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종의 권위

 

1985. 1. 26. 토새벽

 

본문 : 디모데후서 4장 14절-18절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저는 직접은 듣지 안했지마는, 한 상동 목사님이 해방 후 감옥에서 나오셔  가지고 이북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 동안 증거하시고 월남하신 후  바로 주 남선 목사님하고 같이 오시는데, 주남선 목사님은 좀 먼저 오시고 그  다음에 한 상동 목사님이 오시는데, 오시듬 질로 거창읍 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때에 저는 거게 참석을 못 했습니다. 저는 그때에 그저  농업을 하고 있는 때라서 모든 육축들도 있고 이래서 내가 집에서 그것을  관리하고 가족들을 다 보냈었습니다. 보내고 나서 마지막 마치는 날은 그날은  새벽에 일찌거니 모든 것을 대략 간추려 놓고, 거게서 한 육십리 될 겁니다.

거게서 나서서 그래 도보로 참 달음질해 가지고 가기 전에 만나야 되겠다 해서  그렇게 일찍 내려왔습니다. 읍에 오니까 집회가 끝나고 모두 참석한 성도들이  여게 저게 더러 헤어지지 안하고 모여 가지고 있는 것을 방문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이번에 한 목사님이 집회 하는 데 나는 참석을 못 했는데 좀 그  받은 은혜를 나에게 좀 나눠 달라 이라면서 이런 사람저 사람 방문하니까, 다른  말은 제가 한 마디도 기억이 되지 않습니다. 않는데, 한 분이 있다가 말하기를  마태복음 28장 마지막절 20절을 소개를 하면서 한 상동목사님이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나 들어가고 난 다음에나 나올 때까지 늘 주님이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하신 고 약속을 언제든지 믿고 같이 계시는 것을 자기가  믿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겼다고 그렇게 말한다는 그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그때에 '아, 한 목사님을 이곳에 보내 가지고 증거한 것은 이것이다. 그 분이  또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참고 견딘 것도 이것이다' 하는 것을 그때에 저는  거기 참석하지 못했으나 참석한 거와 같은 그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 한 상동 목사님을 잠깐 서로 만났습니다. 만났으나 뭐 만나 가지고는  그바에 별다른 은혜를 내가 받지를 못했고 다만 고 말씀에서 내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분이 승리한 것도 역연 주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는 이 사실을 믿는 그  믿음의 눈이 흐린 것을 이런 성경 저런 성경을 자꾸 엮어서 생각하면서 주님이  그 목사님과 함께 계시는 이 사실을 믿는 그 믿음의 눈을 뜰라고 애를 써서 그  믿음의 눈으로 주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는 이 사실을 보는 그 눈이 차차 차차  밝아져서, 주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는 이 사실을 자기가 보는 눈이 밝아져서  같이 계시는 그 주님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모든 어려움을 이겼다 하는 그것을  제가 느꼈습니다. 그때 그것이 저와 꼭 동감이었습니다. 동감이라 참 옳은 것을  잡았고 옳은 연습을 했다 하는 것을 제가 그때에 느꼈습니다. 느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때 그 말을 해도 뭐 잘 못 알아 들었기 때문에 말은 안 해도 내  속으로는 '그분이 과연 승리할 수 있는 그런 길을 주님께서 그에게 주셨다'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게도 보면 사도 바울이 자기가 개적으로 대적하는 그런 어려운 환경을 이긴  것을 여게다가 말을 했고 또 자기를 상대하는 악한 자들을 이긴 것을 여게  말했습니다.

 '나를' '내곁에' '주께서' 17절에 '주께서 내 곁에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주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는 그 주님을 보는 눈이 정상적으로. 띄워 겼기 때문에  주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는, 이 함께 계시는, 곁에서서 계시는 이 주님으로  인해서 자기에게 모든 위로도 나왔고 담력도 나왔고 조심도 나왔고도 인내도  나왔던 것입니다.

 내가 사자의 이빨에서 건지웠느니라. 내가 사자의 이빨에서 건지웠느니라. 참  사자와 같은 그런 맹수성을 가지고 대적하는 그런 혹독한 대적에도 자기와 함께  계시는, 곁에 계시는 그 주님이 자기를 건지셨다고 그렇게 여게 증거를  했습니다. 그분도 초자연의. 인간으로서 가질 수 없는 그런 담력을 가진 것이나  그런 평안을 가진 것이나 또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그런 절제를 가진 것이나 또  인간이 가지기 어려운 그런 참 인내와 열심을 가진 그것이 전부 다 주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는 이 주님을 보는 그 시각 때문에, 보는 그 믿음의 눈 때문에  그는 꼼짝을 못하고 거게, 주님에게 피동돼서, 주님이 모든 것보다 더 눈에  바시고 두렵고 또 그분이 주는 위로가 어떤 위로보다 넘쳤고, 그러기 때문에,  자기 환경에서 닥쳐지는 그 온갖 어려움 그것보다 자기 곁에 계시는 주님이  자기에게 대해서 역사하신 역사가 더 강했던 것입니다. 강했기 때문에 그분은  주님을 범할 수도 없었고 또 주님을 무시할 수도 없었고 주님을 멸시할 수도  없었고 또 모든 것들이 와서 어떻게 한다 할지라도 주님으로 위로와 평강을  받았던 것입니다.

 다니엘 3장에도 보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그분들도 주님이 자기들과 같이  계시는 그것을 평소에 연습을 해서 참 모든 사람이 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안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거는 막바로 불에다가 던져서 태워 죽이는 죽음인데,  저희들 앞에 그 죽음이 닥쳐져도 그 죽음이 자기들을 충격 주지 못했고 자극  주지 못한 것은 그 주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는 그 계심을 보는, 자기 믿음의  눈으로 보는 자기와 함께 계시는 주님이 그 모든 것을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음을 믿는 고 믿음 때문에 그들에게 말하는 걸 보면은 아주 유유했고  평안했고. 아무런, 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그분들의 감각성. 그 감각이  주님에게만 피동이 됐지 그것들에게 조금도 피동이 되거나, 또, 자극성도  그랬고. 무슨 공포나 그런 것이 그들을 조금도 자극 시키고 충격시켜 주지를  못했고 순전히 주님만이 그들을 주관하게 됐고 거게만 주관을 당했던 것입니다.

 또 6장에, 다니엘 6장에 다니엘도 보면은 그래 했습니다. 다니엘도 그렇게 뭐  조서에 어인이 찍혀서 내려왔으니까 막바로 자기는 기도하면 사자 구더기에  던짐을 받는 사람인데, 그런 일을 당했지마는서도 그는 조금도 거기에 충격되지  안했고 같이 계시는 주님으로 인해서 오히려 자기가 주님에게 영광 돌릴 일을  생각하고, 주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는 거, 살아 계시는 거, 주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 줄 수 있고 함께 계시는 것을 보여 줄 수 있고 주님은 또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것을 그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됐다 해서  그는 감사하면서 조금도 그 모든 악한 자들의 안면이나 또 그들이 말하는  말이나 그들이 꾸며 놓는 공작 이나 그들이 시설해 놓은 시설에 조금도 거기에  억압당하지 안했고 층격당 하지 안했었습니다. 주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는  거기에 그로 인해서 평강과 위로와 담력이 나왔고 자기네들의 소원이 생겨  나왔습니다. '아 때가 됐다. 주님이 참으로 어떤 분이신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해서 그는 진정 감사하면서 주님 앞에 더욱 더 기도하는 일을  조금도 가림없이 문을 열어 놓고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과거와 꼭 같은  그렇게 기도를 계속했던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중요한 것이 많지마는서도 그저 우리의 전 소망이 주님에게  있고, 또 주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주님이고, 또 주님은 계약하기를 당신이  나에게 온갖 것을 다 잘 해 주시겠다고 계약을 했습니다. 또 잘 해 주실 수  있는 실력있는 분인 것을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잘 해 주신다는 것도  우리가 자꾸 말을 해서 연습을 해서 믿어야겠고 또 그런 실력을 가진 분이신  것도 우리가 믿어지는 믿음을 가져야겠습니다. 그래야 그분이 우리에게  약속하신대로 우리를 구출할 수가 있고 또 조건이 있기를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이 명령을 지킬 때에 해 주시마고 했기 때문에 그 명령을 찾는 방편도  자꾸 연습을 해 가지고서 숙달이 되어져야만 하겠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주님이 내 모든 것의 전부가 되고 주님 한 분으로서 어느  모나 모자랄 것이 없고 또 주님 한 분으로서 우리는 얼마든지 평강도 또 생명도  승리도 영광도 부강도 가질 수 있어서. 주님 한 분이면 내게 전부가 되는 이  사실이 우리는 믿어지는 이 믿음을 연습을 해야 되겠고 또 이 믿는 우리의  마음에도, 마음에도 여러 수십 요소가 있고 수십 종류가 있는데 그 마음의 온갖  종류가. 온갖 요소들이 다 주님을 이렇게 나의 구주된 것을 믿는 고 모든  마음의 요소가 돼서 마음의 그 각종의 요소가 하나도 의심하지 안하고 하나도  항거하지 안하고 다 요렇게 한결같이 내 마음에 있는 요소가 다 이 주님을  구주로 믿는 요 믿음을 인식을 우리가 시켜야만 할 것입니다.

 요 내 마음에, 고 지식에, 지식성에도 인식을 시키고 지혜성에도 인식을  시키고 또 감각성에도 인식을 시키고 또 무슨 감정에게도 인식을 시키고 또  욕심에게도 인식을 시켜야겠습니다. 우리가 평안하기를 원하는 안일 욕도  있으니 안일 욕심에게도 인식을 시켜서 주님에게, 안일 욕심이 주님에게 이렇게  자유하지 못하도록 안일 욕심도 내 곁에서서 나와 함께 계시는 그 주님에게  눌려서. 안일 욕신도 이 주님에게 눌리고, 또 교만도 눌리고, 또 살고저 하는  생의 욕심도 이 주님에게 눌리고, 또 이런 무슨 자기가 개적으로 이런 욕심  저런 욕심 모든 욕심이 이 주님에게 눌려서, 차차 연습 해서 내 욕심이 전부  주님에게 다 눌려서 꼼짝 못하고 주님에게 사로잡히게 되고, 내게 있는 모든  감정도 주님에게 사로잡히게 되고. 또 이런 분한 감정이나 또 애정이나 그런  어떤 정서든지, 정서가 주님에게,  자꾸 이와 같이 주님과 대조를 하고 이렇게 우리가 비판을 하고 생각하고 자꾸  이렇게 하면 평가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식을 알기 때문에, 아무 비판하지  안하고 평가하지 안할 때에 그것이 주장을 하지. 내가, 주님이 여게 계시는데  내 욕심은 이래 하자 하고 주님은 계시면서 주님은 그래 하지 말라 하시고,  주님의 욕심은 이래 하고 내 욕심은 이렇고 이럴 때에 우리가 그냥 행할 때에  그게 돼지는 것이지 그때에 비교하고 평가할 때에는 주님이 소원하시는 소원은  이렇게 하라 하는데 내 소원이 이래 한다는 그것을 주님을 생각하고 둘을 자꾸  비교를 하면은 우리가 주님의 욕심을, 주님이 내게 소원하신 소원을 버리고 내  욕심. 주님이 하지 말라는 그 욕심을 행할 만한 그런 담력은 없게 됩니다.

 혹 처음에는 담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담력이 있을 수 있는 것은 내 욕심에만  그것이, 욕심의 힘만 아니고 욕심의 힘 밖에 그 욕심을 협조하는 세력이 있으니  그것이 뭐이냐? 우리의 습관입니다. 우리의 연습. 내 욕심 대로 행했고,  하나님의 소욕대로 하나님의 소원대로 하지 안하고 내 욕심 대로 했던 그런  일이 한 번 두 번 해서 벌써 버릇이 돼 가지고 습성이 딱 돼 가지고 있으니까  그 하던 버릇 그것이 자꾸 하고 싶어서 버릇이 벌써 우리에게 자꾸 버릇을  들이면 그 버릇 그것이 우리라 천성이 된다고 심리 학자들이 말을 했습니다. 그  습성, 자기가 자꾸 연습하고 연습하는 그 습성은 제이의 천성이 된다. 근본  천성은 사람에게 있지마는서도 사람이 만든 천성이 된다 그렇게 안 믿는  심리학자들이 통계를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자꾸 연습을 해야 되겠습니다. 해서 안약을 발라보게 하라  하는 말씀은 우리의 그 심령의 눈 믿음의 눈, 믿음의 눈을 자꾸 이렇게, 안약을  발라서 믿음의 눈을 치료해라 하는 그 말씀인데, 안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자꾸 생각해서 내가 내게 있는 연습을 자꾸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함으로 그 연습이 차차 차차 그 연습이 나를 죽이는 연습이며 그  연습이 주님을 노엽게 하는 연습이며 그것이 백해무익의 연습이라,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보는 눈 주님이 내게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그 주님,  주님 한 분 가지고 못할 것 없는 이렇게 필요하고 중요하고 요긴하고 또 제일  무서운 주님, 또 제일 능하신 주님,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주님이신 것을  내가 성경 말씀 가지고서 자꾸 이렇게 새김질 하겠습니다. 말을 하고, 자꾸  말을 해서 내게 있는 어떤 연습이든지 악한 연습, 자기 중심으로, 한 그 악습,  자기 중심으로 행동한 그 한 행동 두 행동 악습이라는 그 악습이,  차차 차차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이 사실을  말씀을 가지고 자꾸 함께 계신다 계신다 이렇게 해서 내 지식이 차차 차차 열려  가지고서, 내 지식의 눈이 열려서 내 지식으로, 주님이 내게 함께 계신다 나와  지금 같이 계신다 하는 것이 내 지식에 가득 차서 내 지식을 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이 사실을 다 인식해서 내 지식 전부가 확실히 인식을 하고, 또  이렇게 해서 이 지식 가지고서 내게 있는 그 악습에게 달라들어 가지고서 이  악습을 차차 차차 자꾸 인식시켜서 이 악습이 이 지식에게 지배를 받고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에 지배를 받는 이일을 자꾸 해서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이  계시는 주님이 벌써 내게 있는 악습을 점령을 해서 이 주님을 배반하는 악습  이것이 주님을 배반할 수 없도록, 이 악습이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무시할  수 없도록 이 악습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고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이 나를  지배할 수 있도록 이 악습을 차차 차차 이것을 내 지식으로 내 지혜로 내가  믿음으로 이제 지식이 믿음이 되는 것인데, 이 지식으로 믿음으로 인해서 내게  있는 악습이 차차 차차 죽어져서 악습이 꼼짝 못하도록 요렇게 우리가 평소에.

연습을 해 놔야 되겠고, 또 요 악습을 요것을 차차 차차 죽여서 내 곁에 계시는  나와 함께 계시는 이 주님이 내게 있는 악습을 이길 수 있고, 악습 내가 내  곁에 나와 함께 계시는 그 주님을 인해서 이 악습에게 내가 과거에는 따라서  악습 이놈이 가자 하는 대로 갔고 오자 하는 대로 왔고 악습 이놈이 하자 하는  대로 했는데 이제는 악습보다 주님이 내 눈에 확실히 보여서 이 악습을  버렸으면 버렸지 주님을 버릴 수가 없어서, 두려워서 버리지 못 하고. 내게  계시니 버릴 수 없는, 이 악습을 내가, 악습에서 끌리지 안하고 주님에게  끌리고 악습에게 내가 땀지 안하고 주님에게 따를 수 있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그것을 차차 연습을 해서 내게 있는 그 악습을,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이 계심을 믿는 내 믿음이 이 악습을 이길 수 있어야 되겠고,  또 그 다음에. 이제 악습을 이기고 나면 그 다음에는 내게 있는 악성 이것이  있으니까 악성 이것을 차차 이겨서,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이 사실을 믿는  요 믿음이 내게 있는 악성 그것을 이겨서, 내게 있는 악성이 있지 마는 악성  그놈대로 악성 그놈대로 내가 행동할 수가 없는 것이 주님이 내 곁에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이 주님 때문에 내가 이 악성대로 하지 못해서, 내 악성이 나와  함께 계시는 이 주님에게 제재를 받아서 함께 계시는 주님으로 인해서 내게  있는 악성이 꺾어져서 내 악성을 평소에 연습 해 가지고 이 악성이 나와 같이  계시는 이 주님을 그만 잊어 버리도록 주님을 무시하도록 이래 하지 못하게,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 주님이 내게 있는 악성 이것을 꺾어서 악성이 제대로  하지를 못하고 제 욕심대로 하지 못하도록 이 연습을 해서, 내게 있는, 악성  이라면 내 중심의 것인데 내 중심의 것이 주님 때문에 주님에게 방해를 받아서  하지 못하고, 이러니까, 자꾸 눈을 밝혀 놓으면 주님이 보여지니 이것을 자기  악성대로 할 수는 없고, 그러니까. 주님의 낯을 피할라 해도 피해지지 못하는  이런 단계가 와서 어짜든지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 때문에 내게 있는 악성이  제재를 받다가 나중에는. 처음에는 악성은 나와 친하고 주님은 암만 이와 같이  보고 연습해도 주님과 나와 성글고 멀고 악성 이거는 좋기 때문에 자기인 줄  알기 때문에 악성으로 할라고 자꾸 이래 하다가 그 연습이 차차 많아지면  이제는 이 악성이 자기를 해친다는 것과 주님이 자기에게 유익을 준다는 거.

이래서 주님과 나와 친교된 이 친교가 악성과 친교된 거보다도 차차 중량이  높아져서 더 친해지면, 친해져서 이 악성을 적인줄 알고 악성을 한 번씩 두  번씩 버리기를 시작하게 되면은 이것이 잠깐 이것이 버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벌써 안에 성령님이 우리를 살렸고 진리가 우리를 살렸고 주님의  대속의 공로가 우리를 살린, 벌써 내게 있는 주격이라는 그 영은 살아 가지고.

이 셋으로 살아 가지고, 셋의 힘으로 살아 가지고 있는 내 주격 내이기 때문에,  내 영이기 때문에 안에서 역사하지, 또 마음과 몸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이래 읽고 들려지고 이래 가지고 인식을 해 가지고 있지 이러니까, 사람이  생각만 하면, 생각만 하면 거기서 평가가 나오기 때문에 그 악령과 악성과  악습이라 하는 것은 그것은 꼼짝을 못 하게 됩니다.

 왜? 우리는 평가적으로 이게 옳다 하는 걸 알고 있고 또 비판적으로 이것이  바르다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요한계시 3장 8절에 보면 사데  교회에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었다' 그전에는 그렇게 실상이라는  말이 거게 들어 있었는데 지금은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자로다' 하는,  뭐 그 말도 괜찮기는 괜찮습니다. 산 것이 반대 죽은 것 아닙니까? 어떤 사람이  그 원어를 보고 말하기를 '아, 고거 말이 맞습디다. 고 살았다 하고 죽었다  하는 데는 살았다는 고것의 반대라 하는 고런 말이 거게 들어 있습디다' 고거  내나 거게, 원어 안 봐도 다 거게 다 뜻이 나와 가지고 있다 그거요.

 그런데, 거게서 죽은 사데 교회가 살아나는 데 대해서 살아나는 방편을  간단하게 말했습니다.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또 어떻게 들었는지' 그러면  어떻게 받은 것은, 주님의 대속이며 또 대속으로 인해서, 대속을 인해서 내가  받은 거 여러 가지 있습니다. 영감도 대속으로 인해서 받았고 진리도 대속으로  인해서 받았고 새생명도 대속으로 인해서 받았습니다. 어떻게 마련 한 것을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또 어떻게 들었는지' 고 방편 하나 말했습니다.

'생각해라' 그러면, 생각하면 된다 하는 고 생각 하나를 말했습니다. '생각하여  지키어 회개하라' 생각하면 받은 거와 들은 것을 자기는 지켜 야 되는 줄 알기  때문에 그걸 안 지킬 수 없고 또 지킬라고 하고 보니까 하나씩 필연적으로  고쳐야 되겠고 이러니까 고만 이라면 이기는 자가 되다 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참 받은 거 들은 거 이를 가지고 자꾸  따져서 비판을 해야 되겠습니다. 이래 가지고 자기가 평소에 없을 때에 앉아서  자꾸 명상하는 것이 그 명상이라.

 언제 내가 말했지마는서도 성자 프란시스라 하면은 참. 그분이 성자 노릇 한  그것은 조금 보면은 미개적은 미개적이고, 농촌의 그때 성자라고 한 그 사람의  이름을 내가 뭐라고 했지? 네빌린인가 내필린이든가? 뭐 뭣이 고 농촌의 사도라  하고서 하는 고 책이 하나 나와 가지고, 그 책을 누가 가지고 갔는지 그만  없어. 책 도적도 또 도적질이오. 그거, 그것도 안돼.

 프란시스가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러 갔는데 한 달 동안 기도하면서 기도 하는  것을 제자들이 엿들었는데, 엿들으니까 늘 기도 한다는 것이 주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는 그 연습을 하는데, 이제. 함께 계시는 연습이 다 그분은 다  통과됐기 때문에 그 분을 거슬려서 같이 계시는 그분의 눈을 거슬려서 그분의  비위를 상하는 일을 하지를 못했고 또 그분의 성질에 거슬리는 걸 하지를  못했고 또 그분의 소원에 해당되는 일을 자기가 거부하지를 못 했던 생활을  했는데, 그때는 무슨 연습을 하느냐 하면은 한 달 동안 연습하기를 자꾸 자기와  같이 계시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다 하는 그것을 알기 위해서 아버지는  누구십니까?' 또 이래 묻고 난 다음에 누구심을 자기가 깨닫고는 참 감탄해서  자기가 울고, 또 '주님은 누구십니까?' 또 이렇게 묻고 '그러면.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은 누구십니까?' 또 이래 묻고 울고. 또 그라고 난 다음에는  '나는 누굽니까?' 또 이래 물어 가지고서 자기가 거게서 참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이렇게 하더라고.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자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서 사건이 닥치기 전에,  과거는 자기가 알고 있기 때문에 과거를 가지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그 사실을 이렇게 대조해서 자기가 생각 할 때에 그  모든 것이 과거가 후회가 될 것입니다. 후회가 되고, 이 연습을 자꾸 이렇게  하면. 내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영감이 있고 진리가 있기 때문에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이 사실을 내가 자꾸 믿음으로 또 밝히 보고 또 보고 또  믿음으로 또 생자해 보고 또 생각하면은 믿음이 생겨집니다. 생각하면 믿어지지  않습니까? 생각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믿게 되고 믿게 되면은 행동하게  되고,  이러니까, 자꾸 앉아서 명상으로 자기에게 있는 온갖 과거 지나간 연습은 습관  버릇, 자꾸 한 번 두 번 해 버릇 하니까 해 버릇 하는 그것이 자꾸 강해져  가지고서 내게 있는 버릇, 습성, 못된 버릇 말이지요, 고것이 들어서 나를  탈선되게 했는데 고 버릇을 잡아 놓고. 요 버릇 고걸 잡아 놓고 내 곁에 계시는  주님과 이렇게 대조를 할 때에. 지나간 과거 일은 더 쉽습니다. 과거일은 '아,  요거 요렇게 한 게 잘못됐다' 고렇게 과거에 잘못 된 것을 한 고것이, 잘못됐다  잘못됐다 하는 그것이 자꾸 자기에게 느껴지고 생각이 돼진다 말이오. 느껴지고  생각이 돼지면 고 연습이 거게서 자꾸 깨지고 차차차 녹아지고 주님을 보는 고  믿음의 눈을 인해서 자기 습성이 차차차 거게서 녹아져서, 주님이, 같이 계시는  주님으로 인해서 자기 그 습성이 허리를 들지 못하도록. 그 습성이 나타나지를  못하도록 이래서 습성을 꺾어 죽이는 그 일을 자기가 자꾸 연습을 하고 그것이  차차 연습이 되는 데 따라서 자기에게 있는 악성, 그것은 해 놓지 안하고, 모든  것을 건설하지 안했고, 건설하지 안하고 건설할라고 지금 하는 모든 원동력이라  말이오. 그 습성을 악습 악습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악성입니다. 악습을 조성 할  수 있는 악습의 근원인 그 악성. 악성 이것을 자꾸 내가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으로 인해서 그 악성 이것을 죽이는 일을 자꾸 이렇게 연습을 해서 악성이  죽어지고 나면 그 다음에는 악령 그놈이 밉다 그말이오. 악령을 그라고 나면  악령이라 하는 것이 뚜렷이 보여져요. 이라면은 믿음의 눈으로 '아. 요거는  악령이다 요게 보여져서, 이제 악령을 보게 돼서 악령을 자꾸 물리쳐서 악령과  나와 뚜렷이 '이거는 내 적이라 원수라' 하는 걸 생각해서 악령이 똑똑히  보여지면 악령을 배척한다는 그 배척은 필연적으로 우리가 배척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거는 다 어디서 나오느냐? 생각에서 나온다 그말이오. 생각에서.

자꾸 생각하면 우리는 영감이 우리에게, 생각을 안 하기 때문에 영감이  우리에게 손을 대지 못하지, 자꾸, 생각이라 하는 것은 자꾸 더듬어 찾는  것이니까 생각하면 영감이 나를 손을 잡을 수가 있고, 또 진리가 나를 손을  잡을 수가 있고, 또 나를 대속하신 공로가 나를 손을 잡을 수가 있고, 또  대속의 공로를 가지고 오신 주님이 나를 손을 잡을 수가 있다 그거요. 이러면  내게 있는 악습 이놈을 차차 차차 죽여서 원수라는 걸 처음에 인식하고 확실히  원수라는 걸 인식만 하면 이깁니다.

 우리는, 왜? 이 모든 악성이나 악습이나 악령이 우리에게 왕 노릇 하지 못한다  하는 그 말씀을 로마서에 말씀해 놨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참 어떤 들은 사람들 가운데 아마 많이 놀래고 며칠 동안 견딜 수 없는 그런  기쁨을 가졌을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예수 믿고 난 다음에 한 몇 달 지나고 난  다음에 이 로마서에 죄와 사망이 왕 노릇 하지 못한다 하는 이 성구를 보고서  내가 그때 어떻게 놀래고 기뻤는지, 참 왕이라고, 왕권을 가졌으면 주권 가졌기  때문에 꼼짝을 못 하는 데. 이것이 왕권을 가지지 못했으니까 그까짓 거야  쫓가낼려면 쫓가낼 수 가 있다 그거요. 과연 그렇습니다.

 이래서, 악습도 내가 똑똑히 원수라는 것을 발견해서 원수라는 것을 알고 벌써  생각해 가지고 비판하고 평가하면은 그까짓 게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놈은  쫓겨나게 되고 깨지게 됩니다. 박살이 돼 버립니다. 악성도 그러하고 악령도  그러하고, 이런데, 악습과 악성과 악령 이것이 제라고, 자기라고 착각을  일으키는 고걸 가지고서 마귀 이놈이 우리를 미혹을 주지 자기가 아니고 이거  원수라는 것만 알고, 원수라는 걸 알아서 벌써 이걸 비판할라고 하면은  비판하기 전에 그놈 녹아 버립니다. 비판하기 전에 녹아 버려요.

 이렇게 해서 우리에게 있는 감정이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을 감정이  알고, 또 지식이 알고, 우리의 성품이 알고, 우리의 욕심이 알고 이래서,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 함께 계시는 이 주님에게, 평소에 나와 함께 계시는 이  주님에게 내게 있는 욕심이 주님 때문에 이놈이 제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나와  둘이 싸워서, 주님 모실라 하니 내가 욕심하는 이 욕심에게 거리끼고, 욕심과  주님이 대립이 되고 성품과 대립이 되고 내게 대립된 그것이 모든 간단하게  말하면 습관에 속한 그것들이요 또 내 성질에 속한 그것들이니, 내 성질이  저거에게 사로잡혔다 그말이오. 사로잡히고, 또 내게 나 아닌 객관에 있는 어떤  영의 새력이 와 가지고 날 사로잡는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거는 악령과  악성과 악습이라 하는 이걸 볼 수 있다 말이오. 또렷이 보고 이것이, 이것을  보고 주님하고 둘을 같이 봤다면 이거는 녹아졌습니다. 벌써 봐서 '아, 주님은  이런 주님이시다' 하고 나서 보면 그놈이 없습니다. 벌써. 악성과 악습과  악령이라는 것이 주님을 잊어 버렸을 때에 그게 내게 와 역사하지 벌써 주님을  찾아 가지고 '아, 주님은 이러한 주님이신데' 하고서 보면은 그거는 벌써 도망  쳤습니다. 도망을 쳐도 그놈이 어디 멀리 가지 안했오. 도망쳐도 내 속에 숨어  들어있습니다. 숨어 있기 때문에 그놈을 숨어 있을 때 그때 어디로 갔는갑다  하고서 안심하는 사람은 그 다음에 그것이 나도 모르는 무의식 중에 빨리 나와,  빨리 나오니까, 재빨리 나오니까, 나왔을 때는 그것이 악습인 줄을 모르고,  악성인 줄을 모르고 악령인 줄을 모르고 그게 내인 줄 알고. 그러면 그놈이,  다시 말하면 옛사람 그놈이 어떻게 민첩하게 나 오지지 새사람이 나와서  새사람을 내가 발견해 가지고서 '이 사람이 내다' 할 때에는 그놈이 어디로 간  곳이 없는데 이걸 잊어 버리고, 까맣게 새사람을 잊어 버렸을 때에만 그게 와  가지고 역사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신앙 생활은 생각만 하면은 그거는 녹아지기 마련입니다.

마치 아무리 어두움이 깜깜하다 해도 빛이라는 이 등불을 들면 어두움은 언제  어디로 갈 것도 없이 녹아져 버리고 없습니다. 등을 들어 보시오. 등들고 이와  같이 가면은 어두움은 언제 녹아져 버리는지 들고 가는 데로 대항 할 것도 없이  그만 녹아지지 않습니까? 이러니까, 등불이 없으면 그놈이 날 어둡게 해  가지고서 나를 심히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평소에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이 사실을 자꾸  인식을 하도록 연습을 이렇게 해서 연습을 앉아서 우리가 지식적으로 연습을  합니다. 자꾸 연습, 그거 좋습니다. '주님이 함께 계신다 주님이 함께 계신다.'  또 함께 계신다는, 과거가 내게 있으니까 과거를 전부 들어 가지고 '이럴 때  주님이 함께 계신데 주님을 배척하고' 이런데, 요 해 놓은 것은 연습이니까,  했으면 연습이요 하도록 주력하는 것은 악성이요. 해놓은 것은 악습이요 또  하도록. 하도록 주력하는 그것은 악성인데 악성 그놈 속에 악령이 들어서  지배를 하고 있다 말이오. 그놈의 감화를 받았다 말이오. 발견만 하면 절단이  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꾸 지식으로 자꾸 연습을 하고, 과거 것을 들어 가지고서 이렇게.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을 내가 인식할라고, 내가 믿음으로 함께 계심을  내가 믿는 인식입니다. 내가 믿을라고, 인식할라고, 없는데 자꾸 그래 연습을  합니다. 인식을 합니다. 그것이 뭐이냐 하면은 안약을 발라서 보게 하는  것입니다. 자꾸 이와 같이 지식하고 지식하고 하니까, 처음 에는  무시했지마는서도 자꾸, 아무리 무서운 것이라도 처음에는 무서운 줄 알았는데  차차 차차 자꾸 '그게 네게 필요 하다 필요하다' 하면은.

 얄궂게 누러이. 누런 게 이렇게 토넙터기 같은 게 누런 게 있으니까 '아 이구  징그러워 저게 뭐꼬?' 이랬는데, 자꾸 말이요, '야, 누런게 그게 무서운 게  아니라 그게 지금 돈으로 하면 얼마짜리다 얼마짜리다' 자꾸 인식을 시키니까  '그거, 그게 그러면 뭣 돼?' '빵도 된다' '빵도 된다?' '그게 아니라 빌딩 집도  몇 채 살수 있다' 자꾸 이라니까, 인식을 자꾸 하고 보니까 이 붙는다 말이오.

'아, 그렇구나.' '참말로 노렇습니까' 하면서 이걸 떡 어데 가 가자고서 '자,  이거 돈 얼마 줄라요?' 하니까 '돈을 몇천만 원 주지' 이라니까 '하 이게  보배로구나.' 가치를 깨닫고 보니까 정이 붙는다 말이오. 나중에 가서는 그  금덩이 징그럽다 하는 것을 똘똘 싸가지고 안 품에 집어 넣습니다. 안 품에  집어 넣어 놓고 잘때도 이걸 뭐이 가져갈까 싶어서 잘 때도 딱 거머 안고 잔다  그말이오. 자꾸 우리 지식이라 하는 건 지식하면은 자꾸 지식이 돼 가지고서  인식이 돼지고 그래 가지고서 그만 그것이 자기가 고대로 변화가 돼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과거 연습은 지난 거는 과거를 들어 가지고서 나와 함께  계시는 이 주님을. 자기 눈에 안 보이니까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  그렇지요. '함께 계신다. 함께 계시는데 내가 과거에 이렇게 했다 저렇게 했다'  자꾸 연습을 해서 자꾸 이렇게 하다가, 그러면, 과거 이거는 다 논리 연습이오,  논리 연습. 논리 연습인데. 이제 실지로 실험 연습이 있다 말이오. 논리  연습인데, 자기가 현재 닥쳤을 때에 '아 요것은 내가 참 요거는 싫은데, 요거는  싫은데, 주님. 내 곁에 계시는 주님이 요것을 하라 하니까, 싫은데 주님이 하라  하신다. 싫은데 주님이 하라 하신다. 주님이 하라고 하시는데, 내 곁에 계신  주님이 하라고 하시는데 나는 싫은데, 싫어도 내 곁에 계시는 주님이 하라고  하니 요걸 싫지만 안 할 수 없다' 해서 내 곁에 계신 주님 때문에 하기 싫은  것을 한번해 봅니다. 할 때에 주님이. 내 곁에 계신 주님이 보여지는, 눈이  조금 이 흐려져서, 우리 ○ 목사님이 눈을 치료했는데, 뭐 보이느냐 하니까  하나도 안 보인다 해. '야, 좀 조심을 자꾸 해라' 이러니까 안경을 쓰고  이라는데, 또 내가 좀 후에 또 보이느냐 물으니까 '아, 보입니다.' 또 그 뒤에  내가 또 물으니까 영점 뭐, 영점 사가 제일 좋소? 예? 눈이 얼마가 제일 좋은  눈이라? 예? 일점 이? 나는 그런 배울 때 그런 거 다 무시해 몰라. 영점 이인지  일점 이인지, 그래 그때 영점 사라든가 이런데 '이거는 꼭 어린 아이 눈  같습니다.' 그렇게 됐다 그거요. 처음에는 안 보이더니만 차차 차차 자꾸 이거  치료가 되니까, 그래서 아주, 아주 아이들 눈과 같이 아주 똑똑히 보이도록  됐습니다. 그렇게 말해요. 자꾸 자기 속에, 속에 본능이 있지 또 실력이 있지  이러니까 자연 치료가 돼 가지고 이와 같이 치료가 돼지는 것이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참 아무리 눈을 뜬, 내가 오늘 책에 보니까 눈 뜬 고기를 광선  없이 새카만 데 놔 놓고서 한 달 키우고 나면은 눈이 멀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다고서. 그만 눈이 멀어 버린다고서. 또 차차 차차 광선을 줘서 이 모든  사물을 볼 수 있도록 해 놓으면 차차차 눈이 뜨인다고. 우리도 그래요. 그렇지  않습니까? 눈 좀 오래 감고 있으면, 젊은 사람은 안 그렇지만 나이 많은  사람들은 눈 뭐 얼마만 감고 있으면 그만 뭐이 안 보입니다. 한 두 서너 시간  이와 같이 뭐 좀 명상한다고 이래 가지고 있다가 고만 이라면 깜깜하이  아무것도 안 보여, 그만. 벌써 어두워겼다 말이오. 한번 연습,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꾸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이 사실을 보는 이  믿음의 눈을 우리가 가져야 되겠는데, 확신의 눈을 우리가 가져야 되겠는데  이것을 논리 연습을 자꾸 해야 됩니다. 자꾸 눈을 감고 자꾸 '계신다 계신다'  논리 연습을 하다가, 논리 연습을 할 때는 과거를 하나의 대상으로 들어 가지고  주님 계시고 나는 과거 이걸 들어 가지고 대조를 하면서 자꾸 연습을 하고,  이라다가 이제는 고 실지의 현재의 실험 연습, 실험, 실지로 설험하는 그 실험  연습을 한다 말이오. 그러면, 현재에 내가 하고 싶은데, '요건 주님이 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주님이 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주님이 보이나 또 그래 돼  버린다 말이오 그럴 때에 '주님이 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요거는 내가 해야  되겠느냐, 주님이 하지 말라고 하시니' 요 내 습성 요놈은 자꾸 해라 해라  하고서, 내게 악성 요놈은 자꾸 해라 해라 하지마는서도, 악성이 해라 하고  악습이 해라 하지만 주님은 하지 말라 하니까 요 둘이 서로 견제가 된다  말이오. 둘이 어느것을 네가 환영을 할려느냐 할 때에 고때에 이제 주님을  배척하고 요 악습을 환영해서 따라갈 수도 있고 악성을 따라갈 수 있는데,  고때에 고 실지에서 요 악습과 악성이 말할지라도 주님을 대우해서 주님을  따라서 요것을 안 해 본다 말이오. 안 하고 주님을 따라서, 하지 말라 하니까  안 하고,고거 안 했을 때에 우리 눈은 쏵 밝아집니다.

 또 요거. 주님은 요거 하라고, 주님의 소욕은 요거 하라 하는데 나는 지금  요걸 하기 싫어합니다. 악습 요놈도 하지 말라 하고 악성 요놈도 하지 말라  하고 오든 욕심도 하지 말라 하고 주님은 하라 하고 요런데, 고게 서로 견제를  한다 말이오. 서로. 서로 대립이 돼 가지고 되니까 이거냐 이거냐 자꾸 앉아서,  자기 생각으로 연습을 많이 하고, 실지로 현실을 당면 할 때에 현실에 연습하는  것이 고것이 바로 실험 연구입니다. 실험 연구,  실험할 때에 현실에 주님은 요것을 원하시고 요것은 이 악령과 악성과 악습은  원치 안하고, 원치 안하고 주님은 원하고 안 원하고 요럴 때애 요 원하고 안  원하고 요 둘을 대조시켜 놨을 때에 고 가운데에 내가 나옵니다. 이러면, '아  나는 어떠냐? 이 주님이 원하시는 이것이 내가 평가적으로 옳으냐 비판적으로  옳으냐? 이게 옳다' 하는 것이 내게 있는 것이 보여집니다. 옳다 하는 것이  있는 것이 보여지는 동시에 자꾸 이 왼쪽에 이것이 하고 싶은 거, 악령과  악성과 악습대로의 이 하고 싶은 거, 주님이 소원한 것을 하지 안하고 이거  소원하는 대로 할라 하는 이것이 있다는 것,  여게서, 고런 가운데서 로마인서 7장에 말한 거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둘이라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자기가 둘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자기가, 보면 둘뿐  아니오. 둘뿐 아니고 여럿입니다. 자기가 둘이라는 걸 발견하고 '이놈은 내가  아니다. 이놈은 나 아닌 원수요 나를 죽인 내다' 하는 그 말이 듣기는  쉽지마는서도, 내 아닌 내라는 그놈, 나를 죽인 원수인 나 그놈, 나를 속인 나,  나 아닌 나 원수 그놈인 것이, 그놈이 발견이 되고 이놈이 발견이 되고 이제  진리와 성령과 주의 공로로 중생된 내가 뚜렷이 있다는 거,  벌써 내라는 것을 발견할 때에 참 나는 하나님하고 꼭 같고 보니까. 생각도  같고 소원도 같고 성품도 같고 미도 같애. 도덕의 미나 뭐 생각이나 그런 거  보니까 '아주 이 사람이야 말로. 이 사람이야 말로 깨끗하다 이 사람이야 말로  완전하다' 그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시편에 대해서 시편 기자들이 '주여 나를 보십시오. 뭣이 당신  앞에 거리낌이 있습니까? 살펴 보십시오. 나는 완전합니다.' 하는 그 성구를  제가 볼 때에 그분이, 고 시편 기자가 고 단계에 가 가지고서 자기를 참 자기를  발견한 그사람의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자랑하는 게 아니라  '나는 주님 앞에 완전합니다. 내게 흠이 있습니까? 흠을 찾아 보십시오.'  다윗도 말했습니다. '흠을 찾아 보십시오.' 이랬는데 그게 자기 자랑이 고  교만이라고 이랬기 때문에 시편 주석가를 다뒤비 보니까 다 엉뚱한 소리 해  놨오. '이거는 사람으로서 그렇다는 것이 참 자기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참  자기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참 자기가 그렇다는 말 자기는 그런 사람이라  말이오. 그것이 주님을 자랑하는 것이지 자기를 자랑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자기 아닌 원수 그놈을 발견했고 참 하나님으로 구속 받은 참 중생된 참 자기,  하나님의 말씀의 씨와 성령의 씨와 대속의 공로의 씨로 인해서 돼진 참 자기를  발견하고 보니 그야 흠이 점이 없습니다. 얼마든지 맞어. 그를 칭찬한 게 주를  칭찬한 거요.

 이래서, 발견할 수 있는데, 이래 가지고서 자기 현실에서 거게서 자꾸 자기  현실에서 주님을 찾아서 찾고, 자기 현실에서 이 모든 걸 찾고 이래서, 자기  현실에서 주님을 잊어 버리기 쉬워요. 자기가 묵상 가운데에서 많이, 명상  가운데에서 많은 연습을 하고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인식을 자기  지식성에게, 지성에게 인식을 시키고 자기의 감각에 인식을 시키고, 자기의 그  모든 상상에다가 인식을 깊이 시켜 놓으면 자기 현실에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 하는 그것을 아주 잊어 버리기도 쉽고 급할 때는 그만 잊어 버리고 그만  넘어 가지마는서도 생각만 하면 확실히 드러납니다. 생각만 하면 주님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주님이 나타나시면 자기와 함께 계시는 이 주님과 또 이 주님의 지금  사상 주님의 주장과 주님의 주장에 대립되어 있는 주장이 있는데 대립되어 있는  주장이 내게 있다 말이오. 내게 있는 고걸 살펴보면 요게 악습이요 악성이요  악령으로 말미암았다는 요 주님과 대립된 자가 자기에게 있다는 것이  발견됐으면, 주님과 대립되면 그거 망할 것 아닙니까? 그놈이 원수 아닙니까?  그놈이 자기 아니고, 영생할 자기는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자기가 알 수가 있지  않습니까? 확실히 알 수가 있다 말이오.

 이렇게 생각이 됐을 때 그때에 '아, 주님이 계시니, 주님의 소원이 이러니  주님 안면 때문에 내가 못 하겠다' 주님이 자기에게 보여, '주님이 빤하게 같이  계시니 어찌 주님을 이렇게 멸시할 수가 있느냐, 무시할 수가 있느냐? 주님이  자꾸 소원하시는데, 이분이, 나에게 어떻게 해 주신 분이 소원하시는데 이분의  소원을 거부 하고서 어떻게 할 수 있느냐?' 이래 가지고 주님에게 대한 차차  체면이 생겨지고 염치가 생겨지고 차차 자기의 지각이 생겨지고 자기의 믿음의  눈이 차차 이렇게 생겨져서, 자기 현실에서 주님의 소원 하시는 것이라면 내게  악령 악성 악습이 소원하는 것이라도 그것을 버리고 주님이 소원하는 대로  기울어지고, 주님의 욕심과 내게, 있는 욕심과 둘이 마주쳤을 때에 그 현실에서  주님의 욕심을 내가 딿고 또 주님의 감정과 이것들의 감정과 둘이 대립됐을  때에 그때에 거게서 아무리 그렇지마는서도 대립만 시켜서 생각하면  됩니다.생각하면 주님의 감정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말이오.

 이렇게 해서 한 번 두 번 요렇게 하는 가운데에서 우리는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이 사실을 믿어지는 이 믿음이, 이 믿음이, 믿어지는 이 믿음이 내게  있는 주님에게 거슬리는 욕심이, 내가 주님이 함께 계시는 이 사실을 믿는  믿음이, 이 믿음의 힘이. 주님에게 거슬리는 욕심이 꼼짝하지 못하고 욕심이 그  믿음에 꺽어지고, 그 습관이 꺾어지고. 그모든 감정들이 꺾어지고, 그 모든  온갖 자기에게 있는 요소가 이것이 이분으로 인해서 꺽어져서 이분으로 인해서  내게 있는 모든 것이 꺾어질 때에 꺾어지는 그놈이 뭐이냐? 그놈이 옛사람이요  그놈이 주님과 나 사이를 가로 막는 그놈인데. 이놈만 다 꺽어지면 주님의  전능은 나에게 와서 자유할수 있고 얼마든지 역사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데 이분이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내가 유기적으로 내가 자유성을 가지고서  이 주님을 환영하고 이것을 배척해야 돼지지 강제로 밀고 들어 올라 할찐 데는  우리의 구원이라 하는 이것은 하나의, 하나의 무생물. 하나의 동물 하나의 식물  이런 거와 같이 돼지는 것이지, 하나님과 같은 최고의 것이, 하나님의 신성을  닮은 인격성, 하나님의 속성을 닮은 우리의 속성 하나님의 신성을 닮은 그 인성  이건데, 그것이 있을 수가, 이런 묘하고 오묘하고 존귀한 것이 있을 수가 없다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꾸 인식을 시켜서 이래 하는 것이니  우리가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이 사실을 보는 이 눈을 인해서, 믿음의 눈을  인해서 함께 계시는 주님 그분이 내게 있는 옛사람 이놈을 와전히 다 꺾어서  이놈이 꼼짝 못 하게 될 때에는, 못 하게 될 때에는 주님은 내게 와서 다  역사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이든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라든지 그분들이 인간의 최고의 어려운  것이 죽음인데 연습을 해 놨으니까 그 죽음이 와서, 죽음이 와 가지고서 협박을  놓는 그 죽음이 협박 놓는 그것도 다 불신의 옛사람인데, 불신의 옛사람이오.

그게 불신의 옛사람, 육에 속한 첫째 아담에게 속한 옛 사람인데 그것을 평소에  다 연습을 많이 해 가지고서 이겨 놨기 때문에 그 때 죽음이란 게 와 가지고,  '이 죽음이라는 이 최고의 시련을 가지고, 최고의 세력을 가지고서 이놈을  눌르면 되겠지' 하고서 이제 불미불로 가지고 불미불로 눌러도 이 사람들은  연습을 다 해서 벌써 그놈을 죽여 놨기 때문에, '불에 들어가서 타 죽으면 이거  큰일 났으니까 주님을 배반해야 되겠다' 하는 그런 일을 벌써 안 하도록 벌써  돼 가지고 연습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거 와 봤자 웃고 있습니다.

다니엘도 웃고 있었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웃고 있었고 사도 바울도 웃고  있었고 모두 웃고 있었다 말이오.

 이 연습이 우리에게 돼 가지고서 이런 거 저런 거 차차차 우리에게 악습을  이것을 차차 제거해서 악습 이놈을 다 주님에게, 악습이, 주님으로 인해서  악습이 다 물러가고 녹아지고 배척이 당해지고 악성이 배척을 당해 지고 악령이  배척을 당해지고 주님, 내게 계시는 주님이 내게 있는 악습을 이기고 악성을  이기고 악령을 이기고 이긴 이 주님, 이 모든 거보다, 주님을 내가 새게 있는  악습보다 주님을 환영하고 악성보다 주님을 환영하고 악령보다 주님을  환영해서. 주님을 내게 있는 모든 이런 것보다 환영하는 이 내가 되어질 때에  주님은 내게 와서 자유로 와 가지고서 역사하실 수 있고,  이럴 때에 이 세상은 아무리 저희들이 해 봤자 죽이는 거 그. 이상은 내게 뭐  침노를 할 수 없습니다. 죽음 이놈을 제일 두려워하니까 마귀란 놈이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지, 죽음 이거 죽어 버리면 헛일이니까,  죽어 버리면 헛일이니까 죽지 안하고, 죽지 안하고 자꾸 이렇게 할라고 애를  써다가 하다 하다 안 될 때는 죽음이라는 최고의 방편을 씁니다. 최고의 방편  썼을 때에 내가 최고의 방편으로도 꺾어지지 안하고 최고의 방편을 써도 나는  거게 대해서 아무 자극을 받지 안하고 최고의 방편이 와도 내가 그걸 능가하면  마귀는 손을 들고서 다시는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러므로 죽음으로  모든 걸 다 이겼다 하는 것이 그것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이걸 지금 연습하는 일을 이것을  어짜든지 합시다. 이거 지금 급속합니다. 요새도 뭐. 이 세상에서도 살면서  이런 거 저런 거 한다는 그런 거 많이 있지마는 그것이 지금 그런 걸 찾을 게  아니라 주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이분 한 분은 내게 전부의 전부요 이분 한  분으로서는 내게 부족할 것이 하나도 없는 이 사실을 내가 확실히 지식하고  이분이 나와 함께 계시는 이 사실을 내가 보는 믿음을 자꾸 만들어서 믿음의  눈을 자꾸 띄워야 되겠습니다.

 띄우는 이것은 자꾸 혼자 연습해. 지식으로 연습하고 그 다음에는 차차 차차  실험으로 연습해 가지고서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거 사도행전 21장에 보면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죽습니다. 가지 마십시오' 이렇게 말해도 말하기를  '내 마음에 내가 매여서 내가 안 가고는 못 한다.' 그 마음이 무슨 마음입니까?  이제 그 마음이라 말은 주님이 계신다는, 주님이 계신다는 걸, 자꾸 자기  마음이 주님이 계시고 주님이 소원하시고 주님이 거기 가라 하시니 이 주님을  괄시하지 못한다 말이오. 마음에, '내눈에 주님이 보이니' 그말이오. 내 눈에  예루살렘에 가라고 하시는 주님이 내 곁에 보이고 있으니 이분을 배척할 수  없다 그말이오. 배척할 수 없다. 그거는 내 눈 때문에. 내 눈이 뜨여서 주님이  내 눈에 보이기 때문에 이것 때문에 내가 할 수가 없다 하는 그 말을 사도행전  21장에 말씀을 했습니다.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지난밤에는 재독 참여한 수가 아주 적습니다. 여러분들이 자꾸 껍데기로 하기  때문에, 그 지식이, 지식이 연습을 백 번 천 번 만 번도 더 해야 됩니다. 그래  가지고서 그 지식이 내 모든 마음에 꽉 배야되고 내 몸에 배야 되고 그래서 내  마음의 요소들이 다 지식하고 내 모든 몸의 요소들이 다 지식을 하고, 그러면,  지식하고 난 다음에는 그것이 또 믿음으로 자꾸 전진하고 성장해 가지고 또  변화가 자꾸 돼져야 된다 그거요.

 이런데, 고만 하나님 말씀 한 번 들으면 두 번 안 들을라 합니다. 한 번  들으면 두 번 안 들을라 하고 벌써 두 번 할라 하면 그만 좁니다. 조는 그  사람은 절대 승리 못 합니다. 제가 과거에는 뭐 어떻게 했다 할지라도 나는  어떤 사람보니 고만 그라면 한 번 말씀하고 말하면 그만 조요. 저게 또 졸지  싶어 보면 그만 존다 말이오. 그거는 뭐이냐? 지식주의자이기 때문에,  지식주의자는 그 결과 맺는 것이 교만만 맺지, 지식주의자는 교만 맺고, 그  지식을 자기가 실지로 이루어질라고 믿음을 만들라고 할 때에 겸손은  만들어지고 연약한 자는 만들어집니다. 그래야 주님이 함께 하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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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816 첫째 빛/ 디모데전서 4장 6절-11절 / 1988. 08. 25. 목새벽 선지자 2015.12.29
815 첫째 빛 생활 3가지와 축복 3가지/ 마태복음 5장 14절-16절/ 1988. 8. 28. 주일새벽 선지자 2015.12.29
814 첫째 아담의 자손/ 고린도전서 15장 42절-44절/ 1988. 6. 28. 화새벽 선지자 2015.12.29
813 첫째아담 둘째아담/ 골로새서 3장 1절-6절/ 1989. 5. 11. 목전집회 선지자 2015.12.29
812 청종/ 신명기 28장 1절-6절/ 1985. 1. 27. 주일새벽 선지자 2015.12.29
» 청종의 권위/ 디모데후서 4장 14절-18절/ 1985. 1. 26. 토새벽 선지자 2015.12.29
810 청종의 권위/ 사무엘상 15장 22절-23절/ 1985. 2. 22. 금저녁 선지자 2015.12.29
809 청종의 권위/ 사무엘상 15장 22절-23절/ 1985. 3. 3. 주일새벽 선지자 2015.12.29
808 청종의 권위/ 사무엘상 15장 22절-23절/ 1985. 2. 20 주일학교 공과 선지자 2015.12.29
807 청종의 권위/ 사무엘상 15장 22절-23절/ 1985. 2. 20. 수저녁 선지자 2015.12.29
806 청종의 권위/ 사무엘상 15장 22절-23절 / 1985년 4공과 선지자 2015.12.29
805 청종의 실행/ 히브리서 11장 1절-2절/ 1985. 3. 2. 토새벽 선지자 2015.12.29
804 청종-전도사인허/ 디모데후서 3장 10절-17절/ 1985. 2. 27. 수저녁 선지자 2015.12.29
803 청지기/ 누가복음 16장 8절-13절/ 1974. 12. 1. 제48공과 선지자 2015.12.29
802 청지기 비유/ 누가복음 16장 1절~13절/ 1982. 6. 13. 주일오전 선지자 2015.12.29
801 청지기 비유/ 누가복음 16장 1절-13절/ 1984. 4. 17. 화새벽 선지자 2015.12.29
800 청지기 비유/ 누가복음 16장 1절-10절/ 1981. 4. 8. 수저녁 선지자 2015.12.29
799 청지기 비유/ 누가복음 16장 1절-2절/ 1982. 6. 12. 토새벽 선지자 2015.12.29
798 청지기 비유/ 누가복음 16장 9절-13절/ 1988. 2. 7. 주일오후 선지자 2015.12.29
797 청지기 비유/ 누가복음 16장 1절-13절/ 1982. 6. 8. 화새벽 선지자 2015.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