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옥토에 뿌린 씨

  선지자선교회

본문 : 마태복음 131-9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혹 육십배,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전지 전능의 그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신데 이 하나님이 무슨 일이든지 하실 때에는 말씀으로 하십니다. 없는 가운데에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또 영계나 물질계의 수많은 존재들을 운영하실 때도 말씀으로 운영하십니다. 또 이 모든 것들을 심판하실 때도 말씀으로 심판하시고 이 모든 것을 다 파괴 시킬 때도 말씀으로 파괴를 시키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이시며 또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또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전지하신 하나님이시요 없는 가운데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요 또 창조된 것을 영원히 보존 관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시요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통치도 하시고 개별적으로 낱낱이 섭리하셔서 창조된 것을 멸해서 개가 되었던 것을 또 흙으로 돌아가게 하시고 도야지도 만드시고 또 도야지를 사람의 육체로도 만드시고 이렇게 모든 것을 윤회시켜서 이렇게 만드시는 재창조하시는 것도 이분이 다 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지극히 크신 분이신데 이분이 모든 역사를 하실 때에 말씀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이 우주가 참 측량 못 할 만치 큰 것이지만 '우주와 우주가 되어져라' 하실 때에 우주가 되어졌습니다. 또 바다와 육지와 이 공간이 각각 드러나라 하실 때 또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또 바다나 이 공중에 있는 모든 종류대로의 우리가 아는 그 모든 만물이 생겨져라 할 때에 그렇게 생겨졌습니다.

 

그러면, 말씀하실 때에 그렇게 그와같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그거는 그 말씀의 능력이 그와같이 하시는 것으로만 우리가 알지 그 능력이 내부적으로 어떻게 어떻게 역사해 가지고 그런가 그것은 우리가 모릅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은 크고 작은 모든 것, 또 세밀한 것, 굵닥굵닥한 것 모든 것을 하나님은 말씀 하나로 다 하신다 그것을 성경에 말씀해 놨었습니다. 모든 걸 말씀이 그렇게 하셨다 이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모든 것을 말씀으로 과거에도 하셨고 또 현재에도 말씀으로 하십니다. 앞으로도 또 말씀으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십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이 자기가 큰 궁지에 빠졌는데 그 궁지에 빠진 데에서 구출해 달라고 하나님에게 간구했다고 하면 하나님이 그 구출을 당신이 사람 볼 수 있는 그런 손을 가지고 궁지에 있는 것을 끌어내서 이렇게 구출하시는 하나님 아니십니다. 그것도 역연 말씀으로 하십니다. 그 구출을 간구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구출될 수 있는 말씀을 해 주십니다. 그러면 말씀을 해 주시면 그 말씀이 구출이라는 이 사실을 믿고 말씀대로 하고 보니까 구출이 됐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심령이 어두워져서 하나님도 우리 사람들과 같은 그런 존재로 알고 하나님의 하시는 것도 인간들의 그 주관이나 모든 육체가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면 이해를 하고 좋게 여겨서 달게 받을 터인데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다만 말씀만 가지고 하니 인간의 말이야 그 참말로 떡을 하면 천하 사람이 먹을 떡을 하루 아침에 다 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는 것처럼 인간의 말은 암만 말해야 말하는 그거 가지고는 뭐이 돼지지를 않습니다. 이런 말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하시니까 그것이 인정이 될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실 때에 말씀으로 주시는데 말씀으로 주시는 그것이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말씀 주시는 것을 받아 가지고 고대로 하지를 아니해서 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지 못하는 것이 인생들인 것입니다.

 

, 이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모든 것을 주시는데 그 말씀으로 주시는 이 사실이 자기에게 인정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이 말씀대로 할라고 또 자기가 시작해보면 되나 안 되나 한번 하나님을 시험해 보도록 한번 말씀대로 해보자 그 말이오. '되는가 안 되는가 해보자' 하고저 말씀대로 할라고 하면 이 말씀대로 해서는 낭파된다고 그렇게 방해하는 것들이 심히 많습니다. 방해하는 것이 심히 많고 말씀대로 하면 망한다고 유혹 시키는 것이 많고 이러니까 그 환경에 유혹하고 방해하는 것이 많으니 또 말씀대로 행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래서, 하나님은 그 사람이 궁지에 빠져서 구해 달라고 하실 때에 하나님은 참 거기서 구출해 주시되 이는 완전하고 튼튼하게 구출해 주시건만 구출해 주시는 것이 사람들에게 인정이 되지 안해서 구출해 주시는 그 말씀을 사람들이 버리고 구출해 주시는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안하는 거기서 다 하나님의 구출을 받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이러합니다.

 

이래서, 하나님이 여게 씨 뿌리는 비유에 씨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서 씨라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19절에 보면 내려가서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을 씨로 이렇게 비유해서 말씀해 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전지 전능의 말씀이라 하는 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붙잡고 이 말씀을 놓지 안하고 이 말씀을 붙잡고 우리가 가는 것은, 비유컨대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밧줄을 던지니까 이 밧줄을 제가 잡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라고 이 밧줄을 제가 거머쥐고 놓지 안하고 바다에 떨어진 사람이 이 밧줄을 거머쥐고 지금 밧줄만 놓으면 죽으니까 밧줄 놓지 안할라고 애를 쓰는 거와 같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놓지 안하면 살고 놓으면 죽는데, 놓지 안할라고 애를 쓰나 사람이 이 밧줄을 붙들었지만 그것이 심히 다급하게 돼지면 그만 밧줄을 놓아 가지고 그 사람이 바다에 빠져 죽고 살지 못하는 그런 위험스러운 구원의 방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가 붙잡고 하나님의 말씀을 놓지 아니하고 이렇게 살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고, 이제는 하나님 말씀을 내가 붙들고 하나님 말씀대로 내가 살아야 되겠다,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되겠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겠다. 모시고 살아야 되겠다. 이렇게 자기가 자기가 하나님 말씀을 붙드는 것은 마치 밧줄을 붙드는 거와 같고, 또 자기가 말씀을 붙들지 안하고 이제는 말씀에게 붙들려서 하나님의 말씀에게 붙들려서 사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이 뭐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고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자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조그만한 자유도 가지지를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대해서 자유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말씀 자유대로 하지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조그만치라도 자유하지 못하는 그렇게 말씀에게 붙들려서 살아난 사람이 있으니 말씀에게 붙들려서 사는 사람은 이 전능자가 구원하실려고 하는 이 밧줄에 묶인 사람입니다. 밧줄에 묶인 사람. 밧줄에 묶인 사람은 밧줄을 거머쥐고 끌려서 구원으로 나아가는 것보담은 묶인 사람이 아주 든든합니다.

 

밧줄에 묶인 사람도 그런 일이 없지만 밧줄에 묶인 그것보다도 밧줄을 잡고 우리를 구원할라고 하시는 그 하나님의 장중에 붙들린 사람이면 그 사람은 더 든든합니다.

 

밧줄에 묶인 것보다도 그만 이 밧줄을 잡은 그 주님의 장중에 붙들렸으면 그 사람은 더 든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고 하니 이 성경 말씀을 내가 붙들고 놓지 안할라고 애를 쓰는 데에서 자라가면 나중에 이 말씀에게 붙들려서 내가 자유가 없는 말씀에게 내가 붙들려 가지고 꼼짝 못 하고 말씀이 가라면 가고 오라며 오는 이 말씀에게 자유 없어서 붙들린 사람이 차차 돼집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예루살렘에서 나를 잡아 죽일라고 모여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알지만 내가 이 말씀에 붙들려서 내가 안 갈 수가 없다. 내 마음에 붙들려서 안 갈 수가 없다.' 하는 그. 말 하는 것은 마음에 붙들렸다 하는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그 성신의 감화에 붙들렸다 하는 그 말입니다. 성신의 감화에 내 마음에 매인 바 되어서, 그러면 성경은 우리 마음을 통해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마음에 붙들렸다 하는 말은 성령에 붙들렸다 하는 그런 말입니다. 그것은 밧줄에 매인 사람도 아니고 밧줄을 잡은 하나님의 장중에 붙들린 사람이 되어집니다.

 

이러면 이것이 제일 튼튼한 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갈 때에 제일 든든한 것은 뭐이냐? 하나님에게 붙들려서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하나님의 그 어깨에 매여서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하나님의 장중에 붙들려서 이렇게 이 걸어가는 사람은 이 세상 통과할 때에 염려될 것이나 실패할 것이나 그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베드로가 바다 위로 걸어가다가 저 혼자 걸어갈 때에는 빠져 들어가디가 이제 빠져 들어가다가 주님에게 부르짖으니까 주님이 그 다음에는 손을 붙 들어서 잡아 일으키면서 붙들어 올리니까 바다 위에서 올라왔습니다. 그 후에는 주님에게 붙들려 가지고서 가니까 다시는 물에 빠진 일이 없이 배에게까지 잘 가게 됐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말씀은 전능자의 말씀인데 이 하나님이 큰 일 작은 일 온전한 일 영원한 일 세밀한 일 뭐 어려운 일 쉬운 일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은 일을 하실 때에 말씀으로 하신다 하는 요것을 우리가 첫째로 단단히 잡아야 됩니다.

 

그러면 말씀으로 하니까 이 말씀을 내가 떠나지 안하고 이 말씀을 배반치 아니하고 이 말씀을 모시고 사는 그 사람이 전능자를 모시고 사는 사람이요 하나님이 하시는 그 모든 것을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내가 붙들고 놓지 안하고 있는 거기서 그만하면 다 완전이 됩니다. 거기서 한 걸음 나아가서 이제 내가 말씀을 붙들고 놓지 않는 거기서 머물지 말고 이 말씀에게 완전히 자기를 바쳐서 말씀의 것이 되어서 이 말씀에게 완전히 자유를 박탈당해 버리고 이 말씀이 나를 자유 자재하고 나는 이 말씀에게 끌려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이 사람이 되어지는 것이 이제 하나님이 구원하는 구원의 밧줄에게 묶여 다니는 사람 한가지입니다. 묶여 다녔어요. 묶였으니까 붙들어 묶였으니까 이 사람은 떨어질 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밧줄을 거머쥔 주님이 놓으면 낭파지만 자기가 붙들고 다니는 것보담은 튼튼해집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이제는 살든지 죽든지 주의 말씀에게 나는 복종하겠다' 하는 이 사람이 되면 일 학년에서 이 학년이 생깁니다. 일 학년에서 이 학년이 돼서 이 바다에 빠져 가지고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이 구원의 줄을 자기가 잡았으니까 다행입니다. 이 구원의 줄을 잡았으니까 다행 인데 잡은 것은 파도가 심히 날뛰면 자기가 그만 놓고 떨어지기 쉽겠습니다. 거기서 얼른 기회 있을 때에 이 밧줄에 자기가 묶어져야 되겠습니다. 이 밧줄에 붙들려 묶어져야 되겠습니다. 밧줄에 붙들려 묶여지면 더 든든해집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기회가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게 완전히 자기는 자유라 하는 것을 완전히 바쳐서 이 말씀에게 자유를 완전히 뺏기고 이 말씀은 내게 자유할 수 있고 나는 이 말씀에게 자유할 수가 없고 말씀이 가라 하면 아무리 가기 싫어도 가고 말씀이 하라 하면 아무리 하기 싫어도 하고 말씀이 죽으라 하면 아무리 죽기 싫어도 죽고 이렇게 말씀에게 붙들리는 이 일을 마련하는 것이 그 기회가 있으면 이 말씀에 붙들리는 일을 마련하는 것이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이 바다에 빠져 가지고서 이래 가지고 있는데 풍랑이 일 때는 어찌할 수 없지만 풍랑이 안 일면, 밧줄로 가지고서 자기를 그만 매어 놓으면 그거는 나중에 안 되면 송장이 끌려가도 끌려가지 바다에 빠질 리는 없습니다. 그 밧줄에 끌려가니까.

 

그와 같이 든든함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의 든든함이 비유컨대 그저 이와 비슷합니다. 또 이 밧줄에게 붙들린 것보다 이제는 내가 주님에게 주님의 손에 직접 붙들려야 되겠다, 그 주님과 밧줄을 그 사이다 두고 밧줄에게 붙들리는 것보다도 밧줄을 이제 붙들어 가지고 밧줄을 타고 들어가 가지고서 이제 주님의 손에 내가 붙들려야 되겠다, 주님의 장중에 붙들려야 되겠다 하면 여게 나 가지고 장중에 붙들리는 것은 어떤 것이냐 말씀을 붙들고 놓지 안하다가 말씀에게 완전히 붙들려 매여서 내가 말씀에게 붙들려 매여서 매인 사람이 돼 가지고 거기서 노력을 하면 하나님이신 성령님의 장중에 잡히게 됩니다. 성령님에게 붙들리게 되면 그러면 이제 하나님에게 직접 붙들리는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 이 갈릴리 바다와 같은 이런 그 위험한 이 세상을 지나가는데 그만 세상에 빠지면 죽어 버립니다. 세상에 빠지면 그 사람의 생활은 완전히 죽습니다. 아무리 중생된 사람이라도 세상에 빠지면 그 사람의 사는 생활과 기능은 완전히 죽어 버리고 다만 기본구원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 되어지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 말씀은 곧 말씀은 성령님에게 연결돼 있고 또 말씀은 성령의 감화에 연결돼 있고 성령의 감화는 곧 성령님에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께 연결 되었으면 성령님에게 연결된 것이 하나님에게 연결된 것이요 성부에게 연결된 것이요 성자에게 연결된 것이요 성령에게 연결된 것이라. 그러면 연결은 뭘로 연결하느냐? 연결은 이 진리라는 밧줄을 가지고 우리가 연결하게 됩니다. 그러면 진리라는 이 밧줄을 가지고 영감을 내가 만나서 영감과 연결되게 되고 영감과 연결된 그것이 곧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연결되는 그 연결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게 말씀하시기를 옥토에 뿌린 씨는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한다. 성과를 이룬다, 그렇게 백 배 육십배 삼 십 배의 결실을 한다. 이렇게 와 백 배라 육십 배라 삼십 배라 이렇게 말했는가, 거게 대해서 늘 생각은 가지고 있기는 있었지만 작년 대구 집회 때에 제가 가 가지고서 제가 그것을 그 증거를 하면서 좀 그저 내 깨달음에 그렇지 의문되는, 아직까지 의문이 풀리지 안하고 확신이 가지 않는 그런 증거로 제가 증거를 했습니다. 증거를 하고 그 뒤에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는 무엇을 가르치는가 그렇게 대구에서 내가 증거한 대로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하기는 생각 했었는데 그것을 그렇게 발표하는 것이 좀 어짠지 그 어색하고 또 모든 사람이 들을 때에 거게 대해서 좀 듣기를 다 어색하게 들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증거하나 안 증거하나 이렇게 망서리기를 오랫 동안 망설거리다가 대구 집회 때에 그것을 증거를 했고 그 뒤에 늘 계속해서 생각해 나왔는데 지금은 제가 확신 있게 증거를 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 거게 종이라, 또 어린 아이라, 또 젊은이라 늙은이라 하는 그 해석도 예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상징적으로 말씀해 놓은 것인데 그것도 상징적으로 해석을 할라 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똑 조작배기로 끌어다가 해석하는 것같이 여길 것이고 그렇게 인정을 잘 안 할 것 같아서 그 해석하는 것을 주저를 많이 하고 이래 하다가 오랫 동안 주저하다가 그 다음에는 확실히 깨닫고 그렇게 아이 믿음, 종의 믿음, 젊은이 믿음, 늙은이 믿음 거게 대해서 지금은 이제 확실히 나는 확신을 가지고 증거를 하게 됐습니다.

 

그것도 아마 다른데 가서 말하면 저 국척스럽게 저렇게 꾸며대서 해석한다 이렇게 할 것인데. 요한계시록은 보면 그렇게 거의가 그래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다른 성경에 배치되지 않고 성경적으로 돼 있으면 그것이 바른 해석이 되는데. 그러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해석이 제일 어렵고 또 계시록 해석은 하기 쉽습니다. 아무나따나 해석 할 수 있기 때문에 하기 쉽고 참 바로 하기는 제일 어렵습니다. 성경 가운데 요한계시록 해석이 제일 어렵습니다. 요한복음 요한 일서가 그 해석을 하기가 주해는 제일 어렵고. 구약 성경은 좀 쉽고 신약에도 요한복음과 요한 일이 삼서가 해석이 하기가 제일 어렵다 할 수 있는데 그 해석보다 요한계시록은 해석하기가 더 어렵소. 그 해석을 바로 깨달아야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상징적으로 또 해놓은 이런 것은 사람들은 다 이 과학적인 사람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과학으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거 이런 것은 좀 말하기가 어색하고 좀 서먹서먹하다 그거요. 그것이 뭐이냐? 증거하는 나부터가 나부터가 그 믿음의 확신이 없기 때문에 서먹서먹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밤에도 확신을 내가 가지고서 증거를 하지만 내 마음에 지금 이 증거를 하면서 이런 해석을 붙이는 것은 왜 해석을 붙이게 되느냐? 아직까지도 나는 확신을 가졌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좀 쉽게 납득하지 아니하리라 하는 그 점에 대한 염려가 되기 때문에 이런 여러 가지로 거게 대한 서론을 많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앞으로는 이런 서론 할 것 없이 그저 막바로 직접 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는 무엇이라 하는 것을 막바로 증거를 하고. 또 이 증거하는 것이 온 세계에 퍼져서 여기 씨 뿌리는 비유에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라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이렇게 인식을 해서 공통적인 인식이 돼 가지고서 이것도 하나의 그 교리가 되어지기를 저는 바랍니다. 이렇게 장차는 이 교리가 되리라 너는 그렇게 생각을 가집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기본구원을 우리가 마련할라고 사는 것이 아니고 건설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 건설구워이라는 것은 그것은 성화구원이라고도 할 수 있고 행위구원이라 할 수 있는데, 행위구원이라 하는 것은 그 구원 이루는 그 모든 그 동향들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이고, 건설구원이라는 것은 기본구원을 근거해 가지고 되는 것을 가리켜 말하고, 성화구원 이라는 것은 이것이 이 모든 멸망 받을 것들이 완전화 된다, 완전화 된다, 하나님 뜻화 된다. 하나님의 속성화 된다 하나님의 속성화 된다 그런 것을 뜻해서 성화구원이라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 구원을 건설구원을 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있는 것인데, 그러면 건설구원을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라. 성화구원을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라. 우리 행함을 가지고서 이루어지는 이 행위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 그러면 이것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면 대체 뭘하는 것인가? 구체적으로 뭣을 하는 것인가? 그것을 우리가 밝혀야 되겠습니다.

 

이제 성화구원이라. 행위구원이라, 뭐 건설구원이라 하는데 그러면 건설구원이 뭐이며 행위구원이 뭐인가? 성화구원이 뭐인가?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을 하라 한다면 구체적인 뭣이 있습니까? 이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

 

또 모든 사람과 우리와의 관계 또 이 악령과 우리와의 관계 이 삼대 관계를 바로 맺을라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성화구원입니다. 3가지 관계.

 

그러면 만물 관계는 어찌 되는가? 3가지 관계를 바로 맺을 때에 만물 관계는 따라옵니다. 만물 관계는 내가 사람 관계를 바로 할 때에 만물은 거게 따라서 바로 하면 그 만물들이 다 살아나고 사람과 나와의 관계가 잘못될 때에 거게 관련된 거는 다 죽어 버리고 내가 마귀와의 관계를 가질 때에 관계를 바로 할 때에 거게 관련된 모든 만물은 다 살아나고 내가 마귀와의 관계를 잘못할 때에 만물들은 따라서 멸망 받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화구원이라, 건설구원이라, 행위 구원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영원 무궁한 세계의 하나님과의 내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영생활 것을 지금 마련합니다. 또 인류와의 어떤 관계를 가지는 것을 우리가 지금 마련을 합니다. 또 악령과의 어떤 관계를 가지는 것을 지금 마련을 합니다. 그러면 이 3가지 마련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어떤 피조물이든지 모든 피조물과의 나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 그것을 이 세상에서 마련하는 그것이 우리의 성화구원입니다.

 

그래서 여게 백 배를 말한 것은 무엇이냐? 백 배는 인간의 수를 가리켜서 열을 가지고서 늘 하나님이 가르치십니다. 그러면 '열흘 동안 열흘 동안 시험을 받으리라' 그렇게 서머나 교칭에 대해서 말씀했는데 '열 흘 동안 시험을 받으리라' 서머나 교회에게 말씀하셨는데 '열흘 동안 시험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해라' 열흘 동안이라고 거게 표시한 것도 인간에게 대해서 인간에게 대해서 만만점 하나님이 인간에게 대한 그 만점의 시험을 너희에게 할 것이라. 그러면 만점의 시험은 다 양이 일치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네라는 사람에게 네게 대한 그 만점의 시험을 할 터이니까 그 만점의 시험을 하는데 그 만점이라는 것이 한정돼 있지 무한의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네가 있는 힘만 다 기울여서 충성 하면 그 만점 시험에 만점을 할 수 있다 그렇게 열을 말했고, 그러면 열은 거기서 일반적으로 다 성경을 보고 깨닫고 모두하는 사람들이 열은 사람의 수라 그렇게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의 수다. 사람의 수가 열인데, 그러면 백이라면 사람의 수를 또 그 만수를 하면 백이 된다. 인간의 인간의 만수에 만수하면 백이 된다. 마귀 수는 또 여섯으로 가리켰습니다. 이래서 육백 육십 육이라 이랬는데 여섯 수에다가 인간의 만수를 가하면 육십이 됩니다. 또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셋은 하나님의 수라 모두 다 이래 말하는데 그러면 셋에다가 인간의 만수를 가하면 삼십이 됩니다. 그래서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맺을 수가 있다.

 

네가 인간에게 대해서 네가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우리가 있기 전 세대에 왔다가 간 사람들은 우리가 모릅니다. 우리가 있기 전 세대의 세상에 왔다 간 사람의 그 수가 얼마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는데 그 사람에게 대한 관계를 우리가 어떻게 바로 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 주님의 재림이 지금 끝난 다음에 우리 뒤의 사람은 없지만, 우리 뒤에 날 사람들도 있을란지 없을란지 모르기 때문에 그 수도 많으니까 그 사람과의 관계를 우리가 바로 맺을 만한 자격이 없다 그 말이오. 또 내가 이 한국 부산에 있는데 이 넓은 이 세계에 흩어져 있는 별별 사람들이 많이 있고 또 나를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고 원수도 있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이 여러 사람들이 있는데 그 모든 사람들에게 대해서 너와 모든 사람과 인인관계를 인인관계의 만점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 하는 이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인인관계의 그 만점을 네가 이를 수가 있다. 뭐 이전 사람이 나 이후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아는 사람이나 나의 원수된 사람이나 어떤 사람이든지 모든 사람에게 다 만점을 이룰 수 있는 것이 뭐이냐면 옥토에 뿌린 씨다. 옥토에 뿌린 씨는 만점을 이룰 수가 있다.

 

또 여섯은 마귀 수인데 이 세상에는 마귀 수가 뭐 얼마인지 모릅니다. 한 사람에게 마귀 하나 이상은 다 속해 있고, 또 한 사람에게 이천 마귀가 속해 가지고 있는 것도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마귀 수도 그렇게 많습니다. 이런데 그 마귀와 나와 서로 대결한 것도 있고 대결 안 한 것도 있고 내가 모르는 마귀도 있고 접촉하지 안해 본 마귀도 있고 수많은 마귀가 있는데 그 마귀와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 만점을 이룬다, 만점을 이룰 수 있다, 육십. 마귀 수의 인간의 만점 수. 네가 인간으로 서는 마귀에 대해서 그만 하면 만점이다. 조물주가 볼 때에 너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탄 마귀. 공산주의를 통해서 역사하는 마귀, 민주주의를 통해서 역사하는 마귀 또 민족을 통해서 역사하는 마귀, 모든 정권들을 모든 재벌들을 모든 사업들을 과학들을 땅위의 별별 것을 제 이용물로 삼아 가지고 우리 성도들을 시험하고 넘어트릴라고 대결해 싸우는데 네가 모든 마귀하고 그 관계되는 마귀하고는 우리가 대결하는 것이 우리 할 일이요 마귀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우리 할 일이요.

 

, 사람과의 관계는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해서 그 사람들에게 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주님이 모든 음부의 지옥에 가 있는 사람들도 주님에게 감사하다면서 주를 주라 시인하면서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와같이 이는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 일도 그렇습니다. 주님이 하실 때도 첫 열매 주님이 하실 때도 그랬습니다.

 

주님이 하실 때도 십자가 상에 죽기까지 다만 아버지가 그에게 말씀하신 고 말씀을 지킨 거 하나 가지고서 저 지옥 밑층에 있는 모든 것들도 다 주님에게 대해서 아무 반감이 없이 다 주라 시인하고서 영광을 돌리게 됐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마귀와 모든 사람과 관계 맺은 것이 하나도 후회가 없고 흠점이 없고 쥐어 뜯을 일 없고 하나님의 그 심판에서 그들이 뭐 수 없는 그 주장을 할 수 있지만 그들의 입이 다 막혔고 하나도 주님에게 대해서 항의나 불만이나 시비를 불평을 할 수 없도록 그렇게 완전 관계를 가진 것이 주님이 십자가에서 대속하신 것입니다. 또 마귀와도 그런 관계를 관계했습니다. 또 삼수, 하나님, 하나님과의 관계도 예수님께서 아무 흠 없는 완전 관계를 가졌습니다.

 

완전 관계를 가진 것이 뭣 가지고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많고 넓고 수 없는 모든 존재의 지극히 높으신 자존하신 하나님과도 예수님의 인성으로서 완전 관계를 가졌소? 인인 관계도 완전, 또 마귀와 관계도 완전, 또 하나님과의 관계도 완전.

 

완전 무결의 이 관계를 맺은 것이 예수님께서 무슨 조화와 무슨 능력과 무슨 법칙을 가지고 만들었던가? 다른 거 가지고 안 만들었습니다. 믿음 하나 가지고 만들었습니다. 믿음 하나 가지고. 믿음이라 무슨 믿음인가?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거 고거 하나 가지고 만들었습니다. 다른 거 아니고.

 

그러니까 우리에게도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 결실을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곧 이제까지 모든 성경이 말하는 것은 우리 구원 이 3가지가 중요한 것인데 이 3가지 중요한 것인데, 3가지를 하나님의 말씀, 옥토에 뿌린 씨라면 옥토에 뿌린 씨가 이렇게 성공한다고 하면 옥토에 뿌린 씨가 성공한다고 하면 이 3가지 성공이라야 성공이지 다른 성공이 성공이 아닌데 이 3가지 성공이라야 성공인데. 거게는 백 배, 육 십 배 삼십 배로 말했으니까 그걸 어떻게 이 3가지 성공이라 할 수가 있겠는가? 이런 거 같으면 어색하게 되는데 어색할 것인데 그게 아니고, 성경에 말하기를 인간의 만수는 열이라고 말했으니까 열의 인간 만수를 가하면 백이 되고, 마귀는 여섯 수라고 말해서 육백 육십 육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저는 목욕에 가서 이 머리에 그 물을 퍼서 쓸 때에도 그거 합니다. 서이 안 하면 여덟합니다. 여섯은 안 합니다.

 

어찌하다가 그만 세아리다 보면 잘 몰랐을 때에 이 여섯인지 모를 때에는 그럴 때에는 대략 짐작해서 여섯은 넘어가도록 하든지 그러면 그때는 뭐 무한정으로 자꾸 두터 씌웁니다. 두터 씌워서 뭐 열이고 스물이고 그만 뭐 몇 십이든지 계속해 넘어갈라고. 여섯 수에 들지 안할라 하는 거. 목욕할 때 물 퍼 쓸 때에도 그렇고, 또 무슨 거석을 할 때에도 여섯 수는 여기 그만 상대 하지 안할라고 그렇게 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육백 육십 육이라 그것도 한번 세아리면 여섯이요 열 세아리면 육십이요 또 백번 세면 육백이라 그랬는데 마귀에 대해서도 네가 옥토에 뿌린 씨가 되면 만점을 이루게 된다. 그 마귀에 대해서 쫓가낼 거는 쫓가내고 이용할 것은 이용하고 가둘 것은 가두고 호통칠 것은 호령치고 이래서 마귀 상대해서 하나도 네가 흠점이 없다. 마귀 상대에 너는 완전 승리를 했다. 그 마귀는 멸하는 것이 우리 일이라 했기 때문에 마귀에게 지지 안하고 마귀를 이기는 것이 우리 할 일이기 때문에 마귀가 어떤 유혹을 했지만 완전히 이겼다 말이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세상 임금이 오겠으나 하는 것은 마귀 온다 말입니다.

 

오겠으나 와 가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서 고문 고형하고 이라는데 마귀 오겠으나 내게는 상관이 없다. 저야 오든지 가든지 나는 상관없다. 나 할일은 따로 있다. 와서 저가 어떻게 하든지 다만 내가 어떻게 아버지를 사랑하는 거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만 나타날 것뿐이지 제가 건드리면 거기서 또 아버지 사랑하는 것 나타나고 건드리면 아버지 계명 지키는 것만 나타나지 딴거는 하나도. 나는 나 할 일은 이것 뿐이다. 이 일만 전공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완전 승리를 이루셨다 말이오 이러니까, 우리도 옥토에 뿌린 씨가 된다면 이 옥토에 뿌린 씨가 된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순종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모시고 말씀 순종하는 거 가지고서 완전히 다했어.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 12장에는 말씀하시기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는 이이신 예수를 바라보자' 이랬어. 예수님은 믿음으로 성공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성공했어.

 

믿음은 뭐이 믿음인가 하면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믿고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라는 것을 내가 인정하는 것, 내가 믿는 것, 그라고 난 다음에 그대로 복종하는 것이 믿음인데. 옥토에 뿌린 씨는 이거는 참 온전한 믿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믿음의 결실은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로 재미있는 말을 해놨습니다. 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로 이래 말한 거 우리가 똑똑히 알 수 있도록 인인 관계에 네가 완성을 이룬다. 악령과의 관계에 완전을 이룬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전히 이룬다. 이것으로서 옥토에 뿌린 씨가 이렇게 가치 있고 또 능력 있고 존귀하고 지혜로운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옥토에 뿌린 씨가 되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접하는 것입니다.

 

옥토에 뿌린 씨 이 씨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가 제일 처음에 이 하나님의 말씀은 비유할 때에 밧줄과 같다 했지요? 밧줄과 같이, 밧줄과 같은데 밧줄과 같은데 이 밧줄과 같은 이 말씀을 내가 붙들었습니다.

 

내가 붙들었는데, 이 말씀을 붙들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길가 뿌린 씨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길가 뿌린 씨. 길가 뿌린 씨가 이 말씀을 이 말씀을 우리 마음에 간직하지 못하도록 길가 뿌린 씨가 이 말씀을 우리 마음에 담기지 못하도록 담기지 못하도록. 우리로 하여금 깨닫고 깨닫고 믿지 못하도록, 이 길가 길 바닥이 들어서 믿지 못하도록 깨닫지 못하도록 한다. 요것을 버려야 되겠다. 그러면 길 가를 벗어나야 됩니다. 우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믿지 못하게 하는 요것을 없애 버려야 됩니다. 요놈을 요놈을 없애 버려야 됩니다. 요게서 벗어나야 됩니다.

 

요거는 그 하나님의 말씀의 씨를 받을 때에 받을 때에 방해하는 것을 가리켜서 길바닥이라 이렇게 말했고, 또 이 씨가 자랄 때에 이 씨가 자라갈 때에 자라가는 것을 자라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을 가리켜서 돌짝 밭이라 또 이렇게 비유했고, , 이 씨가 자라 가지고 결실을 할라 할 때에 결실 할라고 할 때에 결실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가리켜서 덤불 위에 뿌린 씨라. 덤불이 자라 가지고서 자라기는 자라지만 덤불이 위에 눌러 놓으니까 그늘이 져 가지고서 그 덤불 밑에 무성하게 자라기는 자랐지만 결실은 못 하게 된다, 결실 못하게 된다 이랬습니다. 그러면 옥토에 뿌린 씨로 말하면 요 3가지 방해물을 벗어나야만 옥토에 뿌린 씨가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듣든지 읽든지 할 때에 거게 밭으로 비유한 것은 밭으로 비유한 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우리 마음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가리켜서 밭이라고 말했는데 또 조금 광범위하게 말을 할라고 하면 우리 마음이 아니라 우리 육입니다. 우리 육. 우리 육 영이 아니고 우리 육, 육을 비유해서 요게 밭이라 그렇게 말해 놨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의 도의 말씀을 내 육이 내 마음이 듣고 깨닫고 믿을라고 하는 데에 길바닥 요놈이 들어서 그 씨를 받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씨를 받을라 하니까 길바닥이 딴딴해 놓으니까 암만 뿌려봤자 땅속에 안 들어 가니까 땅속에 안 들어가니 새들이 와 주워 먹었다 말이오. 만일 땅이 허벌허벌해서 땅속에 들어갔으면 새가 와서 주워 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 길 바닥이라는 그것이 뭐이냐? 길 바닥이라는 것은, 간단하게 많은 사람이 왔다 갔다 하면서 밟은 것이 그것이 길바닥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밟힌 마음이라 그 말이오. 많은 사람에게 밟힌 마음이라, 많은 사람에게 밟힌 육이라 그말이오. 많은 사람에게 밟힌 육이라. 그러면 그 말은 그 많은지식에게 많은 지식에게 밟힌 마음이요 몸이라, 많은 지식으로 강팍해지고 완패해진 그 심신이라 그 말이오. 그러면 길바닥을 그렇게 자꾸 늘어나가 가지고 마지막에는 그 지식이라 그렇게 하는 말이 그거 도무지 짐작 못 하겠는데 이해 못 하겠는데 혹 그렇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길바닥은 많은 사람이 오고 가서 그 땅이 다져진 것은 그것은 고 사실이지요? 고 사실 아닙니까? 그러면 주님이 말씀하시기를고 밭을 우리 마음이라고 말을 했는데 마음이 돌밭과 같은 마음도 있고 덤불밭과 같은 마음이 있고 길바닥과 같은 그런 마음도 있다 하는 것을 고게 말씀했기 때문에 고거는 의심할 여지가 없고 달리를 암만 변동할라 변동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이 왔다 갔다 했다. 이것이 뭐인가? 그것을 가리켜서 문화라 그래 말합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문화라. 문화라. 많은 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 그게 뭐이 문화가 되는가? 그게 문화입니다. 창세 이후 이천 년 동안 많은 사람이 왔다 갔다가 하다가 말다가 이거 하고 저거하고 또 시작하고 말고 또 끝까지 하고. 또 이래 실패하고 서래 실패하고 모든 이천 년 동안 인간 생활하는 데에서 인간의 경험.

 

체험, 행동, 또 모든 보고, 또 자기대로 해석하는 거 간단하게 말하면 이천 년 동안 인간의 모든 행동, 인간의 모든 생활 그것을 문자로 기록해 놨으면 그것이 인간의 지식이 됐겠고. 또 인간의 행동이 됐겠습니다. 그랬는데 하나님께서 이천 년이 지나고 난 다음에 인간들이 그만물보다 타락 후에 거짓된 인간들이 제 경험한 대로 경험한 걸 다 썼습니다. 내가 경험했는데, 경험했다 하지만 그 경험을 믿을 수 없다 말이오. 체험 했다 하지만 그 체험도 믿을 수 없다 그 말이오.

 

내가 어떤 그 접촉해 보니까 저 아주 야만국인데 야만국에서 거게는 참 그 공중 신을 섬겨서 공중 신이 우리의 생사 화복을 주관한다 이라고 있는데, 그 사람이 이 공중에서 우리를 구원할 신이 있다 이랬는데, 그 사람이 그때는 조금 오래 전이니까 그 비행기가 처음으로 그리 날라갔다 말이오. 지금 비행기에 관해서 모두 다 일반 보편 상식이 됐지만 그때는 비행기를 몰랐다 말이오. 몰랐는데 그래 오랫 동안 있으니까 언제 한번 보니까 공중으로 훅 날라가는데 새도 아니고 뭐 독수리도 아니고 굉장히 큰 것이 날라가서 '하아 저것이 우리가 섬기는 신이다' 거게다 대고 절을 하고서 이렇게 했다 말이오. 다른 사람에게 '보라 우리가 믿는 그 신이 오늘 이리 지나가셨습니다. 내 위에 오셨다가서 그래 지나 가셨다.' 그래 말하니까 다른 사람이 '어디 그런 날라가는 그런 신이 있겠느냐?' '네가 모르거든 와 봐라' 그라면서 하도 그래 쌓고 세워대고 이라다가서 그 사람들이 있다가 '그런가 보자' 얼마 동안 있으며 가서 보니까 어째 한번 썩 지나간다 '봐라. 이래도 거짓말이가?' 이라니까, 그 사람들이 ', 옳다. 네 말이 옳다. 저거 우리 신 그만 저 신을 우리가 섬기자.' 했다 말이오. 그거는 실은 사람이 타고 가는 비행기라 그 말이오. 비행기인데 그들은 '봤다. 눈으로 봤다.' 우리가 그러니까 우리가 뭐 하니까 막 우글우글 하며 소리를 하고 거기서 소리가 어떻게 웅장하고 큰지 그러니까 '그 크신 분 아니냐? 소리 들으니까 크신분 아니더냐?' 이렇게 하는 거와같이 모든 것이 다 인간 주관으로 경험했다 봤다 해도 그걸 믿을 수 없는 거고 모두 다 거짓 부리라 말이오. 전부 거짓부리를 주워 모아 놓은 거라 OOO선생이 나한테 어제 편지가 왔는데 그거 말했어. '목사님 목사님이 꿩꼬리 철학이라고 이렇게 말씀을 했는데 미국 와서 꿩꼬리 철학을 경험을 했습니다.

 

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무오한데 하나님의 말씀에 삐뚤어지게 이래 삐뚤어지고 저래 삐뚤어시고 모두 저거대로 주장을 해 가지고서 말을 하는데 그게 전부 꿩꼬리 철학입디다. 제 아는대로 말 하기는 말했는데 하나님 말씀을 아는 내가 하나님에게 비추어 보니까 다 틀렸는데 제딴에는 옳다고 뭐 그래 가지고 뭐 어떻게 주장을 하고 사상 하고 이래 가지고 무슨 회 무슨 회 무슨 사상 이래 가지고 했는데 그게 참 꿩꼬리 철학이라 하더니만 목사님이 꿩꼬리 철학이라고 이렇게 증거해 주신 그 사실을 미국 와서 체험했습니다.' 그라면서 그렇게 편지가 왔습디다.

 

이래서 사람들이 '내가 봤다, 내가 경험했다.' 경험하고 본 것을 똘똘 뭉친 서적을 만들어 놔도 그거 봤다는 것을 그걸 인정을 못합니다. 내가 실지로 체험했다, 체험했다. 경험했다 해도 그것도 인정 못 합니다. 그거 다 거짓부리요. 이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천 년 동안 이와같이 해서 모든 잡된 것이라 해 가지고서 너무 지식이 많아졌습니다. 지식이 많습니다. 지식이 어떻게 많아서 뭐 산더미같이 지식이 많은데 그 지식을 말하면 거짓말이 모은 거짓말 그 종합 지식이요 또 그 모든 목적은 유혹의 목적이요, 또 결말은 사람을 죽이는 결말을 만드는 것이요 거게 왕이 돼 가지고 제일 처음에 발기하는 자는 누군가? 발기한 자는 타락한 천사 곧 사탄인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이 '너거 이놈들 내 지식은 부인하고 너희들이 자꾸 그렇게 하니까 너거 시식이 참인지 거짓된 지식인지 이제는 지식을 시험해서 지식을 한번 다 시험 해 가지고서 정리 정돈을 해야 되겠다' 하시고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 때에 노아 홍수를 그만 내리부었습니다. 홍수를 내려부으니까 뭐 인간들이 이거다 저거다 하는 것이 모조리 홍수에서 다 완전히 전멸당했습니다. 그때에 이천 년 동안 만들어 놓은 인간 지식이라 하는 것이 일시에 완전히 전멸을 당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전멸당하고 다만 무슨 지식만 남았느냐? 무슨 지식만 남았느냐?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그 말씀하신 그 말씀의 지식만 남아 있고, 또 무슨 힘만 남아 있느냐? 하나님이 말씀하신 고대로의 순종한 순종 고것만 남아 가지고서 순종 고게 사람이고 순종 안에 있는 사람은 다 홍수가 왔든지 말았든지 잘 지냈고 고 말씀만이 참 말이라. 고 말씀만 들어 순종한 것 만이 인간의 구원이 됐고 우주를 차지하는 것 수입도 이 우주를 차지했으니까 큰 수입이 됐고, 모두 다 죽는데 고 말씀에 순종한 고것만 살았기 때문에 구원에 대해서고 참의 길이 돼서 수많은 지식은 다 거짓부리 인간을 속이는 것이요, 다만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 지식이요 고대로 순종한 것 만이 인간의 구원이 됐다는 것을 일차적으로 한번 이와같이 시험을 하셔 가지고 나머지기는 다 불타 숙청이 돼 버렸고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 말씀대로 행한 고 둘만 남은 것이 노아 홍수 때의 그 홍수 심판인 것입니다.

 

이랬는데 지금 벌써 그 후 사천 년이 지나갔으니까 노아 때의 이 배나 지금 이 배나 지금 인간 지식이 가득 차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 지식이 가득 차서 뭐 이런 지식 저런 지식, 그런데 그 지식은 한말로 말하면 무슨 지식이냐? 인간이 이 걸음 걸었다. 저 걸음 걸었다, 여게 갔다가 저게 갔다. 저게 갔다가 여게 왔다. 인간이 가고 오고 이 걸음 저 걸음 걸은 그것을 다 모아 놓은 것이 세상 지식이라 그 말입니다. 세상 지식이라. 그것을 비유해서 이 지식에게 밟힌 거. 수많은 인간들이 걸어다니는 데에 그 발걸음에 밟혀 가지고 길바닥이 된 거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인간들이 이래 걷고 저래 걷고. 이 생활하고 저 생활하고. 이 마음의 작용으로 이 생각해 보고 저 생각해 보고, 또 이래 연구해 보고 저래 연구해 보고, 이래 욕심 부리고 저래 욕심 부리고, 이 깨달음 저 깨달음, 이 체험 저 체험 모두 다 그걸 한 말로 말하면 세상 지식이라 그렇게 결론을 짓습니다. 세상 지식.

 

세상의 지식인데, 이 주인은 누구냐? 뱀이요, 목적은 뭐이냐? 인간을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 목적이요, 그 방편은 뭐인가? 반거짓말로 꼬우는 것이라. 꼬우는 거, 꾀우는 것뿐이라.

 

그런데 이 지식이 들어서 사람 마음을 강퍅케 해 가지고서 하나님 말씀을 들으나 '뭐 내야' 세상에 같은 말. 참말과 같은 말인 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나 이 말씀이 전능의 말씀이라, 전지의 말씀이라, 없는 가운데에서 모든 것을 존재케 한 말씀이라, 또 이 말씀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말씀이라 하나님이 이 말씀을 통해 가지고서 없는 가운데에서 만들었고 만든 것들에게 이 말씀을 통해서 살게 하고 이 말씀을 통해서 살게 할 때에 이 말씀을 어긴 것은 죽게 하고 이 말씀을 통해서 성공하게 할 때에 이 말씀을 수락하는 자는 성공하고 이 말씀을 배신하는 자는 망하고, 이러니까 모두 다 이 세상은 가득찬 하나님의 계시라. 이래서 이 말씀에 위반된 거는 자꾸 망하는 거는 이 말씀에 위반됨으로 망하는 것이요. 이 모두 다 스스로 존속해 나가는 것은 이 말씀대로 행하는 것으로만 존속해 나가는 것이라.

 

이런데 사람들이 옥토에 뿌린 씨가 될라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지식으로 말미암아 자기 마음이 굳어지고 강퍅해지고 완패해져서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이 말씀은 털끝만치도 거짓이 없고 이 말씀은 참이라. 이 말씀은 실상이라, 이 말씀은 참이라. 이 말씀은 실상이라. 이 말씀에 이제 하늘과 땅의 것이 다 너의 것이 된다.

 

이 말씀은 참이라 말이오. 이러니까 이 말씀을 믿으면 하늘과 땅의 것이 다 네 것이 된다는 이 말씀을 믿고, 그러면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다 내것이 되는 데는 어떻게 돼야 됩니까? 네가 그리스도의 것만 되면 된다. 그리스도의 것만 되면 된다 이랬으니까 이 말씀이 곧 내가 그리스도의 것만 되면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다 내것 된다 그 말이오. 이 실상으로 된다 그거요.

 

이런데 이 사실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 뭐이며 거기서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이 뭐인가? 거게 대해서 소욕을 가지고서 소욕을 가지고서 마구 달라 붙어서 욕심을 가지고 이래 달라 붙어 가지고서 할 수 없도록 이 소욕이 생겨지지 못하게 믿음이 생겨지지 못하게 깨달음이 생겨지지 못하게 이해가 생겨지지 못하게 인정이 생겨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 뭐이냐? 이 모든 많은 인간들이 오고 가고 하는 거기에 내 마음이 굳어져서, 그게 뭐인데? 이 세상 모든 지식에게 우리 마음이 굳어져 가지고서 이와 같이 되는 것이니 모든 세상 지식을 완전히 부인해 버려라. 세상 지식을 완전히 부인해 버려라. 이것이 아니면 안 됩니다. 부인해 버려야 됩니다.

 

완전히 부인해 버리고 하나님 말씀만이 참된 말씀이요 이 말씀은 무한의 그 능력을 가지신 말씀인데, 곧 이 말씀은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은 이 말씀으로 하시기 때문에 내가 말씀만 받아서 내것 삼으면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내것 삼는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씨를 받을 때에 우티가 주의할 것은 우리의 원수가 뭐이냐? 씨를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이 길바닥을 밟아서 길바닥을 밟아서 다져서 다지게 해 가지고 안 되는 이거. 곧 많은 인간들이 사천년 동안이나 살아나온 인간 생애 이런 거 저런 거, 경험 체험, 증거, 계획, 주장 모두 하는 거 그거 통틀어서 말하면 내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지지 못하게 거게 소욕을 가지지 못하게 내 마음을 강퍅하게 하나님의 이 말씀의 씨를 이 말씀의 씨를. 이 말씀의 씨는 무슨 일 할건가? 이 말씀의 씨는 백 배를 결실 할 수 있고 육십 배를 결실 할 수 있고 삼십 배를 결실 할 수 있고 이 말씀의 씨는 모든 전 인류와 나와의 완전한 관계, 관계 완전을 이룰 수가 있고 악령과 나와의 완전 관계를 이룰 수가 있고 하나님과 관계에 완전 관계를 이룰 수 있는 이 지극히 능하신 무한하신 능력을 가지신 이 말씀의 씨인데 이 말씀을 나로 하여금 믿어지지 못하게 하고 또 나로 하여금 소욕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그것이 뭐이냐? 이 세상에 있는 사천 년 역사라, 사천 년 역사라. 사천 년 역사라. 사천 년 역사를 그걸 다른 말로 말하면 사천 년 동안 자꾸 주워 모아서 쌓아 놓은 지식이라. 그러면 그 지식은 무슨 지식이냐? 그 지식의 주인은 누군가? 주인공은 사탄이라. 그러면 그 목적이 어디 있는가? 우리를 사망케 하기 위해서 우리 구원을 이루지 못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목적이라. 그 방편은 뭐이냐? 전부 거짓말이라. 거짓말, 거짓말, 온거짓말 반거짓말 다 거짓말이라 그러기 때문에, 과학은 반거짓말이라. ? 과학은 물리에 대해서는 고걸 바로 말했지만 물질과 사람이 그 관계를 바로 해야 되는데 이 물질과 사람과의 관계를 잘못 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그 물질의 이치만은 맞지만 사람이 그것을 취급하고 관계할 때에 바로 하지 못하고 삐뚤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에 과학도 생명이 없는 것이요 죽은 것이요 반거짓말의 것이기 때문에 그것도 젊은 인간을 멸망케하는 것뿐이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종자를 받는 데에 방해물 요걸 우리가 벗어날라고 애를 써야 됩니다. 이거 벗어나는 게 뭐이냐? 그것이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부인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도적이요 강도라 절도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도적이요 강도라. 먼저 오다니? 먼저 오다니? 주님이 이렇게 대속의 도리를 우리에게 주시는데 대속의 도리 이전에 인간들이 뭐 이런 뭣이 구원이 있다, 저런 구원이 있다, 뭐 미신이든지 종교든지 철학이든지 도덕이든지 사상이든지 모조리 예수님의 대속에 대속에 속한 자 대속을 준비한 한 줄기가 계셨고, 대속 외에 있는 모든 세계의 것은 다 도적이요 강도라. 하나님의 사람을 다 도적질하고 죽이고 망치기 위해서 온 것이라 하는 것을 주님이 요한복음 10장에 말씀해 놨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도리를 우리가 이 씨를 받는게 제일 중요한데 이 씨 받는 데에 우리가 이 길바닥 된, 내 마음을 길바닥으로 만든 이놈을 다 치워 버리고 내 마음을 허분허분하게 새살같이 예민한 새살같이 예민한 우리 마음을 가져야 되기 때문에 이 예민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 과학에도 내가 미혹받지 안하고 모든 어떤 정치 사상에도 미혹받지 안하고 공산주의에도 미혹받지 안하고 민주주의에도 미혹받지 안하고 세상 도덕에도 미혹받지 안하고 모든 유전과 경험 모든 이 온 세계가 다 버글버글 꿇는다 하더라도 나도 거게 미혹 받지 안하고 오직 주의 말씀만이만 참되고 요것 만이만 옳다 요것만을 인정하고, 우리는 그런 것들을 그러면 어짤 건가? 그런 것들은 내가 요 말씀대로 살 때에 고런 것들을 요 말씀대로 사는데에 이용을 해먹지 그것에게 나는 준하거나 복종하거나 그럴 거는 하나도 없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게는 내가 그 말씀에게 복종해야 되고 이 세상 지식은 내가 이용하지 세상 지식에게는 하나도 복종하면 안 됩니다. 내가 이용하기 때문에 내 발 아래 둥상이요 그것들은 내 소유물이요, 하나님 말씀은 나 위에서 나를 명령하고 나는 그에게 복종해야 될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의 지식과 사람의 지식에 대해서 여러차례 말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씨를 받을 때에 이것을 아주 주의해야 되겠고, 이 씨를 받아 가지고서 기르는데 이 씨를 받으면 이거 움이 나 가지고 자라야 될 것 아닙니까? 이 씨를 받아 가지고 기르는 데에 기르는 데에 주의할게 뭐이냐? 기르는 데에는 돌을 주의해라. 돌이 그놈이 안 빠져 나가면 헛일이다. 돌을 뽑아야 되지 돌 그놈을 뽑아내지 안하면 결실 못 한다. 돌은 뭣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인가? 이것은 원죄와 본죄, 원죄와 본죄 다시 말하면 악령, 악성, 악습, 악령, 악성, 악습 이놈을 뽑아 버려야 됩니다. 이놈을 대적으로 삼아서 이놈이 들어서 자라는 데에는 방해합니다. 악령, 악성 악습 이놈이 들어서 자라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말씀대로 살 때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오면 어려움이 옵니다. 어려움이 오면 나 죽는다 하고서 이 말씀을 버립니다. '아이구 이 말씀대로 살다가는 내가 죽겠다' 하고서 어려움이 오니까 자기 죽겠다고 지금 자기가 죽을상 바르고 꼭 죽는다 꼭 실패한다, 이러니까 그만 겁이 나 가지고 이 말씀을 버립니다. 그 말씀대로 살 때에 죽으면 죽는 자가 있습니다. 죽으면 어떤 자가 죽습니까? 어떤 자가 죽습니까? 나 아닌 나, 나를 죽인 나. 옛사람 나 고놈이 죽습니다. 그놈이 죽으면 새사람은 살이 찌고 강건해 집니다.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자는 절대 죽지 안하고 죽이지 못합니다. 그놈이 죽음으로써 죽음으로써 이것이 살아나고 장성하게 됩니다. 이 죄악에 내가 말씀대로 살라 할 때에 이 사업이 깨지겠다. 깨지겠다.

 

말씀으로 살므로 깨지는 사업은 그 사업은 나를 망칠라고 하는 독약과 같은 사업이기 때문에 그 사업은 깨어져야 내가 삽니다. 깨어지지 안하면 내가 그 사업을 해 내가 죽습니다. 이러니까, 말씀대로 살 때에 이제 이 자기에게 해가 되어지니까 자기가 절단난다 싶으니까 이 말씀대로 살던 것을 중단해 버리니 절단난다는 그 자가 누구뇨? 자기 아닌 원수인 자기요, 또 이거 말씀대로 살다가는 내 모든 소유와 지위와 권세가 절단난다 하면 이 말씀대로 살므로 절단나는 것이라고 하면 그 소유와 지위와 권세는 그것을 절단을 내 버려야 되지 절단 안 내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완전히 죽을 것이기 때문에 죽을 것이 말씀대로 사니까 죽을 것이 처리되는 거야 좋다 그 말이오. 이걸 깨달아야 사람들이 나가지.

 

이러니까 '말씀대로 살아보자' 하고서 말씀대로 살고 보니까 깨질 것은 깨졌고 남을 것은 남았고 죽을 거는 죽었고 살을 거는 살았고 보니까 이제 간추려서 아주 잡초 속에서 금을 가려내는 거와 마찬가지로 깨끗하고 완전한 것만 남게 된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말씀대로 살아서 말씀대로 기를라고 자라갈라고 할 때에 기를라고 할 때에 방해하는 자는 어떤 자이냐? 돌이 방해한다. 돌은 뭐이냐? 원죄와 본죄다.

 

원죄와 본죄인데 원죄와 본죄라면 원죄 본죄 그것이 인격이 있느냐? 인격이 있다.

 

원죄 본죄인데 그것이 뭐이냐? 곧 원죄 속에, 원죄 속에 악령과 악성이 들었고, 본죄 속에 악령과 악성과 악습이 들었습니다. 이러니까 그것은 자기 아니라 그 말이오.

 

자기 아닌데 자기 그놈을 죽는다고서 말씀대로 지켜 행하다가서 고만 거절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학교에 공부를 하는데 부모가 공부를 시키는데 아주 그 나쁜 동무가 있어 가지고서 공부하지 못하도록 자꾸 그렇게 꼬우는 동무가 있습니다.

 

남자나 여자애나 혹 계집 아이가 꼬우든지 머슴 아이가 꼬우든지 꼬와 가지고서 공부를 못 하게 한다 그 말이오. 못 하게 하는데 못 하게 하는데 고것은 자기 원수니까 부모가 들어서 그것을 끊도록 할라고 그것을 끊도록 할라고 애를 쓰니까 끊도록 할라고 애를 쓰니까 이 학생은 안 끊어질라고 애를 쓴다 말이오. 안 끊어질라고 애를 쓰고 부모네는 끊을라고서 애를 쓰는데 이 부모의 말을 순종하지 안하는 것은 안 끊어질라고 순종하지, 안 끊어질라고. 부모는 자꾸 부모에게 순종해 그거 끊어라 하는데 부모하는 대로 하면 그거 끊어지고 그거 안 끊어지면 부모 말 거역 해야 되겠고 고럴 때에 부모 말을 거역하고 고걸 안 끊어지면 제가 고것으로 망하고 맙니다. 고럴 때에 부모 말에 순종하면 고게 끊어지는데 부모 말에 순종함으로 끊어지니까 끊어질 때는 안 됐지만 끊고 보니까 좋아졌더라 그 말이오.

 

그와 꼭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이 말씀의 씨를 우리가 내 속에서 이제 이 큰 성공을 할라고 점점 자라갈 때에 자라가는데 방해하는 것은 뭐이냐? 나 아닌 나, 옛사람 나, 악령과 악성과 악습으로 된 나, 고놈이 들어서 방해하는 것이니까 그때 이제는 말씀대로 사는데 나 죽는다 나 죽는다 할 때, 성신의 감화를 받은 사람은 나 죽는다 할 때에 고놈이 평소에 자기 아닌 자기인 것을 깨닫고 자기를 멸망시킨 원수인 자기인 것을 깨닫고 이제 한 사람은 평소에 고놈이 분해서 고걸 죽일라고 애를 썼는데 요 말씀대로 지킬라고 하니까 고놈이 나 죽는다고 나 죽는다고 하면서 나 죽는다 나 죽는다 이라니까 고때에 눈을 떠 가지고 나 죽는다는 고놈이 나 아닌 원수 이니까 고놈은 죽어야 된다고서 말씀대로 바짝 힘을 써서 고대로 행하니까 고만 나 죽는다는 고놈이 바싹 죽어 버립니다. 죽어 버려. 죽었으면 뭣이 죽었습니까? 옛사람 그놈이 악령이 죽었지. 악성이 죽었지. 악습이 죽어 버렸지.

 

이라니까 성령이 왔지, 이제 악성이 죽으니까 하나님 중심으로 된 그 중생된 영이 살아났지, 악성이 다 없애 버렸고 믿음으로 산 그 자꾸 의가 점점 저축하게 돼지지 이라니까 우리가 기르는 데에 요 돌을 요것을 어짜든지 돌의 해독을 벗어나서 돌을 없애야 됩니다. 돌을 없애야 옥토에 뿌린 씨가 됩니다.

 

,결실할라 할 때에 덤불이 자라 가지고서 이렇게 무성하게 자라지만 덤불이 있어 놓으니까 열매를 못 맺어. 그놈 밑에 있는 곡식은 열매는 없습니다. 무성하고 그만 잎만 무성하고 말아 버립니다. 이와 같이 결실할라 할 때에 이 덤불이 들어서 결실 못 하게 했다. 그 덤불을 예수님께서 해석 하시기를 이 세상 물질, 물질계의 세상, 또 이 세상 모든 사건들이 세상에 있는 이 모든 물질계에 있는 거 이것과 이거 문제와 또 세상에 이리 저리 얽혀 있는 모든 문제 이런 문제가 들어서 방해한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이대로만 살면 방해하는 말씀대로 사는 데에 사는 데에 낭파가 되는 그 모든 사건들이라면 그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데에 낭파되는 그 사건이라면 낭파되는 그 사건이 의로운 사건입니까 죄가 되는 사건입니까? 어떻습니까? 의로운 사건입니까, 죄가 되는 사건입니까? 무슨 사건이요? 죄가 되는 사건 아니겠소? 그렇지 않소?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데 옳게 되는 것이 왜 그게 그 뭐 더 좋아지지 그게 낭파될게 뭐 있습니까? , 이 말씀대로 살 때에 세상 물질이 세상 물질이 낭파가 당한다. 세상 물질이 낭파가 되는 것은 그것은 그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거짓말로 만든 물질이든지 죄를 만들어내는 물질이든지 자기가 점점 강퍅하고 악독해 가지고서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물질이든지 어짜든지 이 물질은 하나님과 대립되는 물질이니까 이 물질은 자기를 망치는 물질이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에 세상 재리가 들어서 이 말씀대로 살면 절단난다고 해서 재리 때문에 이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그것은 그 재리가 자기를 망칠 재리기 때문에 말씀대로 살므로 그 재리가 절단나지 말씀대로 안 하면 그 재리가 절단 안 난다 말이오. 이러니까 말씀대로 살므로 그 재리가 절단나는 그 재물은 자기를 망치는 재물이니까 망치는 재물이면 자기가 자기를 망치는 재물이면 그 재물이 절단이 나야 좋습니까, 안 나야 좋습니까? , 나야 좋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소? 우리 이거라 말이오. 나야 좋은데 왜 뻘뻘 떨고 말씀대로 사는 걸 염려해 가지고 던져 버리느냐 말이오 어리석지 맙시다.

 

이래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죽기 전에 다 천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아 가지고야 존귀하게 안 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래서 씨를 받을 때에 방해물이 어떤 것인가? 또 이 씨가 자라서 그 자랄 때에 방해하는게 무엇인가? 또 결실할라 할 때에 방해하는게 무엇인가? 3가지 방해물만 완전히 제해 놓으면 그것은 옥토에 뿌린 씨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가지고 이 말씀이 내 마음을 다 차지하고 이 말씀이 내 마음을 다 차지하고 내 마음은 이 말씀에게 완전히 박탈되어서 이 말씀에게 뽈끈 붙들려서 내 마음과 몸은 이 말씀에게 붙들려서 꼼짝 못 하고 자유하지 못 하고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이 내 마음과 몸은 하나님 말씀에게 뽈끈 붙들려서 털끝만한 자유도 없고 이 말씀이 가라 하면 가야 되고 오라 하면 와야 되고 죽으라 하면 죽어야 되고 살아라 하면 살아야 되고 가만히 있으라면 있어야 되고 요 말씀에게 완전히 발탈돼서 내 마음과 몸은 이 말씀에게 완전히 다 삼켜지면 보니까 길가 뿌린 씨는 아야 씨도 심기지도 못하겠고, 돌짝 밭에 뿌린 씨는 이 마음을 마음을 이 하나님 말씀이 먹고 자랄라 하니까 차지할라 하니까 요 돌이 들어서 방해를 했고, 또 결실에 덤불이 들어 또 방해했고, 옥토에 뿌린 씨는 옥토에 뿌린 씨는 그 마음을, 옥토에 뿌린 씨는 그 마음을 이 종자가 먹을라고 할 때에 돌도 방해하지 안하고 또 세상도 방해하지 안하고 덤불도 방해하지 안하고 솔박 요 씨가 이 마음을 솔박 다 삼켰습니다. 그게 옥토 아닙니까? 이 씨가 옥토는 이 씨가 들어서 그 땅에 있는 그 직위를 이 씨가 다 삼켜 버렸습니다. 그라니까 자라 가지고 결실했지.

 

그래서 우리 마음을 이 말씀이 완전히 차지하고 주장해서 이 내 마음과 몸이 이 말씀의 것이 되면 이 말씀의 것만 되면 내가 이 말씀을 붙들고 그 순서를 말했습니다. 이 말씀을 붙들고 애를 쓰다 보면 이 말씀에게 붙들리게 되고, 이 말씀에게 붙들려 가지고도 내가 자꾸 여러 가지 방해가 있어도 그대로 붙들려 가지고 계속을 하게 되면 이제 이 밧줄을 잡은 하나님의 장중에 우리가 붙들리게 된다. 하나님의 장중에 붙들리게 된다. 하나님의 장중에 붙들리게 되면, 처음에는 말씀에게 붙들리고 다음에는 영감에게 붙들리게 되면 하나님에게 붙들리게 되면 그 사람의 일동 일절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과도 완전한 관계를 맺는 그 관계가 되어지고. 이 마귀에 대해서도 후회 없는 완전 승리의 행위가 이루어지고, 또 모든 인류에 대해서도 완전히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을 수 있는 완전 그 관계가 맺어지고 모든 만물들은 다 찬양하는 그런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 이것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을 이 세상 이 셋에게 빼앗기지 말아야 된다 말입니다. 우리 마음을 이 세상에 있는 셋에게 뺏기면 헛일입니다. 우리 마음을 이 3가지에게 뺏기면 헛일입니다. 어디 뺏기면 헛일입니까? 세상 재리와 염려 그놈에게 내 마음이 뺏겨서 이 말씀을 버리고 그놈에게 가버리면 그만 헛일입니다. 이 말씀이 나 아닌 옛사람 거짓말쟁이 고놈에게 끌려 가 가지고서 이 말씀을 버리고 내 마음이 그놈에게 가면 죽습니다. 내 마음이 세상과 세상 물질에 가면 나는 죽고 망하고, 내 마음이 나 아닌 옛사람 고놈에게 끌려가면 나는 죽고 망하고. 내 마음이 세상 수많은 인간의 지식에게 끌려가게 돼서 끌려가서 지식의 것이 되면 나는 죽고 망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것이 되어야 됩니다. 내 몸은 하나님의 말씀의 것이 되어야 됩니다. 내 마음과 몸이 하나님의 말씀의 것만 되면 하나님에게 대해서도 마귀에게 대해서도 인류에게 대해서도 만물에게 대해서도 만만점을 이룰 수 있는 것이 구속 받은 우리들인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마음을 이 말씀에게만 다 뺏기고 바치고 딴 데에 뺏기지 마십시오. 우리 마음을 말씀이 주장하면 그는 전능자가 됩니다. 전지자가 됩니다. 완전 행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설교: 백영희 목사(1984. 10. 26. 금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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