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지기 비유

 

1984. 4. 10. 화새벽

 

본문: 누가복음 16장 10절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신앙뿐만 아니고 이 불신앙의 생활들도 다 그러합니다. 모든 것이 지극히 작은  데서부터 시작돼 가지고 커 나아가는 것이 모든 존재들입니다. 죄도 그러하고  의도 그러하고, 또 성공도 그러하고 실패도 그러합니다. 또지식도 그러하고  무식도 그러합니다. 사람이 못 쓰게 되는 사람이 삐뚤어지는 것도 지극히 작은  데서부터 삐뚤어져 큰 데까지 삐뚤어지고, 또 사람이 고쳐서 의인되는 것도  지극히 작은 데서 작은 의인 돼 가지고 차차 지극히 큰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선한 것이나 악한 것이나 성공이나 실패나 모든 자기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나 또 비천하게 되는 것이나 또 가난하게 되는 것이나 부유하게 되는  것이나 뭐 좋은 것 나쁜 것 없이 모두는 다 지극히 작은 것에서 시작되어 큰  것이 됩니다. 작은 가난이 큰 가난 되고 작은 부자가 큰 부자되고, 또 작은  수입이 큰 수입되고, 작은 실패가 큰 실패가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무시합니다. 뭐 언제든지 대개 실패하는 사람들이  어떤 데 실패하는고 하니 무슨 병이 들어서 사람들이 실패하느냐? 그 실패하는  것은 전부가 다 큰 병이 들어 가지고서 전부 실패합니다. 큰 병 작은 것을  업신여기고 큰 것만 상대해서 뭐 손해가 가 봤자 요까짓 거야 조그만한 손해  요까짓 거야 가나 안 가나 손해 보나 안 보나 이렇게 생각 하는 데에서 그  사람은 큰 손해를 봅니다. 또 수입도 그러합니다. 수입도, 에히 이까짓 수입이야  이거 하나마나 이런 뭐 사소한 수입 이런 것은 하나 마나 그라는 데에서 큰  수입을 못 합니다.

 여기에 지극히 작은 데서부터 시작돼서 지극히 큰 것이 이루어진다 죄도 지극히  작은 죄에서 부터 시작해서 큰 죄가 이루어진다, 의도 지극히 작은 의에서 큰  의가 이루어진다, 능력도 지극히 작은 능력에서부터 시작해 가지고 지극히 큰  능력이 이루어진다 하는 요 지극히 작은 데서 시작되어 지극히 큰 데 나간다.

좋은 것도 그렇고, 나쁜 것도 그렇고, 망하는 것도 그렇고, 흥하는 것도 그렇고,  죽는 것도 그렇고, 사는 것도 그렇고, 귀하게 되는 것도 천하게 되는 것도  강하게 되는 것도 약하게 되는 것도 모두가 다 지극히 작은 데서부터 시작돼  가지고서 지극히 큰 것이 되어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작은 것을 무시하는 데에서 고만 그것이 시작되면은 그 작은  것이 시작돼 가지고 될 것인데 작은 걸 무시하고 큰 것만 원하다 보니까 그 큰  것은 작은 데서부터 커 나간 것이라야 되지 커 나가지 안한 그런 큰 것은 그것은  뿌리 없는 거와 같기 때문에 그까짓 거는 뭐 나쁜 것도 그러하고 좋은 것도  그러합니다. 사람이 뉘든지 알게 이거는 참 잘못된 죄라 그 뚜렷한 죄를 범한 그  죄는 그 사람이 언젠가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 회개를 해서 그것은 그 죄로  말미암아 자기가 고쳐질 수가 있고 오히려 유익도 될 수도 있지마는서도 그저 죄  아닌 것 같은 그 죄 이 사소한 이런 것으로써 사람이 점점 어두워지고 또  약해지고 또 타락해지고 그래 가지고 실패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떤 것이든지 '아, 지극히 작은 것이 두렵다, 작은 것을  이것을 무시할 수 없다. 지극히 작은 이것을 무시할 수 없다, 지극히 작은  이것이 모든 것을 좌우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해서 무엇이든지 그것에 대해서  큰 것도 한번 생각하고 좋은 것을 생각할 때에 좋은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다  원하고 또 욕심을 냅니다. 좋은 것은 아무리 죄인이라도 의를 좋아하지 않는  죄인이 없고, 아무리 악한 자라도 다른 사람에게 찬성 받고 영광 받는 그런 일을  하기 싫은 사람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좋은 것에 대해서도 다 원하지마는서도 이 원하기는 원하면서  그 좋은 것을 이루는 방편을 모르기 때문에 실패합니다. 좋은 것을 이루는  방편을 몰라서 좋은 것으로 알면서 어데 좋은 것을 당장에 좋은 것이 되리라고  생각하고서 커다란 좋은 그것부터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다 실패합니다. 또 그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좋은 것을 했다 할지라도 그 결과가 그 사람은 좋은  것에 대해서 커 나가지 안했기 때문에 뿌리 없는 좋은 것과 같기 때문에  말라지고, 또 큰 좋은 것을 한 사람은 그 사람은 언제든지 허영의 사람과 허욕의  사람과 교만의 사람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게 됨으로 점점 교만해지니까  실패합니다.

 그러기에, 무엇이든지 이 밟아 올라 갔다 하는 그것을 우리가 밟아서 올라간다.

산을 올라 가듯이 지극히 낮은 자리에서 차차 차차 그렇게 올라간 경험과 체험을  가지고서 올라간 그 사람이 참 강한 사람입니 다. 그러나 뜻밖에 어떻게 된 그런 사람들은 갑자기 무슨 횡재수를 닥치든지  갑자기 참 좋은 운을 타 가지고 어떤 무엇이 된다든지 이렇게 된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반드시 넘어지고야 말고 실패하고야 말지 그것이 불행스럽습니다.

 혹 요셉이나 다윗이나 저런 사람들도 생각할 때에 그런 사람들은 갑자기 죄수가  총리대신 되지 안했는가? 그 천한 사람이 죄수의 천한 사람이 갑자기 존귀한  사람 되지 안했는가 이렇게 생각을 하지마는 그것이 그렇지 안하고, 그 요셉이가  어릴 때부터 지극히 작은 의에서 그 의를 무시하지 안하고 지극히 작은 의를  하나도 놓치지 안하고 해 나갔던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의를 놓치지 안하고 해  나갔는데, 그 사람이 그라다가 나중에 총리 대신 된 그때나 총리 대신이 되기 전  감옥에 있을 때에나 요셉의 생활은 꼭 같습니다. 요셉의 생활이 뭐 총리대신  됐다고서 다른게 아니고, 그가 생활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는 생활이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그 분에게 순종하는 그 생활만 했습니다. 그  생활을 어릴 때부텀 해 나오다가 차차 차차 그 사람이 장성해 가면서 이제 눈이  뜬 것은 자기가 가는 걸음에 모든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 그 세력들과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세력들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세력들과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는 그런 세력들이 자기 주변에 차차 차차 많은 것을 발견하고 강한 것을  발견하니까 그 요셉의 싸움은 점점 빈틈 없이 그 대적이 닥치고 있다는 것을  그가 알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뭐 보디발 집에 있을 때나 감옥에 들어 갔을 때나 또 총리 대신  자리에 앉았을 때나 그 요셉의 생활은 조금도 변동 없었습니다. 요셉은 뭐  했느냐? 내나 이 자리에서도 하나님 위하는 것 저 자리에서도 하나님 위하는 것,  이 자리에서도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 저 자리에서도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  이 자리에서도 하나님에게 의지하고 바라보는 것 저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것 그저 사람이 형태만 달랐지 요셉의 그 생활이라 하는 것은  조금도 변하지 안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현실을 주셨다가 저런 현실을 주셨다가 현실을 주십니다.

 그러기에 현실이야 이렇게 바꿔지든지 저렇게 바꿔지든지 우리 생활은 요동치  안하고 변하지 안해야 됩니다. 우리 생활은 무슨 생활이냐? 한 말로 말하면 믿는  생활입니다. 우리 생활은 믿는 생활, 거지가 거지의 현실을 줘도 거기에서도  거지에서 믿는 생활, 어떤 고관 대작을 해도 고관 대작의 그 자리에서 믿는  생활, 또 우리는 어떻게 아주 곤고한 질병을 줘도 질병을 주신 그 질병의  자리에서 믿는 생활, 어떻게 건강을 줘도 건강에서 믿는 생활. 하나님께서 우리  현실이라는 우리 환경, 우리 주위라는 내 입장 처지라는 내 형편이라는 이것을  자꾸 이렇게 하나님께서 바꿔 주십니다. 바꿔 주시나 우리는 껍데기만 바꿔졌지  우리 생활은 같습니다. 껍데기만 바꿔졌지 우리 생활은 꼭 같애야 됩니다.

 '아 내가 이제는 이렇게 감옥에 있다가서 총리 대신이 됐으니까 내가 총리 대신  일을 내가 지금은 해야 되지 감옥에 있던 그 죄수 때에 있은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 크게 착각이요 오해입니다. 감옥에 있을  때에도 지금 하나님께서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내가 하나님을  위할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위하는 것이 되겠느냐? 또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뜻을 내가 어떻게 하면 바로 찾겠느냐? 또  하나님의 뜻을 찾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해야 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순종하는 것이 되는 것이냐? 어떤 것이 당신을 믿는 것이 되겠느냐  의지하는 것이 되겠느냐? 어떤 것이 당신에게 맡겨 놓고, 내 전부를 맡겨 놓고  그저 나는 그분을 위해서 그분 있는 걸 위해서 그분 시키는 대로 그분을 위해서  그분 시키시는 대로 요대로만 하는 것이 자기 일이라.

 그렇게 해서 어데 가든지 그 요셉의 생활이 변하지를 안했고 다니엘의 생활이  변하지를 안했고 어데서든지 자기 생활이 변하지 아니하는 그 생활을 환경이  변해져도 변해지지 일는 그것을 했기 때문에 다 실패하지 안했지 그것을 하지  안하고 자기 현실이 이렇다고 이런 현실에 따라서 자기 생활이 변해지고 저런  현실에 따라서 생활이 변해지고 이라면 그것이 내나 자기 현실에게 피동되는  것이니까 동산을 다스리지 못하고 동산에 있는 것들에게 다스림을 받았습니다.

동산에 있는 것들에게 다스림 받은 것은 배암이 거기에 들어와 가지고서 배암도  동산에 들어와 동산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배암을 다스려야 될 터인데 배암을 다스렸으면 배암이 그 자리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니까 물리치고 배암이 그런 말 할 때에 호통을 쳤으면 그만  배암이 달아 났을 터인데 그 배암에게 피동됐다 그말이오. 자기 현실에게  피동됐어. 자기에게 좋은 것이 와도 우리는 피동을 안해야 되고 나쁜 것이 와도  피동을 안해야 되고 또 두려운 것이 와도 피동을 안해야 되고 아주 업신여길  만한 그런 천한 것이 와도 피동을 안해야 되고 어려움이 와도 피동을 안해야  되고 쉬운 것이 와도 피동을 안해야 되고 급한 일이 와도 급해도 그 환경에 피동  안 해야 되고 또 수월한 일이 있어도 환경에 피동 안 되야 됩니다. 언제든지  우리 생활은 어데서든지 꼭 같은 생활하는 요게 우리 생활인데, 이 같은 생활은  뭐이냐? 그 의라고 할수 있는데, 지극히 작은 믿음 생활에서 지극히 큰 믿음  생활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지극히 작은 믿음을 떠난게 죄입니다. 죄가  뭐이 죄인가? 의를 떠난게 죄요. 의는 뭐인가? 죄를 떠난게 의입니다.

 이러니까, 지극히 작은 것을 우리가 이것을 조심해서 내가 이 환경에 피동되는  것. 내가 주님에게 지금 피동돼 가지고 있느냐 환경에 피동되느냐 요것을 자기가  따져서 지극히 작은 것을 따지지 안하는 사람은 그 사랑은 벌써 실패자입니다.

지극히 큰 것도 제가 나중에는 따질라 해도 따질 힘이 없습니다. 지극히 작은  데서부터 모든 것을 따져서 구별해 가지고 이래 나가야 되지 지극히 작은 데서  따져서 구별하지 안한 사람은 지극히 큰 것이 오면 알지마는 그때는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방편을 하나님이 주셨는데 할 수 있는 방편은  아무리 연약한 자라도 할 수 있는 그런 방편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마귀가 주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없는 방편을 우리에게 줘 가지고  미혹하게 하는 것이 마귀가 주는 방편입니다. 마귀가 주는 방편은 지극히 작은  것을 우리가 성공하는 방편으로 그렇게 주지 안 하고 그저 '작은 것 그까짓 거야  뭐 사소한 것, 큰 것을 취해야 된다' 이래 가지고서 '큰 것을 취해야 된다'  이래서 사람들은 다 큰 것을 탐해 가기 때문에 전부 허영의 사람이 되고, 교만의  사람이 되고 또 허욕의 사람이 되고 성공했으면 교만한 사람 되고, 또 그 사람이  실패했으면 고만 낙망의 사람이 돼 버리고 맙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지극히 작은 것을 우리가 무시하면 안 됩니다. 평소에 늘  말하기를 하나님의 주권을 우리가 믿어야 된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무슨 어떤 사건을 당신이 주장한다는 그런 좁은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이라 말은 권세는 다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 한 주인이 권세를 만들었고  권세의 주인이고 권세를 쓰고 계신다.

 그러면 권세를 크게 나누면은, 파괴하는 권세와 건설하는 권세 이 두 권세가  있는데 파괴하는 권세도 전부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요,  또 건설하는 권세도 전부 하나님의 권세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요 그  권세는 다 하나님이 쓰시고 있는데. 그것을 모든 피조물들에게 이것을 이것에게  주어서 쓰게 하고 저렇게 쓰게 하고, 또 그렇게 전달되고 전달돼서 다 쓰도록 한  것인데. 파괴의 권세는 우리 자유성을 가지고 죄에 속하면을 그만 파괴의 권세를  자기가 속하게 된다. 죄를 범하면 파괴의 권세에 속하게 되고, 의를 행하면  건설의 권세에 속하게 됩니다.

 제가 아무것도 못 합니다. 인간이 하는 것 같지마는서도 실은 인간이 하는 것  같은 그 속에 하나님이 절대자가 하신 것 전능자가 하신 것 전지자가 하신 것  완전자가 하신 것 완전자가 해서 완전이 이루어진 것만이 불타지 않습니다.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집이라 말은 완전한 것 완전자가 만든 완전한 것 영원한  자가 만든 영원한 것 불변자가 만든 그 불변한 것 이런 것만이 멸하지 않습니다.

불멸에, 멸하지 않는 영원히 불멸 할 것 멸해지지 안할 것 변해지지 안할 것, 또  변해지지 안하는 것은 그게 썩지 않는 것도 변하지 안하는 것이요, 모든  무엇이든지 그것이 자기가 옳은 데에서 나빠지지 않는 그런 것이 다 변해지지  않는 것또 없어지지 않는 것 또 멸해지지 않는 것. 또 영원한 것 완전한 것 이런  것은 다 건설에서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건설의 권세에게 내가 속하면 그 권세가, 나를 붙들고서 합니다.

내가 건설의 권세에 속한다는 것이 뭐이냐? 내가 의에 속하면 내가 의의 것이 돼  버립니다. 의의 것, 의의 것이 뭣이 의의 것인가? 그것은 성령과 물과 피니라  말씀하신대로 성령의 것이 되는 것이, 그만 우리가 성령을 받아라, 성령의  충만을 받아라 이렇게 사람들 쉽도록 말하기 위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라  이렇게 말하지마는 그게 받아라 어떻게 큰 자를 작은 자가 받습니까? 예? 그  성령은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을 어찌 이 물건 받듯이 내가 받고 내가 가질 수  있습니까? 사람들 말로 아주 유치한 그런 때니까 그것 밖에 모르니까 그들의  말로 말하면 그렇다고 해 가지고서 성령을 받으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인제 성령을 받는게 아니고 내가 성령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에게  속하는 것, 성령의 것이 되는 것. 그러면 성령의 것이 백분지 일이 성령의 것이  되어 있는 사람 있고, 백분지 일이 진리의 것이 되어 있는 사람 있고, 백 분지  일이 예수님의 대속의 것이 되어 있는 사람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백의 구십 구가  대속의 것이 되어 있는 사람 있고, 진리의 것이 되어 있는 사람 있고, 또 성령의  것이 되어 있는 사람. 그러면 성령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것이 되는 것.

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내가 이용하는게 아니라 진리 말씀에게 내가 속해서  진리 말씀에게 이용을 당하는 것 진리 말씀에게 이용을 당하는 것, 이렇게 또  예수님의 피 공로를 내것 삼는 것 예수님의 피에 팔려서 주의 피의 것이 되는  것, 사죄의 것이 되는 것, 칭의의 것이 되는 것, 그 화친의 것이 되는 것.

이렇게 의라는 것은 내가 의를 자유성을 가지고서 의를 취하지마는서도 취하고  난 다음에는 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취하면 취하는 그것이 '아 나는  의에 속하겠습니다. 의를 환영합니다. 의의 것이 되겠습니다. 의를 영접  하겠습니다. 나는 의를 모시겠습니다.' 이러니까, 의의 것이 되어지니까 의가 그  사람을 붙들고 일합니다.

 이래서 '문을 열라, 내가 들어 가서 너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너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너는 네게 대한 하나님의 모든 뜻 그것은 뭐냐? 한말로  말하면 구원인데, 네게 대한 하나님의 뜻, 네게 대한 하나님의 구원, 네게  대해서 하나님의 구원, 네 구원 다시 말하면, 그런데 '네 구원은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나로 더불어 이루리라, 나로 더불어 이루리라.' 거기에 먹는다는 것은  인격이 먹는 것은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과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그것이 먹는 것입니다. 그게 양식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의를 선택해서 현실에서는 반드시 의와 죄 이둘이 와  가지고 우리를 상대하고 있는데 우리 자유성으로써 의를 영접하려고 하면 이  죄가 들어서 많은 방해를 합니다. 그 방해하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않는 사람은 죄를 배척하지 안합니다. 죄의 그 놈이 협박을 놓고 위협을 놓고  아주 날뛰쌓으니까 이게 고만 전부는 죄가 주권 되어 있고 죄가 오면 권세 다  가지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의를 가지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신앙은 단계적으로 올라 가야 되지 단계적으로 올라 가지 안하면  안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일는 사람은 그 사람은 의를 이룰  수가 없고 구원을 이룰 수가 없고 죄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요것을 믿어야 됩니다.

 권세는 파괴 권세, 건설 권세 둘 뿐인데 그 권세가 전부이 하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하나님이 지었으면 하나님이  악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그 피조물들에게 대해서 죄냐 의냐 하는 것이지  하나님은 당신이 영원한 지극히 완전하시고 선하신 그 목적을 정하시고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런 것 저런 것들이 지었기 때문에 지음을 받은 것은  지은 자에게 대해서 그런 비중을 가지지 못하고 그런 평가를 하지 못합니다.

 그런고로, 이 성경에 죄라는 것을 이렇게 따로 말했으나 이 죄 그것도 전부  하나님이 의를 위해서 죄를 창조한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보기에  요만한 동가리로 보면 죄이지마는서도 이렇게 길게 보면 그것이 전체면을 보면  그것이 의가 됩니다. 그것이 건설이 되고 파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에게 있다 그것을 사람들이 조부랍게 생각하면 고만  착각이 되고 오해가 되고, 계산을 하다가 뭣이 서면은 자꾸 틀리고 틀리고 이래  되는 것처럼 착각과 오해가 되면은 헛일 합니다.

 제가 고려 신학교에 다닐 때에 졸업 논문을 쓸 때에 졸업 논문을 썼는데 며칠  전에 정리하며 보니까 졸업 논문이 나와서 내가 한번 읽어 봤습니다. 졸업  논문이 나왔는데 그 졸업 논문에 모든 근원을 이렇게 제목으로 해 가지고서  논문을 썼었습니다. 이러니까 그 논문을 발표를 좀 읽어 보라 해서 제가 논문을  가서 읽었습니다. 읽었는데 처음에 읽을 때는 좋아서 모두 잘 됐다고 이래  하는데 중간 쯤 가 놓으니까 고만 이제 근원이 나옵니다. 이래서 에덴동산에  아담 해와의 타락도 하나님의 그 주권에서 됐다 이라니깐 그때 ○○○ 목사님이  교수인데 고만 뻘뻘 떨면서 고만 아이구 좀 중지 하라고서, 아이 저 백 조사님  어쩐 일이냐고서, 그래 내가 있다가서 아, 그러면 이게 틀렸다 말입니까?  그렇지마는 이거는 이런 데서 발표하면 안 된다고서. 그 논문을 돌라 해서  논문을 줬디마는서도 논문을 자기가 보고서 이래도 이런 것을 발표하면 안  된다고서, 성경에 발표해 놓은 것을 어떻게 우리가 알 수 있겠는가, 또 근원을  찾지 안하고는 어떻게 결말을 지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고로, 오늘 믿는다고 해도 일원론을 일원을 믿지 안하고 이원을 믿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근원이 하나뿐입니다. 근원이 없는 가운데서 하나님 혼자  홀로 계셨고 홀로 계신 그분으로 말미암아 마귀도 생겨졌고 죄도 생겨졌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생겨졌는데 그 모든 것은 뭐냐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 모든 것들을 이용해 가지고 합니다.

 그러면, 가정에는 불을 집는 불집게도 있고 가정에는 있으면은 없어질 소모되는  것도 있고 또 건설되는 것도 있고 장성되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그 무엇이든지  소모되는 그 소모되는 것이 건설되는 것의 그 양식이 되어서 소모 되는 것으로  인해서 건설이 돼지지 그리 아니면 건설이 안 됩니다.

 나는 만날 먹히기만 하고 나는 없어지기만 하고 밥은 만날 없어지기만 하고  썩어지기만 하고 이렇게 저거 아들은 자꾸 커지기만 하고, 밥이 없어지는 그  없어지는 밥이 자꾸 소모되는 것이 소모되는게 아니라 그 밥이 그 지극히 고귀한  것이 돼 가지고 그 집 아들의 피도 되고 살도 되고 키도 되고 눈도 되고 귀도  되고 자꾸 이렇게 커지는 것이라 말이오.

 그러면 소모되는 그것이 들어서 소모되지 않는 것으로 자꾸 자라가고 성화돼  나가는 거라 말이오. 땅 위에 있는 모든 죄악이라는 이 죄악이 모두가 다 합해  가지고서 완전을 건설해 나가지고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범위를 전체면을 전체를 보지 안하고 이 조부랍게 편벽된 지식을 가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죄. 의 요 둘이 우리 성공과 실패인데 무엇이든지 악령이든지  뭐 환경에 악령이 오데 악령이 우리 눈에 보입니까? 악령이 사람을 통해서  옵니다. 에덴동산에도 악령이 배암을 통해서 옵니다. 악령이. 사람을 통해서  오고 물건을 통해서 오고 사건을 통해서 오고 이 자연을 통해서 오고 이 악령이  그런 것을 통해서 오는데, 무엇을 통해서 왔던지 우리에게 죄를 범함으로  자기에게 사망하는 것 망하는 것 죽는 것 실패하는 것 천해지는 것 약해지는 것  고통스러워지는 것 가난해지는 것 모든 것 이것 외에는 죄에서 오는 것이 없어.

죄에서는 전부 이것만 옵니다. 자기가 죄를 영접하면 암만 이런 것을 싫어해도  이 모든 사망에 속한 것이 내게 오지 생명에 속한 것은 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현실에서 혹 어떨 때 아 이거는 꼭 이 사정이 이 문제가 이  사정이, 이 문제가 이것은 꼭 요게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서는 안 되겠는데  요게서는 이 성령의 감화, 요게서는 내 양심대로 신앙 양심대로 해서는 안  되겠는데 신앙 양심 속에 신앙 양심보다 더 또록또록한 것이 성신의 감화입니다.

'이건 내가 요게서는 양심대로 해서는 안 되는데, 요것은 진리의 말씀대로  해서는 안 되는데. 요게는 예수님의 대속 사죄를 요게서는 살짝 벗어 나야 되지  사죄를 입고는 안 되겠는데 칭의를 입고는 안 되겠는데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과 동행하고는 안 되겠는데, 자기가 보기에 현실에서 요게는 아무래도  요거는 임시 참 이 특효약으로 늘 할 거는 아니지만 특효약으로서 특효약으로 이  죄 되는 요 방편을 써야 되겠고 요 죄 되는 말을 해야 되겠고 죄 되는 행동을  해야 되겠고 죄 되는 태도를 해야 되겠고 요게 맞는 하나님의 뜻이 내 신앙  양심으로 볼 때는 성경 이 우리에게 지금 가르쳐 준 대로는 꼭 요래야 되는데  하는 요것이 보여 지는데 요것이 보여지니 요 보여지는 요것은 아무래도 요거는  어쩔 수 없다 해서 사람들은 그런 참 확신을 가지고 자기로서는 그저 뭐  돌다리도 두드리 보고 건너 간다는 것처럼 자기 보기에는 천에 만에도 이거는  요래야 되지 요래 안해 가지고는 안 된다, 요래 안 하면 안 된다 고렇게  확고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 의를 버립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버리고 성경 말씀에 위반되는 일을 자기 신앙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자기가 자기를 모르면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그래서는 안 된다 해도, 뭐  가족이 그렇게 말한다 해도 또 자기의 그 신앙의 지도자가 그렇게 말한다 해도  참 남의 사정을 모르네. 다 몰라 그래, 이 속속들이 이 사정을 말도 못하고  몰라, 그래 내 사정에는 꼭 이거는 이번 만큼은 안 할 수 없다 싶어서 사람들이  죄를 영접합니다. 죄를 영접하는 것은 파괴의 그 권세가 파괴의 권세의 것이  되어지기 때문에 죄를 영접해 가지고서 건설의 일이 옳은 일이 천에 억에도 만  만에도 절대 없습니다. 먼지만한 것도 없습니다. 요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것입니다.

 또 자기가 여기에는 내가 의를 행하다가는 이 사업은 실패된다, 의를  행하다가는 가정이 파괴 되겠다. 의를 행하다가는 내가 죽겠다, 의를 행하다가는  모든 것이 낭파 되겠다. 천인 만인이 말할 때도 다 그렇다. 그러니까 이럴 때는  의를 행하면 네가 화약 쥐고 불로 들어 가는 것이다. 망하는 것이다 이렇게 천하  인간이 다 말한다 할지라도, 그럴 때에 내가 의만 취하면 의만 취하면 전능의  건설의 그 권세에게 내가 속하게 되기 때문에 내가 하는게 아니라 의를 취하는  것은 내 자유요. 내 자유 있으니까 내가 의를 취하면 취하고 난 다음에, 거기에  대해서 의를 취하고 난 다음에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을 하나님의 그 주권이  감당하신다. 건설하는 그 건설하는 절대적인 건설하는 전능이 그 일을 감당한다.

건설하는 전능이 감당하니까 내가 의를 어하는 데는 네가 이 놈의 의만 취하면  당장 죽인다. 당장 실패를 준다 당장 망친다 어떻게 말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다 피조물입니다. 그것들이 다 피조물이오. 인간이 말해도 천군 천사가  말해도 마귀가 말해도 사람이 말해도 뭐 온 천하가 말해도 전부가 다 달라들어서  말해도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하지 아니해요.

 하나님은 네가 의를 행하면 네가 산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생활은 믿음으로 말미암을 것은 좋지 안하고 영원히  사느니라. 이렇게 온 천하가 말해도 그럴 때에 천하 것이 다 이 의를 행하면  너는 망한다 요럴 때에 천하가 다 부정해도 자존하신 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이 말씀이 의에는 생명이 이루어지고 죄에는 사망이 이루어진다고  하셨으니까 내 힘 같으면 이 세력들 하고 안 되지마는서도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고서 의를 취하는 그것이 하나님을 최고로 기쁘시게 영접하는 것이요  그것이 모든 피조물을 다 정죄하고 압도하고 피조물의 다 왕이 돼서 피조물의  왕이 되고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고 피조물이 다 자기 발 아래 밟히고 자기  수하에서 있어서 자기 장중에 다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것이  피조물을 점령하는 방편이요 이것이 피조물을 점령하는 방편이요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는 방편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이 의를 취하면 큰 낭파된다 그렇게 볼 때에, 내가 의를  취하면 그 뒤를 내가 하는 게 아니고 내가 의만 취하면 내가 의를 붙들면 의를  취한다는 것은 의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의를 취하 는 거는 의를 영접하는  것이오. 의를 취하는 거는 의를 영접하는 것이고. 의를 취하면 의를 영접하는 것  의를 영접하는 것 내가 의에게 속하는 것입니다. 의를 영접하는 것 의에게  속하는 것 의에게 맡기는 것 의의 것이 되는 것 내가 의 속에 들어 갑니다. 의의  피난처 속에 어 가요. 들어 가니까 의의 피난처 속에 들어 가면은 의가 무슨  권세를 가지고 있는고 하니 건설의 그 정권을 가지고 있읍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권세가 들어서 내가 의만 취하면 그 남은 일 수습은 책임은 그 의에게 속한  그 권세가, 건설의 권세가 나를 책임지기 때문에, 그 건설의 권세가 책임을 지고  할 때에는 그 권세가 어떤 권세를 가졌느냐? 모든 피조물을 자기 마음대로 자유  자재로 할 수 있는 이런 권세를 가졌읍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의를 택할 때에 발발 떠는 것은 왜 발발 떠느냐? 의를 택하면  지극히 큰 주권 지극히 큰 건설의 주권이 있는데. 건설의 주권에 자기가 속해서  건설의 주권이 자기를 책임진다는 그걸 생각지 안하고, 의를 택할 때에 의를  택하는 것도 제가 택하고, 의를 택함으로 말미암아 오는 영향이나 오는 파동이나  오는 모든 문제들이나 오는 그런 모든 일어나는 환난들 그런 것을 제가  감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요것 실패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의에 속하느냐 죄에 속하느냐? 의를 영접하느냐 죄를  영접하느냐? 그 의가 내게 와 가지고 일하도록 하는 것이냐 죄가 와서 나에게  일하도록 하는 것이냐? 이러니까 나는 이 자유성을 가지고 얼마든지 더할 수  있읍니다.

 이 천하에 있는 블신자들의 영원한 멸망이라는 것. 불신자들을 영원히 멸망시킨  것 뭐 왕이든지 장성이든지 부자든지 뭐 학자든지 말할 것 없이 안 믿는  사람들을 전부 유황불 구렁텅이로 다 몰아댄 몰아 넣은 이 세력이 무슨  세력입니까? 이것이 파괴의 세력입니다. 이게 파괴의 세력인데, 이 파괴의  세력이 이렇게 파괴의 세력이 강합니다.

 또, 건설의 세력도 내나 그저 하늘과 땅에 있는 것을 다 자기 것을 삼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모든 것을 영원히 가지고 통치하는 이 세력도 굉장히 큰  세력이니 이 두 가지, 세력은 다 하나님께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가지고서 이 모두 다 하나님에게서 나왔는데, 이 권세는 파괴의 정권을 맡은  것이 파괴의 세력이 파괴의 권세요, 건설의 정권을 맡은 것이 전설의  세력입니다. 이 정권을 다 맡았오.

 이러니까, 이 파괴의 세력은 이렇게 강하지마는 내 자유성에는 하나님이 허락해  놨기 때문에 자유성에는 그것들이 나한테 호령을 받습니다. 파괴의 세력이 내께  올 때에 내 자유성을 가지고 '파괴, 이 죄야 물러가라, 나는 죄의 종이 되지  않는다, 죄는 나와 원수다, 죄야 물러 가라, 나는 죄와 더불어 일생동안 싸워야  할 내다.' 이라면서 그 죄를 착 물리치면 천하에 역사에 있는 수 억억억도 많은  인간들을 제 장중에 거머쥐고 움직였던 그 파괴의 세력이 턱 물러가 버립니다.

꼼짝 못 하고 턱 물러 가버립니다. 이것이 우리 권능입니다.

 또, 의의 이 권세를 의를 내가 취하려고 할 때는 이 죄에 속한 것들이 마구  협박을 하지마는서도 나는 그 모든 것들을 다 깨트릴 수 있는 이 의를 내가  영접할 수 있습니다. 의를 내가 영접하면 의가 와서 나를 붙들고 나를 보호하고  내 대신 모든 것을 하기 때문에, 이 파괴는 내 앞에서는 다 파괴를 당해 버리고  말고. 그 파괴 그것이 다 우리의 건설의 양식이 되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은 우리의 양식이라, 믿는 사람의 양식이라. 죄는 믿는  사람의 양식이라. 마귀는 믿는 사람의 양식이라.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은 의를  잡았을 때에는 모든 것이 그의 양식이 되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며칠 전에 우리가 새사람으로 산다 그 말은 뭐이냐 하면  의인으로 산다 말이오, 의인으로. 의인으로 살면 마귀도 보배요 죄도 보배요  사망도 보배요 나만 요 의에게 속하기만 속하면 현실에 의에게만 속했으면 사망  그것도 나를 위함이 되고 죄 그것도 나를 위함이 되고 마귀 그것도 나를 위함이  되고 전부 나를 영광스럽게 존귀하게 이렇게 하는 것 뿐이지 털끝 만치도 해를  끼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의를 택할 때에 그 뒤 수습을 내가 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착각을 말아야 됩니다. 내가 의를 택하기만 내가 할 일이지 그 다음에 할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또 죄를 택하면 그 다음에는 정권의 그 파괴의 권세가  나를 붙들고 하기 때문에 죄만 택했으면 제까짓게 암만 의를 행할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발람이 죄를 택해 놓고서 뒤에 죽도록 충성했어. 뭐  순교 말 한 마디 마디 한 마디 한 마디가 전부 순교적인 말입니다. 다 생명 내  놓고 한 말. 생명 내 놓고 해 봤자 벌써 파괴의 권세의 것을 붙들었기 때문에 그  하는 생활의 결과는 전부 사망과 완전히 망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런고로, 요것은 지난 시간에 말한 것인데 요것을 굳게 잡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죄냐 의냐 택할 우리의 이 권세는 피조물로서는 제일  특권입니다. 제일 큰 권세입니다. 이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권세가 있습니다. 아무리 죄의 세력이 그렇츰 강하지마는서도 내 자유성에 죄를  물리쳐 버리면 죄는 나가야 됩니다. 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아니면 그것이  우리에게 왕권을 가지고 우리가 물리칠라 하면 뭐 이놈 볼끈 잡아 가지고서 쳐  박아 가지고 거석하지마는서도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있기 때문에 그 죄가  우리에게 왕권을 가지지 못하게 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물리치면 즉시  물러 가야 된다 그말이오. 사탄도 물러 가야 된다 말이오.

 그런고로, 우리는 죄나 의나 현실에 둘이 와 가지고서 누가 죄를 취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는가, 취하고 싶어서 취하는 사람도 있지마는서도 그런 죄도  있지마는서도 대개는 죄를 취하기 싫지마는서도 죄가 위협을 주니까 위협을  주니까 위협에 눌리 가지고서 죄를 취하는 것이 많고, 의를 허하고 싶지마는서도  죄악의 세력들이 의로 말미암아서 이렇다고서 아주 망한다고 이렇게 협박을 놓고  위협을 놓고 자꾸 이래 가지고 유혹을 시키기 때문에 의를 취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어리석은 착각을 가지지 말고, 우리는 뭐이냐? 죄를 취할까  의를 취할까 요 두 가지 뿐이라. 죄만 영접하면 고만 제가 하는게 아니라 이  파괴의 세력이 붙들고 자꾸 죄만 짓기 때문에 암만 결심이 소용이 없어. 의만 딱  취하면 의가 나를 붙들기 때문에 의에 세력이 나를 붙들고서 역사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든지 의든지 우리가 선택해서 자유로 취할 수 있을 때에  우리가 다른 미혹을 받지 말고 미혹을 받지 말고, 그 죄를 취해도 취한 뒤에는  죄에게 속한 그 세력이 나를 붙들고 하기 때문에 내 맘대로 하지 못하고 나를  붙들고 하기 때문에 되어지는 것이고, 의를 택할 때도 의를 택해서 그 뒤에 모든  문제들은 다 의에 속한 건설의 그 권세가 책임을 집니다. 할 때 제가 책임진다고  하는 데서 실패합니다.

 우리가 가만히 과거를 생각해서 이렇게 해 보면 의를 취할 때 그것이 어떤  영향을 끼쳤느냐? 그 영향이 회개하기 전에는 그 영향이 떠나지 않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자기가 깨닫고 이거는 하나님의 뜻을 어긴다는 건데 또  다른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거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하는 것이니까 이라면  안 된다 요렇게 말한 걸음을 걸었다 그말이오. 걸음을 걸었으면 그 걸음이  처음에는 아주 순풍을 만내 가지고서 성공되는 것 같습니다. 성공되는 것  같지마는서도 반드시 마귀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 가면은 처음에 성공이 와  가지고 그 다음에 실패가 옵니다. 이러니까, 성공이 온 그것만 어리석은 사람  보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성공이 와 가지고 커다란 실패가 되어진다는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이렇게 희망 있는 사람이 희망 있는 그 희망이 죄를  지음으로 희망 있게 보이는 것 있고, 의를 행함으로 희망 있게 보이는 것이 있고  더러 있습니다. 죄를 지음으로 희망 있게 보이는 것은 희망 있다고 소문이 나고  난 다음에는 다 깨져 버리고 맙니다. 의를 행함으로서 희망 있는 것은 아주 그  사람이 곤고한 것 같지마는서도 의를 위주로 하는 사람은 그것은 꼭 뭣이 커  나가듯이 돌 크듯이 커 나갑니다. 커 나가도 그것이 진동이 없이 그대로  나갑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것을 사람이 깨닫고 아 내가 아무 연분에 요렇게 요 삐뚤어진  걸 걸은 요것이 잘못 됐다, 고걸 회개 하면 사함 받습니다. 고거 회개하고  고치면 됩니다. 회개하면 사함 받고 고치면 그것이 없어집니다. 고쳐지기 전에는  없어지지를 안 합니다.

 그런고로, 오늘 아침에는, 주권에 두 주권이 있으니 지극히 큰 권세가 이것이  지옥을, 하나는 한 권세는 지옥을 만들었고 지옥을 건설했고 한 권세는 천국을  건설하는 것인데, 지옥을 만들었고 천국을 만드는 이 큰 권세가 있는데 이 두  권세는 내가 자유로 취할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영접할 수도  있고 이제 버릴 수도 있다. 이 현실에 어느 것을 영접하느냐 하는 것. 영접하면  그 뒤에 문제가 겁이 나 가지고 사람들이 의를 영접하지 못하고 죄를 영접한다.

그러나 그 후 일은 의의 그 권세 그 정권이 들어서 일하지 자기가 하지 안하기  때문에 그저 그것은 갖다 맡겨 놓고 그 권세가 그 건설에 건설에 주권이 책임질  터이니까 건설의 주권에나 들어가 버리면 그만입니다. 들어 가면 그만 그 권세가  나를 책임지기 때문에 그 뒤의 문제는 자기가 책임을 질 수도 없는 것이고  자기가 책임지지 않는 것이니까 그 뒤 문제는 그 권세에게 말기고 의만 현실에서  취해라. 취하면 자기는 성공입니다. 그것을 오늘 아침에 한번 재독을 했고,  오늘 아침에 시작해서 하나 배운 것은 뭐이냐? 우리의 생활은 지극히 작은  데서부터 성공이 있고 지극히 작은 데서부터 실패가 있다. 그것을 지금 하나  말을 했고. 고 속에 우리의 생활은 일관돼야 된다. 우리 생활은 변하지 않는다.

환경이 변해도 이 환경에서도 그 생활 저 환경에서도 그 생활 우리의 생활은  변하지 않는 그 생활 요 생활을 일관해야 된다. 요것이 오늘 아침에 요새로서는  처음 말한 말씀인데 요 말씀울 단단히 붙잡습니다.

 요셉이가 뭐 총리대신 됐다고서 딴 생활 한 것 아니오. 총리대신 돼도 자기  생활은 따로 있습니다. 자기 생활했습니다. 다니엘이 학원에 가도 자기 생활  포로되어 가면서 자기의 각오한 감옥에 가도 자기 생활, 그 사자 구덩이 만나도  자기 생활, 그저 자기 생활 그것 하나만 했습니다. 여기서도 자기 생활, 그 자기  생활하는 것 뭐냐? 믿음 생활인데 그라다가 보면 총리 대신을 어떻게 하려고?  어리석다. 네 생활 그거는 믿음 생활이 네 생활이요 의의 생활이 네 생활이니까  믿음의 생활 그것만 하면 믿음의 생활에서 뭐 천하를 통치해 것도 나오고 승리할  것도 나오고, 오만 전지전능의 것이 다 나옵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음만 의만  이렇게 생각하면 밥은 뭘로 먹고 사업은 뭘로 하고 거기에서 밥도 나오고 사업도  나오고 다 나옵니다. 거기에서 어떻게 할 방편도 다 나옵니다. 지능도 다  나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염려 없이 주님을 따라 가야됩니다. 염려 없이 안심 하고  믿음이 없는 통에 우리가 다 공포와 비겁에 쌓이고 모든 변동이 되는 것이지  그러기에 우리는 언제든지 세 가지안 생활만 우리 생활입니다. 뭐? 세 가지 생활  뭣 뭣입니까? 세 가지. 성령, 또 물, 또 피 이것만이 우리 생활입니다. 이것만이  우리 생활이오. 그저 총리 대신이 돼도 이것만 이 생활만 하고 또 아무리  곤고해도 이 생활만 하고 아무리 병이 들어도 이 생활만 하고 아무리 갑자기  하늘까지 올라 가도 이 생활만 하고 아무리 떨어져 내려 가도 이 생활만 하고 이  생활 이것만 어데 가든지 껍데기가 변해져도 껍데기 그 껍데기에서 이 껍데기  속에서 그거하고 이 자리에서 그거하고 저 자리에서 그거하고 장소만 변해졌지  장소만 변해졌지 이 장소에 가도 그 놀음 저 장소에 가도 그 놀음, 이 자리도 그  생활 저 생활 항상 그 생활뿐입니다. 요것만 하면 요동치 않습니다.

 그 저에는 참 시골에서는 아주 우리 클 때에는 그걸 뭐 말 광대라고도 하고  맛시방이라 그때는 말서방이라 말서방이라 이랬는데 그 뭐라 하지요, 그걸 그때  그걸? 곡마단? 곡마단이라 해요? 뭐 곡마단인가 뭣인가 그때는 말서방이라 이거  말도 몰고 이래 가지고 이래 했는데, 그게 말이죠 그게 어북 그 때는 참 그게  귀했습니다. 돈 그 사람들 막 거었어. 이랬는데 그 사람이 그때 거창읍에 와  가지고서 한다 하기 때문에 한번 보러 가지고서 갔다 말이오. 우리 학생 때인데,  거창읍에 가니까 내나 고 순서 그대로 해요. 또 그랬는데 또 딴 데 가서 한 것도  물으니까 장 그거라. 어데 가든지 그거라. 순서도 안 바꾸고 어데 가든지 그거  해요. 그 장소만 바꿔졌지.

 그거 모양으로 우리가 어데 가든지 총리 대신을 세워도 우리 장소만 바뀌는  것뿐이오. 장소만 바뀌는 것뿐이오. 또 어떤 감옥에 들어 가도 장소만 바꾼 것  뿐이오. 오데 가든지 그 생활만 해요. 이 생활만이 우리 활입니다. 요 생활을  처음에 지극히 작은 데부터 해 나가서 이라니까 아 그 생활하면 뭐 어찌되노, 그  환경에 맞춰 살아야 되지 오데 가든지 그 생활만 하면 그 생활에서 다 승리되고  다 됩니다. 이런데 고만 자기 환경에 피동이냐 자기 생활 자기가 하느냐  요것으로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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