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여우도 굴이 있고

  선지자선교회

본문: 누가복음 959-62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계획도 있어야 하고 비판도 평가도 있어야 하고 또 소원과 결심도 있어야 하고 또 그 결심을 다지고 다져서 견고케도 하여야만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능력은 이 제자들이 '불을 명하여 이 영접지 안하고 배척하는 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불을 내려서 다 진멸되도록 그렇게 하랍니까?' 이 말을 한 것을 보면 과거에는 주님이 말씀하신 말씀이라도 그 말씀이 다 이루어지리라 그렇게 생각지 아니하고 많이 에누리를 했는데 벌 써 삼 넌 동안이나 따라 다니고 보니까 믿음이 생겨져서 무슨 말씀이든지 주님이 말씀하라 하는 대로 고대로만 하면 이루어진다 하는 그것은 이 제자들이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 그래 불을 내려서 그들을 진열하도록 해라' 하면 그만 그 말만 하면 진멸된다는 것을 그들 이 벌써 믿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면 다 그대로 되는 것을 이스라엘이 믿었던 거와같이 그들이 믿었습니다 그럴 때에 주님이 돌아보시고 꾸짖었습니다. '그런 생각이나 그런 소원을 가지 면 못 쓴다' 하면서 꾸짖고 다른 데로 옮겨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 계약의 권위성과 또 우리가 대속의 공로를 입었기 때문에 지극히 참 큰 권세를 실은 가졌습니다. 가졌으나 그 능력이 우리에게 이루어지지를 못하는 것은 우리 속에 악독이 있고 사랑의 온전함을 이루지 못한 연고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그 권능을 가지고 잘못 사용해서 잘못을 저지를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권능을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사도되었을 때에 처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가 하나님의 성령을 속인 그 죄 값으로 네가 성령을 속였으니까 거게 대해서 마땅한 보응을 받으리라 할 때에 그 아나니아와 삽비라 그 부부가 즉시 즉사를 했습니다. 그 뒤에 사도행전 8장에 빌립의 사건에 대해서는 그런 말을 하기는 했습니다. '네가 은을 주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려고 하니 은과 같이 망하리라' 하는 그 말을 하기는 했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안하도록 즉시 변개를 했습니다. '네가 회개하고 기도하면 이 일이 너희에게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덧붙였을 때에 그 사람이 베드로에게 간청을 해서 기도해서 면해졌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들으실 수 있는 그 권능의 위치에 서고 못 서는 것은 법적으로는 우리가 그 권능의 위치에서 있지만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이 어떠한 권능을 주셔도 그 권능 가지고 사람을 구원하는 일과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권능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고 우리가 그런 위치와 소속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우리 속에 자기 중심하는, 그 악독이 있어서 혹 자기로 인해서 잘못을 저질러 가지고 하나님의 권능을 잘못 사욕대로 이용해서 사망에 속한 그런 결과가 미쳐질까 해서 하나님이 그 권능의 제한을 해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의 온전함을 이루는 그 도수를 따라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같이 하십니다. 그 사람의 말에 하나님의 능력이 따라서 그 말 한대로 하나님의 능력에 꼭 뒤 따라서 책임을 지고 이루어야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성화에 따라서 차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성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그런 소속을 가진 사람들이요 또 신구약 성경 말씀은 다 그런 말씀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 말씀대로 한다면 필연적으로 승리와 성공을 가져 오는 것은 괼연한 일인데 그렇게 해도 승리와 성공이 오지 안하고 지체해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 승리와 성공으로 인해서 자기가 깨닫지 못하면 교만해 가지고 도리어 크게 넘어지는 그런 우려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지체를 하고 이루어 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능력 있는 사람이 되려면 자기 속에 악독을 뽑아 버리고 사랑으로 채워가야 할 것이고 또 하나님을 힘입어서 승리나 성공을 이루고저 하면 언제나 겸손한 사람이 되어져야만 합니다.

 

그러기에 과거 왜정 말년에도 신사참배의 그 큰 전투가 있었는데 그 전투에 승리한 사람 가운데에 잘못 깨닫고 자기가 남보다 나아서 어떻게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승리로 인해서 그 뒤에 다시 복구 할 수 없는 그런 실패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나 된 것이 내가 나 된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나되게 하셨다고 말씀하신 대로 참 자기나 모든 사람이나 꼭 같은 수평선에 있는 자기인 것을 확실히 깨닫고 고 겸손한 자 겸손에 대해서 많은 시간을 걸쳐서 해석을 했습니다. 오늘 혹 처음 온 사람이라면 겸손은 자기를 바로 알고 자기가 자기로서 모든 행동하는 것이 겸손이고 있는 것을 과소 평가하는 것이 겸손이라는 그런 거짓부리를 말씀하신 것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는 그런 믿음 생활을 모처럼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와서 역사하지 못하고 지체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시고 승리나 성공을 주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자기에게 있어서 아직까지도 미숙한 그런 점이 있어서 그렇다는 것을 깨닫고 빨리 빨리 회개를 해야 하나님도 그 사람을 붙들고 일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오전 말씀, 예수님을 따라오는 사람 가운데에 혹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주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주를 좇겠나이다' '좇으리이다' 하는 좇는다 말은 이거는 그 사람은 이 뜻을 다 모르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를 다 알고 말했는지 모르고 말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은 그 사람을 계시 기관으로 써 가지고 우리에게 생명의 도를 그 사람을 통해서 전하신 계시 기관으로 쓰셔 가지고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좇는다는 이 말에 대한 뜻을 잘 모르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 기자들이 성경에 기룩한 것을 자기네들이 영감 받아 기록했으니까 거게 대한 뜻을 다 알리라고 이렇게 혹 생각하지만 자기가 예언 해놓은 것을 무슨 뜻인지 그거 모르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여게 좇는다는 말은 그는 알고 했든지 모르고 했든지 '좇으리이다' 하는 이 좇는다는 말은 우리는 지금 그 해석을, 그래도 너무 많은 세뭘이 지나 왔고 또 거게서 가르침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이 20세기의 밑이 이르는 성도들로서는 이 좇는다는 뜻은 다 대개가 알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좇는다는 그 말의 뜻은 주님을 는다는 말이요 주님을 따라간다는 말이요 주님이 원형이면 주님을 모방한 모형이 주님의 모형이 되겠습니다. 주님의 형상이 되겠습니다 하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원형적 기능이라고 하면 자기는 그 기능을 인해서 모형적 기능이 되겠다, 주님은 원형적 사랑이라면 자기는 모형적 사랑이 되겠다. 원형인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같은 자가 되겠다는 그런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말이요,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앉은 거와 마찬가지로 너희들이 이기면 내 보좌에 함께 앉으리라' 주님의 승리에 자기도 주를 힘입어서 그 승리에 동참한다는 그런 뜻 될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을 본받고 예수님과 같은 사람, 그래 언행 심사와 욕망이나 그 자체도 예수님과 되어서 예수님과 같고 그의 모든 동경하는 것이나 소망하는 것이나 목적하는 것이나 노력하는 것이나 방편이나 그런 것이 다 예수님 같은 자가 되겠나이다 하는 그말입니다. 좇겠다는 말은.

 

이 아주 좋은, 참 좋은 소망을 말했습니다. 주님을 좇는 그 이상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주님의 형상을 입는 것인데 '주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우리를 부르신 것은 주님의 형상을 덧입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를 주님과 같은 자를 만드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래서 성경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거룩하심과 같이 주의 깨끗하심과 같다는 이 성구를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우리는 감히 그렇게 될 수가 없다, 이것은 그렇게는 될 수 없는데 이렇게 성경에 말해놓은 것은 그렇게 될 수 없는 일을 말한 것은 뭣 때문에 이래 말했느냐 하면 될 수 없는 일을 말한 것은 인간들을 교만을 꺾어서 정죄하기 위해서 해놨다.' 그러기 때문에 어떻게 그 참 자기의 실행으로 구원을 이루겠다고 하는 필라기우스 주의 그런 사람들은 언행을 일치라고서 아주 실행이 엄중했습니다. 그런 사람들도 정죄하기 위해서 된 성구라.

 

'그렇게 네가 그러면 하나님과 같이 온전하냐?' 이래서 그런 사람들을 입을 막고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한 성구라 이렇게 해석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 주석에 그렇게 해놓은 주석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 것은 아니고 주님이 우리에게 위협을 주기 위해서 하는 말씀이 아니고 우리는 주님같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같이 됩니다. 같이 된다 말은 하나님 된다는 말이 아니요 하나님의 모형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소원하시고 우리의 또 소망이 그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소망은 주님의 형상을 이루는 주님과 같은 온전한 사람. 온전한 행위, 온전한 일 이 모두 다 온전하고 영원하고 불변할수 있는 영생에 속한 모든 것들을 우리가 이루려 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거 뭐 지나친 교만한 소망이 아니고 우리에게 실지로 주님이 이와 같이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이요 또 우리에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래적으로는 다 부족한 것이 가득히 있지만 회고적으로 만들어진 것만 큼은 다 온전합니다. 만들어 진 거는 온전하고 영원히 변하지 얻는 그런 회고적으로는 온전한 것들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런 이 지극히 큰 소망. 내가 어짜든지 주님 따라서 그 공로를 힘입어서 성령과 진리를 주셨으니까 진리와 성령님을 힘입어서 내가 온전한 사람이 되겠다, 내 언행 심사의 기능이나 모든 면이 온전한 자가 되어 지겠다 하는 이것을 주님이 제일 기뻐 하십니다. 이것이 되기를 원하고 이 일을 위해서 노력을 하고 어데서든지 이 일을 소망하는 그것을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소망해야 됩니다. '이 소망을 단일 소망을 가져라, 소망은 하나만 가져라.' 이라니까 혹 생각하기를 '나는 이런 거 매일 소망도 있고 한 달 계획 소망도 있고 일 년 계획 소망도 있고 삼 년 계획 소망도 있고 있는데 소망을 하나만 가지라고 하니까 그 너무 이치에 맞지 안하고 내 생활하고는 거리가 머니까 안 되겠다' 그렇게 혹 오해할지 모르나 소망은 꼭 하나만 가져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소망은 하나만 가지면 되나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단편적인 소망 또 부분적인 소망 그런 소망을 백 가지도 천 가지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이냐 그 모든 소망 가지는 것이 단일 소망을 이루기 위해셔 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단일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가지는 것이지 그 단일 소망과 배치가 될 때에는 우리는 그 소망을 버리고 단일 소망을 위해서 그 소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마치 수천 미터 되는 그 높은 산이 있다고 하면 그 높은 산은 당장에 높은 산이 되는 것 아니고 그 밑에는 평지에서부터 차차 그 낮은 산들이 있이 가지고서 산 위에 봉우리 위에 봉우리. 봉우리 위에 봉우리 올라 가 가지고서 그 큰 수천 미터의 산이라고 말하면 그 발치에 아주 수백 리의 그 주위를 흩어 가지고서 위에 상봉이 생겨지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소망도 그런 것입니다. 그 소망 하나를 목적하고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그 소망을 위해서 뭐 이런 경제의 소망, 사업의 소망, 활동의 소망. 자기 출세의 소망 이 모두 내가 이리 이리 해 가지고서 이 소망을 이루겠다 하는 그 소망을 위한 소망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소망을 위한 소망을 가지는 것은 그 소망에 대해서는 변할 수 없는 유일한 법칙이 영감과 진리인데, 영감은 사람들이 잘 몰라도 진리는 신구약 성경의 법칙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법칙이 곧 영감이요 영감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영감과 진리로 이 구원을 이루는 것이요 영감과 진리가 무엇을 이루는가? 영감과 진리는 주님의 피공로를 위해서 역사할라고 나타났습니다. 영감과 진리는 주님의 피공로를 위해서 역사하기 위해서 나타났기 때문에 진리와 영감은 예수님의 그 대속의 공로를 우리에게 증거해 가지고 대속의 공로의 것이 되고 또 그에게 속해서 그의 지체가 되고 그의 성전이 되고 그의 모든 역군이 되고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우리에게 충만케 하고 더 실질적으로 실상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영감과 진리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이 단일 소망을 위해서 여러 가지 소망을 가졌을지라도 단일 소망을 위해서 가진 여러 가지 소망인지 자기는 그렇게 마음을 가졌지만 단일 소망을 위하는 것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단일 소망을 해치는 것이 되어질란지 하는 것이 그것이 우리에게 좀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심사하는 것이 단일 소망을 이루는 것은 예수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 이 셋으로 단일 소망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단일 소망을 위한 여러가지 소망을 가진 그것이 외부는 진리 신구약 성경 말씀대로 되고 그 이면에는 영감대로 되고 이 진리와 성령의 이 두 증거로 인해서 점점 예수님의 대속의 피공로의 것이 되어지도록 이래 되는 것이라면 그 새끼 소망이 그것이 바로 된 것이기 때문에 새끼 소망을 그 유일한 소망이 먹고서 유일한 소망이 자라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새끼 소망은 유일한 소망의 거름이 되고 유일한 소망의 양식이 되고 유일한 소망의 이 도둠돌이 고우는 도둠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한 소망을 인하여서 모든 소망을 가지고 있고 모든 소망은 이 한 소망을 위해서 하여서 그 소망 하나 하나가 있어졌다가 그것이 성공될 때에 유일한 소망이 이루어지고 자라가고 이렇게 되지 안 하면 우리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단일 소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얼마든지 우리는 단일 소망으로 공부할 수도 있고 사업할 수도 있고 출세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자기는 분야에서 활동을 합니다.

 

그러면 그 활동 활동마다 자기는 거게 소망인데 그 소망이 뭣 때문에 네가 이거 하느냐? 너는 이 돈을 소망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야 나는 돈을 소망 하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니고 이 돈이 나의 유일한 예수님이 주신 이 구원을 소망해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내 구원, 내가족 구원 이 모든 구원을 위해서 넓게 있으면 이런 것을 다 사용 해 가지고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있다.

 

그러면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있으면 네가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있는 소망인지 잡탱이 소망인지 네가 알 것이 무엇이냐? 그 알 것은 내가 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그 소망을 이루는데에 법칙이 진리와 영감과 진리 주의 피공로 이 3가지 법칙 밖에 없기 때문에 이 3가지 법칙에 위반되지 안하고 이 3가지 법칙대로의 것이라면 그거는 필연적으로 이 단일 소망을 이루는 밑바탕이 되고 요 또 거름이 되고 말지 다른 데에 오용할 수가 없다. 이 진리와 영감과 주의 피공로대로 된 그 어떤 직장 소망이나 어떤 그 지식 소망이나 또 물질 소망이나 명예나 권세 소망이라도 이 새끼 소망이 진리와 영감과 주의 피공로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거게 위반되지 않게 그 법도대로 되어진 것이라면 이거는 딴 데는 쓰지 못한다. 딴 데는 쓰지 못한다.

 

아무리 세상이 탐하고 좋아하고 원해도 이 3가지 대로 된 것은 그 지식은 그 지식은 공산주의자들이 탐을 내서 암만 갖다 쓸라 해도 쓰지 못한다. 그 지식은 죄짓는데는 쓰지 못한다. 그 지식은 악을 행하는데에 쓰지 못한다. 이러기 때문에 그 지식은 그 재산은 그 사업은 다만 단일 소망만 이루는데에 고게만 딱 들어맞아서 참 요긴하게 쓰이지만 딴 데는 쓰지 못한다 하는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소망도 단일 소망을 가져야 되고. 사랑도 단일 사랑을 가져야 됩니다. 단일 사랑. 그러면 주님만 사랑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에서 사랑을 얼마든지 가지고 있고 또 가져야 됩니다. 우리는 주님 한 분만 사랑해야 되는데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해야 됩니다. 또 만물도 사랑해야 됩니다. 그런데 주님 한 분만 사랑할라 하면 그러면 그런 거 다 버리고 되는가 그렇게 혹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사랑하는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사랑해야 주님을 사랑 하는 결과가 맺겠다 해서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주님을 사랑할 모든 준비로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 있고, 또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함을 인해서 모든 것을 사랑하는 그런 방편들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어떤 것을 사랑하든지 사랑하는 것이 그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데에는 이게 필요하다.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이 사랑하는 이것이 필요하다. 이것을 사랑치 얻으면 안 되겠다 주님을 위해서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한다면 그것이 다 주님울 간접적으로나 직접으로나 사랑하는 것이 되겠고 또 주님을 사랑하니 주님을 사랑하고 보니 내가 이것을 안 사랑할 수 없다. 주님을 사랑하고 보니 이 원수를 사랑하지 안할 수가 없다. 주님을 사랑하고 보니 이거 그만 서로 나뉘고 싶지만 주님을 사랑하고 보니 부득이 이 사람은 사랑하지 안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그 사랑하는 그 각 분야의 사랑이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주님을 사랑함으로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을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것을 사랑하게 된다는 그것이 되어져야 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극히 큰 소망을 이루는데에는 여기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이러니까 주님이 대답하시기를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도다 하시고' 그러면 이 말씀을 주님을 좇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 말씀을 하셨는가 혹 이렇게 생각하겠습니다. 그런 것들도 다 모든 이 타락한 타락한 이후 에덴 동산에서 인간이 타락하고 타락함으로 인해서 모든 만물들이 다 저주 아래에 있게 됐습니다. 이래서 타락 이후에 있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크고 작은 그 전부가 다 자기를 위해서 있다.

 

자기를 위해서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기가 강하기 위해서 자기가 커지기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있는 것인데 심지어 이런 동물 곤충까지도 다 자기를 위해서 있다. 그러나 나는 나를 위해서 한 것은 하나도 없다. '머리 둘 곳도 없다' 그말은 아주 아무것도 없는 극빈을 말 해서 여게 말로 말하면 '송곳 꼽을 땅도 없다' '내 것이라고는 내 것이라고는 뭐 먼지 하나도 없다' 하는 그런 말과 같은 말입니다.

 

왜 그 말씀을 하셨는고 하니 '땅에 있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자기를 중심하고 위하는 것이 타락한 이후에 모든 인류요 타락한 모든 만물들인데 네가 나를 좇겠다고 하는 것도 사람이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의 성공을 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방편을 공부를 해야 되겠다, 정치를 해야 되겠다 돈을 벌어야 되겠다, 여러 가지 방편을 다 쓰는데 너는 네가 오병이어로 많은 사람을 먹였고 또 죽은 자를 살렸고 그런 이적과 기사를 행하는 것을 네가 보고 나를 따라 와서 그런 것을 배워 가지고 너도 지금 그래 가지고 예수를 좋으면서 네가 이 성공하는 것이 제일 첩경이 되겠고 아주 슬기로운 일이 되겠다. 내나 땅의 소망을 가지고서 네가 내게 대해서 그렇게 좇겠다 하는 그런 것으로서 좋으면 안 된다. 나를 좇는데는 나는 나를 위해서 한 것이 하나도 없다. 털끝만한 것도 없다. 그러니까 네가 나를 좋아 가지고서 너를 위해서 할라고 하면 내게 와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실패가 되는 것이니까 네가 이것을 알고 해라.' 하고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때는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없지만 뒤에 차차 성신의 감동으로서 이해를 하는 것은 주님에게 이 주님을 는 이 지극히 큰 소망 이 소망은 제일 좋은 소망인데, 이 단일 소망을 가지고 세상에서 오래 살든지 짧게 살든지 이 소망 하나만을 이루기 위해서 세상에 사는 것으로 알고 사는 사람이라고 하면 그 다음으로 무엇이 필요한 고 하니 '너에게 이런 현실 저런 현실 온갖 별별 현실들이 너에게 부딪히게 된다. 부딪히게 되면 너는 그 현실을 보고서 네 마음대로 이렇게 비판하고 평가해 가지고서 이거는 좋다 나쁘다 그렇게 평가하는데, 그렇게 평가하는 것은 땅에 속한 사람들의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네가 유일한 소망을 이룰라고 하면 유일한 이 소망을 이루는데에는 주님의 피공로가 있어야 되고 성령과 진리가 있어야 되고 너는 이 소망을 네가 소원하기는 소원했지만 이 소망이 얼마나 크며 얼마나 위대하며 얼마나 존영하며 얼마나 어렵다는 걸 너는 알지도 못한다 그런데 네가 소원하는 이 소망을 이룰려고 하면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영감을 말할 때에 네가 큰 것을 구했다 하고서 그 방편을 말한 거와 마찬가지로 네가 이 소망을 이룰려고 하면 네가 땅에 있는 모든 소망을 다 버리고 이 소망 하나를 위해서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투자를 다 해야 된다. 다 해야 되기 때문에 네가 당하는 그 현실 현실은 이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있는 현실인데. 현실에서만 네 소망을 이룰 수가 있는데 네가 소망하는 이 네 소망에 지극히 큰 소망을 이룰려고 하면 그 이루는데에는 어떤 종류의 현실이 필요한지 너는 모른다. 그 현실이 참 현실이 필요할란지 만 가지 현실이 필요할란지 너는 그 현실을 알지 못하니까 나는 그 현실에 필요한 내 소망을 이루는데에 필요한 현실이 무엇 무엇인지 모릅니다. 네 소망을 이루는 네 필요한 현실 중에는 네가 폐병이 들리는 것이 그 필요한 그 현실도 될 수 있고 암병 드는 것도 될 수 있고 사람에게 매장되는 것도 될 수가 있고 지극히 높은 존귀하게 되는 것도 될 수가 있고 또 감옥에 들어가는 것도 될 수가 있고 나는 뭐인지 모르니 주님 어떤 그 현실이든지 나는 만들고 당신이 내 현실을 만들어 준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현실이든지 내 유일의 소망인 이 구원 소망을 이루는데에 필요한 현실이거든 무엇이든지 만들어 주십시오.

 

그라면 어떤 현실을 만들어 주실지라도 나는 이 현실은 유일한 소망을 이루는데에 필요한 이 현실인 줄 알고 그저 그 현실에다가 불만 불평 없이 그 현실을 내 소망 이루는데에만 쓰기로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돼야 됩니다.

 

그러면 그 현실을 그것을 내가 내 유일한 소망의 이 구원을 이루는데에 이용이 될 수도 있고 이용이 될 수도 있고 내가 잘못하면 그 현실에게 내가 이용을 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에게 닥친 그 현실을 내가 이용하는데에는 그 현실에 대해서 주님이 나에게 인도하시는 대로 나에게 성경 말씀으로 가르쳐 주신 고 법칙대로 일차적으로 행하고 또 점진적으로 영감을 따라서 행하고 이렇게 해서 고 닥친 현실에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그 명대로 그 현실에게 대해서 행하면 그 현실은 내 구원을 이루는데에 밥이 되겠고 양식이 되겠고 내가 그 현실에게 내가 지배를 받아서 거게 피동이 되어지면 나는 현실의 종이 되어지니까 현실은 내 상전이 되어지고 내 구원은 거게서 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의 제자되는 데에는 네가 이 제자가 될라고 하면 땅에 있는 소망을 다 버리고 하늘의 소망을 하늘의 소망 이 구원 소망 하나만 네가 가져야 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소망 하나만 가져야 된다 그것을 여게 말씀했고, 하나만 가지는 데에는. 그러면 그 소망 하나만 가지면 그 소망을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됩니까? 아니다. 그 소망을 이루는데에는 현실 현실의 그 실상 생활을 통해 가지고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인격의 완성이요 지능의 기능의 완성이요 그것은 모든 행위의 완성이기 때문에 그거는 움직임이 없이는 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움직임에는 현실을 통하지 않고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니까 모든 현실이 너희에게 필요한 대로 내가 착착 순서를 잡아서 만들어 줄 터이니까 너는 무슨 현실이든지 이 현실이 하나라도 없으면 내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 현실을 네 구원의 양식으로 삼아서 그 현실을 잡아먹고 네 구원이 이루어지게 되고 잘못하면 네가 그 현실에게 잡아 먹혀서 네 구원이 박살나게 된다.

 

그러면 잡아먹히면 어떻게 잡아먹히면 잡아먹하는 것입니까? 그 현실에게 내가 피동되면 현실에게 피동되면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기 때문에 현실에게 내가 피동이 됐으니까 그에게 패전했고 졌으니까 그의 종이 되니까 그 죄악과 악령의 종이 되니까 네 구원은 절단 나는 것이고 네가 그 현실을 닥칠 때에 하나님이 너에게 명령하신 고대로 그거에게 대해서 행하게 되면 너는 그 현실을 양식으로 먹은 게 된다. 네 구원을 위해서 이용한 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켜서 밥이라고 성경에 말씀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 3가지를 주님을 줬는데 대해서 우리가 단단히 기억하고 양보하면 안 됩니다.

 

저 먼저 어떤 사람이 설교를 시켰더니만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운다 하는 그 설교를 대단히 전하기는 고대로 전하기는 전했는데 그 사람 속에 온 천하가 똘똘 뭉쳐서 나 예수 믿는 것을 반대하는 그 세력에 단합들이 되면 그것이 얼마나 두렵고 얼마나 강하고 얼마나 무섭겠느냐 하는 그런 것을 조금도 느껴보지 안하고 설교하기 때문에 그 설교에는 생명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그 실상이 그때 이루어질 것을 알고 그렇게 조그만한 지역에 지방 장관 지방 장관들과 모든 관서들 모든 사회들이 뭉쳐 가지고서 예수 믿는 걸 반대해도 그 세력이 무섭고 두려운데 하물며 일국뿐 아니라 세계가 뭉쳐서 하나 돼 가지고서 우리 구원을 반대할 때에 그 세력이 얼마나 크면 얼마나 무서울건가 그러면 그것을 대항해서 이긴다는 것은 이것은 얼마나 힘이 있어야 될 것인가? 이거는 과연 하나님의 진리의 능력이 아니면 이길 수 없다. 이는 주님의 피공로의 대속이 아니면 이길 수 없다는 그것을 깨닫고 해야 되는데 그걸 깨닫지 못하고 하기 때문에 그걸 뒤에 수정 해서 제가 줬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이 말씀을 들을 때에도 우리가 유일한 소망을 가지는데 이 소망을 위해서 모든 소망을 가지지 이 소망 놓고 제일로 이 소망 잡고 제이 소망은 딴 거 가지고 그런 것 아닙니다. 이 소망 하나뿐입니다. 이 소망을 위해서 이런 거 저런 거 그 사람의 돈도 소망하더니만 소망 하나 그 돈 소망하는 것이 이 구원에 필요 없고 이 구원에 손해 간다면 당장이라도 집어던져 버리고 말지만 그거는 이 구원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다 소망해서 내가 요게 요것까지 돼야 돼야만 요게 이루어지겠다. 요 예배당을 지어 가지고 어떻게 돼야만 되겠다 또 요래 가지고 어떻게 해 가지고서 그 개척교회 내 터를 하나 사야 되겠다, 또 내가 요리 요리 해 가지고서 지금 얼마 얼마 돈을 모아서 그래 놓으면 내가 개척 교회 하는데 연보 얼마 할 수 있겠다, 건축에는 얼마 할 수 있다 그 소망이 전부 유일한 소망을 위해서 가진 소망이어야 되지 그 이질적인 이 유일한 소망 외에 다른 이질적인 그 별개의 소망을 가지면 우리는 안 됩니다. 그 소망을 가질라고 하면 꼭 3가지 기억해야 됩니다.

 

그 소망을 이루는 데에 필요한 현실이라면 어떤 현실이라도 좋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가져야 됩니다. 어떤 현실이라도 좋습니다. 어떤 현실이 와도 그 현실을 우리는 대뜸 온전히 기뻐하고 즐거워 해라. 기뻐하고 즐거워 해야 되겠습니다. ? 거게 지금 큰 현실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내가 소화가 잘 안 될 때에는 소화기에 뭐 소화가 잘 안 될 때에는 하나님께 기도해서 그것을 소화할 수 있도록 감옥이 닥쳤습니다. 또 사형이 닥쳤습니다. 뭐 별별 그런 뭐 가정이 파괴가 됩니다.

 

이래도 그런 일이 있을 때 내가 소화가 잘못되니까 일을 잘 소화 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서 그 여러 가지 어려움의 현실을 닥쳤는데 그 여러 가지 어려움을 인해서 자기가 거게 피동돼서 죄짓지 안하고 유일한 구원을 상하는 유일한 구원을 손해 보이고 유일한 구원을 해치는 그런 일을 하지 안하고 유일한 구원을 이루어지는 영감과 진리대로만 복종하면 반드시 그 어려움의 현실은 잠시 잠깐 후면 우리에게 크게 기쁨을 주고 승리의 그 개가의 그런 기쁨을 우리가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예수님께서 '나를 좇으라' 이래 말씀을 하시니까 그가 말하기를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님이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잘못 깨달으면 그 오계명이 부모에게 효성하라는 계명인데 부모가 살아 있으면 오늘 효성 못 하면 내일 할 수도 있고 또 이렇게 할 수도 있지만 벌써 죽어서 장사 지낸다고 하니까 장사 지내는 이 효성이라 하는 것은 마지막입니다. 장사 지내면 그걸로 끝나 버리는데 뭐 다시는 그런 기회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첫째는 하나님을 위하고 그 다음에는 선조를 위해라' 위선을 말했습니다. 위선이라 말한 것이 일계명이요 위선을 말하는 것이 제오계명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계명을 이렇게 말씀했는데 부모 죽어서 장사 지내는 것도 허락지 안하고 이랬으니까 요게 대해서 우리가 잘 깨달아야만 하겠습니다.

 

여게 주님을 좇는 일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주님을 좇는 일이라 말은 위에서 말을 해석했으니까 주님을 따라가는 일, 천국을 이루어 가는 일, 주님의 제자되는 일 주님과 같은 자가 되어지는 일 그것을 좇는다고 말하는 것인데 이렇게 좇는데에는 좇는데에는 이렇게 좇기로 주님을 좇기로 시작을 하고 또 주님을 쫓는 그걸음을 걷기를 지금 걸어가고 있는 이 걸음에 대해서는 다시 이 걸음에 대해서는 변동을 못 한다는 것을 여게서 특별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게 먼저 말하는 것은 '이제 주님을 좇기로 작정한 우리가 이 구원을 이루기로 작정한 이 구원을 구원을 두고 구원을 둬 두고 이 일을 먼저 하고 구원 이루는 일을 그 다음으로 하도록 허락해 주옵소서' 할 때에 주님께서 그것을 허락지 안했습니다.

 

우리가 중생된 사람 우리들이 구원을 이루는데에는 이 구원을 두고서 다른 일을 뭣 하고 이 구원을 제 이의 평가로 하고 해서 제이 순위로 해도 안 됩니다. 또 이 구원을 제일 순위로 해도 얼마 동안 하다가 뒤에 가서 좀 중단되는 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중단도 안 되고 변동도 안 됩니다. 이 구원이라는 것은 중단도 못 한다, 변 동도 못 한다, 세상 끝날 떠날 때까지 계속해야 된다 하는 요 계속성을 가리켜서 특별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게 '가족을 작별하라, 부모를 장례하도록 하라.' 하는 이 2가지 말씀을 했는데 이 2가지 말씀은 우리 사람들이 세상에서 사는 모든 생활이라 하는 것은 분류하면 2가지 생활입니다. 하나는 사은하는 생활이요. 하나는 자기의 의무와 책임을 감당하는 생활 요 2가지가 인류 생활의 전부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생활은 뭐 높고 낮은 거 없이 전부는 자기 맡은 의무와 책임을 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고 또 자기가 이제 받은 바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함으로 그 은혜를 생각하고 은혜에 보답하는 감사로 사는 생활이고 요 2가지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없는 건데 하필 요런 사실을 고때 형편이 되도록 해 가지고서 '아버지가 죽었으니까 장사 지내고 오도록 먼저 가서 장례부터 지내고 오게 해 주옵소서' 요런 말 하도록 고때 고 형편이 되어진 그것이 계시 기관으로 영원전에 예정된 고대로 고 순서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구원의 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됐지 오다 가다 보니까 저거 아버지가 죽었으니까 말하는 그런거 아닙니다. 고 딱 고때 죽도록 하나님이 예정하셔 가지고서 만드셔서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가르친 것이라 그거요.

 

이것은 모든 사은의 대표적인데, 세상에서는 여러 가지 평가를 이런 무슨 뭐 국가 의무라 무슨 사회 의무라 무슨 말하는데 의무와 책임 중에는 성경은 가족 의무와 책임이 제일 크다고 성경에는 그렇게 평가해놨습니다. 의무와 책임 중에서는 인간의 의무와 책임 중에는 가정에 대해서 의무와 책임이 제일 크다. 또 은혜에 대해서 사은하는 것은 뭐 나라에 사은. 스승에 사은. 부모의 사은. 남편에 사은, 오만 거 다 있지만 사은에 대해서는 부모에게 사은하는 은혜가 사은이 제일 큽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일 극단으로 부모의 사은을 말한 것이고 가족에 대한 책임을 말한 것이니까 이것은 인류의 사은 생활과 책임 생활 전부를 다 총칭해서 절정을 들어서 말씀해 놓은 것입니다.

 

여게 먼저 가서 장례하려 하니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하늘나라를 전파하라' 이 말씀 하신 것은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말은 죽은 자들은 어떤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고 하니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지 못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죽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지 못한 사람들은 다 죽은 사람이요,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그말은 대속의 공로를 입지 못하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상관이 없는 그런 사람 들의 일은 그런 사람들로 다 하게 해라.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지 못 하고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사죄와 칭의와 화친의 이 대속을 입지 못하고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을 받지를 못 했고 하늘나라에 소망을 가지지 못한 이 미중생각 또 불택자, 어쨌든지 택자라도 아직까지 예수님을 믿지 안하는 그런 사람들은 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에 이런 사은의 생활 저런 사은의 생활 그런 생활을 할 수가 있고 이런 책임 저런 책임의 일을 할 수가 있지만 네가 일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살리움을 받은 너는 사은의 사은에 대해서 예수님의 대속에 대한 사은 외에는 아무 사은도 너는 할 수가 없다. 또 의무와 책임도 너는 예수님의 대속의 의무와 책임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너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네가 이 예수님의 대속의 예수님을 좇는 이 일을 뒤로 두고서 이렇게 하는 것은 그것은 일을 안 하고 그 일을 하는 자이지 일을 잡고 그 일은 할 수가 없다. 이 일을 잡고는 그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 일을 잡고도 그 일을 하라 생각하지만 일을 잡고는 그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니까 그 일은 그 일들이 하게 해라. 이 대속의 공로와 중생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을 가지지 안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결합을 가지지 안한 사람들 하나님과 연결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거는 연결이 없는 사람들이 하게 하고, 또 예수님의 대속과 상관없는 없는 일은 예수님의 대속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하고, 하나님과 연결이 돼서 새생명 받아 가지고 살지 않는 내나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들의 관한 일은 죽은 사람들이 다 그들 일을 그들이 하고 너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라. 너는 생명에 속했기 때문에 그것은 할 수가 없다 하는 것을 여게 말씀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게 대해서 우리는 과거적으로 말하면 사은된 일이 많지만 주님이 우리를 대속해 놓으신 그 사은을 뒤로 두고서 어떤 사은이라도 먼 눈을 팔 수 없고 딴 데 그런 걸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이때에 다른 성경을 봐서 이 제자가 묻기를 주님 내가 주를 좋아 가는데 좋아 가는데 이 부모가 죽었으니까 주를 좋아 가는 내가 이 부모의 장례에 대해서는 하는 것이 주를 좇아 가는 것입니까, 주를 좇아 가는데에는 이것은 안 해도 됩니까, 이제 주를 좇아 가는 일을 내가 하는데에는 내가 이 부모가 죽었으니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렇게 주님 앞에 물으면 주님께서 그때 대답을 했었을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복음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그런 모든 세상에 속한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너는 거게 대해서 세상의 빛이 되도록 과연 주의 제자요 주의 좇는 사람은 저렇게 한다 하는 그 빛을 그들에게 보여줘서 많은 사람들이 아, 부모에게 대해서는 저와같이 하는 것이 저것이 옳은 것이로구나 하여 이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는 복음 전파로 전국 전파로 네가 거게 가 가지고서 이리 이리 해야 될 것이고, 또 사람들에게 빛이 되기 위해서 이리 저리 해야 되겠고. 그들에게 인생이 인생의 부모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를 것을 모르는 것을 네가 꼭 바로 이리 이리 해야 된다는 것을 네가 해야 된다. 그러면 그러면 이제 주님 는 일은 주님을 좇는 이 일은 그만 조금 잠깐 중단 해 두고 그러면 내가 그 일을 해야 되겠으니까 하면 그 일은 용납지 안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네가 하는 것은 주님을 좇는 일로 주님의 제자가 되는 일로 주님의 주시는 이 구원을 이루는 일로 네가 그 일도 하고 저 일도 하고 다 해서 그 일에서 네 구원 이루어지는 일도 있고 저런 일에서 네 구원이 이루어지는 일도 있고 온갖 그 분야에서 네 구원이 이루어지고 그 온갖 분야 그것이 이런 현실 저런 현실이니까 이런 현실에서 네 구원을 이루는 것도 있고 저런 현실에서 구원을 이루었으니까 네가 그런 현실에서는 네 부모가 있으면 그런 현실에서는 이렇게 이렇게 해야 네 구원이 이루어진다 하는 그 구원 이루는 것을 똑똑히 주님이 가르쳐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이 구원에 대해서 모르고 이 구원은 내가 좇겠는데 좇는 이거는 뒤로 두고서 먼저 가 가지고서 먼저라는 말을 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사상에는 이 구원은 출발하고 난 다음에 바쁘면 또 딴 볼 일 보고서 이거 이 일을 뒤에 와서 할 수가 있다고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구원 천국 건설을 이루는 이 구원은 다시는 중단도 못 하고 변동도 못 하고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이 구원을 이루는 여게에만 관해서 이 일만 계속해야 된다. 이 일로 네가 이 구원 이루는 이 일을 이 일을 하는 것으로 이 일을 하는 것으로 네가 먹어야 되고 이 일을 하는 것으로 마셔야 되고 이 일을 하는 것으로서 교제를 해야 되고 이 일을 하는 것으로 이런 사업 저런 사업하지 이 일을 두고서 너거가 다른 일은 할 수 없다 하는 거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좇는 이 일에는 왜 그러면 오계명이 인간 계명이 제일 큰 계명인데 오 계명을 그 어기는 그런 소리를 하는가? 그는 오계명이 제일 컸지만 오계명이 제일 컸지만 주님이 대속한 그 은혜는 제일 크기 때문에 이제는 대속의 은혜를 받았는고로 이제는 오계명 지키는 것이 과거에 이 다른 이방인들이 오계명 지키는 것은 그 선조를 위선으로서 오계명을 지키는 것이지만 기독자의 그 오계명은 주님의 명령을 복종하는 것으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주님의 명령을 복종하는 것으로서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지 주님을 위함이 아니면 너는 한 말도 할 수 없고 한 움직임도 할 수 없고 한 행동도 할 수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을 위하는 주님의 큰 은혜의 값으로 팔린 주의 것이기 때문에 이로 인해서 모든 거 내가 할 일이지 이로 인해서 모든 거 하면 이로 인해서 하지 않는 모든 것은 다 죽음에 속한 것이요 멸망에 속한 것이지만 이제 네가 참 생명에게 속했고 주님의 대속에 속했기 때문에 대속에 속하고 진리에 속하고 영감에 속해 가지고서 이제 모든 일을 하면 일하는 그것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다 영생화 되어서 완전케 하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케 하는 법칙이 왔는데 완전케 하는 법칙을 버리고 네가 사망의 법칙으로 또 나가 가지고서 사망의 일을 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완전한 법칙을 가지고서 이 법칙에서 이 법칙이 하지 말라 하면 안 할 것이요 하라면 할 것이요 이 법칙에 소속하고 여게 근거해서 이 법칙의 권능을 힘입어 가지고서 이 법칙대로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네가 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 사은에 대해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이 일도 하고 저 일도 하고 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여게서 똑똑히 우리에게 밝힙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이런 부모가 죽어 장사해 지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으며 그 일도 예수님의 대속을 두고는 못합니다. 대속을 두고 얼마든지 하는 거는 죄입니다. 죄요 사망이요 구원을 절단 내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은 가다가 중단돼 버렸습니다.

 

우리가 탑을 쌓을 때에 그 탑을 쌓다가 다 중단 해 버리면 그 탑은 헐어졌습니다. 헐어지고 또 새로 쌓으면 새로 새로 기초 놔 가지고 새로 탑 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헌 것은 다 소용없이 다 허비하고 낭파된 것이 됐지만 그 먼저 건축한 그 기능이 저에게 남아 있고 모든 경험이 남아 있기 때문에 새로 터를 잡아 가지고서 신축하는데 많은 도움은 되기는 됐지만 이제까지 했던 것을 버렸는데 그것이 다시 계속 된다고 그렇게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남여 이성면으로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세상과 벗되고자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알지 못하느뇨 네가 세상과 벗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요 그것이 음행한 것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음행을 했으면 남편하고 살다가 음행을 했으면 남편과의 관계는 일단 끊어져 버렸습니다. 일단, 끊어졌습니다. 일단 끊어지고 그 다음에 다시 서로 화합이 됐으면 새로 화합이 새로 새 결혼이요 새 화합이지 옛날 것은 벌써 이혼으로 다 끊어진 것입니다.

 

그 모든 일이 다 그런 것입니다. 생명에 속한 일은, 세상에 속해 일도 그 일 하던 것을 먼저 계속적으로 이래 하는 것은 무생명의 일이 그러하고. 또 생명에 속한 것은 그 일이 끊어지지 안하고 지금 보류가 돼 가지고 있든지 이렇게 된 것 말이지 그 일이 일단 포기를 했든지 그거 다 취소를 했든지 암만 해놔도 취소를 해 버렸으면 취소돼 버리고 새로 해야 되지 과거에 취소한 것을 또 그걸 새로 뭣을 시작한다고 돼 그것이 연장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천국 구원을 이루는 것이 그것이 자기가 어떤 일을 해도 계속된다 그런 관념을 우리가 가지지 안해야 됩니다. 계속은 안 됩니다. 끊어졌으면 끊어졌습니다. 또 새로 시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새벽 기도를 나오다가서 만일 새벽 기도를 나오다가 그 무슨 형편에 따라서 아프든지 이래 가지고 끊기는 그런 건 그렇지만 자기가 새벽 기도 나오는 걸 자기가 이제 버리고, 다른 거 뭣 때문에 새벽 기도 하는 것을 버리고 그 새벽 제단 쌓는 계속하는 것을 이제 새벽 기도 안 쌓기로 작정했다 말이오. 안 쌓기로 작정하고 난 다음에 하루를 안 쌓아도 그 이튿날 왔으면 그 이튿날 새로 또 그 새벽 제단을 시작하는 것이지 그전에 쌓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이렇게 저렇게 해서 못 쌓아도 '나는 새벽 기도를 쌓아야 되는데 이거 쌓지 못하니까 오늘 또 못 쌓으니까 안 됐다. 자꾸 쌓아야 된다.' 쌓아야 되는데 자기가 넘어지는 것은 연약해서 넘어지는 것은 하루 일흔 번씩 일곱번이라도 다시 계속을 해라 하는 것을 말씀을 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거는 잘 구별해서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생활은 자세히 여러분들이 집에 가서 궁구해 보면 전부 사은의 종류와 책임의 종류 요 2가지 2가지 생활 밖에는 없습니, . 전부 사은에 안 속했으면 자기 의무와 책임에 속했든지 요 2가지 밖에 없는데 이 사은에 대해서도 어떤 중대한 그 극단적인 어떤 그 절정에 이르는 그런 세상 사은이라도 이제 세상 사은했던 그 일은 너는 죽었다, 그말입니다. 세상 사은에 속해서 살던 사람은 죽었고 그는 죽었고 너는 이제 하나님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새로 중생돼서 새사람 되었기 때문에 새사람 된 사람은 다시 그 일을 할 수가 없다 할 수가 없다 말이오. 새사람 된 사람은 그 일을 할 수가 없다. 너는 진리와 성령으로 다시 살리움을 받았기 때문에 죽은 일은 다시 못 한다. 죽은 일은 죽은 자들이 하지 산 자는 죽은 일을 하지 못한다 하는 것을 여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산 자들이 죽은 일을 할 수 없는데 죽은 일을 한다고 하면 그 일은 제일이 아닙니다. 제가 하는 일이 아니고 제일이 아니고 내나 악령과 악성과 악습으로 되어 있는 옛사람 그것이 하는 것이지 제가 하는 제일은 아닙니다. 분명히 여러분들이 그걸 아십시오. 우리가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됐으면 중생된 새사람인데 새사람이 하는 일이 있고 옛사람이 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새사람으로 새사람으로 하는 일 있고 옛사람이 하는 일이 있는데 새사람으로 된 새사람이 옛사람이 하는 일은 할 수가 없다 말입니다. 해도 새사람이 하는 것 아닙니다. 옛사람 그것이 하는 것이지 악령과 악성과 악습이 하는 것이지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이제 새사람된 사람은 새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진리와 성령과 중생된 새사람이 효성도 할 수 있고 또 부부 애정도 할 수 있고 사회 책임도 할 수 있고 국민 노릇도 할 수 있고 취직도 할 수 있고 출세도 할 수 있고 새사람이 오만 거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사람이 다만 할 수 없는 것은 옛사람의 일은 새사람이 할 수는 없습니다. 요것을 똑똑히 알아야 기독교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요거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거 흐려 가지고서 도무지 경계선이 없습니다.

 

그러면 새사람이 하는데 새사람이 넘어진 그 일은, 넘어지면 그만 낙망하는, 넘어진 것은 하루 일흔번씩 일곱번 넘어져도 네가 일어서라는 걸 말하는 것입니다.

 

일어서라는 거. 그러기 때문에 새사람 일을 해야 될 터인데 새사람의 일하지 안하고서 새사람으로 안하고 옛사람으로 했으면 그러면 이 옛사람으로 했으면, 그러면 옛사람이 했으면 옛사람의 일을 했으면 지금 새사람이 옛사람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새사람은 지금 밀려서 팔짱 찌르고 앉았고 쫓겨났고 옛사람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새사람이 지금 옛사람 일을 하는 것입니까? 새사람은 그때에 심신이 배척하기 때문에 쫓겨나와 버렸고 그 심신하고 합동이 돼 가지고서 옛사람 일을 하고 있을 때에는 그것은 새사람이 하는 일은 아닌 것입니다. 새사람이 하는 일은 아닙니다. 그 말입니다.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라'는 거는 그 죽은 자들, 죽은 자라 말은 옛사람입니다. 옛사람 일은 옛사람이하지만 너는 새사람이 됐기 때문에 다시는 너는 옛사람의 일은 할 수가 없다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해도 제 마음에는 하는 것 같지만 하면 옛사람이 했지 새사람이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새사람은 못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새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되는 것이지, 예수님의 제자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되는 것은 이것은 점점 자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씨가 나가지고서 자라가는 것이지 이래 무엇을 주우 합해 가지고서 둘 서이 합해 가지고 예수님의 제자되는 것은 이래 모든 것을 종 합체로 모으는 것이 아니고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이 자가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라가는 것이 이것이 합해 가지고서 무슨 그 조직물이나 모든 무슨 조합물이나 그런 것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것을 구별해서 우리가 그래 될 때에 ', 새사람은 옛 사람이 할 수가 없다 하더라.' 고럴 때에 옛사람과 새사람을 잘 구별할 수가 있습니다. ', 요 일은 옛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새사람이 하는 것이라' 그러면 새사람은 그라면 모든 세상을 다 버릴 수 있느냐? 새사람이 새사람이 효성하면 더 잘합니다. 새사람이 부모 장례하면 더 잘합니다. 새 사람이 그 가정 생활하면 더 잘합니다. 새사람이 부부생활하면 더 잘합니다. 새사람이 이 사회 생활하면 더 잘합니다. 새사람이 이런 거 저런 것을 맡아 가지고 하면 더 잘합니다. 왜 그거는 다 영생이 되도록 해 버립니다. 영생이 되도록, 진리와 영감대로 해서 털끝만치도 틀림이 없이 그래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사람으로 부부 서로 애정을 가지는 것은 그거는 영원합니다. 옛사람으로 부부 애정 가지는 거는 반드시 없어집니다. 있는 거만치 그때 큰 소리하고서 더 서로 분쟁이 나고 없어질 것입니다. 새 사람으로, 되어진 거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사람은 이 세상에 영육을 가지고 영육을 가지고 지정의를 가지고 이 물질계의 세상 이 우주라는 이 물질계의 세상에서 새사람이 살 수 있는 그 기간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새사람의 생활을 내가 해야 되지 옛사람의 생활을 나는 할 수가 없다' 하는 그것은 구별해 가지고 말씀한 것이기 때문에 이런 걸 혼합시키면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지금 옛사람 생활 하고 있다, 새사람 생활 하고 있다.' 새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 그 옛사람 생활을 예수 믿는 사람이 사는 일로 하지 말라 그말이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모든 이런 일 저런 일 다하나 볼 줄 모르는 사람이 껍데기로 볼 때에는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다 그와 같이 그런 일을 하고 있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이나 못 믿는 사람이나 다 그와같이 하고 있다 그랬지만 주님이 밝히기를 한 자리에서 둘이 누워자는데 한 밭에서 둘이 일을 하는데 한 매를 둘이 갈고 있는데 그런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했다. 하나는 새사람으로 그 일을 하고 하나는 옛사람으로 그 일을 하기 때문에 하나는 썩어진 것을 거두고 하나는 영생을 거둔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스스로 속지 마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기심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의 심은 것은 뭣이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그 육체로 심은 자는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으로 심은 자는 영생을 거두느니라' 말씀했습니다. 꼭 같은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꼭 같은 생활을 하지 만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영생을 거두고 육체가 주관돼 가지고 사는 사람은 썩어진 것을 거둡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기억하고, 둘째로. 또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만' 61절에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좋겠나이다만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그러면, 자기가 주님을 좇는 일은 아니고 좇는 일은 안하고 좇는 일을 좇는 일을 뒤로 두고서 가족 작별이나, 가족 작별로 말하면 가족에 대해서 제일 책임이 제일 중요한 책임이 가족의 책임인데 가족에 대해서 일생 동안 책임을 지고 하는 것 같으면 하지만 이제 가족을 작별할라 하니까 작별하는 것으로 가족에 대해서 다 끝을 마치는 것인데 그걸 요청을 해도 주님이 허락지 안했다 그말이오. 만일 그럴 때에 주님에게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주를 좇겠는데 내가족이 주를 좇으니까 이 가족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좇는 것입니까?' 이럴 때는 주님을 좇는 사람으로서 가족에 대해서 자기 의무와 책임을 주님이 잘 가르쳐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가정에 대해서 하나도 썩는데 일 안 하고 다 영생에 이르는 생명법을 가리쳐 주셔서 잘 바로 하도록 했을 것입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 말은 쟁기는 잡고서 앞으로 가는 거 아닙니까? 앞으로 가는데 이것은 뭘 가르치느냐? 쟁기를 이러면 회개 운동이다 뭐이다 말하지만 그게 아니고 하늘나라의 그 천국 성질을 말한 것입니다. 천국의 속성은 천국의 속성은 뭐이든지 시작됐으면 앞으로만 가지 뒤로 돌아가지 못한다. 옆으로 탈선도 못 한다. 그것을 에스겔 1장에 보면 앞으로만 가고 이리저리 치우치지도 못하고 돌아보지도 못합니다. 앞으로만 가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네가 나를 좇는 일을 시작하면 나를 좇는 일은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됐으면 너는 중생된 새사람으로만 살지 새사람으로 살다가 또 옛 사람으로 돌아가 사는 그런 것은 허락지 못한다. 네가 새사람으로 사는데 새사람으로 살지 안하고 옛사람으로 돌아가 네가 살거나 말거나 그거는 새 사람이 사는 생활이 아니고 새사람이 그 생활 아니고 아니고 네가 새사람 생활을 버려 버리고 옛사람 생활로 네가 타락한 것이지 새사람 생활은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에 우리는 팔렸기 때문에 언제든지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것인데 주님의 것인데 주님의 것이 아닌 것으로서 하는 것은 제가 제 마음대로 주님을 배척하는 것이지 그 대속을 입고는 안 됩니다. 대속에는 주님의 것이 대속을 입은 자는 주님의 것이 됐소.

 

대속을 입은 자는 주의 종이 됐소. 대속을 입은 자는 주님의 성전이 됐소. 대속을 입은 자는 주의 지체가 됐소. 대속을 입은 자는 주의 몸이 됐습니다. 대속을 입은 자는 주의 백성이 됐습니다. 주님의 나라가 됐습니다. 주님의 제사장이 됐습니다. 주님의 선지자가 됐습니다. 주님의 왕이 됐습니다. 다시 뒤돌아보지 못합니다.

 

뒤돌아보지 못하는 이것이 우리의 생활인데, 우리가 이런 저런 다른 일하는 그것은 이것이 신앙 생활로 오인하면 안 됩니다. 그거는 신앙 생활을 배반하고 신앙 생활을 배반하고 제가 마귀 생활로 옛사람의 생활로 지옥생활을 제가 하고 있는 것이지 예수 믿는 신앙 생활이 이랬다 저랬다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 믿는 신앙 생활은 후퇴도 없고 이리저리 탈선도 없는 것입니다. 없는 것인데 옛사람으로 옛사람 생활은 성령과 진리와 중생된 영이 내 심신을 주관해 가지고 살 때에 이제 새사람이 되는 것이고 또 내 심신을 영과 성령과 진리에 바치면 의의 병기가 돼 가지고서 새 사람의 도구가 돼서 새사람에게 이용을 당하는 것이고 내가 그때 새사람을 버리면 내 마음과 내 몸의 이 모든 기능은 이 자유성이 있어서 자유성이 있어서 성령도 배척할 수가 있고 진리도 배척할 수도 있고 증생된 영도 배척할 수가 있습니다. ? 심신 이것도 제한적 자유지만 자유를 받았기 때문에 배척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배척하면 쫓겨 나가야 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일 년 이태고 성령의 충만한 사람으로 살았다 할지라도 자기 마음이 성령의 감화를 소멸하고 쫓아 내 버리고 진리로 쫓아내 버리고 예수님의 대속의 구주를 밀어내 버리면 밀려 나가야 됩니다. 전능의 전능의 하나님인데 밀려 나가야 됩니다. 밀려 나가는 것은 우리에게 있는 제한한 자유지만 그 자유성을 죽여 버리면 이거는 짐승밖에 안 되고 말기 때문에 자유성을 죽이지 안하고 자유성을 살려서 유기적으로 이 구원을 이루어가야만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그 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기적으로 이루기 위해서 이것에 대해서 자유성을 꺾지 않습니다. 쫓겨 나갔다가 또 감동시켜서 그래 '영접하면 문을 두드리면 내가 들어가서 너는 나로 더불어 먹는다' 그말은 먹는다 말은 행사한다는 걸 말하는 것인데 그렇게 영접하면 성령과 진리와 중생된 영이 들어와 가지고서 우리의 심신을 붙들고 하나님이 내게 대한 그 뜻인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룰 수가 있고 하나님은 또 내게 대한 뜻을 당신이 나를 통해 이룰 수가 있고 이런 것을 가르켜서 너는 나로 더불어 먹고 나는 너로 더불어 먹겠다 고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옛사람과 새사람을 우리가 구별해서. 그러면 우리는 옛 사람의 생활을 하면 옛사람의 생활을 하고 새사람의 생활을 하면 새사람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지 그 새사람의 생활과 옛사람의 생활 한테 혼합 해 가지고서 동일시는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여게 똑똑히 밝합니다. 동일시는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새사람 생활을 하면 새사람 생활은 새사람 생활하지 옛사람 생활은 거기 끼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새사람 생활을 일 년 동안 하다가서 일 년 동안 새사람 생활하던 그 심신이 성령도 진리도 중생된 자기 영도 배반해 버리고 다시 타락해 가지고서 죄 가운데 사는 그 생활을 하는 그것을 그것은 신앙 생활 하다가 이 생활하는 것은 신앙 생활이 그거 아닙니다. 신앙 생활이 그거 아니고 이 신앙 생활을 버리고 지금 마귀 생활 하는 것이요 옛사람 생활하는 것이요 멸망의 생활하는 것이지 영생의 생활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럴 때는 새사람 어째? 그럴 때는 새사람은 성령과 중생 된 영은 탄식을 하면서 그대로 있고 우리의 이 심신의 기능으로 성화된 것은 이 세력에 끌려 가 가지고서 원치 안하는 대로 이리 저리 끌려 다니면서 죄를 지으나 반드시 죄 짓는 가운데에 성화된 그 심신의 기능은 그걸 반대 하나마 이기지 못하고 이래 가지고서 언제 때가 돼서 그걸 이기고 나면 그것을 배척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세상에 미련이 있어 그러다가 나이가 많아 가지고 죽을 때가 가까와 오면 자연히 세상에 대해서는 미련이 끊어지고 하늘나라에 대해서 소망이 가까와지기 때문에 죽음이 가까이 오면 새사람이 이제 등장을 하고 힘을 쓰고 옛사람은 풀이 죽어지고 마지막에 죽을 임시 되면 옛 사람이 배척 안 당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배척 당하고 새사람이지만 벌써 새사람이 등장해 봤자 시기가 지나갔기 때문에 자랄 수 있는 그런 기간을 다 허비했기 때문에 그거는 다 둘째 사망의 해를 다 받아 버렸고 그러면 자기의 손도 발도 다 떼서 다 팔아 먹어 버렸어 팔아 먹었으니까 다 죽어 버리고 이제 부활하지만 부활 형체는 부활 당하지만 기능으로 말하면 아주 갓난 아이와 같은 그런 기능을 가지고 부활 하는 자도 있고 이제 어떤 자는 장성한 자로서 하늘과 땅의 것을 통치할수 있는 그런 자로 부활할 수 있도록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부활의 그 권능에 참예하기 위해서 부활의 권능에 참예하는 데에는 부활의 권능을 마련하는 예수님의 고난 그 고난에서 그 현실에서 마련하기 때문에 나도 주님이 당하는 그 어떤 고난이라도 부활의 권능이 마련되는 데는 나는 개의치 않으니까 뭐 예수님의 그 고난까지 내가 다 따라가서 나도 부활의 권능을 지금 마련하겠다' 그 말을 한 것입니다. '주님이 잡은바 주의 손에 잡힌 바 된 것을 나도 잡으려고' 주님이 고 자기 목적 달성 고걸 딱 잡고서 목적을 달성해서 내가 이겼다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바울도 나도 이겼다 이기고 주님이 이기시고 아버지의 보좌에 앉으심과 같이 나도 이기고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겠다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주님의 손에 잡힌바 된 나도 잡을라고 지금 간다' 하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새사람의 생활하다가 새 사람을 배척해 버리고 옛사람의 생활은 할 수가 있습니다. 그걸 새사람의 생활을 옛사람의 생활로 동일시를 하든지 그 혼합을 하든지 그렇게 혼잡하든지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설교: 백영희 목사(1984. 9. 23. 주일오후)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5574 (소책자21) 옥토에 뿌린 씨/ 841026금야 선지자 2015.10.16
5573 (소책자22) 지혜 있는 청지기/ 810408수야 선지자 2015.10.16
5572 (소책자23) 세상의 빛/ 851013주전 선지자 2015.10.16
5571 (소책자24) 세상의 소금/ 800210주전 선지자 2015.10.16
» (소책자25) 여우도 굴이 있고/ 840923주후 선지자 2015.10.16
5569 (소책자26) 기름 준비/ 800817주전 선지자 2015.10.16
5568 (소책자27) 잃은 양 한 마리/ 830410주후 선지자 2015.10.16
5567 (소책자28) 혼인 잔치/ 861123주전 선지자 2015.10.16
5566 (소책자29) 너희는 가지니/ 830515주전 선지자 2015.10.16
5565 (소책자30) 겨자씨 믿음/ 800927토새 선지자 2015.10.16
5564 11가지 구속/ 마태복음5장29절-30절/ 870321토새 선지자 2015.10.19
5563 11가지 할 일/ 출애굽기2장8절-11절/ 870615월새 선지자 2015.10.19
5562 14가지 구속/ 요한복음6장52절-59절/ 870821금야 선지자 2015.10.19
5561 14가지 구속/ 요한복음6장52절-59절/ 870822토새 선지자 2015.10.19
5560 14가지 구속으로만 살 것/ 요한복음6장52절-59절/ 870821금새 선지자 2015.10.19
5559 15단계 도리/ 요한복음9장35절-47절/ 800201금야 선지자 2015.10.20
5558 16가지 구속/ 베드로후서1장4절/ 870830 공과 선지자 2015.10.20
5557 6가지 구속/ 히브리서1장13절-2장4절/ 870830주전 선지자 2015.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