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랑과 그 역사

 

1982. 4. 16. 금야

 

본문 : 요일 4:7-21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예배 마치고 30분 기도 후에 남반은 1층 신관 여반은 구관에서 철야 기도회가  있사오니 많이 참석 바랍니다.

 둘째, 대구집회에 대해서 모든 면으로 준비를 갖추시기를 부탁합니다.

 셋째, 본 교회 건축연보와 양성원 건축연보와 같이 합니다. 연보에 대해서는  생각지 말고 집회 후에 연보할 터이니까 연보에 대해서 하나님이 내게 대한  명령의 액수가 얼마인지 그것만 알려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지나친  연보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미달의 연보도 기뻐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뜻에 명중된 그것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또 내일 새벽기도회 마치고 권찰회 모일 때에는 제직회를 한꺼번에 모입니다.

장로님들 집사님들도 다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특별히 사정상 참석하지  못할 그런 분은 참석 안 해도 됩니다.

 용건은 앞으로 증축을 하는데 있어 세 가지 설이 있습니다. 이렇게 증축하자  저렇게 증축하자 하는 그 증축에 대해서 이 앞에 저 모떼기 거기에 연평 한  300평을 건축하자 하는 설도 있고, 또 저쪽에 삼층집 옆에 거기에다가 한 250평  건축하자 하는 그런 설도 있고, 또 지금 현재 주일학교로 말하면 이 배나 있어야  정상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그런 형편인데 여름이 닥쳐오면 지금 대단히 곤란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남쪽으로 여기 공간과 같은 예배당을 하나 지을 수 있는  면적이 있으니까 거기다가 짓는 것이 좋다 그런 말도 있습니다. 건축비는 별  차이가 없고 이것은 이리 건축하면 600평이 건축이 됩니다.

 앞으로 서부교회는 거기에다가 집을 지으면 다시는 예배당 넓히는 것은 저  솜공장이나 사 가지고 넓힐까 달리 넓힐 수 없는데, 또 솜공장은 본인들이 팔지  않는 것을 우리가 욕심을 내고 생각을 가지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남의  집이기 때문에 우리 자유로 할 수 없고 우리는 앞으로 증축하려면 이리 증축하는  것은 저기에 지으면 못 짓고 또 이리 증축하면 남의 집이 되어 나서 못 짓고  이래서 내일 아침에 어떤 것을 결정해야 되느냐 하는 그 문제 때문에 제직회를  모이는 것이니까 다 참석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또 교학실장 부탁입니다. 예배 후 30분 기도하고 4층에서 대구집회를 위한  모임이 있사오니 교역자들과 장로님들은 빠짐없이 참석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했습니다. 집회에 대한 의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찬송 한 절만 합시다. 새찬송가 30장 1절)

 사랑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첫째 아담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온 사랑과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사랑이 있습니다. 첫 아담으로 통하여 온  사랑의 발원은 타락한 마귀가 그 근거이요 둘째 아담으로 통하여 온 사랑은 그  근원이 자존자 하나님이십니다.

 첫 사랑은 죽은 사랑이요 죽이는 사랑이요, 둘째 사랑은 산 사랑이요 살리는  사랑입니다. 첫째 사랑은 마귀와 피조물들이 타락한 피조물들이 가졌고 둘째  사랑은 하나님만이 가지신 사랑입니다. 왜 이 사랑은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는가.

이는 사랑의 능력이 완전이어야 하고 영원이어야 하고 불변이어야 하고 전지  전능이어야 하고 단일성이어야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모두 피조물은 이 사랑의  실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 혼자만이 가지신 사랑인데 하나님의 본성이십니다. 하나님의  본성인 이 사랑이 하나님의 여러 속성으로 나타났으나 하나님의 본성인 이  사랑이 상대방을 대함에 따라 다른 속성으로 나타나셨고 또 하나님께서  경영하심에 따라 다른 속성으로 나타났으나 그 속성들의 근원은 사랑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모든 속성은 하나님의 사랑인 그 단일 속성에서 단일  본성에서 나타난 모든 속성들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한일서 4장 16절 중간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요한일서 4장 7절 하반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안다"고 했습니다. 이 사랑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에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이 세례는 회개의  세례인데 예수님은 회개의 세례를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택한 자들이 과거 현재  미래에 범한 죄, 범할 죄, 모든 죄를 예수님이 대신 책임지시고 회개의 세례를  대신 받으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마태복음 17장 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대속하실 것을 의논하시고 결정지으신 것을 선포하실 때에  제자들은 헛된 데 소망을 가지고 장막 셋을 지어 모세와 엘리야와 주님 이 세  분을 모시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할 때에 하늘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는 모세는 율법의 책임자로, 엘리야는 선지자의 책임자로, 모든 율법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  노릇 하는 이 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니 너희들은 저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9절에 보면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범죄로 타락한 인간에게 화평의  법은 하나밖에 없으니 주는 것과 손해보는 이 길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다 하나님의 본성을 소개하는 것이오. 하나님의 친아들,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아들, 아들은 본성이 이러하고 생애가 이러하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셋째로 요한일서 4장 10절에 보면 "사랑은 여기 있다" 말씀했습니다. 이는  그때에도 첫째 아담의 사랑이 세계를 점령하고 모든 사람들이 이 사랑의 갈급을  가지고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다 사랑 같은, 사랑이 아닌 미움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 다만 사랑은 하나님만이 가지신 하나님의 사랑만이  참 사랑인데, 참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하나님이 원수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대속의 제물로 보내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첫째 아담의 사랑은 배신하는 사랑이요, 배은하는 사랑이요,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모든 것으로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좋게 하려는 이 사랑이니 이것은  사랑의 껍질을 가졌으나 실은 죽이는 미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와 정반대로 원수를 사랑하므로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서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베푸시고 다시 신인양성일위로 부활하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니, 하나님의 모든 소유와 당신의 자신을 원수를 구원하여 복되게 하기  위해서, 유익 되게 하기 위해서 다 제물로 주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넷째로 요한일서 4장 18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와서 이루어짐에  따라 차차 두려움이 없어지고 이 사랑이 온전히 이루면 두려움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만치 두려움은 내어쫓기고 기쁨과 만족과 쾌락이  생겨지는 것을 가리켜서 요한복음 15장 9절로 15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내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한 것 같이 너희들도 내 계명을 지켜 내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이 되어 충만케 하려 함이라 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니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섯째로 마태복음 28장 18절로 20절까지에 보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너희들이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들에게 분부한 말을 그들에게 말해서  지키게 하라. 세상 끝날까지 나는 너희와 함께 하겠다. 이 모든 것 받아 가지고  아버지가 이 모든 것을 가지시고 내가 사랑을 행할 때에 나와 함께 하시고 그  모든 것을 사랑 성공할 때에 다 내게 준 것 같이 나도 이 모든 것을 내가 받아  가졌으니 너희들이 사랑을 행할 때에 내가 이것을 주겠고 사랑의 온전함을 이룰  때에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다 주겠다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말씀하시기를 "나와 내 복음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손해본 자는  그 백 배를 내가 갚아 주겠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또 마태복음 10장  42절에는 보면 "이 복음을 위하여 수고한 것은 냉수 한 그릇의 수고라고 결단코  상을 잃지 않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섯째로 요한일서 5장 4절에 보면 세상을 이긴 이김은 우리의 믿음이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우리의 믿음이라 믿음은 하나님을 따라  행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을 우리에게 보냈고 그 사랑은 우리에게 사랑의 역사를  하셨으니 그 사랑의 역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믿음이니, 세상을 이긴 이김은  우리의 믿음이라 말씀은 세상을 이긴 이김은 우리에게 온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받아 주께서 나에게 한 것과 같이 형제들에게 이 사랑을 전하여 사랑할  때에 이 사랑이 세상을 이긴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종합적으로 간추려서 말하겠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가 부활주일로 일반적으로 지켰습니다. 주일은 물론 다  부활주일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한 은혜의 실상을  이루어 주시는 날이 주일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인하여 부활하시게 된, 부활의 전제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세상 정권자들이나 바리새교인들이나  제사장들이나 서기관 모든 병정들이 세상에 있는 권력이 예수님을 죽이신 것,  예수님을 죽인 것 아닙니다. 이 권력에게 예수님이 죽음 당한 것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취하신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께서 택자들을 위하여 타락을 예정하시고 이 일을  성취하신 데에서 예수님이 대형 대행 대화친의 이 죽음을 죽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피조물로 인하여 주님이 능력 모자라 당함이 아니고  하나님이 자취하신 죽음이시니 자취하신 까닭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뭐 때문에 꼭 죽어야 하는 그런 사랑을 가졌을까.

 이는 택자들을 하나님처럼 온전한 자를 만드시는 데에는 먼저 지식이요 그  다음에 행함인데, 하나님을 거역한 이 지식을 모르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이  지식만 알게 되면 일방적 지식으로 거역의 그 결과가 어떻다는 것을  피조물로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거역으로 인간에게는 사망이라는  이 사망이 왔습니다. 이 사망의 지식을 택자들에게 알리시기 위함이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알리시기 위한 이 알리는 학비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셈입니다.

 이리하여 첫째 아담으로 하나님을 거슬린 그 값이 영영히 어떠하다는 것을  택자들에게 영원히 보여 주고 증거하고 알리는 것이 유황불 구렁텅이요 영원한  지옥입니다. 또 하나님에게 순종이 어떠하다는 것이 첫째로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는 승리요, 다음은 이 승리로 인하여 모든 구속받은  자들이 순종으로 말미암아 얻어진 실상인 하늘나라의 충만한 영광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타락을 예정하시므로 거역에 대한 결과의 그 지식을 우리에게 알게  하셨고, 거역으로 영원한 정죄, 영원한 주관, 자율, 영원한 원수로 그 결과 맺어진  이 타락으로 생겨진 것을 하나님의 사랑이 그대로 둘 수 없어 이를 대속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피조물 되어 신인양성일위로 오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우리를 위하여 주심이 된 것이고, 모든 부요와  영광과 생명을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대형, 영원한 대행, 영원한 대화친을 위하여  당신의 전부를 이 대속의 제물로 내놓게 된 것입니다. 이는 타락을 하나님이  정하신 때문에 하나님의 전부가 희생되지 않으면, 전부를 택자들에게 빠짐없이 다  주지 않으면 안 되게 되는 이 방편을 취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전부를 주실 이유가 뭐 있느냐. 안 줘도 할 수 있을  터인데, 전능하신 분이 왜 다 주어야 하는가. 이는 하나님의 지공법과 지성법이  이미 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 법의 세력으로 하나님의 전부를 다 주지 않고는  이 타락에서 구출할 수 없고, 다 주지 않고는 온전함을 이룰 수 없는 이 양면의,  하나님이 하나님의 전부를 다 주어야 하는 타락에서 구출하시는 일, 하나님같이  온전하게 이루는 이 구속 성장에 관할 일. 이 두 일을 하는 데에는 하나님의  전부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주지 않으면 이 일이 될 수 없는 지공 지성법에 뽈끈  붙들려 매여서 이렇게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일을 모르시고 경영하다 보니까 이런 일이 생겨진 것이  아닙니다. 타락에서 건져내는 것, 건져낸 것을 하나님 앞에서 온전케 하는 것, 이  두 가지 구속을 이루는 데에는 신인양성일위의 전부를 다 기울여 주지 않으면 안  되도록, 하나님의 모든 것과 하나님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 위해서 주지 않으면  이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도록 된 이것이 타락 예정으로 말미암아 두 건이  생겨졌고 이 두 건이 하나님의 본체 외에 모든 것은 다 주지 않으면 이 일이  성취될 수 없는 강한 세력이 심판하고 있기 때문에 다 주게 되는 이 일이 결정이  된 것입니다.

 대단히 좀 어려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처럼 온전한 자를 만드실려고  하시는 이 일을 경영하시는 그 순서에 타락 순서를 먼저 두신 것은 이는  하나님의 전부를 다 주지 아니하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도록 만든 일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지공법과 지성법을 당신이 아시고 으레 이렇게  결과가 되어지는, 이 지공법 지성법을 아시면서 타락을 예정하신 것이니 하나님이  지극한 그 사랑의 본능에서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그 사랑이 여기에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났으니 곧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냈다" 그말은 타락과  대속과 또 십자가의 구속 이 양면 대속의 이 구속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과 당신의 모든 것을 택자를 위해서 전부를 다  안 주고는 안 되는, 조그마치라도 남겨 놓으면 안 되는, 다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이 길을 택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이요 본성이십니다. 이것을 자취하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이요 본성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순전히 당신의 사랑이 이렇게 하신 것이지 어떤  피조물들에게 억압을 당해서 한 것 아닙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하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의 그 본질과 본성과 그 역사를  소개하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이 대속 하시는 일을 영원 전 경영하시는  그 경영에 타락을 예정하신 것이 우리를 하나님처럼 온전한 자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사랑하므로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주지 아니할 수 없는 길을 택하여 이  길을 택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소원이요 본질이요 본성이십니다.

 그러기에 도성인신으로 오신 것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도, 다시 창조주와  피조물과 일위로써 부활하신 것도 이도 아버지가 원하시고 원하시는 일이요  예수님도 원하시고 원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버지여 내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남은 영화를 다 돌릴 수 있도록  나로 하여금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사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옵소서. 이 말은 아들로 아버지를 만족케 하시고 아버지로 아들을 또한  만족케 하여주옵소서" 하는 간구입니다.

 아버지가 응답하시기를, "내가 이미 아들 너로 인하여 영화롭게 하고 또  영화롭게 하리라" 이 말을 하신 것은 십자가에 못박혀 대속하시는 일을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소원은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원수를 위하여 사랑하는 아들이  대속의 제물이 되어지는 그것을 아버지가 그렇게 소원했고, 예수님은 당신이  대속의 제물 되는 그것이 그렇게 소원이 되어서 "아버지의 아들로 대속의 제물  되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주옵소서 아버지가 아들에 대속의 제물이 되어  아들을 영화롭게 해 주옵소서" 이 소원이 전부가 택자를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다 투자 희생하시고 모든 것을 다 주기를, 모든 것을 다 주어 사랑의 대상을  온전케 복되게 하려는, 하나님처럼 온전케 하려는 이 소원을 가져 당신의 부요를,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주시는 이 소원을 가져 이 소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창조주가 피조물 되어 와서 이를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 대속 하기 위해서  사람되어 33년 사생활 공생활의 이 주는 것, 희생하는 것, 대속 하시는 이것을  시키신 아버지도 기뻐했고 만족했고 이 일을 하신 당신도 만족했고 기뻐했고,  남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이 일과 영원히 책임져 하나님의 모든 것을 주어  하나님처럼 온전하고 거룩한 자 되게 하시는 이 일 위해서 다 주시는 이 일에  이미 주신 것 입는 이것으로 아버지를 기쁘시게 했고, 또 아버지가 나에게 이  일을 맡겨서 내가 기쁨을 가졌으니 남은 부분을 또 성취해서 아들도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아버지로 아들을 기쁘게 하는 이 일을 하게 해주옵소서 하는 것을  십자가를 앞에 두고 요한복음 17장에 간구한 것입니다.

 죄는 엉뚱한 사람이 짓고 죄의 책임은 엉뚱하신 주님이 대신 책임지시고 회개의  세례를 받을 때에 아버지는 만족했습니다.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하는 자라. 이는 참 내 아들이라. 이는 내 아들이라. 소새끼는 꼭 소입니다.

소 새끼가 개 안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꼭 하나님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대속의 회개를 걸머지셨을 때에 아버지는 기뻐 만족했습니다. 십자가의 대속의 이  역사를 결정짓고 선포할 때에 또 아버지는 만족했습니다.

 아들이 죽을 때에 아들은 면제해 나오고 원수가 대신 죽으면 기뻐하고, 죄는  사랑하는 자가 지었는데 그 죄가 어떻게 어떻게 다른 데로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면, 야 다행이다, 참 운수 있다, 복 있다 할 터인데, 하나님은 죄는 다른  사람이 지은 것을 사랑하는 죄 없는 아들이 걸머졌을 때에 좋아서 만족하고, 죄  지어 영원한 형벌 받은 그 자의 형벌을 죄 없는 아들이 대신 형벌 받아 짊어지고,  죄 있는 자는 죄 없는 자로 구출해서 영생하게 하니까 만족하시고, 이 일만 하려  해도 좋아하고 하니까 좋아하고, 아버지도 좋아하고, 억울하게 애매하게 죄는  다른 이가 짓고 형벌을 대신 받는 이 일 하니까 아버지도 좋아하고 대신 받는  아들도 좋아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타락을 예정하신 이 일을 대속하시는 데에는 영원한  멸망을 대속했기 때문에 무한을 붙입니다. 영원한 멸망을 대속했기 때문에 무한을  붙입니다. 하나님의 무한은 그 성질의 것이 아니고 인생이 영원한 멸망에서  영생으로 한 영생은 무한입니다. 제한된 피조물에게 있는 무한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타락을 예정하시고 십자가의 대속을 하시는 것은 무한한  손해요, 무한한 손해요, 무한한 고통이요, 무한한 희생이요, 무한한 손해로 엉뚱한  자에게 무한한 유익을 주고, 무한한 고통으로 엉뚱한 자에게 무한한 평강을 주고,  무한한 희생으로 엉뚱한 자에게 무한한 존귀의 존재를 가지게 하는 이 일을 왜  하나님이 이런 일을 자취했을까. 왜 이 일을 자취했을까.

 이 일을 당할 때에 왜 기뻐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떻게 나를 이렇게 이 대속의 제물로 나를 쓰십니까, 이 어쩐  일입니까 이렇게 기뻐했을까.

 이유는 이렇게 되기를, 엉뚱하게 억울하게 멸망자는 좋아지고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 완전자는 이렇게 희생이 되어지는 이것을 왜 기뻐하고 원하고 영광이라  하고 좋아서 만족해서 내 아들 잘났다, 내 아들 아들 노릇 잘한다, 이는 나의  사랑하며 나의 기뻐하는 자다, 이는 참 내 아들이다, 기뻐하는 자다, 내가 이제  너로 하여금 영광을 받았고 또 영광을 받을 것이다. 예, 받고 또 받으십시오.

 왜 이랬을까, 이는 이렇게 대속 해야 되는 타락과 구속의 목적의 정하신 이것이  이렇게 해 보고 고난 당하고 희생하는 이것을 무한히 원하셨기 때문에, 무한히  원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되니까 소원대로 되니까 좋아합니다.

 무한한 소원을, 이렇게 되기를 무한히 소원했기 때문에 이렇게 되니까 무한한  쾌락을 얻었습니다. 무한한 쾌락 얻었습니다. 무한한 만족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이 도성인신하신 것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가 또 신인양성일위로  부활하신 것은 당신에게는 무한한 만족이요 무한한 쾌락이요 무한한 소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무한한 소원에 무한한 고난 무한한 희생이, 무엇이 그것이  무한한 기쁨이 되고 무한한 소원이 됐고 무한한 소원이 됐고 무한한 쾌락이  됐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본성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은 사랑이십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성은 이렇게 안 하고는  견딜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소원은 이 대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만족은 다 주어 구원하는 것이 만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쾌락은 이렇게 하는 것이 유일한 쾌락이었습니다.

 그런고로 땅에 있는 인간의 사랑이 볼 때에는 예수님은 한없는 비참, 고통, 손해,  불쌍하고 가련하고 비참하지마는 이러기 때문에 땅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을  해석할 때에 이는 참 불행으로 대 실패자 중에 실패자인데, 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대속으로 최고 영원의 만족을 쾌락을  소원 성취를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이런고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오면 두려움은 차차 차차 쫓겨 나갑니다.

왜. 두려움은, 인간이 땅 위에 두려워하는 두려움은 지금보다 좀더 해가 될까  해서 두렵습니다. 해 됨의 두려움입니다. 해를 인하여 두려움이요, 고난에 대한  두려움이요, 고난에 대한 두려움이요, 없어지는 희생에 대한 두려움이오.

 이런데 왜 이 두려움이 차차 쫓겨 나갈까. 이것을 싫어하므로, 이것을 싫어  피하려 하므로 두려워졌던 것이 이것을 싫어하지 않고 원해지고 이것을 찾고  이것이 원해지니까, 이것이 소원되어지니까, 상대를 인하여 손해 가기를  싫어함으로 두려워하던 두려움이 상대를 인하여 손해보기를, 해되기를 원하니까  이 두려움은 차차 녹아지고 쫓겨 나가고,  상대를 인하여 자기가 고난 안 당하려고 함으로써 두려움이 생겨졌고 고난 안  당하려고 생겨진 그 두려움이 고난 당하기를 원하고 원하니까 이 두려움은  녹아지고, 상대로 인하여 상대를 희생시키고 자기는 희생하지 않으려고, 희생 안  되려고 함으로써 생겨진 이 두려움인데 희생되기를 원하고 원하니까 이 두려움은  녹아져서 없어지는 것이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 아직까지도 두려움이  있는 것은 사랑의 온전함을 이루지 못한 연고다. 사랑의 온전함을 이룬 자는  두려움이 없다. 두려움이 다 쫓겨가 버렸다. 이것이 기독자의 완성입니다.

기독자의 완성입니다.

 그러면 불교와 같이 자기에게 있는 것을, (경건하지 않고 말씀을 듣지 않고  이러니까 아이들하고 장난하고 또 소리나 뚜드리고 무슨 짓이야. 정신 차려.

여러분이 이 진리를 알아야 예수를 믿습니다, 바로. 잘못 들으면 안 돼. 몰라.

성경 가운데 수많은 난해절이 다 해결이 됩니다. 그렇게 알아 듣기가 쉬운 줄  아요.)  그러면 껍데기 말로, 자기 아닌 다른 이를 위해서 이타주의로 다른 것을 위해서  자기가 희생되어지고 손해 가고 절단 나고 없어지는 것이라. 이것이 기독교라.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는 다른 이종교와 비슷하게 역연 이타주의요 무아주의라  이렇게 철학들이 와 가지고 사람을 미혹을 시킵니다. 무아주의 아닙니다.

이타주의 아닙니다. 이중입니다.  이타주의 속에 이기주의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껍데기로는 내가 이를 것이 어떤 것을 이를 것이냐. 사랑 안에 온전함을 이루어  두려움이 없어지기까지 되어야 합니다.

 두려움은 무슨 두려움인데. 자기가 가난해지지 않는, 보다 점점 부요해지는  것인데, 보다, 현재보다 손해 안 보려고, 현재보다 작아지지 않으려고, 낮아지지  않으려고, 천해지지 않으려고, 가난해지지 않으려고, 현재보다 더 고생하지  않으려고, 현재보다 없어지지 아니하려고, 현재보다 더 커지고 현재보다 더  평안해지고 현재보다 더 부요해지고 하는 이 소원을 가졌기 때문에 이것이 안  되어지고 이것이 정반대로 적어지니 적어지려 할 때에는 사람들이 근심  고통합니다. 모든 사람의 근심 고통은 이것 때문입니다. 딴것 없어. 전부 이것  때문이라.

 이런데 이 고통이 없어지고 이 두려움이 없어지고 예수님의 기쁨과 평강  이것으로 충만해지는 것, 다시 말하면 상대방을 위하여 있는 대로 다 손해보고  있는 대로 다 고생 다 당해 버리고 다 희생하고 하는 이 자가 됨으로써의 주의  기쁨과 주의 담대로 온전함을 이루는 이것이 외부적이요,  내부는 이렇게 되면 있는 것 다 없앴으니까, 있는 것 다 없앴으니까 이제 없지.

평안 고난 다 당했으니까 평안 없지. 손해봤으니까 없어지고 다 예수님 따라  없어졌는데, 손해보니 다 없어졌고 고난 당하니 이제 다 죽어 버렸고 희생당하니  다 없어져 버렸고 이랬는데,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존하시고 창조주이신 완전자이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한  예수님에게, 이렇게 한 예수님에게 하늘의 것과 땅의 권세를 다 내게 주셨다,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다 예수님에게 주셨다.

 예수님 신인양성일위는 하나님에게 소속자입니다. 하나님에게 소속자가 하나님의  아들 노릇을 하니,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 생활을 하니 하나님의 모든 것을 그에게  다 주니까 이제는 유한한 하나의 일개의 피조물 된, 일개의 피조물 된 인성이 이  일을 하고 나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유업으로 상속을 주기를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다 주셨습니다.

 이러니까 예수님이 있는 것 아버지의 사랑의 그 아들의 성격으로, 그 본질과, 그  사랑의 본질과 본성으로 다 손해봤고 다 고난 당했고 다 희생당했고 아무 것도  없이, 아무 것도 없이 남은 것 먼지만 한 것도 남은 것이 없는 것인데, 다  드렸는데, 사랑으로 다 줬는데 이러고 나면 가난한 거지가 될 터인데 하나님의  모든 것을 그에게 다 줘서 이제는 피조물이 하나님의 소유를 다 받았습니다.

 또 하나님은 당신의 것을 다 주시고 이제는 거지가 되어 앉았는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완전자시며 불변자시기 때문에 당신의 것을 다 주시니, 완전자  불변자가, 시은자가 당신의 본성대로, 당신의 본성은 주는 것이요 당신의 본능은  창조요 당신의 생애는 시은인데, 주고 주고 하니까 하나님 자체는 완전자기  때문에, 불변자기 때문에 털끝도 감해지지 않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본체는 그대로 있고, 본체의 본능의 만족을, 본성의 만족을,  당신의 법칙의 만족을, 이렇게 당신은 하시니까 하나님에게는 만족으로, 하나님은  자체는 불변이지마는 자체로 인하여 하나 됐으면 그만치 큰데 열 됐으니까  그만치 크고 만 됐으니까 그만치 커서 하나님이 이렇게 본체는 불변이나 당신은  크게 확대되고 확대되고 확대되고 충만해져서 이렇게 충만하게 당신은  나타나지시니 당신이 커지는 법칙이요 당신이 성공하시는 법칙이오.

 그분에게 속한 피조물인 그에게 속한 자는 이 사랑의 본질 본성의 법칙으로  살고 보니 유한한 것, 동정녀 마리아에게 난 한 일개의 남아로서 난 그분이 이  사랑으로 살고 보니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다 당신의 것이기 때문에  억억억억억억만보다도 더 커졌습니다. 억억억억만보다 더 커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이요 본성입니다.

 내가 이기고 아버지의 보좌에 앉은 것처럼 네가 이기면, 무엇을 이겨. 사랑으로  살아라. 사랑으로 살아라. 이것이 이긴 것만치 너는 내 보좌에 함께 앉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앉은 거와 같다 이렇게 같이 앉게 해 주겠다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과 본성의 생의 법칙은  이긴 것, 있는 것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주는 것보다 원수를 사랑하므로 주는 것,  자기에게서 가까운 것보다 멀수록 이 사랑을 주는 강도가 강해지는 것, 다 주는  것, 자기에게 있는 것 다 주는 이것이 사랑의 본능이요 본성이요 법칙이라.

사랑이 만족하고 쾌락하고 소원하고 기뻐하는 것은 이것이라. 주는 것이라,  손해보는 것, 손해보는 것, 내가 손해 봄으로 그가 유익 되고, 내가 고난받음으로  그가 평안해지고, 내가 없어짐으로 그가 존재케 되어지는 이것이 사랑의 본능이요  본성이요 본분이요 법칙이라. 이대로 사는 이것이 사랑에는 소원이요 만족이요  쾌락이라.

 이것이 있는 것만치 세상은 이긴다, 이것이 있는 것만치 사망으로 인하여 있는  두려움은 서서히 쫓겨 나간다, 이것이 완전히 자기 안에 수립됐을 때에 두려움은  완전히 쫓겨 나가 버리고 없어진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리는 행복이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성공하는  성공이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리는 쾌락인 것입니다. 이것이 소원이요 행복이요  쾌락이요 만족이요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사는 것이니, 하나님의 아들 된 자의  본질 본성의 생애요,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는  것이라.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하는 자라. 내 모든 것을 그가  상속받을 상속이라.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사는 생애요,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모든 것을 유업으로 상속받는 부요요,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이 하시는  것이 당신의 본성의 만족이요 본능의 만족이요 당신의 본분의 만족이요 당신의  삶이라. 당신의 모든 본성 본질 속성의 만족을 이루는 것이라. 주는 것이 만족을  이루는 것이라.

 그러면 그분에게 텅 빌려고. 그분은 완전자요 불변자요 그분은 모든 것이  완전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나가야 되지 들어오지를 못 해. 나가기는 무한히 나가.

얼마든지 나가서 나갈수록 이 당신은 선전되고 당신은 커지고 당신은 충만해지지.

그분에게 나가는 데에 모자라지 않아 얼마든지 나가기를 영원히 원해. 영원히  나감으로써 당신은 본성의 만족이요 본분의 만족이요 본질의 만족이요 당신의  법칙의 성취라. 이것이 하나님의 생명의 도인 것입니다.

 이런고로 하나님의 사랑은 아주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제 다 해석이  되어 껍데기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와 자기의 전부를 주는 것이  하나님의 본성의 소원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소원이요, 줌으로 만족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소원이요, 다 줌으로 한없는 쾌락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쾌락이오.

 하나님의 사랑의 소원, 하나님의 사랑의 만족, 하나님의 사랑의 쾌락은 이것인데  이것은, 이것이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두려움이 없어. 두려움은 다 없어 두려움이  없어졌으면 이 사랑의 온전함을 입고 두려움이 염려가 있으면 아직까지도  온전함을 이루지 못했어. 이는 아직까지도 정죄받을 요소가 있는 것이야. 완전히  살아난 것이 아니라. 심판할 염려가 있어. 심판받을 요소가 있는 것이오. 이렇게  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외부적으로, 외부적으로 우리는 이런 생애를 가져야 할  우리들이오.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모든 것이 내것이 되어지는 것, 이러니까 하나  주고 열 얻고, 열 주고 만 얻고, 유한한 것 주고 무한한 것 얻고, 일시의 것 주고  이제 불변의 것 얻고, 사망의 것, 썩은 것, 약한 것, 욕된 것, 혈육의 것, 유한한  것 주고 살고 영광스럽고 강하고 영원한 것을 하나님에게 얻어 하나님의  상속권을 받는 이것이 내적이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완성인데, 이것이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이 되어지며,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이 되어지며 이 생애가  되어져서 참으로 주는 것이 소원과 기쁨과 만족이 될 수 있는 이런 사람이  되어질까, 하나님의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상속받는 자가 되어질까. 이것이  결론입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한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내 사랑  안에 거하라" 어떻게 하면 사랑 안에 거합니까.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들도 내 계명을 지키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사랑 안에 거하고 사랑의 사람이 되고 사랑의 생애가 이루어져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으로 충만케 되리라.

 그러면 그 계명은 뭐인데. 그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니라. 이러면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에게 와서 머무는 것이요,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주는  것이라. 하나님께 사랑 받아 사랑 주고 사랑 받아 사랑 주고 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라, 하나님의 계명.

 그러면 어떻게 주는데. 예수님께서 사랑을 받고 사랑을 줬어. 어떻게. 그분이  주는 것은 부요를 내어놓은 것이 주는 것이요, 그분이 모든 생애를 우리 위해서  한 것이 사랑을 주는 것이요, 다 우리 위해서 대속의 제물로 대형 대행 대화친을  위해서 다 희생해서 다 드린 것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라.

 그 성질, 그 방법, 그 종류대로 하나씩 둘씩, 처음에 많이는 안 되지마는 이것을  조금씩 조금씩 해 봐라. 해 보면 너희에게 이 사랑이 생겨질 것이고, 이 사랑이  생겨지면 이 소원이 생겨질 것이고, 이 기쁨이 생겨질 것이고, 이 손해가  생겨지고, 이 고난이 생겨지고, 이 희생이 생겨질 때에 너희에게는 그것이  소원이기 때문에 오히려 기뻐지고, 희생당하는 것이 기뻐지고, 손해 가는 것이  기뻐지고, 주는 것이 기뻐지고, 이렇게 되어지는 이것이 너희에게 이미 씨로 와서  심어져 있으니까 차차 차차 자라서 이것이 성장돼 나가리라 하는 것을 우리에게  방편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반사들이 이것을 조금씩 체험하기 쉽고 권찰들이 체험하기 쉽고  목회자가 체험하기 쉽고 이 복음 역사가들이 체험하기 쉽습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이라. 우리의 행복은 하나님의 사랑이라.

우리의 부요는 하나님의 사랑이라. 우리의 쾌락은 하나님의 사랑이라. 우리의  세상은 두려움이 없는 담대라. 기백이라.

 그런고로 우리가 껍데기로 담대함이 되어지느냐 안 되느냐 담대함이  담대해지느냐 안 지느냐. 담대해 가느냐 안 가느냐. 담대해지느냐 안 지느냐.

이것이 증거입니다. 알맹이가 되어지는 증거.

 그 안에는 그러면, 담대하면, 세상이 두려워하는 그 두려움이 기뻐지고  즐거워지느냐. 이것이 희생하는 이것이 기뻐지고 즐거워지느냐. 이것이 속에  사랑이 역사 하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것으로 내가 부요 해 지느냐 안 지느냐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상속받는 그 증표입니다. 외부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하나를 말하지 않고 여러분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여기에 저기에 많이 말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벙벙하이 잘 모를 것이나 그저 기억만 하고 하면 여러분들  속에 이 말씀과 함께 임한 성령이 여러분들을 가르쳐서 옳고 참되게 다스려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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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4 책망과 징계/ 요한계시록 3장 19절-22절/ 1983. 9. 8. 목새벽 선지자 2015.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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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2 처음 사랑/ 요한계시록 2장 1절-7절/ 1988. 4. 9. 토새벽 선지자 2015.12.29
841 처음 행위를 가지라/ 요한계시록 2장 1절-7절/ 1988. 4. 6. 수새벽 선지자 2015.12.29
840 처음 행위와 그 효력/ 요한계시록 2장 1절-7절/ 1988. 5. 30. 월새벽 선지자 2015.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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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8 처음사랑을 7가지에서 찾으라/ 요한계시록 2장 1절-7절/ 1987. 9. 28. 월새벽 선지자 2015.12.29
837 처음사랑-처음행위/ 요한계시록 2장 2절-5절/ 1987. 10. 5. 월새벽 선지자 2015.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