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의 도리

 

1981. 3. 15. 주일오후

 

본문:출애굽기 7장 1절∼6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여 그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보내게 할지니라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나의 표징과 나의 이적을 애굽 땅에 많이  행하리라마는 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더하여  여러 큰 재앙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 대로 곧 그대로 행하였더라

 

오전에 이 말씀을 증거하였습니다. 거기 계속해서 증거하겠습니다.

이 출애굽기는 해방에 대해서 기록한 성경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피로 구속해서 부르신 것은 자유하도록 하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세상과 세상에 있는 여러 것들에게 종이 되어 있던 자들입니다.

우리의 생활에 대한 자유도 완전히 빼앗겼고 또 우리의 사상이나 지식이나 모든  자유를 다 빼앗겨서 완전히 종이 된 저희들입니다.

악령과 죄악과 모든 악성들에게 종이 된 지 오래 되었으므로 종된 것도 알지  못하고 그것이 우리의 생활인 줄 알고 종된 생활 곧 악령과 악성과 악습에게  사로잡혀서 한 걸음 한 걸음 한 시간 한 시간 멸망으로 끌려가 멸망하는 그것이  우리 생활인 줄 알고 멸망이 빠르면 더 성공인 줄 알고 멸망의 봉이 커지면  대성인 줄로 이렇게 알고 살았던 참 비참한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의 대속으로 인해서 죽은 우리 영이 진리와  성령으로 다시 살리움을 받은 후에는 우리가 자유하는 입장으로 옮겨섰고 자유와  종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일생 동안 죽기를 두려워함으로 죽음에 종이 되어서 굶어 죽을까, 박해를 당해서  죽을까, 갇혀 죽을까, 매장될까 별별 그 세력들에게 종이 되어 가지고 그것이  하라 하는 대로 했던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우리의 생활도 본의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진리대로 살고 싶고, 영감대로 살고 싶고, 양심대로 살고  싶은 이 자유를 찾았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우리 몸에서 주를 존귀케 하는 자,  주님을 영광스럽게 복음을 영광되게 하는 이 생활을 소원하는 우리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원이요 이대로 사는 자유를 원하는 우리들이  되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학대와 학살이라는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도 자유를 그들이 얻으려고 애를 썼지마는 거게서도 동족을 치는 그런  패장같이 그런 직을 가진 사람들은 저거 동족을 패장으로 치면서 거게서 약간의  좀 대우를 받는 그런 것을 기뻐하고 가마에 고기물 그런 것을 탐해서 그저 그날  그날 기뻐 사는 그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래서 자유를 원해서 부르짖는 그 사람들은 마침내 그 호소가 하나님에게  들려져서 하나님이 자유를 시켜 주시려고 이렇게 왔지마는 그때에 자유를 원하던  자들은 다 자유의 해방을 받게 됐고 자유를 원치 않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고 난 다음의 모든 복수는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복수되어 그들은 비참하게 다 멸망을 받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신령한 이스라엘 된 우리들도 이 세상에서 자기가 여러  세력들에게 종되어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도 있고, 종된 것을 깨닫는  자들도 있고, 깨달으나 그대로 그날그날 그저 뜻없이 지내가는 믿는 사람들도  있고, 여게서 자유하지 못하는 데 대해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애굽 왕은 마귀의 상징이요, 애굽에 있는 모든 백성들은 마귀에게 통치를 받는  그 모든 사람들을 상징한 것입니다. 악령과 그의 군병되어 있는 그들을 따라  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이 세상은 육체의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었던 것과  꼭 같이 악령이 통솔하고 있는 수많은 인류 속에 기독자들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남자는 모조리 다 나는 것을 산파로 통해서 죽이게 하고 남은 것은  나일강에 던져서 다 죽이구로 했으니 남자만 죽으면 이스라엘 씨종이라는 것은  완전히 멸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악령은 세상에서 기독자의 생애를 완전히 멸망시켜서 기본구원은  있지마는 건설구원은 모두가 다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집,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이 인간의 그 심신으로 되어 있는 육의 성화라는 이 건설은 완전히  전멸을 시키기를 목표로 하고 노력하고 노리고 있는 이 세상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성경대로 영감대로 신앙 양심대로, 그 양심대로가 소원이  무엇인데? 어쩌든지 나를 구속하신 주님을 기쁘시게 존귀케 영광스럽게 이렇게  하는, 우리의 건설구원이 되는 참 신앙 자유 양심 자유의 이 생활을 하고자  원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지마는 이럭저럭 하루가 지내고 난 다음에 밤에 앉아서  종일 생애를 계수를 할 때에 너무 계산에는 엄청나게 삐뚤어지는 것을 발견을  하고 탄식 고민을 하는 성도도 있고, 하루 종일 종노릇하는 일에 피곤해서 밤이 되면 정신 없이 꼬스라져서 그만 밤을  지내고 새벽에 눈뜨자마자 어떤 자는 돈이 그를 종으로, 권세가 그를 종으로,  행락이 그를 종으로, 자기 욕심이 사욕이 그를 종으로 하여 그 종노릇하기에 또  하루가 급급하고 이래서 하루 하루의 세월을 보내 일생이라는 그 일생을  종노릇해야 멸망에게 멸망받고 말고도 이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술이 취한 사람이요 취해서 잠자고 있는 사람이라고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 말씀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자유 생활은 되지 아니하고 이것에게 시간을 뺏겼다,  정신을 뺏겼다, 자기 안에 있는 온갖 악성에게, 사욕에게 빼앗겼다, 자기 밖에  어떤 사람에게, 어떤 운동에게, 어떤 권세들에게, 어떤 미에게, 어떤 모든  정실들에게 이렇게 빼앗긴 것을 생각하고 마음에 분개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대적의 손에서 나를 구출할까?’ 하는 호소를 하는 그런  사람들도 있고, 안 되니까 하루 생활의 시간표를 정해놓고 자기의 생활을 한  시간 한 시간 돋파서 깎아 나비어 이렇게 검열해 가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참 자유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고, 자유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고, 자유하지  못함으로 심한 고민 분투하는 사람들도 있고, 자유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 이  세상 교회들입니다.

그런고로 오전에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첫째로 자유를 원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죽음 앞에서도 결단코 죽음에게 종되지 아니하고 내가 영감대로  진리대로 내 소원 곧 주의 기쁨 존귀 영광 위해서 나는 살겠다.’ 하는 이 자유  생활을 어데서든지 이 자유가 제재받지 않고 꺾어지지 아니하고 어떤 입장, 어떤  처지, 어느 때라도 이 자유로 하늘나라까지 일관할 수 있는 이런 자유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평생 소원이 자유이기 때문에 그 자유치 못한 부분을 인해서, 또  자유하고 싶은 소원을 인하여 그 마음이 눌리고 있는 것을 무거운 짐진 자와  같이 이렇게 눌리고 있다고 성령의 사람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는 자유케 하기 위해서 중생, 신앙의 부름을 입었으니 이 자유를 깨닫고  자유하고자 하는 이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자유를 원하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영감대로 진리대로 신앙 양심대로 살 수 있는 자기가 되기를  원하는 이 사람들이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나따나 밥만 먹으면, 옷만 입으면, 만물보다 거짓된 자기 사욕이 원수인  줄을 모르고 그저 그것이나 달성되면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얼마나 허무하고  어리석어 속아 있는 사람인지. 우리는 자유를 원하는 동시에 내 자유를 자유하지  못하게 하는 자유의 적이 무엇인가 하는 그것을 우리가 발견해야 합니다.

시간 시간 생활에 ‘아, 이 시간에 이 원수가 나의 자유를 꺾었다. 나는  이것에게 이 시간 적이 되었다.’ 내 안에 있는 적, 내 밖에 있는 적, 온갖  종류의 적을 시간마다 발견해서 이로 더불어 싸우려고 하나 벌써 지내갔기  때문에 과거는 앞으로 당겨놓을 수가 없는 후회해야 소용이 없습니다.

이러니까 다시금 앞으로 자유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은  하로 종일은 정신 없이 이럭저럭 정신 없이 살았지마는 자기 침상에 눕기 전에  하루 해의 계산을 댈 때에 너무도 자유한 이 생명 생활은 없었고 다 종된 생활만  했기 때문에 마음에 탄식을 하면서 하루의 계산을 대면서 이 하루의 계산을 내가  계속 항상 계산하면서 살 수 있는 날수 계산하는 지혜를 달라고 모세는  하나님에게 간구했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모세와 같이  겸손한 자와 내 집에 충성된 자를 보았느냐고 만족히 여겼습니다.

그런고로 자기는 일생 생활에 신앙 양심 생활, 진리대로의 생활, 영감 생활, 곧  소원하는 하나님의 기쁨과 존귀와 영광을 위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과연 그들에게  모본이 될 만한, 기념이 될 만한, 칭찬할 만한, 무궁세계에 바로 깨달으면  환영을 할 만한 이런 생활을 하고자 하는 이 생애를 무엇이 들어서 방해를 하고  있는가 하는 그 적을 발견하고 그 적이 참 우리의 원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물질을 손해보인다고, 우리 인신공격을 한다고, 매장을 한다고  결단코 그는 내 원수가 아닙니다. 그는 나에게 손해를 보이지 못합니다. 그는  오히려 나에게 경성을 줄 수 있고, 조심을 줄 수 있고, 겸손을 줄 수 있고,  주의를 줄 수 있기 때문에 그는 내게 응원자 아닌 실은 응원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그 적은 어떤 것인지 이것을 발견해서 이 적으로 더불어 우리는  포수가 짐승을 총을 들고 겨누듯이 우리는 그것을 겨누는 이 생활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나의 원수이니 이 원수를 다른 데에 눈을 돌리지 안하고 그것을 보고서  겨누어 가지고서 그로 더불어 싸워서 그것에게 비로소 해방하고 그를 이겨  자유할 때에 우리는 다시 다른 데에서 적이 와서 또 다른 모로 우리를 종삼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의 생활은 자유의 생활이요 자유를 방해하는 적의 전투  생활이라 그렇게 할 수 있는 세상 생활인 것입니다.

셋째로는 우리가 어떤 것이 내 자유를 방해해서 내 생애를 다 죽게 하는 그  원수를 발견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힘으로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것이 이것이  성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이 거게서 용감스러운 사람도, 담대한  사람도, 애민족자도 있었지마는 그들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애굽 강한 바로의  손에서 해방한 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세도 결국은 거기서 힘대로 해  봤지마는 마지막에 후퇴하고 그는 쫓겨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성경 비유에 포도나무 비유를 보면은 포도나무에 어떤 해충이 와서 갉아먹는다  할지라도 그 포도나무는 해하는 그 해충을 방지할 만한 힘이 자신에게 없습니다.

만일 해충이 와서 갉아먹을 때에 갉아먹는 것을 갉아먹지 못하게 한다고 제가 해  봤자 진액이나 많이 빨아올려서 양분이 많이 올라오면은 그놈은 더 좋다고 먹지  절대로 그것을 방지는 못 하는 것입니다.

기독자들이 신앙 생활에 있어서 방해하는 것을 결단코 자기의 힘으로써는 방지  못 한다는 것을 여게서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자유를  방해하는 그 원수는 다만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이 오셔서 거게서 자유를  주셨습니다. 해방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사소한 적이라도, 자기의 자유를 막고 있는 사소한 적이라도 그것은 내  힘으로 방지할 수 없는, 꺼풀은 그것이 사소한 일이라 내가 볼 때에는 시쁘게  보입니다. 그까짓 거야 내가 당장에 방어하려면 방어하고, 배반하려면 배반하고,  금지하려면 금지하겠다고 보이지마는 아닙니다. 잘못 본 것입니다.

그 속에는 악령과,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세상 왕인 악령과, 피조물 중심인 그  악성과, 모든 대대로 내려온 악습 그것이 그 속에 힘이 돼 가지고서 껍데기는  부드럽고 순한 사소한 것을 통해서 나오고 있으나 속은 그렇게 강한 것입니다.

하나 예를 들면 어떤 장로가 그 장로가 덕있는 장로요 믿음 좋은 장로라고  누구든지 다 일컫습니다. 거창 지방에 있었던 장로입니다. 제가 거기 목회할  때에 그 장로는 모두 다 덕망 있는 장로라 그렇게 말했는데 아무도 모르게 그  사람은 담배를 끊지 못했습니다.

담배를 끊지 못함으로 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든지 해도 장 외식이지, 뭘 할  때에 기도해서 하나님과 통해지려고 하면 담배가 나옵니다. ‘내가 이것을  끊어야겠다. 주여, 이걸 내가 피우니 내가 죄송합니다. 내가 이것  회개하겠습니다.’ 하면 기도 나오지마는 회개하겠다 하고 또 담배 피우면 그  기도한 것이 다 묵살돼 버리고 맙니다.

이래서 사람 보기에 외부 도덕면이나 이 사회면이나 그런 면은 구비한 장로라고  했지마는 실상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짓는 집이요, 모래 위에 짓는 집이요,  하나님과 직접 연결돼 가지고서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건설하는, 완전성 영원성 불변성의 것으로 건설되는 것은 그에게 없었다 그거요.

그 마음에는 ‘이까짓 거야 내가 안 피면 되는데’ 했지마는, 똑 말이요, 내가  뒤에 발견을 했는데 똑 요만한 쇠로 만들어 가지고서 그 새털 담배 그걸  배배배배 비벼 가지고서 넣으면 꼭 한 모금도 안 됩니다., 반 모금이오. 반  모금밖에 안 되는데 그것 딱, 안 하면 못 견뎌.

사소한 것이지마는 그걸 다른 사람 볼 때에 ‘그걸 끊지 못해? 그걸 금하지  못하나? 하루 담배를 두 갑 세 갑 피우던 사람들도 당장 금하는데 그걸 금하지  못하나?’ 사람마다 단점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모든 요소에 따라서 마귀란  놈이 여러 줄로 걸어놓지마는 최종은 어떤 줄을 가지고서 그 사람을 걸어서 종을  삼으려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사소하게 보이지마는 그 속에는 세상 왕인 악령이  속에 들어 있습니다. 피조물 중심인 악성이 들어 있습니다. 원죄가 들어  있습니다. 모든 대대로 내려오던 풍속과 습성이 그 속에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아예 내 신앙에 자유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거든 무조건  ‘이것은 내 힘으로 이것을 제거할 수가 없다. 내가 이 세력을 꺾어서 내가  여게서 자유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해 주셔야 되니 나는 하나님에게 이 문제를  들고 기도해야 되겠다.’

그 문제가 얼마나 큰데? ‘뭐 사소한 문제니 내가 얼마 기도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면 벌써 저는 틀렸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일 년도 좋고, 십 년도  좋고, 평생도 좋습니다. 평생을 그것에게 종되어서 구원을 헛일할 수 있는 자기  일생을 삼키는 적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보기는 보잘것 없는 사소한 것 같지마는 실은 자기의 일생 구원을 삼킬 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그 대적이요 일생을 삼킬 적이니 그만치 큰 적인 줄 알고  하나님에게 호소를 해야 하나님이 들어주실 수가 있고 자기는 거기서 벗어날  수가 있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지내가는 말로 ‘이까짓 일이야 한번 두번  기도하면 될 것 아닌가?’ 하고서 그렇게 반 힘 들여서 조그만한 찌끼의 힘을  들여 가지고 기도하는 그것으로 하나님이 그것을 거게서 해방시켜 주면 딴데에  또 걸립니다. 또 다른 껍데기에 또 걸리요.

그런고로 하나님이 해방시켜 주시지 아니하시면 방어해 주시지 아니하시면 안  된다는, 겉은 약하나 속에는 강하다는 것, 그러면 겉에 강한 그 세력이 나를 자유를 막는, 정권이 막는다, 공산주의가  막는다, 이종교의 세력이 막는다, 가정에서 막는다 하는 그런 것은 껍데기도  크고 속도 강하지마는 자기 한 사람에게서 자기 주관에서 생겨나는 적은 겉은 제  마음으로 하면 될 것 같지마는 그 속에는 꼭 같은, 신사참배의 일본 그 정권이  속에 껍데기가 돼 가지고서 신사참배 하라고 신앙의 자유를 꺾으려고 하던  그것은 크지마는 그것은 오히려 대항해 이기기가 쉽고 자기 보기에 시쁜, 아주  쉽게 보이는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적은 더 강합니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것을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심으로만 해결된다는 이것을 우리는 굳게 잡고 하나님에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요새도 기도회에 참석하라고 하는데 안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개 기도회에  참석하지 안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종된 그 종의 생활 멸망받는  그 생활을 제 생활로 알고 있습니다. 종의 생활이 더 가속도로 이루어지고 많이  이루어지면 그것을 제 성공인 줄 압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죄지어 가면서 출세를 하면 성공인 줄 알고, 주일날을 범해  가면서 시험쳐 가지고 합격되면 성공인 줄로 이렇게 알고, 오만 사기 협잡  횡령을 다 해 가지고서 자녀 공부를 시키면 성공인 줄 알고,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 전체가 저주 뭉텅이오. 자손에게 마구 저주를 넘겨주고 있는  멸망이지마는 이것이 성공이요 이게 무슨 자랑거리인 줄 알고 이것이 제가  축복받은 생활인 줄로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노의 생활을 해서 무엇을 거머다 놓고 ‘하나님이 이렇게 축복해  주셔서 감사 헌금 드립니다’ 하는 그 소리를 들을 때에 기가 막힙니다.

오전에 말씀한 요 네 가지를 단단히 기억하고, 오후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해방시키시려고 모세와 아론을 보냈을 때에 그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놓지 아니하려고 했습니다. 왜? 그들에게 보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나라에 보배로운 사람도 아니요, 친한 친구도 아니요, 존경하는 이웃도  아니요, 이스라엘에게 마구 부려먹는 그런 짐승같이 그는 참 완전히 종된  보물이었습니다.

생명을 탄압하면서 시키니까 저희들이 하기 힘드는 일은 무엇이든지 시키면 다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기 때문에 놔 줄 리가 없습니다. 저들의 국력을 강하게  하고, 부강케 하고, 필요한 모든 종노릇을 다 하기 때문에 놓아 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악령과 세상은 기독자를 저의 종으로 잡아부려서 저의 것을  건설하고, 저로 부강케 하고, 저의 자유 자재자로 해서 하나님을 모욕시키고,  하나님을 조롱하고, 예수님의 피의 구속 운동을 절단나게 하려는 이 역사이기  때문에 기독자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얼마나 안 놓아주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에게 하나님의 백성들로  해방시켜서 자유로 가서 하나님 섬기게 해 달라는 그 간청을 하나님이 하라 해서  가서 간청을 했습니다. 바로 왕은 대노하면서 네가 어떻게 이런 교만하고 참람된  당돌한 말을 할까보냐고 거절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이적을 보이고, 지팡이로 배암되는 이적을 보이고, 너희들이  해방시켜 주지 안하면 너거 애굽 나라에 있는 모든 물이 다 피가 되게 하겠다고  재앙을 내렸습니다. 피 재앙을 내렸습니다.

그러니까 애굽 사람들이 다 죽을 지경이니까 이스라엘을 내보내려고 했습니다.

했지마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니까 바로 왕이 또 내보내지  못하겠다 말했습니다.

그 다음에 개구리 재앙을 ‘네가 놓지 안하면 개구리 재앙을 내리겠다’ 해  가지고서 모세가 아론을 시켜서 작지로 하수를 가리키면서, 강과 하수를  가리키면서 거게 있는 개구리를 다 올라오라고 이렇게 하라 해서 개구리가 그  뭍에 꽉 차 가지고서 뭐 바로의 궁중과 침상까지 가득 차게 이래 되니까 그들이  못 견뎌서 ‘할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을 놔 보내야 되겠다.’ 하고서 내보낼  터이니까 이것을 없이 해 달라고 그렇게 아론과 모세에게 간청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그 개구리들이 다 몰려서 다 죽어버리니까 악취가 그  나라에 진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죽어 없어지고 난 다음에 다시 바로  왕은 안 내보내려 합니다.

그래서 그다음에는 ‘네가 재를 두어큼 들어 가지고서 궁중에 날리면 전체가 이  땅에 있는 티끌이 다 이가 돼 가지고서 짐승과 사람에게 달라들어 그들이 견디지  못해서 너거를 내 보내리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대로 하니까 이가  재앙으로 내려서 그들이 못 견디니까 이제는 내 보내겠다고 말을 하면서 이것을  이 재앙을 제거해 달라고 해서 그들이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제거해 주셨습니다.

제거되고 난 다음에는 그 마음이 강퍅해서 또 약속한 것을 변개하고 놓아보내지  않겠다고 또 말을 했습니다.

그건 시간이 많습니다. 그 다음에는 파리 재앙이 내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악질  재앙을 하나님이 내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독종 재앙을 내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온역 재앙을 내리려고 하시다가 온역 재앙을 내리면 너거가 인종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안할 터이기 때문에 온역 재앙은 내리지 아니하고 우박 재앙을 대신해서  내렸습니다. 그다음에는 메뚜기 재앙을 내렸고, 그다음에는 흑암 재앙을 내렸고,  그다음에는 장자를 죽이는 재앙을 내릴 때에야 그들이 놓아 보냈습니다.

놓아 보내고 난 다음에 그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지고 홍해 바다 가에 도달했을  때에 다시 바로 왕이 놓아 보낸 것이 마음에 원통해서 대군을 뒤에 보내서  그들을 다시 사로잡아 가려고 추격을 하다가 마지막에 홍해 바다에서 다 매장이  되고야 그들이 끝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첫째로 한 가지 깨달을 것은 어떤 것이냐? 우리를 신앙  자유하지 못하게 사로잡는 모든 대적이 그들이 우리를 끝까지 놓아주지  않습니다. 끝까지 놓아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걸 칠 때에 그들이  견디지 못해서 놓아주지 저희들이 놓아주고 싶어 놓아주지 않는 것을 여게서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악령의 것이 되어 있는 사람, 악령의 소유가 되어 있는  모든 세상과 세상의 것, 왜 이것이 하나님의 것이 악령의 것인가? 그것은 근본은  하나님이 지으셨고 하나님의 것이지마는 대리권은 악령이 가졌습니다. 왜? 인류  시조가 배암으로 더불어 시비해서 졌기 때문에 배암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세상 임금이 오겠으나”라고 말씀한  것은 그들에게 벌써 범죄의 것이 됐고 사탄의 것이 되었는데 그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전투해 가지고 악령을 이김으로써 다시 찾아서 이제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은 악령이 왕노릇을 못 한다고 했습니다. 악령이 이제는 왕노릇은  못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 이전에는 그런 것들이 왕노릇을 했으나  왕노릇은 못 하고 패잔병과 같이 잔해는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들을 눌러 꺾을 때에 그들이 못 견뎌서 믿는  사람들의 신앙 자유를 하도록 하지 그들이 감화나 자원하는 것이나 동정심이나  이해심이나 무엇을 가지고 신앙의 자유를 허락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상관 없는 사람에게는 귀에 들리지 안할 것이오. 혹 공산주의자들이든지,  어느 시대의 정권이든지, 어떤 개인이든지, 어떤 단체든지, 자기 속에 일어나는  모든 악성이든지 사욕이든지 무엇이든지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고 있는 그 적은  그것을 하나님이 눌러 꺾을 때에 못 견뎌서 우리를 자유하도록 해방시켜 주지  그것이 절대로 자의적으로 고의적으로는 해방시켜 주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굳게 잡아야 됩니다.

왜 이 말을 강조하는고 하니 사람들은 어리석게 그런 일 될 때에 ‘내가 거기에  아부하면, 그에게 무슨 선을 베풀면, 그에게 이해를 하면, 존대를 하면,  굽신거리면, 그에게 무슨 조금 양보를 하면 이렇게 하면 해방을 해 주지 않겠나?  동정이 있지 않겠나?’ 그런 생각을 가지고 패전하는 자들이 많이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믿는 사람의 신앙을 압도해서 신앙을 꺾어 자유하지 못하게  진리와 영감대로 사는 생활을, 양심대로 사는 생활을, 하나님을 기쁘게 존귀케  영광스럽게 하는 이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할 때에 ‘공산주의자에게 어떻게 하면  그에게 혹 동정이나 받아서, 또 어떻게 어떻게 논리를 하면, 논리를 하면 그가  이해를 해서, 시비를 하면 어떻게 해서, 내가 큰 소리를 하고 악독을 부리면  그가 어떻게 해서 이 적이 다소라도 거기에서 좀 동요가 있어 내 신앙에 자유가  용납되지 않겠느냐? 신앙의 길이 열려지지나 않겠느냐?’ 이런 생각을  기독자들이 가지지 말아야 됩니다. 요것도 평생 요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만나도 모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6.25 때도 저 이리라 하는 데에서는, 그뿐 아니라 여기 많이 그리 됐습니다.

‘너희들의 신앙을, 신앙 생활 하라. 신앙 생활 못 하게 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자수를 하고 우리가 믿으라 하는 대로의 그래 신앙 생활을 하면 되지  않느냐?’ 하니까 그 꾀에 넘어가 가지고 자수한 신앙 생활 하다가 이리에서는  기독자들이, 그 사람 말로서 칠백 명이 한 구덩이에 매장돼서 산 매장 돼  가지고서 죽었다 말 들었습니다. 학교 운동장에서.

그 이리에 있는 남자 집사가 한 분 대구 여관에서, 내가 아침에 성경을 보고  있으니까 그분이 나한테 찾아와 가지고서 그런 직고를 합디다.

우리는 어떤 상대든지 우리에게 신앙을 억제하고 내게 신앙에 자유를 가지지  못하게 하는 그런 마찰을 받을 때에 내가 그에게 어떻게 어떻게 함으로써 그  자유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그런 인본 수단을 쓰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 때문에 수많은 성도들이 다 죽어지고 넘어집니다.

이 바로는 어떤 웅변으로도, 어떤 이간으로도, 어떤 감언이설로도, 어떻게  그에게 아부로도 존대로도 결단코 해방은 안 줍니다. 해방은 안 줍니다. 눌려서  꺾여서 못 견뎌서 해방 주겠다 하고도 다시금 그 마음이 강퍅해져 가지고 ‘안  된다’ 하고 거부했습니다.

다만 이 속박에서 이 종노릇에서 해방시켜 주실 분은 전능하신 구속주 주님 한  분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굳게 잡아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이 ‘이러면 해방시켜 주겠다, 저러면 해방시켜 주겠다,  저러면 어쩌겠다.’ 무슨 조건을 말을 해도 ‘나는 알고 있다. 네가 어떤 미혹을  줘도 그는 나의 미혹이다. 절대로 너는 나에게 신앙에 자유를 주고 싶은 자가  아니다. 끝까지 대항하고 주지 안할 자이다. 내 주님이 나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너를 꺾을 때에 네가 꺾어져야 나를 해방을 주지, 주님이 해방시켜야 해방되지  너는 나에게 천언 만언을 해도 나를 유혹시키는 것뿐이지 너는 자유로 나에게  해방 줄 리는 없다. 성경이 그랬다.’ 요걸 꼭 쥐고 있어야 됩니다. 요걸 쥐고  있어야 전투를 이깁니다.

그러면 그렇게 바로가 항복하고 또 마음이 강퍅해지고 항복하고 또 마음이  강퍅해지고 해서 해방을 안 시키려고 강퍅하게 완패하게 이렇게 변동을 열  번이나 했습니다. 이렇게 바로의 마음이 강퍅해져서 해방시키지 안하려고 한 그  바로의 마음이 왜 그리 변해서 강퍅해집니까? 성경에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어떻게 해서 그렇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의 마음을 완패케 하였으므로 그가  너희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므로 제가 굴복하고  해방시키려고 했지마는 또 마음이 완패해지고 강퍅해져서 해방시키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는 내가 신앙에 자유를 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있을 때에 그는 스스로  나를 해방시켜 주지 않는 것을 굳게 잡고, 해방시키는 것은 주님이 해방시켜야  되지 아무도 해방시켜 줄 자가 없다는 것 요것을 굳게 잡고, 그러면 해방시켜  주지 아니하려고 그렇게 강퍅의 바로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은 어째 그래지느냐?  나를 구원하시는 주님이 그의 마음을 그렇게 강퍅하게 만들어서 강퍅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깨달아야 됩니다.

성경에 그렇게 해 놨습니다. “내가 그의 마음을 완패케 하였으므로 너거를  해방시켜 주지 안할 것이다” “내가 그의 마음을 다시 강퍅케 함으로 해방시켜  주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면 해방이 안 됩니까? 그러면 우리의 신앙 자유를 하지 못하게 대적이  강하게 이렇게 강퍅하고 완패해져 가지고 해방시켜 주지 못하도록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완패케 이렇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까? 요것을  여게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뭣 때문에 그렇게 하실까?

그렇게 하시는 것은 그들이 이런 면을 가지고 강퍅하게 날뛸 때에 하나님이 이  재앙으로 때리니까 거기서 굴복을 하고 돌이켜서 ‘이제는 해방시키겠습니다.’  하여, 바로는 강퍅케 됨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바로에게 한 번 보이고, 두 번  강퍅해짐으로 두 번 보이고, 열 번 강퍅해짐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열 번 강퍅한  바로에게 체험시키고 경험시키고 보여주고, 믿는 자에게는 한 번 강퍅하게 함으로 하나님을 든든히 믿어두지 못하고, 한번  강퍅하게 되니까 ‘아이구, 이제는 안 될란가배.’ 한 재앙을 내릴 때에 그들이,  ‘아이구, 이제는 해방시켜 줄 터이니까 기도해서 이 일을 없게 해 주옵소서.’  바로가 아론에게 말을 하니까 이 소문을 들은 이스라엘들이 ‘이제는 하나님  주여,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 됐다. 됐다.’ 하고서 기뻐하다가  바로가 ‘안 된다. 내가 죽어도 안 된다. 이놈들 잡아다가 다시 고역을  시키라.’ 이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만 간이 딱 오그라져 가지고서  ‘아이구 뭐 암만 하나님이 그래 봤자 소용이 있나? 결국은 헛일이다.’ 결국은 헛일이다 하면서 하나님 불신하고, 경거망동으로 절망 낙망되고, 온갖  비신앙적인 그 인격, 하나님 백성이 아닌 완전히 본질과 본색이 다 드러나서  경거망동의 범죄를 하고, 신앙의 사람들은 든든하게 ‘네가 아무리 강퍅해서 거부해도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끝까지 어떤 일을 해서라도 너거만 상했지 하나님이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하는 이 든든한 신앙을 가진 신앙가들도 있었고 신앙 없는 자들은 그때  또 놀라서 도근거리고 죽을 지경입니다.

‘공연히 모세와 아론이 오지 안했으면 뭐 우리 자손들은 다 죽는다 할지라도  그래도 그날 그날 일은 되지마는 이렇게 참혹하게 죽지는 안할 터인데 이렇게  벌써 전쟁이 붙어 가지고서 강퍅해서 분해 가지고 우리를 석방시키지 안하고  우리를 대해서 복수하려고 하니까 우리가 모세와 아론 만나기 전에 참혹한 것에  몇 배나 비참하게 됐다.’ 하고서 낙망 비참을 고통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한 재앙을 다시 내려서 바로 왕이 뻘뻘 떨면서 ‘요번에는  틀림없이 거짓말 없이 변동 없이 내보내 줄 터이니까 이 재앙을 면케 해  주옵소서.’ 하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낯이 또 빨가이 돌아와 가지고서 헤헤  하면서 ‘주여 감사합니다. 우리를 이렇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러다가 또  바로 왕이 한번 강퍅해지니까 딱 오그라져 가지고서 불신 낙망 절망 공포 비겁에  들었다가,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 불신을 뽑고, 그들의 자체가  어떤 자라는 것을 알려주시고, 애굽 나라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열 번이나 재앙을 내린 것이 하나님의  역사였다는 것을 여게 보이고 있습니다.

당신이 말씀하시기를 오전 낭독한 말씀에 “천하에 나와 같은 신이 없는 것을  너로 하여금 온 천하로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나님께서 성경에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신앙의 자유를 가지지 못하도록 하는 그 모든 대적들이 나를  사랑하시는 사랑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다는 것을 우리가 굳게 잡아야  됩니다. 일어났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이 이렇게나 저렇거나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이  건들지를 못합니다. 아무리 산더미 같은 파도가 와도 그 바다의 깊은 속에는  파도가 지나가는지 안 가는지 깊은 속에 물은 요동치 않습니다. 가거나 말거나  그것 다 껍데기 노릇이지. 이것처럼 신앙의 사람들은 세상이 놀래게 할 수가  없어. 신앙의 사람들은 세상이 절망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의 마음이 강퍅해진 것이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 그렇게 하셔서 하신 것인  것을 여게 나타냈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할 때에 공산주의가 와서 우리 신앙의  자유를 방해하든지, 그리 안 하면 어떤 정권이, 어떤 시대가, 어떤 이종교가,  어떤 가족이, 어떤 사회인이, 어떤 친구가, 어떤 사건이,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악성 악습이, 어떤 것이 방해하든지 요것은 우리 주님이 하실 역사가 있어  가지고 이것을 강퍅하게 완패케 하는 것이니 반드시 결과적으로는 합력하여 의를  이루는, 반드시 결과적으로는 유익이 이루어지는 요 결말을 잡고 우리는 낙망치  말고 굳게 서야 됩니다.

그러면 이것이 성경대로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강퍅하게 하는가?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한 번 이런 일을 당해 가지고서 낙망하고 조급히  경솔히 날뛰었습니다. ‘아이쿠, 이제는 해방될 것 같더니마는  해방커녕 배나 바로 왕이 악을 가지고 우리에게 복수하겠으니까 우리 형편은  이제는 참 비참하게도 절단났다.’요렇게 한 번 했다가, 그다음에 다시 하나님이  재앙을 내려서 새로 해방의 소망이 생겨지니까 ‘주여, 좀전에 내가 그런 경동한  마음을 가졌던 것을 자복합니다. 다시는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안하겠습니다.’  하고 두번째 닥치니까 또 그런 인간 있고, 두 번 당하고 난 다음에는 다시 안  그런 사람 있고.

이래서 차차 차차 열 가지 재앙이 거듭 될 때에 이스라엘 백성에는 경거망동의  사람이 하나씩 둘씩 줄어져 가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획, 절대적인 그 사랑의  섭리, 최종적인 승리가 이루어지는 그 사실을 바라보는 소망의 백성들이, 신앙의  백성들이, 꾸준히 하나님을 든든히 믿고 의지하고 요동치 않는 무거운 백성들이  차차 차차 많이 생겨지게 하는 요것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소망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는 뭣 때문에? 그들 망치려고? 이방인도 하나님이 해하려고 하지  않소. 이방인들에게도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전능하신 분이니 이분을 거슬릴  자는 세상에 과학도 거슬리지 못하고, 전인류도 거슬리지 못하고, 어떤 신도  거슬리지 못하고, 이분에게는 거슬릴 자는 하나도 없고 거슬리면 망한다.’ 하는  것을 그들에게 똑똑히 인식을 시키기 위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일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구원을  알게 하려 하시는 것이 목적이요 이방인으로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항하지 말라는 것을 그들에게 깊이 깊이 느껴서 하나님을 거슬리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목적인 것을 우리가 여게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적은 이렇게 목적인데, 목적은 이런 목적인데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 목적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때 어떻게  했던가? 그들은 어떻게 했던가? 한 재앙으로 해방시키려고 하던 바로가 해방을 거부하는 강퍅을 부릴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했던가? 하나님이 하시겠지 하고 기다리지  안했습니다. 하나님에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그 바로 왕이 강퍅해져  가지고서 이렇게 거부를 하고 다시 악독을 가지고 향하니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이여,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하나님께서 ‘모세야, 다시  바로에게 가거라. 이번에는 파리 재앙을, 이번에는 이 재앙을, 이번에는 우박  재앙을 내린다고 해라. 그들이 듣지 안하면 그 재앙을 내린다고 선포하고 안  듣거든 네가 이렇게 시키는 대로 작지로 명할 것은 작지로 명하고, 네가 손을  들어 할 것은 손을 들어 하고, 말로 할 것은 말로 하고 이렇게 나 시키는 대로  해라. 그들에게 재앙이 되는 것을 네가 선포하라. 해라.’ 할 때에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대로 그대로 상대방에게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될지 안 될지 보지도 못하고, 만일 그랬다가 안 되면 저는 거게서 가루가 될  것이고 재가 될 것입니다. 이는 다 “핍박을 겸하여 주시리라” “여러 배를  주시되 핍박을 겸하여 주시리라” 이것이 핍박입니다.

‘네가 가서 바로 왕에게 가 말해라. 이리 하면은 이리이리 하나님이 너희들을  치신다고서 그렇게 가서 선포해라.’ 그런 일이 역사에 있은 일입니까 없은  일입니까? 대답하십시요, 얼른. 그런 일이 혹 있었습니까? 역사에 없었어.

없는 일인데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오늘에 자기가 영감으로, 영감을 받고  하는 것 한가지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바로 왕에게 바로가 지금 분해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도 모세와 아론을 이 갈아서 마시면 싶을 만치 지금 막 벌벌  떨고 있는 그 앞에 가 가지고서 말을 하는 것이 그것이 두렵지 안한 일이  아니요, 겁나지 안한 일이 아니요, 자기 생명이 당장에 불에 타서 가루가 돼서  절단날 일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역사로 볼 때는 다 그런 일입니다.

마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사랑을, 그의 신실하심을, 그가 시작하신 그  일을 결론 마칠 그분이 있기 때문에 모세와 아론은 담대히 갔습니다.! 이게  우리에게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없으면 자유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바로의 강퍅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어찌 하리이까?’ 하는  기도를 할 때에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지시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해방이 전개돼 나가는 순위요.

망령을 부려서, 하나님은 아무리 말해도 ‘우뢰 소리가 나는가보다. 이것이 내  속에서 공연히 내 공상인가보다.’ 했으면 저들은 멸해집니다. 이것을 보입니다.

음성을 들었소. 음성이 들릴 수 있는 주여, 내가 지금 신앙의 자유를 사회에서,  국가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이 신앙의 자유를 대항하려고 하고 이걸 꺾으려고  하고 있는데 이 일이 지금 어떻게 하든지 여게서 자유를 주옵소서.’ 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하나님이 ‘네가 이렇게 하라’ 하는 그 영감을 받을  때까지 자기는 기도를 해야 그 영감을 받을 수 있어야 그 기도가 산 기도입니다.

영감을 받고, 영감을 받으면 그 영감은 전부 십자가의 영감이오. 저 죽는  영감이오. 껍데기는 죽는 영감이요 속은 사는 영감입니다. 그 영감이 어떤  영감과 같은 영감인고 하니 다니엘이 ‘이렇게 전국이 나를 죽이려고 하니까  여게서 내 신앙을 꺾으려고 지금 신앙의 자유를 지금 이걸 꺾어서 기도하지  말아라, 신앙의 자유를 꺾으려고 내 생명을 가지고 이렇게 지금 위협하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이 다니엘에게 들렸습니다.

 어떻게 들렸습니까? ‘네가 사자구덩이 던짐을 받아도 기도를 한다고 해라.’  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 음성을 듣고 다니엘이 그때 ‘나는 기도를 중단 못 합니다. 합니다.’ 하는  것은 그는 피 한 방울도 남구지 안하고 굶은 그 사자에게 완전히 삼켜질 수 있는  그 일입니다.

그 일이나 다니엘은 왜 기쁘게 그 일을 했더냐?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왜  기쁘게 했더냐? 한 것은 자기에게 영감시킨 그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그 사랑을  믿고 하기 때문에 사나 죽으나 주님을 존귀케 하려는 것이요 또 주님이 자기에게  실패 주지 안하기 때문에 사는 것이 성공이면 살게 하고 죽는 게 성공이면 죽게  할 것이니까 그분의 사랑을, 그분의 능력을, 그분의 전지를, 그분의 신실을 믿는  믿음에서 이렇던 것도 그들에게는 근심이나 염려나 모든 두려움이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로 피난처를 삼는 생애입니다.

모세와 아론도 이랬었소. 담대히 갑니다. 갈아 마시우려고? 불에 태여 죽으려고?  만일 그랬다가서 그 일이 안 되면 제까짓 것들은 어찌 될 건데? 어찌 되는데?  그런데 어떻게 사지를 담대히 기쁨으로 나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실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실을 믿기 때문에, 자기가 영감 받은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자기네들의 생명이 위험할까 하는 그런 염려는 없고 ‘내가 가서 이 말을 할  때에 바로 왕이 이것이 또 듣지 안해 가지고 하나님의 재앙에서 요번에는 면제해  줄지 모르는데 면제 안 해 주면 우리와 같이 살던 애굽 사람 이것 전부 다  전멸이 되어지는데.’ 애굽에 대해서 동정이나 갔지 두려움이나 염려는 하나도  없었던 것이 모세와 아론의 신앙이었습니다.

시편 5편에 다윗이 천천만의 원수를 인해서 오히려 동정하고 긍휼을 간구하고  염려하지를 안했던 것은 그 신앙의 힘이었습니다.

이렇게 담대히 가서 바로에게 이 말을 직고할 수 있는 그 신앙들이 어떻게  됐으며 그 과정들이 어떻게 됐나 하는 것을 우리가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이것은 만고에 우리에게 표본인 길입니다.

 진리의 길이오. 성경은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놓은 이 진리입니다. 참된  이치입니다. 어느 시대나 다르지 않습니다. 진리는 하나입니다. 언제든지  이대로입니다.

그렇게 전할 때에 그들은 또 굴복을 했고, 그 재앙이 내리니까 굴복을 했고  굴복하고 난 다음에는 또 강퍅해졌습니다. 강퍅해지니까 또 하나님께  부르짖으니까 하나님이 지시해서 또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가운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은 차차 차차 뼈가 자라고  알맹이가 생겨지게 되고 이방들은 당장 해방시켜 주는 것보다 여호와에 대한  지식과 여호와에 대한 경외가 이것이 점점 구비해져 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가서 요번에는 이런 재앙을 내리라’ 해서 그  면으로 애굽 나라를 쳤습니다. 애굽 나라를 치니까 애굽 나라가 항복을  했습니다. 하고 내 보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치신 것을 보면 뜻없이  치신 것이 아니고 전부 원인이 다 있습니다. 애굽이 그것으로 인해서 교만해진  애굽의 교만을 낱낱이 쳤습니다.

물을 친 것은 그들이 수원 좋은 물을 의지하고, 티끌이 이가 된 것은 그들이  땅을 옥토인 그 땅을 비옥을 의지하고, 파리 재앙은 그들이 해끼신이라고 그들이  파리 신을 섬겼고, 그들은 애굽에 비옥한 거기에 아주 윤기나는 그 모든  목축들은 모든 동물들은 그들이 세계에 자랑했던 그게 하나님의 은혜인 줄을  모르고, 그러기 때문에 목축에게 재앙을 내리고, 그들의 과학을 말하기 때문에  재앙을 내린 그 하나 하나의 재앙은 가서 여러분들이, 혹 그냥 생각해도 알  것입니다. 그 재앙 하나 하나가 뜻이 있고 원인이 있지 그냥 닥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을 애굽 나라를 교만케 했던 그 교만을 하나님께서 쳐서 애굽  나라로 겸손케 하신 역사를 했습니다. 마지막에 장자 재앙은 그들은 장자만  사람인 줄 알고 종손 종손 하는 그것이 다른 민족보다도 유별했기 때문에  거게서부터 재앙을 내리 쳤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신앙 자유를 막을 때에, 신앙 자유를 막을 때에 우리는  갖추어야 될 것이 무엇이냐?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에는 모세가 와 가지고서  ‘가자’ 하면서 가자 하니까 자유를 원하던 사람들은 가자고 뛰어 나서고  반수나 남은 사람들은 ‘안 한다’ 이랬습니다. 이러다가 이적을 보고 난 다음에  `우리도 나갈란다' 이랬습니다.

재앙이 한번 내리니까 안 나가려 하던 자도 ‘이제는 뭐 이리도 저리도 못 하게  됐네. 진퇴양난이 됐네. 있으면 복수를 당할 모양이고 이러니까 가야 될세.’  재앙이 한번 더 나니까, 더 났다가 재앙이 한번 더 내렸다가 회복이 돼서,  ‘해방시키겠다’ 이러더니마는 나중에 강퍅해서 `해방 안 시킨다' 이러니까,  해방 안 시킨다고 하니까 처음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애굽이 이제  확실히 자기네들을 죽이려 하는 적이 됐다 하는 것을 적의 인식이, 애굽의 적의  인식이, 애굽이 자기네들에게 대적된 이 대적 의식이 차차 커졌습니다. 차차  강해지게 됐습니다. 강해지게 됐어.

이래서 나중에 여덟 재앙 아홉 재앙 갔을 때에는 이제는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부르짖기를 ‘이제는 이렇게 벌써 일이 이렇게 저질러져  놨으니 이렇게 애굽과 우리와는 원수가 돼 놨으니 이래 놓고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출하지 안하면 우리는 참 어떻게 멸망할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음도 강해졌고, 애굽이 저희의 적이라는 이 적의 인식도 강해졌고, 그들이  어떻게 하든지 애굽에게 재앙을 내려서라도 해방을 시켜 주기를 사정없이 원하고  원하는 이스라엘들이 됐습니다. 이것이 해방의 자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목적 중에 또 하나입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강하게, 애굽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인식이 강하게, 이스라엘로 자유의 해방을 원하는 소원이 강하게,  하나님께 부르짖음이 강하게, 애굽이 이제는 적이라는 적대시가 강하게, 그들이  자기네들을 완전히 전멸시킬 수 있는 그런 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인식, 이런 것들을 되게 하려 하심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오늘도 이런 대적 저런 대적 자기의 신앙을 방해하는 이런 적이 있어도 이게  적인 인식을 하지 못하고, 적이라는 인식을 하고 ‘그게 깨져도 나에게 자유를  주옵소서’ 할 수 있는 이 사람이 돼야 이제 해방이 되는 것인데 그렇지  아니하고 아직까지 신앙에 자유를 막지마는, 신앙에 자유를 막지마는 신앙  자유도 있으면 좋겠고 애굽에도 살면 좋겠고 이렇게 애굽에 살고 싶은 마음이나  신앙에 자유의 소원의 마음이나 이 두 마음이 어금비금하고, 처음에는  자유보다도 애굽에 살기를 원했고 차차 차차 애굽의 소원은 경해지고 자유의  소원은 점점 커지고 높아지고 하도록 여러 차례 지내가니까 자꾸 이 일이  이루어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는 사람이 신앙의 자유를 방해하는 그 대적에게 있어서  이제는 자유가 그 대적에 대한 애착심, 대적에 대한 미련의 것 이것보다 자유에  대한 소원이 강해지고 뜨거워지고, 거게 대한 미련이 끊어지고 애착이 끊어지고,  ‘그것이 어떻게 되어질지라도 신앙의 자유를 얻어야 하겠습니다.’ 하는 요  사람이 될 때에 그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그러면 네가 가서  이것을 선포해라. 내가 이 재앙으로 치겠다.’ 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렇지 안하고 ‘하나님이여, 이제는 자유보다 그만 나를 애굽에 돌아가서 그만  살게 하고 애굽하고 화친만 시켜 주면 좋겠습니다.’ 말하는 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화친이 되면 냅둡니까, 그들이? 이제는 참 전멸을 당장 시켜  버리지. 낳은 아이만 죽입니까? 모조리 다 죽이지.

이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우리의 신앙의 자유를 꺾는 것은 자유를 꺾는 그 대적이  대적인 줄을 모르고 그것이 내 영원을 삼키는, 내 영원, 영원 구원을 삼키는,  육의 구원도 영의 구원도, 세상 성공도 무궁세계 성공도 그게 들어서 삼키는  것이니 그 사람이 원수가 아니라 그 속에 들은 마귀가 원수요, 그 운동이  원수요, 그 사상이 원수라는 것을 똑똑히 알고 거게 대한 미련이나 동정이나  이런 게 없어져야 되고 이 자유의 소원이 강해져야 되는 것인데 이런 것을  가지지 안하고 머뭇거리고 범벅 노릇을 하고 있으니 벗어난다는 참 감감합니다.

이것이 확고하게 됐을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내가 요다음에 무슨  재앙으로 해방을 시키겠다’ 하는 그게 들렸습니다. 들려서 치니까 뭣이  쳐집니까? 애굽이 치여지요. 애굽이 치여지요. 내 신앙의 자유를 방해했던  그것의 세력이 어느 모퉁인가 꺾어져 버립니다. 어느 모퉁인가 꺾어져 버리요.

‘아이고, 그것 꺾어지면 안 되는데, 자유를 못 얻었으면 못 얻었지 그것  꺾어지면 안 되는데.’ 그런 자는 안 돼.

‘구주가 떠나도 도야지떼 죽는 것은 감당 못 하겠습니다. 이 도야지떼, 주님이  계시면 이 도야지떼가 다 죽겠으니까 가십시오.’ 하는 거게는 주님의 구원이  떠났습니다.

오늘 신앙의 자유를 세상에 어떤 것과 비중이 달려지는데, 비중이 달리는데 ‘요  둘 다 하면 좋겠습니다. 세상과 세상에 속한 요것도 하면 좋겠고 자유도 하면  좋겠고 둘 다 좋습니다.’ 요럴 때에 제가 그래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것을 네가 자유해야 된다.’ 이래서 자유를 원하면, 그것을 쳐서 자유를  주면 그다음에 차차 차차 이 자유가 더 소원되고 여게 대한 미련이 끊어져야  그것이 해결이 되어지지 그 미련을 그대로 가지고 이 자유를 가지고 둘 다  하면서 그쪽이 더 원하면 거게 속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자유를 꺾는 하나님이 아니오. 악의 자유도 유한된 자유지만  자유를 꺾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러면 ‘아이구, 이것이 내가 신앙 자유를 못 얻어도 애굽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 되면 그 사람에게는 어떤 게 갑니까? 애굽에 재앙이 점점  심해집니다. 심해지면 ‘아이구, 주여. 이제는 이제는 막 그게 뿌숴져도 신앙의  자유를 원합니다.’ 압박을 실컷 많이 받고 나니까. 많이 받으니까. 죽을  지경이니까.

이래 가지고 기어코 가정을 다 망치고야 자유를 하고, 부부간도 신앙을 방해하는  남편을 꼭 하나님이 죽여야 이제 자유하고 이렇게 하지 말라 그말이오. 멸하기  전에 자유 얻으면 좋지 않습니까? 하나님 백성들의 자유를 막으면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애낌 없이 절단내  버립니다. 그것도 절단내지 않고 빨리 한 재앙에도 될 수 있습니다. 한 재앙에서  첫 재앙에서도, 첫 재앙에서 해방시켰으면 애굽도 손해가 적고 저희들도 시간 안  걸리고 좋은데 첫 재앙에 해방되도록 하려면 뭣입니까? 하나님은 절대  하나님임을 든든히 믿고 요동치 아니할 것,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것을  믿어 애굽을 능가할 수 있는 하나님인 것을 믿을 것,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 해방되면 됐지 뭣 때문에 애굽을 그런 재앙으로 자꾸,  하나님의 솜씨 보이려고? 하나님은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럴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미련을 가지고, 해방 시기에 해방받지  안하고 미련을 가지고 그렇게 나간다고 하면 애굽은 이스라엘을 더 학대할  것이고, 또 말할 수 없는 그런 그 박해를 줄 것이고, 애굽은 죄를 하나님 앞에  더 짓고,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가 더 쌓아서 애굽은 애굽대로 더 망하고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대로 더 박해당해서 더 망하고, 망하는 것 양편이 다 망할  것 외에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망할 것 외에 딴것 하나도 없어.

이러기 때문에 신앙을 방해하는 그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뭣이냐? 그를 그에  대해서 미련을 끊는 것이요, 그것을 내가 나와 한편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라는  것이요, 신앙의 대적이 된 대적에게서 나는 해방을 받아야 된다는 요것을 깊이  인식을 빨리 가질 때에 그것도 상하지 아니하고 모든 신앙 생활이 자유롭게  되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요것은 좀 어려운 말이라서 이해가 되기 어려울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런고로 이렇게 신강하다가 마지막에 장자 재앙이 내렸을 때에는 그들이 못  견뎌서 이스라엘을 해방을 시켰고 해방시킬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있는  모든 것이 저희 것이 되었습니다. 일시에 저희 것이 다 됐어. 애굽의 것은  저희들의 것이 다 됐습니다. 다 소유 됐어. 가지고 갈 힘이 없고 필요가 없어  그랬지. 애굽에 있는 뭣이라도 달라 하면 다 줍니다. 안 줄 수가 없어.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기어코라도 해방을 시키시고 또 그  모든 재앙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부자가 되고, 성공이 되고, 자유가 되고,  하나님 찾고 이렇게 되는 것이 그에게 결말이었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절대 자유할 수 있다는 것을 놓으면 안  됩니다. 절대 자유합니다. 자유하는데 그 자유가 속히 이루어지지 안하고 더딘  것은, 더딘 것은 그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는 그 해방의 자유를 더 좋게, 더  많게, 더 유익되게 하려는 것이오.

그러기 때문에 신앙에 방해하는 그것들이 속히 해결되지 않는다고 낙망하거나  조급하거나 의심하거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해방은 절대로 자기만 원하면  해방이 됩니다.

그런데 그 해방이 속히 되고 더디 되는 이유는 하나님에게 있는 것도 아니요,  애굽 사람에게 있는 것도 아니요, 원인은 어데 있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었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서 회개하지  않소. 하나님을 믿지 않소. 하나님을 바라지 않소.

재앙 한 번이면 다 알 터인데 한 번이면 알고도 또, 또 닥치니까 또 의심하요.

이러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의 믿는 사람의 양이 찼을 때에  하나님은 장자 재앙으로 해방을 시켰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그 신앙을 마찰하고 방해하는 신앙에 거슬리는 모든 것이 있을  때에 거게 대해서 첫째로 알 것은 내가 하나님에게 부르짖으면 주님은 반드시 이  신앙의 자유를 주신다 하는 요 절대성을 우리는 잡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절대성입니다. 절대성을 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거게서 더딘 것은 무슨 이유냐? 더딘 것을 빠르게 하려면, 빠르게 하면  구원 이루는 시간이 많으니까 유익하고 더디면 자기는 그만치 구원 이루는 데  손해갑니다. 그러면 그 해방이 빠르게 하는 유일한 방편은 무엇이냐? 유일한  방편은 하나님에게 대한 모든 절대성을 자기가 확고히 믿고 소망하고 의지할 것,  믿고 바라고 의지할 것, 이제는 하나님이 해방을 시켜도 광야를 거쳐 갈 때에 홍해가 만나도 문제 없고,  광야에서 원수들이 많이 나서도 문제 없고, 먹을 양식이 없어도 문제가 없고,  물이 없어도 문제가 없고, 그 앞에 어떤 애로가 있어도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되는 하나님 한 분이면 되니까 문제 없다 할 수 있는 이 확신의 사람들만 되면  그 해방은 즉시입니다. 해방은 즉시요.

이러기 때문에 이 사실을 깨닫고 신앙에 마찰이 있는 것은 그것이 제대로 있는  게 아니라 주님이 일으시키는 것이요 주님이 내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는 것이니  요구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하고 믿는 요 강도를 원하는 것이니까  요 면에 힘을 쓰고, 신앙에 방해하는 그까짓 것 상관이 없어.

해서, 방해하는 그것이 자기에게 방해로 보여지지 안하고 두렵게 보이지  아니하는 자기의 신앙에 자유가 될 때에 그것은 저절로 다 소멸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아무래도 자유해야 됩니다. 자유를 가져야 됩니다. 자유의 적을  발견해야 됩니다. 자유의 적에서 해방시킬 분은 주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도할 때에 당신이 이루어 주십니다.

이루어 주시는데 나 신앙의 자유를 더 막고 방해하는 강퍅과 그 완패와 악독이  왜 그런가? 주님이 그렇게 하셔셔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왜 주님이 그렇게  하실까?  아직까지도 내 신앙의 자유를 방해하는 그걸 적대시하지 안하고 거게 미련과  애착을 가져서 자유보다 그걸 좋아하기 때문에 그것이 신물이 나서 이제는  적대시가 될 때까지 하나님이 만듭니다. 이러니까 빨리 자기가 정리되면 빨리  신앙의 자유를 얻어서 얼마든지 시온의 대로를 걸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이 진리를 굳게 잡아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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