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행위를 가지라

 

1988. 4. 6. 수새벽

 

본문 : 요한계시록 2장 1절-7절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이 에베소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은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잘 아는 대로 별은 복음의 모든 은사 위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별이라 그렇게 상징했습니다.

 일곱이라는 것은 주의 수로 ‘일곱 교회’ 뭐 일곱을 많이 했는데 그거는  하나님의 하시는 그 수의 전부를 가리켜서 일곱이라 그렇게 늘 표시를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은사 위치에 있는 크고 작은 모든 사람들을 주님이 다 ‘오른손에  잡으시고’ 오른손에 잡으셨다 말은 당신이 승리하신 그 승리를 자본으로  가지고서 승리할 수 있는 그 붙잡음을 가리켜 말합니다.

 그 붙잡는 것이 뭐 되나 안 되나 그런 것이 아니고 이미 완전 승리를 하셔  가지고 그 완전 승리를 그것을 붙잡은 그 일곱별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에게 다 이렇게 나누어 주어서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하시기 때문에 이  역사는 승리에서 시작해서 승리의 결과를 맺을 수 있는 이런 관계로 붙잡은 것을  말합니다.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예수님을 참 믿는데는 그 믿는  믿음에 지극히 작은 자로 지극히 큰 자까지에 전부의 그 예수님의 대속을 가지고  이 생명을 받아서 세상에서 신앙 행위를 하는 그런 모든 사람을 다 총칭한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알 만한 그런 빛이 되지 못할지라도 그저  예수님을 자기의 구주로 똑똑히 몰라도 그저 예수 믿는다는 그것만 가져도  그만큼 그거는 세상에서 빛입니다.

 세상은 그런 것이 없는 완전 어두움인데 예수님의 구속에 대해서 조그마치라도  관련 있는 것은 다 그는 이 빛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은 그 구속의 은혜 역사가  그에게 미쳐 와서 거기에 피동돼 가지고서 조그만한 믿는 행위라도 생겨지게 된  것입니다.

 이래서,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위에는 일곱별을 잡고  이 승리하는, 죄와 사망과 마귀를 이기는 이 승리하는 능력을 가지고 당신이  붙들고 역사해서 그 역사가 순전히 그분이 붙들고 역사함으로 그분의 힘으로  인해서 이 별이 움직여진 것이지 그분와 힘이 아니고는 별이 움직여짐이 하나도  없고 순전히 그분의 붙잡은 힘으로서 움직여졌는데 그 움직여진 힘은 전부다  승리의 성격을 가진 움직임이라.

 또, 그래 가지고 그 힘으로 말미암아 크든지 작든지 세상에서, 예수님은  빛이신데, 예수님의 빛이신데 이 힘의 혜택과 영향을 입어가지고서 조그만한  그에게라도 조그만한 예수님의 이 생명의 요소가 전달돼서 가지고 있는 것은 다  그것은 일곱별 가운데 든 건데 이렇게 된 이것은 다 예수님이 그것을 관리하시고  보존하시고 또 일곱별을 통해서 그에게 역사해서 심으셨고 또 심은 것을 그것을  관리해서 아주 미약한 그 빛이나마 빛은 예수님이십니다 천하에 예수님은  구주시라 하는 이 하나를 믿으면 그거는 깜깜한 이 어두운 세상에서 어두움을  멸할 수 있는 큰 힘을 가진 것입니다.

 이래서, 그 모든 것을 관리하고 보존하고 이 섭리하셔서 있다. 그러면 일곱  금촛대가 보존되어 있는 것도 또 이 모든 하나님의 이 생명 능력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도 이루어지는 것도 전부가 다 주님이 능동이요 주님이 원인이요  주님으로 말미암아 피동되고 그 결과로서 전부가 다 이루어진 것이다 하는 것을  여기에 나타내서 ‘오른손에 일곱별을 불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하는 것은 주님이 이 두 가지 면을 에베소 교회는 강조했습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가 교회에서는 역사로서는 제일 중요한 것을 여기에 뜻하고  있습니다.

 그랬는데, 거기에 어제 아침에 증거한 거와 같이 행위가 여덟 가지 또 마지막에  한 가지 붙여서 아홉 가지의 그 온전한 행위를 했기 때문에 주님이 그것을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책망할 것이 있으니 처음 사랑을  버렸다. 그러므로 어데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떨어졌다.

 그러면, 떨어진 것은 주님과의 그 관계가 끊어진 것인데,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인데 그 관계의 연결은 훅인가? 사랑을 버렸기 때문에 관계가  끊어졌다, 주님과 완전히 절단이 됐다.

 그러면, 주님과 연결은 뭘로 연결됐는가? 주님의 사랑을 알고 믿는 것만치,  주님의 사랑을 아는 것만치 믿는 것만치 그에게 소망이 되어서 자체의 그 평강과  기쁨과 그에게 모든 그 생명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주님과 이 일곱  사자와 일곱 촛대와의 그 관계에 연결의 힘은 순전히 주님의 사랑을 알고 믿는  거기 있어서 연결이 됐고 또 연결된 이 생명이 활발하게든지 어쨌든지 역사하는  데는, 연결된 이 주님의 이 모든 은혜가 역사하는 데에는 ‘가지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라’ ‘가지는 것이라’  ‘네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 버렸다 하는 것은 이 사랑을 무슨 이런 물체  모양으로 그렇게 수족으로 손으로 들고 가지고 뭐 하는 게 아니고 이 사랑을  가지는 것은 사모하는 것입니다. 사모하고 또 이 사랑이 와가지고서 역사하는 그  능력에 결과의 표현은 기쁜 것이고 감사하는 것이고 또 평안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 사랑에 결과요, 또 그분과 나와의 연결은 이 사랑을 아는 것과 믿는 것과  생각하는 것, 그러면 생각하고 사모하는 것, 이것으로써 내가 그 사랑을  영접하는 것이 되고,  그러면, 이 순전히 주님의 이 여덟 가지 아홉 가지 이렇게 구속 일을 한 것도  그 시작할 때는 뭘로 시작했느냐 하면은 그 사랑을 내가 들어서, 등은 것이  그것이 복음이요 들어 가지고서 알고 내가 믿을 때에 곧 그것이 우리에게  연결돼서 생명이요 또 내가 생각하고 사모하고 이렇게 감격되는 그것이 그  사랑의 작용이요 역사라.

 그래서, 그 사랑의 능력이 우리에게 와 가지고서 역사하는 표시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평안이 오고 기쁨이 오고 그 사랑에 감격하는 감격되는 작용, 사모가  되고 감사가 되고 생각이 돼지고 하는 그것이 곧 우리 주관에서 나는 것이  아니고 객관에 피동돼 가지고서 생겨진건데 그것이 객관의 무슨 역사인가?  곧 하나님의 요소인, 신적 요소인 하나님의 요소인 그 사랑이 우리에게 왔을  해에 우리가 앎으로 받아들였고 믿음으로 내게 와 가지고 영접해서 내가  생각하고 사모하고 그 감격에 피동될 때에 이것이 곧 주님이 껍데기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그 하나님의 본성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일이 됐는데 그것이 일곱별을 붙잡았고 그것이 일곱 촛대  사이에 다니면서 관리해서 이렇게 한 것인데 처음에 시작은 그렇게 시작을  했지마는 하다 보니까 그만 마귀의 유혹을 받아가지고서 이 순전히 전부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아는데서 접선이 뵙고 믿는 데서 완전히  내주하게 됐고 또 사모하고 생각하고 감사와 기쁨의 그 발동으로 이 견디는  것이나 또 행위를 하는 것이나 수고하는 것이나 또 악한 자를 용납지 않는  것이나 그 힘이 우리속에 와 역사해 가지고서 이런 일을 하기 시작을 했는데, 이  아홉 가지 이 일을 하기를 시작을 했는데 하다가 악령이 우리를 유혹을  시켜가지고서 그만 가치관을 다시 세상의 가치관과 같은 가치관으로 유혹을 시켜  가지고서 바꿔 버렸습니다.

 차차 차차 바꿔지니까 주님의 그 사랑의 역사로 인해서 내게 와 가지고 그에  피동된 이 모든 역사로 시발됐는데, 생명이요 원인이요 연결인 그 사랑에는 그만  차차 가치를 두지 안하고 이제 주를 위한 행위, 주를 위하는 모든 수고, 견디는  거, 뭐 이런 성결하는 거 구별하는 거, 또 악한 자가 있으면 그것을 꼭 옳고  그른 걸 따져 가지고서 그것을 드러내서 밝히는 거,  이것이 주를 위해서 하는 이 모든 역사인데 이러다가 보니까 주님과 우리와의  연결이 끊어졌으니까 연결이 끊어지니 그 별의 하는 일은 곧 금촛대를 위해서  있는 것이요 금촛대의 뿌럭지요 금촛대의 곧 생명이요 금촛대의 이 원인이  되어지는 것인데 이것을 생각하고 하는 사모하고 믿고 하는 이거보다 그만  그분의 그 사랑의 능력이 와 가지고 우리에게 와서 작용을 해 가지고서 역사된  그 나타난 그 모든 행위 여기에다가 가치를 두고 이것만 귀한 줄 알고  여기에다가 가치를 두고 여기에다가, 주력을 하다 보니까 차차 차차 주님의  사랑을 잊어버린 그런 사람이 되어지기를,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다 건너편으로 가라고 할 때에 그때 나서 가지고서  배타고 노젓고 가는데 그 가게 된 동기도 예수님의 명령 순종이요, 또 가면서  기뻐 즐거워하는 것도 명령 순종이요 또 언덕에 도달할 그것도 주님이 명령했기  때문에 오병이어로 오천 명도 먹였으니까 그분의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다는 그  믿음 가지고 했는데 가다가 보니까 자기네들도 모르게 그만 배 젓고 하는 그리  마음이 기울어지자 풍랑이 일어지자 풍랑이 일어나니까 자꾸 마음은 더 그리  기울어지고 그만 주님과는 그 관계가 끊어지게 됨으로 못 간 그것을 우리에게 한  토막의 역사를 가지고서 형식으로 형식 그 기관을 가지고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가르쳐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와 꼭 같습니다.

 이래서, 에베소 교회도 이렇게 이라다 보니까 원인은 잊어버려 버렸고 그만 그  결과에다가만 가치를 둬 가지고서 거기에만 주력을 하다보니까 자꾸 주력을 하니  그 일이 자꾸 그 할일이 자꾸 생기고,  우리가 지금 이 공회서 뭐를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를 맡아 가지고서 이것을 잘  다스려서 해야 되겠다 해보면 거기에다가 가치를 두고서 주력을 하니까 자꾸  사건이 더 생겨지고 사건이 더 생겨지니까 자꾸 거기다가서 주력을 해서  기울이다가 보니까 완전히 주님과 나와의 연결된 이 사랑은 완전히 끊어져  버리고 이것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네가 회개치 안하면 네 촛대를 옮기겠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니까 그 나타난 결과가 촛대요 또 건설해 놓은 것이  촛대요 일해 놓은 모든 공적이 촛대인데 일해 놓은 게 이게 다 없어진다. 이거  옮기겠다 없어진다. 없어진다 말은 없어지니까 일곱별의 한 일이 없어진다,  일곱별의 능력이 없다. 일곱별의 능력이 없고 일곱별의 하는 그 결과도 없다.

능력도 없고 결과도 없다. 그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그러면, 일곱별을 잡았기 때문에 역사했고 촛대 사이에 다니시기 때문에 이게  일곱 촛대가 보존되고 자꾸 흥왕해 나가는 것인데 거기에 연결되는 그 연결이  끊어져 버렸으니까 연결이 끊어졌으니까 끊어진 그 결과는 먼저 맨 끄트머리인  촛대가 없어질 것이고 또 그 보다도 이제 고안에는 일곱별이 없어져 버릴 것이고  이래서 그 모든 것이 다 멸망될 수밖에 없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이리저리 치우치면 안 되는데, 일방적으로는 하기  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식한 사람이 말을 잘 합니다. 무식한 사람이 말을  잘하요. 또 일방적인 사람이 용기가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하기 때문에.

 그거는 이 예배당 이런 면적에다 만일 물을 한 치 깊이가 되도록 할라하면은  물이 상당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면 한 치 깊이 되면 까짓 거 물 얼마 안 돼  보이지마는 그 물을 만일 조그만한 면적에다가 한 그저 두루 한 자나 되는, 직경  한 자나 되는 그런 면적에다가 그 물을 쌓을라고 하면은 그 물이 아마 깊이가  수십 자 될 것입니다.

 그와같이 넓으면 그것이 적게 보이고 좁으면 많게 보이지마는 그게 다 치우쳐서  그리 되기 때문에 사람이 말을 하면서, 말을 하면서 자기 양심에 맞추어서  이렇게 양심에 맞도록 말할라 하면은 그것이 말을 잘 못 합니다. 또, 양심에  맞는 것보다도 이것이 영감에 맞도록 말을 해야 되겠다, 영감에 맞도록 말할라  하면은 그 말하는 사람은 말을 잘 할 수가 없는 짓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벙어리같이 말해도 그 결과에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자기  양심에도 맞지 않는 그 말은 전부 무책임한 말이요 또 그 결과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남을 보아서 자기가 깨달아야 된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말을 들을 때에 저 사람이 자기 양심과 동행하는 말이가, 영감과 동행하는  말이가, 저 말이 뒤에 결과가 이루어질 터아니까 이루어질 결과와 연결을 해  가지고서 하는 말이가, 뭐 이 시간 말뿐이지 다음이야어찌 됐든지 그런 거 다  생각지 안하고 하는 사람이가, 저 사람의 행위가 무슨 이 면을 보고 하는 것이냐  삼 면을 보고 하는 것이냐 사면을 보고 하는 것이냐 일 면만 보고 저 사람이  행동하는 것이냐?  일 면만 가지고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거기에 대한 구비 뭐  각각 종류대로 구비한 조건들이 있기 때문에 그 조건이 구비 돼야 일이 되는  것이지 그 중에 하나만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이,  이 의는 하나 가지고 전체가 의로워지는 건 아니지마는 죄는 하나 가지고서  전체가 더러워진다. 죄라. 말한 것은 하나가 삐뚤어졌으면 하나 삐뚤어지면 이제  하나 삐뚤어짐으로써 전체가 삐뚤어진다 하는 그것을 죄와 의의 그 맺어지는  영향이 아주 정반대요 다르다 하는 것을 그것을 가르친 것이 그런 뜻입니다.

 이래서, 일곱별도 일곱 금촛대도 이래 이 능력이, 또 이 역사가, 그 맺어지는  그 결과가, 그 모든 것이 보존되는 것이 전부 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시발됐고 또  존재하고 또 역사하고 이렇게 되어지는 것인데 그분과 연결이 뭐이냐? 그분과의  연결이 뭐이냐? 그분과의 연결은 이 사랑으로 연결된다. 그분의 사랑을 깨닫고  믿을 때에 그분의 사랑이 내주해서 역사하는 것이니 알 때 그분의 사랑을 보는  것이고 그분의 사랑을 믿을 때에 그분의 사랑을 내가 받아들여서 영접해서 내  안에 모시는 것이고 그분의 사랑을 생각하니까 감사하고 기쁘고 평안하고  담대하고 즐거운 그것이 뭐이냐? 그 능력이 와 가지고서 내주해서 역사하시는 그  역사의 표현이라. 그 사랑의 능력의 역사에 표현이라.

 그로 인해서 일곱별도 생겨졌고 또 보존되고 또 일곱 촛대도 생겨졌고 보존되고  이렇게 되는 것인데 이제 그것을 결과인 그것만 가치있게 보고서 이렇게 하다  보니까 그만 가치를 거기에 두니까 아무래도 이거 내가 거짓된 사도라 하되 아닌  이거 드러내는 것이 이게 중요하다, 그것도 중요하지요. 중요한데 그것을  생각하다 보니까 우리는 그만 그리 치우쳐 버리고 외나 근본인 이 생명인 이  사랑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가 이 주님 앞에 책망을 받았는데 그 일이 회복이 돼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낙원에 있는 생명 과실을 주어  먹게 한다. 그러면 이기는 자, 이것이 복구될 때에 성도의 낙원 생활은 된다,  낙원에는 거기에는 무슨 염려나 고통이나 뭐 심판이나 그런 벌 받을 것이나  사망이나 그런 것이 하나도 없는 그 낙원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서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에 머물러 가지고 있는 그  대기소를 낙원이라고 그렇게 가르쳤는데 그러면 낙원에 사는 것이 그분의 사랑을  아는 것과, 연구해서 아는 것과 믿는 것, 알고 믿을 때에 그 사랑이 내 속에  들어와서 역사할 때에 아무런 두려움이나 염려나 근심이나 고통이나 이런 게  없고 평안과 기쁨만이 있을 수 있는 낙원 생활 할 수가 있다.

 또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을 수 있다. 그러면 그 사랑의 연결로 인해서 사랑으로  인해서 내 속에 오게 되면 이 사랑으로 인하여서 생명 과실을 먹게 된다.

 생명 과실은 하나님, 절대자이신, 자존자이신, 주권자이신, 모든 것의  주재자이신 그분과 연결이 돼 가지고 맺는 결과를 가리켜서 생명 결과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과 연결이 돼 가지고 연결된 그 결과에 네가  ‘과일을 먹으리라’ 그 결과의 행위를 먹으리라. 그 결과의 모든 역사를  먹으리라. 그러면 그 결과가 모든 사람에게 주는 양식이 되고 물이 되고  그들에게 다 생명이 된다.

 이러기 때문에, 이 낙원 생활은 이것이 복구돼야 낙원 생활할 수 있다.

예수님이는지 또 그 사도들이든지 그분들이 어떤 그 환난 중에서도 그는 기쁘고  즐겁고 평안했고 담대했고 한 것은 그것은 뭐인가? 그것이 낙원 생활이라.

 그 낙원 생활 그 생활이 어떻게 해서 됐던가? 주님의 사랑을 알고 믿을 때에 그  사랑이 내 속에 들어와 가지고서 오니까 그의 사랑을 믿을때에, 마치,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 악어 새끼가 짐승 중에 제일 못쓰고 더럽고  추접하고 흉악한 것이 악어지마는 하나님이 주신 그 에미와 새끼 그 속에  하나님이 주신 그 사랑이 와서 역사할 때에 그는 아무 데보다도 그 악어 품이  제일 좋기 때문에 그 악어를 찾아가서 악어 속에 가서 있는 것이고 모든  맹수들도 그렇고,  미치괭이가 아이를 낳아 가지고, 저 그런 거 많이 봤습니다. 이거 뭐 옷도  가루지 못해서 아랫도리도 뭐 두더기 같은 거 가지고 이래 주 감아놓으니까 감긴  데는 감겨 다니지마는 사람들이 부끄럽다고 가루는데는 다 가루지도 못하고  내놓고 다 모든 사람들이 보면 찌글찌글 웃고 구경거리로 이렇게 해도 어째 그  속에 아이를 하나 낳았는데 그거는 그 품안에서 기쁘고 즐겁고 만족하고 뭐  그렇게 하는 그게 뭐이냐?  하나님이 고 기를 동안에 주시는 그 사랑이 와  가지고 그 역사해서 그런 것이라.

 이러기 때문에, 이분의 사랑의 역사가 오기 전에는 이렇게 죄악이 관영하고  거짓부리 가득 찬 이 참 불안 이 사망으로 관영한 이 세상 속에서 낙원 생활 할  수 없다. 그게 와서 있는 사람들은 다 어데서든지 낙원이다. 사형장에 가서도  낙원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사형을 받아 순교를 당해도 그는 낙원 속에서 한없이  기뻐서 한다.

 그는 주를 사랑함으로서 오히려 순교를 당하면서도 더 큰 순교와 더 모진  고문과 고형이 있으면 좋겠고 또 그 모든 형제를 생각할 때에 그 형제들에게  유익이 된다면 내 모든 피와 살을 점점이 뿌려서 그 위에 제물 위에, 너거 하는  그 제물 위에 뿌려 놓겠다 말씀 한 거와 같이 그렇게,  생명 과실을 먹게 된다. 주님과 연결된, 세상이 모르는 그 열매를 네가 먹게  된다, 그 열매가 양식이 된다,  그러면, 인격의 양식은 그것은 주님과의 연결된 피와 성령과 진리가 우리의  양식이요 또 우리가 행한 의의 행위 그게 양식입니다. 하나 자기가 의의 행위를  했을 때에 배가 부르고 기쁘고 즐겁고 힘이 나고 또 내 양식만 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그 심령의 양식도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만나면  그런 생각 가집니다. ‘오늘은 또 이거 좀 요리를 먹겠다’ 그 사람 만나니까,  그 사람 만나니까 말을 하는 것이라든지 자기가 가서 모두 다 만난 것이라든지  행동한 것이라든지 그런 것을 들을 때에 어떻게 그 맛이 있는지! 그 하는 것이  다 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그 아름다운 의로운 옳은 행위 이거 증 한거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을 듣고 할 때에 마음에 심령이 흐뭇해지는 것이 배가  부르고 힘이 납니다.

 힘이 나고 모든 피곤에서 곤해서 못 견디던 그건 것이 다 없어지고 위로와  기쁨과 평강이 되어지고 나도 그렇게 한 번 좀 살아봐야 되겠다 하는 그 의에  대한 힘이 나는 걸 우리가 많이 봅니다.

 이래서, ‘때를 따라 그 친구들에게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그자를 내가  와서 내게 있는 것을 다 그에게 맡기겠다.’ 그의 모든 언행심사 행동이 접하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양식이 되어진다면, 그에 믿는자에게 양식이 되어지고 모든  피조물들에게는 참으로 그들에게 축복이 되어져서 그 은혜가 되어져서 하나님의  것으로 그들에게 충만케 해주는 그런 충만이 되어지는 그 역사가 그자가 복의  기관이요 그를 하나님께서 영계와 물질계의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될 때에  모든 것을 그분에게 다 맡기게 된다, 있는 것을 다 그에게 맡긴다. 맡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돌아가서, 간단하게 말하나 자꾸 깊이 생각해서 ‘일곱별과  일곱 촛대를 오른손에 잡았다 그 사이에 다니신다’ 이랬는데 ‘처음 사랑을  버렸다’ 이러니까 ‘끊어 졌다’ 그러니까 끊어졌으니까 네가 지금 암만 그것만  보고 역사하지마는 끊어졌기 때문에 촛대도 없어지고 촛대가 없어지면 그거 별도  필요 없고 별도 없어진다. 촛대와 별이 없어진다.

 이걸 당시 재연결하면, 재연결하면 낙원 생활할 수 있다, 아무리 사망속에 원수  속에서라도 낙원 생활할 수 있다, 또 어떤 역경에 어데서라도 하나님과 연결된  그 결실을 맺을 수 있고 그 결실을 맺어서 네 자신에게 양식이 될 것이고 만족이  될 것이고 또 모든 사람에게 나눠 주는 그런 양식이 될 것이다 하는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어짜든지, 사랑은 기이합니다. 사랑은 받는 자에게, 사랑은 받는 자에게 유일한  평강과 기쁨과 담력을 가지게 되는 거 담력이 되는 것이고 또 이것을 가지고  다른 것을 상대할 때에 이것을 가지고 다른 것을 상대할 때에 끝이 없는 그런  희생을 할 수 있는 것이 이 사랑의 능력이다.

 그러면 이 사랑은 가질 때에 한없는 기쁨과 평강과 만족과 담력을 가지게 되고  또 이것을 가졌을 때에 얼마든지 무제한의 끝없는 그 피곤치 않는 그 봉사와  희생을 할 수 있는 것이 그게 사랑의 능력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요새  늘 세 가지 늘 계속해 기도하자.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그 앎이 자라고 하나님을  사랑을 아는 그 지식이 자라고 믿는 그 믿음이 자람으로써 우리에게 있는 평강이  자라고 기쁨이 자라고 담력이 자라고 또 그 사랑이 우리에게 와 가지고  있음으로써 나에게 모든 봉사와 희생이 자라고 피곤치 안한 그 강력한 그 실력,  있는 그 견고한 능력을 가지게 외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믿게 해달라고  주님의 사랑을 믿게 해 달라는 그 기도, 알고 믿게 해 달라는 기도 또 그 사랑이  와 가지고서 내가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   그러면, 이 두 가지에서 우리는 낙원 생활할 수 있고 우리는 무제한의 봉사  생활을 할 수가 있겠는데 이 생활을 우리가 빼앗기는 것은 죄만 들어오면  뺏깁니다. 에베소교회가 이렇게 이 아홉 가지 할라고 하다보니까 자기네들도  모르게, 죄는 뭐이냐? 주님의 뜻에 삐뚤어진게 죄인데 우리는 자꾸 하나 보면 둘  모릅니다. 자꾸 일방적으로 이렇게 치우쳐서 그만 이래 되는데,   사랑은 모든 것에 원만이라.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참. 주님이 뭐 우리  위해서 죽으셨다, 또 부활하셨다, 또 전능자다, 전지자다, 모든 면이 주님의  좋은 면을 다 전부 다 갖추어 다 가질지라도 그 하나 하나 더해도 주님이 날  사랑한 사랑이 없으면 그는 우리에게는 오랑캐가 되고서 우리에게는 적이  됩니다.

 그분이 전능할수록 이 나는 그 무능하기 때문에 두렵지 뭐 좋을 게 뭐  있습니까? 그분이 아무리 전지할수록 이 나는 조바심이 나오고 내게는 불안이  나오지 좋을 게 뭐 있겠습니까? 그분이 또 많은 것을 가졌으면 내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그분의 사랑이 아니라면 그분의 가지신 모든 대속의 은혜가 필요 없고  그분의 사랑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왔기 때문에 그 귀하고 우리는 즐겁고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에 대해서 세 가지 기도해야 되는데 마지막에는 이 사랑은 그만  죄만 들어오면 그만 삐뚤어지면, 주의 뜻에 삐뚤어지면 그만 거기에서 이 사랑은  병들어 죽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이렇게 행위에 힘을 쓰고 수고에 힘을 쓰고 인내에 이런 것만  힘을 쓰고 이 사랑에 감격돼 가지고 그 힘으로써 이런 것 저런 것 해야 되는데  그거 가지면 본능적으로 하게 되는데 본능적으로 그 희생과 봉사하게 되는데 그  사랑의 힘으로,’ 자꾸 내가 연구하고’ 생각하고 믿고 이럼으로써 그 능력이  내게 와 역사하고 또 내가 그 사랑이 내게 와 가지고 있음으로써 이제  필연적으로 본능적으로 안 하고는 못견디는,  하나님께서 고동이같은 이런 거는 하나님이 그 본능적으로 줘서 우리에게  하나의 그 생물의 계시로서 보여서 그건 보면, 그런 말이 있지 안해요? 그  새끼들이 전부 에미 다 먹습니다. 에미를 다 뜯어 먹어버리요. 다 뜯어먹어  버리고, 다 뜯어 먹어야 비로소 고동 새끼가 그게 자기 생명을 가지고 나와서  살지 그리 안 하면 못해. 그러니까 다 뜯어 먹고 난 다음에 떠내려가니까 우리  엄마 시집간다 한다 말 뭐 있지 안해요? 그 다 뜯어먹고 나니까 드부랑 드부랑  떠서 껍데기는 나갑니다. 이게 하나님 사랑의 그 본능의 역사입니다.

 아무래도 그분의 사랑이 우리에게 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고 깨달아야  되겠고 그 믿는 그 믿음으로 그 사랑을 우리가 가질 매 그 사랑은 우리에게  얼마나 와 있는데 내가 믿지 않기 때문에 그 혜택이 우리에게 역사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아는 앎이 자라고 그 사랑을 아는 지식이 자라고 그 사랑을  믿는 믿음이 자라고 그 사랑으로 인하여서 우리에게 이루어진 결과인 그 낙원  생활 이 모든 평강이 우리에게 자라져야 되겠고 이럼으로써 이 사랑이 우리 속에  충만해서 이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에 희생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거,  어떤 가운데서라도 미운 사람이 하나가 있으면 결단코 거기에는 그 사람에게는  낙원 생활이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보기 실은 무슨 물건 하나라도 있을  때에는 거기에는 낙원 생활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제 이 모두 요새 교계에서 일어나는 이런 소리들을 듣고 나니까  어짠지 소화가 잘됐는데 그만 소화가 안 되고 가슴이 멍클해 도무지 소화가 안  된다. 그것이 뭐이냐? 과거와 다른 것은 뭐이냐? 처음 사랑을 잃었다 하는  그것도 거기에 치료법입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그것이 없으면 자기에게 마찰된 원수가 있고 무엇인가 자기와  대립되는 것이 있으면 거기에는 평강을 가질 수가 절대 없는 것입니다. 고만침은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완전 다 해소해지는 것은 곧 사랑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은 두려움을 다 내어 쫓는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이 없고  심판에 대한 염려가 하나도 없게 된다.

 그래서, 이 사랑은 죽이는 그 병이 뭐이냐 하면은 죄요 또 이 사랑이 보존되는  것은 의인데 이 의를 잊버버리면 이 사랑이 거처할 곳이 없으니까 이 사랑은  보호를 입지 못하니 이 사랑 없습니다. 의가 없으면 이 사랑이 보존되지 못하고  죄가 있으면 사랑은 죽고,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제일 중요한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기 때문에 이 사랑을  잘 보존해서 위생해서 이 사랑이 병들지 안하도록 이 사랑이 잘 보호가 되도록  이 사랑이 능력 있게 역사하는 데는 내나 생명 과실, 하나님과 연결된 그 연결이  끊어지지 안해서 그분으로 인하여야 되 어지지 그분께 피동되지 안하면 안  됩니다.

 요 세 가지가 있을 때에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속에 와 가지고서 장수할 수  있고 영생할 수도 있고 얼마든지 전능의 역사를 할 수가 있는 것을 우리가  깨닫고 우리가 너무 이 그만 자꾸 공회에서 이런 저런 모든 사건을 생각하다  보니가 자연히 피곤하기도 하고 짜증도 나고 또 마음에 원망스럽기도 하고 너후  한 데 대해서 뭐 배은했다 또 이는 너무 배신했다 이건 이 피곤을, 암만  배신했으니 섭섭하다 암만 생각해 봤자 사망만 거기서 나오지 아무것도 나오지  안하고,  다만 ‘처음 사랑을 네가 버렸다’ 이 끊어졌기 때문에 그 연결을 가지는  거기에서 자기 혼자 거기에서 얼마든지 낙원을 만들 수가 있고 평강을 만들 수가  있고 만족을 만들 수가 있고 그에게도 더 다시 얼마든지 그 지불할 수 있는  희생의 그 능력이 생겨질 수가 있지 딴 데서는 우리의 이 모든 피곤이나 이 원망  불평 시비 낙망 이런 것을 어떻게 그 씻어서 이 모든 것이 변해서 행복이 될 수  있는 이런 것은 주님과 우리와 연결된 이 사랑뿐인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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