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지기 비유

 

1984. 4. 17. 화새

 

본문: 누가복음 16장 1절∼13절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말 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 세상 사람들의 말과 같이 그렇게 듣는 아주 안된 그 습성을  버리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두 번 듣기가 싫고 또 성경도 읽을  때에 두 번 읽기가 싫습니다. 어떤 사람은 독서할 때에 독서 한 권을 다 하자 한  권 책장이 다 없어집니다. 한 장 읽고 한 장 뜯어 내 버리고 한 장 읽고 한 장  뜯어 내 버리고 이렇게 해서 두 번 읽지 않는다는 그건 세상 글을 그렇게 하는  것이고, 또 세상 지식도 요긴하고 중요한 지식은 그래 가지고는 자기가 습득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말씀이 전부가 다 계약이요, 또 명령이요. 또 우리의 모든  책임입니다. 또 하나님이 요구하심이요, 약속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느  성구나 평생 우리가 이 말씀을 모시고 이 말씀에 속해 가지고 살아야 하지 이  말씀을 이제는 됐다 하고서 벗어 놓을 그런 말씀은 한 말씀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자기가 복음으로 받아 영생으로 받으면 이 말씀은 자꾸  생각하고 또 자기가 해석하고, 또 이 말씀과 자기 과거를 대조해 보고, 또 이  말씀과 자기가 현재 어떻게 되고 있는가 대조를 해 보고. 또 앞으로 이 말씀을  모시고 이 말씀을 버리지 안하고, 이 말씀을 모시고 이 말씀의 인도대로 살라고  하면 어떠한 애로가 있겠느냐 하는 것을, 미래와 이 말씀과 대조를 할 때에 또  자기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아니할 수 없는 미래를 자기가 알게 되고, 또  미래에 대해서 하나님으로 더불어 의논하는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고 자기와는 상관없이 이 말씀은 말씀대로 그대로 두고  자기는 자기대로 그저 한번 들은 것으로 다 됐다 한번 읽은 것으로 다 됐다.

기억을 하고 있든지 없든지 이 말씀과 자기와 자기 행위와 자기 과거와 자기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관련을 가지지 안 하게 되기 때문에 이 말씀은 업신여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렇게 자기 복음으로 듣는 것은 이제 말씀 대로  이렇게 하는 것이 복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이대로 하려고  하니까 한번 들으니 한번 들을 때 자기가 조심해 들으니까 한번 들으니까 더  힘이 되고 능력이 오고, 두 번 들으니까 더 능력이 오고, 세 번 생각하니까 더  능력이 오고, 또 네 번째는 자기 현재를 대조하고 보니까 깜짝 놀라면서 '내가  현재와, 현재는 이 말씀과 아주 상관 없이 내가 살고 있다.' 또 이 말씀과  과거와 대조하니까 주님 앞에 자복을 해야 되겠고, 미래를 자기가 꼭 아는 것은  아니지마는서도 자기 입장과 처지와 환경을 자기가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  미래는 대략 이렇게 될 것 아닌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대구 집회도 가는데 어떤 사람은 '내가 대구 집회를 가면 가정에 인제  문제가 일어날 것 아닌가? 도난이 있을 것 아닌가? 또 직장에서 어려움이 있을  것 아닌가? 학교에서 어려움 있을 것 아닌가?' 자기 미래에 대해서 그런게 있을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그런 것은 하나도 없이 '이번에 내가 또 집회에 가  가지고 그저 흥청흥청하면서 하나 모여 가지고서 똑 유흥 모양으로 그래 고만  분주하게 날뛰다가 올 것 아닌가?' 각각 다 자기의 미래를 짐작할 수 있다  그거요. 짐작하면 자기 미래와 이 말씀과의 관계를 생각하니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안할 수 없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되게 됩니다.

 이러니까, 기독자는 무엇을 기준해 가지고 자꾸 생각하며 연구하고 해야 될  것인가? 서양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이 뭘 생각하느냐? '내가 어떻게 하면 내게  좋을까?' 자기를 생각을 하고. 또 생각할 때 그 법칙은 이제까지 자기에게 있던  모든 선입적 관념. 기존 지식. 경험 체험, 자기 지식, 모든 사람의 지식 이  지식을 가지고 어떻게 할까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인데, 우리가 이 생활을 수천  년 동안 대대로 내려오면서 했던 것입니다. 뭐 자기가 어릴 때부터 예수 믿는다  해도 벌써 수천 년 동안 내려오는 그 유전성이 자기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벌써 유전성의 교훈을 받고 있기 때문에 자기는 심신에 꽉 배어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데 갑자기 예수 믿는 사람으로 지식도 바꾸지, 또 위주로 하는 것도 자기  위주인데 하나님 위주로 바꿔지지 이러니까, 그게 쉽게 되는 것 아닙니다. 아주  쉽게 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이 세상에 두시고 일생 동안을 연습을 시켜서 자꾸.

이번에 실패하면 다음에는 성공하고, 다음에도 실패하면 그 다음에는 성공하도록  이렇게 연습을 얼마든지 시켜 가지고 하는 것인데 우리는 이 연습하는 일이  하나도 없고 이 말씀과 우리와 대조하는 일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고만  교만해져서 아주 거저 먹을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도 한번 들은 것은  두 번 들을 필요가 없고 두 번 듣기 싫습니다. 또, 언제든지 새 말이라야  되겠고, 새것을 구경하는 것처럼 그 사람은 말씀을 구경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이 다 스스로 속는 일입니다.

 우리 기독자의 영과 육, 금생과 내세, 과거에 대해서도 복 되고, 현재에  대해서도 복 되고, 미래에 대해서도 복 될 수 있는 것, 과거는 지나가 버렸는데  그 뭐이가 복될 수가 있을까? 과거가 화가 되어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현재에서  과거를 행복으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한 그 일은 벌써 지나갔으니까 베드로가 나이 늙었을 때에는 벌써 지나간 지  오래 됐습니다. 이렇지마는서도 세 번 부인한 그 과거가 베드로에게 대해서는  일생 동안 다른 사람이 볼 때나 주님이 볼 때에 장점이요, 아주 귀한 점이요, 또  베드로에게는 아주 생수가 흐르는 생수의 샘이 됐던 것입니다.

 이러니까, 과거에 대해서도, 현재에 대해서도, 미래에 대해서도, 이 말씀이  우리를 복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 육, 금생 내세, 또 과거  현재 미래, 또 자기, 자기에게 속한 모든 사람. 또 전부, 또 조물주 하나님  그분에게 대한 좋은 것, 자기와 모든 존재에게 대해서 좋은 것, 복, 은혜,  귀중한 것 그 모든 보배로운 것이 어데서 나옵니까? 보배로운 것이 하늘에서  떨어집니까 보배로운 것이 이리 저리 돌아다니면 어데 횡재수 닥치는 것  모양으로 어데서 나옵니까? 또 이 보배로움이 이 사람 저 사람 접촉하는  가운데서. 유익을 보는 그런 보배로움이 많은 사람을 접촉하는 데에서 나옵니까?  어데서 나옵니까? 어데서 나오지요? 예? 똑똑히 해 봐요? 예, 이 보배로움이  다른 데서 나오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자꾸 생각하고 이 말씀과 나와 대조해서  고쳐질 때에 그때에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나도 행복스러운 사람 되어지고 나와  관련된 사람들도, 만물들도 다 좋아지고. 거기에서 쾌락도 나오고, 거기에서  만족도 나오고, 거기에서 용기도 나오고, 거기에서 담력도 나오고, 열심도  나오고. 거기에서 겸손도 나오고, 거기에서 온유도 나오고, 거기에서 마구 못  견뎌 조급해서, 바울이 말하기를 무거운 짐진 것같이 탄식하면서 지금 고난  당하고 있는 그런 탄식도 나오고 조급도 나오고 다 나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자꾸 생각하는 데에서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딴 데서 나오는게 아니고.

 그 사람이 뭐 이제는 나 배경이 어떤 훌륭한 권리 있는 사람이 됐다 사람이 내  배경이 있다, 내 배후에 있다. 자기 배경이 좋아서 배경으로 인해서 힘이 난 그  힘도 죽을 힘, 이제는 내가 재벌가가 됐다, 자기의 소유가 많아서 소유로  말미암아 기쁨 오는 것도 죽을 기쁨, 힘 나는 것도 죽을 힘, 만족 오는 것도  죽을 만족, 없을 만족. 어떤 것이든지 기독자들이 자기에게 참 좋은 것, 금생  내생, 영과 육, 나와 다른 사람에게 물질적으로, 권세적으로, 지위적으로,  강건적으로, 쾌락적으로, 영광적으로, 모든 면에 좋은 것이 어데서 나옵니까?  좋은 것이 말씀에서 나옵니다! 도무지 하나님 말씀을 깨닫는 것이 전혀 없어,  말씀을 업신여겨.

 기도하러 암만 가도 가 가지고서, '주여 뭐 주십시오, 뭐 주십시오, 뭐  주십시오, 뭐 주십시오. 내가 뭐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따위, 고것  내가, 그런 기도라 할 건데 그따위라 합니다. 그따위! 그따위 기도 암만 해 봐야  주님이 외면하신다 그말이오. 왜? 그것이 주님을 업신여기는 것이거든. 왜  업신여기는게 됩니까? 주님은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분이시요, 또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분이시요, 그분은 나를 고쳐서 바로 되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어  오시기까지 하셨고, 죽기까지 하셨고, 또 영원히 사람을 입은 부활까지 하신 이  애타 하시는 이 주님이신데, 아주 껍데기 말로 발라 맞춰서 아무 생각 하지도  안하고 '주여 내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그럴 때에 주님은 그에게  반문할 것입니다. 귀가 어두워 못 듣지. '너 뭘 잘못했지?' '그저  잘못했습니다.' '뭐 잘못한 것 깨달아?' '아. 잘못했다 해야 될 터이니까.

잘못한게 어데 있든지 있기야 있겠지요. 그러니까 뭐 잘못했다 했지요.' 그런  것이 애타 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멸시가 아니겠습니까? 전지자에게  대해서 얼마나 그를 어리석게, 어리석게 대우합니까? 얼마나 멸시하는 것이  됩니까?  사람도 똑똑한 사람, 아는 사람에게 그렇게 껍데기로 그렇게 하면 섭섭해  합니다. '야, 좀 진실을 말해라. 네가 어떻게 말하는데 말 한 마디도 진실이  없느냐? 그 실상을 말하지 안하고 네 껍데기 껍데기로 그렇게 하느냐? 그럴 것  같으면 네가 생각하지 나한테 얘기할게 뭐꼬?' 상대방을 모르리라 하고 그렇게  하는 것도 무시하는 것. 상대방이 우리에게 대해서 어떻게 요구하고 관심  가지는데 대해서 그것을 모르고 그와 관련 없는 모든 행동을 해도 상대방을  무시히는 것. 상대방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데 '이런 일이야 의논하나 안 하나  뭐, 이런 일이야 의논해 봤자 소용는가? 이런 것을 할 수 있는가?' 그것도  무시하는 일.

 우리가 기도하러 가도 그저 가 가지고서 기도 안 된다는 것이, 가 가지고 들짱  하나님의 말씀을 잡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잡고, 이 말씀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중보자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주님 앞으로 인도합니다. 이  말씀은 주님을 우리에게 소개해 줍니다. '이런 분이시다.' 이 말씀에서 주님을  충분히 소개 받고 그대로 주님을 상대하면 대면이 됩니다. 이러니까, 말씀을  자기가 한번 생각하니 거기에서 두려움도 나오고 사과도 나오고. 후회도 나오고,  소망도 나오고, 열심도 나오고, 기쁨도 나오고. 모든 좋은 것이 다 나오는데,  강단에서 하물며, 한번 말하니까, 자기 혼자 말할 때보다는 강단에서 말할 때는  성령의 은혜가 더 많을 수 있습니다. 왜? 사람의 수가 많은 데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더 많다고 말씀 했습니다. 이런데, 강단에서 한번 말씀하니  그대로 하니까 더 은혜가 되고, 두 번 하니 더 은혜가 되고 이럴 건데, 설교도  한번 듣고 두 번 들으면 듣기를 싫어합니다. 아느냐? 모릅니다. 모르고 듣기  싫어합니다. 참 기차는 일이오.

 또 자기가 말씀과 자기와에 관련을 가질라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이 말씀 이  영원한 계약인 것을 모릅니다. 우리와의 약속입니다. 우리의 전 소망입니다.

우리의 힘입니다. 우리의 지혜요 우리의 거룩이요, 의요, 우리의 생명입니다.

우리의 모든 만사형통의 능력이오. 만사에 성공이오. 이 말씀이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이라 말은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이 하나님이란 말이 아니고 신구약 성경  말씀은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을 우리에게 똑똑히 기록해서 소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소개가 곧 하나님 소개라 그 말이오. 소개 받는 것이라. 이 말씀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이 말씀이 기쁨 덩어리요, 이 말씀이 세상에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안하고 모든 것에 대해서 강하고 담대할 수 있는 담대의 덩어리요.

이런데, 도무지 이 말씀에 대해서 그렇지 안하니까 기도해야 소용없다 말이오.

기도를 해도 이 말씀을 근거해서 자꾸 이 말씀과, 이 말씀은 내가 얼마나 지켜야  될 말씀인가? 내 소유와 몸과 생명, 다해서 지켜야 되는데 이 말씀 지킬라고  하면 목숨이 끊어지면 이 말씀을 버리고 자기 목숨을 가져야 됩니까 목숨을  빼앗겨도 이 말씀은 지켜야 됩니까? 우리가 알고 있으니까 이 다음에 핑계를  못해요. 목숨은 빼앗겨도 이 말씀은 지켜야 될 말씀입니다. 또 이 말씀이 우리의  소망 전부 아닙니까?  이러니까 이 말씀과 자기와 대조를 합니다. '내가 이 말씀에게 걸리는 것이  없나?' 그것이 스스로 자기를 심사하는 것이요, 그것이 심판을 예비하는 것이요,  심판. 그리스도의 심판을 예비하는 것이라. 심판대 가면은 물론 자기 양심에  자책할 것이 없이 다 대조해 가지고서 모든 것을 정리 정돈했다 할지라도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그분이 나보다 더 많이 아시고, 세밀히 아시고 모든 것을 다  아시기 때문에 나는 그분의 뒤에서 너무도 지식이 좁고 너무도 적고 작기  때문에, 내 지식으로는 다 완료를 했고 완성을 했다 할지라도 그분 앞에 갈  때에는 틀린게 많이 있을 것이라 하는 그것을 말한 것이지, 자기가 지금 오늘에  대조해서 아니라고 지적할 수 있는 것을 묻어 놓고서 가는 그 사람이야 그때  어찌 되겠습니까?  이러니까, 자꾸 대조하면 돼. 대조하면. 대조하면 거기에서 자복도 나오고,  대조하면, 거기에서 '주여, 내가 이걸 믿지 못했습니다.' 하고서 소망도 나오고  대조하면 힘도 나오고, 대조하면 감사도 나오고, 대조하면 할일도 나오고,  대조하면 내 각오도 나오고, 결심도 나오고. 대조하면 '이 큰 도적맞았다.'  손해본 것도 알게 되고, 대조하면 내가 '이런 큰 소득과 수입이 내 앞에 있다'  하는 것도 알게 되고 이런 것인데 말씀과 대조가 끊어지면 그 사람은  외식자입니다. 그 외식자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됩니다.

이제 그리 되면 하나님보다 자기를 중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리 되면 하나님의  심판이 어찌 됐던지 우선 사람의 귀나 눈이나 입이나 그런데 걸리지 안하려고만  애를 쓰는 그런 외식자가 되고 맙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어데든지 가면 한 말씀 들어요. 어느 말씀이든지 한 말씀 그  말씀과 자기와 대조해요. 자기의 과거와 대조하고 차기의 현재와 대조하고  자기의 미래와 대조하고, 그 말씀과 자기와의 모든 객관에 있는 이웃들과 그  말씀과 대조를 하고, 내가 이 이웃을 대할 때는 이 말씀이 어찌 됐느냐?  처음에는 이 말씀과 자기, 이 말씀과 자기만, 자꾸 어 둘만 대조하다가 그  다음에 이제 삼각적으로 '내가 이 사람에게 대해서 한 것은 이 말씀과 어찌  되느냐?' 이제 삼각적으로 이제 대조를 하고, 자꾸 이렇게 대조하게 되면,  대조하다가 이것 대조하고 집어 던지고 저거 대조하고 집어 던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 대조한 것 하나 끼고 이것 대조한 것 끼고 저거 대조한 것 끼고 저거  대조한 것 끼고, 모두 대조한 것을 쭈루루룩 끼 가지고, 이 대조한 것이 한테  뚤뚤 뭉쳐 가지고 하나가 돼 가지고 우리에게 이래야 되겠다는 이게 나오는  것이, 우리의 소욕 나오는 것이 이것이 산 소욕입니다. 이 비판이 산 비판인  것입니다. 이런데, 그게 없이 하니까 다 죽는 일이다 그거요.

 이 말씀도 암만 이 말 해도 듣는지 모르겠어. 물어보면 뭐 아는가? 자, 여기에  부자의 청지기 비유에 1절로부터 2절까지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는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자, 내가 물을 터이니까  여러분들이 대답을 바로 하나 안 하나 하는 것을 속으로 대답을 해 놓으십시오.

그러면 내 대답은 틀렸다 바르다 알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 자신의  대답이 이 청지기는 우리에게 대해서 어떤 것을 비유했습니까? 한 가지  비유했습니까? 두 가지 비유했습니까? 세 가지 비유 했습니까? 세 가지  비유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과 주인의 관련되는 모든 것과 그 관계를 잘 조화를 일으키는  것이 청지기의 장기입니다. 이걸 잘 하면 고만 그 주인은 그 청지기를 놓지  않습니다. 주인의 소유도 그 소유와 주인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서 아주 주인에게  유익이 되도록, 오늘 찾아오신 손님도 주인 대신 만나도 주인이 만난 것보다  훨씬 주인에게 낫고 유익됩니다. 이번에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청지기가  사건 처리를 하는데 주인이 암만 처리해 봤자 그 만침 처리를 못하겠습니다.

주인에게 대해서. 모든 주인과의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해서 주인과의 그 관계가  아주 잘 이루어지도록, 유익되고 잘 이루어지도록 그렇게 작용을 하는 것이  청지기의 첫째 직분이오. 이 직분인데 우리에게 있어서는 무슨 직분을 이렇게  비유했습니까? 제사장 직을 비유 했습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 말은. 왕 같은 제사장. 왕  제사장은 누군고 하니 대제사장 예수님을 가리킨 것인데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와 모든 존재와의 그 관계를 어떻게 하심과 같은 그 직책을 우리도 가지고  앞으로 영원히 할 이 실력을 마련하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이러니까 이 제사장  직이 제일 영광 있는 직이라 그 말이오. 제사장 직이 뭐인지 한번 연구도 해  보지 안했기 때문에 아무 가치가 없지. 제사장 직 보다 더 영광된 직이 어디  있어요? 세상에서는 뭐 대통령 되면 영광이라, 대통령은 왕 직에 속한 것이오.

왕 직. 제사장 직은 얼마나 영광인지 모릅니다. 이 제사장 직도 말을 할려면  많은데 간추려서 말한 것입니다. 간추려서 말한 것.

 제사장은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그 조화를 바로 해서, 하나님은 피조물을 멸할라  하고 피조물은 하나님을 누군지도 모르고 대적해 가지고서 자멸을 당하고 있는  이것을 잘 조화해서 이제는 하나님은 피조물에 대해서 '내가 너 없이는 내가 못  살겠다.' 피조물은 '하나님 없이는 못 살겠다' 이렇게 하나님과 피조물 그  사이를 아주 없어서는 안 될 그런 밀접한 관계, 친밀한 화친의 관계를 서로  소망하고 사는, 서로 하나님은 피조물을 위하고 피조물은 하나님 위하고 이것이  완전히 복구 돼서 완전히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제사장 직이라 그말이오. 알지  못하고 이 성경에 명문 되어 있는 제사장 직만 가지고 이래 하다가는 모릅니다.

그런 걸 다 소화를 해 가지고 다 뭉쳐서 거기에서 젖으로 나온 것이 지금 이제  내가 말하는 이 말씀입니다.

 청지기가 주인과의 조화를 맞추는 거와 같이 우리는 제사장 직을 가지고,  주인의 대신 말이오. 주인의 대언자라. 주인을 대신해서 말하는 대언자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대언자라 그말이오. 하나님의 대언자. 말씀은, 하나님의 모든  것이 말씀으로 나옵니다. 하나님의 충만을 다른 사람에게 줄 때에 뭘로 줍니까?  말씀으로 주면 그 말씀 받아 가지고 행하면 그대로 된다 그거요. 요렇게 똑똑히  가르쳐도 뭐 예수 못 믿는 사람들이 뭐 될 것입니까 되기를? 우리는 그렇게  가르쳐 주는, 배우지를 못했어요. 대언자. 또 이것은 선지직이라 말이오. 우리는  선지직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선지자요.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언자라 말이오.

 또 우리는 왕 직을 가졌소. 그리스도로 더불어 영원토록 왕 노릇해요. 왕 직을  가진 것은 하나님이 당신이 이렇게 이렇게 통치를 할 그 소원을 가지시고,  당신이 통치의 의사를 우리가 모든 피조물들에게 다 이행을 시켜서 실천을 시켜  놓는 그것이 우리의 왕 직이라 그말이요. 왕 직은 권세 있고 영광 있는 줄로 다  알고 있지요. 선지직은 왕 직과 비교 못 하는 직입니다. 왕 직은 가지고 있는  것을 잘 관리해서 살라는 것이요, 선지직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갖다가 줘서  그들로 하여금 부강하게 하는 것이오. 그걸 우리가 세상에서 좀 맛볼 수 있다  그말이오. 다른 사람에게 이리 가야 될 자 저리 가야 될지 모르는데 그 사람을  잘 바로 지도를 해서 지도를 받은 결과에 그 사람이 잘 되었으면 지도한  사람에게 참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쁨을 맛을 본 사람은, 사람을 바로  지도해 가지고서 그 사람이 복 되게 되는 이 맛을 본 사람은 땅 위에 돈이니  권세니 그런 것은 텁텁해서, 탁해서 먹지를 못합니다. 그런 기쁨은 가지지를  못해요.

 왕 직도 사건이 복잡해서 어쩔까 머리 앓고 있는데 그걸 척 실마리를 풀어  가지고서 잘 그걸 해결해서 아무 일 없이 잘 정리해서 그 모든 것을 해결해 주면  그 사람 기쁘고 자기도 얼마나 기쁩니까? 그건 다 왕 직에 속한 것이오.

선지직에 속한 것, 제사장 직에 속한 것. 왕 직과 선지직의 영광과 존귀와  쾌락을 비교할 수 없고, 선지직과 제사장 직의 영광과 존귀와 그 쾌락을 비교할  수 없고 그 가치를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비유해서 부자는 하나님, 부자의 집은 이 세상, 이 세상에서 무궁을  준비하기 때문에 이 세상은 무궁세계입니다. 이 세상은 곧 다시 말하면 무궁을  좌우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소유는 주님의 피로 구속하신 주의  것, 청지기는 주님의 대리자로 지금 모든 피조물들에게 대해서 대리 행사를 한번  해 봅시다. 대리 행사 한 것 만침. 대리 행사를 할 수 있는 실력 있는 것 만침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이 대리로 세웁니다. 하늘나라에 당신의 일꾼을  삼으실라고 우리를 기르시는 것이오. 하나님은 교회에 대해서 머리 노릇하고,  교회는 세상의 모든 피조물, 천상 천하의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의 것으로 충만케  하는 중보 노릇하고 이것이 무궁세계의 하늘나라입니다.

 우리는 이 제사장. 선지. 왕직 이것을 지금, 이 실력을 배양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세상 준비인데, 여기에서 우리가 몇 가지 하면 청지기 직책을 잘 한다고  칭찬 받고 점점 청지기 직책의 권위를 더 줄 것이고, 또 어쩌다가 쫓겨났습니까?  어쩌다가 쫓겨났소? 자, 여러분들이 속으로 생각해요 어쩌다가 쫓겨났습니까?  청지기 직책을 잘못해서 쫓겨났습니다. 그 잘못한 것은 왜 잘못했겠습니까?  잘못한 것이 몇 가지입니까? 이거는 소리 내는게 아니니까 한번 들어 보십시오.

잘못한 것이 몇 가지입니까?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십시오. 저 뒤에도. 높이 들고  가리켜 봐요. 한번 가리켜. 봐. 저 뒤에. 저 뒤에 뉘는, 둘이요? 둘인 사람 손  들어 봐. 아, 내 누이 어두워 그런가. 서이인데 이래 둘로 보이나? 세 가지, 세  가지 잘못 해 가지고서 청지기에서 쫓겨 났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세 가지를 바로 하면 청지기 직이 튼튼해진다. 청지기 직이  튼튼해진다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그리스도인의 실력이 튼튼해진다  그말이오. 그리스도인의 실력이라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실력이라.

기름 부음을 받은 직책자의 실력이라 그말이오. 기름 부음을 받은 직책자의  실력이라니? 제사장의 실력이라 말이요, 선지자의 실력이라 말이요 왕의  실력이라 말입니다. 이 세 가지 잘 하면 이 세 가지 직권이, 자기 직책이란 직의  권위, 직권이 점점 견고해지고 강해집니다.

 세 가지를 잘 해야 되는데 이 사람은 잘못했어. 잘못한 것이, 첫째 잘못 한  것이 무엇인가? 속으로 생각해요. 틀렸으면 틀린 줄 알고 '내가 이래 틀렸으니  이 구원 헛일이 아니냐?' 이래 알아야 될 터인데 틀려도 상관 없고 틀렸거나  말았거나 무슨 표가 있어야지? 표가 지금. 지금 왜 표가 없습니까? 있는데 이  표가 있는 것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심판대 앞에 가 가지고 그때는 깜짝  놀라고 절단 날 사람들이지 심판대 앞에 가 가지고 절단 날 사람들을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서 심판대에 가기 전에 무슨 환난 오면 다 절단 나버리지.

 왜정 말년에 조선 교회가 전부 다 넘어지고, 승리한 사람들이 몇 사람 안  됐습니다. 승리한 사람 몇 사람 안 됐소. 감옥에 가서 승리한 사람, 또  망명해서도 굴하지 안한 사람은, 그 사람은 뭐 그래도 승리라고 하지, 승리는 뭐  못되지마는 망명해서 승리한 사람, 감옥에 가서 승리한 사람, 돌아 다니면서  외치면서 승리한 사람. 이렇게, 승리한 사람들은 평소에 그것을 따져 나갔기  때문에 그랬지마는서도 그만 그냥 말씀은 말씀대로 자기는 자기대로 있는  사람들은 다 실패했다 그 말이오. 실패한 것을 세상에 있는 동안에 보여줘서  '너는 실패자라. 다시 고쳐라.' 이것을 보여 주는 이 환난입니다. 환난은 우리를  깨게 하는 선물이오. 우리를 깨우쳐 주는 것이오. 그리스도의 심판을 면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예고입니다. 심판대에 가기 전에, 너는 가면 뭐, 가 봐야  별 수 없어. 이러니까, 너는 실패자요 너는 믿지 않는 자요 너는 거짓부리라는  것을 알라는 것을 알려주는 주님의 그 징계라 그말이오.

 자, 그런데, 이 세 가지 가운데에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손으로  들어요. 제일 중요한 것은, 제일 중요한 것. 주인에게 복종하는 것, 그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드십시오. 네 몇 또 주인을 위해서 하는 것 주인을  위하는 것. 그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드십시오. 또,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주인의 것이라, 내것은 하나도 없고 주인의 것을 내가 보관해  가지고 대리로 처리하고 있다. 자기 말은 모든 것이 주인의 것이라 하는 이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손 드십시오. 녜, 새로 들어야 돼. 모르면  새로 들어야 돼. 착각 하기도 쉽거든. 한번 들었다고 고집할 것 아니고. 한번  들어도 잘못 된, 옳으면 들어야 돼.

 이제,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주인의 것이라, 청지기가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제가 척척 말로 처리하니까 이 집도 내 것이다, 뭣도 내  것이다. 이 토지도 내가 뭐 처리하지마는, 아니야. 그 착각만 들어 오면 그  다음에는 전체가 실패됩니다. 전부 실수돼요, 이거는 내것이 아니라 주인이  나에게 맡긴 것이다. 나를 신임하고 맡겼는데 이것은 내것이 아니라. 그러기  때문에, 이것 처리는 내 맘대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 당신 시키는 대로 당신을  위해서 처리하고 이 모든 것은 당신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 이래서, 제일 중요한  것이 주인의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우리가 기도해도 '주님이여' 하나만 해도 '주님. 내 몸은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주님의 것입니다. 내 몸을 내가 주님의 몸으로 정말 알고 내가 관리했습니까?  내 몸을 내 몸으로 알아서 내 맘대로 내 몸이니까 내 맘 대로 자유했습니까?'  그것만 하나 해도 그것만 해도 울 것도 나오고, 참 기막히는 것도 나오고,  회개할 것도 나오고, 간구할 것도 나오고 나올 거라 말이오. 우리가, 나와 내  모든 소유가 주님의 것인 것을 인정할 때에 주님의 사죄와 칭의와 화친의 공로는  내것이 됩니다. 내가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이 없고, 부인을 안 해도 나와  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인 것을 자기가 기억이 없을 때에는 주님의 대속은 내  기억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내가 부인할 때는 주님의 대속은 나는 배반하고 만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그렇지 안해요? 물건을 살 때도 내가 돈을  줘놓고, 물건을 들고 돈을 줘놓고 '아, 아아 그 돈 날 주십시오. 돈은 내가  찾습니다.' 돈은 찾고, '야, 돈은 내가 받았고 물건을 가지고 가면 되겠다.'  물건 가지고 가면은 그 주인이 냅둡니까? 어짭니까? 자, 어떻게 하요?  ○○○집사님, 그 전방 주인이 뭐라 할꼬? 냅둘까요? 예? 뭐라 하겠습니까?  박절해도 말해봐. 그런데는 박절한 말 쓰는 거라. '이 도둑놈아 네 돈 네가  찾아갔으면 내 물건 내가 가져오는게 정한 이치 아니가? 돈도 가지고 가고  물건도 가지고 가고 이 도둑놈아.' '도둑놈아' 할거라 말이오. 좀 알아 듣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내가 주님의 것이 아니고 내 자유 있는, 내가 내것이 되고 내 자체가  내것이 되고 모든 소유가 내것이 될 때에는 주님의 대속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법적 대속은 변동이 없지마는서도 실질적으로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는  상관이 없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속을 입은 자로 살라고 자꾸 하는 그  말은, 입은 자로 산다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나는 주님의 것으로 산다는 그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이게 제일 중요해. 내가 주님의 것인 것을 잊어버리고  내것이 내것으로 있으면 나는 사죄를 벗어 버렸어. 법적으로는 벗을 수 없는  대속은 입고 있지마는서도 내가 벗을 수 있는 것은 벗어 버렸다 그말이오.

벗었으니까 내 실지의 행동에 있어서는 아무 상관이 없어. 그러니까 구원이 안  이루어진다 그말이오. 사죄를 벗었지, 칭의를 벗었지 하나님과 화친을 벗었지.

벗으니까 뭐입니까? 하나님과 원수 됐지 나는 불의로 살고 불법으로 살 내  주장대로 살 사람이지, 나는 모든 것을 삐뚤어진 데 속해서 과거 현재 미래의  죄악에게 붙들려서 죄가 내게 와 가지고서 주장을 하게되지. 이러니까 뭐이  됩니까?  이러기 때문에, 청지기 이 모든 것은 내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이다. 내가 대리  맡아 가지고 있다. 내가 청지기 직책을 떠나기 전에는 나도 주인의 돈에 팔린  품군이니까 나는 내 맘대로 가고 싶은 대로 가고 오고 싶은 대로 오고 놀고 싶은  대로 놀고 못 한다. 주인에게 허락을 받아서 해야지. 그게 제일 중요하고 주인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둘째로 중요한 것은 주인을 위함입니다. 주인을 위해서. 그것이 둘째로 중요해.

어떤 사람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그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마는서도 주인 시키는 법칙대로 복종은 잘 맞이도 그 중심은 자기를  위해서도 할 수 있고 얼마든지 외식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보십니다.

이러기 때문에 기독교는 이종교와 다릅니다. 이종교는 다 결과를 중요하게  여기지마는 기독교는 동기를 중하게 여깁니다. 결과 보다도 동기를 중하게  여깁니다. 시발을 중하게 여깁니다. 중심을 중하게 여깁니다. 중심이 바로  됐는데 부족해서 잘못 됐소. 잘못 돼도 중심이, 바로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해 주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결과가 잘 돼서 자타가 번들번들하이 큰소리  뻥뻥하고 이래도 속에 동기는, 중심은 나쁜 것 가지고 했으니까 사람들은 모르고  넘어가지마는서도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 볼 때에 '이놈아, 네가 너 위해서  하고 네 중심으로 하다가 어찌 어찌 안할래야 안할 수 없어서 그리 그리 돼  가지고서 꼼짝 못 하고 내 법칙을 지켜서 이런 결과를 맺었지 네가 중심에  소원해서 이걸 맺었느냐?' 그것 가지고 판단합니다. 이러니까, 주를 위함이  둘째로 중요 하다 말이오.

 우리가 누워서 자는 것도 '아, 아무래도 일찍 자야 되겠다. 주를 위해서 자야  되겠다. 주를 위해서 먹어야 되겠다. 아무래도 주님을 위해서 좀 쉬어야 되겠다.

주를 위해서 내가 어데를 좀 가야 되겠다. 또 이 일은 주를 위해서 안 해야  되겠다. 이 생각은, 주를 위해서 이 생각을, 가지자 안 해야 되겠다. 이 생각은  주를 위해서 생각을 가져야 되겠다. 이 말은 주를 위해서 해야 되겠다. 이 말은  주를 위해서 하지 안하고 참아야 되겠다.' 이제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서.

 셋째는. 아무리 주님을 위한다 할지라도 그분의 명령에, 그분이 원하시는  법칙대로 그분이 시키시는 대로 안 하면 아무리 주님을 위한다고 해도 행동을 딴  거 하면 안 된다.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면 돼.

 이 세 가지 하면, 이 세 가지만 하면 세 가지 직책이 견고해집니다. 세 가지  직책이 능력 있게 됩니다. 세 가지 직책 뭣뭣? 첫째. 뭐? 제사장. 여러분들  속으로, '아,' 속으로 첫째, 뭐? 제사장. 내가 말할때 '제사장' 하면 '나도  맞았다.' '아, 나는 뭐 딴거' 자기는 딴거 말했는데 내가 '제사장' 하니까 나와  틀렸으면 틀렸다 그말이오. 제사장, 또 둘째는, 선지. 셋째는, 왕 직. 이것이  견고해집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연성하는 것은 이 세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를 우리가  연성하고 있는 것이오. 이 세 가지 실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오. 이 세 가지  실력은 뭐 성경을 나빌라 하면 복잡해서 여러분들이 머리를 앓아서 견디지를  못할 것이오. 이러나, 간단하게 이런 비유로써 이 세 가지. '아, 언제나 너와 내  모든 것은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주님의 것이라. 그러면 어째야 되느냐?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서 해야 된다. 주님을 위해서 하는 데는 어째야 되느냐?  말씀대로 해야 된다.' 언제? 언제? 내일? 현재, 현재. 여러분들이 '언제?' 할  때에 '아, 현재' 이것도 여간 지식이 아닙니다. 여간 지혜가 아니오. 여간  은혜가 아니오.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배운 것을 그만 자기와 대조하지 안하니까. 마귀가  들어가 놓으면 마귀가 들어가면은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 말씀이 들리지  안하고서 설교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마귀가 들어가면 들리지 안 해요.

마귀가 들어가면 고만 설교 말씀이 정반대가 돼 버려요. 삐뚤어짐이 되고 틀림이  되고 그래 됩니다. 사람이니까 틀림이 없을 수 없지마는서도 그래도 대충은  맞습니다. 혹 내가 말을, 이름을 말할 때에 그 이름이 착각되는 것도 있고, 혹  역사를 말할 때는 그 역사에 대해서 내가 충분히 모르기 때문에 혹 틀리는 것도  있을 수 있고,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도리에 대해서는. 거기에다가 전공을 했고  또 이라기 때문에 구원 도리에 대해서는 그래도 거의 맞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내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이 달지 안해요. 내가 구원을  이룰라고 하는 그 진실이 없으면 하나님 말씀이 깨달아지지를 안합니다.

깨달아지지 안하는 것은 벌써 그 사람이 그만큼 하늘나라에서 먼 사람이 돼  가지고 있는데 제가 구원 어떻게 이루겠습니까?  그런고로, 오늘부터는 또, 어제 아침에도 이 말씀 내나 했소. 어제 말씀에도  내나 이 말씀, 요새 늘 이 말씀을 말하지마는서도, 이런데도 안 들으면  소용없어. 왜? 이 말씀을 지금하는 것은 알라고, 외우라고 말하는 것 아니오.

이제는 이 말씀과 자기와 대조해서 이 말씀과 자기와 일치되라 그말입니다. 이  말씀과 같은 자기가 되고, 이 말씀과 같은 자기 행위가 되고, 이 말씀과 같은  자기의 모든 해 놓은 일이 되고, 이 말씀과 같은 자기가 소유가 되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인간의 말로 표시할 수 없는 그 영감 역사의 능력이 혹 가 가지고서 거기  부딪혀서 연결이 될까 하는 그 소망 가지고서 하는 건데 이거 기억하는 것으로서  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꾸 교만만 나오게 된다 말이오.

 ○○○ 선생, ○○○ 선생. 손들어 봐요. 어데 손 들지? 어데?. 고게 숨어  앉았으니 내가 보이나? 낯을 좀 들지. 이래 놓으니까, 내가 뭐 어떤 사람이 안  왔나 싶어 자꾸 이래 이래 살피면 안 왔을 때는 내가 뒤에 혹 종종 많이  알려지면 말합니다.

 어짜든지 우리가 지금 힘쓸 때입니다. 지금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할 때라 말은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와의 대조할 때라 그말이오. 기도할 때라  그 말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자기가 힘 입을 수 있는 때라 그말이오. 기도할  때라 그 말은 앞으로 모든 환난을 웃음으로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승리하고  대적들을 호령칠 수 있는 능력을 받을 때라 그말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기도록에 등록된 사람은 오천 오백 이십 구 명입니다. 평균 기도하러 온 수는.

어제는 오백 칠십 사 명이 교회에 와서 기도했습니다. 권사님들은 다 왔고,  장로님들은 네분만 오고 남은 분들은 다른 데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어짜든지, 내가 그래도 여기 꽃마을에 기도하러 간다 하지마는서도 가 봐야  우리 교인들 가는 것 별로이 안 보여요. 수원지로 가는가? 수원지는 내 저 아래  보니까 언제 내려가는 내가 ○○○ 권찰님 구역에서 내려가는 소리를 내가  들었어요. 기도하는가 내려가면서 중얼 중얼 뭘 얘기를 해 쌓으면서 가는데,  여러분들이 기도하러 갈 때에 얘기하고 가면은 마귀 들어옵니다. 기도하러  가면서 얘기 하면서 가지 마십시오. 얘기하면서 가는 것은 그거는 관광 가면서,  놀러 가면서 하는 것이지 기도하러 가면서 그러면 안 돼. 기도하러 가면서는  여기서 딱 나설 때 이 말씀을 새김질하면서 가야 됩니다. 이 말씀을  새김질하면서 옆에 사람이 말하면 그걸 대답 안해 주면 그 사람이 삐낄 터이니까  대답은 해 줘도 속으로 대답하는, '이 사탄 이 놈이 지금'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이놈이라 하는게 아니고 '사탄 이놈이 이 사람을 통해 가지고서 또 지금  또 방해를, 또 재를 집어 넣네. 음식에 또 재를 집어 넣네' 이라면서 이 말씀을  자기가 생각하면서 가 가지고서 가서 기도하고, 올 때도 '기도하고 다 했으니  이제는 놀자' 할게 아니라 기도하고 올 때에 기도하면서 연결된 그 연결, 그  각오, 그대로 그 사람으로, 그 사람으로, 그 정신으로, 그 마음으로, 그  소원으로. 그 계획으로 그대로 와 가지고 자기 생활을 그대로 해서 연습을 해서  그대로 하루라도 계속하든지 이틀 계속하든지 계속하도록 이렇게 하는 이것어  자꾸 우리의 연습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 만나 가지고 얘기하고 자꾸 뭐, 얘기하는 그것도 옆의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자꾸 믿음의 얘기를 하는 그런 거는 좋지마는서도 잘못하면 얘기  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유익을 주지마는서도 자기에게는 텅 빕니다.

 그러기에 부흥사들이 설교하고 난 다음에 자기에게 있던 것이 싹 다 빠져  나가고 속이 텅 비었어. 이러니까, 속을 채우지 못해. 속이 텅 비었으니까  설교하고 난 다음에 자기 강사실에 돌아가 가지고는 자기 속에 그것을 채워  가지고, 또 꽉 채워서, 채워 버려야 되지, 젖을 먹 이면, 젖을 먹이면 어머니는  젖 꼭지 아이가 빨았는데 젖을 먹이면 속이 텅 빈 것 같습니다. 난 젖을 안 먹여  봤지만 의례히 그럴 거라 말이오. 속이 텅 빈 것 같애. 쏵 다 빨려 나갔으니까.

그라면 또 음식을 먹어 채우는 것 마찬가지로 자기 속을 채우고, 채워 가지고 또  젖이 나와야 그 다음 시간에 강사가 가 가지고서 뭣을 은혜를 베풀 용기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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