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랑


선지자선교회 1985년 8월 10일 토새 

 

본문 : 사도행전 20장 29절∼32절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사도 바울이 삼 년 동안이나 가르친 그 모든 말씀이 다 성신의 감화로 하신  말씀이요, 자기의 말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말씀이 또 성경에 기록되어  나왔습니다. 이렇게 신앙을 지도하는 사도 바울이 떠나고 난 다음에는 흉악한  이리가 온다 하는 그말은 곧 신앙을 마구 삼키는 그 악한 자 들이 일어날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 악한 자들이 일어나서 삼킬라고 할 때에 그때에 누구를 의지할  것이며 누구의 보호를 받을 것인가? 그때에 혹 사람들은 사람을 의지하거나  사람의 보호를 입을라고 하지만 그 사람은 자기가 언제나 같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족들이라도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부부간이라도  같이 있고 싶다고 있는 게 아니라 갑자기 일이 나서 나 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는 그런 것은 실지로 우리가 듣는 대로 이산 가족 찾기라  해 가지고 방송에 많이 나왔습니다. 이산 가족이라 말은 서로 떠나서 헤어진  가족이라 말입니다. 헤어지기가 싫지만 그만 급한 일이 있어 가지고 잠깐 서로  나뉘었는데 나중에 만날 라고 하니까 만나지 못하고, 또 피차에 그곳에 가서  봐도 없고 이래서 나뉘어지는 거와 같이 우리는 앞으로 지금 있는 사회에서,  사회라 말은 인간 모인 것을 가리켜서 사회라 합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사회에서. 내 가 지금 살고 있는 가족에서, 내가 살고 있는 이 교인들 사회에서  그대로 살리라 생각 못 합니다. 언제 서로 나뉘어질란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신앙 걸음을 걸어가는 우리들은 사람의 보호나 사람의 인도나 사람의  이 도움을 그것을 바라는 것은 낭파될 일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거는 아무리  자기가 참 철통같이 바라고 의지하고 함께 한다 할지라도 그 것은 언제 어디서  없어질란지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누가 너거 가운데서는 신앙이 좋으니까 그  사람을 의지해라, 누가 또 진실하니까 그 사람을 따라라 또 그 사람은  경제적으로나 정권적으로 힘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들의 보호를 받아라.'  이렇게 말하지 안했습니다. '그런 것을 아주 지금 있다 할지라도 언제 없어져도  없어지리라 생각을 하고 그런 것은 바라지 말고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구  은혜의 말씀께 부탁한다 바울이 부탁하는 것도 아, 이 무리들을 신실한  장로에게, 신실한 목사에게. 어떤 이에게 부탁을 하지 안하고 바울이 부탁하는  사람도 주님에게 부탁했습니다.

 주님에게 부탁한 것은 주님은 육체를 가지고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안하시고  육체는 보일 수 없는 신령함으로 변화된 그 육체를 가지시고 또 우리 가 볼 수  없는 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은 인성과  신성을 가지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인성도 보이지 않는 신령함으로  변화되었고, 또 신성은 근본부터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눈으로 보이는 거 손으로 만져지는 거 이런 것이라야 자꾸  있는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그런 관념을 우리가 벗어나야 됩니다. 그런 관념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자살 행위입니다. 그런 관념을 벗어나 지 못하는 것은  우리를 어리석게 만들고 약하게 만들고 속도록 만들고 그렇게 우리를 실패케  하는 그 어리석음입니다. 어리석음은 내게 있는 어리석음입니다. 우리  각자들에게 있는 어리석음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눈으로 손으로 보고 잡고 만질  수 있는 그런 것을 의지하거나 바라거나 하지말고 눈에 보이지 아니해도, 손에  잡히지 아니해도 주님은 전지 전능의 하나님이요, 또 계시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몸으로 접하지 못하는 이  주님이, 보이는 이 모든 것은 다 없어져도, 그 모든 것은 나를 떠나도 주님은  나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언제든지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우리가 자꾸  인식해야 됩니다. 인식하고 믿어야 됩니다. 이래서, 주님에게 부탁한다. 바울이  그 아시아에 있는 교인들을 주님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면, 보이는 것들에게 부탁해 가지고는 그 보이는 것들은 아무리 생명  내놓고 보호하고 책임지고 할라고 해도 그것이 제 마음대로 언제든지 이산되지  안하고, 서로 나뉘지 안하고 그렇게 있을 수 있는 그런 게 아니 그 언제 어떻게  돼서 나뉠지 모릅니다. 이산 가족들의 말 들어보면 같이 가다가 갑자기 공습이  오니까 공습이 와서 거게 폭탄이 떨어지고 사격을 하니까 숨어야 될 거 아닙니까  그때 언제 가족하고 '같이 숨자' 이랄 수 없고 그때 그만 잠시니까 퍼뜩  피할라고 퍼뜩 피했는데 그거 지나가고 보니까, 그거 지나가고 보니까 피하면서,  그때 피하다가 또 요리 피하고 조리 피하고 자꾸 이라다 보니까, 나중에 가서  공습이 지나가고 나서 보니까 남편이 어디 갔는지 암만 찾아야 모르겠고, 아내가  어디 갔는지 암만 찾아야 모르겠고, 이래서 그만 나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얼추 그리 나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예 바울은 부탁을  하기도 주님에게 '이 무리를 지켜 주십시오' 하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보이는 모든 것보다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그 주님이 더 확실히  계신 것을 자기가 보았고 늘 접했기 때문에 그 주님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자기가 이래 성경 지식을 가지고 '아, 주님은 전능하신 분이니, 전지하신  분이니 이분에게 부탁하면 된다.' 하는 그런 지식만 가지고는, 그저 그런 믿음만  가지고는 부탁이 정확지 못합니다. 바울은 평소에 살 때에 사람이 무슨, 수십  명이 말하는 것보다 그 주님이 자기에게 영감으로, 영감으로 같이 하는 영감으로  동행도 하시고 또 동행하던 주님이 그만 서로 나뉘어서 만나지 못하기도 하고  이렇게 영감으로 나타나시는 그 주님, 그리스도의 영으로 나타나시는 그 주님을  상대해서 모든 사람이 다 옳다 해도 내게 영감으로 나타나신 그 주님이 틀렸다  하면 뭐 아무리 많은 사람 이 옳다고 해도 그것은 상대를 하지를 안했고. 그것은  옳다고 해도 아무 능력 없고, 자기에게 영감하는, 그리스도의 영감하는 그  영감이 옳다 하면 천하가 다 거부해도 든든하고, 그 영감이 틀렸다 하고 나를  떠나면 천하 사람이 다 옹호한다 해도 소용이 없는, 늘 영감을 접해 가지고  영감을 상대해서 성신의 감동을 상대해 가지고 이래 살았기 때문에 평소에 모든  사람의 말보다도 행동보다도 그 운동보다도 실력보다도 무엇보다도 온갖,  사람이나 보이는 사람들의 온갖 것보다도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자기에게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인데, 성령의 그 감화를 상대하는 것을 더 상대해서  살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사람보다 성신의 감화의 책망이 더 두렵고. 그분이  반대하는 것이 더 두렵고, 또 그분이 함께 하시는 것이 더 든든하고, 이래 서  보이는 것을 상대하지 안하고 보이지 않는 영감을 상대했고.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늘 살았으니까 영감과 나뉘지기도 하고. 영감을 떨어지기도 하고,  '영감에 동행도 하고, 영감이 도와 주시기도 하고, 영감이 책망도 하고 그러니까  수많은 사람들의 말들보다도 또 자기 생각보다도 영감이 내게 대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그 영감을 늘 상대해 가지고 두려울 때도 영감을 상대했고. 기쁠  때도 영감을 상대했고. 복잡할 때도 영감을 상대해서 성신의 감화를 상대해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그이를 상대해 가지고 살아 가지고 자기는 어려움도  어려움 없이 지냈고, 또 복잡할 때도 올바른 인도를 받았고, 이런가 저런가  복잡해서 비판하지 못할 때에도 그분이 가르쳐 주는 그 비판으로써 올바른  비판을 받았고, 이래서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보이지 마는 그 영감을 보이는  모든 것보다도 더 능력있게 알고 상대해서 살아나왔기 때문에 그분에게 부탁한  것이라, 지금 주님에게 부탁했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래 살아나갈 때에 날마다 모든 것을 상대하는  것보다도 주님이 내게 상대되는 그 상대가 제일 큰 상대요, 항상 상대해서  살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안 되니까 눈을 감고, 눈을 감고 고요히 생각해 가지고  자기에게 나타 나는 영감, 그것을 자기가 만나기 전에는, 그것을 만나기 전에는  이랄지 저랄지를 모르고, 그거 만나기 전에는 뭐 자기생각이 이래야 될까 저래야  될까 해도 그거 도무지 믿을 수 없고 다른 사람이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암만 해 봤자 그 것도 믿을 수 없고 그저, 자기 가 눈을 감고 고요히 양심을 써  가지고 이렇게 묵상하고 이럴 때에 처음에 어릴 때는 주님이여 이렇게 부르기도  하고 하지만, 묵상하고 이래 생각할 때에 성신의 감화가 와서 이렇다 저렇다,  그분을 만나면 그 온 천 하를 다 내가 빼앗기고 온 천하와 나와 이별을 하고  나뉘었다 할지라도 그분 만나면 그분 한 분은 더 든든하고, 더 뭐 가족이나 무슨  주위 환경의 무엇이 어떻게 나를 옹호하고 해 가지고 든든한 그 든든 속에  들었다 할 지라도 내가 영감으로 그분을 만나기 전에는 허전하고, 뭣이  든든하다는 그런 안심할 만한 것이 하나도 되지 않는 그런 것을 차차 차차  우리가 자꾸 연습해서 숙달해서 이제는 보이는 것을 상대해 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주님을 상대해서 살고, 보이는 것을 상대하고 산다는 것은 사람보다도  권세자보다도 어떤 물질이나 뭣보다도 보이는 것으로 상대할 것은 우리에게  문서계시로 나타난 이 성경 말씀입니다. 말씀을 상대합니다. 말씀을 상대하고,  보이지 않는 주님을 상대하고, 이 두 분이나 상대하고 서로 관계를 맺고 의지도  하고 의논도 하고 인도도 받고 지도도 받을 일이지 그 외에는 믿거나 의지하거나  바라보거나 지도 받거나 그럴 만한 상대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  차차 차차 이것이 장성할 때 그 사람은 차 차 영의 사람이요, 진리의 사람이요,  곧 중생된 새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새사람은 주님 상대해 살고 말씀을 상대해 살기 때문에 아무리 세상  과학 온 천하의 통계라 말하는 것은, 통계라 말은 뭣을 통계라 하는고 하니  이제까지 세상에서 고라면 꼭 됐다. 요라면 요리 됐다 하는 그것이 수천 년 동안  내려오면서 틀림없이 그대로 된 그런 것을 가리켜서 통계라 합니다. 이제까지  통계가 아무리 인정하고 요래라 해도 모든 통계의 인도보다도 성경 말씀의  인도를 더 크게 여겨서 인도 받고, 모든 현재 에 있는 온 세상의 옹호하는 그  옹호보다도 성경 말씀의 옹호를 더 능력 있게 의지하고, 온 모든 존재 그런  것들이 다 반대하는 것보다도 성경 말씀 이 나를 반대하는 것을 더 크게 여기는  이 사람으로 우리가 자꾸 자라가야 됩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보다, 심지어 자기보다 말씀을 더 능력 있고  크게 여겨서 상대하고 살고, 이 말씀을 상대하고 사는 것도 좀 흐미하고,  흐미하고 허전하고 참으로 나를 보호할, 절대의 능력 나를 좋게 할, 절대의 은혜  이분은 아니라 그말이오. 이것은 아니기 때문에 말씀만 이렇게 상대해서 해도  그것으로 안심이 안 되니까 거게서 기도하고 묵상하고 또 이렇게 해 가지고  성신의 감화가 '요렇게 해라' 하는 요 영감을 딱 만나고 난 다음에는. 그 마음에  이제 안심입니다.

 영감을 만나고 난 다음에 내가 상대하는 성신의 감화, 곧 성신의 감화는 그  안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곧 부활하신 신인 양성 일위이신 주님이 그렇게  나타나시기를 영감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영감 잡으면 주님 잡았고 영감 떠나면  주님 떠났고, 영감 만나면 주님 만났고 영감 잊어 버리면 주님 잊어 버렸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렇게, 보이는 것을 상대하지 안하고 보이지 않는 이 주님을  상대해서 이렇게 사는 생활을 자꾸 숙달시키고 연습했다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이제는, 사람의 입이 뭐라 하는가? 사람의 입을 상대해 가지고 '사람들이 날  뭐라 하나?' _사람 입을 상대했고, 또 '사람들이 나를 어찌 보나?' 사람들의  눈을 상대했고, 또 '사람들이 내게 어떻게 하나?' 하는 사람들이 내게 대해서  움직이는, 어떻게 행동하는 그런 것을 상대했지만 차차 차차 그런 것은 이제  흐미해지고 멀어지고 그런 것은 무시해진다 말이오, 그거는 차차차 무시해지고.

이제는 말씀을 상대해서 말씀이 내게 뭐라 하느냐, 이게 차차 차차 이제  밝아지고 자꾸 이렇게 연습하고 습관을 들이니까 모든 것보다 말씀 상대가 더  내게 확고하기 때문에 말씀이 안 된다 하면 아무리 천하가 다 달라들어도 안  된다는 것을 자기가 확실히 알게 되고. 또 모든 것이 반대한다 해도 요 말씀과  나와 하나됐을 때에는 온 천하가 어떻게 한다 해도 비웃을 만치 거게 대해서 뭐  그것을 아주 매우 경한 것으로 여긴다 했어. 매우 경한 것으로. 고린도전서  4장에 보면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은 매우 적은 것으로 여긴다  그렇게 했어.

 그러나 말씀이 이렇다 하면 그거는 자기가 목숨이 끊겨지는 일에도 말씀이  이래라 하는 데는 어길 수가 없을 만치 그렇게 말씀은 큰 권능을 가지고 계시는  것을 자기가 믿고 상대했었고 이제는 말씀만 이와같이 해 도 내가 그 말씀을  바로 택했는지. 안 택했는지 그걸, 내 현실에 해당된 말씀이지만 그 말씀을 내가  바로 택했는지 안 택했는지 그 정확성이 내게 염려스럽다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데 그리스도의 영감이 자기에게 함께 할 때에. 영감이  자기와 함께 할 때에 이제 안심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온 천하에 있는 모든  것보다 말씀을 권위 있는, 권위자로 생각하고 상대하고, 모든 말씀보다 영감을  권위 있는 존재로 알고 상대하는 그것이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 바울은 아시아에 있는 교회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하는 것은 주님은 신인 양성 일위이신 주님인데 이 주님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다음에는 육안으로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이 주님은  지금 무엇으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같이 하십니까? 그리스도의 영으로 같이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뭐입니까? 그리스도의 영이 뭐이지요? 성령입니다.

내나 그리스도의 영이 성령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는데  그리스도가 너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주님에게 부탁한, '주님이 이것을 지켜 주옵소서' 부탁하는 것은, 온  천하가 우리가 지켜 주겠으니 염려 없을 것이다 하는 천하가 지켜 주겠다고 하는  그것은 도무지 믿을 수 없고 그것은 오늘 어찌 모르기 때문에 이제 주님에게  지켜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을 이 바울은 상대해 가지고 모든 것 상대하는 것보다 주님 상대가  더 확고하고 또 확실하기 때문에 주님에게 상대했고, 그 다음에는 누구한테  부탁했느냐 하면 이 은혜의 말씀에게, 삼 년 동안 가르친 그 말씀에게  부탁했습니다. 그 말씀은 곧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본체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령으로 우리에게 나타났고. 성령이 또 우리에게 더 알기 쉽고 만나기 쉬운  말씀으로 나타났고. 또 말씀이 더 만나기 쉬워서, 만 나기 쉬워서 거머 쥘려면  거머쥘 수가 있고 들 수가 있고 눈으로 볼 수가 있고 또 입으로 내가 그렇게  접할 수가 있는 더 접하기 쉬운 것으로 나타났으니 그 나타나심이 뭐입니까?  나타나심이 뭐 이지요? 성경, 성경, 곧 말씀이요 성경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는데. 부탁하면 어떻게 됐느냐? '그  말씀이 너희를' 그러면 '그 주님이 너희를' 주님에게 부탁했으니까 그 주님이  너희를 든든히 세운다 이렇게 말하지 안하고, '그 말씀이 너희를' 이랬습니다.

'그 말씀이 너희를' 그러면 말씀을 의지하고 말씀을 따라서 말씀과 같이 있으라  그말입니다. 그러면 그 말씀과 같이 있으라 그 말은 왜 주님과 같이 있으라 하지  안하고 말씀과 같이 있으라 말이냐? 주님과 같이 있으라 하면 주님과는 같이  되지 안하기 때문에 말씀과 같이 있으면 곧 주님과 같이 있게 됩니다. 말씀과  같이 있어 가지고 주님과 같이 있읍니다. 내가 말씀의 인도를 받아 가지고  주님의 인도를 받게 되고 말씀을 먼저 접해 가지고 그 다음에 말씀과 한  덩어리됐을 때에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지 말씀하고도 하나되지 안했는데  주님하고 하나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은 뭐인데? 주님이 나에게 접하기  쉽도록, 내가 접촉할 수 있도록, 내가 만나기 쉽도록, 내가 이렇게 서로  결합되기 쉽도록 나타나신 그 주님이 뭐이냐면 말씀이라. 주님이 말씀으로  나타났다 말이오. 그러니까 말씀을 접해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내가 그거 뭐 그런 거 비유가 잘 안 되지만 내가 어떤 사람을 참  만날라고 하는데 그 사람이 지금 차를 타고 갑니다. 그러면 내가 그 차를 만나야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차가 그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지금  차를 타고 있기 때문에 그 차를 잡아야 내가 그 사람을 만나지 차 잡지 안하면  그 사람을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차를 잡아 그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을 만났지만 그 사람의 낯을 만났고 팔을 만났고 몸뚱이를  만났지만 서도 그 사람의 중심을 내가 만나지 못했다 그말이오. 그러나 내가 그  사람을 대관절. 몸뚱이를 만나야 그 사람의 중심을 만날 수 있고 그 사람의  사상을 만날 수 있고 그 사람의 뜻을 만날 수가 있지 내가 그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에게 도와 달라고 하니까 '예. 도와 주지요.' 하지마는서도 중심에 도와  줄라고 하는 것인지 그걸 모르겠다 그말이오.

 어떤 사람이, 시골 사람이 와 가지고, 그 사람이 조금 좋은 자리에 있으니까  '나에게 좀 직장을 하나 해 주이소. ' '내가 직장 그런 거 모두 할 힘이  있습니까?' 하도 와 가지고 이래 쌓아니까 이 사람도 직장에 대해서 '예, 내가  힘을 써 보지요.' 하니까. '힘써 보지요' 하니까 이 사람은 힘써 본다고 하는  말을 듣고 가 가지고 한 달 기다리고, 또 일 년을 기다리고 그래도 사람이  그렇게 부탁을 해 놓고 그랬는데 또 일 년도 안돼서 가 가지고 뭐 대면을 해  이렇게 독촉한다는 것이 대단히 미안스럽고 그 사람 인격을 대접하지 안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일 년을 기다렸습니다. 일 년을 기다려도 또 이랄까 해서  말할까 말할까, 어찌됐는고 물어 볼까 그렇지만 물을 수 있나?' 또 반 년을  기다렸다 말이오. 이랬는데 그 사람은 그때에 하도 귀찮스러우니까 '내가 힘써  보지요' 하지만 아예 거게 대해서 안 될 것을 알고, 또 자기로는 그런 힘도  없고, 이런데 힘이 없다고 자꾸 피할라 해도 말을 듣지 안하고 이라니까  나중에는 '내가 힘을 써 보지요' 하지만 힘써 본다는 그 말로써 다 끝나버렸고  거게 대해서는 생각을 하나도 가지지 안하고 뜻은 하나도 가지지 안하는데 일 년  반동안 이나 공연히 기다리고 있다 그말이오. 공연히 기다리고 있어.

 이와 마차가지로 말씀하고는 나하고는 하나가 돼서 말씀대로는 됐지만 이분을,  영감을, 주를 만나야 될 터인데 이게 문제다. 이래서 말씀대로 성경을 보고 '아,  성경 이랬으니 내가 성경대로 됐으니까 됐다. 안심을 백프로 안심을 하지 안하고  이제 이랬는데, 아무래도 주님을 만 나야 되겠는데 이 말씀대로 한 그것이  영감이 와 가지고 성신의 감화로써 제게 감화가 왔을 때에 감화가 와 가지고  옳다 바르다 이렇게 나에게 증거를 해 줄 때에 그때에 이제 백프로 맞는 것을  백프로 안심을 할 수가 있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평소에 자꾸, 보이는 이거 모든 보이는 것들하고 상대하는 거 보이는  것들하고 상대하는 이것을 자꾸 옮겨서 말씀하고 상대하는 일 자꾸 연습을 해서  숙달을 시키고 말씀하고 상대하는 것으로써만 나는 다 됐다고 생각지 말고,  말씀하고 상대하면서 말씀 안에 성령이 동참해 '주시는가? 요 말씀을 요래  지키면 되는가 보다. 요래 하고도 지키는 거 가지고 안심이 안 되고 지킬 때에  또, 성신의 감화가 내게 와 가지고 '됐다' 요렇게 성신이 나에게 감화해 주고  영감이 나와 같이 할 때에 비로소 안심을 하는 그것이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도 바울은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부탁을 보이는 모든 그런  것들에게 부탁하지 안하고, 네가 또, '보이는 것들을 의지하라고 하지 안했고,  하는 것이 주님과 말씀에게 부탁을 했고, 부탁을 했는데 나중에 '너희를 든든히  세우리라' 그 말하는 것은 주님이 세운다고 말했습니까. 말씀이 세운다고  말했습니까? 말씀이 세운다 그말은, 말씀이 세운다 말은 이 껍데기에서 말씀  만나면 주님 만날 수 있다 그말입니다. 또 부탁을 하는 데에는 말씀보다 주님이  크시기 때문에 주님에게 부탁하고 그 다음에 말씀에게 부탁했는데, 이제  너희들에게 와서 지킬 때에는 말씀이 너거들을 지킨다 그말은 말씀이 지키면 그  다음에 영감이 지킨다 하는 것으로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난 밤에도 말했지만 우리의 현실에 해당되는 말씀, 우리의  현실에 해당되는 말씀 말이오. 우리 현실에 거게는 네가 진실해라. 네가  사랑하라, 네가 위로하라. 네가 또 환영하라 네가 보호하라, 네가 부지런히  하라. 네가 이 일을 하라, 저 일을 하라, 이렇게 하 라, 저렇게 하라 하는 그  말씀은 그 말씀은 내 현실에는 요래라 조래라 그렇게 온갖 것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라는 고때 해당된 그 말씀은 어떤? 무엇을 가지고 있다  했습니까? 그 말씀은 뭘 가지고 있어요? 전능을 가지고 있어요. 요거 믿어야  돼요. 전능을 가지고 있어요. 또 뭐 가지고 있어요? 전지를 가지고 있어요. 또  뭐 가지고 있어요? 사랑을 가지고 있어요. 또 뭐 가지고 있어요? 주권을 가지고  있어요. 모든 영계나 물질계의 모든 피조물, 모든 피조물을 다 자유 자재할 수  있는. 피조물을 없는 가운데서 만든 그요, 또 만들어 놓은 것을 지금도 자유  자재하는 능력자 그라 그말이오. 능력자인데, 능려자의 능력인데 다만 그  신격성은 없습니다. 신격성은 없으나 신격은 아니나 참된 이치인데 그 이치는 그  능력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이라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치를 만나 가지고  우리의 인격성과 같은 그 신격성을 가진. 성령은 신격성을 가졌는데. 그분을  만나고야 안심되는 그분 만날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 영감을 서로 상대할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감은 바로 그분이기 때문에.

 그러기에, 우리 현실에서 그 현실에 해당되는 말씀을 배반하는 것이 전능자를  배반하는 것이요 말씀을 대적하는 것이요, 말씀을 대항해 싸운다 말이오. 이  말씀을 이래서는 안 그렇다고 자꾸 변명해 가지고 사람을 돌아다니면서. 그  하나님 말씀은 이렇게 하라 하는데 돌아다니면서 사람에게 꾀우고 거짓말 해  가지고 자꾸 이렇다고 사람을 유혹시키면 그 사람은 지금 뭐? 제가 그 옳은 것을  자꾸 반대해서 사람들에게 반대해서 가르치고 옳은 것을 반대해 갖고 자꾸 이제  운동하고 돌아다니는 그 사람의 운동은 뭣을 하고 있는 사람이지요? 뭣하고 있는  사람이지요? 자. 그걸 정말로 지금 몰라서 대답을 안 합니까, 다 대답할 터인데  내가 뭐 쌜쪽스럽게 대답할 거 있나, 그래 대답 안 합니까? 그래도 혼자 대답을  해 봐요. 그렇게 상대방이 옳은 것을 말하면서 이래라 이래라 이렇게 말하는데  나는 그것을 자꾸 반대해서 합니다. 나는 그 반대 운동하고 있습니다. 반대  운동. 강단에서 만일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강단에서 사람을 바로 옳게 가르치고  있는데 이제 그 뒷구멍에 앉아 가지고 그 들은 말씀을 '네가 그러니까 그대로  복종하라. 복종하라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제 말하는 것이 있고, 그렇지 안하고  그래 말하는 것을 뭐 그 말 듣지 마라, 듣지 마라 이래 가지고 그 말을 듣되 다  듣지 마라. 백 프로 듣지 마라. 들을 거는 듣고 안 들을 거는 안 듣고.' 이제  어떤 그런 목사가 와 가지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 말 들어 가지고 한 삼사 년  죽었고 그 죽은 것이 지금까지 그 영향이 있다 그말이오. 지금 그것을 깊이 깨야  돼요.

 '백목사님이 이렇게 저렇게 설교를 하지만 다 들을 게 아니라 들을 거는 듣고  안 들을 거는 안 들어야 된다 하면서 자기 말을 또 이렇게 이렇게 하면서 이래  가지고, 그러면 옳은 것을, 예를 들어 백목사가 말 한 것이 틀렸는데 더 옳은  것을 말했으면 하나님을 그 사람이 만나 가지 그 같이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하는 옳은 것을 이제 그거 틀렸다. 들을 거는 듣고 안 들을 거는  듣지 말아라. 요렇게 말하며 딴것을 말을 해서 틀리 걸 말했다면 그 틀린 걸  가지고 옳은 것을 대항하는 그 대항이 그 사람이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입니까?  속으로 대답해 봐요. 속으로, 내가 바로 말할 터이니까 아, 내 답이 맞나 안  맞나 한 번 그 속으로 답을 하고 지금 답을 기다리면 내가 말할 터이니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전지 전능의 하나님하고 싸우는 거라. 하나님하고  싸우는 사람이오 하나님하고 싸우는 사람이니까 하나님하고 싸워서 하나님을  이길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 그말이오.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하고  싸우는 것이라, 그렇게 자기는 속으로 답을 했던 사람들은 손 한번 들어봅시다.

여게는 거의 속으로 대답을 다 했네. 속으로 대답을 해 보라 그거요. 답을 한번  해 보지요. 그러면 가만히 멍청히 앉았는 게 아니라 아, 답을 한번 해 보라  했으니까 요거다 요랬는데, 아, 목사님이 그 답을 요거다 했는데 내가 그렇게 답  안 가진 게 틀렸으면 나는 그게 틀렸으니까 모든 생활이 다 틀릴 사람이라. 모든  생활이 다 틀릴 사람이라. 그러면 언제 구원을 이루겠습니까? 손을 안 든 사람은  참 답답하다 그거요.

 또 한번 이제 그놈은 죽여야 되는데 그거 자꾸 그놈을 죽여야 그 옛 사람  그놈이 자꾸 와 가지고 장난하기 때문에 부작용이 일어나는 거라. 내 가 답한  답과 자기가 생각한 답이 맞지 안한 사람 손들어 봐요, 정직하게 아, 창피하게  들어야 살지. 마귀 그놈이 나가 버리지, 또 그러면 거게 대해서 답이 뭐인지  몰라서 이게 답이다 이거다 이렇게 확실히 자기가 답을 만들지 못한 사람 손들어  봐요. 그러면 이게 아니고 저거고 저게 아니면 이거고친 그럴 건데. '하거나  말거나 나는 상관 었으니까 뭐 거기 따라서 그렇다고 저렇다고 할 게 아니라  거게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해서. 생각 할 필요가 없다 해서 생각해 보지를  안한 사람 손들어 봐요. 순 거짓말쟁이. 그라면 안 돼요. 내가 그라면 그 답을  해 보십시오 했으니까 그말을 무시했든지 그리 안하면 나는 그 답을 모른다  했든지 그리 안 하면 자기 가 답을 했는데 틀렸든지, 답을 했는데 그게 맞았든지  이 가운데 다 들어 야 되지 여게 한 군데도 안 든다는 그거는 무슨 사람입니까?  거짓말하는 사람이라 말이오. '하거나 말거나 거게 대해서 뭐 상관할 것 없이  내가 챙기고 상관할 게 뭐 있겠느냐?' 그 사람이 돼도 됐지 그 사람 안된 사람은  없다 그거요. 그런데 왜 손 안듭니까? 그런 것을 밝히기 위해서 자꾸 손을  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자꾸 노력을 해야 되는데, 교역자들도 말이오. 교역자들도  자기가 뭣을 어떤 교역자가 말을 떡 하면 아니라고 반대를 했다 말이요. 반대를  했는데 그 뒤에 보니까 그 말이 맞고. 내가 반대한 말이 틀렸으면 옳은 말한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과 함께 했는데, 내가 그 반대한 것은 하나님을  반대했으니까 내가 막바로 마귀 아닙니까? 이걸 느끼지 못해. 틀렸으면 틀린 걸  '아이구 나는 그랬는데 나는 이랬으니까 틀렸습니다.' 이래야 마귀하고 이별하고  마귀 고놈을 쫓아내면 되는 건데 그걸 그러지 안하고 그때 틀렸다고 하면 안되기  때문에 슬그머니 덮어놓고 그만 슬슬 가루어 다른 사람이 아무것이 틀렸다 하는  그런 것을 불거지면 듣기 싫고 불거지지 안하고 그만 그것을 묻어 놓으면 좋겠다  하는 그게 마귀 그놈을 숨겨 묻어 놓는 것이기 때문에 자꾸 자멸하는 거 아니냐  말이오. 그런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교인들도 그래요.

 신앙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말한 거, 사람하고 대화해서  말한 것이야 의례히 그말이 맞나 내 말이 맞나 그것을 뒤에 상대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내가 무슨 말하고 다른 사람과 관계없는 일도 말했든지 내가  행동했든지 하면 그것이 나타납니까 안 나타납니까? 어째요? 자기가 생각했든지  말을 했다든지 행동했다든지 한 그것이 옳다 틀렸다 하는 것이 나타납니까 안  나타납니까? 현재 한 거는 미래를 두고 했지만 미래라 하는 것은 그것의 진가를  나타내는 것이 미래기 때문에 미래가 닥치면 그게 틀렸다 옳다 하는 것이 환하게  드러나지 안합니까? 드러나니까 '아이고 내가 이와 같이 지금 내 비판이  삐뚤어지고 실수 많이 하는구나. 평가가 삐뚤어지고 실수 많이 하는구나. 아,  사람을 지도했는데 이렇게 지도했는데 뒤에 두고 보니까 그게 틀렸구나. 이러니  내가 사람 지도가 이러니 사람 지도할 힘이 없다.' 그러니까 이래 하는 사람은  사람 지도를 벌로 할라고 하지 않는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아는 건  지도하고 다른 모르는 거는 지도 안 할라고 합니다.

 지도할라 할 때에 묻습니다. '네가 이게 다냐?' 그 사람이 말하기를 십분지  구는 말하고 십분지 일은 말하지 안했으면 십분지 구만 듣고 알고 십분지 구에  대해서 정확하고 옳고 바른 것을 지도했다고 하면 그 지도는 맞겠습니까  틀리겠습니까? 그 말은, 그 지도는 틀립니까 옳겠습니까? 왜? 왜 틀려? 십분의  일은 그 사람이 말하지 안하니까 십분지 일은 몰랐지만 십분지 구를 알았으니까  그 십분지 구를 알고 그 사람을 이제 지도를 해서 거게 대해서 바로 지도를  했습니다. 바로 지도를 했으면 은 그 지도는 틀린 지도가 되겠습니다. 왜? 그  지도가 맞아도 십분지 구 만 맞았지 십분지 십이다 맞지는 안 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딱 들어맞아야 되지 비슷하게 된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기에 사람의 지도라 하는 것을 벌로 하지 못하니까 간단하게  이렇고 저렇고 하지만 그저 반드시 지도할 때에는 그렇다면 그거뿐이라면 이렇고  저렇지만 그 속을 모르거든, 사람들 말하는 거 보면 속에 이중 삼중이라. 속에는  이만한 산꺼불도, 이런 쓰레기를 꽉 거석해 놓고도 썩 덮어 놓고 이래 가지고  '이렇습니다.' 이렇게 말하기 때문에 그말 듣고 했다가는 낱낱이 나중에 가서는  그 사람이 나에게 이렇다고 나에게 알려 준 것이 그게 틀렸지만 지도 틀렸다  한다 그거요.

 그렇기 때문에, 그 지도를 다 모든 걸 생각하고, 어떤 사람 말하기를 한 시간  내내 와 가지고 이렇고 저렇고 주 지껄이니까 그래 나중에. 눈감 그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말하기를 '양심을 쓰십시오' 하는 고말 한 마디로 그친다고. 그러면 양심  쓰면 자기가 알 수 있기 때문에, 양심은. 신앙 양심은 알 수 있으니까 '양심을  쓰십시오., 그 말 외에 딴 말은 하지를 안한 다고. 그 목사가 서울 있는데  우리가 여기서 안수한 목사입니다. 그 목사 가 이름이 뭐 이지? 뭐 이지?  ○○○목사님 몰라? ○○○이지? ○○○목사가 그렇게 하고 있어요.

 우리는 용기가 없어서 만나면 그 사람에게 위로해 줄라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이러면 이렇고 저러면 저렇고 자꾸 인제. 옳은 지도는 안 되는 줄 알지만, 그  사람이 다 말하지 안하고 껍데기만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서 자꾸 이렇게 저렇게 말하지만 실은 그 사람을 좋게 할라고, 그 사람을  사람 잃어 버리지 안할라고 하는 말이지만 서도 그것은 다 좋게 평가하면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똑 올바로 평가하면 그 사람에게  올바른 말로 하지 안하고 그래 하는 것은 사람에게 아부한다고 할 수도 있고  간교한 말 한다고 할 수가 있고 나쁘게 말한다면 그렇고. 좋게 평한다면 그저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와 같이 한다 그렇게 평할 수 있다 말이오.

 ○○○목사님은 거게 대해서 아주 담대히 해서 한 시간 내내 가서 묻는다면,  이렇고 이렇고 얘기하면. 다 하면 '이제 말 다 했습니까? '예. 다 했습니다.'  하도 이래 대화를. 뭐 주고 받아야 되는데 자꾸 암말 도 안하고 듣고 이라니까  있다가는 다 하면 '이제 할말 다 했습니까? ' '예, 다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제 말한다 말이오. 그저 '양심을 쓰십시오, 양심을 쓰십시오.' 고말 한 마디면  그만 다 돼 버려요. 그 답안이 참 아주 냉정스러운거 같지만 뒤에 심판을 보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리저리 말하는 것은 뒤에 구원했다는 그 구원면에 그 네가  나보다 더 잘 안다.' 요 말 하는 것이 더 옳기는 옳지만 부득이 그라면 화목이  안 되고 그 사람을 잃어 버리게 되기 때문에 사람을 뭐 잃어 버리지 안해야,  놓지 안해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에 우선 놓지 않기 위해서 하는 그 방편으로  하는 것이지 실은 그사람의 지도라는 것이 그렇고, 또 뚜렷이 나타나는 것도  있고,  그러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는. 우리가 자꾸 뭣을 시험을 해 가지고 내 생활이  어떤가?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 '자기가 믿음에 있는지 없는 지 스스로 시험을  해 가지고 확증을 하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슨 말을 할 때, 판단할 때도  판단해 놓으면 그 판단이 옳은가 그른가 자기가 지금은 모르지만, 지금은 미래에  두고 있기 때문에 모르지만 미래가 현재되고 현재가 과거가 되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판단을 해 놓고 '판단이 어찌 되나? ' 이래 보고  나중에 보면 '아, 내 판단이 틀렸구나.' 이렇게 자꾸 자기를 염려해 가지고  과거를 책임지고 이래 고쳐 나가야 되지, 어쩌든지 틀린 것도 고칠라고 하지  안하고 틀린 것도 다른 사람이 틀린 걸 말하면 '이거 수치스러우니까 다른  사람이틀린 걸 말 안 하면 좋겠다 그만 그게 못 나오도록 하고 그만 그런 걸  쉬쉬 쉬쉬 이래 덮어 가루려 하니까 그게 귀신을 속에다 심는 것이라. 귀신을  심어 가지고 자꾸 귀신될라 하는 것이라. 그렇게 말하면 사람이 알 수 있을텐데  제가 열 번 말한 게 열 번 다 틀려도 그게 또 입을 벌리고 뭘 떠들어 쌓고  있습니다. 그게 귀신이 하는 거라. 사람이 하는 게 아니고.

 그러므로, 깨어 삽시다. 이 말씀은 곧 전지 전능의 하나님이 말씀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말씀하고 동행하면 하나님과 동행하고 전지 전능과 동행하는  것이요, 이 말씀과 동행하고 안심이 되지 못하니까 더 정확한 더 가깝게 주님을  만나 가지고 동행할라고 하는 것이 영감을 찾아서 헤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내 양심에 자책할 거는 없다' 그말은 자기가 아는 대로는  성경대로 꼭 들어 맞았지만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그분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이  아니면 안 돼. 그러기 때문에 영감이 아니면 안돼.

 그래서 고린도전서 7장에 말씀해 놓은 걸 보면 이것은 내 뜻으로 말 한다.

이것은 주께서 명하신 말씀이다. 그렇게 옳은 말을 하고도 영감의 협조를 받기  전에는 요것은 나도 그저, 성신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요거는 내  생각으로는 요게 옳다 싶어서 요거 내 뜻으로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명령으로  말하는 거는 아니다 이렇게 구별을 지웠습니다. 요렇게 구별을 지워서 자기 단독  말인지, 성경 말씀과 일치된 말인지, 성경 말씀과 일치된 말씀이나 영감과  동행하는 말씀인지, 영감 동행을 두고 저는 성경 말씀만 동행하고 말았는지 그걸  바울은 구별해서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믿음의 생활이라 하는 거는 철저하고  세밀하지 않으면 다 이거는 먹통이 되고 만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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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8 처음사랑을 7가지에서 찾으라/ 요한계시록 2장 1절-7절/ 1987. 9. 28. 월새벽 선지자 2015.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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