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지기 비유

 

1984. 4. 12. 목새벽

 

본문: 누가복음 16장 10절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안 믿는 사람에게도 이 이치가 조금은 해당이 됩니다. 그러나 전적 다 해당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작은 것 한다고 큰 것 되는 것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이치가  다소는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맞는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속함을  받은 자들에게는 이것이 하나님의 계약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속을 받은  자들에게는 전적 해당이 됩니다. 완전히 해당 되고 절대성을 가진 해당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변동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법칙으로 주셨기 때문에 이  법칙을 지켜야 지극히 큰 충성을 할 수 가 있지, 지극히 작은 충성에서 시작하지  않고는 지극히 큰 충성은 고만 절대 안 됩니다. 또, 자기가 지극히 작은 불의를  조심하지 아니하고는 큰 불의를 이겨낼 수는 없습니다. 이 믿는 사람들에게는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계약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약은 호리도  가감을 못합니다. 하나님 당신도 가감을 못 하십니다. 왜? 당신은 한번  선포했으면 그대로입니다.

 그러기에, 어제 아침에 여기에 대해서 한 가지 진리를 우리자 또 아는 진리를  다시 한번 새롭게 다짐했습니다. 그 뭐인고 하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전 사는  생활이 의냐 죄냐 하는 그 두 가지입니다. 의냐 죄냐? 의냐 죄냐 한 그 두  가지인데, 인간의 죄는 하나님을 어긴 것이 다 죄이지마는 의는 어떤 것이  의인가? 의에 대해서 해 놓은 일 그 사건 자체, 행위 자체, 사건 자체나 행위  자체나 그것에게 가치를 두어서 평가하는가? 물론 그것도 다소 관련은 있지마는  여기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의를 행하는 것은 그 사람이 행해 놓은일의  가치가 의가 되어지는, 그 일의 가치에다가 근거하지 안하고 그 사람이 어떻게  충성했느냐? 충성을 가지고 하나님이 평가하신다. 해 놓은 일의 가치로  평가하시지 아니하지고 그 사람의 충성 여하를 가지고 평가 하신다.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께서 선천의 은혜나 후천의 은혜, 선천의 은혜는 나기  전에 타고난 은혜를 말하고, 타고 난 축복을 말하고, 후천은 난 다음에 자기에게  마련된 모든 복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선천의 이나 후천의 축복이나 모든  축복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두운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자기의  축복을 자기가 만든 것같이 이렇게 생각을 해서 교만한 사람도 되고, 또 사람의  모든 저주를 그 사람이 단독 것으로 이렇게 생각을 하고서 사람들을 저주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아무리 저주 받을 그런 행위를 한다고 해도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아, 저거는 저주를 받을 행위다 하나님이 저렇게 예정하셨고 저 사람은  저주 받는 그런 입장에서서 그런 일을 하고 있다.' 요것은, 저주 받을 일과 축복  받을 일은 바로 도가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우리가 '저 사람은 저주  받을 일을 저렇게 하고 있다.' 이렇게 그것은 정당하게 평가하고 나서 고다음에,  우리와 그와에 관련을 시킬 때에는 우리는 거기에서 심판적 입장에서 그것을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심판적 입장에서 평가해서는 안 된다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저 사람이 저런  행동을 하니 저거 저주 받아야 마땅하다.' 그 사람을 조그만치라도 멸시를  하거나 천대를 하거나 해서 자기는 심판자가 되어 가지고서 그 사람을 판단하고  다 같은 죄인으로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 사람 만치 화 받을  일을 하지 않는 것이오. 또 다른 사람보다 축복 받을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인 이  사실을 깨닫고, 화를 받을 그 일을 하는 사람을 자기로서는 대할 때에, 주여,  나도 주님이 은혜 주시지 많으면 저럴자가 아닙니까? 저나 나나 꼭 같은 전적  부패한 인간이 아닙니까? 주님, 저 사람도 불쌍히 여겨 주셔서 저런 데에서  돌아서게 해 달라는 그런 자비와 긍휼을 가지고서 우리가 동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에게 대한 내 속 마음, 또 하나님께 대하는 것은 이렇게 대해야  되지. '아, 저 사람은 저렇게 화 받을 일을 저렇게 하고 있는데 나는 복을 받을  일을 합니다. 나를 기뻐해 주옵소서' 하는 이런 말을 하다가 크게 쫓겨난 사람이  있습니다. 세리와 바리새 교인이 둘이, 바리새 교인은 아주 독실한 신앙가라고  칭하는 사람인데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세리는 '나는 죄인입니다.' 하면서  머리를 들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참 애소를 하는데, 바리새는 나는 이  사람과 같지 아니하고 십일조도 드리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이래 하니  '참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고 그 사람에게 대해서 주님이 자기와 같게도 해 줄  수 있고 자기보다 낫게도 해 줄 수 있고, 그와 같이 된 것은 자기와 그 사람과  차이 있는게 아니라 주님의 긍휼이 그 사람에게와 자기에게 차이 있는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그 사람에게 대해서 자비와 긍휼을 가지지 못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판정하시기를, 세리는 하나님 앞에 인정함을 받고 환영함을 받았고 바리새  교인은 물리침을 받았다 그렇게 주님이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의와 죄에 대해서, 무엇을 근거해 가지고서 의로 하나님이  정하시고 죄로 정하시느냐? 우리가 해 놓은일 그것을 가지고 '나는 이렇게 일을  잘했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높이 인정해 주시지 안하시고. 저 사람은 무엇이  잘못됐는데. 내 보기에도 나보다 훨끈 못씁데 나 보다 더 귀중히 인정을 해  주신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해서 자기 해 놓은 일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상대한다고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상대해 주실 것입니다. 상대해 주면. 인간이  몰라서, 자기 보기에 조브라운 생각으로 편벽된 생각으로 평가할 때에는 자기 한  일이 의라고 인정할 수 있는 일아 있을찌라도 하나님의 광대하심에 맞출 때에는  전부가 죄입니다. 죄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욥은 말하기를  인간이 행한 그 의가 희다 해도 아주 더러워서 때 묻어서 볼 수 없는 때 묻은  옷과 같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이 그저 해 놓은 일의 그 가치를 보고서 평가하는 것을 네가  소원하느냐? 또 네가 많이 했던지 적게 했든지 네가 충성한 그것으로 평가하는  것을 원하느냐? 어느 것을 원하십니까? 여러분들은 내 일해 놓은 가치로  평가하는 것을 원하십니까 우리가 힘쓴 그 충성 그걸 가지고서 평가해 주시면  좋겠습니까? 네, 충성을 가지고 평가해 주시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래도  긍휼을 입을 수 있지마는서도 해 놓은 일로 평가하신다면 죄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죄는, 성경에 그래 말했습니다. 죄는 조그만한 죄 하나로서 전부가 다  더럽습니다. 의는, 의 행한 것은 의 그것만은 의지마는서도 죄는 조그만한  죄로서 전체가 더러워지는 것이 그것이 죄입니다. 그 사람이 만일 손가락 하나  가지고서 죄를 지었다고 하면 손가락 하나가 죄를 지었는데 온 몸이 다  죄인으로서 감옥에 들어가야 됩니다. 예를 들면 손가락 하나가 들어 가지고서  다른 사람을 상했다고 하면 다른 사람의 눈을 상했든지 뭘 상했든지 상했다고 해  보십시오. 손가락 하나가 그랬는데, 손가락 하나가 들어서 그랬는데 온 전신이  죄인 돼 가지고서 감옥에 홀껴 가지고서 몇 해 징역을 가야 된다 말이오.

 이와 마찬가지로, 이러기 때문에, 참 하나님께서 그 충성으로 우리를  평가하시고 행한 일의 가치로 평가하지 않는 이것이 하나님의 큰 사랑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깨닫고, 마귀란 놈은 '네가 이만침 했기 때문에 이만침 의롭게  했으니까 너는 상이 있으리라.' 우리를 '해 놓은 일이 이만침 있으니까 해 놓은  일로 평가해서 하나님 앞에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마귀가 유혹을  줘서 우리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주님 앞에 대하면 원하는 대로 심판하십니다.

그런 생각 가지고 대하는 것은 화약 쥐고 불로 들어가는 걸음입니다. '해 놓은  일을 가지고 평가해 주십시오.' 가 보니까 '그래, 해 놓은일로 그래 평가하지.'  평가하고 보니까 정죄 되지 안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보는 데는, 마치 코끼리를 제가 만져 보고 아들 책에 있는 대로 '아, 이  기둥 같다.' 다리가 이만 하니까 '기둥 같다.' 이래 '기둥 같다.' 보고서  제딴에는 '코끼리가 기둥 같다' 이렇게 한 말이 맞는 말이 아니라 그말이오. 왜?  코끼리 다리는 기둥 같다 해야 되지. 그게 코끼리 다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거요.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든 사건을 본대도.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보고, 요 다음 시간에 그게 어찌 되느냐, 그 다음 시간에 어찌 되느냐 영원에  어찌 되느냐, 하나님의 심판에 어찌 되느냐, 이것이 이웃에게 어찌 되느냐,  장래에 어찌 되느냐? 이 모든 면을 광대하게 이렇게 우리는 생각할 만한 지능이  없습니다. 제딴에는 알고 고대로 했다고 이래 하지마는서도 그 사건을 들어서  하나님의 심판에서 판단한다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니라 그말이오. 열 못대기가  있는데 한 못대기는 맞았지마는서도 아홉 못대기는 틀렸으니까 못 쓰는 거라  그말이오.

 그러나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하는 충성을 보시고 그것으로서 평가를 해서  '아, 너는 내가 네게 준 것이 힘이 한 개뿐인데 한 개 힘을 다 해서 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것을 만족을 했습니다. 닷 냥쭝 준 자에게는 닷 냥쭝을 다  활용해 가지고서 장사하니까 주님이 착하다고 칭찬하시고 영접하시고, 두 냥쭝은  두 냥쭝 준 그것 다 활용해 가지고서 하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꼭 같은 대우를 해  줬습니다. 내가 너에게 준 은혜가 요것뿐인데 받은 은혜를 네가 하나도 버리지  안하고, 묵히지 안하고, 무시하지 안하고 그 받은 은혜를 전부 다 가지고 네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네가 더 이상 할 수 없는데 있는 데까지 다 해서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만족히 여기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행위는  충성으로 하나님이 평가하신다.

 이러기에, 어릴 때는 은혜를 적게 주셔 가지고서 또 적은 증성을 하게 하시고,  장성하면 또 은혜를 많이 주셔 가지고 장성한 충성을 하게 했기 때문에, 일  학년에게는 충성이라고 하나님이 상을 주시는데 이 학년,에게는 그 충성을  하나님께서 충성이라고 상을 주시지 않습니다. 삼 학년은 더욱 더 그러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이렇게 표준을 잡으시니까 우리는 행위에 대해서 자기  행위를 어떻게 표준을 잡을 것인가? 만일 설교하는 사람이라면 '이번에 설교를  참 은혜 있게 했다. 아주 은혜로운 설교를 했다. 은혜로운 설교, 설교를  은혜로운 설교를 했다. 아주 은혜 없는 설교 했다.' 그 설교를 두고 자기가  평가를 해야 될 건가? '이 설교를 하는데 내가 참 어느 정도 충성을 기울여서  준비를 했나? 어느 정도 내가 충성하지 못했나?' 자기가, 자기가 충성했다 말은,  충성이라 말은 자기를 피로 값 주고 산, 자기를 값을 주고 산 종에게 대해서  충성이란 말을 씁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충성한다, 이런 말 안 씁니다. 종이  상전에게 대해서 충성이라는 말을 쓰고, 또 부하가 상관에게 대해서 충성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기를 군사로 세운, 자기를 장관으로 세운 그 왕에게  대통령에게 하는 그런 것을 충성이라 하는데, 나를 구속하신 주님을 생각 하면서  자기에게 있는 힘을 십분지 오만 기울인 것도 자기가 알 것이고 십 분의 십을  기울인 것도 자기가 압니다. 아니까. 자기가 주님에게 대해서 힘을 기울인 그걸  가지고서 평가해야 후회가 없고 속지 안하지, 그것을 가지지 안하고서 자기가 해  놓은 일을 가지고서 평가를 한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 일보다 더 몇 배할  수 있는 그 은혜를 하나님이 주셨는지 모릅니다. 주셨는지 모릅니다. 주셨다고  하면 자기는 힘을 안 들여도 그 만침은 됩니다. 힘을 안 들여도 그만침 되고,  다른 사람은 은혜를 적게 주기 때문에 있는 힘을 다 기울여도 그것 밖에 안 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사람 앞에서는 멸시를 받았지마는서도 하나님 앞에 가  가지고서는 환영을 받게 되고 이 사람은 사람들 앞에 아주 존대를  받았지마는서도 하나님 앞에 가 보니까 아무것도 없는 그런 참 불쌍한 사람이  됩니다.

 그때 ○○○목사님을 한번 청해 가지고 집회를 했는데. 서부 교회 집회를  했는데 그때 그렇게 말합디다. 어떤 부흥 강사가, 그 강사가 참 자기가  돌아다니며 세계적으로 부흥 강사로 다니니까 '아마 하늘나라에 금면류관은 내  것일 것이다.' 그 사람이 어째 입신 중에 들어갔어. 고만. 영계에 들어갔는데,  가니까 떡 그 천사가 인도하기를 '자, 여기 십자가가 지금 있는데 네 십자가가  어떤 것인지, 네 면류관이 어떤 것인지 봐라.' 보니까, 아주 금으로 만든  십자가가 있는데, 아주 제일 귀한 십자가가 있더래요. '저게 아마 내 십자가요.

저 금면류관' 저 면류관 저게 내 면류관이지, 이랬는데, 금 십자가도 제 것  아니고 금면류관도 제 것 아니고. 또 이호에 가니까 '이게 내 것인가?' 섭섭해  가지고 이호에 가서 '이게 내건가?' 그것도 아니라. 삼호에 가니까 그것도  아니오. 저 밑에 내려가니까 십자가는 아주 나무로 만들어 놓은 십자가, 아주  가벼운 십자가 그게 제가 지고 온 십자가라. 제가 고렇게 가벼운 십자가를 지고  왔고. 저기 보니까 면류관을 보니까, ○○○ 목사님 말로 개털 모자가 있더라고.

개털 모자. 개털 모자가 있는데 '저게 네 면류관이다.' 그래 가지고. '그라면,  저 위에 금십자가는 저거 뉘 것입니까? 금면류관은 누구 것입니까?' '그것은 네  강단 앞에 거기에 엎드려 가지고 항상 중얼거리는 그 할머니, 네가 무슨  병신같이 생각하고 뭐 천대하는 할머니 있었지? 그 할머니 면류관이요 그 할머니  십자가다' 그렇게 말하더라고. 그래 가지고 그분이 다시 희생 돼 나와 가지고  많은 광고를 해서 아주 그 말이 뭐 내게까지 들려. 여기도 아마 그거  들었습니다. 그 말 들은 사람 손 들어 보이소. 뻐뜩 들어 봐요. 이렇쯤 교인이  바뀌나요? 그러니까 그때 있는 사람이 참 몇 없구먼요. 다 모두 그 다음에 있는  교인이고.

 그래서 어떤 사람이, 참 그 사람이 모진 병이 들었어요. 모진 병이 들어서  있는데 그 사람에게 대해서 제가 그런 말을 해 줬습니다. 성경대로,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죄값으로 오는 병도 없다.' 없습니다. 죄값으로 오는 병이 없습니다.

'죄값으로 오는 병도 없다. 또 어리석어서 주의를 안해 가지고 오는 병도 없다.

자기가 뭘 잘못 저질러 가지고서 닥치는 그런 위생 주의를 안 하거나 그래  가지고 오는 병도 없다.' 요거 성경입니다. 믿는 사람에게 이런 병은 없습니다.

왜? 그 병은 주님이 다 담당했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질고를 주님이 다  담당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에게 와 병이 있는가? 믿는 사람에게  병이 있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구원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될  병을, 구원을 위한 병이, 구원 성취를 위해서 병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지, 안  믿는 사람들이 당하는 그런 병은 없다는 것을 성경이 말했기 때문에 요것 확정을  지어서 요동치 안해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있는 병 중에 그 병으로서 그 사람이 회개케  하기 위해서, 자기의 고치기 위해서, 그러면, 죄값으로 오는게 아니고 그 사람이  죄가 있는데 그 죄를, 다른 죄를, 죄는 이 죄가 있는데 이 병을 가지고서 이  죄를 회개하도록 한다 그말이오. 또 죄는 부모에게 있는데 아이에게 병을 들여  가지고서 부모를 회개시킨다 말이오. 그러면, 주님이 구원을 위해서 온갖 병을  이렇게 이용하시고 활용하시고 작용하신다, 그걸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또 그 사람이 이미 떠날 사람은 떠날 사람인데, 그 사람이 떠날 그 시간까지  강건하게 있다가 떠나면은 언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할 터이니까 그 사람에게  고통을 줘 가지고서 고통으로 말미암아 회개하는 그런, 회개를 안할 수 없이,  고통을 인해서 세상 인연도 고만 죽기 얼마 전에 고통 때문에 '아이구 나는 이제  죽는다' 하니까 세상에 미련을 다 끊어 버리고 하늘나라에 소망만 생각하고, 또  세상에 그동안에, 건강하면 배짱도 내고 이랬는데 죽을 판이니까 죽을 지경이  됐으니까 '나는 이제 죽는다.' 생각하고 보니까 겸손히 회개할 것도 회개하고.

남하고 타협할 것도 타협하고, 양보할 것도 양보하고, 남에게 사과할 것도  사과하고 이렇게 해서 모든 죄에 대한 준비를 하게 되지,  또 하나는 그 사람이, 예를 들어서 일 년을 일을 할 건데. 일 년을 일을 할  건데 건강해 가지고서 일을 하면 그 사람에게 있는 힘의 그저 반은 달리 쓰고 반  가지고만 해도 그 일을 하게 될 터이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반은 딴 데  허비를 하고 반만 하나님께 바쳐서 그 힘을 나누고 정신을 나누어서 그와 같이  할 것인데 그 사람에게 병이 들어 놓으니까 반 가지고는 그 일을 하지 못하니  있는 힘을 거기에다가 다 기울여도 될까 말까 이러니까 그 사람이 병으로서 반은  줄어졌고 남은 힘 다 가지고 주님에게 바치게 되니까 그 사람은 다 바치게 된다.

그 사람을 주님에게 다 바쳐서 주님에게 일하게 하는 데에는 병으로 조절해  가지고서 그 사람이 반은 허비 낭비할 것이고 반만 하나님께 바칠 사람을  자기에게 있는 힘을 다 바치도록 하나님이 조절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제가 그 사람에게 권유한 일이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 홍순철 목사님이 그랬습니다. 그 목사님에게 대해서 제가 그때에  제가 밝히 깨달아지고 느껴진 것은 그분이 그 병으로 말미암아 병이 아니면  그렇츰 어데, 그렇츰 사람이 있는 힘을 다 기울이고 할 수 있습니까? 목회하고  설교할 때에 있는 힘을 다 기울여서 끝까지, 끝까지 설교 듣고, 듣는 것도 다른  사람은 뭐 힘의 십분지 일만 가지고도 듣는데 이분은 들을 때에 전력을 다  기울이지 안하면 그 설교를 듣지 못합니다. 또 있는 힘을 다해서 끝까지 필기를  하다가 힘이 없어 못 해도 합니다. 이래 가지고 마지막 설교할 때에 그저 고게서  설교하다가, 얼마나 설교를 하다가, 그저 설교할 힘이 없는데 나와서 겨우  강단을 붙잡고 설교하고 또 나중에 앉아서 설교하고 이래하다가 마지막에는  설교하다가 설교를 다 끝마치지 못하고 힘이 없어서 고만 힘이 없어서 거기에서,  강단에서 아주 기진해 가지고 힘이 없는데 이렇게 사람에게 들려 가지고서 자기  사택에 가 가지고서 고만 세상 떴소. 이러니까, 그렇게 병이 아니면 그렇게  충성할 수가 없고 그렇게 힘을 다 바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거는 참 하나님  앞에 만점의 충성일 거야. 남는 것 하나도 없이 있는 것 다 기울여 했어.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있는 힘을 다 기울이도록 하기 위해서 질병이나  그런 모든 애로나, 그 사람이 자기 일을 감당할라 하는데 그 일을 감당할라  하는데 애로가 있으면 애로 있는 그것이 회개시키기 위해서 애로 있는 것도  있고, 회개시키기 위해서 애로 있는 것도 있고, 또 애로 있는 것이 모든 세상에  속한 것에 미련을 끊도록 하기 위해서 애로 있는 것도 있고, 또 교만을  없애도록, 교만을 없애서 겸손하도록 하기 위해서 애로 있는 것도 있고, 그  사람에게 있는 힘을 주님에게 기울여서 일하고 다른 데 허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랑으로 이렇게 애로 있는 것도 있으니 누가 애로 있는 그걸.

하나님이 이렇게 사랑이 깊은 줄을 누가 압니까? 참 하나님의 사랑이 깊은 것을  다 말을 하면 어린 신앙들은 이해 못 하기 때문에 말을 못 합니다.

 말을 못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로 말미암아 시련 주는 일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자기에게. 자기, 자기가 주장이 돼 가지고, 자기가 왕이 돼 가지고서  자기주장으로 하는 그 일을 하되, 자기주장으로 하되, 자기주장으로 하는 일  가운데에 다른 사람이 영광이라 존귀라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일을 자기가  왕이 돼 가지고서 자기중심으로 하는 일들도 있고, 또 자기중심으로, 자기.

자기가 주장이 돼 가지고 자기 위주로 했는데 다른 사람에게 욕 얻어먹을 일을  자기 위주로 한 그런 일도 있고 그런데, 회개하기에 어느 것이 쉽겠습니까?  후자가 쉽습니까 전자가 쉽습니까? 예? 고만 잊어 버렸네. 전자가 회개하기  쉽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봐요. 후자가 회개하기 쉽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요. 이 남반은 좀 있는데 여반에는 이래 영 모자라네. 한번 들어봐.

후자가 회개하기가 쉽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봐요. 남반은 거의 다  드는데 여반에는 이렇츰 허무해? 이거 아무리 날뛰어 쌓기는 날뛰어 쌓아도 천당  가면은 뒤 떨어지겠어. 깨닫는 면이 모자라. 후자가 쉽습니다. 후자가 하나님의  축복이라 그말이오. 후자가 하나님의 축복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깊이  역사한다는 것.

 그러므로, 이제 이 성구에서 우리는 자기를 심사할 때에 충성을 가지고  심사하고 일해 놓은 그 일을 가지고 심사하지 말아라 하는 요것을 우리가  언제든지 명심합시다. 충성을 가지고서 심사하고 일해 놓은 그 일을 가지고  심사하지 말자 하는 그것을 우리가 기억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작은 충성은 무엇이 작은 충성인가? 작은 것은 그래 생각하면 됩니다.

시간적으로 작은 것도 있고 시간적으로 큰 것도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작은  것은, 시간적으로 작은 것은 짤막한 시간이 작은 시간입니다. 한 한 시간 보다는  십 분이 작은 시간이요, 십 분보다는 일 분이 작은 시간, 고게 작은 시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말하면 이 일 분이라는 이 일 분을 아끼지 안하면,  일 분을 아끼지 안하면 하루를 아낄 수가 없다. 요 일 분을 아껴 나가면 나중에  하루도 아낄 수 있고, 하루를 아껴 나가면 일생도 아낄 수가 있다. 이러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는 일 분이 제일 작은 것이 되겠고,  또 사건적으로는 어떤 것이 작은 일이 되느냐? 사건적으로는 물론 큰 일 작은  일이 있겠습니다. 작은 일, 작은 일은 평범한 일이요 사소한 일이요 예사롭게  여기는 일이겠습니다. 사소한 일, 그것이 작은 일입니다. 고 작은 일 그것을  자기가 조심해서 주를 위해서, 작은 일 그것을 주를 위해서 조심해서 하면 큰  일도 주를 위해서 할 수 있다. 자기가 작은 것을. 무슨 작은 수고를 작은 수고를  주를 위해서 하면 큰 수고도 할 수 있다 작은 희생을 주를 위해서 하는 사람은  큰 희생도, 순교도 할 수가 있다. 또 작은 사람에게 주의해서 실족하지 안하면  큰 사람에게도 실족하지 안하고 바로 할 수가 있다.

 그러면, 작은 사람에게 주의해서 작은 사람에게 바로 하면 아무리 대대인에게도  바로 할 수가 있다. 그러면, 작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 작은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이 작은 사람? 아주 소인. 소자 하나에게, 소자 하나에게 주를 위해서  조심을 하고 주의를 하면, 그래 나가면은 나중에 그 사람 앞에는 가면 사람이  벌벌 떨고 꼼짝 못하는, 이북에는 김일성에게 꼼 짝 못하는, 김일성이 앞에 가  가지고서도 주를 위하는 생활을 할 수가 있다. 네가 지극히 작은 사람 하나에게  주의하는 것이 어떻게 억세고 강한 자 앞에서도 할 수 있다. 조그만한 작은  두려움, 작은 두려움. 여기 작은 두려움을 주를 생각하고 내가 믿음으로 하면 큰  두려움도 나중에 이겨 나갈 수 있다. 작은 두려움. 또 아주 하기 쉬운 일 이걸  네가 주를 위해서 조심 해서 하면 큰 일도 할 수 있다.

 그러면 시간적으로 작은 것, 공간적으로 작은 것. 네가 요 자리에서, 네가 방  안에 있으면서 네가 조심해서. 방안에 너 혼자 있을 때에 네가 조심한 그  조심이. 여러 수천 수만인 앞에서도 실수 없이 잘 할 수 있는 일이 거기에서  시작된다. 공간적으로 작은 일, 시간적으로 작은 일, 또 종류적으로 작은 일,  사건적으로 작은 일. 이렇게 우리는 작은 것 요것을 깨어서 주를 위해서.

성경대로, 지극히 작은 요것을 성경대로 할하고 주님의 뜻대로 하려고, 주를  위해서 하려고 애를 쓰는, 그것은 할 수 있다 그말이오. 작은 것은 할 수  있습니다. 작은 것은 할 수 있으나, 그것이 들어서 어떻게 큰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거기에서 나오는 것인데, 이 작은 것 할 수 있는데 지극히 작은 이런 것을  조심하지 안하는 사람은 큰 것에도 다 넘어지고 만다 그말이오. 아주 우리에게  가장 가기 쉽고, 좋은 길을, 방편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고로, 어제 아침에 말한 대로 자기를 비판할 때는 사건을 놓고 비판하지  말아라. 거기에 대해서 자기가 충성을 어떻게 했느냐? 죽도록 충성했는데 일은  아무 것도 안 됐습니다. 사건보고 비판하면 그 사람은 낙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있는 충성을 다 해서 안 됐거든 안 됐거든 그게 좋은 줄 알고 감사하며  기다려라, 네가 또 있는 걸 아무리 힘을 반 힘 들여 가지고 일이 아무리 잘 됐다  할지라도 너 힘 들인 것 있는데 주님이 네 충성을 딱 보고서 그걸로 평가하기  때문에 네가 하나님 앞에서 섭섭함을 돌린 줄 네가 알아라, 그것을 가지고  평가해야 되겠고  오늘 아침에는 작은 것을 우리가 말했습니다. 시간적으로 작은 것, 공간적으로  작은 것, 사건적으로 작은 것. 종류적으로 작은 것, 사람으로서 작은 것.

어짜든지 작은 데, 작은 데 요게 조심해서 작은 그것을 작은 그것은 할 수 있다  말이오. 할 수 있는 요것을 주님을 생각하고 주의 법도에 맞추어서 주를 위해서  하려고 애를 쓰게 되면은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제가 ○○○목사님에게 그 한번 배울 때에 그런 말 내가 하나  배웠어요. '식사하고 밥을 먹고 숫가락 놓을 때에 숫가락을 턱 이래 던지는 것과  숫가락을 놓을 때에 이걸 숫가락 소리가 안 나도록 살며시 사르르르르 놓는  여기에서 사람이 크게 변화돼 나간다.' 내 그 말을 듣고서 깜짝 놀랬습니다.

그분이 행해 봤기 때문에 그라는 거라. 그 숫가락 그라는 것 모양으로 일을  하고도, 무슨 연장을 쓰고도 획 집어 던지는 것과 연장을 쓰고서 그 연장을  살며시 갖다 놔서 끝에 놓고 손 뗄 때까지 자기 마음이 거기에 다 쓰여진다는  것. 고거 살며시 소리 안나게 딱 갖다가 살며시 놓고 손을 떼고 고게서 끝까지  자기 마음이 거기에 가는 것. 마음은 없이 손만 획 집어 던지는 것과 그 마음이  그 끝에 말단까지 자기가 가서 활동한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중요하다. 그때  이렇게 많은 말 안 했는데 제가 퍼뜩 하나 지나가는 말에 제가 들을 때에 그  말이 있었는데, '아' 내가 깜짝 놀랬어 '그래.' 그 참 문도 말이지요. 문도 닫을  때 이래, 이래 척 이래닫는 것 있고 또 닫을 때에 마음을 딱 써서 이래 살며시  이래 닫는 것 그러니까. 우리의 활동에 말단의 말단 그 말초, 말단 말초까지  마음을 쓰라. 여기에서 우리의 마음은 경건해지고 우리 마음은 깨끗해지고,  그것이 연습 돼 가지고서 지극히 큰일도 빈틈없는 사람이 된다. 그렇게 작은 데  쓰는 이것이 큰 데도 빈틈없는 일이 되기 때문에 모든 일이 성공 되어지는  것이니까 우리가 지극히 작은 것에 대해서 조심하는 사람 됩시다.

 자유로 기도하다가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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