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행위와 순서

 

1988. 5. 29. 주일오전

 

본문 : 요한계시록 2장 1절-7절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이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주님이 좋은 점을 많이 칭찬하셨습니다. 칭찬한 점을  헤아려 보면 아홉 가지쯤 됩니다. 아주 성도의 좋은 행위요 또 교회에 덕이 되고  교계에도 덕이 되는 좋은 행위 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책망할 것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그 책망하실 것은 처음 사랑을  버렸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는고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처음 사랑을 버렸는고로 띨어진 데가  있다 이랬습니다. 연결되어 있는 그연결이 떨어졌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처음 사랑을 가진 처음 사랑의  행위, 처음 행위를 가지라 했습니다.

처음 사랑의 행위 그 행위가 곧 연결이 되고 그 행위를 버린 것이 연결에서  끊어짐이 된다 하셨고 또 그 연결이 잇기어 있으면 촛대가 빛을 나타내서,  촛대는 곧 등대인데, 이 등대가 빛을 발해서 세상 빛이되지마는  처음 사랑을 버리면 그 등대로 힘을 나타내게 하는 그 능력에 연결줄이  끊어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 등대는 빛을 나타내지 못하게 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처음 사랑의 행위가 이 등대로서 등대의 직책을 잘 감당해서 세상에 빛을  나타내게 하는 그 능력의 역사가 역사하고 처음 사랑의 행위를 버리면 등대로서  그 사명인 빛을 세상에 나타내게 하는 그 역사가 끊어지게 된다, 없어지게 된다  하는 것을 여기에 말씀해서 옮긴다 이랬습니다.

그러면, 처음 사랑의 행위가 곧 세상에서 빛을 나타낼 수 있는 그런 능력에  연결되게 하는 것이요 처음 사랑의 행위를 버리는 것은 세상빛을 나타낼 수 있는  그 능력에서 절단되게 되는 것이라 하는 것을 여기에 밝혔습니다.

 그러면, 처음 사랑의 행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이 에베소 교회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계시에 있는 일곱 교회 중에 제일위로 기록되어 있는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시작의 순서로 일호된것도 아니고, 또 교회에 교세가  크고 작은 것으로 일위된 것도 아니고, 중요한 이 중요성으로 제일위에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이 처음 사랑의 행위가 빛을 발하게 하는 그 능력에 연결되는 것이고. 이  행위를 버리는 것이 세상 빛을 나타낼 수 있는 그 능력에서 끊어지게되는 것이라  그렇게 밝혔습니다. 세상에 빛을 나타내게 하는 그 능력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이 공로로 인한 성령의 능력과 진리의 능력입니다.

 다섯 처녀가 등불을 켰음으로 신랑을 맞이했고, 다섯 처녀는 등불이 꺼짐으로  맞이를 못 한 그 비유에 등불을 켜게 되는 그것은 기름이 있으면 등불이 그대로  계속 켜져 있고 기름이 없으면 안 된다 그렇게 거기 비유했습니다. 그 비유도  기름은 곧 성령의 능력인데 예수님의 피의 능력과 성령님의 능력과 진리의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사람은 세상에서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요 처음 사랑의 행위를 하는 것이 빛을 발할 수 있는 원동력에 연결되는  방편이요, 처음 사랑의 행위를 버리는 것이 빛을 발할 수 있는 그 원동력에서  끊어지게 하는 것인 것을 밝히 말씀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세상에서 빛을 발하고 세상 빛으로 살려고 하면이 능력에  연결이 되어 그 능력을 힘입어야만 세상 빛으로 살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4절 이하에 보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빛을 발하는것이 교회의  본분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말한 것은 교회가 이 희생하는 희생이 아니고는 직책을  감당 못 하고 가치가 없어진다 해서 소금을 말하는 것은 희생을 말하고 빛이라  말하는 것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모든 것을 바로 보여 주고 알려 주고 바로  인식시켜서 옳은 길로 끄는 그런 모든 역사를가리켜서 빛이라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면,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의 행위를 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것이 이것이  제일 중요해서, 하면 세상에 빛이 될 수 있는 지극히 큰능력에 연결이 되고, 이  행위를 버리면 지극히 큰 능력에서 끊어져서 세상에 빛의 본분을 할 수가 없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처음 사랑의 행위가 무엇인가? 처음 사랑의 행위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처음에 베푸신 것이 세 가지입니다. 세 가지는 우리를 멸망케  하는 수많은 그 죄악의 값을 예수님이 대신 형벌 받으시고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죄와 관계없는 자를 만드신 것이 첫째요,  둘째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와 모든 피조물 앞에서 할 본분을 다하지 못한, 그  행하지 못한 것을 예수님이 대신 행하셔 가지고 죽기까지 하셔서 대신 행하시는  데에 전부를 다 기울여 끝마쳐 우리에게 대행으로, 대신 행함으로 칭의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의롭게 만드신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과 원수되고 모든 피조물과의 원수된 그 원수된 그 원수를  예수님이 대신 그 값을 받으시고 원수의 고통을 다 당하셔서 화목의 제물이 되셔  가지고 하나님과 우리와의 화친을 이루고, 모든 인인 관계에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에 화친을 이를 수 있도록 공로를 설정하시고 또 이루도록 하신 것이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힘입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 처음 사랑의 행위가 어떤 행위인가? 곧 예수심께서 나를 위해서  행하신 그 행위입니다. 그 행위를 나를 대속하신 주님을 위함으로 주님의 소원을  듣기 위해서 주님의 부탁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가 대형으로 사죄하는 행위를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죄는 범하고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죄값으로 멸망받고 있는 그 죄에 대한 형을 내가 역량 있는 대로 담당해서 그  사람의 죄를 없애고, 그 사람을 죄에서 벗어나서 관계를 끊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곧 사죄의 사랑의 행위입니다.

 칭의의 행위는 그 사람이 마땅히 해야 될 그 사랑의 의무와 책임과 본분을 하지  못함으로 멸망 가운데 빠져 있는 그 행위를 우리가 대신해서 그 행위를 감당하고  행치 못함으로 멸망 가운데 빠져 있는 그사람을 구출해서 이제는 자기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대행의 희생입니다.

 또 하나는 화친이니 하나님과 모든 사람과 피조물과의 사이가 우리가다  원수되어 있는 그 원수된 죄값으로 멸망받고 있는 원수된 우리 원수의 뭉텅이로  되어 있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 불목의 값을 예수님이 받은 것처럼, 그  불목된 그 불목의 값인 불목의 그 모든 고통과 멸망과 손해라는 그것을 내가  대신 받고 화목하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여 노력하는 것이 그것이  화목의 대속을 자기가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 사랑의 행위를 하는 것은 이 세 가지 종류의 대속으로 내가 주님  앞에 대속 받아서 구원을 얻어 있는 자이니, 이제 이 대 속의 공로에 팔린 주의  것이 되었으니, 이제는 이 세 가지 대속하는 이 대형, 대행, 대화친하는 이  대속하는 이 행위가 주님께서 나에게 시키시는 그 종노릇하는 것이요, 그의  것으로 사는 것이요, 곧 그에게서 내게 주신 그 사랑의 행위인 것입니다.

 이것이 심히 어렵고 끝이 었는 마치 바다에 돌 던지는 거와 같은 그런 끝없는  허무한 행위같고 또 그것이 중단되고 끝을 보지 못할 그허무한 일 같지마는 이  일이 가능을 합니다.

 가능한 것은 뭐이냐? 가능해서 그 일이 이루어진 것을 가리켜서 세상에 빛이라  말씀하시고 모든 사람들이 빛으로 봅니다.

 그러면, 그 일이 사람 생각으로서는 유한한 사람이 예수님의 이 세가지 대속의  사랑을 내가 입어서 이미 이 구원을 받은 내요 받아 가지고주의 것이 된 내니까  우리들이 세 가지 이 대속의 사랑의 행위를 할려고하면 인간 보기에는  무능하지마는 불가능한 것같이 보여지지마는이것이 바로 이 승리를 이루신 삼위  일체의 하나님과 연결되는. 연결되는 행위기 때문에 이 행위를 할 때에는  하나님과 연결이 되고, 하나님과 대속의 공로와 진리와 언결이 되고 이걸 버리면  이 연결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 행워를 하는 것은 이 세. 가지 능력에 연결  행위가 되기 때문에 이 행위는 전능의 행위요, 완전의 행위요, 무한의 행위이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에게 충만케 하고도 남음이 무한하다고 말씀하신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요 세 가지 이 대속 역사, 이 세 가지 대속행위를 내가  하는 이것이 사랑의 행위요 이 대속 행위를 하는 것은 완전에 연결된 행위요 이  대속 행위를 버리는 것은 완전인 그 원동력에서 절단되는 행위가 되어지는 것인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사랑의 행위 곧 대속 행위를 해야 되겠는데 하는 일에  있어서 순서가 어찌 되는가 하는 그것을 간단하게 증거할라고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6절에 보면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말씀을 했습니다. 기독교는 이 첫째 아담 육체의 사람  아담으로부터 시작해 가지고서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에게 성장돼 나갔습니다.

그런고로, 기독교는 먼저 이 혈육, 이 물질 여기에서시작해 가지고 차차 차차  자라서 초월해 가는 것이 그것이 기독교인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4장 16전에도 보면 이래 가지고서 교회가 자라가고 또 골로새  2장 19절에도 보면 이렇게 힘써 가지고서 자라간다고 말씀했습니다. 기독교는  자라가는 도라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잘못 하면 기독교는 초절주의가 되기 쉽습니다. 차차 차차  밑에서부터 자라서 올라가야 되는데 그만 초절이 돼 가지고 도리어 큰 이단이  있어나는 일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에는 이 초월해서 자라가지 안하고 항상 피조물에서 뱅뱅돌면서  하나님에게 도달하지 못하는 그런 신앙들이 많이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만을 상대해서 기초 없는 집과 같이 그렇게 공상적인 그런 신앙으로  초절적으로 모두 다 폐단되고 허사되는 일들이 많이있습니다.

 이래서, 그것을 순서적으로 자라가는 데 대해서 잠깐 간단하게 증거하겠습니다.

 첫째는 죄를 없에게 하는 것이 주님의 사죄의 사랑입니다. 죄를 없이한다 말은  삐뚤어진 것이 없이 한다는 것입니다. 사죄, 죄에서 구출해서 죄를 없이 한다  말은 삐뚤어진 데서 구출해서 뼈뚤어진 것이 없게 한다는 말이고, 또 칭의라  말은 옳은 것이 없었는데 옳은 것을 차차수립해 가지고서 옳은 것을 세워 가는  것을 가리켜서 칭의라 그렇게 말을 합니다. 또 화친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불목과, 인간과 인간 사이에 불목과, 모든 만물과 만물 사이에 불목을  이것을 다 화친으로서 하나되어 생명 가지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한 것입니다.

 첫째로. 죄 없이 하는 그 삐뚤어진 데 대해서 우리는 물질 관계에 대해서  연습을 해야 되겠습니다. 물질 관계에서 삐뚤어진 것을 이것을 없애고 바로  하도록 하려는 노력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물질 관계에 삐뚤어진 것을  없에는 노력을 할 것,  이래서, 다 같은 공업이지마는 목수는 그 자로 재어 가지고 삐뚤어진 게 표가  나지마는 이 미장이 일은 그만 잘못돼도 하나 붙여버리면 그만입니다. 그  삐뚤어진 것에 그렇게 느끼기를 강하게 느낄 그런 기회을 얻지 못합니다. 이래서  물질 관계에 삐뚤어진 것을 없애도록 할 것,  그러면 물질, 사람과 물질 관계가 아니고 내가 물질을 상대해서, 물질을  상대해서, 제가 이 사층 화원부에 저 아래도 한번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자기  집에 꽃 한 송이를 기르는 데도 거기에 삐뚤어짐이 없도록 노력을 합니다.

이래서 자기 정원에나 자기 책상 위에 꽃 한포기 잘 기르는 그 사람은 그것을  보아서 그 사람의 사람돼 가는 인품을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정원밖에 뿐만 아니라 다른 그 산에 가서라도 넓은 산에 가서도모든  식물들이든지 또 자기에게 온 무슨 물질이 어떤 물질이든지’ 그 물질에 대해서  내가 조심 있게 삐뚤어진 게 없도록 그렇게 할라는데에서 우리 사람이 만들어져  갑니다.’  제가 OOO집사님이라는 그 집사님이 개명교회에 있는데 제가 같이 이래 밤에  이웃 동리에 예배드리러 가면 그때 그 교인들이 수십 명이 같이 갑니다. 같이  가면 OO집사님이 자기가 앞섭니다. 앞서는 건 뭣 때문에 앞서느냐 하면은  거기에는 모두 이슬밭이니까 이슬밭에. 가면서 자기가 전부 이슬 다 떨고 그래  나오게 할라고 갑니다.

 그래 가 앞서 가면서 보면 뭐 가다가는 뭐 응치며 속으로 군담을 ‘아이구 내가  잘못했다’ 하는 그런 소리 더러 듣습니다. 그래 내가 역부러 그걸 좀  거석할라고 야지를 줄라고 ‘뭐 잘못해, 잘못하기는?’ 풀포기 있으면 밟기도  하고 뿌질기도 하고 쥐뜯기도 하지 뭐 그까짓 가지고도 뭐 잘못했다고 끙끙 앓고  그따위 짓 하느냐고 내가 좀 나무래 줍니다. 이래도 내 속에는 그것이 은혜가  되고 양식이 됩니다.

 그래서, 풀 한 포기를 상대해도 조심 있게 그것을 인격이 없는 것이지마는 꼭  인격 있는 것과 같이 그것도 독립성이 있고 자주성이 있고 개성이 있으니까  거기에 대해서 거리끼지 안하도록 할라고 애쓰는 것을 그런 제가 봤는데, 그분은  무식한 사람이지마는 신령한 면에 깨닫는 것은 굉장히 앞서 가지고 있어서  그이의 성녀의 그 전기를 제가 쓸라고 하다가서 시간이 없어서 쓰지를  못했습니다. 후란시스 전기에도 보면 그런 것이 보여집니다.

 이래서, 물질에 대해, 물질을 상대할 때에 거기에서 내가 죄를 범하지 안하고  그 죄가 없어지도록. 어떤 사람이 자기가 오르막에 똥장군을 지고 올라가니까  많이 나고 덥고 굉장히 짜증나는데 올라가니까 나무가지가 하나 눈에 턱 걸려  가지고서 눈을 쿡 찌릅니다. 찌르니까 그사람이 되니까 사람이 짜증 안  나옵니까? 짜증이 나오니까 그 나무가지를 거머쥐고 똑 뿌질라서 던질라고 똑  뿌질라고 이래 거머 쥐었다가 다시 뉘우쳐서 회개를 하면서 ‘이거 내가  월권이다’ 하면서 그 나무에게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고 지나가는 그런 사람을  봤습니다.

 우리는 물질 가지고 사람과 관계 하는 게 아니고 내가 물질과 나와의 관계에서  삐뚤어진 게 없도록 또 그 물질에 대해서 삐뚤어진 게 있으면, 그 나무가 가다가  보니까 어떤 것에 눌려 가지고서 그 자유하지 못할때에는 자기가 큰 힘 들면 안  되지마는 지나가면서라도 그런 것을 벗겨 놔서 그 나무가 자유할 수 있도록, 그  나무도 꼭 내 몸같이 생각해서 그것을 이렇게 거기에 뻐뚤어진 죄의 해가  없도록, 삐뚤어진 것이 그를 해치지 못하도록, 내가 그에게 삐뚤어지지 않도록  이렇게 하려는 데에서 시작해서.

 둘째로는 무슨 일이든지 물건이든지 여기에는 벌써 사람 관계가 있겠습니다.

그러면 자기는 이 사건에 대해서 그 삐뜰어진게 있으면 그것을 고치도록 다른  사람도 뻐뚤어진 거 있으면 그 뻐뚤어진 걸 없애서 고쳐서 그 사람이 자유할 수  있도록 그렇게 자기가,  삐뚤어진 건 제가 삐뚤어졌는데 고치기는 매수님이 고쳐 주신 그걸가지고서  그가 삐뚤어졌지마는 그 삐뚤어진 그 일을 내가 보고 힘이 있는 데까지는 - 너무  그리 치우치면 안 되니까, 다른 것 또 못하니까.-해서 어쨌든지 내가  뻐뚤어뜨리지 안한 그 삐뚤어진 일들을 그것을 고치는 그런 노력을 해서, 그  일을 삐뚤어진 일을 없애고 바로되는 일이 되도록 그렇게 거기에서 사죄 행위를  하고  또 사람과의 관계에 인인관계에 있어서 이 사죄 관계를 할 것, 그사람이 제가  잘못해서 뻐뚤어져 가지고서 삐뚤어진 데 고생하고 있는 그것을 어짜든지 그  삐뚤어진 데서 건져서 바로 해서 그 사람을 구원이 되도록 그렇게 할려 하는 그  중심과 우리 그 사상을 가지고서 사죄 사상을 가지고 거기에서 우리들이  희생하는 그것이 사랑의 행위입니다.

 고것이 뭐이냐? 완전자에 전지 전능에 내가 연결되어서 세상에 빛을 나타낼 수  있는 그 능력을 거기에서 받을 수 있고 그런 것을 그 무시하는데에서 능력에  끊겨지면 내게는 빛이 나오지 못하는 거,  그래서, 거기에서 차차 자라 가지고서 하나님에게까지 나아가서 하나님과  나와의 잘못된 거 삐뚤어진 것을 내가 고치도록 노력하고 다른 사람이 또  하나님과 잘못된 그것은 내가 잘못해서 한 거는 아니지마는 그 사람의 모든  잘못된 거, 삐뚤어진 거, 언행심사에 삐뚤어 진 거, 죄의값은 사망이라 말은  삐뚤어진 결과는 죽고 망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삐뚤어진 데에서 할 수 있는 대로 우리는 거기에서  해방시켜서 그 삐뚤어진 것이 없도록,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물질관계에서 사건관계에서 그렇게 하도록 노력하고,

 그와 마찬가지로 또 우리는 칭의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물질 그관계도  어짜든지 의롭게, 의롭게 내가 할려고, 또 모든 사람이 물질관계를 의롭게  하도록 할라고,  이래서, 그 사람이 지나가면서 나무 하나를 사람들이 이렇게 휘어서 처박아  놨으면 그것을 꺼내 놔서 바로 세워 놓지 않고는 마음이 불쾌해서 못 견디는  것이 그것이 곧 칭의의 심정이요 칭의의 성격이요 요소요 그것이 처음 사랑의  행위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칭의의 행위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가든지 가면 그 사람이 가는 데에는 나무들이 좋아합니다.

나무들이 좋아해 나무들을 구하고 풀들도 구하고 또 어데든지 이런 물질이라도  그 물질이 위험하게 놓여 있으면 그 물질을 자기 것이 아니라도 바로 안전하게  놓도록 하고, 또 그게 삐뚤어져 있으면 그거 남의 것이라도 그 삐뚤어져 있으면  손대서 안 되면 안 되지마는 댈수 있으면 그것을 바로 잡도록 그렇게 하고, 또  그 사람이 물질관계 그걸 바로 사용하지 못하면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그  물질관계를 바로 해서 사용이든지 취급이든지 보관이든지 또 보는 것이든지  그런데에서 우리는 칭의의 요소를 길러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양산동에도 보면 몇 해 동안에는 그 산에 좋은 꽃은 피지 못합니다.

좋은 꽃이 피면 전부 꺾어 가지고서 다 가 버립니다. 이랬는데 지금은 그만해도  조금 많이 자랐는지 꽃을 보고 꺾는 사람은 내가 보지를 못했습니다.

 꽃이 많이 피었는데 그게 어데 처박혀서 잘 보이지 안하고 있으면 고거 잘  그것을 들어내도록 해 가지고서 그렇게 손을 봐 주고 가는 그런 사람을 제가  많이 봤습니다. 그런 것이 다 물질에 대한 칭의의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또, 사건에 대해서도 자기도 자기 일을 바로 할라고, 또 다른 사람과의  관계되는 일을 바로 할라고, 다른 사람의 일아라도 그 일이 바로 되기를 원하고  바로 되기를 중심으로 원하고, 바로 되기를 원하지마는 바로할라고 하면은  삐뚤어지게 아는 사람은 자기에게 방해하는 줄 알고원수같이 생각합니다.

 그래도 네 망할라면 망하고 해 버려라 하지 안하고 그 바로 되기를 원해서 안  되면 그저 한 마디 기도라도 하고 ‘하나님이여 저 사람이저 일을 바로 하지  못하니까 저 일을 바로 하도록 어떻게 하든지 주님께서 그 은혜를 주시옵소서’  그렇게 이 내 일이나 남의 있에게나 어쨌든지 사건을 그 대해서 바로 하는 그  칭의의 사랑을 베푸는 그일을 하도록 하고  이제 인 인관계에 있어서 자기가 칭의에 관계하도록, 이래서 다른 사람이  삐뚤어지게 가면 자기의 원수가 삐뚤어지게 가면 저라다가저거 쿡 처박히겠다  하고서 중아하기 쉽습니다. 그 삐뚤어지게 가는것. 우리가 이런 시험 받기  쉽습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이 망령되게 말을 해도 안 듣고 이렇게 삐뚤어지게 가고 옮게  시키는 것을 하지 안해서 거기 대한 상당한 댓가를 받을수 있는 그런 행위를  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끝까지 거기에서 의를 세워서 그 사람이 바로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도록  말을 해서 그 사람이 반감을 가지고서 옳게 안 들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라도 한 마디 하고 지나가는 그런 것이 우리가 의의 사랑을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바로 해서 바로 한, 다른 사람이 바로 하는 남의 의를  보고 진정 마음에 속속들이 기쁨이 없는 그 감사가 없는 그런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자기 의만 좋아한다고 하면 그것은 사사로운 의이기 때문에 내나 그거나  악이나 꼭 같습니다. 그것도 악에 속한 의가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자타의  인간을 대할 때에 의를 건설하는 의의사랑의 행위를 베푸는 거,  또, 하나님에게 대해서도 나도 바로 할라고 애를 쓰고 하나님이 나에게 바로  행하시고 바로 지도하는 것을 깨달을라고 애를 쓰는 것, 하나님은 틀림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게 대해서 바로 하시는 것을 내가 이해 못 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낙망하고 그렇게 실망하고 그 비관하고 불만하고 이러기 쉬우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바로 하시는 그걸 어짜든지 내가 깨달아서 알라고 노력을 하고,  또 나에게 바로 지도하는 걸 알라고 노력을 하고, ‘나도 하나님께 대해서 바로  할라고 애를 쓰고, 다른 사람들도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대해서 의륨게 바로  하도록 할라고하는 이것을 원하고 노력하는 이것이 처음 사랑의 행위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행위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는 화평인데, 화평인데 물질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러합니다.

우리가 물질에 대해서도 잘못 해 놓으면 그 뒤에 가 생각하면 내가 그 나무에  대해서 고역을 줬다, 어떨 때는 나무에게 그 나무가 꼭 그 부담을 하기는 해야  되는 그런 어려운 부담인데 그 부담을 시킬라고 하니까 그 나무에게 미안해서  네가 아니면 이것은 방구어 가지고 있을 수가 없고 이것을 방구며 네가 여기  있으면 네가 못 견뎌서 굽어 질지도 모른다. 미안하다마는 이거는 네가 네  본분인 줄 알고해라.

 인제, 나무에게 대해서도 화평해서 그 나무를 대할 때에 우리는 미안이 없는  거, 나무에 대해서도 내가 잘못하면 그 뒤에 그 나무를 대할때에는 불목이  있습니다. 반드시 그 미안하고 불안합니다. 그 나무에 대해서 내가 뒤에 보든지  생각해도 그 나무가 나를 보면 반가와할 수 있도록, 반가와할 수 있도록,  제가 맨위에 천막 친 데에 거기에 나무가 없고 빈 데가 있어서 그래OOO집사를  소리 해 가지고서 네가 여기 소나후를 세 주만 심궈라 이랬습니다. 그 세 주를  심구라고 이래 가지고, 그 만당이니까 뭐 물이 수분이 없지 않습니까? 세 주를  심궈 놓고 네가 이거 말라 죽지 안하도록 이 나무를 살리도록 해 봐라. 네가  이거 살리면 네가 쓸모 있는 사람이고, 이거 못 살리면 너는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 이랬더니마는 자기가 가서 물도 주고 종종 그랬는데,  그래 거기에 대해서 나중에 제가 생각하니까 암만 물을 갖다 줘도 뭐 늘 그래  갖다 줄 수가 없고 이런데, 자꾸 저 나무가 살아야 되지 저게 죽으면 공연히 잘  사는 걸 캐다가 옮겨놔 가지고 더 좋게 살아야 되지 죽으면 미안하다 해서  연구하니까 비니루를 거기다 씌워야 된다는 게 생각났습니다.

 그래 그 구덩이를 넙적하이 이래 두리두리 만들어 놓고 비니루를 거기다 씌워  가지고서 가운데 구멍을 낮춤하게 뚫으니까 비 오는 거는 전부 그리 다  들어갑니다. 다 들어가고 햇볕에 쬐우는 수분은 하나도 올라가지 안하고  비니루에 벚혀 가지고 다 떨어집니다. 그래 이만하면 뒤에 물 안 줘도 되겠다.

 그래 그 뒤에 가 보니까 그 세 주가 그 부근 나무 중에 제일 무성하게 살아  가지고 잘 살았습니다. 그래 그 나무를 대할 때에는 미안치 안하고 부끄럽지  안하고 날 반가와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이 돼집디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참 뭐, 물질 그런 거 대해도, 물질을 가지고 사람과 관계  아니고,. 그 물질 상대에서 물질에게 우리는 어짜든지 뒤에라도 안면이 있고  만물 심판 때에 물질이 내게 대해서 억울타고 분하다고 송사하는 그런 일이  없도록 우리는 이 화평의 사랑의 행위를 물질에서부터 해 나가야 됩니다.

 물질에서부터 해 나가고 고다음에는 모든 이 사건들에 대해서 이와같이 해  나가고, 사건에 대해서 나와 그와의 그 사건으로 원수되는것 많은데 어떤  사건이라도 그 사건으로서 나와 원수를 맺는 그 일이 있으면 그걸 자꾸 풀도록  노력해 가지고서 그 사건에 대해서도 양심에 가책 아무것도 없고 그 사건에  대해서도 그 사건 자체가 뒤에 나를 대해도 내게 대해서 반가이 하지 서로 원수를 품고 원망 블평을 하지 안하도록  우리는 거기에서부터 해 나와야만 되짓습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는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한 일을 하도록 노력을 할 것. 이래서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그래서, 참 제가 얼마 전에 그런 말 했습니다. 화평이 없는 거룩, 화평이 없는  성결, 화평이 없는 정의, 화평이 없는 공의 그것은 마치 배암 죽어서 배암’  가시가 엉드리한 거 모양으로 배암 가시 모양으로 아주 정떨어지고 징그럽고  흉악하다.

 이래서, 차라리 그것보다는 정의와 공의야 무슨 성결이 없어도 ‘그 성결이  없어도 화평이 좋겠다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또 사망입니다.

 이래서 ‘화평함과 거룩함음 좇으라’ 화평에서 거룩까지를 나가야 되지 화평에  거룩 없어도 안 되겠습니다.

 이래서, 마지막으로는 여기에서 길러 가지고서, 물질에서 기르고, 사건에서  기르고, 사람에게서 길러 가지고서 거기에서 비로소 성장돼서 하나님과 나와의  화평이 이루어지는 이 장성한 분량에 올라가는 것,

 이래서,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46절에 보면 먼저가  신령한 것이 아니고 먼저가 육 있는 것이라, 또 고 위에 올라가 보면 모든  순서가 다 땅에 것에 부터 시작이 됐습니다. 땅에 것에서부터.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신앙이 초절되지 말고 초월된 신앙으로 그러기  때문에 제일 밑잘미에서부터 신앙생활을 시발해 가지고 거기에서부터 길러서  장성한 하나님께까지 나아가도록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자라도록 해라’  말씀하신 대로 이래서 우리 신앙은 제일 낮은자리 물질 신앙, 그 다음에는 사건  신앙, 그 다음에는 인인관계 신앙, 그 다음에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신앙으로  이렇게 점점 초월해서 성장돼 나가는 이 신앙이 아니고 그만 그런 걸 다  무시하고 하나님과 자기와만 관계할라고 이래 하면은 그것이 초절돼서 다 패단이  되고 사고가 생겨집니다.

 이래서, 양산동 우리 기도원에 기도하러 가는 사람들 늘 제가 말하기를 여기에  온 사람들 가운데에 이 사건 사고의 사람들이 오지 않는가? 그만 그러면  거기에서 공기 좋고 신선하고 이라니까 거기 와서 수월하고 평안하고 좋고  이러니까 그만 하나님만 상대하고 기도한다 하고 자기가 물질에 대해서, 사건에  대해서, 인인관계에 대해서 거기 대해서 자기 본분과 의무와 책임을 다 감당하고  거기에서 초월해 가지고 비로소 사건으로 넘어가고. 사건에 초월해 가지고서  인인관계에 넘어가고, 인인관계에 초월해 가지고, 하나님에게까지 도달해 가는  것인데, 잘못하면 저 삼각산 그건 데 굴에 가면은 아무짝도 가장 인종지 말자는  거기있습니다. 아주 신앙에 아주 못쓸 초절자들이, 다 큰 사고쟁이들이 거기  있습니다. 이러니까 그런 사람을 접하면 사람들이 다 신앙에 그만 실패를 하기가  쉽습니다.

 다 같이 이제 우리의 신앙이 자라가는 데에는 밑에서부떠 차차 자라갈것, 처음  사랑의 행위 이것이 전능자에 연결되고 내가 세상에 빛이 되는 원동력을 내가  대하는 것이며 이 원동력이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인 것이 이것이  처음 사랑을 행하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기도)  감사합니다. 세상 빛으로 살 수 있는 이 능력은 처음 사랑의 행위를 할 때에  주님과 연결되어 가능한 이 약속의 도리쯤 가르쳐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대속의 행위를 우리 몸에서 생활에서 할라고 애를 쓰기는  써도 이것이 다 초절되는 그런 방편에서 개별적으로 손해보는 일이 많이 있은  것을 주님이 아시고 깨우쳐 주심을 감사합니다.

 지극히 작은 데서부터 시발되어 하나님에게까지 성장돼 갈 수 있는이 초월의  성장 신앙을 가지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렇게 많은 형제들을 불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저들은 이제 주님의 자녀가  되었사오니 주님이 책임 가지시고 보호해 주사 아무리 험하고 거짓과 인정이  없는 박한 세상이라도 주님의 보호로 아무 염려없이 평안하게 신앙생활 하여 주  앞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모든 것을 주님에게 다 맡겨 놓고 주님으로 의논하여 주님의 인도만  따르면 다 생명과 평강인 것을 확신하고 체험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을 구원하느라고 수고한 사랑하는 종들에게도 주님,의 인간을 사랑하는 이  사랑에 뜨거운 그 능력이 저희들 속에 계속 자라가게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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