 가지고서 잘해 주실 것이다.' 그것 바라는 것도  미안하고 죄송한 일이오. 미안하고 죄송한 일, 그렇게 약빠른 사람들이 신앙생활  벌써 못 해요. 이제 버리면 죽든지 살든지 나는 그것보다 주님이 크시기 때문에,  나는 주님 계시면 다 되기 때문에 나는 그것 다 버려도 낫는 주님을 모시고 그런  것을 나는 포기해도, 아깝지만 포기하고 이제 아깝지만 주님과는 비교가 못 되기  때문에, 어떻게 주님과 비교 할 수 있느냐 하면서 그것을 참 분히 여기면서  집어던지고. 버렸을찌라도 주님은 그것을 낱낱이 책임을 지시고 여러 배 백 배로  다시 얻도록 해. 주신다 하는 약속입니다.

 이러니까, '버린 자는 백 배나 얻되' 하는 그것은 내나 그것을, 그것을 없애지  안하고 그것을 주는데 그것이 백 배나, 돈이라면 백 배도 되겠고 전토라면 한,  마지기인데 백 마지기 주면 백 배가 되겠고 이렇지만 그러면 부모야 백 배, 어찌  부모야 백 배 주겠소? 예? 부모를 그러면 많은 부모를 줍니까? 그것을 그  다음에는 믿는 형제들은 다 부모니까 이제 그런 많은 부모를 준다 그것도 다  억설 해석인데 그거는 뭐이냐? 그 부모의 인격 가치를, 부모의 가치를, 부모의  권위를, 부모를 부모로서 자기에게, 자기에게 부모의 그 효력을 주는 것이 백  배나 더 줄 수 있고 그 부모는 이전 부모보다 더 백 배의 그 가치 있는 권위  있는 부모가 된다 하는, 한 부모지만 자기와의 관계성의 효력성 권위성. 권위성.

가치성, 그인격성 그 행복성, 그 부모가 행복을 눈꼽재기 만한 행복을 받은  부모가 될 터인데 나중에 가서 백 배, 이만한 행복을 받는 그런 부모가 된다  이말이오. 이러니까, 그 뭐 백 배라 하는 것은 여러 가지 면으로 해석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요게 대해서 확신을 가집시다. 확신.

 이런 당면이 있는데.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직장이 있는데 주일날  걸렸습니다. 주일을 걸렸든지 그리 안 하면 계명을 어기라는 무엇이 '나왔든지,  아 신사 참배 안 하면 이 직장 못 가진다. 국기배례 안 하면 이 직장을 못  가진다. 주일을 범하지 안하면 못 가진다. 또 이렇게 거짓말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꾸 이렇게 뭐 그런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혹 있을 수 있어. 그럴  때에. 그럴 때에 우리는 거기에가 바로 그면이오. 거기에가 바로 거기라. 주님을  주님과 도를 내가 저버리지 안할라면 그것을 저버려야 ' 되고 그것을 저버리지  안할라면 주님과 주님의 도를 저버려야 되는 그런 딱한 사정에 매일 때가 우리가  있다 그 말이오.

 그럴 때에 머믓거리고 근심 걱정하고 이래 볼까 저래 볼까 머믓거리는 사람들은  다 넘어집니다. 넘어지니까 주님의 초자연의 능력이 와서 일할 수가 없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이 부자가 안돼. 장 고만이지. 쑥쑥 올라갈  수가 없어. 아 일층에 있는데 백 배 올라가면 백 층 올라가면 쑥 안올라가겠소?  이런데. 이 일을 하나님이 하시기로 약속을 하셨는데 하나님은 신실한데 이렇게  우리가 지키지 안하기 때문에 당신이 계약 이행을 해 주지 못하는 것이라 그  말이오.

 뭐 장사하는 사람들도 다 그러합니다. 가정에도 다 그러합니다. 사사건건 인간  생활이란 생활은 다 같습니다. 그저 형태만 다르고 좀 양으로 많고 적고 크고  작은 것만 다르지 꼭 같습니다. 사업도 꼭 같소. 그런데, 반드시 요런 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합시다. 우리가 눈이 어두워서 이런 것이 있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그만 그냥 지내 보내기 쉬운데 반드시 이런 것이 있다 그 말이오.

(눈이 까무랑 까무랑 잠이 오는구만. 돌아보긴 뭣 돌아봐? 아가씨 말이야. 안  조브랐어? 꼬부락 꼬부락 거렸는데. 우리 ○○○ 목사님 따님이야. 내가 내가 잘  알아.)  반드시 그런 일이 오는 줄을 아십시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우리 앞에 그런  일이 오는데 그것을 모르고 지나가 버리면 그 마귀는 춤 춥니다. '이 까짓 거야  소경이기 때문에' 모르고 지나가니까 그게 어떻게, 알고 이길려고 해도 이기지  못하는데 모르고 지나가면 그것이 이겨질 리가 있습니까? 이겨질 리가 없지요.

이러니까, 패전했으니까 모두 저주 덩어리를 거머안고 있다 그 말이오. 저주  덩어리를 거머안고 하나님이. 책임 안진 것을 다 거머안고 있으니까 그놈에게  항상 종이 되어 가지고서 평상 시달리고 만 다 그 말이오. 성도가 성도답게 권위  있게 살지를 못해요.

 공부도 그러합니다. 어떤 학생 이번에 집회 오는데, 집회, 이번 집회는  학생들을 위주로 한 집회가 아니기 때문에 그거 뭐 가도 되고 안 가도 되니까  그렇게 강요하지 말아라 이렇게 말을 했어요. 그런데 어떤 학생은 '그래도  공부하는 것도 중하지만 요번에 은혜 받는 것은 뒤에 또 있을란지 없을란지  모르기 때문에 은혜 받는 것은 더 중요하니까 이제 가야 되겠습니다.'  이러니까, 그 부모들이 있다 말하기를 '너 그라다가 퇴학 만나면 어쩔래?'  그러니까 그 서슴지 안하고 '뭐 퇴학하면 퇴학하지요. 퇴학하면 퇴학하지요?  우선 하나님의 이 은혜를 내게 받는 것이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이 되기 때문에,  내 마음에 판정이 되기 때문에 이 말씀과 은혜 받는 것과 그 공부 하는 것과  비교하니까 이 중량시 무겁기 때문에 이를 취했으니까 그라고 난 다음에 퇴학을  하면 그거는 어찌할 수 없이 퇴학을 받지요.' 이 단정을 지우고 간다 그 말이오.

집회 같은 거는 거석하지만,  주일날 같은 것은 하나님의 계명에 명문돼 있는 것이기 때문에 주일을 지키는  것이라든지 하나님의 명문된 그 말씀을 지킨다는 그런 거는 쉽소. 그거는  확정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있어서는 주저할 것이나 염려할 것이나 뭐  더듬을 것도 없어. 고만 주님에게 맡기고 이 둘로 비교할 때에는 '아 이거는  천상,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이랄 것도 없고 의례히 그런 것이니까 의례히  이거 놓고 주님 영접하지요. '야 너 어떻게 할래?' '어떻게 할 것 뭐 있습니까?  주님 모시고 주님 뜻대로 이렇게 살아 나가면 이것이 내 생활 아닙니까? 그것은  오든지 가든지 '오면 영접하고 가면 보내는 것이고 그렇지 내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렇게 사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다른 것도 다 그래 붙이면 돼요. 부모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결혼도 그렇고  다 그래. 무엇이든지, 가정 일이든지, 자기 직장 일이든지, 자기 사업의  일이든지, 자기의 무대의 일이든지 무엇이든지 다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현실을 주시는 것이 당신이 현실을 만들어 주시오. '이  현실은 사람이 만들었다.' 죄 지어서 만들어진 현실은 제가 만든 줄 압니까?  아니오. 하나님께서 고렇게 고렇게 죄 짓게 해 가지고서 그런 현실을 만들었소.

그만 현실은 하나님이 혼자 만들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만드신 것이오. 우리  구원을 위해서 있는 것이오.

 이러니까, 그 현실을 만들어 가지고서 그 현실에는 항상 우리 연습시키십니다.

항상 시험치고 연습하고 또 예비 시험 치고 또 연습시키고 또 예비 시험 치고  항상 그것이 일이라. 우리 죽을 때까지 그 일이오. 하나님이 그 일 해. 무슨  연습? 모든 것보다 나를 크게 여기고 그r 명령을 크게 여기느냐, 나와 내  명령보다도 모든 것을 크게 여기느냐? 항상 이거요. 당신이. 당신이 이제 우리  평생 동안 하시는 것이 이것이라. 이래 하시면서 이제. 당신보다 이 세상 것을  그라면 당신이 시기하시고 심히 노여워하십니다. 심히 분히 여기시오.

 고럴 때에, 고럴 때에 세상을 턱 내놓고 주님에게로 딱 기울이면 '내 주님 외에  제게 뭐 주가 있습니까? 하늘에서도 주님 땅에서도 주님 주님 한 분이면  다입니다.' 할 때에 주님이 만족하시오. 그에게 애낌 없이 다 모든 것을 다  주시오. 이러니까,' 항상 그 시험이오. 연단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닫고 요  지식을 확고히 가집시다.

 이번에 이 집회에 와 가지고서 다른 것 못 가져도 요것만 하나 똑똑히 가진다고  하면 우리는 큰 승리를 했고 마귀에게서는 우리가 큰 승리를 가져 왔습니다. 큰  성공을 가져 왔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번민, 고통, 난제, 얼굴이 마르고 빠짝  빠짝 마르는 번민 고통의 모든 난제는 여기에서 해결을 싹 짓고 아무 마찰 없는  시온의 대로, 만당도 없고 골짝도 없고 만당을 까뭉게고 골짝을 돋워서 이제  시온의 대로에, 평탄한 대로로 걸어갈 수 있는 대로를 우리가 마련한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요번에 요 말씀을 확정을 지우면 이다음 집회할 때에는 모두  얼굴이 쭉 펴여 가지고서 근심 걱정이 다 떠나서 주름살이 다 펴지고 얼굴이 솩  펴이고 모두 올 것이오. 요 학정집시다.

 목숨을 구원코자 하는자는 잃는다 그 말은 그다음 말씀을 보니까 뭐이 그? 목숨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 버린 사람은 자기는 그 목숨을 빼앗기게 된다. 빼앗기게  된다. 이러니까, 목숨을 죽인다 살린다, 목숨을 지금 끊을라고 하는 그 지경에  자기 힘으로 그 목숨을 구원할 수 없는 그 목숨인데 주님에게 딱 맡기면 자기가  예정에 벌써 곧 죽는 시간이 됐으면 그렇지만 죽는 시간되기 전에는 아무도 그  생명을 천하가 다 달라들어도 못 뺏들어 간다 그 말이오.

 그러나 이제 주님에게 맡기지 안하고 제가 거머쥐고 있을 때는 뭐 도매금으로  몇십만 명도 척척 다 죽여 버립니다. 이 정권자들이 자기의 하나 취미적으로  하나 취미를 하나 달성하기 위해 가지고서도 백성들을 전쟁을 일으켜 가지고서  몇십만 명도 척척 죽이고 그렇게 몇백만명도 척척 죽인 다 그거요 그거야. 무슨  목숨이 뭐 뭐 있습니까? 다만 우리의 생명을 일각이라도 해하지 못한다, 다만  천하가 다 달라들어 죽일라고 해도 죽이지 못하고 다 달라들어 구원할라 해도  구원할 수가 없다 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맡겨 놓은 생명을 한해서 말씀하는  것이지 그 외에 아무나따나 그까짓 것 파리 죽음 같은 그 목숨 천한 목숨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오.

 그러니까, 우리는 무엇이든지 우리가 반드시 이 둘이 비교가 되어질 때에는  주님을 취하는 것이 그것이, 주님을 위해서 버리면 버린 것은 주님이 다 책임을  지시고 여러 배 백 배를 해 주신다고 그렇게 약속을 했습니다. 그걸 바랄 것은  아니지만 주님에게 맡겨 놓고 그만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과 진리를 붙들고, 그런  것을 다 주님에게 맡겨놓고 고만 주님만. 주님의 진리만 거머쥐고 나가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성공의 비결이요 승리의 비결이요 그것이 부강해지는 비결입니다.

 우리 현실에서는 반드시 그런 일이 있어 가지고 이제 그것이 견고해지고 다  성립돼 나갑니다.

 그다음에 말씀하시기를 '백 배나'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핍박을  겸하여 받는다 말은 박해를 겸하여 받는다 하는 말인데, 이 박해를 겸하여  받는다는 요 박해는 무슨 박해를 가리켜서 말하는 것인고 하니 반드시 고때에  하나님이 세상을 일으켜 가지고서 박해가 오는데, 무슨 박해냐? 하나님이냐  그것이냐? 하나님이냐 이것이냐? 하나님 할래 이거 할래? 하나님 내놔라 이것  준다 하는 그 박해라 말이오. 세상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을  바라보고, 하나님 의지하지 못하게 세상 의지하게, 하나님에게 복종하지 못하게  세상에게 복종하도록 이렇게 하라는 그 강한 대적을 하나님이 일으켜 세웁니다.

일으켜 세워. 그래야 이제 합격 이 되는가 낙제가 되는가 보지. 그렇게 그  핍박이, 박해가옵니다. 박해가 올 때에 그때에 우리는 벌써 지식을 가기고 있기  때문에 '요. 박해가 오는 것 보니까 두 가지를 지금 어느 것 할라느냐 이렇지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서, 또 이 땅의 것을 취하라고 협박과 위협을 놓고 또  이렇게 달래고 꾀우고 하는 것 보니까 이것 참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야 될  때로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렇게 와 가지고 이제 세상 걸 바라보고 의지하고 복종하고 이렇게 할 때에는  이 꽤우는 것, '요 마귀의 일군이라. 마귀의 사자가 왔구나. 마귀의 심부름군이  왔구나 우리는 보고 알아야 된다 말이오. '마귀의 심부름군이 왔구나. 마귀의  심부름군.' 말은 안 하지만 '네, 네.' 이래도 '마귀의 심부름군' 속으로 '마귀의  이 심부름군에게 유혹 받지 안하게 해 주옵소서' 우리는 속으로 기도하고 그라고  있지, 또 그라면 위협과 협박을 줍니다. 협박을 주면 우리가 성경 진리를 알았기  때문에, 그것이 승리하는 유일의 길인 줄 알았기 때문에 자꾸 혐박을 해도  빙글빙글 웃으면서 암만. 부러 웃으면 촛불지르는 일 되니까 웃지는 안하지만  피부를 보니까 피부에 희희낙락이고 안심이고 겁이나' 염려하는 일이 하나도  없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그게 미워서 야단을 지겨요. 야단을 지겨도 결국은 그들은 패전하고  마는 것입니다. 바꾸어서 이제 하나님 바라보고 의지하고 그에게 피동되는  요것을 변동만 안 하면 천하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 천하도 복종해. 하나님이  책임지시기 때문에 아무도 하나님을 능가할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자유할  자가 없어. 이러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에게 맡기는 것이니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때에는 요런 단계를 통과해 가지고서, 그 어려움을 통과해  가지고서 고때에 이제 그것 취할라 하면. 그것 허할라 하면 하나님 내놓아야  되고 하나님 잡을라 하면 그것 내놓아야 되고 요런 단계에 와 가지고서,  내던지고 하나님 허하는 요 방편을 통해서 백 배가 온다 그 말이오. 성도에게는  다 요 방편을 통해서 온다 그말입니다. 요걸 굳게 잡아요. 놓지 말아요. 이것에  대해서 우리가 확정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오후에 두 가지를 말하려고 했는데 한 가지밖에는 말을 못 했습니다. 한 가지  말할라 하는 것은 주님만 사모하고 바라보고 의지하고 만날 주님과 주님 말씀만  생각하면 우리 일은 낭파 안 되나 하는 그것을 낭파가 안 되고 고래야 참  하나님의 전지전능의 사랑의 주님이 그 솜씨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다 하는 것을  말씀할라 했는데 시간이 없어 그거는 뒤로 미루고. 오늘 오후에 요것을 확정을  지웁시다. 확정을 지워요. 확정을 안 지우니까 내가 또. 말하게 돼요. 암만  말해야 확정을 안 지운다 말이요. 이 예사로이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 일이 번연히 지금 막 범하고 있으면서, 범하고 있으니까 백 배오는 이  축복이 오지 못하지. 그런 걸 범하고 있으니까 마귀 그놈들에게 죽는 날까지  사정을 해야 되지. 사정을 하고. 들어붙어 가지고서 사정해서 살라 하니까  그놈들이 우리를 이용해 먹을 대로 이용하고 놀릴 대로 놀리고 이렇게 시달릴  대로 시달리고 조롱할 대로 조롱하고 있으니, 이렇게 우리가 칙칙하고 비굴한  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이렇게 하지 말고 하나님의 아들답게 씩씩하게 살자 그  말이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확정을 지웁시다. 확정 지우고 다시 되풀이하지 맙시다, 개가 토하였던 것을  도로 먹고 돼지가 씻었다가 도로 구렁텅이에 들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다시  반복하는 일 하지 말고 판정하고 앞으로만 가지 뒤로 돌아서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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