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사랑-처음행위/

2015.12.29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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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사랑-처음행위

 

1987. 10. 3. 새벽 (토)

 

본문:요한계시록 2장 1절∼7절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본문을 읽을 때에 그 내용을 잘 생각하면서 읽도록 합시다. 그렇게 여러 시간 증거했지만 아직까지 이 증거가 여러분들 속에 들어가지 안해서 지금 자꾸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껍데기만 줄줄 핥고 확신은 안 가지고 있습니다.

교리와 신조, 교리라는 것은 성경 보고 내가 어떻게 믿어야 되느냐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 교리요, 신조는 또 내나 같은 말입니다. 내가 지금 어떻게 믿어야 하느냐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신조라, 내나 한 말인데.

이 찬송은 뭐 곡이 틀려도, 안 틀리는 게 좋지만 별 큰 일이 없습니다. 왜? 찬송가에 그거 뜻만 하면 되는 것이고 좀 우리의 감정이 좀 뜨거워지고 빈약해지고 하는 그것만 차이 있지만 이 깨달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행위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행위를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 알면 잘못 행위 하니까 구원이 이루어질 리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깨닫는 것을 ‘사람들이 뭐 이렇게도 말하고 저렇게도 말하고, 말한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은 대개 보면 ‘아무것이는 이렇게 말한다 저리 말한다’ 백 명이면 백 명이 지금, ‘두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저렇게 말한다’ 하는 걸 알면 둘을 아니까 더 유력한 줄 알고 또 백 명이 만일 이렇게 지금 깨닫는다 주장한다 하는 그 백 명이 가지고 있는 그 교리를 알면 더 유력한 줄 알고, ‘그러면 네가 백 명이 아는 그런 교리를 알고 있는데 그 아는 거는 좋은데 너는 어떻게 믿노? 네가 가진 교리는 뭐꼬?’ 그거는 없다 그 말이오. 이거 확정 없어.

그러기 때문에 자기 죽이는 것입니다.

이 교리와 신조에, 우리가 앞으로 살아나가는데 우리 소유를 어디다가 바치며, 몸을 어디다 바치며, 또 우리의 생명을 어디다 바칠 것입니까? 소유와 몸과 생명을 어디다가 바칠 것입니까? 교리와 신조에 바칠 것 아닙니까? 잘못 알면 잘못 바칠 것 아닙니까? 잘못 쓸 것 아닙니까? 남은 여생 잘못 사용하니까, 소유든지 몸이든지 생명이든지 잘못 사용할 것이고 잘못 알았으니까 잘못 행동할 거라 말이지.

아는 대로 행할 것 아닙니까? 이게 옳다 하면 그리 행할 거라 말이오. 그러면 삐뚤어진 걸 옳다 했으면 그대로 행하면 자기 소유도 몸도 생명도 다 잘못 허비되는 것 아닙니까? 일생을 그 망칠 뿐 아니라 영원을 망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교리와 신조가 중요하지만 항상 ‘이 교리와 신조는 우리의 생명보다 중하다’ 암만 말해도 귀에 지나가지 그것이 자기에게 그렇게 깊이 느껴지는 그 사람이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김현봉 목사님은 한국에 제일 유력한 학자들인데 그분들 한 책을 보고서 ‘그 책은 죽은 책이다’ ‘왜 죽은 책이라 합니까?' `그 사람의 신앙은 죽었다.’ 이랬어. 그 얼마나 거석한 소리입니까? ‘왜 죽었습니까?’ `그 사람은 교리와 신조에 대해서 여러 사람의 것을 말하지만 제가 믿는 교리와 신조는 없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을 리가 없다. 참은 하나뿐이지 참이 둘일 리가 없다. 진리는 하나뿐이지 둘이 있을 리가 없다. 진리가 둘이라면 이래도 합격 저래도 합격이니까 저는 이러다가 좀 급하고 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저리 할 것이고 저러다 급하면 이리 할 것이고,’ 그것을 가리켜서 양다리 거석해 놓고 머뭇거리는 자입니다.

형편 봐서 이러다가 저러다가, 그렇다고 해 가지고 그게 진리에 맞을진대야 그까짓 놈의 진리야 똥보다 더 더럽습니다. 그 진리 가지고 인간을 구원하고 그 진리 가지고 인간을 심판한다면 그까짓 놈의 진리는 암만 내가, 만일 하나님이면 나는 아무것도 존재가 아니지만 하나님하고 시비해 가지고 내가 뭐 녹아지고 없어져도 시비하겠습니다.

‘옳은 것이 하나뿐이지 어떻게 둘일 수가 있습니까? 이게 옳으면 저게 틀리고 저게 옳으면 이게 틀렸지 이것도 옳다 저것도 옳다 그럴 수가 어데 있습니까, 있기를?’ 그뭐 만일 뽀사져도 그거 항거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항거를 항의를 받지 안할 수 있는, 계시록에 보면 그분의 심판이 참되다고 계시 16장에 보면 얼마나 말했어? “참 공평되고 참되다” 공평되고 참되다 그랬습니다.

이러니까 ‘이것이 하나로 알아야 되지 하나로 모르면 안 된다. 하나로 아는 데는 이 안 것이 생명을 내놨으면 내놨지 이 바로 안 이것을 내놓을 수가 없다.’ 이만치 권위 있게 확고하게 ‘이 바로 알고 이대로 하면 살고 안 하면 멸망이라’ 하는, 멸망이냐 구원이냐 하는 것이 여게 달렸다. 망하고 흥하는 게 여게 달렸다.

이렇게 중요한 이 사실이건만 이렇게 평가하는 사람이 없다, 가치를 이렇게 두는 사람이 없어. 이러니까 자꾸 이거 에베소 교회를 읽는데, 인제 뭐 시간이 없어서 읽을 시간도 없어.

2절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여게 여덟 가지를 말했습니다. 그 다음에 또 “네게 이것이 있으니 나도 이러하다. 니골라 당의 무리의 행위를 네가 미워하는데 나도 이를 미워한다. 그런데 네게 책망할 것 있다, 네가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버리고 있다 말이 아니고 “버렸느니라” 아주 버렸다 말이오.

처음 사랑을 아주 버려 버렸어. 처음 사랑을 버려서 네게는 처음 사랑이 없다.

또 그러고 난 다음에 “그러므로” 5절에 “그러므로 어데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어데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이제 이 떨어졌다, 떨어졌다 했는데 이 처음 사랑을 버림으로 말미암아 떨어졌다 했는데 그 다음에는 “처음 행위를 가지라”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그러니까 행위도 또 버렸다 그 말이오.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회개하여 처음 사랑을 가지라’ 이러면 좋을 터인데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이러니까 처음에는 사랑이라 해 놓고 두번째는 행위라 말해 놓고 또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촛대를 옮기리라” 이러니까 이 촛대가 옮겨지는 이 끊어짐이니까, 촛대가 옮겨지는 이 떨어짐이니까 이 떨어짐이 이것도 큰 일입니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일이라.

촛대 옮겨진다면 하나님이 내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아버지가 무슨 소용 있으며 주님이 무슨 소용 있소? 촛대 옮겨진다는 것은 교회가 옮겨진다는 것인데 교회가 옮겨지고 교회가 없어지면 우리는 교회 때문에, 교회라면 자기 구원인데 우리 구원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감사하고 중요하지 우리가 구원이 없어 멸망받으면 하나님에게 대해서야 뭐 감사할 게 뭐 있으며 존귀히 여길 게 뭐 있습니까? 평생 원망 불평이나 있을 것이지 뭐 그럴 것입니까? 이러니까 이 처음 사랑이나 행위나 이 둘이 하나라는 것을 우리가 여게서 볼 수가 있지 또 떨어진 것, 떨어진 것이나 내나 교회, 촛대 옮기는 것이나 내나 그게 하나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지. 그거는 하나라는 그거는 뭐 이런가 저런가 아니라 그거 확정이 돼지지 않습니까? 확신이 돼지지 않습니까? 또 그러고 “이기는 자는” 이기는 자는 내나 처음 사랑을 버렸는데 처음 행위를,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 말이오. 이기는 자 대해서 두 가지 주시는데 하나님의 낙원에 살게 되지 또 생명나무 과실을 주어서 먹게 되지, 이것도 낙원에 있는 그 생명나무 과실이나 그것이 다 뭐이냐? 떨어지는 것이나 또 촛대 옮기는 것이나, 그러면 촛대 옮기는 것을 다시 촛대를 옮기지 안하고 네게 도로 촛대를 두겠다 하는 말이나 떨어졌는데 다시 이어서 잇기게 한다 말이나 꼭 같은 말이라.

그거 같은 말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여러분들이 자꾸 비판해서 ‘이거는 틀림이 없다. 사랑을 버린 것이나 다시 처음 행위를 찾아서 가지라는 것이나 이 행위나 사랑이나 이것이 같은 종류로 하나이다.’ 하나이다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말이오. 사랑은 사랑과 행위 이것이 둘이 하나라. 그러면 행위가 사랑이요 사랑이 행위라. 이 둘은 하나다.

또 버리면, “버리면 떨어지고 촛대 옮긴다. 도로 찾으면 낙원에 살고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한다.” 이러면 떨어져서 우리에게 닥치는 일이나 내가 버려서 내게 닥치는 일이나 도로 찾아서 닥치는 일이나 말은 다른 말을 했지만 같은 것이라 말이오.

우리가 하나님의 낙원에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낙원에 없으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낙원 아닌, 낙원 외에는 다 사망입니다. 노아 방주 밖에는 전부 사망뿐이오. 세상에서 낙원 밖에는 전부 사망뿐입니다. 노아 방주 밖과 꼭 같소.

낙원 밖에는 전부 그리스도 밖이라 말이오. 그리스도 밖. 그리스도 밖에는 전부 사망뿐이지 그리스도 안에 안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

이러니까 버려서 당한다는 거 두 가지 당하는 것이나 다시 찾아 가져서 두 가지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이나, 버려서 하나님이 두 가지 뺏든다고 하는 두 가지를 말한 것이나 또 다시 도로 회개해서 찾아 가졌을 때에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마고 하는 두 가지 그거나 이것 다 이거 네 가지가, 네 가지가 없으면, 네 가지가, 네 가지 중에 하나 없으면 우리에게는 완전 멸망이요 또 네 가지 중에 하나 있으면 완전 구원이요 뭐 네 가지 중에 하나 있으면, 세 가지 없어도 네 가지 중에 하나만 있으면 세 가지가 다 있는 거 네 가지가 다 있는 것이라.

이것은 말로는 이래 넷을 말했지만 속에 알맹이는 하나라 말이오. 이거 단일성이라 말이오. 이 단일성의 하나인데 이게 우리 몸이니, ‘내 몸뚱이라.’ 또 `내 머리라.' 머리나 몸뚱이나 하나라. 이 몸뚱이를 없애버리겠다 하면은 머리도 없애버린다 말이오. 머리를 없애버린다 하면 이거 몸뚱이도 없앤다 말이오. 이 팔을 거머쥐고 ‘이 사람을 없애버린다’ 하면 또 내나 마찬가지라. 이러니까 그게 겉어머리로 발표는 넷으로 했지만 속은 그 속은 알맹이는 하나라 그거요.

그거 이해가 됩니까? 이러니까 지난밤에 우리가 판단해서 이것은 곧 그리스도의 이 구속, 구원이다.

열여섯 가지 구원이다. 구속이다. 그러면 한 말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라고 이렇게 우리가 깨달아서 해석을 하면 요리 맞춰도 틀림없고 저리 맞춰도 틀림없고, 낙원에서 낙원 과실을, 이 구원 받으면 낙원 과실 먹는다, 낙원에 같이 산다. 이 구원을 네가 가지고 있으면 생명 과실을 먹는다. 이 구원 외에 딴거 가져 가지고는 먹는 길이 없고 낙원 속에 있는 수가 없어. 이 구원만이 낙원에 살 수가 있고 이 구원만이 생명 과실을 먹을 수 있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내가 그거 한 말이라 말이오.

이러니까 구원을, 구원이라 해야 되지 구원 외에 뭐 사랑이라 또 무엇이라 암만 이래 말해도 딴것은 여러분들이 주 대 봐요. 주 대 보면 그거 하나 없어 가지고 이게 다 절단이 되는가? 구원이어야, ‘처음 사랑이라는 것과 또 행위라는 구원을 말한 것이다.’ 이 구원으로 말하면, 구원으로 말하면 이 구원 하나 없으면 낙원에 못 살게 되고, 구원 하나 제가 잡아서 가졌으면 낙원에 살게 되고 생명 과실도 먹게 되고, 이 구원 잊어버리게 되면 하나님과 끊어지게 되고, 이 구원 하나 잊어버리게 되면 이제 촛대 옮겨지게 되고, 이 구원으로 딱, ‘처음 사랑 처음 행위 하는 게 이거 구원이다. 그리스도의 우리를 구속하신 이 구속이다. 구원이다.’ 이 구원이라고 이렇게 우리가 깨닫고 이걸 하면 이 구원이라는 이 깨달음에 대해서는 그게 틀렸다 할 도리가 없어.

틀렸다고 증거할 수가 없어. 이거 외에는 이거라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 말이오.

이러니까 이거 이렇게 이 종으로 횡으로 막 양사방 아무리 둘러맞추고 이래 봐도 이것은 우리의 곧 구속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판정을 지운 것을 지난밤에 했습니다. 이걸 자꾸 해 봐서, 우리 믿는 게 뭡니까? 어떤 사람의 책에, 사람이 그 사람이 잘 믿는 사람인데 이름은 말하지 않습니다.

잘 믿는 사람인데 그것을 말하면 또, 이 학자들은 알지도 못하고 말이지 ‘그 사람은 이런 것 보니까 이단이다’ 사람이 다 바로 깨닫습니까? 다 깨달은 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저거 학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주 종합을 해 가지고 있으니까 저거가 말하는 것이지 실은 사람이 제가 깨달은 사람들은 다 혼자 다 깨달은 사람이 없어. 그게 성경이라.

눈은 눈 일 하고 귀는 귀 일 하지 한 사람이 모든 걸 다 깨닫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주 깨달은 걸 종합해 가지고 그것이 이제 원만해진다 그거요. 이런데 그런 사람이 깨달은 것을 이걸 이런 말하면 ‘그는 이 면이 틀렸다’ 이래 가지고 정죄해 버린다 그거요.

제가 말한 스덴부르크라 하는 그 사람이 입신 중에 들은 것을 말하는데 그 사람 말을 이름을, 사람 이름을 말하면 ‘스덴부르크는 이런 면에 교리가 틀렸는데’ 이래 가지고 정죄한다 그거요.

그 사람이 말하기를 ‘하늘나라, 입신 중에 하늘나라 가서 보니까 어떤 사람이 제일 신앙 생활 잘한 사람이냐? 남을 위해 수고 많이 한 사람이냐? 주님을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냐? 보니까 명상 많이 한 사람이더라. 명상 많이 한 사람이더라.

그러면 자꾸 많이 생각한 사람이더라. 생각을 많이 한 사람이더라.’ 이런 것도 자꾸 이리 맞으나 저리 맞으나 이 생각하는 것이 이것이 우리 신앙 행위요 노력입니다. ‘요래 보니까 요거는 틀렸다 요래 보니까 요거는 맞다.’ 맞다 틀렸다 자꾸 요렇게 해 가지고 비교해 가지고서 자꾸 옳은 것을 찾아 들어가는 그것이 뭐냐 하면 구원 행위요 노력이라 그 말이오.

이러니까 천인 만인이 이렇게 말한다 하는 것을 아는 것은 생명 없는 책이라.

그러나 천인 만인이 말하는데 그거 자기는 이거는 틀렸다 이거는 옳다 자꾸 비판하고 비교하고 이래 가지고 평가해서 옳고 바른 걸 찾는 그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며, 우리 신앙 생활에 제일 중요한 것이라 말이오. 바로 아는 게 제일 중요한 것 아닙니까? ‘이것보다 이게 낫다 이게 옳다 옳다’ 자꾸 이래 하는 그것이 뭐이냐 하면 자기가 행동하는 것보다 그것이 더 중요하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내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니 나는 사람의 마음의 뜻을 살피는 자라” “너희들은 용모의 아주 아름답고 훌륭한 걸 보지만 나는 그 중심을 본다” 이랬어.

이러니까 그 마음의 작용은 우리는 그까짓 거 아무것도 아닌 줄 알고 있고 껍데기 뭐 행동하는 걸 크게 여기지만 행동하는 그까짓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음의 작용이 더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영생 얻으려면 마음 다하고” 마음부터 말했어. “마음 다하고” 그 다음에 “목숨 다하고 힘 다하고 뜻 다하고” 이렇게 말했어.

이러니까 우리 마음으로 자꾸 이렇게 눈감고, ‘주님이 어떠한 주님이며, 주님의 구원이 뭐이며, 사랑이 무엇이며, 내가 어떻게 또 주를 믿어야 되며, 어떻게 섬겨야 되며, 따라야 되며, 행위는 내가 어떻게 해야 되나?’ 자꾸 이걸 마음으로 자꾸 알려고 바로 하려고, 자꾸 바로 알아서 바로 하려고 생각하는 그게 전부 하나님 대접이라. 이것 다 하나님 섬기는 것이라. 이래 가지고 바로 알고 깨달으면 죽어도 그대로 해 나가는 것.

그러기 때문에 이거 우리가 바로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모든 인간들의 지식, 다른 사람이 깨달은 지식, 자기가 경험하고 체험한 지식, 이 지식을 자기가 이 지식 가지고 하나님의 도에 복종하기 위해서 자기의 갖추어 있는 모든 복종하는 데에 구비 요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구비 요소로 삼은 사람은 이런 것이 다 선물이 되어지고, 선물이 되어지고,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이것보다도 더 제 깨달은 것과 모든 사람들이 깨달은 것과 이것이 더 신구약 성경 말씀보다도 더 권위 있게 생각하는 그자는 그것이 뭐라 했습니까? 음행의 포도주요 그것이 우상의 제물이라. 우상 섬기지는 안했으나 제물 먹으면 우상 섬기는 자와 동참한 자가 되고 말아. 그것을 하나님 말씀보다도 높이 평가해 두면 결국은 저는 그거 되고 만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이 참 세상에서 권세나 지위나 있는 그런 것도 한가지입니다. 그것도 자기가 “부자는 천국 가기가 약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가 더 쉽다” 했으니까 절대 못 간다 그 말이오.

부자가 나쁩니까? 이 모든 권세나 뭐이나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섬기는 데에 하나님 주신 선물이라. 이거 하나님 섬기는 데에 다 바쳐서 하나님 바로 섬기고 하나님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거는 내가 쓸 것이지 다른데 쓸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필요한 자기 하나의 요소로 아는 사람은 그게 선물이요, 왜 그 사람이 그 부자가 천국 못 가겠소? 그 사람이 천국에 제일 좋은 자리 가지. 제일 좋은 자리 가지.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과 비중을 달 때에 하나님보다 앞세우고 제가 더 믿고, 더 의지하고, 더 자랑하고, 그것을 더 의지하고, 그것을 더 힘입고, 그거 있으니까 더 배짱 있고, 그거 있으니까 안심되고, 뭐 다른 사람은 그거 없으니까 호독거려 쌓는데 ‘내가 이게 있으니까 뭐 다른 사람 호득거려 하나님 찾는 것보다 내가 이거 하나님 안 찾아도 이것이 하나님 대용물이 된다’ 이래 생각할 때 그게 다 우상되고 만다 말이오.

그런데 이 우리가 여게서 또 깨달을 거 있는 것은 뭐이냐? 이 사람들이 보니까 행위가 여덟 가지가 훌륭합니다. 또 나중에 하나 덧붙이기를 아홉 가지가 훌륭합니다. 아홉 가지가 훌륭해서 이 참 칭찬받을 만치 훌륭한데 구원은 다 절단난다 그거요.

이러니까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구원의 전부가 되는 이 처음 사랑과 이 처음 행위를 버렸을까? 남한테 뺏긴 게 아니라 제가 버려버렸어. 버렸을까? 이걸 버렸을까? 어떻게 이 보배를 버렸을까 그 말이오.

보배를 버렸는데 버리는, 버린 그 사람 보니까 지금 딴데 분주하게 야단이라. 이 아홉 가지 하는 일에 막 분주하게, 아홉 가지 이거 하려고 하면 정신 없어요. 힘이 다 들어야 돼요. 이 아홉 가지 하느라고 분주하다 보니까 우리가 판단하기는 ‘아, 이 사람들이, 에베소 교회이 사람들이 이거 아홉 가지 하는 데 전심 전력 기울이다 보니까 이 처음 사랑도 처음 행위도 그만 버렸구나.’ 시선을 돌려버렸어. 마귀란 놈이 자꾸 시선을 돌렸다 말이오. 이거 처음 사랑이나 처음 행위는 이거 구원인데 이 구원을 보는 눈을 자꾸 ‘네가 구원 얻은 자는 이 행위 한다, 구원 얻은 자는 저렇게 신조를 지킨다, 저리 정조를 지킨다.’ 구원 얻은 자의 행위 그걸 자꾸 보이면서 ‘이게 중요하다 이게 중요하다’ 하니까 그게 중요한 줄 알고 그만 그거 중요한 줄 알고 그것 보다가 거게 기울이다가 이래 보니까 그만 처음 사랑을 버렸다 말이오. 이 구원을 버렸다 말이오. 이 에베소 교회가 이렇다. 이것을 여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저도 지난밤에 말하는 것이 제가 여기 와 가지고 믿는 사람의 행위는 거창 있을 때보다 더 많이 했습니다. 더 크게 했고 거기서 전도해서 뭐 사람을 전도해서 구원한 것보다 더 많이 해, 숫자가 많고 교회도 많이 세웠고 또 이래 늘었지만 처음 사랑을 잊어버렸어.

내가 내 스스로의 내 경험해 보는 대로는 내가 이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 구원만 보니까 좋아서 못 견뎌서 뛰고 굴리고 야단이었는데 이 처음에는 구원 보던 것을 부산 와 가지고 구원 외에 딴게 많이 있으니까 ‘이것도 봐야 되고, 이 교리도 지켜야 되겠고, 이거 뭐 대외관계도 해야 되겠고, 주장하는 설교하는 데’ 그때는 뭐 그때 있을 때에는 설교 하면 뭐 틀리나 어떠나 그런 관심이 없었어.

이거 설교하면 이러면 틀리나 옳으나 하는 그런 것도 관심 없고 틀리든지 어쩌든지 깨달은 대로 막 외치고 자꾸 뭐 구원이 돼서 좋아서 그러니까 그거 참 광신이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걸 기뻐한다 말이오.

이랬는데 여게 와서는 이것 저거 쳐다보는 게 많고 보다 보니까 이것 보고 저거 보는 바람에 외나 구원은 그만, 구원 보는 눈은 딴데로 돌려버렸으니까 이 구원 보던 거 딴데로 돌렸다 말이오.

배암이란 놈이 와 가지고 하와에게 이 하와가 하나님만 보고 살고, 하나님 보고 살고 자기 옆에는 아담 있고, 아담하고 둘이 한짝 돼 가지고 하나님만 보고 사는데 이게 시선을 팩 돌려버렸어. 시선을 돌리기를 어데로 돌렸어? 선악과로 돌려버렸어. 하, 요리 요리 말하는 가운데 선악과로 시선이 딱 돌려지고 나니까 그거 뭐 선악과 그것이 어떻게 보기 좋은지 하나님보다도 좋고 남편보다 좋고 거기 그만 전심 전력이 다 기울어져 버렸어.

요게 선악과인데 우리가 이 구원 잊어버리고 이런 것 저런 것 생각하는 이것이 전부 이거 다 배암에게 홀켜 가지고 이 선악과로 시선을 돌려서 선악과만 전부 주시하고 전부 거게만 주시하고마는 이게 됐다 그거요.

이런데 또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네가 사랑을 버렸다” “네가 행위를 버렸다” “네가 예수 믿는다고 이제까지 애를 쓰지만 어떤 그 성자의 행위를 버렸다” “성자의 사랑을 버렸다” “네가 사도 바울의 그런 사랑을 버렸다” 또 “그런 행위를 버렸다” 이러면 우리가 좀 이거 좀 깨닫기가 쉽겠다 말이오.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것과 사도 바울이 행동하는 건 아주 차이 있다.’ 그러면 뭐입니까? ‘너는 지금 앉은뱅이 모양으로 전진하지 안하고 향상하지 안했다.’ 전진하지 안하고 향상하지 안했다 그 말 아닙니까? ‘너는 자라가지 안했다. 전진 향상을 안 했다.’ 이러지만 이거는 그렇지 안하고 제일 처음 예수 믿을 때, “처음 사랑 버렸다, 처음 행위 버렸다.” 이라니까 이게 또 지금 또 이상하다 그 말이오.

우리를 네가 성자 안 됐다 하면 힘써 가지고 이렇게, 성자 안 됐다 하면 내가 하는 이것은 옳기 때문에 여게서 자꾸 열심히 해 가지고 더 보태가고 더 많아가고 더 성장이 되고 더 전진해 가면 된다 말 아닙니까? 이런데 이게 아니고 제일 처음 예수 믿을 때 그거 버렸다 했다 말이오.

제일 처음에 예수 믿을 때에, “처음 사랑” 처음 예수 믿을 때에 사랑 버렸고, 처음 예수 믿을 때에 행위 버렸다. 이라니까 이제까지 하고 있는 건 다 헛일이라 그 말이오. 알겠습니까? 이제까지 하고 있는 건 다 헛일이다. 이것을 주님이 제일 원하고 계신다. 그러면 이 처음 사랑 이 처음 행위가 뭐인가? 여게 대해서 이렇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에베소 교회를 제일 먼저 말하는 것은 이거 이렇게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말했는데 우리는 이것을 예사로 그만 지내보내 버리고 이러니까 요걸 요리 맞춰보고, 진찰을 하는 데는 나는 모릅니다. 의사들이 진찰하는데 한 가지 일방적으로만 진찰하면 아마 그 진찰이 그만치 성글어질 것입니다.

진찰하는 방법을 둘을 가지고 쌍방적으로 이와 같이 진찰하면 그만치 조금 정확해질 것이고 열 면이나 스무 면이나 백 면이나 가지고 막 이리 저리 해서 진찰하면 그래도 정확이 자꾸 그래 여러가지로 할수록 정확으로 점점 바로 들어갈 거라 말이오. 가까이 될 거라. 저 ○의사, 안 그렇소? 그거 맞지? 나는 의사는 아니지만 맞을 것 같애. 그거 맞대요.

이것 모양으로 이제 여게 보니까 에베소 교회 간단하지만 이리 맞추고 이리 맞추고 자꾸 꺼꾸로 맞추고 옳게 맞추고 치맞추고 내리맞추고 자꾸 이 여러 면을 자꾸 이래 맞춰보니까 여게 참 중요한 정확한 것이 있는데 이게 얼마나 중요하냐? 우리 구원이 그만 다 절단이고, 이 건설구원입니다. 건설구원이 완전히 절단나고 건설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지고 하는 이런 중요성이라.

이러기 때문에 에베소 교회를 제일 처음으로 이렇게 말해 놓은 것인데 이것이 무슨 장성해서 성자된 그런 행위를 우리에게 말해서 그 행위 네가 가져야 된다 그게 아니고 아주 뭐 성경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고 예수 믿는 교리나 신조도 모르고 신앙의 경험도 체험도 없고 할 때에 제일 처음 예수 믿을 때에 우리에게 본능적으로 사랑하는 그 사랑, 본능적으로 행해지는 행함, 그것을 지금 주님이 요구하시고 계신다 그거요.

이러니까, 그러면 우리 신앙의 체험으로 이래 생각할 때에 예수 믿기로 작정하니까 어쩐지 이 구원에 대해서 어떻게 기쁜지 뭐, 사람이 세상에 어데 영생이 있습니까? 영생이라든지 또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됐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해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 이걸 처음에, 이 구원, 우리의 이 구원이라 하는 이 구원을 많이도 몰라요. 구원을 그때 알면 지금 아는 거 뭐, 지금 아는 것의 백분지 일도 몰라요. 백분지 일도 모르는 정도인데 이 구원을 생각하니 어떻게 좋은지, 그만 좋아서 세상을 홱 뒤로 두고 그만 홱 돌아섰더라 그 말이요, 이 구원이 좋아서.

구원이 좋지, 이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이 사랑이 뭐 말할 수 없이 하나님의 사랑이 말할 수 없지. 이 사랑이 말할 수 없어 하나님을 내가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뭐 간절하고 뜨거워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니까 딴데 뭐 사랑하는 것도 아무것도 없고 딴데 사랑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랑도 필요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니 어떻게 좋은지? 그만 이 구원 좋고 나니까 하나님 좋고, 이 구원 좋고 나니까 하나님 좋고, 삼위일체 하나님 좋고 이 구원 좋고 하나님 좋고 나니까 그 다음에 모든 피조물이 다 좋아. 그게 다 내것인데. 처음 믿을 때도 그건 다 깨달아져요. 모든 사람도 원수도 좋고 또 모든 만물도 좋아서 필연적으로 사랑할 마음이 생겨지고, 이 구원 얻은 내가 이거 볼 때에 어떻게 좋은지? 제가 어떤 사람하고 산에 가다가, 산에 이래 가면서 바윗돌을 보고ㅡ그전에는 내가 부러운 게 있었어. ‘이거 참 바위 너는 벌써 수천 년 동안 살아도 살아도 지금 너는 생생한데 인생은 육칠십 칠팔십 년 살면 송장돼 썩어버리고 만다. 참 인생된 게 불쌍하다.’ 이래 쌓았는데 그런 노래를 불러서 그거 참 마음에 한숨도 흘리고 눈물도 흘리고 이랬는데 예수 믿는 구원을 딱 얻고 나니까 자랑하고 싶어서, 가다가 바윗돌 보고 ‘너 나이가 몇 살이지? 네가 앞으로 몇해나 살 것이지?’ ‘예수님 재림 오면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나는 다 이 바윗돌은 없어져 원소로 돌아가고 맙니다.’ ‘하, 불쌍하다. 너는 참 너무 단명자로구만. 너 수명이 너무 짧구먼. 나는 내 생명은 영원이야. 영생이야.’ 영생을 이거 생각하니까 어떻게 이거 좋고 자랑스러운지? 이거 뭐 그때 교리고 신조고 알아 그런 것이 아니고.

이래서 본능적으로 이 구원을 보니까 어떻게 좋은지 딴거 아무것도 없고 이 구원만으로 만족하고 또 이 구원을 보니까 이 구원 주신 하나님 뭐, 삼위일체 하나님 잘 몰라요, 그만.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하나님이라 그래만 알았지. 이 하나님 어떻게 좋은지? 하나님이 내 하나님 됐으니까 뭐 그만 어데 가도 배짱이고 어데 가도, 그러니까 두려울 것도 없고 담대하고 기쁘고 즐거웠다 말이오.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됐으니까.

지금은 그런 짓을 못 하지요. 처음 내가 예수 믿는다고 떡 예수 믿으며 예배당에 갔다 오니까, 그때 그 주재소라, 일본 왜정 말년이니까. 주재소 뒤로 내가 오는데 이거 내가 저거한테 그전에는 술친구 되고 뭐 이래 가지고 친구됐는데 예수 믿으니까 저거 친구가 하나 떨어졌으니까 이거 지금 주재소서 나를 오라 해, 그 사람들이. 오라 해서 갔다 말이오.

가니까 예수 믿는다고 자꾸 이러다가, 예수 믿는 걸 욕을 하고 예수 믿는 걸 예수 믿지 마라고 자꾸 욕을 하거든. 이러니까 서로 말이 시비가 났다 말이오. 시비가 나 가지고 그만, 자꾸 너무 예수님을 욕을 하니까 분해서 못 견디겠다 말이오.

그래 가지고 거기 싸움이 났어. 그래 가지고 그때 뭐 순경 하나를 그만 들어 그만 막 방바닥에 그만 들이꽂아버렸지, 그만 일본 순경 또 그래 버렸지 이래 놓으니까 그만 싸움이 일어났다 말이오.

뭐 그때는 죽는 것도 아깝지 안해요. 이렇게 좋은 우리 주님을 하나님을 욕한다고 이래 가지고 마구 그만 그래 돼지고, 이 구원 얻은 게 어떻게 좋은지? 공연히 다른 사람이 보면 미쳤다 할 거라. 자꾸 좋고 뭐 그까짓 거 뭐 술도가고 뭐 그까짓 눈에 보이지 안해. 이게 참 제일 좋은데. 굶어도 좋고 배고파도 좋고, 굶을수록이 더 좋다 그 말이오.

이렇게 이래서 이 구원을 보니까 구원이 어떻게 좋은지? 구원이 좋아서 구원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니 좋고 행복되고 나 같은 사람이 없어. 또 이러고 보니까 모든 이상하게도 만물이 좋고 만인간이 다 소망이 있고 다 좋고 뭐 미운 게 하나도 없고 희망 없는 게 하나 없다 말이오. 이것도 저것도 희망 있고 저것도 희망 있고 뭐 모든 게 희망 있어지지 구원 얻은 나로 말하면 또 내 자신으로 말하면 어떻게 보배고 귀한지? 이래 가지고 뭐인지도 모르고도 기쁘고 즐겁고 감사하고 이랬는데 이게 지금 심히 빈약해.

지금 내가 가만히 지금 봐요. 처음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어린 사람들이 그렇게 기쁘고 즐거운데, 기쁘고 즐거워하는데 나는 기쁘고 즐거움보다도 항상 상이 찡그려 가지고 마음에 이거 고민 고통뿐이라.

그래 나는 찍해아 한 게 그거라. 뭐이냐? ‘주여, 주님이 내 안에 계셔서 내 언행심사를 맡아 주관하여 주옵소서. 주님으로 인하여서 동하고 정하게 해 주옵소서. 나 혼자 스스로 독단으로 동하고 정하는 일이 없게 해 주옵소서.

주님으로 동하고 정하지 않는 악령 악성 악습으로 동하고 정하는 일이 없게 해 주옵소서. 모든 걸 접할 때에도 주님과 동행해 접하게 해 주옵소서.’ 암만 이래 쌓아도, 암만 이래 쌓아도 뭐 그 애를 많이 썼는데 그뭐 그러니까 그게 안 됐으니까 고통이고 이래 쌓았는데도, 아니야. 이제 처음 사랑이 안 나와요. 처음 기쁨이 안 나와.

이런데 이제 내가 깨달은 것은 이게 뭐이냐 하면 주님이 주신 이 구원, 이 구원에 대해서 이 구원을 자꾸 생각하고 구원을 자꾸 생각하면 여게서 하나님 사랑도 자꾸 나오고, 이 구원을 생각하면 기쁨도 나오고, 즐거움도 나오고, 이 구원을 자꾸 생각하니까 모든 인간도 만물도 다 소망이 있고 사랑하고 싶고, 이 구원을 생각하니까 나 자신도 존귀해지고, 이런데 이 구원을 자꾸 생각해야 될 터인데 이 구원을 생각하지 안하고 내가 시선을 돌려버렸다 말이오. 시선을 어만 데로 돌렸어. 이러니까 에베소 교회와 나와 꼭 같애, 내가 보니까.

이래서 지금 내가 증거하는 것은 뭐이냐? 어쩌든지 주님이, 뭐 이 구원에 대해서 처음에야 뭐 사죄 칭의 화친 이것도 똑똑히 잘 몰랐는데 뭐 알았겠소? 지금은 그것을 세밀히 말해 가지고 열여섯 가지 구원이라, 구원의 기초 본질은 다섯 가지라, 구원의 본성은 또 다섯 가지라, 구원의 또 뭐 자체와 기업이 또 여섯 가지라 이래 가지고 전부 이래 열여섯 가지인데 이걸 조목조목으로 말해서 외워봐도, 외워봐도 시원치 안해요.

외워봐도 시원치 아니하고 그러면 그 이치는 맞기는 맞는데 어쩐지 내 속에 무엇인가 본능적인 그 기쁨과 본능적인 담대와, 본능적인 평강과, 본능적인 만족과, 본능적인 감사와, 본능적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고, 내 자체가 존귀하고 하는 이것이 없어.

본능적으로 되는 그것이 없고, 내게 있는 내 주관의 힘에도 본능이 일어나지 안하고 내 주관의 힘 외에 객관의 능력이 와 가지고 내게 역사하는 그런 것이 빈약하다 말이요, 이제까지 설교해 나가봐도. 이러니 이 고장이 어데서 나왔느냐? 이 고장이 어데서 생겼느냐? 생긴 것은, 처음 사랑 처음 행위라 말하니까 처음 사랑 처음 행위가 뭐인가? 교리와 신조보다도 주님이 주신 구원, 주님 주신 이 구원을 크게 여기고 이 구원에 대해서 감사하고 이 구원을 생각하니까 이 구원의 줄기를 통해서 이 구원을 내게 주신, 이 구원을 내게 주신 영감이 내게 역사하고 진리가 내게 역사하고 주님의 피공로가 역사하니까 그 역사가 하니까 내게 일어나는 파동이 어데서 일어나는지도 모르게 좋았다 말이오.

이래서 아무래도 우리는 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구원을 자꾸 뭐, 다른 교리와 신조보다도, 성경보다도 우리에게 구원 주신 이 구원을 자꾸 생각하고, 이 구원을 생각하고 구원을 연구하고 또 이 구원의 행위를 하고, 이 구원은 전부 사랑인데.

이 구원은 전부 말하자면 하나님의 사랑이요, 이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이 구원의 행동은 내 사랑의 행동이요 전부 이 사랑이요 이 행동 이 둘이 하나인 이것인데 이게 어데 나왔느냐? 구원에서 나왔는데, 이 구원을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여기에서 내 주관의 능력이 아니고 객관의 능력이 다 되고, 이 구원을 자꾸 생각할 때에 하나님과 연결이 돼지고, 이 구원을 생각할 때에, 이 구원을 생각할 때에 그 객관의 능력으로 내가 신앙 행위를 할 수가 있고, 이 구원을 그만 잊어버리고, 암만 교리와 신조 이런 무슨 도덕과 뭐 사회 모든 교계 이 복음 운동 암만 해도 이 구원이 내게 희미해지면 촛대도 옮겨지고 하나님과 나와는 끊어진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밤낮으로 제일 생각할 것이 이 구원이요 이 구원을 느끼고 이 구원을 자기가 누리고 이 구원으로 인해서 이런 것 저런 것 이르는 객관의 도움으로서 일어나는 능동의 모든 이 행위, 이 본능적인 행위,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되겠다.

그러기 때문에 여게서 이러고 보니까 가서 보면 아주 대신학자의 구원, 대목회자의 구원 이것보다도 저 시골에서 처음 믿고, 처음 믿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 사람의 구원이 오히려 앞서가고 위에 있을런지 모르겠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 구원은 이것 뭐 지식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거는 참으로 믿음에 있다.

이러니까 처음 구원을 자기가 생각하고 좋고 기쁘고 즐거운 그 믿음, 요것이 제일 중요하다. 이래서 우리 구원을 자꾸 생각하면은 거게서 나오겠다 이래 가지고서 이 구원을 자꾸 지금 생각해 보자. 자꾸 구원만 생각해 보자. 구원만 자꾸 생각해 보자.

‘우리 구원이 하나님이 영원 자존하신 분인데 자존하신 분이 우리 구원을 제일 첫 목적으로 당신이 시작했다. 하나님이 당신이 움직인 역사 중에 첫 역사로 움직인 것이 곧 나에게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요 나의 예택이다. 내 예택은 이렇게 참 거석하다.’ 그때는 처음에 이래 어려서 들었지만 자꾸 이 구원을 자꾸 생각해서, ‘예택 구원이 이렇게 크다. 이 구원 위해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정하셨다. 이 예정 이게 전부 내 구원 위해서 있다, 이 모든 창조의 존재가 내 구원 위해 있다.’ 자꾸 이 구원에 대해서 생각하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사람되어 왔다.’ 이것 뭐 놀랠 만한 깜짝깜짝한 일이 꽉 찼는데 이거는 내비두고 이 지엽이 되어 있고 있는 그 시선을 다른 데 돌려 가지고 다른 데 돌려 이래 놓으니까 외나 진짜에서 떨어졌다.

이래서 이제는 우리의 구원 이 구원을 자꾸 생각해서 구원을 생각하니까 뭐 기쁘고 즐겁고 좋아서 못 견디는, 내가 기쁘고 좋아서 못 견디고, 사회에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또 산업을 뺏기는 것도 모르고, 히브리 10장에도 보면 산업을 너희들이 뺏긴 것 직업을 뺏긴 것도 기쁘고 즐겁고 참았는데 지금은 조그만한 무슨 일이 있어도 참지 못하고 그만 꺼꾸로 돼 버렸다 그 말이오.

이거는 너희들이 모든 일을 이루시고 난 다음에 너희들의 구원을 이루려고 하는 것인데 우리 그만 이 구원만 보니까 자꾸 거게서 줄줄줄 뭣이 자꾸 나오는데 이 구원을 잊어버리고 구원 이루는 한 방편이 되어지는 ‘뭐 우리가 절제가 있어야 된다, 우리가 경건해야 된다, 우리가 또 뭣을 또 새벽예배를 봐야 된다.’ 그만 이런 데 힘을 딴데로 쓰다 보니까 외나 주력할 것을 주력하지 못했다 그 말이오.

내가 이거 나로서 신앙 간증입니다. 주력할 것을 주력하지 못했다.

뭐 성경을 공부해 가지고 성경에서 설교도 많이 했지만 나 할 일, 주님이 제일 원하시는 일 이 주력할 일을 하지 못해. 주님이 제일 원하시는 건 뭐이냐? 당신이 나에게 구원 주신 이 구원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구원 두고 노래하고, 구원을 자꾸 생각하고, 구원에 대해서 깨달아지고, 구원에 대해서 감사하고, 구원에 발동이 나서 구원의 발동으로 인해서 기쁜 그거 당신이 좋아하시고, 구원의 발동으로 인해서 하나님 사랑하는 그걸 좋아하고, 구원의 발동으로 인해서 만물 사랑하고 만인간을 사랑하는 그거좋아하고, 어쩌든지 이 구원이 얼마나 큰가 이 구원을 자꾸 새기고 새겨서 이 구원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요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되는데 그거는 없고 이 껍데기, “내가 네 행위를 안다, 또 네 수고를 안다, 네 인내를 안다, 내가 악한 자를 용납지 안하는 것을 안다, 사도라 하되 거짓 것을 드러냈다.” 뭐 이런 것 하는 이것을 좋기는 좋지만 당신 마음에는 만족이 없다 말이오.

좋기는 좋지만 네가 이것만 가지고는 나하고 떨어졌다 말이오. “어데서 떨어진 걸 생각하라” 나하고 끊어졌다. 나와 인연이 끊어져 버렸다. “내가 촛대를 옮기겠다” “네가 이 인연을 다시 도로 찾으면 하나님과 연결이 바로 되고 또 교회가 촛대가 바로 되고 교회가 그 자리 설 것이고 낙원에 네가 있을 것이고 생명 과실을 먹게 된다” 이러니까 이게 뭐인가? 이것이 곧 우리의 구원이다. 이것을 제가 생각하고 자꾸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처음 사랑 처음 행위라는 이것이 행위나 사랑이나 하나이다. 그러면 처음 사랑 처음 행위 그게 뭐인가? 그것이 곧 우리의 구원이다. 이러기 때문에 처음 것을 도로 찾아 가지라. 이 구원을 가지라. 그러면 가지는데 성자만치 가질까 성녀만치? 성자 성녀가 필요가 없어. 그거 주님이 말하지 안해. 성자를 네가 가져라, 성자가 돼라, 성녀가 돼라, 네가 사도가 돼라, 선지자가 돼라, 그걸 당신이 말하지 안해. 처음 것, 처음 것 그걸 당신이 원했습니다.

이러니까 이제 우리가 이 구원을, 그때는 구원을 우리가 아는 것이 쌀내끼만치 알았으면 우리가 구원에 대해 지금 아는 것은 콩내끼만치 알 것이고 주먹덩이만치 알 것이고 이 집채만치 알 것이라. 아는 것은 많은데 여게 대해서 이 구원으로 구원의 행위가 없어.

구원으로 말미암아 즐거운 행위가 없지, 만족한 행위가 없지, 이외에 뭐, 우리가 노래도 잘 불러요. ‘예수밖에 무엇을 달리 찾아보리요 복과 영생 다 예수니까 예수 한 분으로 만족하다’ 입술로는 잘하지만 이 구원으로 인한 행동이 없어. 이 구원으로 인한 이 파동이 없어. 구원으로 인해서 맺어지는 행동이 없다 그거요.

이러니까 이 구원으로 인해서 우리가, 내게 대해서는 이 구원으로 인해서 무쌍의 기쁨이 있어서 이 구원으로 인해서, 뭐 돈으로 기뻐하고 세상으로 기쁜 거 뭐 전도해서 교인이 나옴으로 기뻐하는 것보다 이 구원으로 인한 기쁨이 제일 기쁨이 돼야 되겠고, 또 제일 만족이 돼야 되겠고, 제일 감사가 돼야 되겠고, 제일 행복이 돼야 되겠고, 이 구원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그만 제일 사랑하는 그 사랑이 돼야 되겠고, 이 구원으로 인해 모든 피조물을 다 사랑하는 사랑이 돼야 되겠고 어짜든지 구원으로 인해서 구원에서부터 모든 것이 다 발생되고 여게서 동기돼 가지고 일어난 요거 당신이 원하시는데 이것이 실상 우리가 꺼꾸로 됐다 말이오.

인본주의라고 하나님 없습니까? 인본주의는 하나님 안 믿습니까? 인본주의라고 하나님 안 믿는 것 아니오. 하나님 믿소. 그런데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라 하는 건 신본주의는 하나님을 근본으로 하는 것이 제일 그것이 보다 그게 처음에 제일 씨종자고, 인본은 이 세상 인간 관계를 생각하고 하나님을 그 다음으로 뒀기 때문에, 하나님을 이호로 뒀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만 다 싫어하는 거라. 하나님을 일호로 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행동은, 하나님을 뭘 아요? 우리 구원을 생각하니 하나님이 가까워지고 알아지지 우리 구원 없이 하나님 모릅니다. 우리 구원으로 인해서 아는 하나님이 바로 아는 것이오. 우리 구원으로 인해서 하나님 사랑하는 그 사랑이 바른 사랑이고, 이 구원을 인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 두려움이 바른 두려움이고, 이 구원을 인해서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좋아하는 것이 그것이지 이 구원 떼놓고 달리 무슨 법으로 인해서, 또 도덕으로 인해서, 영광으로 인해서, 뭐로 인해서, 이 구원 빼놓고, 구원은, 일호인 이 구원은 빼놓고 막 그외에 딴거 이 에베소 교회가 많이 했다 말이오. 그거 가지고 하는 건 주님이 싫어해요. 당신이 이 구원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이 구원을 귀한 줄 알고, 이 구원을 보배로 알고, 이 구원을, 이 구원에 좋아서 못견디는 건 당신이, 이 구원을 인해서 좋아 못 견뎌서 당신이 좋아 못 견뎌 하는 그거 당신이 원하셔. 그런고로 요것을 굳게 잡도록 합시다.

하루 삼십 분 기도 놓지 맙시다.

반사 선생님들은 이 공과를 외우도록, 외우고 나서 명상하면 제가 언제 한번 거기 대해서 설교한 것이 나와요. 그 설교한 것이 자꾸 공과를 외우고 명상해야 그게 나오지 이 공과에는 그것 다 기록돼 있는 게 아니오. 공과에는 기록돼 있는 게 아닌데 이 공과만 외우고 자꾸 눈감고 생각하면 그 속에 그때 말한 것이 생각하면 거게 나와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어쩌든지 여러분들, 우리가 다른 것 다 좋지만 주님이 요구하시는 이 구원을 크게 여기고 귀히 여기고 이 구원에 좋아서 못 견뎌서 구원으로 인해서 하나님 사랑하는 걸 좋아하지 이 구원 내놓고 딴거는 아무 소용이 없어. 이 구원으로.

그게 사랑이요 행위라.

이 처음 것, 이뭐 예수 믿는 사람 다 할 수 있어, 처음 것. 예수 처음 믿을 때 그거야 다 할 수 있지 지금 우리가 다른 면으로 몇십 배 더 돼 가지고 안 있습니까? 처음 것, 처음 것이라 하기 때문에 우리가 위에 장성한 사람의 거석 하면 애를 써서 나가면 되겠는데 이건 그게 아니라. 처음 것이라 하기 때문에 우리가 처음에 할 수 있던 거 다 버려버렸다 말이오. 버린 그것을 찾아서 가져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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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6 천국의 기원과 그 법칙/ 베드로전서 1장 13절-19절/ 1989. 8. 6. 주일오전 선지자 2015.12.29
825 천국의 기원과 그 법칙/ 빌립보서 2장 1절-4절/ 1976년 12 공과 선지자 2015.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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