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절신앙-초월신앙

 

1987. 2. 6. 새벽 (금)

 

본문:히브리서 11장 5절∼6절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 11장은 믿음장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는 믿음을 기록해 놓은 성경장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 에녹은 산 채로 승천했고 또 엘리야가 산 채로 승천했습니다. 에녹의 승천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그것 때문에 승천한 것을 나타냈고 또 엘리야는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그것으로 인하여 산 채로 승천했습니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이 산 채로 승천한 데 대해서 그 미혹들을 받고 있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에녹도 엘리야도 다 산 채로 승천했으니 우리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잘 믿으면 산 채로 승천하는 일이 있다.’ 이래서 산 채로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하려는 이 미혹을 가지고 사람들을 미혹시킵니다.

또 데살로니가전서 4장이나 고린도전서 15장에 거게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죽은 자들이 먼저 부활하고 살아남아 있는 자들도 홀연히 변화한다 하는 그 성구를 인용해 가지고 ‘예수님을 잘 믿으면 죽지 않고 산 채로 승천한다.’ 그 죽음을 제일 싫어하는 것이 인생인데 죽음을 싫어하기 때문에 요것을 이용해 가지고 사람을 멸망시키는 것인데, 예수님은 오신 것이 죽기를 두려워함으로 일생동안 종노릇 하는 자를 놓아 주기 위해서 주님은 오셨다고 했습니다.

이런데 죽기를 두려워하는 것이 사람들인데 안 죽고 산 채로 승천하는 일 있으니까 이 방편으로 이 교파에 속해 가지고 예수를 믿어야 되지 다 죽어야 된다는 그런 교파에 속하면 그거는 너희들이 다 속는 일이니까 안 죽고 승천하고 안 죽고 영생하는 그런 것을 그런 도를 너희들이 받아라 해 가지고 말하는 그런 도들이 많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안 죽고 승천하는 것을 말하고 또 안식교도 안 죽고 구원 얻는, 죽지 않고 천 년 동안 영생한다. 천 년 동안 산다. 이런 걸 가지고 와서 지상 천국주의를 말합니다.

그래 가지고 사람들이 미혹을 받는 사람 많은데, 중간반 반사 여기 하나 있는데 그 누구지요? 중간반 반사 가운데에 처녀로 있는 반사 누구야? 나한테 말한 사람.

안 왔어요? 이름이 뭐야? ○ 선생? 어찌 됐어? 그 뒤로 안 찾아온다 해. 그래도 그 말을 해 줘야지.

여호와의 증인이 요새 미혹을 많이 하는데 그래도 여호와의 증인이 이 부산 지역에서는 와 가지고 별로이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제일 힘 많이 쓰기를 서울서 제일 힘을 많이 쓰고 또 그 다음에는 대구고 부산서 제일 힘을 쓰지 못합니다. 부산이 신조와 교리에 대해서는 더 굳게 서 있다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이 두 사람은 계시의 기관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계시의 기관으로 사용돼서 앞으로 그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에녹과 엘리야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은 다 죽음을 통과해 가지고 구원 얻지 죽음 통과하지 않고는 구원얻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이 복이 있지 부활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복이 없는 구원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고로, 죽지 안하고 구원 얻는 일이 있으니까 안 죽고 구원 얻기 위해서 일생동안 노력하는 것은 죽지 안할라고 그 죽음을 두려워하는 그런 사람을 만들어 가지고, 자기의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그때는 반드시 자기의 생명을 내놔야 되는데, 순교를 안 해도 죽음을 돌아보지 안하는 그런, 죽음에게 종된 그 종에게서 벗어나야 그때에 하나님을 도를 지킬 수 있는 것인데 안 죽고 한다는 그런 미혹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의 생명 문제가 왔을 때에는 다 그것은 피하게 돼 버립니다. 그래서 사람을 망치는 일을 합니다.

그러면 에녹은 뭣 때문에? 에녹은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그것으로써 사망을 보지 안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계시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사망을 보지 않는다 하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이랬습니다. 또 엘리야는 왜 죽음을 보지 안했는가? 엘리야는 그는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은 죽음을 보지 않는다.

하나님께 순종한 것은 죽지 않는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은 죽지 않는다. 그 사람의 생애 중에 현실 현실마다 또 개별 성화구원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그 토막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또 하나님에게 순종한 그 토막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그것을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공과가 이것인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그러면 기쁘시게 하는 것이 뭣 때문에 그렇게 효력이 있는가? 죽지 않는가? 기쁘시게 하는 것만치 기쁘게 하는 그 상대방의 상대방을 닮아간다 하는 그것을 많이 공부했습니다.

그러기에 무엇이든지 자기가, 기쁘게 한다 말은 좋게 한다 말과 같은 말인데 돈 좋게 하면 돈 닮아가고, 사람 좋게 하면 사람 닮아가고, 예술을 좋게 하면 예술 닮아가지고, 과학 좋게 하면 과학 닮아가고, 자기가 좋아하는 그 상대를 닮게 된다.

좋아하는 것은 그것을 좋아하도록 자기 말도 하고, 행함도 하고, 성질도 가지고, 뜻도 가지고, 소원도 가지고, 그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만 자기가 자꾸 소망으로 목표로 상대로 해 가지고 하니까 좋아하는 그거 좋아하도록 내가 자꾸 하니까, 좋아하는 그 무엇을 좋아하게 하든지, 남편을 좋아하게 하든지, 사람을 좋아하게 하든지, 상관을 좋아하게 하든지, 자녀를 좋아하게 하든지 뭣이든지 그를 좋도록, 그를 좋아하도록, 그를 기쁘게 하도록, 이렇게 기쁘게 하기 위해 좋게 하도록 이렇게 할라고 하면은 자연히 모든 존재는 자기와 같은 것을 좋아하고 기뻐하기 때문에 그를 기쁘도록 할라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어짜든지 모든 언행심사를 전부를 그것 기쁘게 하도록 할라고 하면 그거와 같이 돼야 기뻐하지 그거와 달라지면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러니까 나중에 그것이 돼진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결국은 자기 언행심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까? ‘요거는 하나님이 섭섭하게 여기겠다. 요거는 하나님이 참 노여워하시겠다.’ 그 자꾸 하나님 비위를 맞춰서 그 비위 맞추기를, 그 성품 맞추기를, 그 뜻 맞추기를, 그 기쁨 맞추기면 다 그 안에 든 것인데 이것을 위해서 노력을 하니까 자연히 그 사람의 언행심사가 전부는 그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 기뻐하는 대로 할라고 하니까 그걸 닮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까지 공부한 것은 상대방을 기쁘게 하는 것은 반드시 그를 닮아가고 그와같이 돼진다 하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여게 6절에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데는, “기쁘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그래 놓고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할 수 있는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하나니”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한다. 믿음 없으면 기쁘게 못 한다. 그러면 믿음으로 에녹은 죽지 안하고 산 채로 승천했다.

그러면 그 믿음이 뭐인데? 믿음이 뭐기 때문에 그러냐? 믿음은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인데, 믿음도 그 믿음과 믿음을 구별해서 믿음은 수억만 종류도 넘습니다. 이런 믿음도 있고 저런 믿음도 믿음이 억억만도 넘을 수 있는 그런 믿음의 종류가 많은데 그 믿음을 구분을 할라고 하면은, 여러 수억만 종류도 넘지마는 그 믿음을 크게 구분을 할라고 하면은 몇 가지로 구분을 할 수가 있습니까, 배우기를? 손가락으로 한번 가리켜 보이소. 입니다. 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믿음. 그 믿음이 있고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믿음 뭐 천도 만도 넘습니다.

그것은 다 믿는다는 것은 쌍방이 있어야 되는 것인데 상대방을 믿는 것인데 그러면 내가 상대하고 있는 그 대상이 수많이 있기 때문에 믿는 것은 이걸 대상으로 하면 그걸 믿고 저걸 믿고 하는 그런 믿는 것이 많이 있는데 여기 성경에 “믿음은 능치 못할 것이 없다” 또 “믿음은 죽음을 보지 않는다” 또 “믿음은 하나님께서 의로 인정을 하신다” “믿음은 하나님의 후사가 된다” “믿음은 영생한다” 하는 이 모든 믿음 이것은 인간들이 말하는 수많은 그 종류의 믿음이 아니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니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믿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라 말은 그리스도는 언제 나타났느냐 하면은 창세 전 우리를 택할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했고 또 하나님이 목적을 정하실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목적을 정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하나님으로 나타났을 때에 그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켜서 그리스도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피조물이 아닙니다. 창조주입니다.

자존자요 창조주이신데 그분이 나타나는 그때로부터 “예수” 도성인신 사활하신, 도성인신에까지 연결돼 가지고 만든 것이 믿음이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믿음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라” 그랬습니다.

그러기에 이 믿음은 만드는 데도 영원을 걸렸고 또 이 만드는 데는 창조주와 피조물이 하나돼 가지고, 예수님의 인성은 피조물인데 모든 피조물을 대표한 것인 예수님의 인성이십니다. 모든 피조물의, 천군 천사도 있지마는 사람이 천군 천사보다 피조물 중에서는 제일 으뜸이 되는 대표되는 것인데 그러기 때문에 우주는 아담이 범죄했을 때에 그는 다 그만 정죄를 받았습니다.

하늘나라도 천군 천사도 만들어진 것이 하나님의 택자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택자들의 구원이 절단나면 영계도 다 절단나고 하나님만 남습니다.

이런데 이 신인양성일위는 창조주와 피조물이 하나돼 가지고 역사한 것이 신인양성일위의 역사입니다.

이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그래서 보면은 “예수로 말미암은 믿음이 역사했다” 예수로 말미암은 믿음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만이 가진 믿음이요 하나님의 선물로 받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각 사람에게 믿음을 나눠 주셨다” 이랬어. “믿음을 나눠 주셨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라야 믿음이지 인간들이 믿는 그 믿음이 믿음이 아닌데 요 믿음과 믿음을 다 혼돈시켜 가지고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시는 믿음, 하나님이 주셔야 받는 믿음 이 믿음과 혼돈돼 가지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를 다 허약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믿음은 순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 대속의 이 구원만을 믿게 하는 믿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마음이 미혹을 받았다 하든지 어쨌든지 찰나라도 예수님의 대속을 믿는 믿음이 잠깐이라도 있었다면은 그 믿음은 하나님이, 계속될 것을 주지 안하고 찰나적으로 주었더란대도 하나님의 선물인 그 믿음을 가졌어야 이 수많은 온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게, 만나지 못하게, 믿지 못하게 방어하고 있는데 그 수많은 방어를 꿰뚫고 들어가 가지고 찰나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었다 할지라도 그 믿음은 그것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기 때문에 그것으로서 그 사람은 택한 자로 확정을 지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쁘시게 하는 것은 상대방을 닮아가는 것인데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한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는 유일로 그 믿음이라야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가 있는데 그 믿음이 뭐이냐? 그러면 위에 “믿음으로 에녹은 죽지 안하고 승천했다” 또 “기쁘시게 했기 때문에 승천했다” 그러면 믿음이나 기쁘시게 하는 것이나 하나입니다. 나눠지는 것 아니고.

기쁘시게 하는 것이나,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 아니면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자기가 암만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기쁘시게 안 하면 그게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아무리 복종해서 순종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그 인격성을 가지고 그 사상을 가지고, 그 인격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지켜야 되지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믿음 지키는 것이 아니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육십육 권 도리를 낱낱이 다 그대로 순종해서 행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상대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육십육 권 도리를 지키지 아니한다고 하면은 그것은 뭐이냐? 그것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율법을 지키면 율법을 지킴으로 살 수 있습니다. 율법을 완전히 지켰으면 살 수 있습니다. 율법으로 주장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율법으로 구원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율법을 완전히 다 지켰으면 구원 얻고 계속 지켰으면 구원얻지마는 율법을 완전히 지킬 자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지가 입법해 놨기 때문에 그 입법을 지킬 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대속을 믿는 믿음으로만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대속하신 주님을 사랑함으로 계명을 지켜야 되지 사랑함으로 이 율법을 지키지 안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하는 그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지켜야 된다. 아무리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아무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해도 말씀을 지키지 안하면 그것은 껍데기고 다 헛일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이 믿음뿐이다.

그러기에 “내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 나를 사랑하노라 하고 계명을 지키지 안하는 것은 다 그거는 다 거짓말하는 자라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는 자니 내 계명을 지키는 자는 나를 사랑하는 자요 아버지도 그를 사랑할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는 우리가 와서 거처를 같이 하겠다 나를 사랑함으로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그렇게 요한복음 14장에 많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나 기쁘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사랑함으로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것이 뭐이냐? 하나님을 상대하는 내 인격, 하나님을 상대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그 인격,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인격, 그 인격이 계명을 지켜야 되지 그 인격이 계명 지키지 안하면 소용 없어.

그 인격이 뭐인가? 그것이 자기와 자기를 구별하기 어려운데 곧 중생된 영 자기가 주체가 돼 가지고 계명을 지켜야 그거 다 생명이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지 중생된 영이 주체가 되지 안하고 그런 것은 아무리 계명 지켜봤자 율법주의자라 율법을 지켰지 그것 소용없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그것이 뭐이냐?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내가 아무리 계명 지킨다고 해도, 내가 아무리 계명을 지킨다고 해도 내가 계명 지키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도 되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계명을 아무리 지킨다고 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계명을 지키는 것도 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되는 것도 있습니다. 거게서 나와 나를 구별하라 하는 것을 말했습니다. 이거 짧은 시간에 자꾸 이래 막 전부 합해 놓으니까 잘 알아듣지도 못하고 말도 연결이 없는데.

그러기에 나와 나를 구별하지 못하고 아무리 계명을 지켜도 헛일입니다. 나와 나를 그것을 구별해 가지고 계명을 지켜야 됩니다.

그러면 이것은 ‘내 비위에 맞는다, 내 마음에 섭섭하다, 이것은 내가 하고 싶다, 원한다, 욕심이 난다, 취미가 난다.’ 그럴 때에 나 그것은 뭐입니까? 그럴 때에 ‘나는 이러하다, 내 마음은 기쁘지 않다, 나는 이게 욕심난다, 나는 이것을 원한다, 내 마음이 섭섭하다, 내 마음이 기쁘다.’ 이 내, 몸이나 모든 자기 마음이나 그런 것을 내것이라고 내 마음으로 하는 그 나는 무슨 나입니까? 그 나는 무슨 나입니까? 참 자기입니까 자기 아닌 자기입니까? 자기 아닌 자기입니다.

이래서, 간단하게 말해서 나는 어떤 나인가? 나는 이제 중생된 영 나는 무슨 나인가? 예수님의 일곱 가지 대속을 받은 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나는 내가 아닙니다. 그 나를, 나와 나를 잘 구별해야 되는데 하나님을 향하지 안한 나는 그거는 딴 나입니다. 자기를 향하는 건 나 아니라. 그 민족을 향하고, 인류를 향하고, 과학을 향하고, 향한다 말은 소망을 하고 상대한다 말인데 하나님을 향하지 안한 것은 참 자기가 아니요 또 하나님을 향하되 진리대로 하지 않은 것은 참 자기가 아니요 영감대로 하지 않는 것은 자기가 아닙니다.

마귀를 대적하고 마귀에게 굴복하지 않는 그 내가 참 나요. 마귀를 대적하는 내가 나요. 마귀에게 굴복하지 안하고 마귀에게 자유하는 내가 나요.

또 죄를 대적하고 죄와 원수가 되어 있는, 죄와 원수가 되어 있고 죄를 대적하고 죄에게 복종하지 않는 그 내가 내입니다.

또 사망을 대적하고 사망으로 더불어 싸우는 내가 내입니다. 사망에게 삼키는, 사망의 우려성이 있고, 사망의 염려성이 있고, 사망의 두려움을 가지고 사망 그놈이 위협할 때에는 꼼짝 못하고 사망에게 복종할 수 있는 그 나는 내가 아닙니다. 사망에게 종된 내가 아니고 사망을 이겨서 사망에게 자유하고 사망으로 더불어 싸워서 사망을 멸하려는 그것이 내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사망을 멸하러 왔습니다. 마귀를 멸하러 왔습니다. 죄를 멸하러 왔습니다. 죄로 더불어 싸운 거, 이 세상에 싸움이 많지마는 죄로 더불어 싸우는 사람은 이 그리스도인밖에, 참된 그리스도인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뭐 공산주의하고 싸운다, 뭐와 싸운다, 무신론주의하고 싸운다.

무신론주의하고 싸우나 그 싸움을, 그 싸움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 편이 돼 가지고 죄로 더불어 싸우고 마귀로 더불어 싸우고 사망으로 더불어 싸우는 그 내가 내입니다.

또 하나님의 모든 율법, 하나님이 입법해 놓은 그 모든 입법, 하나님의 공심판을 통과한 내가 내입니다. 하나님의 공심판에 염려 있는, 염려가 되는 나는 참 내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심판을 통과한 자가 있기 때문에 자기는 하나님의 그 율법을 우리가 다 알지 못하나 현실 현실에 하나님의 법이 현실 현실마다 나타나는데 현실에 하나님의 법이 어떤 법이 현실에 해당되고 나타났다 할지라도 그 법을 범하지 안하고 그 법이 곧 자기 법이요, 그 법은 자기 법이요, 자기가 통과한 법이요, 자기 편에 있는 법이기 때문에 그 법과 대립이 대립이 되지 안하고 배치되지 않는 그게 내입니다.

또 하나님과 화친해서, 하나님과 화친돼서 하나님과 연결이 돼 가지고 하나님으로 인해서 동해지는 그것이 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속에 자기가, 자기가 주격이 되면 어찌 됩니까? 자기가 주격이 되면은 그 자기가 주격되어 있는 주격은 참 자기입니까 거짓된 자기입니까? 자기는 주격이 아니고 자기는 대속하신 이 하나님의 것이 되어 있는 하나님의 피소유되어 있는 그것이 자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와 자기를 이렇게 잘 구별해 봐 가지고 계명을 지켜야 되지 자기와 자기를 구별하지 안하고 옛사람이 얼마든지 계명 지킬 수 있습니다.

옛사람이 아무리 성경 계명을 지킨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지 예수님의 대속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힘써도 못하네. 거듭나지 못하니 할 수 없다.’ 하는 그말은 에수님의 대속이 아니면 암만 힘써도 또 참아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자기와 자기를 구별하는 것이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믿음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한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게 못 한다, 믿음은 뭐인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믿음이요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 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믿음이요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다. 그러면 믿음을 뭣을 가리켜 말했는가?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 우리에게 주신 이 계약서, 이 계약서를 아는 것이 믿음이요,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요, 이 계약서대로 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알고 인정하고 행하는 거, 알고 믿고 행하는 거 이것이 믿음인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이 세 가지요 또 믿는 것도 이 세 가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 가지가 없이는 안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제 아침에도 저울을 말했는데 저울을, 마음을 저울질한다. 우리를 저울질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저울질하는 그것은 뭐이냐? 어제 뭐라고 배웠습니까? 저울질한다는 것은 구원 이루는 데는 무엇이 없다 말했습니까? 무엇이 없다고 말했습니까? 초절은 없습니다. 초절은 안 되는 걸 요 딱 못박아 놨습니다. 요것을 예사로 들으면 헛일입니다. 요게 중요합니다.

제가 산에 가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네가 이 저울을 보느냐? 네가 다림줄을 보느냐?” 그것을 제가 며칠 동안 계속해서 그것을 제가 받아서 그라고 난 다음에 제가 거게 대해서 좀 깨달은 것을 가졌습니다. 그러면 저울이라는 것은 이것은 초절은 없습니다.

저울로 사람의 마음을 단다는 이거, 마음을 단다면 행동을 단다 말인데 저울이라 하는 건 달면 근수 많이 나가면 좋지. 근수 많이 나가면 좋지요? 근수 많이 나가는 게 좋은데 첫째 깨달을 것은 이 근수라 하는 것은 처음부터 차차 차차 한 근이 두 근 되고, 두 근이 세 근 되고, 한 근보다 많은 것이 두 근이고, 두 근보다 많은 것이 세 근이요, 세 근보다 많은 것이 네 근 그렇지, 한 근 없는 백 근은 없습니다. 그거 잘 이해 안 되면 안 돼요.

한 근 없는 백 근이 있습니까? 한 근은 없는데 백 근이 있습니까? 한 근 없는데 백 근 있습니까? 있어? 저 ○ 선생? 한 근 없는 만 근이 있을 수 있을까? 그 만 근인데, 만 근이면 만 근인데 한 근은 그 속에 없다. 한 근 없는 만 근이 있어? 없어.

이러기 때문에 이거는 아주 하나님께 정확한, 초절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이거 초월 신앙이라. 요거 하고 요거 하고 자꾸 하기 때문에 그 초월 신앙 누가 가질 건가? 아무도 그걸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을 주시는데 현실 현실에서 하나 하나를 딱딱 지켜 행해 나가야 되지 제가 성경 보고 막 도매금으로 이래 구원할라 하는 것은 헛일이다.

그러기 때문에 모세가 성막을 지을 때 한목 다 총 설계서를 주셨지마는 그라고 난 다음에 성전 실지로 시공할 때에는 오늘은 요거 뭐 해라 뭐 해라 뭐 해라 요래 할 때 하나 하나 말할 때 한 그것이 뭐냐 하면은 오늘은 우리가 성전을 짓는데 성전은 그때는 나무로 물질로 짓지마는 오늘은 우리는 마음과 몸이 첫째 아담의 것이 둘째 아담의 것으로 성화되어 나가는 이게 지금 성전 짓는 거라.

성화되어 나가는데 이 성화되어 나가는 것은 성경보고 도매금으로 제가 아무리 구원 이룰라 해도 소용 없으니까 이 구원 이루는 데는 하나 하나 토막 토막 이래 순서적으로 말할 때 거기 맞춰야 된다.

그러면 하나 하나 하나님께서 요대로 해라 조대로 해라 우리에게 말합니까?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까? 요 성구 지키라 조 성구 지키라 말하고 있습니까 없습니까? 말하고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러면 어째 성전 지을랍니까? 요거 고치라 요래 고쳐라 조래 고치라 자꾸 말하는 데 따라서 고쳐야 되겠는데 그 고칠라면 요래 고쳐라 조래 고쳐라 그걸 알아야지? 어째 고치라 합니까? 현실 주시는 것이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요 현실에서는 요거 고치라 조 현실에서 조거 고치라 주는 거라 말이요.

그러기에 현실에서 주님이 주시는, 현실에 해당되는 주님의 뜻, 내게 ‘네가 요래라’ 하는 그것을 찾아 가지고 하지 안하는 것은 다 이것은 초절 신앙이요 이건 다 자기 주관 신앙이지 이것은 성전은 안 돼 간다 그것을 말합니다.

이래서 저울로 말하는 것이고, 또 다림줄을 말했는데 아모스에도 말하고 스가랴에도 말했는데 이 다림줄을 말하는 거는 뭐냐? 다림줄은 뭐입니까? 다림줄은 연결성을 말합니다. 연결성을 말합니다.

다림줄이 만일 천 척, 천 척이면 길지 않습니까? 천 척인데 거게 일 푼이 끊어져 있으면 그 천 척 다림줄은 다림줄이 됩니까 안 됩니까? 어데까지가 다림줄이 돼? 다림줄은 끊긴 것을 지나 가지고 끊긴 그것을 합해 가지고 다림줄이 됩니까 끊기지 않한 데가 다림줄이 됩니까? 만일 한 자까지는 안 끊기고 한 자만, 한 자 지나고 난 다음에 끊겼으면은 그 다림줄은 한 자밖에는 다림줄을 못 합니다.

거게는 연결성을 말합니다. 연결이 돼야지 연결 안 되는 것은 소용없다.

이런데 사람들은 천 척이면 천 척 이것만 생각하지 그 속에 끊어진 것을 보지 안하기 때문에 소용이 없다. 사람들이 구원 이루는 데는 이건 여기 시작하고 끄터리하고, 이것도 다 한가지 뜻이라. 이거 다 초절이나 한가지 뜻이라. 이러기 때문에 이거는 연결이 없으면 안 된다. 연결된 거게까지만 효력을 내지 연결되지 안한 데에는 효력을 내지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 계약은 다 연결성이 있어야 연결성 없이 이거 초절성은 소용 없다. 저게도 저울도 그걸 말하는 것이고, 저거는 초절을 해서는 안 된다 그말이고 이거는 끊어지면 안 된다 그말입니다. 끊어지면 안 되기 때문에 연결된 데만 됩니다.

이러니까 이 주님 앞에 갈 때에 이 구원을 이루는 것이 이거 나중에 가 보면은 다 그저 이 사람은 그 이 끄터머리, 이 끄터머리 저 끄터머리만 잡고 있지만 그 가운데 끊어져 있는 데가 있어. 그 가운데 자기가 관심을 가지지 안하는 성구가 있고 알지 못하는 무시한 성구가 있으니까 그 톰박이 끊어졌으니까 그게 안 된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학개서에도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그러면 깨끗한 것은 하나 깨끗했다 해도 그것만 깨끗하지 다 깨끗해지지 안하는데 더러운 것은 하나 더러우면 어찌 됩니까? 하나 더러우면 다 더럽다 했어. 이것을 이런 성구가 우리에게 크게 힘이 됩니다. 우리에게 크게 빛이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제물 하나 깨끗했다고 다른 모든 게 다 깨끗해지는 게 아니다.

하나 더럽다고 그것만 더럽지 다른 거 더럽지 않다 말하나 하나 더러우면 모든 게 다 더러워진다. 시체를 만졌으면 그 시체 만지고 다른 거 다 만지면 다른 거 전부 다 더러워진다.

그러면 우리가 이 손가락 하나가 이거 죄를 지었는데, 죄를 지었는데 이 손가락 하나가 죄 지었으면 죄 지은 책임은 전신이 다 책임을 지게 된다. 그러면 의는 손가락 하나 의를 행했다고 전신이 의롭다고 인정받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죄와 의가 해독이 다르다. 평가가 다르다 하는 것을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 지키는 것뿐인데 믿음을 지키는 데에는 저울도 생각해야 되고 다림줄도 생각해야 되고 또 더러운 거와 깨끗한 것이, 더러운 것은 오염이 얼마나 되며 또 깨끗한 것은 그 효력이 얼마나 되는가 그런 것을 우리가 연관성 가지고 모든 성경을 상대하고 자기 구원을 살피라는 것입니다.

광고합니다.

지금 찬송 모두 이렇게 정선해 가지고 편집하는 위원들이 여러 날을 계속해서 지금 수고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 날 계속해서 수고하고 있는데 거의 지금 다 돼 가는 것 같습니다.

이러니까 이 찬송가를 다시 우리가 거기서 지금 편집할 터인데 거게 자기가 혹 아는 대로 복음성가에든지 또 다른 그 성가라도 이런 것은 참 찬송에 하나 넣었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특별히 자기가 이거는 모든 사람이 이 찬송으로 은혜 받아야 되겠는데 이 찬송가에 없으니 안 됐다, 이거 찬송가에 넣어 줬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것이 있으면은 그것을 기록해 가지고 신고함에 넣어 주시면 그것을 다 참고를 하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몇 군데 전화를 해서 그런 찬송 그런 게 있으면은 좀 자기가 기록해서 좀 내 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했습니다.

지금 그래 가지고 앞으로 이 찬송가가 앞으로 나가는데 그래서 이번 우리 그 새찬송에서도 뺄 것을 많이 뺄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성탄 찬송이 너무도 많은데 성탄 찬송을 의논해 가지고 한 열 개나 열다섯 개 하면 되지 않을까? 또 부활 찬송도 그렇게 많이 할 필요가 없고 그러면, 많으면 좋은 찬송 그거 냅두고 딴거 하기 때문에 좋은 찬송이 묻혀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뭣이든지 일등과 이등과 많은 것이 있으면 사람들은 이것 저것 자꾸 하기 때문에 제일 좋은 것을 잡지 못하게 된다 그거요. 이라고 또 자는 찬송, 저녁으로 잠잘 때에 찬송 그 찬송도 너무 많아서 그것도 한 여남은 개만 남구고 나머지기 뽑아버려야 되지 않느냐? 또 예수님의 그 부활의 대해서도, 대속에 대해서도, 감사에 대해서도, 또 자기 현실에 대해서도, 또 천국 소망에 대해서도, 하늘나라의 소망에 대한 찬송이 없어요. 자기가 하늘나라의 소망에 대한 찬송은 이거 찬송에 별로이 없어. 그런 것은 더 첨부도 하고 참으로 맘에 간절해서 요 곡에 대한 찬송이 있는가 싶어서 찾아봐야 거게 대한 찬송이 없는 때가, 없는 게 많다 그거요. 이러니까 요거 좀 개편할 터이니까 여러분들이 협조해서 자기 은혜 받은 그런 걸 말해 주면 좋겠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기쁘시게 하는 데는 믿음뿐이다. 믿음은 세 가지다. 세 가지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인데 지키는 데에는 저울을 생각하고 다림줄을 생각하고 또 오염되는 오염을 생각하고 그래서 지켜서 우리가 흠없이 지켜야 이다음에 구원이 돼지지, 그렇기 때문에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지금 예수 믿는 사람이 점점 많은데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재림할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말씀했으니까 그 믿음이 적다 말인데 지금 예수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전부 제 마음대로 믿습니다. 요 사람은 요 성구가 제 비위에 맞기 때문에 그 성구만 믿고 조 성구만 믿고, 자기가 그래 가지고 어쨌든지 자기 믿는 그것만 자꾸 주장하고, 옆에 말해도 안 듣는다 그말이오. 그것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모든 성경은 다 하나기 때문에, 다림줄은 어데든지 끊어졌으면 거게서 새로 이어야 되지 끊어진 데 거기 끊어지면 나머지기, 천 척이라도 여게서 한 자 위에 끊어졌으면 그 다림줄은 못 써. 와 가지고 한 자 그걸 이어야 된다 말이오. 그 이어야 나머지기가 돼진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걸 지킨다 해도 하나 범했으면 범한 그것을 고쳐서 지켜야 돼지지 안 지키면 안 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빠진 그것을 고쳐서 차차차 지켜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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