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지기 비유

 

1982. 6. 12. 토새

 

본문:누가복음 16장 1절~2절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주인은 구속하신 주님을 말하고, 청지기는 구속받은 우리들을 비유하고,  구속받은 우리들은 우리 자신과 모든 소유가 모든 자체, 자기와 모든 소유는 다  주님이 대속하셨기 때문에 그 공로가 내것 될 때에는 나와 내 모든 소유는 다  당신의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대속의 공로가, 우리 영육이라는 그 자신이  인정을 하든지 아니하든지 기본적으로는 다 대속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대속의 공로가 양면 역할을 하는데, 지극히 큰 능력으로 지극히  광대함으로 양면 역사를 합니다.

일면은 하나님의 지성법과 지공법을 가지고 심판하시는 그 심판에 대해서  역사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공심판에는 다 아무 거침이 없이 죄없는 자로,  의로운 자로, 하나님과 화친된 자로 통과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객관  역사로 주님 편에서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거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이 공로가 역사하는 역사는 꼭 같습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가 기본구원은 얻어지는 것입니다.

일면 역사는 그 터 위에 건축하는 것인데, ‘그 터 위에 건축하되 사람마다  조심해서 건축하라. 그 터는 곧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일면은 이 세상에서 건설구원, 기본구원 얻은 자가 하늘나라에서 어떤 지위,  어떤 권세, 어떤 영광으로, 어떤 환영으로 살 수 있는 그것이 마련되는 것은 다  건설구원으로 인해서 마련되는 것인데 이면을 이 지극히 큰 대속의 공로가  역사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우리의 이 세상 생활에서 역사하는 큰 역사요, 또 이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이것은 이 지극히 큰 능력의 역사를 힘입어 가지고  영원 무궁토록 역사하는 것입니다.

마치 아무리 전기 제품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전기에 연결되지 아니하면  아무런 그 효력을 나타낼 수 없는 것처럼 영원 무궁토록 주님과의 연결이 없으면  아무런 효력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공로의 역사는 우리 현실에 있어서 우리의 과거도 미래도 거기에는  실질적인 파괴나 건설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미래적으로 어떠한 좋은  미래를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이 건설되는 것도 아니고, 또 어떠한 나쁜 미래를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이 파괴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과거에 있어서도 어떤 과거를, 좋은 과거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  과거 가지고 우리에게 건설이 되는 것 아닙니다. 과거는 과거 건설로 그걸로  끝나 버렸고, 또 과거에 어떻게 나쁘다 할지라도 나쁜 그것이 우리에게 파괴를  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다만 건설과 파괴는 자기의 그 현실이라는 현실에서 건설도 되고 파괴도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앞선 자가 뒤 되고’ 하는 그 말은 과거가 좋다 할지라도  그것이 현실에 따라서 아무런 건설을 가지지 못하고, 또 과거가 아무리 나빠서,  ‘뒤선 자가 앞선다’ 과거가 나쁘다 할지라도 현실이 좋을 때는 그는 건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건설은 현실에서만 되어지는 것인데, 우리의 현실에서 어떤 건설과  어떤 파괴가 오느냐? 건설과 파괴는 곧 죄와 사망의 파괴가 옵니다. 또 건설은  어떤 건설이 오느냐? 모든 죄를 방어하고 사망을 방어하고, 또 하나님의 그 지공  지성의 심판에, 심판법에 복종하는 이 복종의 밑천이 오고, 복종을 따라서  하나님의 온갖 그 은혜가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에게서는  우리에게 능력이 오고, 또 하나님이 역사해 놓으신 그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가 되겠습니다. 그것이 또 우리에게 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연결로 인해서 우리에게 오는 게 있고, 또  하나님의 법도를 순종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 있고, 또 하나님의 법에  위반됨이 없는 데에서 우리에게 자격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시험칠 때에 수험 자격이 있는 것처럼 사죄가 되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에 나아갈 그런 자격이 있고, 이 자격이 있을 때에 의가 있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끌어올 수가 있고, 또 아무리 의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끌어왔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결합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본체에서 나오는 친(親) 역사의  그 능력은 자기에게 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논리적 순서로 하면 이렇게 논리가 되고 이렇게 순서가 되지만 실은 그것이  동시에 되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 가지 역사로 지난밤에 말한 것처럼 역사하는데, 우리는 자기가  죄에 대한 문제, 사망에 대한 문제, 또 하나님의 법을 통과하는 믿음 문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믿음 문제, 또 하나님의 온갖 은혜를 끌어 오는 문제, 또  하나님과 화친하는 문제, 하나님의 온갖 그 능력을 내가 힘입어서 사는 문제  이런 문제를 우리가 사람의 의지로, 각오로, 열심으로, 충성으로, 혹은 자기가  다른 것, 뭐 돈을 많이 들이고, 자기의 정력을 많이 들이고, 수고를 많이 하고  이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자기가 많이 했고, 또 자기의 소유를 하나님에게  많이 드렸고, 또 자기가 친히 역사하고 하는 이런 것 가지고 이것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 힘 가지고 이것을 해서 이 세 가지의 중대한 것을  해 보려고 자기 힘으로 달려드는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개 이것을 자기 힘으로 해 보려고 달려드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고 하니  세상에서 선천적으로, 후천적으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많이 받은 부자들입니다.

다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받아 가지고 있는 것이 제법 많고 참  풍성하기 때문에 이것 가지고 한번 해 보려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이것 가지고 하려고 달려들기 때문에 그것이 다 헛일입니다. 이러니까  자기 주관적으로는 잘 믿어서 라오디게아교회 모양으로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실상은 다 헛일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것은 이 세 가지, 세 가지이면 다인데, 죄와 의와 하나님과  화친 이 세 가지면 다입니다. 이 세 가지가 끊어지면 멸망의 다요, 이 세 가지가  바로 되면 구원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자기가 자기라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내놓고, 자기라는 것을  주님에게 내어 드려야 이것이 대속이 다 해결이 되는 것인데, 자기는 내놓지  않고 자기의 소유 중에 무엇을, 또 자기의 노력의 몇 부분을, 이런 것을 가지고  하려고 하는 것이 마치 ‘네가 하나님 은혜를 돈을 가지고 사려고 하기 때문에  돈과 같이 망한다’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다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이것은 우리가 성경 가지고 연구하면 우리에게 오는 죄의 세력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죄의 세력은 벌써 부정모혈로 난 자는  이 세력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이 세력이 어느 정도의 세력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왕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다’ 이랬어. 왕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다 말은  절대적인 주권 능력적 세력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왕권을 가지고 역사하기 때문에 이 왕권에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은, 마치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는 그 나라의 정권에게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과 같다는 것으로 비유의 말로 해서 ‘왕 노릇 한다’ 그렇게, ‘죄가 왕  노릇 한다. 다만 예수님의 공로로 인해서만 왕 노릇할 수가 없다’ 하는 것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도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하나님과 화친에 대해서는  인간이 자기의 힘으로서는 절대 안 됩니다. 이 세 가지의 예수님의 이 대속의  지극히 큰 능력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역사하고, 또 하나는 우리의 세상  생활에서 역사를 합니다. 이 지극히 큰 능력이 역사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 능력이 책임지고 역사합니다. 변호의  역사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어떻게 정죄할 수가 없어 다 인정하고  환영하고 용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공심판에서도 이 세 가지 대속의 공로  외에는 이 심판에서 우리 위해서 변론할 자나 우리를 위해서 역사할 자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하늘에도 땅에도 없습니다. 거기에서 없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내것이 되어지도록, 이는 객관 역사인데 이렇게 되어질 때에 심판을  이기고 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것이 기본구원인데, 그러기에 기본구원은 예수님의 공로로만  되는 것이지 공로가 아니고 다른 무슨 인간의 어떤 장점이나 어떤 노력 가지고는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절대 안 되는 것과 같이 일 면이 남았는데, 이것은 터  위에 건설하는 건설면이 남았는데, 이 건설면도 건설되는 것이 다 영원성의  것으로 건설되고, 완전성의 것으로 건설되고, 무궁성의 것으로 건설되고,  불변성의 것으로 건설이 되는 것입니다. 영원히 생명성의 것으로 건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것이 다 무한함이요, 다만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에만 이것이  있지 그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 가지 문제에 대해서 오는 모든 해의 세력을 방어하는 것도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또 여기에서 건설하는 것도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의  요소 가지고 하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 속은 사람들이요 다 패전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어떤 사람이 해 보려고 달려드느냐? 아예 없는 자는  ‘나는 그것도 없으니까 그것 가지고는 못한다’ 하기 때문에 자기를 내놓고,  이것들이 있는 사람은 이것 가지고 하면 될 것같이, 세상이 모두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귀중히 인정하기 때문에, ‘이것만 하면 되겠다’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기 때문에 그런 것 가지고 해 보려고 달려듭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 것으로 부요한 사람들이 하늘나라 들어 가기가 약대가 바늘 구멍으로  통과되는 것보다 어렵다 그렇게 말씀을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는 아무것으로도 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각오나 결심이나 의지나  자기의 뭐 가진 것을 하나님에게 드리는 헌물이나 헌신이나 뭐 이런 것 가지고  되는 것 아닌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믿음으로만 됩니다. 여기에 쓰이는 믿음은  건설면에 있어서는 기본적 믿음인데, 믿음의 씨인데, 이 믿음은 어떤 믿음이냐?  이것은 자기라는 그 자신, 자신이 주의 것이 되는 이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주님의 것이 되는 이것이 주님이 계약 맺은 이 계약대로의 이행, 복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주의 것이 될 때에 주님의 공로는 우리 현실에서 역사합니다.

역사할 때에 이 죄를 앞장 세우고 오는, 죄를 앞장 세우고 오는 이 사망의 적을,  사죄에 대해서 내가 주의 것이 된, 주의 것이 되고 주의 공로가, 사죄의 공로가  내것이 될 때에 이 공로는 우리에게 지극히 큰 능력 가지고 역사를 합니다. 그럴  때에 죄는 거기에서 깨어지고 사망도 거기에서 깨어지는 것입니다.

죄의 세력과 사망이 그 뒤를 밀고 따라서 오는데, 여기에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말할 때는 이것이 멈춤합니다. 이것이 멈춤하고 우리에게 쉽게  달려들지를 못하고, 예수님의 대속을 말할 때에 멈춤하는 것은 ‘이 지극히 큰  사죄의 세력이 와 가지고 여기에 역사하나 안 하나?’ 하기 때문에, 멈춤하고  있다가 실질적으로는 이 사죄의 역사가 역사할 수 없도록 이 사죄 역사가 막혀  가지고 있고, 사죄 역사가 와서 일할 수 없도록 방해를 받고 있으니까 사죄  역사가 달려들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럴 때에는 죄와 사망이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와 가지고 역사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 지극히 큰 능력의 사죄의 역사인데, 이 역사가 누구에게 매여 가지고  있는가? 인간 자유에 가리워져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 것으로 되어 있고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주의 것이 되어 있지 않는, 자기가 자기 것으로  되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강제로 ‘너는 내것이요 나는 네것이라. 내  공로는 네것이라.’ 이렇게 할 수 없는 이것이 우리에게 계약되어 있는 믿음의  계약입니다.

여기 대해서 복종을 해야, 인정을 해야, 지식적으로 인정하는 것 있고 말로  인정하는 것 있고, 그러면 지식적으로 말로는 인정하는 것은 그것은 그  실질적으로 되어 있는, 실지로 되어 있는 이것의 기초 공작으로 필요있는 것이지  이것이 실지로 되어지지 아니할 때에는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하나의 효력도  가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주의 것이 될 때에 이 능력은  역사합니다.

그러면 죄와 사망에 대해서 지극히 큰 능력이 우리를 도울 수 있고 우리에게  역사할 수 있는데, 이 능력이 막히고 있는 것은 자기의 주관의 불신에서 막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사죄면에서 자기가 주의 것이 완전히 된, 자기가 주의 것을  보관하고 있는 자기가 청지기라는, 이 사죄에 대해서 청지기인 이 사실을 자기가  인정할 때에 이 모든 세력은 멈추고 있고, 실지로 자기가 되어졌을 때에, 주의  것이 되어져서 살 때에 이 죄는 그 시간에 다 깨져 버리고 근방에 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는 사람들이 기본구원은 자기가 부인하든지 말든지, 알든지 말든지,  실지로 인정하든지 말든지, 그것이 되든지 말든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건설구원에 있어서는 우리에게 제한된 권세는 권세이지만, 유한한  권세는 권세이지만 유한한 이 권세는 절대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거부하면  안됩니다.

‘내가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노니 문을 열어 달라. 그러면 내가 들어가서 너는  나로 더불어 일하고 나는 너로 더불어 일해 가지고 이제 영생을 이루겠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기본구원의 역사는 꼭 같지만 그것은 영이 구원 얻는, 우리의 영이  구원 얻는, 우리의 주격체가 구원 얻는 것이고, 이 건설구원은 이 주격체가  아니고 주격의 소유체가 되는 심신이 구원 얻는 것인데 이것이 건설입니다.

인격으로 말하면 자기의 그 기초가 되는, 토대가 되는 인격이 그것이 영이요 그  토대 위에 건설되는 그 인격이 심신의 성화인 것입니다.

이 지극히 큰 능력, 죄에 대해서 사망에 대해서 이것을 방어하는, 죄를 이기는  능력, 사망을 방어해서 이기는 능력, 이 능력이 인간의 힘 가지고는 절대 안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해충을 방어할 수는 없습니다. 방어 못합니다. 다만  방어하는 방편은 과일을 맺으면 주인이 와서 방어를 해 주고, 과일 안 맺으면  주인이 와서 방어를 해 주지 않는 것처럼, 자기가 주의 것이 되면 이 공로가 와  가지고 역사하고, 자기가 자기 것으로 되어 있으면 이 공로는 우리에게 와  가지고 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를 자기의 의지로, 자기의 결심으로 이렇게 이겨 보려고 하는 것은 이것은  인본이요 이것은 어리석은 방편입니다. 다만 죄와 사망을 이기는 방편은  무엇이냐? 내가 주의 것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것 되는 것입니다.

이 청지기의, 청지기라는 이 사실의 도리를 밝히 깨닫고 내가 주의 것으로 되어,  주의 것으로 인정할 때에는 인정적인 죄악은 우리에게 와 가지고 해하지  못합니다. 내가 입으로 증거할 때에 논리적으로는 우리를 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내가 주의 것이 되지 않았을 때에 주의 것은 내것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지는 실지로, 실상은 실상으로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상이 되어질 때에 이 능력은 역사하고,  또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조건있는 것이 하나님의 어떤 은혜라도 그 은혜가  우리에게 직접 오는 은혜는 없습니다. 그 은혜가, 돈이 돈으로 바로 오는 일이  없습니다. 또 자기에게 어떤 영광이나 지위가, 그 영광 지위가 직접 영광이 바로  오고 지위가 바로 오는 일이 절대 없습니다. 언제든지 올 때에는 하나님에게서는  법으로 옵니다. 지성 지공의 법으로 옵니다. 법으로 올 때에 이 법은 돈을 가져  오고, 이 법은 권세를 가져 오고, 이 법은 지위를 가져 오고, 이 법은 영광을  가져 오고, 이 법은 모든 평강을 가져 오고, 이 법은 기쁨을 가져 오고 하는  그것이, 그 법이 하나님의 온갖 은혜를 우리에게 끌고 오는 그 줄이 다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법을 통과하면 하나님께서 그 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리라는 그것은, 그 법을 내가 지킬 때에 바로 지키는 그것이 바로 그 실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법을 통과하지 않고 대번에 주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법을 통과케 해 가지고 주는데, 이 법을 통과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객관 역사로  이것을 권유해 가지고 하는 것이 있고, 자기 주관에서 하는 것이 있는데,  그러기에 이 법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인식시켜 가지고 오기 위해서 인식시키는  것이 있고 실질적으로 자기에게 오는 것이 있습니다.

인식시켜 가지고, 인식시키기 위해서 오는 것은 어떤 것이냐 하면 요새 말로  모두 신유의 은혜라 하는 그것입니다. 이적, 모든 표적, 표적들은 그것이 아무리  표적이 앉은뱅이가 일어났고, 문둥이가 깨끗해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기에게  하나의 실상의 것을 얻도록 하기 위해 가지고 하나 알려 주는 증거품이지 그것이  하늘의 영원한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을 표시해서 열 문둥이  가운데에 다 나았지만 아홉 문둥이는 그것으로서 썩고 죽고 망할 것만 얻어  가지고 그것으로 끝나 버렸습니다. 그 중에 이 표적을, 표적은 실상이 아닌데,  이 표적이 가르치는 실상을 잡은 자는 열 문둥이 중에 한 문둥이밖에는, 나은,  문둥이로 나은 사람 한 사람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렇게 이 공로가 자기에게 와 가지고 이 의에 대해서, 의라는 것은  어떤 것이 의냐? 의는 하나님의 능동에 피동되는 그것이 의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요, 곧 하나님이신 신인 양성 일위가 이루어 놓은 그 의입니다.

불의라는 것은, 불의는 무엇이 불의냐? 의는 의인데 불의입니다. 불의는 어떤  것이냐? 자기가 능동자가 되어 가지고 자기로 움직여진 그것이 불의입니다.

우리에게 불의를 대속하신 그 칭의는, 이것은 자기로 움직이는 능동적으로 살던  자가 하나님에게 피동적으로 사는 이 공로가 칭의의 공로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워서, 동등될 걸로 여기지도 아니하고 자기를 비워 가지고  죽기까지 복종했으니까 이것이 이제 우리가 능동으로 사는 것을 대속해서  피동으로 사는 이것으로 공로를 베푼 것입니다.

하나님께 피동되는 이것으로써, 피동되는 이것으로써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그  모든 역사는 자기가 다 가져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방편을 통해서.

그러나 하나님 자체의 그 완전성, 온전성, 그 본체의 그 속성적인, 하나님  자체의 그 온갖 능력이 우리에게 와 가지고 역사하는 것은 이것은 자기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결합한 이것이 결합으로만 오는 것입니다. 이 결합으로만  오는 것은 전부 영생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연결되어서 이  능력은 무한하신 능력이기 때문에 사망이 해할 수 없는 것을 가리켜서 생명이라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주시는 구원을 우리가 이 세 가지로 분류해서 세 가지로 우리가  이 구원을 받을 수가 있는데, 이 세 가지로 받는 것은 먼저 지식으로 알아야  되겠고, 그 다음에는 입으로 증거해야 되겠고, 그 다음에는 실상이 되어져야  실질적으로 역사하지 실상이 되지 않으면 실상으로는 역사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난밤과 오늘 아침에 말하는 것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하나님과  화친에 대해서, 이 문제를 인간의 요소를 가지고 해 볼려고 하는 그런 일은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고, 그러면 이것은 순전히 예수님의 대속의  지극히 큰 능력, 이 능력으로만 이 세 가지 문제는 해결할 수가 있는 것인데 이  능력이 우리에게 와서 지식적으로 와서 일할 수가 있고 또 논리적으로 와서 일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입으로 증거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는데 그것이 아무리 있어 봤자 실상은 아닙니다. 실상이 이루어지는  데는 실상이 자기 것이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이 곧 온전한  행위입니다.

이러니까 지극히 큰 능력은 우리에게 기본적으로는 아무 상관없이 당신의 단독의  능력으로 이 일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것은 등급이 없고, 꼭 같고, 이 터 위에  건설하는 이 심신의 육의 구원인 이 건설에 있어서는 이것은 순전히 우리가  주격체가 되어 가지고, 우리가 주격체가 됐습니다.

근본은 당신이 주격체가 되어 가지고 하지만 건설구원은 이미 살아난 주격이  있기 때문에, 영과 육과 이 둘이 합한 이것이 우리인데, 우리가 주격체가 돼  가지고 하나님은 피동적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궁극적인 것은 아니지만, 제한된 것이지만 궁극적인 면에는 당신이  역사해 가지고 궁극적인 기본 역사를 일으켰고, 기본 역사를 일으키고 난  다음에는 건설구원은, 이 건설구원의 범위 내에서는 우리가 주격체입니다.

우리가 능동이요 당신이 피동이지 당신이 능동이고 우리가 피동하지를 아니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디까지나 기본구원에 능동적으로 역사하고 건설구원에는  피동적으로 역사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계약에 선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령은 우리에게 중생된 영을 협조해 가지고 영을 통해서 우리의  심신에게 역사하지, 영을 통하지 않고 중생된 자에게 심신에게 직접 역사하는  것은 월권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불법을 하지를 못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인생에게 세 가지 이 문제만 다 그 안에 들어 가지고 있는 것인데, 이  세 가지, 하나님 자체의 것이 내 안에서 역사해 가지고 내가 말하는 것이  하나님이 말하는 것이 되고, 내가 일하는 것이 하나님이 일하는 것이 되고, 내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가 되고, 하나님의 자체, 하나님의 본체, 하나님의 속성 그  모든 것이 내것으로 역사하는 이것은 하나님과 결합된 화친의 결합이 되어져야  됩니다.

이 결합은 인간의 각오나 인간의 충성이나 인간의 성심성의로 되는 것 아닙니다.

이것은 아무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수단 방법 저런 것 아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내가 주의 것 되면 이것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모든 만들어 놓은 공작,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온갖 본체에서  나오는 그 본체의 역사 말고 하나님이 해 놓은 모든 소유, 이런 하나님의 소유  성질에 속한 이런 것은 다만 의를 통해서 우리에게 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66권의 법도를 준 이것은 외모는 보면 글이요  책이요, 속에는 보면 진리요, 속에는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모든 은혜의  실상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상입니다. 이것이 바로 돈입니다. 이것이 바로  권세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위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광입니다. 이것 하면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영광이요, 영광이 올 때에 이것으로  통해서 우리에게 옵니다. 껍데기는 보니까 영광이 진리를 통해서 오는데 그  진리를 검어쥐고 보니까 그 진리의 끄트머리에 영광이 달려 가지고 있습니다.

이게 하나의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의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예수님의 대속의 이 의는 하나님의  지성법과 지공법을 완성한 의입니다. 그러기에 율법의 만족을 일으키는  의입니다. 다시는 율법을 더 요구할 것이 없고, 만족을 일으킨 그 의를 우리에게  줬기 때문에 나만 당신의 것이 되면 이 의는 내것이 되어집니다.

그러기에 이것은 하나님의 소유로서는 못 받을 것이 없습니다. 뭐든지 다  내것이오. 하나님의 온갖 소유는 다 내것이오. 왜? 그것을 내가 필요가 없어서  쓰지 않지, 암만 부자가 자기의 창고에는 오만 것이 다 있지만 농사를 짓는  농구는 농기가 되어야 그 농구가 필요있지 농기 아니면 무슨 그것이 필요가  있겠소? 농시가 되면 그것이 필요있지. 자기의 것이지. 지금 안 쓴다고 자기  것이 아닌 것이 아니고 자기 것이 되어 있지만 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안 쓰는  것입니다. 주님의 온갖 은혜가 다 우리의 것이 되어진 것인데, 되어져 있는데  내가 그때 그때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안 쓰는 것이지 언제든지 필요있으면 갖다  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지성법과 지공법을 완수한 자는 어디든지 자유입니다. 어디든지  자유, 어디든지 자유로 출입할 수 있습니다. 통과할 수 있습니다. 막힐 것이  하나도 없어. 가기 싫어 안 가지 어디든지 다 갈 수 있어. 이런 대속의 공로를  우리에게 베풀어 놓은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 공로는 하나님의 것을 취하는 데에 절대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고,  어디든지 자유하는 데 절대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는데, 이 지극히 큰 능력의,  의의 능력인데 이것을 나만 당신의 것이 돼 버리면 되는 것인데 이것이 안 되는  통에 사고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도 그러합니다. 내가 당신의 것이 되었을 때에는 사망이라는 것은 절대  오지를 못합니다. 사람 보기에는 사망이 왔으나 그 사망은 완전히 나를 위해서  이용물로 귀하게 쓰여졌지 그것이 사망시키지를 못합니다.

그러기에 사죄를 받은 자를 사망시키는 능력도 없고 사망시키지를 않고,  사망시킬 수도 없고, 사망시키려고 달려들지도 않습니다. 사망케 하는 것이 다  자기를 복되게 살게 하는 것입니다. 사망으로 사망을 이겼다는 것이 사망이  해하려고 왔지만 예수님에게 죄가 없기 때문에 그 사망이 사망을 시키지 못하고,  사망이 정반대로 생명 역사를 일으키는 데에 역사하는 것 외에 딴것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이 사죄가 왔을 때에 죄가 와 가지고 죄가 권리를 부리지 못합니다.

벌써 죄를 완전히 이기고, 죄를 이긴, 죄를 정복한 죄의 주인이 됐고, 죄의,  죄로 죄의 왕된 것이 아니고 죄를 정복해서 탈환한, 정복한 죄의 왕이  되어가지고 있는데, 죄는 예수님에게 복종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이겨서 죄를  복종시킨 이런 왕의 능력을 가진 그 능력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 무엇이냐?  자기가 주의 것 될 때에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는 인간의 요소 가지고는 인간 문제의 세 가지는 이것은 절대  할 수가 없는데 이것 가지고 달려드는 사람들은 다 실패한다. 어떤 사람이  달려드느냐? 이것이 없는 사람은 달려들지 않는데 있는 사람들은 이걸 달려든다.

그러기에 가난한 자에게 믿음을 부요하게 해 가지고 하나님의 후사가 되게 했다.

이 세상 부자 있는 것만치 이것은 안 되게 된다.

이러기 때문에 이것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 또 하나는 이제 지극히 큰 능력만이  이것을 할 수 있다는 것, 이 세 가지를 지극히 큰 능력만이 할 수 있다는 것, 한  가지는 지극히 큰 능력이 왜 오면 될 터인데 왜 일 못하고 있느냐? 이것은  자기에게 막혀가지고 내것이 내것이기 때문에 안된다 그말이오.

상점 주인이 암만 주려고 해도 돈을 가지고 ‘돈 주십시오.’ 돈을 안 주려고  하니까, ‘이거 내 돈인데 왜 달라하노?’ 돈을 안 주려고 하니까 상점 주인은  물건을 내어 놨다가 들여 놓을 수밖에 없다 그말이오. 만일 돈도 안 주고  가져가려 하면 그 주인이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 그말이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 가지 해결할 수 있는 지극히 큰 능력이 왜 와서 일하지  못하느냐? 내가 내것이, 내가 내것 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나의 것이요 내것이  내것이라, 내가 나의 것으로 내가 살아 있고 나를 부인하지 않고 내가 주인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는 역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를 내놓는 것이 이것이 값이, 댓가야 안되지. 예수님의  공로를 살 만한 아무 댓가가, 이것이 비중이 되는 댓가는 안된다 그말이오.

비중되는 댓가는 안되지만 이것이, 값은 없지만 그래도 값을 주고 사라 이랬어.

이것은, 이제 값이 없다 말은, 돈이 없어도 값을 내고 사라 그 말은, 이 공로에  대한 비중이 같은 그런 가치있는 것은 아니지만 너를 완전히 주의 대속의 공로로  인해서 주의 피로 값주고, 주의 공로가 네것 되니까 주의 공로를 주고 값주고 산  것이니까 공로가 네것이면 너는 주의 것 됐다는 이것을 인정하라 그말이오.

이것이 세상살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영원 무궁토록 그러합니다. 그럴  때에 역사할 수가 있고, 그것은 없는 일이지만 논리적으로 억만년 뒤에라도  ‘내것을 내것으로 찾겠습니다’ 하면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 가지고 찾았을 때에  주의 공로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내가 믿음으로 나는 주의 것이라 하는 이 지식과 인정과 실상의  역사가 영원히 살아 역사하고 주님의 공로는 영원히 살아 역사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이것은 현재적으로 쉬지 않는 노력과 쉬지 않는 역사로 되어지는  것이지 한 번 못박아 놓으면 다시 빠지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처럼 이렇게  고정되어지는 것은 아니고, 언제든지 살아 있는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의 구원이 한 번 됐으면 어떻게 된다 하는 그것 아닙니다.

기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이 대속의 공로를 계속 하나님의 심판에서 계속,  억만년 영원 무궁토록 이 능력이 계속 역사해야 되지 역사하다가 딱 끊어지면  그만입니다. 이것이 인간과 하나님과 다른 것입니다.

또 건설면에서는 우리의 이 믿음이 계속 노력을 해야 되어지지, 암만 백년, 이  전선은 전기는 와 가지고 여기에서 백년 불을 켜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백년  불을 켜 가지고 있었어도 금방 켠 거와 꼭 같습니다. 백년 불을 켜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백년 불켜 가지고 있으니까 이제 전선을 끊어도 될 것 아닌가?’  끊으면 즉시 불 가는 거와 한가지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지난밤과 오늘 아침에서 이 세 가지는 인간의 요소로는  안된다는 것, 지극히 큰 광대한 무한의 능력, 예수님의 공로는 무한한 것,  광대한 것, 우리의 지식이 백년 가서 알면 아는 것만치 예수님의 대속은 범위가  넓어졌고 더 알면 더 넓어지는데, 우리가 아는 데 따라서 그 공로가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넓어져 있는데 우리가 아는 데 따라서 그 공로의 한계는 커지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극히 큰 능력으로만 이 세 가지는 해결  할 수가 있다.

이 능력이 와서 일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주의 것이 되어야 된다. 청지기가  되어야 된다. 그러기에 청지기가, ‘네가 내것을 허비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거  어쩐 말이냐?’ 허비라 말은 주의 것인데 주의 것을 제 마음대로 쓰는 그것이  허비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계산댑니다. 그 다음에 계속해서 집에 가서 돌아가서  연구하면 나올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우리가 할 일이 뭐이냐? 이 청지기가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하는 것, 이러니 나는 이런 이런 입장에 조건, 이런 조건들이 다  있는데, 이러한 조건의 이 촛점에서, 이런 모든 조건들이 다 종합한 이 촛점에서  내가 지금 움직여야 되는 것이니까 나는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어떻게 행할  것을 연구할 때에 여기에 한 조건이라도 빼 놓고 하면 헛일입니다. 한  조건이라도 빼 놓고 하면 헛일이라 말이오.

며칠 전에 아침에 건축가가 건축을 하면서 ‘아, 이 집 지어 가지고 한 채에  얼마씩만 팔면 아파트 하나 지으면 이거 큰 부자 되겠다. 한 칸에 얼마씩 파니까  이것이 전체 값이 얼마다.’ 당장 부자가 됐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계산을  잘못했습니다. ‘이 아파트 하나만 하면 큰 부자가 된다. 부자 되기 쉽다.’  ‘그러면 아파트 하나에 지금 얼마나 받노?’ ‘얼마가 내 돈이 된다.’ ‘그 터  값을 뺐나?’ ‘터 값? 그것도 줘야 되나?’ 터 값을 계산하니까 푹 줄어집니다.

‘이 바보야, 또 그거 건축하는 데 저절로 되나? 재료값 계산했나?’ ‘재료값  계산 안 했다.’ 또 재료 거석하니까 푹 줄어집니다. ‘또 있다.’ ‘뭐 있기는  무엇이 있어? 이제 아무것도 없지.’ ‘노임이 있다.’ 또 노임 계산합니다.

‘이제는 뭐 없지? 남는 것도 얼마 없구만.’ ‘야, 또 세금이 있다.’ ‘또  세금이 있나? 세금 하니까 남는 것이 없는데?’ ‘그런데 그것이 당장 팔릴런지  몇해 만에 팔릴런지 모른다. 거기에 대한 이자가 있다.’ ‘아이구, 이러면 집  장사 안 해야 되겠다.’ 자기가 계산댈 것 중에 계산을 빼 놔 버리면 헛일이라  그말이오.

우리가 어떻게 행할 것을 거기에 대한 모든 조건들을 다 구비해 가지고  ‘이래도, 이래도 우리가, 이래도 해야 되겠다. 이래도 이것이 수입이다. 이래도  이것은 남아 있을 수 있는,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래야 되어지는 것이지,  이래도 이 법이 와도 정죄받지 아니하고 이 법이 와도 깨지지 않을 수 있는  이것을 해야 되는 것인데 이런 걸 계산하지 아니하고, 이 청지기 비유에서 아주  간편하게 요긴한 요소들이 다 나왔습니다. 아주 간단 명료하게 생각하면 우리가  계산댈 때에 어떻게 행할 것을 계산할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이 다 여기에 다 들려  올라왔습니다.

이런데 결론적으로, 그러면 인간들이 궁구하고 궁구하는데 암만 궁구해 봤자 한  길밖에는 없다. 빚 탕감, 빚을 탕감해 주는 그것밖에는 없다. 이 지혜로운  청지기가 쫓겨나기 전에 쫓겨나고 난 다음의 유익을 위해서 쫓겨나기 전에 했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이지, 쫓겨날 자가 쫓겨나지 않으려고, 쫓겨날 자가  쫓겨나지 않으려고 하면 주인이 볼 때에 ‘저놈 간사한 놈, 이중 놈, 저놈 지금  안 쫓겨날려고 저따위 짓을 한다.’ 더 밉상으로 보입니다. ‘내가 쫓겨난  다음에 어떻게 할꼬’ 그것 생각했으니까 머리가 바로 돌아가고 생각이 바로  들어왔다 그말이오.

기독자는 세상에서 떠나고 난 다음의 자기 유익을 도모하는 것이 그것이  지혜있는 일입니다. 그 외에는 지혜있는 일 없어.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준비, 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살기 때문에 이 세상에 필요한 것, 이 세상에  사는 준비 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요. 이것을 위해서 성경에 많이 가르쳤습니다.

‘풀의 꽃과 같다.’  이것이 쫓겨나고 난 다음에, 쫓겨나고 난 다음에는 그 문제가 둘이 있어. 하나는  뭐이냐? 불가능이라. 쫓겨나고 난 다음에, 힘이 없다 그말은 불가능이라  그말입니다. 이 비유를 하려고 내놨는데, 힘이 없어. 땅을 파자니 힘이 없어.

세상에서 떠나고 난 다음에는 무궁세계의 준비는 우리는 할 수 없는 것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빌어먹자니 부끄럽고’ 구원에는 부끄러운 구원이 있습니다. 영광된 구원도  있고 부끄러운 구원이 있소. 그 부끄러움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해결지워야 되지  거기 가 가지고는 해결을 못 지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세밀하게 방편에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영원한 집으로 너를  영접하리라.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나에게 행한 것이라. 이 가난한  자에게 하는 것이 여호와에게 꾸어주는 것이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해서 하는 것이 바로 직접 주님에게  대해 하는 것인 것을 여기에서 비유로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할 일은 빚 탕감해 주는 것 그것밖에 없습니다. 자기 궤짝을 탁 열더니만  척 내주면서 ‘아나, 문서 고쳐라.’ 인간의 모든 죄병이 하나님께 걸려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저 사람의 죄는 내 서랍 안에 들었습니다. 저 사람의 신령한,  신령한 문제 육체의 문제 그 문제는, 그 사람의 문제는 내 서랍 안에 들었소. 그  문서가 내게 있어. 내가 고쳐 주면, 도장 찍어 고쳐 주면 고쳐 줄 수가 있어.

어떤 사람 이 사람은 아무것이의 아무것이에게 이 세 가지 은혜, 아무것이에게  죄빚을 벗는, 죄에서 해방받는 그것이 아무것이에게 달려있어. 그 사람이  역사해야 되지 다른 사람이 역사하면 안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구역을 정할 때에 ‘이 사람을 누구에게 붙일까’ 하는 그것은  껍데기로 보는 자는 ‘저래 가지고 구역에 붙이는 저 일을 저래 하는 것은 참  지혜있게 정치한다.’ 시기 질투한다 말이오. 이래 가지고 ‘서부교회는,  서부교회는 막 구역에 대해서 서로 제 구역을 만들려고 구역 욕심에서 눈이  발가이 날뛰지 사랑이 없다’ 고. 네가 사랑이 없다. 그러는 자는 회개 안 하면  안돼.

왜? 제 서랍에, 제 서랍 속에 지금 그 사람의 문서가 들었는데 얼른 도장 찍어  고쳐 줘야 되겠는데, 자기에게 관한 사죄와 칭의가 있습니다.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고 네가 땅에서 매면 매여진다는, 자기에게 책임져 가지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탕감해 주는 것 외에 지혜있는 일이 없다 그거요.

이러니까 자기에게 매여진 그 사람의, 그 사람을 죄에서 해방시켜서 의로  옮기는, 빛으로 옮기는 이것만이 자기 할일이지 옆에 사람 언제, 아버지가 오고  아들이 오고 왔다 할지라도 언제 인사할 여가가 없다 그말이오. 거기 인사할  여가 없고 거기 눈 깔 여가가없고 자기 맡은 식구 이 구원에 대해서 전적  기울이는 그 사람이 지혜있는 청지기라 그말이오. 지혜있는 청지기. 이것이, 그  사람의 지금 죽고 망하는 것이 내게 매였는데, 내가 잘못하면 하나님 앞에 큰  심판을 받을 터이니까 이 세상의 예의니 체면이니 그런 껍데기 거기 가서 지금  할 만한 그런 여유가 없다 그말이오, 이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뭐 인간적으로 사돈 팔촌까지 전부 윤리 도덕 거기만 주력하는 것, 잘 살고  똑똑한 줄 알지만 가 보면 통통 헛일입니다. ‘내 부모가, 아버지가 죽었으니까  장사하게 해 주십시오.’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해라.’ 못 가게 했습니다.

‘이 가족을 작별하고 지금 떠나겠습니다.’ ‘작별도 못 한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 이렇게 지금 엄금을 했는데  언제 그렇게 말하겠소? 이러니까 집회 때에 ‘윤리 본위로 하지 말아라. 은혜 본위로 하라’ 하는 것도  다 그런 데서 나온 참 범위가 심히 넓지만 입에는 익어 가지고 몇백 번 읽었다  할지라도 속에 진상은 알지 못한다 그거요. 사람이 진실되지 않기 때문에 안팎이  이중 삼중 십중도 되어 있다 그거요. 진실이 아니면 자기는 속는 여기에서 벗어  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영원한 집을 가지고 있는 무궁세계의  하나님의, 무궁세계의 왕에게 하는 것인데, 무궁세계를 자기 것으로 가지고  있는, 무궁세계는 그분의 집이오. 무궁세계는 주님의 집입니다. 전부 주님의  것이오. 주님의 집이오. 무궁세계서 영접한다 그말이오.

그런데 이 실상으로 이루는 방편은 뭐이냐? 이것은 사람들이 허영과 허욕을  가지고 큰 병이 들어서 큰 것만 알지 작은 것은 시시하게 압니다. 그러나 이  일은 지극히 작은 것에서 큰 것이 되어지지 큰 데서는 큰 것은 안되어진다 하는  이 방편을 말한 것입니다. 핑계는 못 해. 큰 것은 하려면 못 하지만 지극히 작은  것 하면 큰 것은 저절로 된다고 하는 이것 방편을 우리에게 줬습니다. 지극히  작은 죄를 해결되어 큰 죄가 해결되지, 지극히 작은 죄는 예사로 하고 큰 죄를  해결하려고, 큰 의를 하려고, 저는 절대 안됩니다. 지극히 작은 것 하면 그것은  저절로 돼.

그러기에 진실만 가지고 나가면 기독자의 구원은 저절로 되는 것이라. 왜? 한  자욱이야 못 뛰어올라? 수천미터의 산이라도 한 자욱 뛰어 오르니까, 내나  산밑에서 뛰 오르듯이 한 자욱 뛰어 올라, 한 자욱씩 뛰어 오르니까 수천미터  위에도 내나 그대로 그 조시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만, 마지막에 결론은 그랬습니다. ‘네가 남의 것에게 충성치 않으면  누가 너의 것을 너에게 주겠느냐’ 그 말은 네가 남의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남이 네것을 소중히 여겨 주겠느냐? 네가 남의 것에 대해서 알뜰히 하지  않으면 누가 너의 것에 대해 알뜰히 해 주겠느냐? 이것이 결론입니다. 이것이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되는 결론입니다.

내가 주님의 것을 소중히 여기면 주님이 내것을 소중히 여깁니다. 나를 소중히  여겨. 이것이 ‘남의 죄를 사해 주면 하나님 아버지도 너희 죄를 사해 주시고  남의 죄를 사해 주지 않으면 하나님 아버지도 너희 죄를 사해 주지 않는다’  하는, 마지막에 주기도문에 결론지어 놓은 이 결론을 여기에 말씀해 놓으신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그러기에 기독교의 구원은 실상입니다. 실상이 아니면 건설구원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부흥사 노릇을 암만 해도 구원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 있을 수 있습니다. 부흥사는 그것은 말로만도 할 수 있는 것이오. 지식과  말이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권능에 있다고 했기 때문에 바울은,  말만 가지고 하는 것은, 이것은 권능에 있지 않기 때문에 말에 있지 않고 권능에  있기를 원해서 노력했습니다. 권능에 있지 않으면 실상은 되지 않습니다.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짓는 일만 됐지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짓는 집은 지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한 시간 반을 설교를 했습니다. 이러니 오늘 아침에는 권찰회 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제 요새는 뭐 아는 것이니까 어쨌든지 이 건축에 대해서 우리  기도할 제목이 몇 가지입니까? 가리켜 보십시오. 일곱 가지. 이 일곱 가지를  자기도 행하고 맡은 식구들에게 ‘너 일곱 가지 기도하나?’ 이 말만 하십시오.

‘일곱 가지 기도하나?’  이번에 이거 모처럼 교역자들이 왔기 때문에 보이는 성전과 보이지 않는 성전이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가 이것이 둘이나 하나라는 요것을 증거해야  되리라 생각했지만 이것보다는 이게 더 급해서 이것을 증거했습니다. 사람들은  둘로 분리해 놓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것이 나왔고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아 보이지 않는 것이 튼튼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보이는 것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작성하고 보이지 않는 데서는  보이는 것을 작성해야 되지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는 데서 일하고 보이는  것은 보이는 데서 일하면 다 헛일입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만들어야 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을 만들어야 됩니다. 이 둘이  하나라야 돼.

그러기 때문에 서부교회는 보이는 성전을 짓는 여기에서 보이지 않는 성전 짓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 그말이오. 보이지 않는 성전 짓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

이러기 때문에 요새 보이지 않는 성전 짓느라고 내가 골이 빠집니다. 왜? 이거  지을려고 하니 마귀라는 놈이 와 가지고 이것이 톡 불거지면 또 그대로 놔 두면  죽을 터이기 때문에 또 이것을 또 치료해야 되고, 도로 한 마디만 축 해 놓으면  픽 나자빠지고 또 나자빠지면 또 이것 또 일으켜 놔야 되고, 자꾸 그래 가지고  죽이고 살리고 자꾸 이래서 속에 죽이는 요소가 이번에 많이 빠져 나와 가지고,  신령한 성전이 지어져야 주님이 기뻐하시고 보이는 성전에 보이지 않는 당신이  역사하시지, 당신의 수입은 신령한 성전 이것만이 당신의 수입인데, 그것만이 불  안 타고 영원히 있는 것이지 예배당 이것은 아무리 지어 봤자 다 불타  버리고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보이지 않는 성전을 보이는 성전 짓는 데에서 해야 됩니다. 그러기에  학개서에 보면 왜 안 이루어지느냐? ‘너희들이 더러워지는 것과 깨끗해지는  것이 다른데, 깨끗해지는 것을 더러워지는 거와 같이 여기기 때문에 안 된다.

깨끗해지는 것은 하나 깨끗하다고 다 깨끗해지는 것 아니다. 더러워지는 거는  하나 더러워지면 다 더러워진다. 이것이 다르다. 이것을 너희들이 모르고 하기  때문에 틀렸다.’ 이것이 신령한 성전이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번에는 이 일곱 가지를 기도해서, 이번 일로서 자기 옛사람이 있어  가지고 툭툭 나올 것이라 말이오. 나오는데 그것이 나오면 팍 자빠져. 제까짓  것이 새벽기도 나와? 못 나와. 마귀에 붙들려 가지고 나오는가? ‘내가 나가기  싫은데’ 네가 나가기 싫은 것이 아니라 옛사람 그놈이 널 붙들어 가지고 못  나가게 하는데, 그놈이 널 붙들어서 구원을 못 이루어. 그놈이 네 원수라.

그놈을 죽여야 돼. 나와? 어림도 없어. 제가 의로운 생각 가져? 못 가져. 이번에  죽일 것은 죽이고 다 살릴 것은 다 살려야 돼.

오늘 아침에는 권찰회 없습니다. 요 일곱 가지 이것을 권면해서 이거 하면 이  시기에 이룰 수 있는 성전 건축이 됩니다. 신령한 성전이 지어져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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